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3(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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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더굳뉴스] 리틀메시지 _에스더Esther
    에스더Esther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한번도 언급되지 않지만 모든 사건에 하나님의 섭리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페르시아인들은 주전 539년 바빌론을 정복했다. 에스더의 사건들은 수산에서 일어났다. 그곳에 왕의 겨울 궁전이 있었다. 에스더의 아하수에로Ahasuerus라는 명칭은 이집트의 파라오가 왕의 대명사인 것처럼 페르시아의 최고 통치자의 칭호였다. 그러므로 에스더를 왕비로 삼은 페르시아의 아하수에로는 크세르크세스 1세였을 것이다. 에스더서의 사건들은 크세르크세스 1세 재위 3년부터 12년까지 10년 동안에 일어난 일들이다. 성경에서 여성의 이름을 따른 책은 에스더와 룻뿐이다. 룻은 유대인과 결혼한 이방 여인이었다. 반면에 에스더는 이방인과 결혼한 유대 여인이었다. 둘 다 신앙과 용기의 여인들이었다. 둘 다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룻은 다윗의 조상이 되는 아들을 낳았다. 에스더는 유대인을 전부 죽이려는 원수를 막았다. 에스더가 그 일의 결심을 위해 말한 한마디는 죽으면 죽으리라였다. 이런 시가 있다. 가지가 담을 넘을 때 _정끝별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이를테면 수양의 늘어진 가지가 담을 넘을 때 그건 수양 가지만의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얼굴 한번 못 마주친 애먼 뿌리와 잠시 살 붙였다 적막히 손을 터는 꽃과 잎이 혼연일체 믿어주지 않았다면 가지 혼자서는 한없이 떨기만 했을 것이다 한 닷새 내리고 내리던 고집 센 비가 아니었으면 밤새 정분만 쌓던 도리 없는 폭설이 아니었으면 담을 넘는다는 게 가지에게는 그리 신명 나는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가지의 마음을 머뭇 세우고 담 밖을 가둬두는 저 금단의 담이 아니었으면 담의 몸을 가로지르고 담의 정수리를 타 넘어 담을 열 수 있다는 걸 수양의 늘어진 가지는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목련 가지라든가 감나무 가지라든가 줄장미 줄기라든가 담쟁이 줄기라든가 가지가 담을 넘을 때 가지에게 담은 무명에 획을 긋는 도박이자 도반이었을 것이다 사람은 새로운 영역과 미래로의 진입을 위해 첫발을 떼는 순간 두렵고 떨리는 마음과 희생을 각오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렇듯 가지가 담을 넘어서는 데에도 용기가 있기 때문에 가능할 것이다. 그것을 믿음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믿음이 없다면 어떻게 한낱 가지나 줄기가 이 세상의 단단한 담과 깊은 절망의 절벽을 건너갈 수 있겠는가. 에스더서의 주요 교훈은 한낱 가지나 줄기도 담을 넘는 데 용기가 필요한 것처럼 하나님의 뜻을 위해 죽음을 각오한 용기가 필요할 때가 있다는 것이다. 세상 나라들의 주권자는 하나님이시므로 주의 백성은 주의 뜻에 복종하고 따라야 한다. 2024-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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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27
  • [더굳뉴스] 리틀메시지 _느헤미야Nehemiah
    짐실은 노새 느헤미야Nehemiah는 그 공동체를 이어받아 외적 안정을 확보했다. 반면 에스라는 바빌론에서 돌아온 새 공동체의 영적 안정을 확립했다. 그는 아버지가 하가랴이고 형제가 하나니라는 것 말고는 알려진 게 없다. 아마 그의 할아버지는 예루살렘이 멸망했을 때 바빌론으로 끌려온 포로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페르시아에서 태어났을 것이다. 느헤미야서의 생생한 묘사는 그의 개인 일기에 근거한 자료였을 것이다. 그는 아닥사스다 왕의 술 관리관이었을 때 예루살렘 형편이 아주 어렵다는 말을 들었다. 그는 예루살렘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리고 얼마 뒤 그는 왕의 술 관리관이 되었다. 이런 시가 있다. 기도 _라반드라나트 타고르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위험에 처해도 두려워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게 하소서 고통을 멎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고통을 이겨 낼 가슴을 달라고 기도하게 하소서 생의 싸움터에서 함께 싸울 동료를 보내달라고 기도하는 대신 스스로의 힘을 갖게 해달라고 기도하게 하소서 두려움 속에서 구원을 갈망하기보다는 스스로 자유를 찾을 인내심을 달라고 기도하게 하소서 내 자신이 성공에서만 신의 자비를 느끼는 겁쟁이가 되지 않도록 하시고 나의 실패에서도 신의 손길을 느끼게 하소서 그는 유다 총독으로 임명받아 주전 445년 성벽을 재건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부임했다. 하나님의 소명을 성취하기 위한 그의 깊은 신앙은 그의 기도와 강한 확신으로 드러난다. 그 땅에 회복이 이어졌지만 유대 민족은 시련과 비난의 시기를 겪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고 계셨다. 느헤미야의 강조는 하나님을 신뢰하라는 것이었다. 2024-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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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20
  • [더굳뉴스] 리틀메시지 _에스라Ezra
    솔로몬의 왕궁건설 에스라Ezra는 역대기하가 끝나는 곳에서 시작한다. 이스라엘을 정복한 바빌론이 주전 587년에서 586년에 많은 백성을 잡아가고 도시와 성전을 파괴했다. 주전 538년 페르시아 왕 고레스가 유대인들이 그들의 땅으로 돌아가 성전 재건을 허락하는 조서를 공포했다. 그때 스룹바벨의 인솔로 5만여 명이 돌아왔다. 바빌론 포로 생활 70년이 끝났다. 어려움이 많았고 지체되기는 했지만 주전 515년 성전이 완성되었다. 이런 시가 있다. 담쟁이 _도종환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 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율법학자 에스라는 주전 458년 2천여 명의 유대인과 예루살렘에 왔다. 에스라의 주요한 일은 율법의 연구와 해석이었다. 그는 자신의 일을 통해 새 시대 공동체의 영적 지도자가 되었다. 바빌론 포로에서 돌아와 성전을 재건하는 이스라엘 백성은 도종환 시인이 노래하는 담쟁이 잎 같았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가 담쟁이 수 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가는 담쟁이에게 절망의 벽은 없어 보인다. 그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담긴 성경을 믿음으로 붙잡고 성전을 재건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절망의 벽은 없어 보였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독려하는 지도자 에스라가 없고 믿음의 동지적 연대가 없었다면 이스라엘 백성은 그 척박하고 방해가 많은 땅에서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2024-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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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3
  • [더굳뉴스] 리틀메시지_역대기하2Chronicles
    바벨론 포로들 역대기하2Chronicles는 다윗 자손의 통치를 크게 다룬다. 그 기간은 솔로몬 시대부터 주전 586년 시드기야 치하 예루살렘 함락까지다. 역대기서 전체에 걸쳐 남 왕국 유다를 집중적으로 강조한다. 남 왕국 유다의 흥망성쇠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지 안지키는지에 따라 조명이 되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께 신실하지 못하고 그들의 신앙의 의무에 태만해서 망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고향을 떠나 머나먼 바빌론으로 끌려갔다. 이런 시가 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_이상화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자욱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를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쁘게나 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매던 그 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 다오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웃어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지폈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고 오는 봄은 누구도 빼앗을 수 없다. 그것이 천지만물을 들썩이게 하는 봄의 풋내이고 봄의 푸른 웃음이다. 그러나 들을 빼앗긴 자에게 오는 봄은 절박하다. 봄조차 빼앗기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봄의 답답함이고 봄의 푸른 설움이다. 들의 봄과 인간의 봄 자연의 봄과 시대의 봄은 이렇게 갈등한다. 온몸에 햇살을 받고 이들을 발목이 저리도록 실컷 밟아보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이야말로 내 나라 내 땅에 대한 지극한 사랑의 표현이다. 떠나온 길이 멀면 돌아갈 길도 멀다. 바빌론의 유대인들이 그랬을 것이다. 역대기하 마지막에 유대인의 예루살렘 귀환을 허락하는 고레스의 조서가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의 백성이 믿음의 불성실로 하나님의 징벌을 받아 고향을 떠나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하나님의 은혜로 그들의 고향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2024-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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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06
  • [더굳뉴스] 리틀메시지_ 역대기상1Chronicles
    바빌로니아 큰 물가 마을 역대기상1Chronicles과 역대기하는 원래 히브리어 원문에서 한 권이었다. 히브리어의 구약 성경을 그리스어로 번역한 사람들이 그것을 두 권으로 나누었다. 본래의 제목은 뒤에 남은 일들이라는 뜻이었다. 그것은 사무엘서와 열왕기서에 들어있지 않은 작은 이야기들이 들어있기 때문이었다. 마찬가지로 영어 제목 '크로니클스Chronicles'도 히브리어 제목처럼 '일상의 일들'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이것은 역대기서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 특별히 왕들의 생활들에서 일상의 중요한 일들을 차례대로 이야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초점은 다윗과 유다 왕국에 있다. 그리고 그 관점은 제사장들의 것이다. 유대 민족은 신앙의 불성실로 망해 포로가 되어 예루살렘에서 바빌론으로 끌려갔다. 이런 시가 있다. 바빌론 강가에서 _보니 엠 바빌론 강가에 우리는 앉아서 우리는 울었어요 시온을 생각하며 바빌론 강가에 우리는 앉아서 우리는 울었어요 시온을 생각하며 사악한 무리들이 우리를 포로로 잡아왔어요 그리고 우리에게 노래를 부르라고 했지요 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주의 노래를 부를 수 있나요 이런 낯선 땅에서 사악한 무리들이 우리를 포로로 잡아왔어요 그리고 우리에게 노래를 부르라고 했지요 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주의 노래를 부를 수 있나요 이런 낯선 땅에서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말과 우리 가슴에서의 명상을 여기 오늘밤 그대 앞에서 받아주어요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말과 우리 가슴에서의 명상을 여기 오늘밤 그대 앞에서 받아주어요 바빌론 강가에 우리는 앉아서 우리는 울었어요 시온을 생각하며 바빌론 강가에 우리는 앉아서 우리는 울었어요 시온을 생각하며 바빌론 강가에 바빌론의 어두운 눈물 우리는 앉아서 당신은 노래를 불렀죠 우리는 울었어요 사랑의 노래를 불러요 시온을 생각하며 바빌론 강가에 바빌론의 거친 작은 조각들 우리는 앉아서 당신은 사람들이 우는 것을 듣지요 우리는 울었어요 그들은 그들의 하나님이 필요해요 시온을 생각할 때 오 힘을 가져요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 남쪽 약 110km 떨어져 있는 유프라테스 강가에 바빌론이란 고대 국가가 번성했었다. 바빌론이 유대 왕국을 정복하여 많은 횡포를 저질렀다. '바빌론 강가에서'라는 노래는 바빌론에 정복당한 유대인들의 심정을 노래한 메시지가 그 내용이다. 이 노래는 시편 137편을 토대로 작사 작곡을 하였다. 바빌론 포로생활 때 유대인들의 슬픔과 시온의 그리움을 노래한 시가 시편 137편이다. 이 노래를 부른 가수들은 여성 3인과 남성 1인으로 구성된 4인조 보컬 '보니 엠'이다. 그들은 자메이카 출신의 영국 가수들이다. 그들은 악기를 전혀 다루지 않고 순수한 보컬만으로 서인도 제도의 특유한 창법을 구사하는 게 특징이다. 그들은 1978년 이 노래를 불러 세계적인 인기를 얻었다. 역대기상과 역대기하는 바빌론 포로 이후 이스라엘 땅에 돌아온 유대인들에게 중요했다. 그들은 다윗의 신앙 본보기가 필요했고 성전에 대한 강조는 그것을 재건할 때 필요했다. 역대기서는 변화와 어려움의 시기에 성전을 재건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에게 격려와 힘을 주었다. 그것은 다윗의 신앙과 솔로몬의 지혜와 성전 건축의 영광스러운 역사를 통해서였다. 2024-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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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31
  • [더굳뉴스] 리틀메시지_ 열왕기하2Kings
    예수님과 파도와 배 열왕기하2Kings는 이스라엘 왕국과 유다 왕국이 무너지고 사로잡히는 것을 기록한다. 영적 타락은 정치와 사회의 악화로 이끈다. 선지자들의 끊임없는 사역과 하나님의 적지 않은 징계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왕국과 유다 왕국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심판을 받아야 했다. 이런 시가 있다. 어부의 기도 _작자 미상 주님 내가 죽는 날까지 물고기를 잡을 수 있게 하시고 마지막 날이 찾아와 주님이 던진 그물에 내가 걸렸을 때 바라옵건대 쓸모없는 물고기라 여겨 버림을 당하지 않게 해 주소서 예수 그리스도는 의로운 왕이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한 대제사장과 말씀의 선지자이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님으로 늘 바라보고 살 때 주님이 던진 그물에 걸리면 버림을 당하지 않게 될 것이다. 열왕기서는 개인이나 나라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따라야 한다는 것을 교훈하는 역사의 기록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물론이고 특별히 왕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의 행위는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대한 영적인 신실함과 순결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 준다. 이스라엘의 지도자인 그들의 반복되는 영적인 실패의 이야기는 다윗의 왕위를 이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드러낸다. 2024-03-23 신국판 592P @23,000원 /교보.알라딘.예스24.쿠팡 판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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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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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야기 세계 교회사 31 - 니케아 신조
    니케아 신조 아마 직전 총회장이셨던 것 같다. 그는 두루마기 차림의 설교 중에 찬송가를 자작하여 부르시는 목사님이셨다. 우리 교단 가장 큰 교회의 목사님이시기도 했다. 그리고 바로 그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는 총회장이셨다. 그가 이제 바로 뒤를 이은 총회장한테 나무망치와 받침을 물려주고 증경 총회장이 되어 바깥으로 나오셨다. 몇 분 총대 목사님이 이 증경 총회장과 맞닥뜨렸다. 그들의 만남과 대화는 여느 청년들이 모여 노닥거리는 모양과 진배없었다. 햇병아리 신학생의 눈에는 진기한 구경거리가 아닐 수 없었다. 거기에는 진솔한 인간의 모습이 우러나고 있었기 때문이다.요즘의 세태처럼 권력과 부귀와 장수 나부랭이보다는 지혜를 하나님께 구한 솔로몬 왕이 이렇게 말했다. “해 아래 새것이 없다.” 그런데 주 후 325년 니케아에서 인간 역사상 유례없는 일이 발생했다. 다시 말해 해 아래 새로운 일이 일어났다. 바벨탑 이래 인간들이 모이면 쓰잘 데 없는 일을 일삼기 일쑤인데 니케아 총회에서는 전혀 달랐다. 인간들이 웅성웅성 모여 인류 최초로 신에 대한 협의와 결정을 내렸다. 니케아 총회는 부활절 날짜를 결정했다. 부활절은 봄이 시작되고 밤과 낮의 길이가 같아지는 날 이후 첫 번째 보름달이 지난 첫 번째 주일로 결정했다. 이것은 유대인과 이방인과 그리스도인의 관습이 짬뽕 된 것이었다. 의견이 분분했던 부활절이 확정됐다. 이어서 니케아 총회는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관계에 대한 논란도 종지부를 딱 찍었다. 이것은 아다나시우스의 의견을 따라서 결정되었다. 이로써 아리우스의 해괴한 주장은 빛을 잃고 불가사의한 삼위일체는 번쩍거리게 되었다. 이 내용을 담은 걸 니케아 신앙고백이라고 한다. 물론 이 신조가 몇 년 뒤에 작성되었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니케아 신앙고백이라고 하는 것은 그게 니케아 총회의 사상을 참으로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이게 영국 공동기도서에 번역되어있는 걸 한글로 옮기면 이렇다. “나는 하늘과 땅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만물의 창조주 전능하신 한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독생 성자이시며 만세 전에 성부와 함께 계셨고 하나님의 하나님, 빛의 빛이시며 참되신 하나님의 참되신 하나님이신, 나셨지만 만들어지지 않으셨고, 성부와 한 속성을 지니셨고, 만물을 만드셨고, 우리 인간을 위해 우리 구원을 위해 하늘에서 내려오셨고, 그리고 동정녀 마리아의 성령을 통해서 인간이 되신 한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예수님은 본디오빌라도 치하에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고난을 받으사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사흘 만에 예수님은 성경 말씀대로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늘에 오르사 성부 오른쪽에 앉아 계시다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기 위해 영광스럽게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의 나라는 영원할 것입니다.나는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오신 생명의 주와 수여자이신 성령님을 믿습니다. 성령님은 성부와 성자와 함께 경배와 영광을 받으며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십니다.” 2020-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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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야기 세계 교회사
    2020-12-13
  • 기독교강요 영어 수업 - 제오 계명 효도
    The Return of the Prodigal Son Lesson XVII제오 계명 효도Fifth Commandment Flial Duty 부모님과 함께하면 돌아보니 가시밭길 그 길이 꽃길이었습니다. 부모님과 같이 걸으면 아픈 돌팍길 그 길이 비단길이었습니다. 부모님이 옆에 계시면 캄캄해 무서웠던 길 그 길이 빛으로 나아가는 길이었습니다. 부모님과 함께한 가장 훌륭한 시는 아직 씌어지지 않았습니다. 부모님과 같이 부르는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아직 불리지 않았습니다. 부모님이 옆에 계신 최고의 날들은 아직 살지 않은 날들입니다. 부모님과 보고 싶은 가장 넓은 바다는 아직 항해하지 않았고 가장 먼 여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고 불멸의 춤은 아직 추지 않았습니다. 부모님이 옆에 계시지 않을 때 가장 빛나는 별은 아직 발견되지 않은 별이고 무엇을 해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그때 내가 부모 되어 비로소 진정한 무엇인가를 할 수 있을까요. 부모님과 같이 걷지 않아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더 이상 알 수 없을 때 그때가 비로소 진정한 인생 여행의 시작일까요. 2016년 tvN에서 방영한 드라마 디어 마이 프렌즈(2016)는 노년의 삶을 인상 깊게 그려냈습니다. 마지막 방송이 나간 후 노희경 작가는 블로그에서 이런 소감을 적었습니다. “작가가 되어서 이렇게 잔인해도 되나. 드라마의 결말을 쓰며, 내 잔인함에 내가 소름이 돋았다. 아무리 포장해도 이 드라마의 결론은 부모님들, 자식들에게 의지하지 마세요, 우리 살기 바빠요, 그리니 당신들은 당신들끼리 알아서 행복하세요, 우리는 이제 헤어질 시간이에요, 정 떼세요, 서운해 하지 마세요, 어쩔 수 없잖아요, 그건 아닌가 싶었다. 그래서 세상의 모든 부모에게 쓰는 내내 끝난 후에도 참 많이 미안했다.” 독일 여성감독 도리스 되리의 영화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원제 Cherry Blossoms 벚꽃 Hanami 꽃놀이)에 이런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늘 일본에 가보고 싶었다. 후지산과 벚꽃을 그와 함께 꼭 한번 보고 싶었다. 남편없이 구경하는 건 상상할 수가 없다.” 이 영화의 첫 번째 대사이자 아내 트루디의 말입니다. 남편 루디와 함께 일본 후지산의 벚꽃을 보고 싶었다고 독백하던 아내 트루디는 남편의 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말을 의사로부터 전해 듣습니다. 그래서 멀리 산다는 핑계로 한동안 보지 못했던 자식들을 볼 겸 여행을 제안하죠. 베를린에 도착한 부부는 아들 내외와 손자 손녀가 사는 집으로 갑니다. 반가움도 잠시 아이들은 각자 게임에 빠져있고, 아들 내외 그리고 뒤이어 도착한 딸은 불편한 기색을 내비치죠. “왜 온 거야. 시간 없는데…” 그래도 오랜만에 모인 가족이니 시간을 내 시내 구경도 하고 함께 사진도 찍고 식사도 하죠. 하지만 부모는 이미 너무 커버린 자식들이 버겁고 자식은 이제 귀찮아진 부모와 같이 있는 시간이 불편합니다. 부부는 자식에게 폐 끼치는 것 같은 느낌에 자리를 뜨죠. 자식들은 그런 부모를 보며 화를 냅니다. 그러곤 돌아서서 죄책감에 눈물짓습니다. 마음은 그렇지 않은데 왜 그렇게밖에 말하지 못하는지... 그들의 행동을 눈치챈 트루디는 자기들만의 여행을 바다로 가자고 루디를 보챕니다. 도착한 발트해 파도소리에 잠을 못이루겠다고 불평하는 루디. 그리고 그런 루디를 타이르며 함께 춤추고 즐기길 원하는 트루디. 그날 밤을 그렇게 지새고 어젯밤 시끄럽게 쳐대던 파도소리가 고요해졌다며 아내 트루디를 깨우던 루디. 그러나 그 파도처럼 루디는 고요하게 잠들어 버렸습니다. 이 때문에 또 가족이 모이게 됩니다. 도쿄에 거주하던 막내아들까지요. 자신을 희생해가며 가족들을 아껴봐 주던 아내였기에 루디의 슬픔은 더욱더 큽니다. 장례를 치르는 중에 바다를 보며 그는 중얼거립니다. “정말 고요하군....” 장례식에서 자식들은 이제 와 자신이 아무것도 해 드릴 수 없음에 눈물 흘립니다. 그러면서 한편 남겨진 아버지에 대한 부담을 느끼죠. 그들은 바쁘고 엄마는 이제 없고 아버지는... 아버지는 어쩌지... 아버지 루디는 하루살이의 하루의 삶은 천국 그래서 그들의 하루 비행은 행복이라는 말을 떠올립니다. 그러나 그의 그런 슬픔을 자식들은 크게 신경 쓰지 않습니다. 오히려 남아있는 것이 아버지임을 불평하고 서로에게 미루며 마치 짐이 하나 생긴 듯 행동을 취합니다. 아버지 그 이름만으로도 자녀에겐 새처럼 날개를 펴고 마음대로 날 수 있는 하늘입니다. 어머니 그 이름만으로도 자녀에겐 새처럼 날개를 접고 포근히 잠들 수 있는 보금자리인데도 말입니다. 몸빛이 검고 울음소리가 흉측하여 죽음을 알리는 새로 전 세계에 알려진 까마귀는 자기 어미에게 먹이를 물어다 줍니다. 그래서 까마귀를 효조(孝鳥)라고 해서 일본에서는 상당히 귀하게 여기는 까닭에 흔히 볼 수 있는 새이기도 합니다. 농경사회에서는 노쇠한 부모를 자식이 까마귀처럼 공양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현대사회에서는 그러한 의미가 좀 쇠퇴한 감이 있기는 하더라도 그 정신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부모를 공경하는 효도의 의미는 물질과 육체적인 섬김은 물론이고 부모의 뜻과 생각을 존중한다는 데 더 무게를 두고 있습니다. 그 의미에 대해 칼빈은 『기독교강요』 제2권 제8장 36항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HONOUR THY FATHER AND THY MOTHER: THAT THY DAYS MAY BE LONG UPON THE LAND WHICH THE LORD THY GOD GIVETH THEE. 36. Wherefore, we ought to have no doubt that the Lord here lays down this universal rule--viz. that knowing how every individual is set over us by his appointment, we should pay him reverence, gratitude, obedience, and every duty in our power. And it makes no difference whether those on whom the honour is conferred are deserving or not. Be they what they may, the Almighty, by conferring their station upon them, shows that he would have them honoured. The commandment specifies the reverence due to those to whom we owe our being. This Nature herself should in some measure teach us. For they are monsters, and not men, who petulantly and contumeliously violate the paternal authority. Hence, the Lord orders all who rebel against their parents to be put to death, they being, as it where, unworthy of the light in paying no deference to those to whom they are indebted for beholding it. And it is evident, from the various appendices to the Law, that we were correct in stating, that the honour here referred to consists of three parts, reverence, obedience, and gratitude. The first of these the Lord enforces, when he commands that whose curseth his father or his mother shall be put to death. In this way he avenges insult and contempt. The second he enforces, when he denounces the punishment of death on disobedient and rebellious children. To the third belongs our Saviour's declaration, that God requires us to do good to our parents(Mt. 15). And whenever Paul mentions this commandment, he interprets it as enjoining obedience. 이 영어 원문의 대략적인 해석은 다음과 같습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출 20:12 36. 그렇기 때문에 주께서 여기서 한 일반적 원칙을 세우셨다는 것을 우리는 의심해서는 안 됩니다. 즉, 주의 임명으로 어떤 사람이 우리 위에 세워진 것을 알면, 우리는 그에게 경외와 순종과 감사를 드리며, 그밖에도 우리가 할 수 있는 의무를 다해야 합니다. 우리의 웃어른이 이런 존경을 받을 자격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문제가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이든지 그들은 하나님의 섭리로 그 지위에 있게 된 것이며, 이 일이 우리가 그를 공경하라는 하나님의 뜻을 증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이 세상에 낳아준 우리의 부모를 공경하라고 명백히 말씀하십니다. 자연 자체도 이 일을 우리에게 가르칠 것입니다. 반항이나 고집으로 부모의 권위를 무시하는 자들은 사람이 아니라 기괴한 동물입니다. 그래서 주께서는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는 자들은 모두 사형에 처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자기를 낳아 준 분들의 노고를 인정하지 않는 자들은 인생의 혜택을 받을 자격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 공경에 경의와 복종과 감사의 세 부분이 있다고 우리가 말한 것은 율법에 첨가된 여러 말씀을 보아도 분명히 올바릅니다. 주께서는 부모를 저주하는 자는 죽이라고 명령하심으로써 처음 부분인 경의를 주장하시는 것입니다. 이런 방법으로 그는 멸시와 박대를 복수하십니다. 또 순종하지 않고 반항하는 자녀에 대해서 사형을 명령하심으로써(신 21:18-21) 둘째 부분인 순종을 강조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 마태복음 15장에서 부모를 후대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계명이라고 하신 말씀은 존경의 셋째 부분인 감사에 관한 것입니다. 바울은 이 계명을 언급할 때마다 강제적인 복종을 요구하는 것으로 해석합니다. 존 스토트(John Stott)는 그의 저서 『그리스도인의 확신』(Confirmation)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십계명 두 판을 모세에게 주셨습니다. 첫째 돌판에는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의무가 새겨져 있습니다. 둘째 돌판에는 이웃에 대한 인간의 의무가 새겨져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부모를 공경하라는 제오 계명을 첫째 돌판에 새기셨습니다. 그 이유는 보이는 육신의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아니하는 부모이신 하나님을 공경할 수 없다는 사실을 하나님이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웃에 대한 우리의 의무는 감당하지 못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의무는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온당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이웃들도 섬겨야 합니다. 하늘나라에 적합한 사람은 세상에서도 쓸모가 있어야 합니다. 제오 계명은 부모에 대한 의무를 지시할 때 다른 종류의 부모들도 내포하고 있습니다. 즉 정치적인 부모(세상의 권좌에 있는 사람들) 영적인 부모(교회의 목사들) 그리고 연륜과 경험을 통한 가르침을 받아 부모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스승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오 계명이 특별히 지적하고 있는 것은 육적인 부모입니다. 제오 계명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 20:12) 말씀합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 위에 있게 하신 이들을 우리가 존경하고 감사하는 마음과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본질적으로 권위를 싫어합니다. 그러므로 자녀들이 부모를 공경하도록 배우지 아니하면 나중에 정당한 권위를 부여받은 대상에게도 거역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자녀들이 자신을 낳아준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다면 하나님도 경외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 22:6) 말씀합니다. 또한 부모들도 자녀들의 마땅한 공경을 받기에 합당한 부모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경 말씀을 따르는 부모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엡 6:4 2020-12-07
    • G.QT
    • 기독교강요 영어수업
    2020-12-07
  • 이야기 세계 교회사 30 - 니케아 총회
    니케아 총회 고풍스런 대전중앙교회에 모인 목사님들과 장로님들의 모습은 엄숙하고 경건했다. 우리 총신 신학생들은 총대들 틈에 뒤섞이니 이제 알을 깨고 나온 병아리 꼴이었다. 그렇게 높게 보이던 신학부 졸업반 전도사님들도 어설퍼 보이기는 매한가지였다. 한 목사님이 손을 쳐들고 “의자앙!”하며 사회 석 앞으로 어기적 나갔다. 마이크를 손에 쥐고 발언을 했다. “에, 우리가 이렇게 성 총회로 모였으니 어찌 입씨름만 한 대서야 하나님 앞에 면목이 서겠습니까? 낮에는 회의를 하고 밤에는 부흥사경회를 열어 은혜를 받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동의가 들어오고 왁자하니 재청이 울리고 가부를 묻는 소리가 찌렁하니 예배당을 휘감았다. 기름 부음 받는 자들의 “예”하는 소리가 초등학생들 구령처럼 장내를 울렸다. 해가 뉘였거렸다. 기름 부음 받은 분들의 즐거운 저녁밥이 자위가 돌 무렵 총회에 모인 총대들이 결의한 대로 부흥사경회가 시작됐다. 가라앉은 설교자의 음성이 성령의 열매를 강조하느라 냅다 외치는 소리에 뒤이어 쿵 하며 대전중앙교회 마룻바닥을 울렸다. 일순 장내가 조용해졌다. 너나없이 무슨 소리인가 하고 두리번거렸다. 보니 한 목사님이 몸을 앞뒤로 흔들며 주무시다가 의자 밖으로 굴러떨어지신 것이었다. 나라도 하나였고 교회도 하나였는데 그리스도인의 행습은 로마 군인들처럼 일정하지가 못했다. 교회의 가장 중요한 명절인 부활절만 해도 그랬다. 유월절을 지키는 유대인처럼 봄에 달이 꽉 찬 날을 지키는 사람도 있었다. 이를테면 부스럼 예방한답시고 키들거리며 부럼을 까는 정월 대보름을 부활절로 지키는 셈이었다. 그런가 하면 이교도들이 자연을 지배하는 신들이 기지개를 펴고 일어나는 것을 경축했던 봄의 첫날을 부활절로 지키는 사람도 있었다. 부활주간의 부활절날도 가지각색이었다. 어떤 사람은 부활절을 일요일이라고 주장했다. 삼위일체와 이런 모든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콘스탄틴은 주 후 325년 로마의 수도 콘스탄티노플 근처에 있는 안양만 한 니케아 시에서 회집하는 총회를 소집했다. 이 모임을 니케아공의회라고 한다. 이건 전체교회의 지도자들이 모인 최초의 집회였다. 전 세계에서 감독들이 꾸역꾸역 니케아로 모여들었다. 아프리카와 시리아에서 메소포타미아와 페르샤에서 폰투스, 갈라디아, 밤빌리아, 길리기아, 프리지아, 트라키아, 마케도니아, 아가야 및 멀고 먼 스페인 등지에서 감독들이 모여들었다. 로마에서는 사제들이 왔다. 역사가는 콘스탄틴처럼 어떤 군주가 자기의 구세주한테 경의를 표하기 위하여 그토록 성대한 축제를 마련한 적이 전무후무했노라고 니케아 총회의 모임에 대해 말했다. 감독들과 사제들이 거대한 홀에 운집하여 황제를 기다렸다. 황제가 홀에 모습을 드러내자 모두 일어섰다. 그는 하늘에서 보낸 메신저 같았다. 그의 옷을 수놓은 금과 보석들이 빛을 받아 찬란하다 못해 하얗게 빛났다. 황제는 총대들을 만찬에 초대했다. 감독들과 사제들이 줄을 지어 만찬장에 들어설 때 근위병들이 양쪽에 칼을 뽑아 들고 있었다. 그것은 그들을 벌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한테 경의를 표하기 위한 것이었다. 2020-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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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야기 세계 교회사
    2020-12-05
  • 기독교강요 영어 수업 - 제사 계명 주일
    Lesson XVI제사 계명 주일Fourth Commandment Lord's Day 한 이백 년 전 한 소년이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기 위하여 뉴욕으로 갔다. 소년은 그가 자란 고향 마을의 인쇄소에서 일을 배웠었습니다. 그래서 그가 앞으로 자신의 이름을 내고 돈을 버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은 평범한 그리스도교 가정에서 철저하게 신앙 훈련을 받은 것 말고는 오직 인쇄 기술뿐이었습니다. 그는 뉴욕의 아주 큰 인쇄소에 취직이 되었습니다. 어느 토요일 오후 그는 밤을 새워 주일날까지 일하지 않고는 마칠 수 없는 인쇄 양이 많은 일거리를 맡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 일거리를 한 번 보고 혼자 중얼거렸습니다. 오늘 자정까지 이 일을 하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마쳐야겠군. 주일 날 일할 수는 없으니까 말이야. 그 말을 들은 사장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했습니다. 그럼 자네는 일자리를 잃을 텐데. 그 소년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잠시 후 인쇄 원본을 사장에게 넘겨주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주일을 거룩히 지키라고 배웠기 때문에 신앙 양심을 어기는 것보다 인쇄소를 그만 두는 게 더 낫겠다고 말했습니다. 사장은 어린 직원의 정신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사장은 다시는 그 소년에게 주일날 근무를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그 소년이 바로 미국의 가장 훌륭한 문학서들을 출판하고 전 세계에 큰 영향을 끼친 하퍼 앤 브라더스(Harper & Brothers) 출판사의 설립자 제임스 하퍼(James Harper 18171833)였습니다. 안식일(Sabbath sbθ)의 히브리 원어 ‘사바쓰’는 멈추다 쉬다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엿새 동안 창조하시고 일곱 째 날에 쉬셨음을 기리기 위해 시작된 것이 안식일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휴식하기 위하여 잠을 자듯이 아무런 활동을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엿새 동안의 창조를 마치고 쉬셨지만 그의 말씀과 섭리로 세상을 운행하고 다스리셨습니다. 휴식은 어떤 일을 하다가 손을 놓고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죄 짓는 일을 하다가 거룩한 일을 한다는 것도 아닙니다. 교리문답이 세상의 여러 가지 일과 오락에 대하여 말할 때 하나님이 이러한 일들은 엿새 동안만 하도록 명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의 어떤 부분만이 세상적이라거나 신앙적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모든 삶은 신앙적입니다. 우리는 이 세상의 일과 오락을 통해서도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려야 하고 하나님을 섬겨야 합니다. 그러나 일주일 가운데 하루는 다른 일을 해야 합니다. 하루는 우리의 주 하나님에게 예배드리고 찬양하는 일을 통해 몸이 쉼을 얻고 힘을 얻어야 합니다. 그 의미에 대해 칼빈은 『기독교강요』 제2권 제8장 28항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REMEMBER THE SABBATH DAY TO KEEP IT HOLY. SIX DAYS SHALT THOU LABOUR AND DO ALL THY WORK: BUT THE SEVENTH DAY IS THE SABBATH OF THE LORD THY GOD. IN IT THOU SHALT NOT DO ANY WORK, &C. 28. The purport of the commandment is, that being dead to our own affections and works, we meditate on the kingdom of God, and in order to such meditation, have recourse to the means which he has appointed. But as this commandment stands in peculiar circumstances apart from the others, the mode of exposition must be somewhat different. Early Christian writers are wont to call it typical, as containing the external observance of a day which was abolished with the other types on the advent of Christ. This is indeed true; but it leaves the half of the matter untouched. Wherefore, we must look deeper for our exposition, and attend to three cases in which it appears to me that the observance of this commandment consists. First, under the rest of the seventh days the divine Lawgiver meant to furnish the people of Israel with a type of the spiritual rest by which believers were to cease from their own works, and allow God to work in them. Secondly he meant that there should be a stated day on which they should assemble to hear the Law, and perform religious rites, or which, at least, they should specially employ in meditating on his works, and be thereby trained to piety. Thirdly, he meant that servants, and those who lived under the authority of others, should be indulged with a day of rest, and thus have some intermission from labour. 이 영어 원문의 대략적인 해석은 다음과 같습니다. 제사 계명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엿새 동안은 힘써 네 모든 일을 행할 것이나 제칠일은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안식일인즉 너나 네 아들이나 네 딸이나 네 남종이나 네 여종이나 네 육축이나 네 문안에 유하는 객이라도 아무 일도 하지 말라 출 20:8-10 28. 이 계명의 목적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기호나 일에 대해서 끝내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해서 명상하며 하나님이 제정하신 방법으로 그 명상을 실천하라는 것입니다. 이 계명은 다른 계명들에 없는 특별한 고려를 하므로 해석하는 순서도 약간의 차이가 필요합니다. 초대 교부들은 이 계명을 예시(豫示)라고 부르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가 강림하셔서 다른 상징들과 함께 폐기된 일이, 즉, 어느 하루를 외면적으로 지키는 일이 이 계명에 포함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812) 이렇게 말하는 것은 옳지만, 그들은 문제의 절반만 언급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 깊이 해석하며, 이 계명을 준수하는 세 가지 조건이라고 생각되는 것을 숙고해야 합니다. 첫째로, 제 칠일의 안식은 하늘 입법자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영적 안식을 알리시는 방법이었습니다. 신자들은 자기의 일을 제쳐놓고 하나님이 자기 안에서 일하시게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둘째로, 하나님의 의도는 그들이 일정한 날에 서로 모여 율법을 배우며 의식을 행하며 적어도 그 날은 특별히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명상하는 데 바쳐서, 이렇게 회상함으로써 경건의 훈련을 받으라는 것이었습니다. 셋째로, 하나님께서는 그밖에 남의 권위 하에 있는 사람들과 종들에게 휴식하는 날을 주셔서, 그들의 노고를 쉬는 때가 있게 하기로 결정하신 것입니다. 칼빈이 ‘경건의 훈련을 받기 위해 제정하셨다’고 가르친 안식일로 주일을 삼는 문제에는 일반적으로 세 가지 접근 방법이 있습니다. 첫째, 그리스도인들은 토요일에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안식교와 그 밖의 다른 사람들이 주장합니다. 그들의 주장의 핵심은 토요일이 구약의 안식일에 맞는다는 것입니다. 둘째, 신약의 주일이 구약의 안식일과 같은 날이기 때문에 구약의 방법과 똑같이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은 주일을 그리스도인의 안식일이라 부르고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 안식일은 여호와에게 거룩히 지켜야 합니다. 이날 그리스도인들은 일상생활의 용무는 미리 정리한 후에 세상일과 오락에 관한 말이나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리고 온종일 거룩하게 쉬면서 공동예배와 기도와 구제를 행하는 일에 전념해야 합니다. 개혁주의 청교도 신학은 이 입장을 강력하게 지지합니다. 셋째, 안식일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폐기되었기 때문에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고 나름의 특징을 지닌 새로운 날 주일이 안식일을 대체했다고 주장하는 견해가 있습니다. 그러나 주일도 하나님이 세우신 날입니다. 그러나 안식일과 달리 이 날은 이스라엘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교회를 위한 날이고 안식일과는 상당히 다른 특징을 지니고 있습니다. 안식일은 휴식하고 전혀 활동을 하지 않는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엄격한 형벌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주일은 기쁨과 활동과 기대로 넘치는 날입니다. 주일의 특징은 첫 번째 주님의 날에 있었던 사건인 부활을 기리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을 다시 불러 모으고 그들을 가르치고 성령을 주고 그리고 세계에 복음을 전파하라는 임무를 주고 승천하셨습니다. 안식일이 폐지되고 주일이 세워졌다는 사실은 초대교회의 예배가 안식일이 아니라 주일로 재빨리 대체되었습니다는 데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사람들은 십계명의 제사 계명이 안식일만 아니라 다른 날과도 연관되어 있음을 잊어버릴 때가 종종 있습니다. 이 계명은 사실 모든 날에 적용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을 섬기듯이 엿새를 열심히 일하고 하루는 구별하여 하나님에게 예배드리고 다음 엿새를 위하여 거룩하게 쉬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 바울의 권면을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골 3:22-24 2020-11-30
    • G.QT
    • 기독교강요 영어수업
    2020-11-30
  • 이야기 세계 교회사 29 - 한 머리와 세 얼굴
    Russian icon of the Old Testament Trinity by Andrey Rublev, between 1408 and 1425 한 머리와 세 얼굴 ‘사랑이 뭐길래’라는 연속극이 뭐길래 사람들이 그 시간에 바보상자에 눈길을 모으고 배꼽을 잡기도 하고 혀를 차기도 한다. 어제 대발인가 사발인가 하는 청년이 결혼한 데까지 이른 모양이다. 기독교인이라는 인기작가의 엿가락 같은 이야기 늘림을 어디까지 늘릴런지 사뭇 기대가 된다. 삼위일체 논쟁으로 열 받은 교회들이 모세 앞의 홍해처럼 둘로 좍 갈라졌다. 바로를 피하기 위한 선민의 물 건넘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제국의 통일을 뿌리째 흔들어 놓는 교회의 갈라짐이었다. 로마제국의 통치자 콘스탄틴 황제의 두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그는 뒷짐을 지고 어전을 왔다갔다 했다. 제국의 통일을 공고히 해주어야 할 교회가 갈라서서 성부니 성자니 성령이니 하면서 눈에 핏발을 세우고 싸우다니 도저히 그럴 수는 없었다. 그런 양상은 황제의 정치에도 전혀 도움이 되지를 못했다. 어떻게 해서 쟁취한 제국인데 도움을 엄청 주리라 생각된 교회가 오히려 여론을 분열시키는 데 앞장을 서다니 기가 찰 노릇이었다. 사실 콘스탄틴 황제는 삼위일체 논쟁의 본질에 대해서는 이해되는 게 별로 없었다. 측근들을 통해 설명을 몇 번 들었지만 도무지 장님 코끼리 더듬기였다. 그리스도와 성부의 관계를 놓고 설왕설래 하느라 눈에 핏발이 서고 목에 힘줄이 돋는 논쟁에서 그리스도의 사랑은 온데간데없었다. 논쟁이 뭐길래 교회의 사랑까지 식혀 버리는지. 토론장에 난데없는 폭동이 일어났다. 사람들이 드잡이를 하더니 급기야는 치고받았다. 형제요 자매들인 그리스도인끼리 싸우는 꼴을 나비넥타이에 콧수염 기른 김동길 교수가 봤다면 “이게 뭡니까?”하고 코맹맹이 소리를 느물거렸을 것이다. 콘스탄틴은 그리스도인들이 싸우는데 그만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질 않았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었다. 어렵사리 마련된 제국의 안정이 교회 싸움에 깨질런지도 몰랐다. 내란이 일어나면 자신의 정치생명까지도 위협받을 수 있었다. 어떻게 쟁취한 제국이며 황제 자리인가!황제는 뒷짐을 풀었다. 그는 먼저 메신저를 보내 양 파 지도자한테 항의 조의 나무람을 전달했다. 황제는 말했다. “이게 뭡니까? 이 모든 논쟁은 다투기를 좋아하는 기질을 가진 사람들이 빚은 결과입니다. 말에 담긴 어리석은 차이 때문에 형제끼리 원수처럼 치고받고 해서야 되겠습니까? 우리가 예수님만 잘 믿으면 되지 이 무슨 망발들입니까? 이러면 어떻고 저러면 어떻소?” 하나님은 셋이니 둘이니 하고 밤잠을 제대로 못 자며 싸울 때 교인들 사이에는 삼위일체를 나타내는 그림이 유행했다. 이 그림에서 삼위일체가 한 머리와 세 얼굴로 표현되고 있다. 이 그림의 모퉁이에 있는 날개 달린 네 피조물은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등을 나타낸다. 이 그림은 사실 너무 단순해서 하나님의 신비를 설명해줄 수는 없다. 현대 의학으로도 감기의 원인도 정확히 알 수 없는데 하나님의 실체를 어떻게 인간의 말과 그림으로 온전히 설명할 수 있겠는가. Holy Trinity Template교회 지도자들은 이런 그림을 보면 눈살을 있는 대로 찌푸렸다. 그러나 일반 사람들은 좋아했다. 신학적인 설명이야 어찌 됐든 삼위일체는 삼위일체라고 잘 설명해주니까 말이다. 2020-11-28
    • G.QT
    • 이야기 세계 교회사
    2020-11-28
  • 이야기 세계 교회사 28 - 삼위일체와 분열
    Holy Trinity, depicted by Szymon Czechowicz (1756–1758) 삼위일체와 분열 통일과 화해를 기대하는 소박한 사람들에게 세상은 삐걱거리고 있다. 복면을 쓰고 쇠몽둥이를 든 장정들이 벌건 대낮에 스스럼없이 농부의 아들이 세운 공장을 우우 몰려다닌다. 어린 백성을 정신없는 정신대로 내모는 데 일조를 했던 이 나라 사람들은 누구 하나 나섬이 없다. 대신에 섬나라 자그마한 정치 지도자가 우리 의원끼리 박터지게 싸우던 국회에 나타나 머리만 조아리다 사라졌다. 우리네 지도자들은 정말 이 겨울에 무엇들을 하고 있는 것일까? 정말 우리도 독일처럼 통일이 되어 애국가와 찬송을 남북한 사람들이 함께 목이 터져라 부를 수 있을 것인가?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되고 어떻게 살아야 되는 것일까? 그리스도인들끼리 다른 문제도 아닌 그리스도와 하나님과 성령의 관계를 놓고 말다툼이 일어났다.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는 데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너나없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 점에 있어서는 옥신각신 할 건덕지가 하나도 없었다. 그렇지만 도대체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관계는 어떻게 된 것일까? 그리스도께서는 실제의 육신을 지니시고 이 땅에 사셨다. 그는 실제로 고난을 받으셨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께서는 정말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몸을 일으켜 살아나셨고 그를 믿는 사람들한테 새 생명을 주셨다. 그럴진대 그는 확실히 노대통령 같은 보통 사람보다는 훨씬 더 나으셨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이시라면 신이 두 분이 계시지 않게 되겠는가? 그리고 우리 마음속에서 일하시고 움직이시는 하나님의 영도 하나님이시지 않은가? 이럴 경우 신이 세 분 존재하게 되지 않는가? 우리나라에서 영어참고서 제목으로 채택된 바 있는 이 삼위일체 논쟁이 어느 곳보다도 아프리카의 알렉산드리아를 뜨겁게 달구었다. 알렉산드리아에는 아리우스라는 이름의 연로한 성직자가 있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진실로 인간 이상이었지만 하나님보다는 못했다고 알쏭달쏭한 주장을 점잖게 폈다. 그런데 같은 교회에서 시무하던 아다나시우스라는 부교역자가 감히 아리우스 감독의 주장이 얼토당토않다고 반론을 폈다. 근간에 위장을 덤덤하게 떼낸 목사님이 한 분 계신데 그는 아다나시우스 같이 바른 말하는 교역자를 좋아하신다. 아마 도망다니던 아다나시우스를 당시 이 목사님이 계셨다면 자신의 교회에 특채해서 거둬 주셨을 것이다. 아마 당신의 의견을 그가 또 반대한다고 할지라도. Ikone Athanasius von Alexandria어쨌든 아다나시우스의 그 당시 반론은 박수는커녕 그를 밤낮으로 도망 다니게 했다. 당시에 삼위일체를 주장한다는 것은 목숨을 담보로 내놓아야 했다. 그리스도께서 인간 이상이셨고 하나님 이하이셨다면 기실 그는 인간도 아니시고 하나님도 아니시게 되고 만다. 그리스도께서 이도 저도 아닌 얼추 묘한 존재가 되시고 마는 것이다. 아다나시우스는 한 분 하나님이 계시다고 말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실재를 공유하셨다. 하나님의 실재를 완전히 공유하시고 우리도 하나님의 실재를 더욱 풍성히 공유하도록 도와주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인도 하나님의 실재를 공유하게 된다. 성령도 완전하게 공유하신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그러나 그 한 분 안에 하나님의 실재를 공유한 세 분이 계시다. 즉 만유의 주 성부 하나님, 땅에 사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성자 하나님, 우리 영혼을 감동 시키고 하나님의 일을 가르쳐 주시는 성령 하나님이 계신다. 2020-11-22
    • G.QT
    • 이야기 세계 교회사
    2020-11-22
  • 기독교강요 영어 수업 - 제삼 계명 하나님의 이름
    Lesson XV제삼 계명 하나님의 이름Third Commandment The Name od God 1743년 3월 23일 런던에서 헨델이 작곡한 메시아가 초연되었을 때 왕이 많은 청중 속에 앉아 있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 작품의 할렐루야 합창에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 합창 가운데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이 다스리시네 라는 가사가 우렁찬 합창 속에 울려 퍼지자 왕이 자리에 일어서고 모든 청중이 일제히 따라 일어섰습니다. 그리고 왕과 함께 일어난 사람들은 할렐루야 합창이 다 끝날 때까지 서있었습니다. 그 때부터 지금까지 이 작품이 어디에서 연주되든지 할렐루야 합창이 울리는 대목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서서 듣는 것이 관례가 되었습니다. 이 음악을 서서 듣는 청중들은 만왕의 왕이시오 만주의 주이신 하나님에게 경배를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교향곡의 아버지 하이든(Franz Joseph Hydn)이 죽기 일 년 전인 1808년 그의 뛰어난 작품인 천지창조 오라토리오가 비엔나에서 성대하게 공연되었습니다. 그 연주회에 작곡가인 하이든도 참석했습니다. 늙고 병약한 하이든이 휠체어에 앉아 웅장한 연주회장에 들어섰습니다. 그의 참석은 연주회장을 가득 메운 청중들에게 열광적인 환호를 불러일으켰습니다. 오케스트라와 합창단이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라는 대목을 힘차게 연주하고 노래하자 환호와 박수 소리가 점점 크게 터져 나왔습니다. 이러한 뜨거운 청중의 반응에 감동을 받은 노쇠한 음악가는 안간힘을 다하여 일어섰습니다. 그리고 그는 떨리는 손을 쳐들고 외쳤습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이 작품은 내 것이 아닙니다. 하늘 위에 계시는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십시오. 하이든은 탈진해 의자에 주저앉았고 연주회장을 떠나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위대한 작곡가는 자신의 작품의 주제인 하나님의 이름을 도저히 잊을 수 없는 극적인 태도로 표현했습니다. 그 의미에 대해 칼빈은 『기독교강요』 제2권 제8장 22항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THOU SHALT NOT TAKE THE NAME OF THE LORD THY GOD IN VAIN. 22. The purport of this Commandment is, that the majesty of the name of God is to be held sacred. In sum, therefore, it means, that we must not profane it by using it irreverently or contemptuously. This prohibition implies a corresponding precept--viz. that it be our study and care to treat his name with religious veneration. Wherefore it becomes us to regulate our minds and our tongues, so as never to think or speak of God and his mysteries without reverence and great soberness, and never, in estimating his works, to have any feeling towards him but one of deep veneration. We must, I say, steadily observe the three following things:--First, Whatever our mind conceives of him, whatever our tongue utters, must bespeak his excellence, and correspond to the sublimity of his sacred name; in short, must be fitted to extol its greatness. Secondly, We must not rashly and preposterously pervert his sacred word and adorable mysteries to purposes of ambition, or avarice, or amusement, but, according as they bear the impress of his dignity, must always maintain them in due honour and esteem. Lastly, We must not detract from or throw obloquy upon his works, as miserable men are wont insultingly to do, but must laud every action which we attribute to him as wise, and just, and good. This is to sanctify the name of God. When we act otherwise, his name is profaned with vain and wicked abuse, because it is applied to a purpose foreign to that to which it is consecrated. Were there nothing worse, in being deprived of its dignity it is gradually brought into contempt. But if there is so much evil in the rash and unseasonable employment of the divine name, there is still more evil in its being employed for nefarious purposes, as is done bythose who use it in necromancy, cursing, illicit exorcisms, and other impious incantations. But the Commandment refers especially to the case of oaths, in which a perverse employment of the divine name is particularly detestable; and this it does the more effectually to deter us from every species of profanation. That the thing here commanded relates to the worship of God, and the reverence due to his name, and not to the equity which men are to cultivate towards each other, is apparent from this, that afterwards, in the Second Table, there is a condemnation of the perjury and false testimony by which human society is injured, and that the repetition would be superfluous, if, in this Commandment, the duty of charity were handled. Moreover, this is necessary even for distinction, because, as was observed, God has, for good reason, divided his Law into two tables. The inference then is, that God here vindicates his own right, and defends his sacred name, but does not teach the duties which men owe to men. 이 영어 원문의 대략적인 해석은 다음과 같습니다. 제삼 계명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출 20:7 22. 이 계명의 목적은, 하나님께서 자기의 이름의 존엄성을 우리가 거룩히 받들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간단히 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에 대해서 불순하거나 불경한 태도를 가짐으로써 모독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이 금지에는 당연히 하나님의 이름을 공경하며 경건하게 경외하도록 열성과 주의를 다하라는 명령이 따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과 그의 신비들에 대해서 생각하거나 말할 때에 항상 경외하며 조심하는 사고와 발언의 자세를 가져야합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논평할 때에도 그에게 영예가 되는 일만을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점을 열심히 준수해야 된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첫째로, 하나님에 대해서 마음으로 생각하며 입으로 말하는 것은 그의 탁월하심을 나타내며 그의 거룩한 이름의 존엄성에 일치하며 그의 위대성을 찬양하는 데 이바지해야 합니다. 둘째로, 우리는 야심이나 탐욕이나 재미를 위해서 그의 거룩한 말씀과 존귀한 신비들을 경솔하게 또는 패악하게 왜곡 남용해서는 안 되며, 그 말씀과 신비들에는 그의 존엄한 이름이 새겨져 있으므로 항상 존경하며 존중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가련한 인간들이 흔히 상습적으로 하나님을 비난하는 것을 버리고, 우리는 그의 행적 훼방하거나 비평하지 말아야 합니다. 도리어 하나님께서 하시는 줄로 인정하는 일에 관해서는 그의 지혜와 의와 인애를 찬양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받든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어긋날 때에 하나님의 이름을 허망되고 악한 일에 남용하여 더럽히게 됩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합당하게 사용하게 되어 있으므로 합당하게 사용하지 않을 때에는 다른 결과가 나타나지 않더라도 그 존엄성이 사라지고 점점 멸시를 받게 됩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을 남용하기 쉬운 경솔한 태도도 심히 악하거든, 하물며 여러 가지 미신에 접신술과 무서운 저주와 불법한 제마술과 기타 악한 주문들에 악용하는 자들은 죄가 훨씬 더 크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이 계명은 특히 맹세와 관련이 있습니다. 맹세에서는 주의 이름을 가장 가증하게 악용하기 때문에, 우리가 신성 모독을 일체 하지 못하도록 맹세를 언급하십니다(참조, 신 5:11). 이 계명에서는 하나님께 대한 경배와 그의 이름에 대한 경외에 관해서 우리에게 명령하시며, 인간 사회에서 지켜야 하는 공정성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습니다. 이 계명이 사랑의 의무에 대해서 가르친다면, 그것은 무용한 반복이 될 것입니다. 사랑의 문제는 둘째 판에 미루었으며, 거기서 인간 사회를 해치는 위선과 위증을 나무라실 것입니다. 율법의 구분법으로도 이렇게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이 율법을 두 판에 배열하신 것은 이유가 없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점을 보아서 이 계명에서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권리를 옹호하시며 자기의 이름의 거룩함을 지키시지만, 인간 상호간의 의무를 가르치시지는 않습니다. 칼빈의 제삼 계명에 대한 가르침을 보았습니다.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여호와는 그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자를 죄 없습니다 하지 아니하리라(출 20:7) 말씀하는 이 제삼 계명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마 6:9)라고 기도하라고 권고하신 말씀과 함께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주님의 이 권고는 제삼 계명에 부정적인 측면과 긍정적인 측면이 동시에 있음을 나타내줍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줍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는 것은 하나님에게 죄를 짓는 행위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높이는 것은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여러 이름들은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하나님의 여러 속성들을 나타내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그의 속성에 걸맞게 바르고 경건하게 불러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여러 이름들에는 특별한 의미들이 있습니다. 엘로힘(Elohim)은 성경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엘로힘은 하나님이 만물의 창조주이심을 나타내는 이름입니다. 이 이름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창 1:1) 성경의 첫머리에 나옵니다. 엘 엘리온(El Elion)이라는 이름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의미합니다. 이 이름은 아브라함이 여러 왕을 이기고 멜기세덱을 만날 때 사용되고 있습니다.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창 14:18). 야웨(Yaweh)라는 이름은 스스로 있는 자라는 뜻입니다. 이 이름은 하나님의 자존성 자족성 영원성을 나타냅니다. 하나님은 자신을 구속자로 계시하실 때 이 이름을 사용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시기 전에 광야에서 모세에게 이 이름을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출 3:14). 하나님은 여호와 이레(Jehovah Jireh)라는 이름으로도 불리십니다. 이 이름은 ‘준비하여 주시는 하나님’이란 뜻입니다. 이 이름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창 22:14). 이 각각의 이름들이 지닌 의미에 따라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을 모욕하고 그의 계명을 어기게 됩니다. 더욱이 우리의 행동은 우리의 말 못지않게 중요하다. 우리의 행동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믿음을 고백하는 말과 일치하지 않을 때 우리는 하나님을 모욕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름에 걸맞게 말하고 행동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하지 않기 위해 어떻게 생활해야 합니까. 그 방법을 야고보 사도가 분명하게 가르쳐줍니다.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리거니와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약 1:22-25). 이 말씀은 신자가 왜 성경을 끊임없이 살펴보아야 하는지를 깨우쳐줍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는 것은 우리의 자화상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습 속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을 찾기 위해서입니다.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고후 3:15-18). 우리가 성경을 통해 우리의 참 모습으로 주의 영광을 보면 주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겸손해지고 하나님의 도움을 바라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한 삶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게 되고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2020-11-16
    • G.QT
    • 기독교강요 영어수업
    2020-11-16
  • 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27_ 제국과 교회
    Byzantine mosaics of the Hagia Sophia in Constantinople 제국과 교회 아무리 일해도 배고픈 게 싫어 아버지를 떠난 아들이 있었다. 그는 시류에 맞춰 쌀 배달부에서 싸전주인으로, 운수업에서 자동차 수리공장으로, 해방이 되자 건설회사 등으로 많은 돈을 벌었다. 그는 끈질긴 빈대처럼 끈기도 있었지만 덩치에 걸맞지 않게 빈대처럼 여기저기 빌붙기도 잘했다. 이제 얼굴에 검버섯은 군데군데 피었을지라도 세계가 알아주는 한국 제일의 재벌이 됐다. 새해 벽두에 그가 카랑한 목소리로 정가에 바람을 일으켰다. 그의 말인즉 이승만 대통령의 제2공화국 때는 형편이 여의치를 못했단다. 그렇지만 박정희 장군의 제3공화국 때부터는 제법 돈푼께나 만지게 되었단다. 그래서 명절 때마다 잊지 않고 우정 높은 분 사시는 청와대에 돈 보따리를 들고 찾아가 인사를 드렸단다. 그런데 재벌이 된 농부의 아들이 돈 보따리를 갖다 바치지 않은 이승만 대통령 때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꽤나 대통령 덕을 많이 봤던 모양이다. 왜냐하면 이승만 대통령이 교인이었기 때문이다. 집권자가 덕수궁 돌담 옆에 있는 정동교회에 주일마다 꼬박꼬박 출석하는 교인이었다. 그래서 어느 공공기관에서건 기독교의 이런저런 일들에 퍽이나 협조적이었다. 콘스탄틴은 제국의 수도를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플로 바꿈으로써 교회에 간접적인 도움을 주었다. 이 도시는 제국 전체를 다스리기에 아주 좋은 위치를 가지고 있었다. 그곳은 육로로 유럽과 아시아를 해로로 에게해와 흑해를 연결하는 교차점에 있었다. 이를테면 천안삼거리인 셈이었다. 예전에 그 도시를 비잔티움이라고 불렀다. 콘스탄틴은 그걸 자기 이름을 따라 콘스탄티노플이라고 했다. 터어키인들은 그걸 이스탄불로 바꿨다. The Byzantine Empire under Manuel I, c. 1180. 그곳은 새 로마로도 불리웠다. 옛 로마는 더 이상 수도가 아니었다. 그곳에는 황제도 없었다. 따라서 로마의 교황이 어떤 의미에서 황제의 후계자처럼 되어버렸다. 마침내는 콘스탄틴 황제가 로마의 감독 실베스터 1세한테 제국의 서쪽 지역 통치권을 하사했다는 전설도 생겨났다. 이 이야기가 사실은 아닐지라도 일말의 진리는 내포하고 있다. 교회가 제국의 위치에 버금갈 만치 무럭무럭 성장하고 있었다. 콘스탄틴 황제가 그리스도교를 로마의 국교로 선택한 데는 보다 깊은 정치적인 계산이 깔린 사정이 있었다. 사실 권력투쟁을 위해 진군하던 장군 시절에 십자가 환상을 얼핏 보았을런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 때문에 그가 십자가를 제국의 상징으로 삼은 것은 아니었다. 실상은 거대한 제국 내에서 바글거리며 살고 있는 온갖 잡다한 민족을 하나로 결집시킬 수 있는 종교가 하나 필요했었다. 콘스탄틴의 생각에 아주 급속하게 전파돼 아주 강력하게 성장한 그리스도교야말로 로마제국을 공고히 결합시켜 줄 접합체로 아주 안성마춤이었다. 어떤 시련에도 발전을 멈추지 않고 결속을 흐트러뜨리지 않는 그리스도교는 제국의 틀을 다져주는 견고한 시멘트로써 최상의 종교였다. 유능한 정치가요 통치자인 콘스탄틴은 주도면밀한 사람이었다. 그런데 골조공사가 끝나 그리스도교로 옷 입은 로마제국 내에서 정작 시멘트 역할을 하는 그리스도교가 내부에서 삐걱대며 금가기 시작했을 때 콘스탄틴의 당혹과 실망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2020-11-14
    • G.QT
    • 이야기 세계 교회사
    2020-11-14
  • 기독교강요 영어 수업 - 제이 계명 우상숭배
    Moses Indignant at the Golden Calf by William Blake, 1799-1800 Lesson XIV 제이 계명 우상숭배Second Commandment Idolatry 색이 바랜 5센티 가량의 송곳니를 4억 불교도들이 지상의 가장 신성한 것으로 숭배합니다. 이 치아는 주전 543년 석가모니를 화장할 때 태운 장작더미에서 나온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800년이 지난 뒤 실론(Ceylon)으로 그 치아를 가져왔다고 합니다. 오늘 날에는 그 치아가 실론의 칸디(Kandy)에 휘황찬란하게 건립된 치아 사원 안의 황금 연꽃 위에 얹혀있습니다. 황금 연꽃 둘레는 수많은 루비와 꽃들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해마다 여러 나라에서 10만의 신실한 불교도들이 이 신성한 치아를 바라보려고 찾아옵니다. 그들은 사원에 금과 은과 보석들의 예물들을 가지고 와 바칩니다. 이와 비슷한 일들을 가톨릭에서도 자행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가톨릭교도들이 성물이라고 숭배하고 보관하는 것들에는 이런 것들이 있습니다. - 나폴리와 로마의 교회들에 안치된 동정녀 마리아의 머리털.- 페루기아 대성당(Cathedral Perugia)에 안치된 동정녀 마리아의 결혼반지.- 프라토(Prato)의 교회에 안치된 동정녀 마리아의 거룩한 허리띠. - 나폴리의 산 가우디오소 에파트리찌오 교회와 로마의 백성들의 마리아 교회에 보관되어 있는 동정녀 마리아의 젖 방울들. - 주님의 마지막 만찬 때 사용된 대야가 제노아의 성 로렌조 대성당에 안치되어 있습니다. - 예수님의 옆구리를 찌른 창 그리스도의 얼굴 모습이 새겨진 베로니카의 면사포 그리고 안드레 사도의 두개골이 모두 베드로 대성당의 돔을 떠받치고 있는 네 개의 거대한 돌기둥 속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수의 세마포가 투린의 세례 요한 대성당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그 의미에 대해 칼빈은 『기독교강요』 제2권 제8장 17항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THOU SHALT NOT MAKE UNTO THEE ANY GRAVEN IMAGE, OR ANY LIKENESS OFANYTHING THAT IS IN HEAVEN ABOVE, OR THAT IS IN THE EARTH BENEATH, OR THAT IS IN THE WATER UNDER THE EARTH: THOU SHALT NOT BOW DOWN THYSELF TO THEM, NOR SERVE THEM. 17. As in the first commandment the Lord declares that he is one, and that besides him no gods must be either worshipped or imagined, so he here more plainly declares what his nature is, and what the kind of worship with which he is to be honoured, in order that we may not presume to form any carnal idea of him. The purport of the commandment, therefore, is, that he will not have his legitimate worship profaned by superstitious rites. Wherefore, in general, he calls us entirely away from the carnal frivolous observances which our stupid minds are wont to devise after forming some gross idea of the divine nature, while, at the same time, he instructs us in the worship which is legitimate, namely, spiritual worship of his own appointment. The grossest vice here prohibited is external idolatry. This commandment consists of two parts. The former curbs the licentious daring which would subject the incomprehensible God to our senses, or represent him under any visible shape. The latter forbids the worship of images on any religious ground. There is, moreover, a brief enumeration of all the forms by which the Deity was usually represented by heathen and superstitious nations. By “any thing which is in heaven above” is meant the sun, the moon, and the stars, perhaps also birds, as in Deuteronomy, where the meaning is explained, there is mention of birds as well as stars(Deut. 4:15). I would not have made this observation, had I not seen that some absurdly apply it to the angels. The other particulars I pass, as requiring no explanation. We have already shown clearly enough(Book 1. chap. 11, 12) that every visible shape of Deity which man devises is diametrically opposed to the divine nature; and, therefore, that the moment idols appear, true religion is corrupted and adulterated. 이 영어 원문의 대략적인 해석은 다음과 같습니다. 제이 계명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출 20:4-5 17. 제일 계명에서 하나님께서는 자기를 친히 유일하신 하나님이라고 선언하시고, 그 이외에 다른 신들을 상상하거나 가져서는 안 된다고 하셨습니다. 이제 그는 우리가 그에 대해서 어떤 세속적인 것을 생각하지 않도록, 그는 어떤 하나님이신가요, 어떤 경배로 그를 공경할 것인가를 더욱 밝히 선언하십니다. 그러면 이 계명의 목적은, 하나님에게 합당한 경배가 미신적인 의식으로 모독되는 것을 원하시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요컨대, 우리의 이러한 마음이 하나님께 대한 유치한 생각으로 조작하기 쉬운 너절하고 육적인 행사들을 일체 버리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자기에 대한 합당한 경배를, 즉, 자기가 친히 제정하신 영적 경배를 따르게 하십니다. 그뿐 아니라, 이 범행의 가장 큰 허물을 곧 외형적 우상 숭배를 극악한 잘못이라고 지적하십니다. 이 계명에는 두 부분이 있습니다. 첫째 부분은 무한하신 하나님을 감히 우리의 감각적 지각에 예속시키려는 바꿔 말하면, 그를 어떤 형상으로 나타내려고 하는 우리의 무엄한 짓을 억제합니다. 둘째 부분은 종교의 이름으로 이런 형상을 경배하는 것을 일체 금합니다. 여기서는 모독적이며 미신적인 사람들이 하나님을 표시하기 위해서 보통 만드는 모든 형상들을 간단히 열거하십니다. 하늘에 있는 것은 해, 달, 기타의 광명체들을 의미하며, 또한 새도 의미합니다. 신명기 4장에서는(17, 19절) 그의 마음을 피력하시면서 새와 별에 대해 언급하십니다. 어떤 사람들이 지각없이 이 표현을 천사들에게 적용하는 것을 보지 않았다면, 나는 이 점을 말하지 알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나머지 부분들은 저절로 알려지기 때문에 그대로 지나가겠습니다. 우리는 이미 제1권에서 하나님에 대해서 인간이 만드는 보이는 형상은 모두 하나님의 본성과 완전히 반대가 되며 따라서 우상이 나타나면 참된 경건이 부패하며 타락한다는 것을 아주 분명하게 배웠습니다. 칼빈은 ‘우상이 나타나면 참된 경건이 부패하며 타락한다’고 가르칩니다. 제이 계명은 우리가 참 하나님을 섬길지라도 알맞지 않은 방법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을 금하고 올바른 방법으로 드릴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 계명은 우리가 하나님을 영적 예배를 통해 섬겨야 한다고 요구합니다. 이 제이 계명과 제일 계명은 언뜻 비슷한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확실히 다릅니다. 제일 계명은 하나님께서 다른 신에 대한 예배를 금하신 것입니다. 제이 계명은 하나님을 섬기되 그의 어떤 형상이든지 새겨 섬기는 것을 금하신 것입니다.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어떤 형상도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 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출 20:4-6 이 계명에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라고 엄중한 경고가 붙을 정도로 심각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어떤 형상이든지 하나님을 나타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물질적인 것으로 인간의 감각적인 욕구를 위하여 하나님을 나타내고자 할 때 하나님의 속성과 뜻을 왜곡하고 모독하게 됩니다. 이 사실을 선지자와 사도가 잘 증언해주고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런즉 너희가 하나님을 누구와 같다 하겠으며 무슨 형상을 그에게 비기겠느냐(사 40:18)라고 반문합니다. 예레미야 선지자는 사람마다 어리석고 무식하도다 은장이마다 자기의 조각한 신상으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하나니 이는 그가 부어 만든 우상은 거짓 것이요 그 속에 생기가 없음이라 그것들은 헛것이요 망령되이 만든 것인즉 징벌하실 때에 멸망할 것이다(렘 10:14-15)라고 단정합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너희 시인 중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이와 같이 하나님의 소생이 되었은즉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라(행 17:28-29)고 주장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하지 않은 것을 신앙의 가르침과 예배의 영역에 도입할 때마다 십계명의 제이 계명을 어기게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에게 합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예배드리는 일이 금해졌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요. 우리는 하나님이 참으로 어떤 분이신지를 깨닫고 그를 높이기 위하여 말씀과 기도와 찬양으로 전심을 다하여 예배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제이 계명은 잘못에 대한 경고와 더불어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의 계명을 지킨 자들에게 세세무궁토록 긍휼을 베풀어 주시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은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삼 사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출 20:5-6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요 4:24 2020-11-09
    • G.QT
    • 기독교강요 영어수업
    2020-11-09
  • 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26_ 웅장한 교회
    View of saint Peter basilica from a roof 웅장한 교회 로스앤젤레스는 연말연시이면서도 햇살은 사뭇 따사로울 것이다. 지중해성 기후의 바람을 가르며 웃통을 훤히 드러낸 채 길거리를 오토바이로 질주하는 염치없는 사람도 더러 있을 것이다. 오아시스로 변한 그 사막의 도시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철골과 유리로 외관을 꾸미고 안에는 분수가 흐르는 크리스털 교회가 있다. 주일이면 옛날 코미디언 김희갑을 닮은 목사가 함박웃음을 머금고 뜨거운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강단에 들어선다. 주일날 그곳은 활기와 왁자함과 은은함이 한데 어울려 성공의 믿음을 자아낸다. Christian Chi-Rho on a 5th-century marble table, Quiroga, Galicia. 콘스탄틴 치하에서 로마는 그리스도교 국이 됐다.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짜 맞춘 문자 PX는 콘스탄틴 군대의 승리 군기가 됐다. 초대 교인들이 대체로 군인이 되기를 거부했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느냐고 입에 침을 튀길 사람도 있을게다. 그 대답은 사상이 변했다는 것이다. 콘스탄틴 황제가 그리스도인을 보호하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신자는 콘스탄틴이 승리하기를 오매불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도움을 자처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마침내 모든 적이 궤멸 됐을 때 그리스도인들은 콘스탄틴을 하나님이 보내신 구원자라며 두 손 들고 환호성을 질렀다. 콘스탄틴은 직.간접으로 교회를 위해 많은 공헌을 했다. 직접 적으로 그는 옛날에 이교도 사제들이 누리던 특권들을 교회 목사들에게 주었다. 교회는 이교도사원에 버금가는 권리를 소유하게 됐다. 그리스도교의 주일은 공식적인 공휴일이 됐다. 그리스도교 감독은 높은 예우를 받았다. 감독은 원로원 의원처럼 정부의 대형마차를 타고 여행할 수 있었다. 박해 때 파괴된 교회는 이교도의 경비로 재건됐다. 콘스탄틴 황제 자신도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세인트 소피아(거룩한 지혜)성당을 비롯하여 새 교회당을 많이 건축했다. 당시 교회를 바실리카라고 했다. 바실리카는 큰 교회당을 뜻한다. 지금 옆에 나와 있는 그림은 로마에 있는 성 베드로 대성당(바실리카)의 평면도이다. 반원형에 표시되어있는 C는 앱시스 라고 한다. 이곳에는 성찬 상 뒤에 감독과 성직자가 앉았다. 성찬 상은 그 위에서 떡과 포도주의 형식으로 그리스도의 몸과 피가 성부 하나님께 희생 제물로 바쳐진다는 믿음이 자라면서 제단으로 통하게 되었다. F는 날개 모양으로 양쪽으로 약간 삐져나와 있는데 그것은 십자가 형태를 암시하며 교차랑이라고 한다. A는 교회를 배에 비유 한 데서 비롯된 네이브라고 하는데 이를테면 본당이다. 이것은 성가대를 위한 통로였다. 사람들은 B라고 표시된 낭하에 앉았다. 우리나라의 초기 기역 자(r) 예배당에서 마냥 남자와 여자가 양편에 따로 갈라 앉았다. D는 뚜껑이 있는 널따란 홀인레 배랑이라고 한다. E는 뚜껑이 없는 홀인데 노천 식인 것은 풀에 빗물을 받기 위한 것이다. 날씨에 따라 예비 신자들이 이들 뜰에 모였다. 이들 초 신자는 신앙이 아직 어려서 성만찬과 교회예배에 참석할 수가 없었다. 바실리카는 아주 아름답고 화려하고 웅장했다. 제롬은 이렇게 툴툴거렸다. “바실리카 대 예배당은 엄청난 경비로 건축된다. 지붕은 금으로 장식되고 사이사이에 대리석이 박혔다. 한때 불에 던져졌던 그리스도인과 성경이 이제는 자주 옷을 입고 금과 보석으로 장식되고 있다.” 2020-11-07
    • G.QT
    • 이야기 세계 교회사
    2020-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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