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2-10-0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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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9월 7일 대전중앙교회에서 제102회기 총회 부총회장 후보 이승희는 말했다.


"정치권에 아무런 부채가 없는 제가 어떤 조직에도 속하지 않는 제가 총대 여러분의 권리를 지켜내겠습니다. 새로운 변화와 개혁을 실행하겠습니다. 나이의 많고 적음이나 또 선배 후배로 표를 구하는 낡은 의식으로는 결코 개혁을 말할 수 없고 개혁을 실천할 수 없습니다. 부총회장이 명예직이라면 목회를 끝마칠 때쯤 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총회를 섬겨야 하는 사명의 자리라고 하면 목회가 힘이 있을 때에 잘 감당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또 102회 부총회장은 103회 총회장이 될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교단의 얼굴이 될 수 있는 사람, 또 우리 교단의 자존심이 될 수 있는 사람, 한국 교계 앞에 세워놓고 우리 장자 교단의 위상과 주권을 되찾을 수 있는 당당하고 품격 있는 리더십을 세워야 합니다. 제가 그 사명을 감당하겠습니다. 우리 총회의 자존심을 제가 확실하게 되찾아 오겠습니다...


여러분 우리 총회는 신학이 문제가 아니라 신뢰가 문제입니다. 금 번 총대 설문 조사에서 응답자 75프로가 총회를 불신한다고 하는 이 대답은 대단히 심각하고 위험한 것입니다. 신뢰를 잃어버린 총회는 미래가 없습니다. 희망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총회의 신뢰를 회복하기 위해서 금권과 불법으로부터 총회를 지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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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외친 이승희는 '금권과 불법으로부터 총회를 지키겠다'라는 자신의 공약을 어겼다. 이에 대한 기사를 세 차례 게재했다. 당시 60세 이하의 이승희가 출마할 선거법을 깔아준 소강석에게서 한번 만나자고 연락이 왔다. 존경의 뜻으로 캡틴이라 부르던 시절이라 즐겁게 달려가 비서실을 거쳐 침실을 갖춘 그의 사무실에서 무릎을 조아리고 만났다. 


그런데 뜻밖의 말이 내 귀에 들렸다. 이승희의 불법 금품 살포에 대한 기사를 내려달라는 것이었다. 멈칫거리니 5백 주겠다는 말에 눈이 휘둥그레지니 8백 주겠다는 제안이 거푸 귓전을 때렸다. 그럴 수도 없고 돈 하고도 상관없는 일이라며 사정을 말했다. 그러나 소강석의 이승희에 대한 부탁은 간절했다. 그래서 말했다.


"기사를 내리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더 쓰지는 않겠습니다."


존경하던 소강석은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일어서 나오려니 소강석은 별실에 들어갔다 나오며 봉투를 건넸다. 받아 안주머니에 넣고 나왔다. 나와서 가는데 소강석에게서 연락이 왔다. 봉투는 돌려달라고 했다. 의아해하며 안주머니에서 흰 봉투 머리에 기도 제목과 헌금자 이름이 적혀 있었다. 봉투 내용물은 세종대왕이 아닌 신사임당으로 아주 두툼했다. 


왜 소강석은 이승희를 위해 그런 수고를 아끼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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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회에서의 정치는 크게 3가지로 움직인다. 명분, 책임, 미래다. 그런데 맨돈 소강석과 꼽사리 이승희의 교단 부패라는 최대의 난제 앞에 눈앞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명분 없는 총회 권력 무리를 보노라면 총회에 맨돈이 개입하면 어떤 파국을 맞는지 확실히 알겠다. 총신의 궤도를 바꿀 기회를 날려버리고 은혜로운동행 기도 운동을 앞세운 채 위험한 배임 의혹을 택한 배광식. 이를 견제는커녕 묵인 찬양하는 언론. 부패의 진짜 원인은 총대가 아니었다. 부패한 맨돈 정치와 탐욕스러운 임원과 기회주의적인 언론과 진영 논리에 휩쓸려 가짜를 진짜로 둔갑시키는 우매한 정치 총대들이었다. 그런데 혀를 차며 보다 보면 오싹해진다. 저 안에 나도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높은 곳을 좋아하는 것은 높이 올라갈수록 멀리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멀리 본다는 건 이미 게임을 반쯤 이기고 시작하는 것과 같다. 전쟁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망루를 설치하는 이유다. 하지만 또 총회장이 되기 위해 선거법을 만지작거린다는 맨돈 소강석이나 꼽사리 이승희처럼 높은 곳에 오르려는 사람은 알아야 한다. 어느 곳이든 정상이 가까워질수록 산세가 더 가파르고 험난해지기 때문이다. 급경사일수록 허리와 머리를 더 숙이고 걷지 않으면 우리는 정상에 오를 수 없다. 정치적 도전, 발돋움도 중요하지만 때에 따라선 책임과 명분을 우선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맨돈 소강석이나 꼽사리 이승희는 전혀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고 있다는 것이 총회 주위의 비판이다.


정상을 보며 달리는 많은 사람이 저 고지에만 오르면 행복할 수 있다고 자신을 추스른다. 문제는 등정 이후에 나타난다. 올라갔으면 내려와야 하는 것이 세상 이치이기 때문이다. 가파르고 비좁은 산 정상에서 평생을 살 수 있을까. 헤밍웨이는 ‘킬리만자로의 눈’에서 정상 부근을 표범의 시체가 말라붙어 있는 곳으로 묘사했다. 그는 “그 높은 곳에서 표범이 무엇을 찾고 있었는지는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다”라는 말로 이 단편의 도입부를 채워간다.


삶의 ‘목표’와 ‘의미’를 혼동해선 안 된다. 삶에서 내가 이루려는 목표와 삶에서 내가 찾고 싶은 의미는 다르다. 특별히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는 목사에게 ‘의미’는 언제나 ‘목표’ 그 이상이 되어야 한다. 목표를 이루고 싶은 이유가 ‘의미’이기 때문이다. 조용필은 그의 노래 '킬리만자로의 표범'에서 “묻지 마라, 왜냐고 왜 그렇게 높은 곳까지 오르려 애쓰는지 묻지를 마라”라고 노래했다. 그러나 바울처럼 주님의 소명을 받은 우리는 끝내 물어야 한다. 왜 오르려고 하는지, 정상을 향한 이런 노력이 나에게 그리고 총회와 교계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말이다.


살다 보면 영원히 지속될 것 같은 기쁨도 고통도 끝이 있다는 걸 깨닫는다. 중요한 건 언젠가는 내려와야만 하는 그 길, 하강의 시기를 잘 보내는 것이다. 그 시기를 어떻게 보내느냐가 그다음의 삶을 결정할 때가 더 많다. 유도를 배울 때도 가장 처음 배우는 기술은 낙법이 아니던가. 성경은 말씀한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 생명이 무엇이냐 너희는 잠깐 보이다 없어지는 안개니라 약 4:14


2022-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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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강석과 이승희 금품수수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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