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이 빛나는 밤하늘은 늘 나를 꿈꾸게 해.”
네덜란드 후기인상파 화가 고흐(1853-1890)가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 쓴 말이다. 그랬다. 현실은 아프고 힘들었지만 별을 그리는 순간만큼은 꿈을 꾸는 것처럼 행복했을 터다. 화가는 비록 실패작으로 여겼지만 밤하늘에 빛나는 그림 속 별들은 21세기를 사는 우리들도 꿈꾸게 만든다.
큰일을 추진하면서도 작은 일을 챙기는 데 소홀함이 없던 만 가지 일(기미)을 친히 살핀다는 만기친람(萬機親覽)형 통치술의 이승만(李承晚1875년 3월 26일~1965년 7월 19일)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이자 마지막 주석을 거쳐 대한민국의 제1·2·3대 대통령으로서 대한민국의 토대를 마련했다.
대한민국의 제5·6·7·8·9대 대통령 박정희(朴正熙 1917년 11월 14일~1979년 10월 26일)는 경제에 문외한이었지만 자기주도적 학습 능력을 통해 끊임없이 노력하며 단기간에 경제의 본질을 배웠다. 매일 3시간씩 대학교수로부터 1대1 강습을 받았고 수출진흥확대회의를 열어 찬반 토론을 경청한 뒤 결론을 내렸다. 유연한 정신자세, 겸손, 사심(私心)이 적은 태도도 한몫했다. 그 결과는 ‘한강의 기적’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탄탄한 권력 기반을 확보한 뒤에는 역설적으로 이 장점들의 빛이 바랬다. 1972년 유신 선포와 1974년 육영수 여사 피습 사건을 거치며 자기주도 학습은 기능을 멈췄고 특유의 자기 수정 능력도 둔화됐다. 그럼에도 대한민국은 박정희 대통령이 성장시켰다.
대한민국의 제14대 대통령 김영삼(金泳三, 1929년 1월 14일~2015년 11월 22일)은 대한민국 역대 최연소인 만 25세의 나이로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9선 의원을 지내면서 김대중과 민주 진영의 지도자로 활동하며 민주화를 이룩했다. 이승만, 박정희, 김영삼 이들이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들었다. 이들은 대한민국의 세 별들이었다.
그처럼 오늘의 합동 총회를 만든 세 별을 꼽는다면 누구일까.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1859년 7월 19일 ~ 1916년 10 월 12일)는 미국 장로교 선교사이다. 언더우드 선교사라는 이름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한국어 이름은 원두우(元杜尤)이다. 1859년 7월 19일에 영국 런던에서 태어나서 13세가 되던 해에 미국으로 이주하였다. 1881년 뉴욕 대학교를 졸업하였으며 같은 해부터 1884년까지 뉴브런스위크신학교에서 공부하였다. 1883년 11월 목사가 되었고 1년간 인도 선교를 위해서 의학 공부를 하면서 실력을 쌓았으며, 1884년 7월 28일 조선 최초의 장로교 선교사로 선정되었다. 하지만 조선은 개혁파들이 일으킨 갑신정변으로 사회가 혼란하였기 때문에 일본에 머물러야 했다. 그동안 조선 기독교인으로서 마가복음서를 번역한 문서선교사 이수정(李樹廷)에게서 한국어를 배우면서 조선에서의 선교를 준비하였다.
언더우드는 1885년 부활주일인 4월 5일에 제물포항에 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와 함께 한국 선교사로 입국했다. 그러나 그는 조선 정부에서 선교 활동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제중원에서 물리와 화학을 가르치는 교사가 되었다. 그러면서 그는 조선어 문법책을 영어로 저술하였다. 그 후 성서번역위원회 초대위원장, 대한기독교서회 회장 등을 역임하였다. 한편 예수교 학당(현재 경신중고등학교), 서울 구세 학당, 연희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를 설립하였다. 또한 교회 연합 운동을 지도하는 등 한국의 종교·문화·언어·정치·사회 등 여러 분야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런 그가 1912년 9월 1-4일 대한예수교장로회 제1회 총회장으로 선출됐다.
1930년대 일제는 기독교단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였다. 이에 개신교인들은 저항했으나 많은 목사들이 투옥되고 평양신학교가 휴교당했으며 결국 일제 패망까지 많은 목사와 신도들이 신사참배에 가담하였다. 1940년대 총독부의 허가를 받아 서울에 조선신학교가 생겼다. 그리고 해방 후 1947년 다시금 대한예수교장로회가 복원되었다.
1959년 제44회 총회는 선교 75주년 기념 총회로 1959년 9월 24일 대전중앙교회에서 개회된다. 총회 한 달 전에 총대들에게 통보되어야 할 총대 명단이 총대 호명 시간에 비로소 배부된다. 하지만 거기에는 경기노회 총대 명단이 빠져 있었다. 첫날 회의부터 경기노회 문제로 양측은 대립을 계속하다가 25일 경기노회 정기·임시 양측에서 3인씩 나와서 경위를 밝히고 표결 처리하기로 한다. 오후에 표결을 진행, 임시 노회 측이 124표(정기 노회 측 119표)를 얻어 회장은 임시노회 총대를 받게 됨을 선포하면서 사태는 급박하게 전개된다. 그 갈등의 결과 1959년 한국장로교회는 한국장로교 NAE 세력과 에큐메니칼 WCC 세력으로 갈리게 되었다.
1948년 루터교, 개혁교회(장로교), 감리교, 침례교, 성공회 등의 개신교 주류 교파들과 동방 정교회 대표 성직자들이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에 모여서 결성한 세계 교회 협의회 WCC(World Council of Churches)를 지지하는 측은 기장 측 일부 온건파 인사들과 연합하여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총회를 만들었다. 반면 WCC를 반대하는 1942년 결성된 ‘전국복음주의자협의회’ NAE(National Association of Evangelicals)에 1953년 가입한 측은 1951년 독립해 나갔던 고신 교단과 손을 잡고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총회를 만들었다. 합동이라는 이름은 고신과 승동파가 합동하였으므로 그런 이름이 붙은 것이다. 한국장로회 NAE는 경북 NAE(박병훈), 호남 NAE(정규오), 이북 NAE(김윤찬)의 정치적 연합체였다. 이들은 박형룡을 앞세워 긴밀한 연합체를 이루었고 총회 교권과 남산 총회신학교의 주도권을 공유하고 있었다. NAE 측의 승동총회는 1959년 11월 24일에 속회하였다. 이런 과정을 통해 제108회를 맞을 합동 총회의 세 별을 꼽는다면 내 개인적 소견은 다음 세 총회장일 것 같다.
분열 이후 신앙 인격과 보수적 정치력으로 합동 총회 정체성을 확립한 제51회 총회장 박찬목 목사(1966.9.22.-27), 성장하는 교계와 교단을 아우르는 특유의 정치력으로 현재의 총신과 총회의 터전과 기틀을 확립한 제65회 총회장 이영수 목사(1980.9.25-29), 성장에 취해 그 본질을 잃은 교단의 정체성을 회복시킨 제104회 총회장 김종준 목사(2019.9.23-26) 등이다.
어떤 사람은 시간을 포도주처럼 해석한다. 풍부한 자원이거나 지금은 없더라도 은퇴하면 시간이 많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젊을 때와 은퇴 후 시간은 그 안에서 무언가를 할 수 있는 신체적 능력과 가능성에서 차이가 나기 마련이다. 이들은 “나중에”라는 말을 자주 하며 언젠가 자신이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지금 시도하지 않는 일을 나중에 정말 할 수 있을까. 제108회 총회 선거에 나선 분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성경은 말씀한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빌 3:12-14
2024-08-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