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1-09-18(토)
 

 

엄상익 초상화 580px-web.jpg

 

아름다운 친구


대학 동기 한 명이 내게 전화를 해서 저녁을 사고 싶다고 했다. 대학 시절 그를 본 기억이 없었다. 그리고 그 후에도 그와 어떤 연관이 있었던 적이 없다. 업무와 관련해서 한두 번 정도 만난 적은 있었다. 내가 나온 대학은 용광로 같은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다. 같은 학교를 나왔다는 것만으로 강한 끈끈함과 안아주는 듯한 포근함이 감도는 것이다. 아무튼 그렇게 해서 그 친구가 알려준 양재 시민의 숲 근처에 있는 양고기를 파는 식당에서 함께 저녁을 먹게 됐다. 기름을 두른 검은 불판 위에서 양고기가 노릇노릇 구워지는 걸 보면서 대학 동기인 친구와 술잔을 부딪쳤다. 이상하게도 그 친구한테서 예사롭지 않은 어떤 기운이 흘러나오는 것 같았다. 그가 살아온 자취를 알고 싶어 물었다.


“대학 때 어떻게 지냈어?”


“내가 대학을 다닌 건 모두 합쳐서 백일도 되지 않을 거야. 대학 1학년 때부터 난 청계천에서 야학 활동을 하고 있었으니까.”


뭔가 심상치 않은 게 느껴졌다. 그 시절 청계천은 처절한 빈민굴이었다. 인간들이 사는 터전이 아니라 지금의 짐승들이 사는 축사보다 못한 환경이었다. 개천에는 똥물이 검게 흐르고 천변에는 판잣집들이 바위에 붙어있는 따개비 같이 붙어있었다.


“어떻게 야학을 하게 됐어?”


나는 그가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자세를 고쳐앉고 내면의 귀를 쫑긋 세웠다.


“당시 김진홍 목사가 청계천 빈민굴로 들어가 활빈교회라고 천막 교회를 세우고 활동했는데 나는 그 교회 마당 한구석에 천막을 치고 빈민촌 아이들에게 공부를 가르쳤지. 내가 가르친 건 수학이고 다른 사람들과 과목을 나누었지. 그때 같이 야학을 하던 선배가 빈민운동을 하던 제정구 씨야.”


그가 갑자기 존경스러워졌다. 그가 밥과 술을 살 게 아니라 미안해서 내가 사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당시 법대생들의 야망은 고시를 빨리 통과해서 세상 적인 출세를 빨리하는 것이었다. 그때 우리들의 세상 적인 꿈을 상징하는 인물이 아마도 같은 학년이었던 홍준표인지도 모르겠다. 창녕의 가난한 집 아들인 홍준표는 독서실의 포개서 붙인 나무의자에서 자며 도서관을 드나들었다. 같은 도서관의 앞자리에서 책상에 엎드려 자는 그의 모습을 종종 보았었다. 그는 고시에 합격하고 언론의 관심 대상이 된 사건을 휘몰아치는 검사가 됐다. 정계로 들어가 국회의원이 되고 당 대표가 되고 도지사가 되고 대통령 후보가 됐다. 그런 야망이 법대생인 우리들의 의식을 지배하던 시기에 청계천의 빈민굴로 그가 들어갔다는 것은 깨달음의 경지가 다르다는 걸 말해주는 것 같았다.


“청계천에서의 생활은 어땠어?”


내가 그 친구에게 물었다.


“내 환경은 그런대로 사는 집안 아들이었어. 그 시절 청계천 빈민굴로 가보니까 기가 막히더라. 개천에 막대기를 기둥으로 세우고 그 위에 몇 장의 판자를 엮어 만든 방에서 지냈지. 그건 그래도 괜찮았어. 그런데 아침에 일어나 동네에 하나 있는 공동변소에 가면 수십 명이 줄을 서 있는 거야. 재미있었지.”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그가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덤덤하게 말을 계속했다.


“나는 빈민운동을 한다던가 아니면 정치로 나가려는 어떤 생각이 있거나 특별한 사회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게 아니야. 대학에 입학하고 친구의 소개로 우연히 청계천에 가게 됐었는데 안타까운 마음에서 그 일을 했던 거야. 청계천 사람들이 김진홍 목사와 남양만으로 이주할 무렵 나는 그냥 대기업에 들어가서 회사원이 됐어. 회사원이 돼서도 임원이 되겠다는 야망이 없었어. 그냥 평범한 사원으로 하루하루 성실하게 지내면 된다는 생각이었지. 그런데 어떻게 하다보니 전무도 되고 사장도 되고 퇴직을 하고 10년이 넘은 지금도 가난에서 벗어나려는 청년들을 돕는 사회운동 비슷한 걸 하고 있는 거야.”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일들을 말하고 있었다.


“야 대단하다. 존경스럽다. 이렇게 훌륭한 친구가 대학 동기였는지 몰랐네.”


내가 감탄하면서 말했다. 그가 다시 보였다. 


“얼마 전에 ‘미나리’라는 영화로 오스카상을 받은 배우 윤여정 씨가 인터뷰한 기사를 읽었어. 왜 모두가 최고가 되려고 하느냐면서 자기는 최고의 중간이 되겠다고 하는 부분이야. 괜찮은 말 같더라구.”


선행도 희생도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하는 그의 인품을 말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늙어서 만난 아름다운 친구였다. 

 

2021-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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