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7(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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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에 무더위가 이어진 8월 9일 지하철 원당역에서 내려 마을버스로 갈아타고 원당교회(유선모 목사)에 10시 30분 도착했다. 기독교방송 설립자 감의도(본명 오토 디캠프) 선교사가 1949년 9월11일 한 교인의 가정집에서 시작한 경기도 고양시 주교동의 원당교회는 창립 65년을 넘어 70년을 향하고 있다. 2부 11시 예배를 드리기 위해 본당 2층 앞줄에 자리 잡았다. 그런데 설교 강단 벽에 작은 교회에도 있는 고해상도 대형 스크린이 장년 1,700여명이 참여하는 원당교회의 강단 벽에 없었다. 언제부턴가 한국교회 예배당에 고해상도 대형 스크린 설치가 유행이다. 신축하는 예배당들은 거의 예외 없이 예배당 정면 상단에 스크린을 한두 개씩 설치한다. 건축한 지 오래된 교회들도 강단을 뜯어고쳐 앞 다투어 스크린을 설치했다. 대형 스크린에는 설교하는 목사의 얼굴이 배우나 가수처럼 크게 나타나고, 성가대 찬양, 성경 본문, 회중 찬송 가사, 교독문까지 제공된다. 신자라면 두 손으로 들고 펼쳐야 할 성경도 찬송가도 필요 없는 편리한 세상의 편리한 예배 풍경이다.
이런 시대에 원당교회는 보기 드문 정통 칼빈주의 예배를 지키고 있다. 칼빈은 그의 활동을 시작하면서 초대교회가 가졌던 내용을 되살리는 예배를 회복하기를 원했고, 그래서 은혜의 방편은 말씀과 성례전임을 강조하였다. 칼빈은 중세 미사를 흉내 내는 것을 싫어하였으며 그의 기준은 어디까지나 초대교회가 드렸던 예배였다. 칼빈은 성경을 신앙과 생활에 있어서 최고의 권위로 여겼다. 그래서 그에게 있어서 설교는 성만찬과 함께 예배에 있어 중심적이고 규범적인 요소였다. 즉 설교는 그의 예배에 있어서 필수적인 부분이었다. 그 다음에 칼빈은 시편송을 아주 강조하였다. 찬송가를 부르는 것을 장려하였던 루터교 전통이나. 노래
를 부르는 것이 거의 허용되지 않았던 쮜리히의 종교개혁과는 달리 칼빈은 시편을 프랑스 운문으로 번역하도록 조치했다. 그래서 제네바를 방문한 사람들은 시편 찬송이 예배에 주는 엄숙함과 기쁨에 대해 말하였고, 회중들의 능동적인 참여가 이루어지는 것에 대해 감명을 받았다. 제네바에서는 시편의 기쁨과 슬픔들이 음악으로 회중의 입으로 표현됐던 반면에 예배 장소의 시각적인 면들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이 없었다.
 
1542년 칼빈이 인도하는 제네바의 예배의식 다음과 같다.
말씀의 예전, 예배의 부름(시 124:8), 죄의 고백 속죄를 위한 기도, 시편송(운율에 맞춤), 성령의 임재를 위한 기도문, 성경봉독, 설교, 성찬성례전, 구제를 위한 헌금, 중보기도, 주기도문 해설, 성물준비(사도신경을 노래함), 제정의 말씀, 권면, 성찬기도(성령임재를 위한), 성체분할(분병례), 분병, 분잔, 성찬참여(시편 혹은 성경말씀을 봉독), 성찬 후 기도, 아론의 강복선언(민 6:24-26).
 
2015년 유선모 목사가 인도하는 원당교회의 예배의식 다음과 같다.
입례찬송, 예배의 부름, 찬송, 성시교독, 신앙고백(사도신경), 송영, 기도, 성경봉독, 찬양, 설교, 찬송, 헌금, 봉헌찬송, 봉헌기도, 교회소식, 찬송, 축복.
 
개혁주의 예배의식 전통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칼빈의 예배의식 전통을 지키고 이끌어가는 주인공은 정통 설교자 유선모 목사다. 그 사실은 장년 1,700여명이 참여하는 주일 원당교회의 예배에 참석해 보면 누구나 알 수 있다. 이제 시각적인 대형 스크린을 배제하고 성경말씀과 경건한 찬송을 강조하는 칼빈주의 설교자 유선모 목사의 설교 원문을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해 보자.
 
세상을 사랑하지 맙시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요한일서 2:15-17
 
스코틀랜드의 선교사이며 탐험가였던 리빙스턴이 나일강의 근원을 밝히기 위해서 아프리카의 정글을 탐험하다가 그만 심한 열사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그와 함께 원주민들이 의사를 부르기 위해 급히 밀림을 헤치고 마을로 내려갔습니다. 한참 뒤에 돌아온 그들은 리빙스턴이 침대 위에 앓아누워 있으리라 생각을 하였습니다만 그는 뜻밖에도 두 손을 깍지 낀 채 침대위에 올려놓고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기도가 끝나기를 기다렸습니다만 기도가 끝나지를 않습니다. 인기척이 없어서 가까이 다가가 보니까 이미 숨을 거둔 상태였습니다. 리빙스턴은 기도하는 가운데 평온하게 생을 마감한 겁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스데반이 돌에 맞아 순교할 때에 그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았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이처럼 자기의 삶을 아름답게 마무리하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있지요. 죽음에 대한 공포와 두려움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나온 삶에 대해서 자신이 없기 때문에 두려움 가운데 생을 마감하는 사람이 있지요. 하나님 앞에 서야 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우리에게 주어진 삶을 아름답게 마감할 수 있습니까? 삶의 방향을 바꿔야 합니다. 세상을 사랑하는 삶이 아니라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며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 언제 우리를 부르시든 주저 없이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럴 때 바울이 했던 생의 마지막 고백을 우리도 할 수 있게 되겠지요.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 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면류관이 예비되어 있음으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딤후 4:7-8). 바울은 그의 생의 마지막에 이렇게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생애 마지막에 이렇게 고백을 할 수 있도록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는 본문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을 다져야 합니다. 왜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지 말아야합니까? 오늘 읽은 이 본문을 통해서 세 가지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첫째로, 세상을 사랑할 때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빼앗기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우리에게 말씀을 합니다. 세상을 사랑하면 당연히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빼앗기게 되겠지요. 그러므로 지나가는 세상과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이렇게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15절에서 뭐라고 말씀합니까?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리라. 이렇게 분명히 요한은 말씀을 합니다. 한마음으로 하나님과 세상을 동시에 사랑할 수 없다는 겁니다. 빛과 어두움이 함께 공존 할 수 없는 것과 동일한 의미를 갖습니다. 주님도 뭐라고 말씀을 하십니까?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느니라. 이렇게 말씀을 하셨어요. 둘 다를 사랑 할 수 없다고 하십니다. 하나님이든 세상이든 둘 중 하나일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리라. 요한이 이렇게 잘라서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정말 하나님만 사랑한다고 자신 할 수 있습니까? 주께서 물어보실 때에 정말 내가 하나님만 사랑합니다 이런 자신 있는 고백이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하는 거죠. 우리 모두가 이런 고백을 할 수 있으시길 축원합니다.
등산을 좋아하는 한 사람이 있었어요. 한 번은 깊은 산에 등산을 갔다가 길을 잃어버렸습니다. 숲을 헤매다가 그만 밤이 되고 말았습니다. 지척을 분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더듬거리며 산길을 내려오다가 그만 발을 헛디뎌서 밑으로 굴러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간신히 나뭇가지 하나를 붙들게 돼요. 발을 더듬거리며 뭔가를 디뎌보려고 했습니다마는 발이 땅에 닿지를 않습니다. 그러다가 간신히 작은 돌부리 하나에 발을 딛게 됐어요. 발끝으로 그 돌부리를 딛고 작은 나뭇가지를 붙들고 매달려 있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팔에 힘이 빠지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불현듯 어린 시절 주일학교 다닐 때 기도하던 생각이 났습니다. 그래서 캄캄한 밤하늘을 향해서 소리를 칩니다.
“하나님 제발 저를 살려주세요. 그러면 정말 이제부터 열심히 교회를 다니겠습니다. 신앙생활을 한다기보다는 그저 열심히 교회를 다니겠습니다. 아직 신앙생활이 뭔지 모르기 때문에 나를 한번 살려주시면 교회를 열심히 다니겠습니다.”
그렇게 하늘을 향해서 소리를 쳐대니 순간 하늘로부터 무슨 소리가 들렸습니다. “손을 놓아라.” 그에게 손을 놓으라고 하니 세상에 눈앞이 캄캄합니다. 아무리 하늘에서 난 소리라고 하더라도 이 사람 생각에 도저히 손을 놓을 수 없었습니다. 손을 놓았다간 뼈도 못 추릴 것 같았습니다. 낭떠러지인데 여기서 떨어지면 그냥 하늘로 올라갈 것이라는 생각에 도저히 손을 놓을 자신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이 못 들으시게 속으로 외쳤습니다. 하나님 손을 놓으면 어떻게 하라고 하시는 겁니까? 저는 죽습니다. 그런데 또 하늘의 소리가 들려오는데 그래도 손을 놓아라 하는 겁니다. 이 사람이 그 소리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어요. 그래서 밤새도록 죽으라고 이 나뭇가지를 붙들고 있었어요. 새벽녘이 되었습니다. 어둠이 가시기 시작했습니다. 주위가 희끄무레 보이니 좌우를 살피다가 아래를 내려다봅니다. 보니까 깜짝 놀라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간신히 딛고 서있는 돌부리 밑이 바로 땅이었던 것입니다. 땅에서 솟아오른 작은 돌부리를 딛고 서서 나무를 붙들고 진땀을 흘리며 버티고 있었던 거죠. 순간 맥이 탁 풀리면서 그는 땅에 쓰러지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이렇습니다. 뭔가를 손에 쥐어야 살 것 같아요. 놓으면 죽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런 저런 세상 줄을 붙들고 살고 있지 않습니까? 어떤 사람은 돈의 줄을 붙들고 삽니다. 어떤 사람은 권력의 줄을 붙들고 삽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배운 지식의 줄을 붙들고 삽니다. 어떤 사람은 세상의 지위나 명예의 줄을 붙들고 삽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들 살고 있습니다. 이런 우리를 향해서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을 하십니까? 정말 살기를 원하느냐? 그러면 네가 붙들고 있는 것을 놓아라. 세상의 줄을 놓아라 그래야 살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왜 세상 줄을 놓으라고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그 속에 생명이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붙들고 있는 그 모든 것 가운데에는 생명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것을 놓으라고 분명히 말씀하시는 겁니다.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속에는 참 생명이 없습니다. 그 속에는 참 평강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속에 부분적이고 일시적인 것들은 존재 할 수 있어요. 돈이 주는 기쁨이 있지요. 권력이 주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지식이 주는 어떤 확신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이 다 완전한 것이 아니라 부분적인 것이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지요. 그런 것이 있을 때에는 무슨 일이든 부분적으로 가능합니다만 그것이 내 손을 떠날 때 또 다른 불안이 나를 찾아온다는 겁니다. 솔로몬이 뭐라고 합니까? 해 아래 있는 모든 것이 헛되도다. 그가 그렇게 가르치고 있지 않습니까? 솔로몬이 인생을 살아본 마지막 결론이 무엇입니까?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되도다. 그것이 우리를 향해서 이야기하는 삶의 결론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을 다 누려보고 살아봤습니다만 그가 우리에게 남기는 마지막 한마디는 모든 게 헛되다는 거예요. 솔로몬 왕이 그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내가 의지하던 세상 줄을 놓을 때 주님의 품에 안기게 됩니다.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마태복음 11장 28절에서 무어라고 말씀하십니까?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하시며 주님께서 우리를 초청하십니다. 이 주님의 초청에 우리가 응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세상 줄을 놓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쥐고 있는 것을 여전히 내가 쥐고 있기 때문에 주님의 초청에 우리가 응하지 못 할 때가 너무나 많다는 거예요. 세상 줄을 내려놓을 때 세상이 줄 수 없는 평강이 우리 가운데 찾아오는 겁니다. 세상을 사랑하지 마시고 하나님을 사랑하시고 주님이 주시는 참 평강을 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가 세상 줄을 놓는 그 순간, 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우리의 심령 가운데 충만해질 때 세상이 줄 수 없고 세상이 갖지 않은 평강을 우리가 누릴 수 있는 거지요.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을 합니까? 내가 주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리라 분명히 우리에게 말씀하셨어요.
우리가 세상을 통해서 평강을 누립니다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기를 원하시는 평강은 세상이 주는 한시적이고 부분적인 것이 아니라 완전하고 순전한 평강입니다. 그것을 놓치지 말아야 돼요. 어떻게 그 평강을 여러분과 제가 소유 할 수 있습니까? 세상을 떠나고 세상 줄을 내려놓을 때에 그것을 우리가 누릴 수 있고 소유할 수 있게 된다는 거죠. 오늘 사도 요한이 본문을 통해서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영적 교훈이 여기에 있다 하는 거죠. 그 사실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데 현실에선 이게 쉽지가 않아요. 세상 줄 다 놓아야 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예수 믿는 사람치고 그것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럼에도 현실을 살다보면 그것이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라는 것을 우리가 많이 경험하지 않습니까? 당장 손에 잡히는 것이 땅에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놓는 것이 믿음입니다. 믿으시길 바랍니다. 바로 그것을 놓는 것이 믿음이라고 하는 것을 우리가 분명하게 깨달아야 돼요. 믿음으로 하나님께 맡기고 놓아버리시길 바랍니다. 아직도 쥐고 있다면 지금이라도 놓아버려야 돼요. 우리가 그것을 놓지 못 하고 있기 때문에 여전히 믿음생활을 해가면서도 불안한 가운데 살아 갈 수밖에 없다고 하는거죠. 여전히 내가 그것을 붙들고 있기 때문에 마음에 참된 평강이 찾아오지 않는 겁니다. 세상에 있는 것들을 믿음으로 놓으심으로 주님이 주시는 참된 청강을 누리는 축복이 우리 모두에게 함께하기를 축원합니다.
세상을 사랑하지 말아야할 두 번째 이유가 무엇입니까? 세상에 있는 것들이 죄를 짓도록 만들기 때문이죠. 사도 요한은 이 본문을 통해서 우리에게 그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16절을 보세요. 뭐라고 말씀을 합니까?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다 이렇게 우리에게 말씀하지 않습니까? 세상에 있는 것들이 죄 뿐이라 이렇게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어요.
사도 요한은 이 죄의 뿌리를 세 가지로 이야기 하고 있어요.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 이 세 가지라고 우리에게 말씀을 하고 있어요. 갈수록 단계가 고차원적으로 높아지는 것을 발견 할 수 있습니다. 육신의 정욕이라고 하는 거 동물적인 본능의 욕구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갈라디아서 5:19이하에서 이야기를 하는데 15가지를 설명을 합니다.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이런 육신의 정욕들이 우리를 죄짓게 만든다고 하는 겁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지만 아직까지 온전히 성화한 자들이 아니기 때문에 아직까지 남아있는 죄의 잔재들이 여러분과 저를 부추겨서 죄짓도록 만든다고 하는 거죠. 사도 요한이 바로 이점을 지적해서 이야기를 합니다. 안목의 정욕은 인간적인 욕구죠. 눈에 보이는 것들을 다 탐하는 것을 말합니다. 아간이나 가룟 유다처럼 물질을 탐하는 것을 말하죠. 눈에 보이니 얼마나 좋습니까? 아간이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여리고성을 점령했을 때 눈에 보이는 좋은 것들을 숨겨두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그 다음 아이성 점령에 실패한 원인이 되지 않았습니까? 눈에 보이는 안목의 정욕으로 말미암아 그 민족 전체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히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습니다. 다윗처럼 이성의 유혹에 빠지는 경우도 있지요. 이 안목의 정욕 때문에 그렇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들을 탐하다가 생각지 아니한 이런 죄 가운데 빠지는 결과를 가지고 온다는 거지요. 오늘 이것은 예수 믿지 않는 사람들의 문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 자신들의 문제라는 것을 우리가 심각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이 말씀은 안 믿는 사람들을 향해서 주시는 말씀이 아니라 바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여러분과 저를 향해서 주시는 말씀이라는 것을 깊이 인식할 필요가 있어요. 나는 예수를 믿는데 무슨 문제가 있겠느냐 이래도 문제가 생깁니다. 예수 믿는다고 다 온전해집니까? 그렇지 않아요. 우리 주변에 매스컴을 통해서 이상한 소리를 들을 때 그 가운데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예수를 믿고 교회를 다닌다고 해서 그 사실로 예수를 온전히 믿는다고 할 수는 없죠. 그것이 우리의 모든 것을 책임지고 보장하는 것이 아니란 겁니다.
우리도 안목의 정욕에 얼마든지 넘어질 가능성을 가지고 사는 연약한 존재들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세계 최대의 여객선이라고 불리던 타이타닉이 침몰할 때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배가 바다에 온전히 가라앉는 시간이 두 시간 정도 남아 있었습니다. 배 안에 있는 구명보트가 충분하지 못했어요. 할 수없이 1등 객실의 손님과 여자들에게 우선권을 주기로 했습니다. 마지막 구명보트를 내려야되는데 이 구명보트를 타기로 되었던 한 여성이 선실을 향해서 갑자기 질주하기 시작합니다. 깜짝 놀란 선원이 가로 막았어요. 그런데 이 여성이 이렇게 말하며 울며 애원을 합니다. “저 객실에 제가 소중히 여기는 작은 보석상자 하나가 있는데 그것을 놔두고 나왔습니다. 빨리 가서 그것만 가지고 올 테니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그녀가 통사정을 하며 하도 애원을 하니까 5분만 시간을 주기로 했어요. 그녀가 선실로 뛰어가는데 1분, 그것을 찾는데 1분, 뭐 어디에 뒀는지 아니까 얼른 찾아서 뒤돌아오는데 1분, 그래서 3분 정도면 충분히 뒤돌아 올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5분이 지나도 여인이 뒤돌아 오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5분을 더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10분이 지나도 여인이 나타나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구명보트를 바다에 내리고 말았어요. 이 여인이 왜 돌아오지 못한 줄 아십니까? 자신의 보석상자만 가지고 나왔으면 충분히 돌아왔을 겁니다. 그런데 뒤돌아보니까 바닥에 보석이 깔린 거예요. 그걸 딱 보는 순간 약속시간을 잊어버린 겁니다. 그것을 정신이 없이 줍다가 정신이 들어 나와 보니 구명보트는 저 멀리 가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그녀는 보석을 잔뜩 안은 채 그만 배와 함께 가라앉아버리고 말았던 거죠. 이게 인생입니다. 죽음의 길인 줄도 모르고 안목의 정욕에 빠져 사는 게 인생이다 그거죠. 이건 비단 이런 여인의 문제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문제라는 것을 우리가 깊이 인식할 필요가 있어요.
안 믿는 사람만 안목의 정욕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 믿는 우리도 안목의 정욕에 빠질 가능성이 충분히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을 살피는 삶을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되어야 합니다. 안목의 정욕에 빠지지 않는다고 자신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가운데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이런 상황이 오게 되면 나도 빠질 수 있어요. 세상에 있는 것들이 이런 것들이라는 사실을 지적하면서 우리에게 경계하고 있는 겁니다.
또 우리를 죄짓게 하는 죄의 뿌리가 뭐라고 합니까? 이생의 자랑이라고 요한은 지적을 하지요. 이생의 자랑, 우리 예수 믿는 사람도 얼마나 자기를 자랑하려고 하는지 몰라요. 가만히 여자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남편의 험담을 이야기 하는 것 같은데 나중에는 자기 자랑입니다. 또 남자들 역시도 아내의 어떤 점을 이야기하는데 들어보면 결국 자기 자랑이에요. 부모들 역시 자식에 대해서 자랑하는데 결국 자기들 자랑입니다. 사실 자랑한다는 것이 누구나 다 같은 속성이에요. 예수를 믿든 안 믿든 다 자랑하고 싶은 속성이 우리 가운데 존재합니다. 부인할 수 없지요. 이생의 자랑 ,이것이 지니치게 되면 죄의 뿌리가 된다는 것을 아셔야 됩니다.
하루는 한 중년 부인이 자기가 다니는 교회의 목사님을 찾아가서 굉장히 심각한 표정을 지으면서 고백할 게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목사님, 저는 아침마다 거울을 보면 황홀할 때가 있습니다. 이것도 죄인가요?” 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목사님이 대답했습니다. “죄는 아닙니다. 착각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착각하고 삽니다. 우리도 역시 그렇습니다. 여러분이나 저나 착각하고 살 때가 많이 있습니다. 이것은 어느 특정한 사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 우리 자신의 문제인 거죠. 착각이 심각해지면 하나님 자리까지 올라가게 돼요. 하와가 그렇지 않았습니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실과를 따 먹으니까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처럼 될 줄 알았어요. 이런 착각 속에 우리가 살아 갈 때가 많이 있다고 하는 거죠. 느부갓네살이 그렇지 않습니까? 일본의 천황이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 자신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다 이런 착각 속에 산다고 하는 겁니다. 지금도 사단은 이 세 가지 죄의 뿌리를 가지고 끊임없이 여러분과 저를 미혹한다는 겁니다. 사도는 이 본문을 통해서 이것들을 경계할 것을 우리에게 이야기하고 있는 겁니다. 에덴동산에서 하와를 미혹할 때에 이 세 가지를 가지고 미혹하지 않습니까? 40일 동안 광야에서 금식하며 기도하신 이 주님을 찾아와서 사단이 미혹할 때 사용한 것도 이 세 가지예요.
이 돌들이 떡덩이가 되게 하라. 육신의 정욕이죠. 성전에서 뛰어내리라 천사들이 네 발을 받쳐 주어 다치지 않게 할 것이다. 많은 사람이 환호하게 될 것이다. 안목의 정욕이죠, 내게 절하면 보이는 천하만국을 네게 줄 것이다. 이생의 자랑이죠. 여러분 사단이 여러분이나 저를 유혹하는 것은 과거나 주님 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예요. 예수님 때나 지금이나 이 세 가지를 가지고 우리를 미혹하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어떻게 이러한 미혹을 이겨 낼 수 있습니까? 우리 힘으로 안돼요. 여러분 내 힘으로 될 줄 아십니까? 절대로 내 힘으로 안돼요. 내 능력으로 안돼요. 공부 많이 한 사람도 여기서 넘어가지 않습니까? 우리가 존경하는 사람도 여기에 넘어가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매스컴을 통해서 이런 보도들을 우리가 경험하지 않습니까? 이걸 이길 수 있는 사람은 없어요, 다윗 같은 성군도 그 믿음 좋은 사람도 안목의 정욕에 넘어가고 말았잖아요, 이게 쉬운 문제가 아니라고 하는 겁니다. 어떻게 우리가 이길 수가 있느냐? 바울은 갈라디아서 5장 16절에서 그 방법을 우리에게 말씀합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믿으시길 바랍니다. 내가 이르노니 너희는 성령을 좇아 행하라 그리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루지 아니하리라. 육신을 쫒아 행하지 말고 성령을 쫒아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갈 때에 이 죄의 뿌리들을 이길 수 있다고 하는 겁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에게 성령의 충만함을 허락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가 성령의 인도함을 따라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이김으로써 세상을 이기는 귀한 삶을 살아가는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세상을 사랑하지 말아야 할 세 번째 이유가 뭡니까? 세상에 있는 것들은 결코 영원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오늘 17절에서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말씀을 하지요. 요한은 우리에게 이렇게 분명히 말씀하고 있어요. 이 세상도 다 지나간다고 했습니다. 인간의 정욕도 지나간다고 했어요.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만이 영원히 거하느니라 말씀합니다. 이 세상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구름에 달 가듯이 다 지나가버리고 맙니다, 시냇물이 흘러가듯 다 흘러갑니다. 공중의 새가 날아가 버리듯 다 날아가 버린다고 하는 겁니다. 그러므로 잠시 있다 사라지는 땅 위에 있는 것들에 집착하지 말아야 해요. 영원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이란 영원한 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이지요. 여러분과 제가 세상 사람들과 다른 것이 뭡니까? 세상은 땅의 것을 바라보지만 여러분과 저는 영원한 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이에요. 이 땅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세계,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저를 위해 준비해 두신 그곳을 바라보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마치 땅에 있는 것들이 영원한 것처럼 이렇게 생각하며 살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래서 세상에 있는 것들에 집착하게 되지요. 여기에 인생에 한계가 있다고 하는 것을 깊이 깨달아야 해요. 여기에 바로 여러분과 제 자신의 한계가 있다고 하는 겁니다. 이 세상에 있는 것들이 영원하지 않다고 하는 것을 분명히 우리가 알고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착해서 살고 있는 것이 바로 우리 자신들의 모습이에요. 여기에 인생의 한계가 있는 겁니다.
생쥐 두 마리가 돌아다니다가 우연히 치즈 창고에 들어가게 되었어요. 아 들어가니까 치즈가 창고 가득 쌓여있는 겁니다. 죽을 때까지 다 먹어도 먹을 수가 없을 정도가 있는 겁니다.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이리저리 뛰고 살판이 났어요. 생쥐들은 행복했습니다. 야 이제는 먹을 걱정 안 해도 되겠다. 날마다 고양이를 피해서 도망을 다니며 숨죽이며 먹이를 찾았는데 이제는 그 걱정과 고생을 할 필요가 없다. 이 치즈를 봐라. 치즈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치즈가 자기들 앞에 가득 있으니까 너무 좋은 겁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날도 당연히 치즈가 있으려니 생각하고 치즈창고에 들어갔는데 하나도 없는 겁니다. 아주 깨끗이 창고가 치워져 있습니다. 주인이 치즈를 다 옮긴 거죠. 이 생쥐들이 발광하고 난리가 났어요. 야 도대체 우리 치즈를 누가 다 가지고 갔느냐며 누가 듣든 말든 소리를 찍찍거리며 소동을 피웠습니다. 이 말이 맞습니까? 남의 것을 훔쳐 먹다가 누가 우리 치즈를 가져갔느냐 난리를 피우는 거예요. 누가 내걸 가지고 갔느냐 하는 겁니다. 이런 모양이 인생이라고 하는 거예요.
마치 세상이 온통 내 것이고 영원히 살 것처럼 삽니다. 이 땅에 있는 것이 다 내 것인 것처럼 생각해요. 아닙니다. 하나님이 허락하실 동안만 내 것이죠. 그 때까지 잠시 빌려 쓴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해요. 결코 영원하지 않습니다. 결코 내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머리로는 아는데 가슴에 와 닿지 않는다는 거죠. 영원하지 않다는 것, 내 것이 아니라는 것 다 압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치고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요. 다 알지만 우리의 가슴에 와 닿지 않는다는 심각한 문제가 있다고 하는 것을 알아야 해요. 본래 내가 가지고 온 것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올 때처럼 갈 때도 아무것도 가지고 가는 것 없습니다. 전도서 5:15에 뭐라고 말씀을 합니까? 저가 모태에서 벌거벗고 나왔은즉 그 나온 대로 돌아가고 수고하여 얻은 것을 아무 것도 손에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라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디모데전서 6:7에 뭐라고 말씀합니까?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라고 말씀합니다. 욥기 1:21에 뭐라고 고백을 합니까? 가로되 내가 모태에서 적신이 나왔사온즉 또한 적신이 그리로 돌아 가올찌라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찌니이다 말씀합니다.
이 세상에 나올 때 벌거벗고 나왔어요. 역시 이 세상을 떠날 때도 그 모습으로 간다고 하는 거죠. 그러므로 이 세상에 있는 것을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를 못합니다. 세상 것은 다 일시적인 것입니다. 집착하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영원을 사모하며 영원한 것, 신령한 것, 위에 있는 것을 바라보며 추구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축원합니다. 누가 이런 살을 살 수 있습니까? 오늘 17절에 보니까 오직 주의 뜻을 행하는 자가 영원히 거하느니라 말씀합니다. 주의 뜻을 행하는 자가 이런 삶을 살 수 있다고 하는 거죠. 주의 뜻을 행하는 자는 누구를 가리킵니까? 구원받은 성도들을 지칭하는 표현입니다. 구원받은 성도가 왜 영원합니까?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모두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주신 하나님의 자녀들임을 믿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장로교의 창시자 존 칼빈을 다 아실 줄 압니다. 그가 임종 시에 이런 유언을 남겼다고 합니다. “내가 죽거든 내 무덤에 절대로 묘비를 세우지 마세요. 내 무덤은 가급적 흔적을 남기지 마세요. 그 무덤에 칼빈이 묻혔다는 걸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하도록 비석을 세우거나 이름을 새기거나 어떤 표시를 절대로 하지 마세요.” 그리고 그는 숨을 거두는 시간까지 로마서 8장18절 말씀을 계속해서 암송을 했다는 겁니다. 따라서 해 보세요.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땅에서 아무리 영광을 누려도 나중에 우리 하나님에게서 받을 영광과 족히 비교되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칼빈은 이 말씀을 열다섯 번을 외우고 열여섯 번째 끝부분에서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그는 떠나는 세상을 아쉬워하지 않았습니다. 다가올 찬란한 영광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여러분과 저도 떠나는 세상을 아쉬워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영원한 영광을 기뻐하며 즐거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누가 이런 삶을 살아 갈 수 있습니까?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그 사람은 이러한 삶을 살아 갈 수 있어요. 말씀을 맺으려고 합니다. 늘 우리에게는 세상을 사랑하고 싶은 욕망이 끊임없이 올라오게 되어있지요. 그런데 세상을 사랑하지 않아야 됩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은 세상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가 왜 세상을 사랑하지 말아야 하느냐 하면 세상사랑은 우리한테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빼앗아가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죄를 짓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모든 것은 일시적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금 주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므로 영원한 소망 가운데 살아가시는 귀한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 함께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녹음정리 김정주 기자
2015-08-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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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주의 예배자 유선모 목사 _ 원당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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