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5(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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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건영 목사 이전이나 이후에도 
위대한 설교자나 목회자는 많을 것이다. 

그러나 말씀을 깨우치고 실천하는 
지혜자의 마음을 지닌 이건영 목사에게 
목회 성공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에게 목회는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에 
알리는 하나의 수단일 뿐이기 때문이다. 

화장터에 가서 뼈 몇 줌으로 바뀌어 나온 어머니를 상수리나무 아래 뿌리던 일은 크나큰 슬픔이다. 전도국장 시절 원자력병원에 가서 환자복 입고 곧 나을 것이라며 다짐하는 독일 병정 허봉춘 목사를 보던 기억은 기나긴 슬픔이다. 내 삶의 원천이며 원동력인 슬픔은 남의 슬픔을 이해하기 위해 고개 숙이고 몸 더욱 낮추어 눈물을 삼키게 한다. 

미워할 수 없는 사랑은 나를 끊임없이 구속했으나 사랑할 수 없는 미움은 이날 이때껏 나를 키웠다. 그리고 대상을 알 수 없는 막막한 슬픔이 나를 일으켜 세우곤 했다. 어금니 꽉 깨물고 응시하리. 목사로서 오늘이 있게 한 선지동산 총신과 목사인 우리를 두른 거룩한 총회를. 

2016년 1월 8일(금) 3월 6일(주일) 두 차례 이건영 목사(총신 75회)를 인천시 중구 인중로에 있는 인천제2교회 당회장실에서 만나 대담을 했다. 

-선교나 전도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십니까.

“우리도 보편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저희 교회는 이제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사회복지 정도로 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사회복지가 상당히 많은 효과를 거두는 모양이던데요. 

“그러니까 효과가 이제 갑자기 나타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저희들이 장애우들을 평일에 교회로 초청을 합니다. 교육관에서 하고 있습니다. 장애우 사역을 하다보면 말을 못하는 사람이 아버지라고 얘기할 수 있는 게 사오 년 걸립니다. 금방 효과가 나타나는 건 아닙니다. 꾸준히 하고 있기는 합니다.”

-어떻게 그런 사역을 생각하시게 되었습니까.

“이제 인천제2교회 1대 이승길 목사님은 전쟁 직후 남편 없고 모자들만 불쌍하게 사는 사람들을 교회 안에서 돌보는 마르다 모자원을 운영하셨습니다. 미군 부대에서 나오는 물품이나 식품을 가지고 불쌍한 모자들을 돌보셨는데 그것이 우리 교회 사회복지의 시작입니다. 그 다음은 우리 교회 2대 이삼성 목사님 그분은 우리 교회 내에 그 당시(70년대) 드물던 교회에 삼일유치원을 열었습니다. 우리 이 지역에서는 사립 유치원으로 꽤 유명한 유치원이었습니다. 지금이야 유치원이니 유아원 선교원이 많지만 말입니다. 그 당시는 거의 없다시피 했죠. 그런 사회복지를 이삼성 원로목사님이 하셨죠. 그 정신을 물려받은 것입니다. 몇 가지 사역을 교육관을 중심으로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사회복지 사역에 우리 교인들 마음이 많이 열려 있고 헌금도 많이 합니다. 그 종류가 열 몇 가지가 됩니다. 지역사회를 어떻게 보셨는지 모르지만 이 지역은 재개발 지역입니다.”

(인천제2교회는 숭의로터리를 중심으로 주변에 공구업체와 인천중앙여자상업고, 인천시립도원체육관이 있다. 인천에서 두 번째로 세워진 장로교회라는 뜻에서 ‘인천제2교회’란 이름으로 1948년 세워진 교회는 68년이 됐다. 도시화와 산업화가 가속화되면서 인천 주변 지역은 숨 가쁘게 변했다. 많은 이들이 주변 신도시로 떠났고, 관련 기관과 시설도 자리를 옮겼다. 교회가 있던 지역은 점점 문화 혜택에서 소외된 지역으로 남았다. 그래서 2010년 새 예배당을 건축하며 지역사회를 향한 사역의 지향점을 더 분명히 했다. 주 중에도 주민에게 열린 교회, 지역과 함께 호흡하는 교회를 지향한 것이다. 과감하게 4000석 규모의 예배당을 1700석으로 줄였다. 그 대신 주민들을 위한 다양한 공간을 확보했다. 완공된 예배당에선 어린이 도서관, 장애인을 위한 특수교육센터, 노숙인과 어르신을 위한 목욕탕, 외국인 노동자를 위한 치과와 미용실, 헬스장 등에서 21가지 사역이 활발하게 진행 중이다.)

-공장 가게들 공구 상가들이 많더군요.

“공구 상가 음식점들이 많죠. 사실 이 지역은 인천에서 아주 낙후된 지역입니다. 그래서 사회복지에 관심을 가지게 됐고 눈을 뜨게 된 겁니다. 저희 교회가 송도 신도시라든지 영종 신도시에 있다 하면 사회복지가 필요 없죠. 재개발지역이라 사회복지가 필요합니다.”

-지금 이 교회 오신 지 몇 년 되셨어요. 

“저는 여기에서 태어났어요. 이 교회 유아세례 출신입니다.”

-아버님이 장로님이셨나 보죠.

“장로님이셨죠. 돌아가셨습니다.”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이준경 장로님이라고 옛날에 경기도 제5대 교육감(1980. 2. 11. ~ 1983. 2. 27)을 하셨죠. 한명수 목사님 계실 그 때 경기도 교육감을 하셨습니다. 그 이후 교회가 점점 성장을 했어요. 저는 27살까지 여기 교인으로 있었죠. 그러다 소명을 받아 총신 신대원가서 서울서 칠팔 년 부교역자 생활을 했습니다.”

-서울 어디서 하셨습니까.

“혜성교회 박광옥 목사님 밑에 있었고 장충체육관 앞 장충교회 이규일 목사님 밑에도 있었죠. 거기서 부목사로 있다가 여기 이삼성 목사님이 내려오라고 해서 오게 됐습니다. 그 당시야 목사님 말씀하시면 하나님 하시는 걸로 알았죠. 장충교회에서 여기 본교회로 오라고 하니까 그냥 온 겁니다. 어르신 말씀이니까. 그때 와서 부목사(부임 1987. 6. 28) 6년 그리고 담임목사 23년(위임 1993. 12. 9) 넘어가네요. 그러니까 거의 30년 됐네요. 제가 52년 2월 14일 생이거든요. 제가 64세죠. 64세 가운데 이 교회에서 교인으로 27년 목회자로 30년 그러니 57년을 여기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기는 뭐 권위도 없어요. 여기는 다 동기들 선배 스승 같으신 어른들인데 어느 날 건영이가 목사로 온 겁니다. 그래서 여기서 키워주신 어르신이 오시라고 해서 왔지만 몇 년 있다 서울로 도로 올라가려고 했어요. 그런데 한 2년 지나니까 초청해 주신 이삼성 목사님(1992. 9. 22 제77회 총회장 취임)이 저한테 후임자가 돼주면 좋겠다고 하신 겁니다. 그리고 저를 유학을 보내 주셨습니다.”

-이삼성 목사님이 대단하시네요.

“유학 다녀온 다음에 본인이 만 70세에 은퇴하시겠다고 하더니 정말 그러셨어요. 그때부터 지금까지 사역하고 있는 거죠.”

-그 때가 언제죠.

“그러니까 그게 87년입니다. 장충교회에서 87년에 왔습니다. 한참 민주화 운동할 때죠. 설마 제가 이렇게 오래 있을 줄 몰랐어요. 있을 수가 없는 건데 교인들이 좋아서 있을 수 있었죠. 시골 교회처럼 순수해요.”

-이삼성 목사님이 언제 돌아가셨죠.

“한 7년 넘었죠. 제가 여기 재직한 것도 부목사 6년 담임목사 23년 29년이네요. 정말 꿈만 같네요.” (그는 파안대소했다.)

-총신은 몇 회세요.

“75회입니다. 지금은 제 마음속에 하나님 은혜 주시면 이 교회에서 은퇴하자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니 그러시면 지금 또 어디로 부임해 가시겠다는 겁니까.

“저는 좀 일찍 은퇴를 해 힘이 있을 때 다른 사역을 좀 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장로님들이나 교인들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시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마음을 접었습니다.” 

-제가 보니 한 교회에서 지도력을 키우신 목사는 영적 지도자라 연륜이 더할수록 더 지도력이 성숙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지도력을 다른 데 쓰는 건 좀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은혜지만 인천에는 신도시가 많이 생겼습니다. 여기 교회 근처에서 걸어 교회 나오는 교인은 5퍼센트도 안 됩니다. 나머지는 상상을 초월하는 먼 데서 오는 분들도 있습니다. 교회가 어느 정도 복음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 지역에서 오시는 분들을 위한 것입니다. 여기는 청계천처럼 공구상가가 많습니다. 500개가 넘어요. 저 구석구석까지 성탄절 날 수건을 돌리면 500개가 부족해요. 장사하는 사람들은 그 자리를 죽어도 안 옮기려고 해요. 이미 다 자리가 잡혔으니까요. 저희 교회는 공구상가와 주위 식당들과 같이 갈 수밖에 없습니다.”

-제임스 보이스가 30년간을 담임목사로 섬긴 필라델피아 제10장로교회는 장장 현재는 190년을 개혁주의 청교도 신앙을 전수하고 있는 뿌리 깊은 교회입니다. 그런데 그 교회가 필라델피아의 명동이라는 월넛 스트리트에 있습니다. 제임스 보이스는 선교를 위해 교회가 그 지역 중심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여기가 중구니까 옛날에는 인천의 번화가였죠. 제 어렸을 때 추억이 다 있습니다. 학교도 가고 병원도 가고 음식점도 많았습니다. 지금은 그런 것들이 다 신도시로 나갔습니다.”

-교회로서는 딱 좋은 환경이네요. 교회가 땅값이 오르면 문제가 생기더군요.

“교회가 땅 사기는 좋습니다. 평당 600이면 삽니다. 다른 지역은 굉장히 비싸지요. 그런데 파는 데는 600밖에 안 하니까요. 내놓으면 팔리는 건 공구상가입니다. 그러나 안 팔려고 하지요.”

-시카고의 무디 바이블 교회도 시내에 있는데 목회자에 따라 교회로 사람들이 몰려온답니다. 거기 교인이 말하길 온 지역에서 몰려오는 교인들을 보면 아름답다고 하더군요. 그 교회는 변두리로 이사 가려고 하지를 않아요. 인천제2교회도 그럴 것 같네요. 

“아멘. 목사님 잘 모르시겠지만 실제로 송도 신도시하고 연수동에 수 만 채 아파트 대단지가 있습니다. 고 가운데 3000평 땅이 나왔어요. 경매로 80억에 나온 거예요. 일부 장로님들이 그 쪽으로 가자고 말씀 했어요. 한 10년 전일 겁니다. 그 때 거기로 갔다면 지금 엄청난 교회가 됐을 겁니다. 송도 신도시가 엄청나고 연수동 수 만 채 아파트 단지 한 가운데이니까요. 많은 교인들이 가자고 했는데 최종적으로 장로님들을 설득해 가지 말자고 했습니다.”

-왜 그러셨습니까.

“나중에 장로님들이 이유라도 좀 알자고 했어요. 내가 이유를 말씀 드릴 테니까 그 이유를 듣고 포기하는 것으로 하면 말씀 드리겠다고 했어요. 장로님들이 그렇게 하시겠다고 했어요. 아내랑 그 곳에 가봤더니 이미 작은 교회 개척교회 상가교회들이 많이 있더라고요. 그런 작은 교회들이 없다고 하면 가도 괜찮을 겁니다. 그러나 그런 교회들이 반경에 엄청나게 많은 데 이 대지를 팔고 거기 가서 큰 교회를 지어놓으면 교인 간에 수평이동이 생기고 작은 교회 개척 교회 상가 교회들이 엄청나게 타격을 받을 겁니다. 장로님들 아시지 않느냐 우리 교회가 나쁜 소문이 있는 것도 아니고 좋은 평판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가 그곳으로 가면 우리는 엄청 큰 교회가 될 것이지만 주위에 많은 교회들이 말로 할 수 없는 피해를 볼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런 일을 하지 맙시다. 제가 연구하고 현장 조사를 한 걸 말씀 드리는 겁니다. 여기에서라도 오겠다는 교인만 받읍시다. 우리가 인천에서 제일 큰 교회가 된다고 해서 천국 가서 더 큰 면류관을 교인들이나 장로님들이 받는 건 아닙니다. 목사가 받는 것도 아닙니다. 인천에서 제일 큰 교회가 못 되더라도 여기서 오는 교인만 받고 거기 작은 교회들 살려줍시다. 그랬더니 이제 많이 얘기들이 있었습니다만 결국 장로님들이 제 말씀을 들어주셨어요.”

-그런 일이 있었군요.

“저희 교회는 34년 된 아주 낡은 건물이었습니다. 여기다 새로운 건물을 짓자 해서 지금 이 교회를 건축하게 된 겁니다. 입당해서 5년 됐습니다. 그런데 이제 마음속에서는 제 나이로 보면 하나님께서 주신 마지막 기회였는데 하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결정하고 나서 그 땅 근처로 심방 가는 일이 생기면 가슴이 아려오면서 잘못했나 하는 자책이 생기는 겁니다. 이거 결정을 잘못 한 것이 아닌가 하는 후회와 아쉬움이 교차하는 겁니다. 6개월이 지나니 괜찮아지더군요.”

-정말 잘 하신 일이죠.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결정을 하신 거죠.

“장로님들에게 감사하죠. 그분들이 저희 교회 제 선배님들이시고 주일학교 스승들이십니다. 그런데 제가 그분들에게 말씀을 드렸더니 목사님 말씀이 옳은 듯 하다고 교회 앞에 광고하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다음 주 광고해도 될까요 물었더니 그렇게 하라는 겁니다. 저희들이 목사님 말씀이라면 인정하고 따라야죠 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 다음 주 신도시로 안 간다고 광고하고 우리 교회에 오시는 분들만 받자고 했더니 교인들도 다 따라주는 겁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잘 한 일이다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당시는 지금보다 더 젊었으니까 잘못 결정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곤 하는 겁니다.”

-그게 주님이나 사도들의 정신이 아니겠습니까.

“결정을 하고 나니 그 땅값이 70억으로 내려오는 겁니다. 3000평이라는 땅이 학교도 안 되고 큰 식당도 안 되고 천상 교회 거예요. 그 유혹이 내 마음속에서 많은 투쟁을 일으켰습니다. 내 자신과 싸우는 거죠.”

-제 생각에 교회는 가난한 사람이 많아야 된다고 봅니다. 그런 지역으로 가면 가난한 사람이 적어요. 병원에 환자가 많아야 하듯 교회에는 가난한 사람이 많아야죠.

“(차를 한 모금 마시고 크게 웃었다.) 여기는 그냥 평범한 지역이라 제가 골프를 안 쳐요. 제가 미국 미시시피주 잭슨에 있는 리폼드신학교를 다녔는데 당시 환율이 1달러에 800원이었습니다. 그런데 5달러면 하루 종일 골프를 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니 누구나 골프를 치는 겁니다. 그 당시 그곳에 노수길 집사님이라고 가발 사업을 하는 분이 계셨는데 골프를 치라고 골프채를 선물하더라고요. 그래 그 정성에 못 이겨 골프채를 그냥 놔둘 수도 없어서 미국에서 한 3년 골프를 쳤습니다. 금요일과 토요일 주말에 골프를 쳤습니다. 제가 잘 쳐요. 저희 교회에 와서 느낀 게 뭐냐 하면 여기서 골프 쳤다가는 귀족 중에 귀족이겠구나. 그래서 골프채를 버리고 오늘까지 동기들 후배들 골프 치자고 얼마나 전화가 오는지 모릅니다. 수원에 있는 모 목사님은 골프채를 하나 선물로 가져왔어요. 그가 이거 가져왔는데 내가 전도사입니다 말하는 거예요. 무슨 전도사냐고 했더니 골프전도사라는 겁니다(그가 누군지 아는지라 같이 웃었다). 내가 이 사람도 전도했고 저 사람도 전도했다고 해요. 그러면서 골프채를 받으라고 하는데 나는 안 받는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한사코 받아 두시기만 하라는 겁니다. 제가 골프를 한 달만 치면 그 분들 따라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교회에 여러 가지로 덕이 안 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골프는 치지 않습니다. 은퇴하면 칠겁니다. 워낙 제가 운동을 좋아해 은퇴하면 잘 치겠죠. 이 지역을 생각하면 골프 친다 안 친다를 떠나 제가 섬기는 이 교회 교인 수준하고 안 맞습니다.”

-신도시도 안 맞습니다. 

“(웃는다) 그래요.”

-미국에서도 영적으로 사는 목사는 골프 안 칩니다. 이게 사실은 운동이 되질 않습니다. 왜 그러냐하면 골프는 점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근육을 단련하는 헬스클럽은 점수가 없어요. 이건 자기 혼자하고의 싸움이고 훈련인데 골프는 점수가 있어 반드시 내기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미국에서도 가난한 노인들도 몇 불이라도 걸거나 식사 내기라도 하더군요. 게임이라 경쟁심이 생겨요. 우리 목사들도 골프를 치면 내기를 합니다. 게다가 필드에서 목사라고 할 수 없으니까 교수니 박사니 하며 젊은 캐디들한테 정치인이나 기업인들처럼 농담 던지고 합니다. 무엇보다 골프는 목사에게 덕이 안 됩니다. 골프 전도사 필리핀 가서 뭐 하고 지내는지 잘 압니다.

“잘 아시네요.”

-그 전도사 주선으로 필리핀에 골프 약속들 잡아놓고 주일 예배 끝나면 골프채들 챙겨들고 공항에 모여 있는 모습 본 적 있습니다. 참으로 목사들에게 어울리지 않는 일입니다. 언제 우리 목사들이 돈이 많아졌다고 그러는 겁니까. 그거 영적인 성직자 목사들이 할 짓이 아닙니다. 사도 시대 말씀과 기도에 전념하기 위해 구제는 집사를 뽑아 맡긴 건 아닙니까. 그처럼 목사도 말씀과 기도에 전념하기 위해 골프도 집사들에게 맡기는 건 성경적이 아니겠습니까. 건강이라는 게 사실 경건에 힘쓰면 더 건강해지는 거 아닙니까. 

“(쾌할하게 웃으며) 어쨌든 저는 제 자신 목회 현장이라든지 형편이 골프가 맞질 않습니다. 골프치는 다른 분들을 뭐라고 할 마음은 없습니다. 우리 교회 십일조 내시는 분들을 봐서 나는 골프를 쳐서는 안 된다는 생각입니다.”

-하실 수 있는데 안 하시는 건 굉장한 결단입니다. 그거 한번 빠지면 재미 탓에 못 빠져나옵니다. 

“정말 재미있긴 하죠.”

-좋아하시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잠언 16장 9절입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목사가 ‘지혜자의 마음’을 가졌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이는 그가 목회나 설교에 탁월한 테크닉을 가졌다는 뜻이 아니다. 비범한 지성과 의지를 가졌다는 의미도 아니다. ‘마음’을 가졌다는 건 특별하고 고귀한 정신을 가졌다는 걸 의미한다.

그렇다. 이건영 목사의 경이로움은 그의 정신적 위대함에 있다. 지극히 평범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이 이뤄낸 위대함이라 더욱 값지다. 그는 세상의 시선에 얽매이지 않고 성경의 진리를 앎으로 얻은 자유인이었기 때문이다. 이건영 목사가 지난 2월 16일자 국민일보 인터뷰에서 행한 그의 자유로운 마음을 보여 주는 말 한마디를 소개한다. 

“교회가 마련한 공간과 시설들은 이용자의 대다수가 교회 외부 사람들이므로 그 공간에서 단 한 순간이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온기를 유지하는 것이 교회가 해야 할 일이라 생각합니다.”

슬픔을 경유하지 않고 믿음의 바닥에 이를 수 없다. 성경은 말씀한다.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함으로 마음이 좋게 됨이니라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자의 마음은 연락하는 집에 있느니라 전도서 7:3-4 

슬픔은 이웃의 아픔에 ‘나’를 겹쳐놓는 일이다. 슬픔을 “응시”할 때, ‘나’는 이웃에게로 건너가 이웃과 하나가 된다. 그리하여 슬픔은 사랑의 다른 이름이다. “기나긴 미움”은 “막막한 슬픔” 앞에 무력하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권면한다.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 갈라디아서 5:14

이건영 목사 이전이나 이후에도 위대한 설교자나 목회자는 많을 것이다. 그러나 말씀을 깨우치고 실천하는 지혜자의 마음을 지닌 이건영 목사에게 목회 성공은 아무것도 아니다.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에게 목회는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에 알리는 하나의 수단일 뿐이기 때문이다. 

2016-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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