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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영규 목사의 이력을 총회 교단지 기독신문은 이렇게 전하고 있다.

1997년 5월 6일
총회 산하 전국교회 교역자들이 한자리에 모여 한목소리로 교단과 나라를 위해 기원하는 34회 전국목사장로기도회가 '일어나라 빛을 발하라'를 주제로 1997년 5월 6일 오후7시 충현교회(김창인목사)에서 제81회 총회장 김준규 목사의 설교로 개회됐다. 기도회는 교회 성장이 멈추고 나라가 총체적 위기에 빠진 가운데 3천여명의 교역자가 참석해 열렸다. 둘째 날 저녁집회에서 김창인 목사는 '예수님의 눈물'이란 제목의 설교를 통해 "예수님이 예루살렘을 보고 불쌍히 여겨 눈물을 흘렸지만, 지금 한국교회를 본다면 더욱 많은 눈물을 흘리실 것"이라면서, 우리 속에 젖어있는 물질지상주의 명예심 당파싸움 지방색 등을 눈물로 회개하지 않는다면 멸망할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외쳤다. 이어서 계속된 '교단의 부흥과 발전을 위한' 특별기도 시간에는 사회자인 백영규 목사가 "예수님의 눈물을 기억하며 두 손을 높이 들고 우리 모두 울자"고 호소하자 예배당은 온통 눈물바다가 되었다.

1998년 6월 10일
첫시집 <목사는 목사는 성경이 집입니다 고향입니다>를 낸 백영규 목사(예장총회 서기·상리교회·광주신학교 학장)는 『시는 아닙니다. 설교로 못 다한 이야기, 일상생활에서 얻었던 귀한 경험들을 시의 형태를 빌어 부드럽게 표현했을 뿐입니다』라고 자신의 작품에 대해 겸손하게 설명했다.
“고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시를 탐닉했습니다. 김소월부터 괴테니 바이런이니 하는 세계적인 시인들의 작품도 미치도록 읽었구요. 그런데 전도사로, 목사로 바쁘게 생활하게 되자 자연 잊고 살게 되더군요. 그렇게 마음 한구석에 숨겨 두었던 시심을 다른 분들의 위임예배나 장로장립식에 축사를 하면서 되찾게 됐습니다. 작은 시작입니다.”

2001년 10월 3일
상리교회(백영규 목사)가 4년 6개월에 걸친 예배당 신축공사를 마무리하고 입당식과 직원 임직식을 거행했다. 성도와 하객 1500여명이 참석한 이날 입당식은 백영규 목사 사회로 백원술 장로(장흥중앙) 기도, 최기채 목사(광주동명) 설교, 리영숙 목사(광주서문) 입당기도, 정성규 목사(여수제일) 안기영 목사(광주지산) 축사, 김길현 목사(증경총회장) 축도 등으로 진행됐다. 1997년 5월 14일 기공한 후 25억을 들여 완공한 상리교회 새 예배당은 지상 3층에 예배실과 친교실 등 800여평 규모를 갖추고 있다. 기존 예배당은 교육관과 목포노회 사무실 등으로 사용하게 된다. 2002년 12월 17일 목포노회가 3개 노회로 분리되기 전 당시 백영규 목사는 총 164 교회, 85 당회를 거느리며 호남지역 최대 노회로 군림했던 목포노회의 대표로 총회 지도자로 활동하던 때였다.

2006.10월 11일
목포서노회(노회장:최우식 목사)는 2006.10월 11일과 12일 목포 사랑의교회에서 제102회 정기회를 열어 백영규 목사(상리교회)의 은퇴식을 거행했다.

2014년 7월 26일 토요일 은퇴해 농촌 생활을 하고 있는 백영규 목사를 만나러 목포로 갔다. 감사하게도 내가 태어난 산정동에서 목회하는 총회 회록서기 최우식 목사(예손교회)의 신세를 졌다. 최 목사의 차로 청계북초등학교 정류장 옆으로 난 길을 따라 전남 목포시 무안군 청계면 동암길 75-17에 주소를 둔 백영규 목사의 은퇴 후 지내는 거처를 찾았다. 그는 그의 처소를 천계 목향원이라 부른다.

인사와 차를 나누고 최우식 목사는 떠났다. 백 목사와 마주 앉아 여러 이야기 끝에 나이든 사람에게 가장 중요한 사안을 물었다.

Q: 건강은 어떻게 유지하십니까.
그의 건강 비결은 간단했다.

A: 노동. 그리고 기도와 찬송. 천계 목향원 앞과 뒤에 있는 1000여 평의 밭과 과수원을 가꾸느라 일해야 하고 집안일도 만만치 않아 계속 움직이니 몸에 힘이 늘어나. 그 노동이 내 육체에 힘을 주고 건강을 주더군.

그의 얼굴은 맑고 몸은 건강해 보였다. 그는 말을 이었다.

4년 전 교통사고가 나 갈비뼈가 여덟 대 부러지는 사고를 당해 병원에 41일 입원해 있었는데 일찍 퇴원해 노동을 했더니 오히려 더 빨리 낫더라구.

목회 일선에서 은퇴했지만 그 자유로운 환경에서 그의 경건 생활은 더욱 깊어진 것 같았다.  은퇴한 지 8년이 지났지만 새벽기도만 자유롭지 기도 시간은 더욱 늘어났다고 한다. 그의 서재 겸 기도실은 응접실과 천정 사이의 중층에 있었다.

중층 서재 책상 뒤의 창이 있는 의자에서 그는 기도를 하고 크게 찬송을 한다. 아침에 일어나거나 밤에 자기 전에 자유롭게 기도를 하고 찬송을 한다. 찬송은 아예 외워서 하다 보니 백영규 목사는 모세처럼 목소리도 정정하고 기억력도 쇠하지 않았다. 그가 가사를 외워 부를 수 있는 찬송이 이백여 곡이다. 그는 하루걸러 100곡을 큰소리로 부른다. 시인 서정주는 치매 방지를 위한 기억력을 위해 세계의 산 이름을 외웠다고 한다. 그런데 백영규 목사는 경건 생활을 위해 하는 찬송 부르기가 육체의 건강과 기억력 보존에 도움을 주었다.

그가 제일 좋아하는 찬송이 324장 “주님 찾아 오셨네”이고 늘 그의 마음을 치는 가사는 헛된 교만 버리세 우리 구주 모시고 영원한 복락 누리세였다.

78세의 백 목사에게 앞날의 꿈을 물었다.

내가 사는 동네 너머에는 교회가 있는데 정작 목사인 내가 사는 동네에는 교회가 없어. 원래 동안교회라고 있었는데 없어졌어. 이 동네가 동안이야. 그래서 내가 세상 떠나려고 하니까 이 동네에 교회를 하나 세우고 싶어. 그런데 희망이 있어. 이 너머에 꾸리꾸리 마을이 있는데 바로 꽃동산교회 김종준 목사가 그 마을 출신이야. 내가 김종준 목사 한번 찾아가서 이 마을에 교회 하나 세워달라고 부탁하려고 해. 그래서 교회가 세워지면 아내와 내가 예배에 참석하거나 저녁설교를 도와줄 수도 있겠지.

백 목사의 외동딸은 기장측 목사의 사모가 되어 군산에 있다고 했다. 그 딸이 낳은 아이들이 그의 집에서 지내는 흔적이 집안과 집밖에 있었다. 그의 여러 시집 가운데 초야에 실린 시 한편을 골랐다.
 
목사6
이 대목은
소리 내지 말고
눈으로 읽고 목사만 보아라
하나님이 에덴에서 사람을 만드신 후에
사람은 좋아라
내 살중에 살이요
내 뼈중에 뼈라고
옷을 올리고 내리고
모두 던져 버리고
허우적 거리다
실수로 만든 것이
사람들이다
목사는 목사는
고요하고 깊은 밤에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다

모태에서 지었고 알았고
구별하였고
세웠노라
2014-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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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영규 목사의 목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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