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2-08-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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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한 가난뱅이 주 씨

 

벌써 오랜 세월이 흘렀다. 아마 90년대 말쯤일 거다. 그때 나는 시베리아를 횡단하는 낡은 녹색 열차의 3등 칸에 타고 있었다. 노보시비르스크 역사 창밖으로 퇴락한 판잣집들이 보이고 텃밭에서 웃통을 벗어젖히고 일하는 남자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때 갑자기 한국말이 내 귀에 들어왔다.


“같은 기차를 탄 한국 나그넨데 인사나 합시다.”


꾸페의 문 앞에 육십 대 말쯤 되어 보이는 뚱뚱한 한국남자가 보였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통로로 나가 그와 대화를 시작했다.


“저는 여행이 저의 신앙인 사람입니다.”


주 씨라고 자신을 소개한 그가 그렇게 말을 시작했다.


“저는 젊어서부터 훌쩍 지리산이고 어디고 떠났어요. 산속에서 며칠간 헤매다가 간첩으로 오인되어 체포된 적도 있죠. 이 여행 전에는 백만 원으로 인도에 가서 한 달을 버텼어요. 내가 뚱뚱하고 여행을 자주 다니니까 남들은 내가 돈 많은 사람으로 알아요. 그런데 사실 나는 고등학교만 나오고 기능공으로 일하다가 IMF 때 쫓겨났어요. 퇴직금을 가지고 중국이고 어디고 마음대로 다녔어요. 친구들은 내가 곧 거지가 될 거라고 하죠.”


어느새 차창 밖에는 눈을 하얗게 덮어쓴 소나무 숲과 전신주가 뒤로 빨리 지나가고 있었다. 나는 그의 다음 말을 조용히 기다렸다.


“대학 졸업장이 없다고 무시하는 사람이 많았어요. 그렇지만 나는 신경 쓰지 않았어요. 대학 졸업장은 좋은 직장에 들어가기 위한 서류지 실제 학력은 아니잖아요? 나는 누구를 만나던지 제일 먼저 내가 못 배웠다는 걸 솔직히 얘기했어요. ”


자기의 약점을 그대로 드러내는 그는 자존감이 강한 사람 같았다. 그가 말을 계속했다.


“저는 가난했어요. 옥수동의 무허가 판잣집에서 40년을 버텼죠. 그랬더니 재개발이 되고 나한테 서민 아파트가 하나 떨어지더라구요. 참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왕국이 너의 것이다 라는 성경 말씀이 있다고 하잖아요? 거기서 지금까지 혼자 잘살고 있죠.”


여행길에서 만난 좋은 친구였다. 집으로 돌아와 한 달쯤 지났을 때 자그마한 소포가 왔다. 예쁜 액자 속에 든 나의 사진이 들어있었다. 금빛 양파 모양의 첨탑 아래에 선 나의 모습이었다. 그의 뚱뚱한 배에 걸려있던 구형 카메라가 떠올랐다. 며칠 후 그가 나의 사무실로 놀러 왔다.


“나는 여행길에서 만난 사람들을 그들이 모르게 살짝 사진을 찍어서 나중에 선물로 보내는 걸 좋아해요. 그냥 보내면 구석에 처박아 두니까 멋진 액자에 넣어 보내죠. 그래야 볼 거 아니야.”


어느새 저녁때가 됐다. 내가 근처의 밥집으로 가자고 권하니까 그가 고개를 저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엄 변호사에게 나만 아는 생활의 비결을 알려주고 싶어요. 우리 동대문 시장 뒷골목으로 갑시다. 거기에 가서 천 원짜리 양말을 파는 집도 알려주고 신간 서적을 30퍼센트 할인해서 파는 서점도 알려 줄께요. 시장통 작은 골목에 내가 단골로 가는 허름한 밥집이 있는데 그 집 아줌마는 생선을 다 구어 두는 게 아니라 반쯤 구어 두었다가 손님이 오면 그때 다시 완전히 궈서 내놔요. 처음에 다 궈 두면 생선이 딱딱해지니까 그런 정성 나만 알지 헤헤”


나는 그를 따라 시장 뒷골목에 있는 ‘호남식당’이라는 곳으로 가서 밥을 먹었다. 그는 밥집 아줌마에게 군인처럼 거수경례를 하며 감사를 표현했다. 어둠이 내렸다. 그가 길을 가다가 거리매점 앞에서 발길을 멈추고 천 원짜리 복권을 한 장 샀다. 그리고 나를 돌아보면서 말했다.


“나는 매주 이렇게 희망을 삽니다. 이걸 한 장 사면 일주일 동안 흐뭇한 꿈을 꿀 수 있거든.”


나는 지위가 높은 사람, 돈이 많은 사람, 지식이 뛰어난 사람을 많이 보았다. 그러나 그들이 행복한 사람은 아니었다. 저마다 고민이 많고 그걸 없애려고 하지만 안되는 것 같았다. 남의 행복은 부러워하면서도 자신은 불행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행복한 사람은 누구일까? 주 씨같이 돈도 지위도 없으면서 행복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닐까. 남과 비교해서 행복해지는 게 아니라 그는 단독으로 행복했다. 이제 세월이 꽤 흘렀다. 그가 살아있다면 구십 고개를 오르고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의 영혼이 이별에서 저 별로 우주여행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의 사람 좋은 미소가 떠오른 아침이었다. 

 

2022-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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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상익의 미셀러니_ 행복한 가난뱅이 주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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