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굳뉴스] 방성일 목사 예배 디자이너
젊은이 전도를 위해 테드의 앤더슨처럼 교회의 예배를 디자인하는 Worship Designer 목사
'지식 나눔 콘서트'나 '스타 특강쇼'처럼 요즘 TV를 틀면 흔히 볼 수 있는 강연 프로그램의 원조(元祖)가 테드 콘퍼런스다. 테드는 기술(Technology), 엔터테인먼트(Entertainment), 디자인(Design)의 약자이다. 원래 테드는 1984년 건축가 리처드 워먼(Wurman)씨가 창립해 청중 800여명을 상대로 매년 한 차례씩 열린 소규모 행사였다. 그러나 2000년도에 워먼씨로부터 1400만달러에 테드를 인수한 앤더슨씨는 파격적인 실험을 통해 세계 지식산업의 지형을 송두리째 바꿨다. 18분 강연의 기적으로 10억 명을 감동시키는 앤더슨은 말한다.
“우리의 모토는 가치 있는 아이디어의 확산(ideas worth spreading)입니다. 저희는 하나의 큰 '아이디어 기계'예요. 기계 위쪽 입구에 아이디어를 떨어트리면, 전 세계로 배급되는 거죠. 테드는 한 가지에만 집중합니다. 호기심. 그것이 이 방대한 콘텐츠를 이어주는 유일한 단어입니다. 테드는 호기심을 자극하는 모든 것에 대한 무대입니다. 테드는 선사시대의 캠프파이어 경험을 복원하려고 해요. 모닥불에서 불이 타고, 한 명이 물감을 잔뜩 칠한 얼굴로 앞에서 이야기해요. 또 누군가는 드럼을 치겠죠. 모두가 참여해요.”
효과적인 강연을 위한 테드의 무대 디자인 다섯 가지 규칙 가운데 두 가지 규칙
1. 이중 조명: 단선 조명은 역동적인 퍼포먼스를 지루하게 만든다. 무대 바닥과 천장 등에 조명을 이중으로 설치해 효과를 극대화한다.
2. 강연자는 청중석에서 무대에 올라서고 청중석으로 퇴장한다: 테드는 뒷무대가 없다. 뒷무대에서 입장하고 퇴장하면 시간이 낭비되며 청중과 심리적 거리가 멀어진다.
꽃샘바람이 시샘하지만 그 바람이 겨울처럼 코끝을 아리게 하지는 않는 3월 4일 오후 2시 한 목회자를 대담하러 갔다가 젊은이 전도를 위해 테드의 앤더슨처럼 교회의 예배를 디자인하는 Worship Designer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는 하남교회의 방성일 목사다. 그의 서재는 두 면의 대형 책꽂이에 책이 빽빽이 꽂힌 것은 물론이고 바닥도 책들이 7,107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필리핀의 섬들처럼 쌓여 있었다. 커피가 나왔다. 잔에서 오른 김이 커피 내음을 실어 책 섬들 사이로 번졌다.
―어떻게 목사가 되셨습니까. 타고난 목회자로 보이시는데요.
그렇게 봐주시니 감사합니다. 사실 저는 목사 자질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목사의 성품이나 나름대로 소양이 있었다면 목사가 된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 있겠죠. 열등의식일 수도 있겠지만 목사란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저 자신 품행이나 모든 면에서 목사에 못 미친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목사가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 은혜입니다.
―그러면 목사가 되기 전에 다른 꿈이 있었습니까.
원래 소박한 꿈이 있었습니다. 옛날 시골 어른들이 제일 좋아하시는 직업은 당시의 화이트칼라인 면사무소 면서기였습니다. 농사꾼에게 가장 인기 직업이었죠. 당연히 제 부모님도 늘 제게 그런 소망을 말씀하셨어요. 공무원이 되라고요. 그래서 저 자신도 자연스레 그런 꿈을 꾸게 되었습니다. 세무직공무원이나 검찰직공무원이 되고 싶어서 공무원시험 준비를 했습니다. 그러나 막상 해보니 공부도 쉽지 않은데다 적성에도 맞지 않고 당시 세무직공무원 시험은 경쟁률이 120대 1이나 했어요. 그래서 포기하고 말았죠.
―그러면 목사가 되게 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구체적으로 어떻게 작용했습니까.
그 당시 경북 경산의 우리 마을에 아주 잘 믿는 장로님이 담 너머 이웃집에 사셨어요. 그 집은 잘 믿는 집안입니다. 그 장로님 딸이 같이 자란 내 또래였어요. 그 영향으로 주일학교를 같이 다녔어요. 우리 부모님은 농사꾼이시니까 도시 사람처럼 신앙생활을 잘하시지는 못 했지만 교회는 그냥 다니시는 수준이었어요. 누나 등에 업혀 교회 다닌 기억도 지금 나네요. 내가 목사가 된 결정적인 계기는 이웃집 장로님이 세상사로 시달리던 저한테 권유를 했어요. 나보고 신학을 한번 해 보면 어떻겠냐고 말입니다. 그 권면이 제가 목회자의 길로 걷게 된 하나님의 부르심이었습니다.
―목회 경력이 어떻게 되십니까.
제가 담임목사로 미국 샌디에이고 카운티의 엘센트로 한인교회에서 이민 교회 한번 목회했고 한국에서는 하남교회가 처음입니다. 사실 총신신대원 다닐 때 하남에서 교육전도사 생활했어요. 졸업반 때 제가 대구로 내려가서 청소년교육선교회 지역총무를 하고, 교회 교육전담 교역자, 교회가 파송한 교목으로 활동을 했어요. 그렇게 청소년 사역을 6년 정도 하다가 1996년도에 미국 유학을 갔어요.
―미국 유학을 가시게 된 어떤 동기가 있었습니까.
그게 제가 미국을 처음 간 게 1995년이었을 겁니다. 한번 가서 학교를 돌아보고 돌아와서 1996년에 가방을 싸가지고 유학을 갔어요. 교육목사, 선교단체 총무, 학교 교목으로 청소년 사역을 6년간 했어요. 그런데 아무리 열심히 해도 사역에 대한 미래가 안 보이는 거예요. 세상은 급변하고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안목이 없으니까 말입니다. 정치, 교육, 경제 모든 게 미국을 따라가니까 미국에 가서 공부하면 10년 후를 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청소년 사역을 잘하고 싶었어요. 이 아이들 사역을 잘하려면 미래를 봐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미국을 가야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선겁니다.
―어디로 가셨습니까.
먼저 조사를 했어요. 그 당시만 해도 우리나라에는 청소년학과가 없었어요. 그래서 미국에 알아보니까 샌디에이고에 복음주의 기독교 사립대학이 있는데 크리스찬 헤리티지 칼리지(Christian Heritage College)였어요. 지금은 이름이 샌디에이고 크리스찬 칼리지(San Diego Christian College)로 바뀌었어요. 샌디에이고 엘카혼(El Cajon)에 있는 그 학교 안에는 쉐도우 마운틴 처치(Shadow Moutain Church)라는 백인들 교회가 있는데 3,000여명 모이는 큰 교회였어요. 그 교회 담임목사가 이 대학의 설립자예요. 가보니까 유치원부터 대학까지 학교가 있고 이 대학에 청소년학과가 있어요. 학부에 Youth Ministry가 있는 거예요. 게다가 1970년 1월에 설립된 이 대학의 설립 동기는 창세기의 창조 기사에 근거한 창조론의 틀 안에서 교육할 수 있는 대학이 필요해서였어요. 그래서 그 학교로 유학을 가게 된 겁니다. 처음에는 3년만 있다 돌아오겠다고 아주 간 크게 보따리 싸들고 혼자 갔어요. 그런데 한 학기 지냈는데 너무 외로워서 혼자 못 살겠더라고요. 그 학교에는 당시 한국인이라곤 나뿐이었어요. 동양계도 일본인과 홍콩인 둘뿐이에요. 서른일곱이었는데 한 학기동안 기숙사에서 많이 울었어요. 그래서 한 학기 마치고 방학 때 나와 가족을 데리고 들어갔죠.
―미국 비자가 참 어려울 때였는데요.
맞아요. 참 비자가 안 나올 때였어요. 돈도 없지 영어 실력도 짧지 비자도 없지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 그냥 용기만 있는 겁니다. 그런데 참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었어요. 94년 1월 겨울에 강사로 청소년연합수련회를 기도원에서 인도했어요. 그런데 새벽기도회 마치고 내 방에서 하나님 말씀을 묵상하는데 하나님께서 저한테 얼마나 말씀으로 위로를 주시는지 모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시편 32:8을 통해서 내가 너의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 말씀하시는 겁니다. 산에서 내가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릅니다. 내가 너의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 너무 감동스럽더라고요. 아 하나님이 나를 인도하시겠다는 말씀이구나. 그래서 바로 비자 신청했어요. 그랬는데 놀랍게도 비자를 바로 주더라고요. 담당자가 바로 찍어버리는 겁니다. 아 하나님 인도하심이구나 하고 감사했습니다. 너무 쉽게 가족과 함께 미국을 가게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참 하나님 인도하심이었어요. 11년 살다가 한국으로 왔어요.
―11년 사셨으면 미국에서 목회 사역도 하셨겠군요.
거기 가서 한인 목회를 했죠. 한인 교회 목회를 잘하다 왔어요.
―저도 시카고에 1년 있었어요. 목사님 같은 분 오시면 교인들이 좋아하죠.
제가 이민 목회를 했는데 한 5년 지나니까 그곳이 좋더군요. 사회 환경도 느긋하고 우리 가족도 다 좋아하는 거예요. 영주권은 아이 때문에 받게 됐어요. 영주권 받은 지 5년이 지나면 시민권을 신청할 수 있어요. 제가 미국에서 한국에 2007년 4월에 왔는데 2006년 봄에 가족회의를 했어요. 우리 이제 미국 살자고 말입니다. 다 좋아하는 겁니다. 그래서 시민권 신청을 했어요. 그런데 아이 시민권이 제일 먼저 나오고 그 다음에 아내 시민권이 나오고 나는 맨 나중 12월에 나오는 거예요. 그런데 한 달 뒤 해가 바뀐 1월에 하남교회에서 청빙이 온 겁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시는 거예요. 사실 2006년 가을 대구의 한 교회에서 청빙이 있었어요. 그리고 그 교회가 나를 9 10 11월 계속 기다리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연말에 들르겠다고 말해 놓으니까 그 교회는 계속 다른 사람을 설교시키면서 나를 기다리는 겁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나를 그곳에 보내신다는 마음의 감동이 전혀 없어요. 불안하고 그래요. 그래서 계속 못 갔죠. 그러다 미국 시민권을 받았는데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 그 교회에 못 가겠다고 말했어요. 그 교회가 1월까지 기다리고 있었는데 도저히 안 되겠다고 연락했어요. 그 교회 청빙 문제를 그렇게 다 정리하고 홀가분하게 마음을 놓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 다음 날인가 이 하남교회에서 청빙 연락이 온 겁니다. 나는 너무 놀랐죠. 하나님이 나를 보내신 건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 말입니다. 그래서 오게 됐습니다.
―그러면 하남교회는 실제로 어떻게 오시게 됐습니까.
그러게 말입니다. 참 놀라운 일입니다. 참 이야기가 긴데 제가 신대원 시절 하남에서 3년여 모시고 있던 분이 김윤규 목사님(하남예일)이세요. 월간목회 편집장을 오래 하셨죠. 그런데 그 목사님이 저를 여기 추천해 주셨어요. 그분과 헤어진 지 20년이나 됐는데 저를 기억하고 이 교회에 추천해 주신 겁니다. 김윤규 목사님이 당시 이 교회 임시당회장이셨습니다.
―저도 출판관계로 인연이 있는데 김윤규 목사님 정말 좋으신 분이죠.
김 목사님이 임시당회장이시니까 저를 모든 면에 이 교회에 맞는 사람이라고 추천하신 겁니다. 김윤규 목사님이 워낙 훌륭하신 분이라 장로님들이 그럼 한번 보겠다고 한 겁니다. 저는 서류도 낼 겨를이 없이 바로 청빙 목사 세 명의 후보군에 들어가게 된 겁니다. 그래서 나까지 네 명이 되었죠. 네 사람이 다 설교하고 교회가 투표를 했어요. 장로님 권사님 안수집사님들이 투표를 한 겁니다. 먼저 두 사람이 결정됐어요. 두 사람을 놓고 당회가 또 투표를 했어요. 그래서 결정된 한 사람을 놓고 전교인이 참여하는 공동의회를 한 겁니다. 저는 투표를 세 번 받았어요. 하나님이 하시니까 순적하게 진행됐어요.
―하남교회가 전통을 따라서 은혜롭게 청빙 절차를 밟았네요.
기도하고 투표하면 하나님의 뜻을 따르게 되는 거죠. 다른 분들도 아주 강력한 후보들이었는데 제가 됐어요. 하나님 은혜죠. 저는 모르고 왔는데 와 보니까 청빙위원들이 정한 열 가지 조건이 있었어요. 그런데 제가 그 조건에 딱 맞았다는 거예요. 뒤돌아보면 하나님이 보내신 일이니까 다 순적하게 이루어지더라고요.
―담임목사로서 실제로 목회를 하시는데 교회는 어떠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교회는 주님의 몸 된 교회입니다. 그런데 신학적인 지식보다도 교회는 성도에게 어머니와 같다고 생각합니다. 마음의 고향인 겁니다. 우리가 어머니 품에서 자라고 힘을 얻듯이 교회가 그렇지 않겠습니까. 광야 같은 이 세상에서 나름대로 열심히 살다가 지치고 힘들면 어머니한테 와서 용기를 받고 또 세상으로 나가고. 그래서 교회가 어머니 같다고 하는 겁니다. 아이들이 뛰어놀다가 어려움이 생기면 엄마를 찾듯이 성경이 말씀하는 교회는 어머니와 같은 그런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민 교회 해 보니까 두드러지는 게 한국에서 예수 안 믿던 사람들이 외롭고 괴로우니까 교회로 오잖아요. 어떤 면에서 교회가 엄마지요. 그 사람들 인도해 주고 품어 주고 격려해 주고 돌보아 주고 하는 겁니다. 결국 한국 교회도 마찬가지 아니겠습니까. 이민 교회를 목회하면서 참 교회는 예수 믿는 사람뿐만 아니라 안 믿는 사람에게도 꼭 필요한 곳이 교회라는 생각이 듭니다. 교회를 통해서 성도들이 위로도 얻고 힘도 얻는 거죠. 우리가 몸이 병들면 병원가고 약 사먹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마음이 아프면 갈 데가 없잖아요. 마음이 아프면 어디로 가나요. 마음이 상하고 고통스러우면 혼자 끙끙 앓고 있거든요. 그러다 누구 만나면 고작 푸념이나 하고 술이나 마시지 않습니까. 정신적인 문제가 생기면 정신과에 가죠. 그전에는 안 가거든요. 결국 마음이 상한 자는 갈 곳이 어머니인 교회입니다. 이민자들은 더욱 그렇죠. 한국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살다가 마음이 상하고 아프면 어머니한테 와야죠.
―목사님이 오셔서 교회를 이전하고 이렇게 성장시키셨는데 어떤 목회관을 가지고 계십니까.
참고로 제가 2007년 4월 8일 부활주일에 부임 설교를 했어요. 그리고 그 다음 날 월요일 서울동노회가 열렸어요. 노회 참석해서 이명 허락을 받은 바로 그날 저녁 장로님이 내 이름의 도장을 새겨가지고 와서 이 땅 계약을 했어요. 이 땅은 제가 부임하기 전에 이미 구입하기로 결정을 해 놓은 거죠. 그러니까 계약만 제가 한 거죠. 그때부터 설계와 건축은 제가 다 관여하게 됐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비행기 타고 오면서 이런 형편을 모르고 교회가 힘들테니 이삼 년 안에는 교회를 건축하면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교인도 잘 모르고 하니 말입니다, 그게 일반 목사들 생각이죠. 그런데 와 보니 상황이 그렇지 않은 거예요. 지나고 나니까 그때 잘했지 싶어요. 그런데 이 예배당 장소를 놓고 갑론을박이 참 많았어요. 원래 교회가 있던 장소를 주장하는 측이 있고, 이전 결정을 한 지금의 장소를 원하는 측이 있고, 제삼의 다른 장소를 생각하는 측이 있었어요. 저는 그런 상황을 이민 교회에서 한번 겪었어요. 미국에서 작은 예배당을 하나 지었는데 상황이 똑같았어요. 땅 계약 진행 과정이 다르긴 하지만 말입니다. 그래서 그 경험을 살려 진행을 했는데 하나님 은혜로 잘됐어요. 하나님께서 한국 목회를 위해 미국에서 저를 미리 훈련을 시키신 거죠.
―그 당시 지금의 교회를 크게 지으신 거 아닙니까.
제가 아니라 온 교인이 힘을 다해 지었습니다. 사실 부채도 꽤 되긴 하지만 교회가 감당할 수 있는 수준입니다.
―교회의 갈등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십니까.
저는 시골 출신이라 그런지 정이 많아요. 저는 미국에서도 장로님들하고 친구처럼 지냈어요. 저는 스스럼이 없습니다. 우리 교회 장로님들이 저를 처음 봤을 때 놀랐을 겁니다. 제가 미국에서 선을 보러 왔는데 편하니까 백팩을 메고 왔어요. 목사는 그렇게 안 다니잖아요. 그런데 와서 설교를 하고 당회실에서 면담을 하는데 저는 그냥 편하게 앉아 있었어요. 그리고 스스럼없이 자유롭게 대화를 나누었어요. 오랜 사귄 사람들처럼 막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장로님들이 놀랬을 거예요. 저는 잘 보일 일도 없고 하나님이 결정하신다고 생각하니 참 편했어요. 지금처럼 이렇게 얘기 했어요. 사실 저는 좀 자유로운 사람입니다. 교회 건축 문제를 얘기할 때도 그냥 자유롭고 편하게 하는 겁니다. 목사가 그러니 교인들도 그렇게 되더라고요. 그런데 저한테는 단호함과 엄격함이 드러날 때가 있어요. 교회는 어머니뿐만 아니라 아버지도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저희 교회가 반세기가 넘은 51년 되었습니다. 그러니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이 서로 어울려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겁니다. 그 모두를 포용할 수 있는 지도력이 필요하죠.
―목사님 겉보기에는 점잖고 매끄럽게 보이는 데 다른 면이 있는 모양이지요. 그런데 그런 내면의 힘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요.
저희 교회가 오래 되다 보니 전통을 고수할 때가 있어요. 그럴 때 저는 세상적인 방법보다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성경적인 방법을 강조합니다. 그래서 저희는 당회를 할 때도 기도를 많이 해요. 하나님의 뜻을 찾고 구하는 것이 교회 회의의 목적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당회는 통성 기도를 많이 하고 회의를 합니다. 이렇게 했더니 회의도 순조롭고 시간도 많이 안 걸려요.
―처음 들어보는 새로운 방식의 회의네요.
저희는 회의를 할 때 순서에 따라 발언을 하고 조용하게 진행합니다. 회의는 의견 조율이 중요하기 때문에 충분한 논의가 되어야 하고 발언의 기회가 공정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의견 조율이 어렵지 않아요.
―어려운 걸 쉽게 처리하십니다.
다 하나님의 은혜죠. 하나님께서 사람들 일을 잘 아시니까 캘리포니아 끝자락에 있는 저를 하남교회에 데려다 놓으신 거예요. 교회가 평안해지고 교인들이 얼마나 좋아하는지 몰라요. 그 당시에는 교회적으로 어려움이 있었어요. 그때 제가 오고 3개월 만에 좋아졌어요.
―설교를 어떻게 준비하십니까.
씨름하죠. 그러니까 현대교회의 예배 핵심이 설교인데 설교에 맞춰 예배를 디자인해야 합니다. 저는 빅 아이디어 큰 생각 즉 큰 주제 하나를 정해요. 이 달 같으면 지난주에 했는데 지저스 스토리Jesus Story 즉 예수님과 나와의 이야기인데 이걸 의역해서 인생의 봄이라고 해요. 3월이니까 봄이 오잖아요. 이 봄에 맞는 메시지 다섯 개를 기도하면서 정합니다. 제가 주목하는 것은 성도들의 상황입니다. 성도들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어떤 말씀이 필요할까에 맞춥니다. 이 다섯 개를 정해놓고 설교를 준비합니다. 주제가 정해지면 거기에 맞는 자료들을 찾고 강단에 디스플레이를 합니다. 주보도 거기에 맞춥니다. 주보에 예고편 식으로 다섯 개의 주제도 보여 줍니다. 그러면 교인들이 다음 주에 어떤 말씀을 듣게 될지 마음을 가지고 기다리지 않겠습니까. 교인들이 예컨대 히든카드라는 제목을 보면 호기심을 가지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그 설교에 맞는 영상을 제작합니다. 다음 주 영상을 찍으러 내일 담양에 간답니다. 한 팀이 갑니다.
―매주 그걸 만들면 상당한 시간과 예산이 투입되겠는데요.
그래서 우리는 전문 방송 팀이 있어요. 풀타임 사역자들입니다. 영상 음향 조명 팀도 있습니다. 스토리를 만드는 작가도 있어요. 등장 배우는 교인들이 봉사해요. 남의 것을 사용하면 저작권 침해라 방송에 내보낼 수가 없어요. 설교 한 편에 맞춰 이 모든 것들이 종합해 사용됩니다. 설교는 건축의 기둥처럼 큰 주제로 세우고 거기에 맞는 소주제를 교인들의 상황에 맞춰 채웁니다. 그렇게 디자인된 예배 시간에 제가 설교를 합니다. 말하자면 아픈 사람이 약국에 오면 열이 나는지 기침이 나는지 들어보고 진단해 약을 조제해 주잖아요. 그런데 약국에서 진단 없이 미리 약을 지어놓고 오는 사람 순서대로 주는 게 아니란 말입니다. 약사는 환자의 상황에 맞는 약을 주는 게 약사의 본분이죠. 목사는 성도의 상황에 맞는 메시지를 선포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일 년치 주제를 정하지 않습니다. 성도의 상황을 위해 매달 주제를 정합니다. 그 달이 끝날 때쯤 다음 달 주제를 기도하면서 정합니다. 어떤 면에서는 교인 중심의 설교를 준비해서 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독서는 한 달에 얼마나 하십니까.
정해 놓지는 않았습니다만 서점에 가면 30권은 삽니다. 직원을 시켜 사는데 30권 더 사면 샀지 덜 사지는 않을 겁니다. 그리고 그 책들을 금방 봅니다.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컨대 이 책을 보면 목차를 보고 필요한 곳을 찾아 읽습니다. 그러면 이 책에서 본전 다 뽑은 겁니다. 소설이 아니니까요. 그리고 다음 책을 읽는 겁니다. 30권 사오면 금방 다 읽게 됩니다. 그리고 저렇게 쌓아놓죠. 저는 독서 때문에 머리 아프거나 부족을 느끼진 않습니다. 필요한 만큼은 독서를 하니까요. 그래서 제가 다양한 책을 섭렵합니다. 성도들의 상황에 맞추려면 제가 노력하는 수밖에 없죠.
―성경 본문 연구는 어떻게 하십니까.
우리 교회가 참 좋은 교회라고 자랑하고 싶습니다. 본문 중심으로 말씀을 묵상하는 두란노가 발간하는 《생명의 삶》을 온 교인이 보기 때문입니다. 1997년 부임한 해 여름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그걸 계속 사용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그걸 매월 정기구독으로 700권을 받습니다. 그 본문을 가지고 새벽기도회에서 활용하고 있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본문 묵상이 훈련이 되어 있습니다. 성경 전체 본문을 돌은 게 아마 몇 차례 될 겁니다. 본문이 정해지면 주석도 보죠. 필요한 단어는 원어도 찾아봅니다. 그러나 본문에 그렇게 매이지는 않습니다. 저는 자연스럽게 성경 연구보다 묵상 쪽으로 더 기울어져 있죠. 그래서 지난달의 주제가 하나님을 체험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영어로는 Testimony 증언이라 했지요.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은 자기 간증이 있을 거 아니겠습니까. 많은 사람들이 논리나 신학적으로는 하나님을 잘 아는데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한 종교적인 사람 즉 종교인입니다. 지난 한 달 그걸 설교하면서 제 개인적으로는 참 좋았습니다.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하면 아무리 지식적으로 하나님을 많이 알아도 사실은 잘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깊이 묵상해야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경험하기 위해 성도들과 은혜의 시간을 많이 나누었죠. 제 개인적으로는 참 풍성한 한 달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는 데 우리가 걱정하고 근심하는 것은 믿음이 부족하거나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많이 배우기만 했지 하나님을 경험하지 못한 것입니다.
―목사님 설교를 한번 들었는데 자기계발적인 내용이 많은 것 같았는데 실제 내용은 그렇지가 않군요.
제 설교를 그렇게 하는 의도는 교인 가운데 청년이 많기 때문입니다. 오래된 교회이기도 합니다만 우리 교회가 연령층이 높았습니다. 제가 부임할 때 마음에 부담이 될 만큼 교인들 머리가 하얀 거예요. 그래서 포커스를 바꿨더니 지금은 삼사십 대가 교인들 주류를 이룹니다. 아주 많아요. 그런 젊은 사람들 때문에 설교를 그렇게 하는 겁니다. 안목을 가지고 젊음의 한때에 분명한 목표를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내용이 제 설교에 많이 나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젊은이들에게 강하게 어필하고 도전 의식을 불어넣어 주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제 설교 때문에 다시 시작하고 도전한 사람이 젊은 사람 가운데 많습니다. 주부들 중에서도 자격증도 따고 학위도 받은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우리 사무실 직원도 그렇습니다.
―듣고 보니 놀랍네요. 목회자들의 사고가 일찍 늙어버리는 경우가 많은데 말입니다.
나이가 들어도 젊은 사람이 있고 젊은데도 나이 든 사람이 있어요. 나이와 상관없이 사고(思考)가 나이 든 목사가 있어요. 관건은 저도 나이가 들어도 젊음의 사고를 가지고 목회를 하면 젊은 사람들이 제 설교를 듣는 자리에 계속 있지만 제 사고가 늙어버리면 이 사람들은 사라져요. 그래서 목사의 설교가 아주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저희 교회는 지금 삼사십 대 교인들이 좋아할 만한 그런 요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컨대 예배도 1부 2부는 정장 차림으로 설교합니다. 그러나 3부 4부는 넥타이를 매지 않고 헤드셋을 하고 강대상을 자유롭게 누비며 설교를 합니다. 3부와 4부는 조명도 회중석은 좀 어둡습니다.
―왜 그렇게 하십니까.
미국 교회에서도 그런 걸 많이 봤습니다. 극장처럼 아주 어두운 교회도 있어요. 사람의 마음이 약간 어두우면 안정이 돼요. 어두우면 숨을 수가 있어요. 요즘 젊은 세대들이 숨고 싶은 마음이 있어요. 그들의 심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젊은 세대가 그렇게라도 교회 나와서 하나님께 편안히 예배드리게 해야지 하는 마음에서 그렇게 합니다. 그런 배려가 젊은이가 교회를 올 수 있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예배의 집중을 위해서도 좋은 것 같은데요. 청년들은 퍼포먼스에도 익숙해져 있으니까요.
어쨌든 편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불편하면 은혜가 안돼요. 환하면 불안해지는 경향도 있어요. 나이든 세대는 예배는 환해야 된다고 생각하지만 말입니다.
―선교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제 나름대로 선교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고 있어요. 미국에 있을 때 멕시코에 교회를 하나 세워 봐서 아는데 선교 전략이 정말 필요해요. 선교지의 형편이 어려워지면 후원받은 재산을 처분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명의를 여러 사람 이름으로 해야 됩니다. 서로서로 모르게 하고 후원한 교회의 담임목사만 아는 거죠. 선교는 복음을 전하는 게 맞죠. 그러나 선교에 대해 성도들도 보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려면 선교의 방향과 전략이 필요합니다. 그냥 선교사 보내고 후원금만 보내가지고는 안됩니다. 그래서 저희는 선교를 하게 되면 전략적인 선교를 할 것이고 계획도 가지고 있습니다. 선교지에 학교도 세우고 센터도 세우려고 합니다. 태국이나 캄보디아 수도 같은 데서 좋은 대학의 젊은이들을 선교할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사람이 없는 시골보다 도시의 젊은이들을 선교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한 나라가 바뀌는 것은 젊은이 선교를 통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그런 꿈이 있습니다.
―후배 목사들에게 한마디 해 주시죠.
우리 세대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세대였습니다. 밤새 부르짖고 울고 기도했습니다. 우리는 가슴 세대고 요즘 세대는 머리 세대 같아요. 우리는 열정을 앞세우는데 요즘 세대는 데이터와 정보를 중시하는 것 같아요. 총신대학교 목회신학전문대학원에서 두 학기 째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다 제 후배들 아닙니까. 늘 이런 얘기를 자주해요. 우리 시대가 갈수록 어려워지는데 목회자들이 시대에 맞는 연구를 할 필요가 있다고 말입니다. 세상은 점점 더 편리해지지만 그 대신에 마음은 더 공허해집니다. 그래서 그 심령을 채워줄 수 있는 신앙이 필요합니다. 제 설교는 많은 경우 인간의 내면을 이야기합니다. 사람이 겉은 멀쩡한데 속이 병들잖아요. 계절의 봄은 때가 되면 와요. 꽃이 피고 향기가 날리는 봄은 그냥 누구에게나 오는 겁니다. 그런데 인생의 봄은 초청하지 않으면 오지 않아요. 내 인생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내가 영접하고 나를 향한 그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여야 내 인생의 진정한 봄이 옵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돈을 벌고 출세해도 인생의 봄은 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봄을 맞이할 때 하나님을 향한 젊은 목사들의 사랑과 헌신이 뜨거워지게 될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한다.
내가 너의 갈 길을 가르쳐 보이고 너를 주목하여 훈계하리로다 시편 32:8
2015-03-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