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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더굳뉴스] 리틀메시지 _에스더Esther
    에스더Esther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한번도 언급되지 않지만 모든 사건에 하나님의 섭리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페르시아인들은 주전 539년 바빌론을 정복했다. 에스더의 사건들은 수산에서 일어났다. 그곳에 왕의 겨울 궁전이 있었다. 에스더의 아하수에로Ahasuerus라는 명칭은 이집트의 파라오가 왕의 대명사인 것처럼 페르시아의 최고 통치자의 칭호였다. 그러므로 에스더를 왕비로 삼은 페르시아의 아하수에로는 크세르크세스 1세였을 것이다. 에스더서의 사건들은 크세르크세스 1세 재위 3년부터 12년까지 10년 동안에 일어난 일들이다. 성경에서 여성의 이름을 따른 책은 에스더와 룻뿐이다. 룻은 유대인과 결혼한 이방 여인이었다. 반면에 에스더는 이방인과 결혼한 유대 여인이었다. 둘 다 신앙과 용기의 여인들이었다. 둘 다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룻은 다윗의 조상이 되는 아들을 낳았다. 에스더는 유대인을 전부 죽이려는 원수를 막았다. 에스더가 그 일의 결심을 위해 말한 한마디는 죽으면 죽으리라였다. 이런 시가 있다. 가지가 담을 넘을 때 _정끝별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이를테면 수양의 늘어진 가지가 담을 넘을 때 그건 수양 가지만의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얼굴 한번 못 마주친 애먼 뿌리와 잠시 살 붙였다 적막히 손을 터는 꽃과 잎이 혼연일체 믿어주지 않았다면 가지 혼자서는 한없이 떨기만 했을 것이다 한 닷새 내리고 내리던 고집 센 비가 아니었으면 밤새 정분만 쌓던 도리 없는 폭설이 아니었으면 담을 넘는다는 게 가지에게는 그리 신명 나는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가지의 마음을 머뭇 세우고 담 밖을 가둬두는 저 금단의 담이 아니었으면 담의 몸을 가로지르고 담의 정수리를 타 넘어 담을 열 수 있다는 걸 수양의 늘어진 가지는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목련 가지라든가 감나무 가지라든가 줄장미 줄기라든가 담쟁이 줄기라든가 가지가 담을 넘을 때 가지에게 담은 무명에 획을 긋는 도박이자 도반이었을 것이다 사람은 새로운 영역과 미래로의 진입을 위해 첫발을 떼는 순간 두렵고 떨리는 마음과 희생을 각오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렇듯 가지가 담을 넘어서는 데에도 용기가 있기 때문에 가능할 것이다. 그것을 믿음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믿음이 없다면 어떻게 한낱 가지나 줄기가 이 세상의 단단한 담과 깊은 절망의 절벽을 건너갈 수 있겠는가. 에스더서의 주요 교훈은 한낱 가지나 줄기도 담을 넘는 데 용기가 필요한 것처럼 하나님의 뜻을 위해 죽음을 각오한 용기가 필요할 때가 있다는 것이다. 세상 나라들의 주권자는 하나님이시므로 주의 백성은 주의 뜻에 복종하고 따라야 한다. 2024-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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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27
  • [더굳뉴스] 리틀메시지 _느헤미야Nehemiah
    짐실은 노새 느헤미야Nehemiah는 그 공동체를 이어받아 외적 안정을 확보했다. 반면 에스라는 바빌론에서 돌아온 새 공동체의 영적 안정을 확립했다. 그는 아버지가 하가랴이고 형제가 하나니라는 것 말고는 알려진 게 없다. 아마 그의 할아버지는 예루살렘이 멸망했을 때 바빌론으로 끌려온 포로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페르시아에서 태어났을 것이다. 느헤미야서의 생생한 묘사는 그의 개인 일기에 근거한 자료였을 것이다. 그는 아닥사스다 왕의 술 관리관이었을 때 예루살렘 형편이 아주 어렵다는 말을 들었다. 그는 예루살렘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리고 얼마 뒤 그는 왕의 술 관리관이 되었다. 이런 시가 있다. 기도 _라반드라나트 타고르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위험에 처해도 두려워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게 하소서 고통을 멎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고통을 이겨 낼 가슴을 달라고 기도하게 하소서 생의 싸움터에서 함께 싸울 동료를 보내달라고 기도하는 대신 스스로의 힘을 갖게 해달라고 기도하게 하소서 두려움 속에서 구원을 갈망하기보다는 스스로 자유를 찾을 인내심을 달라고 기도하게 하소서 내 자신이 성공에서만 신의 자비를 느끼는 겁쟁이가 되지 않도록 하시고 나의 실패에서도 신의 손길을 느끼게 하소서 그는 유다 총독으로 임명받아 주전 445년 성벽을 재건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부임했다. 하나님의 소명을 성취하기 위한 그의 깊은 신앙은 그의 기도와 강한 확신으로 드러난다. 그 땅에 회복이 이어졌지만 유대 민족은 시련과 비난의 시기를 겪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고 계셨다. 느헤미야의 강조는 하나님을 신뢰하라는 것이었다. 2024-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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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20
  • 리틀메시지 _에스라Ezra
    솔로몬의 왕궁건설 에스라Ezra는 역대기하가 끝나는 곳에서 시작한다. 이스라엘을 정복한 바빌론이 주전 587년에서 586년에 많은 백성을 잡아가고 도시와 성전을 파괴했다. 주전 538년 페르시아 왕 고레스가 유대인들이 그들의 땅으로 돌아가 성전 재건을 허락하는 조서를 공포했다. 그때 스룹바벨의 인솔로 5만여 명이 돌아왔다. 바빌론 포로 생활 70년이 끝났다. 어려움이 많았고 지체되기는 했지만 주전 515년 성전이 완성되었다. 이런 시가 있다. 담쟁이 _도종환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 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율법학자 에스라는 주전 458년 2천여 명의 유대인과 예루살렘에 왔다. 에스라의 주요한 일은 율법의 연구와 해석이었다. 그는 자신의 일을 통해 새 시대 공동체의 영적 지도자가 되었다. 바빌론 포로에서 돌아와 성전을 재건하는 이스라엘 백성은 도종환 시인이 노래하는 담쟁이 잎 같았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가 담쟁이 수 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가는 담쟁이에게 절망의 벽은 없어 보인다. 그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담긴 성경을 믿음으로 붙잡고 성전을 재건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절망의 벽은 없어 보였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독려하는 지도자 에스라가 없고 믿음의 동지적 연대가 없었다면 이스라엘 백성은 그 척박하고 방해가 많은 땅에서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2024-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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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3
  • 리틀메시지_역대기하2Chronicles
    바벨론 포로들 역대기하2Chronicles는 다윗 자손의 통치를 크게 다룬다. 그 기간은 솔로몬 시대부터 주전 586년 시드기야 치하 예루살렘 함락까지다. 역대기서 전체에 걸쳐 남 왕국 유다를 집중적으로 강조한다. 남 왕국 유다의 흥망성쇠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지 안지키는지에 따라 조명이 되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께 신실하지 못하고 그들의 신앙의 의무에 태만해서 망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고향을 떠나 머나먼 바빌론으로 끌려갔다. 이런 시가 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_이상화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자욱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를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쁘게나 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매던 그 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 다오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웃어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지폈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고 오는 봄은 누구도 빼앗을 수 없다. 그것이 천지만물을 들썩이게 하는 봄의 풋내이고 봄의 푸른 웃음이다. 그러나 들을 빼앗긴 자에게 오는 봄은 절박하다. 봄조차 빼앗기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봄의 답답함이고 봄의 푸른 설움이다. 들의 봄과 인간의 봄 자연의 봄과 시대의 봄은 이렇게 갈등한다. 온몸에 햇살을 받고 이들을 발목이 저리도록 실컷 밟아보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이야말로 내 나라 내 땅에 대한 지극한 사랑의 표현이다. 떠나온 길이 멀면 돌아갈 길도 멀다. 바빌론의 유대인들이 그랬을 것이다. 역대기하 마지막에 유대인의 예루살렘 귀환을 허락하는 고레스의 조서가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의 백성이 믿음의 불성실로 하나님의 징벌을 받아 고향을 떠나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하나님의 은혜로 그들의 고향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2024-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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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06
  • 리틀메시지_ 역대기상1Chronicles
    바빌로니아 큰 물가 마을 역대기상1Chronicles과 역대기하는 원래 히브리어 원문에서 한 권이었다. 히브리어의 구약 성경을 그리스어로 번역한 사람들이 그것을 두 권으로 나누었다. 본래의 제목은 뒤에 남은 일들이라는 뜻이었다. 그것은 사무엘서와 열왕기서에 들어있지 않은 작은 이야기들이 들어있기 때문이었다. 마찬가지로 영어 제목 '크로니클스Chronicles'도 히브리어 제목처럼 '일상의 일들'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이것은 역대기서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 특별히 왕들의 생활들에서 일상의 중요한 일들을 차례대로 이야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초점은 다윗과 유다 왕국에 있다. 그리고 그 관점은 제사장들의 것이다. 유대 민족은 신앙의 불성실로 망해 포로가 되어 예루살렘에서 바빌론으로 끌려갔다. 이런 시가 있다. 바빌론 강가에서 _보니 엠 바빌론 강가에 우리는 앉아서 우리는 울었어요 시온을 생각하며 바빌론 강가에 우리는 앉아서 우리는 울었어요 시온을 생각하며 사악한 무리들이 우리를 포로로 잡아왔어요 그리고 우리에게 노래를 부르라고 했지요 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주의 노래를 부를 수 있나요 이런 낯선 땅에서 사악한 무리들이 우리를 포로로 잡아왔어요 그리고 우리에게 노래를 부르라고 했지요 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주의 노래를 부를 수 있나요 이런 낯선 땅에서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말과 우리 가슴에서의 명상을 여기 오늘밤 그대 앞에서 받아주어요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말과 우리 가슴에서의 명상을 여기 오늘밤 그대 앞에서 받아주어요 바빌론 강가에 우리는 앉아서 우리는 울었어요 시온을 생각하며 바빌론 강가에 우리는 앉아서 우리는 울었어요 시온을 생각하며 바빌론 강가에 바빌론의 어두운 눈물 우리는 앉아서 당신은 노래를 불렀죠 우리는 울었어요 사랑의 노래를 불러요 시온을 생각하며 바빌론 강가에 바빌론의 거친 작은 조각들 우리는 앉아서 당신은 사람들이 우는 것을 듣지요 우리는 울었어요 그들은 그들의 하나님이 필요해요 시온을 생각할 때 오 힘을 가져요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 남쪽 약 110km 떨어져 있는 유프라테스 강가에 바빌론이란 고대 국가가 번성했었다. 바빌론이 유대 왕국을 정복하여 많은 횡포를 저질렀다. '바빌론 강가에서'라는 노래는 바빌론에 정복당한 유대인들의 심정을 노래한 메시지가 그 내용이다. 이 노래는 시편 137편을 토대로 작사 작곡을 하였다. 바빌론 포로생활 때 유대인들의 슬픔과 시온의 그리움을 노래한 시가 시편 137편이다. 이 노래를 부른 가수들은 여성 3인과 남성 1인으로 구성된 4인조 보컬 '보니 엠'이다. 그들은 자메이카 출신의 영국 가수들이다. 그들은 악기를 전혀 다루지 않고 순수한 보컬만으로 서인도 제도의 특유한 창법을 구사하는 게 특징이다. 그들은 1978년 이 노래를 불러 세계적인 인기를 얻었다. 역대기상과 역대기하는 바빌론 포로 이후 이스라엘 땅에 돌아온 유대인들에게 중요했다. 그들은 다윗의 신앙 본보기가 필요했고 성전에 대한 강조는 그것을 재건할 때 필요했다. 역대기서는 변화와 어려움의 시기에 성전을 재건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에게 격려와 힘을 주었다. 그것은 다윗의 신앙과 솔로몬의 지혜와 성전 건축의 영광스러운 역사를 통해서였다. 2024-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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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31
  • 리틀메시지_ 열왕기하2Kings
    예수님과 파도와 배 열왕기하2Kings는 이스라엘 왕국과 유다 왕국이 무너지고 사로잡히는 것을 기록한다. 영적 타락은 정치와 사회의 악화로 이끈다. 선지자들의 끊임없는 사역과 하나님의 적지 않은 징계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왕국과 유다 왕국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심판을 받아야 했다. 이런 시가 있다. 어부의 기도 _작자 미상 주님 내가 죽는 날까지 물고기를 잡을 수 있게 하시고 마지막 날이 찾아와 주님이 던진 그물에 내가 걸렸을 때 바라옵건대 쓸모없는 물고기라 여겨 버림을 당하지 않게 해 주소서 예수 그리스도는 의로운 왕이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한 대제사장과 말씀의 선지자이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님으로 늘 바라보고 살 때 주님이 던진 그물에 걸리면 버림을 당하지 않게 될 것이다. 열왕기서는 개인이나 나라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따라야 한다는 것을 교훈하는 역사의 기록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물론이고 특별히 왕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의 행위는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대한 영적인 신실함과 순결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 준다. 이스라엘의 지도자인 그들의 반복되는 영적인 실패의 이야기는 다윗의 왕위를 이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드러낸다. 2024-03-23 신국판 592P @23,000원 /교보.알라딘.예스24.쿠팡 판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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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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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태영 목사 아들 결혼
    3월 1일 결혼식장 가는 길에 햇빛은 분가루처럼 흩날리고 쉽사리 키가 변하는 나무 그림자들은 한 줌 바람에 흔들린다. 주일처럼 밀려드는 오전 10시 무렵 봉은사 앞 신작로 위에 믿음은 추억 없이 떠오르고 걸어가는 길에 먼저 왔다 먼저 가는 기독신문 편집국장 강석근과 총회에서 한교총 사무총장으로 전임한 신평식 목사를 지나치며 인사를 나누었다. 결혼식장 더라빌 2층은 반가움의 웃음들로 그득하다, 누구일까. 전 총신 총장 길자연 목사 총회 총무 최우식 목사 총회농어촌부 부장 김관선 목사 선관위원장 이은철 목사 양성수 장로 총신 법인국장 권주식 목사 충청도에 사는 재경호남협의회 회장 윤익세 목사... 2018년 3월 1일 오전 11시 더라빌 1층 그랜드볼룸에서 총신대 재단이사 유태영 목사의 아들 유성봉 군과 신부 박연주 양이 대한교회 윤영민 목사의 주례로 결혼예식을 올렸다. 성경은 말씀한다. 아담이 모든 육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아담이 돕는 배필이 없으므로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아담이 가로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칭하리라 하니라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찌로다 아담과 그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 아니하니라 창세기 2:20-25 2018-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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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3-05
  • 송준 시네마힐링
    <아타나주아> 감독 : 자카리아스 쿠눅 출연 : 나타르 웅갈락, 실비아 이발루 제목 : 에스키모, 그들의 선택은 아름다웠다 성선설을 믿지 않는다. 아파트 옥상에서 병아리를 떨어뜨리는 철부지 아이들에게서 인간 본성의 잔인함을 읽는다. 아이들의 해맑은 눈동자는 일종의 보호색 정도라고 애써 폄하한다. 세상의 모든 어린 생명들은 거개가 ‘귀여움’을 보호색으로 차용하기 마련이다. 본디 선한 사람도 있다. 대책없이 착한 사람들이 있다. 이들을 좋아하지만, ‘자비’라는 열성인자를 물려받은 멸종 위기의 안타까운 희귀종이라고 애써 치부한다. 그렇다고 성악설을 맹신하는 것도 아니지만, 은연중에 성선설과 성악설의 이분법 사이에 끼여 있었다. 두 대립항은 맹렬한 논리로 생명의 본성을 갈파하며 인간을 정의하고 또 강요한다. 그랬다. 적어도 영화 <아타나주아>를 만나기 전까지는. 어쩌면 중요한 것은, 성선인가 성악인가의 논리가 아니라, 인간을 이해하려는 태도에 있는 것 아니었을까. 아타나주아의 태도는 애절하다. 인간의 가슴에 도사린 일말의 따뜻함을 희구하는 아타나주아의 세계관은 애절하다 못해 곤고하다. 그 간절함의 끝에 맺힌 주술의 몸짓은 더 이상 미신이 아니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 아름다울 것이다. 아니, 아름다워야 한다. 이 우둔한 맹목은 과학보다 간명하고 합리보다 미래지향적이다. 영화 <아타나주아>는 끝없이 펼쳐진 순백의 설원, 일망무애의 빙토를 살아낸 에스키모의 구전 신화를 스크린에 옮긴 대서사시다. 눈이 시리도록 푸르른 북극의 하늘 아래서 사랑하고 미워하고 시기하고 죽고 죽이는 저들의 삶은 놀랄 만큼 우리와 닮아 있고, 또 놀랄 만큼 다르다. 영화 <아타나주아>는 그 다름에 관한 파노라마다. 먼 옛날, 혹은 가까운 옛날이어도 좋다. 한 무리의 에스키모가 부족장을 정하는 날 ‘사우리’는 맞수인 ‘툴리막’을 누르고 새로운 리더로 추대되는데 분위기가 무언가 석연치 않다. 세월이 흘러 사우리의 아들 ‘오키’와 딸 ‘푸야’ 그리고 툴리막의 두 아들 ‘아막주아’(힘센 사나이)와 ‘아타나주아’(빠른 사나이)가 이야기 전면에 등장한다. 사우리 가문은 이를테면 ‘카인의 후예’다. 악역이다. 지배욕과 호승심이 강하고, 질투에 사로잡혀 손에 피를 묻히는 역할이다. 툴리막 가문은 물론 ‘아벨의 후예’다. 사우리 집안이 좋은 고기와 가죽옷으로 풍요를 누리는 동안, 주리고 헐벗은 생활고를 딛고 아막주아와 아타나주아(나타르 웅갈락)는 뛰어난 사냥꾼으로 성장한다. 특히 쾌활하고 친절한 ‘얼짱’ 아타나주아는 처녀들에게 선망의 대상이다. 문제는 오키의 약혼녀인 ‘아투아’(실비아 이발루)가 아타나주아에게 마음을 주면서부터다. 질투에 눈이 먼 오키가 먼저 결투를 신청하고, 언감생심이던 아타나주아에게 기회가 주어진다. 분을 삭히지 못한 오키는 ‘죽여버리겠노라’고 공언하며 이를 갈고 다닌다. 다음번 악역의 주인공은 ‘푸야’다. 에스키모들은 아내가 임신을 해서 몸이 무거워지면 살림을 대신 꾸려줄 두 번째 부인을 맞는다. 남자는 사냥을, 여자는 살림을 맡아야 하는 혹독한 환경이 빚은 풍습이다. 하필 새 부인이 푸야다. 손도 까딱 않고 아투아를 부려먹던 푸야는 급기야 옆자리-에스키모는 온가족이 한 공간에서 함께 생활한다-에서 잠자던 아막주아를 유혹했다가 발각되어 쫓겨난다. 눈물로 호소하는 푸야의 거짓말에 눈이 뒤집힌 사우리는 오키에게 살인을 명하고, 묵은 감정까지 곱절로 폭발한 오키는 사냥에 지쳐 잠자는 형제의 천막을 덮친다. 짓뭉개진 아막주아의 주검을 뒤로하고 알몸으로 설원을 내달리는 아타나주아. 칸영화제에서 기립박수를 받았던 바로 그 명장면이다. 아타나주아는 얼음바다 어느 구석에서 은인을 만나 생명을 구하고 권토중래를 도모한다. 풍비박산난 아타나주아의 가족은 사우리의 무릎 아래서 목숨을 구걸하고, 오키는 강제로 아투아의 몸을 탐한다. 익숙한 내러티브, 영락없는 홍콩 무협영화의 플롯이다. 영화 <아타나주아>의 매력이 바로 여기에 있다. 홍콩 무협의 스토리가 ‘거시기’한 까닭은, 관객으로 하여금 가능한 한 머리 복잡하지 않은 상태에서 마음껏 무림 고수들의 몸의 향연을 즐기게끔 하자는 배려 때문이다. <아타나주아>는 홍콩 무협의 활극 대신 다큐멘터리를 방불케 하는 에스키모의 삶의 진실을 흠뻑 보여준다. <아타나주아>는 에스키모어로 제작된 최초의 영화다. 감독과 출연진 전원, 그리고 스탭의 90% 이상이 에스키모다. 자카리아스 쿠눅 감독과 제작자 겸 주연을 맡은 나타르 웅갈락은 한편으로 유명한 에스키모 조각가이기도 하다. 조각품을 판매한 자금이 제작비에 투입되었음은 물론이다. 미국 서부영화를 보며 감독의 꿈을 키우던 쿠눅 감독은, 스티로폼으로 지은 이글루에 올림픽 성화 같은 횃불을 꽂아둔 할리우드식 표현에 치를 떨었다고 한다. 그래서 탄생한 ‘아타나주아’는 철저한 연구와 고증을 바탕에 깔고 있다. 이글루를 짓는 과정, 개썰매의 모든 것, 아기를 넣을 수 있도록 커다란 모자가 달린 여인들의 의상에 이르기까지 에스키모 버전의 ‘네오리얼리즘’ 미장센이다. 사냥한 짐승의 가죽을 벗기고 고기를 썰어내는, 뼈와 돌로 만든 도구들까지도 일일이 전통 기술로 만들었다. 게다가 북극 현지 올로케이션으로 스탭 전원이 에스키모식으로 생활하며 촬영했다. 칸영화제 황금카메라상에 빛나는, 소실점까지 하얗게 펼쳐지는 ‘빙평선’의 파노라마는 단순한 그림이 아닌 것이다. 시나리오를 복층적으로 뒤섞지 않고 구전 신화에 충실한 연유도 같은 맥락이다. 여기에 이 영화의 인식론적 진면목이 숨어 있다. 아타나주아가 귀환하면서부터 영화는 홍콩 무협과 궤를 달리한다. 신화는, 지배자가 되기 위해 아버지마저 살해한 오키 일당을 용서한다. 그가 악해서가 아니라 악령이 들려서라고, 혼내줘야 할 대상은 오키가 아니라 악령이라고, 그러므로 오키를 죽일 수 없다고. 오키를 악령으로부터 구하기 위한 한바탕 씻김굿이 벌어지고, 마침내 오키와 푸야 일당에게 추방령이 내려진다. 악령과 주술의 개념을 빌린 미신적 인식론이 성선설·성악설보다 훈훈하게 다가온다. 오키 추방령은 곧, 인간 본성에 대한 에스키모 후예들의 선택이기도 하다. 신화를 구전해온 에스키모들이 선한 삶과 용서를 미덕으로 선택했듯이, 영화를 찍은 후예들 역시 같은 선택을 한다. 에스키모들의 선택은 아름답다. 아벨의 후예들이 유목의 신성함을 강조하느라 카인(농경)의 후예를 악인으로 낙인 찍어버린 구약의 낡은 스토리텔링보다도. (fin) 송준 기자 / 영화평론가 1990년부터 <시사저널> 문화부 기자로 ‘괴로운 글쓰기’의 업을 시작하였고, 1999년 영화전문주간지 <프리뷰>의 창간 편집장으로 숱한 밤을 새웠다. 2003년에는 중견 영화평론가 그룹 ‘젊은영화비평집단’의 회장을 맡아 비상업예술영화를 중심으로 광화문 시네큐브에서 <작은영화제>를 개최하였다. 2004년에는 각색을 맡아 작업했던 황철민 감독의 영화 <프락치>가 제34회 로테르담국제영화제에서 ‘국제비평가협회상’을 수상했으며, 2007년 MBC대한민국영화대상의 심사위원을 역임한 바 있다. 저서로 영화평론집 『아웃사이더를 위한 변명』(2004, 심산)이 있다. e-mail : bullwalk@naver.com
    • G.QT
    2018-01-26
  • 이서미 성경판화전 My Wonderful Dream
    나의 놀라운 꿈 정녕 믿기는 장차 큰 은혜 받을 표니나의 놀라운 꿈 정녕 이루어져 주님 얼굴을 뵈오리라 마음 괴롭고 아파서 낙심될 때 내게 소망을 주셨으며내가 영광의 주님을 바라보니 앞길 환하게 보이도다 세상 풍조는 나날이 갈리어도 나는 내 믿음 지키리니인생 살다가 죽음이 꿈 같으나 오직 내 꿈은 참되리라 나의 놀라운 꿈 정녕 믿기는 장차 큰 은혜 받을 표니나의 놀라운 꿈 정녕 이루어져 주님 얼굴을 뵈오리라 13일 정오까지 서울과 경기 남부, 충북 지역에 최대 3㎝의 눈이 내릴 것으로 예보됐다. 기상청은 이날 "13일 오전 9시 현재 북쪽을 지나는 약한 기압골의 영향으로 서울을 비롯한 중부지방과 경북에 눈이 내리고 있고, 일부 경기 남부 지역에 대설특보가 발효됐다"고 밝혔다. 계속된 한파는 낮부터 풀려당분간 큰 추위 없을 전망 오전 8시 현재 서울에는 0.2㎝의 눈이 새로 쌓였고, 청주에는 1.5㎝, 수원 1.3㎝ 등의 신적설이 기록됐다. 기상청 관계자는 "이 기압골은 차차 약화하겠으나, 오전까지 중부지방과 경북에 영향을 줄 것으로 예상한다"며 "경기 북부와 강원 영서 북부, 호남, 그 밖의 영남 지역에는 13일 오전까지 산발적으로 눈이 날리는 곳이 있겠다"고 말했다. 2018.1.11.-2.4My Wonderful Dream 이서미 개인전 롯데갤러리 서울 송파구 올림픽로 240롯데백화점 잠실점 12층 T. 02 411 6911 목마른 이들에게 물 한 잔씩 건네다가 꿈이 깨었습니다 그렇게 살아야겠습니다 살아 있는 모든 것을 다시 사랑해야겠습니다 누구에게나 물 한 잔 건네는 그런 마음으로 목마른 마음으로...... 꿈에서 나는 때로 천사이지만 꿈을 깨면 자신의 목마름도 달래지 못합니다 -이해인 오늘 밤에는 주님 꿈을 꾸고 싶다. 절대로 안 된다 말씀하지 마옵소서. 당신 꿈만 꾸고서도 하늘까지 갔다 온 기쁨 내일 밤에도 당신 꿈을 꾸고 싶습니다. 이서미 판화가의 어떤 선(線)은 고귀하고, 어떤 선은 무지개처럼 몽환적이다. 직선(直線)은 우주의 무한을 암시하고 곡선은 하나님의 창조를 암시한다. 색채는 훨씬 더 설명적이다. 시각에 대한 자극 때문이다. 어떤 조화는 평화롭고, 어떤 것은 위로를 주며, 또 어떤 것은 대담하여 흥분을 일으킨다. 그러나 그 모든 선이 성경 이야기를 담고 있어 신비롭고 은혜롭다. 2018.1.11.-2.4 롯데백화점 잠실점 12층 롯데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는 My Wonderful Dream 이서미 판화 개인전은 우리를 위로하고 격려하는 성경 이야기를 판화 기법의 그림으로 보여 준다. 그의 그림은 뒤러를 닮았다.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urer, 1471년 5월 21일 - 1528년 4월 6일)는 뉘른베르크에서 금세공의 아들로 태어난 르네상스의 대표적 독일의 화가, 판화가, 조각가다. 그는 특히 목판화와 동판화에서 독창적 재질을 보였다. 작가로서의 뒤러의 명성은 꽤 높았으나 그의 명성을 결정적으로 만든 것은 오히려 판화였다. 특히 1498년에 간행한 목판 연작 ‘요한계시록’(1498년)과 ‘동방박사의 경배’(1504년)는 뒤러의 삶에서 만이 아니라 유럽 목판화 역사에 있어서 기념비적 작품이 되었다. 추위가 매서운 1월 11일 개인전 첫날 전시장에서 ‘풍랑 만난 배 안의 예수님’ ‘노아의 무지개’ ‘물고기 안의 요나’ 등 그의 그림 어느 것이나 보는 사람마다 위로와 힐링을 느낀다고 이서미 작가에게 말했다. 그의 작품의 선, 색채, 명암, 공간구성 등의 일정한 배열이 보는 사람에게 낳는 효과가 있다. 이것을 주님의 위로와 치유를 일으키는 그림의 기적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그의 그림은 현실과 성경 이야기 및 명상과 행위가 서로 합하여 전 생명을 지배하는 초현실성을 창조한다. 왜냐하면 그림이란 많은 상상력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천연색 사진이기 때문이다. 로댕은 말했다. "중요한 것은 감동을 받고, 사랑하며, 소망하며, 요동하며 사는 것이다. 예술가가 되기 전에 사람이 되라." 그렇듯 이서미 작가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예술가가 되기 전에 오빠의 전도로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자가 되었다. 그 이후 그의 평생은 홍익대 판화과를 졸업한 이후 자신의 믿음과 상상 속의 주님 이야기를 판화와 그림으로 표현하는 데 일생을 바치고 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말했듯 회화와 조각의 목적은 볼 줄 알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서미는 자신이 믿는 것을 표현한 작품을 통해 주님의 위로와 사랑을 사람들이 보게 되기를 평생 바라고 있다. 2018-01-12
    • G.QT
    2018-01-13
  • 송준 시네마힐링
    감독 : 프랑소와 오종 출연 : 카트린느 드뇌브, 이자벨 위페르, 엠마뉴엘 베아르, 화니 아르당 제목 : 아버지를 두 번 죽인 거짓말 릴레이 비밀은 비밀을 낳고, 잉태된 비밀들은 ‘고르기아스의 매듭’처럼 서로 뒤엉켜 어둠의 복잡계를 건설한다. 비밀은 욕망을 먹고 자란다. 애초 파편에 불과한 개별의 욕망들은 비밀의 메커니즘을 통과하면서 분화하고 또 조직화한다. 그 욕망의 함수에 따라 비밀은 암묵적으로 공유되는 동시에 개별화하고, 임무와 권리의 분양과 더불어 짜릿한 공범의식의 쾌감이 그 테두리를 지배한다. 비밀의 매듭은 ‘알렉산더의 단칼’로 해결되지 않는다. 단칼에 도륙난 비밀의 실오라기들은 잠시 눕는다. 누웠다가 피비린내가 사라지길 기다려 ‘터미네이터 2’의 T-1000 액체금속 미래 사이보그처럼 부활한다. 다름 아닌, 부패와 혁명·혁신을 반복해온 인류 역사의 사이클이다. 이 난마의 매듭을 푸는 것은 결국 욕망의 실타래를 한 올 한 올 짚어가는 애거서 크리스티 식의 투명성 시스템이다. 영화 <8명의 여인들>은 한 가족의 24시를 도려낸 단면 위에 비밀과 욕망의 공생 메커니즘을 멋지게 극화한 미스테리극이다. ‘프랑스 영화계의 악동’으로 불리는 프랑소와 오종 감독은, 프랑스 극작가 로베르 토마의 원작을 빌려 여덟 여인의 욕망과 비밀을 들추며 당대의 관습과 편견, 터부의 경계, 그리고 가족 이데올로기의 허위를 통렬하게 풍자한다. 백설이 흐벅지게 휘날리는 화이트 크리스마스 아침, 마르셀이라는 중년 사업가의 파리 교외 저택으로 가족들이 모여든다. 두 뺨에 번갈아 키스를 날리며 단란한 애정 표현이 끝나기도 전, 2층에서 외마디 비명이 터져나온다. 모닝커피를 들고 갔던 하녀가 이 집의 유일한 남자인 가장 마르셀의 주검을 발견한 것이다. 마르셀은 유혈이 낭자하도록 등에 칼을 꽂고 침대에 엎어져 있다. 신고를 하려 했지만 전화선은 끊겨 있고, 차마저 고장나버렸다. 밤새 개들도 짖지 않았다. 그렇다면? 모두가 모두를 의심하는, 전형적인 애거서 크리스티 식의 미로적 중첩 구도의 ‘Who-Dunnit Movie'다. 애거서 크리스티도 없다. 용의자인 여덟 여인은 마르셀의 누이와 아내, 처제, 장모, 두 딸과 두 하녀. 이들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동시에 서로의 알리바이를 체크해가며 마르셀의 사망시간을 추정하고, 피차의 혐의 정도를 간추려간다. 하나씩 새로운 진술이 전개되는데, 여덟 증인의 크로스체크 결과 하나같이 거짓말이다. 이들은 여기서 비밀의 메커니즘과 관련된 중요한 진실을 깨닫는다. 자신을 변호하기 위한 거짓말이 실제로는 타인의 비밀을 강화하는 효과로 쓰인다는 사실. 그리하여 이들은 진실을 향한 ‘투명성 평화협정’을 맺고 일체의 패를 까는데, 역시나 진실의 칼날은 너무도 쓰라리다. 먼저 아내 게비(카트린느 드뇌브). 마르셀의 유산 상속 1순위자. 평생 한 번도 남편을 사랑한 적이 없다. 게다가 큰 딸 수종(비르지니 르드와양)은 교통사고로 죽은 옛 애인의 유산이다. 남편이 파산에 직면해 몸부림치는 상황에서 동업자 자크 파농과 부적절한 관계를 갖고 있다. 사건 당일 침대 밑에서 집을 떠나기 위해 꾸려놓은 짐 가방이 발견되었다. 처제 오귀스틴(이자벨 위페르). 독설과 질투의 화신, 깡마른 체구에 불 같은 성미의 예민한 노처녀. 심장발작이 심하다. 게비의 미모와 풍요를 몸서리치게 시샘하며, 형부를 가로채려 꼬리를 치는 등 돌출행동의 상처를 안고 있다. 장모(다니엘 다리유). 거액의 채권에 대한 방어 의지가 지나치게 강하다. 파산에 직면한 사위와 심한 말다툼을 하는데, 공교롭게 그 채권을 누가 훔쳐갔다. 나중에 밝혀지지만, 남편을 독살한 전례도 있다. 스스로 실토하기를, 흠 잡을 데 없이 잘해준 남편인데 사랑할 수가 없어서, 그렇다고 이혼하거나 새출발할 수도 없는 시대의 굴레 때문에…. 누이 피에레트(화니 아르당). 전직 스트립댄서, 자유연애주의자. 유산 분배를 요구하며 오빠를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해 50만 프랑을 빼앗는다. 흑인 하녀 샤넬(휘르민 리샤르)과 열정을 탐닉하는 사이다. 클라이맥스에 이르러 게비와 뒤엉킨 뜨거운 장면은 폭소를 자아내면서 영화의 극적 대단원을 이룬다. 하녀 루이즈(엠마뉴엘 베아르). 마르셀의 정부. 5년 여의 밀애 끝에 아예 하녀로 들어앉았다. 그러나 루이즈의 실제 애정의 과녁은 마르셀의 아내 게비? 큰 딸 수종(비르지니 르드와양). 런던에 유학 중인데, 혼전 임신으로 신경이 날카롭다. 그런데 허걱! 뱃속의 아이는 마르셀의 작품? 세상에 이런 콩가루 집안이 없다. 게다가 등장인물이 온통 여자다(마르셀은 몇 차례 뒤통수만 잠깐 보이고, 대사도 전무하다). 그 수다와 질투와 앙탈과 토라짐의 오케스트라는 콩가루로 범벅이 되어 정신없이 북적거리다가 슬픔과 분노와 격앙과 자탄의 몸부림으로 잦아들면서 한순간 홀연히 서로를 안아주는 애틋한 반전이 더없이 신비롭다. “영화를 통해 톨레랑스를 보여주고 싶다”던 오종 감독의 득의의 연출이다. <8명의 여인들>은 등장인물 모두가 주인공인 특이한 영화다. 그 여덟 모두가 60년대 ‘왕년의 스타’에서 막 떠오르는 20대 신성에 이르기까지, 하나같이 당대의 톱스타들인 초호화 캐스팅이다. 그들을 한 자리에 모아 조화된 선율로 지휘해낸 오종의 재능이 돋보인다. 게다가 카메라는 한 번도 그 집을 벗어나지 않는다. 눈발 휘날리는 바깥 풍경을 두어 번 비출 뿐, 거개의 앵글이 실내 시퀀스로 마감된다. 이 단조로운 공간만으로 2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을 지루하지 않게 경영해낸 오종의 감각 또한 간과할 수 없는 감상의 주요 포인트다. 단 20일 만에 모든 촬영을 끝냄으로써 저예산 미학의 한 경지를 보여준 것도 눈여겨볼 만하지만, 그러면서 화사하고 다채로운 프레임을 꾸려낸 비결은 무릇 치밀한 사전준비에서 찾을 수 있겠다. 오종은 여덟 스타의 매력을 고루 살려내는 것이 이 영화의 포인트라고 판단, 각 주인공들에게 어울리는 색채와 꽃의 이미지를 부여하고, 캐릭터의 성격과 이미지와 의상들을 거기에 맞추었다. 드뇌브는 오키드(서양란), 위페르는 패랭이, 아르당은 붉은 장미, 르드와양은 카네이션… 같은 식이다. 조명도 철저히 콘트롤되었다. 예컨대 왕년의 스타 카트린느 드뇌브와 화니 아르당에게는 역광이나 스포트라이트를 강조한 50~60년대 풍의 조명 미학을, 신세대 스타 비르지니 르드와양과 뤼디빈 사니에르(막내 딸 카트린느 역)에게는 현대적인 측면 연출을 강조한 것이다. 심지어 필름까지도 각 색상의 색온도를 최적으로 소화하는 세 가지 필름을 각기 다르게 사용했다. 다소 엉뚱하지만 여덟 여인이 한 번씩 돌아가면서 보여주는 뮤지컬 코너도 맛이 색다르다. 사랑과 열정과 자유, 삶과 고독, 욕망 따위를 주제로 펼쳐지는 독무대의 가무 개인기가 심각한 장면에 피식 웃음이 새어나오게 만들기도 하지만, 얼굴이 벌개지도록 흥분했던 배우들이 뮤지컬 타임을 위해 슬그머니 계단 구석 등지에 주저앉으며 관객의 표정으로 변신하는 대목은 망외의 별미로 꼽힐 만하다. 특히 오귀스틴으로 열연한 이자벨 위페르의 신경질적인 질투 연기는 환상이다. 위대한 배우는 대본을 초월한다. (fin) 송준 기자 / 영화평론가 1990년부터 <시사저널> 문화부 기자로 ‘괴로운 글쓰기’의 업을 시작하였고, 1999년 영화전문주간지 <프리뷰>의 창간 편집장으로 숱한 밤을 새웠다. 2003년에는 중견 영화평론가 그룹 ‘젊은영화비평집단’의 회장을 맡아 비상업예술영화를 중심으로 광화문 시네큐브에서 <작은영화제>를 개최하였다. 2004년에는 각색을 맡아 작업했던 황철민 감독의 영화 <프락치>가 제34회 로테르담국제영화제에서 ‘국제비평가협회상’을 수상했으며, 2007년 MBC대한민국영화대상의 심사위원을 역임한 바 있다. 저서로 영화평론집 『아웃사이더를 위한 변명』(2004, 심산)이 있다. e-mail : bullwalk@naver.com
    • G.QT
    2017-12-16
  • 초콜릿
    감독 : 라세 할스트롬 출연 : 줄리엣 비노쉬, 조니 뎁, 레나 올린 음악 : 레이첼 포트만 영상으로 빚은 ‘오감의 연금술’ 흥미로운 실험이 하나 있다. 누군가를 선택해 초콜릿을 선물하고 그 반응을 본다. 화를 내거나 짜증을 부리는 사람은 없을 테니, 결과는 대체로 둘 중 하나다. 무덤덤해 하거나 몹시 반색을 하거나. 대개의 선물이 받는 사람을 기쁘게 하기는 매일반이지만, 같은 값의 선물에 견주어 초콜릿의 경우는 다소 유별난 측면이 있다. 흔히 ‘사랑의 묘약’으로 불리는 초콜릿의 맛을 몇 마디 말로 설명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달콤 쌉싸름하다’는 어느 영화 제목마따나 초콜릿의 맛은 복합적이고 오묘하다. 맛뿐 아니다. 조각품에 가까운 모양새와 신비감을 품은 광택, 신경망을 파고드는 깊숙한 향기…. 초콜릿의 매력은 단순한 음식의 영역을 넘어선다. 그렇다 해도 초콜릿 애호가의 반색은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이해되기 어려운 호들갑으로 비치기 십상이다. ‘맛이 아무리 오묘하다 한들 저리 요란을 떨 것이 무엇인가’ 하는…. 바로 이 점에서 앞서 예로 든 두 부류의 인생관이 달라지기 시작한다. ‘사람은 초콜릿 없이도 살 수 있다’ ‘그렇지만 긴장과 스트레스로 충혈된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맛보는 초콜릿의 여유, 그 일탈의 미감 또한 소중한 삶의 한 장면이다.’ 혀 끝을 스치는 화학 반응의 연금술은 마침내 사람의 의식과 철학에 영향을 주고, 나아가 사회 변혁의 한 동인이 되기도 한다. 영화 <초콜렛>은 프랑스의 한 작은 마을 사람들이 초콜릿 가게를 두고 벌이는 갈등과 대립, 그리고 화해를 그린 깜찍한 우화다. 영화 속에서 초콜릿은 맛의 유혹 차원을 넘어, 주민들을 정치적·철학적·종교적·윤리적 혼돈에 빠뜨리는 ‘주제 넘은’ 역할을 수행한다. 북풍이 거세게 몰아치는 겨울, 빨간 외투를 입은 비엔나(줄리엣 비노쉬)와 어린 딸이 마을을 찾아온다. 비엔나는 초콜릿의 고향 ‘마야’의 피를 이어받은 신비의 여인, 북풍을 따라 떠도는 방랑자다. 비엔나는 광장 모퉁이에 작은 초콜릿 가게를 연다. 초콜릿을 생전 처음 보는 마을 사람들에게 비엔나와 그의 가게는 미스터리 그 자체다. 마을에 호기심을 동반한 작은 흥분이 일기 시작할 무렵, 비엔나와 주민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이 생겨난다. 이방인에게 배타적인 데다 가톨릭 전통이 엄한 마을의 질서가, 교회에도 나오지 않는 비엔나 모녀에게 거리를 두게 만든 것이다. 게다가 초콜릿의 유혹으로 인해 자신의 권위가 미미하게나마 흔들리게 됨을 감지한 시장은 비엔나 모녀를 이단으로 모는 험담을 유포시키고, 신임 교구 신부에게 압력을 가해 주민에 대한 윤리적 고삐를 강화하려 한다. 주민들은 비엔나의 세련된 친절과 우정, 그리고 감미로운 초콜릿의 마술에 점점 젖어들면서도 한편으로 보수적 가치관과 질서를 강요하는 시장과 교회의 권위에 눌려 번민한다. 주민의 순수한 심성에 반한 비엔나가 마을에 정착하려는 결심을 할 즈음, 갈등이 급상승하면서 ‘위험한 선택’을 감행하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그럴수록 전전긍긍하는 시장의 압박도 강도를 더해간다. 영화는 마침내 자유와 사랑을 갈망하는 사람들과, 보수적 질서의 우산 아래 몸을 맡기고 가슴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외면하는 사람들의 첨예한 대립으로 치닫는다. 영화에서 초콜릿은 갈등의 시원이자 변화의 훈풍이며 화해의 매개 노릇을 하는 핵심 디테일이다. 초콜릿의 매력을 어떻게 연출하느냐가 극적 설득력의 관건이 됨은 물론이다. 할스트롬 감독은 이를 위해 전방위적·공감각적 미학을 펼쳐 보인다. 초콜릿의 신비한 광택을 극대화한 은은한 조명, 비엔나의 자태와 초콜릿의 이미지를 관통하는 의상들과 가게 인테리어, 환상적 분위기를 극대화한 플래시백 시퀀스. 사운드 트랙의 절묘한 배합도 빠지지 않는다. 아카데미 작곡상 수상자인 레이첼 포트만의 ‘달콤 쌉싸름한 현악’은 마치 사운드로 빚은 초콜릿에 비유할 만하다. 영화의 흐름에 따라 때론 경쾌하게, 때론 우울하게, 때로는 긴박하게 혀 끝으로 녹아드는 선율! 클라이막스를 지나 깔끔한 엔딩으로 이어지는 감독의 달콤한 연출 감각에 젖어, 관객들은 어쩌면 입 안 가득 고인 군침을 소리 죽여 삼켜야 할지도 모른다. 입장하기 전에 미리미리 ‘소리 없는 초콜릿’(에티켓 감안 ^-^)을 준비하시라. box : 라세 할스트롬의 ‘따뜻한 고집’ <개 같은 내 인생>을 보셨다면, <길버트 그레이프>도 보셨다면, 그리고 <사이더 하우스 룰스>마저 보셨다면 당신은 이미 라세 할스트롬의 ‘따뜻한 고집’에 사로잡힌 팬이다. <초콜렛>을 포함해, 네 영화 모두 주인공(또는 나레이터)의 성장 과정을 모티프로 삼고 있다. 결핍 가정의 구성원들이 무대의 주변부를 서성이며 아픔과 고독을 나눈다는 설정도 흡사하다. 나름의 상처를 간직한 등장인물들의 화해와 해원을 그린다는 점, 특유의 유머와 감성을 발휘하여 갈등과 대립을 초월하는 가슴 뭉클한 휴머니즘의 해피엔딩으로 관객의 발걸음을 가뿐하게 만들어준다는 점에서도 할스트롬 영화는 대부분 닮은꼴이다. 그러면서도 할스트롬의 영화들은 각기 다른 매력으로 중첩의 느낌을 주지 않는다. 군살 없는 극적 구성과 매끈한 흐름, 꼼꼼하게 안배된 캐릭터들, 그리고 유려한 영상미 등이 어우러져 관객을 스크린 속으로 흡입해버리기 때문이다. 이 강점을 바탕으로 할스트롬 감독은, 블록버스터가 지배하는 할리우드에서 고집스럽게 완성도 높은 ‘소품’의 행진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할스트롬 미학의 또다른 매력은 영상과 사운드의 절묘한 궁합이다. 그의 영화들 거개가 심금을 파고드는 상큼한 선율을 부둥켜안고 있다. 할스트롬의 음악적 감각은 그의 전력과 무관하지 않다. 1946년 스웨덴의 수도 스톡홀롬에서 태어난 할스트롬은 10세 때 벌써 8분짜리 단편 <유령도둑>으로 신고식을 한다. 10여 년 간 TV감독으로 활동하던 할스트롬은 1977년 스웨덴이 낳은 월드스타 ‘아바’의 뮤직비디오를 연출하면서 여러 뮤지션과 작업할 기회를 갖는다. 마지막으로 할스트롬 감독의 재능 하나 더. 배우의 역량을 극대화해주는 친화적 연출력이 그것이다. 아직 무명이던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연기력을 세상에 알린 영화가 바로 <길버트 그레이프>였다. 이 영화를 거치면서 조니 뎁과 줄리엣 루이스는 자신들의 독특한 연기 세계를 꽃피우게 되었다. <사이더 하우스 룰스>에 비친 샤를리즈 씨어런의 상큼한 매력은 영화 속 ‘캔디’ 역에 녹아들면서 제대로 광채를 발한다. 할스트롬 감독은 <프라하의 봄>에 출연했던 스웨덴 여배우 레나 올린과의 사이에 두 딸을 두고 있다. (fin) 송준 기자 / 영화평론가 1990년부터 <시사저널> 문화부 기자로 ‘괴로운 글쓰기’의 업을 시작하였고, 1999년 영화전문주간지 <프리뷰>의 창간 편집장으로 숱한 밤을 새웠다. 2003년에는 중견 영화평론가 그룹 ‘젊은영화비평집단’의 회장을 맡아 비상업예술영화를 중심으로 광화문 시네큐브에서 <작은영화제>를 개최하였다. 2004년에는 각색을 맡아 작업했던 황철민 감독의 영화 <프락치>가 제34회 로테르담국제영화제에서 ‘국제비평가협회상’을 수상했으며, 2007년 MBC대한민국영화대상의 심사위원을 역임한 바 있다. 저서로 영화평론집 『아웃사이더를 위한 변명』(2004, 심산)이 있다. e-mail : bullwalk@naver.com
    • G.QT
    2017-11-07
  • 복 주는 목사 육수복 딸 결혼
    복 주는 목사 육수복 장녀 육하은 2017년 9월 16일 오후 1시 총회유리창 김선규 총회장 주례 결혼 복스러운 결혼예배 예장합동 총회장 주례 예장통합 총회장 축도 흰 웨딩드레스 ‘부의 상징’ 의미 다른 색 옷감에 비해 값이 비싸 흰 웨딩드레스 부유한 집안 딸 의미 결혼식에서는 지켜야 할 게 참 많다. 누가 강제로 시킨 것도 아닌데 신랑 신부를 포함해 결혼식에 참석하는 하객까지 상식처럼 알고 따르는 많은 약속들이 있다. 그중 제1의 원칙은 ‘신부를 제외한 사람은 흰색 옷을 입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 신부가 흰색 웨딩드레스를 입기 때문이다. 결혼식 주인공인 신부를 가장 돋보이게 만들기 위해 신부가 입는 흰색 옷을 다른 사람이 입어서는 안 된다는 논리다. 모두가 당연하게 생각하는 신부의 흰색 웨딩드레스. 과연 언제부터 입기 시작한 걸까. 웨딩드레스를 흰색으로 만드는 이유로 흰색이 순결을 상징하는 색이어서 신부와 잘 어울리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옛날 유럽의 신부는 결혼식에서 다양한 색의 웨딩드레스를 입었다. 흰색을 입는 신부가 흔치 않았을 정도다. 그러니 신부의 색으로 흰색을 고른 이유가 순결을 상징해서라기보다는 흰 웨딩드레스를 대중적으로 입기 시작한 후에 의미를 부여한 것으로 보는 게 맞다. 1840년 빅토리아 여왕은 알버트 왕자와의 결혼식에서 입은 흰 가운과 망토를 썼고 이후 그의 스타일을 따르고 싶어 하는 신부들이 따라 입으면서 대중에 확산됐다. 빅토리아 여왕이 흰 웨딩드레스를 선택한 이유로는 여러 가지 해석이 붙는다. 당대 다른 신부들이 입지 않는 흰색을 선택함으로서 젊은 여왕의 개혁과 혁신의 이미지를 표현하려 했다는 게 하나다. 또 다른 한편에선 영국 레이스 업자들을 배려해 레이스가 가장 돋보이는 색인 흰색을 선택했다는 해석도 한다. 가령 패션 컬럼리스트 마들린 루켈은 패션잡지 보그에 “빅토리아 여왕은 평소 지원받던 레이스 업자를 도우려고 레이스를 강조하는 흰 드레스를 입었다”고 전했다. 흰 웨딩드레스가 갖는 또 하나의 의미는 바로 ‘부의 상징’이다. 표백 기술이 발달하지 못했던 19세기에는 흰색 옷감을 만들려면 일일이 손으로 물을 빼는 방법 외엔 없었다. 공이 많이 들다 보니 다른 색 옷감에 비해 값이 비쌌고 흰 웨딩드레스를 입는 신부는 곧 부유한 집안의 딸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다시 말해 흰 웨딩드레스를 입는 신부는 모난 데가 없이 복이 있어 보여 집안에 복을 가져다주는 복스러운 신부를 뜻했다. 복 주는 목사 육수복(총신 83회 총회은급재단이사 전곡충현교회)과 사모 최화정의 장녀 육하은 양이 복스러운 흰 웨딩드레스를 입고 2017년 9월 16일 오후 1시 전남 광주 소재 일곡중앙교회당에서 총회유리창 김선규 총회장의 주례로 결혼예배를 드렸다. 신랑은 성남고등학교 교사로 예쁘고 복스러운 신부와 참 잘 어울리는 정만혁 전도사였다. 그는 일곡중앙교회 담임 정연수 목사와 사모 장미화의 장남이었다. 복스러운 결혼예배는 예장합동 총회장이 주례로 설교(전도서 4:9-12 ‘아름다운 가정’)하고 예장통합 총회장이 축도해 그 축복과 성대함의 의미를 더해주었다. 두 남녀가 참 잘 어울렸다. 하나님의 섭리로 참 잘 만났다. 보기에도 너무나 아름다웠다.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게 보이는 신랑 신부 닮은 점이 많았다. 눈빛에는 꿈이 가득하고 가슴에는 믿음이 가득하니 소망들을 이루어 갈 거다. 참 부러웠다. 신랑 신부 두 사람 참 좋은 짝을 만났다. 믿음은 내일을 향해 힘차고 가슴에는 사랑이 가득하니 하나님께서도 축복하고 싶으셨을 것이다. 아파치족 인디언의 시처럼 이제 두 사람은 춥지 않으리라. 서로가 서로에게 따뜻함이 될 테니까. 이제 두 사람은 더 이상 외롭지 않으리라. 서로가 서로에게 동행이 될 테니까. 그래서 두 사람은 예수님 말씀대로 ‘창조 시로부터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으니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그 둘이 한 몸이 될찌니라 이러한즉 이제 둘이 아니요 한 몸이니 그러므로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할찌니라’(마가복음 10:6-9). 이제 두 사람 앞에는 한 몸이기에 오직 하나의 복스러운 삶만이 있으리라. 2017-10-03
    • G.QT
    2017-10-03
  • 송준 시네마힐링
    <슈렉> 장르 : 애니메이션 기획 : 제프리 카젠버그 제작 : 드림웍스 동화보다 아름다운 ‘엽기 판타지’ 동화에는 묘한 공통점이 있다. ‘옛날 옛적에~’ ‘무카시 무카시~’ ‘원스 어폰 어 타임~’으로 시작하는 도입부는 동서고금, 시대와 국경을 초월하여 닮은꼴이다. 파스텔 톤의 그림동화책 <잠자는 숲 속의 미녀> 첫 장을 넘기면서 시작되는 애니메이션 <슈렉>의 첫 장면도 ‘원스 어폰 어 타임~’이다. 그러나 흔히 동화, 또는 애니메이션이 주는 선입견은 그리 오래 가지 않는다. 갑자기 솥뚜껑 같은 손이 동화책을 덮고는 책장을 홱 찢어낸다. 그리고 쏴~, 화장실 물 내리는 소리. 동화책은 괴물 슈렉의 ‘대변지’였다. 볼일을 마친 슈렉이 화장실 문을 쾅 닫고 나온 뒤 1분 여 동안 영화는 자기 색깔을 분명히 밝힌다. <슈렉>은 일종의 ‘안티 동화’다. 전통적 미학의 틀도 거부한다. 슈렉이 목욕하고 식사하는 사이사이 타이틀 자막이 올라가는 오프닝 시퀀스에서부터 객석은 웃음바다다. 물 속 방귀에 붕어가 죽어서 뜨고, 진흙 목욕에 달팽이 스테이크까지, 괴물 슈렉의 라이프 스타일과 캐릭터가 소개되는 사이 <슈렉>은 자연스럽게 향후 1시간 여 동안 이 애니메이션이 견지할 자세와 입장을 예고한다. 어느 날 깊은 숲 속 늪지에서 혼자만의 고즈넉한 고독을 즐기는 슈렉(마이크 마이어스)에게 기겁할 일이 발생한다. 백설공주와 일곱 난장이, 신데렐라, 꼬마 돼지 삼형제, 피노키오, 피터팬 등 성장기에 누구나 한 번쯤은 접했을 동화의 온갖 주인공들이 슈렉의 늪지로 몰려와 진을 친 것이다. 자기 연민 콤플렉스를 가진 포악한 영주 파콰드(존 리트고)가 동화 속 주인공들을 자신의 영지 밖으로 쫓아낸 것이 사건의 발단이었다. 늪지를 예전처럼 되돌리기 위해 파콰드를 찾아간 슈렉은, 대신 불을 뿜는 용의 성에서 피오나 공주(카메론 디아즈)를 구해오기로 약속한다. 백마 대역으로 따라붙은 말 많은 당나귀(에디 머피)와 함께 우여곡절 끝에 공주를 구한 슈렉은 그만 사랑에 빠지고 만다. 널리 알려진 ‘공주 구출 이야기’를 기본 얼개로 삼고 있지만, <슈렉>은 처음부터 끝까지 동화의 문법을 전복해가며 노골적인 패러디로 ‘왜 공주는 반드시 미녀여야 하는지, 공주를 구하는 건 꼭 백마를 탄 왕자나 기사여야 하는지, 기사는 잠든 초면의 공주에게 함부로 키스해도 되는지, 공주는 왜 그렇게 첫 키스를 받고 싶어 안달을 하는지’ 딴지를 건다. <슈렉>의 첫 번째 포인트는 종전의 동화들이 세뇌하듯 건설해온 통념을 뒤집는 ‘엽기 전략’이다. 괴력을 가진 슈렉의 주무기는 트림과 입 냄새. 얌전해 보이는 피오나 공주는 <와호장룡>의 소녀 검객과 <매트릭스>의 여전사를 합쳐놓은 듯한 왈가닥이다. 아리아처럼 고운 피오나의 노래 소리는 죽음을 부르고, 피오나는 새알을 가져다 태연히 프라이 요리를 한다. 슈렉과 피오나는 풍선 배틀로 관객의 턱을 빠지게 하고는 사이좋게 ‘들쥐 바비큐’를 뜯는다. 불 뿜는 용은 당나귀에게 첫 눈에 반해 사랑의 열병을 앓고…. <슈렉>이 보여주는 또 하나의 매력은, 현대 사회와 풍습에 대한 고도의 풍자다. 파콰드 성의 액션 신에서는 레슬링에 열광하는 현대인의 세태를 영화 <글래디에이터>의 원형극장 결투 신으로 패러디하여 일침을 가하고, 로빈훗 일당과의 대결 장면에서는 뮤지컬을 마음껏 비틀어 웃음으로 바꿔버린다. 방송사 스튜디오를 연상시키듯 ‘정숙’ ‘웃음’ ‘박수’ ‘함성’ 따위 피킷을 쳐드는 대목도 재기가 넘친다. 시종 객석을 요절복통 웃음의 도가니로 몰아넣는 <슈렉>의 비틀기는 결코 우연의 소치가 아니다. 84년 디즈니에 입사하면서 애니메이션과 인연을 맺은 제프리 카젠버그는 <인어공주> <미녀와 야수> <알라딘> <라이온 킹> 등을 잇달아 성공시키면서 영락해가던 디즈니 왕국의 르네상스를 견인한 인물이다. ‘가족을 위한 애니메이션’이란 콘셉트 아래 어린이용 캐릭터 사업을 디즈니의 주요 마케팅 포인트로 자리매긴 그가 디즈니를 떠나 스티븐 스필버그와 손잡고 드림웍스 애니메이션의 새 장을 열게 된 이면에는 나름의 확신이 자리잡고 있었다. “10대들 대부분은 디즈니 애니메이션을 보러 극장에 가지 않는다. 열 살 이하의 아이들과 그들의 부모인 30대 이상이 디즈니의 주 관객이다. 나는 <슈렉>을 보러 온 관객의 반응을 지켜보았다. 아이들은 멋진 액션과 불을 뿜는 용, 슬랩스틱 유머나 개그에 즐거워한다. 10대와 20대의 반응은 다르다. 그들은 그들이 자라온 세상에 대한 ‘불경스러운 패러디’에 열광했다. 인습을 뒤집는 ‘쿨’한 문화적 코드가 10대와 20대를 사로잡는 매력이 되리라는 게 나의 확신이었다.” 한 인터뷰에서 카젠버그는 이렇게 밝혔다. <개미> <이집트 왕자> <엘도라도> <치킨 런>으로 이어지는 드림웍스의 일관된 작품 경향이 카젠버그의 확신의 반영이었음은 물론이다. <슈렉>에서 특히 돋보이는 것은 실사에 가까운 3D 애니메이션의 테크닉이다. 등장인물들의 생생한 표정과 실감나는 움직임, 피오나의 머릿결과 옷자락의 느낌, 당나귀의 털, 발 밑에 밟히는 풀들의 움직임, 나뭇잎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숲의 이미지, 물·우유·맥주 등 액체의 표현, 용이 내뿜는 불과 들끓는 용암의 열기 등 <슈렉>이 보여주는 영상은 애니메이션 기법의 신기원으로 평가된다. 피오나의 표정은 너무 실사와 흡사해서, 일부러 표현 수위를 낮추기까지 했을 정도다. <개미> 제작으로 극찬을 받았던 드림웍스의 파트너 PDI는 <슈렉>을 위해 ‘쉐이퍼’(몸의 근육 및 표정 변화를 표현하는 프로그램)와 ‘쉐이더’(피부와 옷감 등에 굴절·반사되는 다양한 빛을 표현하는 프로그램)라는 소프트웨어를 새로 개발했고, 수십억 개의 이미지를 자유롭게 조합할 수 있도록 ‘디지털 그린 하우스’와 ‘디지털 인형 하우스’를 만들었다. 사람의 표정을 창조하는 ‘안면 근육 애니메이션 시스템’과 액체의 움직임을 묘사하는 ‘액체 애니메이션 시스템’을 한 차원 끌어올렸으며, 때로는 스탭이 직접 진흙 세례를 받는 실험까지 치렀다고 한다. 이같은 성가에 힘입어 <슈렉>은 제54회 칸영화제 경쟁부문에 정식 초청을 받았다. 애니메이션이 칸의 경쟁부문에 초대를 받은 것은 1973년 특별상을 수상한 르네 랄루의 <판타스틱 플래닛> 이후 28년 만의 일이다. 제프리 카젠버그는 이에 대해 “아카데미에서 <글래디에이터> <아메리칸 뷰티>가 상을 받은 것보다 훨씬 기쁘다”고 말했다. <슈렉>은 미국에서만 개봉 11일 만에 1억 달러가 넘는 흥행 수익을 기록했다. box : 디즈니 왕국과 새로운 도전자들 제프리 카젠버그와 디즈니의 인연은 미묘한 구석이 있다. 카젠버그의 입성과 함께 <인어공주>의 흥행으로 디즈니 르네상스가 꽃을 피웠고, <라이온 킹> 성공 이후 마이클 아이스너 회장과의 불화로 카젠버그가 떠나면서 디즈니의 상승세가 수그러들었다. 전 세계적인 캐릭터 사업과 일본·유럽으로 확산되는 디즈니랜드의 호황으로 디즈니 왕국은 여전히 굳건하지만, 디즈니의 애니메이션만 놓고 본다면 도전자들의 등쌀이 그리 만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먼저 20세기 폭스사가 <아나스타샤> <타이탄 A.E.>로 도전장을 냈고, 워너 브러더스사도 <매직 스워드> <아이언 자이언트>로 도전 대열에 합류했다. 노련한 디즈니의 방어력은 도전자들에게 참담한 패배를 안겨주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신생아 드림웍스가 도전장을 이어받았다. 드림웍스의 <개미>와 디즈니의 <벅스 라이프>의 1차전은, 제작비의 4배가 넘는 1억6천만 달러를 벌어들인 디즈니의 승리였다. 그렇다고 드림웍스의 패배도 아니었다. <개미>는 미국에서만 9천만 달러 이상을 벌어들였다(제작비는 6천만 달러). 카젠버그는 드림웍스를 설립할 때부터 “동화는 만들지 않겠다. 동화를 스토리텔링의 기초로 삼는 디즈니 전통과는 다른 애니메이션의 비전을 갖고 있다”라고 밝혔다. <개미> <이집트 왕자> <치킨 런> <슈렉>으로 이어지는 드림웍스 행진의 출발이었다. 사업 컨셉트도 디즈니와 달랐다. 어린이를 상대로 한 캐릭터·테마 파크 대신, 10대와 성인층을 대상으로 OST와 출판 쪽으로 전략을 다각화한다는 복안도 갖고 있었다. 디즈니식 동화와 애니메이션은 이미 여러 비평가들로부터 날카로운 지적을 받고 있었다. 아동 문화 비평가 조셉 H. 스와츠는 디즈니식 세계관의 문제를 이렇게 비판한다. 첫째는 전형성과 상투성이다. 매우 비슷한 줄거리와 상황, 도식적 갈등과 상투적인 대응, 뻔한 결말. 인위적으로 밝은 세상에 인형 같은 주인공들. 틀에 박힌 비현실적 순수함. “이는 마치 ‘걱정마라. 현실에 해결 못하는 어려움은 없다’라는 세뇌 작용에 다름 아니다”라고 조셉은 지적한다. 또 하나의 문제는 이분법이다. 주인공은 늘 아름답고 착하며 순수하게 그려진다. 인위적인 아름다움은 이상화된 비현실적 유년기를 유포시킨다. 반대쪽 등장인물은 징그럽고 폭력적이거나, 자주 실수를 저지르며 못생겼다. 항상 서로를 배신하고 속인다. 이같은 이분법은 세상을 늘 착한 세력과 나쁜 세력으로 이분화하도록 학습시킨다. “한 편의 애니메이션으로 치부하기에는 디즈니의 영향이 세계적으로 너무나 크다는 것이 문제다.” 바로 이 점에서 드림웍스는 디즈니의 문제로부터 자유롭다. <슈렉>의 주인공들은 이미 충분히 복합적이고 다층적이다. ‘왕따 괴물’ 슈렉과 버림받은 당나귀, 밤이면 정체가 변하는 공주. 이들이 빚어가는 이인삼각의 위로와 사랑. 어쩌면 디즈니가 드림웍스를 경계해야 하는 까닭은 흥행 성적이 아니라 바로 이 점, ‘슈렉식 세계관’인지도 모른다. (fin) 송준 기자 / 영화평론가 1990년부터 <시사저널> 문화부 기자로 ‘괴로운 글쓰기’의 업을 시작하였고, 1999년 영화전문주간지 <프리뷰>의 창간 편집장으로 숱한 밤을 새웠다. 2003년에는 중견 영화평론가 그룹 ‘젊은영화비평집단’의 회장을 맡아 비상업예술영화를 중심으로 광화문 시네큐브에서 <작은영화제>를 개최하였다. 2004년에는 각색을 맡아 작업했던 황철민 감독의 영화 <프락치>가 제34회 로테르담국제영화제에서 ‘국제비평가협회상’을 수상했으며, 2007년 MBC대한민국영화대상의 심사위원을 역임한 바 있다. 저서로 영화평론집 『아웃사이더를 위한 변명』(2004, 심산)이 있다. e-mail : bullwalk@naver.com
    • G.QT
    2017-09-22
  • 송준 시네마힐링
    <블러디 선데이> 감독 : 폴 그린그래스 출연 : 제임스 네스빗, 알란 길디어, 디클란 더디 피는 착취와 분노를 먹고 자란다. 인류의 역사는 결국 정복과 지배, 살육과 탄압, 그 착취의 기록에 다름 아니다. (문화도 예술도, 완력에 의해 지배 체제가 갖춰진 뒤에, 그 핏자국이 가신 뒤에 싹을 틔우는 것이다.) 역사가 승자의 기록임을 감안하면, 실제 우리가 알고 있는, 우리가 배워서 알게 된 역사는 또 얼마나 걸러지고 미화된 ‘용비어천가’일 것인가. 그렇게 걸러낸 역사만으로도 인류의 심성은 충분히 잔혹하다. 고대 역사로부터 굵직한 것들만 추려도, 인류의 잔혹사는 꼬리에 꼬리를 문다. 그 잔혹사는 대부분 타인의 피를 뽑아 제 배를 채우려는, 흡혈귀적 무한 욕망의 발자취였다. 마케도니아로부터 인도에 이르는 ‘알렉산더 제국’의 영광은 기껏 스무 살 철부지 왕의 정복욕으로 비롯된 ‘피눈물의 행진곡’이었고, 로마 천 년의 팽창주의도 결국은 몇만 명 남짓한 귀족들의 배를 불리기 위한 착취의 칼부림에 지나지 않았다. 바이킹의 뱃길도, 징기스칸의 질주도, 사라센의 모래바람도, 나폴레옹의 파죽지세도, 히틀러의 광기도 기실 ‘피의 경제학’에 다름 아니었다. 피의 경제학은 아즈텍·잉카·마야 등지의 인간을 도륙하고, 북미 대륙 전체를 선주민으로부터 송두리째 강탈했으며, 아프리카 전역을 이산가족의 눈물로 적시며 납치와 인신매매를 한 시대의 당당한 경제활동으로 미화시켰다. 문제의 심각성은 이 잔혹사가 과거형이 아니라는 데 있다. ‘피의 경제학’은 여전히 인간에게 유력하고도 유효한 ‘경제행위’로써 유혹의 마력을 흘리고 있다. 예컨대 이라크에서 아프가니스탄, 이란과 시리아로 이어지는 미국의 무한 전쟁은 배후의 군산복합체의 이익을 위해 작동하는 ‘기획 전쟁’이라는 의혹을 사고 있다. 자유의 여신상이 곧 ‘식민과 착취로부터의 해방’을 상징하는 기념물일진대, 그 여신의 이름으로 다시 세계 도처에서 식민과 착취를 위한 군가가 울려퍼지는 아이러니. 이 ‘피의 경제학’이 더욱 잔혹한 것은, 단지 엄청난 ‘피의 양’ 때문만이 아니다. 피바다를 덮는 절묘한 명분이, 비단보다 더 치밀하고 선동적인 논리로 사람들을 현혹시키는 까닭이다. 피바다를 감추는 레토릭은, 단순한 치장이나 궤변이 아니다. 이미 하나의 시스템이다. 정치와 권력의 역학, 소시민의 인생관과 인식론, 군중의 광기와 어리석음, 착취의 열매를 나누는 달콤한 공범의식에 이르기까지 인간의 이중심리마저도 매끈하게 녹여낸 고도의 메커니즘이다. 넓게는 국가 간의 왜곡된 관계를, 좁게는 한 나라 안의 독재와 폭정의 문제를 두루 덮어주는 꾀와 명분의 금자탑이다. 베트남 전쟁과 이라크 전쟁을 비호하는 작금의 논리가 그 전자라면, 광주민주항쟁을 ‘폭도 진압’으로 덮어온 수십 년 세월이 그 후자에 해당한다. 인간은 피를 뿜을 때, 이미 그 피를 덮을 온갖 장치를 준비하고 있다. 국가는 국가대로, 개인은 개인대로, 각각 처지에 맞게 공인된 ‘피 덮개 레토릭’을 준비해놓고 ‘액션’에 들어가는 세상인 것이다. 폴 그린그래스 감독의 <블러디 선데이>는 피의 얼룩을 덮는 비단의 논리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보여주는 핏발 선 고발장이다. 흡사 십자수를 놓듯이 힘의 논리, 힘의 메커니즘을 한 땀 한 땀 떠서 생생하게 이미지로 보여준다. 여기 작은 피의 기록이 있다. 갈등이 커지고, 부딪치고, 피를 부르고, 그 피를 덮는 마무리까지, 예의 시스템이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는지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본보기다. 영화는 1971년 1월 31일, 북아일랜드 데리시에서 벌어진 유혈 사태를 주목한다. 이 유혈 사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설명이 필요한데, 그 시발은 154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영국 왕 헨리 8세는 캐서린 왕비와 이혼을 하기 위해 로마 교황의 승인을 요구하다 거절당하자 가톨릭으로부터 독립하여 성공회를 설립하고, 이웃나라인 아일랜드에도 개종을 요구한다. 이로부터 비롯된 아일랜드의 종교 갈등은, 17세기 들어 크롬웰이 청교도혁명을 일으킨 뒤 군대의 힘으로 스코틀랜드와 아일랜드에 대해 다시 개종을 요구함으로써 더욱 심화된다. 저항의 결과는 참혹했다. 크롬웰은 아일랜드의 모든 토지를 몰수하여 영국인에게 나눠주고 아일랜드인을 소작농으로 전락시켰다. 내친 김에 영국은 아일랜드에 신교도들을 대거 이주시키고, 1801년에는 아예 속국으로 삼아버린다. 이런 여건에서 1백만 명 이상이 굶어죽은 것으로 유명한 ‘아일랜드의 대기근(1847~48년)’이 발생하게 된다. 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아일랜드 독립운동의 불길이 치솟아 우여곡절 끝에 1921~22년 자치령을 획득(1922년 영연방 자치령 ‘아일랜드자유국’, 1937년 국호를 ‘에이레’로 바꾸어 독립, 1949년 ‘아일랜드공화국’으로 국호를 바꾸고 영연방 탈퇴)하는데, 영국은 당시 신교도 주민이 다수인 북아일랜드 6개 주를 영국에 잔류시키고, 새로 국경선을 긋는다. 파란만장한 북아일랜드 분쟁은 이렇게 태어났다. 북아일랜드의 구교도들은 극심한 차별과 탄압에 시달렸고, 다수인 신교도들은 영국의 보호 아래 특권을 누렸다. 신.구교도 사이에는 결혼을 기피할 정도로 갈등이 심화되었고, 마침내 1969년 IRA(아일랜드공화국군)가 결성되어 아일랜드공화국과의 통일을 주장하며 무장 투쟁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영화 <블러디 선데이>는 IRA의 무장 투쟁이 본격화되기 직전, 그 분수령이 되는 사건을 다큐멘터리에 가깝게 스크린에 재현한다. 1971년 1월 31일, 북아일랜드 데리시. 시민들은 미국의 마틴 루터 킹 목사의 비폭력주의를 본받은 평화 시위를 준비한다. 주요 이슈는 극심한 유아사망률. 영국의 차별 정책으로 인해 너무도 낙후되고 비위생적인 생활 환경 아래서 구교도 주민의 아이들이 무참하게 죽어나가는 데 대한 항의였다. 영화는 시간의 흐름을 좇아, 평화 시위를 준비하는 시민단체의 상황과 이에 대응하는 영국군의 입장을 교차 편집으로 보여주는데, 그렇게 교차되는 순간들의 쌍방의 입장 차이가 경악을 금치 못하도록 선연하게 대비된다. 어차피 이미 벌어진 역사 속 사건을 보여주는 영화이므로 관객이 벌써 결과를 알고 있는 상황, 감독은 결과가 아닌 ‘과정의 미학’으로 관객의 호흡을 멎게 만든다. 평화 시위에 참가하기 위해 몰려드는 ‘아무 것도 모르는’ 군중들과, 작전 지시에 따라 그 날의 풍경이 어떻게 그려질지 ‘자신의 임무를 너무도 명확히 알고 있는’ 공수부대원들. 인간이 몸으로 빚어낸 실화가 알프레드 히치코크의 서스펜스를 능가한다. 피의 서스펜스는, 폴 그린그래스 감독 득의의 리얼리티의 승리다. 리얼리티를 향한 감독의 치밀함은 곱씹을 만하다. 주연 제임스 네스빗은 시위를 이끈 아이반 쿠퍼 하원의원과 같은 입장을 가진 북아일랜드 출신이고, 희생자 제리 도너히 역을 맡은 디클란 더디는 ‘피의 일요일’에 목숨을 잃은 삼촌의 아픈 기억을 가지고 있다. 진압군 역에는 실제 공수부대원 출신들을, 시위대에는 실제 데리시 주민을 캐스팅했다. 총격 피해자들로 시끌벅적한 병원 시퀀스에는 실제 희생자의 유가족들이 모여 눈물바다를 이뤘다. 그러나 정작 감독이 방점을 찍은 부분은 피비린내 나는 참상 너머에 있다. 일을 벌이고 난 뒤, 수습을 위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는 가해자들의 마무리 메커니즘이다. 시체를 치우고, 시체의 주머니 안에 수류탄을 집어넣어 평화 시위를 ‘실패한 테러’로 위장하고, 언론을 동원하여 거짓으로 포장하고, 심지어 진상조사위원회조차 형식적으로 사태를 마무리하는 일련의 수순들. 우연의 일치인가, 저 참상과 그에 뒤이은 매끈한 수습까지, 멀지 않은 우리 역사의 한 장면과 절묘하게 닮아 있다. 그 날 데리시에서는 13명이 죽고 14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 사건은 여전히 가공된 논리로 포장돼 있으며, 1998년에는 편파 판결에 반발하는 청문회가 다시 열렸고, 진실을 밝히려는 노력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데리시의 ‘피의 일요일’ 이후 10년 뒤, 대한민국 광주에서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엄청난 사건이 벌어졌다. 피의 드라마는 어찌도 저리 ‘붕어빵’인지. 1980년 5월 18~27일, 광주는 사망 218명, 부상 5,088명, 실종 363명, 기타 피해자 1,520명(www.518.org 참조)의 비극을 남기고 상황 종료되었다. 10배의 기간 동안, 100배의 피해를 낳은 광주는 공수부대를 앞세운 부대의 구성이며, 사냥을 방불케 하는 진압군의 양상이며, 지역을 완전 봉쇄하여 ‘도시의 비밀’이 새어나가지 못하도록 차단한 치밀함이며, 이후 언론 및 진상 조사·재판 등의 과정에서까지 어쩌면 저렇게 데리시의 모델을 닮았는지. 인간의 폭력성과 간악함은 정녕 시간을 초월하여 되풀이되는가. 언제까지고 되풀이될 것인가. 송준 기자 / 영화평론가 1990년부터 <시사저널> 문화부 기자로 ‘괴로운 글쓰기’의 업을 시작하였고, 1999년 영화전문주간지 <프리뷰>의 창간 편집장으로 숱한 밤을 새웠다. 2003년에는 중견 영화평론가 그룹 ‘젊은영화비평집단’의 회장을 맡아 비상업예술영화를 중심으로 광화문 시네큐브에서 <작은영화제>를 개최하였다. 2004년에는 각색을 맡아 작업했던 황철민 감독의 영화 <프락치>가 제34회 로테르담국제영화제에서 ‘국제비평가협회상’을 수상했으며, 2007년 MBC대한민국영화대상의 심사위원을 역임한 바 있다. 저서로 영화평론집 『아웃사이더를 위한 변명』(2004, 심산)이 있다. e-mail : bullwalk@naver.com
    • G.QT
    2017-08-28
  • 피스메이커 김재호 장남 결혼
    총회 피스메이커 김재호 목사 김순애 사모 장남 김요섭 군과 전경은 양 혼인 예식 제101회 총회장 김선규 목사 주례 사랑은 어떤 시간에 피어나는 것일까, 한 사람이 힘없이 손짓하던 부름을 말하지 못한 하고 싶은 말을 대신하여 피어나는 것일까. 사랑이 피어나는 시간에 그 주위에서 일어나는 바람은 또 무엇일까, 한 사람 가장이를 예감처럼 돌다가 사라지는 빛이 사랑의 시작일까. 사랑은 결국 무슨 뜻으로 저리도 선명한 자태로 짝이 되어 내게 다가오는가. 사랑이 피어나는 순간에 바람과 빛과 또 그 알 수 없는 미동의 신비는 무엇인가. 사랑에는 무슨 뜻이 없다. 무슨 뜻이 없어서 남자와 여자 사이 더욱 아름다운 저 파동(波動)의 눈빛과 웃음들처럼 사랑은 그 자체로 두 몸이 한 몸이 되게 하는 영매(靈媒)의 존재인지도 모른다. 총회 피스메이커 김재호 목사 김순애 사모 장남 김요섭 군과 전종일 씨와 최춘열 여사의 장녀 전경은 양 혼인 예식이 제101회 총회장 김선규 목사 주례로 2017년 8월 12일(토) 12시 더 리버사이드 호텔 노벨라홀에서 열렸다. 상견례 뒤 찬송 605장 찬송을 불렀다. 오늘 모여 찬송함은 형제자매 즐거움거룩하신 주 뜻대로 혼인예식 합니다신랑신부 이 두 사람 한 몸 되게 하시고 온집안이 하나 되고 한뜻 되게 하소서 세상에서 사는 동안 한길가게 하시고맘과 뜻이 하나 되어 주 따르게 하소서서로 믿고 존경하며 서로 돕고 사랑해 고와 낙을 함께 하며 승리하게 하소서 아버지여 우리들이 기도하고 바람은저들 부부 세상에서 해로 하게 하소서이 두 사람 감화하사 항상 주를 섬기며 이세상을 살아갈 때 행복하게 하소서 아멘 신부 전경은 양이 다니는 신창동교회 담임 김동희 목사가 기도했다. “남자와 여자를 지으시고 에덴동산에서 주례하시어 가정을 이루어주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 요섭 군과 경은 양을 신랑신부 삼으셔서 가정을 이루도록 혼인예식을 허락해주심을 감사드립니다. 혼인 잔치에 참여하셔서 축복하셨던 주님께서 이 자리에도 찾아오시어 양가의 부모님과 가문 그리고 신랑신부를 축복해주실 줄 믿습니다. 총회장 김선규 목사님을 통해서 신랑신부가 평생 가슴에 품고 살아갈 하나님의 말씀을 주실 때 그 말씀을 잘 가슴에 담고 평생 그들 속에 담긴 말씀대로 순종하게 하시고 충만한 축복을 받을 수 있도록 축복해 주시옵소서. 그래서 그들이 사는 날 동안 하나님에게 영광이요 교회의 유익이며 이웃에 덕을 세우며 부모님에게 효도하는 두 사람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두 사람이 사는 동안 가슴에 품고 기도한 이상의 행복을 누리며 사는 부부되도록 축복해 주시옵소서. 두 사람이 시냇가에 심은 나무처럼 축복해 주시어 시절을 따라 열매를 풍성히 맺게 하여주옵소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믿음의 명문 가정을 이어가도록 복 내려주옵소서. 양가를 축복하시고 신랑신부를 특별히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총회 유리창 김선규 목사는 본문 시편 128:1-6을 읽고 제목 ‘복 있는 가정’ 메시지를 전했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의 길을 걷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네가 네 손이 수고한 대로 먹을 것이라 네가 복되고 형통하리로다 네 집 안방에 있는 네 아내는 결실한 포도나무 같으며 네 식탁에 둘러 앉은 자식들은 어린 감람나무 같으리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는 이같이 복을 얻으리로다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 너는 평생에 예루살렘의 번영을 보며 네 자식의 자식을 볼지어다 이스라엘에게 평강이 있을지로다 “옛날 여름 비오는 날 초가집에서 떨어지는 낙숫물이 모여 흘러가면 작은 냇물을 이룹니다. 이 냇물이 모아지면 강물을 이루고 강물이 모이면 바다를 형성하는 것 잘 압니다. 부모가 만나 가정을 이루면 또 그 가정 가정들이 모이면 마을이 되고 그 마을들이 모이면 사회가 되고 사회가 모이면 국가가 되고 국가들이 모여 세계를 이룹니다. 성경은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를 특별하게 창조하셨음을 나타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그런 뒤 하나님은 아담의 몸에서 하와를 창조하셨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잠들매 그가 그 갈빗대 하나를 취하고 살로 대신 채우시고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에게서 취하신 그 갈빗대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시니’. 하나님은 아담이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분명하게 알려주셨습니다. 왜냐하면 아담이 다음과 같이 외쳤기 때문입니다.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그런데 성경은 결혼의 원리를 이렇게 말씀합니다. 남자가 혼자 있는 게 외로워 보여 짝을 지어주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둘이 합하여 한 몸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와를 만드시고 아담에게 데려왔을 때 아담은 외쳤습니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하나님은 서로 좋아하는 둘이 한 몸을 이루게 해주셨습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라고 창세기 2:24에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의 원리를 따라 믿음의 가정이 바로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루는 게 하나님이 명령하신 가정인 것입니다. 이 명령을 따라 두 사람이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루어 생육하고 번성하시기를 축복합니다.” 이어서 신랑신부의 결혼서약과 성혼기도 후 결혼이 이루어졌음을 주례자가 공포했다. 384장 찬송과 김선규 목사 축도로 혼인 예식을 마쳤다. 이어서 광고와 지구촌교회 보컬디렉터 성정선 집사의 축가가 있은 뒤 신랑신부의 행진으로 결혼예배를 마쳤다. 결혼이란 부부 사이에 빈 공간을 두어서 그들 사이에서 하늘의 바람이 춤추도록 하게하고 서로 사랑하되 상대방 고유의 영역을 침범하지 말라는 칼릴 지브란의 말이 있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한다. 아내들이여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기를 주께 하듯 하라 이는 남편이 아내의 머리 됨이 그리스도께서 교회의 머리 됨과 같음이니 그가 바로 몸의 구주시니라 그러므로 교회가 그리스도에게 하듯 아내들도 범사에 자기 남편에게 복종할지니라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그러므로 사람이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그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 비밀이 크도다 나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그러나 너희도 각각 자기의 아내 사랑하기를 자신 같이 하고 아내도 자기 남편을 존경하라 에베소서 5:22-25, 31-33 2017-08-23
    • G.QT
    2017-08-23
  •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 장르 : 다큐멘터리감독 : 빔 벤더스음악 : 라이 쿠더노래 :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 '인생의 바다'에서 들려오는 '검은 라틴'의 파도 소리 흔히 노년은 인생의 황혼기로 비유된다. 작열하던 태양이 광포한 열기를 거두고 슬며시 서산 마루에 기대듯이, 들끓던 열정과 억센 힘, 넘치는 에너지를 세월 저편으로 갈무리한 ‘실버 실루엣’. 갈수록 급변하는 일상의 강파른 속력 앞에서 노년은 더욱 초라하다. 경쟁력 위주의 속도전 사회에서 노인은 자칫 걸림돌로 치부되기 십상이다. 그러나 이같은 현대 문명의 맹목을 살짝 비켜나서 살펴보면, 노년의 이미지는 달라진다. 평생에 걸쳐 숙성한 기술과 지혜, 기품, 우주를 헤아리는 조화와 혜량. 비유를 바꿔보자. 한 방울 이슬로 태어난 물의 일생은 평생을 흘러흘러 바다에 이른다. 물이 일생에 걸쳐 조우한 온갖 미네랄과 자양들이 바다로 그윽하게 고여든다. 노년은 한편으로 ‘인생의 바다’인 것이다. 더욱이 그 노년이 기예와 함께 한 삶이라면, 일생을 조탁해온 기예의 경지는 삶의 온갖 희로애락을 용해한 세월의 밀도로 인해 독보적인 아우라를 발하기 마련이다. 빔 벤더스 감독의 영화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은 평생을 음악으로 살아온 아름다운 노년들의 실황 다큐멘터리다. 1997년 혜성처럼 나타나 미국·유럽·일본 등지를 뒤흔들며 쿠바 열풍을 불러일으킨 백발부대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 이들의 앨범은 발매되자마자 클래식·재즈·팝 계로부터 즉각적인 환호와 찬사를 받으며 250만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렸고, 연일 빌보드차트를 뒤흔든 뒤 그 해 그래미상을 거머쥐었다. 이듬해에는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을 거쳐 미국 뉴욕의 카네기홀 콘서트에서 열광적인 앵콜 세례를 받았고, 이후로도 파리, 도쿄 등지의 뮤직차트를 누비며 인기를 누리고 있다. 이 세계적인 백발 그룹은 이름부터 아이러니하다.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은 이름 자체가 ‘환영 받는 사교 클럽’이란 뜻이다. 본디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은 쿠바의 수도 하바나의 고급 사교장이었다. 쿠바 최고의 뮤지션들의 무대였던 이 클럽은 지난 30~50년대에 전성기를 구가하다가 1959년 쿠바혁명과 함께 사라진 추억의 명소다. 영화는 한 노인이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의 옛터를 찾아가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이 아흔살(영화 촬영 당시) 노인은 15세에 벌써 첫 자작곡을 발표한 바 있는 쿠바 음악사의 산 증인 꼼빠이 세군도(1907년 생)다. 이어서 ‘쿠바의 냇 킹 콜’로 불리는 전설의 보컬리스트 이브라힘 페러(1927년 생), 영혼을 끌어들이는 피아니스트 루벤 곤잘레스(1919년 생), 여성보컬 ‘쿠바의 에디트 피아프’ 오마라 포르투온도(1930년 생), 베이시스트 ‘작은 베토벤’ 카차이토(1933년 생) 등 백발부대 멤버 십여 명이 차례로 등장한다. 이 기묘한 영화는 한 음반 프로듀서의 아이디어에서 잉태되었다. 라이 쿠더. 작곡가이자 프로듀서, 전설적인 기타리스트, 제3세계 음악의 거장이다. 1996년, 라이 쿠더는 월드서킷 음반사로부터 아프리카와 쿠바의 사운드를 매치한 ‘아프로-쿠바’ 음반을 기획해달라는 제안을 받고 쿠바로 향한다. 라이 쿠더는 젊은 시절부터 테이프를 통해 매료되었던 쿠바 뮤지션들을 찾아다닌다. 쿠바의 뮤지션들 대부분은 카스트로 혁명 이후 ‘부르주아 음악인’으로 낙인찍혀 음악을 그만두고 잊혀졌거나 활동 무대를 외국으로 옮겨야 했다. 지난 40여 년 동안 적지 않은 뮤지션들이 이미 세월의 파도에 휩쓸려 세상을 떠나기도 했다. 라이 쿠더는 하바나 골목의 낡은 아파트 등지에서 추억을 안고 살아가는 노년의 거장 뮤지션들을 어렵사리 만나 그룹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을 결성한다. 여기에 빔 벤더스가 합류했다. 라이 쿠더는 벤더스 감독의 영화 <파리, 텍사스>에서 작곡을 맡았던 환상의 콤비였다. 벤더스는 라이 쿠더가 이브라힘 페러의 솔로 음반을 녹음하기 위해 하바나로 돌아가는 길에 동행했다. 영화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은 이렇게 태어났다. 영화는 ‘백발 특공대’가 결성되는 순간부터 카네기홀 콘서트에서 앵콜 박수가 쏟아지는 장면까지를 다룬다. 벤더스는 처음부터 드라마를 버렸다. 재미를 위해서라면, 카리브해 작은 섬의 늙고 초라한 뮤지션들이 카네기홀에 입성하기까지의 우여곡절을 할리우드식 앵글에 담는 편이 옳았다. 대신 벤더스는 재미의 자리에 애잔한 쿠바의 눈빛과 숨소리를 담아 영롱한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빚어냈다. 공연 실황과 음반 녹음 장면, 멤버들의 인터뷰 모습 등이 교차되면서, 노익장들의 골 깊은 인생유전과 스크린을 가득 메우는 음악적 환희가 멋진 대조를 이룬다. 이들의 노랫말은 시처럼 삶과 사랑을 노래하고, 사이사이 화면에 등장하는 하바나의 다양한 표정은 영상으로 써낸 에세이처럼 은은하게 흔들린다. 이 ‘시골 노인네들’이 마침내 뉴욕에 입성하던 날의 모습은, 마치 ‘촌로들의 서울 효도관광’ 풍경처럼 어색하고 우스꽝스런 ‘역설적 감동’을 전해준다. 거리에서 촌티를 흩날리던 꼬부랑 백발들이 보여주는 무대 위의 기품, 매너. 그 은유적인 콘트라스트……. 그리하여 카네기홀 콘서트의 대단원의 막이 내리면, 콘서트홀 객석과 스크린 앞 관람석에서 동시에 우레 같은 갈채가 저 아름다운 백발들 앞에 바쳐지는 것이다. box : 빔 벤더스의 영상 미학 황량한 세상, 소외를 바라보는 따뜻한 눈길 빔 벤더스의 영상 어조는 낮고 그윽하다. 맑고 가지런하며, 뒷부분에 힘이 실린 음색이다. 삶은, 세상은 부조리한 시지프스의 언덕 같은 것. 그 너머의 진실은 알 수 없지만, 묵묵히 가야 하는 공허한 허방. 관조하되 낙관하지 않고, 방황하되 절망하지 않는다. 냉소와 갈망의 중간 어디쯤, 우울과 희망의 중간 어디쯤. 황량하고 건조한 상황 속에도 그는 끝내 한 조각 온기의 비늘을 간직한다. 벤더스의 미학은 어쩌면 자기 삶의 궤적에서 고스란히 우러난 것인지도 모른다. 벤더스는 1945년 패전 독일의 뒤셀도르프에서 태어나 프라이브루대학에서 철학과 의학을 전공했다. 파리에서 미술 공부를 하던 중 시네마테크에 심취해 영화 인생을 시작한다. <파리, 텍사스>(1984․칸영화제 황금종려상) <베를린 천사의 시>(1987․칸영화제 감독상) 등으로 국내 관객들에게도 익숙한 벤더스 감독의 화두는 일단 ‘소외’다. 그의 영상에 투영된 고독의 빛깔, 단절의 이미지, 고뇌의 미학이 모두 소외와 같은 심장을 쓰고 있다.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을 보는 벤더스의 눈길 또한 마찬가지다. 주인공들이 겪은 개인사의 굴곡들, 중남미 ‘라틴 아메리카’를 휩쓴 근대사의 핏빛 흔적들. 삶이 너무 고달파서 차라리 삶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라틴 노예의 후예들. 독립과 가난, 그리고 혁명. 이 소외의 연대기를 바라보는 감독의 따뜻한 시선이 영화 <부에나비스타 소셜 클럽> 속에 잔잔히 물결친다. 98년 완성된 이 영화는 99년 유럽영화아카데미 최우수 다큐멘터리상, 영국 최우수 다큐멘터리상, 시애틀국제영화제 최우수 다큐멘터리상, LA영화협회 최우수 다큐멘터리상, 호주 누사영화제 최우수 다큐멘터리상 등을 휩쓸었다. (fin) 송준 기자 / 영화평론가 1990년부터 <시사저널> 문화부 기자로 ‘괴로운 글쓰기’의 업을 시작하였고, 1999년 영화전문주간지 <프리뷰>의 창간 편집장으로 숱한 밤을 새웠다. 2003년에는 중견 영화평론가 그룹 ‘젊은영화비평집단’의 회장을 맡아 비상업예술영화를 중심으로 광화문 시네큐브에서 <작은영화제>를 개최하였다. 2004년에는 각색을 맡아 작업했던 황철민 감독의 영화 <프락치>가 제34회 로테르담국제영화제에서 ‘국제비평가협회상’을 수상했으며, 2007년 MBC대한민국영화대상의 심사위원을 역임한 바 있다. 저서로 영화평론집 『아웃사이더를 위한 변명』(2004, 심산)이 있다. e-mail : bullwalk@naver.com
    • G.QT
    2017-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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