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을 거친 그 세월, 옛날 가난하고 외로운 나를 지켜주는 것은 빨간 교회에서의 어린 기도뿐이었다. 놀며 기도했고 기도하며 놀았었다. 그 시절 지나고 문밖에는 늘 짐승들이 지도자 숭내를 내며 어슬렁거렸다. 독사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솔개도 있었다. 그 세월 가고 아아 조용하다. 늙어 이리 평안하고 버리고 갈 것만 남아 참 홀가분하다. 나이 들수록 어릴 적 그랬듯 외로움과 친해져야 한다. 누가 뭐라 해도 결국 믿는 자의 삶은 나 혼자 주님과 함께하는 성화의 과정이기 때문이다. 기독인의 삶은 그래서 숙연하고 아름답다. 그러니 늘 기도하며 잘 살자. 그럼에도 자신의 삶에서 선행돼야 하는 것은 내 바깥의 나(I)와 내 안의 자신(self)이 서로를 이해하려는 의지와 관용도 필요할 것이다. 내가 내 자신과 함께 살아가는 인생은 성령께서 도와주실지라도 마치 교향곡을 연주하는 오케스트라처럼 하모니를 이뤄야 하니까 말이다. 그러면 자신의 삶에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가 하모니를 이루며 자아내는 축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오늘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이자 마지막 주석을 거쳐 대한민국의 제1·2·3대 대통령으로 재임하고 대한민국의 건국 이념을 세운 이승만(李承晚, 1875년 3월 26일~1965년 7월 19일)대통령 그리고 대한민국의 제5·6·7·8·9대를 지내며 국가 성장의 물적 토대를 이룬 박정희(朴正熙, 1917년 11월 14일~1979년 10월 26일) 대통령을 누가 뭐래도 조국 근대화에 그들의 공을 빼놓을 순 없을 것이다. 이승만은 대한제국 시절 '독립신문'과 '협성회 회보' 주필, 독립협회 활동 등 계몽운동을 하였고 왕정 폐지와 공화국 수립을 도모하였다는 반역의 죄목으로 한성감옥에 투옥되었다. 수감 시절 기독교로 개종하고 옥중 계몽 활동을 하고 '독립정신'을 저술하였다. 대한제국 말기 특별사면된 후 밀사로 도미하였다가 큰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러나 기회를 잘 활용하는 그답게 미국에서 학업을 계속하여 5년에 걸쳐 조지워싱턴대학교에서 학사, 하버드 대학교에서 석사,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믿음의 예지력을 지닌 그는 일제강점기 중후반에는 일본의 미국 침략을 경고하였다. 그리고 1941년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일본 제국의 패전을 확신하고 일제가 망하는 즉시 한국이 빼앗긴 주권을 돌려받을 수 있도록 국제사회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정식 승인해야 된다는 외교활동을 하였다. 그는 그 수단으로 미국의 소리 초단파 방송을 통해 고국 동포들의 투쟁을 격려하였다. 그는 임시정부와 미군 OSS 간의 한미군사협력을 주선하는 외교력도 발휘하였다.
1945년 광복 후 김구와 함께 신탁 통치 반대 운동을 주도하는 한편 공산 진영과의 타협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그는 38선 이남에 민족진영을 중심으로 국제사회가 인정하는 합법 정부를 단독 수립한 뒤 38선 이북의 비합법 정부와 공산 진영 일체를 쫓아내고 한반도 통일을 이루고자 하였다.
이어서 그는 1948년 제헌 국회의장을 지냈으며 그해 대한민국 제1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냉전 시대에 발맞추어 반공주의, 자유민주주의, 시장 경제 체제의 대한민국의 토대를 마련하였고 1949년 농지개혁법 제정, 1953년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등 안팎으로 대한민국 발전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1952년 평화선을 선포하여 독도를 사수하고 일본을 견제하였다.
이승만이 하와이로 떠난 뒤 구심점을 잡는 지도자의 부재로 서울을 관할하는 제6관구의 사령관이었던 박정희 소장은 1961년 5월 15일 저녁부터 1961년 5월 18일 정오 무렵까지 서울, 부산, 대전, 광주, 김포, 인천, 포천 등에서 일어난 군사 정변을 일으킨다. 그는 반공을 국시로 하는 국가변란 성격의 5·16 군사 정변을 주도하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되어 "군으로 돌아가겠다"라는 약속을 깨면서 군복을 벗고 직선제로 치루어진 제5대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 윤보선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는 등 1963년 12월부터 1979년 10월 26일까지 치러진 선거에서 당선되어 제5·6·7·8·9대 대통령으로 재직하였다. 국가재건사업을 추진하여 1968년부터 경부고속도로 기공 및 개통, 서울 지하철 기공 및 개통, 농촌의 현대화 운동이었던 새마을 운동, 대규모 중화학 공업 건설 및 육성, 민둥산의 기적인 산림녹화 사업, 식량 자급자족 실현, 자주국방 및 군대 현대화 사업 등 국가 근대화 정책을 추진하여 국가 발전의 기반을 마련하였다.
1969년 10월 10일 박 대통령은 자신이 걸어온 길이 가시밭이었음을 대국민 담화로 호소한다. 한일 국교 정상화를 추진하다 매국노라는 욕을 듣고 남의 나라, 돈 빌려와 경제 건설한다고 차관 망국이라 비난당하는 가운데 가슴속 깊은 곳에서 울분을 토해낸다. 비장하게 말한다.
"만일 우리가 그때 야당의 반대를 못 이겨 이를 중단하거나 포기했더라면 과연 오늘 우리 대한민국이 설 땅은 어디겠습니까. 내가 만일 야당의 반대에 굴복하여 물에 물 탄 듯 소신 없는 일만 해왔더라면 나를 가리켜 그들은 독재자라고는 말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박정희 정권은 1977년 부가가치세제를 도입했다. 경제개발에 필요한 재원(財源)을 확보하고 복잡한 세제(稅制)를 정비하기 위한 ‘세제개혁’이었다. 부가가치세 도입을 두 주 앞두고 당정(黨政)협의회가 열렸다. 난상토론 끝에 박정희 당시 대통령은 김용환 재무부 장관에게 “부가가치세를 지금 꼭 도입해야 하느냐?” “나라를 위해 꼭 필요한 일이냐?”고 물었다. 김 장관이 “그렇다”라고 대답하자 박 대통령은 예정대로 부가가치세제를 도입하라고 지시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정치는 내가 걱정할 테니 장관은 경제를 잘 챙기도록 하시오.”
'뮌헨에서 시작된 대한민국의 기적’이라는 책에 김재관(1933~2017)이란 사람의 이야기에 이승만과 박정희의 업적이 담겨있다. 김재관은 서울공대 기계공학과를 졸업하고 1956년 산업은행과 서독 유학생 시험에 모두 합격했다. 그런데 산업은행에서 유학 기간에도 월급을 주겠다고 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만든 인재 양성 제도였다. 이 대통령은 과학을 몰랐지만 미국에서 MIT를 둘러보며 여기에 나라가 죽고 사는 게 달렸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산은은 김재관에게 출국 때까지 국내 산업 현장을 둘러보라고 알선까지 해줬다. 전쟁 직후 형편없는 시절이었지만 한국은 싹수가 있는 나라였다.
김재관은 KIST에서 ‘한국 기계공업 육성방안’을 보고하고 박 대통령은 이를 토대로 1973년 ‘중화학 공업화 선언’을 한다. 한국이 농업 국가에서 공업 국가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그 골간이 선철, 특수강, 중기계, 조선이었다. 선철과 특수강은 산업의 쌀인 동시에 대포 등 무기를 만드는 재료였다. 김재관은 뮌헨공대에서 독일군 함포와 대포의 금속 조성을 공부해놓고 있었다. 중기계는 탱크를 만드는 것과 같았다. 조선은 유조선과 동시에 군함도 만들었다. 오늘날 K방산의 토대가 만들어졌다. 김재관은 부산 피란 시절 미군 부대에서 일하면서 미군 무기들이 모두 특수한 철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뮌헨공대에서 그의 전공은 이때 이미 금속학으로 정해졌는지도 모른다. 박사학위를 받고 세계적 제철소인 덴마크 종합기획실에 들어갔다. 2년 뒤 박정희 대통령이 차관을 얻으려 서독을 방문했다. 서독에 돈 벌러 간 광부, 간호사들 앞에서 눈물의 연설을 한 것으로 유명한 그 방문이다. 박 대통령은 유학생들을 초청해 조찬 모임을 했다. 박 대통령이 “하고 싶은 얘기를 해달라”고 하자 한 명이 걸어 나왔다. 김재관이었다. 박정희와 김재관의 첫 만남이자 한국 산업사에 기록될 순간이었다. 그는 대통령에게 ‘한국 철강 공업 육성방안’이라는 두툼한 논문을 전달했다. 박정희는 김재관을 눈여겨보았다.
박 대통령은 KIST(한국과학기술연구원) 첫 번째 해외 유치 과학자 18명 중 한 명으로 그를 불러 제1 연구부장을 맡겼다. 박정희는 제철소 건설을 일본에서 받아낸 대일청구권자금으로 해결하기로 했다. 놀라운 것은 30대 중반인 그가 그때 이미 10년, 20년 뒤 우리 산업에 대한 그림을 그리고 자동차와 조선에 쓰이는 특수강까지 만드는 제철소를 준비했다는 사실이다. 그 골간이 선철, 특수강, 중기계, 조선이었다. 선철과 특수강은 산업의 쌀인 동시에 대포 등 무기를 만드는 재료였다.
박 대통령은 김재관을 상공부 중공업 차관보로 임명했다. 김 차관보는 일부의 강한 반대를 무릅쓰고 박 대통령에게 독대를 청해 ‘한국형 승용차 양산화’ 계획을 채택시킨다. 조선과 자동차 모두 당시 기업인들은 손을 저었으나 유일하게 정주영 회장이 “하겠다”라고 손을 들었다. 현대자동차, 현대중공업 신화의 시작이다.
박 대통령은 김재관을 ADD(국방과학연구소) 부소장에 임명한다. 임명된 날 당시 심문택 소장, 김재관, KIST 조선 담당 김훈철 세 사람은 남해 한산도 충무공 사당을 찾아가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고 임전무퇴로 국방기술을 완성한다”라고 맹세했다고 한다. 이 ADD에서 미사일까지 나왔다. 당시 박 대통령이 KIST 연구원들에게 밥을 사면 그 자리에서 코피를 쏟는 연구원들이 한둘이 아니었다고 한다. 오늘의 이 나라는 그냥 된 것이 아니다.
이런 나라를 무너뜨리려는 세력이 나타났다. 그것은 노무현과 법무법인 부산에서 변호사로 활동했고 노무현 참여정부의 청와대 민정수석과 대통령비서실장을 거쳐 제19대 국회의원과 더불어민주당 대표를 역임, 친공 친북을 추구하며 대한민국 민주주의와 경제를 무너뜨리려는 문재인(文在寅, 1953년 1월 24일~) 무리였다. 그는 2017년 3월 10일 박근혜가 대통령직에서 파면되어 조기 대선이 결정되자 대권에 재도전하였고 이재명, 최성, 안희정과 겨루어 전체 표수의 과반을 얻어 결선투표 없이 2017년 4월 3일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최종 승리하여 더불어민주당 제19대 대선 후보가 되었다. 이어 2017년 5월 9일 치러진 대선에서 41.1%를 득표하여 24%를 득표한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를 누르고 당선되었다. 2017년 5월 10일 대한민국의 제19대 대통령으로 행한 취임선서식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를 만들겠다"라고 말했다. 그 말대로 그는 반공을 국시로 심은 대한민국을 친공 친북으로 부정하고 자유경제를 말살하려는 듯 과격 투쟁을 일삼는 좌경 노조를 지원하거나 방임하고 대표적인 기업인들을 압박하고 탈원전으로 국가 기간 산업을 고사시키려고 했다. 문재인 정부 마지막 해인 2021년에는 우리나라 국가부채가 2200조 원에 육박해 역사상 처음 ‘나라 빚 2000조 원 시대’가 열렸다. 문 정부 5년은 ‘국가경쟁력’ ‘생산성’ ‘기업환경 개선’이라는 용어 자체가 아예 사라진 한국 경제의 암흑기였다.
유다 민족을 살린 에스더처럼 '죽으면 죽으리라'라는 믿음으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를 만들겠다"라는 친북 주사파 문재인을 무너뜨린 투사가 나타났다. 그는 이승만 대통령과 박정희 대통령을 내세우는 '광장의 소리' 전광훈 목사였다. 그런 문재인을 간첩으로 몰아 궁지에 몰아넣은 사생결단 전광훈 목사 때문에 거짓의 아비 마귀를 닮은 이재명은 20대 대통령 선거에서 간발의 차로 떨어지고 문재인도 2022년 5월 9일에 퇴임했다. 다음날 전광훈 목사 덕에 문재인 후임으로 윤석열이 이승만이 세우고 박정희가 발전시킨 대한민국을 세계 일류로 만들고자 대한민국 제20대 대통령으로 취임했다. 성경은 말씀한다.
당신은 가서 수산에 있는 유다인을 다 모으고 나를 위하여 금식하되 밤낮 삼 일을 먹지도 말고 마시지도 마소서 나도 나의 시녀로 더불어 이렇게 금식한 후에 규례를 어기고 왕에게 나아가리니 죽으면 죽으리이다 에 4:16
2023-02-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