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0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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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더굳뉴스] 리틀메시지 _욥기Job
    욥의 정원 욥기Job는 대부분 시로 이루어져 있지만 이야기는 아니다. 구약성경에서 에스겔은 그의 책 14장 14절에서 20절까지에서 욥은 실제 장소에서 실제 시련들을 겪은 실제 인물이었다고 말한다. 신약성경은 야고보서 5장 11절에서 시련을 겪을 때 신앙을 지키는 인내자의 본보기로 욥을 들었다. 그는 하나님을 믿는 자신의 신앙을 버리지 않았다. 욥기는 왜 의인이 고난을 받는가라는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런 시가 있다. 난 기도했다 _작자 미상 나는 하나님에게 가장 강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내가 원하는 모든 걸 이룰 수 있도록 하지만 하나님은 나를 약하게 만들었다 겸손해지는 법을 배우도록 나는 하나님에게 건강을 부탁했다 더 큰 일을 할 수 있도록 하지만 하나님은 내게 허약함을 주었다 더 의미 있는 일을 하도록 나는 부자가 되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행복할 수 있도록 하지만 난 가난을 선물받았다 지혜로운 사람이 되도록 나는 재능을 달라고 기도했다 그래서 사람들의 찬사를 받을 수 있도록 하지만 난 열등감을 선물받았다 하나님의 필요성을 느끼도록 나는 하나님에게 모든 것을 부탁했다 삶을 누릴 수 있도록 하지만 하나님은 내게 삶을 선물했다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도록 나는 내가 기도한 것을 하나도 받지 못했지만 내게 필요한 모든 걸 선물 받았다 내가 작은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내 무언의 기도를 다 들어 주셨다 모든 사람들 중에서 나는 가장 축복받은 자이다 작자 미상의 시인은 하나님은 내 무언의 기도를 다 들어 주셨기에 모든 사람들 중에서 나는 가장 축복받은 자라고 노래한다. 이 시인처럼 욥도 그의 모든 고난 속에서 하나님을 인정하고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흔들리지 않는다. 욥기에는 세 만남이 있다. 첫째 하나님과 사탄의 만남이 있다. 둘째 욥과 친구들의 만남이 있다. 셋째 하나님과 욥의 만남이 있다. 그의 친구들은 욥이 고난을 받는 것은 죄 때문이라고 납득시키려 애를 쓴다. 욥은 자신의 성실과 믿음을 타협하게 만드는 어떤 시도나 말도 거부했다. 화를 내기는 했지만 욥은 언제나 진실을 말했다. 그러나 그의 친구들은 그렇지 못했다. 욥기에는 많은 비유들이 사용되고 있다. 그 비유들은 자연 세계의 삶과 죽음과 전능하신 하나님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욥의 고난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의미를 깨우치게 해 주는 아주 귀중한 교훈이다. 2024-0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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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5
  • [더굳뉴스] 리틀메시지 _에스더Esther
    에스더Esther에는 하나님의 이름이 한번도 언급되지 않지만 모든 사건에 하나님의 섭리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페르시아인들은 주전 539년 바빌론을 정복했다. 에스더의 사건들은 수산에서 일어났다. 그곳에 왕의 겨울 궁전이 있었다. 에스더의 아하수에로Ahasuerus라는 명칭은 이집트의 파라오가 왕의 대명사인 것처럼 페르시아의 최고 통치자의 칭호였다. 그러므로 에스더를 왕비로 삼은 페르시아의 아하수에로는 크세르크세스 1세였을 것이다. 에스더서의 사건들은 크세르크세스 1세 재위 3년부터 12년까지 10년 동안에 일어난 일들이다. 성경에서 여성의 이름을 따른 책은 에스더와 룻뿐이다. 룻은 유대인과 결혼한 이방 여인이었다. 반면에 에스더는 이방인과 결혼한 유대 여인이었다. 둘 다 신앙과 용기의 여인들이었다. 둘 다 이스라엘 민족을 구원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룻은 다윗의 조상이 되는 아들을 낳았다. 에스더는 유대인을 전부 죽이려는 원수를 막았다. 에스더가 그 일의 결심을 위해 말한 한마디는 죽으면 죽으리라였다. 이런 시가 있다. 가지가 담을 넘을 때 _정끝별 나의 영혼 굽이치는 바다와 백합의 골짜기를 지나 마른 나뭇가지 위에 다다른 까마귀같이 이를테면 수양의 늘어진 가지가 담을 넘을 때 그건 수양 가지만의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얼굴 한번 못 마주친 애먼 뿌리와 잠시 살 붙였다 적막히 손을 터는 꽃과 잎이 혼연일체 믿어주지 않았다면 가지 혼자서는 한없이 떨기만 했을 것이다 한 닷새 내리고 내리던 고집 센 비가 아니었으면 밤새 정분만 쌓던 도리 없는 폭설이 아니었으면 담을 넘는다는 게 가지에게는 그리 신명 나는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가지의 마음을 머뭇 세우고 담 밖을 가둬두는 저 금단의 담이 아니었으면 담의 몸을 가로지르고 담의 정수리를 타 넘어 담을 열 수 있다는 걸 수양의 늘어진 가지는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목련 가지라든가 감나무 가지라든가 줄장미 줄기라든가 담쟁이 줄기라든가 가지가 담을 넘을 때 가지에게 담은 무명에 획을 긋는 도박이자 도반이었을 것이다 사람은 새로운 영역과 미래로의 진입을 위해 첫발을 떼는 순간 두렵고 떨리는 마음과 희생을 각오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렇듯 가지가 담을 넘어서는 데에도 용기가 있기 때문에 가능할 것이다. 그것을 믿음이라고 부를 수 있지 않을까. 믿음이 없다면 어떻게 한낱 가지나 줄기가 이 세상의 단단한 담과 깊은 절망의 절벽을 건너갈 수 있겠는가. 에스더서의 주요 교훈은 한낱 가지나 줄기도 담을 넘는 데 용기가 필요한 것처럼 하나님의 뜻을 위해 죽음을 각오한 용기가 필요할 때가 있다는 것이다. 세상 나라들의 주권자는 하나님이시므로 주의 백성은 주의 뜻에 복종하고 따라야 한다. 2024-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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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27
  • [더굳뉴스] 리틀메시지 _느헤미야Nehemiah
    짐실은 노새 느헤미야Nehemiah는 그 공동체를 이어받아 외적 안정을 확보했다. 반면 에스라는 바빌론에서 돌아온 새 공동체의 영적 안정을 확립했다. 그는 아버지가 하가랴이고 형제가 하나니라는 것 말고는 알려진 게 없다. 아마 그의 할아버지는 예루살렘이 멸망했을 때 바빌론으로 끌려온 포로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페르시아에서 태어났을 것이다. 느헤미야서의 생생한 묘사는 그의 개인 일기에 근거한 자료였을 것이다. 그는 아닥사스다 왕의 술 관리관이었을 때 예루살렘 형편이 아주 어렵다는 말을 들었다. 그는 예루살렘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리고 얼마 뒤 그는 왕의 술 관리관이 되었다. 이런 시가 있다. 기도 _라반드라나트 타고르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위험에 처해도 두려워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게 하소서 고통을 멎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고통을 이겨 낼 가슴을 달라고 기도하게 하소서 생의 싸움터에서 함께 싸울 동료를 보내달라고 기도하는 대신 스스로의 힘을 갖게 해달라고 기도하게 하소서 두려움 속에서 구원을 갈망하기보다는 스스로 자유를 찾을 인내심을 달라고 기도하게 하소서 내 자신이 성공에서만 신의 자비를 느끼는 겁쟁이가 되지 않도록 하시고 나의 실패에서도 신의 손길을 느끼게 하소서 그는 유다 총독으로 임명받아 주전 445년 성벽을 재건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부임했다. 하나님의 소명을 성취하기 위한 그의 깊은 신앙은 그의 기도와 강한 확신으로 드러난다. 그 땅에 회복이 이어졌지만 유대 민족은 시련과 비난의 시기를 겪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고 계셨다. 느헤미야의 강조는 하나님을 신뢰하라는 것이었다. 2024-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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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20
  • [더굳뉴스] 리틀메시지 _에스라Ezra
    솔로몬의 왕궁건설 에스라Ezra는 역대기하가 끝나는 곳에서 시작한다. 이스라엘을 정복한 바빌론이 주전 587년에서 586년에 많은 백성을 잡아가고 도시와 성전을 파괴했다. 주전 538년 페르시아 왕 고레스가 유대인들이 그들의 땅으로 돌아가 성전 재건을 허락하는 조서를 공포했다. 그때 스룹바벨의 인솔로 5만여 명이 돌아왔다. 바빌론 포로 생활 70년이 끝났다. 어려움이 많았고 지체되기는 했지만 주전 515년 성전이 완성되었다. 이런 시가 있다. 담쟁이 _도종환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 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율법학자 에스라는 주전 458년 2천여 명의 유대인과 예루살렘에 왔다. 에스라의 주요한 일은 율법의 연구와 해석이었다. 그는 자신의 일을 통해 새 시대 공동체의 영적 지도자가 되었다. 바빌론 포로에서 돌아와 성전을 재건하는 이스라엘 백성은 도종환 시인이 노래하는 담쟁이 잎 같았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가 담쟁이 수 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가는 담쟁이에게 절망의 벽은 없어 보인다. 그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담긴 성경을 믿음으로 붙잡고 성전을 재건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절망의 벽은 없어 보였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독려하는 지도자 에스라가 없고 믿음의 동지적 연대가 없었다면 이스라엘 백성은 그 척박하고 방해가 많은 땅에서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2024-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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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3
  • [더굳뉴스] 리틀메시지_역대기하2Chronicles
    바벨론 포로들 역대기하2Chronicles는 다윗 자손의 통치를 크게 다룬다. 그 기간은 솔로몬 시대부터 주전 586년 시드기야 치하 예루살렘 함락까지다. 역대기서 전체에 걸쳐 남 왕국 유다를 집중적으로 강조한다. 남 왕국 유다의 흥망성쇠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지 안지키는지에 따라 조명이 되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께 신실하지 못하고 그들의 신앙의 의무에 태만해서 망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고향을 떠나 머나먼 바빌론으로 끌려갔다. 이런 시가 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_이상화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자욱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를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쁘게나 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매던 그 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 다오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웃어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지폈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고 오는 봄은 누구도 빼앗을 수 없다. 그것이 천지만물을 들썩이게 하는 봄의 풋내이고 봄의 푸른 웃음이다. 그러나 들을 빼앗긴 자에게 오는 봄은 절박하다. 봄조차 빼앗기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봄의 답답함이고 봄의 푸른 설움이다. 들의 봄과 인간의 봄 자연의 봄과 시대의 봄은 이렇게 갈등한다. 온몸에 햇살을 받고 이들을 발목이 저리도록 실컷 밟아보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이야말로 내 나라 내 땅에 대한 지극한 사랑의 표현이다. 떠나온 길이 멀면 돌아갈 길도 멀다. 바빌론의 유대인들이 그랬을 것이다. 역대기하 마지막에 유대인의 예루살렘 귀환을 허락하는 고레스의 조서가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의 백성이 믿음의 불성실로 하나님의 징벌을 받아 고향을 떠나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하나님의 은혜로 그들의 고향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2024-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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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06
  • [더굳뉴스] 리틀메시지_ 역대기상1Chronicles
    바빌로니아 큰 물가 마을 역대기상1Chronicles과 역대기하는 원래 히브리어 원문에서 한 권이었다. 히브리어의 구약 성경을 그리스어로 번역한 사람들이 그것을 두 권으로 나누었다. 본래의 제목은 뒤에 남은 일들이라는 뜻이었다. 그것은 사무엘서와 열왕기서에 들어있지 않은 작은 이야기들이 들어있기 때문이었다. 마찬가지로 영어 제목 '크로니클스Chronicles'도 히브리어 제목처럼 '일상의 일들'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이것은 역대기서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 특별히 왕들의 생활들에서 일상의 중요한 일들을 차례대로 이야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초점은 다윗과 유다 왕국에 있다. 그리고 그 관점은 제사장들의 것이다. 유대 민족은 신앙의 불성실로 망해 포로가 되어 예루살렘에서 바빌론으로 끌려갔다. 이런 시가 있다. 바빌론 강가에서 _보니 엠 바빌론 강가에 우리는 앉아서 우리는 울었어요 시온을 생각하며 바빌론 강가에 우리는 앉아서 우리는 울었어요 시온을 생각하며 사악한 무리들이 우리를 포로로 잡아왔어요 그리고 우리에게 노래를 부르라고 했지요 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주의 노래를 부를 수 있나요 이런 낯선 땅에서 사악한 무리들이 우리를 포로로 잡아왔어요 그리고 우리에게 노래를 부르라고 했지요 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주의 노래를 부를 수 있나요 이런 낯선 땅에서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말과 우리 가슴에서의 명상을 여기 오늘밤 그대 앞에서 받아주어요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말과 우리 가슴에서의 명상을 여기 오늘밤 그대 앞에서 받아주어요 바빌론 강가에 우리는 앉아서 우리는 울었어요 시온을 생각하며 바빌론 강가에 우리는 앉아서 우리는 울었어요 시온을 생각하며 바빌론 강가에 바빌론의 어두운 눈물 우리는 앉아서 당신은 노래를 불렀죠 우리는 울었어요 사랑의 노래를 불러요 시온을 생각하며 바빌론 강가에 바빌론의 거친 작은 조각들 우리는 앉아서 당신은 사람들이 우는 것을 듣지요 우리는 울었어요 그들은 그들의 하나님이 필요해요 시온을 생각할 때 오 힘을 가져요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 남쪽 약 110km 떨어져 있는 유프라테스 강가에 바빌론이란 고대 국가가 번성했었다. 바빌론이 유대 왕국을 정복하여 많은 횡포를 저질렀다. '바빌론 강가에서'라는 노래는 바빌론에 정복당한 유대인들의 심정을 노래한 메시지가 그 내용이다. 이 노래는 시편 137편을 토대로 작사 작곡을 하였다. 바빌론 포로생활 때 유대인들의 슬픔과 시온의 그리움을 노래한 시가 시편 137편이다. 이 노래를 부른 가수들은 여성 3인과 남성 1인으로 구성된 4인조 보컬 '보니 엠'이다. 그들은 자메이카 출신의 영국 가수들이다. 그들은 악기를 전혀 다루지 않고 순수한 보컬만으로 서인도 제도의 특유한 창법을 구사하는 게 특징이다. 그들은 1978년 이 노래를 불러 세계적인 인기를 얻었다. 역대기상과 역대기하는 바빌론 포로 이후 이스라엘 땅에 돌아온 유대인들에게 중요했다. 그들은 다윗의 신앙 본보기가 필요했고 성전에 대한 강조는 그것을 재건할 때 필요했다. 역대기서는 변화와 어려움의 시기에 성전을 재건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에게 격려와 힘을 주었다. 그것은 다윗의 신앙과 솔로몬의 지혜와 성전 건축의 영광스러운 역사를 통해서였다. 2024-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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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31

실시간 G.QT 기사

  • 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20_ 정경과 외경
    CANON Bible malmesbury arp 정경과 외경 영지주의자들은 예수님과 사도들의 비밀 가르침들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하는 책들을 썼다. 교회는 불가피하게 어떤 책을 받아들여야 되고 어떤 책을 받아들이지 말아야 되는지를 말해야만 했다. 언행의 일치가 없고 그악스런 영지주의자들이 어깨에 힘을 주고 다니던 시절에는 아직 신약성경이 없었다. 신약의 책들이 기록되긴 했지만 이런 책들은 참된 가르침으로 받아들여야 된다는 입장 표명을 교회가 하지 않고 있었다. 차츰 일반교회는 정경(Canon)으로 받아들여야 될 책들과 정경에서 제외 시켜야 될 책들을 결정했다. ‘정경’(Canon)이라는 말은 사물을 똑바로 재는 잣대를 의미한다. 어떤 책이 정경으로 받아들여지게 되면 그 책은 잣대에 어떤 표시가 새겨진 것과 같게 되었다. 먼저 바울의 서신들이 정경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다음에 네 복음서들과 사도행전이 받아들여졌다. 지금의 신약성서의 다른 기록들은 정경 안에 자리를 하나 차지하는데 지금의 어디 당회장 자리 하나 맡는 것만큼이나 더뎠다. 그래서 요한복음 같은 기록조차도 한바탕 싸움을 치루고서야 정경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다. 요한계시록, 히브리서, 베드로후서, 유다서, 야고보서 및 요한이서와 삼서 등도 정경 안에 내 집을 마련하기 위해 분당 아파트 당첨만큼이나 어려움을 겪은 뒤에 한 칸을 차지할 수 있었다. 다시 말해서 이들 성경들이 정경이라는 잣대에 어떤 표시를 새길 수 있기까지는 아주 점진적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온갖 어려움을 겪고 난 뒤 비로소 4세기에 이르러서야 정경 안에 마련된 신약성서들의 주택마련이 마무리되었다. 성령께서 교회와 협력하여 성서들의 보금자리인 정경을 완성하는데 수백 년을 두고 역사하신 셈이었다. 참으로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내기 위한 걸러냄의 역사였다. 인간의 어떤 발견이 이만한 노력을 끈질기게 기울일 수 있었겠는가. 하나님이신 성령께서는 결코 서두르시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교회의 일들에 얼마나 서두르고들 하는지. 성령께서 수백 년에 걸쳐 걸러내어 확정하신 그 말씀을 전하는데 우리는 얼마나 소홀하고 급한지... 그리스도교 미술에서 네 복음서들은 구약성서의 에스겔 선지자가 본 환상에서 나타났던 천국 생물들로 표현되었다. 에스겔 선지자가 신비한 환상 가운데 본 한 얼굴은 소의 형상이었고 나머지 한 얼굴은 사람의 형상이었다. 이 형상들이 복음서들의 저자들이라고 하는 네 전도자들의 상징들이 되었다. 즉 사자는 마가의 상징이고 독수리는 요한의 상징이고 소는 누가의 상징이고 그리고 사람은 마태의 상징이다. 술탄 모하메드 2 세의 외경 서신, Apocryph 정경 안에 어렵사리 주택을 마련하지 못한 책들을 외경(Apocrypha)이라고 한다. 시쳇말로 무주택자들인 이 외경의 기록들은 상상이라는 물레를 돌려 이야기들을 자아냈다. 이것들은 신약성서에 생략되어 있거나 단순히 암시 정도만 되어 있는 예수님의 생애와 사도들의 인생이 궁금해 성이 차지 않는 부분들을 메우려고 무진 애를 썼다. 일례로 외경은 예수님의 어머니와 심지어 할머니에 대해서까지도 고주알미주알 이야기한다. 또 예수님의 어린 시절에 대해서도 주절거린다. 어떻게 소년 예수님께서 진흙으로 새를 만드셨으며 손뼉을 딱딱 치시자 날개를 퍼득이며 날아갔는지를 너스레 떤다. 신명이 난 부흥사의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처럼... 2020-0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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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야기 세계 교회사
    2020-09-19
  • 기독교강요 영어 수업 - Lesson IX 신실한 조력자
    Idelette Stordeur de Bure (Boer) Calvin Lesson IX 신실한 조력자the faithful helper 제네바는 사계절이 분명한 곳입니다. 중세를 갓 지난 16세기 신앙 때문에 촘촘하게 중층적으로 서로 얽히게 되는 칼빈 시대에 물 같이 담백한 관계 맺음은 어떤 것일까요. 휘어진 달리아 이파리 하나가 허공에 몸을 기댑니다. 허공도 따라서 휘어지면서 달리아 이파리를 살그머니 보듬어 안습니다. 그들 사이에 누구도 모르는 잔잔한 기쁨의 강물이 흐릅니다. 부부 사이의 주고받음이 달리아 이파리와 허공 같으면 어떨까 싶습니다. 조용한 요구에 조용한 응답이 있는 것, 어떤 부름에 낮은 목소리의 대답이 있는 것, 모자라는 것을 가만히 채워주는 것, 말하지 않아도 짐작하고 헤아리는 것, 거만하지 않고 정중한 것, 들으면서 기다리는 것, 마음이 굳어지지 않게 살피는 것 등이 관계를 담백하게 가꾸지 않을까 싶습니다. 관계는 말로써 이뤄지는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얼음이 녹으면 봄이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불완전하기에 세상이 풍요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관계라는 말이 나온 김에 영어의 관계대명사에 대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관계대명사(relative pronoun)란 두 문장을 연결하는데 관계하는 대명사로 앞의 명사를 설명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접속사 역할과 대명사 역할을 동시에 하게 됩니다. 관계대명사는 영어의 몇 문장만 읽어내려 가더라도 반드시 나올 정도로, 실제로 대단히 많이 사용됩니다. 따라서 반드시 읽혀 둘 필요가 있습니다. He's reading a book. 그는 책을 읽고 있습니다. The book has useful information. 그 책에는 유용한 정보가 있습니다. 이를 한 문장으로 쓰면 다음과 같이 쓰일 수 있습니다. He's reading a book which has useful information. 그는 유용한 정보가 있는 책을 읽고 있습니다. which가 서로 다른 두 문장을 붙였다는 데서 접속사 성격을 가지며, which가 ‘a book’ 대신에 쓰였다는 데서 대명사 성격도 있습니다. 그런데 종속절의 일부 대상을 관계대명사로 대신해서 쓰는 것이라서 관계대명사 뒤에 오는 말은 불완전한 문장일 수밖에 없습니다. 위의 문장을 다시 봅시다. which 뒤에 있는 ‘has useful information.’은 주어가 비어있으므로 불완전한 문장입니다. 참고로 관계대명사로 특정 대상을 받았는데 관계사절 맨 끝에 전치사가 목적어 없이 혼자 남는다면 그 전치사는 관계대명사 앞으로 보낼 수 있습니다. 한국어에선 관계사가 따로 없기에 해석할 때 관계사에도 뜻을 붙여 해석해야 합니다. 그런데 저게 영어 용법 자체에도 그리 뜻이 있지 않다 보니 적당히 재량으로 넘기는 게 좋습니다. 위의 예시로 예를 들자면 이렇습니다. He's reading a book which has useful information. 그는 그것에(which) 어떤 유용한 정보가 있는 책을 읽고 있습니다. 정도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정말로 직역하자면 '그는 책을 읽고 있는데 그것은 어느 유용한 정보가 있습니다'로 해석되나 이는 비제한적 용법에 따른 해석이 돼버리니 올바르게 해석하자면 틀리는 해석이 됩니다. 사실 관계대명사만 해석이 되면 웬만한 원서를 독해하는 것이 문법 면에서 크게 어렵지는 않게 됩니다. 관계대명사도 대명사이므로 앞에 오는 명사가 있게 되는데 그게 바로 선행사입니다. 이 선행사가 관계대명사가 받는 대상이며, 사람일 경우 who, 사람이 아닐 경우 which를 써야 합니다. that은 사람이나 사물 다 사용 가능하지만 소유격으로 쓰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사람이 아니면 원칙적으로 소유를 할 수 없으니 소유격이 없지만, 소유격을 써야 하는 경우가 많으니 사람의 소유격인 whose나 전치사와 함께 오는 of which를 빌려 쓰게 됩니다. 여기서 주격, 소유격, 목적격, 즉 격을 결정하는 것은 선행사가 아니라 관계대명사절 안에서의 기능과 위치에 달려 있습니다. 1. 선행사 뒤의 관계사절에서 주어 역할을 하면 주격 2. 관계사절에서 소유격 역할을 하면 소유격 3. 관계사절에서 목적어 역할을 하면 목적격입니다. 관계대명사가 받는 대상(선행사)이 사람인 경우에 씁니다. 주격은 who, 소유격은 whose, 목적격은 whom입니다. 주격 : This is my friend who is very kind. 이쪽은 아주 친절한 친구입니다. 소유격 : I met Leah whose eyes are attractive. 나는 눈이 매력적인 레아를 만났습니다.목적격 : The criminal was her husband she had trusted. 범인은 그녀가 신뢰했었던 남편이었습니다. 선행사가 사람이 아니면 which를 씁니다. 주격과 목적격은 which, 소유격은 whose입니다. 주격 : We built the house which has three rooms. 우리는 3개의 방이 있는 집을 지었습니다.소유격 : At the zoo, I saw many animals whose legs are four. 동물원에서 나는 다리가 4개인 많은 동물들을 보았습니다.목적격 : I'm going to make chocolate which she likes. 나는 그녀가 좋아하는 초콜릿을 만들려고 합니다. that은 선행사가 사람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다 쓸 수 있습니다. 위의 예문들에 쓰인 who, whom, which를 that으로 바꾸면 됩니다. 주격과 목적격은 that이고 소유격은 없습니다. 관계대명사 what은 ‘the thing(s) which/that’이 한 단어로 줄어든 것으로 지 혼자서 선행사까지 다 포함합니다. That과 마찬가지로 소유격이 없습니다. 주격 : Most girls prefer what is cute. 대부분의 소녀들은 귀여운 것을 선호합니다.목적격 : Rachel likes Jacob very much, because I've often done what she likes. 라헬이 야곱을 매우 좋아하는 이유는 그가 그녀가 좋아하는 일을 자주 해왔기 때문입니다. 관계대명사는 영어 원서를 읽다보면 많이 접하게 될 것이니 이 정도로 끝내고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이 정도만 알면 문장 해독 실력이 곧 늘어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칼빈은 정숙하고(chaste teist) 자상하고(obliging blidiŋ) 까다롭지(fastidious fæstdis) 않고 검약하고(economical ːknmikl) 근면하고(patient pint) 그리고 자신의 건강(health helθ)에 세심한(careful krfl) 여인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help help) 친구들에게 부탁했습니다. 칼빈은 그런 여인과 결혼을 했습니다. 샤프(Philip Schaff)는 그의 『기독교 교회사』(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8권에서 칼빈의 유일한 아내 이델레트에 대한 글이 이어집니다. Idelette bore Calvin one son and possibly a few daughters, all of whom died in infancy. In response to the slander of Catholics who took this for a judgment upon them for being heretics, Calvin said he was content with his many sons in the faith. 이델레트는 칼빈에게 한 아들과 아마 몇 명의 딸(daughter dːtr)을 낳아주었습니다. 그들 모두 유년기(infancy nfnsi)에 죽었습니다. 이것을 두고 이단(heretic hrtik)이 된 것 때문에 그 아이들에게 심판(judgment ddmnt)이 내린 것이라는 가톨릭교도들의 비방(slander slndr)에 답하여(in response to) 칼빈은 믿음 안의 많은 아들들로 만족한다(content kntnt)고 말했습니다. Idelette busied herself attending to Calvin in his many illnesses, faithfully visiting the sick and afflicted, and making her home a refuge for those who fled for their lives and their faith.이델레트는 칼빈 자신의 많은 질병(illness lnis)들에도 아프고 어려운(afflict flkt) 사람을 성실하게 심방하는 칼빈의 시중을 들고(attend tnd) 그리고 삶과 신앙을 위해 도망친 사람들을 위해 그녀의 집을 피난소(refuge rfjuːd)로 제공하는 등의 일로 분주했습니다. Though she survived the plague when it ravaged Geneva, Idelette died after a lengthy illness in 1549. Upon her deathbed she was patient, and her words, 전염병(plague pleig)이 제네바에 창궐했을(ravage rvid) 때 살아남긴(survive srviv) 했지만 이델레트는 오랜(lengthy lŋkθi) 질병(illness lnis)으로 1549년 사망했습니다. 임종(deathbed deθbed)에 임해서도 인내심이 강한(patient pint) 그녀는 말했습니다. “O God of Abraham, and of all our fathers, in thee have the faithful trusted during so many past ages, and none of them have trusted in vain. I also will hope.”“아브라함과 우리 모든 조상의 하나님이시여. 수많은 과거 시대에도 신자들이 하나님을 신뢰했고 그들의 신뢰가 한 사람도 헛되지 않았습니다. 저도 소망합니다.” What Calvin wrote to Pierre Viret some days after her death will illustrate her character further.그녀가 죽고 며칠 뒤 칼빈이 비레(Pierre Viret 1511 1571 스위스 개혁주의 신학자)에게 이델레트의 성품(character kriktr)에 대해 아주 깊이(further fːrðr) 설명하는(illustrate lstrit) 편지를 썼습니다. I have been bereaved of the best companion of my life, of one who, had it been so ordered, would not only have been the willing sharer of my indigence, but even of my death. During her life she was the faithful helper of my ministry.나는 내 생애 가장 훌륭한 동반자를 잃었습니다. 그렇게 정해진 도리였다면(had it been so ordered) 그녀는 내 가난(indigence ndidns)뿐만 아니라 내 죽음의 자발적인(willing wliŋ) 공유자(sharer rr)이기도 했습니다. 살아 있는 동안 그녀는 내 목회 사역(ministry mnistri)의 신실한(faithful fiθfl) 조력자(helper hlpr)였습니다. From her I never experienced the slightest hindrance. She was never troublesome to me throughout the entire course of her illness; she was more anxious about her children than about herself. As I feared these private cares might annoy her to no purpose, I took occasion, on the third day before her death to mention that I would not fail in discharging my duty to her children. 그녀에게서 나는 한 번도 아주 사소한(slightest slaitist) 방해(hindrance hndrns)도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아픈 전체(entire entir) 기간(course kːrs) 내내(throughout θruːut) 한 번도 나를 귀찮게(troublesome trblsm) 한 적이 없습니다. 그녀는 자신보다 그녀의 아이들을 더 염려했습니다(anxious ŋks). 이런 사사로운 걱정들이 그녀를 괴롭힐까봐(annoy ni) 걱정을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을(fear to no purpose 걱정을 해도 전혀 성과가 오르지 않다) 때 그녀의 임종 사흘 전 내가 그녀의 자녀들에 대한 나의 의무를 저버리지(discharge distːrd) 않겠노라고 언급할(mention mnn) 기회(occasion kin)를 잡았습니다. Taking up the matter immediately, she said, ‘I have already committed them to God.’ When I said that that was not to prevent me from caring for them, she replied, ‘I know you will not neglect what you know has been committed to God.’ Lately, also, when a certain woman insisted that she should talk with me regarding these matters, I, for the first time, heard her give the following brief answer: 그 문제(matter mtr)를 즉시 잡고 그녀는 말했습니다. ‘저는 이미(already ːlrdi) 그 애들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commit kmt).’ 또한 나중에 이 문제에 대해 그녀가 나와 이야기를 나누었어야 한다고 (칼빈이 재혼할 경우를 생각하고) 어떤 여인이 주장할 때 그녀에게 다음의 짤막한(brief briːf) 대답(answer nsr)을 들려주라는 말을 처음으로(for the first time) 들었습니다. ‘Assuredly the principal thing is that they live a pious and holy life. My husband is not to be urged to instruct them in religious knowledge and in the fear of God. If they be pious, I am sure he will gladly be a father to them; but if not, they do not deserve that I should ask for aught in their behalf.’ This nobleness of mind will weigh more with me than a hundred recommendations.‘확실히(Assuredly ːridli) 제일 중요한(principal prnspl) 일은 그 아이들이 신앙심이 깊고(pious pis) 거룩한 생활을 사는 것입니다. 제 남편(칼빈)이 그 아이들에게 종교 지식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경외(fear fir)를 가르치려고(instruct instrkt) 애쓰지 말아야 합니다. 그 아이들이 신앙심이 깊다면 그가(칼빈) 그 아이들에게 기꺼이 아버지가 되 주실 것이라는 것을 확신합니다. 그러나 만일 그렇지 않다면(if not) 제가 그 아이들을 위해 무언가를(aught ːt) 요청해야 할 가치가(deserve dizːrv) 그들에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 고매한 마음(nobleness of mind)은 내게는 100개의 권고(recommendation rkmndin)보다 더 무게가 나갈(weigh wei) 것입니다. John Calvin, Letter to Pierre Viret, 1549 존 칼빈, 비레(Pierre Viret)에게 보내는 편지, 1549 칼빈이 피신한 바젤 현대교회아내의 유언을 전하는 칼빈의 편지는 그녀가 얼마나 고결한 마음의 신앙을 가졌는지를 동료 개혁자에게 편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임종을 앞둔 아내의 마음은 자녀들의 신앙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 아이들이 신앙심이 깊고(pious pis) 거룩한 생활을 살지 않는다면 양아버지 칼빈이 그 아이들에게 종교 지식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경외를 가르치려고 애쓰지 말아야 한다고 죽음을 앞둔 자리에서조차 말할 정도로 자녀의 신앙과 삶을 칼빈의 아내 이델레트는 무엇보다 강조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우리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히 11:6). 이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엡 2:8-9). 진정한 성경적 믿음은 지적인 만족을 포함하게 됩니다. 이 점에 대해 칼빈은 『기독교강요』에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가 주장하는 것은 믿음의 대상은 그리스도이며 그 믿음은 경건한 무지가 아니라 올바른 지식에 근거를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지식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오고 믿음은 확신을 포함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믿음의 방패가 되어야 합니다. 한 남녀가 결혼에 이르는 과정을 그리스도인의 믿음에 비유해보면 이렇습니다. 구혼의 첫 단계는 믿음의 첫 번째 요소인 알게 되는 과정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남녀가 처음 만나게 되면 서로에 대해 알게 되고 상대가 좋은 결혼 생활에 필요한 것을 가지고 있는지의 여부를 배우게 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단계입니다. 이 단계에서 상대방이 신뢰할만한 사람인지를 판단하지 못하게 되면 나중에 문제가 생기게 될 것입니다. 구혼의 두 번째 단계는 믿음의 두 번째 요소인 마음의 감동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알게 되는 것을 넘어선 사랑에 빠지게 되는 단계입니다. 서로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된 남녀는 서로를 이해하고 좋아하고 사랑하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사랑에 빠진 두 남녀는 결혼하기로 약속하고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서로 사랑하고 신실하기를 약속합니다. 두 남녀는 그 약속이 변하지 않을 것을 확신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신부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몸과 마음과 뜻을 다해 사랑하는 신랑 되신 그리스도에게 칼빈의 아내 이델레트처럼 신앙과 삶으로 헌신해야 할 것입니다. 2020-09-14
    • G.QT
    • 기독교강요 영어수업
    2020-09-14
  • 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19_ 교황과 베드로
    Christ Handing the Keys to St. Peter by Pietro Perugino (1481-82) 교황과 베드로 거대한 로마제국의 혹독한 박해들이 교회의 성장이 진행되는 것을 가로막지 못했다. 그 밖에 그리스도인들이 항상 쫓기는 사냥감 마냥 추적과 뒤짐을 당한 게 아니었고 로마 전역에서 동시에 숨돌릴 사이 없이 빈번하게 박해를 받지는 않았다. 예컨대 지금의 프랑스인 골(Gaul 라틴어로는 갈리아)지역에서의 박해가 반드시 아프리카나 그리이스에서의 박해를 의미하지는 않았다. 주 후 1백 년에서 2백 년에 이르는 2세기 동안에 여기저기에서 아주 자주 박해가 일어나긴 했지만 모든 곳에서 한꺼번에 발생한 게 아니었다. 그러다가 주 후 2백 년에서 3백 년까지의 3세기 동안에는 기독교회가 로마 전역에 걸쳐 거의 완전한 평화를 향유한 근 50년에 달하는 두 번의 시기가 있었다. 그러니까 약간의 기간을 빼고는 근 한 세기의 평화를 진력날 정도로 누린 셈이었다. 다시 말해서 3세기가 시작되는 2백2년과 세기의 중간인 2백50년과 3세기가 바로 끝난 직후의 3백3~3백4년에 로마 황제들이 로마 전 지역에 걸쳐 그리스도교를 분쇄하려고 힘을 썼다. 특별히 이 평화 시기에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사상을 보다 명확하고 확고하게 틀을 잡았다. 요즘의 통일교 추종자들 같은 그악스런 영지주의자들과 벌인 논쟁들은 누가 옳은지를 어떻게 알 것이냐 하는 문제를 제기시켰다. 눈에 한껏 힘을 준 영지주의자들은 자기들이 예수님과 베드로와 바울의 특별한 가르침들을 지키기 때문에 옳다고 입에 거품을 물고 주장했다. 일반(Catholic: 이 단어는 보편적인, 일반적인, universal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들은 혀가 돌아가는 대로 대답하다가 막히면 고개를 갸웃거린 게 아니라 예수님과 베드로와 바울에게 물어봄으로써 맹랑한 이단들의 물음에 답했다.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그분들이 어떤 신비한 가르침들을 책임 맡았을 가능성이 가장 높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교회들을 돌보도록 선택받은 감독들에게 그러한 중요한 사항들을 맡기지 않았겠는가? 신약성서에 나오는 감독(bishop)이라는 말은 교회를 돌보는 사람인 감독자, 즉 목자(Pastor)를 의미했다. 그런데 이들 감독들 가운데에서 로마의 감독만큼 사도들의 정신과 가르침을 잘 설명해 줄 수 있는 감독이 없노라고 교인들이 입을 모아 영지주의자들에게 말했다. 로마교회는 베드로와 바울, 두 사도들에 의해 설립되었다. 2세기 무렵에는 베드로가 로마교회를 세우는 데 도움을 줬다는 생각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다가 4세기에 이르러서는 베드로 자신이 로마교회의 첫 번째 감독이었다는 주장이 어지간히 설득력을 가지게 되었다. 3세기에는 로마의 한 감독이 난데없이 주장을 폈다. 그의 주장은 그리스도께서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마 16:18, 19)라고 말씀하셨을 때 주님께서는 베드로가 로마의 감독들에게 줄줄이 전달해준 어떤 권한을 베드로에게 주시고 계셨다는 것이다. Coat of arms Holy See 중세기에 이르러서는 유독 로마의 감독에게만 포우프(Pope)라는 칭호로 불려졌다. 이 단어는 단순히 ‘아버지’라는 뜻만을 의미했다. 그래서 초창기에는 이 칭호가 어떤 주교에게든지 사용되었다. 지금 중간에 소개된 그림은 메달인데 후대의 사상을 나타내고 있다. 이 메달의 그림에서 교황(포우프)이 베드로 앞에서 그의 교회를 쳐들고 있다. 2020-09-13
    • G.QT
    • 이야기 세계 교회사
    2020-09-13
  • 기독교강요 영어 수업 - Lesson VIII 하나님, 새가 되게 해주세요
    Lesson VIII 하나님, 새가 되게 해주세요 Dear God, make me a bird “바보라서 바보처럼 한 행동을 바보도 아닌 당신은 왜 못 합니까.” 윈스턴 그룸(Winston F. Groom 1943년 3월 23일 ~ )의 1986년 동명 소설을 각색한 1994년 코미디 드라마 영화 포레스트 검프(Forrest Gump)는 새털 하나가 바람에 실려 소도시의 거리와 하늘을 떠도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감미로운 음악과 함께 거리의 이곳저곳을 날아다니던 새털(즉 카메라 시점)은 미국 조지아 주 서배너의 버스 정류장에 앉아 있던 버스 정류장 벤치에 앉아 있는 포레스트 검프 발 옆에 떨어집니다. 포레스트 검프는 그 옆에 앉아 있던 한 여성에게 그의 삶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이야기를 하는 가운데 버스 정류장에서 그의 이야기를 듣던 사람들이 계속 바뀝니다. 이야기를 듣던 어떤 사람은 믿지 못하겠다는 태도를 취하기도 하고 무관심한 태도를 짓던 사람도 있었으며 또 재미있게 듣고 관심을 보이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포레스트 검프가 유일하게 그리고 변함없이 사랑한 제니는 알코올중독 홀아버지의 학대에 시달리던 어린 시절 아버지를 피해 옥수수 밭에 숨어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새가 되게 해주세요. 여길 벗어나 멀리멀리 날아갈 수 있게요.”“Dear God, make me a bird. So I could fly far. Far far away from here.” 새의 몸통에서 떨어져 나와 이리저리 흩날리는 깃털은 새의 부재(不在)를 상징합니다. IQ 75인 포레스트 검프는 척추가 휘어져 다리마저 불편합니다. 대대로 물려받은 앨라배마 집에 여행객을 상대로 단기 세를 놓아가며 생계 문제를 해결하고 있는 현명한 홀어머니는 다리 교정기를 착용한 외아들 검프를 헌신적으로 돌봅니다. 초등학교 첫 등교 때 스쿨버스에서 아이들의 배척 탓에 자리를 못 찾고 있던 검프는 함께 앉기를 청한 제니와 짝이 됩니다. 돌을 던지며 못되게 구는 아이들에게 시달리는 검프에게 제니는 “어서 달려”를 외칩니다. 그 말에 무작정 달리던 검프는 교정기가 필요 없는 훌륭한 러너(runner)가 되어 덕분에 미식축구 특기자로 대학까지 진학합니다. 특히 베트남전에서 동료 5명을 구하고 부상을 당한 검프가 군병원에서 우연히 탁구를 접하고 천부적 재능 덕분에 당시 중화인민공화국에까지 날아가 ‘핑퐁 외교’(ping-pong diplomacy diplumsi 1971년 미국 탁구팀의 중공 방문을 계기로 1979년 미·중 전격 수교에까지 이른 스포츠 외교)를 돕게 됩니다. 이로써 그는 유명 인사의 자리로 올라갈 수 있었으며 뒤에 중국 팀들과 탁구 경기를 겨루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병장으로 진급합니다. 워싱턴 D.C.에서 반전 모임이 일어나는 가운데 병장 검프는 히피족 스타일로 살고 있던 제니와 다시 만나게 됩니다. 포레스트는 그녀의 남자 친구가 그녀에게 뺨을 때리는 것을 목격합니다. 포레스트는 그를 공격하지만 제니는 그 남자 친구와 떠날 것이라고 포레스트에게 말합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포레스트는 탁구 패들(라켓)을 만드는 회사와 연계하여 스스로 25,000 달러를 법니다. 이 돈으로 전시에 죽었던 친구 버바와의 약속대로 새우잡이 배를 삽니다. 이때 댄은 포레스트와 고기잡이에 합류합니다. 초기에는 새우잡이에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러다가 허리케인 카르멘이 나타났지만 포레스트의 배만 살아남습니다. 거기다 엄청난 양의 새우를 잡아 새우잡이 배 한 척을 살 만큼의 돈을 법니다. 댄은 스티브잡스의 애플사에 돈을 투자해 수익을 남겨 포레스트는 그의 여생을 재정적으로 안전하게 보낼 수 있게 됩니다. 또 그가 벌어들인 돈 절반을 버바의 가족에게 기부합니다. 그는 집으로 돌아와 며칠 동안 그의 어머니의 죽음을 맞습니다. 그러는 내내 자신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사는 제니와 다시 만날 날만을 꿈꿉니다. 한편 존 바에즈(Joan Baez) 같은 포크송 가수를 꿈꾸며 캘리포니아로 떠난 제니는 히피문화에 기울어 술과 마약에 빠져 지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제니는 포레스트를 만나러 돌아오고 포레스트는 그녀에게 청혼합니다. 그녀는 이를 거절하지만 사랑의 뜻으로 그와 잠자리를 같이 합니다. 그녀는 다음 날 아침에 일찍 그를 떠납니다. 포레스트는 달리기를 다시 시작합니다. 그는 3년 반에 걸쳐 국가를 가로질러 달리기로 마음먹습니다. 그가 유명하게 되자 다른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그의 뒤를 따라 달리기 시작합니다. 현재로 돌아와 포레스트는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까닭이 텔레비전에서 포레스트를 본 제니가 자기를 방문해 달라는 내용의 편지를 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임을 되새깁니다. 그가 제니를 만나던 가운데 그녀는 포레스트라는 이름의 아들을 그에게 소개시켜 줍니다. 포레스트는 그 아이가 자기 아들임을 깨닫고 순간 놀랍니다. 제니는 포레스트에게 그녀가 지금 한 바이러스로 인하여 고통을 받고 있다고 포레스트에게 말합니다. 가족 세 명은 앨라배마 주의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그린보우(Greenbow)로 돌아옵니다. 제니와 포레스트는 마침내 결혼하지만 머지않아 그녀는 죽음을 맞습니다. 영화는 포레스트와 그의 아들 포레스트가 처음 등교하는 날 학교 버스를 기다리는 것으로 끝을 맺습니다. 엄마와 검프 자신이 반복하는 “바보는 바보처럼 행동하는 거지(Stupid is as stupid does)”라는 말은 바보로 상징되는 장애인들에 대한 편견을 꼬집는 대사입니다. 포레스트 검프를 통해 로버트 제메키스(Robert Zemeckis, 1952년 5월 14일 ~ )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지능이 떨어지는 바보라서 벌인 일들(화염에 휩싸인 정글로 동료를 구하러 무작정 뛰어들고, 아무런 기약도 없이 사랑하는 여성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등)이야말로 ‘정상’이라는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이 아니었던가 하는 질문일 것입니다. 즉 “바보라서 바보처럼 한 행동을 바보도 아닌 당신은 왜 못 합니까” 하는 반문 말입니다. 감독 로버트 제메키스는 IQ 75인 검프에 대해 이런 말을 했습니다. “... 영화에서 검프는 완전히 점잖고 그의 말에는 진실한 인물입니다. 그에게는 제니와 그의 어머니 그리고 하나님 말고는 어떠한 계획도 의견도 없습니다.” 영화를 통해 드러난 진실한 포레스트 검프에게는 제니와 그의 어머니 그리고 하나님 말고는 어떠한 계획도 의견도 없었습니다. 그렇듯 칼빈의 저서와 파커의 전기(Parker, T. H. L. 1995, Calvin: An Introduction to His Thought, London: Geoffrey Chapman)를 통해 드러난 경건한 칼빈에게 1540년 8월 이전까지는 오직 하나님과 개혁운동뿐이었습니다. 『기독교강요』가 앞선 시기의 저술가들에 신세를 졌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이 어떤 새로운 목소리를 느끼고 일 년도 안 되어 재판의 요구가 잇따랐습니다. 이 요구에 부응하여 1539년 30세 되는 해 칼빈은 특별히 성경의 권위뿐만 아니라 인간의 타락 선택 유기(遺棄) 등도 다룬 증보판을 출판했습니다. 이 증보판은 성만찬 부분에 있어서 루터와 보다 타협적인 성향도 드러냈습니다. 그런 가운데 파커의 전기는 그 다음 해 1540년 칼빈의 결혼 과정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Calvin's friends urged him to marry. Calvin took a prosaic view, writing to one correspondent:칼빈의 친구들이 그에게 결혼을 권했습니다. 칼빈은 한 기자(corres -pondent kːrspndnt)에게 보내는 글을 쓰면서 담백한(prosaic prouziik) 견해를 취했습니다. I, who have the air of being so hostile to celibacy, I am still not married and do not know whether I will ever be. If I take a wife it will be because, being better freed from numerous worries, I can devote myself to the Lord. “독신주의(celibacy slbsi)에 아주 적대적인(hostile hstil) 태도를 지닌 나는 아직 결혼을 하지 않고 있고 언젠가(ever vr) 할지 안할지(whether hwðr) 모릅니다. 내가 수많은(numerous njːmrs) 걱정(worry wːri)에서 자유로워질 것이기 때문에 아내(wife waif)를 취하지 않는다면 주님에게 헌신할(devote divut) 수 있을 것입니다.” Several candidates were presented to him including one young woman from a noble family. Reluctantly, Calvin agreed to the marriage, on the condition that she would learn French. Although a wedding date was planned for March 1540, he remained reluctant and the wedding never took place. 귀족 가문(noble family) 출신의 한 젊은 여자를 포함해 칼빈에게 몇몇 후보자(candidate kndidit)들을 선보였습니다(present priznt). 마지못해(reluctantly rilktntli) 칼빈이 신부 후보가 프랑스어(French frent)를 배운다는(learn lːrn) 조건으로(on the condition kndn) 결혼(marriage mrid)에 동의했습니다(agree grː). 혼례(wedding wdiŋ date) 날짜(date deit)가 1540년 3월(March mːrt)로 잡혔지만 그는 계속 꺼렸고 혼례식은 결코(never nvr) 거행되지(take place) 않았습니다. He later wrote that he would never think of marrying her, “unless the Lord had entirely bereft me of my wits.” Instead, in August of that year, he married Idelette de Bure, a widow who had two children from her first marriage. 그는 후일 “주께서 나의 재치(wit)들을 앗아가지(bereft birft bereave birːv의 과거·과거분사) 않으시면(unless nls)” 나는 그녀와 결혼할 생각이 전혀 없었을 것입니다. 그 대신에(Instead instd) 그 해 8월(August ːgst) 그는 첫 결혼에서 두 아이들을(children tldrn) 낳은 미망인(widow wdou) 이델레트(Idelette de Bure 1500 - 1549)와 결혼했습니다. 샤프(Philip Schaff)는 그의 『기독교 교회사』(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8권에서 칼빈의 유일한 아내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Idelette de Bure came from Flanders and first married John Stordeur from Lige. At some stage they moved to Strasburg where they were recorded as being Anabaptists. Idelette and John Stordeur had two children (Charles, Judith) before Stordeur died after a brief illness, leaving Idelette a widow. 이델레트(Idelette de Bure)는 플랑드르(Flanders flndrz)에서 왔고 리지(Lige) 출신 스토르되르(John Stordeur)와 첫 결혼을 했습니다. 어떤 시기에 그들은 재세례파가 된 것으로 기록이 된 스트라스부르로 이사했습니다. 이델레트와 스토르되르는 두 아이(Charles, Judith)를 낳았습니다. 그 뒤 스토르되르는 짧은(brief briːf) 기간의 병으로 이델레트를 미망인으로 남기고 죽었습니다. Calvin was so caught up in his labors that he did not seem to consider marriage until age 30 or so. He asked friends to help him find a woman who was “chaste, obliging, not fastidious, economical, patient, and careful for (his) health.” 칼빈은 일에 너무 매달린(so caught up) 나머지 서른 즈음까지 결혼을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는 “정숙하고(chaste teist) 자상하고(obliging blidiŋ) 까다롭지(fastidious fæstdis) 않고 검약하고(economical ːknmikl) 근면하고(patient pint) 그리고 자신의 건강(health helθ)에 세심한(careful krfl) 여인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help help) 친구들에게 부탁했습니다. His fellow laborer Martin Bucer had known Idelette and recommended her to Calvin in confidence that she would fit the bill. They married in August 1540.그의 동료 사역자 부서(Martin Bucer 1491년 11월 11일 1551년 2월 28일)가 이델레트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녀가 (칼빈이 제시한) 그 목록(bill)에 안성맞춤이라고 자신하고(confidence knfidns) 그녀를 칼빈에게 추천했습니다(recommend rkmnd). 서른한 살되는 해 1540년 8월 서른한 살 칼빈은 결혼하였습니다. 스물여섯 1990년에 결혼한 가수 김광석(1964년 1월 22일 ~ 1996년 1월 6일)은 어느 콘서트에서 자신의 노래 서른 즈음에를 부르고 관객들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반갑습니다. 안녕하시지요. 네. 어... 처음 보내 드린 곡이서른 즈음에라고 하는 곡이었습니다. 공감하시는지요. (관객 웃음) 누구나 스스로의 나이에 대한 무게는 스스로 감당해내면서 지냅니다. 10대 때에는 거울처럼 지내지요. 자꾸 비추어보고 흉내 내고 선생님 부모님 또 친구들. 그러다 20대 때 쯤 되면 뭔가 스스로를 찾기 위해서 좌충우돌 부대끼면서 그러고 지냅니다. 가능성도 있고 나름대로 주관적이든 일반적이든 뭐 객관적이든 나름대로 기대도 있고. 그렇게 지내지요. 자신감은 있어서 일은 막 벌이는데 마무리를 못해서 다치기도 하고 아픔도 간직하게 되고 그럽니다. 그래도 자존심은 있어서 유리처럼 지내지요. 자극이 오면 튕겨내 버리든가 스스로 깨어지든가. 그러면서 아픔 같은 것들이 자꾸 생겨나고 또 비슷한 일들이 일어나면 더 아프기 싫어서 조금씩 비켜나가죠. 피해가고. 일정 부분 포기하고 일정 부분 인정하고. 그러면서 지내다 보면 나이에 'ㄴ'자 붙습니다. 서른이지요. 뭐 그때쯤 되면 스스로의 한계도 인정해야 하고 주변에 일어나는 일들도 뭐 그렇게 재미있거나 신기하거나 그렇지도 못합니다...”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가 ‘스물여덟 즈음에’나 ‘서른둘 즈음에’로 발표됐어도 그토록 큰 사랑을 받을 수 있었을까요. 스무 명 넘는 가수들에 의해 리메이크되고 음악평론가들에 의해 최고의 노랫말로 선정되고 있습니다. 발표된 지 25년이 지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18번으로 불리는 이 노래는 현대인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노래 중 하나입니다. 서른 즈음인 사람들만이 이 노래를 좋아하는 것은 아닙니다. 마흔 즈음이나 쉰 즈음이 된 사람들 심지어 스물 즈음의 젊은이들도 삶이 울적할 때 이 노래를 부른다고 합니다.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내뿜은 ... 연기처럼/ 작기만 한 내 기억 속엔/ 무얼 채워 살고 있는지/ 점점 더 멀어져 간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 비어 가는 내 가슴속엔/ 더 아무것도 찾을 수 없네. ‘또 하루 멀어져 가는’ 시간의 흐름은 늘 그리고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자연 현상입니다. ‘무얼 채워 살고 있는지’라며 삶의 의미를 고민하는 행위도 나이와 상관없이 누구나 할 수 있는 정신 작용입니다. ‘아무것도 찾을 수 없’다는 공허함을 느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왜 유독 서른 즈음일까요. 서른한 살에 결혼한 칼빈은 어떠셨을까요. 인간은 스스로의 나이를 10년 단위로 끊어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모든 범주적 사고가 그렇듯이 사람들은 10대 20대 30대 40대 50대 등으로 나이를 범주화합니다. 그리고 같은 연령대 사람들끼리는 서로 유사하다고 생각합니다. 반면 다른 연령대 사람들은 마치 극복하기 어려운 차이점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곤 합니다. 인간은 왜 이처럼 10년 단위로 삶을 구분하고 10년의 경계 지점에서 때로는 흔들리고 때로는 성장하는 것일까요. 이는 인간이 의미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의미란 무질서해 보이는 것들 속에서 특별한 패턴을 발견하는 일입니다. 시간의 흐름은 늘 일정합니다. 특별한 패턴이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시간의 일정한 흐름을 구분하여 의미 있는 패턴을 만들어냅니다. 그리고 그 패턴에 삶을 맞추어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은 의미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이고 인간의 뇌는 의미를 발견하도록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포레스트 검프가 유일하게 그리고 변함없이 사랑한 제니는 알코올중독 홀아버지의 학대에 시달리던 어린 시절 아버지를 피해 옥수수 밭에 숨어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새가 되게 해주세요. 여길 벗어나 멀리멀리 날아갈 수 있게요.”“Dear God, make me a bird. So I could fly far. Far far away from here.” ‘노래가 나의 힘이라고’ 노래하던 가수 김광석이나 포레스트 검프가 사랑한 제니는 젊은 나이에 일찍 죽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칼빈은 55년 평생 하나님과 성경만을 믿고 살았습니다. 2020-09-08
    • G.QT
    • 기독교강요 영어수업
    2020-09-08
  • 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18_ 기독교의 이단
    Titelkupfer Index librorum prohibitorum 기독교 속의 이단 신화 속의 신들이 지닌 신비들을 믿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되었다. 그는 예수께서 스산해지는 가을이면 가을마다 어김없이 죽으셨다가 싱숭생숭한 봄이면 보란 듯이 부활하시는 또 다른 신쯤으로 생각 했을런지도 모른다. 그런 조리에 닿지 않는 생각을 가진 그리스도인은 예수님께서 단순히 계절들의 가공의 신화적 인물이신 게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가망 없는 우리를 위하여 단번에 자신을 드려 혹독한 죽음을 당하시고 부활하시어 영원토록 다스리시는 분이셨음을 똑똑히 배워야 했을 것이다. 로마제국에는 아주 색다른 형태의 종교가 또 하나 있었다. 그 종교는 자연계 안에서 하나님을 알 수 있는 표시들은 그 어느 것이든 보기를 단호히 거부했다. 이 종교는 세상은 악하다고 말하고 있다. 세상에는 그 얇디얇은 날개를 소리 나게 재빨리 퍼덕이는 파리들과 자기 몸의 수십 배를 거뜬히 톡톡 튀는 벼룩들과 고장 난 온도계 같은 열병이 있었다. 복음송 가락에 흥이 겨워 눈을 감고 손을 반쯤 쳐든 오늘의 교인들이 되뇌이기를 좋아하는 좋으시고 선하신 하나님께서 그런 것들을 만드셨을 리가 만무했다. 우리의 몸이란 악하다. 우리가 행하는 행위는 우리가 몸을 벗어나지 않는 한 하찮고 부끄럽기 그지없다. 이러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때 그들은 다는 아니더라도 그들의 옛 사상들을 얼마간은 끌어들였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은 몸은 악하고 예수님은 선하셨기 때문에 예수님은 몸을 가지실 수 없었다고 침을 튀기며 말했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실제의 사람이실 수가 없으셨다는 것이다. 몸이란 건 도무지 악하고 쓸데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말을 해댄 김에 그들은 더욱 신바람이 나서 예수님은 실제로 태어나신 게 아니었다고 - 실제로 고통받고 죽으시고 다시 사신게 아니었다고- 손짓 발짓해가며 떠들어댔다. 무슨 신기한 약이라도 파는 약장사같이 그들은 악다구니를 썼다. 이런 탐탁치 않은 사람들을 도케타이(Docetae)라고 불렀다. 이 말은 헬라어에서 왔는데 허울(to seem)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왜냐하면 이 어설픈 친구들이 예수님이 단지 몸을 허울로 가지신 것 같다고 생떼를 썼기 때문이다. 또한 이런 조리에 닿지 않은 언행과 생각을 가지고 있는 작자들을 노스틱주의자들(Gnostics 영지주의자)이라고 했다. 이 말은 헬라어 그노스티코스에서 온 말인데 안다(to know)의 뜻을 지니고 있다. 이 친구들이 몸을 초월하는 방법은 더 많이 아는데 있다고 한사코 고집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철학, 점성술 및 마술 등을 알고 즐기고 있음을 상당히 으스대며 뻐겼다. 오늘날에도 노스틱주의자들이 주장하듯 기독교의 허울을 쓰고 기독교 행세를 하고 있는 이단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본인은 한사코 손사레를 치는데 구세주처럼 떠받침 받는 자들도 있다. 헛소리를 듣고 그러는 것인지 들림은 듣는 게 아니라 들림은 받아야 한다고 침을 튀기는 자들도 있다. 노스트라다무스 흉내를 내며 밑도 끝도 없는 날짜를 들먹이며 휴거를 준비하자며 책을 팔아먹는 번역쟁이 출신의 이단자도 생겨났다. 그 친구 어줍잖은 책 한 권 번역해 오토바이 타고 이리저리 갖고 다녔다. 그러다가 한 어엿한 교주가 되어 1992년 10월 28일 휴거 소동으로 하늘로 올라간다고 하다가 날개없이 추락했다. 그는 자기가 지정한 휴거 예정 한달 전에 금품수수 사기 혐의로 구속 기소되고 1992년 12월 4일 항소심에서 징역 1년과 몰수형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정말 그가 말하듯 그날에 그만 하늘로 압송되듯 올라갔다면 우리는 남아서 그리스도의 오심을 여전히 기다릴 수 있었을까. 2020-09-05
    • G.QT
    • 이야기 세계 교회사
    2020-09-05
  • 기독교강요 영어 수업 - Lesson VII 교육의 목적
    Lesson VII교육의 목적The purpose of education 1960년대 영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영화 ‘언 에듀케이션’(An Educa -tion)에서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옥스퍼드대학 진학을 목표로 공부하는 16살 모범생 제니가 교장에게 묻습니다. “교육의 목적이 무엇인가요.” 교장은 답합니다. “교육은 의무란다.” 오케스트라 연습을 마치고 돌아오던 어느 날 갑자기 비가 쏟아집니다. 무거운 첼로를 옆에 둔 채 비에 흠뻑 젖은 그에게 멋진 자동차를 탄 신사 데이비드가 다가옵니다. 제니는 “비싼 첼로가 불쌍하니 첼로만 차에 태워주겠다”는 데이비드의 위트에 호감을 느끼고 그의 유려한 말솜씨와 예술적 감각 그리고 물량 공세에 점차 빠져들기 시작합니다. 지루한 학교 교육보다 재미있는 그 체험을 통해 인생의 의미를 깨우치게 되는 그런 소녀가 당신에게도 똑같은 질문을 한다면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교육(敎育)이란 말은 본래 맹자의 '得天下英才而敎育之(득천하영재이교육지)'라는 글에서 유래하였습니다. 각 한자의 기원을 살펴보면, ‘가르칠 교(敎)’ 자는 회초리로 아이를 배우게 한다는 뜻이고, ‘기를 육(育)’ 자는 갓 태어난 아이를 기른다는 뜻입니다. 좀 섬뜩하죠. 그러나 교육(educate dukit)의 영어 어원은 라틴어 educere인데 뜻은 ‘앞으로 인도합니다’(lead forth)입니다. 교육에 대한 한자보다 라틴어의 뜻이 훨씬 부드럽죠. 칼빈이 말하는 그리스도교 교육의 목적은 성경을 통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자라는 데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디모데후서 3:17에서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the man of God may be perfect, thoroughly furnished unto all good works) 하신 말씀과 일치합니다. 어쨌든 교육 또는 가르침은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지식이나 기술 등을 가르치고 배우는 활동입니다. 칼빈은 무지렁이 프랑스인을 훈련에 적합하게 ‘단순한 초등교육의 형식으로 저술한’(written in a simple and elementary form adapted for instruction) 『기독교강요』 제1권 제1장 1항에서 ‘서로 연결된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우리 자신에 대한 지식-연결의 본질’(THE KNOWLEDGE OF GOD AND OF OURSELVES MUTUALLY CONNECTED - NATURE OF THE CONNECTION)에서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지식을 이렇게 가르칩니다. Our wisdom in so far as it ought to be deemed true and solid Wisdom, consists almost entirely of two parts: the knowledge of God and of ourselves. But as these are connected together by many ties, it is not easy to determine which of the two precedes and gives birth to the other. 우리의 지혜(wisdom wzdm)는, 참되고 견고한(solid slid) 지혜라고 생각해야 하는 한에서는(in so far as), 거의(almost ːlmoust) 완전히(entirely entirli) 두 요소(part pːrt)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자신에 대한 지식. 그러나 이것들이(두 요소) 많은 끈(tie tai)들로 함께(together tgðr) 연결되어(connect knkt) 있기 때문에 둘 가운데 어느 것이 다른 것보다 앞선(precede prisːd) 것이고 다른 것을 생기게(give birth bːrθ) 하는 것이라는 걸 결정하기란(determine ditːrmin) 쉽지(easy ːzi) 않습니다. 왜냐하면(for fːr) 첫째로(in the first place) 아무도(no man) ‘그 분 안에서 그가 살고 움직이는’(in whom he lives and moves 참조. 행 17:28) 하나님에게 자기 생각을 즉시(forthwith fːrθwith) 돌리지(turn tːrn) 않고는(without wiðut) 자기 자신을(himself himslf) 관찰할(survey sːrvi) 수 없기 때문입니다. For, in the first place, no man can survey himself without forthwith turning his thoughts towards the God in whom he lives and moves; because it is perfectly obvious, that the endowments which we possess cannot possibly be from ourselves; nay, that our very being is nothing else than subsistence in God alone. 왜냐하면 첫째(in the first place) 우리가 소유한(posses pzs) 재능(endowment endumnt)은 우리 자신에게서(from ourselves) 도저히(possibly psbli 부정문에서 can과 같이 사용할 때 ‘아무리 해도’, ‘도저히’ …않다는 뜻 I cnnot possibly do it. 도저히 할 수 없다) 나올 수 없다는 게 아주 명백하기 때문입니다. 아니(nay nei 오히려), 바로 우리의 참(very vri) 존재(being bːiŋ)는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실제 존재(subsistence sbsstns ‘real being’)일 따름입니다. In the second place, those blessings which unceasingly distil to us from heaven, are like streams conducting us to the fountain. Here, again, the infinitude of good which resides in God becomes more apparent from our poverty. In particular, the miserable ruin into which the revolt of the first man has plunged us, compels us to turn our eyes upwards; not only that while hungry and famishing we may thence ask what we want, but being aroused by fear may learn humility. 둘째로(in the second place) 하늘에서 우리에게 끊임없이(unceasingly nsːsiŋli) 방울져 떨어지는(distil distl) 이러한 축복들은 우리를 원천(fountain funtin)으로 인도하는(conduct kndkt) 개울(stream striːm)들 같습니다. 이 점이 또 하나님에게 있는 한없는(infinitude infntjːd) 선하심이 우리의 부족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게 됩니다. 특히(In particular prtkjlr) 우리를 비참한 파멸로 몰아넣은(plunge plnd) 첫 사람의 반역이 우리의 눈이 위로(upward pwrd) 향하지 않을 수 없게 합니다. 그 때부터 우리가 배고프고(hungry hŋgri) 굶주릴지라도(famish fmi) 원하는 것을 요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두려움으로 각성이 되어 겸손(humility hjuːmlti)도 배울 수 있게 됩니다. For as there exists in man something like a world of misery, and ever since we were stript of the divine attire our naked shame discloses an immense series of disgraceful properties every man, being stung by the consciousness of his own unhappiness, in this way necessarily obtains at least some knowledge of God. 왜냐하면 인간 속에 비참한(miserable mzrbl) 세상(world wːrld)과 같은 어떤 것이 실재하고 있는 것처럼 그리고 우리가 신성한 의복(attire tir)이 벗겨진(strip strip) 이후 우리의 벌거벗은(naked nikid) 수치심(shame eim)이 인간 자신의 불행(unhappiness nhpinis)의 자각(consciousness knsnis)으로 찔림을 받는 모든 인간에게 끝없이(immense imns) 이어지는(series sriːz) 수치스러운(disgraceful disgrisfl) 소유 본능(property prprti)들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disclose diskluz). 이렇게 해서(in this way)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knowledge nlid)을 아주 조금이라도(at least liːst) 반드시(necessarily nssrli) 얻게 됩니다(obtain btin). 칼빈이 그의 저서 첫머리 첫줄에서 언급한 ‘참되고 견고한 지혜라고 생각해야 하는 한에서의 우리의 지혜’라고 말할 때 그 지혜(wisdom wzdm)는 무엇일까요. 웹스터 영영사전은 지혜를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wisdom wzdm ability to discern inner qualities and relationships.’ 즉 지혜는 내적 특성(quality kwlti)들과 관계(relationship rilinp)들을 분별하는(discern disːrn) 능력(ability blti). 성경은 지혜를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잠언 1:7 The fear of the Lord is the beginning of knowledge: but fools despise wisdom and instruction. 영영 사전과 성경의 정의대로 지혜가 내적 특성(quality kwlti)들과 관계(relationship rilinp)들을 분별하는(discern disːrn) 능력(ability blti)이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the fear of the Lord is the beginning of knowledge)을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칼빈은 『기독교강요』 제1권 제1장 1항 상반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무도(no man) ‘그 분 안에서 그가 살고 움직이는’(in whom he lives and moves 참조. 행 17:28 개역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 하나님에게 자기 생각을 즉시(forthwith fːrθwith) 돌리지(turn tːrn) 않고는(without wiðut) 자기 자신을(himself himslf) 관찰할(survey sːrvi) 수 없습니다(no man can survey himself without forthwith turning his thoughts towards the God in whom he lives and moves). 칼빈은 우리가 하나님에게 자신의 생각을 즉시 돌려야만 비참한 우리 자신을 관찰하고 알 수 있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경외심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혜를 소유할 수 있는 관건(關鍵 문빗장과 자물쇠)은 무엇보다 하나님을 먼저 바라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참된 경건(piety piti)과 분별 능력의 원칙(principle prnspl)이라는 것이 칼빈주의(Calvinism)의 시조 칼빈의 지혜로우신 가르침입니다. “아무도 ‘그 분 안에서 그가 살고 움직이는’(참조. 행 17:28) 하나님에게 자기 생각을 즉시 돌리지 않고는 끝없이(immense imns) 이어지는(series sriːz) 수치스러운(disgraceful disgrisfl) 소유 본능(property prprti)을 드러내는 인간 자신을 관찰할 수 없습니다.” 2020-08-31
    • G.QT
    • 기독교강요 영어수업
    2020-08-31
  • 김영배의 이야기 교회 세계사 17_ 신화 속의 신들
    Greek trinity 신화 속의 신들 그리스도교와 갈등을 빚은 것은 로마 정부와 심술을 일삼는 변덕스러운 민중들뿐만이 아니었다. 다른 종교들도 그리스도교에 대한 눈초리가 곱지 않기는 매한가지였다. 우리에게 가장 잘 알려진 그리스와 로마의 신들로는 올림푸스의 햇빛 내리쬐는 산꼭대기에 앉아 있었던 것들이 있다. 개중에는 신들의 대장 격인 주피터와 그의 마누라 주노, 신들의 심부름꾼 머큐리, 여성용품의 대명사 격인 사랑과 미의 여신 비너스, 싸움을 부추기는 무기상 같은 전쟁의 신 마르신, 우리네의 천하지대본인 농사를 담당한 신 새턴(사투르누스라고도 함) 및 그리스신화의 아테나에 버금가는 지혜의 신 미네르바 등이 있다. 이들 가운데 다섯은 인간들이 제멋대로 망원경으로 발견한 행성들의 이름으로 차용했다. 또한 신은 요일의 이름으로 사용되고 있다. 즉 토요일(Saturday)은 농사의 신인 ‘새턴의 날(Saturn`s day)’이다. 이외에도 다른 신들이 로마제국에서 상당한 인기를 누렸다. 그런 것들로는 땅과 지하를 주름 잡는 신들인 아티스, 디오니시우스, 이시스 및 오시리스 등이 있다. 이들 신들의 이야기들은 식물의 시듦과 자람, 여름과 겨울의 변화과정을 설명하는 신화들이 되었다. 이러한 신화들 가운데 오늘날에도 잘 알려진 것으로는 제우스의 딸 페르세포네의 이야기가 있다. 그녀는 지하의 신 플루토(또는 하데스)에게 땅에서 납치당해 땅 아래로 끌려갔다. 그녀의 어머니 데메테르는 곡물의 여신이었다. 데메테르는 세레스(Ceres)라고도 하는데 이 이름에서 요즘 애들이 우유에다 말아 먹는 시리얼(Cereal)이라는 새우깡 같은 곡식깡의 이름이 비롯됐다. 그녀의 사랑하는 딸이 사라져 없는 동안에는 곡식의 여신 데메테르는 곡식을 성장하지 못하게 했다. 그녀는 페르세포네를 돌아오게 하려고 무진 애를 썼다. 그러나 땅 아래의 신 플루토(또는 하데스)는 페르세포네가 지하에 있는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면 돌려보내겠노라고 동의했다. 그런데 일이 꼬일려고 공교롭게도 그녀는 석류의 씨들을 먹었던 터였다. 플루토는 타협을 해서 일 년의 여섯 달 동안은 그녀를 땅으로 되돌려 보내도록 허락을 했다. 페르세포네가 땅으로 돌아오는 때가 바로 여름 기간이다. 그녀가 플루토와 함께 있을 때가 겨울이다. 이 이야기는 계절들에 대한 설명보다 더 많은 어떤 것을 내포하고 있다. 사람들이 여신의 죽음뿐만 아니라 부활도 함께 나눌 수 있다는 걸 이 이야기가 약속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도 역시 하나의 종교였다. 사람들은 페르세포네의 사당에서 까닭 모를 의식들을 드림으로써 그녀의 죽음과 부활에 동참 하려고 힘을 썼다. 휘영청 밝은 달빛 속에서 사람들은 납치당한 여신을 찾아 서글피 울부짖었다. 이슥한 한밤중에 사람들은 동굴로 꾸역꾸역 들어가서 그녀의 이야기를 상연하는 연극을 눈을 또록거리며 구경했다. 이것을 봄으로써 사람들은 죽음을 극복한 여신처럼 될 수 있다고 믿었다. Sandro Botticelli La nascita di Venere 이런 류의 또 다른 종교로는 빛의 신 미트라의 종교가 있었다. 전설에 따르면 미트라는 황소의 옆구리를 찔러 죽였다. 황소의 상처 난 옆구리에서 밀 곡식이 부수수 쏟아졌다. 여기에 식물의 성장에 대한 또 다른 설명이 있다. 즉 식물은 태양의 신 미트라에서 나오는 빛과 열 때문에 살 수 있었다. 미트라의 생일은 태양이 위로 치솟는 진로를 시작하는 12월 25일이었다. 그리고 태양이 살아 돌아오듯 미트라를 믿는 사람들도 그렇게 된다고 생각했다. 2020-08-29
    • G.QT
    • 이야기 세계 교회사
    2020-08-29
  • 기독교강요 영어 수업 - Lesson VI 지중해와 중세
    Lesson VI지중해와 중세Mediterranean and the Middle Ages 젊은 시절의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1913년 11월 7일 ~ 1960년 1월 4일)에게 큰 영향을 준 장 그르니에(Jean Grenier, 1898년 - 1971년)는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작가이다. 그르니에는 아름다운 산문을 여럿 남긴 수필가이기도 했다. 카뮈는 스승의 문체에 대해 말했다. “그 언어는 빠르게 흐르지만 그 메아리는 긴 여운을 남깁니다.” 그르니에 산문의 정수(精髓)가 담긴 『지중해의 영감』(Inspirations mdi -terranennes, 1941)은 그가 북아프리카와 남부 유럽을 품고 있는 지중해 연안 지역을 돌아다니며 쓴 산문집이다. 알제리의 카스바를 찾았던 그르니에는 그 영감을 이렇게 서술했습니다. “모르는 사이에 날빛이 푸른색 타일들의 색깔에서 노란색 타일들 색깔로 변해가도 그들(카스바 주민들)에게는 하루의 시간이 그냥 그대로 멈추어 있습니다. 식물들의 삶처럼 그렇게 늘어져 느리게 흐르는 삶이 무엇보다 시(詩)에 어울린다는 상상을 해보곤 했습니다. 마음에 와 닿는 어떤 하나의 지형(地形), 그것이 바로 지중해(Mediterranean mdtrinin)의 정신을 만들어냅니다. 공간일까요. 그것은 어깨의 둥그런 곡선이며 얼굴의 타원형 윤곽입니다. 시간일까요. 그것은 해변의 이쪽 끝에서 저쪽 끝으로 달리는 한 젊은이의 질주입니다.” 그르니에는 책 서문에서 “지중해는 절대의 숭배로부터 그리고 행복의 숭배로부터 등거리에 위치할 수 있는 어떤 형이상학의 계시를 줄 수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한때 그런 지중해를 ‘우리의 바다’라 호언하던 로마도 3세기 말에 이르자 디오클레티아누스(Gaius Aurelius Valerius Diocletianus 245년 312년 재위 284년 - 305년)는 위기에 빠진 로마 제국의 혼란을 수습하고 황제 중심의 통치 체제를 회복시켰습니다. 그리고 제국의 방위를 위해 사두정치체제를 창안하고 여러 가지 개혁으로 제국의 쇠퇴를 막아보려 했습니다. 그의 일환으로 기독교를 탄압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황제의 필사적인 재건 개혁도 헛되이 쇠퇴 일로를 걸었습니다. 인구는 감소되고 경제는 굳어 화폐거래보다 실물경제(實物經濟: 돈이 될 만한 가치를 지닌 물건만 중시되는 물물경제)화 했습니다. 토지는 일부 대토지 소유자에 독점되어 자유농민과 중간층은 몰락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왕년에 막강함을 자랑하던 로마군이 게르만 용병으로 채워져 무력화(無力化)하고 마침내는 475년 서고트족이 동로마의 국경을 침입하자 사상 유례가 드문 일대 민족 이동을 유발하고 말았습니다. 제일 먼저 국경을 침입한 서고트족은 아드리아노플 전투에서 동로마군을 격파, 콘스탄티노플을 위협했고 서진하여 서로마군을 격퇴, 이탈리아 반도로 남하했습니다. 이리하여 410년 ’영원한 도성‘ 로마가 함락되고 잇따라 게르만의 여러 부족들이 로마의 다른 영토를 유린하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시작된 약 일천 년의 중세(Medium aevum 476-1453)는 유럽 역사에서 서로마 제국이 476년 멸망하고 동로마 제국 즉 비잔티움 제국이 멸망한 1453년까지 즉 5세기부터 15세기까지의 시기입니다. 이 시기에는 그리스 정교회와 로마 가톨릭 교회의 분열에도 불구하고 종교계의 지배자인 가톨릭 교황의 권력이 강대해졌으며, 이에 세속계의 최고 권력자인 신성 로마 황제와의 사이에 권력투쟁이 전개되었습니다. 성직의 서임을 둘러싸고 교황 그레고리 7세와 하인리히 4세 사이에 벌어졌던 정면충돌은 그 두드러진 예였습니다. 이 충돌의 결과로 헨리 4세는 카노사에서 그레고리 7세에게 항복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이 있은 다음부터는 교황권이 절대적인 것으로 된 반면에 속세의 황제권은 점차 쇠퇴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강대한 교황권을 바탕으로 그리스도교권 국가가 회교권 국가에게 반격을 가하기 시작한 것이 십자군의 원정으로 나타났습니다. 회교도들에게 점령된 성지 예루살렘의 탈환과 동로마 구원의 명분을 가졌던 십자군 원정은 1096년에서 1100년에 이르기까지 3회에 걸쳐서 단행되었습니다. 중세는 암흑기가 아니었고 르네상스의 씨앗이 이미 그 시대에 뿌려져 있었습니다. 중세 후기는 결코 르네상스의 예고편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어둠과 광기의 시대도 아니었습니다. 성(聖)과 속(俗)은 달뜬 활기 속에 섞여 있었습니다. 성지순례는 데이트 여행이었고 교회 안에서 매춘부가 호객 행위를 했습니다. 성 유물을 전시하는 건너편에서 알몸 공연이 벌어졌습니다. 중세인들은 자주 울었고 쉽게 감동받았고 잔인했고 무절제했습니다. 죄수에게 가하는 고문은 최고의 구경거리였지만 사형수의 마지막 참회에는 다 같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방탕에 가까울 정도로 향락을 즐기는 동시에 종말론과 염세주의에 사로잡혀 있기도 했습니다. 현대인의 기준으로는 이런 모순이 너무 낯설어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순진한 정서가 한 사회를 지배하는 분위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눈물을 부끄러워하고 감정을 다스리고 무관심을 미덕으로 받드는 현대가 중세보다 더 기괴한 시대인지도 모릅니다. 인간은 세계를 인식하기 위해 지도를 만들었고 이 지도를 이용해 세계를 바꿔나갔습니다. 지도는 당대인들의 세계관을 볼 수 있는 거대한 텍스트이기도 합니다. 중세 지도에선 수도원 중심으로 모든 생활이 이뤄지던 당시 인류의 자기 인식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특정 구역 건물부터 골목까지 범죄율을 일대일로 매핑해 표시한 19세기 샌프란시스코 ‘범죄 지도’에선 모든 것을 수치화하던 근대적 인간의 욕망과 자신감을 엿볼 수 있습니다. 스마트폰 위치 정보 버튼을 '온(ON)'으로 켜놓고 다니는 요즘 사람들은 매일매일 새로운 지도를 만들어가기도 합니다. 한편 칼빈이 태어난 1509년 16세기 초엽 독일에서는 인문주의자와 신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중세 로마 교회의 미신적 교리와 교권에 항거하고 초대 교회의 정신으로 복귀하기 위한 개혁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이와 같은 개혁운동은 보헤미아의 후스(Jan Hus, 1372년 ~ 1415년 7월 6일), 영국의 위클리프(John Wycliffe, 1320년 ~ 1384년)를 거쳐 마침내 루터(Martin Luther, 1483년 11월 10일~1546년 2월 18일)에 이르러 실현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제네바의 칼빈과 스위스의 츠빙글리(Ulrich Zwingli, 1484년 1월 1일 - 1531년 10월 11일) 등은 각각 타당한 명분을 내걸고 로마 교회와 대결하여 개혁운동을 촉진시켰습니다. 이 개혁 운동은 단순히 로마 교회에 대한 항거라는 차원에서 끝난 것이 아니고 정치·경제·사회 각 방면의 개혁에도 적지 않은 공헌을 하였습니다. 독일에서는 13, 14세기 이래 연방국가 체제가 더욱 진전되고 성속(聖俗)의 제후나 도시는 자립했으며 국내의 분열은 점점 심해져갔습니다. 쇠퇴해 가고 있던 교황권은 국가적 통일이 약한 나라에 기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교황 레오 10세(Leo PP. X, 제217대 교황 재위: 1513년 3월 9일 - 1521년 12월 1일)에 의한 면죄부의 판매가 독일을 목표로 한 것도 그와 같은 사정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이 면죄부 판매에 반대한 루터의 95개 조항의 논제 발표(1517)와 함께 종교개혁(Reformation rfrmin)이 시작되었습니다. 봉건사회의 해체가 늦어진 독일에서도 농민의 계층 분화가 진행되고 해방을 요구하는 농민들은 15세기 이래 농민 폭동으로 번지기 시작하였으며 루터의 개혁을 통해 그들의 사회적 해방을 기대하였습니다. 1524년과 1525년 재세례파(Anabaptist nbptist) 지도자 뮌처(Thomas Mnzer, 1489년 ~ 1525년 5월 27일)의 민중적인 설교를 신봉한 서남 독일의 농민들은 격렬한 농민전쟁을 전개했습니다. 그러나 루터의 격려로 태세를 정비한 제후들은 이 반란을 잔혹하게 진압하였고, 더욱이 이들은 종교개혁을 정치 대립에 이용했습니다. 이 혼란한 종교개혁 시기에 1536년 3월 『기독교강요』를 저술한 칼빈이 열정과 달변의 뛰어난 신학자였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신학자의 과업이 성서의 제자가 되기 위해 겸손하고 고결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칼빈보다 더 통렬하게 자각하고 있던 인물이 아무도 없었습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영어 입문 과정에서 to 부정사는 아주 중요합니다. 영어의 부정사(infinitive)란 시제나 수에 따라 변화하지 않은 동사 다시 말해 동사의 원형을 말합니다. 영어의 부정사 구문은 크게 세 가지 종류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부정사는 ‘수와 인칭 등이 정해지지 않은 말’이란 뜻입니다. 아래에 용법 같은 게 나오긴 하지만 큰 의미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to 부정사 자체가 문장의 일부를 대체 혹은 추가하는 문구이므로 가장 자연스럽게 해석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주어부분에 오면 주어처럼 해석합니다. I want to eat이면 먹고 싶다라든가... 그냥 ‘이런 게 있구나’ 하는 정도만 알고 실생활에서 느낌을 익히는 것이 훨씬 유용합니다. to부정사는 70~80%가 하기 위해 부사적 용법으로 사용됩니다. to 자체가 어딘가로 항하는 방향성을 띄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to부정사가 부사절, 형용사절, 명사절로 쓰여도 결국 모두 ‘to 이하를 하려는’ 또는 ‘to 이하로 가려는’ 의미로 귀결됩니다. 왜냐하면 본래 부정사가 형태가 정해지지 않아 동사적 특성을 띤 명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to 이하 문장구조와 내용에 따라 그 뜻은 달라집니다. 간단한 예로 다음과 같습니다. Calvin lived to be 55 years old. 칼빈은 55세까지 살았습니다. Jesus came to my rescue. 예수님은 나를 구하러 오셨습니다.Lord has been pleased to give His life. 주께서 기꺼이 자기 생명을 주셨습니다. 이제 『기독교강요』 영어 본문으로 들어가 볼까요. 다음의 본문에서 실제로 to부정사가 사용된 ‘My intention was only to furnish a kind of rudiments’(제 의도는 단지 기초 원리를 제공해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라는 문장을 대하게 될 것입니다. 1536년 바젤에서 처음 출판된 『기독교강요』의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에게 바친 헌사 첫 머리에 JOHN CALVIN PRAYS PEACE AND SALVATION IN CHRIST.’(존 칼빈은 그리스도 안에서 평화와 구원을 기도드립니다)는 왕에 대한 인사에 이어 칼빈의 헌정 저서 『기독교강요』의 저작 의도를 말합니다. 프랑수아 1세 Sire,--When I first engaged in this work, nothing was farther from my thoughts than to write what should afterwards be presented to your Majesty. My intention was only to furnish a kind of rudiments, by which those who feel some interest in religion might be trained to true godliness. 폐하(Sire sair]) 제가 이 일을 처음 착수하게(engage engid) 됐을 때 나중에(afterwards ftrwrdz) 폐하(your Majesty mdisti)께 헌정(present priznt ‘선물합니다’ 뜻의 단어 악센트는 뒤에 붙음)해야 할 것을 쓴다고는 전혀(nothing nθiŋ) 생각(thought θːt)하지 못했습니다. (여기에서 ‘Nothing ~ 비교급 than’의 용법을 잠깐 살펴봅시다. Nothing is easier than to cheat him. 그를 속이는 것만큼 쉬운 일은 없다. Nothing was farther from my thoughts than to write 쓰는 것만큼 내 생각에서 먼 것은 없다.) 제 의도(intention intnn)는 종교에 어떤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참된 경건(godliness gdlines)의 훈련을 받을 수 있는 기초 원리(rudiment rːdmnt)와 같은 것((a kind of))을 제공해(furnish fːrni) 주기 위한 것이었을 뿐입니다. And I toiled at the task chiefly for the sake of my countrymen the French, multitudes of whom I perceived to be hungering and thirsting after Christ, while very few seemed to have been duly imbued with even a slender knowledge of him. That this was the object which I had in view is apparent from the work itself, which is written in a simple and elementary form adapted for instruction.그리고 저는 주로(chiefly tːfli) 제 동포(countrymen kntrimen) 프랑스인들을 위해서(for the sake of) 그 고된 일(task tːsk)을 수고했습니다(toil til). 저는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multitude mltitjːd) 그리스도에 굶주리고(hunger hŋgr) 목마른(thirst θːrst) 것이 보였습니다(perceive prsːv). 그러면서도(while hwail) 그리스도에 관한 빈약한(slender slndr) 지식조차도 제때(duly djːli) 받는(imbue imbjː) 사람이 아주 소수(few fjuː)였던 것 같습니다. 제가 목표했던(in view vjuː) 대상이 본 저서에서 드러난(apparent prnt)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이 책을 훈련(instruction instrkn)에 적합하게(adapt dpt) 단순한 초등교육의(elementary lmntri) 형식으로 저술한 것입니다. 칼빈이 프랑수아 1세에게 보내는 헌사에서 말하듯이 『기독교강요』의 저술 목적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굶주리고 목마르지만 그 양식을 제때 공급을 받지 못하는 무지렁이 프랑스인을 세종대왕처럼 어여삐 여겨 훈련에 적합하게 ‘단순한 초등교육의 형식으로 저술한’(which is written in a simple and elementary form adapted for instruction)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디모데후서 3:15-17에서 말씀합니다.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And that from a child thou hast known the holy scriptures, which are able to make thee wise unto salvation through faith which is in Christ Jesus. All scripture is given by inspiration of God, and is profitable for doctrine, for reproof, for correction, for instruction in righteousness: That the man of God may be perfect, thoroughly furnished unto all good works. 이 말씀처럼 『기독교강요』는 믿음이 어린 사람들을 위한 쉬운 교리문답서 수준의 것이었습니다. 2020-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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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독교강요 영어수업
    2020-08-24
  • 김영배의 이야기 세계 교회사 16_ 초대교인의 한마디
    초대교인의 한마디 교회는 많은 이유들로 해서 로마제국 내의 여타종교들을 누르고 점점 더 강해졌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와 사도들에 관해서 신약성서에 기록된 것을 믿었기 때문에 우선 남다른 데가 있었다. 또한 그리스도인들은 그들 가운데에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능력을 나타냈던 생활 태도 때문에 이러니저러니 하는 여타종교들의 속설과 가르침을 압도할 수 있었다. 예전에 자기 마누라를 심심치 않게 내버렸던 사람들이 이제는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싱글생글 충실하게 아내들과 잘살게 되었다. 이 세상에서 무엇이 제일이냐 하면 돈이라며 엄지를 곤두세웠던 사람들이 이제는 그들의 살붙이 같은 재산을 선선히 나눠 가졌다. 다른 종족이라면 얼굴 힘살이 샐쭉거리며 죽이거나 같이 못 살겠다고 고개를 돌리던 사람들이 이제는 그들의 원수를 위하여 기도했다. 돈을 벌면 술 마시고 놀고 사치하는데 이외에는 무슨 돈이 쓸데가 있겠느냐고 생각하던 사람들이 이제는 어렵사리 번 돈을 과부와 고아와 노인과 파산당한 자들을 돌보기 위한 공동 기금에 아끼지 않고 선뜻 내놓았다. 무엇보다도 시절이 하 수상했던 로마의 평화라고 하던 때라 이방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이 신앙을 위하여 서슴없이 죽는 용기에 뭉클한 감동을 받았다. 눈을 화등잔만 하게 뜨고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는 눈초리를 보내는 이방인들에게 한 초대교인이 담담하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들 가운데 우리가 배운 가르침의 선을 말로 변변하게 설명할 수 없는 교육 받지 못한 사람들과 노동자들과 할망구들을 발견하고 당신들은 고개를 갸웃거릴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말로는 표현을 못 해도 그것을 행동으로는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들은 나발나발 말은 잘 못 해도 선행들을 행합니다. 맞게 되면 그들은 되받아치지를 않습니다. 강도를 당해도 그들은 법에 호소하지를 않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에게 뭘 요청하는 사람들에게 늘 손사래를 치거나 고개를 꼬거나 기도해 봅시다라고 둘러대는 법이 없이 너그럽게 줍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 이웃들을 자기 몸처럼 사랑합니다.” 믿음이 없는 이방인들에겐 참으로 신기하고 놀라운 일이었다. 어떻게 저 개차반 같은 사람이 변할 수 있나를 생각하면 고개를 절로 끄덕거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요즈음엔 교인이 강물에 빠지면 헤엄을 못 쳐 몸은 다 가라앉아도 입만은 붕어처럼 방실방실 물 위로 내놓고 빠꼼 거릴 수 있다는데. 그런가 하면 미국교포가 듣고 전달해준 이런 얘기도 있다. 어느 날 미국지역의 한 목사가 때가 되어 하늘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게 되었다. 그는 그의 믿음과 직분에 걸맞게 하늘나라에 별 어려움을 겪지 않고 갈 수 있었다. 미국에 들어갈 때는 상당히 애를 먹었던 것에 비하면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건 가히 식은 죽 먹기였다. 아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가 하늘나라에 도착하자마자 예수님께서 신발도 제대로 걸치시지 않고 뛰어나오셨다. 이제 그곳에 막 도착한 신 입주자는 생각하기를 주님께서는 누구에게나 저러시겠지 하면서도 딴에는 겸손을 떨며 말했다. “주님 저같이 먼지만도 못한 것을 이렇게 안 해 주셔도 될 텐데 이러시니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주님이 마음이 선뜻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말씀하셨다. “아니다. 내가 이러는 것은 이곳에 하도 오랜만에 목사가 와서 그러는 것이느니라.” 이 말씀을 들은 신입 천국 거주자는 손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고 하던가. 삼위일체 2020-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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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야기 세계 교회사
    2020-08-22
  • 기독교강요 영어 수업 - Lesson V 성서의 제자
    Lesson V 성서의 제자A disciple of the Scripture “네가 얼마나 대단한 소녀인지 생각해 보아라. 네가 오늘 얼마나 먼 길을 왔는지 생각해 보아라. 지금 몇 시인지 생각해 보아라. 아무것이라도 좋으니 생각해 보아라. 그리고 울지 마라.” 영국의 수학자이자 작가인 도지슨(Charles Lutwidge Dodgson)이 루이스 캐럴(Lewis Carroll)이라는 필명으로 1865년에 발표한 소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Alice's Adventures in Wonderland)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낯선 장기판 왕국에 떨어져 비참함을 느끼는 앨리스에게 백색 여왕이 한 말입니다. 바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돌연한 회심’으로 가톨릭과 결별한 지 6년이 지났습니다. 마침내 칼빈이 스물일곱 살 되던 1536년 3월 바젤에서 『기독교강요』 라틴어 초판을 출판했습니다. 사실 이 저서는 그의 신앙의 변증서이고 종교개혁자들의 교리에 대한 진술서였습니다. 그리고 책을 출판하고 얼마 안 있어 그는 바젤을 떠나 이탈리아의 포강(Po River)이 흐르는 페라라(Ferrara)로 여행을 갔습니다. 그곳에서 편안한 여행을 즐기고 있었지만 프랑스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낙담스러웠습니다. 칼빈은 프랑스에 자신을 위한 희망이 전혀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1536년 8월 마음을 굳힌 그는 신성로마제국(Holy Roman Empire)의 자유로운 제국의 수도이고 종교개혁자들의 피난처 스트라스부르로 출발했습니다. 그러나 신성로마제국과 프랑스 군대의 군사 작전 때문에 그는 자신을 제네바로 안내하는 스트라스부르로 가는 남쪽 우회로를 어쩔 수 없이 택하게 되었습니다. 1536년 당시의 제네바는 약 1만 명의 주민이 거주하는 도시였습니다. 1526년 사보이아 공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했으며 베른과 프라이부르크의 주들과 시민연대라 불리는 상호 방위 동맹을 맺고 있었습니다. 1532년 이후 개신교 주가 된 베른을 계기로 삼아 파렐(William Farel 1489년 - 1565년 9월 13일)과 그를 돕던 사람들은 1532년 10월 이래 줄곧 제네바에 종교개혁운동을 도입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파렐은 1534년 공식적으로 제네바의 목사가 되었습니다. 베른의 도움에 힘입어 제네바는 이 시기에 사부와 공작과 로마 가톨릭 교회 주교로부터 완전히 독립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1536년 5월 21일 제네바의 모든 시민은 파렐의 지휘 아래 종교개혁을 수용하기로 맹세했습니다. 1536년 8월 그 당시 파렐은 칼빈이 슈트라스부르로 가는 길에 하룻밤을 묵고자 제네바에 들렸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는 칼빈을 찾아가 제네바에 남아서 이 도시의 종교계를 더 발전시킬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거절하던 칼빈은 결국 승낙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후에 그는 이 사건을 『시편 주석』 서문(Autobiographical Sketch from the Dedication of the Commentary on the Psalms, in Calvin: Commentaries, 1979, Joseph Haroutunian, ed., Westminster John Knox Press, p. 53.)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Then Farel, who was working with incredible zeal to promote the gospel, bent all his efforts to keep me in the city. And when he realized that I was determined to study in privacy in some obscure place, and saw that he gained nothing by entreaty, he descended to cursing, and said that God would surely curse my peace if I held back from giving help at a time of such great need. 그 당시(then ðen) 복음(gospel gspl)을 장려하기(promote prmut) 위해 믿을 수 없는(incredible inkrdbl) 열정(zeal ziːl)으로 사역하던 파렐은 그 도시에 나를 붙잡아 두기 위해서 온갖 노력(effort frt)을 다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내가 개인적으로(in privacy privsi) 어느 궁벽한(obscure bskjr) 장소에서 공부하기로 마음먹었다는 사실을 그가 깨닫고(realize rːliz) 간청(entreaty entrti)으로 얻을(gain gein)게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봤을(saw sː see의 과거) 때 그는 저주(curse kːrs)를 내리퍼붓고(descend disnd) 그리고 그토록 크게 어려울 때(at a time of such great need) 내가 도움을 망설인다면(hold back) 하나님께서 나의 침묵(peace piːs)을 반드시 저주하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Terrified by his words, and conscious of my own timidity and cowardice, I gave up my journey and attempted to apply whatever gift I had in defense of my faith. 나는 그의 말에 간담이 서늘해지고(terrify trfi) 나의 소심(timidity timdti)과 비겁함(cowardice kurdis)을 자각하고(conscious kns) 나의 여행(journey dːrni)을 포기하고 나의 신앙(faith feiθ)을 변호하기(defense difns) 위해 어떤 은사(gift)를 가졌든(whatever hwtvr) 활용하기로(apply pli) 마음먹었습니다(attempt tmpt). 파렐의 어떤 말도 칼빈을 설득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파렐이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의지해 “크게 어려울 때(at a time of such great need) 내가 도움을 망설인다면(hold back) 하나님께서 나의 침묵(peace piːs)을 반드시 저주하실 것이다”(God would surely curse my peace if I held back from giving help at a time of such great need)라는 경고와 예언에 칼빈은 크게 떨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파렐의 말을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순종했습니다. 칼빈은 자신의 저서 『기독교강요』 제6장 2항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No man can have the least knowledge of true and sound doctrine without having been a disciple of the Scripture. Hence originates all true wisdom, when we embrace with reverence the testimony which God hath been pleased therein to deliver concerning himself. For obedience is the source, not only of an absolutely perfect and complete faith, but of all right knowledge of God(Inst. 1, 6, 2). 성서(scripture skrptr)의 제자(disciple disipl)가 되지 않고(without wiðut) 참되고 건전한(sound saund) 교리의 지식을 아주 조금이라도 가질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에 관해 그 속에서(therein) 전달하기를 기뻐하시는 증거를 존경심(reverence rvrns)을 갖고 받아들일(embrace embris) 때 거기서부터(hence hens) 모든 참된 지혜(wisdom wzdm)가 생깁니다(originate rdnit). 순종(obedience oubːdins)이 절대적으로(absolutely æbslːtli) 완전하고(perfect pːrfikt) 철저한(complete kmplːt) 신앙의 원천(source sːrs)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올바른(right rait) 지식의 원천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칼빈이 설교한 스트라스부르그 교회 칼빈주의에 대해 『웹스터 영영사전』은 다음과 같이 정의했습니다. Calvinism: the theological system of Calvin and his followers marked by strong emphasis on the sovereignty of God, the depravity of humankind, and the doctrine of predestination 칼빈주의(Calvinism klvinizm)는 하나님의 주권(sovereignty svrinti), 인간의 부패(depravity diprvti), 예정(predestination pridstnin)의 교리(doctrine dktrin)에 대한 강한 강조(emphasis mfsis)로 특징짓는(mark mːrk) 칼빈의 신학적(theological θːldikl) 체계(system sstm)와 그의 추종자(follower flour)들. 여러분도 이제 절대적으로 완전하고 철저한 신앙의 원천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올바른 지식의 원천 하나님 말씀 성서에 순종하는 칼빈(Calvin klvin)이 주장하고 가르치고 실천한 칼빈주의를 따르는 칼빈주의자(Calvinist klvvnist)가 되어 칼빈처럼 성서의 제자(a disciple of the Scripture)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2020-08-17
    • G.QT
    • 기독교강요 영어수업
    2020-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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