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3(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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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더굳뉴스] 성석교회의 길
    7부 16권으로 이루어진 대하소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서 프루스트는 비자발적 기억에 대해 고찰한다. 그 유명한 ‘마들렌 에피소드’가 소개되는 1부 ‘스완네 집 쪽으로’에서 주인공은 홍차에 적신 마들렌 조각을 머금는 순간 어머니에 대한 강렬한 기억이 비자발적으로 떠오르는 것을 경험한다. 아주 오래전 기억도 익숙한 냄새, 맛, 소리, 촉감 등 여러 가지 감각에서 환기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지면의 굴곡이 많아 험한 길이 기구(崎嶇)다. 산길처럼 다니기 고단한 길은 험준(險峻)이나 험조(險阻)라고 적는다. 굽이가 많아 에돌아가거나 통행이 까다로운 길의 상황은 우회(迂回)와 곡절(曲折)이다. 평평한 길로 보이지만 성석교회 안에는 구덩이가 팬 곳이 많다. 중국에서는 그 구덩이를 감가(坎坷)라고 곧잘 표현한다. 아예 함정(陷穽)으로 적기도 하고, 혹은 요철(凹凸)로도 부른다. 요즘 중국 매체들이 잘 쓰는 말은 김화경의 '걍'이 아닌 ‘갱(坑)’이다. 구덩이를 일컫는데, 단어로는 광산의 갱도(坑道)로 우리에게 익숙하다. 성어로는 책을 불태우고 선비들을 땅에 산 채로 묻었다는 분서갱유(焚書坑儒)가 친숙하다. 이제는 아예 유무형의 함정을 파서 사기를 치거나 해코지하는 행위를 가리킨다. 언뜻 평탄해 보이는 김화경의 길에는 이런 ‘구덩이’가 참 많을 것 같다. 총회나 성석교회 실세들이 통제를 잃으면서 생긴 윤리의식의 위축은 그를 더 심화했다. 그래서 성석교회라는 갱에 들어선 길은 늘 만만찮다. 신중하게 나서야 할 성석교회의 길이다. 성경은 말씀한다.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너희가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로다 이제부터는 너희가 그를 알았고 또 보았느니라 요14:5-7 2024-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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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3
  • 윤석열 대통령과 이순신 장군 사즉생
    국민의힘의 비례 위성 정당인 국민의미래는 18석을 얻을 것으로 예측돼 비례를 합쳐 개헌선을 지킬 108석 의석을 가진 여당이 될 것이다. 21대 총선 때는 비례를 포함해 103석이었다. 그때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따르면 2022년 3월 10일 오전 개표율 100% 기준,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가 득표율 48.56%를 기록해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47.83%)를 앞섰다. 선거 막판까지 1%포인트 차이가 나지 않은 초접전 상황에서 이재명을 누르고 20대 대선에서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런 그이기에 문재인 휘하 검찰총장으로서도 기죽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국회의원 수도 5명이 더 늘어난 대한민국 국민의 대통령 윤석열은 그 나름의 능력을 발휘해 이순신 장군의 사즉생(死卽生) 각오로 헤쳐나가리라 믿고 믿음의 사람들은 기도해야 할 것이다. 주님 그리워 기도하는 새벽 벚꽃 피네 벚나무는 아련한 추억처럼 꽃잎을 흩날리며 아득하게 진다. 건축의 기본 단위는 건물이다. 건물을 쪼개면 방들로 나눠지고 방을 쪼개면 가구들로 나눠진다. 반대로 건물이 모이면 거리가 되고 거리가 모이면 동네가 되고 동네가 모이면 도시가 되고 도시가 모이면 국가가 되고 국가가 모이면 세계가 된다. 훌륭한 건축가는 다양한 크기의 스케일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면서 사고하는 사람이다. 여러 가지 스케일에서 검토해야 좋은 의사 결정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건물을 설계할 때도 크게는 도시를, 작게는 가구를 동시에 생각해서 디자인 의사 결정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르코르뷔지에, 노먼 포스터 같은 훌륭한 건축가는 건물 디자인뿐 아니라 의자 디자인부터 도시 설계까지 했다. 의사 결정은 가치관이 결정한다. 가치관은 상대적이고 항상 변한다. 가치관을 바꾸는 기준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 하나는 공간이다. 고려하는 ‘공간의 크기’가 가치관을 결정한다. 예를 들어서 군부대에서 상관이 강압적인 명령을 내렸다고 하자. 인권 등을 고려해서 명령을 내린 상관이 징계를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배경을 극동아시아로 넓혀 보니 전쟁 중이라면 전쟁에서 이기기 위한 불가피한 명령으로 정당성을 가질 수도 있다. 이처럼 우리 판단의 기준이 되는 공간의 크기에 따라서 가치관의 우선순위가 달라지기도 한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얼마 안 된 해방 후에는 국제 정세가 어지러운 시대였다. 이때는 여러 국가 간 지정학적 공간 스케일이 가장 중요한 판단 기준이었다. 자유 진영에 자리를 잡는 것이 가장 중요한 시대였고 우리나라는 올바른 선택을 했다. 신앙을 가진 이승만 대통령은 개인이 토지를 소유할 수 있는 시대를 만들어서 자유민주주의의 공간적 초석을 놓았다. 1970년대에는 경제 발전이 필요한 시대였다. 산업화를 하였고 아파트를 지어서 고밀화된 도시 공간을 만들고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했다. 90년대에 가장 큰 변화는 베를린 장벽과 소련의 붕괴다. 냉전 시대가 끝나고 지정학적 긴장감이 사라지니 민주화의 속도를 높일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지금은 시대의 기류가 바뀌어 미·중 신냉전의 시대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시작으로 세계는 본격적으로 양분화되는 중이다. 중국, 러시아를 중심으로 한 세계와 그 외 자유민주주의 진영이라는 새로운 냉전 구도가 구축되고 있다. 이런 시대가 되면 지리적 위치가 국가의 정치와 국제 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지정학의 중요성이 높아진다. 미·중 갈등의 최전선은 중동이 아니라 한반도다. 우리의 의사 결정 가치관의 기준은 작은 국내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건축에 비유하자면 건물 디자인을 결정할 때 가구가 아니라 도시적 스케일에서 의사 결정이 되어야 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아직도 지난 시대의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국민이 많고 이를 악용하는 모사꾼을 감옥에 보낸 허활민 목사보다 못한 이재명이나 조국 같은 정치가들이 많다. 지금은 50년대 건국의 시대도 아니고 70년대 경제 발전의 시대도 아니고 90년대 민주화의 시대도 아니다. 지금은 새로운 지정학의 시대다. 50년대와 비슷한 위기의 지정학적 시대에 인공지능의 변화까지 덮친 시대다. 우리나라의 경우 인구의 노령화까지 겹쳐서 변화에 대응하기 더 어려운 상황이다. 국내라는 좁은 공간적 시각에 갇혀 생각하면 구한말 때 우리 조상이 한 실수를 똑같이 반복하게 될 것이다. 일본은 유럽에 도자기를 팔았던 나라로 바닷길로 해상무역을 했던 나라였기에 더 넓은 공간을 보았고 우리보다 앞서 메이지 유신을 했다. 우리는 한반도에 시선이 머물러서 당파 싸움만 하다 나라를 잃었다. 바다라는 더 큰 공간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계속해서 사고 속 공간을 확장시켜 나가야 한다. 90년대 우리는 어느 나라보다도 빨리 초고속 인터넷망을 통해서 가상공간으로 사고의 공간을 확장했다. 경제학자 찰스 굿하트의 분석에 따르면 1988년부터 2018년까지 일본의 경제 성장률은 전체 인구를 고려했을 때는 주요 국가 대비 최저 수준이지만 노동인구(20~64세) 1인당 연간 평균 경제 성장률은 오히려 미국, 영국, 프랑스를 앞서는 수준이다. 이는 고령층이 적극적으로 사회 참여를 지속하고 있음을 방증한다. 실제로 지난 20년간 일본은 고령층이 꾸준히 일할 수 있는 사회를 추구함과 동시에 후기 고령자(75세 이상)의 신체, 인지 기능 보존을 위한 지역사회의 돌봄 예방 체계를 구축하고 돌봄 요구의 발생을 예방하기 위해 의료-복지를 연계하는 등의 노력을 지속해 왔다. 싱가포르는 일본의 개념에서 더 나아가서 나라 전체를 아예 느리게 나이 들게 만들겠다는 의지를 통해 세계 여섯 번째의 ‘블루존(세계 최고의 장수마을)’ 목록에 추가되기도 했다. 자연적으로 형성된 기존 블루존들에 비해 싱가포르는 정책에 기반한 블루존 2.0의 개념을 도입했다. 사람들이 도시를 걷고 건강하게 식사하도록 장려하고 자동차 보유, 음주, 흡연에는 높은 세금을 매긴다. 노인 의학적 개념을 기저에 둔 연령 친화적인 의료 시스템을 통해 병원이 질병을 치료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질병과 노쇠를 예방할 수 있도록 한다. 나아가 노쇠가 이미 발생한 상황, 즉 내재 역량이 감퇴하는 상황에서도 지역사회에서 공동체 생활을 유지할 수 있도록 지역사회 시스템을 형성한다. 한국의 일하는 고령층 비율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1위다. 노년 빈곤을 원인으로 꼽지만, 통계청의 2023년 고령자 통계에 따르면 일하는 노인은 자신의 건강 상태가 좋다고 생각하며 일상생활에서 스트레스도 비교적 덜 느꼈다. 더 건강한 이들이 일을 지속할 가능성도 높지만, 일이 신체, 인지, 사회적 자극을 유지할 수 있어 내재 역량 유지의 선순환을 만들어 주는 효과가 있기도 하다. 지금 갓 65세를 넘고 있는 분들은 이전 세대보다 더욱 건강하고 부유하고 잘 교육받았다. 이들이 앞으로도 내재 역량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은 정책의 역할이다. 앞으로 한 나라의 실력은 그 나라 사람들의 나이 드는 모습을 통해 드러날 것이다. 어두운 미래는 확정적이지 않다. 우리의 미래는 우리가 만드는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예언자적 안목을 지니고 있었다. 일본은 미국에 반드시 패한다고 예측하였다. 미국이 주도하는 신국제질서에 신생국인 한국이 따라가야 한다고 보았다. 미국은 군사력 국가이고 경제부국인 데다가 기독교 서구 문명의 중심 국가라고 간파했던 것이다. 미국의 실체를 하나님의 은혜로 요셉처럼 100년 전에 정확하게 파악했던 셈이다. 이승만 대통령 버금가는 전략가는 독일의 비스마르크, 영국의 처칠이다. 철혈재상(鐵血宰相) 비스마르크의 철(鐵)은 군사력이고, 혈(血)은 국민정신이다. 철혈이 없는 나라는 죽도 밥도 안 되고 강대국의 먹잇감이 된다. 처칠이 말했다고 한다. "소련에 평화를 호소하는 것은 악어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것과 같다." 그렇듯 감옥을 눈앞에 두고도 으스대는 이재명과 조국에게 소크라테스가 중요하게 여긴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을 한다는 건 처칠의 말과 같이 될 것이다. 성경은 말씀한다. 무릇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라 눅 17:33 2024-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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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1
  • 소강석 목사의 날개
    이제 거리 어디에도 시계란 없다. 심지어 서울역에도. 왜? 아무도 시계를 쳐다보지 않기 때문이다. '만들어진 신'(The God Delusion, 신이라는 망상)의 대표적 무신론 작자 리처드 도킨스(Clinton Richard Dawkins, 1941년 3월 26일~ )가 아직 살아 말한다. 비행하는 동물은 왜 나를까. 목적은 적자생존이며 목표는 유전자의 생존이다. 더 잘 날아 먹이를 잘 잡는 새나 박쥐가 후손을 잇고 더 잘 날아 포식자를 잘 피하는 곤충이 자손을 남긴다. 먼저 날기 시작한 것은 곤충이었다. 척추동물보다 2억 년이나 앞선 3억 년 전부터 날기 시작했다. 가볍기 때문이다. 무게에 비해 표면적이 넓을수록 나는 데 유리하다. 몸 크기(길이)가 두 배가 되면 표면적은 네 배, 무게는 8배다. 크기가 열 배가 되면 표면적은 100배, 무게는 1000배가 된다. 어쩌다 날게 되었을까. 포식자를 피하며 몸 일부를 펼치다 붕 떠서 적을 뿌리칠 수 있었고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날개가 생겼을 것이라고 저자는 해석한다. 초기 단계는 날다람쥐 같은 ‘활강’이었지만 이윽고 자신의 힘으로 날아오르는 ‘동력 비행’이 가능해졌다. 동물의 비행과 인간의 비행은 실제 비슷한 방향으로 ‘진화’했다. 맹금류가 먹이를 향해 내리꽂는 광경은 급강하 폭격기를 보는 듯하다. 벌새는 날개를 위로 칠 때 완전히 뒤집어 정지 비행을 할 수 있다. 마치 헬리콥터나 드론을 연상시킨다. 그렇지만 동물과 인간이 만든 기계의 비행에는 차이가 있다. 비행기나 헬기, 드론은 날개를 칠 수 없다. 엔진으로 추력을 얻고 날개로 양력을 얻는 비행기의 원리는 새나 박쥐, 곤충이 날개를 치는 것과 완전히 다르다. 새가 날개를 치면 몸을 앞으로 밀어내면서 공기를 아래로 밀어내 날아오를 수 있지만 그 역학은 비행기의 동작보다 훨씬 분석하기 어렵다. 그는 비행을 넘어 지구 밖을 향하는 인간의 꿈을 격려한다. 원하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이곳을 떠나야만 할 가능성에 대비하기 시작할 때라고 도킨스는 말한다. 분야는 다르지만 과학 대중화에 일생을 바친 천문학자 칼 세이건을 떠올리게 한다. “나는 과학 자체를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는 영웅적인 비행이라고 여긴다. 이제 날개를 활짝 펼치고 과학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갈지 지켜보자.” 그렇듯 2005년 7월 3일 소강석 목사는 그렇게도 기다리던 약속의 성전 프라미스 콤플렉스에서 날개를 활짝 펼치고 하늘로 날기 위해 첫 예배를 드리는 날이었다. 그런데 아침부터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소강석 목사는 비가 내리는 창문가에서 흐린 하늘을 보며 하나님께 기도했다. "주여, 새에덴의 성도들 한 사람도 빠짐없이 함께 감격적인 첫 예배를 드리게 하소서..." 그리고 첫 날부터 프라미스 콤플렉스를 향해 들어오는 예배자들 우산의 물결로 장엄한 광경을 이루었다. 몸에 묻은 빗물을 털면서도 성도들의 얼굴은 감격과 환희로 가득했고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약속의 성취를 기뻐하며 환호했다. 첫 예배를 드린 프라미스 콤플렉스의 비전홀은 성도들의 눈물과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했다. 시인 소강석 목사는 2023년 12월 4일 '너라는 계절이 내게 왔다'라는 시집을 내고 하나님의 은혜를 이렇게 노래했다. 문득 가을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고 나뭇잎들이 허공 위로 날아가다 나의 발 앞에 떨어졌을 때 그건 나뭇잎이 아니라 편지였다 쓰고 싶은 시였다 불 꺼진 창문 아래서 혼자 부르고 싶은 노래였다 눈을 감아도 보이고 귀를 막아도 들리고 숨을 참아도 부르게 되는 사랑이었다 시인 소강석 목사의 날개는 하나님의 사랑이었다. 성경은 말씀한다.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네째 날이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들은 생물로 번성케 하라 땅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하나님이 큰 물고기와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창 1:19-21 2024-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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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05
  • 윤희원의 선거 변혁 제안
    사람이라면 누구나 속한 곳에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있다. '사람 구실, 아비 구실, 맏형 구실, 며느리 구실'과 같은 말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런 일을 수행하는 것은 지위나 형편에 관계가 없다. 여기서 '구실'이란 자기가 마땅히 해야 할 맡은 바 책임을 이르기 때문이다. 원래 구실은 공적인 의무를 이르던 말이다. 옛말에서는 온갖 세납을 통틀어 말했다. 그래서 '구실을 바치다, 구실을 물다'와 같은 말이 남아 있다. 구실은 어쩌다가 이처럼 강한 의무감을 띠게 되었을까. 구실의 원말은 '그위실'인데 관아 즉 대치동 총회 같은 공공기관을 이르는 우리말이다. 관아에서 맡긴 공적인 업무가 마땅히 있을 테니 그 말이 오늘날에 이어진 셈이다. 이 총회 상비부 임원 같은 구실보다 높은 직이 총회 임원 같은 벼슬이다. ‘벼슬’은 관아에 나가서 나랏일을 맡아 다스리는 자리를 뜻한다. 벼슬이라 하면 우선 ‘높은 벼슬과 후한 봉록’과 같은 예시가 먼저 떠오른다. '벼슬을 지내다', '벼슬 한 자리를 하다'와 같은 말에서 벼슬하는 이의 영광스러움을 어떻게 딴 자리인데 하며 배광식이나 고광석 같은 이는 느낄 것이다. 오늘날 말로 보면 구실과 벼슬은 곧 직무와 직위이다. 물론 직위가 없어도 직무를 잘 수행하는 사람들도 있다. 한 가정의 구석구석을 살피며 빈자리를 채워내는 이름 없는 어머니들이 그러하고 한 사회의 여기저기에서 빛과 소금의 봉사 활동을 하며 기여 하는 많은 분들도 이러한 유형에 속한다. 그러나 자아를 성취하고 올바른 수행 통로를 부여하기 위해서는 직무에 맞는 직위를 부여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다. 그래서 제구실을 한다는 말이 생겨난 것이다. 구실의 다른 말로 ‘임무’나 ‘역할’은 물론 ‘제값’이라는 멋진 표현도 있다. 세상에 존재하는 한 사람으로서 자신의 위치에서 일을 훌륭히 수행하는 이를 제값을 한다고 한다. 이와 달리 ‘종노릇, 총대 노릇’처럼 그 직업과 직책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 ‘노릇’이다. 흥미롭게도 사전에는 ‘선생 노릇, 관리 노릇’ 등도 나온다. 선생, 관리라는 직업과 연결할 때 언뜻 보면 어울리지 않는 말인데 이런 표현이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목사와 장로들 모임의 총회 관행과 달리 속담에 "벼슬이 높을수록 뜻은 낮추랬다"라고 한다. 직위가 높을수록 겸손해야 한다는 말이다. 관리가 관리자로서의 구실을 충실히 한다면 어떤 벼슬보다 더 잘 모실 것이나, 관리 구실을 못한다면 "관리 노릇한다"라고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문재인 나부랭이 좌파와 달리 직위보다 직무를 더 충실히 앞세운다면 노릇으로 폄하 받는 일은 없을 것이다. 오늘 총회 임원과 상비부 임원들은 총회 안에 서 있는 자리에서 벼슬이 아닌 구실로 일을 잘 맡아 하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그래야 목사와 장로 같은 직분을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는(고전 4:2) 말씀의 총회 목사와 장로들이 아니겠는가. 108년 역사의 총회 민주주의의 핵심 기제로 △권력의 견제와 균형 △법치 △소수의견과 절차의 존중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런데 숙의민주주의와 소수의견 및 교회 전통 존중이라는 불문율이 총회 역사상 이처럼 절실한 시절은 없었던 것 같다. 나토 당국자가 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나려면 수년 걸릴 것이라고 말했다 그 전쟁이 터지기 6일 전 2022년 2월 18일 주간 기독신문에 총총 출신의 총회 최고 지성 윤희원 목사는 총회 선거 부정의 실태를 점잖게 밝히는 "지지의 긍정성을 부정성으로"라는 제하의 논단을 실었다. 금권으로 총회장이 되는 현실을 다음과 같이 점잖게 지적한다. 총회의 선거는 내가 보기에는 정치의 장을 떠나 자본이라는 돈의 공간으로 옮겨갔다. 그래서 선거는 가시성에서 비가시성으로, 투명성에서 불투명성으로, 공정성에서 차등성으로, 부정적인 면을 드러내게 되었다. 이러한 선거가 된 것은 선관위가 선거 규정을 적용하고 운영하며 선거를 관리하는 데서 비롯되었다고 보여진다. 본래 선거 규정이란 모임의 대표자나 임원을 공명정대하게 선거를 통해 선출하기 위해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그 규정에 의해서 경쟁하게 하고 더욱이 선거전(戰)이 과열되지 않도록 또 소모적인 마타도어에 휩쓸려가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선거 규정은 상보적이고 그 규정을 운용하는 선관 위원은 중개 적이어야 한다. 더욱이 총회의 선관 위원은 정치적 중개를 넘어서서 개혁신학과 신앙에 걸맞는 중개를 해야 한다. 즉 어느 후보가 더 개혁신앙과 신학의 정체성이 분명한가를 선거운동을 통해서 드러낼 수 있도록 해 총대들이 선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유감스럽게도 지금까지의 선관위와 선거 규정은 그렇지 못했다. 제107회 선거를 관리하는 선관위가 제106회 선거 규정을 고치지 아니하고 그대로 사용하여 시행한다고 하니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 격이 된다. 왜냐면 제106회 총회처럼 부정선거가 된 선거는 없었다. 총회는 선거가 끝나자마자 부정투표에 휘말렸고 사실상 비상사태가 되었다. 후보자끼리 선거관리 규정에 의해 각서하고 공증까지 했어도 그 선거의 과정이 공정하지 않고 투명하지도 않은 부정선거가 이루어졌는데 공증한 각서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더욱이 선관위는 검표하면 비밀투표한 것이 드러나 선관위 스스로는 할 수 없고 형사 고발을 해서 사법적으로만 할 수 있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그 사이에 장자 교단이라는 시스템을 작동해 어느 유능한 인물이 이 비상사태를 정상상태로 만들어 버렸다. 이런 점에서 나는 개인적으로 솔직히 선거 규정을 바꾸기를 원했다. 다른 것은 몰라도 한번 투표의 방법을 비밀투표가 표로 아닌 공개투표로 바꾸었으면 했다. 왜냐면 비밀투표로 하게 되니 후보자에 대한 지지 긍정성이 과잉 생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찾아와서 만나면 그 면전에서 “나는 당신을 지지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할 수 없어 지지하는 척하고 명목상 주는 여비를 받는다. 만일 공개투표로 바꾸게 되면 이 지지 긍정성이 사라지고 부정성이 드러나서 후보자도 만나보았자 날 지지하지도 않을 사람이니 만나지 말고 여비도 주지 말자고 할 것이다. 당연히 유권자인 총대들은 이제 한 표 가지고 두 사람 아닌 후보자 모두를 지지할 수 없으니 아주 조심할 것이다. 그리고 잘못되면 받은 여비 내놓으라는 소송 아닌 소송에 휘말리게 되니 후보자들에 대한 지지 긍정성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이렇게 투표의 방법을 바꾸면 종전에 시행했던 제비뽑기 방식의 선거보다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투표의 방식을 이렇게 공개투표로 전환하면 후보들 스스로가 총대들의 지지 긍정성에 현혹되지 아니할 것이다. 지금의 선거 규정은 너무 부정적인 요소가 강하다. 온통 배제와 금지를 규정하고 후보자로서 활동을 못 하게 한다. 그래서 후보자들 스스로가 그 규정 안에서 담합 하거나 아니면 이의제기 또는 고소 고발로 상대를 떨어지게 하려는 비정치적인 행위를 한다. 결국은 자본을 많이 소비한 쪽이 승리하는 경제 행위가 되어 버렸다. 한번 바꾸어 보자. 투표의 방법을 공개투표로 바꾸면 굳이 지금과 같은 선거를 치러야 할 필요성도 사라지고 총회진행 시간도 매우 단축될 것이다. 지금 우리는 선거라는 정치적 행위를 통해 개혁신학과 신앙의 위계를 상황적으로 계승시키지 못하고 위기 적 상황만 고조시키고 있다. 이런 점에서 총대들의 정치적 행위가 되는 선거의 방법을 고쳐야 한다. 그래야 탈 정치 화 되고 탈 신앙 화 되고 탈 신학 화 된 선거문화를 바꿀 수 있다. 아쉽게도 이번 총회가 선거 규정을 바꾸지 않고 선거를 치른다고 하니 걱정이 된다. 걱정이 우려로 끝나면 좋겠지만 기대가 되어 버리면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꼴이 되어 버릴 것이다. 우리 총회의 개혁은 먼저 선거의 변혁을 통해서 이루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선관위와 선거 규정은 참으로 중요하다. 왜냐면 선한 양심을 총대 모두에게 지켜가게 하기 때문이다. 바꾸자. 먼저 우리의 마음을, 그리고 지키자. 선거 속에서 신앙과 신학을. 성경은 말씀한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딤전 6:10 2024-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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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05
  • 의사 파업과 총회 선거
    구름이 발 아래 머물더니 3월 하늘이 폭설을 쏟아낸다. 가난한 신학생 시절 1970년대 사당동 골짜기엔 태곳적 침묵이 쌓여갔다. 현관의 유리창 밖을 보고 서 있었다. 고요 속에 장엄한 살아있는 천지가 압도해 들어온다. 관입실재(觀入實在)! 마음의 눈으로 실재를 대면하는 순간순간이 이어진다. 만유의 주 하나님께서 만물을 지으시며 말씀하신 “보시기에 좋았다”라는 감탄이 가슴에서 터졌다. 그 시절 3월에 웬일이냐! 만상이 살아있다는 영광을 이렇게 누리다니! 예수께선 ‘들에 핀 백합을 보라! 솔로몬의 영광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다(마태복음 6:29)’ 말씀하셨다. 그날 사당동 골짜기 미완성의 1동짜리 총신대에서 되뇌었다. “오늘은 눈이 열려 솔로몬의 영광보다 더한 영광을 이 골짜기에서 보게 하시니 감사하나이다!” 예수께선 어린이와 같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하셨다. 동심에 온유와 겸손의 도가 있다. 늘 성경을 읽는다는면 우리의 마음엔 그 진리가 벌써 자리한 것일까. 꽃은 봄의 전령(傳令)이다. 그 꽃을 가리키는 대표적 한자는 화(花)다. 영화(榮華)라는 단어의 각 글자는 꽃이다. 식물 형태가 목본(木本)이냐 초본(草本)이냐에 따라 ‘영’과 ‘화’를 구별할 때도 있지만 분명치는 않다. 두 글자는 어쨌든 식물의 가장 아름다운 부분, 정수(精髓)라는 우러름을 받는다. 그 맥락에서 영(英) 또한 꽃의 지칭이다. 가장 빼어난 사내를 영웅(英雄), 그런 능력의 사람을 영재(英才)로 적는 이유다. 꽃이 피었다 시드는 과정을 영고(榮枯)라 적어 성쇠(盛衰)와 흥망(興亡), 흥폐(興廢) 등의 뜻으로 새긴다. 총회선관위(위원장 권순웅 목사)의 유권해석에 따라 4월에 열리는 이번 봄 노회에서 총회 임원의 경우 총회장은 오직 예수 김종혁 목사(울산노회ㆍ명성교회)가 추대될 것이다. 목사부총회장은 장봉생 목사(서울노회ㆍ서대문교회)가 가장 유력한 후보로 나설 것이다. 장로부총회장은 김영식 장로(군산남노회ㆍ익산서두교회), 김형곤 장로(김제노회ㆍ대창교회), 박석만 장로(서수원노회ㆍ풍성한교회)가 경합할 것이라고 한다. 부서기는 서만종 목사(광주전남노회ㆍ광주단비교회)가 앞선 가운데 이종석 목사(동수원노회ㆍ광교제일교회) 배정환 목사(광주노회ㆍ광주미문교회) 등 두 사람이 뒤쫓을 형국이다. 부회록서기는 안창현 목사(군산남노회ㆍ서광교회)와 최찬용 목사(남수원노회ㆍ대덕교회)가 경쟁할 것이다. 서기는 부서기 임병재 목사(경청노회ㆍ영광교회), 회록서기는 부회록서기 김종철 목사(용천노회ㆍ큰빛교회), 회계는 부회계 이민호 장로(경북노회ㆍ왜관교회)가 정임원으로 올라갈 것이다. 기관장 유력 후보는 교육개발원 이사장 송태근 목사(평양제일노회ㆍ삼일교회, 재임), 기독신문 사장 태준호 장로(전서노회ㆍ태인교회, 재임), 총회세계선교회 이사장 김장교 목사(대경노회ㆍ서성로교회), 기독신문 이사장 장재덕 목사(경동노회ㆍ서문교회) 등이 드러나고 있다. 아카데미상을 휩쓴 영화 ‘오펜하이머’의 주인공인 핵물리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철저한 강의 준비로 유명했다. 버클리 교수 시절엔 영감을 불어넣는 강의에 매료된 학생들이 같은 과목을 두세 번씩 수강 신청했다. 오펜하이머는 다른 교수들이 불성실하게 강의하는 것을 참지 못했다. 강의가 마음에 안 들면 수업 중인 교수를 강의실 밖으로 내쫓은 적도 있다고 한다. 강의에 대한 이런 열정은 교수직을 단순한 지식 전달이 아닌 신의 소명으로 보는 서구 대학의 오랜 전통에서 비롯됐다. ‘교수’라는 뜻의 영어 ‘프로페서(professor)’는 라틴어 pro(앞으로)와 fateri(공표하다)에서 왔다. ‘다중 앞에서 공적인 주제로 말하는 사람’이란 뜻이다. 대학의 시초로 꼽히는 11세기 볼로냐 대학에서 처음 개설한 것은 신학이었다. 교수는 신의 진리를 많은 이에게 전하는 신성한 직업이었던 것이다. 중세 이후 교수는 출신에 관계없이 귀족 대우를 받았다. 오늘날 독일 등 중부 유럽에서 교수들이 누리는 사회적 존경에는 깊은 뿌리가 있다. 우리는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직업에 ‘사’를 붙인다. 공적인 일을 하는 판·검사에겐 ‘일 사(事)’를 쓴다. 변호사·변리사·조종사는 전문 지식을 존중하는 의미로 ‘선비 사(士)’를 쓴다. 그런 전문가 중에 특히 사회에 희생하고 봉사하는 직종엔 ‘남을 가르친다’라는 뜻의 ‘스승 사(師)’를 붙인다. 아픈 이들을 돌보는 도덕적 사명을 수행하는 의사에게 ‘師’를 쓰는 이유다. 대한의사협회에서 정한 의사윤리지침 3조에는 의사의 본분이 이렇게 적혀 있다. "의사는 고귀한 사람의 생명과 건강을 보전하고 증진하는 숭고한 사명의 수행을 삶의 본분으로 삼아…." 의사윤리지침이 정한 소명에 충실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는 의사라면 결국에는 죄책감의 칼날에 양심이 베일 것만 같다. 그 소명에 다가갈수록 환자를 두고 떠난 옛 기억이 그를 괴롭힐 것이다. 그 기억은 '나는 환자의 고귀한 생명을 보전하는 의사'라는 정체성과는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목사(牧師)는 개신교의 성직자이다. 개신교의 예배(禮拜)와 예전(禮典)을 집행하며 신도의 교육과 지도, 비 신도에게 복음을 전해야 할 임무를 갖는다. 역사는 타이밍, 사람, 상황 그리고 우연의 복잡한 얽힘이라고 할 수 있다. 아픈 이들을 돌보는 도덕적 사명을 수행하는 의사가 의대생 숫자 늘린다고 환자가 있는 병원을 떠나 파업을 하는 시대가 됐다. 이런 상황에 우리 목사와 장로는 어떤 삶을 살고 총회를 어떻게 섬겨야 할까. 성경은 말씀한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빌 3:7-14 2024-03-25
    • G.OPIN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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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5
  • 의사와 총선
    영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As Good As It Gets)는 1997년에 만들어진 미국 영화다. 모두가 싫어하는 괴팍한 작가 멜빈(잭 니콜슨)과 병든 아들에 대한 의무로 자기 삶을 포기해온 식당 종업원 캐럴(헬렌 헌트)의 사랑을 다룬 제임스 브룩스 감독의 로맨틱 코미디 영화이다. 1998년 70번째 아카데미상 수상식에서 7개 부문 수상 후보로 올라 남우주연상(잭 니콜슨)과 여우주연상(헬렌 헌트)을 수상하였다. 다른 한편 이 영화는 미국 의료 시스템에 대한 영화이기도 하다. 영화의 줄거리는 이렇다. 멜빈 유달(Melvin Udall: 잭 니콜슨 분)은 강박증 증세가 있는 로맨스 소설 작가이다. 뒤틀리고 냉소적인 성격인 멜빈은 다른 사람들의 삶을 경멸하며 신랄하고 비열한 독설로 그들을 비꼰다. 그의 강박증 역시 유별나다. 길을 걸을 땐 보도블록의 틈을 밟지 않고, 사람들과 부딪히지 않으려고 뒤뚱뒤뚱 거린다. 식당에 가면 언제나 똑같은 테이블에 앉고, 가지고 온 플라스틱 나이프와 포크로 식사를 한다. 그러나 식당의 웨이트리스로 일하는 캐럴 코널리(Carol Connelly: 헬렌 헌트 분)만은 예외이다. 언제나 인내심 있는 태도로 멜빈을 대하는 그녀는 그의 신경질적인 행동을 참고 식사 시중을 들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녀에게도 어려움은 있다. 그녀는 천식으로 괴로워하는 어린 아들이 있지만, 변변한 치료도 못할 정도의 빠듯한 살림을 아이 아빠 없이 혼자 꾸려나가야 한다. 멜빈이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들 중의 하나는 이웃에 사는 동성애자 화가인 사이먼(Simon Bishop: 그레그 키니어 분)이다. 그는 멜빈이 자신의 생활 방식을 싫어하며 또한 그의 작고 귀여운 개 버델도 미워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모든 것은 변한다. 사이먼이 강도들로부터 구타를 당하자 멜빈이 사이먼의 애견 버델을 돌봐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처음에 멜빈은 버델을 싫어하지만, 이 작은 강아지로 인해 멜빈의 얼음 같은 심장은 서서히 녹기 시작한다. 동물과 소통하며 공감 능력을 조금씩 배워나가던 그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온다. 캐럴이 일을 그만뒀다는 것이다. 캐럴의 집까지 찾아간 멜빈은 갑작스러운 호흡 곤란에 오래 시달려온 아들을 돌봐야 하는 캐럴의 딱한 사정을 알게 된다. 캐럴의 아들이 앓던 병은 심각한 게 아니었다. 캐럴이 가입한 의료보험으로는 정상적인 검사를 받을 수 없어 응급실에서 증상만 치료했을 뿐이다. 멜빈 덕분에 캐럴의 아들은 제대로 치료받고 완치됐다. 나쁜 의료 시스템이 한 여성과 아이의 삶을 억누르고 있었던 것이다. 매너리즘에 빠진 사이먼의 작품은 더 이상 팔리지 않는다. 그런데 갑자기 큰 수술을 받게 생겼다. 막대한 의료비를 지불할 능력이 없어서 파산할 지경에 놓인 그는 자신을 쫓아낸 부모를 찾아가 손을 벌릴 수밖에 없다. 멜빈은 출판사 사장을 통해 캐롤의 아들을 치료해주고 캐롤과 함께 차로 사이먼을 고향까지 데려다주기에 이른다. 사이먼은 매우 힘든 상황에 있으면서도 건강한 자아를 가진 캐롤과의 만남, 그리고 그녀와의 자유로운 대화들로 조금씩 치유가 되면서 다시 그림에 대한 열정을 보이고 삶의 의욕을 되찾는다. 강박증이 있고 타인을 배려할 줄 모르던 멜빈은 집이 없어진 사이먼을 자기 집에 머물게 하고, 강아지에게 애정을 줄 줄도 알게 되었고 나아가 캐롤에게는 사랑을 느낀다. 캐롤이 자기의 급성 천식을 앓는 아들 스펜서를 돌보기 위해 브루클린에 있는 자기 집에서 가까운 곳에서 일하기로 했을 때 멜빈의 삶은 변화를 맞는다. 다른 종업원들에 적응할 수 없었던 멜빈은 캐롤이 다시 이곳에서 일하기로 동의하면 아들의 상당한 병원비를 자신이 도와주겠다 한다. 캐롤은 멜빈의 너그러움에 마음이 기울긴 하지만 그래도 그를 의심한다. 사이먼은 폭행 사건을 겪고 재활하는 중 베르델이 멜빈을 더 좋아하고 자신의 뮤즈를 잃어 우울증에 빠진다. 그는 의료보험이 없어서 의료비 청구서 때문에 파산에 이르게 된다. 프랭크는 떨어져 사는 부모님께 볼티모어에 가서 돈을 빌려보라고 한다. 프랭크는 사이먼을 볼티모어까지 데려가기는 바빠서 멜빈이 데리고 가기로 한다. 프랭크는 멜빈에게 900 컨버터블을 타고 다녀오라 빌려준다. 멜빈은 어색함을 덜기 위해서 캐롤에게 같이 가자 초대한다. 캐롤은 마지못해 그 초대를 받아들이고 셋의 관계가 발전한다. 세 사람이 동행한 여행길에서 캐롤은 사이먼에게 예술적 영감을 불러일으키고, 멜빈은 여행에서 돌아온 후 캐롤에게 서툰 몸짓으로 사랑을 고백한다. "당신은 내가 더 나은 남자가 되고 싶도록 하네요." 이런 그의 대사는 이런 변화를 잘 보여주는 명대사였다. 영화 마지막에 가서야 멜빈은 비로소 자신을 꽁꽁 싸매고 있던 껍데기를 벗어던지고 진심을 표현하는 사람으로 변모한다. 캐롤은 캐롤대로 가슴에 뻥 뚫려있던 구멍이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 만남으로서 채워지는 행복감을 맛볼 일만 남았다.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는 사회 고발물이 아니다. 하지만 모든 캐릭터가 미국 의료 체계의 어두운 면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비싼 보험에 가입하지 않으면 인간의 생명에 필수적인 진단과 치료마저 받을 수 없고, 난데없는 사고를 당하면 목숨을 건져도 ‘의료 파산’이 기다리고 있다. ‘이보다 더 나쁠 순 없는’ 의료 시스템의 문제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의대 정원 확대를 둘러싼 갈등을 보며 나는 문득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를 떠올렸다. 물론 한국은 미국과 다르다. 하지만 관객들은 공감할 수 있다. 내 아이가 아픈데 원인을 모르거나 치료받지 못해 발을 구르거나 사고나 범죄의 피해자가 되어 병원 신세를 지게 되는 건 누구에게나 악몽과도 같은 일이기 때문이다. 국민들은 나나 내 아이가 사이먼이나 캐럴, 그 아들 같은 처지가 될까 불안하다. 의대 정원 확대에 국민의 80% 이상이 찬성하는 건 그래서다. 올해 치러지는 2025학년도 입시부터 전국 의과대학 입학 정원이 2000명 늘어난다. 전국 의대 40곳 입학 정원은 3058명에서 5058명으로 65% 증가한다. 교육부는 20일 의과대학 입학 정원을 2000명 늘리고, 경기·인천 지역 대학에 361명(18%)을, 비수도권 대학엔 1639명(82%)을 신규 배정한다고 밝혔다. 서울 지역 의대엔 신규 정원을 배정하지 않았다. 의대 정원 확대가 필수 의료 회복으로 이어지지 않을 수 있다는 설명도 일리가 있어 보인다. 그렇다면 어떻게 현 체제의 한계를 극복할 것인가? 여기서부터 문제가 난삽해진다. 수련의, 전공의, 개업의, 의대, 대학병원 등이 각기 다른 셈법을 굴리고 있는 가운데, 납득할 만한 대안 로드맵 제시는커녕, 그저 ‘일단 정책 철회하라’는 목소리만 울려 퍼지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몇몇 의사들은 미국에서 푸드트럭을 하겠다는 둥, 용접을 배워 이민을 가겠다는 둥, 보는 사람이 더 부끄러운 자기 연민을 공적으로 늘어놓는다. 사람의 목숨을 다루는 것은 숭고하고 힘든 일이다. 그러므로 의사는 용접공을 신세 한탄의 소재로 삼아서는 안 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아픈 용접공의 병상을 지켜야 한다. 고소득 전문직인 의사가 타 직업을 그런 식으로 언급하는 것 자체가 평범한 국민에 대한 조롱으로 들릴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공부 잘하는 학생으로 이루어진 사람들이 왜 이 간단한 이치를 생각하지 못할까.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를 마저 짚어보자. 멜빈의 처지는 여러모로 다르다. 부자고, 독신이며, 심지어 한 다리 건너 의사 친구가 있다. 하지만 잘못된 미국 의료 시스템의 피해자가 아닌 건 아니었다. 멜빈에게 의사는 무신경하게 약만 처방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캐럴을 만나지 못했다면 약물 중독자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다행히 영화는 해피 엔딩으로 끝난다. 잘못된 의료 시스템이 빚어내는 비극 속에서 몹시 삐뚤어진 못된 남자가 공감 능력을 익히며 조금은 괜찮은 사람이 되어간다. 그래서 그는 캐럴에게 말한다. “당신은 내가 더 좋은 남자가 되고 싶게 만들어요.” 믿음으로 사는 우리의 기도가 주님의 은혜로 합력하여 환자를 볼모로 삼은 의사 파업과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인질로 삼은 4월 10일 총선이 좋은 결과를 이루기를 바란다. 성경은 말씀한다.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찌니라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 8:25-28 2024-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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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0

실시간 G.OPINION 기사

  • 2017 안녕 2018
    ‘더굳뉴스’ 주필로서 총신대 수정 정관 제1조 ‘개혁신학’ 옹호 제19조 ‘정년제 폐지’ 총신대 총장 김영우 사상 지지 WCC 신학 기독교만이 참 종교 포기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세주 부인 종교다원주의 신학 1959년 제44회 총회 WCC 찬성 통합교단WCC 반대 합동교단 내일 모레가 신년인데 목사들은 목회 이외의 삶을 부차적인 것이라 여기는 때가 많다. 목회도 삶의 일부일 텐데도 어떤 목사들은 삶을 목회에 통째 바친다. 목회에 전부를 쏟지 못하는 처지에 대해 물론 할 말이 많고 많은 목사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건 다 변명일 뿐이라고 평생 부지런히 설교 준비하다 은퇴 준비를 하는 김희태 목사의 입이 다른 목사의 입을 막을 것이다. 걸음은 더디고 마음은 바쁘지만 그런 말을 듣는 목사는 이 외롭고 고단한 길에서 총신의 돌비처럼 침묵할 것이다. 어서 돌아가 불을 밝히고 밤새워 뭐든 설교 원고를 또 써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기에. 그래서 그는 너무 무겁다. 그는 너무 느리다. 그는 목회가 지나쳤다. 가도 가도 총회 바람이 입을 막는 목회. 연말의 대부분은 총회를 위해 이영수 목사 같은 죽은 자들에 대한 추억에 바쳐진다. 그가 임태득일지라도 죽은 자들은 모두가 겸손하며 그 생애는 이해하기 쉽다. 나 역시 여태껏 수많은 목사들을 허용했지만 때때로 죽은 자들에게 나를 빌려 주고 싶을 때가 있다. 세 번째 개척에 나선 수북한 흰머리가 매력적인 정삼지 목사는 의심할 여지없이 평생 외눈박이 목회자다. 위대한 목사들이란 대부분 비슷한 삶을 살다 갔다. 그들이 선택할 삶은 목회 이외 다른 건 없다. 몇 개의 교회를 방랑하며 청춘을 탕진한 목사는 엎질러진 것이 기도뿐인 옛 교회당에서 멀리 떨어진 강서구의회 건너편 건물에서 전도할 사람을 찾는 중이다. 그는 분명 그 누구보다 인생과 목회의 고통을 잘 이해하겠지만 그 마음에 설교 메모만 바스락거릴 뿐 틀림없이 나에겐 관심이 없다. 그럴 때마다 내 믿음은 까닭 없이 성급해지는 것이다. 연말이 지나가면 그뿐 그 누가 내 기사를 읽겠는가. 나는 분명 감동적인 설교를 늘어놓을 그를 잊고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저녁의 거리로 나간다. 연말의 대치동 행인들은 하나같이 곧 울음을 터뜨릴 것만 같다. 그러면 종종 묻고 싶어진다, 내 으시시한 생애는 얼마나 매력적인가. 이 거추장스러운 마음을 채우기 위해 가엾게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총회 주위를 나는 기웃거렸던가. 그러면 총대들은 말한다. 당신 같은 사람은 너무 많이 읽었다고. 대부분 총회 주변에서 쓸모없는 죽은 자들을 당신이 좀 덜어가 달라고. 총회에 대한 믿음을 잃고 나는 쓴다. 잘 있거라 총회 창밖을 떠돌던 겨울안개 같은 총대들아. 돈밖에 모르던 목사들아 잘 있거라. 설교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소망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사건들아 바룩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기사를 마감하네. 가엾은 내 기사 불 꺼진 총회에 갇혔네. 세계 교회 협의회(普世敎會協會 World Council of Churches, WCC)는 세계적인 에큐메니컬 운동 단체이다. 1948년에 네덜란드의 암스테르담에서 에큐메니컬 운동의 첫 총회를 시작으로 결성되었다. 성공회, 개신교, 동방 정교회, 오리엔트 정교회, 아시리아 동방교회가 회원교단으로 참여하고 있다. 협의회 내에 국제선교협의회, 생활과 실천위원회, 신앙과 직제위원회가 조직되어 있다. 로마 가톨릭교회는 WCC 회원이 아니지만 신앙과 직제위원회에 정식 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이 협의회의 성격을 '성서에 따라 예수께서 하느님이자 구원자이심을 고백하며, 삼위일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교회 공동의 부르심에 응답하는 것'으로 규정한다. 본부는 스위스 제네바에 있다. WCC 가입 문제는 한국의 개신교 최대교파인 장로교회를 두 조각으로 분열시켰다. 한국의 장로교회는 WCC를 로마 가톨릭 교회와의 일치운동이라고 판단하며 반대하는 예장합동과 WCC 가입에 찬성하는 예장통합으로 분열됐다. 한국의 예장 총회는 1956년 9월에 열린 제 41회 총회에서 WCC 문제로 찬성파와 반대파가 크게 대립하자 이 운동을 연구할 에큐메니칼 연구위원 8명을 발족했다. 여기에 선정된 위원은 한경직을 위원장으로 유호준, 안광국, 박형룡, 박병훈, 환은균, 정규오 등 8명이었다. 이들은 다음해 열린 42차 총회에 발표한 첫 보고서에서 단순한 친선과 협조라는 측면에서는 WCC를 지지하지만 교회의 단일화에 대해서는 반대한다는 보고서를 내놓았다. 이즈음 박형룡은 신학지남에 WCC에 반대하는 견해를 발표하였는데 그는 이렇게 주장했다. “WCC는 교리적으로는 혼란한 자유주의 지도하에 움직이며 정책적으로는 세계 단일교회의 구성을 최종 목표로 하는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 그런 고로 복음주의에 입각한 교회의 전통적 신앙을 존중하며 보수하려는 교회와 신도로서는 이 운동에 방심하고 따라갈 수는 없는 것이다.” WCC 신학은 기독교만이 참 종교임을 포기하며 예수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구세주임을 부인하는 종교다원주의 신학을 내포하고 있다. 개혁주의 교회론은 예수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로 하는 하나의 교회를 주장하지만 WCC의 교회론은 머리되는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는 교회의 본질보다 기능적인 차원의 교회론이다. 1959년 제44회 총회에서 WCC를 찬성하는 측은 연동측 반대하는 측은 승동측으로 갈라졌다. 연동측은 WCC에 중립적인 측과 통합했다고 해서 통합 측 교단이 됐고, WCC를 반대한 승동 측은 1951년 분열한 고신측과 합동했다고 해서 합동측 교단이 됐다. 1979년 9월 20일 제64회 총회가 대구동부교회에서 회집됐다. 원래는 대구서현교회로 소집공고 됐으나 총회의 험악한 분위기를 예상하고 장소제공을 거절하자 재공고하여 동부교회에서 회집됐다. 예장합동 교단 내 이 분열을 주류와 비주류의 분열이라 한다. 비주류로 명명된 교단은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개혁측)”으로 분류됐다. 1979년 분열 이후 26년이 지난 후인 2005년 제90회 총회에서 1979년에 분열된 개혁측과 합동측이 합병하는 합동을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합동 이후 광주에 소재한 광신대학교는 합동 총회 내 인준신학교로 광신대학교 신학대학원 학생들 중에 목회자 후보생들은 총신대에서 3주 수업을 거쳐 총회 강도사 고시 응시자격을 부여받는다. 1959년 제44회 총회에서 WCC를 반대한 합동측 교단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기 위해 총장 김영우 목사를 중심으로 2017년 9월 15일 총신대 정관 제1조를 수정했다. 제1조 (목적) 이 법인은 대한민국의 교육이념에 의거하여 고등교육 및 신학교육을 실시하되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이하 "총회"라 한다)의 성경과 개혁신학에 입각한 교의적 지도하에 인류사회와 국가 및 교회 지도자를 양성함을 목적으로 한다. <개정 2017.09.15.> ‘더굳뉴스’의 주필인 나는 ‘성경과 개혁신학에 입각한 교의적 지도하에 인류사회와 국가 및 교회 지도자를 양성함을 목적으로 한다’는 이 총신대 정관 제1조와 제19조 ‘정년제 폐지’를 찬성해 총신대 총장 김영우 목사의 사상을 지지한다. 칼빈의 사상에 근거한 개혁신학만이 우리 사회를 구원하고 발전시키는 신학사상이고 목사 정년제는 소강석 목사가 주창하는 목회생태계 파괴 주범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오직 믿음 2017 안녕 2018. 2017-12-29
    • G.OPINION
    2017-12-29
  • 총장 김영우 리더십
    그는 로린 마젤처럼 악보를 넘기지 않고도 정확하게 총회와 총신을 지휘 제102회 무임승차 총회장 전계헌의 힘공전(空轉)에 있다 제비뽑기와 무임승차 총회장의 총회 정치 위기는 지도력의 시험대 제102회 무임승차 총회장 전계헌의 힘은 공전(空轉)에 있다. 별들로 하여금 지구를 돌게 하고 지구로 하여금 태양을 돌게 하듯 그는 총회 결의를 끌어당기고 부풀리고 무거워지게 해 문득 총회 권위를 떨어트리는 저 무능력의 포만. 총신의 팔다리를 몸에 묶어놓고 총회의 몸을 마음에 묶어놓고 총회 임원회와 상비부와 특별위원회가 그의 곁을 돌게 해 기어코 총회결의를 밀어내게 하는 저 믿음의 포만 그리고 그 허기가 총회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 선거에서 보듯 부패하고 무능한 총회와 개혁주의 총신의 궤도를 제각각 돌게 하고 저는 정작 국내외(國內外) 촘촘하게 약속된 순서 채우기에 바쁘다. 그만 파라 허공(許公) 나올라. 속을 가진 것들은 대체로 어둡다. 소란스레 쏘삭이고 속닥이는 속은 죄다 부패의 소굴이다. 그 소굴에 사는 자들은 속을 가진 것들을 보면 후비고 싶어 한다. 부패하고 무능한 속이 무슨 일을 벌이는지 속을 끓이는지 속을 태우는지 속을 푸는지 속을 썩히는지 속이 있는지 심지어 속이 없는지 후비고도 부패하고 무능해 도무지 그 속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허공(許公)처럼 남의 속을 파는 것들은 대체로 사납고 하나가 아닌 흑심(黑心)의 총회장처럼 제 속을 파는 것들은 대체로 모질다. 어린 시절 홍제동 쪽 인왕산 산기슭 판잣집에 살 때였다. 성탄절 밤 좀 있다 오신다던 목사님은 좀처럼 오시지 않았다. 붉은 벽돌 교회 밖에는 밤새 함박눈이 쌓이고 별은 세상에 마음이 없어 사라지고 눈 시린 교회유리창마다 타닥거리는 톱밥난로의 열기가 퍼지고 있었다. 달빛도 없는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나는 낮에 햇살 따뜻한 담벼락을 기대고 정심이와 놀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싸륵싸륵 눈꽃은 교회창틈에 쌓이고 아이들 모두는 눈꽃의 화음에 맞춰 거룩한 밤을 웅얼거렸다. 자정 넘으면 배고픔도 고요한 밤도 다 눈밭인데 그리웠던 순간들을 상상하며 나는 한줌의 톱밥을 내 유년의 타닥타닥 타는 기억 속에 던져 주었다. 세계적 매니지먼트사인 IMG에서 오케스트라 투어를 담당하는 세계적 오케스트라 공연 매니저해럴드 클락슨 수석 부사장(68)이 지난 12월 6·7일 대구콘서트하우스가 주최한 2017 국제 오케스트라 심포지엄에 발제자로 참여했다. 그가 만난 수많은 지휘자는 각 오케스트라의 리더다. 클락슨은 “지휘자들의 각기 다른 리더십을 보면 ‘좋은 리더십’이란 게 뭔지 단서를 발견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는 “지휘자는 두 가지를 알아야 한다. 자신이 이끄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그리고 언제 지휘하지 않을지다”라고 했다. 그가 본 지휘의 리더십은 이렇다. “어떤 지휘자의 리더십이 기억에 남나.” “로린 마젤(1930~2014)을 들 수 있다. 마젤은 테크닉이 완벽한 지휘자였다. 단원들 얘기를 빌리면 ‘악보가 약간이라도 복잡할 때 마젤은 언제나 거기에 있다’. 조금이라도 어려운 부분에서는 늘 정확한 지시를 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어떻게 가능한가.”“오케스트라 모든 악기의 모든 악보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 ‘악보의 A부분부터 다시 합시다’라는 지시를 하며 동시에 악보를 넘기지 않고도 정확하게 지휘봉을 들었다. 단원들은 그를 존경하고 따를 수밖에 없다.” “지휘자는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단 뜻으로도 들린다.” “반대로 니콜라우스 아르농쿠르(1929~2016)는 기술적으로 완벽한 지휘자는 아니었다. 지휘봉의 놀림이 정확하지 못했다. 나는 아르농쿠르와 그의 오케스트라인 콘첸투스 무지쿠스 빈과 12년 동안 투어 공연을 함께 했다. 그는 언제나, 모든 것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지휘자이지만 축구에 대한 해박한 지식은 놀라울 정도다. 그는 ‘설명하는 지휘자’였다. 단원들에게도 음악에 대한 자신의 이론을 정확하게 설명한다. 그래서 다른 식으로 연주하게끔 만든다.” “지휘자 리더십의 핵심은 무엇인가.” “지휘자는 두 가지를 알아야 한다. 첫째, 내 앞에 있는 연주자들이 누구인가. 둘째, 언제 지휘하지 않을 것인가. 카를로스 클라이버(1930~2004)는 이 둘을 정확히 알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원하는 음악이 나오면 약간의 제스처만 하고 거의 지휘를 하지 않았다. 그래서 빈필 같이 좋은 오케스트라를 지휘할 때는 지휘를 거의 하지 않는다. 하지만 실력이 별로인 오케스트라는 열심히 지휘했다. 앞에 누가 있는지 아는 것이다. 대부분의 젊은 지휘자가 거꾸로 하는 실수를 범하는 부분이다. 그들은 좋은 음악이 나오면 과하게 지휘를 해서 단원들을 짜증나게 만든다.” “경험이 적은 지휘자들은 어떤 식으로 리더십을 가질 수 있나.” “내가 오타와에 있을 때 오케스트라 단원 중 짓궂은 팀파니 주자가 있었다. 객원 지휘자가 오면 언제나 연습 중간에 손을 들고 물었다. ‘마에스트로, A부분에서는 느려지는 겁니까 아닙니까?’ 이 질문의 오답과 정답은 분명하다. 오답은 악보를 뒤적이면서 A부분을 찾아보는 거다. 정답은 ‘거기선 제 지휘를 보세요’ 하고 넘어가는 것이다. 객원 지휘자 중 반 정도가 맞히고 나머지는 틀렸다.” “다른 음악가에 비해 지휘자는 특히 소통 능력이 필수일 듯하다.” “다른 예술 분야와 마찬가지로, 좋은 지휘자가 반드시 좋은 사람일 필요는 없다. 예를 들어 귄터 반트(1912~2002)는 내가 만난 가장 끔찍한 사람이었다. 다른 이들에게 소리를 질렀고 심지어는 자신의 아내에게도 그랬다. 정말 불쾌한 사람이었지만 그가 지휘하는 브루크너를 들어보라. 위대한 지휘자다. 마젤 또한 좋은 사람이지만 따뜻한 사람은 아니었다. 지휘자들이 음악을 만드는 과정은 옳지 않아도 결과적으로 음악이 좋은 경우는 얼마든지 있다.” 정치가의 성취는 리더십의 성공이다. 총회지도력의 핵심 요소는 총대와의 관계 설정이다. 그것이 총회지도력 경영의 기량이다.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의 정치 철학자다. 그의 저서 ‘군주론’(Il Principe)은 권력 경영학의 고전이다. 그 책은 권력과 인간의 본성을 탐구했다. 통치자와 대중의 관계를 해부했다. 마키아벨리는 권력의 평판을 중시했다. 그는 평판을 지도력의 핵심 요소로 삼았다. 평판의 핵심 요소는 설득력이다. 그 바탕은 소통이다. 김영우 목사는 ‘소통의 대가(大家)’이다. 감성의 시대다. 프랑스 군중심리학자 귀스타브 르봉의 말은 강렬하다. “사람을 다스리는 기량은 언어 구사력으로 이루어진다. 군중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기술이 통치술을 아는 것이다.” 역사적 개혁주의를 외치는 김영우 목사는 개혁주의에 반하는 총회 교권주의자들에게는 대항하고 총대들과 전국 교회 목사들과는 개혁신학을 전하고 설득한다. 그러나 대중 심리는 이중적이다. 마키아벨리는 설파한다. “신질서를 만드는 것은 어렵고 성공하기 힘들다. 왜냐하면 구질서의 이득을 본 사람들은 개혁자에게 적대적이다. 반면에 신질서로부터 이익을 누릴 사람들의 지지는 미온적이다... 인간 속성은 확고한 결과를 보기 전에는 개혁을 신뢰하지 않는다. 인간이란 가식적인 위선자이며, 이익에는 열정적이다... 무장하지 않은 사람들은 파멸을 당했다. 인간의 본성은 변덕스럽다. 대중에게 무언가를 설득하기 쉬우나 그들을 설득한 상태로 유지하기는 어렵다... 군주는 대중에게 사랑보다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게 훨씬 안전하다. 하지만 미움은 피해야 한다.” 역사적 개혁주의를 헌신하는 김영우 목사는 얼마 안 있어 이렇게 함께 노래할지도 모른다. ‘나는 하나님을 사랑했고 하나님 다음으로는 성경을 사랑했다.’ 그는 로린 마젤처럼 ‘악보의 A부분부터 다시 합시다’라는 지시를 하며 동시에 악보를 넘기지 않고도 정확하게 지휘봉을 들었듯 총회와 총신을 지휘했다. 제비뽑기와 무임승차 총회장으로 말미암은 총회 정치 위기는 지도력의 시험대다. 그 사이 역사적 개혁주의를 설파하고 그것을 위해 매진해 온 김영우 목사는 드디어 1971년처럼 10여년의 각고(刻苦) 끝에 2017년 총신을 부패와 협잡과 통합 측과 같은 혼합주의 신학에서 지키는 데 성공했다. 김영우 목사는 로린 마젤(1930~2014) 같은 지도자다. 마젤은 테크닉이 완벽한 지휘자였다. 단원들 얘기를 빌리면 ‘악보가 약간이라도 복잡할 때 마젤은 언제나 거기에 있다’고 했다. 조금이라도 어려운 부분에서는 늘 정확한 지시를 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는가. 김영우 목사는 지휘자 로린 마젤처럼 오케스트라의 모든 악기의 모든 악보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알고 있듯 총회와 총신의 모든 문제를 성경에 근거해 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로린 마젤처럼 ‘악보의 A부분부터 다시 합시다’라는 지시를 하며 동시에 악보를 넘기지 않고도 정확하게 지휘봉을 들었듯 성경과 개혁신학의 근거를 가지고 총회에 대응하고 총신을 지휘했다. 마키아벨리는 말했다. “군주는 경멸을 피해야 한다. 경멸받는 것은 변덕스럽고 가볍고 우유부단한 인물로 생각되는 경우다.” 속 빈 총회에는 벌레들이 산다. 그 속에 벗은 몸을 숨기고 깃들인다. 속 빈 총회에는 버섯과 이끼들이 산다. 그 속에 뿌리를 내리고 꽃을 피운다. 속 빈 총회에는 딱따구리들이 산다. 그 속에 부리를 갈고 곤충을 쪼아 먹는다. 속 빈 총회에는 박쥐들이 산다. 그 속에 거꾸로 매달려 잠을 잔다. 속 빈 총회에는 올빼미들이 산다. 그 속에 둥지를 틀고 새끼를 깐다. 속 빈 총회에는 여우가 산다. 그 속에 굴을 파고 집을 짓는다. 속 빈 총회 속 임자 없는 돈을 먹고 속 빈 소리를 듣고 속 빈 교회 분쟁에 편들어 사는 썩은 무리 때문에 속을 앓는다. 따라서 금식기도는 총신이 아니라 총회라는 이름으로 모인 부패하고 무능한 그들을 위해 또는 그들 자신의 흔들리는 교회를 위해 해야 할 것이다. 역사적 개혁주의에 헌신하는 김영우 목사는 얼마 안 있어 이렇게 노래할 것이다. 월터 새비지 랜더(Walter Savage Landor 1775~1864)가 일흔다섯 번째 생일에 쓴 시를. Dying Speech of an Old Philosopher늙은 철학자의 마지막 말 I strove with none;나는 그 누구와도 싸우지 않았노라.for none was worth my strife싸울 만한 가치가 있는 상대가 없었기에.Nature I loved, and next to Nature, Art;자연을 사랑했고, 자연 다음으로는 예술을 나는 사랑했다.I warmed both hands before the fire of life;나는 삶의 불 앞에서 두 손을 쬐었다.It sinks, and I am ready to depart.이제 그 불길 가라앉으니 나 떠날 준비가 되었노라. 그는 ‘Nature I loved, and next to Nature, Art; 나는 자연을 사랑했고 자연 다음으로는 예술을 나는 사랑했다’ 라는 이 대목을 이렇게 바꾸어 노래할 것이다. ‘God I loved and next to God, Chongshin; 나는 하나님을 사랑했고 하나님 다음으로는 총신을 사랑했다.’ 2017-12-17
    • G.OPINION
    2017-12-18
  • 총신 발전 제언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칼빈주의 표어에 따라 개혁주의를 개혁한 총신 총장 김영우 목사의 역사적 개혁주의 성경말씀에 근거 개혁주의 신학과 믿음의 삶역사적 실체로 이루는 개혁주의 사상 교육부 김영우 총장 임기4년(2015. 7. 10.-2019. 7. 9.) 확인김영우 총장 임기 논란 잠재워 겨울 추위 사이로 가지에 가지가 걸릴 때 쭉쭉 뻗은 사당동 솔숲 발치에 앉아 솔나무 꼭대기를 올려다보자니 저 높은 허공(虛空)에 부러진 가지가 땅으로 채 무너지지 못하고 살아 있는 가지에 걸려 있다. 살아 있는 허공(許公) 어깨가 처져 있다. 믿음이 살아 있는 가지들은 서로에게 걸리지 않는데 믿음이 살아 있다는 것은 제멋대로 뻗어도 다른 가지의 길을 막지 않는데 총신 한줄기에서 난 차마 무너지지 못한 믿음과 차마 보내지 못한 소망이 얼마 동안은 한 총회 안에서 그렇게 엉켜 있으리라. 서로가 서로 다른 형제인 채 서로에게 걸려 있으리라. 엉킨 두 이사회가 하나님의 질투처럼 짙다. 가지에 걸린 총회 허공(虛空)의 빈터에 동그랗게 입을 다물고 얼굴 내민 제7대 총장 누가 데려다 놓았을까. 백년 묵은 총회 임원회 가지들이 모인 자리에서 12월 11일 최규돈 처리 문제로 벼랑 끝에 선 남울산노회 강진상이 단호한 표정으로 2억 내지 3억의 총신 장학금 제안을 했다며 운영이사장의 총장 추천 인사를 그 제안을 실행하려는 듯 퇴직금 중간 정산을 한 김형국이 제7대 총신 총장 운영이사회 선출 취임 인사를 결연하게 했어. 대낮의 총신생들이 겨울을 뚫고 총신 행정을 방해하려 뻥이야 맘껏 차버린 오래된 신학교의 전통. 그러나 너무 세게 차지는 마라. 총신의 전통마다 가늠할 수 있는 속도와 높이는 다른 법 그 사이사이가 모두 개혁주의 신학이다. 그 전통을 벗어날 수 없는 맑은 허기가 안에서부터 그리스도의 몸을 먹어치우는 사이 매서운 초겨울까지 날아와 날카로운 부리로 총회에 걸린 총신을 가늠하고 간다. WCC를 배격한 개혁신학 제 집으로 들앉을 셈인가. 비 내리는 초겨울 아침 총회가 외롭게 보이는 대치동 다리 아래 물이 한강으로 흐르고 우리들의 믿음도 흘러간다. 그러나 흐르는 믿음에 이어서 오는 은혜를 나는 또한 기억하고 있다, 성령이시여 오시라 이제는 들리지 않는 교회 종들이여 울려라, 믿음의 시간과 세월은 흘러 나는 여기 총신 언저리에 머문다. 그 어느 측이든 목사와 장로 손에 손을 잡고서 얼굴을 마주 보자. 우리들의 눈물 닦는 소매 밑으로 미끄러운 물결의 영원하신 눈길이 지나갈 때 성령이시여 오시라 이제는 보이지 않는 교회 종들이여 울려라, 세월은 흐르고 나는 여기 총회 앞에 머문다. 대치동 아래 흐르는 탁한 개울처럼 믿음은 흘러간다. 우리의 믿음도 힘찬 한강으로 흘러간다. 기도가 느리듯이 소망이 강렬하듯이 성령이시여 오시라. 이제는 성령의 은혜 내린 보이지 않는 교회 종들이여 울려라, 총회가 탁하게 흘러도 우리는 주님 안에 머물러야 하리라. 날이 가고 세월이 지나면 가버린 시간도 총회 결의도 돌아오지 않고 대치동 다리 아래 선지 동산에서 흘러내린 물만 한강으로 흐른다. 성령이시여 오시라 이제는 말씀으로 깨어난 교회 종들이여 울려라. 믿음은 흐르고 나는 개혁주의 총회와 총신 안에 머문다. 세월은 흐르고 총신 정관 1조의 십계명 돌판 같은 개정으로 나는 그 꿈이 이루어진 현실을 바라본다. 그 꿈의 실상이 총신 개정 정관 1조에 담겨 있다. 제1조 (목적) 이 법인은 대한민국의 교육이념에 의거하여 고등교육 및 신학교육을 실시하되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이하 "총회"라 한다)의 성경과 개혁신학에 입각한 교의적 지도하에 인류사회와 국가 및 교회 지도자를 양성함을 목적으로 한다. <개정 2017.09.15.> 1877년 발족한 '도쿄대학'이 '제국대학'으로 명칭이 변경된 것은 1886년의 일이다. 왜 '제국'대학이었을까. 1886년 제정된 '제국대학령' 제1조에 그 답이 있다. 국가의 수요에 부응하여 학술기예를 교수하고 그 온오(蘊奧·이치가 깊고 오묘함)를 공구(攻究)함을 목적으로 한다. 메이지 유신 이후의 일본. 근대화·산업화를 서두르는 '국가의 수요'에 부응하는 대학 달리 말하자면 개발도상국형 대학 그것이 제국대학이었다. 도쿄에 하나뿐이었던 제국대학은 1939년까지 설립 순으로 교토·도호쿠·규슈·홋카이도·오사카·나고야 등 7개로 확장된다. 일본 사회 전반에 민주주의·자유주의 물결을 불러일으킨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일환으로 1918년 '대학령'이 공포될 때까지 제국대학 이외의 대학은 설립이 허용되지 않았다. 제국대학은 새 시대를 위한 새로운 엘리트 양성 기관이었다. 탈아입구(脫亞入歐) 즉 아시아를 벗어나 서구 유럽으로의 진입을 기치로 삼은 일본은 구미의 최첨단 지식을 갖춘 전문 인력을 필요로 했다. '학생'이라는 칭호는 영광이자 명예였다. 이 시대 법규상 고등학교나 전문학교 소속은 '생도'였고, 대학생만이 '학생'이라 불렸다. 1918년 전까지 게이오·와세다 등 사학(私學)은 '대학'이라 칭하는 걸 허락받았지만 제도상 전문학교였다. '학사'라는 칭호도 제국대 졸업자에게만 인정되었다. 딸 가진 부모들 사이에서 '학사님에게라면 시집보낼까'라는 유행어가 돌 정도로 제국대 졸업생들의 위상은 높았다. 개혁주의는 종교개혁 이후에 발생한 개신교 사상 중 루터교회와 구별되는 칼빈주의를 뜻한다. 즉 칼빈주의(Calvinism) 또는 개혁주의(Reformed Tradition, Reformed Chrisitianity, Reformed Protestantism, Reformed Faith)는 칼빈이 주창한 기독교 사상 및 성경을 따르는 신학사상이다. 그것은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는 칼빈주의 표어에 따라 칼빈주의를 더욱 개혁한 총신 총장 김영우 목사가 틈만 나면 말하는 역사적 개혁주의(歷史的改革主義 Historical Reformed Protestantism)이다. 그것은 성경말씀에 근거하여 개혁주의 교회와 신학과 믿음의 삶을 역사적으로 입증된 실체로 이루는 개혁주의 사상이다. 이제 역사적 개혁주의(歷史的改革主義 Historical Reformed Protestantism)로 개혁된 총신은 새 시대를 위한 새로운 엘리트 양성 기관 제국대학이 탈아입구(脫亞入歐) 즉 아시아를 벗어나 서구 유럽으로의 진입을 기치로 삼은 것처럼 한국을 벗어나 아시아와 세계로 그리고 교단과 국가의 영향에서 벗어나 그 사상을 전하고 심는 전문 목회자와 신학자를 키워내는 학교를 지향해야 할 것이다. 교육부는 재단이사회가 총신대 김영우 총장 임기는 선임한 날로부터 4년(2015. 7. 10.-2019. 7. 9.)으로 확인해 주는 통보를 해 총회와 제7대 총장 김형국을 선출한 운영이사회의 총장 김영우 목사에 대한 임기 논란을 잠재운 모양이다. 세상을 약간 개선하고 싶다면 집중과 결단이 필요하다. 한 분야의 울타리를 벗어나지 않고 한 번에 하나씩 인접 가능성에 새로운 문을 열어주면 된다. 그러나 '감춰진 것을 직관적으로 인식하는 능력'을 갖고 싶다면 원하는 깃발을 더 높이 쳐들어야 할 것이다. 2017-12-13
    • G.OPINION
    2017-12-13
  • 포럼100보다 포럼20
    전계헌 세 개의 블랙홀 말해사탄은 목사님들과 지도자들 돈 여자 권력(명예) 사용 무너뜨려 ‘포럼100’ 교통비 20만원 200명분 배급‘부정청탁 및 금품 수수 금지 법률’ 저촉이 되는지 문의하고 신고해야 교통비 20만원씩 주니 총대들 귀가 더 솔깃하게 ‘포럼100’보다 ‘포럼20’으로 한 해의 끄트머리 어두워지자 길이 오로지 한곳을 향해 질주해 온 이에게 길이 그만 내려서라 한다. 길 끝에서 등불을 찾는 마음의 끝 그 어둠 속에서 믿음의 등불 앞에 가만히 앉아 보라고 한다. 몸속에 말씀의 길을 쌓으며 살아온 사도(使徒) 같은 시간을 돌아보라는 것이다. 그래도 길을 닮아 세상의 물 앞이나 권력의 문 뒤에서 멈칫거린다. 나의 사방은 얼마나 어둡길래 말씀의 등불 이리 환한가. 총회를 떠도는 내 그림자 이토록 낯선가. 등불이 어둠의 그늘로 보이고 내가 총회의 어둠에 가린 빈틈일 때 내 몸의 끝에서 떨어지는 파란 소망 한 가닥. 몸속으로 들어온 주님의 길이 호렙산 가시나무에 붙은 불의 심지를 한 칸 올리며 말한다. 함부로 사도(使徒)의 길을 나서 그 길 너머를 그리워한 죄. 허활민에게 물었다. “포럼100 의미가 뭐요.”그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입을 열었다.“뭐 정책이 100가지 일 수도 있고 발언자가 100명 일 수도 있고...” 김상윤에게 물었다. “포럼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왜 돈을 주는 거요.”“내 돈 내 맘대로 주는데 뭔 상관입니까.” 2017년 3월 27일(월) 출석도 하지 않은 총신 편목 과정 이수에 대한 사법의 정당성을 판결받은 오정현이 건립한 사랑의교회 언약 채플실에서 열린 ‘제1회 포럼100’에서 당시 총회 무임승차 부총회장 전계헌이 고린도전서 10:23-33 본문의 설교 ‘정치의 블랙홀’에서 말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라고 말씀합니다. 먹는 문제로 형제가 시험에 들면 그를 위하여 먹지 말라고 한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 현실적으로 주시는 문제의 해답입니다. 교계 안에 벌어지고 있는 현실정치도 이 말씀대로 모든 것이 다 가능하지만 과연 그것이 유익한지 덕을 세우는 것인지를 생각해야합니다. 그리고 어떤 일이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남을 위한 일이어야 합니다. 이것을 이루지 못할 때 그 정치는 그 자체가 블랙홀입니다. 블랙홀(black hole)은 강력한 중력으로 인해 입자를 비롯한 그 무엇도 빠져나올 수 없는 시공간 영역입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사람의 말이나 글이 아니더라도 선배들에게 많이 듣는 말이 교회지도자인 목사는 ‘돈과 여자와 권력(명예)을 조심하라’는 교훈을 한시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탄은 주님의 종 된 목사님들과 지도자들을 돈과 여자와 권력(명예) 이 세 가지 도구를 사용하여 무너뜨리려는 전략을 펴고 있습니다. 지도자들이 여기에 빠져서는 안 되는 세 개의 블랙홀이 바로 이것들입니다...” 2017년 6월 19일(월) 오전 10시 대전 판암장로교회(홍성현 목사)에서 총회정책 100개 수립을 목표로 하는 제2회 포럼100에서 제99회 대쪽 총회장 백남선 목사가 격려사에서 말했다. “... 자기 욕심이나 채우려는 총회를 누가 원하겠습니까. 구심점이 있어 가지고 그런 사람들이 모여야 일이 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 역사하십니다. 이 모임에는 구심점이 있어 귀한 일을 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저는 기쁜 마음으로 격려를 드립니다. 마가복음 14장에 보면 마리아가 힘껏 매우 값진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옥합을 가지고 와서 그 옥합을 깨뜨리고 예수의 머리에 부었습니다. 예수께서 ‘저가 내게 좋은 일을 하였느니라’ 칭찬하셨습니다. 그러나 가룟 유다는 비난했습니다. 우리가 교회를 섬기든지 총회를 섬기든지 우리의 정성과 재력을 다 바쳐한다고 할지라도 다 박수치는 것은 아닙니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전서 4장에 보면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말씀합니다. 사도 바울은 사람의 평판을 크게 생각하지 않고 흔들림 없이 주의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개혁은 역사적인 사명입니다. 누가 돌을 맞고 욕을 먹으려 하겠습니까. 그럼에도 오늘 이런 일을 주도하는 귀한 일을 하는 분들 또 함께하기 위해서 모인 여러분들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함께 힘을 합해 다윗이 여호와를 힘을 삼았듯이 좋은 일에 하나님을 힘을 삼고 우리 총회를 섬기는 귀한 일꾼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격려를 드립니다.” 정책 총회를 지향하며 총회 총대들 중심의 포럼100 행사가 12월 21일(목) 오전 11시에서 오후 2시까지 계룡시 소재 천문대를 갖춘 나눔의교회(김상윤)에서 제102회 초청 총대 중심으로 정책 총회의 대안을 제시하는 모임을 갖는다는 광고와 기사가 소재열 박사의 신문에 자신의 강연 소식과 함께 났다. 그 사이 100개의 총회 정책을 세우려는 허활민은 2017년 9월 18일 제102회 총회에서 총대영구제명이 됐고 어디에서 나온 것이든 내 돈 내 맘대로 한다는 김상윤은 제102회 총회에서 총회 강도사 고시를 치러야 한다는 결의를 받았다. 2018년 제103회 대구 총회에서는 앞의 두 사람이 어떻게 될지 기대된다. 리폼드뉴스는 아마 제5회 쯤 될 '포럼100'에 관해 다음과 같은 개혁적인 뉴스를 전했다. 아마 '포럼100'측이 제5회 쯤 될 이번 행사를 진행하면서 "종교개혁 500주년을 보내면서 '포럼100'은 정치가 아닌 정책으로 새로워지는 총회'를 위해 한 알의 말알이 되려고 한다"면서 개혁을 위해 필요한 헌신과 희생의 자리에 하나님을 사랑하며 총회를 섬기시는 총대들을 초대한다"고 밝혔다. 이번 '포럼100'에서는 제102회 총회 총대를 초청 대상으로 삼고 있다. 이번 '포럼100'은... 소재열 목사의 ‘종교인 과세에 따른 개 교회의 준비(안)’에 대해서 강의를 한다. 이번 행사는 사전 등록에 의해서만 접수하며, 제102회 총회 총대들만을 그 대상으로 한다. 그리고 주최 측이 참석자 전원에게 교통비(내 기억으로 20만원)를 지급한다. 국민권익위원회가 12월 11일 부정청탁금지법, 일명 '김영란법'의 시행령 개정안을 다시 상정해 음식(3만원)과 경조사비(10만원)의 상한액을 바꾸고 농축수산물 또는 원료·재료의 50% 이상이 농축수산물인 선물의 상한액은 10만원으로 올리는 내용을 가결했다. 이날 의결에 따라 기존의 '식사비 3만원·선물 5만원·경조사비 10만원 상한' 규정은 '식사비 3만원 선물 5만원 경조사비 5만원 상한'으로 바뀌게 된다. 이는 경조사비 상한액 10만원 규정이 공직자 등 청탁금지법 대상자들에 대한 경조사 때 부담을 기존보다 가중시켰다는 지적에 따른 것이다. 또 결혼식·장례식 등에 보내는 화환은 10만원까지 가능하게 했다. 이 역시 화훼업계의 요청을 받아들인 것이다. 특정 경조사에 보내는 부조금과 화환을 합쳐 10만원을 넘지 않아야 한다.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약칭 청탁금지법)은 대한민국에서 부정부패를 방지하기 위해 국민권익위원장이던 김영란의 제안으로 만들어진 법률로, 제안자의 이름을 따서 흔히 '김영란법'이라는 별칭으로 불린다. 공무원이나 공공기관 임직원 그리고 학교 교직원 등이 일정 규모 이상의 (식사대접 3만원 선물 5만원 경조사비 10만원)상당의 금품을 받으면 직무 관련성이 없더라도 처벌하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2012년에 김영란 당시 국민권익위원장이 추진했던 법안을 기초로 제정된 법률로서, 공무원이 직무 관련성이 없는 사람에게 100만원 이상의 금품이나 향응을 받으면 대가성이 없어도 형사처벌을 할 수 있도록 하는 내용의 법이다. 소관부처는 국민권익위원회이다. 법제처가 만든 약칭은 '청탁금지법'인데 다소 오해의 소지가 있다. 이 법률에서 청탁 일반을 금지하는 내용은 없으며 이 법이 규율하고 금지하는 대상은 어디까지나 '부정청탁'이다. 다만 일상 언어생활에서 청탁을 중립적인 의미로 사용되는 경우는 거의 없고 부정한 청탁을 의미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법제처 관계자도 이 이유 때문에 약칭을 이렇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12월 21일(목) 오전 11시에서 오후 2시까지 계룡시 소재 천문대를 갖춘 나눔의교회(김상윤)"에서 총신 정관 1조처럼 개혁을 위해 필요한 헌신과 희생의 자리에 하나님을 사랑하며 총회를 섬기시는 총대들 참석자 전원에게 교통비(내 기억으로 20만원)를 지급한다고 공지했다. 그런데 아주 재미있고 유익한 소재열 박사의 강연은 돈을 내고 듣고 그의 저서를 구입해도 아깝지 않을 정도라고 강력 추천할 수 있다. 그런데 그의 구수한 강연이 공짜인데다 곁들여 점심 식사도 주고 줄만 서면 20만원 든 봉투도 돈 좋아 하는 총대들에게 준다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세상 어디에 이런 행사가 또 있겠는가. 차제에 그 이름을 별 실효도 없고 마음에 와 닿지도 않는 정책이니 뭐니 너스레를 떠는 ‘포럼100’은 안 쓰는 게 좋겠다. 그것보다 차라리 툭 까놓고 솔직히 생활비가 아닌 교통비로 20만원씩 주었고 또 준다고 하니 총대들 귀가 더 솔깃하고 손이 더 따끈하게 ‘포럼20’으로 하는 게 나을 것 같다는 점잖은 제안을 해본다. 그렇지 않으면 국민권익위나 총회 감사부나 총회선거관리위원회에 가서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약칭 청탁금지법)에 돈값이 아니라 꼴값을 하는 ‘포럼100’의 교통비 20만원 200명분 배급이 혹시 저촉이 되지 않는지 문의하고 신고해야겠다. 어디에서 그 많은 돈이 생기는지 몰라도 그리고 아무리 자기 돈 자기 마음대로 쓴다고 해도... 2017-12-12
    • G.OPINION
    2017-12-12
  • 종교개혁 500주년 총신의 미래
    개혁주의는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 성경에 근거해 교회와 신학과 믿음의 삶을 항상 개혁한다는 사상 개혁된 교회 항상 개혁되어야 지상불변의 슬로건 가지고 있어 제102회 전계헌 총회장 출애굽기 3장 9~12절에 근거해종교개혁 500주년 총신의 미래 예언 “현재 총신의 암담한 상황을 보며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되어 모세를 지도자로 세워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나오게 하신 것처럼 하나님이 역사하실 때에 총신의 모든 일들이 풀릴 것” 내가 목사와 교회의 피를 빨아먹고 산다고 한 말에도 허공(許公)은 겁을 먹었어. 무수하게 취소된 말들이 돈으로 내렸어. 돈이 산서노회를 건너뛰었어. 산서노회 허공(許公)이 허공(虛空)을 바라보며 실세로서 상처 입은 허세에 통한(痛恨)의 울음을 터트렸어. 달콤한 것들이 얼마나 짠지 계속 헛물을 들이켜야 했어. 갈증이 돈을 허공(虛空)에 돈을 날렸어. 저 돈을 잃어버리면 안 되는데. 그런데 허공(許公)은 안 되는 데만 기억이 났어. 총회를 모욕했어. 그는 총대로서 잘못했습니다와 미안합니다를 구분하지 못했어. 모르는 걸 아는 것보다 모르지 않는 걸 아는 것이 더 어려웠겠지. 사면이 돈뿐인 총회 재판국과 춤을 추는 동안 붉게 지는 해가 돈처럼 얼마나 아름답고 허무한지를 몰랐어. 삼십 대 초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며 살았다. 오십 대가 되면 일에서 벗어나 오로지 나 자신만을 위해 살겠다. 사십 대가 되었을 때 나는 기획을 수정하였다. 육십 대가 되면 일 따위는 걷어차 버리고 애오라지 먹고 노는 삶에 충실하겠다. 올해 예순이 되었다. 칠십까지 일하고 여생은 꽃이나 뒤적이고 나뭇가지나 희롱하는 바람으로 살아야겠다. 그러니 제대로 될 리가... 사당동이나 대치동에서 눈을 감고 하늘을 올려다보니 사이가 참 좋다. 사당동과 대치동 사이 김영우와 전계헌 사이 허활민과 조영기 사이 총대와 총대 사이 목사와 장로 사이 교회들과 노회들 사이 지는 허세와 뜨는 실세 사이 총회와 총신 사이 그들이 모두 도착해야 할 믿음의 정거장이 있다면 더 좋겠다. 총회는 교단 사람들 얼굴을 죄다 기억하고 있다. 총신이 있던 자리 총회가 있는 자리 나는 총회 밑에서 총신을 올려다보는 얼굴들을 죄다 기억하고 있다. 허공(許公)이 도사린 총회는 가장 깊고 음습하고 무서운 곳이었다. 사람들은 총회를 들여다보며 허공(許公) 얼굴만 바라본 게 아니었다. 야 하고 소리를 질러 본 사람 돈을 건넨 사람 침을 뱉어 본 사람 돌멩이를 슬쩍 던져 본 사람 같이 사는 게 도무지 싫어 총회를 떠날까 생각하던 사람도 있었다. 총회는 목사와 장로들의 젖줄이었고 교회의 눈동자였다. 우리가 총회를 내려다본 게 아니었다. 총회가 우리를 올려다봤다. 물로 씻을 수 없는 우리의 상처와 허위와 치욕과 죄를 총회는 모두 알고 있었다. 기억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총회처럼 회의록을 갖고 있다. 이것과 저것의 간격을 사이라고 한다. 또한 이것과 저것의 관계도 사이다. 간격이든 관계든 둘 다 거리 조정이 필수적이다. 거리 조정에 성공하면 돈이 생기고 실패하면 다툼이 생기고 소송이 걸리고 황공하게도 황공(黃公)에게 칼 맞는 일도 벌어진다. 사이가 파괴되는 것이다. 정거장은 도착하는 지점이지만 새롭게 떠나는 지점이기도 하다. 정거장은 편히 쉬는 곳이 아니다.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은 천리 길 믿음의 여행을 시작하는 곳이다. 이 세상은 빛과 어둠이 교차하고 공존하지만 유독 어둠이 더욱 길고 강하게 느껴지는 것은 무슨 연유인가. 내일은 온다. 그러나 미래는 그냥 오는 것이 아니다. 만들어지는 것이다. 내일을 제대로 만나기 위해 우리는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가. ‘지속가능한 총회의 미래’를 우리 후손들에게 물려주기 위해 우린 어떤 믿음의 자세로 살아갈 것인가. 살아갈 날보다 살아온 시간이 더 많은 우리들은 이러한 질문에 무엇이라고 답해 주며 조언해 줄 것인가. 급격한 기후변화로 위기에 몰린 생태계. 소강석 목사가 동분서주하는 목회 생태계 복원. 포항지역 지진. 중동의 종교 갈등과 전쟁. 총회와 총신 분쟁. 난민들과 지역분쟁 등의 원인은 어디에서 오는가. 결국 사람이 문제다. 사람이 바뀌어야 한다. 보다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경제와 윤리 그리고 환경을 어떻게 조화를 이루며 살아갈 것인가를 함께 고민해야 한다. 이를 위해 정책적인 구현 또한 애쓰고 노력해야 할 부분이다. 인간은 누구나 자신의 삶속에서 완성해야 하는 과업이 있고, 그것을 위해 자신의 모든 노력을 쏟아 부어야 한다. 타인에게 선한 영향력을 줄 수 있는 과업이 답이다. 불필요한 전쟁을 치르고 정권을 바꾼다고 해서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 우리 모두가 스스로 마음과 정신을 바꿔야한다는 이야기다. 보다 나은 세상, 지속 가능한 미래를 위해 우리가 지금까지 살아온 파괴지향적인 역사의 방향과 다르게 행동해야 한다. 우리 모두는 지금 세상 역사가 어느 방향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곳은 종말에 이르는 ‘대재앙’이다. 따라서 우리는 세상의 성향과는 정반대로 행동해야 한다. 500년 전 종교개혁의 시작은 루터(Martin Luther, 1483년 11월 10일~1546년 2월 18일)가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대학교 교회 문에 95개 논제를 붙여 종교 개혁의 시작이 되었다. 그 95개 논제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부패와 면죄부 판매와 같은 잘못을 비판하고 믿음을 통하여 의롭다함을 얻는 이신칭의를 주장하였다. 루터는 칭의를 통한 개인 구원의 새 시대를 열어주었다. 그러나 종교개혁을 이루는 데 필요한 추진 동력을 제공한 것은 칼빈(John Calvin, 1509년 7월 10일 – 1564년 5월 27일)이다. 그의 신학적 전통을 따르는 사상을 칼빈주의 혹은 개혁주의라고 한다. 그는 루터와 츠빙글리가 시작한 종교 개혁을 완성한 인물이다. 그가 1536년 저술한 초판 ‘기독교 강요’(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는 여러 분야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 책에서 칼빈은 개혁교회(Reformed Church)의 시각에서 그 때까지 드러난 기독교 진리를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논술하려고 하였다. 그래서 개혁주의는 종교개혁 이후에 발생한 개신교 사상 중 루터교회와 구별되는 칼빈주의를 뜻한다. 즉 칼빈주의(Calvinism) 또는 개혁주의(Reformed Tradition, Reformed Chrisitianity, Reformed Protestantism, Reformed Faith)는 칼빈이 주창한 기독교 사상 및 성경을 따르는 신학사상이다. 그것은 총신 총장 김영우 목사가 틈만 나면 말하는 역사적으로 입증된 개혁주의(改革主義)이다. 그것은 성경말씀에 근거하여 교회와 신학과 믿음의 삶을 항상 개혁한다는 사상이다. 그래서 개혁주의의 유명한 표어는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는 것이다. ‘칼빈주의’란 말은 칼빈 개인의 사상을 가리키는 말이기는 하나 다만 그 사상이 체계적으로 정리되고 발전하게 된 데에 칼빈이 미친 지대한 영향에서 ‘칼빈주의’란 이름이 연유한다. 칼빈주의가 종교 개혁 당시 개신교 주류의 신학으로 자리 잡아가면서 유럽 각지에 개혁교회(Reformed Church)가 생겼다. 이들 개혁교회를 통해 칼빈주의는 꽃을 피우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개혁교회 전통을 계승하는 교파의 하나로서 칼빈주의를 말할 때에는 개혁주의라는 표현을 쓴다. 칼빈주의는 문화, 경제, 교육, 정치 그리고 복지를 포함한 근대 사회를 형성 하는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스위스의 종교개혁자 츠빙글리(Ulrich Zwingli,1484년 1월 1일 – 1531년 10월 11일)는 말씀을 강조하고 로마가톨릭교회는 성례를 강조하고 재세례파는 성령의 직접적인 조명을 강조한다. 그러나 칼빈주의는 말씀과 성령을 함께 강조한다. 칼빈은 프랑스 출신이지만 주로 스위스 제네바에서 활동하였다. 그와 같은 시대의 사람들 중 루터는 주로 독일에서 사역하고 쯔빙글리는 스위스 취리히에서 활동하였다. 종교개혁의 열풍이 유럽 전역으로 번져가면서 개신교의 신학은 점차 칼빈의 신학 쪽으로 기울었다. 그 결과 루터교가 주류로 뿌리내린 독일 및 스칸디나비아의 몇 곳을 제외하고 칼빈주의가 개신교 신학의 주류로 자리 잡게 된다. 이것이 칼빈주의 역사의 시작이다. 이렇게 하여 유럽에 자리잡은 개신교회가 개혁교회이고 칼빈주의의 영향을 받은 존 낙스가 스코틀랜드에 개혁주의를 전파함으로써 설립된 교회가 장로교이다. 이들 교회의 성장과 더불어 체계화 된 신학 사상 및 그 전통을 개혁주의라고 부른다. 개혁신앙은 여러 국가들에서 다양한 특성을 가지고 16세기에 유럽 곳곳으로 확장되었다. 칼빈주의는 프랑스에서 개신교의 지배적인 형태였다. 투쟁의 기간 후에 칼빈주의자들은 공식적으로 용납되었다. 존 녹스의 지도력 하에 스코틀랜드 교회는 개혁되었고 스코틀랜드에서 국가교회가 되었다. 네덜란드에서는 칼빈주의가 공식적인 국가 교회가 되었다. 이렇게 개혁주의는 칼빈이 신학체계의 전체적인 틀을 만들었고 스위스에서 시작하여 영국을 거쳐 미국을 통하여 1885년 한국에 들어오게 되었다. 1912년 9월 첫 장로교 총회를 열었다. 41년 뒤 1953년 성서비평학 수용문제로 보수적인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와 진보적인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로 분열되었다. 그리고 7년 뒤 1960년 2월 대한 예수교 장로회는 세계교회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 약칭 WCC) 가입에 찬성한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측과 반대한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측으로 갈라졌다. 이제 다시 57년 뒤 종교개혁 500주년이 되는 2017년 11월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측은 총신대 총장 김영우 목사를 중심으로 한 15인 재단이사회(이사장 박재선)의 학교법인 대한예수교장로회 총신대학교 정관 제1조(목적)의 성경과 개혁신학을 앞세운 수정 조항으로 300만 교세 교단 역사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그 수정 정관은 다음과 같다. 제1조 (목적) 이 법인은 대한민국의 교육이념에 의거하여 고등교육 및 신학교육을 실시하되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이하 "총회"라 한다)의 성경과 개혁신학에 입각한 교의적 지도하에 인류사회와 국가 및 교회 지도자를 양성함을 목적으로 한다. <개정 2017.09.15.> 종전의 정관에서 ‘총회의 지도하에’라고 명시한 구절을 ‘총회의 성경과 개혁신학에 입각한 교의적 지도하에’라고 수정 첨가해 ‘신학적으로 개혁주의를 따르며 신구약성경을 신앙과 본분에 대하여 정확 무오한 유일의 법칙으로’ 한다는 합동 교단 보수주의 본래의 정신으로 돌아감과 동시에 그 정신이 모세의 십계명 돌판처럼 영원히 변할 수 없게 학교법인 대한예수교장로회 총신대학교 정관 제1조(목적)에 새겼다. 이에 대해 학교법인 대한예수교장로회 총신대학교에 법적 구속력이 없는 총신운영이사회(이사장 강진상)는 11월 15일 사당캠퍼스 에덴동산에서 이사회를 열어 추운 날씨 속에서도 144명의 운영이사 중 위임 표명한 이사 포함 87명이 김영우 총장과 재단이사들에 대한 압박 수위를 높여 ‘성경과 개혁신학에 입각한 교의적 지도하에’라는 돌판에 새긴 십계명같은 확실한 문구를 애매모호한 안개같은 ‘총회 지도하에’라는 문구로 되돌리기로 결의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늦가을이 빗기는 쌀쌀한 바람을 맞아 웅크린 모습으로 이제 임기 10개월 남은 종교개혁 500년을 지나며 부패하고 무능한 총회를 향해 성경과 칼빈의 개혁사상 깃발을 높이 쳐든 총신의 미래개혁주의는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 성경에 근거하여 교회와 신학과 믿음의 삶을 항상 개혁한다는 사상이고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는 지상불변의 슬로건을 가지고 이제 102회 전계헌 총회장은 종교개혁 500주년 총신의 미래를 예언하듯 출애굽기 3장 9~12절에 근거한 설교를 신문제호 문제로 난감한 교단지가 이렇게 전했다. “현재 총신의 암담한 상황을 보며 이스라엘 민족의 출애굽 역사를 생각해 봅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되어 모세를 지도자로 세우고 이스라엘 민족을 애굽에서 나오게 하신 것처럼 하나님이 역사하실 때에 총신의 모든 일들이 풀릴 것입니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종교개혁 정의를 위한 배경을 살펴본다면 역사적으로 교회와 성직자 중심의 로마가톨릭교회에 반대하여 루터가 성경의 권위와 이신칭의를 근거로 종교개혁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후기의 루터파는 작금의 우리 교단처럼 적극적으로 신학 전반과 삶에 성경적 변화에 전진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종교 개혁의 2세대에 속한 칼빈은 보다 더 성경에 근거하여 철저한 개혁을 강조하였다. 이제 우리는 종교개혁 500주년이 저물어가는 시점에서 총신의 미래를 생각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먼저 부패와 무능에 젖은 총회는 총신 없는 교단이 될 수도 있음을 생각해야 한다. 그 다음 성경과 개혁신학의 기치를 높이 쳐든 총신은 그 정신이 결여된 총회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를 생각해야 한다. 왜냐하면 개혁주의는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 성경에 근거하여 교회와 신학과 믿음의 삶을 항상 개혁한다는 사상이고 개혁된 교회는 항상 개혁되어야 한다(ecclesia reformata semper reformanda)는 지상불변의 슬로건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기사 언제 끝납니까. 안 끝납니까. 끝이 없는 기사입니까. 그런 줄 알았다면 아예 보지 않았을 겁니다. 제가 신청한 게 아니라구요. 그냥 공짜로 보내주니 어쩔 수 없이 자꾸 보게 된 거란 말입니다. 미쳤군요. 공짜로 보내주는 그 사람이 누굽니까. 도대체 이해할 수 없군요. 근데 왜 저만 듣고 앉아 있습니까. 전 이제 총회니 총신이니 지긋지긋합니다. 다른 소식을 듣고 싶다구요. 꼭 듣고 싶은 다른 소식도 있습니다. 김소월 말투처럼 기다리노라면 포럼100처럼 돈 받으며 들을 수나 있습니까. 여기서 성경은 하나님의 정확무오한 말씀이고 개혁신학이 옳다는 소식을 꼭 듣고 싶은데, 들어야 하는데. 목사가 되려면 총신 말고 딴 데는 가지 못하는 게 우리 교단 법입니다. 제발, 이 기사 좀 그치게 해,.. Oh my God Jesus Christ. 좋을수록 끝이 선명해야 한다. 사실은 끝을 알 수 없기에 일정한 기준으로 단락과 공백을 정해놓곤 한다. 그래서 쉬는 시간이 좋고 잠이 좋고 그믐이 좋고 세모가 좋고 헤어짐이 좋고 총회 폐회 소리가 그렇게 좋다. 이런 끝은 0의 발견과도 같다. 십진법에 따르면 0은 끝이자 시작이다. 더하거나 뺄 때는 그대로지만 곱하거나 나누면 제로 0이나 무한대 ∞가 된다. 0처럼 끝은 결말이고 중지이고 모서리다. 허(虛)는 허공(許公)이고 공(空)은 활(活)이니 신(信)이고 생(生)이겠다. 듣고 싶은 기사를 꼭-지금-여기서 듣고 싶은데 신청하지 않은 기사를 끝없이 들어야만 하는 사람들. 지금-여기-이대로-이렇게 살아가는 우리 목사들의 자화상이다. 그래도 허활민이나 최규돈이나 전계헌이나 박무용이나 듣고 싫은 기사가 있어 끔찍한 일이고 그리고 좋은 소식 성경의 복음(福音)이 있어 다행한 일이다. 그것이 종교개혁 500년을 지나며 부패하고 무능한 총회를 향해 성경과 칼빈의 개혁사상 깃발을 높이 쳐든 총신의 미래이다. 2017-11-16
    • G.OPINION
    2017-11-16
  • 총신과 총회 이제 11월
    2017년 9월 15일 총신재단이사회정관 개정 전문 1조 “총회의 지도”를 “총회의 성경과 개혁신학에 입각한 교의적 지도”로 제19조 임원 정년 삭제 비성경적이고 비효율적인 정년제를 없애제20조 임원 ‘개혁신학에 투철한 목사와 장로 선임’ 드골 프랑스를 핵무장 시키듯총장 김영우 목사도 정관 개정으로부패총회와 자유주의 맞설 총신 핵무장 강원도 설악산에 올가을 들어 첫눈이 내려 쌓였다. 지난 3일 밤부터 정상부인 대청봉 등 고지대 일원에 겨울의 시작을 알리는 첫눈이 내려 적설을 기록했다고 한다. 지난해에는 첫눈이 10월 28일에 내렸고 첫 적설은 10월 29일에 기록된 것과 비교할 때 올해는 일주일가량 늦은 것이란다. 주절주절 옛일 돌이켜보면 단풍 좋지만 내 몸의 잎사귀 귀가 단풍 닮아지는 11월은 불안하다. 어디서 무리 지어 멀리 나는 풀무치 소리를 내면서 총신 소문이 자꾸만 번지고 있을 11월.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달력에서 11월은 ‘모든 것이 다 끝난 것은 아닌 달’이다. 11월은 한 해의 끄트머리로 가기 위해 이것저것 준비를 해야 하는 시간이다. 특별한 기념일도 없고 휴가 계획을 짤 일도 없고 무던히 하던 일을 계속해야 하는 달이다. 살갗으로 겨울의 기운이 와 닿는 11월 돌아보면 애당초 설계해 놓았던 일들은 시작도 하지 못했고 야무지게 이루어 놓은 것도 없다. 11월 밤 길거리에 서서 총신대 시절 김영우 목사랑 옛 서울역 근처 구루마 좌판의 데친 오징어를 초장에 찍어 먹던 일을 떠올린다. 그때는 야만의 시절이었다. 사람이 사람을 감시하고 사람이 사람을 분류하던 때였다. 처절하게 회개할 줄 아는 가해자가 없었다. 그래도 교인들은 울고불고 나라를 위해 기도원과 교회에서 기도했다. 그동안 우리는 속죄하지 않고도 거들먹거리며 살아온 여전히 야만적인 허공(許公)같은 이들을 너무 많이 목격하였다. 그러나 우린 몰랐다. 총회와 총신을 사이에 두고 이런 모습으로 서로 만날 줄은. 허공(許公)은 얼마 전 칠순 맞이를 가족과 해야 한다며 허공(虛空)을 날아 미국으로 갔다. 그도 문찬수 목사처럼 실제 나이는 70이 넘은 모양이다. 나잇값을 해라. 나이 헛먹었나. 그런 말이 있다. 나잇값이 헐값이 아니라는 얘기다. 참 비싼 대가를 치르며 우리는 나이를 먹었다. 그걸 돈으로 환산하거나 권력으로 대체하거나 명예로 계산할 수는 없다. 나이는 나이대로 상당한 값이 나가는 건 총회 70정년이 있건 없건 동서고금의 진리다. 함부로 대하다간 큰 코 다친다. 어떤 경우에도 나이가 많은 것은 적은 것보다는 값이 더 나간다. 깎는다고 깎여지지도 않을뿐더러 함부로 값을 매기려고 하거나 헐값에 넘기려고 해서도 안 된다. 어떤 값보다도 귀한 대접을 받아야 하는 것이니 늘 소중하게 지니고 살다가 세상 떠나 허공(許公)과 함께 허공(虛空)으로 날아가는 노잣돈으로 삼아야 한다. 어떤 이는 공부하러 학교로 가고 어떤 이는 놀기 위해 학교로 간다. 공부와 놀이 사이에서 사람은 늙는다. 우리 세칭 총신 출신 개혁주의자들은 교회와 총회 사이에서 늙는다. 집이라는 매우 안정된 공간에 갇히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아직은 안보다는 바깥에 머무르고 싶다는 것, 즉 끄떡없다는 뜻이다. 이런 나잇값을 하는 총대 어르신들이 많아야 한다. 한 점 해봐. 형님. 고등어회는 여기가 아니고는 못 먹어. 산 놈도 썩거든. 퍼덩퍼덩 살아 있어도 썩는 게 고등어야. 그게 살이 깊어 그래, 사람도 그래. 두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어도 허공(許公)처럼 썩는 게 사람이야. 나도 내 살 썩는 냄새에 미쳐. 형님. 양말 속 내 발가락 냄새에 미쳐. 그 냄샐 잊으려고 남의 살에 살을 섞어도 봤어. 돈처럼 이 살 저 살 냄새만 맡아도 살 것 같던 살이 냄새만 맡아도 돌 것 같은 살이 되는 건 금세 금방이더라. 온 김에 맛이나 한번 봐. 지금 딱 한철이야. 형님. 지금 아님 평생 먹기 힘들어. 왜 그러고 섰어. 형님. 여태 여기저기 교회 설탕만 먹고 살았어. 우리의 인생이 자주 꼬이는 이유는 '질투'와 '열등감' 때문이다. 이 둘은 동전의 양면이다. 질투가 외부를 향한다면 열등감은 내부를 향해 있다. '열등감'을 인간 행동의 중요한 설명 기제로 끌어들인 사람은 알프레드 아들러(Alfred Adler)다. 성적 욕망의 좌절과 억압으로 일관하여 설명하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 반기를 들며 내세운 개념이다. 프로이트의 '콤플렉스'와 아들러의 '열등감'은 지난 백 년간 대립해왔다. 우리나라에서 수백만 부가 팔린 '미움받을 용기'는 바로 아들러의 이론을 대중적으로 해설한 책이다. 느닷없는 '아들러 열풍'은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그만큼 열등감으로 힘들어한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열등감을 생략하고 오늘날 한국인의 집단 심리를 이해하기는 어렵다는 뜻이기도 하다. 흥미롭게도 프로이트나 아들러 모두 '유대인'이라는 열등감에 시달렸다. 총회 내의 어디 신학교 출신이라는 유치한 열등감과는 비교할 수 없는 고통이다. 매일같이 경험하는 인종차별로 인한 뿌리 깊은 열등감의 상처를 유대인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해결했다. 우선 독일인보다 더 철저한 '독일인'이 되는 방식이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독가스를 개발한 유대계 독일인 프리츠 하버(Fritz Haber) 같은 이다. 암모니아 합성비료를 발명한 그는 자신의 발명품이 독가스로 사용되는 것에 적극 동조했다. 그의 아내는 이를 반대하며 자살까지 했지만 막을 수 없었다. 그의 독가스는 결국 히틀러 정부가 자신의 유대인 친척까지 살해하는 데 사용되었다. 주님의 몸인 교회를 해치고 그 총체인 총회를 유린하기까지 하면서 돈을 사랑한다고 총회 앞에서도 돈다발을 이승희의 반야월교회에서 흔들며 밝히고 결국 유유상종(類類相從) 송삼용과의 인터뷰에서는 총회를 대표하는 실세라고 밝힌 허공(許公)의 잔꾀처럼... 열등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총회가 총신을 총신이 총회를 '적'으로 만드는 것은 가장 게으른 방식이다. 그것은 내면을 향한 칼끝을 바깥으로 향하는 것이다. 어떤 사회 이슈든 양극단에 치우친 이들의 이해하기 힘든 공격성과 적개심에는 이 같은 잘못된 방향의 속내가 숨어 있다. 그런 부류는 부와 권력을 한 손에 쥐고도 여전히 적을 만들어야 마음이 편해지는 이들이다. 그러다 허공(許公)처럼 죄다 한 방에 허공(虛空)으로 훅 간다. 열등감은 외부로 투사하여 적을 만드는 방식으로는 결코 극복되지 않는다. '적'은 또 다른 '적'을 부르기 때문이다. 타인들과 공동체를 이뤄 살아가는 한 열등감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 열등감을 극복하려면 '마음속에 깊이 박힌 대못'처럼 그것을 그저 기도의 불씨로 품어야 한다. 드골은 장엄하다. 그의 언어는 묵시(黙示)론적 색채로 드러난다. “위대하지 않은 프랑스는 프랑스가 아니다." 그 구절은 그의 소명의식을 민중에게 주입한다. 그는 역사 앞으로 돌진했다. 20세기 프랑스에 시련이 닥쳤다. 1940년 6월 나치 독일은 파리를 점령했다. 독일에 패전한 뒤 드골은 영국 런던으로 갔다. 그는 망명 조직 ‘자유 프랑스’를 이끌었다. 그는 BBC방송 마이크 앞에 섰다. “우리는 전투에서 패배했다. 하지만 전쟁에서 패배하지 않았다." 드골은 항전의 투지를 퍼뜨렸다. 영국 총리 처칠은 그를 지원했다. 그는 프랑스 해방의 영웅이었다. 그는 잠시 정부(내각수반)를 맡았다. 하지만 낙담과 은퇴가 이어졌다. 1954년 프랑스는 베트남(디엔비엔푸 참패)에서 치욕을 당했다. 프랑스는 패배에 익숙해졌다. 4공화국 정부는 드골의 권력 복귀를 요청했다. 58년 6월 나이 68세 때다. 1958년 드골은 권력을 장악했다. 그는 ‘프랑스 영광’의 복원에 나섰다. 드골에게 ‘신(神)의 한 수’가 있었다. 그것은 독자적인 핵무장이다. 핵무기는 프랑스의 국가 위상을 높였다. 사회의 침체 분위기를 몰아냈다. 드골은 정치적 상상력과 영감(靈感)을 전파했다. 그는 장교 시절 기갑부대의 공세적 전략을 역설했다. 전시실에 탱크 지휘관 차림의 드골(생시르 육사 졸업) 사진이 있다. 하지만 군 지휘부는 방어적 전략을 채택했다. 그것은 마지노 지하 요새의 구축이다. 2차 대전 초기 독일군은 요새를 우회했다. 벨기에 쪽으로 전격전 목표를 바꿨다. 마지노의 수비적 개념은 허무하게 무너졌다. 그는 국민을 향해 말했다. “프랑스 방어는 프랑스인의 손에 있어야 한다. 우리 프랑스는 국익을 위해 어디에서나 즉각 동원할 수 있는 ‘타격능력’이 필요하다... 군사력의 기본은 핵무장이다. 우리는 핵무장을 단행할 수 있는 용기와 의지를 가져야 한다." 그것은 리더십의 결정적 순간이다. 칼 없는 정의(正義)는 조롱당한다. 핵무기는 공세적 상상력을 제공한다. 그 심리는 상황의 주도권을 생산한다. 드골은 “군사력은 주권국가의 조건이다. 핵무장이 군사력의 선봉"이라고 했다. 1960년 2월 알제리 남부 사하라 사막. 프랑스의 1차 핵실험은 성공했다. 프랑스는 핵무기 클럽에 진입했다. 드골의 야망은 실현됐다. 드골은 핵무기를 마법의 정책수단으로 다듬었다. 핵은 국제정치의 판도를 바꿨다. 드골은 독자 외교의 기반을 확장했다.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탈퇴 그리고 제3세계 국가들에 대한 영향력 강화가 이어졌다. 드골의 정치에는 성공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시련도 있었다. 그의 시련에는 군부 반란과 여러 차례 암살 위기도 있었다. 배경은 식민지 알제리에 대한 독립 허용. 군 일부가 거세게 반항했다. 비밀결사대(OAS)가 조직됐다. 목표는 군의 대선배 저격. 1962년 8월 22일 저녁 대통령의 모터케이드가 파리 외곽 오를리 공항으로 가고 있었다. 시속 110㎞. 검은색 리무진(시트로앵 DS19)에 드골은 부인과 타고 있었다. 극우파 OAS 대원 12명이 거리에서 기습했다. 자동소총 140발을 발사했다. 차의 뒷유리창이 깨졌다. 타이어는 터졌다. 타이어 펑크가 나도 달릴 수 있게 개조된 차는 위험지대를 벗어났다. 드골 부부는 무사했다. 그는 여유를 보였다. “(저격범들이) 돼지처럼 쏘아댔다." 사건 후에 드골은 시트로앵 천장 위로 장신(長身)을 드러냈다. 군중 환호에 답례했다. “프랑스는 핵무장을 단행할 용기와 의지를 가져야 한다.” 2015년 7월 10일 오후 3시 총신대 재단이사회실에서 총신대 제6대 총장 김영우 목사를 추인했다. 총신 재단은 아사회를 소집하여 총장 추인을 결의했다. 재단이사회는 개회 성수에 1명이 모자라 고영기 목사를 1시간 여 기다린 뒤 총장 추인에 앞서 김영우 이사장은 이사장 직무대행으로 안명환 목사를 지명했다. 이어 안명환 목사의 사회로 김 이사장을 이석시킨 후 운영이사회에서 총장으로 선출된 김영우 목사를 제6대 총신 총장으로 추인했다. 2017년 9월 15일 총신재단이사회는 이사회를 열어 총신대 정관을 개정했다. 전문 1조 “총회의 지도”를 “총회의 성경과 개혁신학에 입각한 교의적 지도하에”로 변경하여 총회가 신학적 문제 외에는 개입할 수 없도록 했다. 제19조 임원의 임기에서 ‘임원 정년’을 삭제하고 비성경적이고 비효율적인 정년제를 없앴다. 제20조 임원의 선임방법에서 ‘본 총회에 소속한 목사 및 장로 중에서 선임하여’를 ‘성경과 개혁신학에 투철한 목사와 장로 중에서 선임하여’로 또한 제20조 2 개방이사의 자격에서 ‘본 총회에 소속한 목사 및 장로 중에서 선임한다’를 ‘성경과 개혁신학에 투철한 목사 및 장로 중에서 선임한다’로 개정했다. 학교법인 대한예수교장로회 총신대학교 법인 정관 변경은 이사 정수의 3분의 2 이상의 찬성으로 이사회의 의결로 가능하다. 정관변경은 주무관청인 교육부의 승인 사항이 아니라 보고사항이기 때문이다. 이상의 개정으로 총신 총장 김영우 목사는 총신을 화란의 아브라함 카이퍼가 세운 자유대학과 같이 교단과 자유주의로부터 자유로운 개혁주의 신학대학교 운영 방침을 갖추었다. 1962년 8월 22일 드골은 군중 환호에 답례하며 “프랑스는 핵무장을 단행할 용기와 의지를 가져야 한다”고 외쳤다. 2017년 9월 15일 총신재단이사회는 총신대 정관 개정을 통해 부패하고 변덕스러운 총회에서 자유롭고 총신 중심의 총회까지도 재편할 수 있는 핵무장을 했다. 그것은 드골과 같은 총신 총장 김영우 목사의 외침이다. “총신은 부패한 총회 세력과 세상 정부의 자유주의 영향에 맞설 총신 방어는 총신인의 손에 있어야 한다. 칼빈주의 원리를 교리와 신학에만 적용할 것이 아니라 생활의 전 영역에 하나님의 주권이 임하게 하기 위해 개혁주의를 위한 자위(自衛)의 핵무장을 단행할 수 있는 용기와 의지를 가져야 한다.” 지금 마음이 몹시 불편하고 모두가 '구조'의 문제이거나 '네 편'의 문제로만 생각한다면 방법론으로서의 자신의 믿음을 되돌아보아야 한다. 총회와 총신 사이에서 총대들의 처신은 방향을 잡지 못할 것이다. 그런데 나와 비슷한 상황에 처한 많은 사람들이 말하고 생각하는 언제 어디서도 성령에 감동한 촉수로 써서 울림이 있는 성경에는 우리를 바른 길로 인도하는 하나님의 감동이 들어있다. 어쨌거나 꼬이면 자빠질 수 있다. 총회와 총신이 어쨌거나 꼬이지 아니하려면 우리의 생명의 원천 성경으로 돌아가야 할 필요가 있다. 이런 문제에 대해 성경은 여러 가지 질문을 촉발시키고 해결의 깨우침을 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면의 뿌리 깊은 질투와 열등감이 허공(許公) 식의 '총회'라는 미명(美名)의 겉옷을 입고 있는 것은 아닌지도 살펴봐야 한다. 총회의 부패하고 무능한 세력의 문제는 쏙 빼놓고 총신 문제만을 이야기하는 것은 참으로 분별없는 짓이기 때문이다. 이는 지난 몇 년간의 '총회의 부패와 무능'을 바라본 총신 72회 목사의 뒤늦은 자책(自責)이다. 어떤 사람이든 얼마나 다른 환경에서 살든 인간은 한 가지 점에서는 전혀 다르지 않다. 그것은 누구나 단 한 번뿐인 소중한 인생을 산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인생에서 우리의 고향 총신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총회를 위한 총신이 되어야 하는 것인지 총신을 위한 총회가 되어야 하는 것인지 고민해야 할 것이다. 더욱이 총신 총장 김영우 목사는 총신대 정관 개정을 통해 개혁주의를 위한 핵무장을 했다. 허공(許公)의 총회든 허공(虛空)의 총회든 무임승차 총회장 전계헌은 아들을 맡긴 꾀돌이 전주남의 자문을 구하거나 우직한 안명환의 도움을 빌어 핵무장을 한 김영우 목사에 대응해야 할 것이다. 성경은 말씀한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지 아니하나니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도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됨이라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넣어야 둘이 다 보전되느니라 마태복음 9:17 2017-11-05
    • G.OPINION
    2017-11-05
  • 제102회 총회 선거의 환희
    총회의 꽃은 선거매년 총회 임원 선거 총대의 꿈 목사 부총회장 후보 가운데 유력 후보 김정훈 목사와 이승희 목사부총회장 선출 변수 제비뽑기 어느 경우든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제102회 부총회장이 될 것 총회 총무 유력 후보 최우식 목사와 김영남 목사변수 충청노회 난관 딛고 나온 다크호수 정진모 제102회 총회에서 제101회 총회 서기 서현수 목사총회 역사에 ‘악의 무리에 맞서는 정의의 기사’ ‘제다이’로 등재될 전망 허활민과 박무용은 누가 살다 간 장마일까. 구시월은 귀뚜라미의 허리가 가늘어지는 계절. 9월 18일 밤새워 등성이를 넘어온 익산 기쁨의교회 총회는 그것을 알 것이다. 그래서 총회를 위해 귀뚜라미가 밤새 울었나 보다. 귀뚜라미 울음은 수컷이 암컷을 유혹하려고 날개를 비벼 내는 소리다. 밤새 그 귀뚜라미를 지켜본 제102회 총회가 내일 열린다. 하여간 그쯤 그곳에서 환희의 함성이 터져 나올 것이다. 종교개혁 500주년이 흐르다가 격랑의 총회를 만나기 전 숨을 고르는 곳 익산 기쁨의교회로 총회 선거의 환희를 맛보러 전국 노회 1600여 총대들이 몰려들 것이다. 새떼가 총대들처럼 우르르 내려앉았다. 교회의 강대상 같은 키가 작은 나무였다. 열매를 쪼고 똥을 누기도 했다. 새떼가 몇 발짝 떨어진 나무에게 옮겨가자 새떼 의자로밖에 여겨지지 않던 나무가 총대가 들고 가는 성경처럼 흔들렸다. 흔들리는 한 권의 성경 아직은 이 좋은 징조를 갖고 있다. 총대들이 모인 총회의 위력은 대단하다. 무덤덤한 헌의를 성경의 뜻으로 바꾸고 서 있던 총대를 한 권의 흔들리는 성경으로 바꾼다. 딱딱한 것을 살아 있는 것으로 변환시키는 총회의 역동적인 힘은 총대들의 기도에 의해 생겨난다. 한없이 작고 가벼운 것이 세상을 뒤흔드는 것이다. 세상은 폭력과 사기와 협잡으로 가득 차 있지만, 마지막 행에 와서 시인은 세상에 대한 기대를 버리지 않았음을 내비친다. ‘아직은’이라는 한 덩이의 말은 절망과 희망을 함께 품고 있어 유심히 읽어야 한다. 아직은 좋은 징조를 믿고 나아가야 한다. 아침이니까. 매년 실망하면서도 기도의 힘으로 다시 열리는 총회 죽었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다시 환하게 살아나는 총회. 총회의 꽃은 선거다. 매년 총회 임원 선거는 총대의 꿈이기도 하다. 이번 제102회 총회는 3년마다 열리는 총회 총무 선거도 있다. 목사 부총회장 후보 가운데 유력 후보는 김정훈 목사와 이승희 목사다. 부총회장 선출 변수는 방정맞은 제비뽑기다. 그러나 어느 경우든 두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제102회 부총회장이 될 것이다. 총회 총무 가운데 유력 후보는 최우식 목사와 김영남 목사다. 총무 선거는 무조건 직선이지만 변수는 충청노회 어려움을 딛고 나온 다크호수 정진모 목사다. 과거 영국의 경마 경주에서 아주 출중한 예상마가 승리할 것이라는 대중의 기대에 반하여 전혀 예상하지 않은 말이 갑자기 두각을 나타내어 그 경주에서 승리하게 되었다. 물론 그 말의 색깔이 주위의 다른 말들과 달리 검은 색이었다. 그 때 이 후로 다크호스(dark horse)란 말이 대중에게 오르내려 전혀 기대하지 않은 대상이 갑자기 급부상할 경우를 비유하여 사용하게 되었다. 영국에서는 아직도 신조어가 옥스퍼드 사전에 기록하고 발표한다. 사람들이 많이 그런 뜻으로 사용하니까 이제는 다크호스라고 하면, 대부분 사람들이 별 의문 없이 이 단어를 사용하게 되었다. 일례로 스타워즈에 나오는 ‘제다이’도 이번에 등재되었는데 ‘악의 무리에 맞서는 정의의 기사’라는 일반적인 뜻으로 의미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제102회 총회에서 제101회 총회 서기 서현수 목사가 총회 역사에 ‘악의 무리에 맞서는 정의의 기사’ ‘제다이’로 등재될 모양이다. 2017-09-17
    • G.OPINION
    2017-09-17
  • 허활민 총회 농락
    하나님이 무섭지 않은 허활민 교회와 목사의 피를 빨며 사는 모양 지금의 우리에게 소중한 건 여호수아가 진군하는 여리고 성을 바라보는 것 같은 믿음 제102회 총회에 대한 믿음같은 총대들과 나눌 때 더욱 의미가 있어 여문 씨앗들을 품은 호박 옆구리가 굵어지고 매미들 날개가 너덜거리고 쌍쌍이 묶인 잠자리들이 저릿저릿 날아다니고 알을 품은 사마귀들이 뒤뚱거리며 벽에 오른다. 목백일홍이 붉게 타오르는 불타버린 진양교회 마당 수돗가에서 목사가 끝물인 늙은 오이 한 개를 따와서 씻고 있다. 끝물 때는 모두 허활민 사단처럼 너덜거리고 저릿저릿하고 진저리 치고 뒤뚱거린다. 북한이 중거리탄도탄을 쏜 다음 날 신문 기사 한 토막. '북한은 한국 정부의 대화 분위기 조성 노력을 농락이라도 하겠다는 듯 더 큰 미사일로 확실한 전략적 도발을 한 셈이다.' 농락(籠絡)이 뭔가. '새장과 고삐라는 뜻으로 남을 교묘한 꾀로 휘잡아서 제 마음대로 놀리거나 이용함'이다. 속된 말로 갖고 논다는 뜻이다. 닷새 뒤 핵실험까지 벌였으니 농락이랄 수도 있겠다. 그런데 농락이란 표현이 들어맞으려면 "그래 만나자" 했다가 멋대로 뒤집거나 다시는 미사일 안 쏜다 해놓고 쐈다거나 해야 한다. 그래서 '최순실 국정 농단 사건'에서는 농단(壟斷)보다 농락이 더 잘 어울린다. 농단은 '이익이나 권리를 독차지함'인데, 그보다는 나랏일과 사람을 쥐락펴락했으 니까. 그렇듯 허활민의 경우도 교회와 노회 분쟁이 날 때마다 총회를 통해 사건과 총대들을 쥐락펴락했으니까 총회를 농단했다기보다 총회를 농락했다는 말이 어울릴 것이다. 그는 예배 뒤 주신교회 칸막이 사무실에서 양복 안주머니를 꺼내 보이고 빙긋 웃으며 존경의 눈으로 바라보는 내게 말하곤 했다. “요즘 누가 나한테 돈을 갖다 주는 사람이 없어.” 모든 창문에 촘촘한 방충망이 있고 모기라는 놈이 몇 층 이상은 올라오지 못 한다는데 요 며칠 새 모기가 나만 문다. 이 자식이 어떤 놈 피를 빨까 궁리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내 다리에만 주둥이를 꽂고 피를 빨아먹는데 그 헌혈량은 미미하나 나중은 창대할 수도 있을 것이다. 모기향부터 모기를 쫓는다는 방향제까지 두루 써보지만 이놈은 허활민처럼 물러설 줄 모른다. 큰 질병을 가져오는 것도 아니지만 어쨌든 귀찮은 상처를 남기기에 이놈의 모기 퇴치가 보통 일이 아니다.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다. 모기도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이다. 그놈은 태어나 보니 모기였고 대한민국 서울에서 어떻게든 남의 피 빨아먹어야 하는 처지인 것이다. 나는 모기 편이 아니다. 다만 모기도 열심히 살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저 하찮은 모기도 죽어라 남의 종아리 피를 빨며 산다. 그래서 하나님이 무섭지 않은 허활민은 교회와 목사의 피를 빨며 사는 모양이다.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 사람들은 종종 나의 본질이 내 내면 안에 오롯이 담겨 있어 끊임없이 질문하고 답하면 그것을 찾을 수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본질이 과연 내면에 있는 걸까. 나는 내면의 문을 열고 외면으로 나아가 확장될 때 나를 만날 수 있다고 믿는다. 그 외면에는 타인이라는 커다란 문이 놓여 있다. 정체성은 관계를 통해 변화한다고 말이다. 온순한 수다스러운 고요한 신경질적인 무심한 내 안의 내가 타인이라는 거울을 통해 끊임없이 표출된다. 그러므로 나를 찾기 위해선 저 먼 곳이 아닌 바로 이곳 내가 발을 디디고 서 있는 곳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렇듯 개혁의 욕구가 차오르는 제102회 총회를 앞둔 목사와 장로 총대들은 총회 공동체 안의 나가 나의 시작이며 과정이라는 걸 잊어선 안 된다. 그 무엇보다 지금의 우리에게 소중한 건 총회의 복잡한 정황 속에서 여호수아가 진군하는 여리고 성을 바라보는 것 같은 믿음이다. 총회에 대한 믿음은 같은 총대들과 나눌 때 더욱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2017-09-17
    • G.OPINION
    2017-09-17
  • 총회지도력의 성공
    니콜로 마키아벨리 ‘군주론’ 권력 경영학의 고전 권력과 인간 본성 탐구 인간 속성 확고한 결과 보기 전 개혁을 신뢰하지 않아 허활민 허(許)세(勢) 총회를 위해 하나님을 의지해 기도 생각 행동 김영우 김(金)세(勢) 총회 대항 담임목사면서 교회 시무하지 않고 사욕 위해 교회와 총신 이용 내세울 논문 한 편 없는 박사학위 총신 총장 추문 속에 군림 더욱이 총신졸업 자격으로 총회 강도사고시 인허 안수 목사 총회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대항 모교 총신의 명예 더럽혀 김영우 직언과 진실에 불편 허활민 직언과 진실에 호응 총회지도력 성공은 성경 근거 하나님의 뜻 포착 병원마다 장례식장마다 남아도는 죽음, 삶은 언젠가 나에게도 죽음 하나를 주리라. 부정한 것이 아니라면 무엇이든 주면 받을 준비가 되어 있는 내 두 손은 공짜이므로 그 죽음조차 넙죽 받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 죽음이 내 몸에 피기까지는 나는 여전히 나의 삶을 소망으로 채우고 있을 거다. 죽음이 오기까지는 소망이 뚝뚝 떨어져 버린다 해도 나는 비로소 삶을 여읜 시름에 잠기겠지. 사노라면 그 어느 날 그 하루 무덥던 날 떨어져 누운 삶마저 시들어버리듯 천지에 죽음조차 자취가 없어질지 모른다. 그리고 뻗쳐오르던 내 소망 서운케 무너져도 삶이 지고 말면 그뿐 내 삶이 다 할지라도 9월 총회 기간만은 5일장 장사꾼마냥 하냥 들떠 바쁠 게다. 죽음이 피기까지는 나는 여전히 나의 삶을 소망으로 채우고 있을 거다. 보리가 찬란히 푸르른 믿음의 유월을. 여름철새인 ‘저어새’는 주걱처럼 생긴 검은 부리를 얕은 물속에 넣고 좌우로 휘휘 저으며 먹이를 찾는다고 해서 저어새라 이름 붙여졌다. 2017년 동아시아 서식지 조사 결과 전 세계적으로 3000여 마리만 남은 것으로 알려진 저어새는 멸종위기 동물이다. 우리나라에선 멸종위기 1급 천연기념물 205호로 지정돼 있다. 번식기인 4월~6월이면 뒷머리에 황금빛 장식깃이 생기고 가슴 윗부분에도 황금빛 털이 자라며 갯벌 강하구 논습지 등의 생태계를 고루 갖춘 강화도를 찾아 짝을 짓고 알을 낳는다. 저어새는 백로랑 짝지어 다닐 때가 많다. 서로 돕는 관계다. 고개를 물에 처박고 있을 때가 많은 저어새에게 외부의 위험 신호를 알려주는 게 백로라고 한다. 대신 저어새가 논바닥을 휘저어서 풀 사이에 숨은 물고기를 찾아내면 백로가 냉큼 잡아먹는다고 한다. 어리바리 착한 저어새와 뺀질대지만 똘똘한 백로는 멋진 친구사이가 아닐까. 이런 상생(相生) 관계를 일컬어 우리는 인간의 삶 중 가장 중요한 도덕이라고 할 수 있을 게다. 우리 믿는 자들은 그것을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신앙이라고 한다. 신앙을 살아가는 힘으로 삼고 그것으로 깨끗한 의식(意識)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총회 지도자의 과제라는 생각이 든다. 듣기로 김정호 목사(총신운영이사회 서기 목회대학원 교무처장)는 2017년 제80회 목회대학원(원장 박무용 목사) 여름학기 장소 사용 문제(지난 총신 거부로 1월 겨울학기 숙소 갖춘 김희태 목사 시무 동광교회 사용)로 총신총장 겸 재단이사장 김영우(서천읍교회 격주 설교 비거주 담임)를 2월 총신대학원 졸업식 후 기숙사 옆 귀빈 식당에서 만났다. 그 자리에는 김영우를 위해 주진만(총산강당 사용 교회 담임)이 잔심부름을 하고 법인국장 권주식과 크리스천포커스의 송삼용이 배석했던 모양이다. 김영우는 김정호 목사의 총회 직영 목회대학원 장소 사용 요청에 대해 홍준표처럼 딴말을 한참 하다가 비대위 시절 자신의 휘하였던 점을 들먹이며 총신운영이사회 서기와 목회대학원 교무처장 신분의 김정호 목사에게 아랫사람 대하듯 섭섭함만 토로했다고 한다. 그의 충복 주진만은 알지 모른다. 김영우가 자신에게는 총신 강당사용을 허락하지만 총회에 대해서는 ‘총회는 무슨 얼어 죽을...’ 할 것이라는 것을. 대학 1학년 72년부터 45년여 보아온 김영우는 딱 선거판의 홍준표를 닮았다. 잘 되는 것은 자기 덕이고 잘못 된 것은 남 탓을 하는 점에서 말이다. 홍준표 자유한국당 전 대선후보는 박근혜 탄핵의 폐허에서 출마했다. 처참한 5% 지지율에서 그나마 개인기 덕분에 24%나 득표했다. 홍준표는 대선 후 미국으로 건너가 페이스북에다 이렇게 올렸다. 대선을 도와준 한 인사의 발언을 인용해 “목에 깁스하고 (한국당의) 대변인실이라는 데가 칼퇴근에 휴일은 아예 출근도 하지 않고… 느려터진 배부른 돼지들만 모인 곳”이라 힐난했다. 참패 책임을 당으로 돌린 것이다. 홍준표의 분노는 한국당의 대선 광고에서 폭발했다. “문재인·안철수 후보는 44회 방송광고를 한 반면, 한국당은 내가 15% 이하 득표로 선거보전금이 나오지 않을까 봐 11회만 했다” “사실상 대선 홍보를 포기했고, 대선 후 당권 향배에만 신경을 썼다...” 훼이스 신학교(Faith Seminary) 한국 분교의 엉터리 박사 학위 이력을 내세우며 활동한 기독신문 주필 시절 총회 결의 거의 전부를 자신이 해냈다고 상계동 소재 자신의 관리교회(현재 총신재단이사 곽효근 담임 삼산노회 소속 선천교회)에서 별 볼일 없는 내게 너스레를 떨었다. 나는 입을 딱 벌리고 고개를 주억거리며 들었다. 이제는 어리버리 김삼봉을 십분 활용해 총신재단이사회 서기에서 재단이사장이 됐다. 그 뒤 전 총신 총장 길자연의 잔여임기까지 물려받아 박근혜 탄핵 덕에 대선후보가 된 홍준표처럼 총신 총장 반열에까지 올라갔다. 그런 그를 대단한 사람이라며 추앙하는 사람들이 문찬수와 주진만 말고도 적지 않고 제102회 부총회장 후보 가운데도 있으니 세상 참 억울하면 무슨 수를 쓰든 출세하고 볼 일이다.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의 정치 철학자다. 그의 저서 ‘군주론’(Il Principe)은 권력 경영학의 고전이다. 그 책은 권력과 인간의 본성을 탐구했다. 통치자와 대중의 관계를 해부했다. 마키아벨리는 권력의 평판을 중시했다. 그는 평판을 지도력의 핵심 요소로 삼았다. 평판은 상징적 조치로 획득된다. 그래서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이런 말을 한 모양이다. “인간 속성은 확고한 결과를 보기 전에는 개혁을 신뢰하지 않는다. 인간이란 가식적인 위선자이며 이익에는 열정적이다. 인간은 어버이의 죽음은 쉽게 잊어도 재산의 상실은 좀처럼 잊지 못한다.” 마키아벨리의 그 냉혹한 지적은 지금 총회기소위원회의 총신 부적격 재단이사 목사직 면직 기소문제로 표출된다. 6월 12일 임원회에서 김승동 하귀호 문찬수 곽효근 총신대학교 재단이사 4인을 기소하기로 결의했다. 그 이유는 목사직이 면직될지라도 총신 재단이사직은 사임할 수 없다는 그들 4인의 결연한 결심 때문이었다고 한다. 총회상설기소위원회(위원장 서문강)의 모래시계의 검사 같은 서기 이형만 목사(삼호교회)가 6월 9일 곽효근 목사에 대한 면담조사도 실시했다. 비공개로 진행된 면담조사에서 기소위원들은 곽효근 목사에게 재단이사 선임 배경과 사임 의사를 물은 것으로 알려졌다. 총회상설기소위원회에 따르면 곽효근 목사는 재단이사가 된 과정에 대한 진술에서 “총신 법인국에서 등록 서류를 제출하라고 해서 제출하여 이사가 됐다”고 한다. 나는 총신법인국장 권주식이 주진만과 곽효근에게 서류를 받으며 설명하는 총신현장을 목격한 적이 있다. 당시는 총신문제가 불거지기 전의 일이었다. 그런데 3년여가 지난 지금 총신 강당에서 개척교회를 하고 있는 주진만과 김영우의 관리교회 후임으로 50여명의 교인 교회를 맡은(누구 말마따나 재단이사가 교회 규모와 무슨 상관이냐는 사람도 있지만) 곽효근이 현 총신 재단이사로 등재되어 있다는 사실에는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다. 그런 충성을 낳는 김영우의 용인술은 가히 전두환 급이다. 정치가의 성취는 리더십의 성공이다. 총회지도력의 핵심 요소는 총대와의 관계 설정이다. 그것이 총회지도력 경영의 기량이다.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르네상스 시대 이탈리아의 정치 철학자다. 그의 저서 ‘군주론’(Il Principe)은 권력 경영학의 고전이다. 그 책은 권력과 인간의 본성을 탐구했다. 통치자와 대중의 관계를 해부했다. 마키아벨리는 권력의 평판을 중시했다. 그는 평판을 지도력의 핵심 요소로 삼았다. 평판의 핵심 요소는 설득력이다. 그 바탕은 소통이다. 로널드 레이건의 별명은 ‘위대한 소통자’다. 대통령 시절 레이건의 발언은 낙관적 미래를 생산했다. 감성의 시대다. 프랑스 군중심리학자 귀스타브 르봉의 말은 강렬하다. “사람을 다스리는 기량은 언어 구사력으로 이루어진다. 군중의 상상력을 자극하는 기술이 통치술을 아는 것이다.” 그러나 대중 심리는 이중적이다. 마키아벨리는 설파한다. “신질서를 만드는 것은 어렵고 성공하기 힘들다. 왜냐하면 구질서의 이득을 본 사람들은 개혁자에게 적대적이다. 반면에 신질서로부터 이익을 누릴 사람들의 지지는 미온적이다... 인간 속성은 확고한 결과를 보기 전에는 개혁을 신뢰하지 않는다. 인간이란 가식적인 위선자이며, 이익에는 열정적이다... 무장하지 않은 사람들은 파멸당했다. 인간의 본성은 변덕스럽다. 대중에게 무언가를 설득하기 쉬우나 그들을 설득한 상태로 유지하기는 어렵다... 군주는 대중에게 사랑보다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게 훨씬 안전하다. 하지만 미움은 피해야 한다.” 미움은 통치자에게 치명적이다. 정유라의 이화여대 특혜 입학이 폭로됐다. 젊은 세대의 미움이 폭발했다. 총신으로 말미암은 총회 정치 위기는 지도력의 시험대다. 마키아벨리는 말했다. “군주는 경멸을 피해야 한다. 경멸받는 것은 변덕스럽고 가볍고 우유부단한 인물로 생각되는 경우다.” 이명박 정권의 임기 초 광우병 촛불시위 때다. 그는 청와대 뒷산에 올라갔다. 그는 장로와 대통령으로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그의 도우심을 구하는 기도대신 촛불 시위대의 ‘아침이슬’ 노래를 들으며 망설였다. 그 장면으로 그는 얕잡아 보였다. 지지층도 나약한 장면에 실망했다. 그러나 현재 허활민의 허(許)세(勢)는 다르다. 그는 성실히 성경을 읽고 설교를 준비하고 겸손하게 낮은 목소리로 전한다. 그리고 그는 총회를 위해 하나님을 의지해 기도하고 생각하고 행동한다. 그러나 김영우의 김(金)세(勢)는 하나님이 아니라 세상의 부패한 배경을 의지하고 담임목사면서 교회를 시무하지 않는다. 총대지위를 유지하기 위해 교회를 이용하고 변변한 논문 한 편은커녕 영어실력을 과시하면서도 번역서 한 권 없이 길자연의 것보다 못한 부끄러운 박사학위로 총신 총장을 맡아 추문(醜聞) 속에 군림한다. 더욱이 총신졸업 자격으로 총회 강도사고시 인허로 안수 받은 목사임에도 총회를 섬기는 것이 아니라 대항하고 자신의 모교 총신의 명예를 결혼도 하지 않고 더럽힌다. 이탈리아 피렌체에 마키아벨리의 500년 전 고향 집이 남아 있다. 그 집에 놓인 안내 책자에 ‘비르투(virt?)와 포르투나(fortuna)’가 써 있다고 한다. 그 용어는 군주론을 관통한다. 총회 정치 목표의 달성은 포르투나 즉 세상의 방법이나 운에 기대는 것이 아니라 비루투 즉 하나님을 의지하는 의지와 결단으로 이뤄진다. 지도자는 눈앞의 이익만 추종해선 안 된다. 지도자의 성취는 비르투의 산물이다. 지도력은 사사로운 이익을 억제하면서 일을 해결하는 경륜과 기량이 결집된 의지의 발현이다. 이것이 허활민으로 대표되는 허(許)세(勢)의 실상이다. 그 허(許)세(勢)가 총회 정치와 총신 정기를 흐리는 김영우의 김(金)세(勢)에 맞서 총회를 이끌어가고 있다. 김영우는 직언과 진실에 불편해한다. 허활민은 직언과 진실에 호응한다. 직언의 외면은 지도력의 침체와 탈선을 초래한다. 총회 지도력은 총대와 건강한 긴장 상태를 유지해야 한다. 총회지도력의 성공은 성경에 근거한 ‘하나님의 뜻’을 포착하는 것이다. 그 순간은 여호수아의 가나안 정복 결행 시점과 같다. 망설임이 용납되지 않는다. 그 포착과 결단의 시기는 하나님의 말씀과 총대의 신앙적 관계에서 설정된다. 그것이 총회지도력 경영의 종합적인 역량이다. 성경은 말씀한다.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여호수아 1:7-9 2017-06-16
    • G.OPINION
    2017-06-16
  • 총회 위기 극복 방안
    주전 3세기 로마의 집정관 원로원 시민서로 권력 견제와 공유로 위기 극복 총회임원회 총회재판국 노회 정치세력서로 견제하고 권력을 공평하게 나누어야산하 노회가 총회를 신뢰하고 따를 것 과거와 미래 100년 역사 갈림길제101회 총회장 김선규 총회결의실행 모범을 보이면 영광의 이정표 될 것 ‘불행은 언젠가 잘못 보낸 시간의 보복’이라는 나폴레옹의 이 말은 그의 삶을 예언한 것이었다. 그렇듯 모든 불행엔 말씀의 예언이 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고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는 말씀은 이제 시계의 시간처럼 내게 다가와 계시 받은 듯 밀려온다. 싱싱한 사자 한 마리 같던 청춘이 잠시였다는 걸 아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는다. 그래서 평생 새벽마다 일삼아 일어난 목사에게도 세월 가는 소리가 들린다. 기적소리를 내면서 멀어져 가는 기차처럼 설핏 잠든 밤에도 세월이 마구 흘러간다. 아무리 총회를 드나들어도 사람들이 때마다 겸손하게 머리 숙여 기도하는 마음을 알겠다.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뜻의 호모사피엔스를 출발점으로 네안데르탈인과 현생 인류를 포함하는 인류의 4만 년 시간은 더디게 흘렀다. 오직 살아남는 연명(延命)이 그 시대 인류의 목표였다. 그러니 시간 구분은 먹거리가 있을 때와 없을 때밖에 없었다. 그러다 사계절로 나뉘었고 농사를 짓게 되면서 24절기로 쪼개졌다. 밝고 어둠에 따라 아침과 저녁만 있다가 넉넉한 배 두드리는 날이 늘면서 마음에 점 하나 찍은 점심(點心 lunch)이 고작이었다. 산업혁명을 겪으면서 시간은 완전히 다른 모습이 됐다. 기계의 가공할 속도는 시간을 시분(時分) 단위로 바꿔 놓았다. 기계화로 일컬어지는 2차 산업혁명은 시간을 초 단위로 쪼갰다. 사람은 컨베이어벨트의 부속이 됐다. 기계의 틈새를 메우는 숙련공이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찰리 채플린(모던 타임스 Modern Times는 1936년에 제작된 찰리 채플린의 코미디 영화인데 당시 산업혁명을 날카롭게 비판하였으며 채플린은 이 영화가 발단이 되어 나중에 공산주의자로 몰려 미국에서 쫓겨나게 된다)이 탄생했지만 역시 돌이킬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토키영화 도래에 맞서 무성(無聲)영화의 아성(牙城)을 지키며 단 한마디의 대사 없이 이미 오늘의 오토메이션시대를 60년 전에 간파한 영화이다. 타이틀백의 시계 문자판이 상징하듯 시계에 지배되는 기계문명에 대한 도전과 자본주의의 인간성 무시에 대한 분노를 설파한 것이다. 결코 새로운 것만 좋아하지는 않았으므로 토키에 대해 반응을 보이지 않았고 채플린은 자본주의의 인간성 무시에 대한 격렬한 분노를 저력 있게 고발했다. 컴퓨터와 인터넷이 몰고 온 3차 산업혁명은 기어이 시간을 인간이 셀 수 없는 단위로 만들어 버렸다. 동시간대에 전 지구적으로 움직이는 시공간에 인간이 끼어들 틈은 많지 않았다. 일자리 없는 성장이란 결국 ‘시간’의 문제였던 것이다. 그러한 공포가 채 가시기도 전에 인류는 인공지능(AI)이 주도하는 4차 산업혁명의 거센 물결을 마주하고 있다. 사회 각 분야의 ‘알파고’들이 인간을 대체할 준비를 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드러나는 시간의 ‘가속화’를 보자. 1차 산업혁명에서 2차 산업혁명까지의 시간은 대략 150년이다. 2차에서 3차까지는 약 80년이고 3차에서 4차는 35년 정도 걸렸다. 4만 년 동안 움직임이 없다가 한번 불이 붙으니 정신 못 차릴 속도로 달리고 있는 것이다. 이런 추세라면 어떤 경악할 형태의 5차 산업혁명이 20년 내에 출현할지 모를 일이다. 그러다 천년이 하루 같고 하루가 천년 같은 하나님의 시간을 체험하게 될지도 모른다. 대한민국 헌법 1조 1항은 이렇게 말한다.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다수가 ‘민주’라는 말은 이해하는데 ‘공화국’의 의미를 생각하는 이는 별로 없다. 공화국이란 ‘공공성을 주권을 가진 국민의 결정에 따라 실행하는 나라’라는 뜻이다. 바로 그 주권을 드러내는 행위 중 하나가 바로 ‘투표’다. 우리는 곡절 많고 상처도 많은 현대를 살아 왔다. 이번에 느닷없이 주어진 대통령 보궐선거는 우리가 제대로 청산하지 못했던 과거의 잔재다. 대통령 선거가 사흘 앞으로 다가왔다. 당선 확정과 동시에 임기가 시작될 제19대 대통령은 국가 리더십의 공백을 메우고 갈라진 민심을 하나로 모아 대한민국의 새로운 도약을 이끌어가야 한다. 군사적 긴장감이 한반도를 휘감고 있고 헌법을 유린하고 국정을 농단했던 세력은 엄존해 있다. 로마 시대는 이런 상태를 아포리아(Aporia) 상태라고 했는데 ‘길 없음’ ‘해결책 없음’이라는 뜻이다. 로마인들에게 주전 3세기가 바로 그런 시대였다. 로마인들은 우선 그리스의 찬란한 문화에 기가 죽었다. 큰 신장과 강인한 체력을 가졌던 게르만 족들 앞에서 늘 무력감을 느꼈다. 로마인들에게 가장 두려웠던 존재는 한니발 장군이 이끄는 카르타고 군대였다. 주전 218년 코끼리 부대를 앞세우고 알프스 산맥을 넘어 남하한 한니발의 카르타고 군대는 16년간 이탈리아 반도를 유린했다. 그런데 주전 202년 소(小) 스키피오(그의 아버지 대 스키피오는 한니발과 싸우다 전사)가 이끄는 로마의 주력군은 자마(Zama)에서 한니발의 군대를 무찌르고 지중해의 패권을 장악하게 된다. 로마가 역사의 주인공으로 부상하는 순간이었다. 역사가 폴리비우스는 궁금했다. 그리스인의 문명 게르만인의 체격 카르타고인의 군사력에 눌려있던 로마는 어떻게 주전 3세기의 아포리아를 극복할 수 있었을까. 폴리비우스는 '역사'란 책에서 이 의문을 풀어내고 있다. "집정관·원로원·호민관이 서로 협력하며 위기에 대응했기 때문에 로마 헌법은 최고의 헌법이 될 수 있었다.” - 폴리비우스 ‘역사’ 제 6권 18절 그의 분석에 의하면 로마가 그리스·게르만·카르타고의 삼각 편대를 무찌를 수 있었던 이유는 권력의 정점에 있던 집정관 귀족 세력을 대표하던 원로원 그리고 호민관으로 상징되는 일반 시민들이 서로 철저하게 견제하면서 권력을 공평하게 나누어 가졌기 때문이었다. 이 아포리아 시대에 우리 교단 총회장의 자리에 올랐거나 오르려는 목사는 '역사'의 가르침을 기억하기 바란다. 주전 3세기의 로마가 집정관과 원로원 그리고 일반시민들이 서로 권력을 견제해 나가며 힘을 합쳤을 때 아포리아가 극복됐다. 그렇듯 총회임원회 총회재판국 그리고 노회 정치세력은 서로 견제하고 권력을 공평하게 나누어야 한다. 그래서 총회에서 결의하고 총회장이 그 총회 결의를 지키고 실행할 때 산하 노회가 총회를 신뢰하고 따를 것이다. 과거 100년 역사를 대표하고 미래 100년 역사를 상징할 제101회 총회장 김선규 목사는 제101회 총회 총대들이 성안한 결의들을 하나하나 챙기고 실행하는 모범을 보여 총회와 총신과 노회를 바로 세우는 역사의 이정표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간 제비뽑기 출신들이 보여준 행태를 못 벗어나 거룩한 총회와 총신과 노회를 사욕과 부패의 장으로 전락시키는 치욕을 되풀이하고 말 것이다. 2017-05-06
    • G.OPINION
    2017-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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