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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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독 : 프랑소와 오종 
출연 : 카트린느 드뇌브, 이자벨 위페르, 엠마뉴엘 베아르, 화니 아르당 

제목 : 아버지를 두 번 죽인 거짓말 릴레이 

비밀은 비밀을 낳고, 잉태된 비밀들은 ‘고르기아스의 매듭’처럼 서로 뒤엉켜 어둠의 복잡계를 건설한다. 비밀은 욕망을 먹고 자란다. 애초 파편에 불과한 개별의 욕망들은 비밀의 메커니즘을 통과하면서 분화하고 또 조직화한다. 그 욕망의 함수에 따라 비밀은 암묵적으로 공유되는 동시에 개별화하고, 임무와 권리의 분양과 더불어 짜릿한 공범의식의 쾌감이 그 테두리를 지배한다.  

비밀의 매듭은 ‘알렉산더의 단칼’로 해결되지 않는다. 단칼에 도륙난 비밀의 실오라기들은 잠시 눕는다. 누웠다가 피비린내가 사라지길 기다려 ‘터미네이터 2’의 T-1000 액체금속 미래 사이보그처럼 부활한다. 다름 아닌, 부패와 혁명·혁신을 반복해온 인류 역사의 사이클이다. 이 난마의 매듭을 푸는 것은 결국 욕망의 실타래를 한 올 한 올 짚어가는 애거서 크리스티 식의 투명성 시스템이다.  

영화 <8명의 여인들>은 한 가족의 24시를 도려낸 단면 위에 비밀과 욕망의 공생 메커니즘을 멋지게 극화한 미스테리극이다. ‘프랑스 영화계의 악동’으로 불리는 프랑소와 오종 감독은, 프랑스 극작가 로베르 토마의 원작을 빌려 여덟 여인의 욕망과 비밀을 들추며 당대의 관습과 편견, 터부의 경계, 그리고 가족 이데올로기의 허위를 통렬하게 풍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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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설이 흐벅지게 휘날리는 화이트 크리스마스 아침, 마르셀이라는 중년 사업가의 파리 교외 저택으로 가족들이 모여든다. 두 뺨에 번갈아 키스를 날리며 단란한 애정 표현이 끝나기도 전, 2층에서 외마디 비명이 터져나온다. 모닝커피를 들고 갔던 하녀가 이 집의 유일한 남자인 가장 마르셀의 주검을 발견한 것이다. 마르셀은 유혈이 낭자하도록 등에 칼을 꽂고 침대에 엎어져 있다.  

신고를 하려 했지만 전화선은 끊겨 있고, 차마저 고장나버렸다. 밤새 개들도 짖지 않았다. 그렇다면? 모두가 모두를 의심하는, 전형적인 애거서 크리스티 식의 미로적 중첩 구도의 ‘Who-Dunnit Movie'다. 애거서 크리스티도 없다. 용의자인 여덟 여인은 마르셀의 누이와 아내, 처제, 장모, 두 딸과 두 하녀. 이들은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동시에 서로의 알리바이를 체크해가며 마르셀의 사망시간을 추정하고, 피차의 혐의 정도를 간추려간다.  

하나씩 새로운 진술이 전개되는데, 여덟 증인의 크로스체크 결과 하나같이 거짓말이다. 이들은 여기서 비밀의 메커니즘과 관련된 중요한 진실을 깨닫는다. 자신을 변호하기 위한 거짓말이 실제로는 타인의 비밀을 강화하는 효과로 쓰인다는 사실. 그리하여 이들은 진실을 향한 ‘투명성 평화협정’을 맺고 일체의 패를 까는데, 역시나 진실의 칼날은 너무도 쓰라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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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아내 게비(카트린느 드뇌브). 마르셀의 유산 상속 1순위자. 평생 한 번도 남편을 사랑한 적이 없다. 게다가 큰 딸 수종(비르지니 르드와양)은 교통사고로 죽은 옛 애인의 유산이다. 남편이 파산에 직면해 몸부림치는 상황에서 동업자 자크 파농과 부적절한 관계를 갖고 있다. 사건 당일 침대 밑에서 집을 떠나기 위해 꾸려놓은 짐 가방이 발견되었다.  

처제 오귀스틴(이자벨 위페르). 독설과 질투의 화신, 깡마른 체구에 불 같은 성미의 예민한 노처녀. 심장발작이 심하다. 게비의 미모와 풍요를 몸서리치게 시샘하며, 형부를 가로채려 꼬리를 치는 등 돌출행동의 상처를 안고 있다.  

장모(다니엘 다리유). 거액의 채권에 대한 방어 의지가 지나치게 강하다. 파산에 직면한 사위와 심한 말다툼을 하는데, 공교롭게 그 채권을 누가 훔쳐갔다. 나중에 밝혀지지만, 남편을 독살한 전례도 있다. 스스로 실토하기를, 흠 잡을 데 없이 잘해준 남편인데 사랑할 수가 없어서, 그렇다고 이혼하거나 새출발할 수도 없는 시대의 굴레 때문에….  

누이 피에레트(화니 아르당). 전직 스트립댄서, 자유연애주의자. 유산 분배를 요구하며 오빠를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해 50만 프랑을 빼앗는다. 흑인 하녀 샤넬(휘르민 리샤르)과 열정을 탐닉하는 사이다. 클라이맥스에 이르러 게비와 뒤엉킨 뜨거운 장면은 폭소를 자아내면서 영화의 극적 대단원을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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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녀 루이즈(엠마뉴엘 베아르). 마르셀의 정부. 5년 여의 밀애 끝에 아예 하녀로 들어앉았다. 그러나 루이즈의 실제 애정의 과녁은 마르셀의 아내 게비? 

큰 딸 수종(비르지니 르드와양). 런던에 유학 중인데, 혼전 임신으로 신경이 날카롭다. 그런데 허걱! 뱃속의 아이는 마르셀의 작품?  

세상에 이런 콩가루 집안이 없다. 게다가 등장인물이 온통 여자다(마르셀은 몇 차례 뒤통수만 잠깐 보이고, 대사도 전무하다). 그 수다와 질투와 앙탈과 토라짐의 오케스트라는 콩가루로 범벅이 되어 정신없이 북적거리다가 슬픔과 분노와 격앙과 자탄의 몸부림으로 잦아들면서 한순간 홀연히 서로를 안아주는 애틋한 반전이 더없이 신비롭다. “영화를 통해 톨레랑스를 보여주고 싶다”던 오종 감독의 득의의 연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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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명의 여인들>은 등장인물 모두가 주인공인 특이한 영화다. 그 여덟 모두가 60년대 ‘왕년의 스타’에서 막 떠오르는 20대 신성에 이르기까지, 하나같이 당대의 톱스타들인 초호화 캐스팅이다. 그들을 한 자리에 모아 조화된 선율로 지휘해낸 오종의 재능이 돋보인다. 게다가 카메라는 한 번도 그 집을 벗어나지 않는다. 눈발 휘날리는 바깥 풍경을 두어 번 비출 뿐, 거개의 앵글이 실내 시퀀스로 마감된다. 이 단조로운 공간만으로 2시간이 넘는 러닝타임을 지루하지 않게 경영해낸 오종의 감각 또한 간과할 수 없는 감상의 주요 포인트다.  

단 20일 만에 모든 촬영을 끝냄으로써 저예산 미학의 한 경지를 보여준 것도 눈여겨볼 만하지만, 그러면서 화사하고 다채로운 프레임을 꾸려낸 비결은 무릇 치밀한 사전준비에서 찾을 수 있겠다. 오종은 여덟 스타의 매력을 고루 살려내는 것이 이 영화의 포인트라고 판단, 각 주인공들에게 어울리는 색채와 꽃의 이미지를 부여하고, 캐릭터의 성격과 이미지와 의상들을 거기에 맞추었다. 드뇌브는 오키드(서양란), 위페르는 패랭이, 아르당은 붉은 장미, 르드와양은 카네이션… 같은 식이다.  

조명도 철저히 콘트롤되었다. 예컨대 왕년의 스타 카트린느 드뇌브와 화니 아르당에게는 역광이나 스포트라이트를 강조한 50~60년대 풍의 조명 미학을, 신세대 스타 비르지니 르드와양과 뤼디빈 사니에르(막내 딸 카트린느 역)에게는 현대적인 측면 연출을 강조한 것이다. 심지어 필름까지도 각 색상의 색온도를 최적으로 소화하는 세 가지 필름을 각기 다르게 사용했다.  

다소 엉뚱하지만 여덟 여인이 한 번씩 돌아가면서 보여주는 뮤지컬 코너도 맛이 색다르다. 사랑과 열정과 자유, 삶과 고독, 욕망 따위를 주제로 펼쳐지는 독무대의 가무 개인기가 심각한 장면에 피식 웃음이 새어나오게 만들기도 하지만, 얼굴이 벌개지도록 흥분했던 배우들이 뮤지컬 타임을 위해 슬그머니 계단 구석 등지에 주저앉으며 관객의 표정으로 변신하는 대목은 망외의 별미로 꼽힐 만하다. 특히 오귀스틴으로 열연한 이자벨 위페르의 신경질적인 질투 연기는 환상이다. 위대한 배우는 대본을 초월한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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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준 기자 / 영화평론가

1990년부터 <시사저널> 문화부 기자로 ‘괴로운 글쓰기’의 업을 시작하였고, 1999년 영화전문주간지 <프리뷰>의 창간 편집장으로 숱한 밤을 새웠다. 2003년에는 중견 영화평론가 그룹 ‘젊은영화비평집단’의 회장을 맡아 비상업예술영화를 중심으로 광화문 시네큐브에서 <작은영화제>를 개최하였다. 2004년에는 각색을 맡아 작업했던 황철민 감독의 영화 <프락치>가 제34회 로테르담국제영화제에서 ‘국제비평가협회상’을 수상했으며, 2007년 MBC대한민국영화대상의 심사위원을 역임한 바 있다. 저서로 영화평론집  『아웃사이더를 위한 변명』(2004, 심산)이 있다.

e-mail : bullwalk@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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