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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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둠스데이(최후의 날)’라는 별명을 가진 핵 어뢰를 장착한 러시아 최첨단 스텔스 핵잠수함 ‘벨고로드(Belgorod)’가 러시아 백해 기지에서 돌연 자취를 감췄다고 2022년 10월 3일(현지 시간) 미국 폭스뉴스, 이스라엘 내셔널뉴스 등이 보도했다. 전문가들은 벨고로드의 핵 어뢰가 항공모함뿐만 아니라 해안 도시 전체를 날려버릴 위력을 가졌다고 분석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수세에 몰린 러시아가 미국과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ㆍNATO)를 향해 핵 무력시위에 나설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세계가 긴장하고 있다.


문재인이 굽신거리던 북한이 2022년 10월 4일 발사한 중거리 탄도미사일(IRBM)이 일본 상공을 지나 태평양에 떨어졌다. 북한이 일본 상공을 통과하는 탄도미사일을 쏜 것은 2017년 9월 이후 5년 만에 처음이다. 일본은 홋카이도와 아오모리 지역에 한때 피난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김승겸 합참의장은 북한의 탄도미사일 발사 직후 한미 간 공조 회의를 통해 상황을 긴밀히 공유하고 “북한의 어떠한 위협과 도발에도 연합방위태세를 더욱 굳건히 할 것”을 확인했다고 합참이 전했다.


북한이 올해 들어 30차례 넘게 미사일 도발을 감행한 가운데 4일 문제의 당사자는 문제를 삼지 않고 문재인은 딴 나라에 사는 자처럼 “남북한 모두 더이상 상황을 악화시키는 것을 멈추고 대화 모색에 나설 것을 촉구한다”라고 했다고 한다. 참으로 이재명처럼 낯 두꺼운 자다.


유럽연합(EU) 대외관계청 대변인은 10월 3일(현지시각) 성명에서 “북한은 미사일 발사를 멈추고 핵실험을 삼가며 미국과 한국, 그리고 다른 국제사회 구성원들이 표명한 대화 제의에 건설적으로 응해야 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뚱보 김정은은 이판사판이니 삶은 소 대가리 같은 자들의 말을 들을 리 없지만 다행스러운 것은 그럴만한 위인이 못 된다는 것이다.


그처럼 돌이킬 수 없는 목사 칠십 정년제를 반대하는 이순우 같은 교단 총대들이 후회하지 않는 비결은 단 하나, 지금 바로 그들이 북한처럼 신앙적이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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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기 중세 영국의 프란치스코회 탁발수도사, 신학자인 오캄의 윌리엄(William of Occam 1287년경 - 1347년 4월 10일)은 체계적 사색가라기보다는 정치적 성향이 강한 수도사였다. 중세 시대에 성씨는 귀족들이나 가질 시기라 이름은 윌리엄이고 오컴은 성이 아니라 고향 마을의 지명이다. 윌리엄이 죽은 후로도 윌리엄의 방법론은 엄청난 파급력을 가져온다. 마르틴 루터만 해도 윌리엄의 열렬한 추종자라 그를 나의 스승(Magister Meum)이라 부를 정도. 새로운 길은 기존 학문 질서에 대항하여 새로운 학파가 개설되었고 당연히 종교개혁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종교개혁자들은 신학적 방법으로 모두 윌리엄의 새로운 길, 노선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다만 마르틴 루터는 신학적으로는 윌리엄을 비롯한 새로운 길 학자들과 1510년 중반에 완전히 결별했다. 루터의 신학 이신칭의는 기존의 아퀴나스 학문과 오컴주의를 모두 비판하며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으로 돌아간 것이다.

 

"실체를 필요 이상으로 복잡화하여서는 아니 된다"라는 명제는 그의 이름을 따서 '오컴의 면도날'이라 일컬어진다. 오컴의 면도날(Occam's Razor 또는 Ockham's Razor)은 흔히 '경제성의 원리' (Principle of economy), 검약의 원리(lex parsimoniae), 또는 단순성의 원리라고도 한다. 유명한 두 명제는 다음과 같다.


"많은 것들을 필요 없이 가정해서는 안 된다."

"더 적은 수의 논리로 설명이 가능한 경우 많은 수의 논리를 세우지 말라."


간단하게 오컴의 면도날을 설명하자면 어떤 현상을 설명할 때 불필요한 가정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좀 더 쉬운 말로 번역하자면 '같은 현상을 설명하는 두 개의 주장이 있다면 간단한 쪽을 선택하라(given two equally accurate theories, choose the one that is less complex)'라는 뜻이다. 여기서 면도날은 필요하지 않은 가설을 잘라내 버린다는 비유로, 필연성 없는 개념을 배제하려 한 "사고 절약의 원리"(Principle of Parsimony)라고도 불리는 이 명제는 현대에도 과학 이론을 구성하는 기본적 지침으로 지지받고 있다.


예컨대 새까맣게 그을린 나무가 있다고 가정하자. 이는 나무가 벼락에 맞았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누군가가 어떤 장치를 이용해서 나무가 완전히 잿더미로 변하지 않도록 적절히 그을린 다음 자신이 그을렸다는 흔적을 완전히 없앤 것일 수도 있다. 이 상황을 판단할 다른 증거가 없는 경우 오컴의 면도날을 적용해 본다면 나무가 그을린 것은 벼락에 맞았기 때문이라고 추론하는 것이 옳다. 왜냐하면 나무가 벼락에 맞아서 그을린 것이라고 설명하는 것이 더 적은 수의 가정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중세의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의 복잡하고 광범위한 논쟁 속에서 오컴은 1324년의 어느 날 무의미한 진술들을 토론에서 배제 시켜야겠다고 결심한다. 그는 지나친 논리 비약이나 불필요한 전제를 진술에서 잘라내는 면도날을 토론에 도입하자고 제안했다. 오컴은 "쓸데없는 다수를 가정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이를 좀 더 알아듣기 쉽게 바꾸면 "무언가를 다양한 방법으로 설명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중에서 가장 적은 수의 가정을 사용하여 설명해야 한다"고 표현할 수 있다. 더 짧게 말하면 설명은 간단할수록 좋다. 오컴의 면도날은 다음과 같이 일종의 계율처럼 말해지기도 한다. "가정은 가능한 적어야 하며 피할 수만 있다면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한다."


적은 가정(假定)으로도 충분하다면 불필요하게 많은 가정은 사유의 면도날로 다 잘라내 버려야 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단순성 내지 간결함의 원리는 오늘날 미니멀리즘의 사조나 이른바 단색화의 미학으로도 우리 주위에 알게 모르게 밀착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심각하다고 할 '정치의 사법화' 현상이 최근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며 검찰과 법원의 독립과 중립성을 근저에서 뒤흔들고 있다. 정치적 분란을 사법부로 가져가는 문제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양당 구도가 고착화하고 법조인들의 정치권 진입이 늘어나면서 온갖 고소·고발과 가처분의 싸움터로 격화하고 있는 것이다. 정치적으로 정의를 수단화하고 거래하여 법적 정의를 무력화시키는 일들이 서슴없이 도모되고 있는 징후이다.


얼굴의 피부를 상하게 하지 않고 수염을 깔끔히 깎아내려면 면도날이 예리하면 예리할수록 좋을 것이다. 그렇지만 언제든 날카로운 칼날에 자상을 입을 위험성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불의의 치명상을 초래할 수도 있다. 지난 정권 말 쫓기듯이 통과시킨 소위 "검수완박" 입법의 경우와 같이 법이면 다 된다는 도그마로 칼을 휘두르거나 타협과 조정의 정도를 저버리고 사법을 마치 용병처럼 부리려고 한다면 스스로의 존재 이유도 부정될 따름이다.


법은 어디까지나 최후의 수단일지언정 최선의 수단일 수는 없다. 대철학자 칸트가 면도날의 위험성을 경고하며 남긴 말을 오늘의 우리도 음미할 필요가 있다. "실체의 다양성은 섣불리 깎아내려서는 아니 된다."


윌리엄은 신앙 주의자였다. 그는 “오로지 신앙을 통해서만 신학적 진리에 접근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논리나 합리성이 밝혀낼 수 있는 어떠한 법칙도 필요 없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 안에 구원의 길을 마련하셨다. 그러니 하느님의 그 길은 이성에는 열려 있지 않다”라고 말했다. 윌리엄은 학문은 발견의 문제이지만 신은 유일한 존재론적 필연성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윌리엄 본인이 형식화한 오리지널 오컴의 면도날은 다음과 같다. “스스로 증거되거나 경험으로 알려졌거나 신성한 경전의 권위로써 증명되지 않은 한 그 무엇도 이유가 주어지지 않으면 사실로 상정될 수 없다.” 윌리엄에게 있어 유일하게 진실로 필연적인 존재자는 기독교의 신, 하나님 한 분뿐이었고 그 밖에 다른 모든 것은 우발적인 것이었다. 윌리엄이 충족이유의 원리를 수용하지 않은 것, 본질과 실존의 구분을 거부한 것, 토마스주의를 반대한 것이 모두 그런 이유에서였다. 윌리엄의 존재론적 검약성은 인간의 이성이 영혼의 불멸,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다는 회의주의로 이어진다. 그러나 윌리엄의 결론은 그런 것들을 가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무신론이 아니라 그런 것들은 오로지 계시에 의해서만 가르침 받을 수 있는 신앙의 영역이라서 이성이 범접할 수 없다는 신앙 주의였다.


윌리엄이 죽은 후로도 윌리엄의 방법론은 엄청난 파급력을 가져온다. 마르틴 루터만 해도 윌리엄의 열렬한 추종자라 그를 나의 스승(Magister Meum)이라 부를 정도. 새로운 길은 기존 학문 질서에 대항하여 새로운 학파를 개설되었고 당연히 종교개혁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종교개혁자들은 신학적 방법으로 모두 윌리엄의 새로운 길 노선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다만 마르틴 루터는 신학적으로는 윌리엄을 비롯한 새로운 길 학자들과 1510년 중반에 완전히 결별했다. 루터의 신학 이신칭의는 오정호 목사가 좋아할 마태복음 7:21-23 KRV 것 같은 기존의 아퀴나스 학문과 오컴주의를 모두 비판하며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으로 돌아간 것이다.


성경은 말씀한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 7:2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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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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