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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42_ 교회 포기한 군대
Divi Ambrosii Episcopi Mediolanensis Omnia Opera 교회 포위한 군대 이상한 것을 이상하다고 말하면 안디는 이상한 세상이 됐다. 그래서 바름을 이야기한다고 뒤집어 이야기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덩달아 그것을 듣는 사람도 수를 더해 가고 있다. 거꾸로 사는 세상이니, 막 쪄낸 찐빵이니, 베 짜는 하나님이니 하는 변설로 진리를 낯설게 만든다. 신학교를 들어 간 사람이 갑자기 목사 될 필요성을 못 느껴 신학교를 그만두었단다. 그리고 믿음대로 살기 위해 바로 살아야 될 세상을 거꾸로 살아야 된단다. 어느 넋이 빠진 친구는 목사 안수를 받은 날 가슴이 하도 허전해 실컷 술로 채웠단다. 이따위 수작의 대가는 역시 니체였다. 그가 얼빠진 눈망울로 종종 되뇌인 말이 선한 악이니 악한 선이니였다. 성경은 말씀하신다. 악은 악이고, 선은 선이라고. 성경에서는 의적 일지매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도둑은 도둑이고 의인은 의인이다. 어찌 의로운 도둑이 있을 수 있으며 악한 의인이 있을 수 있겠는가! 암브로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세상의 가치관이 흔들리고 있었다. 많고 강한 게 판단의 가름끈이 되고 있었다. 신자들마저도 그 수가 늘어감에 따라 성경이 아니라 세상 풍조를 따르는 경향이 짙어졌다. 니케아 신앙을 지지하는 암브로스는 아리우스파에 대한 어떤 지원도 단호히 거절했다. 그는 성경대로 ‘예’와 ‘아니오’가 분명한 사람이었다. 그가 유스티나 황후의 부탁을 거절한 까닭은 솔직히 아리우스주의가 그르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아리우스주의가 고트족의 신앙이었기 때문이다. 고트족은 아리우스파가 로마 제국에서 온갖 힘을 다 쓰던 시절에 파송한 선교사들이 개종시킨 야만인들이었다. 그 후 로마 제국의 대부분이 니케아 신앙을 받아들였다. 반면에 이성과 논리에 근거해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아리우스주의는 야만인들에게 전파됐다. 그 결과 아리우스주의자는 미개인이나 야만인을 의미하게 됐고 니케아주의자는 로마인을 뜻했다. 황후는 여타 야만인들로부터 로마 제국을 방어하기 위해 야만인들을 용병으로 고용하고 있었다. 아리우스 신앙을 지닌 이를 야만인 병사들을 위해 그녀는 밀란에다 예배당을 하나 마련해주고 싶었다. 암브로스는 딱 잘라 거절했고 그녀가 바랬던 교회를 그를 따르는 사람들로 채워버렸다. 화가 치밀 대로 치민 황후는 야만인 군대를 보내 그 교회를 포위하게 했다. 군인들의 동태를 예의 주시하면서 암브로스는 신자들에게 자신이 작곡한 찬송가를 부르도록 가르쳤다. 사실상 암브로스는 라틴 찬송가의 아버지로 불리운다. 병사들은 살기를 번득이며 공격 명령을 기다렸다. 온 밀란 시민이 숨을 죽이며 사태를 주시했다. 싸움의 결과는 불을 보듯 뻔했다. 유스티나 황후는 지휘봉을 손에 쥐고 교회 정문을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었다. 암브로스 ‘네까짓 게 버텨봤자 별수 있겠어. 이제 무릎을 꿇을 거야’ 하며 그녀는 느긋한 마음으로 기다렸다. 그녀는 짐짓 일그러뜨린 얼굴에 묘한 웃음까지 짓고 있었다. 그때 숨 막히는 정적을 깨고 교회에서 찬송을 부르는 회중의 힘찬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아연했다. 어찌됐던 그녀도 신자였다. 황후는 찬송부르는 회중에게 공격 명령을 내릴 심장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암브로스가 이겼다. 2021-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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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32 - 쳇바퀴 세상
Sylvester I and Constantine 쳇바퀴 세상 신문을 펼쳐 든다. 날마다 그렇듯 오늘도 사건으로 지면은 그득하다. 10대 소녀가 괴성을 지르다 밟히고 밟혀 눈이 개개풀어진 사건, 미국 대통령 예비선거, 이주일 귀국, 다리 저는 국회의원이 목욕하고 나오다 칼 맞은 일, 이북에서 올까 싶은 목사들 이야기, 이스라엘 레바논 폭격으로 악명 높은 헤즈볼라의 책임자 무사위가 콩가루 된 사건. 주후 325년에 신문이 있었다면 콘스탄틴 황제가 주최한 니케아 총회를 대서특필했으리라. 한국전쟁 참전을 결의한 유엔총회에 비교가 안 되게 신문지면을 꽉 채웠을 것이다. 이런 소식이 공해로 하늘에 구멍 뚫리는 기사나 국회의원 선거 시사 나부랭이보다 얼마나 좋을 것인가. 어제와 같은 하루의 일과가 시작됐다. 로마 제국의 황제 콘스탄틴은 기지개를 펴며 침소에서 일어났다. 햇살은 밝았다. 만찬 석상에서 박해 때 눈이 뽑혀 애꾸가 된 감독의 눈 자국에 입맞춤했던 정경이 떠올랐다. 만찬장에 감동의 박수가 넘쳤다. 황제는 빙긋 웃음을 흘렸다. 니케아 총회가 파한 뒤 총대들이 콘스탄틴에게 활동결과를 보고했다. 그러나 연로한 아리우스를 비롯한 다섯 총대들은 니케아 신조에 서명을 거부했고 유배를 당했다. 이게 난관을 전부 해결해 주지는 못했다. 그리스도와 성부의 관계와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에 관한 토의는 해를 거듭해 한 시대를 넘어 계속됐다. 추방당했던 감독들이 의기양양하게 돌아왔고 반대로 아다나시우스가 유배당했다. 인생은 죽기 마련이다. 세월이 흘러 임종 무렵에 세례를 받은 콘스탄틴 황제가 숨을 거뒀다. 세 아들이 뒤를 이었다. 고구려의 독재자 연개소문이 죽은 뒤 일어났던 꼴이 콘스탄티노플에서 이미 오래 전에 본을 보이고 있었다. 황제의 아들들은 황제 자리를 놓고 아귀다툼을 했다. 어렸을 때 그리도 친했던 형제들이었는데 권력 앞에서는 모두가 철천지원수였다. 역사를 보노라면 지금의 사태는 아무 것도 아님을 느끼게 된다. 그에 곁들여 아리우스파와 니케아파의 팽팽한 신념들이 이방원의 넋두리마냥 칡넝쿨처럼 얼키고 설켜 맴돌았다. 승리한 쪽이 반대파의 감독들을 유배시켰다. 심지어는 기독교 신자끼리의 싸움을 종식시키고자 콘스탄틴(세 아들 가운데 한 사람)이 알렉산드리아에 파송했던 연로한 메신저도 유배를 당했다. 유배당한 사람은 세 아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항의를 전달했다. “나는 당신 할아버지 치하에서 박해를 받았습니다(콘스탄틴 황제의 아버지는 디오클레티안 치하 때 부황제들 가운데 하나였다). 당신이 날 박해하려고 한다면 진리를 부인하기보다는 박해를 달게 받을 것이오. 하지만 이건 분명히 기억하십시오. 당신에게는 제국을 주고 우리에게는 교회를 주신 분이 하나님이셨음을 말이오. 우리가 정권을 탈취한다면 그건 우리가 하나님을 반대하는 게 될게요. 그러나 당신이 교회에 간섭하신다면 당신은 보통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이 말은 니케아파의 지도자가 아리우스파 황제에 대항해 말했다. 드디어 니케아파가 완전히 승리하는 날이 왔다. 더 이상 그런 소모성의 싸움들을 방지하기를 바라는 황제들이 삼위일체를 반대하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칙령을 발했다. 2020-1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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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강요 영어 수업 - 제육 계명 살인
Cain slaying Abel by Peter Paul Rubens Lesson XVIII제육 계명 살인Sixth Commandment Murder 2018년 3월 2일 방송된 SBS 궁금한 이야기 Y에서는 문재인 대통령의 변호사 인생 중 가장 한 맺힌 사건으로 알려진 엄궁동 부녀자 살인사건의 진실을 파헤쳤습니다. 지난 1990년 1월 4일, 부산 엄궁동 낙동강 주변 갈대숲에서 눈 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참혹한 모습의 시신 한 구가 발견됐습니다. 성폭행을 당한 후 둔기로 머리를 가격당해 두개골이 함몰된 채 사망한 상태였습니다. 당시 현장에는 범인을 단정할 수 있는 어떤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피해자를 알아본 결과 인근 지역에 살고 있던 삼십대 여성 김 모 씨였습니다. 피해자와 함께 있던 그녀의 애인은 2명의 범인과 격투 끝에 도망을 쳤고 늦은 밤이어서 가해자의 인상착의 등을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그렇게 미제 사건으로 남을 줄 알았던 엄궁동 살인사건의 범인은 뜻밖의 사건을 통해 검거됐습니다. 1991년 11월 경찰을 사칭해 금품을 갈취했던 2인조 강도사건이 발생했는데 범행 수법과 장소가 부산 엄궁동 2인조 살인사건을 떠올리게 했다는 것입니다. 경찰은 2인조 강조를 범인으로 체포했고 그들 역시 순순히 범행일체를 자백했습니다. 그런데 27년이 지난 지금 무기징역 선고를 받았던 그들이 무죄를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 당시 자백을 했던 것은 경찰의 고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거짓 자백을 했다고 밝혔습니다. 당시에 이 사건의 변호를 맡은 변호사는 문재인 대통령이었습니다. 무죄를 주장하고 있는 장동익씨는 이날 방송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변호사 시절 보낸 편지를 간직하고 있었습니다. 편지에는 “내 생각에 어떻게 해서든지 재심이 열리기만 한다면 동익씨의 억울함을 밝힐 수 있으리라 믿습니다”라는 내용이 담겨있었습니다. 이들이 범인이 아니라는 증거는 바로 장동익 씨의 좋지 않은 시력상태였습니다. 장 씨는 시각 장애 1급 장애인으로 근거리의 사물을 알아보지 못할 만큼 안 좋은 시력을 지녔습니다. 불빛 하나 없는 캄캄한 밤에 강으로 사람을 끌고 가서 돌로 피해자의 머리를 가격하여 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판단입니다. 27년이 지난 지금 무죄를 주장하는 장 씨는 진실을 밝힐 수 있을까요. 21년 만에 만난 딸에게 장 씨는 말했습니다. “너는 살인자의 딸이 아니다. 너에게 평생 따라다녔을 살인자의 딸이라는 누명을 꼭 지워주겠다.” 장 씨는 또 이렇게 말을 이었습니다. “내 딸을 만나러 오는데 걸린 시간은 21년하고도 5개월, 그러나 딸은 제 방에서 나올 생각을 않습니다. 우리를 이렇게 만든 저들에 대한 분노가 치밀어 오릅니다. 그래도 분노에 잡아먹히지 않을 것입니다. 저 아이의 상처는 내가 누명을 벗는. 거기서 치유될 것입니다.” 장 씨가 진실을 밝히고 27년 만에 무죄를 입증할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됩니다. 하지만 대법원까지 이어졌던 재판에서 유죄 판결은 바뀌지 않았으며 결국 이 사건은 문 대통령이 변호사로 지냈던 35년 동안 가장 한스러운 사건으로 남았다고 합니다. 가인이 자신의 동생 아벨을 죽인 이후 인간은 살인을 끊임없이 저지르고 있습니다. 성경의 관점에서 볼 때 살인은 매우 넓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 살인이라는 말 자체가 누구나 죄의식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요소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산상수훈에서의 예수님의 가르침은 아주 의미심장합니다.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살인이란 단지 외적인 행동일 뿐이고 십계명도 그런 행동만을 지적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이 의미에 대해 칼빈은 『기독교강요』 제2권 제8장 39항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THOU SHALT NOT KILL. 39. The purport of this commandment is that since the Lord has bound the whole human race by a kind of unity, the safety of all ought to be considered as entrusted to each. In general, therefore, all violence and injustice, and every kind of harm from which our neighbour's body suffers, is prohibited. Accordingly, we are required faithfully to do what in us lies to defend the life of our neighbour; to promote whatever tends to his tranquillity, to be vigilant in warding off harm, and, when danger comes, to assist in removing it. Remembering that the Divine Lawgiver thus speaks, consider, moreover, that he requires you to apply the same rule in regulating your mind. It were ridiculous, that he, who sees the thoughts of the heart, and has special regard to them, should train the body only to rectitude. This commandment, therefore, prohibits the murder of the heart, and requires a sincere desire to preserve our brother's life. The hand, indeed, commits the murder, but the mind, under the influence of wrath and hatred, conceives it. How can you be angry with your brother, without passionately longing to do him harm? If you must not be angry with him, neither must you hate him, hatred being nothing but inveterate anger. However you may disguise the fact, or endeavour to escape from it by vain pretexts. Where either wrath or hatred is, there is an inclination to do mischief. If you still persist in tergiversation, the mouth of the Spirit has declared, that “whosoever hateth his brother is a murderer,”(1 John 3:15); and the mouth of our Saviour has declared, that “whosoever is angry with his brother without a cause shall be in danger of the judgment: and whosoever shall say to his brother, Raca, shall be in danger of the council: but whosoever shall say, Thou fool, shall be in danger of hell fire”(Mt. 5:22). 이 영어 원문의 대략적인 해석은 다음과 같습니다. 제육 계명 살인하지 말지니라 출 20:13 39. 이 계명의 목적은, 주께서 인류 전체에 일종의 통일성이 있도록 한데 묶어 두셨으므로 우리는 각각 전체의 안전을 생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약하면, 이웃의 신체를 해할 일은 폭행, 상해 기타 어떤 것이든지 일체 금지하십니다. 따라서 이웃의 생명을 구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충실히 이용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들의 평화에 도움이 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하라, 해로운 것이면 막아내라, 이웃이 위험한 처지에 있으면 도와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입법자로서 이렇게 말씀하신다는 것을 상기한다면, 우리는 동시에 그는 이 원칙으로 우리의 영혼을 인도하려 하신다는 것도 생각해야 합니다. 마음속의 생각을 보시며 특히 그것을 중시하시는 분이 육체에만 진정한 의를 가르치신다면, 그것은 우스운 이야기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계명은 마음으로 살인하는 것을 금하며, 형제의 생명을 구하겠다는 마음을 가지라고 명령하십니다. 참으로 살인은 손이 낳는 것이지만, 마음이 분노와 증오심에 감염될 때에 살인을 잉태합니다. 형제에 대해서 노하면서 그를 해하려는 욕망이 치밀어 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형제에 대해 노하지 않는다면 미워할 수도 없습니다. 증오심은 지속되는 분노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 분노나 증오심이 있는 곳에는 해를 주려는 의도도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수단으로도 감출 수 없고 피할 수도 없는 사실입니다. 당신이 계속 변명할지라도 성령께서는 이미 “마음속에서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라”(요일 3:15)고 선언하셨고, 주 그리스도께서는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 5:22)고 선언하셨습니다. 칼빈의 살인에 대한 가르침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습니다. 즉 목숨을 죽이는 것만이 살인의 전부냐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마음과 태도도 문제를 삼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성내는 것뿐만 아니라 모욕하는 말조차 살인에 버금가는 죄가 됩니다. 라가라 하는 말의 원래 뜻은 비었습니다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라가(raca)를 사용해 욕을 하게 되면 속이 빈 놈이나 정신 나간 놈이라는 뜻으로 모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미련한 사람이라 하는 말의 원어 모로스(moros)는 바보라는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이 말들은 도덕적으로 바보이거나 정신 나간 사람을 의미합니다. 즉 바보짓을 하거나 정신 나간 짓을 하는 사람을 빗대는 말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들을 듣는 사람은 마음과 명예에 심한 상처를 받게 됩니다. 예수님은 누구를 비방하거나 모욕하는 것조차도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제육 계명을 어기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우쳐주십니다. 주님의 이 가르침은 우리의 본성을 적나라하게 밝혀주십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화를 내고 투덜대고 비방하고 무시하는 말을 함부로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그러한 행위가 살인을 저지르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성향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주님께서 말씀해주십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마 5:43-45 우리는 이웃 사랑과 기도로 자신을 다스려 제육 계명을 지켜야 할 것입니다. 2020-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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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세계 교회사 31 - 니케아 신조
니케아 신조 아마 직전 총회장이셨던 것 같다. 그는 두루마기 차림의 설교 중에 찬송가를 자작하여 부르시는 목사님이셨다. 우리 교단 가장 큰 교회의 목사님이시기도 했다. 그리고 바로 그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는 총회장이셨다. 그가 이제 바로 뒤를 이은 총회장한테 나무망치와 받침을 물려주고 증경 총회장이 되어 바깥으로 나오셨다. 몇 분 총대 목사님이 이 증경 총회장과 맞닥뜨렸다. 그들의 만남과 대화는 여느 청년들이 모여 노닥거리는 모양과 진배없었다. 햇병아리 신학생의 눈에는 진기한 구경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거기에는 진솔한 인간의 모습이 우러나고 있었기 때문이다.요즘의 세태처럼 권력과 부귀와 장수 나부랭이보다는 지혜를 하나님께 구한 솔로몬 왕이 이렇게 말했다. “해 아래 새것이 없다.” 그런데 주 후 325년 니케아에서 인간 역사상 유례없는 일이 발생했다. 다시 말해 해 아래 새로운 일이 일어났다. 바벨탑 이래 인간들이 모이면 쓰잘 데 없는 일을 일삼기 일쑤인데 니케아 총회에서는 전혀 달랐다. 인간들이 웅성웅성 모여 인류 최초로 신에 대한 협의와 결정을 내렸다. 니케아 총회는 부활절 날짜를 결정했다. 부활절은 봄이 시작되고 밤과 낮의 길이가 같아지는 날 이후 첫 번째 보름달이 지난 첫 번째 주일로 결정했다. 이것은 유대인과 이방인과 그리스도인의 관습이 짬뽕 된 것이었다. 의견이 분분했던 부활절이 확정됐다. 이어서 니케아 총회는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관계에 대한 논란도 종지부를 딱 찍었다. 이것은 아다나시우스의 의견을 따라서 결정되었다. 이로써 아리우스의 해괴한 주장은 빛을 잃고 불가사의한 삼위일체는 번쩍거리게 되었다. 이 내용을 담은 걸 니케아 신앙고백이라고 한다. 물론 이 신조가 몇 년 뒤에 작성되었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니케아 신앙고백이라고 하는 것은 그게 니케아 총회의 사상을 참으로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게 영국 공동기도서에 번역되어있는 걸 한글로 옮기면 이렇다. “나는 하늘과 땅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만물의 창조주 전능하신 한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독생 성자이시며 만세 전에 성부와 함께 계셨고 하나님의 하나님, 빛의 빛이시며 참되신 하나님의 참되신 하나님이신, 나셨지만 만들어지지 않으셨고, 성부와 한 속성을 지니셨고, 만물을 만드셨고, 우리 인간을 위해 우리 구원을 위해 하늘에서 내려오셨고, 그리고 동정녀 마리아의 성령을 통해서 인간이 되신 한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예수님은 본디오빌라도 치하에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고난을 받으사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사흘 만에 예수님은 성경 말씀대로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늘에 오르사 성부 오른쪽에 앉아 계시다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 위해 영광스럽게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의 나라는 영원할 것입니다.나는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오신 생명의 주와 수여자이신 성령님을 믿습니다. 성령님은 성부와 성자와 함께 경배와 영광을 받으며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2020-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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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강요 영어 수업 - 제오 계명 효도
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Lesson XVII제오 계명 효도Fifth Commandment Flial Duty 부모님과 함께하면 돌아보니 가시밭길 그 길이 꽃길이었습니다. 부모님과 같이 걸으면 아픈 돌팍길 그 길이 비단길이었습니다. 부모님이 옆에 계시면 캄캄해 무서웠던 길 그 길이 빛으로 나아가는 길이었습니다. 부모님과 함께한 가장 훌륭한 시는 아직 씌어지지 않았습니다. 부모님과 같이 부르는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아직 불리지 않았습니다. 부모님이 옆에 계신 최고의 날들은 아직 살지 않은 날들입니다. 부모님과 보고 싶은 가장 넓은 바다는 아직 항해하지 않았고 가장 먼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불멸의 춤은 아직 추지 않았습니다. 부모님이 옆에 계시지 않을 때 가장 빛나는 별은 아직 발견되지 않은 별이고 무엇을 해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그때 내가 부모 되어 비로소 진정한 무엇인가를 할 수 있을까요. 부모님과 같이 걷지 않아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때가 비로소 진정한 인생 여행의 시작일까요. 2016년 tvN에서 방영한 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즈(2016)는 노년의 삶을 인상 깊게 그려냈습니다. 마지막 방송이 나간 후 노희경 작가는 블로그에서 이런 소감을 적었습니다. “작가가 되어서 이렇게 잔인해도 되나. 드라마의 결말을 쓰며, 내 잔인함에 내가 소름이 돋았다. 아무리 포장해도 이 드라마의 결론은 부모님들, 자식들에게 의지하지 마세요, 우리 살기 바빠요, 그리니 당신들은 당신들끼리 알아서 행복하세요, 우리는 이제 헤어질 시간이에요, 정 떼세요, 서운해 하지 마세요, 어쩔 수 없잖아요, 그건 아닌가 싶었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부모에게 쓰는 내내 끝난 후에도 참 많이 미안했다.” 독일 여성감독 도리스 되리의 영화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원제 Cherry Blossoms 벚꽃 Hanami 꽃놀이)에 이런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늘 일본에 가보고 싶었다. 후지산과 벚꽃을 그와 함께 꼭 한번 보고 싶었다. 남편없이 구경하는 건 상상할 수가 없다.” 이 영화의 첫 번째 대사이자 아내 트루디의 말입니다. 남편 루디와 함께 일본 후지산의 벚꽃을 보고 싶었다고 독백하던 아내 트루디는 남편의 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을 의사로부터 전해 듣습니다. 그래서 멀리 산다는 핑계로 한동안 보지 못했던 자식들을 볼 겸 여행을 제안하죠. 베를린에 도착한 부부는 아들 내외와 손자 손녀가 사는 집으로 갑니다. 반가움도 잠시 아이들은 각자 게임에 빠져있고, 아들 내외 그리고 뒤이어 도착한 딸은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죠. “왜 온 거야. 시간 없는데…” 그래도 오랜만에 모인 가족이니 시간을 내 시내 구경도 하고 함께 사진도 찍고 식사도 하죠. 하지만 부모는 이미 너무 커버린 자식들이 버겁고 자식은 이제 귀찮아진 부모와 같이 있는 시간이 불편합니다. 부부는 자식에게 폐 끼치는 것 같은 느낌에 자리를 뜨죠. 자식들은 그런 부모를 보며 화를 냅니다. 그러곤 돌아서서 죄책감에 눈물짓습니다.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왜 그렇게밖에 말하지 못하는지... 그들의 행동을 눈치챈 트루디는 자기들만의 여행을 바다로 가자고 루디를 보챕니다. 도착한 발트해 파도소리에 잠을 못이루겠다고 불평하는 루디. 그리고 그런 루디를 타이르며 함께 춤추고 즐기길 원하는 트루디. 그날 밤을 그렇게 지새고 어젯밤 시끄럽게 쳐대던 파도소리가 고요해졌다며 아내 트루디를 깨우던 루디. 그러나 그 파도처럼 루디는 고요하게 잠들어 버렸습니다. 이 때문에 또 가족이 모이게 됩니다. 도쿄에 거주하던 막내아들까지요. 자신을 희생해가며 가족들을 아껴봐 주던 아내였기에 루디의 슬픔은 더욱더 큽니다. 장례를 치르는 중에 바다를 보며 그는 중얼거립니다. “정말 고요하군....” 장례식에서 자식들은 이제 와 자신이 아무것도 해 드릴 수 없음에 눈물 흘립니다. 그러면서 한편 남겨진 아버지에 대한 부담을 느끼죠. 그들은 바쁘고 엄마는 이제 없고 아버지는... 아버지는 어쩌지... 아버지 루디는 하루살이의 하루의 삶은 천국 그래서 그들의 하루 비행은 행복이라는 말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그의 그런 슬픔을 자식들은 크게 신경 쓰지 않습니다. 오히려 남아있는 것이 아버지임을 불평하고 서로에게 미루며 마치 짐이 하나 생긴 듯 행동을 취합니다. 아버지 그 이름만으로도 자녀에겐 새처럼 날개를 펴고 마음대로 날 수 있는 하늘입니다. 어머니 그 이름만으로도 자녀에겐 새처럼 날개를 접고 포근히 잠들 수 있는 보금자리인데도 말입니다. 몸빛이 검고 울음소리가 흉측하여 죽음을 알리는 새로 전 세계에 알려진 까마귀는 자기 어미에게 먹이를 물어다 줍니다. 그래서 까마귀를 효조(孝鳥)라고 해서 일본에서는 상당히 귀하게 여기는 까닭에 흔히 볼 수 있는 새이기도 합니다. 농경사회에서는 노쇠한 부모를 자식이 까마귀처럼 공양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현대사회에서는 그러한 의미가 좀 쇠퇴한 감이 있기는 하더라도 그 정신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부모를 공경하는 효도의 의미는 물질과 육체적인 섬김은 물론이고 부모의 뜻과 생각을 존중한다는 데 더 무게를 두고 있습니다. 그 의미에 대해 칼빈은 『기독교강요』 제2권 제8장 36항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HONOUR THY FATHER AND THY MOTHER: THAT THY DAYS MAY BE LONG UPON THE LAND WHICH THE LORD THY GOD GIVETH THEE. 36. Wherefore, we ought to have no doubt that the Lord here lays down this universal rule--viz. that knowing how every individual is set over us by his appointment, we should pay him reverence, gratitude, obedience, and every duty in our power. And it makes no difference whether those on whom the honour is conferred are deserving or not. Be they what they may, the Almighty, by conferring their station upon them, shows that he would have them honoured. The commandment specifies the reverence due to those to whom we owe our being. This Nature herself should in some measure teach us. For they are monsters, and not men, who petulantly and contumeliously violate the paternal authority. Hence, the Lord orders all who rebel against their parents to be put to death, they being, as it where, unworthy of the light in paying no deference to those to whom they are indebted for beholding it. And it is evident, from the various appendices to the Law, that we were correct in stating, that the honour here referred to consists of three parts, reverence, obedience, and gratitude. The first of these the Lord enforces, when he commands that whose curseth his father or his mother shall be put to death. In this way he avenges insult and contempt. The second he enforces, when he denounces the punishment of death on disobedient and rebellious children. To the third belongs our Saviour's declaration, that God requires us to do good to our parents(Mt. 15). And whenever Paul mentions this commandment, he interprets it as enjoining obedience. 이 영어 원문의 대략적인 해석은 다음과 같습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출 20:12 36. 그렇기 때문에 주께서 여기서 한 일반적 원칙을 세우셨다는 것을 우리는 의심해서는 안 됩니다. 즉, 주의 임명으로 어떤 사람이 우리 위에 세워진 것을 알면, 우리는 그에게 경외와 순종과 감사를 드리며, 그밖에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우리의 웃어른이 이런 존경을 받을 자격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문제가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그들은 하나님의 섭리로 그 지위에 있게 된 것이며, 이 일이 우리가 그를 공경하라는 하나님의 뜻을 증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 세상에 낳아준 우리의 부모를 공경하라고 명백히 말씀하십니다. 자연 자체도 이 일을 우리에게 가르칠 것입니다. 반항이나 고집으로 부모의 권위를 무시하는 자들은 사람이 아니라 기괴한 동물입니다. 그래서 주께서는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모두 사형에 처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자기를 낳아 준 분들의 노고를 인정하지 않는 자들은 인생의 혜택을 받을 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공경에 경의와 복종과 감사의 세 부분이 있다고 우리가 말한 것은 율법에 첨가된 여러 말씀을 보아도 분명히 올바릅니다. 주께서는 부모를 저주하는 자는 죽이라고 명령하심으로써 처음 부분인 경의를 주장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방법으로 그는 멸시와 박대를 복수하십니다. 또 순종하지 않고 반항하는 자녀에 대해서 사형을 명령하심으로써(신 21:18-21) 둘째 부분인 순종을 강조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마태복음 15장에서 부모를 후대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계명이라고 하신 말씀은 존경의 셋째 부분인 감사에 관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 계명을 언급할 때마다 강제적인 복종을 요구하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존 스토트(John Stott)는 그의 저서 『그리스도인의 확신』(Confirmation)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십계명 두 판을 모세에게 주셨습니다. 첫째 돌판에는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의무가 새겨져 있습니다. 둘째 돌판에는 이웃에 대한 인간의 의무가 새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부모를 공경하라는 제오 계명을 첫째 돌판에 새기셨습니다. 그 이유는 보이는 육신의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아니하는 부모이신 하나님을 공경할 수 없다는 사실을 하나님이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웃에 대한 우리의 의무는 감당하지 못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의무는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온당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이웃들도 섬겨야 합니다. 하늘나라에 적합한 사람은 세상에서도 쓸모가 있어야 합니다. 제오 계명은 부모에 대한 의무를 지시할 때 다른 종류의 부모들도 내포하고 있습니다. 즉 정치적인 부모(세상의 권좌에 있는 사람들) 영적인 부모(교회의 목사들) 그리고 연륜과 경험을 통한 가르침을 받아 부모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스승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오 계명이 특별히 지적하고 있는 것은 육적인 부모입니다. 제오 계명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 20:12)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 위에 있게 하신 이들을 우리가 존경하고 감사하는 마음과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본질적으로 권위를 싫어합니다. 그러므로 자녀들이 부모를 공경하도록 배우지 아니하면 나중에 정당한 권위를 부여받은 대상에게도 거역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자녀들이 자신을 낳아준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다면 하나님도 경외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 22:6) 말씀합니다. 또한 부모들도 자녀들의 마땅한 공경을 받기에 합당한 부모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경 말씀을 따르는 부모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엡 6:4 2020-1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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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세계 교회사 30 - 니케아 총회
니케아 총회 고풍스런 대전중앙교회에 모인 목사님들과 장로님들의 모습은 엄숙하고 경건했다. 우리 총신 신학생들은 총대들 틈에 뒤섞이니 이제 알을 깨고 나온 병아리 꼴이었다. 그렇게 높게 보이던 신학부 졸업반 전도사님들도 어설퍼 보이기는 매한가지였다. 한 목사님이 손을 쳐들고 “의자앙!”하며 사회 석 앞으로 어기적 나갔다. 마이크를 손에 쥐고 발언을 했다. “에, 우리가 이렇게 성 총회로 모였으니 어찌 입씨름만 한 대서야 하나님 앞에 면목이 서겠습니까? 낮에는 회의를 하고 밤에는 부흥사경회를 열어 은혜를 받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동의가 들어오고 왁자하니 재청이 울리고 가부를 묻는 소리가 찌렁하니 예배당을 휘감았다. 기름 부음 받는 자들의 “예”하는 소리가 초등학생들 구령처럼 장내를 울렸다. 해가 뉘였거렸다. 기름 부음 받은 분들의 즐거운 저녁밥이 자위가 돌 무렵 총회에 모인 총대들이 결의한 대로 부흥사경회가 시작됐다. 가라앉은 설교자의 음성이 성령의 열매를 강조하느라 냅다 외치는 소리에 뒤이어 쿵 하며 대전중앙교회 마룻바닥을 울렸다. 일순 장내가 조용해졌다. 너나없이 무슨 소리인가 하고 두리번거렸다. 보니 한 목사님이 몸을 앞뒤로 흔들며 주무시다가 의자 밖으로 굴러떨어지신 것이었다. 나라도 하나였고 교회도 하나였는데 그리스도인의 행습은 로마 군인들처럼 일정하지가 못했다. 교회의 가장 중요한 명절인 부활절만 해도 그랬다. 유월절을 지키는 유대인처럼 봄에 달이 꽉 찬 날을 지키는 사람도 있었다. 이를테면 부스럼 예방한답시고 키들거리며 부럼을 까는 정월 대보름을 부활절로 지키는 셈이었다. 그런가 하면 이교도들이 자연을 지배하는 신들이 기지개를 펴고 일어나는 것을 경축했던 봄의 첫날을 부활절로 지키는 사람도 있었다. 부활주간의 부활절날도 가지각색이었다. 어떤 사람은 부활절을 일요일이라고 주장했다. 삼위일체와 이런 모든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콘스탄틴은 주 후 325년 로마의 수도 콘스탄티노플 근처에 있는 안양만 한 니케아 시에서 회집하는 총회를 소집했다. 이 모임을 니케아공의회라고 한다. 이건 전체교회의 지도자들이 모인 최초의 집회였다. 전 세계에서 감독들이 꾸역꾸역 니케아로 모여들었다. 아프리카와 시리아에서 메소포타미아와 페르샤에서 폰투스, 갈라디아, 밤빌리아, 길리기아, 프리지아, 트라키아, 마케도니아, 아가야 및 멀고 먼 스페인 등지에서 감독들이 모여들었다. 로마에서는 사제들이 왔다. 역사가는 콘스탄틴처럼 어떤 군주가 자기의 구세주한테 경의를 표하기 위하여 그토록 성대한 축제를 마련한 적이 전무후무했노라고 니케아 총회의 모임에 대해 말했다. 감독들과 사제들이 거대한 홀에 운집하여 황제를 기다렸다. 황제가 홀에 모습을 드러내자 모두 일어섰다. 그는 하늘에서 보낸 메신저 같았다. 그의 옷을 수놓은 금과 보석들이 빛을 받아 찬란하다 못해 하얗게 빛났다. 황제는 총대들을 만찬에 초대했다. 감독들과 사제들이 줄을 지어 만찬장에 들어설 때 근위병들이 양쪽에 칼을 뽑아 들고 있었다. 그것은 그들을 벌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한테 경의를 표하기 위한 것이었다. 2020-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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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리틀메시지 _욥기Job
- 욥의 정원 욥기Job는 대부분 시로 이루어져 있지만 이야기는 아니다. 구약성경에서 에스겔은 그의 책 14장 14절에서 20절까지에서 욥은 실제 장소에서 실제 시련들을 겪은 실제 인물이었다고 말한다. 신약성경은 야고보서 5장 11절에서 시련을 겪을 때 신앙을 지키는 인내자의 본보기로 욥을 들었다. 그는 하나님을 믿는 자신의 신앙을 버리지 않았다. 욥기는 왜 의인이 고난을 받는가라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런 시가 있다. 난 기도했다 _작자 미상 나는 하나님에게 가장 강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내가 원하는 모든 걸 이룰 수 있도록 하지만 하나님은 나를 약하게 만들었다 겸손해지는 법을 배우도록 나는 하나님에게 건강을 부탁했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도록 하지만 하나님은 내게 허약함을 주었다 더 의미 있는 일을 하도록 나는 부자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행복할 수 있도록 하지만 난 가난을 선물받았다 지혜로운 사람이 되도록 나는 재능을 달라고 기도했다 그래서 사람들의 찬사를 받을 수 있도록 하지만 난 열등감을 선물받았다 하나님의 필요성을 느끼도록 나는 하나님에게 모든 것을 부탁했다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하지만 하나님은 내게 삶을 선물했다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도록 나는 내가 기도한 것을 하나도 받지 못했지만 내게 필요한 모든 걸 선물 받았다 내가 작은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내 무언의 기도를 다 들어 주셨다 모든 사람들 중에서 나는 가장 축복받은 자이다 작자 미상의 시인은 하나님은 내 무언의 기도를 다 들어 주셨기에 모든 사람들 중에서 나는 가장 축복받은 자라고 노래한다. 이 시인처럼 욥도 그의 모든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흔들리지 않는다. 욥기에는 세 만남이 있다. 첫째 하나님과 사탄의 만남이 있다. 둘째 욥과 친구들의 만남이 있다. 셋째 하나님과 욥의 만남이 있다. 그의 친구들은 욥이 고난을 받는 것은 죄 때문이라고 납득시키려 애를 쓴다. 욥은 자신의 성실과 믿음을 타협하게 만드는 어떤 시도나 말도 거부했다. 화를 내기는 했지만 욥은 언제나 진실을 말했다. 그러나 그의 친구들은 그렇지 못했다. 욥기에는 많은 비유들이 사용되고 있다. 그 비유들은 자연 세계의 삶과 죽음과 전능하신 하나님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욥의 고난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의미를 깨우치게 해 주는 아주 귀중한 교훈이다. 2024-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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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리틀메시지 _욥기Jo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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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리틀메시지 _에스더Esther
- 에스더Esther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한번도 언급되지 않지만 모든 사건에 하나님의 섭리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페르시아인들은 주전 539년 바빌론을 정복했다. 에스더의 사건들은 수산에서 일어났다. 그곳에 왕의 겨울 궁전이 있었다. 에스더의 아하수에로Ahasuerus라는 명칭은 이집트의 파라오가 왕의 대명사인 것처럼 페르시아의 최고 통치자의 칭호였다. 그러므로 에스더를 왕비로 삼은 페르시아의 아하수에로는 크세르크세스 1세였을 것이다. 에스더서의 사건들은 크세르크세스 1세 재위 3년부터 12년까지 10년 동안에 일어난 일들이다. 성경에서 여성의 이름을 따른 책은 에스더와 룻뿐이다. 룻은 유대인과 결혼한 이방 여인이었다. 반면에 에스더는 이방인과 결혼한 유대 여인이었다. 둘 다 신앙과 용기의 여인들이었다. 둘 다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룻은 다윗의 조상이 되는 아들을 낳았다. 에스더는 유대인을 전부 죽이려는 원수를 막았다. 에스더가 그 일의 결심을 위해 말한 한마디는 죽으면 죽으리라였다. 이런 시가 있다. 가지가 담을 넘을 때 _정끝별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이를테면 수양의 늘어진 가지가 담을 넘을 때 그건 수양 가지만의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얼굴 한번 못 마주친 애먼 뿌리와 잠시 살 붙였다 적막히 손을 터는 꽃과 잎이 혼연일체 믿어주지 않았다면 가지 혼자서는 한없이 떨기만 했을 것이다 한 닷새 내리고 내리던 고집 센 비가 아니었으면 밤새 정분만 쌓던 도리 없는 폭설이 아니었으면 담을 넘는다는 게 가지에게는 그리 신명 나는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가지의 마음을 머뭇 세우고 담 밖을 가둬두는 저 금단의 담이 아니었으면 담의 몸을 가로지르고 담의 정수리를 타 넘어 담을 열 수 있다는 걸 수양의 늘어진 가지는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목련 가지라든가 감나무 가지라든가 줄장미 줄기라든가 담쟁이 줄기라든가 가지가 담을 넘을 때 가지에게 담은 무명에 획을 긋는 도박이자 도반이었을 것이다 사람은 새로운 영역과 미래로의 진입을 위해 첫발을 떼는 순간 두렵고 떨리는 마음과 희생을 각오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렇듯 가지가 담을 넘어서는 데에도 용기가 있기 때문에 가능할 것이다. 그것을 믿음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믿음이 없다면 어떻게 한낱 가지나 줄기가 이 세상의 단단한 담과 깊은 절망의 절벽을 건너갈 수 있겠는가. 에스더서의 주요 교훈은 한낱 가지나 줄기도 담을 넘는 데 용기가 필요한 것처럼 하나님의 뜻을 위해 죽음을 각오한 용기가 필요할 때가 있다는 것이다. 세상 나라들의 주권자는 하나님이시므로 주의 백성은 주의 뜻에 복종하고 따라야 한다. 2024-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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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리틀메시지 _에스더Es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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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리틀메시지 _느헤미야Nehemiah
- 짐실은 노새 느헤미야Nehemiah는 그 공동체를 이어받아 외적 안정을 확보했다. 반면 에스라는 바빌론에서 돌아온 새 공동체의 영적 안정을 확립했다. 그는 아버지가 하가랴이고 형제가 하나니라는 것 말고는 알려진 게 없다. 아마 그의 할아버지는 예루살렘이 멸망했을 때 바빌론으로 끌려온 포로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페르시아에서 태어났을 것이다. 느헤미야서의 생생한 묘사는 그의 개인 일기에 근거한 자료였을 것이다. 그는 아닥사스다 왕의 술 관리관이었을 때 예루살렘 형편이 아주 어렵다는 말을 들었다. 그는 예루살렘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리고 얼마 뒤 그는 왕의 술 관리관이 되었다. 이런 시가 있다. 기도 _라반드라나트 타고르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위험에 처해도 두려워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게 하소서 고통을 멎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고통을 이겨 낼 가슴을 달라고 기도하게 하소서 생의 싸움터에서 함께 싸울 동료를 보내달라고 기도하는 대신 스스로의 힘을 갖게 해달라고 기도하게 하소서 두려움 속에서 구원을 갈망하기보다는 스스로 자유를 찾을 인내심을 달라고 기도하게 하소서 내 자신이 성공에서만 신의 자비를 느끼는 겁쟁이가 되지 않도록 하시고 나의 실패에서도 신의 손길을 느끼게 하소서 그는 유다 총독으로 임명받아 주전 445년 성벽을 재건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부임했다. 하나님의 소명을 성취하기 위한 그의 깊은 신앙은 그의 기도와 강한 확신으로 드러난다. 그 땅에 회복이 이어졌지만 유대 민족은 시련과 비난의 시기를 겪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고 계셨다. 느헤미야의 강조는 하나님을 신뢰하라는 것이었다. 2024-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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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리틀메시지 _느헤미야Nehemi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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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리틀메시지 _에스라Ezra
- 솔로몬의 왕궁건설 에스라Ezra는 역대기하가 끝나는 곳에서 시작한다. 이스라엘을 정복한 바빌론이 주전 587년에서 586년에 많은 백성을 잡아가고 도시와 성전을 파괴했다. 주전 538년 페르시아 왕 고레스가 유대인들이 그들의 땅으로 돌아가 성전 재건을 허락하는 조서를 공포했다. 그때 스룹바벨의 인솔로 5만여 명이 돌아왔다. 바빌론 포로 생활 70년이 끝났다. 어려움이 많았고 지체되기는 했지만 주전 515년 성전이 완성되었다. 이런 시가 있다. 담쟁이 _도종환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 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율법학자 에스라는 주전 458년 2천여 명의 유대인과 예루살렘에 왔다. 에스라의 주요한 일은 율법의 연구와 해석이었다. 그는 자신의 일을 통해 새 시대 공동체의 영적 지도자가 되었다. 바빌론 포로에서 돌아와 성전을 재건하는 이스라엘 백성은 도종환 시인이 노래하는 담쟁이 잎 같았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가 담쟁이 수 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가는 담쟁이에게 절망의 벽은 없어 보인다. 그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담긴 성경을 믿음으로 붙잡고 성전을 재건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절망의 벽은 없어 보였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독려하는 지도자 에스라가 없고 믿음의 동지적 연대가 없었다면 이스라엘 백성은 그 척박하고 방해가 많은 땅에서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2024-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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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리틀메시지 _에스라Ez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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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리틀메시지_역대기하2Chronicles
- 바벨론 포로들 역대기하2Chronicles는 다윗 자손의 통치를 크게 다룬다. 그 기간은 솔로몬 시대부터 주전 586년 시드기야 치하 예루살렘 함락까지다. 역대기서 전체에 걸쳐 남 왕국 유다를 집중적으로 강조한다. 남 왕국 유다의 흥망성쇠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지 안지키는지에 따라 조명이 되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께 신실하지 못하고 그들의 신앙의 의무에 태만해서 망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고향을 떠나 머나먼 바빌론으로 끌려갔다. 이런 시가 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_이상화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자욱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를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쁘게나 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매던 그 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 다오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웃어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지폈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고 오는 봄은 누구도 빼앗을 수 없다. 그것이 천지만물을 들썩이게 하는 봄의 풋내이고 봄의 푸른 웃음이다. 그러나 들을 빼앗긴 자에게 오는 봄은 절박하다. 봄조차 빼앗기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봄의 답답함이고 봄의 푸른 설움이다. 들의 봄과 인간의 봄 자연의 봄과 시대의 봄은 이렇게 갈등한다. 온몸에 햇살을 받고 이들을 발목이 저리도록 실컷 밟아보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이야말로 내 나라 내 땅에 대한 지극한 사랑의 표현이다. 떠나온 길이 멀면 돌아갈 길도 멀다. 바빌론의 유대인들이 그랬을 것이다. 역대기하 마지막에 유대인의 예루살렘 귀환을 허락하는 고레스의 조서가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의 백성이 믿음의 불성실로 하나님의 징벌을 받아 고향을 떠나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하나님의 은혜로 그들의 고향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2024-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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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리틀메시지_역대기하2Chronic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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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리틀메시지_ 역대기상1Chronicles
- 바빌로니아 큰 물가 마을 역대기상1Chronicles과 역대기하는 원래 히브리어 원문에서 한 권이었다. 히브리어의 구약 성경을 그리스어로 번역한 사람들이 그것을 두 권으로 나누었다. 본래의 제목은 뒤에 남은 일들이라는 뜻이었다. 그것은 사무엘서와 열왕기서에 들어있지 않은 작은 이야기들이 들어있기 때문이었다. 마찬가지로 영어 제목 '크로니클스Chronicles'도 히브리어 제목처럼 '일상의 일들'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이것은 역대기서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 특별히 왕들의 생활들에서 일상의 중요한 일들을 차례대로 이야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초점은 다윗과 유다 왕국에 있다. 그리고 그 관점은 제사장들의 것이다. 유대 민족은 신앙의 불성실로 망해 포로가 되어 예루살렘에서 바빌론으로 끌려갔다. 이런 시가 있다. 바빌론 강가에서 _보니 엠 바빌론 강가에 우리는 앉아서 우리는 울었어요 시온을 생각하며 바빌론 강가에 우리는 앉아서 우리는 울었어요 시온을 생각하며 사악한 무리들이 우리를 포로로 잡아왔어요 그리고 우리에게 노래를 부르라고 했지요 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주의 노래를 부를 수 있나요 이런 낯선 땅에서 사악한 무리들이 우리를 포로로 잡아왔어요 그리고 우리에게 노래를 부르라고 했지요 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주의 노래를 부를 수 있나요 이런 낯선 땅에서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말과 우리 가슴에서의 명상을 여기 오늘밤 그대 앞에서 받아주어요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말과 우리 가슴에서의 명상을 여기 오늘밤 그대 앞에서 받아주어요 바빌론 강가에 우리는 앉아서 우리는 울었어요 시온을 생각하며 바빌론 강가에 우리는 앉아서 우리는 울었어요 시온을 생각하며 바빌론 강가에 바빌론의 어두운 눈물 우리는 앉아서 당신은 노래를 불렀죠 우리는 울었어요 사랑의 노래를 불러요 시온을 생각하며 바빌론 강가에 바빌론의 거친 작은 조각들 우리는 앉아서 당신은 사람들이 우는 것을 듣지요 우리는 울었어요 그들은 그들의 하나님이 필요해요 시온을 생각할 때 오 힘을 가져요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 남쪽 약 110km 떨어져 있는 유프라테스 강가에 바빌론이란 고대 국가가 번성했었다. 바빌론이 유대 왕국을 정복하여 많은 횡포를 저질렀다. '바빌론 강가에서'라는 노래는 바빌론에 정복당한 유대인들의 심정을 노래한 메시지가 그 내용이다. 이 노래는 시편 137편을 토대로 작사 작곡을 하였다. 바빌론 포로생활 때 유대인들의 슬픔과 시온의 그리움을 노래한 시가 시편 137편이다. 이 노래를 부른 가수들은 여성 3인과 남성 1인으로 구성된 4인조 보컬 '보니 엠'이다. 그들은 자메이카 출신의 영국 가수들이다. 그들은 악기를 전혀 다루지 않고 순수한 보컬만으로 서인도 제도의 특유한 창법을 구사하는 게 특징이다. 그들은 1978년 이 노래를 불러 세계적인 인기를 얻었다. 역대기상과 역대기하는 바빌론 포로 이후 이스라엘 땅에 돌아온 유대인들에게 중요했다. 그들은 다윗의 신앙 본보기가 필요했고 성전에 대한 강조는 그것을 재건할 때 필요했다. 역대기서는 변화와 어려움의 시기에 성전을 재건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에게 격려와 힘을 주었다. 그것은 다윗의 신앙과 솔로몬의 지혜와 성전 건축의 영광스러운 역사를 통해서였다. 2024-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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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굳뉴스] 리틀메시지_ 역대기상1Chronic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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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티주석50 소돔 왕의 제안
- 소돔 왕의 제안 14:21 소돔왕이 아브람에게 이르되 사람은 내게 보내고 물품은 네가 취하라 22 아브람이 소돔왕에게 이르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 23 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케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무론 한 실이나 신들메라도 내가 취하지 아니하리라 24 오직 소년들의 먹은 것과 나와 동행한 아넬과 에스골과 마므레의 분깃을 제할찌니 그들이 그 분깃을 취할 것이니라 창 14:21-24 요단강 하구에서 홍해에 이르러 강은 이름을 잊어버린다. 강과 바다 사이에서 흐름은 잠시 머뭇거린다. 그때 강은 신비하게도 아름다운 연한 초록빛 물이 된다. 두려워 말라. 흐름이여 너는 어머니 품에 돌아가리라. 귀향을 매개로 조용히 다른 곳으로 몸을 옮기는 강은 바다의 일부가 되어 비로소 자기를 완성한다. 흐르고 흘러가는 강은 인생을 닮았다. 강은 뭐하러 흐르나. 1등 되기 위해 흐르는 강은 없다. 높은 고개마루 넘기 위해 흐르는 강도 없다. 강은 바다에 닿기 위해 흐른다. 흐르는 일에 멈추는 일을 더해 결국 완성되려고 흐른다. 흐름으로서의 우리는 흐르는 것도 두려워하고 흐르지 않게 되는 것도 두려워한다. 그런데 두려워하지 말라. 결국 이르는 곳은 같다는 말이 위로가 된다. 생을 멈추면 다 바다가 될 것이다. 사랑하고 사랑받는 것만으로도 강의 흐름은 너무 짧다. 두려워만하기에 삶이 너무 아깝다. 가장 빛나는 별을 보기 위해선 가장 깊은 어둠 속으로 걸어가야 한다. 그것이 가장 아름다운 별을 보는 방법이다. 가장 큰 희망은 가장 큰 절망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러므로 나를 구원한 아름다운 말들이 대개 어둠 속에서 탄생했다는 건 그리 놀랍지 않다. 밖에 나가지 못하고 두려움과 우울 속에서 보내고 있는 지구 저편 믿음의 형제에게 하나님이 만드신 별에 대해 말했다. 눈을 감고 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 더 잘 들린다고. 그때는 보이는 것이 아니라 들리는 것에 집중해야 한다고 말이다. 한 세계가 닫혔으니 우리가 믿을 건 다른 세계가 열린다는 것 아닐까. 하나님의 말씀을 더 잘 듣게 된 사람에게는 더 잘 볼 수 있는 또 다른 세계가 열릴 테니. 성경이 말씀하는 것처럼. +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히 11:1-3 아브람은 세 가지 승리를 얻었다. 첫째 그는 롯을 이겼다. 둘째 그는 세상의 왕들을 이겼다.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삼상 14:6)는 사실을 그는 성경에서 최초로 보여주었다. 그는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1 5:4)는 믿음으로 싸우고 그것이 그에게 승리를 안겨주었다. 셋째 그는 자신을 이겼다. ‘싸우기 전처럼 이긴 후에도 살펴보아야 한다’는 말이 있다. 아브람은 하나님이 주신 승리를 개인적인 이익을 사용할 수 있는 유혹을 받았지만 그 제안을 거절했다. 우리는 모든 승리 뒤에 그 영광을 하나님에게 드리고 마귀의 거래를 물리쳐야 한다. 주의하지 않는다면 싸움에 이기고 승리를 잃어버릴 수 있다. 그렇지 않은 아브람을 살펴보자. 창 14:20-24 소돔 왕의 제안 A proposal of king of Sodom 21절. 소돔 왕이... 이르되 사람은 내게 보내고 the king of Sodom said ... Give me the persons 승리자로서 아브람은 그가 구원한 사람들을 자신이 원하는 어떤 방식으로든 처리할 권리가 있었다. 그는 그들을 그의 노예들로 삼거나 묶어서 팔거나 속량 몸값(ransom)을 요구할 수도 있었다. 소돔 왕이 ‘사람은 내게 보내고 물품은 네가 취하라’고 그의 권리를 인정했다. 그러나 그는 전리품은 승리자의 것이라는 관례를 걷어차 버렸다. 22절.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I have lift up mine hand unto the LORD 세상은 모르는 정직한 자부심과 아량을 지닌 아브람은 여호와께(unto the Lord) ‘내가 나의 손을 들었다’(I have lifted up mine hand) 즉 ‘내가 맹세했다’(I have sworn)는 강한 어조로 대답했다. ‘네 말이 내가 아브람으로 치부케 하였다 할까 하여 네게 속한 것은 무론 한 실이나 신 들메라도 내가 취하지 아니하리라’(창 14:23). 이 말의 의미는 ‘승리는 하나님의 것이므로 전리품은 나의 것이 아니다’라는 것이다. 성경은 말씀한다. + 또 두렵건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 신 8:17 23절. 신 들메 a shoe-latchet 아브람의 훌륭한 독립 정신은 자신의 친척을 구출한 대가로 신을 메는 끈 같은 아주 사소한 정도의 이익조차 받아들이지를 않았다. 24절. 오직 소년들의 먹은 것과 나와 동행한 (사람들의)... 분깃 only that which the young men have eaten and the portion of the men which went with me 아브람은 자기와 함께 싸움의 위험을 무릅쓴 사람들의 수고를 모른 체 할 권리는 없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정당한 할당량을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전리품의 정당한 몫이 아브람의 동맹자들에게 돌아가야 할 것이다. ♣ QT 되새김 A 승리자로서 아브람은 소돔 왕의 제안을 어떻게 처리했는가. 당신은 그 사실을 인정하는가(admit). B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었다’는 아브람의 말의 뜻은 무엇인가. 그 사실을 믿는가. 믿음은 말씀에 대한 하나님의 능력과 의지를 믿는 것이다(believe). C ‘한 실이나 신 들메라도 내가 취하지 아니하리라’는 아브람의 말의 의미는 무엇인가. 당신은 그 의미를 어떻게 생각하는가(consider). D 아브람이 자신과 싸움을 같이 한 사람들에 대해 태도는 어떠했는가. 당신은 그것을 당신의 생활에 어떻게 적용하고 실천할 것인가(do). ♤ 오늘의 기도 Today’s prayer +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마 5:5 주님 온화하고 부드러운 자가 되어 주님 주시는 땅을 기업으로 받게 해주십시오. 아멘. 2020-0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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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티주석50 소돔 왕의 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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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티주석49 멜기세덱의 축복
- Meeting of Abraham and Melchizedek, canvas by Dieric Bouts the Elder, c 멜기세덱의 축복 14:18 살렘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19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20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찌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창 14:18-20 물고기 비늘에 바다가 스미는 것처럼 신자의 몸에는 자신이 살아가는 믿음의 시간이 새겨진다. 그 믿음은 말씀에 뿌리내린 삶이다. 노벨문학상 수상 작가인 알베르 카뮈의 1847년 작 ‘페스트’는 프랑스 식민지였던 알제리의 오랑 시(市)가 페스트로 봉쇄된 후 절망과 고통 그리고 투쟁 등 다양한 시민들의 반응을 그려낸 소설이다. 그는 그 책에서 이런 말을 했다. ‘봄이 되자 사실 사람들은 이제나 저제나 하고 병의 종말을 기다렸다. 그런데 아무도 다른 사람에게 질병이 얼마나 더 계속될지 물어보려고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은 병이 얼마나 더 오래 갈지에 대해서는 전혀 알 길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날이 지남에 따라서 그 불행에는 정말 끝이 없는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 시작되었다. 그래서 동시에 페스트의 종말이라는 것이 모든 희망의 대상이 되었다.’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은 세상의 풍경을 바꿔놓았다. 세계의 중심가 뉴욕 맨해튼이 비현실적으로 텅 비고 항구엔 대형 해군용 의료선박이 들어서 있다. 시체를 채운 냉동 컨테이너 행렬이 도로에 즐비하고 임시 시신 안치소 천막이 바람에 휘날린다. 며칠 전 SNS에 현장 사진을 올린 의료진이 2020년 4월 6일 운명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중국산 마스크를 차지하려고 선진국 국가 간에 얼굴을 붉히고 주가는 폭락했다. 마스크(Mask)의 어원인 라틴어 마스카(Masca)는 본래 공연에서 배우가 쓰는 가면을 말한다. 이탈리아어의 마스케라타(mascherata·가면무도회), 스페인어의 마스카라르(mascarar·얼굴을 칠하다), 속눈썹을 돋보이게 하는 화장인 마스카라도 여기서 파생했다. 요즘은 마스크라고 하면 먼저 호흡기 질환을 예방하는 의료용 마스크를 떠올리지만 본래는 얼굴을 가리고 화려하게 돋보이기 위해 썼던 셈이다. 천 마스크가 대부분이던 2003년 봄 국내 한 대형마트에서 영국에서 처음으로 직수입한 일회용 황사 전용 마스크 4000개가 하루 만에 품절돼 화제가 됐다. 0.3μm(마이크로미터) 크기의 입자를 95%까지 걸러낼 수 있다는 제품이다. 그런데 황사와 함께 사스(SARS·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 발병 우려가 커지자 동이 난 것이다. 마트 측은 1만5000장을 추가 주문했지만 언제 올지 알 수 없다고 했는데 전 세계에서 동시에 1500만 장이나 주문이 폭주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황사와 감염병이 고기능 마스크 시대를 연 것이다. 이들 명품업체의 마스크 생산은 위기 극복 차원이지만 마스크로 감염병 예방과 패션을 동시에 노리는 업체가 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프랑스의 한 유명 디자이너가 만든 공기필터가 장착된 마스크는 70만 원이 넘는 가격에 팔리고 있다. 스포츠용품 회사는 운동할 때 쓸 수 있는 마스크도 만들고 있다. 유쾌하지 않은 이유로 마스크의 신세계가 열리고 있는데, 어쩌면 원래 마스크의 목적으로 되돌아가는 것인지도 모른다. 어떤 리더는 거짓말로 화를 키우고 어떤 리더는 굳은 얼굴로 재난을 직시한다. 바이러스는 동시에 지구의 풍경을 바꿔놓았다. 인간의 움직임이 멈추자 지구가 깨끗해졌다. 중국의 탄소 배출이 25% 이상 줄어들면서 대기질이 깨끗해졌고, 관광객으로 몸살을 앓던 베네치아 운하에는 60년 만에 물고기가 돌아왔다. 시리아와 예멘의 전투가 중지됐으며 각국의 사회 보장이 강화됐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할 것 같은’ 순박한 얼굴의 소강석 목사는 가장 낮은 자리의 언어로 시와 설교로 치열하고 튼튼한 이야기를 쏟아낸다. 배우가 될 수도 가수가 될 수도 정치가가 될 수도 있었을 것 같은 인물이 시인 목사로 교단과 교계의 지도자가 된 듯하다. 중화인민공화국은 앞선 왕조들처럼 내전을 통해 성립됐다. 국민 총선거처럼 그 합법성을 뒷받침할 절차는 없었다. 국공내전 중 공산군의 비인도성은 12만∼30만 명이 봉쇄에 따라 굶어 죽은 사건이 대표적이다. 이후에도 중국 인민의 처지는 ‘해방’과는 거리가 멀었다. 토지개혁 과정에서 최소 300만 명이 학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1950∼1953년 반혁명 진압 운동에서는 70만∼200만 명이 처형되었다. 이는 서론에 불과했다. 자립을 통한 경제성장을 충동질한 1958∼1960년의 대약진운동에서는 최대 4500만 명이 굶어 죽었다. 토론의 자유를 일시 허용했던 ‘백화제방’ 운동은 반항자를 색출할 쉬운 도구가 되었다. 이 비극들의 배경에는 인권을 ‘사악한 이기심의 발로’로 치부하는 원천적 비인간성이 깔려 있다. 지금도 중국은 인간을 국가를 구성하는 ‘인민’ (人民)과 국가에 대적하는 ‘적인(敵人)’으로 구분한다. 사회에 암세포처럼 퍼져 있다는 적대세력을 늘 찾아내야 하는 것이다. 지도자의 개인숭배가 재연되고 마오쩌둥이 다시 소환되는 오늘날 억압은 오히려 심해지고 있다. 전쟁 발발부터 일본의 진주만 공습이 일어나기까지 4년간 중국은 일본의 80만 병력을 묶어두었다. 연합군의 승리는 중국의 희생 없이는 상상할 수 없었다고 한다. 아이러니다. 성경에서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이 홀연히 나타나 아브람을 축복하고 십일조를 받아 사라진 멜기세덱은 누구인가. 창 14:18-24 멜기세덱이 아브람을 축복 Melchizedek blessed Abram 18절. 멜기세덱 Melchizedek 이 이름의 뜻은 ‘나의 왕은 의롭다’(My king is righteousness)이다. 성경은 그를 이렇게 말씀한다. +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치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 시 110:4 + 이 멜기세덱은 살렘 왕이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 여러 임금을 쳐서 죽이고 돌아오는 아브라함을 만나 복을 빈 자라 아브라함이 일체 십분의 일을 그에게 나눠주니라 그 이름을 번역한즉 첫째 의의 왕이요 또 살렘 왕이니 곧 평강의 왕이요 아비도 없고 어미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어 하나님 아들과 방불하여 항상 제사장으로 있느니라 히 7:1-3 이 말씀은 멜기세덱 한 사람에게 왕과 제사장 직분이 공존한다는 것을 진술한다.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말했다. ‘천지의 주재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찌로다.’ 아브람이 그돌라오멜 동맹군을 격파한 승리는 멜기세덱과 소돔 왕의 나라 편에도 공적인 이익이 되는 일이었다. 그래서 아브람이 승리하고 돌아올 때 소돔 왕과 멜기세덱이 특별히 나와 환대하고 관심과 존경을 나타냈다. 그리고 멜기세덱은 아브람이 섬기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the most high God)을 알고 경배하는 몇 안 되는 그 지역 군주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것 같다. 히브리서 7:1에 따르면 멜기세덱은 구세주의 예표(a type of the Saviour)였다. 왕이며 제사장인 그가 아브람에게 나아와 그의 군대가 이기게 해주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아브람을 축복했다. 그것은 어떤 합법적인 일을 통해 거두는 성공의 경우 우리가 본받아야 될 경건한 감사와 승인의 표시다. 19절.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가로되 And he blessed him 제사장으로서 멜기세덱은 아브람의 무공에 대해 하나님의 축복을 기원했다. 20절.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he gave him tithes of all 아브람은 그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을 감사의 예물로 멜기세덱에게 주었다. 이것은 아브람의 용맹뿐만 아니라 그의 경건한 신앙의 증거가 된다. 왜냐하면 멜기세덱을 가장 높으신 하나님과 자신 사이의 공적인 중재자나 제사장으로 인정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아브람의 감사의 표시였고 하나님의 섭리에 영광을 돌리는 행위였다. + 네 재물과 네 소산물의 처음 익은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창고가 가득히 차고 네 즙틀에 새 포도즙이 넘치리라 잠 3:9-10 ♣ QT 되새김 A 멜기세덱은 누구인가. 당신은 그 사실을 인정하는가(admit). B 멜기세덱은 아브람에게 어떻게 했는가. 그 사실을 믿는가. 믿음은 말씀에 대한 하나님의 능력과 의지를 믿는 것이다(believe). C 아브람은 멜기세덱을 어떻게 대했는가. 당신은 그 의미를 어떻게 생각하는가(consider). D 아브람의 무공과 경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당신은 그것을 당신의 생활에 어떻게 적용하고 실천할 것인가(do). ♤ 오늘의 기도 Today’s prayer +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마 5:3 주님 당신의 말씀에 늘 배고프고 목마른 심령이 가난한(poor in spirit) 우리에게 겸손과 온유와 인자를 더하여 천국을 소유하게 해주십시오. 아멘. 2020-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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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티주석49 멜기세덱의 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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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티 주석48 아브람이 롯을 구원
- Sodoma_-_Aldegrever 아브람이 롯을 구원 14:13 도망한 자가 와서 히브리 사람 아브람에게 고하니 때에 아브람이 아모리 족속 마므레의 상수리 수풀 근처에 거하였더라 마므레는 에스골의 형제요 또 아넬의 형제라 이들은 아브람과 동맹한 자더라 14 아브람이 그 조카의 사로잡혔음을 듣고 집에서 길리고 연습한 자 삼백십팔 인을 거느리고 단까지 쫓아가서 15 그 가신을 나누어 밤을 타서 그들을 쳐서 파하고 다메섹 좌편 호바까지 쫓아가서 16 모든 빼앗겼던 재물과 자기 조카 롯과 그 재물과 또 부녀와 인민을 다 찾아 왔더라 17 아브람이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한 왕들을 파하고 돌아올 때에 소돔왕이 사웨 골짜기 곧 왕곡에 나와 그를 영접하였고 창 14:13-17 그리스 중부 보이오티아의 테베는 신화와 비극 그리고 역사의 삼위(三位)에 놓인 도시다. 페니키아의 왕자 카드모스는 제우스에게 납치된 여동생 에우로페를 찾아 나섰으나 실패했다.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델포이 신탁에 따라 테베를 건설했다. 여기까지는 그리스 신화다. 아버지를 죽이고 어머니와 결혼할 운명을 타고난 오이디푸스는 운명의 저주로부터 벗어나려 발버둥쳤지만 결국 실패했다. 그는 테베의 왕이었다. 이처럼 오이디푸스를 비롯한 그리스 비극의 여러 소재가 테베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기원전 4세기 중반 테베가 한 세대 동안 그리스 세계의 패권을 장악한 것은 역사다. 황금기는 길지 않았다. 테베의 패권은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에 의해 무너졌고 도시 자체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에 의해 파괴됐다. 대왕이 죽은 후에 재건됐지만 과거의 영광을 되찾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르렀다. 그래서일까. 지금 테베는 인구 2만여명에 불과한 작은 도시다. 유네스코 세계유산목록에 등록됐다는 것이 무색할 정도로 유물과 유적은 빈약하다. 그러나 한번쯤은 가볼 만하다. 조용한 도심을 걸으며 테베의 역사와 운명을 떠올리다 보면 스스로를 성찰하기에 안성맞춤이다. 보이오티아 지방의 중심에 위치해 주변으로 소소하게 볼만한 곳도 많다. 특히 레욱트라와 카이로네이아가 좋다. 테베의 패권이 시작되고 끝난 옛 전쟁터들이다. 그리스에서 드물게 평평하고 풍요로운 땅답게 레욱트라로 가는 길은 밭에서 밭으로 이어진다. 그 평원 한가운데 조형물 하나가 덩그러니 서 있다. 레욱트라 전투 기념비다. 본체는 원통형이고 지붕은 방패 모양의 장식을 둥글게 이어 만들었다. ‘Leuktra Victory Monument’라 적힌 녹슨 표지판만이 이곳의 역사적 의미를 전하고 있다. 먼 옛날 이곳에서 그리스 세계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스파르타와 테베 두 강대국이 건곤일척(乾坤一擲)의 전투를 벌였던 것이다. 두 나라는 오랜 세월 동맹이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기원전 431년~기원전 404년) 73년이란 길고 파괴적인 전쟁 내내 두 나라는 아테네를 상대로 함께 싸웠고 승리했다. 혈맹의 관계가 틀어진 건 전후 처리 과정에서였다. 테베는 라이벌 아테네의 멸망을 원했다. 스파르타는 패배한 아테네를 존속시키고자 했다. 아테네의 빈자리를 테베가 차지할까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영원한 적도 친구도 없고, 국가이익만이 있을 뿐’이란 국제관계의 비정한 철칙이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테베는 상처받았으나 강대국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스스로의 힘으로 보이오티아 전역을 통합하고자 했다. 테베의 야망은 새로운 경쟁자의 등장을 원치 않는 스파르타의 소망과 정면으로 배치됐다. 충돌이 불가피했다. 스파르타가 선수 쳤다. 친(親)스파르타 성향의 테베인을 동원해 쿠데타를 일으켜 괴뢰정부를 세웠다(기원전 382년). 테베가 해방된 건 기원전 379년, 탁월한 정치가 펠로피다스(Pelopidas)에 의해서였다. 복원된 테베 정부는 확고하게 반(反)스파르타적 입장을 취했다. 펠로피다스는 에파미논다스를 발탁했다. 그는 숨은 진주였다. 둘은 손잡고 테베의 부흥을 위해 분투했다. 마침내 스파르타는 테베의 성장을 막기 위해 군대를 파병했다(기원전 371년 7월). 레욱트라에 모습을 드러낸 스파르타 연합군은 중장보병만 1만 명에 이르는 대군이었다. 스파르타 왕 클레옴브로토스(Cleombrotus)가 이끌었다. 이에 맞선 테베 연합군의 중장보병은 6500명에 불과했다. 명성 사기 군세 모든 면에서 스파르타가 우세했다. 그러나 테베에는 에파미논다스가 있었다. 스파르타가 가진 모든 우세를 무력화할 만큼 그는 탁월한 전략가였다. 전투에 앞서 에파미논다스는 중장보병의 진형에 큰 변화를 줬다. 전통적인 팔랑크스 대형 중장보병 방진의 가로 열은 그 수가 12열 내외였다. 팔랑크스(Phalanx)는 아테네 사람이다. 전쟁의 역사나 군사학을 공부할 때 반드시 등장하는 이름이다.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아테나 여신으로부터 전쟁기술을 배워 아테네인들에게 전했다고 한다. 고대 그리스의 시민들은 전쟁이 터지면 스스로 무장을 준비해 참전했다. 그러므로 그리스군은 훈련된 병사가 아니라 무장을 한 시민들이었다. 이들은 오른손에 사리사(sarissa)라는 2.5m가량의 긴 창을 들고 왼팔로는 커다란 방패로 자신의 몸과 왼쪽에 선 병사의 몸 일부를 가려주는 형태로 바짝 다가서 밀집진형을 짰다. 양쪽 날개부분은 소수의 기병들이 보호했다. 이 밀집전투대형(密集戰鬪隊形)을 ‘팔랑크스’라고 한다. 그래서 그리스의 도시국가(폴리스) 사이에 전투가 벌어지면 팔랑크스가 맞붙어 먼저 대열이 깨지는 쪽이 지곤 했다. 팔랑크스는 제대로 대열을 갖추지 않은 외적(外敵)의 보병부대와 싸울 때 위력을 발휘했다. 그리스군이 페르시아와 전투를 할 때 지상군의 수가 대등할 경우 페르시아군은 그리스군의 팔랑크스를 깨뜨리지 못했다. 페르시아의 왕 크세르크세스가 30만 대군을 휘몰아 그리스를 침공한 제3차 페르시아전쟁에서 레오니다스가 이끄는 스파르타의 정예병력 300명이 소수의 동맹군과 테르모필라이에서 페르시아군을 가로막을 수 있었던 것도 대군이 통과하기 어려운 좁은 지형을 활용한 팔랑크스의 방어능력 덕분이었다. 에파미논다스는 스파르타군 정예와 상대할 테베군 좌익의 가로 열을 50열로 대폭 늘렸다. 대신 중앙과 우익의 열은 줄였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괴이한 진형이었다. 전투가 시작되자 에파미논다스는 좌익의 테베군을 빠르게 진격시켰고, 중앙과 우익의 부대들은 돌격 속도를 늦췄다. 결국 테베군은 전체적으로 좌익이 앞서고 우익이 뒤처지는 사선형으로 전진했다. 스파르타는 모든 부대의 열을 동일하게 12열로 맞추고, 같은 속도로 전진하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임했다. 자연스럽게 좌익의 테베군이 우익의 스파르타군과 먼저 충돌했다. 스파르타의 중장보병이 무적이기는 했지만 수적으로 너무 열세였다. 고작 12열의 방진으로는 빠르게 부딪쳐오는 50열의 방진을 막아낼 수 없었다. 스파르타 방진은 처참하게 깨어졌다. 충돌 초기에 왕과 많은 장교가 전사했기 때문에 스파르타는 제대로 된 반격조차 할 수 없었다. 테베군의 압도적인 승리였다. 에파미논다스는 누구도 생각지 못했던 창의적인 전술로 무적의 스파르타 중장보병을 일대일 전투에서 쳐부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승리 이후, 그리스 세계에 난폭하게 군림하던 스파르타의 패권이 순식간에 무너졌다. 에파미논다스가 스파르타 군과 맞섰듯 고작 318명을 거느린 열세의 아브람이 자신을 떠난 조카 롯을 구하기 위해 막강한 그돌라오멜과 그와 함께한 왕들과의 전쟁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는 이방의 객이었음에도 많지 않은 군사를 거느리고 믿음으로 싸워 그돌라오멜의 강력한 동맹군을 격파하고 롯을 구출했다. 창 14:13-18 아브람이 롯을 구출하다 Abram rescues Lot 13절. 히브리 사람 아브람 the Hebrew Abram 이 말이 성경에서 처음 나온 곳이 바로 이 구절이다. 12지파 가운데 10지파의 부족이 B.C. 609-598년경 처음 바벨론으로 유배(Babylonian Exile)당한 후 이스라엘의 중심 지파 유다 부족이 남게 되자 그 이름이 이스라엘의 일반적인 명칭이 되었다. 그 히브리어 이름 예후딤(Yehudim)이 Judaioi Judaei Juden Jews 등으로 번역되었다. 그래서 이스라엘인이 유대인(Jews)이라 불리게 되었다. 히브리 사람이라는 명칭의 기원에 대해 이스라엘 랍비 학자들 사이에도 의견이 갈리지만 에벨 자손(a descendent of Eber)을 지칭하는 에벨(Eber)과 관련이 있다. + 셈은 에벨 온 자손의 조상이요 야벳의 형이라 그에게도 자녀가 출생하였으니 창 10:21 + 셀라는 삼십세에 에벨을 낳았고 에벨을 낳은 후에 사백 삼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에벨은 삼십 사세에 벨렉을 낳았고 창 11:14-16 또한 그 말은 ‘다른 편에서 온 자’(one from the other side)를 의미하기도 한다. 그것은 여호수아서의 아브라함을 강 ‘저편에서’(from the other side) 이끌어내어 라는 진술과도 일치한다. + 내가 너희 조상 아브라함을 강 저편에서 이끌어내어 가나안으로 인도하여 온 땅을 두루 행하게 하고 그 씨를 번성케 하려고 그에게 이삭을 주었고 수 24:3 14절. 아브람이... 듣고 when Abram heard 아브람이 롯의 사로잡힌 소식을 들었을 때 그의 마음은 이랬을 것이다. + 그는 흉한 소식을 두려워 아니함이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그 마음을 굳게 정하였도다 시 112:7 부드럽고 이성적인 성격과 더불어 아브람은 아주 강한 용기와 결단력도 지니고 있었다. '집에서 길리고 연습한 자 318인 his trained servants, born in his own house, three hundred and eighteen' 그들은 옛날 동방의 나라들에서 일반적이었던 집안의 종들이었다. 그들은 가족과 같은 대접도 받았다. 아브람이 집안의 양과 소들을 관리하는 사람을 318명이나 거느렸다면 그의 소유가 상당했음이 분명하다. '단까지 쫓아가서 pursued them unto Dan' 단은 팔레스타인 최북단에 있다. 예전에 그곳을 레센 또는 라이스라고 다르게 불렸다. + 그런데 단 자손의 지경이 더욱 확장되었으니 이는 단 자손이 올라가서 레센을 쳐서 취하여 칼날로 치고 그것을 얻어 거기 거하였음이라 그 조상 단의 이름을 따라서 레센을 단이라 하였더라 수 19:47 + 이스라엘의 소생 그 조상 단의 이름을 따라 그 성읍을 단이라 하니라 그 성읍의 본 이름은 라이스더라 삿 18:29 '호바 Hobah' 다메섹 북쪽 80km 떨어진 곳에 있다. '다메섹 Damascus' 도시의 정식 이름은 아랍어로 디마쉿 앗샴(Dimashq ash-Sham)으로 불린다. 많은 사람들은 ‘디마쉿’으로 압축해 부르며 다마스쿠스 시민이나 시리아 등 아랍권 사람들은 ‘앗샴’으로 부른다. ‘앗샴’은 아랍어로 ‘북쪽’이라는 단어를 어원으로 갖는 말로 시리아(특히 역사적 시리아에 대해서)는 ‘비라드 앗샴’(북쪽 땅)이라고 불렀다. 영어 이름 ‘다마스쿠스’는 그리스어를 어원으로 하며 라틴어를 거쳐 전해졌다. 이들은 곧 아랍 고어의 도시명으로써 다르메섹((Darmeśeq ‘봇물 대기 좋은 땅’이라는 뜻)에서 왔다. 현존하는 도시 중 역사가 가장 오래된 도시이기도 한 다마스쿠스는 이슬람 문화의 4대 도시 (메카 메디나 예루살렘 다마스쿠스) 중의 하나이자 수많은 이슬람 학자들의 수련장이었으며 십자군 원정 당시에는 이를 저지하는 전략적 요지로 역할하였다. 또한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를 연결하는 대상 무역로와 아라비아 반도와의 통상로 등 교통의 중심지에 위치하고 있다. 대부분의 볼거리들은 바자르를 둘러싸고 있는 로마 시대의 성벽 안에 밀집해 있다. 눈앞에 높은 미나렛과 함께 우마야드 모스크와 유리로 천장을 만들어 올린 모스크 그리고 로마 시대의 기둥들과 서문들 그리고 사도 바울의 눈을 치료한 의사 아나니아의 교회 등이 길 사이에 뒤섞여 있다. 주전 16세기 이집트 비문(碑文)에도 언급된 도시이다. 15절. 그 가신을 나누어 밤을 타서 he divided himself ... by night 아브람은 자신의 군사들을 몇 개로 나누어 진을 편성했다. 그리고 밤을 틈타 서로 다른 방향들에서 기습 공격을 했다. 한밤중 동사다발적인 맹렬한 기습은 아무리 대군일지라도 혼란과 공포에 사로잡혀 우왕좌왕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기드온의 300용사도 동일한 전술을 사용했다. + 삼백 명을 세 대로 나누고 각 손에 나팔과 빈 항아리를 들리고 항아리 안에는 횃불을 감추게 하고 세 대가 나팔을 불며 항아리를 부수고 좌수에 횃불을 들고 우수에 나팔을 들어 불며 외쳐 가로되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이여 하고 각기 당처에 서서 그 진을 사면으로 에워싸매 그 온 적군이 달음질하고 부르짖으며 도망하였는데 삿 7:16, 20-21 롯이 자의적으로 어리석게 선택해 빚은 불행한 결말을 아브람이 아랑곳하지 않는 게 쉬울 것이다. 그러나 축복의 근원이라고 불리게 될 믿음의 사람 아브람은 롯을 구출하는 일에 어떤 망설임도 없었다. 롯이 아주 신실한 신자도 아니었지만 그는 여전히 아브람의 도움이 필요한 형제였다. 당신에게 형제나 자매의 문제가 생길 때 아브람과 사도 바울이 전하는 말씀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롬 12:21 롯은 다시 소돔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아브람이 했던 일은 실제적으로는 주님을 위한 것이었다. 17절. 사웨 골짜기 곧 왕곡 the valley of Shaveh which is the king’s dale 이 계곡이 압살롬과 관련하여 ‘왕의 골짜기’라는 지명으로 언급되고 있다. + 압살롬이 살았을 때에 자기를 위하여 한 비석을 가져 세웠으니 이는 저가 자기 이름을 전할 아들이 없음을 한탄함이라 그러므로 자기 이름으로 그 비석을 이름하였으며 그 비석이 왕의 골짜기에 있고 이제까지 압살롬의 기념비라 일컫더라 삼하 18:18 ♣ QT 되새김 A 히브리 사람이라는 유래는 어떻게 시작되었는가. 당신은 그 사실을 인정하는가(admit). B 아브람이 롯의 소식을 들었을 때 어떻게 했는가. 그 사실을 믿는가. 믿음은 말씀에 대한 하나님의 능력과 의지를 믿는 것이다(believe). C 아브람은 자신의 군사들을 어떻게 했는가. 당신은 그 의미를 어떻게 생각하는가(consider). D 믿음의 사람 아브람이 롯을 위해 한 일은 실제로는 누구를 위한 일이었는가. 당신은 그것을 당신의 생활에 어떻게 적용하고 실천할 것인가(do). ♤ 오늘의 기도 Today’s prayer +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마 4:19 주님 당신을 따르기 위해 우리의 그물을 가지고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여주십시오. 아멘. 2020-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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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티 주석48 아브람이 롯을 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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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티주석47 롯의 불행
- Amalek Exodus cap 17 vv 10&13 Galle 롯의 불행 14:5 제 십사 년에 그돌라오멜과 그와 동맹한 왕들이 나와서 아스드롯 가르나임에서 르바 족속을 함에서 수스 족속을 사웨 기랴다임에서 엠 족속을 치고 6 호리 족속을 그 산 세일에서 쳐서 광야 근방 엘바란까지 이르렀으며 7 그들이 돌이켜 엔미스밧 곧 가데스에 이르러 아말렉 족속의 온 땅과 하사손다말에 사는 아모리 족속을 친지라 8 소돔왕과 고모라왕과 아드마왕과 스보임왕과 벨라 곧 소알왕이 나와서 싯딤 골짜기에서 그들과 접전하였으니 9 곧 그 다섯 왕이 엘람왕 그돌라오멜과 고임왕 디달과 시날왕 아므라벨과 엘라살왕 아리옥 네 왕과 교전하였더라 10 싯딤 골짜기에는 역청 구덩이가 많은지라 소돔왕과 고모라왕이 달아날 때에 군사가 거기 빠지고 그 나머지는 산으로 도망하매 11 네 왕이 소돔과 고모라의 모든 재물과 양식을 빼앗아 가고 12 소돔에 거하는 아브람의 조카 롯도 사로잡고 그 재물까지 노략하여 갔더라 창 14:5-12 100시간 남짓한 벚꽃의 한평생,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시점은 따로 있다. 봉오리 시절도 아니고, 갓 개화한 무렵도 아니다. 활짝 피었을 때보다도 더 아름다운 때가 있다. 다섯 장의 꽃잎이 제각각 바람 따라 춤추듯 날아가는 시간이다. 자신을 버리면서 남들에게 아름다움을 선사하는 장관이다. 이를 사람들은 산화(散花)한다고 한다. 일본의 선승 료칸(良寬)의 하이쿠(俳句·일본 전통의 짧은 시구)가 연상된다. ‘지는 사쿠라/ 나머지 사쿠라도/ 지는 사쿠라’. 벚꽃의 일본말 ‘사쿠라(櫻)’는 외래어로 우리말에 건너와 전혀 다른 뜻으로 자리 잡았다. 다른 속셈을 가지고 어떤 집단에 속한 사람 곧 변절자를 가리킨다. 특히 여당과 야합하는 야당 정치인을 이르는 말이다. 지난 연말 여당에서 ‘위헌 선거법’을 만들 때 가담한 이들에게 어울리는 말이다. 보름 뒤 총선이 끝난 뒤에도 이들 사쿠라는 지지 않고 남아 있을 것인가.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권불십년(權不十年)이라. 피고 지는 벚꽃에게서 겸손과 순리를 배워야 할 시간이다. 중국 지도자 세 사람이 함께 기차를 타고 가는데 기차가 갑자기 멈추더니 한참을 서 있었다. 참다못한 마오쩌둥이 말을 꺼냈다. “기관사는 혁명의 적이니 인민재판으로 처형합시다. 그러면 우리가 꿈꾸는 혁명이 무엇인지를 다른 기관사들도 깨닫게 될 것이오.” 창문 밖을 응시하던 덩샤오핑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사회주의를 수호하는 데 자본주의 방식이라고 거부할 이유가 없습니다. 기관사의 월급을 올려줍시다.” 두 사람의 눈치를 보던 시진핑이 말했다. “일단 기차 창문의 블라인드를 내리죠.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모르게.” 꽃씨 가장 귀한 걸로한 가지만 간직하겠소그러고는 죄다 잊어버리겠소. 꽃샘에 노을질, 그황홀될 한 시간만 새김질하며시방은 눈에 숨어 기다리겠소. 손금 골진 데 꽃씨를 놓으니문득닝닝거리며 날아드는 꿀벌들…… 따순 해나래를 접고향내 번져 꿈처럼 윤 흐르는 밤……. - 이수복(1924∼1986) 이수복 시인의 ‘꽃씨’는 담백하고 깨끗하다. 요새 일로서는 귀한 작품이다. 진실로 청아하기란 쉽지 않다. 고아하고 품위 있는 말씨와 사상이 담겨 있다. ‘가장 귀한 거 하나만 간직하고 나머지는 다 잊겠다.’ 이 말은 시인이 꽃씨를 보며 한 말이다. 결코 우리의 지난 1년이라든가 세월이라든가 기쁘고 슬펐던 기억들을 두고 한 말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눈에는 저 꽃씨가 세월이나 기억 혹은 감정들로 보인다. 첫 연을 읽다 보면 작은 씨들이 마음에 콕콕 박혀 아팠던 지난날들을 연상하게 된다. 이제 딱 하나만 남기고 다 잊을 때가 됐다. 기쁨도 슬픔도 지나갔다. 어떤 의미로는 고마웠고 감사했다. 그러니 이 시를 다 읽고 나면 딱 하나 남길 그 씨앗을 고르기로 하자. 썩어야 싹을 틔울 씨앗이라도 품어야 믿음을 간직할 수 있을 테니. 전쟁을 앞둔 왕들의 형편을 살펴보자. 창 14:5-17 롯의 불행 the misfortune of Lot 5절. 르바 족속 Rephaims 수스 족속 Zuzims 엠 족속 Emins 호리 족속 Horites 5절과 6절에서 언급되는 이 족속들은 그 지역의 원주민들이다. 나중에 에돔과 모압과 암몬 등이 점령한다. + 그들을 아낙 족속과 같이 르바임이라 칭하였으나 모압 사람은 그들을 에밈이라 칭하였으며 호리 사람도 세일에 거하였더니 에서의 자손이 그들을 멸하고 대신하여 그 땅에 거하였으니 이스라엘이 여호와의 주신 기업의 땅에서 행한 것과 일반이었느니라 신 2:11-12 '아스드롯 가르나임 Ashteroth Karnaim' 갈릴리 바다 동쪽 33,6킬로 떨어진 작은 산. 그 이름은 ‘두 뿔의 아스타르테’(Astarte of the two horns)을 의미한다. 아스타르테는 페니키아의 풍요와 생식의 여신 이름에서 나왔을 것이다. 두 뿔의 상징은 끝이 초승달이거나 두 뿔 모양의 달이다. '함 Ham' 암몬 족속의 수도 랍바(Rabbah)의 고대 이름이다. 팔레스타인의 소금 바다 사해(the Dead Sea) 상부 끝 북동쪽으로 40킬로 떨어진 곳에 있다. '사웨 기랴다임 Shaveh Kiriathaim' 문자적으로는 ‘두 도시의 평원’(the plain of two towns)라는 뜻이다. 사해 동쪽 16킬로 떨어진 현대의 쿠레야트(Kureyat)와 동일시된다. 6절. 세일 Seir 사해의 남동쪽 산악 지대이다. '광야 the wilderness' 가나안과 이집트 사이의 석회암으로 이루어진 벌거벗은 평원이다. '엘바란 El-paran' 홍해(Red Sea) 아카바(the Gulf of Akaba)만 북쪽 맨 끝에 있던 항구로 추정된다. 7절. 그들이 돌이켜 they returned 그돌라오멜과 그와 동맹한 왕들이 지금까지 남쪽으로 행군을 하다가 북서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엔미스밧 Enmishpat ‘심판의 우물’(the well of judgement)이라는 곳인데 논쟁자들이 자신들의 주장을 해결하기 위해 모인 성소(the seat of oracle)가 있었던 곳인 모양이다. '가데스 Kadesh' 유다 국경 남동쪽에 있던 가데스 바네아(Kadesh-Barnea)였을 것이다. + 호렙산에서 세일산을 지나 가데스 바네아에까지 열 하룻길이었더라 너희가 가데스에 여러 날 동안 거하였었나니 곧 너희가 그곳에 거하던 날 수 대로니라 신 1:2, 46 '아말렉 족속의 온 땅 all the country of the Amalekites'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아말렉 족속의 들’(the field of the Amalekites)이다. 팔레스타인과 이집트 사이에 유목민이 사는 곳이었다. 나중에 이스라엘 민족이 시나이 반도(the peninsula of Sinai)로 들어가는 것을 아말렉이 가로막았던 곳이다. Schnorr von Carolsfeld Bibel in Bildern 1860 + 때에 아말렉이 이르러 이스라엘과 르비딤에서 싸우니라 모세가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우리를 위하여 사람들을 택하여 나가서 아말렉과 싸우라 내일 내가 하나님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산꼭대기에 서리라 여호수아가 모세의 말대로 행하여 아말렉과 싸우고 모세와 아론과 훌은 산꼭대기에 올라가서 모세가 손을 들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더니 모세의 팔이 피곤하매 그들이 돌을 가져다가 모세의 아래에 놓아 그로 그 위에 앉게 하고 아론과 훌이 하나는 이편에서 하나는 저편에서 모세의 손을 붙들어 올렸더니 그 손이 해가 지도록 내려오지 아니한지라 여호수아가 칼날로 아말렉과 그 백성을 쳐서 파하니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리라 내가 아말렉을 도말하여 천하에서 기억함이 없게 하리라 모세가 단을 쌓고 그 이름을 여호와 닛시라 하고 가로되 여호와께서 맹세하시기를 여호와가 아말렉으로 더불어 대대로 싸우리라 하셨다 하였더라 출 17:8-16 유대인 히브리어 성경 주석 미드라시(Midrash).가 이렇게 해석하고 있다. ‘아말렉 족속의 온 땅’이라는 구절은 ‘나중에 아말렉 족속이 살게 된 땅’(the country afterwards inhabited by the Amalekites)이라는 의미로 이해하는 게 좋을 것이다. 아말렉이라는 이름을 가진 에서(야곱의 형)의 손자가 그 이름을 따 아말렉 족속을 설립했다. '아모리 족속 the Amorites' 일반적으로 이스라엘인 살기 전 가나안에 살던 주민을 말한다. '하사손다말 Hazezontamar' 사해로 통하는 깊은 골짜기 입구인데 서쪽 해변 중간쯤에 있다. 10절. 역청 구덩이가 많은지라 full of slime pits 그돌라오멜 동맹군에 패배한 군대가 도망가다가 빠진 구덩이들이다. 역청(bitumen)은 아스팔트의 원료가 되는 물질이다. '거기 빠지고 fell there' 동사의 주어가 애매하지만 소돔과 고모라 왕이 빠진 구덩이다. 나머지 다른 세 왕은 도망을 잘 갔다. 17절을 통해 우리는 소돔 왕이 역청 구덩이에서 빠져 나온 것을 알 수 있다. '산으로 to the mountain' 사해 동쪽에 있는 모압의 산. 12절. 소돔에 거하는 who dwelt in Sodom 롯이 악을 행하는 자들이 버글거리는 소돔에 자발적으로 원해 살았기 때문에 불행을 피할 수가 없었다. '롯도 사로잡고 그 재물까지 노략하여 갔더라 they took Lot ... and his goods, and departed' 악한 도시를 선택한 어리석고 무례한 롯은 그돌라오멜의 동맹군에 사로잡혀 목숨과 재물까지 잃을 위기의 불행을 당하게 되었다. 우리가 믿음이 요구하는 의무의 길에서 벗어나려고 할 때마다 우리는 스스로 하나님의 보호에서 멀어지게 되고 롯이 겪는 것처럼 우리의 선택이 우리의 지속적인 유익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할수 없게 될 것이다. 성경은 말씀한다. +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롬 12:19-21 Dead_Sea ♣ QT 되새김 A 아말렉 족속의 온 땅을 어떻게 이해하는게 좋은가. 당신은 그 사실을 인정하는가(admit). B 아말렉 족속은 시나이 반도로 들어가려는 이스라엘 민족에게 어떻게 했는가. 그 사실을 믿는가. 믿음은 말씀에 대한 하나님의 능력과 의지를 믿는 것이다(believe). C 롯은 그돌라오멜 동맹군에 어떤 일을 당했는가. 당신은 그 의미를 어떻게 생각하는가(consider). D 롯의 불행은 어떤 의미인가. 당신은 그것을 당신의 생활에 어떻게 적용하고 실천할 것인가(do). ♣ 오늘의 기도 Today’s prayer+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단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마 4:10 주님 광야에서 시험받으실 때 사단아 물러가라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라 말씀하신 것처럼 그런 확고함으로 사단을 물리칠 수 있게 도와주십시오. 아멘. 2020-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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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티주석47 롯의 불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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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티주석46 왕들의 전쟁
- Tempesta Abraham Makes the Enemies Flee Who Hold His Nephew 왕들의 전쟁 14:1 당시에 시날왕 아므라벨과 엘라살왕 아리옥과 엘람왕 그돌라오멜과 고임왕 디달이 2 소돔왕 베라와 고모라왕 비르사와 아드마왕 시납과 스보임왕 세메벨과 벨라 곧 소알왕과 싸우니라 3 이들이 다 싯딤 골짜기 곧 지금 염해에 모였더라 4 이들이 십이 년 동안 그돌라오멜을 섬기다가 제 십삼 년에 배반한지라 창 14:1-4 재앙은 홀로 오지 않는다. 지난 시대에 사회 전체를 뒤흔든 위기는 대개 전쟁과 기근 그리고 질병의 세 가지 모습으로 나타났다. 그 세 가지는 사실 내적으로 얽혀 있다. 전쟁은 농사의 기반을 파괴하여 기근을 낳고, 군대가 이동하여 전염병을 퍼뜨린다. 다른 한편 기근은 정치적 불안을 초래해 전쟁의 원인이 되는 동시에 사람들의 신체를 허약하게 만들어 병을 더 퍼뜨리기 십상이다. 유럽 역사상 최대의 위기가 발생한 14세기 상황이 전형적이다. 이때에는 백년전쟁(1337~1453)과 대기근 그리고 페스트가 함께 찾아왔다. 서유럽 중심부에서 백년 넘게 전쟁으로 대혼란이 지속되는 동안 선페스트(腺pest: 페스트균에 감염되어 림프샘에 출혈성 염증을 일으키는 병)는 병독성이 훨씬 더 강한 폐페스트(肺pest: 페스트균이 폐에 침입해서 생기는 병. 출혈성 기관지 폐렴을 일으키며 살 빛깔이 흑자색으로 변하고 사망률이 높음)로 변이를 일으켜 엄청난 피해를 줬다. 이런 현상들 이면에 구조적인 농업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오늘날과 달리 전통 시대 농업은 지속적인 생산성 향상이 불가능했다. 인구는 늘어나는데 식량 생산이 지탱해주지 못하는 한계 상황에 이르면 참혹한 대량 아사 사태를 피할 수 없다. 이 모든 일이 한 번에 터진 14세기에 유럽은 자칫 문명의 붕괴를 걱정할 정도로 큰 위기를 맞았다. 사회적 위기는 또한 정신적 위기를 동반한다. 이런 시대에 빈발하는 대표적 현상 중 하나가 종말론이다. 우리 시대의 고난은 이미 예견되어 있던 일이며, 조만간 말세가 찾아오고 세상이 뒤집히리라는 주장이다. 종말론 자체는 원래 기독교의 중요한 교리 중 하나다. 중세에는 요한계시록 20장을 근거로 마지막 날들에 사탄이 일시 승리를 거두지만 그리스도가 그를 제압한 후 천년 동안 이 땅에서 그리스도가 통치하는 시대가 이어진다고 해석했다. 천년이 지난 후 사탄이 풀려나면 신에 대항하는 마지막 전투를 벌이다가 패배하고 그 후 최후의 심판이 일어난다. 이런 내용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면 소위 ‘천년왕국주의(millenarianism)’가 된다. 재앙의 시대에는 이런 교리를 기묘하고도 과격하게 해석하여 사회에 불을 지르는 사람들이 자주 등장한다. 대개는 기성 교회에서 떨어져 나와 홀로 망상에 가까운 교리에 집착하는 수도사 출신 인사들이기 십상이다. 기근 상태에 빠진 농민이나 도시 빈민이 자신의 불행한 처지를 개선하기 위해 분출하는 격렬한 욕구가 모든 것을 일시에 해결해 주리라는 환상적 메시지와 만나면 때로 걷잡을 수 없는 폭력 사태가 벌어지기도 한다. 이런 사람들의 특징 중 하나는 성경의 일부 구절을 문자 그대로 해석한다는 것이다. 믿음의 조상 아브람이 그런 재난을 초래할 수 있는 왕들의 전쟁을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서 어떻게 겪었나 보자. 창 14:1-4 왕들의 전쟁 The war of the Kings 1절. 당시에 in the days 당시는 이 사건이 기록되기 14년 전이었다. 이 장에서 아브람은 예기치 않은 전사(戰士)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이 당시 아브람은 하란에 있었던 것 같다. '아므라벨 Amraphel' 아므라벨(Amraphel) 왕은 바빌로니아(Babylonia)의 위대한 계몽 군주 함무라비(Hammurabi 기원전 1810년경-기원전 1750년경)와 대개 동일시된다. 바빌로니아 제1왕조(아무르 왕조)의 제6대 왕으로서 기원전 1792년에서 기원전 1750년까지 바빌로니아 제국의 왕이었다. 이란에 있었던 고대 왕국 엘람(Elam)을 정복하고 지중해 연안까지 영향력을 확대하고 바빌로니아를 강한 중앙집권 제국으로 키웠다. 인류사상 발견된 가장 오래된 성문 법전 중의 하나인 함무라비 법전을 함무라비가 반포한 것으로 유명하다. 100여 년 이상 앞선 수메르 법전이 발견되기 전까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성문법으로 알려져 있다. '시날 왕 king of Shinar' 아람어(Aramaic)로 번역된 구약성서 타검(Targum)은 시날(Shinar)을 바빌로니아의 수도 바빌론(Babylon)으로 번역했다. 그것은 바빌로니아에 대한 이집트 명칭들 가운데 하나였던 것 같다. '엘라살왕 아리옥 Arioch king of Ellasar' 바빌로니아의 수도 바빌론과 유프라테스 강 입구 사이 중간에 있는 라르사(Larsa)의 왕 에리아쿠(Eriaku)를 지칭한다. '그돌라오멜 Chedorlaomer' 그돌라오멜(Chedorlaomer)은 (누구)의 종(servant of)이라는 뜻을 지닌 히브리어(Hebraized) 형태의 쿠두르(kudur) 그리고 엘람 신(Elamite deity)의 이름 라가마르(Lagamar)가 합쳐진 단어이다. 즉 라가마르의 종이라는 뜻의 이름이다. '엘람 Elam' 그 당시 엘람은 바빌로니아의 소유였다. 그러므로 당시 가나안(Cannan)도 바빌로니아 주권의 지배를 받았다. '고임 왕 디달 Tidal king of Goyyim' 고임(Goyyim)은 민족들(nations)로 번역된다. 그래서 킹 제임스 성경은 ‘민족들의 왕(king of nations)’이라고 번역했다. 개역성경은 고임 왕(king of Goyyim)이라고 번역했다. 티그리스 동쪽과 엘람 북쪽에 고임이라는 나라가 있었다. 고임을 히브리어 형식으로 쿠르드인(Kurdistan)이라고 해석하는 사람도 있다. 쿠르드인은 터키와 이란과 이라크에 걸친 고원 지대에 사는 민족이다. 그러므로 디달(Tidal)은 북쪽 쿠르드 유목민들(hordes)의 왕이었다. 4절. 이들이 십이 년 동안 그돌라오멜을 섬기다가 Twelve years they served Chedorlaomer 그들이 섬겼다는 것은 공물을 바쳤다는 것이다. '제 십삼 년에 배반한지라 in the thirteenth year they rebelled' 그런데 그들이 그돌라오멜을 배반했다는 것은 굴종의 멍에를 벗기 위해 그에게 공물을 바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 QT 되새김 A 아므라벨은 누구라고 생각할 수 있는가. 당신은 그 사실을 인정하는가(admit). B 왜 그돌라오멜은 쳐들어왔는가. 그 사실을 믿는가. 믿음은 말씀에 대한 하나님의 능력과 의지를 믿는 것이다(believe). C 아람어(Aramaic)로 번역된 구약성서 타검(Targum)은 시날(Shinar)을 어떻게 번역했는가. 당신은 그 의미를 어떻게 생각하는가(consider). D 이들이 십이 년 동안 그돌라오멜을 섬기다가 제 십삼 년에 배반했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당신은 그것을 당신의 생활에 어떻게 적용하고 실천할 것인가(do). 오늘의 기도 Today’s prayer +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마 4:4 주님 사단이 우리를 파멸시키려 사용하는 유혹과 기교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이기게 해주십시오. 아멘. 2020-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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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티주석46 왕들의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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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티주석45 새로운 축복
- Abraham Sees Sodom in Flames, watercolor by James Tissot, c. 1896–1902 새로운 축복 13 소돔 사람은 악하여 여호와 앞에 큰 죄인이었더라 14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동서남북을 바라보라 15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16 내가 네 자손으로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찐대 네 자손도 세리라 17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18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더라 창 13:13-18 뉴욕에서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우한 코로나) 환자가 갈수록 급격히 늘고 있는 추세다. 2020년 3월 23일(현지 시간) 미 CNBC 방송과 뉴욕타임스(NYT) 등에 따르면 뉴욕주의 코로나 확진자는 이날 현재 2만909명으로 집계됐다. 전날 기준 확진자 1만5168명에서 하룻밤 사이에 5000명 이상이 급증한 것이다. 사망자 수도 현재 157명이다. 의심 환자 검사 대비 확진자 발견 비율도 다른 주(州)에 비해 현저히 높다. 각 주별 코로나 환자 집계 결과에 따르면 뉴욕은 현재까지 7만8289건 검사 건수 가운데 확진자임이 판명된 건수가 2만875 건으로, 검사 대비 약 26%였다. 검사자 대비 확진자가 약 1~3% 정도수 수준인 다른 주의 약 20배 수준이다. 뉴욕주가 다른 지역보다 환자 수가 월등히 많은 이유 가운데 하나는 검사량 자체가 대폭 늘어난 데 있다. 앤드루 쿠오모 뉴욕 주지사는 23일 코로나와 관련한 일일 브리핑에서 ‘뉴욕주는 미국 내 다른 어떤 주보다 바이러스 검사를 많이 한다’라고 밝혔다. 뉴욕을 제외한 다른 주는 주별로 차이가 있지만 현재까지 누적 검사 건수가 2000~3000건 수준이다. 쿠오모 주지사는 한국이 하루에 약 2만 명을 대상으로 코로나바이러스 검사를 실시하고 있다는 점을 거론하면서 “뉴욕은 하루에 1만6000명을 검사하는데, 한국 인구는 뉴욕주의 약 2배에 이른다”라고 말했다. 인구 수로 따지면 뉴욕이 한국보다 검사를 더 많이 하고 있다는 뜻이다. 한국 인구는 올해 통계청 기준 약 5,178만 명이고, 뉴욕주 인구는 미국 인구조사국의 지난해 7월 발표 기준 약 1.950만 명으로 한국 인구가 뉴욕주의 약 2.66배다. 그 밖에 인구 밀집도가 높고 전 세계 여러 국가 출신들이 거주한다는 점 미국의 다른 지역들과 달리 자가용이 아니라 지하철 등 대중교통을 이용하며 레스토랑을 비롯한 사람들이 다수 모이는 장소가 타 지역에 비해 많다는 점 역시 뉴욕에 확진자가 많을 수밖에 없는 이유로 꼽힌다. 지도자는 외롭고 상처받기 쉽기 때문에 옛날에 양반이 중인을 다루듯 전문가와 부하 직원들을 대한다. 지도자는 그들의 조언이 상황을 바꾸지 못할 경우 자신의 지위를 잃을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한다. 지도자는 그들을 칭찬하지 않고 자신을 칭찬한다. 지도자는 ‘국민’에 대해 많은 얘기를 하고 국민을 사랑하고 섬기는 척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국민을 두려워한다. 그런 두려움 때문에 지키지 못할 것을 약속하고 미래에 받게 될 비판에 자신을 내모는 식으로 대중의 기대를 잘못 관리한다. 필연적으로 비판은 계속 쌓이고 새로 나타난 지도자는 본능적으로 전임자가 나라를 망가뜨린 모든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새 권력이 비민주적인 사법권을 장악하면서 옛 권력은 감옥행으로 끝을 맺는다. 이런 악순환은 지도자들이 대중에 대한 두려움 대신 민주주의 시스템을 존중하고 그것의 신성한 가치를 깨닫게 될 때라야만 깨질 수 있을 것 같다. 한국은 민주주의 국가인데 왜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았을까. 알 수가 없다. 기업의 세계는 이미 다 변했는데 정치는 그렇지 않았다. 정부의 잘못 때문일까. 그래 정부의 잘못이 맞는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당신은 이미 좋은 정치인의 자질이 있는 것 같다. 사람은 자기 자신을 위해 살아야 한다고들 한다. 세상 누구보다 자신을 가장 사랑하고 자존감을 높이라고들 한다. 이 말은 정답 같다. 그런데 우리는 가끔 오답을 선택하곤 한다. 어떤 사람은 남을 위해 산다. 자기 자신보다 남을 더 사랑하기도 한다. 이런 일에 거창하게 희생이라든가 위인이라는 말을 붙일 것도 없다. 평범한 나도 평범한 너도 종종 할 수 있는 일이니까. 믿음의 사람이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 ‘이까짓 못난 인생 망쳐 버릴까. 확 죽어 버릴까’ 이런 생각이 들 때, 모진 마음이 약해지는 건 자신을 지극히 사랑해서가 아니다. 지금 내가 죽으면 엄마가 얼마나 슬퍼할까 걱정이 앞선다. 지금 내가 잘못되면 아이들이 얼마나 괴로워할까 두려움이 앞선다. 그래서 정말 절망적일 때 나는 나 자신이 아니라 엄마를 위해 아이를 위해 일어서게 된다. 성경에도 그런 사람이 나온다. 혼자서 앓는 한 사람이 서러워 우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에게는 병원 갈 힘도 없고 약을 챙겨주는 사람도 없다. 그때 주님이 그를 일으켜 세워 주셨다. + 그 후에 유대인의 명절이 있어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시니라 예루살렘에 있는 양문 곁에 히브리 말로 베데스다라 하는 못이 있는데 거기 행각 다섯이 있고 거기 38년 된 병자가 있더라 예수께서 그 누운 것을 보시고 병이 벌써 오랜 줄 아시고 이르시되 네가 낫고자 하느냐 병자가 대답하되 주여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 줄 사람이 없어 내가 가는 동안에 다른 사람이 먼저 내려가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하시니 그 사람이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 가니라 요 5:1-2, 5-9 쓰러지고 싶은 저 인생을 잡아주는 건 믿음으로 가능한 ‘주님 생각’ 하나뿐이다. 놀랍게도 주님 생각은 마스크가 되고 약이 되어 혼곤히 쓰러진 저 사람을 지켜줄 것이다. 3월은 조금 아픈 달. 땅도 얼음이 풀리느라 몸살을 하고 환절기에 우리도 기침하는 달.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이 코로나19를 무사히 넘기기를 기도한다. 믿음의 사람은 시험의 시간이 지난 뒤 하나님에게서 특별한 말씀을 언제나 받게 된다. 다른 사람들은 그들이 원하는 것을 취하게 한다. 그러나 우리의 하나님은 그들이 전혀 상상할 수 없는 이상의 것을 우리에게 주신다. +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 시 16:5 + 자기 하나님을 삼은 나라 곧 하나님의 기업으로 빼신바 된 백성은 복이 있도다 시 33:12 창 13:13-18 새로운 축복 A new blessing 13절. 소돔 사람 the men of Sodom 롯은 비옥한 땅과 문명이 발달한 도시를 선택했다. 아브람에게는 바위투성이 산들(rugged hills)과 황량한 들판의 역경과 영광과 덕들이 남겨졌다. 그것은 서부 팔레스타인의 소멸되지 않는 미래를 나타낸다. 소돔은 일찍이 문명화됐지만 타락한 종족의 관능적인 악폐들이 발달한 도시였다. + 네 아우 소돔의 죄악은 이러하니 그와 그 딸들에게 교만함과 식물의 풍족함과 태평함이 있음이며 또 그가 가난하고 궁핍한 자를 도와주지 아니하며 거만하여 가증한 일을 내 앞에서 행하였음이라 그러므로 내가 보고 곧 그들을 없이 하였느니라 겔 16:49-50 무엇보다도 롯은 자발적으로 그런 사람들 가운데 살기를 원했다. 그 지방의 물질적인 매력들이 신앙과 도덕의 오염에 대한 그의 두려움을 눌러버렸다. '악하여... 큰 죄인이었더라 were wicked and sinners' 악하다(wicked)는 것은 동료 인간을 대함에 있어 무정하고(heartless) 잔인하다(inhuman)는 것이다. 그리고 죄인(sinner)이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혐오(abomination)와 악행(depravity)들에 빠진 사람이다. '여호와 앞에 before the LORD' 여호와 앞에서 행한 그들의 부도덕한 행위는 하나님에게 어긋나는 행위와 무례를 범하는 것이었다(Before the LORD their immoral conduct was an offence to God).. 14절,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after that Lot was separated from him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확신을 새롭게 해주시기 위해 그 순간을 선택하셨다. 왜냐하면 아브람이 조카 롯이 떠난 뒤에 상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들이 없는 아브람이 롯을 유력한 상속자로 생각해 하나님의 약속이 그를 통해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했을 수 있었다. 그런 아브람에게 하나님이 ‘너 있는 곳’(the place where thou art) 즉 아브람이 서 있는 베델 근처의 장소에서 온 땅의 놀라운 광경을 보라고 명령하신다. '너는 눈을 들어 Lift up now thine eyes' 아브람은 눈을 들어 사방의 땅을 바라보았다. 외로운 족장 아브람의 눈앞에 황량한 평지와 산들이 펼쳐졌다. 그는 발을 들어 그 땅을 믿음으로 자기의 것이라 요구했다. + 내가 모세에게 말한 바와 같이 무릇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을 내가 다 너희에게 주었노니 수 1:3 그리고 그 땅은 강력한 나라의 사람들로 채워질 것이었다. 솔로몬 시대에 그것이 이루어졌다. + 유다와 이스라엘의 인구가 바닷가의 모래 같이 많게 되매 먹고 마시며 즐거워하였으며 왕상 4:20 15절. 영원히 for ever 아브라함이 그의 생존 시에 실제로 그 땅을 갖지 못했지만 하나님이 그것을 아브람에게 주셨다. 그처럼 이스라엘이 그것을 항상 소유한 것은 아니지만 영원히 그들의 것이 될 것이다. 그렇듯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그 의미는 하늘나라가 영원히 우리의 것이 될 것이라는 것을 확신시켜 준다. +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 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 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히 11:8-10 17절.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행하여 보라 Arise, walk through the land 땅을 여기저기 걷는 행위는 그 땅의 소유권을 인정하는 법률상의 정식 절차(legal formality)였다. 18절. 헤브론 Hebron 1세기 제정 로마 시대의 유대인 출신의 정치가이자 역사가 요세푸스(Flavius Josephus 37년 경~100년 경)는 헤브론이 이집트의 멤피스(Memphis)보다 더 오래된 도시라고 말했다. '마므레... 거기서... 단을 쌓았더라 the plain of Mamre ... built ... an altar' 그런 뒤 아브람이 경건한 감사의 새로운 예물과 예배를 드림으로 하나님의 약속이 갱신되었다. 아브람은 마음을 들어 하나님을 경배했다. 롯은 아브람의 마음을 찢어놓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브람의 마음을 축복하시고 그를 모든 민족을 위한 축복의 통로로 삼으셨다. Bethel. From the book Holy Land photographed by Daniel B. Shepp. 1894 ♣ QT 되새김 A 롯이 선택한 소돔은 어떤 곳이었는가. 당신은 그 사실을 인정하는가(admit). B 왜 롯은 소돔을 선택했는가. 그 사실을 믿는가. 믿음은 말씀에 대한 하나님의 능력과 의지를 믿는 것이다(believe). C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어떻게 하셨는가. 당신은 그 의미를 어떻게 생각하는가(consider). D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는 약속에서 ‘영원히’는 실제적으로 어떤 의미인가. 당신은 그것을 당신의 생활에 어떻게 적용하고 실천할 것인가(do). 2020-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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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티주석45 새로운 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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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티주석44 새로운 짐
- Abraham and Lot separate. Gen 13.7 &.c, etching by Wenceslaus Hollar 새로운 짐 13:5 아브람의 일행 롯도 양과 소와 장막이 있으므로 6 그 땅이 그들의 동거함을 용납지 못하였으니 곧 그들의 소유가 많아서 동거할 수 없었음이라 7 그러므로 아브람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가 서로 다투고 또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도 그 땅에 거하였는지라 8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 9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10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들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는고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11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들을 택하고 동으로 옮기니 그들이 서로 떠난지라 12 아브람은 가나안 땅에 거하였고 롯은 평지 성읍들에 머무르며 그 장막을 옮겨 소돔까지 이르렀더라 창 13:5-12 봄은 힘이 세다. 고운 잿빛 털로 덮인 강아지처럼 보송보송해 버들강아지라 불리는 버드나무 수꽃이 살을 에는 강풍과 무자비한 가랑비를 이기고 끝끝내 머리를 내민다. 진정한 봄이 왔다는 첫 신호다. 약 5000만 명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스페인 독감(1918~1919년) 당시 젊은이가 가장 많이 죽었다. ‘사이토카인 폭풍’은 젊고 건강한 사람이 왜 바이러스를 못 이기는지에 대한 의학적 설명이다. 가령 몸속으로 들어온 바이러스의 힘이 1이면 면역력도 1로 대응해야 하는데 10의 힘으로 너무 열심히 싸워 다른 장기까지 다치게 해 염증을 일으킨다. 사스와 메르스 때도 이런 사례가 있었다. 젊은 사람들도 ‘나는 건강하니 괜찮을 것’이라고 너무 자만해선 안 된다. 적어도 1~2년은 걸릴 것이고 안 만들어질 가능성이 더 높다. 코로나바이러스류에 대한 백신과 치료제는 한 번도 개발되지 못했다. 처음 1~4번 코로나는 감기였고 5번 코로나는 사스였고 6번은 메르스였다. 모두 백신과 치료제가 없었다. 이번이 일곱 번째 변형 코로나인데 잘 물러갈 놈이 아닌 것 같다. 19세기 영국의 사상가 러스킨(John Ruskin, 1819년 2월 8일 - 1900년 1월 20일)은 말했다. ‘우리가 군인과 의사를 존경하는 것은 군인의 과업이 사람을 죽이는 것이 아니고 나라를 지키다가 죽는 것이고 의사는 전염병이 창궐할 때 사지에 남아서 환자들을 돌보기 때문이다.’ 우리 위정자들은 우리에게 존경받을 사유가 하나라도 있는가. 우리는 무엇으로 존경을 받아야 할까. 아브람이 어떻게 했나를 보자. 삼촌 아브람과 조카 롯 사이에 소유가 늘어나 갈등이 생겼다. 창 13:5-13 새로운 짐 A new burden 애굽에 있는 동안 롯은 재산을 얻고 세상맛을 알게 되었다. 그의 세속적인 관심은 일부분 아브람의 잘못도 있었다. 하나님은 아브람의 죄를 용서하셨지만 슬픈 결말을 막지 않으셨다. 우리는 용서받은 뒤에도 우리가 뿌린 것을 거두게 된다. 아브람의 믿음의 처음 시험은 기근에서 왔다. 그의 두 번째 시험은 그 자신의 가족에게서 왔다. 가족의 시험들은 모든 시험 가운데 가장 어려운 것이다. 아브람은 믿음으로 살았기 때문에 평화의 조정자(peacemaker)였다. 그러나 롯은 안목(眼目)으로 살았기 때문에 말썽꾸러기(troublemaker)였다. 아브람은 하나님이 계시는 하늘의 도시(heavenly city)를 선택했다. 그러나 롯은 그 당시에도 악했고 하나님이 안 계시는 세속적인 도시(earthly city)를 선택했다. 롯은 하나님을 뒤에 남겼고 그의 가정을 파괴했다. 세속 도시가 이상적으로 보일 수 있지만 그것은 멸망을 향하는 도시이다. 당신의 장막을 죄와 가까운 곳으로 가까이 가면 갈수록 당신의 제단을 함께 옮길 수 없을 것이다. +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히 11:16 7절. 그러므로 서로 다투고 And there was a strife 여기에서 아브람의 성격은 아주 온건한 사람으로 나타난다. 강한 신앙심을 지닌 그는 그 성격에 상처를 주거나 그 이름을 깎아내릴 수 있는 일을 꺼렸다. 그래서 그는 골육이라 성품과 덕이 아주 밀접하게 연결된 두 사람이 갈라져야 하는 불행한 결과를 놓고 깊이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롯에게 진심을 담아 말했다. + 우리는 한 골육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말자 창 13:8 자신이 삼촌으로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리를 양보하고 그는 조카 롯에게 먼저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주었다. 아브람의 행위는 비이기적이고 평화적일뿐만 아니라 성경 가르침에 따르는 아주 뛰어난 관용과 호의의 모범이기도 했다. 성경은 말씀한다. +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마 6:31-32 +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롬 12:10-11 +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케 하라 빌 2:4 10절. 이에 롯이 눈을 들어 Lot lifted up his eyes 여행자들은 말한다. 그들이 서 있는 벧엘 동쪽 작은 언덕마루에서 요단강과 강 양쪽의 드넓은 목초지 그리고 물결치는 푸르른 풀밭을 볼 수 있다. 그 광경은 시냇물이 흐르는 것 같았다고 한다. 11절. 그러므로 롯이 요단 온 들을 택하고 Then Lot chose him all the plain 롯의 선택은 세상 적인 관점에서 탁월한 것이었다. 그러나 최상의 이익을 위한 것으로는 가장 비효과 적인 것이었다. 롯은 좋은 사람이긴 했지만 이기적이고 욕심이 많았다. 안타깝게도 그러한 성향의 사람은 세상의 이익을 바라고 자신의 영혼을 위험에 빠뜨리거나 판다. 이와 달리 인내로 일본의 패자가 된 도쿠기와 이에야스의 경우도 있다. 오다 노부나가의 급사(急死) 이후 권력을 거머쥔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기세를 몰아 일본 통일에 박차를 가한다. 능수능란하게 세력을 불리며 서일본과 규슈를 접수한 히데요시는 1590년 봄 동쪽으로 시선을 돌려 관동(關東)의 강자 호조(北條) 가문 복속에 나선다. 호조 가문은 본거지인 오다와라(小田原)성에서 농성(籠城)했으나 집요한 봉쇄를 견디지 못하고 그해 여름 성문을 열고 만다. 소위 ‘오다와라 정벌’이라고 하는 이때의 전투로 히데요시는 사실상 일본의 패자(覇者)가 된다. 관동을 접수한 히데요시는 같은 진영으로 참전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에도로 영지를 옮길 것을 넌지시 제안한다. 드넓은 관동의 지배권을 주겠다는 명분이었으나 내막은 간단하지 않았다. 당시 에도는 불모지나 다름없는 미개척지였다. 반면 이에야스의 본거지인 슨푸(駿府·시즈오카현)는 풍부한 물산을 자랑하는 교통 요지였다. 후세의 사가들은 에도 전봉(轉封) 권유를 이에야스를 견제하기 위한 히데요시의 계책으로 해석한다. 이에야스의 가신들은 울분을 토했지만 아직 히데요시에게 맞설 때가 아니라고 판단한 이에야스는 불온함을 내색하지 않고 명(命)에 따른다. 하루아침에 삶의 터전을 잃게 된 수만 가솔을 이끌고 에도에 입성한 이에야스는 맨땅에서 다시 시작한다. 보통 영주라면 성(城)부터 챙길 것이나, 이에야스는 가신들의 주거지 개척 농경지 확보와 물자 운송용 수로 건설 그리고 상업 진흥에 힘을 쏟는다. 다행히 에도는 동서를 연결하는 천혜의 지리적 이점이 있었다. 이때부터 시작된 에도 건설이 훗날 이에야스가 도요토미 가문을 응징하고 강력한 통치력의 에도 막부를 여는 원동력이 되어 주었다. 이에야스의 위대한 지도자 면모는 형세를 읽고 힘을 기르며 때를 고르는 안목에서 찾을 수 있다. 위기를 전화위복으로 만드는 것은 분노나 오기(傲氣)가 아니라 냉철한 상황 판단과 전략적 인내임을 알려주는 교훈이 일본 근세 역사에 담겨 있다. ♣ QT 되새김 A 조카 롯과 문제가 생겼을 때 아브람은 어떤 태도로 해결했는가. 당신은 그 사실을 인정하는가(admit). B 롯은 그것을 어떻게 대처했는가. 그 사실을 믿는가. 믿음은 말씀에 대한 하나님의 능력과 의지를 믿는 것이다(believe). C 롯의 성향은 어떤 결말을 초래할 수 있는가. 당신은 그 의미를 어떻게 생각하는가(consider). D 아브람은 결국 무엇을 바리보는가. 당신은 그것을 당신의 생활에 어떻게 적용하고 실천할 것인가(do). 2020-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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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티주석44 새로운 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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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티주석43 새로운 시작
- Rembrandt Abraham Serving the Three Angels 새로운 시작 13:1 아브람이 애굽에서 나올 새 그와 그 아내와 모든 소유며 롯도 함께하여 남방으로 올라가니 2 아브람에게 육축과 은금이 풍부하였더라 3 그가 남방에서부터 발행하여 벧엘에 이르며 벧엘과 아이 사이 전에 장막 쳤던 곳에 이르니 4 그가 처음으로 단을 쌓은 곳이라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창 13:1-4 2020년 3월 26일 코로나19가 지구촌을 공포로 몰아간다. 인간의 근본 욕망이 식욕과 성욕 그리고 재앙으로부터의 안정 욕구라고 전제한다면 생명을 빼앗기고 사랑하는 사람을 잃으며 제대로 된 격식도 갖추지 못하고 떠나보내야 하는 슬픔은 무엇과도 비길 수 없을 것이다. 인류 역사상 유행성 질병과 전쟁은 인간의 안정 욕구를 파괴하는 2대 재앙이다. 질병이 천재(天災)라면 전쟁은 인재(人災)에 더 가까우니 감정적인 원한은 후자가 더 클 수밖에 없겠다. 그래서일까. 전쟁과 관련한 전쟁이 낳은 노래는 민족상잔을 겪은 우리나라는 물론 지구상에 셀 수 없을 정도로 많다. 그중 20세기를 울린 전쟁 노래의 백미 중 하나로 ‘Danny Boy’를 지목하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닐 것이다. 일찍이 우리나라에도 상륙하여 ‘아 목동아’를 제목으로 테너 현제명이 녹음하기도 했고, 이 곡의 멜로디를 색소폰으로 연주한 실 오스틴의 재즈는 한국전쟁 직후의 한반도를 강타했다. 아일랜드의 테너 존 매코맥의 가창부터 스탠더드 팝의 대표 주자인 빙 크로스비와 앤디 윌리엄스, 나아가 자메이카 출신 칼립소 가수 해리 벨라폰테와 로큰롤의 왕 엘비스 프레슬리까지 이 곡을 부른 가수는 셀 수조차 없다. 이 노래는 오랫동안 대영제국과 피비린내 나는 독립 투쟁의 역사를 지닌 북아일랜드 지방의 민요 ‘Londonderry Air’에서 출발했다. 이 곡이 채집되던 19세기 중반 이래 보통 3개의 가사 버전이 통용되고 있다. 그중에서 영국의 변호사이자 작사가인 프레더릭 웨덜리의 노랫말이 ‘Danny Boy’를 대표한다. 전쟁터로 끌려나가 결국 돌아오지 못할 아들을 그리워하는 애끓는 부모의 정을 담은 이 노랫말은 전 세계 부모들의 마음을 처절하게 대변한다. ‘여름은 갔고 장미들도 시드는데 이제 너는 떠나야만 하고 우리는 남아 널 기다린다...’ 전염병이 창궐하니까 체크되는 부분이 보인다. ‘내가 믿음이 성숙했나 성숙하지 않았나’이다. 죽음을 담담한 상태로 받아들이면 믿음이 성숙한 것이고 담담하지 못하면 성숙하지 않은 것이다. 이럴 때면 에피쿠로스(Epicurus 기원전 341년–기원전 271년)가 떠오른다. 그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이자 에피쿠로스 학파(Epicurianism)라 불리는 학파의 창시자이다. 에피쿠로스는 300여 권의 저술 활동을 했는데, 그중 몇 권의 일부만이 전해진다. 알려진 에피쿠로스 학파 철학의 대부분은 후대의 추종자들이나 해설자들에 그 유래가 있다. 에피쿠로스에게 철학의 목적은 행복하고 평온한 삶을 얻는데 있었다. 그가 말하는 행복하고 평온한 삶은 평정(ataraxia), 평화, 공포로부터의 자유, 무통(無痛, aponia) 등의 성향을 의미한다. 그는 쾌락과 고통은 무엇이 좋고 악한지에 대한 척도가 되고 죽음은 몸과 영혼의 종말이기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아야 하며 신은 인간을 벌주거나 보상하지 않고 우주는 무한하고 영원하며 세상의 모든 현상들은 궁극적으로는 빈 공간을 움직이는 원자들의 움직임과 상호작용으로부터 나온다고 가르쳤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살아 있을 때는 죽음이 찾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죽음이 찾아왔을 때 우리는 없다. 때문에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부활을 인정하지 않는 에피쿠로스(개역성경 ‘에비구레오’로 번역) 철학자에 대해 사도 바울도 언급한 적이 있다. + 어떤 에비구레오(Epicureans)와 스도이고(Stoicks)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 쌔 혹은 이르되 이 말장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뇨 하고 혹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또 몸의 부활 전함을 인함이러라 행 17:18 그는 결혼하지 않았으며 아이도 없다. 그는 요로결석을 앓았고 이는 그가 기원전 270년 결국 사망하는 원인이 된다. 요로결석의 굉장한 고통을 겪으면서도 그는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고 한다. ‘나는 이 편지를 내 삶의 마지막이기도 하지만 기분 좋은 날에 쓰네. 소변을 볼 수 없는 고통스러운 상황인데다가 세균성 이질까지 겹쳐 내 고통은 더 이상 심각해질 수 없을 정도네. 그렇지만 내 철학적 사색들로부터 오는 기쁨이 이 고통을 상쇄시켜준다네...’ 부활을 믿지 않는 에피쿠로스가 고통 가운데 떠났지만 부활을 믿는 우리는 믿음의 조상 아브람의 삶으로 들어가 보자. 창 13:1-4 새로운 시작 A new beginning 1절. 남방으로 올라가니 went up ... south 하나님은 애굽에서 아브람을 단련하셨고(chasten) 그가 다시는 떠날 수 없는 땅으로 돌아갔다. 팔레스틴은 고지대라 애굽의 입구에서 남쪽 경계선까지 계속 오르막이다. 2절. 풍부하였더라 very rich 아브람의 소유는 목축업 종족에 비해 부유한 정도였다. 아랍의 족장(sheik)은 장막 100개 내지 200개, 낙타 60마리에서 100마리, 양과 염소는 각기 1000마리 정도는 되어야 부유하다는 소리를 들었다. 아브람이 목축업 종족의 소유보다는 훨씬 많았던 것 같다. 목축업 부족에게는 금과 은은 흔하지 않은 것인데 애굽에서 늘어난 재산을 팔아서 구한 모양이다. 3절. 남방에서부터 발행하여 went on his journeys from the south 그의 여행은 느린 행진이고 물과 목초지를 찾아 움직여야 했기 때문에 자주 장막을 치고 머물러야 했을 것이다. '벧엘과 아이 사이 전에 장막 쳤던 곳에 unto the place... between Beth-el and Hai' 그곳은 초목이 있는 작은 산이었을 것이다. 정상에는 바위 경사지들이 있고 그 아래에는 올리브 숲이 있었을 것이다. 그곳은 제단을 쌓기에 적합한 기슭이 있고 족장의 장막을 치기에 적합한 그늘을 제공해 주었을 것이다. 4절.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there Abram called on the name of the Lord 아브람은 처음으로 단을 쌓고 예배를 드린 그 현장에서 믿음과 경건에 대한 강한 열망을 느끼고 제단을 쌓았을 것이다. 그것은 애굽에서 저지른 자신의 잘못된 행위에 대한 부끄러움과 뉘우침을 고백하고 위험에서 건져주신 구원의 감사를 표현하기 위한 것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가족을 거느리고 가나안에 돌아와 하나님에 대한 충성을 갱신하고 약속의 축복들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희생 제물을 바치는 첫 번째 기회였다. 아브람은 이제 부유했지만 그가 소유한 가장 소중한 것은 그의 장막과 제단이었다. 우리가 실패할 때 주님은 용서하시고 회복시켜주실 준비를 하고 계시다. +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 요1 1:9 그러므로 우리가 죄를 고백하고 잘못을 인정하기만 하면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언제나 새로운 시작들의 연속이 될 것이다. Dead Sea ♣ QT 되새김 A 아브람이 애굽에서 나올 때 어떤 상태에 있었는가. 당신은 그 사실을 인정하는가(admit). B 아브람의 소유는 이방인의 부자와 비교했을 때 어떤 수준이었는가. 그 사실을 믿는가. 믿음은 말씀에 대한 하나님의 능력과 의지를 믿는 것이다(believe). C 아브람 일족의 여행은 어떻게 진행되었는가. 당신은 그 의미를 어떻게 생각하는가(consider). D 아브람이 처음으로 단을 쌓고 예배를 드린 그 현장에서 다시 제단을 쌓은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당신은 그것을 당신의 생활에 어떻게 적용하고 실천할 것인가(do). 2020-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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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티주석43 새로운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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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티주석42 믿음의 시험
- Abimelech, King of Gerar, returns Sarah to Abraham 믿음의 시험 12:10 그 땅에 기근이 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우거하려 하여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11 그가 애굽에 가까이 이를 때에 그 아내 사래더러 말하되 나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12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고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13 원컨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대로 인하여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인하여 보존하겠노라 하니라 14 아브람이 애굽에 이르렀을 때에 애굽 사람들이 그 여인의 심히 아리따움을 보았고 15 바로의 대신들도 그를 보고 바로 앞에 칭찬하므로 그 여인을 바로의 궁으로 취하여 들인지라 16 이에 바로가 그를 인하여 아브람을 후대하므로 아브람이 양과 소와 노비와 암 수 나귀와 약대를 얻었더라 17 여호와께서 아브람의 아내 사래의 연고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 18 바로가 아브람을 불러서 이르되 네가 어찌하여 나를 이렇게 대접하였느냐 네가 어찌하여 그를 네 아내라고 내게 고하지 아니하였느냐 19 네가 어찌 그를 누이라 하여 나로 그를 취하여 아내를 삼게 하였느냐 네 아내가 여기 있으니 이제 데려가라 하고 20 바로가 사람들에게 그의 일을 명하매 그들이 그 아내와 그 모든 소유를 보내었더라 창 12:10-20 3월 영국 서퍽 지역에 자엽꽃자두가 만발하고 가시자두꽃이 피어나지만 그는 봄 소식을 알아차리자라나는 조그만 지 못한다. 우울증 때문이다. ‘난 무가치한 인간이야.’ 생각의 블랙홀에 빠져들다 차를 몰고 나선다. ‘어느 다리가 가장 높고 효율적일까.’ 생을 끝내고 싶은 욕망에 휘둘려 차를 몰아가는데 문득 도로 중앙분리대에서 묘목들이 눈에 들어온다. 눈앞을 스치는 푸른 잎사귀와 엔진의 규칙적인 진동이 내면의 참담한 소음을 가라앉힌다. 나무들, 푸르름, 그리고 위로. 파국을 향해 폭주하던 소란이 멈추고 그는 차를 집으로 돌린다. 영국 박물학자이자 일러스트레이터인 그가 심각한 우울 증상을 겪으며 만난 자연의 위안에 대해 1년간 적어간 그의 일기다. ‘솔직히 말하겠다. 나는 지난 25년 내내 우울증 환자였다.’라고 첫 문장을 시작한 그는 ‘인생이 한없이 힘들게 느껴지고 찐득거리는 고통의 덩어리에 두들겨 맞아 슬퍼지는 날이면 초목이 무성한 장소와 그 안의 새 한 마리가 기분을 바꿔주고 마음을 치유해줄 수 있다.’라고 썼다. 과학적 근거도 있다. 2007년 마드리드대학교와 노르웨이생명대학교의 합동 연구서에 따르면 자연경관을 보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스나 정신적 피로가 해소돼 질병에서 회복되는 속도도 빨라진다고 한다. 식물이 바이러스나 박테리아 감염을 막기 위해 생성하는 ‘피톤치드’는 인간의 면역계와 순환계 등에도 일부 같은 작용을 한다. 자연과의 접촉은 세로토닌 분비를 촉진해 우울증을 완화한다. 우울한 사람에게 산림욕이 도움이 되는 이유다. 숲으로 산책을 나가 나뭇잎사귀나 새의 깃털, 조약돌 등을 주워오는 것도 기분 전환이 된다. ‘채집 황홀’이라는 것이다. 인간이 새로운 환경을 탐험하고 자원을 찾아 나서면 도파민이라는 뇌신경전달물질이 분비돼 일시적 흥분을 느끼게 한다. 저자는 ‘이러한 현상은 인간이 채집, 수렵 생활자였던 과거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3월 자살을 생각하던 그는 4월 정원에 찾아온 검은지빠귀 노랫소리를 듣는다. 서정적이고 덧없는 노랫소리가 머릿속에 현란한 색의 불꽃을 터뜨린다. 행복하다. 엑서터대학 연구 결과에 따르면 우울증을 완화하려면 주변 경관에 새가 있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한다. 그는 정원에서 점점 더 오랜 시간을 보낸다. ‘정원 일은 흙을 만지면서 하는 요가와도 같아서 만족스럽고 은근히 기분을 달래줄 뿐만 아니라 우울한 생각을 쫓아내는 데도 도움이 된다.’ 문득 하늘로 눈을 돌렸을 때 보이는 것이 있다. 올해의 첫 번째 제비다. 저 제비는 남아프리카에서 여기까지 여행해 왔다. 한 달 동안 9,000㎞를 이동했으니 하루에 약 300㎞를 날아온 셈이다. 저렇게 작은 새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위업이다. 그는 쓴다. ‘제비가 목적지에 도착했듯이 나 역시 또 한 번의 겨울을 이겨낸 것이다. 나는 안마당에 앉은 채 잠시 조용히 운다. 7월 나비들이 날아오르는 숲에서 강렬한 환희를 느끼며 "지금 이 기분을 붙잡아둘 수 있다면’ 하고 간절히 기도한다. ‘거실 창밖으로 새를 관찰한 것은 우울증을 달래는 데 도움이 되긴 했지만 그건 말하자면 진통제 한 알로 부러진 다리의 통증을 가라앉히려는 것과 같았다. 그에 비교하면 숲의 효력은 아편이나 마찬가지다.’ 지난 두 달간 창밖 풍경만으로 애써 ‘코로나 우울’을 달래 온 사람이라면 이 구절이 뼛속까지 깊이 이해가 될 것이다. 봄이 부른다. 주말엔 홀로 숲으로 나가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을 보며 기도나 아니면 찬송이나 불러볼까. 창 12:10-20 믿음의 시험 A test of faith 하나님의 말씀은 믿음으로 인도한다. 믿음은 축복으로 인도한다. 그리고 축복은 시험으로 인도한다. 최소한 세 가지 이유로 믿음은 항상 시험을 받게 된다. 먼저 우리의 믿음이 진실한지 아닌지를 증명하기 위해. 그 다음 우리의 믿음이 자라도록 돕기 위해. 마지막으로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도록 하기 위해. +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시험을 인하여 잠간 근심하게 되지 않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 너희 믿음의 시련이 불로 연단하여도 없어질 금보다 더 귀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실 때에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려 함이라 벧전 1:6-7 +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약 1:2-4 10절. 그 땅에 기근이 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우거하려 하여 그리로 내려갔으니 there was a famine... and Abram went down into Egypt 하나님이 아브람을 인도하신 바로 그 땅에 기근이 있었다는 것을 상상해보라. 우리가 하나님의 뜻 안에서 살지만 여전히 시련을 겪을 수 있다. 아브람은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에서 기근을 만나 시험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는 나그네 같은 그의 삶의 여행을 후회하거나 약속의 땅을 멸시하지 않았다. 그는 잠시 이웃 나라로 피했다. + 저희가 나온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저희가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러므로 하나님이 저희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 아니하시고 저희를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히 11:15-16 '아브람 Abram' 아브람은 나중 아브라함(Abraham)으로 바뀐다. 그는 유대인과 아랍인의 조상이 되었다. 그는 고대 수메르(Sumer)의 우르(Ur)를 떠나 시리아(Syria)의 하란(Haran)으로 여행했다. 그는 하나님이 그에게 약속하신 가나안(Canaan)으로 이주했다. 그의 자손이 거주할 땅이었다. 그는 175세까지 살았다. 그는 성경에서 하나님의 부르심과 명령을 순종했기 때문에 믿음의 아버지(the father of faith)로 기술됐다. 아브라함의 가장 큰 시험은 모리아 산에서 아들 이삭을 바치는 것에 대한 순종이었다. +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사자가 가라사대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아무 일도 그에게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창 22:2, 12 '애굽 Egypt' 고대 이집트 문명은 나일 강 하류에서 번성한 문명이었으며, 최전성기인 기원전 15세기에는 나일 강 삼각주에서 제벨 바르카까지 세력을 뻗쳤으며 이 시기에는 에티오피아와도 교류하기까지 했다. 기원전 3200년부터 기원전 332년까지 3천 년 동안 존재했으며 알렉산더 대왕의 점령으로 그 막을 내리게 되었다. 이집트는 원조 수로(水路) 제국으로서 관개 산업에 의존하였던 문명이다. 이집트 영토의 대부분은 북아프리카에 위치해 있으나 시나이 반도는 서남아시아에 있다. 이 나라는 지중해와 홍해에 해안선이 있으며 서쪽으로는 리비아와 남쪽으로는 수단 그리고 동쪽으로는 가자 지방과 이스라엘을 마주보고 있다. 고대 이집트 문명은 흔히 상이집트와 하이집트로 나뉜다. 나일 강은 남쪽에서부터 지중해를 향해 북쪽을 향해 흐른다. 이집트의 인구는 대부분 나일 강을 둘러싸고 집중되어 있다. 이 강은 석기 시대와 나카다 문화 시대로부터 근근이 이어져온 이집트 문화의 동맥이다. 때문에 헤로도토스는 이집트를 ‘나일 강의 선물’이라고 부르기도 하였다. 이집트 지도자 파라오(Pharaoh)는 ‘큰 집’을 뜻하는데 살아 성육신한 신으로 추앙받았고 그의 말이 법이었다. 그러므로 이집트는 어떤 성문법이 없었기 때문에 모세 율법(Mosaic Law)의 독창성이 인정을 받고 있다. 이집트는 구약 성서 기록 전체에 걸쳐 이스라엘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요소였다. 11절. 나 알기에 그대는 아리따운 여인이라 I know that thou art a fair woman to look upon 아브람의 아내 사래는 용모가 뛰어났던 모양이다. 게다가 혈색이 좋지 않은 애굽 여인들과 비교했을 때 그녀의 모습은 더욱 돋보였던 것 같다. 아브람은 이방 땅에서 그녀의 미모 때문에 자신의 안전이 위협받게 될 것을 염려했다. 그래서 그는 말했다. + 애굽 사람이 그대를 볼 때에 이르기를 이는 그의 아내라 하고 나는 죽이고 그대는 살리리니 원컨대 그대는 나의 누이라 하라 그리하면 내가 그대로 인하여 안전하고 내 목숨이 그대로 인하여 보존하겠노라 하니라 창 12:12-13 아브람의 사래에 대한 권면은 말은 맞지만 그녀가 아내가 아니라 누이라고 속이는 행위였다. 그의 행위는 비난받을 일이었고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그의 성격과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보다 세속적인 정략에 더 의존하는 행위였다. 그리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보호를 받는 신분임에도 그는 자신의 생명 보존을 위해 자신도 죄를 범했을 뿐만 아니라 사래도 죄를 짓도록 유혹했다. 14절. 아브람이 애굽에 이르렀을 때에 when Abram was come into Egypt 아브람이 애굽에 당도하자 애굽 사람들이 그 여인의 심히 아리따움을 보았고 바로의 대신들도 그를 보고 바로 앞에 칭찬하므로 그 여인을 바로의 궁으로 취하여 들였다. 동방의 왕들은 좋아하는 미혼의 여인을 후궁으로 들이는 특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바로가 그를 인하여 아브람을 후대해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약대까지 주었다. 17절. 여호와께서... 바로와 그 집에 큰 재앙을 내리신지라 the LORD plagued Pharaoh and his house with great plagues 하나님이 간섭하지 않으셨다면 아브람은 애굽에 눌러 앉아 살았을 것이고 하나님의 약속을 잊어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주권은 아브람의 죄를 능가했다. 성경은 말씀한다. + 이르시기를 내가 가나안 땅을 네게 주어 너희 기업의 지경이 되게 하리라 하셨도다 때에 저희 인수가 적어 매우 영성하며 그 땅에 객이 되어 이 족속에게서 저 족속에게로 이 나라에서 다른 민족에게로 유리하였도다 사람이 그들을 해하기를 용납지 아니하시고 그들의 연고로 열왕을 꾸짖어 이르시기를 나의 기름 부은 자를 만지지 말며 나의 선지자를 상하지 말라 하셨도다 시 105:11-15 하나님은 지금도 여전히 그의 백성을 종종 꾸짖으시고 그들을 대적하는 적들을 통해 이 세상이 그들의 영원한 안식처가 아님을 상기시켜 주신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언제나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 +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롬 8:30-31 Nahal Paran, Negev ♣ QT 되새김 A 아브람이 하나님이 약속하신 땅에 이르렀을 때 무엇을 겪게 되었는가. 당신은 그 사실을 인정하는가(admit). B 아브람은 그것을 어떻게 대처했는가. 그 사실을 믿는가. 믿음은 말씀에 대한 하나님의 능력과 의지를 믿는 것이다(believe). C 아브람은 애굽에 이르기 전 사래에게 어떤 권면을 했는가. 당신은 그 의미를 어떻게 생각하는가(consider). D 애굽에서 하나님의 간섭이 없었다면 아브람은 어떻게 되었을까. 당신은 그것을 당신의 생활에 어떻게 적용하고 실천할 것인가(do). 2020-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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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티주석42 믿음의 시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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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티주석41 아브람의 소명
- The Caravan of Abraham, watercolor by James Tissot, before 1903 (Jewish Museum, New York) 아브람의 소명 12:1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 4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좇아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그 나이 칠십오 세였더라 5 아브람이 그 아내 사래와 조카 롯과 하란에서 모은 모든 소유와 얻은 사람들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6 아브람이 그 땅을 통과하여 세겜 땅 모레 상수리나무에 이르니 그 때에 가나안 사람이 그 땅에 거하였더라 7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가라사대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하신지라 그가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그곳에 단을 쌓고 8 거기서 벧엘 동편 산으로 옮겨 장막을 치니 서는 벧엘이요 동은 아이라 그가 그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 9 점점 남방으로 옮겨 갔더라 창 12:1-9 풀잎에 맺혀 글썽이는 은혜 방울 위에 뛰어내리는 믿음 위에 포개어지는 말씀. 그리고 아득한 허공. 거기에 떠도는 구름과 소나무 가지에 매달리는 소망. 믿음들이 곤두박질하는 바위 위 풀잎에 글썽이며 맺혀 있는 은혜 방울들. 말씀에 나오는 세계는 소리 정보나 문자 정보로 가득 차 있지 않다. 비어 있는 편에 가깝다.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별다른 노력도 필요 없다. 그저 이 말씀을 천천히 따라 읽으면 된다. 따라 읽다 보면 금방 알아차릴 수 있듯이 말씀의 신비한 맛은 의미 즉 하나님의 뜻에 있다. 말씀은 지상의 가장 낮은 곳인 풀잎의 은혜 방울 같은 성경 구절에서 시작한다. 그다음에는 우리 마음속 소망과 하늘 순으로 끝 모르게 상승한다. 말씀은 잔잔해 보이지만 상승의 속도는 놀랍다. 끝까지 올라간 다음에 말씀은 다시 구름을 거쳐 소망과 믿음으로 마음속 나에게 하강한다. 신자는 이 상승과 하강을 거쳐 지구의 저만치를 주유하고 온 듯한 황홀을 느낀다. 우리의 정신은 말씀 따라 먼 여행을 하고 다시 우리에게로 돌아온다. 다시 돌아온 우리는 이전의 우리와는 다르다. 말씀을 통한 성령으로 거듭났기 때문이다. 눈을 감고 즐겨보자. 은혜 방울 같은 나는 그리고 우리는 정말 누구인가. 그 뒤 우리는 다윗과 골리앗 사건에서 역경과 결점의 힘을 느끼듯 하나님의 예정과 선택을 역시 실제 삶을 통해 체험할 수 있다. 그렇듯 하나님이 말씀으로 아브람을 부르셨다. 창 12:1-9 아브람을 부르심 Call to Abram 1절.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the Lord had said unto Abram 그분을 구하지 않는 자들을 종종 찾으시는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이적으로 자신을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셨다. 아브람의 회심(the conversion of Abraham)은 성경 역사에서 아주 놀라운 일들 가운데 하나이다. 아브람은 하나님 말씀을 믿고 순종했다. 그 사실은 신약성서에서 그의 믿음의 뛰어난 실제 본보기로 종종 언급되고 있다. +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 쌔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히 11:8 부르심의 교리가 중요한 이유는 복음을 통한 부르심이 없이는 우리가 구원을 받을 수 없다고 말씀하기 때문이다. +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롬 10:14 이 부르심은 두 가지 명령으로 이루어져 있다. 첫 번째 명령은 아브람이 그 땅을 떠나는 것이었다. 이 떠남은 세 가지에 대한 것이다. 먼저 본토 그 지방에서(out of thy country) 떠나고 그 다음 친척을(from thy kindred) 떠나고 마지막으로 아비 집(from thy father’s house)에서 떠나는 것이었다. 성경은 그의 가족이 우상숭배를 했다고 기록한다. + 여호수아가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에 옛적에 너희 조상들 곧 아브라함의 아비 나홀의 아비 데라가 강 저편에 거하여 다른 신들을 섬겼으나 수 24:2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unto a land that I will shew thee' 그러나 아브람은 정확히 어디로 가야 하는지는 몰랐다. 다만 하나님이 지시할 땅으로 또는 보여주실 땅으로 가야 될 뿐이었다. 그 명령은 아브람 편에서의 믿음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그가 떠난다면 하나님이 그에게 이루어주실 2절의 세 가지 약속이 수반되는 것이었다. 큰 민족을(a great nation) 이루게 해주시고 복을 주시고(bless thee) 이름을 창대케(thy name great) 해주신다는 약속이다. 그래서 2절의 마지막 말씀 ‘너는 복의 근원이 될찌라’는 ‘너는 축복이 될찌라’(thou shalt be a blessing)로 번역되어야 할 것이다. 확실히 오늘날 우리에게 이 말씀의 약속이 이루어졌다. + 너희가 그리스도께 속한 자면 곧 아브라함의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갈 3:29 아브람이 누구에게(to whom) 어떻게(how) 축복이 될지를 3절에서 하나님이 설명해 주신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를 인하여 복을 얻을 것이니라 하신지라(I will bless them that bless thee, and curse him that curseth thee: and in thee shall all families of the earth be blessed).' 4절. 하란을 떠날 때에 when he departed out of Haran 아브람의 순종의 첫 번째 행위가 하란에서 떠나는 것이었다. 창세기는 두 주요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다. 첫 부분은 11장까지 인류의 역사를 다룬다. 나머지 39장은 아브라함의 가족을 다룬다. 이제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은 우리의 관심을 바벨 탑 심판의 사건으로 흩어진 반역적인 인류에서 궁극적으로 세상의 구세주가 오실 한 가족으로 돌리신다. 5절. 가려고 떠나서 마침내 가나안 땅에 들어갔더라 into the land of Canaan ... they came 아브람은 아내와 고아 조카 롯을 데리고 목적지 가나안 땅에 무사히 도착했다. 이렇게 아브람의 자손의 소유가 될 땅을 보여주시겠다는 하나님의 약속이 잘 이루어졌다. 7절. 내가 이 땅을 네 자손에게 주리라 Unto thy seed will I give this land 하나님은 아브람 개인을 위해서만 약속하신 것이 아니라 더 높은 생각을 가지지고 미래 세대를 위하여 약속하신 것이다. 아브람의 자손이 차지할 땅은 특별한 백성을 위한 것이었다. 그 땅은 하나님을 아는 자손의 씨앗이 모든 인류를 위해 뿌려질 땅이었다. 온 세상을 위해 하나님의 지혜로 계획된 하나님의 계시의 요람으로 선택된 땅이었다. '여호와를 위하여 그곳에 단을 쌓고 there builded he an altar unto the Lord' 이 엄숙한 헌신의 행위로 아브람은 자신의 신앙을 분명하게 고백했고 참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를 드렸고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자신의 신앙을 선포했다. 하나님의 말씀은 믿음으로 인도하고 믿음은 순종으로 안도하고 순종은 축복으로 인도한다. 당신이 믿음으로 살 때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한 결단을 내리게 된다. +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롬 10:17 그리고 당신은 오로지 하나님의 영광만을 구하게 된다. + 그가 백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롬 4:19-20 참된 믿음은 서두르지 않고 기꺼이 기다린다. + 그러므로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가 한 돌을 시온에 두어 기초를 삼았노니 곧 시험한 돌이요 귀하고 견고한 기초 돌이라 그것을 믿는 자는 급절하게(make haste) 되지 아니하리로다 사 28:16 + 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히 6:12 믿음은 어떤 상황이나 결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하나님께 순종하고 다른 사람의 행동이나 말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 믿음으로 저희가 홍해를 육지 같이 건넜으나 애굽 사람들은 이것을 시험하다가 빠져 죽었으며 믿음으로 칠일 동안 여리고를 두루 다니매 성이 무너졌으며 히 11;29-30 Ein Avdat in the Zin Valley in the Negev ♣ QT 되새김 A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때 아브람은 어떻게 했는가. 당신은 그 사실을 인정하는가(admit). B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했을 때 아브람에게 요구되는 것은 무엇인가. 그 사실을 믿는가. 믿음은 말씀에 대한 하나님의 능력과 의지를 믿는 것이다(believe). C 아브람이 누구에게(to whom) 어떻게(how) 축복이 될지를 하나님이 어떻게 설명해 주시는가. 당신은 그 의미를 어떻게 생각하는가(consider). D 가나안에 들어가 제단을 쌓은 아브람의 행위가 무엇을 의미했는가. 당신은 그것을 당신의 생활에 어떻게 적용하고 실천할 것인가(do). 2020-0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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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티주석41 아브람의 소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