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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42_ 교회 포기한 군대
Divi Ambrosii Episcopi Mediolanensis Omnia Opera 교회 포위한 군대 이상한 것을 이상하다고 말하면 안디는 이상한 세상이 됐다. 그래서 바름을 이야기한다고 뒤집어 이야기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덩달아 그것을 듣는 사람도 수를 더해 가고 있다. 거꾸로 사는 세상이니, 막 쪄낸 찐빵이니, 베 짜는 하나님이니 하는 변설로 진리를 낯설게 만든다. 신학교를 들어 간 사람이 갑자기 목사 될 필요성을 못 느껴 신학교를 그만두었단다. 그리고 믿음대로 살기 위해 바로 살아야 될 세상을 거꾸로 살아야 된단다. 어느 넋이 빠진 친구는 목사 안수를 받은 날 가슴이 하도 허전해 실컷 술로 채웠단다. 이따위 수작의 대가는 역시 니체였다. 그가 얼빠진 눈망울로 종종 되뇌인 말이 선한 악이니 악한 선이니였다. 성경은 말씀하신다. 악은 악이고, 선은 선이라고. 성경에서는 의적 일지매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도둑은 도둑이고 의인은 의인이다. 어찌 의로운 도둑이 있을 수 있으며 악한 의인이 있을 수 있겠는가! 암브로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세상의 가치관이 흔들리고 있었다. 많고 강한 게 판단의 가름끈이 되고 있었다. 신자들마저도 그 수가 늘어감에 따라 성경이 아니라 세상 풍조를 따르는 경향이 짙어졌다. 니케아 신앙을 지지하는 암브로스는 아리우스파에 대한 어떤 지원도 단호히 거절했다. 그는 성경대로 ‘예’와 ‘아니오’가 분명한 사람이었다. 그가 유스티나 황후의 부탁을 거절한 까닭은 솔직히 아리우스주의가 그르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아리우스주의가 고트족의 신앙이었기 때문이다. 고트족은 아리우스파가 로마 제국에서 온갖 힘을 다 쓰던 시절에 파송한 선교사들이 개종시킨 야만인들이었다. 그 후 로마 제국의 대부분이 니케아 신앙을 받아들였다. 반면에 이성과 논리에 근거해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아리우스주의는 야만인들에게 전파됐다. 그 결과 아리우스주의자는 미개인이나 야만인을 의미하게 됐고 니케아주의자는 로마인을 뜻했다. 황후는 여타 야만인들로부터 로마 제국을 방어하기 위해 야만인들을 용병으로 고용하고 있었다. 아리우스 신앙을 지닌 이를 야만인 병사들을 위해 그녀는 밀란에다 예배당을 하나 마련해주고 싶었다. 암브로스는 딱 잘라 거절했고 그녀가 바랬던 교회를 그를 따르는 사람들로 채워버렸다. 화가 치밀 대로 치민 황후는 야만인 군대를 보내 그 교회를 포위하게 했다. 군인들의 동태를 예의 주시하면서 암브로스는 신자들에게 자신이 작곡한 찬송가를 부르도록 가르쳤다. 사실상 암브로스는 라틴 찬송가의 아버지로 불리운다. 병사들은 살기를 번득이며 공격 명령을 기다렸다. 온 밀란 시민이 숨을 죽이며 사태를 주시했다. 싸움의 결과는 불을 보듯 뻔했다. 유스티나 황후는 지휘봉을 손에 쥐고 교회 정문을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었다. 암브로스 ‘네까짓 게 버텨봤자 별수 있겠어. 이제 무릎을 꿇을 거야’ 하며 그녀는 느긋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그녀는 짐짓 일그러뜨린 얼굴에 묘한 웃음까지 짓고 있었다. 그때 숨 막히는 정적을 깨고 교회에서 찬송을 부르는 회중의 힘찬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아연했다. 어찌됐던 그녀도 신자였다. 황후는 찬송부르는 회중에게 공격 명령을 내릴 심장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암브로스가 이겼다. 2021-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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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32 - 쳇바퀴 세상
Sylvester I and Constantine 쳇바퀴 세상 신문을 펼쳐 든다. 날마다 그렇듯 오늘도 사건으로 지면은 그득하다. 10대 소녀가 괴성을 지르다 밟히고 밟혀 눈이 개개풀어진 사건, 미국 대통령 예비선거, 이주일 귀국, 다리 저는 국회의원이 목욕하고 나오다 칼 맞은 일, 이북에서 올까 싶은 목사들 이야기, 이스라엘 레바논 폭격으로 악명 높은 헤즈볼라의 책임자 무사위가 콩가루 된 사건. 주후 325년에 신문이 있었다면 콘스탄틴 황제가 주최한 니케아 총회를 대서특필했으리라. 한국전쟁 참전을 결의한 유엔총회에 비교가 안 되게 신문지면을 꽉 채웠을 것이다. 이런 소식이 공해로 하늘에 구멍 뚫리는 기사나 국회의원 선거 시사 나부랭이보다 얼마나 좋을 것인가. 어제와 같은 하루의 일과가 시작됐다. 로마 제국의 황제 콘스탄틴은 기지개를 펴며 침소에서 일어났다. 햇살은 밝았다. 만찬 석상에서 박해 때 눈이 뽑혀 애꾸가 된 감독의 눈 자국에 입맞춤했던 정경이 떠올랐다. 만찬장에 감동의 박수가 넘쳤다. 황제는 빙긋 웃음을 흘렸다. 니케아 총회가 파한 뒤 총대들이 콘스탄틴에게 활동결과를 보고했다. 그러나 연로한 아리우스를 비롯한 다섯 총대들은 니케아 신조에 서명을 거부했고 유배를 당했다. 이게 난관을 전부 해결해 주지는 못했다. 그리스도와 성부의 관계와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에 관한 토의는 해를 거듭해 한 시대를 넘어 계속됐다. 추방당했던 감독들이 의기양양하게 돌아왔고 반대로 아다나시우스가 유배당했다. 인생은 죽기 마련이다. 세월이 흘러 임종 무렵에 세례를 받은 콘스탄틴 황제가 숨을 거뒀다. 세 아들이 뒤를 이었다. 고구려의 독재자 연개소문이 죽은 뒤 일어났던 꼴이 콘스탄티노플에서 이미 오래 전에 본을 보이고 있었다. 황제의 아들들은 황제 자리를 놓고 아귀다툼을 했다. 어렸을 때 그리도 친했던 형제들이었는데 권력 앞에서는 모두가 철천지원수였다. 역사를 보노라면 지금의 사태는 아무 것도 아님을 느끼게 된다. 그에 곁들여 아리우스파와 니케아파의 팽팽한 신념들이 이방원의 넋두리마냥 칡넝쿨처럼 얼키고 설켜 맴돌았다. 승리한 쪽이 반대파의 감독들을 유배시켰다. 심지어는 기독교 신자끼리의 싸움을 종식시키고자 콘스탄틴(세 아들 가운데 한 사람)이 알렉산드리아에 파송했던 연로한 메신저도 유배를 당했다. 유배당한 사람은 세 아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항의를 전달했다. “나는 당신 할아버지 치하에서 박해를 받았습니다(콘스탄틴 황제의 아버지는 디오클레티안 치하 때 부황제들 가운데 하나였다). 당신이 날 박해하려고 한다면 진리를 부인하기보다는 박해를 달게 받을 것이오. 하지만 이건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당신에게는 제국을 주고 우리에게는 교회를 주신 분이 하나님이셨음을 말이오. 우리가 정권을 탈취한다면 그건 우리가 하나님을 반대하는 게 될게요. 그러나 당신이 교회에 간섭하신다면 당신은 보통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이 말은 니케아파의 지도자가 아리우스파 황제에 대항해 말했다. 드디어 니케아파가 완전히 승리하는 날이 왔다. 더 이상 그런 소모성의 싸움들을 방지하기를 바라는 황제들이 삼위일체를 반대하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칙령을 발했다. 2020-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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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강요 영어 수업 - 제육 계명 살인
Cain slaying Abel by Peter Paul Rubens Lesson XVIII제육 계명 살인Sixth Commandment Murder 2018년 3월 2일 방송된 SBS 궁금한 이야기 Y에서는 문재인 대통령의 변호사 인생 중 가장 한 맺힌 사건으로 알려진 엄궁동 부녀자 살인사건의 진실을 파헤쳤습니다. 지난 1990년 1월 4일, 부산 엄궁동 낙동강 주변 갈대숲에서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한 모습의 시신 한 구가 발견됐습니다. 성폭행을 당한 후 둔기로 머리를 가격당해 두개골이 함몰된 채 사망한 상태였습니다. 당시 현장에는 범인을 단정할 수 있는 어떤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피해자를 알아본 결과 인근 지역에 살고 있던 삼십대 여성 김 모 씨였습니다. 피해자와 함께 있던 그녀의 애인은 2명의 범인과 격투 끝에 도망을 쳤고 늦은 밤이어서 가해자의 인상착의 등을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미제 사건으로 남을 줄 알았던 엄궁동 살인사건의 범인은 뜻밖의 사건을 통해 검거됐습니다. 1991년 11월 경찰을 사칭해 금품을 갈취했던 2인조 강도사건이 발생했는데 범행 수법과 장소가 부산 엄궁동 2인조 살인사건을 떠올리게 했다는 것입니다. 경찰은 2인조 강조를 범인으로 체포했고 그들 역시 순순히 범행일체를 자백했습니다. 그런데 27년이 지난 지금 무기징역 선고를 받았던 그들이 무죄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자백을 했던 것은 경찰의 고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거짓 자백을 했다고 밝혔습니다. 당시에 이 사건의 변호를 맡은 변호사는 문재인 대통령이었습니다. 무죄를 주장하고 있는 장동익씨는 이날 방송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변호사 시절 보낸 편지를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편지에는 “내 생각에 어떻게 해서든지 재심이 열리기만 한다면 동익씨의 억울함을 밝힐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라는 내용이 담겨있었습니다. 이들이 범인이 아니라는 증거는 바로 장동익 씨의 좋지 않은 시력상태였습니다. 장 씨는 시각 장애 1급 장애인으로 근거리의 사물을 알아보지 못할 만큼 안 좋은 시력을 지녔습니다. 불빛 하나 없는 캄캄한 밤에 강으로 사람을 끌고 가서 돌로 피해자의 머리를 가격하여 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판단입니다. 27년이 지난 지금 무죄를 주장하는 장 씨는 진실을 밝힐 수 있을까요. 21년 만에 만난 딸에게 장 씨는 말했습니다. “너는 살인자의 딸이 아니다. 너에게 평생 따라다녔을 살인자의 딸이라는 누명을 꼭 지워주겠다.” 장 씨는 또 이렇게 말을 이었습니다. “내 딸을 만나러 오는데 걸린 시간은 21년하고도 5개월, 그러나 딸은 제 방에서 나올 생각을 않습니다. 우리를 이렇게 만든 저들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오릅니다. 그래도 분노에 잡아먹히지 않을 것입니다. 저 아이의 상처는 내가 누명을 벗는. 거기서 치유될 것입니다.” 장 씨가 진실을 밝히고 27년 만에 무죄를 입증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됩니다. 하지만 대법원까지 이어졌던 재판에서 유죄 판결은 바뀌지 않았으며 결국 이 사건은 문 대통령이 변호사로 지냈던 35년 동안 가장 한스러운 사건으로 남았다고 합니다. 가인이 자신의 동생 아벨을 죽인 이후 인간은 살인을 끊임없이 저지르고 있습니다. 성경의 관점에서 볼 때 살인은 매우 넓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 살인이라는 말 자체가 누구나 죄의식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요소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산상수훈에서의 예수님의 가르침은 아주 의미심장합니다.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살인이란 단지 외적인 행동일 뿐이고 십계명도 그런 행동만을 지적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이 의미에 대해 칼빈은 『기독교강요』 제2권 제8장 39항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THOU SHALT NOT KILL. 39. The purport of this commandment is that since the Lord has bound the whole human race by a kind of unity, the safety of all ought to be considered as entrusted to each. In general, therefore, all violence and injustice, and every kind of harm from which our neighbour's body suffers, is prohibited. Accordingly, we are required faithfully to do what in us lies to defend the life of our neighbour; to promote whatever tends to his tranquillity, to be vigilant in warding off harm, and, when danger comes, to assist in removing it. Remembering that the Divine Lawgiver thus speaks, consider, moreover, that he requires you to apply the same rule in regulating your mind. It were ridiculous, that he, who sees the thoughts of the heart, and has special regard to them, should train the body only to rectitude. This commandment, therefore, prohibits the murder of the heart, and requires a sincere desire to preserve our brother's life. The hand, indeed, commits the murder, but the mind, under the influence of wrath and hatred, conceives it. How can you be angry with your brother, without passionately longing to do him harm? If you must not be angry with him, neither must you hate him, hatred being nothing but inveterate anger. However you may disguise the fact, or endeavour to escape from it by vain pretexts. Where either wrath or hatred is, there is an inclination to do mischief. If you still persist in tergiversation, the mouth of the Spirit has declared, that “whosoever hateth his brother is a murderer,”(1 John 3:15); and the mouth of our Saviour has declared, that “whosoever is angry with his brother without a cause shall be in danger of the judgment: and whosoever shall say to his brother, Raca, shall be in danger of the council: but whosoever shall say, Thou fool, shall be in danger of hell fire”(Mt. 5:22). 이 영어 원문의 대략적인 해석은 다음과 같습니다. 제육 계명 살인하지 말지니라 출 20:13 39. 이 계명의 목적은, 주께서 인류 전체에 일종의 통일성이 있도록 한데 묶어 두셨으므로 우리는 각각 전체의 안전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약하면, 이웃의 신체를 해할 일은 폭행, 상해 기타 어떤 것이든지 일체 금지하십니다. 따라서 이웃의 생명을 구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충실히 이용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들의 평화에 도움이 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하라, 해로운 것이면 막아내라, 이웃이 위험한 처지에 있으면 도와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입법자로서 이렇게 말씀하신다는 것을 상기한다면, 우리는 동시에 그는 이 원칙으로 우리의 영혼을 인도하려 하신다는 것도 생각해야 합니다. 마음속의 생각을 보시며 특히 그것을 중시하시는 분이 육체에만 진정한 의를 가르치신다면, 그것은 우스운 이야기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계명은 마음으로 살인하는 것을 금하며, 형제의 생명을 구하겠다는 마음을 가지라고 명령하십니다. 참으로 살인은 손이 낳는 것이지만, 마음이 분노와 증오심에 감염될 때에 살인을 잉태합니다. 형제에 대해서 노하면서 그를 해하려는 욕망이 치밀어 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형제에 대해 노하지 않는다면 미워할 수도 없습니다. 증오심은 지속되는 분노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분노나 증오심이 있는 곳에는 해를 주려는 의도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수단으로도 감출 수 없고 피할 수도 없는 사실입니다. 당신이 계속 변명할지라도 성령께서는 이미 “마음속에서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라”(요일 3:15)고 선언하셨고, 주 그리스도께서는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 5:22)고 선언하셨습니다. 칼빈의 살인에 대한 가르침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습니다. 즉 목숨을 죽이는 것만이 살인의 전부냐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음과 태도도 문제를 삼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성내는 것뿐만 아니라 모욕하는 말조차 살인에 버금가는 죄가 됩니다. 라가라 하는 말의 원래 뜻은 비었습니다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라가(raca)를 사용해 욕을 하게 되면 속이 빈 놈이나 정신 나간 놈이라는 뜻으로 모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미련한 사람이라 하는 말의 원어 모로스(moros)는 바보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이 말들은 도덕적으로 바보이거나 정신 나간 사람을 의미합니다. 즉 바보짓을 하거나 정신 나간 짓을 하는 사람을 빗대는 말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들을 듣는 사람은 마음과 명예에 심한 상처를 받게 됩니다. 예수님은 누구를 비방하거나 모욕하는 것조차도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제육 계명을 어기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우쳐주십니다. 주님의 이 가르침은 우리의 본성을 적나라하게 밝혀주십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화를 내고 투덜대고 비방하고 무시하는 말을 함부로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그러한 행위가 살인을 저지르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성향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주님께서 말씀해주십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마 5:43-45 우리는 이웃 사랑과 기도로 자신을 다스려 제육 계명을 지켜야 할 것입니다. 2020-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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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세계 교회사 31 - 니케아 신조
니케아 신조 아마 직전 총회장이셨던 것 같다. 그는 두루마기 차림의 설교 중에 찬송가를 자작하여 부르시는 목사님이셨다. 우리 교단 가장 큰 교회의 목사님이시기도 했다. 그리고 바로 그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는 총회장이셨다. 그가 이제 바로 뒤를 이은 총회장한테 나무망치와 받침을 물려주고 증경 총회장이 되어 바깥으로 나오셨다. 몇 분 총대 목사님이 이 증경 총회장과 맞닥뜨렸다. 그들의 만남과 대화는 여느 청년들이 모여 노닥거리는 모양과 진배없었다. 햇병아리 신학생의 눈에는 진기한 구경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거기에는 진솔한 인간의 모습이 우러나고 있었기 때문이다.요즘의 세태처럼 권력과 부귀와 장수 나부랭이보다는 지혜를 하나님께 구한 솔로몬 왕이 이렇게 말했다. “해 아래 새것이 없다.” 그런데 주 후 325년 니케아에서 인간 역사상 유례없는 일이 발생했다. 다시 말해 해 아래 새로운 일이 일어났다. 바벨탑 이래 인간들이 모이면 쓰잘 데 없는 일을 일삼기 일쑤인데 니케아 총회에서는 전혀 달랐다. 인간들이 웅성웅성 모여 인류 최초로 신에 대한 협의와 결정을 내렸다. 니케아 총회는 부활절 날짜를 결정했다. 부활절은 봄이 시작되고 밤과 낮의 길이가 같아지는 날 이후 첫 번째 보름달이 지난 첫 번째 주일로 결정했다. 이것은 유대인과 이방인과 그리스도인의 관습이 짬뽕 된 것이었다. 의견이 분분했던 부활절이 확정됐다. 이어서 니케아 총회는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관계에 대한 논란도 종지부를 딱 찍었다. 이것은 아다나시우스의 의견을 따라서 결정되었다. 이로써 아리우스의 해괴한 주장은 빛을 잃고 불가사의한 삼위일체는 번쩍거리게 되었다. 이 내용을 담은 걸 니케아 신앙고백이라고 한다. 물론 이 신조가 몇 년 뒤에 작성되었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니케아 신앙고백이라고 하는 것은 그게 니케아 총회의 사상을 참으로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게 영국 공동기도서에 번역되어있는 걸 한글로 옮기면 이렇다. “나는 하늘과 땅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만물의 창조주 전능하신 한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독생 성자이시며 만세 전에 성부와 함께 계셨고 하나님의 하나님, 빛의 빛이시며 참되신 하나님의 참되신 하나님이신, 나셨지만 만들어지지 않으셨고, 성부와 한 속성을 지니셨고, 만물을 만드셨고, 우리 인간을 위해 우리 구원을 위해 하늘에서 내려오셨고, 그리고 동정녀 마리아의 성령을 통해서 인간이 되신 한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예수님은 본디오빌라도 치하에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고난을 받으사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사흘 만에 예수님은 성경 말씀대로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늘에 오르사 성부 오른쪽에 앉아 계시다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 위해 영광스럽게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의 나라는 영원할 것입니다.나는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오신 생명의 주와 수여자이신 성령님을 믿습니다. 성령님은 성부와 성자와 함께 경배와 영광을 받으며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2020-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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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강요 영어 수업 - 제오 계명 효도
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Lesson XVII제오 계명 효도Fifth Commandment Flial Duty 부모님과 함께하면 돌아보니 가시밭길 그 길이 꽃길이었습니다. 부모님과 같이 걸으면 아픈 돌팍길 그 길이 비단길이었습니다. 부모님이 옆에 계시면 캄캄해 무서웠던 길 그 길이 빛으로 나아가는 길이었습니다. 부모님과 함께한 가장 훌륭한 시는 아직 씌어지지 않았습니다. 부모님과 같이 부르는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아직 불리지 않았습니다. 부모님이 옆에 계신 최고의 날들은 아직 살지 않은 날들입니다. 부모님과 보고 싶은 가장 넓은 바다는 아직 항해하지 않았고 가장 먼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불멸의 춤은 아직 추지 않았습니다. 부모님이 옆에 계시지 않을 때 가장 빛나는 별은 아직 발견되지 않은 별이고 무엇을 해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그때 내가 부모 되어 비로소 진정한 무엇인가를 할 수 있을까요. 부모님과 같이 걷지 않아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때가 비로소 진정한 인생 여행의 시작일까요. 2016년 tvN에서 방영한 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즈(2016)는 노년의 삶을 인상 깊게 그려냈습니다. 마지막 방송이 나간 후 노희경 작가는 블로그에서 이런 소감을 적었습니다. “작가가 되어서 이렇게 잔인해도 되나. 드라마의 결말을 쓰며, 내 잔인함에 내가 소름이 돋았다. 아무리 포장해도 이 드라마의 결론은 부모님들, 자식들에게 의지하지 마세요, 우리 살기 바빠요, 그리니 당신들은 당신들끼리 알아서 행복하세요, 우리는 이제 헤어질 시간이에요, 정 떼세요, 서운해 하지 마세요, 어쩔 수 없잖아요, 그건 아닌가 싶었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부모에게 쓰는 내내 끝난 후에도 참 많이 미안했다.” 독일 여성감독 도리스 되리의 영화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원제 Cherry Blossoms 벚꽃 Hanami 꽃놀이)에 이런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늘 일본에 가보고 싶었다. 후지산과 벚꽃을 그와 함께 꼭 한번 보고 싶었다. 남편없이 구경하는 건 상상할 수가 없다.” 이 영화의 첫 번째 대사이자 아내 트루디의 말입니다. 남편 루디와 함께 일본 후지산의 벚꽃을 보고 싶었다고 독백하던 아내 트루디는 남편의 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을 의사로부터 전해 듣습니다. 그래서 멀리 산다는 핑계로 한동안 보지 못했던 자식들을 볼 겸 여행을 제안하죠. 베를린에 도착한 부부는 아들 내외와 손자 손녀가 사는 집으로 갑니다. 반가움도 잠시 아이들은 각자 게임에 빠져있고, 아들 내외 그리고 뒤이어 도착한 딸은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죠. “왜 온 거야. 시간 없는데…” 그래도 오랜만에 모인 가족이니 시간을 내 시내 구경도 하고 함께 사진도 찍고 식사도 하죠. 하지만 부모는 이미 너무 커버린 자식들이 버겁고 자식은 이제 귀찮아진 부모와 같이 있는 시간이 불편합니다. 부부는 자식에게 폐 끼치는 것 같은 느낌에 자리를 뜨죠. 자식들은 그런 부모를 보며 화를 냅니다. 그러곤 돌아서서 죄책감에 눈물짓습니다.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왜 그렇게밖에 말하지 못하는지... 그들의 행동을 눈치챈 트루디는 자기들만의 여행을 바다로 가자고 루디를 보챕니다. 도착한 발트해 파도소리에 잠을 못이루겠다고 불평하는 루디. 그리고 그런 루디를 타이르며 함께 춤추고 즐기길 원하는 트루디. 그날 밤을 그렇게 지새고 어젯밤 시끄럽게 쳐대던 파도소리가 고요해졌다며 아내 트루디를 깨우던 루디. 그러나 그 파도처럼 루디는 고요하게 잠들어 버렸습니다. 이 때문에 또 가족이 모이게 됩니다. 도쿄에 거주하던 막내아들까지요. 자신을 희생해가며 가족들을 아껴봐 주던 아내였기에 루디의 슬픔은 더욱더 큽니다. 장례를 치르는 중에 바다를 보며 그는 중얼거립니다. “정말 고요하군....” 장례식에서 자식들은 이제 와 자신이 아무것도 해 드릴 수 없음에 눈물 흘립니다. 그러면서 한편 남겨진 아버지에 대한 부담을 느끼죠. 그들은 바쁘고 엄마는 이제 없고 아버지는... 아버지는 어쩌지... 아버지 루디는 하루살이의 하루의 삶은 천국 그래서 그들의 하루 비행은 행복이라는 말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그의 그런 슬픔을 자식들은 크게 신경 쓰지 않습니다. 오히려 남아있는 것이 아버지임을 불평하고 서로에게 미루며 마치 짐이 하나 생긴 듯 행동을 취합니다. 아버지 그 이름만으로도 자녀에겐 새처럼 날개를 펴고 마음대로 날 수 있는 하늘입니다. 어머니 그 이름만으로도 자녀에겐 새처럼 날개를 접고 포근히 잠들 수 있는 보금자리인데도 말입니다. 몸빛이 검고 울음소리가 흉측하여 죽음을 알리는 새로 전 세계에 알려진 까마귀는 자기 어미에게 먹이를 물어다 줍니다. 그래서 까마귀를 효조(孝鳥)라고 해서 일본에서는 상당히 귀하게 여기는 까닭에 흔히 볼 수 있는 새이기도 합니다. 농경사회에서는 노쇠한 부모를 자식이 까마귀처럼 공양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현대사회에서는 그러한 의미가 좀 쇠퇴한 감이 있기는 하더라도 그 정신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부모를 공경하는 효도의 의미는 물질과 육체적인 섬김은 물론이고 부모의 뜻과 생각을 존중한다는 데 더 무게를 두고 있습니다. 그 의미에 대해 칼빈은 『기독교강요』 제2권 제8장 36항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HONOUR THY FATHER AND THY MOTHER: THAT THY DAYS MAY BE LONG UPON THE LAND WHICH THE LORD THY GOD GIVETH THEE. 36. Wherefore, we ought to have no doubt that the Lord here lays down this universal rule--viz. that knowing how every individual is set over us by his appointment, we should pay him reverence, gratitude, obedience, and every duty in our power. And it makes no difference whether those on whom the honour is conferred are deserving or not. Be they what they may, the Almighty, by conferring their station upon them, shows that he would have them honoured. The commandment specifies the reverence due to those to whom we owe our being. This Nature herself should in some measure teach us. For they are monsters, and not men, who petulantly and contumeliously violate the paternal authority. Hence, the Lord orders all who rebel against their parents to be put to death, they being, as it where, unworthy of the light in paying no deference to those to whom they are indebted for beholding it. And it is evident, from the various appendices to the Law, that we were correct in stating, that the honour here referred to consists of three parts, reverence, obedience, and gratitude. The first of these the Lord enforces, when he commands that whose curseth his father or his mother shall be put to death. In this way he avenges insult and contempt. The second he enforces, when he denounces the punishment of death on disobedient and rebellious children. To the third belongs our Saviour's declaration, that God requires us to do good to our parents(Mt. 15). And whenever Paul mentions this commandment, he interprets it as enjoining obedience. 이 영어 원문의 대략적인 해석은 다음과 같습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출 20:12 36. 그렇기 때문에 주께서 여기서 한 일반적 원칙을 세우셨다는 것을 우리는 의심해서는 안 됩니다. 즉, 주의 임명으로 어떤 사람이 우리 위에 세워진 것을 알면, 우리는 그에게 경외와 순종과 감사를 드리며, 그밖에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우리의 웃어른이 이런 존경을 받을 자격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문제가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그들은 하나님의 섭리로 그 지위에 있게 된 것이며, 이 일이 우리가 그를 공경하라는 하나님의 뜻을 증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 세상에 낳아준 우리의 부모를 공경하라고 명백히 말씀하십니다. 자연 자체도 이 일을 우리에게 가르칠 것입니다. 반항이나 고집으로 부모의 권위를 무시하는 자들은 사람이 아니라 기괴한 동물입니다. 그래서 주께서는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모두 사형에 처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자기를 낳아 준 분들의 노고를 인정하지 않는 자들은 인생의 혜택을 받을 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공경에 경의와 복종과 감사의 세 부분이 있다고 우리가 말한 것은 율법에 첨가된 여러 말씀을 보아도 분명히 올바릅니다. 주께서는 부모를 저주하는 자는 죽이라고 명령하심으로써 처음 부분인 경의를 주장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방법으로 그는 멸시와 박대를 복수하십니다. 또 순종하지 않고 반항하는 자녀에 대해서 사형을 명령하심으로써(신 21:18-21) 둘째 부분인 순종을 강조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마태복음 15장에서 부모를 후대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계명이라고 하신 말씀은 존경의 셋째 부분인 감사에 관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 계명을 언급할 때마다 강제적인 복종을 요구하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존 스토트(John Stott)는 그의 저서 『그리스도인의 확신』(Confirmation)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십계명 두 판을 모세에게 주셨습니다. 첫째 돌판에는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의무가 새겨져 있습니다. 둘째 돌판에는 이웃에 대한 인간의 의무가 새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부모를 공경하라는 제오 계명을 첫째 돌판에 새기셨습니다. 그 이유는 보이는 육신의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아니하는 부모이신 하나님을 공경할 수 없다는 사실을 하나님이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웃에 대한 우리의 의무는 감당하지 못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의무는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온당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이웃들도 섬겨야 합니다. 하늘나라에 적합한 사람은 세상에서도 쓸모가 있어야 합니다. 제오 계명은 부모에 대한 의무를 지시할 때 다른 종류의 부모들도 내포하고 있습니다. 즉 정치적인 부모(세상의 권좌에 있는 사람들) 영적인 부모(교회의 목사들) 그리고 연륜과 경험을 통한 가르침을 받아 부모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스승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오 계명이 특별히 지적하고 있는 것은 육적인 부모입니다. 제오 계명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 20:12)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 위에 있게 하신 이들을 우리가 존경하고 감사하는 마음과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본질적으로 권위를 싫어합니다. 그러므로 자녀들이 부모를 공경하도록 배우지 아니하면 나중에 정당한 권위를 부여받은 대상에게도 거역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자녀들이 자신을 낳아준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다면 하나님도 경외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 22:6) 말씀합니다. 또한 부모들도 자녀들의 마땅한 공경을 받기에 합당한 부모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경 말씀을 따르는 부모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엡 6:4 2020-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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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세계 교회사 30 - 니케아 총회
니케아 총회 고풍스런 대전중앙교회에 모인 목사님들과 장로님들의 모습은 엄숙하고 경건했다. 우리 총신 신학생들은 총대들 틈에 뒤섞이니 이제 알을 깨고 나온 병아리 꼴이었다. 그렇게 높게 보이던 신학부 졸업반 전도사님들도 어설퍼 보이기는 매한가지였다. 한 목사님이 손을 쳐들고 “의자앙!”하며 사회 석 앞으로 어기적 나갔다. 마이크를 손에 쥐고 발언을 했다. “에, 우리가 이렇게 성 총회로 모였으니 어찌 입씨름만 한 대서야 하나님 앞에 면목이 서겠습니까? 낮에는 회의를 하고 밤에는 부흥사경회를 열어 은혜를 받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동의가 들어오고 왁자하니 재청이 울리고 가부를 묻는 소리가 찌렁하니 예배당을 휘감았다. 기름 부음 받는 자들의 “예”하는 소리가 초등학생들 구령처럼 장내를 울렸다. 해가 뉘였거렸다. 기름 부음 받은 분들의 즐거운 저녁밥이 자위가 돌 무렵 총회에 모인 총대들이 결의한 대로 부흥사경회가 시작됐다. 가라앉은 설교자의 음성이 성령의 열매를 강조하느라 냅다 외치는 소리에 뒤이어 쿵 하며 대전중앙교회 마룻바닥을 울렸다. 일순 장내가 조용해졌다. 너나없이 무슨 소리인가 하고 두리번거렸다. 보니 한 목사님이 몸을 앞뒤로 흔들며 주무시다가 의자 밖으로 굴러떨어지신 것이었다. 나라도 하나였고 교회도 하나였는데 그리스도인의 행습은 로마 군인들처럼 일정하지가 못했다. 교회의 가장 중요한 명절인 부활절만 해도 그랬다. 유월절을 지키는 유대인처럼 봄에 달이 꽉 찬 날을 지키는 사람도 있었다. 이를테면 부스럼 예방한답시고 키들거리며 부럼을 까는 정월 대보름을 부활절로 지키는 셈이었다. 그런가 하면 이교도들이 자연을 지배하는 신들이 기지개를 펴고 일어나는 것을 경축했던 봄의 첫날을 부활절로 지키는 사람도 있었다. 부활주간의 부활절날도 가지각색이었다. 어떤 사람은 부활절을 일요일이라고 주장했다. 삼위일체와 이런 모든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콘스탄틴은 주 후 325년 로마의 수도 콘스탄티노플 근처에 있는 안양만 한 니케아 시에서 회집하는 총회를 소집했다. 이 모임을 니케아공의회라고 한다. 이건 전체교회의 지도자들이 모인 최초의 집회였다. 전 세계에서 감독들이 꾸역꾸역 니케아로 모여들었다. 아프리카와 시리아에서 메소포타미아와 페르샤에서 폰투스, 갈라디아, 밤빌리아, 길리기아, 프리지아, 트라키아, 마케도니아, 아가야 및 멀고 먼 스페인 등지에서 감독들이 모여들었다. 로마에서는 사제들이 왔다. 역사가는 콘스탄틴처럼 어떤 군주가 자기의 구세주한테 경의를 표하기 위하여 그토록 성대한 축제를 마련한 적이 전무후무했노라고 니케아 총회의 모임에 대해 말했다. 감독들과 사제들이 거대한 홀에 운집하여 황제를 기다렸다. 황제가 홀에 모습을 드러내자 모두 일어섰다. 그는 하늘에서 보낸 메신저 같았다. 그의 옷을 수놓은 금과 보석들이 빛을 받아 찬란하다 못해 하얗게 빛났다. 황제는 총대들을 만찬에 초대했다. 감독들과 사제들이 줄을 지어 만찬장에 들어설 때 근위병들이 양쪽에 칼을 뽑아 들고 있었다. 그것은 그들을 벌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한테 경의를 표하기 위한 것이었다. 2020-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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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리틀메시지 _에스더Esther
- 에스더Esther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한번도 언급되지 않지만 모든 사건에 하나님의 섭리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페르시아인들은 주전 539년 바빌론을 정복했다. 에스더의 사건들은 수산에서 일어났다. 그곳에 왕의 겨울 궁전이 있었다. 에스더의 아하수에로Ahasuerus라는 명칭은 이집트의 파라오가 왕의 대명사인 것처럼 페르시아의 최고 통치자의 칭호였다. 그러므로 에스더를 왕비로 삼은 페르시아의 아하수에로는 크세르크세스 1세였을 것이다. 에스더서의 사건들은 크세르크세스 1세 재위 3년부터 12년까지 10년 동안에 일어난 일들이다. 성경에서 여성의 이름을 따른 책은 에스더와 룻뿐이다. 룻은 유대인과 결혼한 이방 여인이었다. 반면에 에스더는 이방인과 결혼한 유대 여인이었다. 둘 다 신앙과 용기의 여인들이었다. 둘 다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룻은 다윗의 조상이 되는 아들을 낳았다. 에스더는 유대인을 전부 죽이려는 원수를 막았다. 에스더가 그 일의 결심을 위해 말한 한마디는 죽으면 죽으리라였다. 이런 시가 있다. 가지가 담을 넘을 때 _정끝별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이를테면 수양의 늘어진 가지가 담을 넘을 때 그건 수양 가지만의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얼굴 한번 못 마주친 애먼 뿌리와 잠시 살 붙였다 적막히 손을 터는 꽃과 잎이 혼연일체 믿어주지 않았다면 가지 혼자서는 한없이 떨기만 했을 것이다 한 닷새 내리고 내리던 고집 센 비가 아니었으면 밤새 정분만 쌓던 도리 없는 폭설이 아니었으면 담을 넘는다는 게 가지에게는 그리 신명 나는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가지의 마음을 머뭇 세우고 담 밖을 가둬두는 저 금단의 담이 아니었으면 담의 몸을 가로지르고 담의 정수리를 타 넘어 담을 열 수 있다는 걸 수양의 늘어진 가지는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목련 가지라든가 감나무 가지라든가 줄장미 줄기라든가 담쟁이 줄기라든가 가지가 담을 넘을 때 가지에게 담은 무명에 획을 긋는 도박이자 도반이었을 것이다 사람은 새로운 영역과 미래로의 진입을 위해 첫발을 떼는 순간 두렵고 떨리는 마음과 희생을 각오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렇듯 가지가 담을 넘어서는 데에도 용기가 있기 때문에 가능할 것이다. 그것을 믿음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믿음이 없다면 어떻게 한낱 가지나 줄기가 이 세상의 단단한 담과 깊은 절망의 절벽을 건너갈 수 있겠는가. 에스더서의 주요 교훈은 한낱 가지나 줄기도 담을 넘는 데 용기가 필요한 것처럼 하나님의 뜻을 위해 죽음을 각오한 용기가 필요할 때가 있다는 것이다. 세상 나라들의 주권자는 하나님이시므로 주의 백성은 주의 뜻에 복종하고 따라야 한다. 2024-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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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리틀메시지 _에스더Es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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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리틀메시지 _느헤미야Nehemiah
- 짐실은 노새 느헤미야Nehemiah는 그 공동체를 이어받아 외적 안정을 확보했다. 반면 에스라는 바빌론에서 돌아온 새 공동체의 영적 안정을 확립했다. 그는 아버지가 하가랴이고 형제가 하나니라는 것 말고는 알려진 게 없다. 아마 그의 할아버지는 예루살렘이 멸망했을 때 바빌론으로 끌려온 포로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페르시아에서 태어났을 것이다. 느헤미야서의 생생한 묘사는 그의 개인 일기에 근거한 자료였을 것이다. 그는 아닥사스다 왕의 술 관리관이었을 때 예루살렘 형편이 아주 어렵다는 말을 들었다. 그는 예루살렘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리고 얼마 뒤 그는 왕의 술 관리관이 되었다. 이런 시가 있다. 기도 _라반드라나트 타고르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위험에 처해도 두려워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게 하소서 고통을 멎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고통을 이겨 낼 가슴을 달라고 기도하게 하소서 생의 싸움터에서 함께 싸울 동료를 보내달라고 기도하는 대신 스스로의 힘을 갖게 해달라고 기도하게 하소서 두려움 속에서 구원을 갈망하기보다는 스스로 자유를 찾을 인내심을 달라고 기도하게 하소서 내 자신이 성공에서만 신의 자비를 느끼는 겁쟁이가 되지 않도록 하시고 나의 실패에서도 신의 손길을 느끼게 하소서 그는 유다 총독으로 임명받아 주전 445년 성벽을 재건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부임했다. 하나님의 소명을 성취하기 위한 그의 깊은 신앙은 그의 기도와 강한 확신으로 드러난다. 그 땅에 회복이 이어졌지만 유대 민족은 시련과 비난의 시기를 겪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고 계셨다. 느헤미야의 강조는 하나님을 신뢰하라는 것이었다. 2024-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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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리틀메시지 _느헤미야Nehemi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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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리틀메시지 _에스라Ezra
- 솔로몬의 왕궁건설 에스라Ezra는 역대기하가 끝나는 곳에서 시작한다. 이스라엘을 정복한 바빌론이 주전 587년에서 586년에 많은 백성을 잡아가고 도시와 성전을 파괴했다. 주전 538년 페르시아 왕 고레스가 유대인들이 그들의 땅으로 돌아가 성전 재건을 허락하는 조서를 공포했다. 그때 스룹바벨의 인솔로 5만여 명이 돌아왔다. 바빌론 포로 생활 70년이 끝났다. 어려움이 많았고 지체되기는 했지만 주전 515년 성전이 완성되었다. 이런 시가 있다. 담쟁이 _도종환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 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율법학자 에스라는 주전 458년 2천여 명의 유대인과 예루살렘에 왔다. 에스라의 주요한 일은 율법의 연구와 해석이었다. 그는 자신의 일을 통해 새 시대 공동체의 영적 지도자가 되었다. 바빌론 포로에서 돌아와 성전을 재건하는 이스라엘 백성은 도종환 시인이 노래하는 담쟁이 잎 같았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가 담쟁이 수 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가는 담쟁이에게 절망의 벽은 없어 보인다. 그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담긴 성경을 믿음으로 붙잡고 성전을 재건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절망의 벽은 없어 보였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독려하는 지도자 에스라가 없고 믿음의 동지적 연대가 없었다면 이스라엘 백성은 그 척박하고 방해가 많은 땅에서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2024-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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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리틀메시지 _에스라Ez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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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리틀메시지_역대기하2Chronicles
- 바벨론 포로들 역대기하2Chronicles는 다윗 자손의 통치를 크게 다룬다. 그 기간은 솔로몬 시대부터 주전 586년 시드기야 치하 예루살렘 함락까지다. 역대기서 전체에 걸쳐 남 왕국 유다를 집중적으로 강조한다. 남 왕국 유다의 흥망성쇠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지 안지키는지에 따라 조명이 되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께 신실하지 못하고 그들의 신앙의 의무에 태만해서 망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고향을 떠나 머나먼 바빌론으로 끌려갔다. 이런 시가 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_이상화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자욱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를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쁘게나 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매던 그 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 다오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웃어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지폈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고 오는 봄은 누구도 빼앗을 수 없다. 그것이 천지만물을 들썩이게 하는 봄의 풋내이고 봄의 푸른 웃음이다. 그러나 들을 빼앗긴 자에게 오는 봄은 절박하다. 봄조차 빼앗기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봄의 답답함이고 봄의 푸른 설움이다. 들의 봄과 인간의 봄 자연의 봄과 시대의 봄은 이렇게 갈등한다. 온몸에 햇살을 받고 이들을 발목이 저리도록 실컷 밟아보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이야말로 내 나라 내 땅에 대한 지극한 사랑의 표현이다. 떠나온 길이 멀면 돌아갈 길도 멀다. 바빌론의 유대인들이 그랬을 것이다. 역대기하 마지막에 유대인의 예루살렘 귀환을 허락하는 고레스의 조서가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의 백성이 믿음의 불성실로 하나님의 징벌을 받아 고향을 떠나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하나님의 은혜로 그들의 고향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2024-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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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리틀메시지_역대기하2Chronic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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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리틀메시지_ 역대기상1Chronicles
- 바빌로니아 큰 물가 마을 역대기상1Chronicles과 역대기하는 원래 히브리어 원문에서 한 권이었다. 히브리어의 구약 성경을 그리스어로 번역한 사람들이 그것을 두 권으로 나누었다. 본래의 제목은 뒤에 남은 일들이라는 뜻이었다. 그것은 사무엘서와 열왕기서에 들어있지 않은 작은 이야기들이 들어있기 때문이었다. 마찬가지로 영어 제목 '크로니클스Chronicles'도 히브리어 제목처럼 '일상의 일들'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이것은 역대기서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 특별히 왕들의 생활들에서 일상의 중요한 일들을 차례대로 이야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초점은 다윗과 유다 왕국에 있다. 그리고 그 관점은 제사장들의 것이다. 유대 민족은 신앙의 불성실로 망해 포로가 되어 예루살렘에서 바빌론으로 끌려갔다. 이런 시가 있다. 바빌론 강가에서 _보니 엠 바빌론 강가에 우리는 앉아서 우리는 울었어요 시온을 생각하며 바빌론 강가에 우리는 앉아서 우리는 울었어요 시온을 생각하며 사악한 무리들이 우리를 포로로 잡아왔어요 그리고 우리에게 노래를 부르라고 했지요 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주의 노래를 부를 수 있나요 이런 낯선 땅에서 사악한 무리들이 우리를 포로로 잡아왔어요 그리고 우리에게 노래를 부르라고 했지요 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주의 노래를 부를 수 있나요 이런 낯선 땅에서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말과 우리 가슴에서의 명상을 여기 오늘밤 그대 앞에서 받아주어요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말과 우리 가슴에서의 명상을 여기 오늘밤 그대 앞에서 받아주어요 바빌론 강가에 우리는 앉아서 우리는 울었어요 시온을 생각하며 바빌론 강가에 우리는 앉아서 우리는 울었어요 시온을 생각하며 바빌론 강가에 바빌론의 어두운 눈물 우리는 앉아서 당신은 노래를 불렀죠 우리는 울었어요 사랑의 노래를 불러요 시온을 생각하며 바빌론 강가에 바빌론의 거친 작은 조각들 우리는 앉아서 당신은 사람들이 우는 것을 듣지요 우리는 울었어요 그들은 그들의 하나님이 필요해요 시온을 생각할 때 오 힘을 가져요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 남쪽 약 110km 떨어져 있는 유프라테스 강가에 바빌론이란 고대 국가가 번성했었다. 바빌론이 유대 왕국을 정복하여 많은 횡포를 저질렀다. '바빌론 강가에서'라는 노래는 바빌론에 정복당한 유대인들의 심정을 노래한 메시지가 그 내용이다. 이 노래는 시편 137편을 토대로 작사 작곡을 하였다. 바빌론 포로생활 때 유대인들의 슬픔과 시온의 그리움을 노래한 시가 시편 137편이다. 이 노래를 부른 가수들은 여성 3인과 남성 1인으로 구성된 4인조 보컬 '보니 엠'이다. 그들은 자메이카 출신의 영국 가수들이다. 그들은 악기를 전혀 다루지 않고 순수한 보컬만으로 서인도 제도의 특유한 창법을 구사하는 게 특징이다. 그들은 1978년 이 노래를 불러 세계적인 인기를 얻었다. 역대기상과 역대기하는 바빌론 포로 이후 이스라엘 땅에 돌아온 유대인들에게 중요했다. 그들은 다윗의 신앙 본보기가 필요했고 성전에 대한 강조는 그것을 재건할 때 필요했다. 역대기서는 변화와 어려움의 시기에 성전을 재건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에게 격려와 힘을 주었다. 그것은 다윗의 신앙과 솔로몬의 지혜와 성전 건축의 영광스러운 역사를 통해서였다. 2024-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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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리틀메시지_ 역대기상1Chronic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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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리틀메시지_ 열왕기하2Kings
- 예수님과 파도와 배 열왕기하2Kings는 이스라엘 왕국과 유다 왕국이 무너지고 사로잡히는 것을 기록한다. 영적 타락은 정치와 사회의 악화로 이끈다. 선지자들의 끊임없는 사역과 하나님의 적지 않은 징계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왕국과 유다 왕국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심판을 받아야 했다. 이런 시가 있다. 어부의 기도 _작자 미상 주님 내가 죽는 날까지 물고기를 잡을 수 있게 하시고 마지막 날이 찾아와 주님이 던진 그물에 내가 걸렸을 때 바라옵건대 쓸모없는 물고기라 여겨 버림을 당하지 않게 해 주소서 예수 그리스도는 의로운 왕이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한 대제사장과 말씀의 선지자이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님으로 늘 바라보고 살 때 주님이 던진 그물에 걸리면 버림을 당하지 않게 될 것이다. 열왕기서는 개인이나 나라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따라야 한다는 것을 교훈하는 역사의 기록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물론이고 특별히 왕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의 행위는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대한 영적인 신실함과 순결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 준다. 이스라엘의 지도자인 그들의 반복되는 영적인 실패의 이야기는 다윗의 왕위를 이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드러낸다. 2024-03-23 신국판 592P @23,000원 /교보.알라딘.예스24.쿠팡 판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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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리틀메시지_ 열왕기하2Ki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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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선철 성경 에세이_ 내가 살아있는 동안 내 하나님을 찬양하리
- 주신 말씀_시편 84: 10, 104: 33 33. 내가 평생토록 여호와께 노래하며 내가 살아있는 동안 내 하나님을 찬양하리로다 내가 살아있는 동안 내 하나님을 찬양하리 혹이 물었다. 너는 무슨재미로 세상을 사니? 돈 버는 재미? 술마시고 친구들과 어울리는 재미? 자식 낳아 키우면서 성장하고 성공하는 것을 보는 재미? 출세하여 높은 자리에 앉아 권력을 누리는 재미? 재미를 못 느끼며 사는 삶은 불행한 일이라... 재미는 고사하고 사방이 꽉 막혀 답답함과 비참함에 처하고 어느 순간에는 죽지 못해 살고 있음을 본다. 그렇게들 인생의 시간들은 각각 어지럽게 흘러간다. 재미를 느끼는 때는 한 순간이요 붙잡아 놓을 수 없는 것이 ‘사는 재미’이다. 누구나 초행길의 인생! 목적과 방향은 잃어버리고 덧없는 시간에 그저 몸을 맡길뿐이라. 다 겪어보지 않았는가! 돈도 명예도 권력도 한 순간이요 애지중지 내자식도 품 떠나면 그만인 것을.... 오직, 영원한 재미는 하나뿐! 주님께 사랑받고 그 품에 안겨 사는 것! 일찍이 깨달은 ‘다윗의 길’을 가는 것! 나 살아있는 동안 우리 주님 찬양하는 ‘재미’ 놓치지 않으리!! 아멘. 2021-0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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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선철 성경 에세이_ 내가 살아있는 동안 내 하나님을 찬양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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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52_ 로마제국의 해체
- Anastasis Pio Christiano Inv31525 로마제국의 해체 개구리가 물이 든 주전자에 들어갔다. 이제 그는 우물 속의 개구리가 아니라 주전자 속의 개구리다. 그 물이 끓는 물이었다면 그는 있는 힘을 다해 도약해 뛰어나왔을 게다. 뜨거움이 그에게 주전자 속은 아주 위험하다는 사실을 즉시 인식시켰을 게다. 그러나 아주 미지근한 물 속이었다면 개구리는 별 저항 없이 목울대를 움직이며 주전자 속에 멀뚱히 떠있을 게다. 서서히 아주 서서히 물의 온도를 높일지라도 개구리는 팔딱 뛰어나오지 않을 게다. 그는 환경이 변하고 있다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한다. 서서히 물이 더워지고 있으니까 말이다. 아주 약하게 가스버너를 계속 켜두면 결국 물은 끓게 될 게다. 그러면 불쌍한 개구리는 삶은 개구리가 되고 말 것이다. 우리 사회는 서서히 변하고 더워지고 있다. 그 속에 들어 있는 우리 교회는 어떻게 해야 될까. 야만족 침략의 세찬 파도가 로마제국을 서방에서 명맥을 이어가는 것조차 끊어버렸다. 소련의 해체 과정에서 역력히 볼 수 있듯이 로마제국의 멸망은 유럽에 올망졸망한 나라들이 생기게 했다. 반달족은 북아프리카까지 진출했다. 수에비족과 서고트족은 스페인에 자리 잡았다. 고트족과 프랑크족은 프랑스에 퍼질러 앉았다. 고트족과 롬바르드족은 이탈리아에 둥지를 틀었다. 앵글로족과 색슨족은 모퉁이 땅이라는 이름의 영국에다 말뚝을 박았다. 영국(England)은 모퉁이(Angle) 땅(Land)의 축어이다. 프랑스라는 이름은 프랑크족에서 유래됐다. 상부 이탈리아는 지금도 롬바르디라고 한다. 침략자들은 로마제국 백성을 다 죽이지 않았다. 원래 주인이 자기 땅에서 종이 된 경우도 있다. 또는 땅의 일부를 빼앗기고 나머지는 그대로 간직하는 행운을 맛보는 기회도 적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서 옛날 사람과 새 사람들이 뒤섞여 결혼을 하다가 하나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오늘날의 유고슬라비아와 같은 인종 싹쓸이는 없었다. 라인강 남부는 로마어가 약간 변형된 형태로 계속 생명을 유지했다. 스페인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는 라틴어와 아주 유사하다. 그리고 영어는 그 말의 대부분을 라틴어에서 차용했다. 침략전쟁이 전부 끝나자 지도가 다시 바뀌었다. 모하멧족은 그들이 내세우는 상징처럼 초승달 모양의 영토를 차지했다. 북부지역에서 떼거지로 몰려온 침략자들은 묘하게도 그리스도교의 상징인 십자가 모양의 영토를 형성했다. 스코틀랜드에서 이탈리아까지 내리뻗은 수직선과 스페인 경계선에서 독일까지 가로 뻗은 팔은 얼추 십자가 형태다. 그리스도인과 모하멧의 영토 이들 북부 야만인들을 로마의 방법과 그리스도의 방법으로 가르치는 과업이 교회에 맡겨졌다. 로마 가톨릭교회가 어떤 면에서 로마제국의 계승자가 되었다. 로마 교황들은 황제의 권력과 영향에 버금가는 힘을 휘둘렀다. 서방을 차지하는 위대한 과업을 수행함에 있어서 교황들은 수도사들의 도움을 엄청 받았다. 최초의 수도사들은 기독교화된 세상에 너무도 욕지기가 치밀어 세상을 훌훌 털고 떠나 사막으로 도망갔다. 누구 말마따나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해도 너무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세상이 아주 큰 어려움에 빠졌을 때 서방교회의 수도사들은 분연히 사막의 모래를 툭툭 털고 일어나 세상을 새롭게 하고자 세상으로 돌아왔다. 2021-05-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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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52_ 로마제국의 해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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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선철 성경 에세이_ 성령의 할례파
- 주신 말씀_ 창세기 17: 10~17, 빌립보서 3: 2~3 10. 너희 중 남자는 다 할례를 받으라 이것이 나와 너희와 너희 후손사이에 지킬 내 언약이니라 성령의 할례파 하나님의 약속의 자녀는 언약의 표징으로 남자는 다 할례를 받아야 했다. 그 할례의 표시는 남자 생식기의 표피를 베어내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애굽으로 그 맡은 사명을 완수하고자 떠나던 모세도 아들 게르솜의 무할례로 인하여 죽을 고비를 넘겼고 애굽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도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의 여리고성을 치기 전에 광야에서 치르지 못하였던 할례의식을 거행하였다. 이처럼 표피를 베는 할례의식은 하나님의 백성임을 표징하고 택함을 받은 약속의 자녀라는 뜻으로 거룩한 행위이다. 육체에 하나님의 자녀라는 할례의 표시를 하였다 하여 이스라엘 백성이 온전하게 제사장 나라 백성의 의무를 다 이행하였던게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거역하고 우상을 숭배하며 하나님의 분노를 일으킨 역사적 사실을 보더라도 육체의 표징은 무의미하기만 하다. 결국 이땅에 오신 예수님은 귀한 육체를 상하시고 죽기까지 하시며 성막을 찢어 제사장 나라를 거두시고 성전을 우리의 몸 안으로 옮기셨다. 곧 성령님이 내 안에서 역사하고 계심의 여부가 어떤 ‘할례 파’인지를 가늠하는 잣대이다. 고로, 나는 성령의 할례 파라고 자부한다. 아멘. 2021-0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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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선철 성경 에세이_ 성령의 할례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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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51_ 동방교회, 서방교회
- 양파형 둥근지붕의 러시아정교회 동방교회, 서방교회 귀뚜라미가 운다. 비오지 않는 날 하늘은 더없이 맑고 높다. 여름이 가고 가을이 오듯 76총회가 가고 77총회가 성큼 다가서고 있다. 땅에 발을 딛고 사는 인간들이 서로를 죽이지 못해 안달을 한다. 유고에서는 공산주의가 물러간 대신 혈통이 다르다고 같이 살던 사람끼리 서로 씨 말리기 놀이를 펴고 있다. 우리네 노란 제복의 운전사께서는 뜬금없이 살 맛 나지 않는다고 성령화대성회가 엄청 크고 어수선하게 열리고 있는 광장에서 차에 친 사람을 구경하고 있는 사람들을 차로 쓰러뜨렸다. 철창에 갇힌 그를 사진 찍는 사람들에게 그는 이죽거리며 플래시를 받았다. 서방교회 성직자는 면도를 해 턱이 밋밋했다. 동방교회 성직자는 수염을 더부룩하게 길러 매일 빨아야 했다. 서방교회 성직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결혼할 수 없었다. 동방교회는 주교급의 성직자까지 마누라를 둘 수 있게 했다. 양쪽 교회는 성령님이 하나님에게서 비롯된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그러나 서방교회 사람들은 성령께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만 임한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 그래서 그들은 성령께서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온다고 말한다. 그러나 희랍정교회 헬라인들은 신앙고백의 한 부분으로 『성자에게서』라는 말을 받아들이길 단연코 거부한다. 러시아 천년기념비에 묘사된 블라디미르 1세의 조각상 희랍교회를 통해 기독교가 불가리아인, 러시아인 등과 같은 슬라브족에게 펴졌다. 러시아는 주후 9백88년 블라드미르 1세 때 기독교 국가가 되었다. 블라드미르의 할머니 올가가 그리스도인이긴 했지만 백성들을 교화시키지는 않았다. 이런 전설이 있다. 블라드미르는 어떤 종교를 국교로 정할지 망설였다. 종교는 많았다. 그리고 그리스도교도 그 당시는 로마 가톨릭과 희랍정교회 둘로 갈라져 있었다. 여러 종교와 양 교회의 메신저들이 블라드미르 궁전에 찾아와 자기들 주장을 폈다. 먼저 모하멧 메신저가 낙원의 기쁨들을 그림으로 그렸다. 블라드미르는 아주 좋아했다. 그러나 지상에 사는 동안에는 술을 입에 대서는 안 된다는 말에 오만 상이 찡그러지고 말았다. 블라드미르는 뚱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렇담 그건 결코 안 되겠는데. 술 마시기는 러시아인의 기쁨이거든』 그 다음에 유대인이 말했다. 그러나 블라드미르는 나라가 없는 사람들이 믿는 종교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손사래를 쳤다. 로마 가톨릭은 블라드미르의 할머니 올가가 로마를 통해 믿음을 갖지 않았기 때문에 아예 선정 대상에서 빠졌다. 희랍정교회 메신저는 정통 신앙을 받아들이지 않은 사람들이 받게 될 온갖 고문들과 마지막 심판의 무서운 광경을 그림으로 그렸다. 블라드미르는 희랍교회를 더 알아볼 요량으로 사신을 콘스탄티노플에 파송했다. 러시아 사신들은 성 소피아 예배당으로 안내되었다. 웅장한 건물들, 수많은 성직자, 화려한 의상, 성가대의 매혹적인 선율, 향로의 감미로운 향내, 횃불을 나르는 집사들의 행렬 등의 모든 것들이 사신들의 마음을 왈칵 사로잡았다. 사신들이 보고를 장황스레하자 블라드미르의 즉답은 『어디서 세례를 받지?』였다. 러시아교회는 희랍교회의 자교회였다가 동로마제국이 터어키족에게 멸망하자 콘스탄티노플이 제2의 로마였듯이 모스크바가 제3의 로마라고 자처했다. 2021-0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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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야기 세계 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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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51_ 동방교회, 서방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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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선철 성경 에세이_ 하나님 나라의 극히 작은 자
- 주신 말씀_누가복음 7: 28~29 28.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여자가 낳은 자 중에 요한보다 큰 자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극히 작은 자라도 그보다 크니라 하시니 하나님 나라의 극히 작은 자 위 말씀으로 미루어 생각할 때에 하나님 나라에서는 신분의 차별이 없는 것이 분명하다. ‘하나님 나라의 극히 작은 자라도 땅에서는 요한보다 크다’라고 말씀하신 예수님. 그러나 그 요한은 ‘여자가 땅에서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라고 하셨으니 하나님 나라에 가기만 한다면 일단은 요한보다 큰 사람으로 신분이 보장된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요한은 어떤 사람인가? 그는 나실인으로 세상에 태어나서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님 앞에 먼저 와서(눅 1: 17) 주님의 길을 곧게 하려고 선지자 이사야가 예언한 바로 그 사람, 곧 ‘광야의 외치는 자’가 아닌가? 그는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세상에 널리 알림은 물론 예수님께 세례를 베품으로 예수님의 이 땅에서 인류 구원의 고귀한 사역을 하시게 도왔으니 과연 주님이 보실 때에 ‘여자가 난 자 중에 가장 큰 자’라는 칭송을 들을만 하였다. 이세상에는 수없이 많은 차별과 차이로 뒤엉켜있다. 부와 권력으로 나뉜 신분의 차이, 태생부터 나누인 귀하고 천함의 차이, 이런 차이들은 아픔과 갈등의 요인이 되고 불평등, 불공정을 양산하며 결국 이세상을 부패와 타락의 지옥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러나 주 예수를 구주로 믿는 우리에게는 하늘나라 시민의 신분이 보장 되어있으니 이거야 말로 ‘대박’ 사건이 아닌가? “할렐루야! 다시 한번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값없이 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하고 찬송하리로다.” 아멘. 2021-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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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선철 성경 에세이_ 하나님 나라의 극히 작은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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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50_ 성상 타파 논쟁
- Byzantine Iconoclasm, Chludov Psalter, 9th century 성상 타파 논쟁 신호등이 있어도 차끼리 뒤엉키는 희한한 나라에 사는 느낌은 사뭇 꺼림직하다. 아니 남세스럽다. 그러나 어쩌리, 내 나라고 나 역시 엽전인걸. 게다가 그리스도인이니 주님의 말씀대로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해야 되겠지. 그리고 나도 사랑을 받아야겠지. 나 역시도 꽤 까다로운 사람이니까 말이다. 그래도 속에서 치미는 게 있는 건 어찜일까? 성직자가 될 사람을 뽑는데 부정이 있어서일까? 아님 찌뿌드한 날씨 탓일까? 옛날에 비해 상상도 못할 만큼의 올림픽 금메달을 따도 메울 길 없는 허기 때문일까? 그리스도교를 믿는 세계에 대한 모하멧 교인의 침략은 서방의 땅덩어리를 줄이는 것 못지않게 다른 면에서도 많은 영향을 그리스도교에 끼쳤다. 인간 모습의 어떤 신상도 금한 모하멧 교의 본보기는 교회에 범람하기 시작했던 많은 사치스러운 형상들을 일부 그리스도인들이 반대하게 되는 계기가 됐다. 아무런 장식이 없는 밋밋한 십자가가 그리스도의 몸을 십자가에다 정교하게 새긴 십자가 고형으로 대체 됐었다. 신의 어머니라고 하는 동정녀 마리아도 많은 성상이 있었다. 성상에 대한 헬라어는 이콘(Icobn)이다. 일부 성자들도 성상이 있었다. 성자(Saint)라는 말은 본디 덕이 높은 경건한 사람을 단순히 일컫는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교회가 특별히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예컨대 성 바울, 성 베드로, 성 제롬, 성 어거스틴 등과 같은 사람들을 일컫는 칭호로 그 말이 바뀌었다. 성자들은 아주 훌륭했기 때문에 그들의 기도가 하나님에게 훨씬 영향력이 있을 걸로 여겨졌다. 이제는 지상에 없을지라도 성자들이 그들의 성상을 숭배하는 사람들을 위해 하늘에서 기도할 수 있을 걸로 여겨졌다. 특별한 사람이나 나라를 돌보는 성자를 수호성인이라고 한다. 크리스토퍼 성자는 여행자들의 수호성인이다. 영국의 수호성인은 성 조지이다. 그리고 러시아와 스코틀랜드의 수호성인은 안드레 성자이다. 헬라제국의 일반인은 성상들에 입을 맞췄고, 메마른 우물에 물이 생기길 바라며 성상을 우물에 처넣었고, 그리고 성상이 마술도 부린다고 믿었다. 소아시아의 이소리아 인이라고 하는 레오 황제는 이런 어처구니없는 관습들을 막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콘스탄티노플 성문에 걸린 십자가 고상을 베어 내라고 군인들에게 명했다. 명령에 죽고 사는 군인들이 사닥다리를 올라가 십자가상을 조각내어 땅에 떨궜다. 그러자 분기탱천한 아낙네들이 대거 몰려와 사닥다리를 밀쳐내자 십자가 철거반 군인들은 졸지에 땅바닥에 떨어져 죽고 말았다. 이를 기화로 성상타파 논쟁이라고 하는 말싸움이 대판 벌어졌다. 성상 타파(Iconoclast)라는 말은 『형상』과 『부순다』라는 뜻의 헬라어가 합친 단어이다. 여자들과 수도사들은 성상을 사랑했고 성상 타파를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은 사건에 견주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성상에 신포도주를 머금은 스폰지를 디미는 그림까지 나올 정도가 됐다. 성상 옹호론자들은 이렇게 강변했다. 『성상은 배우지 못한 사람들의 책이다.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은 성상을 봄으로써 성상이 나타내는 의미까지 알 수 있는 수준으로 올라가게 된다』 성상 타파론자들은 하나님께서 우상을 만들지 못하게 하셨다고 반박했다. 2021-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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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50_ 성상 타파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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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선철 성경 에세이_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신 예수님
- 주신 말씀_히브리서 1: 1~3 3. 이는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오 그 본체의 형상이시라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시고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리편에 앉으셨느니라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신 예수님 만유라함은 얼마나 크고 넓은 곳인가? 깊은밤 하늘을 보면 하늘을 꽉 메운 은하계의 셀 수 없는 별들과 그 장엄한 크기에 그저 감탄만 할 뿐이다. 그 모든 세계를 지으신 분이 하나님이시라는데 과연 창조주 하나님의 영원하신 능력 앞에는 그저 경배만 필요할 뿐, 무슨 미사여구가 가당키나 하겠는가! 별 하나하나의 거리가 최소 몇광 년에서 수천억 광년 거리에 떨어져 있으며 눈에 보이는 제 1은하계에만도 그런 별이 몇수천억 개가 존재하는데 제 2은하계에는 그보다 더 많은 별이 있으며 우주에는 제 2, 제 3은하계가 있다고 하니 만유는 그저 영원의 세계라 함이 옳다. 하나님은 우리 구주 예수님을 ‘그 만유의 상속자’로 세우시고 또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다고 히브리서 기자는 예수님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있다.(히 1: 2) 만유의 주인이신 우리 예수님! 그 예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내 죄를 책임져 주셨으며 오늘도 나와 동행하여 주시며 나의 모든 삶을 위해 하나님께 중보하여 주신다. 믿어지는가? 이러한 사실들이... 이해하기 힘든 일이나 믿어야 한다!! 아니, 믿는 도리를 다하여야 하는 것이다. 그게 이 미물이 할 일이다.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신 예수님’ 주님, 세세토록 영광 받으시옵소서... 영광 받으시옵소서. 더 이상 표현할 말이 없나이다! 아멘, 할렐루야!! 2021-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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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선철 성경 에세이_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이신 예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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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49_ 초승달
- 초승달 장마라는데 작달비나 궂은비는 없고 여우비만 오락가락한다. 누구 말마따나 갱제가 쪽을 못 쓰니 장대 같아야 될 장마비도 시무룩해진 것 같다. 어렸을 적 싸리나무 줄기 같은 장마비가 사정없이 쏟아지곤 했다. 그러면 그 어수룩하던 50년대 말에는 금새 물난리가 대한민국 수도를 휘몰아쳤다. 우리 꼬마들은 비가 멈추길 기다려 한강 둑으로 구경 나갔다. 그곳은 불어난 물살처럼 현장감이 넘쳤다. 풀더미가 떠내려가고 소가 헤엄을 치며 내려가고 흥부가 켜던 박덩이 마냥 농부가 올라앉은 초가지붕이 둥실둥실 흘러가고 양재기와 솥이 곤두박질치며 황망히 물살을 헤쳤다. 생생한 진풍경이었다. 신나는 구경거리였다. 물에 떠내려가는 것들은 급한 탁류 속에서 아우성인데 둑에선 구경꾼들은 신이 났다. 활달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세상을 떠난 뒤 서방에서 회복됐던 로마제국의 영토들은 다시 빼앗겼다. 동방에서도 영토가 많이 줄어들었는데 아라비아에서 말 달려온 사람들의 침입 때문이었다. 이 새로운 침략자들이 좋아하는 상징은 어여쁜 여인의 눈썹 같은 초승달이었다. 초승달이 그려진 깃발 아래서 그들이 부르짖는 외침은 알라 외에는 다른 신이 없고 모하멧은 알라의 선지자이다였다. 이들은 모하멧 교인들이었다. 이슬람교의 창시자 무하맛(또는 모하멧)은 유대인이다. 그리스도인처럼 하나님은 오직 한 분뿐이시고 우상을 숭배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쳤다. 무하맛은 모세와 예수님을 선지자로 여기긴 했지만 참된 대표적인 선지자는 자신뿐이라고 느물스럽게 가르쳤다. 그는 모하멧 예배당인 모스크 안에 인간 모습의 어떤 그림이나 조각도 그리거나 새겨서는 안되고 우상을 깨뜨려야 한다고 추종자들에게 가르쳤다. 모하멧 교인들은 그들 신앙의 성소가 있는 메카로 얼굴을 향하고 하루 다섯 차례씩 기도를 드려야 했다. 눈을 가늘게 뜨기를 좋아하는 모하멧은 추종자들한테 알라를 위해 싸울 것을 부추겼다. 그러면 알라께서 차디찬 생수와 우유와 꿀과 포도주가 강같이 흐르는 하늘에서 그들한테 보상해 준다고 혀로 입술을 다시며 말을 했다. 그러나 땅에서는 그들이 포도주를 마셔서는 안 되었다. 모하멧의 가르침은 코란이라고 하는 책에 기록되어 있다. 기실 코란도 성경처럼 책이라는 뜻의 아랍어이다. 알라를 위해 싸우는 전사들은 정복민에게 코란을 받아들이든지 세금을 내든지 죽든지 우리네 대학 예비고사 같은 삼지선답 형을 강요했다. 주후 6백22년에 시작된 이슬람정복 운동은 아주 급속히 확산되었다. 그 까닭은 헬라황제의 압제에 시달리던 아르메니아인, 시리아인, 에디오피아인 등이 모하멧 교인의 지배를 쌍수를 들어 환영했기 때문이다. 모하멧인은 정복당한 민족이 세금만 따박따박 잘 내면 무슨 종교를 믿든 개의치 않았다. 알라의 떼거리가 팔레스틴, 이집트, 스페인 등을 휩쓸고 프랑스 문턱까지 위협했다. 정복 운동이 시작된 지 1백 년 만에 모하멧 교인들은 프랑스 문턱에서 말달리기를 멈췄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하게도 모하멧 교인이 숨 가쁘게 점령했던 땅들이 거의 초승달 형태를 띠었다. 한쪽 끝이 프랑스 하부에서 스페인 하부까지 이르고 다른 한쪽 끝은 콘스탄티노플을 질러 비엔나 경계까지 이르렀다. 2021-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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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야기 세계 교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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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49_ 초승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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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선철 성경 에세이_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 주신 말씀_ 사도행전 27: 25, 시편 46: 2~3 3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든지 그것이 넘침으로 산이 흔들릴 지라도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노다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나의 환란의 때에 나는 두려워 떨었다. 잠을 이루지 못하였다. 눈물이 베겟닢을 적시고... 적막과 공포감이 내 간을 녹이려는 듯 밀려왔다. 절망과 환란의 날에 나만 그랬을까? 아니다, 성경 속 위인들도 그러했다. 다윗도 떨었고 엘리야도 떨었다. 모세와 여호수아에게도 하나님은 ‘두려워 말라’고 안심시키셨다. 물위를 걷다 파도에 빠져 들어가는 베드로를 주님은 잡아주셨다. 주님께 택함 받은 사람은 주님이 찾아오시고 손을 내밀어 주신다. 두려움을 이겨낼 힘과 의지를 주시는 거다. 산이 흔들릴지라도 주님 손만 붙잡고 믿으면 ‘기적’은 반드시 주님의 은혜로 나타나고 마는 것이다. 나는 체험하였다. 그래서 간증할 수 있다. 두려움을 극복하고 절망을 이겨내게 하신 하나님의 손을! 말씀의 능력을! 그래서 이제는 자신있다. 설사 산이 흔들리는 공포가 밀려와도 주님의 손을 내가 놓치지 않는 이상 두려워하지 않겠노라고...! 아멘. 2021-0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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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선철 성경 에세이_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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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48_ 유스티아누스 大帝
- Mosaic depicting a crowned Justinian 유스티아누스 大帝 여의도에 선다. 밤톨만한 섬이었던 게 지금은 고층빌딩으로 울창한 숲을 이루고 있다. 세계에서 크기로 손꼽는다는 국회의사당도 있고 세계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교회당도 있다. 위대한 사람은 큰일을 하는가 보다. 그 큰일이란 물론 보이는 일이다. 보이지 않아서는 진리도 힘을 잃고 하나님의 능력도 면을 세울 수 없는 세상이다. 이 작은 땅 한국에서는 더욱 그렇다. 동로마제국 또는 비잔틴 제국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업적을 보면 빨간 후드를 가슴에 드리우고 사각모의 금술을 덜렁이길 막무가내로 좋아하는 성직자들에게 귀감이 될 성싶다. 콘스탄틴 대제가 신앙에 복받쳐 성(聖) 소피아 대 예배당을 건립했다. 그런데 이 아름다운 건물이 로마의 영광을 외치며 옛 영토를 실제로 회복시킨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때 불에 타 폭삭 가라앉아 버렸다. 불이 난지 40일 만에 위대한 황제 유스티니아누스는 성 소피아 재건축을 시작했다. 일만 명의 일꾼이 동원되고 날마다 진짜 은으로 임금이 지불됐다. 인부들은 널뛰듯 일했다. 황제는 의관을 걸치고 공사 현장에 나타나 인부들을 격려했다. 이런 엄청난 노력의 결과 첫 번째 돌이 놓인 지 5년 11개월 10일 만에 재건되어 5백37년 크리스마스에 성 소피아 대 예배당이 봉헌되었다. 이 교회에 사용된 건축양식은 장방형의 바실리카가 아니었다. 타원형 모양 대신에 중앙의 돔을 좀 더 작은 돔들로 둘러쌌다. 이런 종류의 건축을 콘스탄티노플의 옛 이름인 비잔티움에서 따 비잔틴 양식이라고 한다. 지금 이 글에 실린 그림 좌우에 있는 가느다란 뾰족탑들은 회교 사원의 첨탑이라고 한다. 그것은 회교도가 훗날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했을 때 교회를 회교사원 모스크로 바꿀 때 곁들여 세운 것이었다. 최근 터어키인들은 그걸 박물관으로 만들었다. 위대한 황제 유스티니아누스의 또 다른 위대한 업적은 로마제국의 법을 모아 분류해 ‘유스티니아누스 대전’이라고 하는 법전의 편찬이었다. 이 법의 여러 부분이 그리스도교와 교회와 밀접한 관계를 지녔다. 이 법전은 삼위일체 믿기를 거부하는 사람이나 세례를 되풀이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사형에 처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전자의 조항은 아리우스파를 겨냥한 것이었고 후자의 조항은 도나투스파를 향한 것이었다. 도나투스파는 티오클레티안 박해 이후 일반 교회에서 떨어져 나가 북아프리카를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교회와 로마 정부에 골칫거리가 되었다. 그리스도교 정부조차 그들의 불경과 폭력을 도저히 묵과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불행하게도 골칫덩어리 도나투스파를 벌했던 유스티니아누스 법전이 겨냥했던 것은 그들의 행위가 아니라 신념이었다. 도나투스파 자신이 스스로를 지구상에서 유일한 참된 교회라고 생각하는 한 그들은 일반 교회의 세례를 받은 사람들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래서 나중에 도나투스파에 가입하려고 애가 닳은 사람은 세례를 다시 받았다. 로마 제국의 법은 이런 행위, 즉 재세례를 위법으로 규정하고 엄히 다스렸다. 수 세기 뒤 이와 마찬가지의 법이 침례교파에 적용되었다. 역사를 통해 인간의 행태를 보면 인간은 형식을 중요시하는 것 같다. 하나님은 인간의 중심을 중요시하시는데. 2021-04-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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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48_ 유스티아누스 大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