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3(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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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빵과 장미>
감독 : 켄 로치
출연 : 파일러 파딜라, 에이드리언 브로디, 엘피디아 카릴로
음악 : 조지 펜톤

우리에게 빵보다 장미를 달라
 
어쨌든 평화를 연출하는 건 진실보다 망각인지 모른다. 세상은 언제나 비장한 진실의 시대보다 부조리한 관습의 시대가 외견상으로는 훨씬 평온했다. 망각의 힘, 무감각의 힘이다. 때론 의도적으로, 혹은 미필적으로 사람들은 진실의 경종을 애써 외면하고 살아왔다. 또 그렇게 살고 있다. 왜냐하면 진실은 인간에게 불확실한 ‘내일의 광명’을 위해 핏빛 선연한 ‘오늘의 희생’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저 휘황한 내일의 광명조차, 실현되기 바쁘게 스러져버리는 찰나적인 가치가 아니었던가. 
 
물론 수천 년 인류사를 통틀어 언제고 진실의 목소리를 기억하는 ‘불구’들이 있었다. 망각할 줄 모르는 불구들. 불구들은 자주 오늘의 평온을 들쑤셔서 내일의 불확실성을 선동하곤 했다. 망각의 행복, 절망과 타협의 안정을 뒤흔들어서 진실의 고통, 두려운 희망 속으로 인간을 밀어넣곤 했다. 불구들은 늘 소수였고, 그들의 목소리는 대부분 다중의 아우성 속에 묻히곤 했다. 
 
여기 망각을 모르는 불구, 영원한 아웃사이더인 한 영화감독이 있다. 그의 영화는 늘 세상의 그늘을 주목한다. 저 포장된 평온의 이율배반적 내면을 향해 카메라를 들이민다. 영국의 켄 로치 감독이다. 영화 속에서 그의 목소리는 시퍼렇게 날이 서 있지만, 사람을 바라보는 눈길만큼은 더없이 따스하다. 웃음을 머금은 고함이고 미소로 외치는 ‘할(喝)’이다. 한국의 잣대로 보면, 켄 로치 감독은 급진 좌파다. 막말로 ‘빨갱이’다. 그의 영화는 늘 무산자.노동자 계급, 약자.소수민족의 마이크 역할을 자처한다. 그러면서도 ‘자본주의 예술의 총아’인 영화판에서 수십 편의 작품을 줄기차게 내놓았다. 한국에서라면 두 번째 작품의 제작비 조달이 불가능했을 감독이다. 그런 그가 이번에는 할리우드를 강습했다. 그것도 ‘빌딩 청소부들의 노조 결성’이란 소재를 들고서.
 
영화 제목 <빵과 장미>는 영화 속 주인공들이 “우리에겐 빵뿐만 아니라 장미도 필요하다”고 외치는 구호의 함축이다. 노조 조직책인 남자 주인공은 청소원들에게 “아무도 장미를 거저 주지 않습니다. 언제 장미를 얻는 줄 아십니까? 구걸을 멈추고 단결할 때입니다”라며 노조 결성을 선동한다. 그럼에도 이 ‘불손한’ 영화에 대해 미국의 언론들은 극찬의 비평을 게재했다. ‘모순에 대한 날카로운 감각, 스토리텔링의 정밀함’(<뉴욕타임즈>) ‘오스카 투표자들이 말끔히 청소된 건물에서 이 영화를 보았다면 아카데미상을 선사했을 것’(<시카고 선 타임즈>)….  .
 
신자유주의 경제를 신봉하는, 부자.고용자들의 천국 아메리카에서 어떻게 이런 ‘빨갱이 영화’가 호평을 받을 수 있었을까. 그것은 <빵과 장미>가 바로 ‘사람의, 사람에 의한, 사람을 위한 스토리’이기 때문이다. 켄 로치는 이데올로기적 분류를 하기 이전에 타고난 휴머니스트다. 인간애를 바탕으로 전개되는 로치의 내러티브는 느꺼운 소구력으로 감동의 눈물샘을 자극한다. 켄 로치 영화의 힘은 바로 이 감동에서 샘솟는다. 영화 구석구석에 배치된 유머와 아이러니, 해학과 골계의 에피소드도 더없이 절묘하다. 
 
켄 로치는 무엇보다 인간 사회의 먹이사슬 메커니즘에 대해 눈부신 통찰을 보여준다. 토끼에서 사자에 이르기까지, 먹이사슬의 여러 주체들은 다양한 인간형으로 대유되어 등장한다.  물론 양아치.불량배 같은 주변부의 가해자 그룹을 포함해서.
 
영화는 여주인공 마야의 밀입국 장면에서 시작된다. 마야는 당돌하고 순박한 멕시코 처녀, 이를테면 무작정 상경한 우리의 또순이다. 마야의 밀입국을 도와준 ‘멋진 싸나이’들은 알고보니 하이에나다. 가족들에게 몸값을 받고서야 밀입국자들을 풀어준다. 돈이 모자란 마야, 하릴없이 끌려가 하룻밤 수청으로부터 인생을 저당 잡힐 판이다. 영등포·청량리의 상경 처녀 사냥꾼과 영락없는 닮은꼴이다. 우여곡절 끝에 마수에서 벗어난 마야는 LA의 언니 집을 찾지만, 궁색하기는 마찬가지. 없는 살림의 곤핍함은 동서고금을 막론하는 법이다.
 
마야의 첫 취직, (아니나 다를까) 술집 웨이트레스다. 취객의 입담과 손찌검 또한 수컷들의 본능에 충실하다. 아메리카 드림이고 코리아 드림이고 간에 다이애스포라들의 첫걸음은 늘 이렇게 음습한 것이다. 다시 어찌어찌 우여곡절 끝에 마야는 ‘밤의 직장’ 대신 ‘낮의 직장’을 얻는다. 빌딩 청소부다. 말괄량이 마야, 출근 첫날부터 화이트컬러 골탕먹이기로 신고식을 치르고 웃음과 실수와 열패감을 한데 뒤섞어 사회의 쓴맛을 배워나간다.
 
‘또순이 상경기’의 서문을 꾸미는 와중에, 켄 로치는 ‘서울이라는 피라미드’의 권력 구성인자들을 꼼꼼히 소개하기를 잊지 않는다. 빌딩 소유주와 고소득 입주자들, 빌딩 관리 용역 회사와 청소부들, 그리고 청소부 위에 군림하는 용역회사 간부. 이들 간에 물고 물리는 자본과 권력의 지배 관계. 순수 자본주의보다 더 가증스런 인간의 이기주의. 피라미드 진입을 향한 저층민의 인간 유형들도 생략할 수 없다. 하버드 장학생을 꿈꾸는 주경야독파, 부조리 혁파를 외치는 열혈남녀, 가족 이기주의에 매몰된 프락치, 동료를 고변하지 못하고 해직되는 의리파, 내일의 개혁보다 오늘의 수당이 더 절실한 소시민…. 
 
이쯤에서 켄 로치는 빌딩을 사회라는 소우주의 모델하우스로 삼아 인간의 표리부동한 ‘망각 게임’을 본격적으로 벗기기 시작한다.
이 심각한 주제를 웃음과 눈물의 에피소드로 엮어내는 거장의 솜씨가 눈부시다. ‘빌딩’으로 상징된 LA 혹은 서울이라는 도시는 실상 페어플레이보다 기상천외하게 변형된 갖은 파울플레이로 점철된 정글에 다름 아니다. 자본과 노동의 근본적 불합리, 착취에 가까운 저임금, 중간 간부의 임금 갈취, 성 상납, 노노간의 갈등과 다툼, 사람 사는 모습의 꾀죄죄함은 피부색을 초월하여 어찌나 닮아 있는지. 
 
그 틈바구니에서 켄 로치는 다시 희망을 이야기한다. 사람만이 희망이다. 체온만이 희망이다. 살과 살을 부비고, 온기를 공유하며, 아픔과 슬픔을 나눠갖는 삶. 악다구니의 일상 속에서도 어김없이 새 살처럼 돋아나는 저 끈적끈적한 인간애. 마야와 언니 로사가 화해하는 클라이맥스는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장면으로 꼽힌다. 경쾌한 슬픔, 혹은 은유적 분노로 표현해도 좋을 서정적인 음악도 <빵과 장미>의 백미다.
 
 
box : 영원한 아웃사이더, 최후의 리얼리스트
 
'아름다운 빨갱이’ 켄 로치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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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은 케네스 로치. 1936년 영국 워웍셔주 뉴니튼 출생. 옥스퍼드대학에서 법학 전공. 일찍이 노동계급·무산자들의 삶의 진실에 눈을 뜨고 이들의 이야기를 대신하는 데 평생을 바친다. 대학에서 실험연극 활동을 했던 로치는 62년 BBC에서 견습 감독으로 일하면서 영화와 인연을 맺었고, 64년 유명한 경찰 시리즈물 <Z카>(그 중 세 편의 에피소드)로 연출에 데뷔했다. 
 
<업 더 정션>(65년)으로 가시화된 로치의 작품 경향은 <커밍아웃 파티>(65) <캐쉬, 집으로 돌아오다>(65) <불쌍한 암소>(67) <케스>(69) 등을 거치면서 선을 분명히 드러낸다. <업 더 정션>은 노동자 소녀들의 낙태 문제를, <캐쉬, 집으로 돌아오다>는 홈리스 가족의 절망과 사회복지의 허상을 다룬 작품이다. 첫 극장용 장편 <불쌍한 암소>에서 노동계급에 대한 본격적인 성찰을 보여준 로치는 영국 북부 요크셔의 광산 노동자들의 암울한 현실을 다룬 다음 작품 <케스>를 통해 대중적 관심을 불러모으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같은 연출 경향은 영화 자본의 환영을 받지는 못했다. 70년대 들어서면서 켄 로치 감독은 매 작품마다 늘 검열에 부닥쳐야 했고, 다음 작품의 제작비를 마련하기 위해 몸부림쳐야 했다. <가족생활>(71)과 <블랙잭>(79)을 영화화했을 뿐 대부분의 시간을 TV 드라마에 바쳤다. 80년대에도 고난은 계속되었다. <사냥감지기>(80)와 <조국>(86) 두 편의 영화를 제외하고는 연출 작품 대부분이 노동 현장 다큐멘터리들이었다. 
 
그러나 말년에 들어서면서 켄 로치의 황금기가 열리게 된다. <하층민>(90)은 그의 최고 걸작 중 하나로 꼽히며, <숨겨진 비망록>(90)과 <레이닝 스톤>(93)은 각각 90년과 93년 칸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한다. <리프 라프>(91)로 91년 <올해의 유럽영화상>을, <레이디버드 레이디버드>(94)로 베를린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랜드 앤 프리덤>(95년)으로 칸영화제 비평가상을 수상하면서 마침내 켄 로치 감독은 거장의 반열에 오른다. 이후 내놓은 작품들 <칼라송>(96) <내 이름은 조>(98) <빵과 장미>(2000) 등을 통해 켄 로치는 농익은 원숙미를 한껏 보여준다. (fin)
 
송준 기자 / 영화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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