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2-08-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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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사꾼의 본전과 인생

 

해가 물결치는 산들의 능선 뒤쪽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나는 실버타운 옆 산자락의 잔디밭을 산책하는 중이었다. 키가 후리후리한 칠십 대 중반쯤의 노인이 뒷짐을 진 채 걷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안면이 있는 분이었다. 그의 친구가 카톡으로 글을 보내줬는데 내가 그 글을 쓴 게 맞느냐고 확인을 했었다. 글을 써서 블로그에 올리면 더러 그 글이 민들레 씨같이 바람에 날려 사람들의 마음 밭에 떨어지는 것 같다. 그가 이런 말을 했다.


“내가 고등학교 시절에는 문예반에서 시도 쓰고 그랬어요. 그러다 공무원이 됐는데 정년퇴직할 때까지 바쁘다는 핑계로 책을 제대로 읽지 못했어요. 그러다가 늙어서 이제 읽으려고 하니까 눈도 아프고 골치도 아파요. 못 읽겠어요.”


모든 게 때가 있는 것 같다. 공부해야 할 때가 있고 책을 읽어야 할 때가 있다. 어쩌면 인생도 한 권의 책인지 모른다. 사람들은 자기의 직업이라는 하나의 책 속에서 살다가 가는 것 같기도 하다. 실버타운에 있어 보니까 재미있는 면을 발견한다. 역사 선생님 출신은 같이 밥을 먹는 다른 노인에게 게르만 민족의 이동을 설명했다. 비행기 기장 출신은 하늘에 뜬 비행기를 보면 계기와 좌표 외국의 도시들을 말하고 싶어 한다. 경찰 출신은 헬스클럽에 운동화를 가지고 오지 않은 노인을 적발하고 있다. 공무원 출신이나 군 출신은 아직도 젊은 날의 계급장을 달고 자신의 인생 책 속에서 캐릭터가 되어 활동하고 있는 것 같다. 실버타운의 문을 들어섬과 동시에 그들의 책장은 덮여졌다. 세상에서 높고 낮고 많고 적음은 그중 한 페이지의 낡고 의미없는 기록일 뿐이다. 노인들을 보면 자기 그림자를 이끌고 날이 저무는 아득한 지평 저쪽으로 혼자 걸어가는 것 같은 느낌이다. 노을이 짙어지면서 인생의 밤이 가까이 왔다. 황혼에서 밤까지의 짧은 시간에 붉은 노을을 보며 관조하는 사람도 있고 아직도 과거의 책장 속 캐릭터가 되어 와글거리는 사람도 있다. 지위는 안개같이 사라지고 돈도 자기 그릇에 과분한 것은 넘쳐 흘러가 버리지만 그래도 끝까지 가지고 있을 수 있는 게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제야 나는 그걸 떠올리면서 뒤늦게 감사한다. 젊은 시절 변호사인 후배가 이런 말을 하는 걸 우연히 들었었다.


“우리 같은 변호사 인생의 세 가지 길이 있어요. 첫째가 정계 진출이야. 둘째는 미국 유학 가서 전문변호사가 되어 돈을 많이 버는 것이고 셋째는 말이죠. 지금부터 고전을 고시 공부할 때 같이 정독을 하면서 읽는 거야. 그렇게 20년 정도 책에 몰입하면 만만치 않은 내공이 되지 않을까?”


그 후배의 말을 듣고 나는 그가 말하는 마지막 방법을 선택했다. 그리고 바로 실행에 착수했다. 그 무렵 국회의원에 당선된 친구가 사무실에 놀러 왔다가 고전을 읽는 나를 보고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었다. 돈 벌지 않고 뭘 하느냐는 얼굴이었다. 나는 고전 한 장 넘기는 게 지폐 한 장 얻는 셈 치겠다는 마음이었다.


30대 말쯤 나는 독특한 경험을 했다. 믿음이 없을 때였다. 직장의 사무실에 앉아있는데 갑자기 성경을 읽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럴 수 있다고 상식적으로 해석했다. 잠시 후 마음이 흔들렸다. 어떤 존재가 지금 당장 서점에 가서 성경을 사라는 명령 같은 게 느껴졌다. 그래도 버텼다. 퇴근길에 사도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때였다. 어떤 존재가 의자에 앉아있는 나의 등을 확 밀었다. 분명한 물리적인 힘이었다. 나는 혼비백산해서 그길로 차를 몰고 서점으로 갔다. 그 서점 성경코너의 서가 맨 위에 갈색표지의 성경 하나가 나를 기다리고 서 있는 것 같았다. 다음날부터 그 성경이 읽혀졌다. 내 의지로 읽는 게 아니었다. 대충 40번 가까이 읽었을 때 사표를 냈다. 하나님의 아들은 평민이었다. 그리고 자유를 상징했기 때문이다. 백번쯤 읽었을 때 그는 내 영의 우주가 된 것 같았다. 나는 그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세상에 대해 죽고 그에게로 옮겨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한해 한해 독서를 하고 여행을 했다. 찾아오는 사람들의 애환과 하소연도 여행도 책 한 권을 읽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내 역할도 달라진 것 같았다.


진리의 작은 덩어리를 누룩으로 부풀게 하려고 한다고 할까. 노트북으로 자유를 상징하는 그분을 지키는 일이기도 하다. 나는 헛것을 따라다니며 시간을 소홀히 할까 봐 조심했다. 성경은 배의 중심을 잡는 바닥짐같이 나의 삶에서 심지 같은 역할을 해 주었다. 그렇게 세월의 강을 흘러 장년의 산을 넘고 노년의 강가에 이르렀다. 넓은 강 하구에서 떠도는 물방울이 되어 바다를 바라보면서 나는 생각한다.


그분은 인생의 시간을 주셨고 그 시간은 장사꾼들의 본전과 같았다. 그분이 주신 본전을 까먹고 손해 보지 않았는지는 잘 모르겠다. 

 

2022-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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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상익의 미셀러니_ 장사꾼의 본전과 인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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