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2-08-14(일)
 

엄상익 초상화 580px-web.jpg

 

파란 하늘에 걸려있는 빨간 감


젊은 시절 부산에 갈 일이 있으면 마음이 설레곤 했다. 기차를 타고 잔잔한 낙동강 변을 지날 때 창을 통해 들어오는 아름다운 광경 때문이었다. 산이 지나고 들이 지나고 평화로운 마을이 지나갔다. 햇빛을 받고 반짝거리는 납색의 강물이 있고 은빛의 비닐하우스가 있었다. 산굽이를 돌은 후 다시 보이는 강가에는 다리가 긴 새가 무심히 기차를 바라보고 있었다. 작은 마을의 집집마다 마당에 심기어져 있는 감나무 가지 끝에는 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빨간 감들이 투명한 햇빛을 퉁겨내며 더욱 빨개져 있었다. 허공에 매달린 빨간 감의 모습은 지금도 내 영혼 속에 각인되어 있다.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 어느 가을밤 작고 초라한 어머니의 편물점 마룻바닥에 앉아 무심히 길 건너편에 있는 잡화점을 보곤 했다. 가게 입구의 판자에는 홍시들이 알전구 빛을 반사하며 손님들을 유혹하고 있었다. 입안에 퍼져 나가는 크림같이 부드럽고 단 홍시의 맛을 상상했다. 그런 인식 속에서 미처 익지 않은 감을 급하게 먹은 적이 있었다.


떫은맛이 입안에 퍼져 입안에 두꺼운 막이 쳐진 듯한 느낌이었다. 그렇게 달고 맛있는 감이 왜 그렇게 떨떠름한지 이해할 수 없었다. 갑자기 감을 생각하게 된 것은 지난밤 백 년 전에 살았던 현자 노인의 책을 읽다가 ‘감에서 배우는 것’이라는 이런 부분을 보았기 때문이다. 


‘젊고 번민하는 자여 감을 본받아 배우라 감은 훌륭한 교훈을 그대에게 주리라. 감은 덜 익어 시퍼럴 때는 떫은 열매이다. 그러나 붉게 익으면 비할 데 없이 달콤한 과실이다. 같은 감이라도 풋것일 때 떫기가 더한 것일수록 익으면 더 달아진다. 감의 떫은맛이란 단맛의 요인이 된다. 감은 떫지 않으면 달게 익을 수가 없는 것이다. 사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청년 시절 번민하지 않으면 성숙한 어른이 되었을 때 인생의 진미를 충분히 맛볼 수 없는 것이다. 괴로움은 즐거움의 바탕이다. 고통 없는 생애는 맛이 없는 생애다. 무의미한 생애다. 우리는 청년 시절 고통을 받음으로써 인생의 맛의 원소를 빚는 것이다.’ 


젊어서의 고통이 모두 늙어서 추억이 되는 것일까?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나의 대학 졸업 무렵이었다. 더이상 공부할 돈도 없었다. 고시 준비를 하다 보니 취직이 불가능했다. 영어공부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국가에서 청춘의 일정 기간을 군대에 바칠 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시험에 붙을 가망은 거의 없어 보였다. 실패의 연속이었다. 늙어가는 부모를 부양할 멍에가 지워져 있기도 했다. 친구 한 명과 눈 덮인 산골 암자의 뒷방에서 같이 묵고 있었다. 그 친구는 밥만 먹으면 위가 쓰리다고 하면서 방안을 이리저리 기어 다녔다. 한번은 그가 이런 말을 내뱉었다. 


“우리 아버지는 선생의 박봉으로 여러 명의 자식을 키워야 했어. 장남인 나는 우연히 시골에서 천재라는 소리를 들으면서 서울법대에 갔지. 너 서울법대에 들어간 가난한 집의 장남이 어떤 멍에를 써야 하는지 아냐? 벌써부터 부모 형제가 모두 나만을 바라보고 있다. 그런 짐이 너무 무겁다.”


그는 천재답게 그해에 고시에 합격하고 판사가 됐다. 그리고 얼마 후 자살로 인생의 막을 내렸다. 젊은 시절 고통의 떫었던 맛이 단맛으로 변하지 않은 것 같았다. 그런 영혼의 변화를 일으켜 주는 뭔가가 있어야 하는 것 같았다. 논의 나락들은 혼자 익지 않았다. 가을의 쨍쨍한 햇빛이 쬐어야 했다. 농부의 인간적인 의지만으로 되는 게 아니었다. 구름 덮인 하늘에 폭풍이 불면 인간의 노력은 단번에 무의미하게 되어 버리는 것이다. 현자 노인은 내게 이렇게 말을 계속했다. 


‘하나님의 은혜가 그 생애의 뼈아픈 경험을 단맛으로 바꾸어 인생의 진미로 만드는 것이오. 하나님께 의지해서 자기를 이길 수 있다면 그는 달콤한 자유 세계로 들어갈 수 있소. 가을 하늘을 장식하는 붉고 감미로운 감을 다시 한번 보시오.’


고통을 기쁨으로 바꾸는 그분이 있다는 것이다. 엊그제 미국에서 혼자 산다는 스물두 살의 청년이 맑고 투명한 마음이 담긴 댓글을 보냈다. 시련을 맞고 방황하면서 힘든 일이 많은 것 같다. 그 청년에게 이 글을 보내고 싶다. 

 

2021-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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