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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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더굳뉴스] 리틀메시지 _욥기Job
    욥의 정원 욥기Job는 대부분 시로 이루어져 있지만 이야기는 아니다. 구약성경에서 에스겔은 그의 책 14장 14절에서 20절까지에서 욥은 실제 장소에서 실제 시련들을 겪은 실제 인물이었다고 말한다. 신약성경은 야고보서 5장 11절에서 시련을 겪을 때 신앙을 지키는 인내자의 본보기로 욥을 들었다. 그는 하나님을 믿는 자신의 신앙을 버리지 않았다. 욥기는 왜 의인이 고난을 받는가라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런 시가 있다. 난 기도했다 _작자 미상 나는 하나님에게 가장 강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내가 원하는 모든 걸 이룰 수 있도록 하지만 하나님은 나를 약하게 만들었다 겸손해지는 법을 배우도록 나는 하나님에게 건강을 부탁했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도록 하지만 하나님은 내게 허약함을 주었다 더 의미 있는 일을 하도록 나는 부자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행복할 수 있도록 하지만 난 가난을 선물받았다 지혜로운 사람이 되도록 나는 재능을 달라고 기도했다 그래서 사람들의 찬사를 받을 수 있도록 하지만 난 열등감을 선물받았다 하나님의 필요성을 느끼도록 나는 하나님에게 모든 것을 부탁했다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하지만 하나님은 내게 삶을 선물했다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도록 나는 내가 기도한 것을 하나도 받지 못했지만 내게 필요한 모든 걸 선물 받았다 내가 작은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내 무언의 기도를 다 들어 주셨다 모든 사람들 중에서 나는 가장 축복받은 자이다 작자 미상의 시인은 하나님은 내 무언의 기도를 다 들어 주셨기에 모든 사람들 중에서 나는 가장 축복받은 자라고 노래한다. 이 시인처럼 욥도 그의 모든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흔들리지 않는다. 욥기에는 세 만남이 있다. 첫째 하나님과 사탄의 만남이 있다. 둘째 욥과 친구들의 만남이 있다. 셋째 하나님과 욥의 만남이 있다. 그의 친구들은 욥이 고난을 받는 것은 죄 때문이라고 납득시키려 애를 쓴다. 욥은 자신의 성실과 믿음을 타협하게 만드는 어떤 시도나 말도 거부했다. 화를 내기는 했지만 욥은 언제나 진실을 말했다. 그러나 그의 친구들은 그렇지 못했다. 욥기에는 많은 비유들이 사용되고 있다. 그 비유들은 자연 세계의 삶과 죽음과 전능하신 하나님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욥의 고난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의미를 깨우치게 해 주는 아주 귀중한 교훈이다. 2024-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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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5
  • [더굳뉴스] 리틀메시지 _에스더Esther
    에스더Esther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한번도 언급되지 않지만 모든 사건에 하나님의 섭리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페르시아인들은 주전 539년 바빌론을 정복했다. 에스더의 사건들은 수산에서 일어났다. 그곳에 왕의 겨울 궁전이 있었다. 에스더의 아하수에로Ahasuerus라는 명칭은 이집트의 파라오가 왕의 대명사인 것처럼 페르시아의 최고 통치자의 칭호였다. 그러므로 에스더를 왕비로 삼은 페르시아의 아하수에로는 크세르크세스 1세였을 것이다. 에스더서의 사건들은 크세르크세스 1세 재위 3년부터 12년까지 10년 동안에 일어난 일들이다. 성경에서 여성의 이름을 따른 책은 에스더와 룻뿐이다. 룻은 유대인과 결혼한 이방 여인이었다. 반면에 에스더는 이방인과 결혼한 유대 여인이었다. 둘 다 신앙과 용기의 여인들이었다. 둘 다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룻은 다윗의 조상이 되는 아들을 낳았다. 에스더는 유대인을 전부 죽이려는 원수를 막았다. 에스더가 그 일의 결심을 위해 말한 한마디는 죽으면 죽으리라였다. 이런 시가 있다. 가지가 담을 넘을 때 _정끝별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이를테면 수양의 늘어진 가지가 담을 넘을 때 그건 수양 가지만의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얼굴 한번 못 마주친 애먼 뿌리와 잠시 살 붙였다 적막히 손을 터는 꽃과 잎이 혼연일체 믿어주지 않았다면 가지 혼자서는 한없이 떨기만 했을 것이다 한 닷새 내리고 내리던 고집 센 비가 아니었으면 밤새 정분만 쌓던 도리 없는 폭설이 아니었으면 담을 넘는다는 게 가지에게는 그리 신명 나는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가지의 마음을 머뭇 세우고 담 밖을 가둬두는 저 금단의 담이 아니었으면 담의 몸을 가로지르고 담의 정수리를 타 넘어 담을 열 수 있다는 걸 수양의 늘어진 가지는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목련 가지라든가 감나무 가지라든가 줄장미 줄기라든가 담쟁이 줄기라든가 가지가 담을 넘을 때 가지에게 담은 무명에 획을 긋는 도박이자 도반이었을 것이다 사람은 새로운 영역과 미래로의 진입을 위해 첫발을 떼는 순간 두렵고 떨리는 마음과 희생을 각오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렇듯 가지가 담을 넘어서는 데에도 용기가 있기 때문에 가능할 것이다. 그것을 믿음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믿음이 없다면 어떻게 한낱 가지나 줄기가 이 세상의 단단한 담과 깊은 절망의 절벽을 건너갈 수 있겠는가. 에스더서의 주요 교훈은 한낱 가지나 줄기도 담을 넘는 데 용기가 필요한 것처럼 하나님의 뜻을 위해 죽음을 각오한 용기가 필요할 때가 있다는 것이다. 세상 나라들의 주권자는 하나님이시므로 주의 백성은 주의 뜻에 복종하고 따라야 한다. 2024-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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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27
  • [더굳뉴스] 리틀메시지 _느헤미야Nehemiah
    짐실은 노새 느헤미야Nehemiah는 그 공동체를 이어받아 외적 안정을 확보했다. 반면 에스라는 바빌론에서 돌아온 새 공동체의 영적 안정을 확립했다. 그는 아버지가 하가랴이고 형제가 하나니라는 것 말고는 알려진 게 없다. 아마 그의 할아버지는 예루살렘이 멸망했을 때 바빌론으로 끌려온 포로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페르시아에서 태어났을 것이다. 느헤미야서의 생생한 묘사는 그의 개인 일기에 근거한 자료였을 것이다. 그는 아닥사스다 왕의 술 관리관이었을 때 예루살렘 형편이 아주 어렵다는 말을 들었다. 그는 예루살렘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리고 얼마 뒤 그는 왕의 술 관리관이 되었다. 이런 시가 있다. 기도 _라반드라나트 타고르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위험에 처해도 두려워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게 하소서 고통을 멎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고통을 이겨 낼 가슴을 달라고 기도하게 하소서 생의 싸움터에서 함께 싸울 동료를 보내달라고 기도하는 대신 스스로의 힘을 갖게 해달라고 기도하게 하소서 두려움 속에서 구원을 갈망하기보다는 스스로 자유를 찾을 인내심을 달라고 기도하게 하소서 내 자신이 성공에서만 신의 자비를 느끼는 겁쟁이가 되지 않도록 하시고 나의 실패에서도 신의 손길을 느끼게 하소서 그는 유다 총독으로 임명받아 주전 445년 성벽을 재건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부임했다. 하나님의 소명을 성취하기 위한 그의 깊은 신앙은 그의 기도와 강한 확신으로 드러난다. 그 땅에 회복이 이어졌지만 유대 민족은 시련과 비난의 시기를 겪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고 계셨다. 느헤미야의 강조는 하나님을 신뢰하라는 것이었다. 2024-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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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20
  • [더굳뉴스] 리틀메시지 _에스라Ezra
    솔로몬의 왕궁건설 에스라Ezra는 역대기하가 끝나는 곳에서 시작한다. 이스라엘을 정복한 바빌론이 주전 587년에서 586년에 많은 백성을 잡아가고 도시와 성전을 파괴했다. 주전 538년 페르시아 왕 고레스가 유대인들이 그들의 땅으로 돌아가 성전 재건을 허락하는 조서를 공포했다. 그때 스룹바벨의 인솔로 5만여 명이 돌아왔다. 바빌론 포로 생활 70년이 끝났다. 어려움이 많았고 지체되기는 했지만 주전 515년 성전이 완성되었다. 이런 시가 있다. 담쟁이 _도종환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 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율법학자 에스라는 주전 458년 2천여 명의 유대인과 예루살렘에 왔다. 에스라의 주요한 일은 율법의 연구와 해석이었다. 그는 자신의 일을 통해 새 시대 공동체의 영적 지도자가 되었다. 바빌론 포로에서 돌아와 성전을 재건하는 이스라엘 백성은 도종환 시인이 노래하는 담쟁이 잎 같았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가 담쟁이 수 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가는 담쟁이에게 절망의 벽은 없어 보인다. 그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담긴 성경을 믿음으로 붙잡고 성전을 재건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절망의 벽은 없어 보였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독려하는 지도자 에스라가 없고 믿음의 동지적 연대가 없었다면 이스라엘 백성은 그 척박하고 방해가 많은 땅에서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2024-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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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3
  • [더굳뉴스] 리틀메시지_역대기하2Chronicles
    바벨론 포로들 역대기하2Chronicles는 다윗 자손의 통치를 크게 다룬다. 그 기간은 솔로몬 시대부터 주전 586년 시드기야 치하 예루살렘 함락까지다. 역대기서 전체에 걸쳐 남 왕국 유다를 집중적으로 강조한다. 남 왕국 유다의 흥망성쇠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지 안지키는지에 따라 조명이 되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께 신실하지 못하고 그들의 신앙의 의무에 태만해서 망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고향을 떠나 머나먼 바빌론으로 끌려갔다. 이런 시가 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_이상화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자욱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를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쁘게나 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매던 그 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 다오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웃어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지폈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고 오는 봄은 누구도 빼앗을 수 없다. 그것이 천지만물을 들썩이게 하는 봄의 풋내이고 봄의 푸른 웃음이다. 그러나 들을 빼앗긴 자에게 오는 봄은 절박하다. 봄조차 빼앗기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봄의 답답함이고 봄의 푸른 설움이다. 들의 봄과 인간의 봄 자연의 봄과 시대의 봄은 이렇게 갈등한다. 온몸에 햇살을 받고 이들을 발목이 저리도록 실컷 밟아보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이야말로 내 나라 내 땅에 대한 지극한 사랑의 표현이다. 떠나온 길이 멀면 돌아갈 길도 멀다. 바빌론의 유대인들이 그랬을 것이다. 역대기하 마지막에 유대인의 예루살렘 귀환을 허락하는 고레스의 조서가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의 백성이 믿음의 불성실로 하나님의 징벌을 받아 고향을 떠나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하나님의 은혜로 그들의 고향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2024-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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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06
  • [더굳뉴스] 리틀메시지_ 역대기상1Chronicles
    바빌로니아 큰 물가 마을 역대기상1Chronicles과 역대기하는 원래 히브리어 원문에서 한 권이었다. 히브리어의 구약 성경을 그리스어로 번역한 사람들이 그것을 두 권으로 나누었다. 본래의 제목은 뒤에 남은 일들이라는 뜻이었다. 그것은 사무엘서와 열왕기서에 들어있지 않은 작은 이야기들이 들어있기 때문이었다. 마찬가지로 영어 제목 '크로니클스Chronicles'도 히브리어 제목처럼 '일상의 일들'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이것은 역대기서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 특별히 왕들의 생활들에서 일상의 중요한 일들을 차례대로 이야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초점은 다윗과 유다 왕국에 있다. 그리고 그 관점은 제사장들의 것이다. 유대 민족은 신앙의 불성실로 망해 포로가 되어 예루살렘에서 바빌론으로 끌려갔다. 이런 시가 있다. 바빌론 강가에서 _보니 엠 바빌론 강가에 우리는 앉아서 우리는 울었어요 시온을 생각하며 바빌론 강가에 우리는 앉아서 우리는 울었어요 시온을 생각하며 사악한 무리들이 우리를 포로로 잡아왔어요 그리고 우리에게 노래를 부르라고 했지요 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주의 노래를 부를 수 있나요 이런 낯선 땅에서 사악한 무리들이 우리를 포로로 잡아왔어요 그리고 우리에게 노래를 부르라고 했지요 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주의 노래를 부를 수 있나요 이런 낯선 땅에서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말과 우리 가슴에서의 명상을 여기 오늘밤 그대 앞에서 받아주어요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말과 우리 가슴에서의 명상을 여기 오늘밤 그대 앞에서 받아주어요 바빌론 강가에 우리는 앉아서 우리는 울었어요 시온을 생각하며 바빌론 강가에 우리는 앉아서 우리는 울었어요 시온을 생각하며 바빌론 강가에 바빌론의 어두운 눈물 우리는 앉아서 당신은 노래를 불렀죠 우리는 울었어요 사랑의 노래를 불러요 시온을 생각하며 바빌론 강가에 바빌론의 거친 작은 조각들 우리는 앉아서 당신은 사람들이 우는 것을 듣지요 우리는 울었어요 그들은 그들의 하나님이 필요해요 시온을 생각할 때 오 힘을 가져요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 남쪽 약 110km 떨어져 있는 유프라테스 강가에 바빌론이란 고대 국가가 번성했었다. 바빌론이 유대 왕국을 정복하여 많은 횡포를 저질렀다. '바빌론 강가에서'라는 노래는 바빌론에 정복당한 유대인들의 심정을 노래한 메시지가 그 내용이다. 이 노래는 시편 137편을 토대로 작사 작곡을 하였다. 바빌론 포로생활 때 유대인들의 슬픔과 시온의 그리움을 노래한 시가 시편 137편이다. 이 노래를 부른 가수들은 여성 3인과 남성 1인으로 구성된 4인조 보컬 '보니 엠'이다. 그들은 자메이카 출신의 영국 가수들이다. 그들은 악기를 전혀 다루지 않고 순수한 보컬만으로 서인도 제도의 특유한 창법을 구사하는 게 특징이다. 그들은 1978년 이 노래를 불러 세계적인 인기를 얻었다. 역대기상과 역대기하는 바빌론 포로 이후 이스라엘 땅에 돌아온 유대인들에게 중요했다. 그들은 다윗의 신앙 본보기가 필요했고 성전에 대한 강조는 그것을 재건할 때 필요했다. 역대기서는 변화와 어려움의 시기에 성전을 재건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에게 격려와 힘을 주었다. 그것은 다윗의 신앙과 솔로몬의 지혜와 성전 건축의 영광스러운 역사를 통해서였다. 2024-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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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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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26_ 웅장한 교회
    View of saint Peter basilica from a roof 웅장한 교회 로스앤젤레스는 연말연시이면서도 햇살은 사뭇 따사로울 것이다. 지중해성 기후의 바람을 가르며 웃통을 훤히 드러낸 채 길거리를 오토바이로 질주하는 염치없는 사람도 더러 있을 것이다. 오아시스로 변한 그 사막의 도시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철골과 유리로 외관을 꾸미고 안에는 분수가 흐르는 크리스털 교회가 있다. 주일이면 옛날 코미디언 김희갑을 닮은 목사가 함박웃음을 머금고 뜨거운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강단에 들어선다. 주일날 그곳은 활기와 왁자함과 은은함이 한데 어울려 성공의 믿음을 자아낸다. Christian Chi-Rho on a 5th-century marble table, Quiroga, Galicia. 콘스탄틴 치하에서 로마는 그리스도교 국이 됐다.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짜 맞춘 문자 PX는 콘스탄틴 군대의 승리 군기가 됐다. 초대 교인들이 대체로 군인이 되기를 거부했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고 입에 침을 튀길 사람도 있을게다. 그 대답은 사상이 변했다는 것이다. 콘스탄틴 황제가 그리스도인을 보호하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신자는 콘스탄틴이 승리하기를 오매불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도움을 자처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마침내 모든 적이 궤멸 됐을 때 그리스도인들은 콘스탄틴을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라며 두 손 들고 환호성을 질렀다. 콘스탄틴은 직.간접으로 교회를 위해 많은 공헌을 했다. 직접 적으로 그는 옛날에 이교도 사제들이 누리던 특권들을 교회 목사들에게 주었다. 교회는 이교도사원에 버금가는 권리를 소유하게 됐다. 그리스도교의 주일은 공식적인 공휴일이 됐다. 그리스도교 감독은 높은 예우를 받았다. 감독은 원로원 의원처럼 정부의 대형마차를 타고 여행할 수 있었다. 박해 때 파괴된 교회는 이교도의 경비로 재건됐다. 콘스탄틴 황제 자신도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세인트 소피아(거룩한 지혜)성당을 비롯하여 새 교회당을 많이 건축했다. 당시 교회를 바실리카라고 했다. 바실리카는 큰 교회당을 뜻한다. 지금 옆에 나와 있는 그림은 로마에 있는 성 베드로 대성당(바실리카)의 평면도이다. 반원형에 표시되어있는 C는 앱시스 라고 한다. 이곳에는 성찬 상 뒤에 감독과 성직자가 앉았다. 성찬 상은 그 위에서 떡과 포도주의 형식으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성부 하나님께 희생 제물로 바쳐진다는 믿음이 자라면서 제단으로 통하게 되었다. F는 날개 모양으로 양쪽으로 약간 삐져나와 있는데 그것은 십자가 형태를 암시하며 교차랑이라고 한다. A는 교회를 배에 비유 한 데서 비롯된 네이브라고 하는데 이를테면 본당이다. 이것은 성가대를 위한 통로였다. 사람들은 B라고 표시된 낭하에 앉았다. 우리나라의 초기 기역 자(r) 예배당에서 마냥 남자와 여자가 양편에 따로 갈라 앉았다. D는 뚜껑이 있는 널따란 홀인레 배랑이라고 한다. E는 뚜껑이 없는 홀인데 노천 식인 것은 풀에 빗물을 받기 위한 것이다. 날씨에 따라 예비 신자들이 이들 뜰에 모였다. 이들 초 신자는 신앙이 아직 어려서 성만찬과 교회예배에 참석할 수가 없었다. 바실리카는 아주 아름답고 화려하고 웅장했다. 제롬은 이렇게 툴툴거렸다. “바실리카 대 예배당은 엄청난 경비로 건축된다. 지붕은 금으로 장식되고 사이사이에 대리석이 박혔다. 한때 불에 던져졌던 그리스도인과 성경이 이제는 자주 옷을 입고 금과 보석으로 장식되고 있다.” 2020-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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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야기 세계 교회사
    2020-11-07
  • 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25_ 십자가를 짊어진 로마
    성모 마리아에게 콘스탄티노플을 봉헌하는 콘스탄티누스, 하기아 소피아의 모자이크 십자가를 짊어진 로마 사람은 줄어들었지만, 거리는 캐롤로 술렁인다. 사람들은 종종걸음으로 바삐 이곳저곳을 오간다. 소련에서는 상점마다 사람들이 즐비하게 줄을 서고 붉은 용의 몸둥아리는 조각조각 흩어졌다. 제주도에서 시끌벅적하게 노대통령과 우정이니 뭐니 하며 돈을 우려내던 고르비도 조만간 구하기 힘든 영광 굴비마냥 역사 속으로 묻힐 모양이다. 콘스탄틴은 그리스도인들의 섧디섧은 박해를 종식시켰다. 콘스탄틴은 근 21년간을 로마황제직에서 몽기작거린 디오클레티안(재위 기간 AD 2백84년~3백5년)을 이은 황제였다. 콘스탄틴은 그냥 권좌에 덜렁 앉았던 게 아니라 오랜 각고의 투쟁 끝에 황제가 될 수 있었다. 그는 애시당초 그리스도교 신자는 아니었다. 디오클레티안은 한 사람이 통치하기에는 로마제국이 너무 방대하다고 생각을 했다. 그는 생각을 실천에 옮기는 황제였다. 그는 홍당무를 동강내듯 분할 해 부목사같은 보조 황제들에게 하나씩 나눠줬다. 당회장 목사 같은 디오클레티안 황제가 늙고 병들고 은퇴를 고려하게 됐을 때 보조 황제들끼리 물고 뜯는 싸움이 벌어졌다. 그 애비에 그 아들이라고 보조 황제의 아들들끼리도 싸움을 이어받았다. 콘스탄틴은 한 보조 황제의 아들이었고 막세티우스는 다른 보조 황제의 아들이었다. 콘스탄틴은 지금의 영국인 브리튼과 지금의 프랑스인 골 지역을 장악하고 있었다. 막센티우스는 로마와 이태리를 꽉 쥐고 있었다. 콘스탄틴이 로마로 진군했을 때 어떤 표징을 하늘에서 보았다고 한다. 해가 뉘였거리는 석양 무렵이었는데 태양 위에 빛으로 된 십자가가 보였다. 그리고 그 십자가에는 ‘이 표징으로 네가 이기리라’는 말씀이 새겨져 있었다고 한다. 어쨌든 교회는 콘스탄틴이 하나님은 분명히 아주 강력한 신이라고 믿지 않을 수 없을 만큼 로마제국 내에서 당시 아주 막강했다. 콘스탄틴은 이 하나님을 승리의 기대를 안고 섬긴다면 승리는 따논 당상이 아니겠는가 하며 그는 무릎을 쳤다. 콘스탄틴의 생각과 믿음에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었던지 막센티우스의 군대는 후퇴하는 것까지는 좋았는데 너무 서두른 게 화근이었다. 티베르 강 위에 설치된 배로 만든 부교들이 그만 무너지고 말았다. 6.25 당시 한강 다리 꼴이었다. 군사와 말과 수레가 강과 부교 사이에 뒤엉켜 아비규환을 이루는 와중에 막센티우스 자신도 익사하고 말았다. 주후 3백12년에 일어난 이 사건을 ‘밀비안 다리의 전투’라고 한다. 콘스탄티누스 1세의 조각상 콘스탄틴이 이태리를 획득했다. 그러나 그가 로마제국의 유일한 황제가 되는 데는 다른 라이벌들과의 힘겨운 투쟁을 십 년 이상이나 겪어야 했다. 콘스탄틴이 힘이 미치는 곳마다 그리스도인의 박해가 중단됐다. 이제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콘스탄틴의 손에 로마제국이 완전히 들어왔을 때 그리스도교는 제국에서 가장 많은 혜택을 누리는 종교가 되었다. 한 로마 총독의 명령에 십자가에 못 박힌 나사렛의 예수가 로마제국의 구세주로 숭배를 받기에 이르렀다. 불로 시련을 받았던 교회가 이제는 호의와 혜택으로 시련을 받았다. Anastasis Pio Christiano Inv31525 당대의 동전이 그 변화를 실감 나게 보여준다. 이교도제국의 동전마다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짜 맞춘 문자 PX가 으레 덧붙여 새겨지게 되었다. 세상은 아무튼 오래 살고 볼 일이었다. 2020-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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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야기 세계 교회사
    2020-11-01
  • 기독교강요 영어 수업 - Lesson XIII 제일 계명 유일신
    Holy Trinity, depicted by Szymon Czechowicz(1756-1758) Lesson XIII 제일 계명 유일신First Commandment One God 지난 2018년 7월 5일은 마르크스 탄생 200주년이었습니다. 그의 고향인 독일 트리어와 중국 공산당, 그리고 한국 일부에서 크게 의미를 두었습니다. 그의 공산주의는 그것을 따르는 사람에게 증오와 굶주림을 안겨줍니다. 그를 따르는 좌파 정권의 베네주엘라는 산유국(油國)임에도 경제 붕괴로 망하기 일보 직전에 있습니다. 중세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한 권의 책만 읽은 사람을 조심하라.” 1980년대 운동권 학생 책꽂이엔 주로 한 종류 책이 꽂혀 있었습니다. 마르크스 저작과 마르크스주의에 토대를 둔 『사회구성체론』과 『정치경제학』 같은 책입니다. 서클 세미나에서 토론하려면 그런 책을 읽지 않을 수 없었지요. 그 시대 청년 대학생들은 하나님을 부인하는 ‘한 권의 책만 읽은 사람’이었습니다. 좌파 정권의 베네주엘라 지도자들처럼. 성경은 말씀합니다. 이 재앙에 죽지 않고 남은 사람들은 손으로 행한 일을 회개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여러 귀신과 또는 보거나 듣거나 다니거나 하지 못하는 금 은 동과 목석의 우상에게 절하고 또 그 살인과 복술과 음행과 도둑질을 회개하지 아니하더라 계 9:20-21 세계에서 가장 많은 신들을 섬기는 사람들은 힌두교도들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물경 3억 3천만에 달하는 신들과 여신들을 모시고 있습니다. 그들은 한 세대 당 여덟 신을 섬긴다고 합니다. 힌두교는 동물의 생명이 신성하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그들은 언제나 비참하게 가난한 생활을 살면서도 동물들과 한 집에서 같이 생활하며 부양을 합니다. 동물들은 아무 하는 일 없이 그들의 집에서 하인을 둔 부자 주인 노릇을 하며 빈둥빈둥 살아갑니다. 인도의 4억 5천만 힌두교도들은 거의 7천 5백만에 달하는 소들을 경배하고 섬깁니다. 더욱이 그들은 그들의 농작물들을 먹어치우고 해를 주는 원숭이들과 쥐들과 여러 해충들까지도 내버려 둔다고 합니다. 제일 계명은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말하는 영역에서 시작합니다. 이 계명은 우리가 오직 하나님만을 힘을 다해 섬길 것을 요구합니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출 20:2-3). 이 말씀은 다른 신이나 현대의 무수한 우상들뿐만 아니라 어떤 사물이나 사람을 섬기는 것도 이 계명을 어기는 것입니다. 또한 성공 소유 명예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는 것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 계명을 얼마나 잘 지키고 있는가요. 그것을 위해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 22:37). 그 의미에 대해 칼빈은 『기독교강요』 제2권 제8장 16항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First Commandment I AM THE LORD THY GOD, WHICH BROUGHT THEE OUT OF THE LAND OF EGYPT, OUT OF THE HOUSE OF BONDAGE. THOU SHALT HAVE NO OTHER GODS BEFORE ME. 16. The authority of the Law being founded and established, God delivers his First Commandment THOU SHALT HAVE NO OTHER GODS BEFORE ME. The purport of this commandment is, that the Lord will have himself alone to be exalted in his people, and claims the entire possession of them as his own. That it may be so, he orders us to abstain from ungodliness and superstition of every kind, by which the glory of his divinity is diminished or obscured; and, for the same reason, he requires us to worship and adore him with truly pious zeal. The simple terms used obviously amount to this. For seeing we cannot have God without embracing everything which belongs to him, the prohibition against having strange gods means, that nothing which belongs to him is to be transferred to any other. The duties which we owe to God are innumerable, but they seem to admit of being not improperly reduced to four heads: Adoration, with its accessory spiritual submission of conscience, Trust, Invocation, Thanksgiving. By Adoration, I mean the veneration and worship which we render to him when we do homage to his majesty; and hence I make part of it to consist in bringing our consciences into subjection to his Law. Trust, is secure resting in him under a recognition of his perfections, when, ascribing to him all power, wisdom, justice, goodness, and truth, we consider ourselves happy in having been brought into intercourse with him. Invocation, may be defined the retaking of ourselves to his promised aid as the only resource in every case of need. Thanksgiving, is the gratitude which ascribes to him the praise of all our blessings. As the Lord does not allow these to be derived from any other quarter, so he demands that they shall be referred entirely to himself. It is not enough to refrain from other gods. We must, at the same time, devote ourselves wholly to him, not acting like certain impious despisers, who regard it as the shortest method, to hold all religious observance in derision. But here precedence must be given to true religion, which will direct our minds to the living God. When duly imbued with the knowledge of him, the whole aim of our lives will be to revere, fear, and worship his majesty, to enjoy a share in his blessings, to have recourse to him in every difficulty, to acknowledge, laud, and celebrate the magnificence of his works, to make him, as it were, the sole aim of all our actions. Next, we must beware of superstition, by which our minds are turned aside from the true God, and carried to and fro after a multiplicity of gods. herefore, if we are contented with one God, let us call to mind what was formerly observed, that all fictitious gods are to be driven far away, and that the worship which he claims for himself is not to be mutilated. Not a particle of his glory is to be withheld: everything belonging to him must be reserved to him entire. The words, “before me,” go to increase the indignity, God being provoked to jealousy whenever we substitute our fictions in his stead; just as an unfaithful wife stings her husband's heart more deeply when her adultery is committed openly before his eyes. Therefore, God having by his present power and grace declared that he had respect to the people whom he had chosen, now, in order to deter them from the wickedness of revolt, warns them that they cannot adopt strange gods without his being witness and spectator of the sacrilege. To the audacity of so doing is added the very great impiety of supposing that they can mock the eye of God with their evasions. Far from this the Lord proclaims that everything which we design, plan, or execute, lies open to his sight. Our conscience must, therefore, keep aloof from the most distant thought of revolt, if we would have our worship approved by the Lord. The glory of his Godhead must be maintained entire and incorrupt, not merely by external profession, but as under his eye, which penetrates the inmost recesses of his heart. 이 영어 원문의 대략적인 해석은 다음과 같습니다. 제일 계명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 16. 하나님께서는 율법의 권위에 대해서 그 근거를 마련하시고 확립하신 후에, 제일 계명을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하지 말지니라”(출 20:3). 이 계명의 목적은, 주께서는 자기만이 자기 백성 사이에서 최고의 지위를 가지시며, 그들에 대해서 완전한 권위를 행사하고자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일을 실현하시기 위해서, 그의 신성의 영광을 감하거나 흐리게 하는 불경건과 미신을 일소하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십니다. 같은 이유로, 우리에게 진실하고 열렬한 경건으로 자기를 경배하며 찬양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계명의 단순한 용어가 거의 이 뜻을 표현합니다. 하나님을 있게 하면 반드시 그에게 속한 것도 동시에 받아들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신이 있게 하지 말라고 금지하시는 것은 하나님에게 속한 것을 다른 신에게로 옮겨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게 드려야 할 것이 수없이 많지만, 그 모든 것을 편의상 네 가지로, 즉, 숭배, 신뢰, 기원(祈願), 감사로 분류하는 것이 편리하겠습니다. 우리 각 사람이 하나님의 위대성에 머리를 숙여 공경과 경배를 드리는 것을 나는 숭배(adoration)라고 부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율법에 우리의 양심을 바치는 것을 숭배의 일부라고 생각하는 것은 옳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속성을 인정하고서 그를 굳게 믿고 안심하는 것을 신뢰라고 부릅니다. 그에게 모든 지혜와 의와 힘과 진리와 인애가 있다고 생각해서, 그와 연결될 때에만 우리에게 행복이 있다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곤란한 일이 닥칠 때마다 하나님의 신실과 도움만을 우리의 의지할 것으로 믿어 구하는 마음의 습성을 나는 기원이라고 부릅니다. 모든 선한 일에 대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태도를 감사라고 부릅니다. 주께서는 이런 일들이 조금이라도 다른 신에게 옮겨지는 것을 허락하시지 않으므로, 모든 것을 전적으로 자기에게 드리라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신을 위하지 않는 것만으로는 아직 충분하지 못합니다. 종교를 멸시하는 악인들은 흔히 모든 종교를 통틀어 조롱하며 무시하지만, 우리는 그들을 본받지 말아야 합니다. 진정한 경건이 가장 앞에 서서, 우리의 마음이 살아 계신 하나님을 향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깊이 알고, 그 존엄성을 명상하며 경외하며 경배하며, 그의 축복에 참여하며, 항상 그의 도움을 구하며, 그의 역사(役事)의 위대성을 인정해서 찬양으로 축하하는 것을 이 세상에서 하는 모든 활동의 유일한 목표로서 갈망해야 합니다. 다음에 우리는 사악한 미신을 경계해야 합니다. 미신은 우리의 마음을 진정한 하나님에게서 떠나게 하며, 여러 가지 신들 사이를 방황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한 분 하나님으로 만족한다면, 우리가 전에 말한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즉, 우리는 모든 날조된 신을 몰아내야 하며, 유일하신 하나님이 자기의 것으로 친히 요구하시는 경배를 부분적으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티끌만큼이라도 감축하는 것은 부당하며, 하나님에게 속한 것은 모두 항상 하나님에게 있어야 합니다. 다음에 있는 ‘내 앞에’라는 어구는 계명 위반을 더욱 가증한 것으로 생각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을 제쳐놓고 우리가 날조한 신으로 대신할 때에, 하나님의 질투심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파렴치한 여자가 자기 남편 앞에 정부를 끌어들여 더욱 그의 마음을 괴롭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권능과 은총으로 항상 자기의 택한 백성을 지켜 주신다고 증언하신 것은, 그들이 새 신을 끌어들이면 반드시 하나님이 그 모독행위를 보시리라고 경고하며, 그들의 반역죄를 더욱 효과적으로 막으시려는 뜻입니다. 이런 대담한 행위에는 불경건한 짓이 많이 첨가됩니다. 즉, 사람들은 하나님을 버려도 하나님의 눈을 속일 수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하며 무엇을 계획하며 무엇을 만들든 간에, 자기에게는 모두 보인다고 선언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경건이 하나님의 시인을 받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반역에 대한 극히 은밀한 생각도 없는 맑은 양심을 가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께서는 그의 신성(Godhead)의 영광이 외면적 고백에서 뿐 아니라, 그 자신의 목전에서 완전하며 부패하지 않기를 요구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눈은 우리 마음의 가장 비밀한 구석까지도 꿰뚫어 보십니다. 칼빈의 이 가르침을 따르는 태도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고 하나님과 관계된 일이 아니면 어떤 일도 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우리의 지침으로 삼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의 목표로 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생각하고 사귀고 일하는 모든 것에서 하나님을 언제나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까지 이 계명을 온전히 지키신 분은 예수님 이외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기에 이러한 의무를 요구하시는가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는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출 20:2)는 말씀에 담겨있습니다. 이 말씀은 히브리어로 야웨 엘로헤카(Yaweh Eloheka)라고 합니다. 우리에게 이 계명을 말씀하시는 분이 바로 참되신 하나님이시고 시작도 끝도 없으신 하나님이시기에 우리가 그에게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출 3:14)고 말씀하시는 스스로 존재하시는 유일한 신이십니다. 하나님을 존재하시게 한 존재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아무에게도 책임이 없으시고 스스로 충족하십니다. 이렇지 못한 존재는 진정한 신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무슨 신이라고 하는 열등한 존재들과 완전히 다르시기에 우리에게 최고의 예배를 요구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조상이 되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우르를 떠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것은 메소포타미아의 아무런 가치도 없는 잡다한 신들을 섬기기보다는 참되신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고 복 받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창 12:1-3
    • G.QT
    • 기독교강요 영어수업
    2020-10-26
  • 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24_ 돌아온 탕자
    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19773) 돌아온 탕자 돈 주고 제사 증명서를 번듯하니 소지했던 탕자들을 용서해준 것에 화가 아주 단단히 난 그리스도인들이 있었다. 그러한 온건한 조처는 또 다른 박해 때 생길 실족을 조장할 우려가 있었다. 그리고 교회는 비리비리한 허약한 신자들을 양산해내게 될 터였다. 일제시대 신사참배를 죽으면 죽었지하고 한사코 반대했던 재건 파 같은 엄격 파가 일반교회에서 떨어져 나가 딴 살림을 차렸다. 배교자를 용납하거나 관용할 수 없는 엄격파는 고개를 돌리고 나름의 교회를 시작했다. 이 교회는 상당 기간 존속했다. 70여 년이 지났다. 이즈음에 그리스도교 신자가 된 콘스탄틴 황제가 이 딴살림에 열중해 있는 엄격 파를 카톨릭 교회와 연합시키려고 애썼다. 황제는 도대체 잘못이 무엇인가 물었다. 신앙에 어떤 차이가 있는가? 실제로 신앙에는 차이가 없었다. 그렇다면 무엇이 문제인가? 정작 문제는 이런 것이었다. 시련 때 믿음을 지켰던 사람의 자손이 믿음을 헌신짝 버리듯 했던 사람의 자손과 어떤 관계도 가질 수 없다는 것이었다. 속이 뒤틀린 황제는 엄격 파의 감독에게 냅다 소리 질렀다. “그렇다면 사닥다리를 가져다가 당신들만 천국에 올라가시구려.” 박해와 평화가 신통하게도 50년 주기로 반복됐다. 디오크레티안 황제 때도 박해가 시작됐고 앞의 이야기가 다시 되풀이됐다. 디오클레티안은 교회와 모든 성경 사본까지 없애려고 했다. 이때는 성직자 가운데에도 성서를 파기하는데 앞장선 자들이 있었다. 그러나 박해가 끝나자 그런 성직자들까지도 교회로 다시 돌아오고 싶어 안달을 했다. 일반 그리스도인인 평신도가 교회로 다시 돌아오는 문제는 이미 해결되어 있었다. 그런데 성직자는 어떻게 해야 된단 말인가? 박해 때 주님과 말씀을 등한시했던 성직자들도 용서를 받았다. 그러나 이번에는 교단 적인 거센 저항의 물결이 북아프리카에서 일었다. 그 교파를 도나투스파라고 한다. 아프리카의 가난하고 불만이 입에 가득한 사람들이 그 교파로 우르르 몰렸다. 그들의 성격은 매우 억세고 모질었으며 제멋대로였다. 그들은 교회를 가르고 다른 파의 감독들을 충동질했다. 전 로마제국이 그리스도교화 된 뒤까지도 도나투스파는 어찌나 골머리를 썩였던지 그 파를 추종하는 사람들에게 사형 형벌이 포고될 정도였다. 많은 사람이 발을 헛디뎌 넘어졌지만 다는 아니었다. 이를테면 박해에 굴하지 않고 신앙을 고백하리라 생각했던 사람이 신앙에 손사래를 쳤는가 하면 부인하겠지 했던 사람이 한사코 신앙을 고백하며 죽음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리스도인을 코웃음 치는 디오클레티안 황제 앞에서 연극이 한 편 공연되었다. 한 배우가 세례를 받기 위하여 하얀 옷을 입었다. 그가 소리쳤다. “너무 무거워” 그는 아픈 듯이 무대에 벌렁 누웠다. 그러면서 말한다. “좀 가벼워졌으면 좋겠어” 안타까운 눈빛으로 동료가 말했다. “어쩐다지? 목수처럼 널 대패질 해주랴? 그럼 얇아져 가벼워지지 않겠니.” 하얀 옷의 배우가 질겁하며 외쳤다. “바보 천치 같으니라구. 난 그리스도인이 되어 하나님에게로 훨훨 날아 올라가고 싶단 말이야.” 황제의 눈이 실쭉해졌다. 2020-10-24
    • G.QT
    • 이야기 세계 교회사
    2020-10-24
  • 기독교강요 영어 수업 - Lesson XII 도덕의 법칙
    Lesson XII 도덕의 법칙Moral Law 서울이 39.6도로 역대 최고를 기록한 올해의 여름날처럼 연일 혹독한 무더위가 이어지다 보면 사람을 대하는 일이 내 마음처럼 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마음도 지치고 고달프게 됩니다. 그러나 문제는 내 밖이 아니라 내 안에 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옆을 돌아보면서 안부를 묻고 작은 것이라도 챙겨줄 일입니다. 여름이 익으면 가을이 된다는 말이 나를 살게 합니다. 불완전하기에 은혜가 넘친다는 말이 나를 살게 합니다. 그중에서도 나를 신나게 살게 하는 건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사람을 사랑할 수밖에 없으니 사람 사이에 잔잔한 믿음의 강물이 흐르도록 할 일입니다. 가장 어리석어 보이는 질문을 하는 사람. 그 사람이 가장 힘 있는 사람입니다. 왜 그럴까요. 가장 근본적인 질문은 어리석어 보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그런 질문을 하지 않는 저기 깨지기 쉬운 그러나 세상에서 드세기로 유명한 사람이 갑니다. 그러나 믿음이 부족해 명예가 무너지고 재산이 파손되고 건강이 부서진 ‘파손주의’라고 써진 등짝을 보세요. 잔소리에 깨지고 뼈있는 말에 파손되고 속임 말에 넘어간 가슴에 ‘취급주의’가 새겨진 사람을 보세요. 슬픔에 갇힌 질그릇 하나가 갑니다. 어느 때 사람은 유리 같습니다. 어찌 할 사이 없이 명예와 재산과 건강을 잃기도 하고 무정한 말들에 찔리고 부서지기도 합니다. 그는 골고다의 그리스도처럼 걸음마다 피를 흘리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취급할까요. 이 슬픈 질그릇을. 이 연약한 폭발물을. 우선 모두가 생각보다 쉽게 파손되지는 않는다고 말해야겠습니다. 서로 어지간히는 ‘주의’하므로. 깨졌다고 그냥 주저앉으려 하는 사람도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어떻게든 자기를 고치고 붙여서 다시 걸으려 하니까요. 진리를 알기 위해 애쓰던 초기에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저의 죄에서 구원해주십시오. 그러나 아직 다는 아닙니다.” 얼마 뒤 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한 가지 죄만 빼고 저의 죄에서 구원해주십시오. " 얼마 뒤 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저의 모든 죄에서 지금 구원해주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아우구스티누스가 죄와 악을 떠나기로 굳게 마음을 먹자 그렇게 되었습니다. 사실 죄와 악에 끌리는 사람은 이런 말에 절어있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중독성 없이는 쾌락이란 없지. 허무로 먼지로 죽음으로 사라지고 있다는 느낌 없이는 중독성이란 없지.” 칼빈의 신학은 그의 평생에 걸쳐 사실상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1536년 라틴어 초판이 나온 이래 1559년 마지막 판에 이르기까지 『기독교강요』의 내용은 확장되었습니다. 초판은 단 1권 6장에서 출발해 마지막 판은 4권 80장으로 끝났습니다. 4권 각 책은 사도신경(creed kriːd])의 신앙고백을 따라 이름을 붙였습니다. 1권(Book 1) 창조주 하나님에 대해(on God the Creator), 2권(Book 2) 그리스도 안의 구세주(on the Redeemer in Christ), 3권(Book 3) 성령을 통한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 것에 대해(on receiving the Grace of Christ through the Holy Spirit), 4권(Book 4) 그리스도 또는 교회의 사회(on the Society of Christ or the Church) 등의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 책의 시간은 기억의 시간, 믿음의 시간, 개혁의 시간입니다. 칼빈의 전기 작가 파커(Parker 1995, pp. 1314)는 이렇게 말합니다. The first statement in the Institutes acknowledges its central theme. It states that the sum of human wisdom consists of two parts: the knowledge of God and of ourselves. Calvin argues that the knowledge of God is not inherent in humanity nor can it be discovered by observing this world. The only way to obtain it is to study scripture. Calvin writes, “For anyone to arrive at God the Creator he needs Scripture as his Guide and Teacher.”『기독교강요』의 첫 진술이 그 책의 중심 주제를 나타냅니다. 그것은 인간의 지혜는 하나님과 우리 자신의 지식(the knowledge of God and of ourselves) 두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고 진술합니다. 칼빈은 하나님의 지식은 인간 본성에 본래 있는 것이 아니고 또한 이 세상을 관찰함으로써 발견할 수도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것을 얻는 유일한 길은 성경을 공부하는 것입니다. 칼빈은 “창조주 하나님에게 도달하려고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의 인도자와 선생으로 성경이 필요합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칼빈은 『기독교강요』 제2권 제8장 1항에서 우리의 죄와 연관이 있는 도덕의 규칙에 대해 설명합니다. 1. I believe it will not be out of place here to introduce the Ten Commandments of the Law, and give a brief exposition of them. In this way it will be made more clear, that the worship which God originally prescribed is still in force a point to which I have already adverted; 나는 여기에서 율법의 십계명을 소개하고 간략한(brief briːf) 설명(exposition kspzn)을 하는 것이 부적절하지(out of place) 않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렇게 하여(In this way) 하나님께서 원래 규정하신(prescribe priskrib) 예배(worship wːrip)는 내가 이미(제7장 ‘율법의 목적’에 대해) 언급했던(advert ædvːrt) 요점(point pint)이 여전히 유효합니다(in force). and then a second point will be confirmedviz. that the Jews not only learned from the law wherein true piety consisted, but from feeling their inability to observe it were overawed by the fear of judgments and so drawn, even against their will, towards the Mediator. 그리고 다음에 둘째 요점이 확증((confirm knfːrm))될 것입니다. 즉(viz 리틴어 videlicet ‘비데리케트’의 약어인데 보통 영어로 ‘namely nimli’ ‘네임리’라고 읽음) 유대인들은 그 곳에(wherein hwεrn) 참된 경건(piety piti)이 들어있는(consist knsst) 율법에서 배웠을 뿐만 아니라 자기들이 그것을 준수할(observe bzːrv) 수 없다는 것(inability nblti)을 감지했기 때문에(from feeling) 심판의 두려움으로 억눌렸고(overawe uvrː) 심지어(even ːvn) 그들의 의지에 반하면서도(against their will) 중보자(mediator mːdiitr)에게 마음이 끌리게(drawn drːn ‘draw drː’의 과거분사) 되었다는 것이 확증될 것입니다. In giving a summary of what constitutes the true knowledge of God, we showed that we cannot form any just conception of the character of God, without feeling overawed by his majesty, and bound to do him service. In regard to the knowledge of ourselves, we showed that it principally consists in renouncing all idea of our own strength, and divesting ourselves of all confidence in our own righteousness, while, on the other hand, under a full consciousness of our wants, we learn true humility and self-abasement. 그런데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을 이루고 있는 것을 요약(summary smri)했을 때 우리가 그의 존엄(majesty mdisti)에 위압되고(overawed uvrːd) 그를 섬겨야 한다는(bound to do him service) 느낌을 받지 않으면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어떤 바른 개념(conception knspn)도 품을(form fːrm) 수 없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 자신에 대한 지식과 관련하여(regard rigːrd) 우리 자신의 힘(strength streŋkθ)에 대한 모든 사상을 포기하고(renounce rinuns), 우리 자신의 의에 대한 모든 신념을 스스로 벗어버리는(divest divst) 한편(while hwail) 이와 반대로(on the other hand) 우리 자신의 빈곤에 대한 완전한 자각(consciousness knsnis)하에(under ndr) 우리는 진실한 겸손(humility hjuːmlti)과 자기 비하(self-abasement bismnt)를 배우게 된다는 사실을 보았습니다. Both of these the Lord accomplishes by his Law, first, when, in assertion of the right which he has to our obedience, he calls us to reverence his majesty, and prescribes the conduct by which this reverence is manifested; and, secondly, when, by promulgating the rule of his justice, he charges us both with impotence and unrighteousness. ...첫째로 그가 우리의 복종을 받으셔야 하는 권리의 주장(assertion sːrn)에 있어서 그는 우리에게 그의 위엄에 대한 숭배(reverence rvrns)를 요구하시고, 그리고 주님은 이 숭배가 나타나는(manifest mnfst) 행위(conduct kndkt)를 규정하는(prescribe priskrib) 그의 율법으로(by his Law) 이 두 가지 일을 다(both of these) 이루십니다(accomplish kmpli). 그리고 둘째로, 그는 무기력(impotence mptns)과 불의(unrighteousness)로 우리를 책망하실 때 그의 정의(justice dsti)의 규칙을 공표(promulgate prmlgit)하심으로써 이 두 가지 일을 다 이루십니다. ... 소요리문답은 이렇게 묻고 대답합니다. 문 39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본분이 무엇인가.답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본분은 그 나타내 보이신 뜻을 복종하는 것입니다. 문 40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복종할 규칙으로 사람에게 처음 나타내 보이신 것이 무엇인가.답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복종할 규칙으로 사람에게 처음 나타내 보이신 것은 도덕의 법칙입니다. 문 41 이 도덕의 법칙이 어디에 간략히 포함되었는가. 답 이 도덕의 법칙은 십계명에 간략히 포함되었습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정의의 여신은 디케(Dike)입니다. 디케는 정의(正義) 혹은 정도(正道)라는뜻입니다. 로마시대에는 유스티티아(Justitia)로 대체됐는데 정의를 뜻하는 영어 저스티스(justice)는 여기서 유래했습니다. 디케는 칼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졌고 유스티티아는 여기에 형평을 지킨다는 의미로 저울이 더해졌습니다. 정의의 여신은 오른손에는 칼 왼손에는 저울을 들고 있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칼은 정확한 판정에 따라 정의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하다는 뜻이며 저울은 엄정한 정의의 기준을 상징합니다. 디케가 안대로 눈을 가리고 있는 이유는 정의와 불의의 판정에 있어 사사로움을 떠나 공평함을 유지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스위스 대법원 건물에 거대한 그림이 하나 걸려있습니다. 폴 로버트(Paul Robert)라는 화가가 그린 그 그림의 제목은 재판관들을 가르치는 정의의 여신(Justice Instructing Judges)입니다. 그림의 전경에는 소송 당사자들이 그려져 있습니다. 남편을 고소한 아내 건축주를 고소한 건축가 주정뱅이를 고소한 술집 주인 등이 그려져 있습니다. 소송 당사자들 위에는 작은 하얀 장식용 가슴판이 달린 법의를 입은 스위스 재판관들이 서있습니다. 이 재판관들이 다양한 소송 당사자들을 어떻게 재판해야 할까요. 이 그림에 그 답이 그려져 있습니다. 정의의 여신은 대개 눈을 가린 채 손에 든 칼을 위로 치켜들고 서있습니다. 그런데 이 그림에 그려진 정의의 여신은 눈을 가리지 않고 손에 든 칼을 아래로 향하고 서있습니다. 그 칼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적힌 책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 책 The Bible에 인간이 복종해야 할 하나님의 십계명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에게 복종하는 것은 인간의 의무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자이시고 인간은 그의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셨으므로 그에게 원하시는 것을 요구할 권리가 있습니다. 사람은 피조물이기에 자기 멋대로 할 권리가 없습니다. 오히려 사람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권리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법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율법의 주요 목적은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과 우리에게 구세주가 필요하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이 율법은 그리스도가 모든 인간의 죄를 위해서 죽으셨던 십자가의 대속 형벌을 통하여 종식되었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렘 31:31 율법에서 십계명이 차지하는 위치는 중요합니다. 율법이 죄를 깨닫게 해주기 위해서는 우리가 지은 개별적인 죄들을 구체적으로 먼저 깨닫게 해주어야 합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자신이 완전한 자가 아니라는 것과 같은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자신이 우상 숭배자와 살인자와 간음자와 도둑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바로 십계명은 이러한 역할을 담당합니다. 그리고 십계명이 특별히 가치가 있는 것은 종합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주신 첫째 판의 계명들은 그리스도께서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의무의 범주에 속합니다. 이 계명들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 22:37)는 말씀으로 요약이 됩니다. 둘째 판의 계명들은 우리의 이웃에 대한 우리의 의무의 범주에 속합니다. 이 계명들은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마 19:19)는 말씀으로 요약이 됩니다. 예수님은 더 나아가서 이 요약된 계명들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40)고 정의하셨습니다. 2020-10-19
    • G.QT
    • 기독교강요 영어수업
    2020-10-19
  • 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23_ 타협하는 교회
    면죄부 판매 타협하는 교회 교회가 조심성이 없어졌다. 야심만만한 데키우스 황제가 로마 권좌에 또아리를 틀기 전 반세기 동안 교회는 평화에 흠씬 젖어 있었다. 이 기간에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 엄격함이 하나하나 풀어졌다. 그리스도교 신자가 이교도인에게 더욱 친근하게 되었다. 불신자와의 결혼도 꺼리지 않게 되었다. 시련에 대해 마음을 굳게 다잡지 않았다. 축복과 평화와 즐거움이 신자의 마음을 차지했다. 많은 신자가 발을 헛디뎌 넘어지고 엎어졌다. 서둘러 황제 신전에 희생 제사를 드리러 가는 신자가 조금씩 늘어났다. 그곳에서 얼굴을 마주친 신자들은 처음에는 서로 쭈뼛거리기도 했지만 이내 반갑게 인사를 나누게 되었다. 감독들까지도 뒤질세라 이교도 제단에 양 떼를 질질 끌고 갔다. 그런가 하면 이교도의 제단에 허리를 조아리지 않고 투옥되는 그리스도인도 있었다. 잠시 고문을 견디는 그리스도인도 있었다. 아주 곤란하고 난처했음을 나타내는 모종의 행동을 취한 그리스도인도 있었다. 이 약삭빠른 사람들은 희생 제사를 드리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이 희생 제사를 우상에게 드렸음을 말해주는 증명서를 취득했다. 종종 관리들도 신자들에게 사근사근하게 대했고 신자들을 죽이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관리는 신자한테 눈웃음을 치며 이렇게 말을 건넸다. “난 당신이 그리스도인이라는 걸 알아요. 굳이 희생 제사를 드리지 않아도 되요. 뭐 좋은게 좋은거 아니겠어요.(이때 그는 눈을 찡긋했다.) 얼마 내세요. 그럼 희생 제사를 드리지 않아도 증명서를 내드리겠오.” 귀가 솔깃해진 그리스도인은 눈을 말똥거리며 머리를 잽싸게 돌려댔다. “희생 제사를 드려서는 안 된다고 감독께서 말씀하셨지. 나 역시 그럴 마음은 털끝만치도 없지. 그렇지만 증명서를 발급받아서는 안 된다는 말은 감독이 안 하셨지. 증명서를 갖는다고 해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관리는 내가 그리스도인임을 알고 있다. 고맙게도 관리는 내 목을 자르질 않고 그리스도인이 된 것에 대한 벌금만을 물릴려고 한단 말이야. 내가 그리스도를 부인하지 않을진대 이걸 안 할 도리가 없지 않은가?” 정작 고통스러운 문제는 그 증명서가 우상에게 희생 제사를 드렸음을 말해준다는 데 있었다. 박해는 오래가지 않았다. 그게 끝나자 발을 헛디뎌 넘어졌던 사람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 교회에 돌아가고 싶어 했다. 그들은 진심으로 주 예수를 사랑했다. 그들은 교회란 노아의 방주와 같아서 교회 밖에 있으면 모두 멸망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이제 이 사람들은 방주로 돌아갔으면 했다. 이런 사람은 달랑달랑 선물을 들고 감독을 찾아가 눈물 콧물 흘리며 애걸복걸했다. 마음이 약해진 감독은 넘어졌던 배교자가 용서받을 수 있는 조처를 취했다. 그 조처란 배교자가 굵은 베옷을 입고 머리에 재를 쓰고 회중 앞에 나와서 자신의 슬픔을 나타내 보이는 것이었다. 이것을 고백이나 참회라고 한다. 처음에 고백은 회중 앞에서 행하는 공개적이고 공중 적이었다. 나중에 그것이 목사나 사제 앞에서 행하는 은밀한 개인적인 것이 되었다. 2020-10-17
    • G.QT
    • 이야기 세계 교회사
    2020-10-17
  • 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22_ 예배와 예절
    Last supper from Kremikovtsi 예배와 예절 스무 세기 끄트머리쯤에 사는 한국 사람들은 너나없이 새로운 병을 하나씩 앓고 있다. 병명은 교통체증이다. 며칠 전에 살 만치 살았으니 가도 괜찮겠다며 세상 떠난 이브몽땅이 코맹맹이 소리로 노래하던 마른 낙엽처럼, 길마다 차들이 가득가득 뒹군다. 주일이면 그리스도를 모르는 친구들은 들녘이나 산자락으로 승용차를 타고 몰려가 북새통을 이룬다. 또 그리스도인과 친하거나 안면이 있는 사람들도 거의 대부분이 자가용을 타고 교회로 밀려와 교회 마당 내지는 골목을 깍두기 판으로 만들어 놓는다. 초대교회의 예배는 금요일 해 질 녘에서 토요일 해 질 녘까지 이어진 유대교의 안식일보다는 주일(Sunday)에 드려졌다. 그리스도인들이 예배드리는 날을 이렇게 바꾸게 된 연유는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뒤 제자들에게 처음 모습을 나타내셨던 날이 바로 일요일이기 때문이다. 이날이 되면 도시와 지방에 흩어져 살던 그리스도인들이 꼬박꼬박 함께 모였다. 그리스도인들이 옹송옹송 모여들면 지도자가 그들에게 구약과 신약을 읽어주고 설명을 해준다. 설교를 마친 뒤 회중은 일어서서 기도했다. 그다음에 떡과 포도주를 들여왔다. 지도자가 감사기도를 드렸고 모든 사람이 ‘아멘’이라고 답했다. 아멘이라는 말은 히브리어로서 “그렇게 되게 해주소서(So may it be)”라는 뜻이다. 이 말은 예수 님의 말씀을 그대로 채택한 것인데 헬라어와 라틴어로 변함없이 번역되었다가 나중에 영어로 번역되었다. 그리고 급기야는 한국말로도 원래 말 그대로 옮겨져 사용될 정도로 온 세계에서 공히 사용되고 있고 누구나 알아듣고 뜻이 통하는 방언이 되었다. 감사기도를 드린 뒤 집사들이 떡을 떼고 잔을 나누는 일을 봉사했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주일마다 꼬박꼬박 성만찬 내지는 감사제를 가졌다. 설교자는 회 중에게 신앙의 위대한 진리를 들려주었다. 또 한 설교자는 교인들에게 좋은 몸가짐이나 예절과 같은 아주 사소한 문제들에 대해서도 말했다. 예컨대 이 세기 교인이 받은 교훈 가운데 이런 게 있다. 설교자는 그를 빤히 바라보는 교인들에게 담담한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 “길 떠나는 사람이 배를 채우듯이 음식을 게걸스레 먹지 마십시오. 입안에 음식을 가득 채우고 우적우적 먹는 모양은 얼마나 볼썽사납습니까. 입에 음식을 넣은 채 말한다든지 동시에 마시고 먹고 하지 마십시오. 웃음을 자제하세요. 사람이 늘 상 웃어서는 안 됩니다. 사람이 시도 때도 없이 웃게 되면 웃는 동물이 되고 맙니다. 말이 늘 상 히잉 거리며 우는 것은 그렇게 울게 되어 있는 동물이기 때문에 그런 것처럼 말입니다. 여자가 너무 웃음이 헤픈 걸 킬킬거린다고 하고 남자가 그러는걸 껄껄거린다고 합니다. 그런 웃음보다는 미소가 훨씬 낫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뭐 울적한 표정을 지을 필요는 없습니다. 재채기가 날 경우에 느닷없이 폭발해서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하지 마십시오. 보석으로 치렁치렁 꾸민 여인들에게 그렇지 못한 여인들이 그들의 종들처럼 보일까 걱정됩니다. 제발 여자들은 덕지덕지 바른 화장으로 그 고운 얼굴들을 뭉개지 마십시오. 아름다움이란 건강한 모습이 활짝 핀 꽃이랍니다. 너무 사치품들을 쓰지 마십시오. 칼자루에 보석이 없다고 칼이 잘 들지 않겠습니까? 예수 님은 그냥 밥그릇에 밥을 잡수셨고 풀밭에 앉아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바가지에 담은 물을 좀 달라하셨습니다...” 2020-20-10
    • G.QT
    • 이야기 세계 교회사
    2020-10-10
  • 기독교강요 영어 수업 - Lesson XI 등대
    헤라클레스 등대 Lesson XI 등대Lighthouse 우리가 사는 행성은 차라리 수구(水球) ‘물로 된 공’ 또는 해구(海球) ‘바다로 된 공’이라 불러야 옳습니다. 바다가 지구 표면 70%를 차지하기 때문입니다. 그 옛날 항해에 나선 바다 사나이는 어두운 밤 별빛을 따르며 마음 졸이다 멀리 땅에서 오는 한 줄기 불빛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을 것입니다. 등대가 언제 생겼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등대(lighthouse lithus)는 배를 위험에서 벗어나도록 안내해주기 위해 해안 가까이 세워진 강력한 빛을 비추는 탑입니다. 항해의 역사와 비슷할 것으로 짐작됩니다. 해안 마을의 불빛도 갈 길을 알려주는 표지 역할을 했습니다. 스페인에는 1900년이 넘은 등대가 있었습니다. 이름은 토레 데 에르쿨레스(Torre de Hercules) 바로 헤라클레스의 탑이지요. 헤라클레스의 탑은 ‘코스타 다 모르테(Costa da Morte)’ 즉 ‘죽음의 해변’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위험한 해안선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로마인들에게 세계는 평평했습니다. 해안선은 세상의 끝을 의미한다고 믿었습니다. 코스타 다 모르테 죽음의 해변이 그러했습니다. 세상의 끝에 세워진 탑을 보며 그들이 무슨 생각을 했을지 궁금합니다. 몇 세기 동안 수천 명의 선원들의 목숨을 구해주었던 헤라클레스의 탑은 오늘날 국제적으로 명성이 높은 랜드 마크가 되었습니다. 중세와 그 이전에 제작된 지도에도 이 탑이 그려져 있습니다. 등대 이름에 왜 ‘헤라클레스’(Herakles)가 들어가는지 궁금하시죠. 그는 그리스 신화의 제우스 아들인데 미쳐서 아내와 아들을 죽여 그 죗값으로 신으로부터 열두 가지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 명령 가운데 하나로 헤라클레스는 머리 3개 몸 3개인 거대 괴수 게리오네스(Geryon)와 격투를 벌여 쓰러뜨리고 현재 라 코루나(La Coruna)에 해당되는 장소에 괴물의 머리를 묻어 그 자리에 탑을 지을 것을 명했다고 합니다. 이 같은 이유로 헤라클레스의 탑이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헤라클레스의 탑은 18세기에 개조되었는데 지금도 등대로 작동되고 있습니다. 이 탑은 높이 57m의 암석 위에 서 있으며 탑 자체의 길이는 55m입니다. 탑 안에는 242개의 계단이 있으며, 수면으로부터 112m 높이에서 깜빡이는 불빛은 50㎞가 넘는 거리에서도 눈에 잘 들어온다고 해요. 기원전 62년 카이사르가 이곳을 정벌한 후 등대는 로마 제국 선단(船團)이 영국·아일랜드로 가는 길목을 밝혔습니다. 로마의 대서양 진출을 보여주는 기록물입니다. 등대는 예술가에게도 영감을 줬습니다. 스페인 남부 출신으로 라 코루나 예술학교를 다닌 소년 파블로 피카소(Pablo Ruiz Picasso 1881년 10월 25일 1973년 4월 8일)는 헤라클레스 등대가 서 있는 해변을 거닐며 예술혼을 꽃피웠습니다. 피카소 본인 스스로 “12살 때 라파엘로만큼 그렸다”고 말한 그가 헤라클레스 등대가 있는 풍경을 그린 초기 작품도 있습니다. 해변과 연관된 이런 일화도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피카소가 바닷가에 놀러갔는데 어떤 아이가 종이와 펜을 들고 나타나 그림을 그려달라고 했습니다. 물론 아이의 부모가 피카소를 알아보고 아이에게 시킨 것입니다. 피카소는 종이 대신 아이의 등에다 그림을 그려서 돌려보내고 낄낄거리며 말했다고 합니다. “저 애 부모는 저 그림 지우지 못 할걸.” 물론 이전에도 등대는 있었습니다.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파로스(Pharos) 등대는 14세기 지진으로 무너지기 전까지 1500년간 지중해를 밝혔습니다. 파로스 등대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기원전 280~247년 사이 파로스 섬에 세워졌습니다. 그 높이가 40층 건물 규모의 120~140m에 달해 기자의 피라미드와 함께 고대 7대 불가사의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등대가 956년부터 1323년 사이 이곳에서 발생한 세 번의 지진으로 크게 훼손되었습니다. 낮에는 햇빛을 거울로 반사하고 밤에는 장작을 때 불을 밝혔다고 합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이 도시를 건설하라고 명령한 것이 기원전 332년이고 죽은 것이 323년이니 그로부터 약 50년쯤 후 등대가 세워졌습니다. 등대는 가로 세로 8m의 사각형 기단 위에 2단의 원통형 구조물로 이루어졌고 그 위로 굴뚝이 있어 불이 나오도록 했습니다. 이러한 등대 구조가 후대 모든 등대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안달루시아 출신의 아라비아 여행가 이븐 무하마드 엘 발라위(Ibn Mohammed el-Balawi)는 1165년 알렉산드리아를 방문해 파로스 등대를 보고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습니다. 파로스 등대는 섬의 끝에 솟아 있다. 건물은 한 변이 8.5m인 육면체다. 동남쪽으로 바다가 감싸고 있다. 등대의 둘레로는 높이 6.5m의 벽이 감싸고 있다. 바닥은 등대를 향해 올라가는 형태로 되어 있고 안으로 183m의 경사로가 나 있다. 이 길은 곡선의 아치 형태로 등대 꼭대기까지 이어진다. 아치는 16개나 된다. 파로스 등대는 사라졌지만 그 모습은 알렉산드리아 시의 상징으로 남아있다. 시의 깃발과 문장에 모두 파로스 등대가 들어있다. 이탈리아 제노바엔 1128년 점등한 란테르나(Lanterna) 등대가 있었습니다. 제노바는 베네치아와 함께 중세 지중해 패권을 다툰 해양 세력이었습니다. 당대 제노바의 무역 수입은 프랑스 왕국 전체 세입의 3배였다고 합니다. 신대륙을 찾은 콜럼버스 고향이 제노바입니다. 1449년 란테르나 등대 책임자는 콜럼버스의 삼촌 안토니오 콜롬보였습니다. 콜럼버스 집안이 바다 일과 깊은 관련이 있었습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탐험가 콜럼버스가 태어난 토양이 있었던 것입니다. 등대 가까운 구도심에 콜럼버스 생가가 있습니다. 란테르나 등대는 우리에게도 친숙합니다. 일본 만화영화 엄마 찾아 삼만리는 19세기 제노바가 배경입니다. 아르헨티나로 돈 벌러 떠난 엄마를 그리며 주인공 마르코가 앉아 있던 곳이 란테르나 등대였습니다. 2018년 긴긴 폭염의 여름 끝에 아침저녁으로 가을의 서느런 발소리가 들립니다. 가을은 풍요와 조락(凋落)의 계절입니다. 하나님이 베푸시는 풍요를 인간이 얻듯 하나님이 예정하신 조락도 인간의 기회가 돼야 합니다. 그 고독한 시간을 갈아 믿음의 씨앗을 뿌려야 합니다. 정결하고 단단한 성화의 소망을 낙엽 지는 거리에 내놓는 일. 꼿꼿하게 기도하는 일. 등대는 그저 역사만이 아니라 문학적 상상력을 자극하고 신앙적 은유를 나타내는 상징물입니다. 한 치 앞도 내다보기 어려운 시절 2018년 갈 길을 밝힐 등대는 어디에 있을까요. 삶의 등대와 같은 좌우명(座右銘)은 개인이나 단체나 국가에서 특별한 동기 부여를 위해 만드는 표어입니다. 좌우명이라는 말은 후한(後漢)의 학자 최원(崔瑗)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자리(座)의 오른쪽(右)에 일생의 지침이 될 좋은 글을 쇠붙이에 새겨 놓고(銘) 생활의 거울로 삼은 데서 유래되었습니다. 그렇게 우리 믿음의 자리(座) 오른쪽(右)에 마음에 새겨 놓고(銘) 믿음의 거울로 삼을 좌우명(motto mtou)을 칼빈은 『기독교강요』 제3권 제21장 2항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칼빈은 총신 출신이면 거의 말씀이 가는 데까지 가고 멈추는 데서 멈춘다(Where the Word goes we should go, where the Word stops we should stop.)고 되뇌는 그의 좌우명을 아우구스티누스의 말로 시작합니다. “We have come into the way of faith,” says Augustine: “let us constantly adhere to it. It leads to the chambers of the king, in which are hidden all the treasures of wisdom and knowledge. For our Lord Jesus Christ did not speak invidiously to his great and most select disciples when he said, I have yet many things to say unto you, but ye cannot bear them now(John 16:12). We must walk, advance, increase, that our hearts may be able to comprehend those things which they cannot now comprehend. But if the last day shall find us making progress, we shall there learn what here we could not”(August. Hom. in Joann).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합니다. “우리는 믿음의 길로 가고 있습니다. 항상(constantly knstntli) 그 길을 고수합시다(adhere ædhr). 그 길은 왕의 방(chamber timbr)들로 인도합니다. 그 방들에는 지혜와 지식의 보물(treasure trr)들이 숨겨져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요 16:12) 말씀하셨을 때 그의 중요하고 아주 엄선한(select silkt) 제자(disciple disipl)들에게 차별적으로(invidiously invdisli)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자들이 지금 이해할 수 없는 이것들을 우리의 심장이 이해할 수 있도록 우리는 걷고(walk wːk) 전진하고(advance ædvns) 늘려야(increase inkrːs) 합니다. 그러나 만일 마지막 날 우리가 전진(progress prgres)한 것을 발견하게(find faind) 된다면 우리는 여기에서 배울 수 없었던 것을 거기에서 배우게(learn lːrn) 될 것입니다.” (August. Hom. in Joann). If we give due weight to the consideration, that the word of the Lord is the only way which can conduct us to the investigation of whatever it is lawful for us to hold with regard to himis the only light which can enable us to discern what we ought to see with regard to him, it will curb and restrain all presumption. 주의 말씀이(the word of the Lord) 주를 존중하기 위해 우리에게 합법적인(lawful lːfl) 것은 무엇이든 조사하게 인도할(conduct kndkt) 수 있는 유일한 길이고, 우리가 주에 관해 무엇을 보아야 할지를 분별할(discern disːrn)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빛이라는 고려의 대상(consideration knsdrin)에 우리가 정당한(due djuː) 값어치(weight weit)를 쳐준다면 그것(주의 말씀)이 모든 억측(presumption prizmpn)을 제어하고(curb kːrb) 억제할(restrain ristrin) 것입니다. For it will show us that the moment we go beyond the bounds of the word we are out of the course, in darkness, and must every now and then stumble, go astray, and fall. Let it, therefore, be our first principle that to desire any other knowledge of predestination than that which is expounded by the word of God, is no less infatuated than to walk where there is no path, or to seek light in darkness. Let us not be ashamed to be ignorant in a matter in which ignorance is learning.왜냐하면 우리가 말씀의 경계(bound baund)들을 넘어서(beyond bijnd) 가는 순간(moment mumnt) 우리는 암흑(darkness dːrknis) 속에서 경로(course kːrs)를 벗어나게 되고(out of utv) 그리고 때때로(every now and then) 넘어지고(stumble stmbl) 길을 잃고(astray stri) 그리고 떨어진다(fall fːl)는 것이 틀림없다는(must mst) 것을 그것(the word of the Lord)이 우리에게 보여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정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해석하기(expound ikspund)보다 예정에 대한 어떤 다른 지식을 갈망하는(desire dizir) 것은 길이 전혀 없는 곳을 걷거나 어둠 속에서 빛을 찾는 것 못지않게 분별을 잃는(infatuate inftuit) 것과 마찬가지(no less ... than …못지않게 …와 마찬가지로)라는 것을 우리의 첫째(first fːrst) 원칙(principle prnspl)으로 삼도록 합시다. 무지(ignorance gnrns)가 학식(learning lːrniŋ)이 되는 어떤 문제(matter mtr)에서 무지하게 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ashamed imd) 맙시다. Rather let us willingly abstain from the search after knowledge, to which it is both foolish as well as perilous, and even fatal to aspire. If an unrestrained imagination urges us, our proper course is to oppose it with these words, “It is not good to eat much honey: so for men to search their own glory is not glory,”(Prov. 25:27). There is good reason to dread a presumption which can only plunge us headlong into ruin. 오히려(rather rðr) 그것을 열망하는(aspire spir) 것이 위험할(perilous prls)뿐만 아니라 어리석기(foolish fːli)도 하고 심지어 치명적(fatal fitl)이기까지 한 지식을 쫓는 탐구(search sːrt)를 자진해서(willingly wliŋli) 삼가도록(abstain æbstin) 합시다. 만일 억제되지 않은(unrestrained nristrind) 상상(imagination imædnin)이 우리를 다그치게(urge ːrd) 된다면 우리의 올바른(proper prpr) 행로는 “꿀을 많이 먹는 것이 좋지 못하고 자기의 영예를 구하는 것이 헛되니라”(잠 25:27)는 말씀과 반대가 될 것입니다. 다만 우리를 앞뒤 가리지 않고(headlong hdlːŋ) 파멸로 몰아넣을 수 있는 억측(presumption prizmpn)을 두려워할(dread dred) 합당한(good gud) 이유(reason rːzn)가 거기(말씀)에 있습니다. 칼빈은 우리가 말씀의 경계들을 넘어가는 순간 우리는 어둠 속에서 경로를 벗어나게 되고 그리고 때때로 넘어지고 길을 잃고 떨어지는 것이 틀림없다는 것을 주의 말씀이 우리에게 보여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칼빈의 가르침에 따라 개혁주의를 따르는 우리의 좌우명 즉 모토는 말씀이 가는 데까지 가고 말씀이 멈추는 데서 멈춘다(Where the Word goes we should go, where the Word stops we should stop)입니다. 우리에게도 이것이 우리의 좌우명이 되도록 합시다. “꿀을 많이 먹는 것이 좋지 못하고 자기의 영예를 구하는 것이 헛되니라”(잠 25:27)는 말씀처럼 되지 않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러기 위해 말씀이 우리의 등대가 되어야 합니다. 영영 사전은 등대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A lighthouse is a tower with a powerful light that is built on or near the shore to guide ships away from danger.등대(lighthouse lithus)는 배를 위험에서 멀리 떨어지도록(away wi) 안내해주기 위해 해안(shore ːr) 가까이 세워진 강력한(powerful purfl) 빛을 비추는 탑(tower tur)이다. 그래서 칼빈은 『기독교강요』 제3권 제21장 2항에서 성경의 경계를 벗어난 해석을 하려는 자세에 대해 가르칩니다. “It(the word of God) will show us that the moment we go beyond the bounds of the word we are out of the course, in darkness, and must every now and then stumble, go astray, and fall.”“우리가 말씀의 경계들을 넘어가는 순간 우리는 어둠 속에서 경로를 벗어나게 되고 그리고 때때로 넘어지고 길을 잃고 떨어지는 것이 틀림없다는 것을 주의 말씀이 우리에게 보여줄 것입니다.” 2020-10-05 주의 말씀이 배를 인도하는 등대처럼 우리의 눈과 마음을 밝혀 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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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독교강요 영어수업
    2020-10-05
  • 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21_ 주님의 만찬
    Christ with the Eucharist, Vicente Juan Masip, 16th century 주님의 만찬 주님께서 잡히시던 날 제자들과 더불어 저녁식사를 나누셨다. 요새말로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회식을 하신 셈이었다. 그러니 모처럼 제자들로서는 제법 걸게 차린 식사였다. 그러나 그것은 주님과 나눈 마지막 저녁 식사임을 제자들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이 마지막 만찬을 계속 기념하는 것을 주님의 저녁 식사 즉 성만찬이라고 한다. 이것이 그리스도교에서 세례 말고 또 하나의 성례가 되었다. 이 성만찬에 대한 그리스어 명칭이 유카리스트(Eucharist)였다. 그 뜻은 ‘감사한다(to give thanks)’이다. 이를테면 주님의 만찬은 일종의 감사제였다. 처음에는 성만찬이 진짜 식사였다. 감정표현이 솔직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게걸스레 너무 많이 먹고 마신다고 툴툴거렸다. 그래서 사도는 교인들에게 점잖은 권면을 하나 해주었다. 그것은 성만찬을 먹으러 교회에 오기 전에 집에서 뭔가 먹고 배를 좀 채워오라는 것이었다. 사실 20세기 말엽을 한국교회에서 보내고 있는 우리들은 어떻게 보면 매 주일 초대교회식의 성만찬을 즐기고 있다고 봐야겠다. 우리는 늘 상 대 예배를 마치기가 무섭게 예배당의 지하실이나 별실로 몰려가 그들먹한 점심들을 양껏 뱃속에다 밀어 넣고 있으니 말이다. 이렇게 말하면 입이 뭐만큼 나와 우리는 기껏해야 국수밖에 못 먹는데 하는 교인도 있겠지만서두... St Michael the Archangel, Findlay, OH - bread and wine crop 어쨌든 얼마 안 가서 이런저런 이유로 해서 성만찬의 진짜 식사는 모습을 감추게 되었다. 그 대신에 오늘날과 같은 적은 양의 떡과 포도주로 대체됐다. 그리스도인들은 이 감질날 만큼의 떡과 포도주가 아주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믿었다. 초대교회 때 성만찬 시 사용된 다음과 같은 기도문이 있다. 먼저 잔을 위해 기도드립니다. 우리의 아버지시여 당신의 종 다윗의 거룩한 포도나무에 대해 당신께 감사드립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그 거룩한 포도나무를 알려주셨습니다. 당신에게 영원히 영광을 돌리옵니다. 뗀 떡을 위하여 기도드립니다. 당신의 아들 예수님을 통하여 우리에게 알려주신 생명과 지혜에 대해 우리의 아버지 당신에게 감사드립니다. 당신에게 영원히 영광을 돌리옵니다. 떼어진 떡이 산들에 씨앗으로 뿌려진 뒤에 함께 모여 한 덩어리가 됐던 것처럼 당신의 교회가 땅의 쪼가리들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함께 모여지게 해주소서.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영광과 권세가 당신의 것이기 때문이옵니다. 주님과 더불어 식사를 하는 이 성만찬 예식에서 눈물을 글썽이는 집례자들이 적지 않다. 감사제로 드리는 이 성례에 참여하는 세례 교인들은 사실 그리스도교의 정식회원으로서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게 된다. 그러나 이 식사를 권하는 사람이 눈물을 섞어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게 되면 주님의 식사에 초대받는 세례교인들도 덩달아 목이 메어 얼마 되지도 않은 식사를 보릿고개 넘기듯 해야 한다. 초대교회의 성만찬 기도를 통해 엿볼 수 있듯이 이 예식을 통하여 모든 신자들이 한 덩어리 떡이 되고 한 줄기 포도나무가 되는 뜻을 되새겨야 할 것 같다. 하나님이신 주님의 만찬에 초대받아 그의 살과 피로 만들어진 음식을 먹는 사람들이 전라도니 경상도니 하는 것은 얼마나 객쩍은 일들인지... 2020-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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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야기 세계 교회사
    2020-10-03
  • 기독교강요 영어 수업 - Lesson X 어떤 사람은 구원에 그리고 다른 사람은 멸망에
    1589년 제네바성경의 문답 형식 예정론 Lesson X 어떤 사람은 구원에 그리고 다른 사람은 멸망에Some to salvation and others to destruction 주여, 구원의 때가 왔습니다.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마지막 예배들이 무르익도록 명해주시고 이틀만 더 은혜의 날을 베푸시어 믿음 열매들의 무르익음을 재촉하시고 진한 꿀물에는 마지막 회개가 스미게 하소서. 지금 믿음이 없는 사람은 무섭게 더운 이 여름 예배를 드리지 않습니다. 더위 속 혼자인 사람은 그렇게 오래 남아 깨어서 믿음과 뜨겁게 다투며 긴 변명으로 부채질할 것입니다. 혹간 태풍이 길을 잃은 날에는 강한 불안이 가로수들 사이로 이리저리 헤맬 것입니다. 풍경이 계절이 세상이 우리만 빼고 자전하는 듯 시간은 끊임없이 앞을 향해 뻗어나가는데 예정에 없던 어느 한 순간에 붙들린 채 제자리에 멈춰 설 수밖에 없을 때 그때 우리는 어디로 갈 수 있을까요. 마음 안에선 하얀 눈이 흩날리는데 바깥은 온통 붉은 여름일 때 말입니다. 김애란의 소설 『바깥은 여름』에 실린 일곱 단편 가운데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에서 주인공 명지는 남편 도경을 사고로 잃고 에든버러로 여행을 떠납니다. 그녀는 남편을 잃은 후 ‘고통에 대해’ ‘인간에 대해’ 묻던 ‘나’가 끝까지 붙들고 있던 질문은 ‘나를 남겨두고 어떻게 다른 사람을 구하려 자기 삶을 버릴 수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남겨질 사람은 생각하지 않은 채 계곡에 빠진 제자를 구하기 위해 어떻게 물속에 뛰어들 수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제법 알려진 관광지임에도 그는 관광 명소를 찾지 않고 신문을 보지 않고 운동을 하지 않고 친구를 사귀지 않고 티브이를 켜지 않고 운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숙소에 틀어박히다시피 한 그의 유일한 말벗은 스마트폰 인공지능 음성 앱이었습니다. 주위 인간들에게선 찾을 수 없던 예의를 갖춘 이 앱에게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되나요’라는 질문을 던지자 기계는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라고 반문합니다. 여행을 끝내고 돌아온 명지는 죽은 남편이 구하려 했던 학생의 누나한테서 “겁이 많은 지용이가 마지막에 움켜쥔 게 차가운 물이 아니라 권도경 선생님 손이었습니다는 걸 생각하면 마음이 조금 놓여요”라는 내용이 담긴 편지를 받습니다. 몸이 불편한 지용 누이가 서투르게나마 보내준 편지 덕분에 명지는 남편의 선택을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게 됩니다. 탁상공론을 좋아하는 신학자들이 어느 더운 날 모여 『바깥은 여름』에 나오는 학생을 구하려다 죽은 남편이 하나님의 예정에 의한 것이냐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한 것이냐에 대해 토론하고 있었습니다. 갈수록 논쟁이 뜨겁게 달아올랐습니다. 급기야 그들은 예정파와 자유의지파로 패가 갈리어 격렬하게 토론을 벌였습니다. 그런데 한 신학자가 어느 쪽에 가담해야 될지를 결정 못 하고 잠시 엉거주춤 서 있었습니다. 마침내 마음을 정한 그 신학자는 예정파가 있는 쪽으로 갔습니다. 그가 그 쪽으로 갔을 때 예정파의 신학자들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누가 당신을 이리로 보냈습니까. 그는 대답했습니다. 아무도 나를 보내지 않았습니다. 내 자유의지로 여기 왔습니다. 예정파의 사람들이 외쳤습니다. 자유의지라니요. 이쪽은 당신 자신의 자유의지로 올 수 있는 데가 아니요. 다른 데로 가보시오. 그는 몸을 돌려 자유의지파 쪽으로 갔습니다. 그가 그 쪽에 끼어들려고 하자 누군가 질문을 던졌습니다. 언제 당신은 우리와 함께하기로 결정했습니까. 그는 짜증난 얼굴로 퉁명스레 대꾸했습니다. 내가 결정하지 않았습니다. 저 쪽 사람들이 이리 보내서 왔습니다. 그들이 눈을 부라리며 외쳤습니다. 당신이 자신의 자유의지로 결정하지 않는다면 우리 쪽에 가담할 수가 없습니다. 그 사람은 예정파와 자유의지파 양 쪽에서 다 제외되고 말았습니다. 예정은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습니다. 예정은 하나님께서 피조물이 어떤 공로를 나타내기 이전에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선하신 뜻으로 구원받을 사람을 미리 정하시고 선택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구원받을 자들을 예정하셨음을 분명하게 확증하는 것으로 보이는 말씀들이 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에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을 때 사도 누가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행 13:48 또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롬 8:28-30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구원을 받은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는 것에 대해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느니라 그런즉 어떠하냐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우둔하여졌느니라 롬 11:6-7 이 말씀에서 바울은 택하심을 입은 자가 구원을 얻은 반면에 택하심을 입지 못한 자는 구원을 얻지 못하고 우둔하여졌다고 주장합니다. 바울은 또한 하나님의 예정이 이 세상의 창조 이전에 이루어졌음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엡 1:4-6 더 나아가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살전 1:4-5 이 말씀에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사람들이 믿게 된 것은 하나님의 선택하신 예정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분명하게 알 수 있는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의 예정을 받았느냐 못 받았느냐의 여부는 현재의 믿음을 통해서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지금 우리가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으면 창조 이전에 우리가 택함을 받은 것이고 믿지 않으면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고 부르신 이유를 우리의 행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은혜 때문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딤후 1:9 『기독교강요』 제3권 제21장 1항에서 칼빈은 예정론을 다음의 표제 하에 다루고 있습니다. BOOK THIRD CHAPTER 21 OF THE ETERNAL ELECTION, BY WHICH GOD HAS PREDESTINATED SOME TO SALVATION, AND OTHERS TO DESTRUCTION.영원한(eternal itːrnl) 선택(election ilkn)에 대해, 그것으로(eternal election)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은 구원(salvation sælvin)에 그리고 다른 사람은 멸망(destruction distrkn)에 이르도록 예정하셨습니다(predestinate pridstnit). The covenant of life is not preached equally to all, and among those to whom it is preached, does not always meet with the same reception. This diversity displays the unsearchable depth of the divine judgment, and is without doubt subordinate to God's purpose of eternal election. 생명의 언약(covenant kvnnt)이 모두에게 동등하게(equally ːkwli) 전파된 것이 아니고 그리고 그것이 전파된 사람들 가운데에도 동일한 입회허가(reception rispn)를 반드시 받았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not always 반드시…라고는 할 수 없다 The rich are not always happy. 부자라고 해서 반드시 행복하다고는 할 수 없다). 이 차이(diversity divːrsti)는 신성한(divine divin) 심판(judgment ddmnt)의 헤아릴 수 없는(unsearchable nsːrtibl) 심원함(depth depθ)을 나타내고 그리고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 목적을 확실히 중시하는 것입니다(subordinate sbːrdnit] ~ work to pleasure 일보다도 즐거움을 중시하다). But if it is plainly owing to the mere pleasure of God that salvation is spontaneously offered to some, while others have no access to it, great and difficult questions immediately arise, questions which are inexplicable, when just views are not entertained concerning election and predestination. To many this seems a perplexing subject, because they deem it most incongruous that of the great body of mankind some should be predestinated to salvation, and others to destruction. 그러나 만일 구원이 어떤 사람에게는 자동적으로(spontaneously spntinisli) 주어지면서 다른 사람은 그것에 전혀 접근조차 하지 못하는 것이 순전히(plainly pleinli) 하나님의 단순한 즐거움(pleasure plr) 때문이라면(owing to) 크고 난감한 의문들이 즉시(immediately imːditli) 일어나게(arise riz) 될 것입니다. 그리고 정당한 견해(view vjuː)들이 선택과 예정에 관해 받아들이지(entertain ntrtin) 못할 때 그것은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inexplicable inksplikbl) 의문(question kwstn)들이 될 것입니다. 많은 사람에게 이것은 당혹스러운(perplexing prplksiŋ) 주제(subject sbdikt)로 생각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어떤 사람에게는 구원을 예정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멸망을 예정했다는 것은 거대 집단(great body) 인류(mankind mænkind)의 생각과 대부분(most moust) 일치가 안 되는(incongruous inkŋgrus) 말이라고 간주할(deem diːm) 것이기 때문입니다. (...중략) But before I enter on the subject, I have some remarks to address to two classes of men. 그러나 본 주제에 들어가기(enter ntr) 전에 나는 두 부류(class klæs) 사람들에 대한 어떤 소견(remark rimːrk)을 말하고자 합니다. The subject of predestination, which in itself is attended with considerable difficulty is rendered very perplexed and hence perilous by human curiosity, which cannot be restrained from wandering into forbidden paths and climbing to the clouds determined if it can that none of the secret things of God shall remain unexplored. 그 자체로 상당한(considerable knsdrbl) 어려움(difficulty dfiklti)이 수반되는(attend tnd) 예정의 주제는 아주 난감하게(perplex prplks) 만들고(render rndr) 그리고 금지된(forbidden frbdn) 길(path pæθ)들에 들어가고 구름 위로 올라가 헤매는 것을 억제할 수 없는 인간의 호기심(curiosity kjristi)이 생길 위험이(perilous prls) 있기 때문에 할 수 있다면(if it can) 하나님의 비밀(secret sːkrit)에 속하는 것(thing θiŋ)들은 아무도 탐구하지 못하게(unexplored niksplːrd) 그대로 두자는(remain rimin) 결심을 했습니다(determine ditːrmin). When we see many, some of them in other respects not bad men, every where rushing into this audacity and wickedness, it is necessary to remind them of the course of duty in this matter. 어디든 이러한 무모함(audacity ːdsti)과 사악함으로 돌진하는(rush r) 많은 사람을 우리가 볼 때 그들 가운데 다른 점(respect rispkt)들에서 나쁜 사람들이 아닌 사람들도 있지만 이 문제(matter mtr)에 있어서는 (지켜야 할) 의무(duty djːti)의 행로(course kːrs)를 그들에게 상기시켜 줄 필요(necessary nssri)가 있습니다. First, then, when they inquire into predestination, let then remember that they are penetrating into the recesses of the divine wisdom, where he who rushes forward securely and confidently, instead of satisfying his curiosity will enter in inextricable labyrinth. 그러면 먼저 그들이 예정(predestination pridstnin)에 대해 문의할(inquire inkwir) 때 그들이 신성한 지혜의 깊숙한 곳(recess rːses)으로 침투하고 있다는(penetrate pntrit) 것을 상기시켜(remember rimmbr) 주세요. 그가 안심하고 자신 있게 앞으로 돌진하는 곳은 그의 호기심(curiosity kjristi)을 만족시키기는커녕(instead of satisfying) 헤어날 수 없는(inextricable inkstrikbl) 미로(labyrinth lbrnθ)에 들어갈(enter ntr) 것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For it is not right that man should with impunity pry into things which the Lord has been pleased to conceal within himself, and scan that sublime eternal wisdom which it is his pleasure that we should not apprehend but adore, that therein also his perfections may appear. Those secrets of his will, which he has seen it meet to manifest, are revealed in his word--revealed in so far as he knew to be conducive to our interest and welfare.왜냐하면 인간이 주님께서 자신 속에 감추고(conceal knsːl) 싶어하신(please pliːz) 것들에 벌을 받지 않고(impunity impjːnti) 파고들고(pry prai) 그리고 우리가 이해해야(apprehend æprihnd) 하는 것이 아니라 경모해야(adore dːr)하는 숭고하신(sublime sblim) 영원한 지혜를 자세히 조사하겠다고(scan skæn) 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도(therein ðεrn) 주의 완전하심(perfection prfkn)이 나타날(appear pr) 수 있는 데 말입니다. 주께서 나타내기(manifest mnfst) 위해 보여주고 계시는 그의 뜻이 담긴 이 비밀들은 그가 아시는 한에 있어서(in so far as) 우리의 이익(interest ntrist)과 복지(welfare wlfr)에 이바지하기(conducive kndjːsiv) 위해 계시된(reveal rivːl) - 그의 말씀 속에 계시된 것들입니다. 칼빈은 예정과 유기에 대한 논증을 이론적으로 알기 위해 성경의 경계를 벗어나지 말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예정이 어떤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이라면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이해해야 될까요.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유기(遺棄)라고 하는데 이렇게 정의할 수 있습니다. 유기(reprobation reprbin)란 창세 전에 하나님이 어떤 사람은 구원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공의를 나타내기 위하여 그들의 죄를 심판하기로 정하신 하나님의 주권적인 결정입니다. 여러 가지 면에서 유기 교리는 성경의 모든 가르침 가운데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렵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교리입니다. 성경은 이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하지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방탕한 것으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 유 4 또한 바울 사도도 이것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 하리니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어리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 하리요 롬 9:17-23 우리가 유기 교리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겠지만 그것을 생각할 때마다 두려워 떨면서 하나님의 공의를 받아들이고 믿는 태도를 지녀야 할 것입니다. 선택의 근거는 하나님의 은혜인 반면 유기의 근거는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다시 말해서 선택의 원인은 하나님에게 있지만 유기의 원인은 죄인들에게 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선택과 유기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생각할 때마다 우리의 삶에 그것을 적용시켜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날마다 자신에게 물음을 던져야 합니다. 나는 왜 그리스도인인가.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성경이 가르치는 예정 교리는 내가 그리스도인이 된 까닭이 영원 전에 하나님이 그의 사랑을 베풀어 주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기로 작정하셨을까요. 그것은 내가 사랑받을 만한 어떤 선한 것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설명이 필요 없는 이유입니다. 이 진리를 깨달으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더욱 겸손해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요구할 아무런 자격이 없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에 기인합니다. 이 은혜에 우리가 보답할 수 있는 행위는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찬송하는 일 뿐입니다. 그래서 소요리문답 1조는 이렇게 묻고 답합니다. 1.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인가.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입니다 내 육체와 마음은 쇠약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 시 73:25-2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아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롬 11:36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전 10:31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알기 이전에 자신에게 유익하던 것을 배설물과 같은 해로운 것으로 여기고(빌 3:8) 하나님과 그의 뜻을 추구하기 위하여 언제나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하는 삶의 습관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이러한 삶의 습관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을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으로 삼는 삶의 태도입니다. 그 이유는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생활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칼빈의 『기독교강요』는 사람이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는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는 삶을 살 수가 없다고 가르칩니다. 이러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성경이 가르치는 구원의 진리를 배워야 합니다. 즉 인생의 목적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알아야 합니다. 2020-09-21
    • G.QT
    • 기독교강요 영어수업
    2020-0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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