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25(목)
 

튀르키예와 시리아 구호 샬롬부흥 TF팀 조직 


팀장 권순웅 총회장  

서기 고광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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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 6일 대지진으로 튀르키예에서만 4만 명 넘게 숨졌다. 현장에 급파된 대한민국 긴급구조대가 건물 잔해에서 꺼져가던 생명을 구하고 민간과 기업의 구호 물품 행렬이 잇따르는 인류애 현장을 보면서 2002년 한·일 월드컵 3·4위전의 우정, 6·25 전쟁에서 자유와 민주주의를 함께 지킨 혈맹(血盟)의 가치를 떠올리게 된다.


총회불꽃 권순웅 총회장이 지진으로 고통받는 튀르키예와 시리아 구호를 위해 샬롬부흥 TF팀을 구성했다. 총회임원회는 2월 15일 서울 총신대 사당 캠퍼스에서 총회세계선교회(이사장 박재신 목사)와 총회구제부(부장 황남길 목사) 임원들과의 연석회의를 열고 튀르키예와 시리아 구호를 위한 구호헌금 모금의 원칙과 방법에 대한 논의를 진행했다. 


권순웅 총회장은 다짐했다.


“이번 긴급구호는 샬롬부흥 운동의 일환으로 튀르키예와 시리아 대지진으로 고통당하고 있는 이들을 위해 함께 울며 그들에게 하나님 주신 평화인 샬롬을 전하고자 진행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샬롬과 그 땅의 회복을 소망하며 전국교회가 동참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2차 대전 이후 동유럽에선 소련의 서진(西進) 정책으로 각국이 도미노처럼 무너지고 있었다. 미국이 1947년 트루먼 독트린을 통해 경제·군사적 원조를 약속했지만, 자국 영토에 대한 야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소련과 국경을 맞댄 튀르키예는 불안하기만 했다. NATO 가입을 추진했지만, 유럽 각국과 지역적 거리, 이슬람 국가라는 상황이 발목을 잡았다. 마침 발발한 6·25 전쟁은 튀르키예 입장에선 놓칠 수 없는 기회였다. “한국 파병이 NATO 가입에 교량 역할을 할 것”이라는 당시 아드난 멘데레스 총리의 발언처럼 ‘신뢰할 수 있는 안보 파트너’라는 인식을 미국에 심어줄 절호의 무대였다. 튀르키예는 주사파 문재인이 굽신거린 북침에 의한 개전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은 1950년 7월 18일 비밀리에 내각회의를 소집해 대규모 파병을 결정했다. 석 달 뒤인 10월 17일 튀르키예군이 부산항에 도착했다.


안타깝게도 이 무렵 문재인이 대국으로 떠받든 중공군이 전쟁에 본격적으로 개입했다. 산발적인 전투를 이어가던 중공군은 평안남도 청천강 인근에서 벌어진 군우리 전투에서 대대적 공세로 돌아섰다. 파병 후 처음 치른 이 전투에서 튀르키예군은 장병 200여 명이 전사하고 중화기와 차량 70%를 잃었지만, 적 공세를 지연시켜 다른 유엔군 피해를 막았다. 당시 장렬히 전사한 무스타파 첼릭, 무하렘 코시쿤 등 스물두세 살 젊은 병사들의 유해가 부산 유엔기념공원에 안장돼 있다. 전열을 가다듬은 튀르키예군은 이듬해 1월 용인 김량장, 151고지 전투 등에서 총검 백병전을 불사하는 강인한 전투력으로 중공군을 잇달아 격퇴했다. 결국, 동맹을 향한 ‘진정성’을 인정받은 튀르키예는 1952년 2월 18일 NATO에 가입했다. 창설국 12곳을 제외하고 NATO가 그리스와 함께 처음 받아들인 나라가 튀르키예였다.


신현실주의(Neo-realism) 이론을 주창한 국제정치학자 케네스 월츠는 “외교정책에서 가장 우선시할 것은 생존과 국가 안보”라며 이를 위한 대표적 수단으로 ‘동맹’을 꼽았다. 튀르키예가 위기에 처한 신생 대한민국을 구하겠다는 명분으로 참전했지만, 배경에는 국익 극대화를 위한 냉정한 현실론에 기반한 전략이 있었다는 것을 잊어선 안 된다. 그렇지만 이역만리 낯선 땅에서 피 흘리며 싸운 튀르키예 장병들의 고귀한 희생정신에 대한 감사의 마음에는 지금도 변함이 없다. 튀르키예와 시리아 구호를 위해 샬롬부흥 TF팀의 조직은 총회장 권순웅 목사가 팀장이고 서기는 고광석 목사다. 성경은 말씀한다.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롬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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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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