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1-01-22(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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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주는 청년들

 
코로나라는 병이 창궐해서 세상이 감옥이 되어 버린 것 같다. 길거리의 커피숍이 텅텅 비었다. 폐업 딱지를 붙인 작은 식당들이 흔하다. 연말 사람들의 모임도 해외여행도 금지됐다. 정부는 자영업자들에게 긴급 재난 지원금을 준다고 소식을 전하고 있다. 나는 재난 영화 속의 한 장면 속으로 들어와 살고 있다.

어젯밤 아내와 산책을 나갔다. 영하의 수은주를 밑도는 날씨였다. 도심의 빌딩 사이를 냉기 가득한 세찬 바람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면도날 같은 냉기에 도심의 현란한 불빛들마저 그 자리에서 얼어붙어 버린 것 같았다. 아내와 신사역 부근을 웅크리고 걸을 때였다. 20대 즈음의 젊은이 서너 명이 거리에 서서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다가가 뭔가 건네고 있었다. 찬바람 부는 겨울 거리에서 광고 전단지를 나누어 주나? 하고 생각했다. 한 청년이 아내에게 다가와 아주 작고 예쁘게 디자인된 책 두 권을 전해 주었다. 고동색과 보라색의 표지에는 금박으로 ‘신약성경과 시편, 잠언’이라고 글씨가 박혀 있었다. 성경책은 집에도 여러 권 쌓여 있었다. 아내가 그 책을 받고는 청년에게 “잠깐만요”하고 기다리게 했다. 아내는 메고 있던 핸드백을 열더니 뭔가 한참을 찾았다. 이윽고 지갑에서 노란 5만 원권 한 장을 꺼내 청년에게 건네면서 말했다.

“성경을 그냥 받을 수는 없지.”
“감사합니다. 잘 쓰겠습니다.”

청년의 활짝 웃는 얼굴이 칼 같은 겨울 추위를 따스하게 해 줄 것 같았다. 다시 걸음을 걸으면서 아내가 말했다.

“젊은 사람들이 열정으로 말씀을 담은 책을 전하는데 이 추위에 돌아가다가 따뜻한 국밥 한 그릇이라도 나누어 먹으면 얼마나 좋겠어?”

아내는 나보다 속이 몇 배나 넓고 통이 큰 여자였다. 나는 언제나 째째한 인간이었다. 남에게 돈을 내놓을 때는 몇 번이나 재고 또 쟀다. 그저 모든 걸 움켜쥐려는 욕심만 있지 남에게 줄 줄을 몰랐다.

‘신약성경’이라는 작은 책자가 나를 청록색 안개 속에 묻혀 있는 40년 전 기억 저편으로 끌고 갔다. 눈 덮인 전방의 철책선 부대에 장교로 근무하던 시절이었다. 밤새 순찰을 돌고 새벽에 막사사무실로 돌아왔다. 책상 위에 손바닥만 한 작은 책 두 권이 놓여있었다. 신약성경이었다. 부하인 김 중사가 공짜로 받아왔다는 것이다. 종이가 얇아 담배 가루를 말아서 피면 좋을 것 같다고 했다. 내게 믿음이 없을 때였다. 감옥 안의 재소자들은 성경 속에 네모난 구멍을 파서 그곳에 가치 담배를 숨겨두는 경우가 많았다. 어떤 죄수들은 성경을 잘라 여러 겹 두껍게 붙인 후 그 위에 붉고 검은 화투 그림을 그려 도박을 하기도 했다.

장교로 전방에 있던 그 무렵 나를 감싸고 있던 감정은 절망 비슷한 것이었다. 고시 공부를 하느라고 군 복무를 연기하다가 마지막까지 시험에 실패하고 어쩔 수 없이 끌려 전방에 배치된 것이다. 무심코 그 작은 책을 몇 장 들춰보았다. 흙으로 여러 종류의 그릇을 빚는 도공의 얘기가 나왔다. 귀하게 쓰는 화려하지 않더라도 자기 그릇에 만족하고 자기만의 삶을 채우라는 것 같았다. 그 구절을 보면서 실패한 나의 운명을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하나님이라는 분이 나를 2류나 3류로 만들었다면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피라미가 꿈을 꾼다고 상어가 될 수는 없는 거니까. 아무튼, 그 한 구절이 세상의 불공평을 받아들이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 후 군대에서 제대하고 뒷골목의 개인 변호사로 살아가면서 우연히 천재 시인 강태기를 만난 적이 있었다. 소년 시절 자동차수리공을 하면서 두 신문의 신춘문예에 당선된 천재였다. 그는 평생 가난을 친구삼고 인도의 순례 여행을 자기의 친구로 한 사람이었다. 그가 암에 걸려 혼자 죽어가는 임대아파트의 어둑한 골방에서였다. 그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내가 평생 읽은 책들을 보관할 장소가 없어서 모두 처분했어요. 그러면서 죽기 전까지 머리맡에 놔두고 읽어야 할 책이 뭘까 고민해봤죠. 그러다가 마지막에 ‘신약성경’이라고 결론을 지었어요.”

시인은 인생의 거친 밭 속에 숨겨진 귀한 보물인 신약성경의 존재를 내게 알려주고 죽음의 무대 저쪽으로 옮겨갔다. 그 신비한 책 속에는 수많은 영혼의 친구들과 선생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은 내게 죽음 이후의 나의 모습과 내가 살아갈 아름다운 세계를 보여주고 있었다.

2020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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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상익의 미셀러니 - 책을 주는 청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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