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2-05-25(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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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지만 큰 나라


90년대 중반경 카이로를 여행한 적이 있다. 안내는 이집트 의사와 결혼해서 그곳에 정착한 한국 여성이었다. 그 여성이 이런 말을 했다.


“제가 한국에서 크던 시절만 해도 미국의 원조를 받는 가난한 나라였어요. 물건 하나 제대로 만들지 못하는 후진국이었죠. 그런데 여기 카이로 시내를 우리나라에서 10년 전 폐차된 포니들이 굴러다니고 있어요. 그걸 보면서 정말 눈물이 나도록 반갑고 고마웠죠. 저처럼 외국에 살면 애국자가 되나 봐요.”


어린 시절 나의 조국은 거지와 실업자가 넘쳐나는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였다. 대학 1학년이 될 때까지 미국이 돈을 주지 않으면 1년 예산을 짜지 못하는 나라였다.


스스로 먹고살지 못하면 완전히 독립한 나라가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부모 세대는 총을 들고 나라를 지켰다. 우리 세대는 먹을 라면과 샘플이 든 가방 하나 들고 전 세계를 다니며 세일즈를 하고 다녔다. 그렇게 해서 경제적 독립 국가를 세웠다. 카이로에서 룩소로 가는 비행기 안에서 옆자리에 앉은 이집트인 남자에게 말을 걸었다.


“이집트에 와 보니 정말 당신네 조상들의 찬란한 문화를 알겠어요.”


그는 바로 내가 한국인인 걸 알아보고 이렇게 대답했다.


“한국은 우리 이집트보다 훨씬 잘 살고 많이 발달하지 않았나요? 지금 제가 입고 있는 청바지도 메이드 인 코리아고 이집트에는 한국산 전자제품이나 자동차 등 안 들어와 있는 게 없어요. 한국은 부자입니다. 우리 이집트는 조상을 잘 만나 이렇게 관광국이 됐죠. 그러나 그 조상 덕에 우리들은 모두 게으름뱅이가 됐어요. 한국인 같이 부지런하지 않아요. 게으름뱅이가 많은 나라는 아무리 조상이 훌륭해도 가난해요. 그게 우리의 현실이죠.”


이집트인은 우리를 칭찬해 주었지만 내가 보는 현실은 어떤가? 매일 검색해 보는 언론이 전해주는 메시지는 절망이다. 정치인의 부패, 종교 교육의 타락이다. 공정을 부르짖는 사람의 이면은 의를 사랑하는 소리가 아니라 불평 같아 보이기도 한다. 불안하기 짝이 없는 사회, 조금도 신용할 수 없는 사회, 형식 일변도의 거짓으로 꾸며진 사회다. 돈을 좀 벌었다고 교만한 세상이기도 하다. 관광객들로 세계로 퍼져서 여자를 사고 추태를 부리는 기사도 종종 본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이태리 카프리섬 부두에 갔을 때였다. 벤치에 곱슬머리의 이태리인과 나란히 앉아있다가 짧은 대화를 나누게 됐다. 그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한국인을 보면 일밖에 모르는 개미 같아요. 그렇게 열심히 일해서 돈만 벌면 다입니까? 주머니만 두둑하면 다냐구요? 돈보다 중요한 게 있어요. 예술이 있어야 하고 사상이 있어야 합니다. 제가 보면 한국인들은 주머니는 가득 차 있는데 머리는 비어 있는 것 같아요.”


나는 그의 말에서 어떤 의미를 깨달았다. 한국에서 중산층은 아파트와 차가 기준이라고 했다. 프랑스에서는 샹송과 역사에 대한 교양이 있어야 중산층으로 인정한다. 미국인은 휴가와 여유가 중산층을 가늠하는 척도라는 소리를 들었다. 그 비슷한 얘기가 아니었을까. 나는 빈정거리는 듯한 이태리인의 입을 통해 천민자본주의가 고쳐지려면 사상과 믿음이 있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대통령이 되겠다는 정치인을 만날 때마다 “당신은 어떤 나라를 만들고 싶습니까?”라는 질문을 했었다. 표를 향한 포장만 그럴듯한 생각 없는 상품이 아니고 그가 추구하는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나라가 어떤 것인가 알고 싶었다.


나라도 빵만으로 사는 게 아니다. 정신이 있어야 하고 세계 속에서 천직이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작은 그리이스는 철학을 인류에게 제공했다. 로마는 법률을 지금까지 전하고 있다. 영국과 프랑스는 민주주의 제도를 세계에 펼쳤다.


한국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열등의식으로 다른 나라가 만든 열매만 따 먹고 배만 부르면 될까. 우리는 특수한 재능을 가진 국민이다. 미국문화를 흡수 소화하고 한국화해서 한류 문화를 만들었다. 세계가 한류에 열광하고 있다.


내가 아는 한 과학자는 비닐 소재 위에 복잡한 전자회로를 프린트하는 기술을 평생 연구하고 있다. 그것만 사업화하면 우리나라 20년 먹거리는 충분할 거라고 했다. 고교 동창인 바이오 회사 사장은 돼지를 이용한 인공장기개발에 성공했다고 내게 자랑했다. 세계 최고의 기술이 틀림없다는 것이다. 미국과 유럽인들이 오랜 시간 걸려 땀 흘려 이룩한 기술을 우리는 단시간 내에 익히고 최고가 되어간다. 문화와 과학기술의 대국이 되어 세계에 이바지하는 대한민국이 됐으면 좋겠다. 

 

2022-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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