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회 가는 역사(驛舍)
2월 15일 총장도 없는 총신대 사당동캠퍼스 졸업식을 다녀오니 마음이 더욱 쓸쓸해져
해는 저물고 총회 가는 삼성역 지하철 역사(驛舍)에서 너를 보냈다. 예레미야 애가야! 개찰구에는 못 쓰는 차표와 함께 찍힌 젊은 믿음의 조각이 흩어져 있고 아직 갈 길 먼 총회 역사(歷史)가 전동차에 실려 간다. 대합실에 남은 사람은 아직도 누굴 기다려 두리번거리고 나는 이곳에서 내 죄벌이 너무 무겁습니다 외치는 가인을 만나면 목 놓아 울리라. 누굴 닮은 거북이여 느릿느릿 소망을 싣고 가거라. 슬픔이 없는 곳으로 통하는 지하철 모든 노선이 너의 등에는 지도처럼 펼쳐 있다.
어릴 적 가난한 홍제동 언덕 성탄절이지만 마지막 은혜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낡은 교회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이 시려 덜컹거리는 유리창마다 톱밥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횃대 위의 닭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주님이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기도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껴잡은 손바닥을 불빛 속에 오므리며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추위에 떨 듯 한 상자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소리와 쓴 약 같은 끓인 보리차 김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기도는 식어간다.
조그만 예배당에 눈은 푹푹 내려 쌓이고 푹푹 내려 쌓이는 눈 때문에 사람들은 더는 오지 않는다. 사람들은 예배당에서 오지 않는 전도사를 기다리고 있다. 털모자에 잠바를 입은 나는 간간이 난로에 톱밥을 던져 넣으며 깊은 생각에 빠져 있다. 난로 위 주전자는 그렁그렁 끓는 소리를 내며 수증기를 내뿜고, 시계는 자정을 넘어서고….
1942년 1월 말 일본으로 떠나기 전 젊은 윤동주는 이런 시를 남겼다. 그가 죽기 3년 전이다.
참회록 - 윤동주(1917~45)
파란 녹이 낀 구리 거울 속에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내 얼굴이 남아 있는 것은
어느 왕조의 유물이기에
이다지도 욕될까.
나는 나의 참회의 글을 한 줄에 줄이자.
ㅡ만 24년 1개월을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
무슨 기쁨을 바라 살아왔던가
내일이나 모레나 그 어느 즐거운 날에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나는 또 한 줄의 참회록을 써야 한다.
ㅡ그때 그 젊은 나이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자.
왜 그런 부끄런 고백을 했던가
밤이면 밤마다 나의 거울을
손바닥으로 발바닥으로 닦아보자.
그러면 어느 운석 밑으로 홀로 걸어가는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 온다.
슬픈 사람의 뒷모양이
거울 속에 나타나 온다.
윤동주는 여전히 믿음과 순결의 피 흐르는 우리의 순교자다. 2월 16일은 그의 76주년 기일(忌日)이다. 믿음을 전하고 믿음의 본이 되어야 할 총회 소속 목사들은 사후(死後) 각기 기일마다 총회와 총신을 위해 어떤 기억을 남길 수 있을까. 2월 15일 총장도 없는 총신대 사당동캠퍼스 졸업식을 다녀오니 마음이 더욱 쓸쓸해졌다. 우리의 믿음은 정말 어디로 가고 있나하는 참회의 생각에...
2017-0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