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5(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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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내 모든 명예를 내려놓으라고 (이런 일을) 하게 하시나봅니다
 
로마의 황제 첫 번째 칭호
로마의 제일 시민
 
전 헌법재판관 조대현 장로
그의 경력 신앙 세상 삶에서
대한민국 제일 법관
 
이도 저도 마땅치 않은 겨울 끝물. 때 아닌 천둥소리에 놀라 내린 눈발에 철 지난 낙엽 하나 슬며시 곁에 내린다. 그냥 있어볼 길밖에 없는 내 곁에 부엉이바위에서 뛰어내린 그분처럼 저도 말없이 그냥 조용히 내려 잊히지 않는 뇌리 속에 그냥 있다. 생각하면 고맙다. 실은 이런 것이 고마운 일이기 때문일까. 그저 마음의 정처가 없는 것인가. 모든 일이 꽉 막혀 손 써볼 방도가 없는 것인가. 그냥 있음은 아주 힘없는 상태 같기도 하고, 무언가 참기 힘든 걸 참고 있는 뜨거운 견딤의 시간 같기도 하다. 이러고 있을 수밖에 없다는 맥 놓은 이 순간에 미묘한 서글픔이 어린다. 피가 빠져나가 버린 듯 이 쓸쓸한 믿음에 어떤 말도 손길도 부질없는 염려일 것 같다. 그저 슬며시 내려앉는 것, 그 또한 그렇게 있어 볼 길밖에 없어 그냥 있는 믿음의 ‘있음’만이 그 마음의 믿음에 어울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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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盧武鉉 1946년 9월 1일 ~ 2009년 5월 23일)은 대한민국의 제16대 대통령이었다. 그는 부산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막노동에 뛰어들었다가 독학으로 1975년 4월 30세에 제17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였다. 1975년 3월 27일자 경향신문 맨 왼쪽 아래 제17회 사법고시 합격자 명단 60명 중 한 사람으로 ‘고졸=노무현’ 바로 위에는 당시 이화여대 89년사에 첫 사법고시 합격생인 ‘이화여대=전효숙’의 이름도 그리고 서울대를 졸업했지만 단국대학원의 지원을 받아 적을 두고 사시에 합격한 ‘단국대학원=조대현’의 이름이 적혀있다.
 
17회 사법시험에 합격해 수료해야 하는 2년의 사법연수 시절 고졸 출신 사법연수생으로 서울 서소문 사법연수원에 들어간 노무현은 명문 고등학교도 마땅한 대학교도 내세울 게 없어 어울릴 사람이 없었다. 그때 조대현이 노무현을 자신이 좌장격인 7명이 모이는 토론회 멤버로 끼워주었다. 그렇게 사법연수원 시절 같은 반의 비슷한 자리에 앉았던 사람들이 노무현 대통령 당선 후 언론에 의해 ‘8인회’로 명명되었다. 그렇게 시작된 조대현과 노무현의 인연은 노 대통령이 집권 이전부터 사석에서 동기 중 가장 존경하는 법조인이라는 얘기를 서슴없이 했다. 노 대통령은 나중에 자서전에 "얼마나 고마웠던지 연수원 시절 내내 가깝게 지냈고, 지금까지도 가끔씩 만나며 친하게 지내고 있다"고 적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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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대현은 법관 시절 조용하면서도 강직한 성품으로 선ㆍ후배들의 존경과 두터운 신망을 샀으며 변호사 개업 후에도 사건을 가려서 맡을 정도로 자기관리에 철저한 법조인으로 알려졌다. 서울경제신문 주필을 지낸 후배 김인모가 한국일보 청와대 출입기자 시절이다. 그가 용산고 동창 조대현 판사의 청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날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 있잖습니까. 조 판사야말로 어떤 경우에도 그럴 정도로 청렴하신 바로 그런 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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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헌법재판관 조대현은 유명한 법조인이었고 지금은 존경받는 법조인이다. 그러나 내게는 그가 장로이기에 목사들의 소식지 ‘더굳뉴스’에 소개할 마음이 생겨 인터뷰 요청을 하고 세상에 대해 겸손한 그가 쾌히 허락을 했다.
 
2017년 1월 22일 주일 그가 장로로 시무하는 일원동의 개포감리교회(당시 담임 안성욱 목사)에서 만났다. 11시 예배가 시작되기 전 개포교회 사무실에서 만나 용산고 20회 동기 동창 사이라 격의 없이 신앙생활에 대해 말을 나누었다.
 
조대현 장로는 87년 말 망우동 살 때 금란교회 다니다가 일원동으로 이사 와서 개포교회를 다니게 됐다. 개포교회는 1985년 1월 6일 안성옥 목사가 대신교회 개포 구역을 중심으로 일원1동 654-2호에서 첫 예배를 드리고 같은 해 1월 20일 일원1동 677-1 소재 건물 지하 35평을 얻어 창립 예배를 드렸다. 1977년 사법연수원을 수료한 후 육군 법무관을 마치고 1980년부터 서울민사지법에서 판사 생활을 시작한 조대현 장로는 판사가 된 지 5년째일 때 교회가 설립된 지 2년 된 개척교회에 다닌 초창기 교인인 셈이다. 그로부터 대법원장 비서실장, 대전고법 부장판사, 법원 행정처 인사관리실장 등 법원 내 요직을 두루 거치고 헌법재판관 재직 중인 24년 뒤 그는 2009년 12월 6일 감리교 교회 권사에서 장로로 피택을 받아 장로안수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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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2018년 1월 9일 자신의 신앙생활의 변환기에 대해 행한 간증에서 이렇게 말했다.
 
“장로가 되어 헌법재판관 임기가 끝나기 두 달 전인 2011년 5월 초 아내에게 끌려서 처음으로 기도원에 가서, ‘헌법재판관 임기를 마치면 무슨 일을 할까요’하고 기도했는데 두 말씀이 제 마음에 박혔습니다. 첫날 저녁에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는 갈라디아서 2장 20절 말씀이었고 다음날 새벽에 ‘이제는 여호와를 경외하며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섬겨라’는 여호수아 24장 14절 말씀이었습니다.
 
저는 판사로 일하기 시작한 뒤 1981년 서른 살이 넘어서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는데, 1주일에 60시간 이상 판사 일을 했기 때문에, 주일 예배만 간신히 참석할 뿐, 성경을 읽지도 못했고 성경공부모임에 참석하지도 못했습니다. 그 동안 공직 업무에 바쁘다는 핑계로 신앙생활을 소홀히 했으니 이제는 열심히 믿으라고 하시는 당연한 말씀이네라 생각하고 별로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퇴임 후 여행을 다니기로 하고 첫 번째로 2011년 8월 터키 여행을 갔습니다. 그런데 허리가 아프고 다리가 저려서 1시간이상 걸을 수가 없어 정작 그렇게 원하던 여행을 제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귀국하자 허리 치료를 받느라고 잔뜩 세웠던 여행계획을 모두 접어야 했습니다.
 
그 때 생각이 났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인도하시려고 이제는 제대로 믿으라고 일깨우는 말씀을 2011년 5월 기도원에서 석 달 전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 말씀을 내가 무시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내 마음대로 세운 인생계획을 수정하도록 몰아가신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허리를 치료하느라 돌아다니지 못하니 기도원에서 은혜 받은 말씀을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점점 생각이 깊어졌습니다. 제대로 믿는 게 뭐지. 믿는다는 게 뭐지. 무얼 믿는 거지. 왜 믿어야 하지. 그런데 평생 법관을 지낸 제가 아무 것도 대답할 수가 없더군요.  그래서 성경을 읽고 신앙서적을 읽으며 공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2년 남짓 공부하던 중 2012년 2월 말경 예수전도단 김지태 대표님으로부터 시니어 DTS(Discipleship Training School: 12 주간의 강의와 가르침으로 시작하여 약 12주의 전도여행으로 이어지는 그리스도인을 위한 예수전도단의 집중적인 제자훈련 프로그램) 학교가 3월 5일 개학한다는 말을 듣고,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아내와 함께 시니어 DTS학교에 지원했습니다. 60세 이상 성도들이 8개월간 예수제자훈련을 하는 과정이었습니다.
 
시니어 DTS학교에 가서 그곳에서 일하는 간사님들이 여호수아 24:14 말씀대로 하나님을 온전함과 진실함으로 섬기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진정한 제자의 모습을 보고 배우게 하셨다고 생각합니다.

시니어DTS학교에서 말씀 묵상과 하나님의 음성 듣는 훈련을 받게 하셔서, 하나님의 인도를 제대로 받는 방법을 배우게 하셨고, 2012년 8월 10일간의 전도여행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구체적으로 인도하시는 것을 체험하게 하셨습니다. DTS의 전도여행은 여행계획을 미리 세우지 않고 지갑과 휴대폰 없이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살아가는 훈련입니다. 어디로 갈지, 며칠간 머물지, 무엇을 할지 등을 그때그때 하나님께 여쭙고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음성을 듣고 순종하는 훈련입니다.
 
그 후 기도를 많이 하는 아들이 2014년 2월부터 3월 복음학교에 가라고 강권했습니다. 복음학교에 가서 내 생각이 옳다는 생각을 버리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2014년 6월 2일부터 7일까지 순회선교단 복음학교에 가서 복음 공부를 했습니다. 김용의 선교사님 혼자서 하루 15시간씩 강의를 하시더군요. 성령이 충만한 하나님 일꾼은 저런 분이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강의 내용은 단순하고 강력했습니다. ‘오직 예수, 십자가 복음만이 살 길이다. 십자가에서 죽고 다시 태어나라. 제대로 믿어라. 세상의 가치에 이끌려서 생명의 길에서 벗어나지 말아라.’
 
복음학교를 마치고 돌아오자마자 2014년 6월 11일 제가 형사피고인으로 기소되었습니다. 공직에서 퇴직한 제가 대한감리회 재판위원으로 봉사하던 중 2013년 9월 감독회장 당선이 무효라고 판결했습니다. 그리고 그 판결에 불복한 당선자가 그 판결이 무효라고 법원에 소송을 제기해서, 제가 감리회의 당선무효판결은 정당하다는 답변서를 작성하여 제출하였습니다. 그 답변서를 작성하면서 감리회 직원이 저의 요청과 감독회장 직무대행의 지시로 감독회장 부하인 행정실장의 사무실 책상 위에 있던 증거서류를 꺼내왔다는 이유로, 그 직원과 감독회장 직무대행과 제가 공모하여 행정실장 사무실에 무단침입을 했다는 죄목이었습니다.
 
제가 기소되자, 모든 신문과 방송이 크게 보도했습니다. ‘재판관이 재판받다.’ 빅 뉴스였죠. 그 결과 제가 평생 쌓은 명예가 산산조각 나버렸습니다.
 
제가 기소된 사실은 범죄가 되지 않는 사실이었습니다. 평생 법조인으로 살아온 저로서는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억울하다고 기도했더니, ‘하나님께서 허락하지 않으시면 참새 한 마리도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는 말씀(마 10:29)이 떠올랐습니다. 그리고 제 아들이 하나님께서 드디어 아버지를 손대기 시작했으니 기뻐하고 감사드리라고 말했습니다.
 
아들의 말과 같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것이라고 생각하니, 불평하는 마음이 사그라지고 마음이 평안해졌습니다. 그러자 비로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네가 법관의 경력과 명예를 나에게 내놓으려 했느냐.’
 
저는 판사와 헌법재판관으로 지내면서 저의 명예를 아주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제가 판사와 헌법재판관으로 일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신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러한 경력이나 명예를 제가 자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진 것임을 망각하고 나의 공적이라고 내세우는 짓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네가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에서 거주하며 네 소유가 풍부할 때에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신 8:12-14)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말할 것이라’(신 8:17)
 
하나님의 은혜로 인생살이가 형통할 때 교만의 죄에 빠지기 쉬우니 조심하라고 경고하시는 말씀인데 제가 바로 거기에 걸린 것입니다. 이것을 깨닫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저를 형사피고인으로 세우시고 언론에 대서특필되게 하신 것이었습니다.
 
제가 아끼는 세상 명예는 하나님 앞에서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려고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일이라고 생각하니, 형사피고인 처지에서도 마음이 평안해졌고, 기자들이 심경을 물을 때에도 하나님께서 내 명예를 내려놓게 하신 것이라고 대답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복음학교의 가르침에 따라 가장 가치 있는 것, 하나님, 그리스도 구원의 복음, 하나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을 깨닫고자 노력했습니다. 성경 말씀을 읽으면서 묵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성령님의 깨우치심이 저를 행복하게 했습니다.
 
새벽 기도 시간에 앉아 있으면, 목사님을 통하여 필요한 말씀과 교리를 가르쳐 주시기도 하고, 제가 찾던 성경 말씀이 저절로 생각나기도 하고, 제가 알지 못하던 진리가 떠오르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루 종일 컴퓨터에 앉아 원고 정리 하는 것이 참으로 즐겁고 행복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저의 신앙생활이 너무 부족하고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에 합격 판정을 받으려면 아직도 멀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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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을 전 헌법재판관 조대현 장로가 자신의 소속 감리교 교단 교권 다툼 끝에 피소되어 법정에 서게 되었다. 2014년 7월 3일 오전 11시 올곧은 법관 조대현이 서울법원종합청사 522호 법정 피고인석에 섰다고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모든 언론의 조명을 받았다. 나중 무죄가 되었지만 그 때 그는 담담한 표정으로 심경을 묻는 신문기자에게 전 대통령 이명박 장로와 달리 한국 교회 신앙 역사에 남을 말을 했다.
 
“하나님께서 내 모든 명예를 내려놓으라고 (이런 일을) 하게 하시나봅니다.”
 
개포교회 장로(長老) 조대현(曺大鉉, 1951년 2월 11일 ~ )은 대한민국의 법조인이다. 헌법재판소 재판관을 지냈다. 1951년 충청남도 부여군에서 태어났다. 용산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를 졸업하였고 단국대학교 대학원 재학 중 1975년 17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여 판사가 되었다. 1977년 사법연수원을 수료한 후 육군 법무관을 마치고 1980년부터 서울민사지법에서 판사 생활을 시작한 조 변호사는 대법원장 비서실장, 대전고법 부장판사, 법원 행정처 인사관리실장 등 법원 내 요직을 두루 거쳤다. 수학 교사로 시작해 서울 언주중학교 교장을 지낸 헌신적 사랑과 눈물의 기도로 평생 내조한 서외순 권사와 두 아들을 두었다. 조대현 장로가 그 바쁜 법관 생활 속에서도 어릴 적부터 책상을 마주하고 직접 가르친 쌍둥이 아들 둘 다 직업도 쌍둥이 법조인(변호사)으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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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황제 첫 번째 칭호는 princeps 즉 제일(第一) 시민(市民)이다. 그렇듯 전 헌법재판관 조대현 장로는 그의 법관 경력이나 기독교 신앙이나 세상 삶에서 대한민국 제일(第一) 법관(法官)이라 말해도 그를 아는 누구나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2018-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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