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2-11-2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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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8월 7일 오후 예배 시간 전 전주효성교회 당회장실에서 대위법 기술의 정연한 음악가 바흐(Johann Sebastian Bach, 1685년 3월 21일 ~ 1750년 7월 28일)같은 논리 정연한 설교가 윤희원 목사와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는 조용한 어조로 종교개혁을 얘기했다.


"종교개혁이 지탱하고 성공했다는 것은 16세기 당대 인문학적 의식이 아주 높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개혁을 부르짖지만 합동 측 교단은 어렵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그럴 수 있는 힘이 없기 때문입니다..."


논리 정연한 설교가 윤희원 목사의 이어지는 총회개혁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종교개혁에 대해 되돌아봐야 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작금 맨돈 소강석 류가 판치는 우리 교단에 이제는 아득하게 여겨지는 주제이기 때문이다.


중세 로마 가톨릭교회의 강제적인 면죄부 판매는 당시 비텐베르크 대학교의 교수 당시 34세의 혈기왕성한 루터(Martin Luther 1483년 11월 10일 ~ 1546년 2월 18일)의 신앙을 근본적으로 흔들었다. 왜냐하면 "돈으로 구원을 살 수 있다"라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에 그는 순응할 수 없었고 나아가 침묵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성경을 깊이 연구해온 루터는 자신이 가르치고 돌보는 많은 사람을 위한 목회적 양심과 책임을 느끼고 설교를 통해 면죄부 판매를 목숨을 걸고 비판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상황이 전혀 개선되지 않자 드디어 1517년 10월 31일 비텐베르크 대학교 교회 문에 면죄부를 반박하는 ‘95개 논제’를 게시했다고 한다. 이것이 종교개혁의 시발점이다. 


면죄부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일곱 성사들 가운데 하나인 고해성사와 연관된 것이다. 사제는 통회하는 고해자의 죄 고백을 듣고 죄 사면을 한 뒤 죄책에 대한 보속으로 순교, 시편 낭송, 특별 기도 등의 행위를 하게 하였는데 면죄부는 이러한 보속을 면해주는 증서였다. 그런데 면죄부가 로마 가톨릭교회의 주요 수입원이 되면서 작금의 무료가 아닌 유료 안수기도와 축복 기도처럼 중세 교회는 면죄부 영업에 열을 올렸다. 


실제로 각종 요직을 거쳐 면죄부 판매위원장이 된 요한 테첼(Johann Tetzel 1465년 - 1519년 8월 11일)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금화가 헌금 궤에 떨어지며 소리를 내는 순간 영혼은 연옥을 벗어나 천국을 향해 올라갈 것이다.” 


면죄부 판매위원장 테첼은 선제후 프리드리히 3세가 작센 영내에서의 면죄부 판매를 거부하자 경계 근처에다 면죄부 판을 벌여 놓고 성서도 적절히 인용하고 연옥에서 당신들의 부모가 고통을 받고 있다는 감정적 호소로 순진한 신자들을 현혹하기까지 했다. 이러한 타락에는 요즈음 맨돈 소강석과 그의 장모에게 거금을 내고 축복 기도를 받듯 당시 교인들도 원인을 제공하였다. 실제로 중세 교회의 신자들은 하나님께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는 진지한 신앙생활보다는 면죄부를 구입함으로써 죄의식을 면하려는 손쉬운 신앙생활을 좋아하고 구원을 돈으로 살 수 있다는 교회의 주장이 과연 성서의 가르침에 부합하는가를 생각하지 않았다.


의인은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말씀에 투철한 루터는 면죄부 판매 반박문에서 “우리의 주님이시며 선생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고 하실 때 그는 신자들의 전 생애가 참회 되어야 할 것을 요구하셨다”라고 논제(제1조)를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복음의 재발견을 면죄부 문제에 적용하여 “교회의 참 보고가 하나님의 영광과 은혜의 거룩한 복음”(제62조)이라고 역설하고 면죄부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나타난 자비에 비할 바가 아님을 천명하였다(제68조). 마지막 논제(제95조)에서 루터는 그리스도인은 면죄부와 같은 행위의 의가 아니라 ‘오히려 많은 고난과 믿음의 의를 통해 하늘나라에 들어간다’라고 결론 내린다.


만일 루터가 속죄권 판매를 정당시한 테첼과의 대결이 없었다면 종교개혁은 늦어졌을런지 모를 일이다. 교회가 신령한 축복을 돈 받고 파는 장사를 하면서도 그것을 합리화시키려 할 때 루터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그 외에도 성직매매가 성행했다. 그리고 신부의 문란한 생활과 사회의 지탄을 받는 생활을 했다. 이러한 도덕적 타락은 일부 주교들이 교회개혁을 교황 바울 3세에게 정식으로 건의하기까지 했다.


종교개혁은 어떤 사상이나 제도든지 원래의 순수하였던 이념을 상실하고 그 이념을 유지하기 위한 제도에 매이게 되면 내부적으로 썩는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다. 그래서 유대교의 전통과 제도에서 썩어버린 복음을 예수님께서 새롭게 개혁하셨듯이 언제나 스스로를 개혁함으로서 제도 속에 살면서도 제도에 메이지 않고 이념을 구현할 수 있는 종교가 참다운 종교임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었다. 


그리고 14세기부터 16세기 사이 일어난 르네상스(Renaissance) 또는 문예 부흥(文藝復興)은 유럽의 지적인 생활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오게 했다. 여기서 문예부흥이란 구체적으로 유럽에서 일어난 문화, 예술 전반에 걸친 고대 그리스와 로마 문명의 재인식과 재수용을 의미한다. 옛 그리스와 로마의 문학, 사상, 예술을 본받아 인간 중심(人間中心)의 정신을 되살리려 하였다. 이 점에서 르네상스는 일종의 시대적 정신운동이라고 말할 수 있다. 고대 문학에로의 복귀, 개인주의적 각성, 지리상의 발견에 따라 동서문화의 교류, 봉건제도의 붕괴에 뒤따른 상업인구의 격증, 스콜라 철학의 퇴조와 함께 득세한 오컴주의의 득세 등 이 모든 것들이 중세의 사상적 기초를 흔들었다. 중세의 긴 지적인 통제는 성서적 인문주의의 세찬 도전을 받게 되었다.


이러한 경향을 대성하여 유명론을 실념론과 대비되는 하나의 큰 학파로 형성시킨 사람은 14세기 잉글랜드의 프란치스코회 탁발수도사, 신학자 오컴의 윌리엄(William of Ockham, 1287년경 - 1347년 4월 10일)이었다. 그는 영국인 특유의 경험주의를 바탕으로 그 무렵 옥스퍼드에 일어난 과학적 연구를 신학·철학에 응용하여 새로운 경험과학의 길을 열었다. 유명론은 스콜라학파(기독교의 신학에 바탕을 두기 때문에 일반 철학이 추구하는 진리 탐구와 인식의 문제를 신앙과 결부시켜 생각하였으며 인간이 지닌 이성 역시 신의 계시 혹은 전능 아래에서 이해하는 사조)의 벽을 뚫고 근대과학·근대사상의 길을 준비했다. 루터에게도 영향을 끼친 오컴주의는 개체는 언제나 지각(知覺)의 대상이라 하였고, 이성에 의존하는 것이 권위에 의존하는 것보다 옳다고 하였다.


종교개혁에 이어 정연한 설교가 윤희원 목사는 교단 개혁을 위한 개혁주의 설교론을 피력했다.


"우리가 정말 공부를 많이 해야 하고 무엇보다 설교가 바뀌어야 합니다. 어떻게 보면 80년대는 대부분 제목 설교였습니다. 삼지창 설교라고 하는 3대지 설교였습니다. 그러다가 강해 설교가 유행했습니다. 80년대부터 지금까지 강해 설교가 대세인데 사실상 그렇게 할 만큼의 실력을 갖고 있는 사람도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강해 설교를 한다고 헬라어 히브리어 동사형이니 수동태, 능동태 따진다고(대학 시절 헬라어 원서 강독 시간이 그랬고 신학원 시절 히브리어 원서 강독 시간도 그 모양이라 원어는 한 줄도 맛을 보지 못 했다) 누가 그걸 듣냐고요. 


요즈음 우리 한국 교회가 침체 된 이유가 나는 설교에 있다고 봅니다. 강해 설교 때문에 교회가 침체 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에세이를 읽어보면 짧은 글인데 깨우침도 있고 감동도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후배들에게 강해 설교보다 에세이(essay 기본적으로 서론-본론-결론의 구조를 따른다) 설교를 권장합니다. 그리고 에세이 설교를 하려면 목사에게 상당한 고민을 요구하는 부문이 있습니다. 강해 설교한다고 해석만 하고 내려오는 것이 아니라 깨우침이 있어야 합니다. 깨우침도 없고 감동도 없으니 교인들이 맥이 풀리고 신앙의 성장이 없는 것입니다. 


78년도에 총신에 들어갔습니다. 당시 최훈 목사님이 총회장으로 총신 개강 부흥회를 했어요. 그때 설교가 모세 신발 사건에 관한 것이었어요(출 3:5). ‘신발을 벗으라’에서 신발은 경험의 신발이었고 이성의 신발이었고 감정의 신발이었다는 세 대지였습니다. 그래서 나도 이제 신학교에 들어왔으니까 이거 다 벗어버리고 하나님 앞에서 단독자의 개념으로 내가 살아야지. 그렇게 큰 은혜를 받고 4층 채플실을 내려올 때였습니다. 그 생각이 안 들었어야 했는데 모세가 그 신발을 다시 신었을 것 아닌가. (웃음) 그런 식이라면 다시 신을 신었다는 게 아닌가. 경험의 신발 이성의 신발 감정의 신발을 다시 신었을 것 아닌가. 이건 아닌데 하면서 고민을 했습니다. 주석을 뒤지고 책들을 찾다가 폰 라트(Gerhard von Rad 1901년 10월 21일 ~ 1971년 10월 31일 독일의 성직자이자 구약학에서 흥미로운 논문과 연구를 남긴 유명한 구약학자) 책을 읽게 됐습니다. 폰 라트의 '육경 신학' 등의 저서를 보다가 '전승사 신학'에서 딱 한 줄 나온 것을 발견했습니다. 왜 모세가 신발을 벗었는가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시 애굽의 관습은 종은 주인 앞에서 신발을 신을 수 없다'라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요구하시는 것이 '너는 내 종이다'라는 뜻으로 신발을 벗으라는 것이었습니다..."


루터에 이어 중세 종교개혁가들의 사상을 집대성하고 실천해 종교개혁을 완성 시켜 우리가 존경하고 따르는 칼빈(Jean Calvin 1509년 7월 10일 ~ 1564년 5월 27일)의 삶은 어떤 것이었을까.


제네바에서 칼빈은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 목회에 임했었다. 제네바에서 처음으로 발을 들여놓았던 1536년으로부터 3년간 의욕에 찬 목회를 감행하다가 슈트라스부르크로 ㅤㅉㅗㅈ겨나는 어려움을 겪었다. 그러다가 1541년 다시금 제네바로 부임해서 처음 14년 동안은 반대자들로부터 어려움을 겪으면서 목회를 했다.그러다가 1555년부터 1564년 사망 시까지 최후적으로 9년 동안 소신 있는 목회를 할 수 있었다. 칼빈은 제네바에서 목회하면서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월급의 증액을 거부하였고 그나마도 구제와 헌금으로 거의 다 바쳐 버렸다.


그는 매일같이 저술 활동, 설교, 강의, 교회법원의 회의참석, 목사회의 참석, 손님 접대, 각종 자문 등 경건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감당하기 벅찬 일을 했다. 그는 종합병원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병을 지니고 있었다. 그가 걸을 수 없게 되자 설교단 의자로 옮겨줄 것을 부탁하였다. 1564년 2월 6일 마지막 설교를 하였고 4월 2일에는 교회로 옮겨가 베자로부터 마지막 성찬을 받았다. 그는 1564년 4월 25일 자신의 마지막 소원과 증언이 담긴 글을 남겼다. 


하나님께 대한 송구스러움과 감사로 가득 찬 이 글에서 그는 자신의 부족함, 하나님의 값없는 은총의 선택, 그리스도의 넘치는 공로 등을 부드럽게 회상하면서 이제는 세상의 모든 논쟁과 다툼을 그치고 저 멀리 하늘나라를 바라본다고 하였다. 그는 4월 26일 소위원회로부터 친구들에게 이르기까지 일일이 다 작별인사를 하였다. 5월 19일에는 목회자들을 다 초청해서 저녁을 나누었다. 칼빈을 제네바로 이끈 파렐(Guillaume Farel 1489~1565)은 80세가 넘은 나이로서 칼빈의 임종을 보러 왔다. 칼빈은 마지막 며칠 동안 기도와 시편의 위로의 시를 암송하는 일에 전념하다가 5월 27일 동녁에서 뜨는 해를 받으면서 54년의 삶과 사역을 마쳤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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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네바에서 평생을 보낸 종교개혁가 칼빈처럼 윤희원 목사는 1990년부터 전주에서 사역하고 있다. 어린 시절 어려웠던 생활고와 부친의 목회에 대한 반발심이 잠재해 있어 목회에 대한 비전이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는 예수님의 말씀에 사로잡혀 점차적으로 목회에 대한 비전을 품게 되었다. 그 동기에 대해 그는 술회했다.

 

“부친이신 윤남중 목사님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사실 신학을 전공하기 전까지 많은 갈등이 있었습니다. 총신대학교 1학년 초기에도 갈등이 있었지만 부친의 권고로 오늘날까지 이어가고 있습니다. 당시 부친께서는 사생결단의 각오로 신학을 전공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제네바의 칼빈처럼 전주에서만 사역자로 32년을 지낸 논리 정연한 설교가 윤희원 목사는 '총회를 위해 총신을 사생결단의 각오로 지켜야겠다'라는 뜻의 다짐을 했다.


하나님 은혜로 맨돈 소강석의 봉투가 전혀 먹히지 않는 김기철 목사(정읍성광교회)가 제18대 총신대 재단이사장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고 그 뒤에는 청년의 사도 송태근 목사가 버티고 있다. 게다가 총신 개혁의 불꽃 권순웅 목사가 제107회 총회장이 된다. 이에 더해 진정한 총신대와 총신대학원을 거쳐 칼빈의 개혁신학으로 무장된 총회의 심장 윤희원 목사가 총회와 총신을 지키기 위해 힘을 다할 것이다. 성경은 말씀한다.


이제 가라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히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모세가 하나님께 아뢰되 내가 누구이기에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반드시 너와 함께 있으리라 네가 그 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낸 후에 너희가 이 산에서 하나님을 섬기리니 이것이 내가 너를 보낸 증거니라 출 3:9-12


2022-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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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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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남길

총회개혁은 안된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위를 보나 아래를 보나 바르게 살겠다는 사람이 없는
총회이기 때문입니다.
좀 낫게 사는 사람은 소극적으로 자기 교회만합니다
연합의 힘을 모름니다
사회와 교회에 만연된 풍조는 남을 존중히 여김이 없는 것입니다.미국과 독일에서 온 분들과 최근 만났는데 그 나라는 존중히 여김이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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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열왕

하나님의 편에 서는 총회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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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희원의 총회개혁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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