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2-11-2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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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다는 것


이웃의 부자 영감님이 있다. 성실한 은행원으로 아내는 약사로 일개미같이 열심히 일해서 돈을 모았다고 했다. 그 부부는 개미같이 끝없이 걷는다. 아침을 먹고 이웃의 고등학교 운동장을 걷는다. 점심을 먹고도 걷는다. 그리고 밤에도 걷는 때가 많다. 매일 일정한 목표를 달성한다. 오늘은 만 보, 다음에는 만오천 보, 이만 보 그런 식이다. 그 부부는 걸어서 지구를 한 바퀴도 넘게 돌았을 것이다. 그 부부에게 걷는다는 것은 인생의 목적이고 구원일지도 모른다. 그 부부는 내게 누워있으면 죽음이고 걸으면 산다고 알려 주었다. 나는 그 걸음에 색깔과 삶의 질감을 넣고 싶었다. 

 

한번은 여의도에서 볼일을 보고 잔잔한 한강길로 걸어서 돌아오는 중이었다. 강이 내는 잔잔한 물소리를 듣고 저녁 무렵 튀어 올랐다 철푸덕 떨어지는 물고기가 만드는 동그라미를 보면서 나는 강에 취했다. 뭔가에 홀린 듯 나는 강을 따라 옆을 걸어내려갔었다. 여주 들판에는 노랗고 빨간 여린 가지의 들꽃들이 바람에 손짓하는 것 같이 나를 맞아 주었다. 원주 옆을 흐르는 푸른 강물은 내 가슴으로 시원하게 흘러들어오는 것 같았다. 그렇게 충주까지 갔다가 돌아온 적이 있다. 

 

소년 시절부터 혼자 걷는 걸 좋아했다. 함박눈이 골목길에 쌓이는 날 서민 한옥이 어깨를 맞대고 옹기종기 모여있는 동네의 미로 같은 길을 걸었었다. 낮은 담 옆으로 작은 기와집의 장독대 위로 소복소복 눈이 쌓이고 있었다. 내리던 비가 그친 저녁 고즈넉한 골목길을 걷는 것도 좋았다. 이따금씩 딸랑거리는 두부 장사의 투명한 종소리가 지금도 영혼 속에서 맑게 울려 퍼지고 있다. 나는 서울의 뒷 골목길 순례도 많이 한 셈이다. 궁상이 덕지덕지 묻어있는 뒷골목이 더 마음에 편하게 와 닿았다. 뚝 방 옆에 판잣집들이 닥지닥지 붙어 있는 청계천의 길들을 걸었다. 그 길에는 밤이면 카바이트 불을 켜놓은 리어카 위에 놓인 책을 파는 노점상들이 많았다. 히틀러가 쓴 ‘나의 투쟁’이나 사상서적이 왜 거기서 팔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밤이면 성북동에서 안암동 쪽으로 더러운 물이 흐르는 안암천 변을 걷곤 했다. 냄새나는 시궁창 물도 밤이 되면 달과 별이 비쳐 아늑한 느낌을 주곤 했다. 대학 시절은 절에 묵으면서 산길을 많이 걸었다. 부슬부슬 눈이 내리는 겨울나무 사이를 공허한 마음으로 지나기도 했다. 빈 가지만을 두른 겨울나무들은 내게 뭔가 얘기를 하려는 것 같았다. 

 

노인이 되어 동해 바닷가로 옮겨온 나는 요즈음 느릿한 걸음으로 파도가 밀려오는 백사장을 걷는다. 몇 걸음을 걷다가 아득한 수평선을 바라보고 다시 걷다가 물결이 스며드는 고운 모래뻘을 본다. 바다는 수시로 색깔과 표정을 바꾸었다. 햇빛에 반짝거리는 대낮의 바다는 내게 에너지 넘치던 젊은 날을 떠올리게 한다. 황혼이 아련하게 구름을 물들이는 저녁 바다는 파스텔톤이다. 물과 하늘의 경계가 서로 스미고 섞여들어 어둠 속으로 서서히 지워져 간다. 은자의 표정 같은 저녁 바다는 내게 넌지시 뭔가를 알려주려는 것 같다. 

 

영롱한 별들을 거느리고 바다 위 검은 하늘에 하얗게 걸려 있는 보름달을 볼 때가 있다. 달은 번들거리는 검은 바다 위에 길다란 빛의 띠를 만든다. 밤바다에서 철썩거리는 파도와 모래언덕 사이의 적막 속에 있는 나는 바다가 전해주는 또 다른 소리를 듣는다. 인생은 별 게 아니라고. 잠시 일었다가 스러지는 물거품이라고. 그러니 물고기 뱃속에 삼켜진 요나처럼 목적에 삼켜지는 삶은 살지 말라고 말이다. 

 

이따금 은발이 휘날리는 강변의 갈대밭을 지나는 나그네를 화면에서 본다. 그 나그네는 바닷가를 한없이 걷는다. 화면 속의 당당한 있음이 내게 다가와 마음이 저릿해질 때가 있다. 나도 그렇게 구름에 달 가듯이 살고 싶다. 

 

오늘은 한 교수의 산책에 대한 글을 읽고 걷는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 봤다. 그 교수는 산책은 존재의 휴가이며 구원이라고 했다. 쉬는 것도 쉽지 않은 인생이라고 하면서 악착같이 쉬고 최선을 다해 설렁설렁 살아야 한다고 말한다. 그의 말이 맞는지 아닌지 나는 잘 모르겠다. 그는 그의 음악을 들으면서 그 박자에 따라 걷고 나는 나의 음악을 들으면서 내 박자에 맞추어 걸으면 되는 건 아닐까. 

 

2022-08-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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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상익의 미셀러니_ 걷는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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