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2-10-0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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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떼구름을 보더라니까 


나는 동해의 바닷가로 흘러들어와 산다. 아침에 일어나면 드넓게 누워있는 바다가 보인다. 부드러운 회색의 바닷물이 햇빛을 받아 유리 조각을 흩어놓은 것 같이 반짝인다. 아름다운 풍경과 함께 또 하루를 선물 받은 것에 대해 감사한다. 요즈음 이상한 걸 발견한다. 비로소 색깔들이 보인다고 할까. 매일 해변을 산책하고 작은 포구 앞에 있는 커피점에 들려 무심히 바다를 보다가 돌아온다. 바다의 색깔과 표정이 수시로 변하는 걸 알게 됐다. 하얀 바다가 있고 파란 바다가 있다. 녹색과 남색의 바다가 보이기도 했다. 바다는 수시로 능숙하게 색을 바꾸었다. 파랑 속에 더 짙은 파랑이 스며있기도 했다. 파도로 몰려와 바위에 부딪쳐 포말로 변하면서 눈부시게 빛나는 하얀색을 연출하기도 했다. 대낮의 바다와 황혼 무렵의 바다와 밤의 바다는 색이 다르고 표정이 다르고 전해주는 얘기가 달랐다. 대낮의 바다는 낮잠을 자고 있었다. 속정은 있지만 무뚝뚝하게 침묵하는 모습이었다. 황혼의 저녁 바다는 뭔가 얘기를 해 주려는 것 같다. 붉다 못해 타오르는 자기를 보면서 인생 황혼에 너도 그렇게 하라고 넌지시 권하는 것 같기도 했다.


어둠에 묻혀 단조로운 파도 소리만 들리는 밤바다는 가슴 시린 자각을 줬다. 그런 속에서 멀리 해변 가의 빨강 노랑 파랑의 보석 같은 등불들이 띠를 이루면서 반짝이는 걸 보면 체념 속의 신비한 아름다움을 느낀다.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이는 것 같다. 눈으로 보이던 것이 마음으로 보인다고 할까. 전에는 그저 시각적으로 예뻤다. 이제는 그 아름다움이 가슴에 스며들어 물이 든다고 할까. 전에는 깨닫지 못한 것들이었다.


내가 묵고 있는 실버타운의 식당 옆자리에서 식사하는 여든여덟 살을 넘긴 노인이 있다. 부산의 바닷가에서 오십 년 이상 의원을 하다가 실버타운으로 들어온 의사 선생님이다. 노인은 부산 바다도 좋았지만 동해 바다의 색깔이 더 좋아서 왔다고 했다. 그가 이런 말을 했다.


“여기 실버타운책임자를 보면 다른 직원들에게 명령하지 않고 솔선수범해서 제일 일을 많이 해요. 쉬지 않고 정원을 가꾸고 노인들 산책로를 만들고 하지. 리더는 그렇게 앞서가는 한 마리 모범적인 양이 되어야 해요. 그런데 어제는 내가 일을 하는 그 사람 옆을 지나가고 있는데 나보고 파란 하늘을 흘러가는 양떼구름이 너무 아름답다고 하는 거예요. 그 사람 아직 오십 대인데 파란 하늘이 보이고 양떼구름이 보인다면 보통이 아니야.”


그 노인의 지혜가 남다른 것 같았다. 그가 덧붙였다.


“엄 변호사도 바다의 미묘한 색조의 변화를 볼 거예요. 그런데 내가 경험해 보니까 햇빛에 따라 바다의 색이 변하기도 하지만 마음에 따라 달리 보이기도 하더라구요. 기쁘면 기쁜 색이 되고 슬프면 슬픈 색이 되고 말이죠.”


이제는 그 의미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냥 눈으로 보는 색이 있다. 가슴속으로 들어오는 생명을 가진 색깔이 있다. 갑자기 나의 영혼이 육십 년 저쪽의 초등학교 4학년 가을로 돌아가고 있었다. 시인인 담임선생님이 방과 후에 혼자 남으라고 했다. 나는 텅 빈 교실의 책상 앞에 앉았다. 선생님은 싱그러운 국화가 담긴 꽃병을 가져다 책상 위에 올려놓으면서 말했다.


“내가 삼십 분 후에 돌아올 테니까 이 국화만 보고 있어라. 그리고 무엇을 느꼈는지 내게 말해줘.”


나는 잡혀있는 게 싫었다. 만화 가게도 가고 싶고 버터 빵도 사 먹고 싶고 온갖 상념이 가득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런 상념들이 잦아들면서 콧속으로 그윽한 향기가 스며들었다. 은은하고 깊은 냄새였다. 그다음으로 내 눈에 눈부시게 밝은 노랑 빛이 흘러들어와 영혼을 물들였다. 교실 구석에 놓여있을 때 내게는 보이지 않던 국화였다. 그 밝은 노란색 꽃잎은 경이였다.


그다음 내게 아름다운 색깔이 다가온 것은 사십 대 중반의 봄날 암 수술을 하기 위해 병원으로 가는 길가에서였다. 산과 들에 연두색이 풀리기 시작하고 파란 하늘에 흰 구름이 떠가고 있었다. 그 현란한 색의 잔치들을 보면서 나는 아름다운 지구를 처음으로 깨달았었다. 다시 인생 장년의 산맥을 넘어 노년의 바닷가에 왔다. 엊그제는 비가 내린 후 바다 위를 가르고 있는 거대한 무지개를 봤다. 일곱 가지 색깔이 서로 조화를 이루면서 신비롭게 빛을 뿌리는 걸 봤다. 눈으로만 보던 것이 마음으로도 약간 보이는 것 같다. 아름다움이 아름다움으로 보이는 작은 깨달음에 감사한다. 

 

2022-0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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