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5(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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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차로 가을 강변 산책길에 한때 실세였던 이에게 물었더니 가을 색 짙은 어조로 말했다.
 
"김종준은 어렵게 커서 사람이 좀 그래... 소강석은 어렵게 컸는데도 캐면 금강석이지. 총회도 잘할 걸."
 
아니면 그는 다윗의 물멧돌 같은 작은 센돌 소강석이겠지. 그래서인지 김종준은 총회장 취임식 축하 예배 때 순서자 봉투를 직접 들고 돌아 다녔다. 그리고 취임식과 임직식 예배 사회도 봉투를 절약할 요량이었는지 소속 동한서노회 관계자가 아니라 직접 챙겼다.
 
반면 작은 센돌 소강석 목사는 부총회장 취임식 감사 예배 때 경기남노회 관계자가 사회를 보고 거액의 축하금을 들고 온 신자들이 총신, 광신, 기독신문 관계자들에게 단상에서 직접 전달하게 했다. 더 나아가 부총회장 잠재적 라이벌이었던 이건영 목사와 오정호 목사도 초청해 축하와 격려의 말이 금강석처럼 빛나게 했다. 시인이기도 한 소강석 목사는 확실히 교단과 교계를 빛낼 금강석의 면모를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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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곳을 떠날 때 우리는 우리의 일부를 남긴다. 떠나더라도 그곳에 머무는 것이다. 1497년 7월 8일 리스본을 떠난 바스쿠 다가마 함대는 이듬해 5월 20일 악전고투 끝에 인도 남쪽 고아에 도착했다.
 
이들이 출항한 항구가 리스본에 있는 벨렝이다. 1493년 3월 4일 북미 서인도제도를 발견하고서 인도를 발견했다는 대 착각에 빠진 콜럼버스가 유럽으로 귀환한 곳도 벨렝이었다. 벨렝에 있는 ‘발견 기념탑’에는 대항해시대 주인공이 포르투갈이라는 자부심이 가득하다. 대항해시대에 활동한 인물 32명이 높이 56m짜리 석조물에 새겨져 있다.
 
1520년 완공된 벨렝 '발견 기념탑' 맨 앞에 있는 사람은 포르투칼의 대항해 시대를 연 엔히크 항해왕자(1394년 3월 4일~1460년 11월 13일 )다. 그  뒤로 바스쿠 다가마, 바르톨로메우, 디아스 같은 포르투갈 영웅들이 저마다 직업을 상징하는 물건을 들고 줄지어 서 있다. 기념탑 서쪽 면 끝에는 일본과 중국에 선교를 했던 신부 하비에르가 무릎을 꿇고 있다. 기념탑 동쪽면 열두 째에 서서 글을 적은 문서를 들고 있는 사람은 루이스 카몽이스다. 목사이며 시인인 소강석처럼 카몽이스는 군인이며 시인(詩人)이다. 포르투갈의 개척 정신을 바스쿠 다가마가 상징한다면 한국 교계 문화의 상징 소강석처럼 카몽이스는 포르투갈 문화의 상징이다.
 
벨렝 바닷가에서 강변도로 쪽으로 걸어 들어가면 새하얀 건물이 보인다. 엔히크 왕자가 세운 산타마리아 성당과 그 후계자 마누엘 왕이 세운 제로니무스 수도원이 눈부시다. 성당 남문에는 대항해시대를 기념하는 온갖 조각상과 상징이 새겨져 있다. 밧줄, 닻, 범선 등 대항해 시대의 상징물을 모티브로 하는 후기 고딕 양식의 일종이다.
 
우리 생각과 달리 중세 초기 성당들은 대부분 작은 목조건물이었다. 서기 1000년이 지나 인구가 크게 늘면서 기존 성당이 너무 협소해져 더 큰 공간이 필요해졌고 그로 인해 각지에 성당 재건축 붐이 일었다. 특히 파리를 중심으로 한 프랑스 북부 지방에서는 고딕 양식이라 부르는 새로운 형태의 대형 성당들이 지어졌다. 파리 북쪽 외곽에 1144년 마침내 새로운 건물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 국왕 루이 7세와 왕비 알리에노르를 비롯하여 이 웅대한 성당을 둘러본 사람들은 하나같이 감탄을 금하지 못했던 생드니 성당이 바로 이 고딕 양식 건축의 효시에 해당한다.
 
고딕(Gothic)이라는 용어는 게르만족 일파인 고트족(Goth)에서 유래했다. 다음 시대인 르네상스시기에 만들어낸 이 말은 중세 예술을 야만적이라고 조롱하는 의미였다. 고트족이 로마를 공격하고 파괴하여 고대 그리스·로마의 고전적 규범과 미적 균형이 깨져서 ‘괴물 같은 무질서’가 시작되었으며 고딕 성당이 바로 그런 데서 나온 저급한 건축물이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전혀 사실이 아니다. 장엄하고도 화려한 고딕 성당을 지은 당시 사람들은 자부심이 가득했다. 어쨌든 고딕 풍 마누엘 양식의 걸작으로 리스본의 제로니무스 수도원과 벨렝 탑을 꼽는다. 마누엘 1세가 제로니쿠스 수도원을 지으며 완성된 건축 양식이라 그의 이름을 따 마누엘 양식이라 부르게 되었다.
 
제로니무스 수도원 창문을 통해 웅장한 실내에 햇살이 들어온다. 햇살은 정교한 마누엘 양식 기둥들을 때리며 아주 형언하기 어려운 경건한 분위기를 만든다. 신도들이 앉는 자리 뒤편 성가대 아래 양쪽으로 바스쿠 다가마와 루이스 카몽이스의 석관이 있다. 1524년 인도 코친에서 말라리아로 죽은 다가마는 15년 뒤 자기 영지인 뷔디게이라로 운구 돼 안장됐다가 1880년 이 성당으로 이장됐다. 1580년 가난 속에 죽었던 시인 카몽이스 또한 같은 해 이곳으로 이장됐다.
 
카몽이스는 군인이었다. 인도와 마카오에서 전투에 투입돼 오른쪽 눈을 잃은 군인이었다. 그 와중에 시를 썼다. 다가마의 항해와 포르투갈 역사와 신화를 버무린 서사시를 집필했다. 메콩 강에서 조난당했을 때 떠내려가는 중국인 애인과 시집 초고(草稿) 사이에 갈등하다가 여자를 버리고 시집을 움켜쥐었다. 그래서 남은 시가 대서사시 ‘루시아드’다. 사랑을 버리고 빈곤 속에 죽었으나 시는 남았다. 아마 시인 소강석도 언젠가 교회와 총회를 위한 헌신 속에 죽겠지만 그의 시는 남을 것이다.
 
몰랐다 정말 몰랐다. 입으로는 바쁘게 가을 산 노래하고 있지만 나라와 교회를 향해 바싹바싹 타는 입술과 야위어만 가는 그의 속마음은 정말 몰랐다. 총신의 단풍나무야 미안하다. 단풍의 화려함만 보던 마음이 깜짝 놀란다. 환한 얼굴에만 취해 손뼉을 쳐댔으니. 잎들은 찬바람과 기온 차이에 스트레스를 받아 물든다는데.
 
사랑받고 싶어 하고 사랑하고 싶어 하는 생명의 처절한 몸부림을 담아내는 데 단풍나무가 어떻든 무엇이 중요하겠는가. 그렇듯 윤동주를 사랑하는 시인 소강석, 그리고 교회와 총회를 사랑하는 목사 소강석, 총회 정치인으로서 지도자의 새로운 길을 가기 바란다. 새에덴교회를 세우고 이끄는 그 믿음과 열정으로...
 
새로운 길 / 윤동주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길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내일도....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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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 부총회장 금강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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