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5(목)
 
돌아온 탕자 사진.JPG
 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19773)

돌아온 탕자

돈 주고 제사 증명서를 번듯하니 소지했던 탕자들을 용서해준 것에 화가 아주 단단히 난 그리스도인들이 있었다. 그러한 온건한 조처는 또 다른 박해 때 생길 실족을 조장할 우려가 있었다. 그리고 교회는 비리비리한 허약한 신자들을 양산해내게 될 터였다. 일제시대 신사참배를 죽으면 죽었지하고 한사코 반대했던 재건 파 같은 엄격 파가 일반교회에서 떨어져 나가 딴 살림을 차렸다. 배교자를 용납하거나 관용할 수 없는 엄격파는 고개를 돌리고 나름의 교회를 시작했다. 이 교회는 상당 기간 존속했다.

70여 년이 지났다. 이즈음에 그리스도교 신자가 된 콘스탄틴 황제가 이 딴살림에 열중해 있는 엄격 파를 카톨릭 교회와 연합시키려고 애썼다. 황제는 도대체 잘못이 무엇인가 물었다. 신앙에 어떤 차이가 있는가? 실제로 신앙에는 차이가 없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정작 문제는 이런 것이었다. 시련 때 믿음을 지켰던 사람의 자손이 믿음을 헌신짝 버리듯 했던 사람의 자손과 어떤 관계도 가질 수 없다는 것이었다.

속이 뒤틀린 황제는 엄격 파의 감독에게 냅다 소리 질렀다.

“그렇다면 사닥다리를 가져다가 당신들만 천국에 올라가시구려.”

박해와 평화가 신통하게도 50년 주기로 반복됐다. 디오크레티안 황제 때도 박해가 시작됐고 앞의 이야기가 다시 되풀이됐다. 디오클레티안은 교회와 모든 성경 사본까지 없애려고 했다. 이때는 성직자 가운데에도 성서를 파기하는데 앞장선 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박해가 끝나자 그런 성직자들까지도 교회로 다시 돌아오고 싶어 안달을 했다.

일반 그리스도인인 평신도가 교회로 다시 돌아오는 문제는 이미 해결되어 있었다. 그런데 성직자는 어떻게 해야 된단 말인가? 박해 때 주님과 말씀을 등한시했던 성직자들도 용서를 받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교단 적인 거센 저항의 물결이 북아프리카에서 일었다. 그 교파를 도나투스파라고 한다. 아프리카의 가난하고 불만이 입에 가득한 사람들이 그 교파로 우르르 몰렸다. 그들의 성격은 매우 억세고 모질었으며 제멋대로였다. 그들은 교회를 가르고 다른 파의 감독들을 충동질했다. 전 로마제국이 그리스도교화 된 뒤까지도 도나투스파는 어찌나 골머리를 썩였던지 그 파를 추종하는 사람들에게 사형 형벌이 포고될 정도였다.

많은 사람이 발을 헛디뎌 넘어졌지만 다는 아니었다. 이를테면 박해에 굴하지 않고 신앙을 고백하리라 생각했던 사람이 신앙에 손사래를 쳤는가 하면 부인하겠지 했던 사람이 한사코 신앙을 고백하며 죽음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리스도인을 코웃음 치는 디오클레티안 황제 앞에서 연극이 한 편 공연되었다. 한 배우가 세례를 받기 위하여 하얀 옷을 입었다. 그가 소리쳤다. “너무 무거워” 그는 아픈 듯이 무대에 벌렁 누웠다.

그러면서 말한다.

“좀 가벼워졌으면 좋겠어”

안타까운 눈빛으로 동료가 말했다.

“어쩐다지? 목수처럼 널 대패질 해주랴? 그럼 얇아져 가벼워지지 않겠니.”

하얀 옷의 배우가 질겁하며 외쳤다.

“바보 천치 같으니라구. 난 그리스도인이 되어 하나님에게로 훨훨 날아 올라가고 싶단 말이야.”

황제의 눈이 실쭉해졌다.

2020-1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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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24_ 돌아온 탕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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