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2-05-25(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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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영혼의 양식


좋은 책이라는 제목으로 내가 감명을 받았던 책들을 얘기하니까 그걸 알려달라는 분들이 있다. 이런 때는 정말 조심스럽다. 사람마다 입맛이 다르듯 독서도 기호가 다르다. 


원로 소설가 정을병 선생은 저세상으로 건너가기 전 내게 책 몇 권을 선물했다. 그가 연필과 색연필로 줄을 쳐가면서 읽고 또 읽던 정신세계에 관한 책이었다. 그 성의에 보답하기 위해 받은 그 책을 읽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그 책들은 나의 머릿속 프로그램들을 헝클어지게 하면서 가슴속에 검은 안개가 피어오르는 느낌이 들게 했다. 영적인 싸이클이 맞지 않는 것 같았다. 내가 망고를 좋아한다고 모든 사람에게 망고가 맛있는 건 아니었다. 그래도 내가 그동안 구입했던 책들을 처분하면서 남긴 얼마간의 책을 알려달라는 분들 때문에 나의 스승이 된 몇몇 책을 소개하려고 한다. 내게 전문 직업인으로서의 철학을 형성해준 몇 권의 책들이 있다. 

 

의사 출신 영국 작가 크로닌과 써머셋 모옴이 쓴 것들이다. 써머셋 모옴은 런던 변두리에서 비참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왕진하면서 겪은 체험을 글로 썼다. 크로닌은 대학병원의 유명교수나 대도시에서 성공한 일류 개업의와 광산촌의 고용 의사나 시골 의사를 대비해 전문직업인이 추구해야 할 정신이 무엇인지를 썼다. 그중 이런 장면이 기억에 생생하다. 시골 의원에 고용된 의사가 왕진을 가서 밤늦게까지 아픈 사람을 돌보다가 한밤중에 돌아왔다. 물에 젖은 솜처럼 피곤한 몸으로 벽난로 앞에 앉아 차 한잔을 마시려고 할 때였다.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마을의 다른 아픈 사람의 가족이 그를 데리러 온 것이다. 그는 비가 뿌리는 어두운 진창길로 나서기가 싫었다. 그때 그를 고용한 늙은 시골 의사가 말해준다. 어두운 밤 환자를 보러 다시 나가야 하는 게 의사의 운명이라고. 광산촌에 고용된 의사가 있었다. 낙반 사고가 일어나자 그는 직접 탄광 안에 들어가야 했다. 바위에 다리가 깔린 광부가 있기 때문이었다. 그는 현장에서 광부의 다리를 절단하고 그를 탈출시켜야 했다. 머리 위에서 부서진 돌덩어리가 떨어지고 있었다. 갱도가 붕괴 직전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탄광촌의 젊은 의사는 목숨을 걸고 수술을 한다. 그 시각 대도시의 성공한 의사들은 화려한 파티에서 귀족과 명사들과 사귀면서 사교계의 중심이 된다. 의사 출신 작가들은 작품을 통해 전문직업인으로서 어떤 태도를 취하겠는지를 묻고 있었다. 나는 그 책을 통해 변호사의 직업관을 확실히 굳히게 됐다. 인간의 인연같이 내가 책을 만나는 것도 어떤 섭리가 있는 것 같다. 아버지가 내게 남겨준 셍케비치의 ‘쿼바디스’라는 제목의 책이 있다. 세 번을 정독했다. 읽을 때마다 울었다. 하나님이 내게 믿음이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 보내준 책인 것 같았다. 게오르규의 ‘25시’를 읽고 울었었다. 톨스토이의 책들에서 주인공들을 통해 하나님을 느꼈다. 안나까레니나에서 레빈이라는 인물의 모습을 통해 어떻게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인가를 알았다. 토스토엡스키의 작품에 나오는 죠시마 장로는 예수의 다른 현현 같았다. 고등학교 은사가 써머셋 모옴의 ‘면도날’이라는 책을 한 장 한 장 복사해서 보내주셨다. 감명을 받고 노트를 하면서 두 번 정독을 했다. 어떤 부인이 ‘성 프란치스코’의 전기를 선물로 준 적이 있다. 읽지 않고 서가 한구석에 처박아 뒀다가 십 년 후에 읽고 깊은 감명을 받기도 했다. 책마다 인연이 달랐다. 일본 작가 가야바다 야스나리의 ‘설국’이란 책은 처음에 그걸 읽고 속으로 막 욕을 했다. 스토리도 플롯도 없는 그런 걸 왜 읽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다가 진가를 알고는 마음속으로 무릎을 꿇고 작가에게 용서를 빌었다. 세상에서 그렇게 아름답고 감동적인 묘사는 없을 것 같았다. 나중에야 그 작품이 언어예술의 최고의 경지인 걸 알았다. 


제일 많이 반복해서 읽은 건 성경이다. 나는 요즈음 성경을 보면서 매트릭스의 세계나 메타 버스를 연상한다. 그 안에 나오는 수많은 인물들이 하나님이 창조하고 연출을 하는 아바타 같기도 하다. 그분은 매트릭스의 세계에 수많은 캐릭터들을 등장시키기도 하고 또 퇴장시키기도 하는 것 같다. 나는 그 캐릭터들의 고난과 그 극복과정 그리고 여러 형태의 죽음이라는 퇴장과정에서 섭리하는 그분의 의도를 찾으려고 노력한다. 요즈음 네플릭스에서 인기를 얻은 프로그램인 ‘오징어 게임’처럼 하나님이 멀리서 구경만 하지 않고 직접 게임의 세계에 참여한 것 같기도 하다. 하나님이 예수라는 인간의 형태를 취해 매트릭스의 세계에 들어왔다 나간 것 같기도 하다. 성경 속에 등장한 여러 명의 예언자는 하나님의 계시를 전달하는 중개자다. 나는 40대부터 백 년 전 중국의 임강가 초막이나 일본의 시골에 살았던 현자가 쓴 책을 매일 조금씩 보며 소화시키려고 노력하고 있다. 간단하나마 묻는 분들의 궁금증에 대한 대답이 되었으면 한다. 

 

2021-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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