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5(목)
 
헤라클레스 등대.JPG
 헤라클레스 등대

Lesson XI
등대
Lighthouse


우리가 사는 행성은 차라리 수구(水球) ‘물로 된 공’ 또는 해구(海球) ‘바다로 된 공’이라 불러야 옳습니다. 바다가 지구 표면 70%를 차지하기 때문입니다. 그 옛날 항해에 나선 바다 사나이는 어두운 밤 별빛을 따르며 마음 졸이다 멀리 땅에서 오는 한 줄기 불빛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을 것입니다. 등대가 언제 생겼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등대(lighthouse  lithus)는 배를 위험에서 벗어나도록 안내해주기 위해 해안 가까이 세워진 강력한 빛을 비추는 탑입니다. 항해의 역사와 비슷할 것으로 짐작됩니다. 해안 마을의 불빛도 갈 길을 알려주는 표지 역할을 했습니다.

스페인에는 1900년이 넘은 등대가 있었습니다. 이름은 토레 데 에르쿨레스(Torre de Hercules) 바로 헤라클레스의 탑이지요. 헤라클레스의 탑은 ‘코스타 다 모르테(Costa da Morte)’ 즉 ‘죽음의 해변’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위험한 해안선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로마인들에게 세계는 평평했습니다. 해안선은 세상의 끝을 의미한다고 믿었습니다. 코스타 다 모르테 죽음의 해변이 그러했습니다. 세상의 끝에 세워진 탑을 보며 그들이 무슨 생각을 했을지 궁금합니다. 몇 세기 동안 수천 명의 선원들의 목숨을 구해주었던 헤라클레스의 탑은 오늘날 국제적으로 명성이 높은 랜드 마크가 되었습니다. 중세와 그 이전에 제작된 지도에도 이 탑이 그려져 있습니다.
 
등대 이름에 왜 ‘헤라클레스’(Herakles)가 들어가는지 궁금하시죠. 그는 그리스 신화의 제우스 아들인데 미쳐서 아내와 아들을 죽여 그 죗값으로 신으로부터 열두 가지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 명령 가운데 하나로 헤라클레스는 머리 3개 몸 3개인 거대 괴수 게리오네스(Geryon)와 격투를 벌여 쓰러뜨리고 현재 라 코루나(La Coruna)에 해당되는 장소에 괴물의 머리를 묻어 그 자리에 탑을 지을 것을 명했다고 합니다. 이 같은 이유로 헤라클레스의 탑이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헤라클레스의 탑은 18세기에 개조되었는데 지금도 등대로 작동되고 있습니다.

이 탑은 높이 57m의 암석 위에 서 있으며 탑 자체의 길이는 55m입니다. 탑 안에는 242개의 계단이 있으며, 수면으로부터 112m 높이에서 깜빡이는 불빛은 50㎞가 넘는 거리에서도 눈에 잘 들어온다고 해요. 기원전 62년 카이사르가 이곳을 정벌한 후 등대는 로마 제국 선단(船團)이 영국·아일랜드로 가는 길목을 밝혔습니다. 로마의 대서양 진출을 보여주는 기록물입니다.

등대는 예술가에게도 영감을 줬습니다. 스페인 남부 출신으로 라 코루나 예술학교를 다닌 소년 파블로 피카소(Pablo Ruiz Picasso 1881년 10월 25일  1973년 4월 8일)는 헤라클레스 등대가 서 있는 해변을 거닐며 예술혼을 꽃피웠습니다. 피카소 본인 스스로 “12살 때 라파엘로만큼 그렸다”고 말한 그가 헤라클레스 등대가 있는 풍경을 그린 초기 작품도 있습니다. 해변과 연관된 이런 일화도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피카소가 바닷가에 놀러갔는데 어떤 아이가 종이와 펜을 들고 나타나 그림을 그려달라고 했습니다. 물론 아이의 부모가 피카소를 알아보고 아이에게 시킨 것입니다. 피카소는 종이 대신 아이의 등에다 그림을 그려서 돌려보내고 낄낄거리며 말했다고 합니다.

“저 애 부모는 저 그림 지우지 못 할걸.”

물론 이전에도 등대는 있었습니다.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파로스(Pharos) 등대는 14세기 지진으로 무너지기 전까지 1500년간 지중해를 밝혔습니다. 파로스 등대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기원전 280~247년 사이 파로스 섬에 세워졌습니다. 그 높이가 40층 건물 규모의 120~140m에 달해 기자의 피라미드와 함께 고대 7대 불가사의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등대가 956년부터 1323년 사이 이곳에서 발생한 세 번의 지진으로 크게 훼손되었습니다. 낮에는 햇빛을 거울로 반사하고 밤에는 장작을 때 불을 밝혔다고 합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이 도시를 건설하라고 명령한 것이 기원전 332년이고 죽은 것이 323년이니 그로부터 약 50년쯤 후 등대가 세워졌습니다.

등대는 가로 세로 8m의 사각형 기단 위에 2단의 원통형 구조물로 이루어졌고 그 위로 굴뚝이 있어 불이 나오도록 했습니다. 이러한 등대 구조가 후대 모든 등대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안달루시아 출신의 아라비아 여행가 이븐 무하마드 엘 발라위(Ibn Mohammed el-Balawi)는 1165년 알렉산드리아를 방문해 파로스 등대를 보고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습니다.

파로스 등대는 섬의 끝에 솟아 있다. 건물은 한 변이 8.5m인 육면체다. 동남쪽으로 바다가 감싸고 있다. 등대의 둘레로는 높이 6.5m의 벽이 감싸고 있다. 바닥은 등대를 향해 올라가는 형태로 되어 있고 안으로 183m의 경사로가 나 있다. 이 길은 곡선의 아치 형태로 등대 꼭대기까지 이어진다. 아치는 16개나 된다. 파로스 등대는 사라졌지만 그 모습은 알렉산드리아 시의 상징으로 남아있다. 시의 깃발과 문장에 모두 파로스 등대가 들어있다.

이탈리아 제노바엔 1128년 점등한 란테르나(Lanterna) 등대가 있었습니다. 제노바는 베네치아와 함께 중세 지중해 패권을 다툰 해양 세력이었습니다. 당대 제노바의 무역 수입은 프랑스 왕국 전체 세입의 3배였다고 합니다. 신대륙을 찾은 콜럼버스 고향이 제노바입니다. 1449년 란테르나 등대 책임자는 콜럼버스의 삼촌 안토니오 콜롬보였습니다. 콜럼버스 집안이 바다 일과 깊은 관련이 있었습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탐험가 콜럼버스가 태어난 토양이 있었던 것입니다. 등대 가까운 구도심에 콜럼버스 생가가 있습니다. 란테르나 등대는 우리에게도 친숙합니다. 일본 만화영화 엄마 찾아 삼만리는 19세기 제노바가 배경입니다. 아르헨티나로 돈 벌러 떠난 엄마를 그리며 주인공 마르코가 앉아 있던 곳이 란테르나 등대였습니다.

2018년 긴긴 폭염의 여름 끝에 아침저녁으로 가을의 서느런 발소리가 들립니다. 가을은 풍요와 조락(凋落)의 계절입니다. 하나님이 베푸시는 풍요를 인간이 얻듯 하나님이 예정하신 조락도 인간의 기회가 돼야 합니다. 그 고독한 시간을 갈아 믿음의 씨앗을 뿌려야 합니다. 정결하고 단단한 성화의 소망을 낙엽 지는 거리에 내놓는 일. 꼿꼿하게 기도하는 일. 등대는 그저 역사만이 아니라 문학적 상상력을 자극하고 신앙적 은유를 나타내는 상징물입니다. 한 치 앞도 내다보기 어려운 시절 2018년 갈 길을 밝힐 등대는 어디에 있을까요.

삶의 등대와 같은 좌우명(座右銘)은 개인이나 단체나 국가에서 특별한 동기 부여를 위해 만드는 표어입니다. 좌우명이라는 말은 후한(後漢)의 학자 최원(崔瑗)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자리(座)의 오른쪽(右)에 일생의 지침이 될 좋은 글을 쇠붙이에 새겨 놓고(銘) 생활의 거울로 삼은 데서 유래되었습니다. 그렇게 우리 믿음의 자리(座) 오른쪽(右)에 마음에 새겨 놓고(銘) 믿음의 거울로 삼을 좌우명(motto mtou)을 칼빈은 『기독교강요』 제3권 제21장 2항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칼빈은 총신 출신이면 거의 말씀이 가는 데까지 가고 멈추는 데서 멈춘다(Where the Word goes we should go, where the Word stops we should stop.)고 되뇌는 그의 좌우명을 아우구스티누스의 말로 시작합니다.

“We have come into the way of faith,” says Augustine: “let us constantly adhere to it. It leads to the chambers of the king, in which are hidden all the treasures of wisdom and knowledge. For our Lord Jesus Christ did not speak invidiously to his great and most select disciples when he said, I have yet many things to say unto you, but ye cannot bear them now(John 16:12). We must walk, advance, increase, that our hearts may be able to comprehend those things which they cannot now comprehend. But if the last day shall find us making progress, we shall there learn what here we could not”(August. Hom. in Joann).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합니다.
“우리는 믿음의 길로 가고 있습니다. 항상(constantly knstntli) 그 길을 고수합시다(adhere ædhr). 그 길은 왕의 방(chamber timbr)들로 인도합니다. 그 방들에는 지혜와 지식의 보물(treasure trr)들이 숨겨져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요 16:12) 말씀하셨을 때 그의 중요하고 아주 엄선한(select silkt) 제자(disciple disipl)들에게 차별적으로(invidiously invdisli)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자들이 지금 이해할 수 없는 이것들을 우리의 심장이 이해할 수 있도록 우리는 걷고(walk wːk) 전진하고(advance ædvns) 늘려야(increase inkrːs) 합니다. 그러나 만일 마지막 날 우리가 전진(progress prgres)한 것을 발견하게(find faind) 된다면 우리는 여기에서 배울 수 없었던 것을 거기에서 배우게(learn lːrn) 될 것입니다.” (August. Hom. in Joann).

If we give due weight to the consideration, that the word of the Lord is the only way which can conduct us to the investigation of whatever it is lawful for us to hold with regard to himis the only light which can enable us to discern what we ought to see with regard to him, it will curb and restrain all presumption.
주의 말씀이(the word of the Lord) 주를 존중하기 위해 우리에게 합법적인(lawful lːfl) 것은 무엇이든 조사하게 인도할(conduct kndkt) 수 있는 유일한 길이고, 우리가 주에 관해 무엇을 보아야 할지를 분별할(discern disːrn)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빛이라는 고려의 대상(consideration knsdrin)에 우리가 정당한(due djuː) 값어치(weight weit)를 쳐준다면 그것(주의 말씀)이 모든 억측(presumption prizmpn)을 제어하고(curb kːrb) 억제할(restrain ristrin) 것입니다.

For it will show us that the moment we go beyond the bounds of the word we are out of the course, in darkness, and must every now and then stumble, go astray, and fall. Let it, therefore, be our first principle that to desire any other knowledge of predestination than that which is expounded by the word of God, is no less infatuated than to walk where there is no path, or to seek light in darkness. Let us not be ashamed to be ignorant in a matter in which ignorance is learning.
왜냐하면 우리가 말씀의 경계(bound baund)들을 넘어서(beyond bijnd) 가는 순간(moment mumnt) 우리는 암흑(darkness dːrknis) 속에서 경로(course kːrs)를 벗어나게 되고(out of utv) 그리고 때때로(every now and then) 넘어지고(stumble stmbl) 길을 잃고(astray stri) 그리고 떨어진다(fall fːl)는 것이 틀림없다는(must mst) 것을 그것(the word of the Lord)이 우리에게 보여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정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해석하기(expound ikspund)보다 예정에 대한 어떤 다른 지식을 갈망하는(desire dizir) 것은 길이 전혀 없는 곳을 걷거나 어둠 속에서 빛을 찾는 것 못지않게 분별을 잃는(infatuate inftuit) 것과 마찬가지(no less ... than …못지않게 …와 마찬가지로)라는 것을 우리의 첫째(first fːrst) 원칙(principle prnspl)으로 삼도록 합시다. 무지(ignorance gnrns)가 학식(learning lːrniŋ)이 되는 어떤 문제(matter mtr)에서 무지하게 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ashamed imd) 맙시다.

Rather let us willingly abstain from the search after knowledge, to which it is both foolish as well as perilous, and even fatal to aspire. If an unrestrained imagination urges us, our proper course is to oppose it with these words, “It is not good to eat much honey: so for men to search their own glory is not glory,”(Prov. 25:27). There is good reason to dread a presumption which can only plunge us headlong into ruin.
오히려(rather rðr) 그것을 열망하는(aspire spir) 것이 위험할(perilous prls)뿐만 아니라 어리석기(foolish fːli)도 하고 심지어 치명적(fatal fitl)이기까지 한 지식을 쫓는 탐구(search sːrt)를 자진해서(willingly wliŋli) 삼가도록(abstain æbstin) 합시다. 만일 억제되지 않은(unrestrained nristrind) 상상(imagination imædnin)이 우리를 다그치게(urge ːrd) 된다면 우리의 올바른(proper prpr) 행로는 “꿀을 많이 먹는 것이 좋지 못하고 자기의 영예를 구하는 것이 헛되니라”(잠 25:27)는 말씀과 반대가 될 것입니다. 다만 우리를 앞뒤 가리지 않고(headlong hdlːŋ) 파멸로 몰아넣을 수 있는 억측(presumption prizmpn)을 두려워할(dread dred) 합당한(good gud) 이유(reason rːzn)가 거기(말씀)에 있습니다.

칼빈은 우리가 말씀의 경계들을 넘어가는 순간 우리는 어둠 속에서 경로를 벗어나게 되고 그리고 때때로 넘어지고 길을 잃고 떨어지는 것이 틀림없다는 것을 주의 말씀이 우리에게 보여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칼빈의 가르침에 따라 개혁주의를 따르는 우리의 좌우명 즉 모토는 말씀이 가는 데까지 가고 말씀이 멈추는 데서 멈춘다(Where the Word goes we should go, where the Word stops we should stop)입니다. 우리에게도 이것이 우리의 좌우명이 되도록 합시다. “꿀을 많이 먹는 것이 좋지 못하고 자기의 영예를 구하는 것이 헛되니라”(잠 25:27)는 말씀처럼 되지 않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러기 위해 말씀이 우리의 등대가 되어야 합니다. 영영 사전은 등대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A lighthouse is a tower with a powerful light that is built on or near the shore to guide ships away from danger.
등대(lighthouse lithus)는 배를 위험에서 멀리 떨어지도록(away wi) 안내해주기 위해 해안(shore ːr) 가까이 세워진 강력한(powerful purfl) 빛을 비추는 탑(tower tur)이다.

그래서 칼빈은 『기독교강요』 제3권 제21장 2항에서 성경의 경계를 벗어난 해석을 하려는 자세에 대해 가르칩니다.

“It(the word of God) will show us that the moment we go beyond the bounds of the word we are out of the course, in darkness, and must every now and then stumble, go astray, and fall.”
“우리가 말씀의 경계들을 넘어가는 순간 우리는 어둠 속에서 경로를 벗어나게 되고 그리고 때때로 넘어지고 길을 잃고 떨어지는 것이 틀림없다는 것을 주의 말씀이 우리에게 보여줄 것입니다.”

2020-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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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의 말씀이 배를 인도하는 등대처럼 우리의 눈과 마음을 밝혀 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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