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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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더굳뉴스] 리틀메시지 _욥기Job
    욥의 정원 욥기Job는 대부분 시로 이루어져 있지만 이야기는 아니다. 구약성경에서 에스겔은 그의 책 14장 14절에서 20절까지에서 욥은 실제 장소에서 실제 시련들을 겪은 실제 인물이었다고 말한다. 신약성경은 야고보서 5장 11절에서 시련을 겪을 때 신앙을 지키는 인내자의 본보기로 욥을 들었다. 그는 하나님을 믿는 자신의 신앙을 버리지 않았다. 욥기는 왜 의인이 고난을 받는가라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런 시가 있다. 난 기도했다 _작자 미상 나는 하나님에게 가장 강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내가 원하는 모든 걸 이룰 수 있도록 하지만 하나님은 나를 약하게 만들었다 겸손해지는 법을 배우도록 나는 하나님에게 건강을 부탁했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도록 하지만 하나님은 내게 허약함을 주었다 더 의미 있는 일을 하도록 나는 부자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행복할 수 있도록 하지만 난 가난을 선물받았다 지혜로운 사람이 되도록 나는 재능을 달라고 기도했다 그래서 사람들의 찬사를 받을 수 있도록 하지만 난 열등감을 선물받았다 하나님의 필요성을 느끼도록 나는 하나님에게 모든 것을 부탁했다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하지만 하나님은 내게 삶을 선물했다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도록 나는 내가 기도한 것을 하나도 받지 못했지만 내게 필요한 모든 걸 선물 받았다 내가 작은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내 무언의 기도를 다 들어 주셨다 모든 사람들 중에서 나는 가장 축복받은 자이다 작자 미상의 시인은 하나님은 내 무언의 기도를 다 들어 주셨기에 모든 사람들 중에서 나는 가장 축복받은 자라고 노래한다. 이 시인처럼 욥도 그의 모든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흔들리지 않는다. 욥기에는 세 만남이 있다. 첫째 하나님과 사탄의 만남이 있다. 둘째 욥과 친구들의 만남이 있다. 셋째 하나님과 욥의 만남이 있다. 그의 친구들은 욥이 고난을 받는 것은 죄 때문이라고 납득시키려 애를 쓴다. 욥은 자신의 성실과 믿음을 타협하게 만드는 어떤 시도나 말도 거부했다. 화를 내기는 했지만 욥은 언제나 진실을 말했다. 그러나 그의 친구들은 그렇지 못했다. 욥기에는 많은 비유들이 사용되고 있다. 그 비유들은 자연 세계의 삶과 죽음과 전능하신 하나님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욥의 고난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의미를 깨우치게 해 주는 아주 귀중한 교훈이다. 2024-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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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5
  • [더굳뉴스] 리틀메시지 _에스더Esther
    에스더Esther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한번도 언급되지 않지만 모든 사건에 하나님의 섭리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페르시아인들은 주전 539년 바빌론을 정복했다. 에스더의 사건들은 수산에서 일어났다. 그곳에 왕의 겨울 궁전이 있었다. 에스더의 아하수에로Ahasuerus라는 명칭은 이집트의 파라오가 왕의 대명사인 것처럼 페르시아의 최고 통치자의 칭호였다. 그러므로 에스더를 왕비로 삼은 페르시아의 아하수에로는 크세르크세스 1세였을 것이다. 에스더서의 사건들은 크세르크세스 1세 재위 3년부터 12년까지 10년 동안에 일어난 일들이다. 성경에서 여성의 이름을 따른 책은 에스더와 룻뿐이다. 룻은 유대인과 결혼한 이방 여인이었다. 반면에 에스더는 이방인과 결혼한 유대 여인이었다. 둘 다 신앙과 용기의 여인들이었다. 둘 다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룻은 다윗의 조상이 되는 아들을 낳았다. 에스더는 유대인을 전부 죽이려는 원수를 막았다. 에스더가 그 일의 결심을 위해 말한 한마디는 죽으면 죽으리라였다. 이런 시가 있다. 가지가 담을 넘을 때 _정끝별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이를테면 수양의 늘어진 가지가 담을 넘을 때 그건 수양 가지만의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얼굴 한번 못 마주친 애먼 뿌리와 잠시 살 붙였다 적막히 손을 터는 꽃과 잎이 혼연일체 믿어주지 않았다면 가지 혼자서는 한없이 떨기만 했을 것이다 한 닷새 내리고 내리던 고집 센 비가 아니었으면 밤새 정분만 쌓던 도리 없는 폭설이 아니었으면 담을 넘는다는 게 가지에게는 그리 신명 나는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가지의 마음을 머뭇 세우고 담 밖을 가둬두는 저 금단의 담이 아니었으면 담의 몸을 가로지르고 담의 정수리를 타 넘어 담을 열 수 있다는 걸 수양의 늘어진 가지는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목련 가지라든가 감나무 가지라든가 줄장미 줄기라든가 담쟁이 줄기라든가 가지가 담을 넘을 때 가지에게 담은 무명에 획을 긋는 도박이자 도반이었을 것이다 사람은 새로운 영역과 미래로의 진입을 위해 첫발을 떼는 순간 두렵고 떨리는 마음과 희생을 각오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렇듯 가지가 담을 넘어서는 데에도 용기가 있기 때문에 가능할 것이다. 그것을 믿음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믿음이 없다면 어떻게 한낱 가지나 줄기가 이 세상의 단단한 담과 깊은 절망의 절벽을 건너갈 수 있겠는가. 에스더서의 주요 교훈은 한낱 가지나 줄기도 담을 넘는 데 용기가 필요한 것처럼 하나님의 뜻을 위해 죽음을 각오한 용기가 필요할 때가 있다는 것이다. 세상 나라들의 주권자는 하나님이시므로 주의 백성은 주의 뜻에 복종하고 따라야 한다. 2024-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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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27
  • [더굳뉴스] 리틀메시지 _느헤미야Nehemiah
    짐실은 노새 느헤미야Nehemiah는 그 공동체를 이어받아 외적 안정을 확보했다. 반면 에스라는 바빌론에서 돌아온 새 공동체의 영적 안정을 확립했다. 그는 아버지가 하가랴이고 형제가 하나니라는 것 말고는 알려진 게 없다. 아마 그의 할아버지는 예루살렘이 멸망했을 때 바빌론으로 끌려온 포로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페르시아에서 태어났을 것이다. 느헤미야서의 생생한 묘사는 그의 개인 일기에 근거한 자료였을 것이다. 그는 아닥사스다 왕의 술 관리관이었을 때 예루살렘 형편이 아주 어렵다는 말을 들었다. 그는 예루살렘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리고 얼마 뒤 그는 왕의 술 관리관이 되었다. 이런 시가 있다. 기도 _라반드라나트 타고르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위험에 처해도 두려워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게 하소서 고통을 멎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고통을 이겨 낼 가슴을 달라고 기도하게 하소서 생의 싸움터에서 함께 싸울 동료를 보내달라고 기도하는 대신 스스로의 힘을 갖게 해달라고 기도하게 하소서 두려움 속에서 구원을 갈망하기보다는 스스로 자유를 찾을 인내심을 달라고 기도하게 하소서 내 자신이 성공에서만 신의 자비를 느끼는 겁쟁이가 되지 않도록 하시고 나의 실패에서도 신의 손길을 느끼게 하소서 그는 유다 총독으로 임명받아 주전 445년 성벽을 재건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부임했다. 하나님의 소명을 성취하기 위한 그의 깊은 신앙은 그의 기도와 강한 확신으로 드러난다. 그 땅에 회복이 이어졌지만 유대 민족은 시련과 비난의 시기를 겪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고 계셨다. 느헤미야의 강조는 하나님을 신뢰하라는 것이었다. 2024-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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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20
  • [더굳뉴스] 리틀메시지 _에스라Ezra
    솔로몬의 왕궁건설 에스라Ezra는 역대기하가 끝나는 곳에서 시작한다. 이스라엘을 정복한 바빌론이 주전 587년에서 586년에 많은 백성을 잡아가고 도시와 성전을 파괴했다. 주전 538년 페르시아 왕 고레스가 유대인들이 그들의 땅으로 돌아가 성전 재건을 허락하는 조서를 공포했다. 그때 스룹바벨의 인솔로 5만여 명이 돌아왔다. 바빌론 포로 생활 70년이 끝났다. 어려움이 많았고 지체되기는 했지만 주전 515년 성전이 완성되었다. 이런 시가 있다. 담쟁이 _도종환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 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율법학자 에스라는 주전 458년 2천여 명의 유대인과 예루살렘에 왔다. 에스라의 주요한 일은 율법의 연구와 해석이었다. 그는 자신의 일을 통해 새 시대 공동체의 영적 지도자가 되었다. 바빌론 포로에서 돌아와 성전을 재건하는 이스라엘 백성은 도종환 시인이 노래하는 담쟁이 잎 같았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가 담쟁이 수 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가는 담쟁이에게 절망의 벽은 없어 보인다. 그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담긴 성경을 믿음으로 붙잡고 성전을 재건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절망의 벽은 없어 보였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독려하는 지도자 에스라가 없고 믿음의 동지적 연대가 없었다면 이스라엘 백성은 그 척박하고 방해가 많은 땅에서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2024-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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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3
  • [더굳뉴스] 리틀메시지_역대기하2Chronicles
    바벨론 포로들 역대기하2Chronicles는 다윗 자손의 통치를 크게 다룬다. 그 기간은 솔로몬 시대부터 주전 586년 시드기야 치하 예루살렘 함락까지다. 역대기서 전체에 걸쳐 남 왕국 유다를 집중적으로 강조한다. 남 왕국 유다의 흥망성쇠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지 안지키는지에 따라 조명이 되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께 신실하지 못하고 그들의 신앙의 의무에 태만해서 망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고향을 떠나 머나먼 바빌론으로 끌려갔다. 이런 시가 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_이상화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자욱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를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쁘게나 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매던 그 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 다오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웃어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지폈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고 오는 봄은 누구도 빼앗을 수 없다. 그것이 천지만물을 들썩이게 하는 봄의 풋내이고 봄의 푸른 웃음이다. 그러나 들을 빼앗긴 자에게 오는 봄은 절박하다. 봄조차 빼앗기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봄의 답답함이고 봄의 푸른 설움이다. 들의 봄과 인간의 봄 자연의 봄과 시대의 봄은 이렇게 갈등한다. 온몸에 햇살을 받고 이들을 발목이 저리도록 실컷 밟아보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이야말로 내 나라 내 땅에 대한 지극한 사랑의 표현이다. 떠나온 길이 멀면 돌아갈 길도 멀다. 바빌론의 유대인들이 그랬을 것이다. 역대기하 마지막에 유대인의 예루살렘 귀환을 허락하는 고레스의 조서가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의 백성이 믿음의 불성실로 하나님의 징벌을 받아 고향을 떠나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하나님의 은혜로 그들의 고향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2024-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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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06
  • [더굳뉴스] 리틀메시지_ 역대기상1Chronicles
    바빌로니아 큰 물가 마을 역대기상1Chronicles과 역대기하는 원래 히브리어 원문에서 한 권이었다. 히브리어의 구약 성경을 그리스어로 번역한 사람들이 그것을 두 권으로 나누었다. 본래의 제목은 뒤에 남은 일들이라는 뜻이었다. 그것은 사무엘서와 열왕기서에 들어있지 않은 작은 이야기들이 들어있기 때문이었다. 마찬가지로 영어 제목 '크로니클스Chronicles'도 히브리어 제목처럼 '일상의 일들'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이것은 역대기서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 특별히 왕들의 생활들에서 일상의 중요한 일들을 차례대로 이야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초점은 다윗과 유다 왕국에 있다. 그리고 그 관점은 제사장들의 것이다. 유대 민족은 신앙의 불성실로 망해 포로가 되어 예루살렘에서 바빌론으로 끌려갔다. 이런 시가 있다. 바빌론 강가에서 _보니 엠 바빌론 강가에 우리는 앉아서 우리는 울었어요 시온을 생각하며 바빌론 강가에 우리는 앉아서 우리는 울었어요 시온을 생각하며 사악한 무리들이 우리를 포로로 잡아왔어요 그리고 우리에게 노래를 부르라고 했지요 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주의 노래를 부를 수 있나요 이런 낯선 땅에서 사악한 무리들이 우리를 포로로 잡아왔어요 그리고 우리에게 노래를 부르라고 했지요 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주의 노래를 부를 수 있나요 이런 낯선 땅에서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말과 우리 가슴에서의 명상을 여기 오늘밤 그대 앞에서 받아주어요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말과 우리 가슴에서의 명상을 여기 오늘밤 그대 앞에서 받아주어요 바빌론 강가에 우리는 앉아서 우리는 울었어요 시온을 생각하며 바빌론 강가에 우리는 앉아서 우리는 울었어요 시온을 생각하며 바빌론 강가에 바빌론의 어두운 눈물 우리는 앉아서 당신은 노래를 불렀죠 우리는 울었어요 사랑의 노래를 불러요 시온을 생각하며 바빌론 강가에 바빌론의 거친 작은 조각들 우리는 앉아서 당신은 사람들이 우는 것을 듣지요 우리는 울었어요 그들은 그들의 하나님이 필요해요 시온을 생각할 때 오 힘을 가져요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 남쪽 약 110km 떨어져 있는 유프라테스 강가에 바빌론이란 고대 국가가 번성했었다. 바빌론이 유대 왕국을 정복하여 많은 횡포를 저질렀다. '바빌론 강가에서'라는 노래는 바빌론에 정복당한 유대인들의 심정을 노래한 메시지가 그 내용이다. 이 노래는 시편 137편을 토대로 작사 작곡을 하였다. 바빌론 포로생활 때 유대인들의 슬픔과 시온의 그리움을 노래한 시가 시편 137편이다. 이 노래를 부른 가수들은 여성 3인과 남성 1인으로 구성된 4인조 보컬 '보니 엠'이다. 그들은 자메이카 출신의 영국 가수들이다. 그들은 악기를 전혀 다루지 않고 순수한 보컬만으로 서인도 제도의 특유한 창법을 구사하는 게 특징이다. 그들은 1978년 이 노래를 불러 세계적인 인기를 얻었다. 역대기상과 역대기하는 바빌론 포로 이후 이스라엘 땅에 돌아온 유대인들에게 중요했다. 그들은 다윗의 신앙 본보기가 필요했고 성전에 대한 강조는 그것을 재건할 때 필요했다. 역대기서는 변화와 어려움의 시기에 성전을 재건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에게 격려와 힘을 주었다. 그것은 다윗의 신앙과 솔로몬의 지혜와 성전 건축의 영광스러운 역사를 통해서였다. 2024-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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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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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독교강요 영어수업 1 - 들어가는 글
    베이지색이 섞인 부드러운 느낌의 분홍색 입술을 가졌을 안나 카레니나가 젊은 귀족 장교 브론스키에 대한 믿음의 상실로 절망합니다. 그녀가 실연(失戀)에 마음을 잃고 몸을 던진 기차는 한 번 출발하면 종착점을 향해 달려갈 수밖에 없는 동물(動物)입니다. 그러나 그녀와 달리 세상에서 소망을 잃었지만 주님 은혜로 믿음을 가진 교인들이 모인 교회도 믿음과 소망이 뒤엉키는장소이자 신자들을 싣고 한 번 출발하면 하나님 나라 종착역 까지 달려갈 수밖에 없는 구원열차(救援列車)입니다. S. 프로이트의 기본원리에서 출발하면서도 생물학적 충동보다는 환경과 사회적 상황이 개인 성격의 많은 부분을 결정한다는 여성심리학자 카렌 호니(Karen Horney 1885~1952)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환자가 치료자를 찾는 이유는 신경증을 치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를 완성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듯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따르는 신자는 스스로의 성화(聖化)를 완성하기 위해 믿음의 길을 걷습니다. 그리고 매 순간 거듭 태어나기 위해 날마다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하나님을 닮은 나 자신과 만나기 위해 끝없이 노력합니다. 그 소중한 하루하루가 모여 ‘신자다움’과 ‘내 믿음의 나이’를 만들어 갈 것입니다. 사실 이 책은 영어를 가르치는 책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 책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우선 성경대로 살고 싶은 교인이라면 그리고 그 삶을 전하고 싶은 전도자라면 개혁신학의 모태 『기독교강요』를 읽고 개혁주의 사상을 익히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 다음 현대 신앙인이라면 알아두면 좋을 진리를 『기독교강요』 영어수업을 통해 인생을 공부하고 싶게 만들고 스스로 배운다는 것을 진지하게 돌아보게 만들기 위한 책입니다. 영어는 그 자체의 학습이 목적이기보다는 하나의 도구로서의 목적이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세네카는 ‘학교를 위해서가 아니라 삶을 위해서 배운다’고 말했습니다. 시편 기자는 시편 8편 4절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질문을 던집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사람이란 무엇일까요.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창 2:7 이렇게 생령으로 만들어진 사람은 아담과 이브의 타락 이후 동물의 본성까지 내려갈 수 있는 동시에 성자의 영혼까지 올라갈 수 있는 존재입니다. 사람은 동료 인간을 죽이기 위하여 가스실을 만든 존재이면서 그 죽음의 가스실로 들어가면서 머리를 똑바로 들고 주기도문을 외우거나 찬송가를 부를 수 있는 존재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입니다. 에덴을 나온 이래 사람은 살기 위한 목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목적이란 이루거나 도달하려고 하는 목표나 방향입니다. 사람의 목적은 살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을 잊어버리고 사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께서 간명하게 일깨워주십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마 16:26 이 진리를 깨우친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무엇이든지 자신에게 유익하던 것을 다 해로 여길뿐더러 모든 것을 포기하고 배설물로 여긴다고 고백합니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지 영원히 사는 부활에 이르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아는 것만이 자신에게 유익하다고 선언합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빌 3:7-11 바로 이러한 바울의 삶의 태도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영화롭게 한다는 것은 어떤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거나 더 존경하고 숭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은 인생의 다른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더 중요하게 여기거나 하나님을 더 존경하고 숭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즐거워한다거나 즐기는 것은 무엇을 좋아하여 거기에 마음을 쏟는 것입니다. 음악을 즐기는 사람은 음악을 좋아하고 음악에 마음을 쏟게 됩니다. 이것은 쾌락을 추구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쾌락은 욕망을 만족시키는 즐거움입니다. 그런데 이 쾌락은 근본적으로 삶의 성취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쾌락이란 목적을 위해 노력할 때 충족되고 얻게 되는 부차적 효과입니다. 즉 쾌락은 사람이 삶의 의미를 실현하고 삶의 가치를 인식하게 되면 자연히 얻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이 쾌락을 얻는 것을 자기의 목표로 삼으면 반드시 실패하게 됩니다. 그 까닭은 쾌락은 목표의 대상이 아니라 목표의 부산물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알기 이전에 자신에게 유익하던 것을 배설물과 같은 해로운 것으로 여기고(빌 3:8) 하나님과 그의 뜻을 추구하기 위하여 언제나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하는 삶의 습관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사람이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는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는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성경이 가르치는 구원의 진리를 배워야 합니다. 즉 인생의 목적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알아야 합니다. 제네바의 칼빈(John Calvin 1509년~1564)은 죽기 5년 전 1559년 8월 1일 자신의 라틴어판 저서 『기독교강요』(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를 위해 쓴 ‘저자의 개정 마지막 판에 덧붙인 서문’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I may further observe, that my object in this work has been, so to prepare and train candidates for the sacred office, for the study of the sacred volume, that they may both have an easy introduction to it, and be able to prosecute it with unfaltering step; 이 저술에 있어서 나의 목적은 신성한 두루마리(the sacred volume 성경) 공부를 위하여 성직후보자들(聖職候補者 candidates for the sacred office)을 준비시키고 훈련시키기 위해(so to prepare and train) 계속 말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들이 그것(성경)의 쉬운 개론(槪論)에 접할 수 있고 단호하게(with unfaltering step) 그것을 적용할(prosecute)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칼빈의 말처럼 그의 저서 『기독교강요』를 공부하면 성경의 지식과 적용의 힘이 늘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믿음의 삶과 성직자로서의 능력을 배가시켜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칼빈의 저서가 모태인 칼빈주의 교회의 특성과 유익은 한 가정의 모계 가족과 부계 가족의 종교 내력을 따지지 않는 식구 간의 유대(紐帶)와 결합에 있습니다. 칼빈은 신자들에게 하나님 말씀의 순종을 가르치고, “우리는 풍부하든 풍부하지 않든 사람들을 돌보아야 한다”며 신자들이 서로 협력하며 살게 했습니다. 총신대 시절 꿈에 그리던 『기독교강요』 원서 강독시간이 되었습니다. 두 권으로 된 『기독교강요』 두툼한 영어 원서를 당시 형편으로 거금을 들여 구입했습니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한 학기 내내 담당 교수는 미국 유명 대학교에서 박사까지 되신 분인데 무슨 이유인지 두 페이지밖에 나가지 못했습니다. 그는 교수이신데 학교 밖의 일로 늘 바쁘셨고 정작 시간이 되면 영어 원문 해석이 와 닿지를 않고 다른 이야기만 했습니다. 그 시간 기억이라고는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말밖에 남은 게 없습니다. 그래 하는 수 없이 혼자서 『기독교강요』 영역본 두 권을 붙들고 읽고 또 읽어 1년 반 만에 독파했습니다. 그 뒤 어지간한 영어 원서는 쉽게 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강요』는 다시 보지 않아 독파할 때도 미흡하기 그지없었는데 그 내용은 다 흘러가버린 아련한 추억이 되어버렸습니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해 칼빈의 『기독교강요』의 핵심을 간추려 영한(英韓) 역본으로 내게 되었습니다. 수업의 종류로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수업은 주고 받는 授를 써서 교사가 학생에게 지식이나 기능을 가르쳐 주는 수업(授業)이 있습니다. 둘째 수업(修業)은 닦을 修를 써서 작가 수업처럼 혼자서 교재 등을 이용해 기술이나 학업을 스스로 익히고 닦는 수업입니다. 본서 『기독교강요 영어수업』은 둘째 수업(修業) 방식을 위한 책입니다. 즉 혼자서 『기독교강요』의 영어역(영어역본은 칼빈이 쓴 『기독교강요』의 원본 라틴어나 프랑스어를 번역한 것)과 한글역을 대조해 가며 우리를 성경의 삶으로 이끄는 칼빈의 개혁주의 사상을 깨우치는 한편 영어 원서를 읽고 영어 구조를 익히기 위해 『기독교강요 영어수업(修業)』이라는 제목의 책을 펴내게 되었습니다. 내 후배 목사나 후보생들에게 그것이 가능하게 하기 위해 영어 번역에 있어서 가능한 문장의 순서에 따른 직역을 하고 교리적인 설명을 덧붙였습니다. 덧붙여 본서의 전반부 11과까지는 영어 원문 읽기의 편이성과 습관을 익히기 위해 필요한 단어마다 발음을 달았습니다. 영어의 기본 중의 기본이 발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강요』(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에서 강요(綱要)로 번역된 단어 institute[nsttjːt (단기의) 강습회, 규칙, 관습, 원리가 어미에 s가 붙어 institutes 복수가 되면 (법률의) 적요(摘要), 원리의 강요(綱要)를 뜻합니다. 다시 말해 『기독교강요』는 기독교에 대한 강령(綱領) 즉 기독교의 으뜸이 되는 진리의 큰 줄거리를 서술한 책입니다. 먼저 칼빈은 제1권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대하여(Of The Knowledge of God THE Creator)’ 제1장 ‘서로 연결된 하나님과 우리 자신에 대한 지식(the knowledge of God and ourselves mutually connected)’ - 그 연결의 본질(nature of the connection)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성호 관계’를 다룹니다. 이제 칼빈이 개혁주의 체계를 세운 『기독교강요』 라틴어판을 영어로 번역한 역본의 일부분을 읽으면서 그의 사상과 영어의 맛을 보도록 합시다. 이 영역본은 가장 최근의 『기독교강요』 1960년 영역판(Philadelphia, Penna. 1960,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in Two Volumes. Translated by Ford Lewis Battles. Philadelphia: Westminster Press)입니다. 이것은 『기독교강요』 라틴어 원본을 베틀즈(Ford Lewis Battles)가 번역하고 맥닐(John T. McNeill)이 편집하고 웨스트민스터 출판부가 출판한 것입니다. 학자들이 이 영역본을 일반적으로 가장 권위 있는 것으로 여깁니다. 교회의 역사는 언제나 전진의 역사입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을 향하여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계속 전진할 것을 이르셨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유대로 사마리아로 전진했습니다. 다시 유럽으로 아시아로 전 세계 교회로 전진했습니다. 2020-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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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독교강요 영어수업
    2020-07-05
  • 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9_ 새로운 인종
    Stele Licinia Amias Terme 새로운 인종 싱그러운 여름이다. 이 여름에 장대비가 억세고 모질게 내릴지라도 초목들의 짙푸르름과 쑥쑥 자라남은 은빛 잉어가 없어지는 것처럼 곤두박질치는 폭포를 거슬러 솟구치는 그 모습을 닮는다. BC 753년에 티베르강이 낮게 흐르는 여울 위 언덕에 옹기종기 세워진 촌락으로 출발했던 로마가 이제는 제국이 되었다. BC 27년에 옥타비안이 오랜 세월에 걸친 내란을 평정하고 로마의 진정한 최초의 황제가 됐을 때 로마는 이제 모든 것이 무르익는 여름에 비교될 수 있었다. 가이사 아구스도가 된 옥타비안이 다스리게 된 로마제국은 거대하고 강력했다. 근 3백 년에 걸친 로마의 평화를 만끽하기 위하여 로마인들은 7백 년이 넘는 엄청난 세월을 외부로부터의 침략에 시달리고 자신들의 영토 확장 전쟁에 참전하고 권력투쟁에 얽힌 내란에 부대껴야 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이제 로마는 주전 1세기 말과 주후 1세기 말에 알려진 세계의 대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우리의 주님되시는 예수님도 가이사 아구스도가 로마제국을 호령하던 BC 4년에 태어나셨다. 옥타비안의 치하에서 어림하여 1억에 이르는 로마인들은 실질적인 이익과 혜택을 전쟁만큼이나 신물나게 누릴 수 있었다. 이때부터 확립된 로마의 평화는 간혹 짧은 단절을 제외하곤 거의 3세기 동안 지속되었다. 싸움이 일어났다면 그것은 로마제국에서 멀리 떨어진 변경지역에서 일어난 것이었고 일반 민중들은 그러한 전쟁을 모르거나 아예 무시해 버렸다. 무엇보다도 주로 군사적인 목적을 위하여 건설되긴 했을지라도 로마제국 전역에 거미줄처럼 잘 짜여진 도로망은 모든 사람들에게 많은 유익을 안겨 주었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복음의 전파를 널리 전하는데 이 도로망이야말로 엄청난 편의를 제공해 주었다. Vienne RomanTemple 프랑스 비엔에 위치한 아우구스투스와 리비아의 신전 로마인들은 그들의 황제를 숭배했고 황제를 위한 제단에서 분향했다.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거부했다. 로마인들은 군인들로 봉직하면서 야만인들에 대항해 제국을 수호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를 통해 원수를 사랑하라고 가르침을 받았다. 그런 이유 때문에 그리스도교 지도자들은 그리스도인들의 군대 복무를 찬성하지 않았다. 로마 사회에서는 일반적인 많은 다른 일들도 그리스도인들은 행하지를 않았다. 처음에 로마인들은 그리스도교를 유대교의 한 분파쯤이거나 그 당시의 이런저런 종교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를 따르는 신자들의 수가 날이 다르게 늘어가고 그리스도인들의 남다른 신앙생활의 습관에 그것이 전혀 새로운 하나의 종교임을 로마인들이 발견하게 되었다. 로마인의 관점에서 볼 때 그리스도교는 로마 사회의 틀과 알맹이를 깨뜨리는 아주 위험스러운 종교였다. 그리스도인들은 세계의 모든 인종들로 구성되었다. 또 한 그들은 신분의 귀천이 없이 서로를 형제요, 자매라고 부르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서로에게 나타내고 어려운 이웃에게도 사랑을 베풀었다. 콰드라투스(Quadraatus)는 로마인들에게 그리스도인들은 “새로운 인종”이라고 소개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은 기존의 세상 사람들이나 기존의 종교인들과 비교하면 전혀 이해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그리스도인들은 기존의 인종과 전혀 다른 이 땅에 새로 생겨난 인종으로 생각할 때만이 이해가 될 수 있는 대상들이었다. 이제 이 새로운 인종들 앞에는 무서운 시련이 눈을 번득이며 기다리고 있었다. 2020-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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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야기 세계 교회사
    2020-07-04
  • 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8_ 가이사 아구스도
    Augustuksen mauseleomi 가이사 아구스도 제사장 사가랴가 벙어리 고생까지 하며 늘그막에 어렵사리 아들을 하나 얻었다. 그 아들의 이름을 어떻게 지었으면 좋겠냐고 주위 사람들이 아버지에게 물었다. 낳은 지 팔 일이 되어 아이에게 할례를 베풀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아내 엘리사벳이 잉태한 뒤로 이제까지 말 못하는 진짜 벙어리가 되어버린 주름이 깊게 패인 늙숙한 아버지가 손짓으로 그 아이의 이름을 쓰게 서판을 달라고 했다. 그는 서판을 받아들자 자기의 성을 따라 아들의 이름을 짓지 않고 요한이라고 썼다. 모였던 사람들이 고개를 갸우뚱거리고 있는데 더 놀라운 일이 발생했다. 이제껏 벙어리였던 아이의 늙은 아버지가 주위 사람들에게 “아니 자네들 왜들 그렇게 어정쩡하게들 서 있나. 그 아이의 이름은 천사가 그렇게 지어준 것일세.” 사람들은 두 번째 놀랬을 때 눈이 커질대로 커졌었기 때문에 세 번째의 놀람에는 눈들이 오므라들고 입이 해벌쭉해졌다. 요한이라는 아이가 무럭무럭 자라고 있을 때 가이사 아구스도가 칙령을 내려 천하로 다 호적하라고 하였다. 요셉이라는 젊은 목수도 나사렛에서 그럭저럭 살아가던 일을 잠시 접어두고 그의 고향 베들레헴을 향해 길을 떠났다. 요셉의 이 고향 방문길에 동행이 있었는데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마리아였다. 그녀는 이미 홀몸이 아니었다. 천하에 칙령을 내린 로마 황제 가이사 아구스도(Caesar Augustus)의 본래 이름은 가이우스 옥타비우스(Gaius Octavius BC 63 - AD 14)였다. 그가 약관의 나이에 로마 정치 판도에 뛰어들게 된 것은 원로원에서 암살당한 카이사르의 유서에 의해 양자로 세워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대체로 옥타비안이라고 불렸다. 옥타비안은 카이사르 조카의 아들이었다. 이 솜털이 보송거리는 청년은 자세하고 빈틈이 없어서 로마 제국에 막강한 영향력을 끼친 공화정의 대의 정치를 숭상하는 키케로의 주목을 받게 된다. 키케로는 이 청년을 이용해 카이사르에 의해 전제정치로 가고 있던 로마를 다시 원로원 중심의 공화정으로 되돌려 놓으려는 옹골찬 계획을 세웠다. Cicero Denounces Catiline, fresco by Cesare Maccari, 1882–88 키케로는 자신의 영향력을 과신하고 있었다. 시대가 하루가 다르게 바뀌고 있음을 그는 미처 실감하지 못했다. 의뭉하고 능청스러운 키케로는 자신의 입장을 강화시키려다가 솜털 보송거리는 청년에게 오히려 이용당하고 만다. 옥타비안은 젊었음에도 약삭빠르고 처신이 능숙했다. 암살당한 자신의 양부 카이사르의 합법적인 상속자로서 그는 양부의 부하들이었던 퇴역 군인들과 현직 군인들의 동정을 자신에게 결집시키는 수완을 주위 사람들의 입이 딱 벌어지게 발휘했다. Marcus Tullius Cicero 키케로는 옛날의 명성뿐이었지만 이 애송이 옥타비안은 로마제국의 상당한 병력을 손아귀에 틀어쥔 진정한 카이사르의 후계자가 되어 있었다. 그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자신의 입장이 강화되고 확고해지자 타협과 양보의 손을 거두어들였다. 키케로가 원로원에서 탄핵을 받은 몇 달 뒤 옥타비안은 여세를 몰아 안토니오와 손을 잡고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카이사르의 암살자들인 카시우스와 브루투스의 군대를 격파했다. Castro Battle of Actium BC 31년 악티움 전투에서 강력한 안토니오의 군단과 이집트 집권자 클레오파트라의 군대가 합친 거대한 연합군을 옥타비안은 행운에 힘입어 쉽사리 패배시켰다. 그것은 무슨 이유에선지 먼저는 클레오파트라가 싸움이 시작되자 도망을 가고 다음에는 그녀를 안토니오가 뒤따랐기 때문이다. 이 전투를 끝으로 로마에 평화가 찾아왔고 최초의 황제가 탄생하게 되었다. Statue-Augustus 2020-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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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야기 세계 교회사
    2020-06-27
  • 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7_ 가이사의 권력
    Murder of caesar 가이사의 권력 바람이 살랑이는 서늘한 그늘에 앉아 책을 읽던 중년의 카이사르가 목놓아 울었다. 갑작스러운 일에 깜짝 놀란 측근들이 왜 이러시느냐고 조심스럽게 물었다. 눈물을 글썽인 채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물쩍지근하게 대답했다. “내가 지금 알렉산더 대왕의 전기를 보고 있는데 아, 글쎄 이 사람은 서른도 안 된 나이에 세계가 좁다고 누비고 다니지 않았지 뭔가. 그런데 나는 벌써 서른다섯이나 됐는데 이렇다 할 뭐 내놓을 만한 게 없으니 내 꼴이 뭐란 말인가!” 그랬던 카이사르가 지금의 유럽인 갈리아 지역을 정복했고 루비콘강을 건너 자신의 나라를 점령했다. 그는 이제 어정쩡한 세력가가 아니라 로마의 진정한 실권자가 되었다. 어떤 현자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권력이란 손에 쥔 모래와 같다.” 다시 말해 권력은 쥐면 쥘수록 손아귀에 움킨 모래가 움킬수록 손에서 빠져나가듯 된다는 역설이다. 이 말을 그 현실주의자 카이사르도 예전에 미처 몰랐던 모양이다. 그는 2년 임기의 독재관을 두 차례나 연거푸 해먹은 뒤에 BC 49년 10월에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아예 종신 독재관에 눌러앉고 말았다. 그의 권세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그를 위해 신께 제사 드리는 사제단까지 구성됐다. 이 사제단의 단장은 카이사르의 충직한 심복이며 나중에 클레오파트라의 품에서 헤어나지 못했던 집정관 안토니우스였다. 그러나 천하에는 모든 일에 기한이 있다. 인생에는 이런 때가 있으면 저런 때도 있다는 것이다. 종신 독재관으로 절대 권력을 적절하게 휘두른지도 다섯 해가 되어갈 무렵이었다. 화려한 옷을 걸친 절대 권력자 카이사르의 아내가 어느 날 무섭고 흉칙한 꿈에 가위눌려 진저리를 치며 일어났다. 그러니까 그 날이 주님 태어나시기 전 44년 3월 15일이었다. 또한, 그날은 원로원에서 로마를 제외한 다른 속주 지역에서는 카이사르를 왕으로 부르자는 결의를 통과시키기로 한 날이었다. 카이사르의 아내는 의관을 갖추고 있는 남편에게 지난밤의 불길한 꿈 이야기를 들먹이며 그 날의 원로원 출두를 만류했다. 게다가 이날 결의할 안건이 복잡미묘하고 아주 조심스러운 것이라 그의 측근들도 조심스럽게 그의 원로원 출두를 만류했다. 바로 이날 원로원에서는 카이사르가 옛날 청년 시절 사랑했던 애인의 아들이라고 친자식처럼 아끼고 사랑하던 브루투스를 위시하여 군주제의 독재가 아닌 대의 정치의 공화정을 희구하는 원로원 의원 40명이 저마다 단검을 품은 가슴을 다독이고 있었다. Retrato de Julio César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현실주의자였고, 기회주의자였고, 탁월한 정치가였다. 그는 본질적으로 보수주의자였다. 그러므로 그가 권력을 장악한 뒤에 급진적인 사회 개혁을 기대했던 그의 추종자들 가운데 실망했던 사람들이 적지 아니했다. 그는 위대한 영웅이었지만 장엄한 역사와 신의 섭리의 흐름은 어찌할 수 없었는가. 부인과 측근들이 원로원 출두를 애써 만류하던 날 절대 권력자의 위엄으로 그 만류들을 지그시 눌렀다. 그는 망토를 펄럭이며 원로원에 나갔다. 그리고 자기가 무찌른 폼페이우스의 흉상 아래서 난자당해 암살당하고 말았다. 2020-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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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야기 세계 교회사
    2020-06-20
  • 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6_ 가이사의 쿠테타
    Augustus Lugdunum principes iuventutis 671253 가이사의 쿠테타 아마 어슴프레하게 동이 틀 무렵이었을 것이다. 가이우스 율리우스 가이사(Gaius Julius Caesar)는 골 지역(라틴어의 갈리아) 사령관에 걸맞는 말에 올라 병사들에게 외쳤다. “주사위는 던져졌다” 그림자처럼 도열 해 있던 병사들이 고래고래 함성을 질렀다. 텁텁한 입을 다문 가이사는 지쳐서 눈이 쏙 들어간 눈을 껌벅거리며 말의 배에 냅다 박차를 가했다. 말은 앞발을 곰처럼 쳐들고 허우적대며 힝힝거리다가 쏜살같이 물을 요란하게 튀기며 루비콘강을 건넜다. 본디 루비콘강은 미사리 근처의 한강만큼이나 작은 강인데 지금은 프랑스와 벨기에 등지가 들어있는 고대의 골(라틴어로는 갈리아) 지역과 이탈리아를 가름하는 경계선이었다. 관례상 로마의 장군은 이 강을 건너 이탈리아의 로마로 들어 올 때에는 군사 지휘권을 포기해야 했다. 가이사가 이 강을 건너던 주전 49년 1월 10일에 즈음하여 로마의 시국은 뒤엉켜 타고 내리는 전철 모습 같았을 것이다. 귀족 중심의 원로원과 일반 시민 중심의 민회는 무슨 일이든 티격태격했다. 그 틈바구니에서 몇 안 되는 과두 정치가들은 자신들의 잇속을 챙기기에 눈이 벌겋다 못해 검붉어졌다. 대의 정치에 오랜 기반을 둔 로마 공화정의 합리적인 민주주의가 혼란 속에 흔들리고 있었다. 신나는 골 지역 사령관직의 10년 임기가 다 되어가는 가이사는 임기를 더 연장받고 싶어했지만 원로원에서는 영향력이 날이 다르게 커가는 그에게 더 이상의 권력 증대기반을 주고 싶은 생각이 털끝만치도 없었다. 이제 자신의 운신 폭이 좁다 못해 머리 둘 곳까지 없어질 것을 눈치챈 가이사는 자신의 선배 술라를 본 따 로마의 두 번째 쿠데타 주동자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아주 뛰어난 현실주의자였다. 그는 크라수스처럼 돈이나, 폼페이우스처럼 명성을 구하지 않고 실제적인 권력을 바랬다. 그는 기민하게 움직였다. 그는 무혈혁명이 아니라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통해 권력을 장악했다. 그는 그리스의 파르살루스에서 우세한 폼페이우스 군대를 숫자의 열세에도 불구하고 격파했다. 폼페이우스는 이집트로 도망쳤다가 암살당하고 만다. 암살자는 이집트 톨레미 왕의 고문인 로마인이었다. 암살자는 가이사의 칭찬과 환심을 살 줄 알았는데 이집트에 진군한 가이사에 의해 처형당하고 말았다. 이때 가이사는 이집트의 톨레미 왕과 클레오파트라를 지원하게 된다. 그래서 클레오파트라의 코는 한층 더 높아지게 되었고 가이사는 지원의 대가로 그녀를 통해 아들을 하나 얻게 되었다. Kunsthistorisches Museum - Gaius Julius Caesar 우리말의 가이사는 본래 라틴어로는 카이사르(Caesar)라고 발음하고 영어로는 시저라고 발음하는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이름에서 비롯된 것이다. 한글 성경에 나오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라는 말씀에서 가이사는 우리가 신소리 하듯 개 사러 간다는 뜻이 아니다. 그 말은 골(Gaul) 지역 사령관직의 임기 말년에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한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후계자를 일컫는 황제의 뜻으로 발전된 대명사이다. 권력을 쥔 카이사르는 그의 쿠데타 선배 술라(Lucius Cornelius Sulla)와는 달리 절대 권력을 향해 줄달음쳤다. 2020-06-13
    • G.QT
    • 이야기 세계 교회사
    2020-06-13
  • 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5_ 로마, 로마
    Capitoline Wolf, sculpture of the mythical she-wolf suckling the infant twins Romulus and Remus 로마, 로마 바울이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라는 걸 마게도냐 관리들이 알게 되었을 때 그들은 얼굴색이 하얗게 되어 감옥에서 제발 나가주십사고 바울에게 허리를 굽신거리며 손이 발이 되게 빌었다. 왜 그랬을까? 이제 세계는 마게도냐의 알렉산더 대왕의 후예들인 그리스인들이 득세하던 때가 아니고 로마의 지배를 받던 시대이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우리 초대교회의 역사는 이 고대의 로마 역사와 아주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다.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로마관리에 의해 사형선고를 받으시고 죽임을 당하신 사건을 시작으로 초대교회의 모든 사건들이 사실 로마가 지배하는 세계역사 속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역사란 대체로 언제나 유익하다. 특히 로마의 역사는 학자들, 정치인들 및 일반인들에게 항상 유익하게 생각되었다. 우리 동양인들에게 중국의 역사가 그러했던 것처럼 말이다. 오늘날 생각해 볼 때 기마 경찰이 신은 장화처럼 생긴 로마는 세계제국의 중심이 되기에는 적합하지 못한 위치에 있다. 이탈리아는 20세기 현대의 시점에서는 미국 방송인들이 흔히 뇌까리는 초강대국이 될만한 자원이 없다. 고대적 기준에서 본다면 특별히 그리스와 비교해 볼 때 이탈리아반도는 기본적으로 부를 타고 났으며 전략적으로도 유리한 위치에 자리 잡았다고 볼 수 있다. Rome is located in Italy 이탈리아는 반도이면서도 우리 한국과 달리 광활한 땅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물경 9백 60km나 되는 아페닌산맥이 이탈리아반도의 남북으로 척추처럼 뻗어 내려오고 있지만 우리의 소백산맥이나 그리스의 산들처럼 나라를 서로 갈라놓지는 않았다. 더구나 기름진 이탈리아의 농경 지역은 그리스의 경작이 가능한 계곡보다 훨씬 넓었다. 철과 동 등의 광물과 귀금속도 이탈리아는 생산했다. 로마의 진정한 값진 부는 농경지, 목초지 및 산림 등에 있었다. 더욱이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인력을 로마는 풍성하게 공급받았다. 그로써 로마는 끊임없는 전쟁에서 생기는 군대의 결원 보충을 용병에 의존하지 않고 자체 내에서 계속해서 공급을 받을 수 있었다. 전설에 따르면 불타는 트로이를 용케 탈출한 아이네아스(Aeneas) 왕자의 후손인 레아(Rhea)가 레무스와 로물루스라는 쌍둥이를 낳았다. 그 가운데 로물루스가 구약 성서의 호세아 선지자가 눈물겨운 사랑을 이스라엘 백성에게 전하던 BC 753년에 티베르 강변에다 로마를 창건했다. 로마(Roma)라는 이름은 그것의 창건자 로물루스(Romulus)에게서 따온 듯싶다. 로마라는 이름의 기원을 설명하기 위해 수 세기 뒤에 로물루스란 이름이 창안되었을 수도 있다. 어쨌든 BC 8세기 중엽 로마는 티베르강이 흐르다가 얕아지는 여울이 있는 언덕 위에 사람들이 올망졸망 모여 살던 조그마한 시골 마을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고고학을 통해 입증되었다. 그리고 시장이 서고 재판이 열리는 등 기타 공적인 집회에 쓰인 대광장이었다고 로마인들이 침이 마르게 칭송하던 포럼(forum)이라는 것도 실상 요즘 알고 보니 시체를 묻는 매장지에 불과했다. 무엇이 어찌 되었든 로마 최초의 정착지는 전설이 전하는 대로 팔라티누스 언덕에서 김을 모락거리던 시골 동네였다. 그 시골 마을이 수 세기에 걸친 끊임없는 전쟁을 통해 세계 지배자의 위치로 성장하게 되었다. 그들은 이유가 무엇이었든 툭하며 싸웠고 거의가 이겼다. BC 2세기 이후에는 영국지역과 나일강과 티그리스.유프라테스강 지역까지 뻗친 광활한 지역을 지배하는 제국이 되었다. 2020-06-06
    • G.QT
    • 이야기 세계 교회사
    2020-06-06
  • 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4_ 바울의 개종
    Bab Kisan, believed to be where Paul escaped from persecution in Damascus 바울의 개종 다시 사신 주님의 용서를 받고 용기를 얻은 베드로는 제자들을 모으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던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셔서 지금도 살아계심을 사람들에게 전파하기 시작했다. 베드로는 그들의 잘못을 뉘우치고 돌아서서 주님을 따르라고 사람들에게 뜨겁게 호소했다. 그 결과 예수를 믿고 따르는 제자들의 수가 날로 늘어나게 되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에서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그래서 그들은 이 그리스도교가 민간에 더 퍼지지 못하게 어떤 조처를 취해야 겠다고 생각했다. 유대교 지도자들이 모인 대책회의는 강공책을 쓰기 전에 먼저 불온한 무리의 지도자를 불러다가 위협을 해서 그런 허튼소리를 전파하지 못하게 입을 막자는 결정을 내렸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베드로를 소환해서 앞으로는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무서운 기세로 으름장을 놓았다. 덤덤히 서 있던 베드로는 “당신들에게 복종하는 게 옳은지 아니면 하나님에게 복종하는 게 옳은지 당신들 스스로 판단해 보시오.”라고 대답했다. Greco, El - Sts Peter and Paul 그리스도인들을 앞장서서 박해했던 이들 유대 지도자들 가운데에는 나중에 사도 바울이 된 사람도 섞여 있었다. 이 사람은 다메섹(현재의 다마스커스)에 가서 그리스도인들을 색출하여 체포해 예루살렘으로 끌고 올 양으로 대제사장에게서 수색, 체포 허가공문을 받았다.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이 사람은 홀연히 하늘에서 비추는 빛에 둘러싸이게 되었다. 그때 하늘에서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고 그는 얼결에 “주여, 누구십니까?”라고 물었다. 그는 그리스도인이 되라는 그리스도의 부르심에 응했다. 여기에 사도 바울을 나타내는 초대교회의 그림이 하나 있다. 나중에 그는 칼과 책을 든 모습의 그림으로 일반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Caravaggio The Conversion on the Way to Damascus 바울이 그리스도인들에게 분노했었던 이유는 그들이 유대 율법을 지키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그가 그리스도인이 되자 음식, 금식 및 의식 등에 대한 율법들이 구속력이 없다는 결정을 내렸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좋다고 생각한다면 그 율법들을 지킬 수는 있겠지만 그 율법들을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요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다른 제자들은 반대했다. 왜냐면 예수님께서 안식일의 법을 깨뜨리셨을지라도 그가 유대교 성일들을 지키셨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바울은 이것을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할 수도 있고 안 할 수도 있는(may) 문제이지 반드시 해야만 되는(must) 문제가 아니라고 응답했다. 이 문제에 대한 열띤 논쟁에서 바울이 이겼다. 바울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위대한 전파자가 되었다. 헬라의 여러 도시들과 로마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다가 죽은 자 가운데에서 살아나셨음을 전파했다. 물론 유대인들은 이것이 그들의 신앙이 아니었기 때문에 바울을 적대했다. 이방인들도 바울을 적대했는데 그들이 애지중지 섬기는 우상이나 신상들을 바울이 신은커녕 없애 버려야 되는 하찮은 쓰레기와 같은 것이라고 거침없이 말했기 때문이었다. 급기야 에베소에서는 등록금 문제로 데모를 죽기 살기로 해댄 어느 대학생들처럼 소동이 일어났다. 서슬이 시퍼런 로마 총독부 관리들은 이런 소란을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소란의 원인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소란을 가라앉히기 위해 그들은 바울을 무지하고 우악스럽게 체포했다. 로마에서 오랜 구금 끝에 바울은 사형을 당했다. Rubens apostel paulus grt 2020-05-30
    • G.QT
    • 이야기 세계 교회사
    2020-05-30
  • 김영배의 이야기 세계교회사 3_ 잠자는 곳
    Grave niches in the Catacombs of Domitilla, Rome. 잠자는 곳 마치 곤한 잠을 자고 일어난 사람처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처음 본 제자는 베드로였다. 다른 제자들도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지만 보지 못한 제자들도 있었다. 보지 못한 제자들도 그 사실을 믿었다. 그 이유는 다시 살아나신 주님을 보았다는 사람들의 말을 그들이 믿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는 교회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유는 교회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교회 안에서 사람들의 삶들이 변화되고 있었다. 그것은 분명 교회 안에서 살아 일하시는 그리스도가 없이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두 눈으로 목격하지 못했던 제자들과 사람들도 바로 교회 안에서 살아 움직이시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똑똑히 보고 느낄 수 있었다. 때문에 그들은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놀라운 사실을 스스럼없이 믿을 수 있었다. Jesus and his twelve apostles, fresco with the Chi-Rho symbol ☧, Catacombs of Domitilla, Rome. 그리스도인들이 그린 초기의 그림들은 그들의 신앙과 신념을 드러내 준다. 이들, 그림들 가운데 많은 수가 카타콤들에서 발견되고 있다. 카타콤(catacomb)이란 로마 변두리의 땅 밑에 있는 너비 1m 가량의 꼬불꼬불한 미로같은 지하통로를 일컫는다. 카타콤들은 그리스도인들의 무덤이었다. ‘카타콤’이라는 말은 ‘땅 밑에 잠자는 곳’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들의 무덤을 나타내는 ‘세미터리(cemetery)’ 역시 잠자는 곳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이란 단지 잠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카타콤의 벽을 따라 죽은 사람의 유해를 안치할 수 있는 바위 턱 선반들이 들쑥날쑥 있었다. 그리고 그 카타콤 벽의 빈공간들에는 이름과 말과 그림 따위를 새겼다. 이 그림들에서 예수님은 무덤에서 부활하시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지 않았다. 큰 물고기에서 나오는 요나를 보여 줌으로써 부활을 나타냈다. 마태복음은 요나가 밤낮 사흘을 큰 물고기 뱃속에 있었던 것같이 예수님도 죽은 자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시기 전에 밤낮 사흘을 땅속에 있어야 된다고 말하고 있다. 카타콤 벽들에 그려진 그림들에서 예수님은 양들을 돌보는 선한 목자로 그려졌다. 그 그림에 나타난 목자의 얼굴은 지금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성화들에 나타나는 예수님의 모습은 아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어떻게 생기셨는지를 딱 부러지게 알지 못한다.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상징들로는 헬라어로 된 주님의 이름에서 딴 처음 두 문자들이 있다. 우리의 그에 해당되는 영어의 X자처럼 생긴 상형문자이다. 헬라어 R은 영어의 P 모양처럼 생겼다. 우리는 이 두 문자가 결합되어 있는 모양을 교회의 강대상 앞면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다. The Chi-Rho symbol ☧ with Alpha and Omega, Catacombs of Domitilla, Rome 이 두 문자는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이러한 문자를 머리글자 따위를 짜 맞추어 도안화했다고 해서 흔히들 짜 맞춘 글자 내지는 합문자(合文子)라고 한다. 또한, 헬라어 알파벳의 첫 번째 문자를 알파라고 하고 마지막 문자를 오메가라고 하는데 이 두 문자도 예수님을 나타낸다. 왜냐면 그는 처음과 나중이시기 때문이다. Stele Licinia Amias Terme 67646 비둘기는 성령과 평화를 상징한다. 물고기야말로 기독교의 아주 일반적인 상징이다. 이유는 첫째, 예수께서 떡 덩이와 물고기로 많은 사람들을 먹이셨기 때문이다. 셋째, 헬라어의 물고기라는 단어를 이룬 문자들이 ‘예수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를 뜻하는 헬라어 단어들의 머리글자들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2020-05-23
    • G.QT
    • 이야기 세계 교회사
    2020-05-23
  • 더굳뉴스 큐티1 천지의 빛
    The Creation of Adam depicted on the Sistine Chapel ceiling by Michelangelo, 1508-1512 천지의 빛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창 1:1-5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 빛도 그렇다. 17세기 천문학 혁명의 핵심 인물 케플러(Johannes Kepler 1571년 12월 27일 - 1630년 11월 15일)는 한 친구 때문에 고민을 했다. 그는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하고 우주가 자동적인 방법(mechanical methods)으로 저절로 생겼다고 생각했다. 케플러는 그 친구의 생각을 바꿔주기 위하여 행성들이 태양 주위를 도는 모형을 만들었다. 그 친구가 케플러의 관측소(觀測所)를 방문해 그 아름다운 모형을 보고 탄성을 질렀다. “아주 아름다운데. 누가 만들었지.”그러나 케플러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만들긴 누가 만들어. 그냥 그게 저절로 있는 거지.”친구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보며 말했다.“말도 안 되는 소리. 누가 만들었는지 말해 줘.”케플러가 진지한 표정으로 대답했다.“여보게. 이 작은 장난감이 저절로 있을 수 없다고 자네는 말하지. 이건 이 위대한 우주의 아주 허접스런 모형일 뿐이야. 그런데 내가 알기로 자네는 그 우주가 스스로 존재한다고 믿잖아.” 모세의 첫 번째 책에 대한 히브리어 이름은 원래 세페르 마아세 베레쉬트(Sefer Maaseh Bereshith) ‘창조의 책’(Book of Creation)이었다. 이것이 70인이 번역했다 해서 70인역 성경이라 불리는 그리스어 구약성경에서 ‘기원’(origin)이라는 뜻의 ‘제네시스’(Genesis)로 번역되었다. 창세기는 시작의 책이다. 창세기는 우주와 시간과 생명과 죄와 구원과 인류와 히브리 민족의 시작을 기록하기 때문이다. 창세기에서 시작한 것들이 성경 이야기에 한결같이 흐르다가 요한계시록에서 완성이 된다. 성경이라는 명칭의 시작은 책들(books)을 뜻하는 그리스어 비블리아(Biblia)에서 유래한다. 영어의 바이블(Bible)은 신성한 책들의 전체 문집에 붙인 5세기에 시작된 명칭이다. 바이블이라는 명칭을 채택한 것은 영국의 기독교 신학자이며 종교개혁가인 위클리프((John Wycliffe 1320년경-1384년)였고 점차 영어에서 자리 잡게 되었다. 66권으로 이루어진 바이블은 많은 다른 저자들이 다른 세 언어로 1,600여 년에 걸쳐 기록을 했다. 세상에 수많은 책들이 있지만 궁극적으로 바이블은 오직 한 주제 즉 ‘인간 구원의 주제’를 다루는 단 한 권의 책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건 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 그는 하나님의 창조와 선택과 그리고 그의 구원을 함께 믿기 때문이다. 넘어지기 쉬운 그래서 넘어지기도 했을 그가 하나님의 부축을 받게 되는 것이다. 그 은혜의 갈피를 아마 바람은 더듬어 볼 수 있을 믿음. 내 믿음이 그런 바람을 느낀다면 분명 축복이 될 것이다. 우리는 날마다 우리 주변의 보이는 세상을 건성 본다. 그러나 우리는 이 세상이 하나님에 대해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그분의 존재 그분의 지혜 그리고 그분의 능력에 대해. +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 시 19:1 +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 롬 1:20 하나님은 창조하신다. 모든 것은 하나님과 함께 시작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나님의 목적을 이룬다. + 만물이 그에게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보좌들이나 주관들이나 정사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시고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 골 1:16-17 +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능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계 4:11 그분은 그의 말씀의 능력으로 역사(役事 work)하신다. +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이 그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 시 33:6 그 동일한 말씀이 우리 삶 속에서도 역사하실 수 있다. + 이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쉬지 않고 감사함은 너희가 우리에게 들은바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때에 사람의 말로 아니하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음이니 진실로 그러하다 이 말씀이 또한 너희 믿는 자 속에서 역사하느니라 살전 2:13 하나님은 계획에 따라 역사하신다. 먼저 그분은 형성하신다(form). 그 다음에 채우신다(fill). 그분은 땅을 형성하셨고 식물들과 동물들로 채우셨다. 그분은 궁창을 형성하시고 별들과 행성들로 채우셨다. 그분은 바다를 형성하셨고 생물들로 채우셨다. 그분은 우리가 그분에게 복종하면 오늘도 우리의 삶을 형성하실 수 있고 채우실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새 창조의 한 부분이다. + 어두운데서 빛이 비취리라 하시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취셨느니라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고후 4:6;5:17 +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 엡 2:8-10 +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히 11:1-3 해와 별을 창조하는 야훼 신 주석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 1:1 태초에 In the beginning 1절은 위대한 천지창조의 선언문이다. 창조 기사의 장엄한 요약이다. 하나님은 시작(the beginning)이시다. 아니 만물의 원인이시다(the Cause of all things). 본장의 나머지는 창조의 세부 사항들을 기술한다. ‘태초에’(In the beginning)는 영원의 심연 속에(in the depths of eternal ages) 숨겨진 아주 멀고 알려지지 않은 태고의 한 시기(a period)를 나타낸다. 여기에서 언급되지 않은 세대들은 물질의 창조와 혼돈이 줄어들고 질서가 자리 잡는 사이에 지나갔을 수 있다. + 여호와께서 그 조화의 시작 곧 태초에 일하시기 전에 나를 가지셨으며 만세 전부터 상고부터 땅이 생기기 전부터 내가 세움을 입었나니 잠 8:22-23 하나님 God 하나님을 지칭하는 히브리어는 엘로힘(Elohim)이다. 초월자(the Supreme Being)의 "힘 Strong"과 "능력 Mighty"을 지닌 전능(omnipotent power)을 나타낸다. 그리고 본문에서 언급된 하나님의 이름 엘로힘은 히브리어 복수 형태다. 그 복수 형태에 근거하면 세분 하나님 삼위일체의 가르침이 성경 서두에 희미하게 나타나고 있기는 하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다. 신성의 존재 여부는 논쟁이나 의심의 대상이 아니다. 엘로힘은 성경에서 만물의 원천과 근원이신 신적 존재(the Divine Being)의 일반적인 칭호이다. 엘로힘은 복수 형태인데 히브리어에서 막강한 힘과 능력을 나타내기 위해 종종 사용되는 형식이다. 여기에서 엘로힘은 하나님이 영원(eternity)과 무한(infinity)의 모든 힘을 쥐고 계시고 하나로 사용하신다는 것을 나타낸다. 또한 성경은 창조 사역에 함께 참여하신 신성(the Godhead)의 복수(성부 성자 성령 Father, Son, Spirit) 교리를 명확하게 계시하고 있다. + 그가 하늘을 지으시며 궁창으로 해면에 두르실 때에 내가 거기 있었고 잠 8:27 +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요 1:2-3 +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딤후 3:16 + 이 모든 날 마지막에 아들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이 아들을 만유의 후사로 세우시고 또 저로 말미암아 모든 세계를 지으셨느니라 히 1:2 천지 the heaven and the earth 우주(the universe)를 의미한다. 창세기의 이 첫 절은 영감된 성경의 전체 서론 즉 총론(general introduction)이다. 만물이 시작이 있고 어떤 것도 영원부터 존재하거나 우연히 생긴 것은 없고 어떤 열등한 대리자의 기술로 만들어진 것이 없고 온 우주는 하나님의 창조 능력으로 생겼다는 위대하고 중요한 진리를 선포하는 선언문이다. +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행 17:24 +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롬 11:36 이 창조의 선언 뒤에 지구에 한정된 창조의 서술이 이어진다. 창조하시니라 created 이 히브리어 단어는 단수 형태이다. 이것은 이 단어의 복수 형태 주어 엘로힘이 복수 형태로 이해되어야 하는 어떤 사상을 가로막게 된다. 히브리어 동사 '창조하다'의 빠라(bara)는 하나님의 활동에만 오로지 사용된다. 만들다(make) 또는 이루다(form) 같이 사람에 대해 사용하는 단어가 아니라 무(nothing)에서 유(something)를 창조하는(create) 하나님의 행위에 대해서만 사용하는 단어이다. 즉 어떤 선재하는(pre-existing) 물질들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무(nothing)에서 생산하는(produce) 것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다. +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창 1:2 땅 the earth 땅으로 번역한 지구(地球, Earth)는 태양으로부터 세 번째 행성이며, 엷은 대기층으로 둘러싸여 있고, 지금까지 발견된 지구형 행성 가운데 가장 크다. 지구는 달을 위성으로 둔다. 지구의 중력은 우주의 다른 물체, 특히 태양과 지구의 유일한 자연위성인 달과 상호작용한다. 지구와 달 사이의 중력 작용으로 밀물과 썰물을 일으키는 힘에 의해 해면(海面)이 주기적으로 오르내리는 조석(潮汐) 현상이 발생한다. 태양에서 지구까지 거리는 약 1억 5000만 킬로미터이다. 지구는 완전한 구(球)가 아닌 회전타원체에 가깝다. 태양은 어마어마하게 뜨거운 가스가 뭉쳐 이뤄진 거대한 공이라 할 수 있다. 지구만 한 행성이 100만 개도 넘게 들어갈 수 있다. 이글거리는 태양 빛이 지구에 닿는 데 걸리는 시간은 8분. 그런데 태양이 보내는 빛에는 열도 함께 있다. 촛불에 손을 가까이 대면 촛불의 열을 받아 손이 뜨거워지는 것처럼 햇빛이 아침에 우리 이불 위를 비출 땐 태양의 열도 이불 위에 같이 와서 따뜻해지는 것이다. 혼돈하고 공허하며 without form, and void 킹제임스 성경에서 ‘형태가 없다’(without form)로 번역한 혼돈(chaos)은 은하계(universe) 또는 질서와 조화의 구현으로서의 우주(cosmos) 창조 이전의 진공 상태(void state)를 말한다. 그리스어 카오스(chaos)는 ‘광대한 진공’(vast void), ‘공백’(chasm), ‘끝없이 깊은 구렁’(abyss 深淵) 등을 의미한다. 그것은 공기의 팽창 즉 공간(space)을 의미할 수도 있다. 혼돈은 창세기 1:2의 ‘깊음’(abyss 深淵)이라는 용어와 연관이 있다. 그 용어는 창조 이전의 비존재(a state of non-being)의 상태나 형체가 없는 상태(a formless state)를 말하는 것일 수 있다(C. Westermann, Genesis, Kapitel 1-11, Neukirchen-Vluyn, 1974, 3rd ed. 1983.). 창세기에서 ‘하나님의 신(the spirit of God)은 수면(the face of the waters)에 운행하시니라’는 말씀의 ‘수면’은 ‘물속의 혼돈’(watery chaos)과 같은 우주의 초기 상태를 말하는 것일 수 있다(Guthrie, W.K.C. A History of Greek Philosophy: Volume 1, The Earlier Presocratics and the Pythagoreans. Cambridge University Press. pp. 59, 60, 83). 그리스어 구약성경 70인역 성경(The Septuagint)은 창조의 본문에서 ‘혼돈’(chaos)을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대신에 미가서 1:6(‘그 돌들을 골짜기에 쏟아 내리고’)과 스가랴 14:4(‘그 한가운데가 동서로 갈라져 매우 큰 골짜기가 되어서’)에서 ‘갈라진 틈’(cleft), ‘골짜기’(gorge), ‘깊은 구렁’(chasm) 등의 용어를 사용했다. 그러나 4세기에 번역된 라틴어역 불가타 성서(The Vulgate)는 누가복음 16:26(‘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끼어 있어’)에서 혼돈을 하늘과 지옥 사이의 ‘큰 구렁’(great gulf)으로 번역한다. 태초의 지구는 형태(form)가 없이 혼돈(confusion)했고 텅 비어(void) 공허(emptiness)했다. 이사야 34:11에 ‘당아(cormorant 물새 종류)와 고슴도치가 그 땅을 차지하며 부엉이와 까마귀가 거기 거할 것이라 여호와께서 혼란의 줄과 공허의 추를 에돔에 베푸실 것인즉’이라고 표현한 것 같은 상태였을 것이다. 어떤 설명되지 않는 시기에 진동하고 쪼개지고 있던 이 지구는 혼돈의 상태에서부터 현재 구조의 세상이 이루어지기까지 여러 세대에 걸쳐 어둡고 물속에 잠긴 황무지(watery waste)였을 것이다. 흑암 darkness 흑암이 언제나 악의 상징인 것만은 아니다. + 여호와께서 달로 절기를 정하심이여 해는 그 지는 것을 알도다 주께서 흑암을 지어 밤이 되게 하시니 삼림의 모든 짐승이 기어 나오나이다 시 104:19-20 인간의 시각은 아주 밝은 빛이나 아주 어두운 흑암의 상태에서는 색을 구분할 수가 없다. 그런 상태에서는 거의 무색이거나 흑색으로 보이게 된다. 본문에서 빛의 정반대인 흑암은 단순히 빛이 없는 상태를 언급하는 것이다. 깊음 the deep 깊음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테홈(tehom)은 깊은 연못 심연(深淵 abyss)을 의미한다. 그 깊음은 태초의 우주 발생(primitive cosmogony)이 아니라 지구를 덮은 물을 언급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신 the Spirit of God 유대인 주석은 본문의 ‘하나님의 신’을 ‘신성한 존재의 신비롭고 보이지 않는 저항할 수 없는 임재’(mysterious, unseen, and irresistible presence of the Divine Being)로 해석했다. 그러나 본문에서의 ‘하나님의 신’은 성령(the Holy Spirit)의 창조 사역에 참여하신 분명한 언급을 의미한다. 요한복음 1:3(‘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은 성자 그리스도께서 성부 하나님을 위하여 만물을 실제로 창조하셨다는 것을 나타낸다. 따라서 삼위일체의 성삼위 모두 창조에 참여하셨다는 사실을 증명한다. 하나님에 대한 위엄의 복수 대명사(us, our)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연합을 나타내기 위해 창세기 1:26(‘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에서 단수 동사를 사용한다. 운행하시니라 moved 이 말씀의 문자적인 의미는 알을 품을 때 닭이 하는 것처럼 하나님의 신(the Spirit 성령)이 수면(the face of the waters)을 계속 덮고(brooding over) 계셨다는 것이다. 신(the Spirit)의 직접적인 행위는 생명이 없고, 조화되지 않는 요소들이 작용하게 함으로써 새 창조의 환경에 적합한 상태에 맞도록 결합시키고 정돈하고 성숙하게 했다. 이 새 창조의 기사(account 記事)는 창세기 1:2의 마지막 부분에서 알맞게 시작하면서 창조 과정의 상세한 사항들이 잇따라 일어나는 변화들을 어떤 구경꾼(onlooker)이 보고 말하는 것 같은 자연스러운 방법으로 서술한다. +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창 1:3 하나님이 가라사대 And God said 태초의 우주는 혼돈하고 공허하고 어두웠다. 그때 하나님의 신은 물에 덮인 우주의 수면을 알을 품은 닭처럼 덮고 계셨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 혼돈하고 어두운 우주가 밝아졌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하셨다’는 뜻의 ‘가라사대’는 하나님의 창조 명령을 표현하는 최초의 간결한 관용 표현이다. 원래 '말씀하시되'의 뜻으로 쓰이는 말이고 '가로되'보다 높임의 뜻을 나타낸다. 개역성경은 예스러운 ‘가라사대’와 ‘가로되’를 사용한다. 개정성경은 이 말을 모두 ‘이르시되’나 ‘말씀하시되’로 고쳤다. 창조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졌다. + 여호와의 말씀으로 하늘이 지음이 되었으며 그 만상이 그 입 기운으로 이루었도다 시 33:6 유대 문학 기도서 16페이지에서 서술한 하나님의 이름 가운데 하나는 ‘말씀하시고 세계가 존재하게 하신 분’(He who spake and the world came into existence)이시다. 성경 본문에서 자주 반복되는 ‘하나님이 가라사대’(God said)라는 구절은 하나님께서 뜻하셨다(willed), 포고하셨다(decreed), 지명하셨다(appointed) 등을 의미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결정하시는 뜻(determining will)은 모든 경우 즉각적인 결과가 따랐다.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Let there be light: and there was light. 하나님은 계획에 따라 역사하신다. 먼저 그분은 말씀하신다. 그 다음에 창조가 이루어진다. ‘빛이 있으라.’ 그리고 ‘빛이 있었다.’ 그리고 어둠에 쌓여 있던 지구가 환해졌다. 빛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사물을 볼 수 있는 것은 빛 때문이다. 우리 주위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태양이나 불빛은 그 자체가 빛의 원천(광원)이다. 광원이 아닌 다른 사물에서 산란되어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광원에서 나온 빛이 그 사물에서 산란되어 우리 눈에 닿기 때문이다. 광원은 자연광과 인조광으로 나눌 수 있다. 자연광은 우리가 조절할 수 없는 광원에서 나온다. 이러한 광원에는 태양과 별이 있다. 인조광은 우리가 조절할 수 있는 광원에서 나온다. 보통 빛은 호수 위를 전파해가는 수면파와 같은 파동이라고 설명한다. 또 빛은 광자라고 하는 입자로 설명하기도 한다. 빛을 파동으로 설명하든 입자로 설명하든 두 경우 모든 빛이 에너지를 가진다는 사실은 틀림없다. 빛의 속력을 측정하려 한 사람 중에 17세기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있다. 갈릴레이는 약 1km 떨어진 곳에서 서로 등불을 가지고 상대방의 등불이 보이면 바로 등불을 열게 하는 방법으로 그 시간차를 통해 광속을 측정하려고 했다. 그러나 이 실험에서는 빛이 왕복하는 데 걸린 시간이 10만분의 1초 정도로 매우 짧아 속력을 제대로 측정할 수 없었다. 그러나 결국 여러 실험을 통해 정의된 빛의 속력(speed of light) 또는 광속은 진공에서 1초에 대략 30만 킬로미터이다. 그것은 고대 그리스의 수학자 에라스토테네스(Eratosthenes B.C. 274년 ~ B.C. 196년)가 인류 최초로 측정한 지름 4만 킬로미터의 지구를 일곱 바퀴 반을 돌 수 있고 지구에서 달까지 가는 30만 킬로미터 거리를 1초에 도달하는 매우 빠른 속력이다. 에라토스테네스는 북반구에서 해가 가장 높게 올라오는 날인 ‘하지’에 시에네(아스완) 지역 한 우물에 주목했다. 그 우물을 들여다보면 해가 보였다. 태양이 머리 위에 90도 수직으로 떠있다는 얘기다. 그런데 같은 날 알렉산드리아 지역에 세워놓은 막대기에는 그림자가 생겼다. 두 도시는 약 800km 가량 떨어져 있다. 에라토스테네스는 이 현상에 주목했다. 이렇다 할 첨단 장비나 도구는 없었지만 그는 두 가지 가정을 통해 지구 둘레의 길이를 계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첫 번째는 ‘태양의 빛줄기들은 지구로 평행하게 도달한다’는 것이었고 두 번째는 ‘지구는 완벽한 구 형태’라는 것이었다. 알렉산드리아에 세운 막대의 그림자와 막대가 이루는 각의 크기를 측정했다. 막대와 그림자 끝이 이루는 각의 크기는 7.2도였다. 이는 시에네와 알렉산드리아가 지구 중심으로부터 이루는 각의 크기도 7.2도라는 말이다. 360도의 1/50이다. 그렇다면 알렉산드리아에서 시에네까지의 거리가 약 800km일 때 지구의 둘레는 50배인 약 40,000km라는 결과가 나온다. 이는 현재 미항공우주국이 명시한 지구 둘레 40,030km와 비교해도 오차가 크지 않다. 하나님이 만드신 자연의 비밀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이 그 두뇌로 발견한 것이다. 아담이 하나님이 데려오시는 짐승들의 이름을 맞춘 것처럼. +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 아담이 모든 육축과 공중의 새와 들의 모든 짐승에게 이름을 주니라 창 2:19-20 장엄한 사실을 표현하는 최고의 단순한 구절. 태양에서 나온 것과 다른 이 빛이 깊음(the deep)을 덮고 있는 흑암(darkness)을 깨뜨린다. 그런데 창조의 넷째 날 태양이 만들어지기 전에 생긴 이 빛은 어디에서 왔는가. 이 케케묵은 물음에 대해 태양계가 거대하고 밀도 높은 분자 수소 구름 물질에서 생겨났다는 성운설(the nebular theory) 등 여러 가설이나 과학적 추론이 있지만 ‘성경이 가는 데까지 가고 멈추는 데서 멈춘다’라는 성경 해석의 제일 원칙을 따라야 할 것이다. 인간적인 생각으로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성경을 벗어나 성경의 권위를 훼손하는 시도를 하는 것은 하나님의 비밀을 알려는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행위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을 통해 성경은 말씀한다. +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by inspiration of God)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딤후 3:16-17 하나님이 ‘빛이 있으라’ 명하시자 바로 나타난 최초의 이 빛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지구 밖의 어떤 신비한 빛의 원천에서 왔을 것이다. 4절 좋았더라 that it was good 창조주의 뜻이 이루어졌다는 표현이다. 10절 12절 18절 21절 25절 31절 등에서 반복된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다’(good)는 미학적인 판단(aesthetic judgment)보다는 창조의 순결한 선함(the moral goodness of Creation)을 나타내는 하나님의 뜻과 일치되는 목적을 표현한다.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divided the light from darkness 지구가 그 축의 둘레를 날마다 도는 것으로 생기는 낮과 밤의 교체나 연속을 의미하는 빛과 어두움을 나누셨다. 그렇듯 하나님은 나누신다. 하나님은 빛과 어두움, 땅과 물, 하늘 위의 물과 하늘 아래의 물 등을 나누셨다. 이 나눔의 원리가 성경의 기본이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우르를 나누셨고 이스라엘 민족과 이방인을 나누셨고 그의 교회와 세상을 나누셨다. + 내가 아버지의 말씀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매 세상이 저희를 미워하였사오니 이는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을 인함이니이다 내가 비옵는 것은 저희를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내가 세상에 속하지 아니함 같이 저희도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삽나이다 요 17:14-16 하나님은 오늘날도 그의 백성이 모든 더러운 것들과 나누어지고 구별되기를 바라신다. +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같이 하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하며 빛과 어두움이 어찌 사귀며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케 하자 고후 6:14;7:1 5절 칭하시니라 God called ‘빛을 낮이라 칭하신’ 하나님은 인간 생활에서 빛의 의의(意義)를 정의(定義)하신다. 성경의 창조 기사는 하나님 중심이고 그의 관점에서 전개된다.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신 행위는 창조에 대한 그의 주권을 나타내신다. 인간 세상에서도 이런 일이 생긴다. 어떤 인물이나 어떤 사물에 대해 이름을 정하는 것은 주권의 표시이다. 르우벤 자손은 아모리 족속을 정복한 뒤 그 도시들의 이름을 바꿨다. + 르우벤 자손은 헤스본과 엘르알레와 기랴다임과 느보와 바알므온들을 건축하고 그 이름을 고쳤고 또 십마를 건축하고 건축한 성읍들에 새 이름을 주었고 민 32:38 마찬가지로 이집트의 파라오 느고도 유다 왕을 격파한 뒤 엘리아김의 이름을 여호야김으로 바꾸었다. + 바로 느고가 요시야의 아들 엘리아김으로 그 아비 요시야를 대신하여 왕을 삼고 그 이름을 고쳐 여호야김이라 하고 여호아하스는 애굽으로 잡아갔더니 저가 거기서 죽으니라 왕하 23:34 저녁과 아침 the evening and the morning 이 구절은 두 요소 즉 낮과 밤이 분명하게 결정하는 말 그대로 자연적인 하루(a natural day)를 의미한다. 그리고 창세기 저자 모세(Moses)는 하루의 구분을 오늘날 우리가 하듯이 하루를 낮과 밤으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 저녁(evening)과 아침(morning) 즉 해넘이에서 해돋이까지(from sunset to sunrise)로 생각한다. 그리고 본문에서 창조의 시작을 아침으로 표시하고 창조의 마감을 저녁으로 표시하는 의미가 담겨있다. 첫째 날 the first day ‘첫째 날’에서 ‘날’로 번역된 히브리어 욤(yom)은 창조의 날을 서술하는 5절 8절 13절 19절 23절 31절 등에서의 그 단어의 사용은 별문제로 하고 창세기 1장과 2장에서 최소한 네 가지 방식으로 사용이 되고 있다. (1) 창세기 1장 14절 16절 18절 등에서의 야간(night) 밤에 대비되는 12시간의 주간(晝間 daytime)을 나타낸다. (2) 창세기 1장 14절에서 24시간의 태양일(solar day)을 나타낸다. (3) 창세기 1장 5절에서 첫째 날 ‘빛’의 창조로 시작된 빛의 기간(period of light)을 나타낸다. (4) 창세기 2장 4절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신 때’(the day that the LORD God made the earth and the heavens)의 24시간 태양일로 이루어진 창조의 전체 기간 6일을 나타낸다. 따라서 창세기의 창조 기사는 하나님이 세상을 문자적인 6일 엿새에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나타낸다. + 이는 엿새 동안에 나 여호와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가운데 모든 것을 만들고 제 칠일에 쉬었음이라 그러므로 나 여호와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출 20:11 QT 되새김 A 성경 본문에서 자주 반복되는 ‘하나님이 가라사대’(God said)라는 구절은 하나님께서 뜻하셨다(willed), 포고하셨다(decreed), 지명하셨다(appointed) 등을 의미한다는 말씀이 진리라고 인정하는가(admit). B 혼돈과 흑암이 가득한 지구에 ‘빛이 있으라 Let there be light’ 하나님이 말씀하시자 빛이 있었다는 사실을 진리라고 믿는가(believe). C 이 빛이 깊음(the deep)을 덮고 있는 흑암(darkness)을 깨뜨리는데 창조의 넷째 날 태양이 만들어지기 전에 생긴 이 빛은 어디에서 왔는가를 생각해보라(consider). D 혼돈과 흑암을 깨뜨린 이 말씀의 빛을 당신의 삶에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do). 오늘의 기도 빛으로 세상을 밝히신 하나님이시여 나의 혼돈하고 어두운 삶에 하나님의 말씀의 빛을 비춰주소서. 2020-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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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5-22
  • 김영배의 이야기 세계교회사 2_ 비방 표적
    Perpetual adoration at the National Expiatory Temple of San Felipe de Jesus, Mexico City 비방을 받는 표적 예수님이 선하시고 친절하시고 위대하시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예수님을 지지했을 것이라고 사람들은 상상할는지 모른다. 사실은 그렇지 못했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이 신주 모시듯 하는 그들의 규칙을 깨뜨리셨기 때문에 애시당초부터 예수님을 꺼렸다. 일반 사람들은 유대에 무거운 멍에를 씌워 거칠게 다스리는 로마 정복자들을 몰아내기 위해 예수님이 그의 능력을 사용하시지 않는 것 때문에 고개를 돌렸다. 유대인들은 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기름 부음 받은 자’를 의미하는 메시아를 하나님께서 보내주실 것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모아서 로마인들을 몰아내실 수 없었을까. 예수님은 정말 하나님께서 보내신 메시아셨다. 그는 적들에게 맞서기 위해 칼을 치켜들지 않으셨다. 그는 그의 왕국을 사람들의 마음속에다 세우셨다. 일반 사람들은 예수님이 그들을 처절하지만 신바람 나는 반란의 전쟁으로 인도해 주지 않으리라는 것을 발견했을 때 그들은 예수님에게서 얼굴을 돌리고 그를 반대하는 대열에 줄을 섰다. 부자들은 또 다른 이유로 예수님을 두려워했다. 부자들은 예수님이 안식일 규칙들을 삶아 잡수시든 볶아 잡수시든 전혀 개의치 않았다. 또한 그들은 로마의 통치 밑에서도 일이 잘되고 잘 먹고 살았기 때문에 일제 강점기의 친일파들 마냥 로마인들에 항거하는 전쟁은 더더욱 바라지 않았다. 예수님이 부자들을 화나게 만든 것은 예루살렘 성전에서 자랄대로 자란 하나의 관행에 대한 예수님의 통렬한 공격이었다. 예루살렘 성전에 큰 제단이 있었다. 그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는 예물로 동물들을 올려놓고 죽이는 돌이었다. 세계 각지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이 참배하려고 성전에 올 때 희생제물로 바칠 황소나 염소나 비둘기들을 가지고 먼 길을 올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객지에서 온 유대인들은 현장에서 희생제물들을 돈 주고 사야만 했다. 그들이 가져온 돈은 요새 말로 외화였기 때문에 현지 통화인 예루살렘 돈으로 환전해야만 했다. 짐승을 팔아 돈을 남기고 환전해서 차익을 챙기고 해서 부자들의 돈지갑은 늘 배고픈 줄을 몰랐다. 이런 어처구니없는 장사가 바로 성전 안에서 아무런 거리낌 없이 행해지고 있었다. 이렇게 쏠쏠하고 재미있는 돈벌이 장소에 어느 날 예수님이 느닷없이 나타나시더니 사람들과 짐승을 내모시고 돈 바꾸는 상들을 엎어 버리셨다. 돈 보따리인 짐승들이 푸드득 날아가고, 음매 거리며 도망가고, 사람들은 예수님의 그 무서운 기세에 기겁하고 우왕좌왕했다. 예루살렘 동전들이 성전 바닥에 흩어졌다. 이 일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도 치솟는 분을 삭이지 못해 손을 부르르 떨고 발을 동동 굴렸다. 율법의 엄격한 옹호자들, 반란을 바라는 일반 대중들, 그리고 부자들은 예수님의 이름 소리만 들려도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툴툴거렸다. 오래지 않아 자신에게 닥칠 일을 아신 예수님은 제자들과 마지막 저녁 식사를 나눌 자리를 마련하셨다. 떡과 포도주를 나눠주시며 그다음 날 부서지고 흘릴 그의 몸과 피라고 말씀하셨다. 그다음 날 예수님은 정죄를 받고 십자가 위의 사형을 선고받으셨다. 그가 죽으신 뒤 한 무덤에 안치되셨다. 제자들은 그들의 주님을 다시는 보지 못하리라 생각하며 다들 흩어져 도망갔다. 2020-05-16
    • G.QT
    • 이야기 세계 교회사
    2020-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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