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1-10-20(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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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큰 기적 별일 없는 하루



지리산에서 우연히 만난 선배로부터 수필집 한 권을 선물 받았다. ‘가장 큰 기적 별일 없는 하루’라는 제목이었다. 그는 퇴직을 하고 지리산에 들어가 혼자 십일 년째 산다고 했다. 빈 농가를 하나를 고쳐서 그곳에서 명상을 하면서 틈틈이 글을 쓰며 말년을 보내는 것 같았다. 그는 글에서 소박한 일상을 말하고 있었다. 인생은 소소한 하루하루의 집합이지만 아주 작은 일상들로 이루어진 별일 없는 하루가 기적이라는 것이다. 그 말은 깊은 의미를 암시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의 글을 읽고 내 기적인 일상을 찾아보았다. 중동 사막 지역을 여행하다가 한쪽 팔과 다리를 독충에 물린 적이 있었다. 피부가 벗겨져 나가고 상처에서 진물이 나왔다. 약을 바르고 그 위에 거즈를 대고 다녔다. 혼자 샤워도 하기 힘들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내게 간절한 소원이 생겼다. 따뜻한 물이 담겨져 있는 욕조에 푹 잠겨보는 것이었다. 그렇게 쉽고 평범하던 일상의 목욕이 내게 보석보다 더 귀한 존재로 절실하게 다가왔다. 완치가 되고 뜨거운 욕조 속에 들어가는 순간 나는 “아”하고 감사가 섞인 짧은 신음을 했었다. 가슴속에 찌릿한 감동이 흘렀다. 평범한 일상의 목욕이 그렇게 좋은 건지 전에는 몰랐다. 


매일 오후가 되면 가까운 실내수영장으로 갔었다. 코로나가 한 단계 오르면서 수영장 운영이 정지됐다. 수영장이 열리기를 하루하루 손꼽아 기다렸다. 일상이 정지가 되야 비로서 그 가치를 깨닫게 되는 것 같다. 다시 수영장에 들어가 몸을 담그게 됐을 때 기쁨을 다시 확인했다. 일상의 사소한 것 하나하나가 그렇게 감사한 것인지 전에는 몰랐다. 주변에 널려진 보석 같은 일상은 빼앗겨 보아야 그 진가가 나타나는 것 같다. 


영국의 한 노신사가 죽음 직전에 했던 말을 전해 들은 적이 있었다. 별 게 아니었다. 매일 같이 산책을 하던 길목에 있는 레스토랑에 들어가 구석 자리에서 평소같이 향기 나는 커피 한잔을 마시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자극적인 맛이 없는 녹차 같은 평범한 얘기지만 그럴 것 같다고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인생의 마지막에는 다시 한번 바다를 보고 싶기도 하고 밤하늘에 영롱한 별을 보고 싶기도 할 것이다. 그러고 보니 기억의 깊숙한 바닥에서 물방울같이 몇 개 떠오르는 존재들이 있다. 기억에 세월이 덮이니까 이제는 아련한 추억이 된 것 같다.


칠십년대 말 나는 군에 입대해서 광주 부근의 벌판에 있는 부대에서 훈련을 받았다. 오래된 플라스틱 식판에 스팀에 찐 보리밥 한 무더기와 썩은 냄새가 나는 진한 갈색의 생선국 그리고 소금에 절인 무가 반찬이었다. 제대로 씻지도 않은 무에는 잔털이 숭숭했다. 물을 부어 그 밥을 들이키면서 나는 짜장면을 생각했다. 윤기가 흐르는 고동색의 짜장면을 먹어보는 게 소원의 하나로 떠올랐다. 중학교 때부터 흔하게 먹던 짜장면이 그렇게 귀한 존재인지 몰랐다. 어느 날 하루종일 행군을 하고 피곤한 몸으로 부대로 돌아오는 어스름한 저녁 무렵이었다. 길가 판자집의 반쯤 열려진 판자 쪽문을 통해 콩나물국 끓이는 냄새가 은은히 흘러나왔다. 콩나물이 뜨거운 물에 익어가는 냄새가 그렇게 향긋한지 처음 느꼈다. 그 콩나물국 한 그릇 먹어 봤으면 하는 게 순간 나의 작은 소원이었다. 무심히 하던 일상의 일들도 기적 같은 환희로 변하는 순간이 있는 것 같다. 


‘접시꽃 당신’이라는 시를 쓴 도종환 씨로부터 직접 들은 얘기다. 그가 민주화 투쟁과정에서 감옥에 갇혔을 때 제일 하고 싶은 일이 시를 쓰는 것이었다고 했다. 그게 시인의 일상이었다. 당시는 감옥 안에서의 집필이 금지되어 있었다.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역시 감옥에 갇힌 적이 있던 김남주 시인은 감옥 안에서 못으로 은박지에 시를 썼다고 했다. 어느 날 운동시간에 다른 감방에 있는 청년이 도종환 시인에게 반 토막짜리 볼펜심 하나를 툭 던져주고 갔다. 그는 그게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그 볼펜심으로 그는 감방에 있던 책들의 위아래의 여백에 시를 썼다고 했다. 평범했던 일상이 기적으로 변하는 순간이었다. 


한 톨 한 톨의 쌀이 모여 익어서 밥이 된다. 가을 길가에서 웃음을 짓는 코스모스도 하나하나가 모여 바람에 물결치는 길가의 꽃밭이 된다. 인생도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일상들이 모여 아름다운 삶이 되는 게 아닐까. 


 

이 글을 쓰고 있는데 아내가 밥을 먹으라고 부른다. 아들과 며느리 가족이 한 상에 모여 아침밥을 먹는다. 성경 속의 솔로몬은 가족이 함께 모여 즐겁게 먹고 마시라고 했다. 그게 축복받은 인생의 낙이라고 했다. 녹차 같은 수필 한 편의 맑고 은은한 향기를 맡은 아침이다. 

 

2021-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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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상익의 미셀러니 - 가장 큰 기적 별일 없는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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