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준 시네마힐링
2018/04/26 17:17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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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미한 기억의 그림자를 붙잡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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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멘토>
 
감독 : 크리스토퍼 놀란
출연 : 가이 피어스, 캐리 앤 모스
 
제목 : 희미한 기억의 그림자를 붙잡고
 
사람은 기억을 먹고 사는 존재다. 유년의 기억들이 쌓여서 일기가 되고, 앨범이 된다. 여럿의 기억이 엮여서 추억이 되고, 그 거시적 온축의 맥락이 곧 역사다. 기억은 과거의 일부다. 은연 중에 현재로 날라온 과거의 파편이다. 그 파편들이 모여서 기억이 된다. 역사가 된다.
 
주지하다시피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승자의 편의에 따라, 취향에 따라 편집된 기록이다. 역사가 편집된 기록이라면, 개인적인 기억이며 추억은 또한 편집 아닐런가. ‘삶의 증언’으로 믿어온 기억이 혹여 자의식과 무의식의 지배를 받은 편집이라면, 그 기억을 토대로 쌓아올린 인생관이며 가치관은 또한 무엇인가.
 
기억의 의의는 과거의 회상을 위한 것이 아니다. 기억은 현재를 판단하는 척도가 되고, 미래의 행위를 담보하는 확신의 토대가 된다. 결국 우리는 편집된 기억에 기대어 가치관을 세우고, 그 편집된 가치관에 기대 오늘의 현실을 판단하고, 그 판단에 편승하여 내일을 설계하는 셈이다. 그대의 기억은 진실인가, 편집인가. 편집된 기억의 이름으로, 우리는 행여 무망한 행위의 업을 짓지는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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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한 남자가 있다. 기억손실증 환자. 기억을 10분 이상 지속시키지 못하는 희귀한 병이다. 전직 보험수사관 레너드 셸비(가이 피어스)는 아내가 강간·살해당하던 날의 충격으로, 그날 이후의 기억을 보존하지 못한다. 오직 자기 이름과, 아내가 강간·살해당했다는 사실과, 그리고 범인 이름이 존 G.라는 것만을 기억할 뿐이다.
 
범인을 찾아내서 복수를 하기에, 레너드의 뇌 상태는 너무도 취약하다. 치명적이다. 레너드는 통화를 하다가도, 10분이 지나면 통화 상대가 누군지, 왜 전화를 하고 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같이 잠자리에 든 여자가 누구였는지도 기억하지 못한다. 심지어, 영화 속에서 거리를 질주하다가 스스로 묻는다. “내가 왜 뛰고 있지? 저기 뛰고 있는 사람을 쫓고 있는 건가? (총알이 날아오자) 아니, 이런. 쫓기는 중이었군.”
 
레너드는 매일 밤 잠들기 전에 자신의 이름과 처지, 그리고 전날의 활동을 기록으로 남긴다. 묵고 있는 호텔, 자신이 찾아갔던 장소, 만난 사람과 그에 대한 정보를 폴라로이드 사진으로 찍어 메모를 해둔다. 특히 중요한 사실은 몸에 문신으로 남긴다. 레너드의 몸은 온통 문신 투성이다. “기억은 믿을 수 없어. 내가 믿는 건 기록뿐이야”라며 레너드는 가물가물한 기억의 신기루를 밀치고, 폴라로이드 사진과 친필 메모만을 근거로 비칠비칠 갈짓자 추리에 목숨을 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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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에서 깨어나면, 베개 곁의 메모를 보고, 그렇게 자신이 남긴 기억의 지시에 따라 자신의 처지를 파악하고, 전날의 사진과 메모들을 재해석하며 범인 추적에 나선다. 레너드에게는 매일매일이 새로운 나날이고, 만나는 사람이 하나같이 생면부지인데, 유독 레너드를 잘 아는 듯이 대하는 두 사람이 있다. 웨이트레스 ‘나탈리’(캐리 앤 모스)와 퇴폐 경찰 ‘테디’다. 나탈리는 테디가 범인임을 암시하는 단서를 제시하고, 테디는 ‘절대 나탈리의 말을 믿지 말라’고 안타까워한다.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하는 걸까. 기록은 믿을 수 있을까, 어차피 기억을 토대로 적은 것이거늘...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철저하게 레너드의 시각을 견지한다. 관객은 내러티브 상으로 레너드가 인지한 정보 이상을 알지 못한다.
레너드의 눈으로 보고, 레너드의 뇌로 생각하고 판단해야 한다. 레너드의 기억을 매개로, 기억의 인위성, 기억의 불확실성, 기억의 고의적 편집 의도 따위에 대한 인식론적 물음을 던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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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토퍼 감독은 기억의 단절에 대한 상징으로, 고도의 장치를 설정한다. 레너드가 아내의 살인범으로 여겨지는 누군가를 죽인 시점부터 영화를 거꾸로 편집한 플롯이 그것이다. 고난도의 퍼즐을 풀듯이, 레너드의 복수로부터 과거를 향해 역순으로 돌아가는 필름. 그리하여 마침내 밝혀지는 복수의 비밀. 결과로부터 원인을 향해 가는 기억의 회귀 여행은, 특히 카메라를 레너드의 눈높이에 맞춰 풀어가는 역순의 퍼즐은, 관객에게 한편으로 답답하고 낯설은, 그러면서도 신선한 영상 경험이 될 것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복수의 비밀이 밝혀지는 순간, 크리스토퍼 감독의 연출 의도가 묘한 파장으로 이해되는 순간이 온다.
 
뇌리에 새겨진 기억은 한 개인이 여러 경로를 통해 얻을 수 있는 숱한 정보들 가운데서 가장 신뢰할 만한 것으로 여겨진다. ‘내 기억’보다 믿음직스런 정보는 없다. 설사 ‘내 기억’이 너무 특이하거나 혹은 너무 은밀하여 사람들로부터 공인을 받지 못하는 특수상황이더라도, ‘기억’은 당사자로 하여금 기꺼이 ‘좁은 길’을 가도록 부추기는 가공할 신뢰도를 함유하고 있다. 이 ‘기억의 순수성’에 대해 감독은 묻는다. “정말 그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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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은 진정으로 충분히 옳은가. 충분히 사실적인가. 충분히 객관적인가. 나아가 동시대인이 공유한 어떤 사회적 기억(사건, 혹은 역사)에 대해서도 이 질문은 유효하다. 21세기 들어 유독 전쟁과 분쟁이 지구촌을 어지럽히는 것 또한 이 물음과 무관하지 않다. 국가 단위의 기억이 선명할수록, 그리고 그 기억이 주체에 따라 두 국가 사이에 서로 다른 형식과 의미로 존재할 때, 기억이 낳는 피비린내 또한 그에 비례해서 선명해지지 않던가.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은 데뷔작인 저예산 영화 <메멘토> 한 편으로 단박에 할리우드에 확실하게 눈도장을 찍었다. 할리우드의 화끈한 지원으로 제작된 이후의 작품들 <인섬니아>(불면증, 2002년) <프레스티지>(2006) <다크 나이트>(2008) <인 셉션>(2010) <인터스텔라>(2014) <덩케르트>(2017) 등 연출이 거듭될수록 크리스토퍼 감독은 인간의 숨겨진 내면을 묘파하는 독자적인 내공의 깊이를 감탄과 충격으로 보여준다. 미스테리 기법으로, 한편으로 스릴러의 긴장을 놓치지 않으면서 한편으로 복잡,난해한 인간의 불가해를 짚어내는 공력이 40대(1970년 생)의 내공을 훌쩍 초월한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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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준 기자 / 영화평론가
1990년부터 <시사저널> 문화부 기자로 ‘괴로운 글쓰기’의 업을 시작하였고, 1999년 영화전문주간지 <프리뷰>의 창간 편집장으로 숱한 밤을 새웠다. 2003년에는 중견 영화평론가 그룹 ‘젊은영화비평집단’의 회장을 맡아 비상업예술영화를 중심으로 광화문 시네큐브에서 <작은영화제>를 개최하였다. 2004년에는 각색을 맡아 작업했던 황철민 감독의 영화 <프락치>가 제34회 로테르담국제영화제에서 ‘국제비평가협회상’을 수상했으며, 2007년 MBC대한민국영화대상의 심사위원을 역임한 바 있다. 저서로 영화평론집  『아웃사이더를 위한 변명』(2004, 심산)이 있다.
[ 송 준 (bullwalk@naver.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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