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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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례교 뿌리는 종교개혁 후기 16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1609년 홀랜드에서 영국 국교회 목사 존 스미드(John Smyth)는 자신의 머리에 물을 붓는 세례를 행하고 다른 교인들에게도 그렇게 했다. 

19세기에 이르러 침례교 운동은 의미 있는 성장을 했다. 런던의 스펄전(Charles Haddon Spurgeon)과 맨체스터의 맥클라렌(Alexander Maclaren)과 같은 위대한 설교자들이 침례교회로 수많은 청중을 이끌었다. 

2009년 침례교는 설립 400주년을 기렸다. 

찰스 해돈 스펄전((C. H. Spurgeon, 1834-1892)은 영국 에섹스 켈비던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에게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어린 시절부터 몸에 배어온 일상이었으나,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는 삶은 아니었다. 스펄전의 회심은 15세 때인 1850년 1월 6일 일어났다. 약속이 있어 가는 길에 눈보라 때문에 콜체스터에 있는 한 감리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다. 하나님은 그 교회에서 스펄전의 마음에 구원의 메시지를 열어주셨다. 그를 감동시킨 성경 본문은 이사야서 45:22 “땅 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음이니라”였다.

그의 자신의 회심에 대한 회상은 이렇다. 

나는 지금도 가끔 생각합니다만, 만약 하나님이 은혜롭게도 어느 일요일 아침 대단히 심한 눈보라로 나의 예배당 가는 길을 막지 않았더라면 나는 지금까지도 암흑 속에 있지나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날 아침 나는 눈에 길이 막혀서, 우리 집에서 얼마 멀지 않은 보잘 것 없는 조그만 한 교회에 불가불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회중은 모두 열 두 서넛밖에 없었으며 목회자도 안 나왔습니다. 아마 눈에 길이 막혔던 모양이었습니다. 이윽고 한 초라한 사람 ― 양복장이거나 그렇지 않으면 구두장이 같아 보이는 이가 강단 위로 올라갔습니다. 이 사람의 설교는 처음부터 끝까지 성경본문을 외어대는 것이었는데,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딴 소리는 할 재능이 없어보였습니다.

본문은 "땅 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 나는 하나님이라 다른 이가 없음이니라"고 하는 이사야 45장 22절이었는데 이 사람은 본문을 온전히 읽지도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의 성경 봉독을 들었을 때 제 생각에 그 말씀에는 제게 대한 어떤 소망이 감추어져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는 말했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바라보라고 합니다.
안됩니다. 예수를 자주 바라보십시오.
예수는 '나를 바라보라' 하셨습니다.
 
나를 바라보라. 나는 큰 핏방울을 떨어뜨리고 있다.
나를 바라보라 나는 십자가에 매달렸다.
보라, 나는 죽어 장사되었다! 
나를 바라보라, 나는 다시 살아났다!
나를 바라보라, 나는 승천했다!
나는 아버지 오른 편에 앉았다!
오오, 나를 바라보라! 나를 바라보라!"
여기까지에 겨우 한 십 분 동안을 소비하고 나서 이 설교자는 밑천이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그는 강단 바로 밑에 앉았던 나에게 시선을 던졌습니다. 아마 사람들이 얼마 안 되었기 때문에 그는 내가 처음 나온 사람인 줄을 알아 차렸던 모양입니다.

그는 나를 향해 입을 열어 "청년, 당신은 왜 그리 가련한 모양을 하고 있소?"하고 물었습니다. 그는 말을 계속했습니다. 

"청년이 이 성경 본문을 순종하지 않으면 언제나 가련할 것이고 죽어서도 가련할 것이요. 그러나 이제, 이 시간에 이 성경을 순종하면 당신은 구원을 받소."

그는 한층 소리를 높였습니다.

"청년이여, 예수를 바라보라! 지금 바라보라!"

나는 깜짝 놀랐습니다. 자리에서 놀라 일어났으나, 그러나 그 때 나는 예수를 바라보았던 것입니다. 그 순간 구름은 걷히고, 나는 햇빛을 보았습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 감격에 넘쳐 구주의 귀하신 보혈과 단순 명확한 그리스도의 복음을 찬송하고 싶었습니다. 아아, 그 누가 이 진리를 좀 더 일찍이 나에게 깨우쳐 주었더면..."나를 앙망하라, 그러면 구원을 얻으리라!"고한 이 위대한 진리를!

그때부터 스펄전의 삶은 주의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열정의 삶이었다. 1851년 그는 17세의 나이로 정식 목사 직분을 얻었다. 

장대영 목사의 회심도 스펄전처럼 이루어졌고 목사 안수도 17세 때 받고 부흥사로 나섰다. 그의 당시 충청도는 성령의 바람이 뜨겁게 불던 곳이었다. 부흥회를 얼마나 많이 다녔던지 충청도 지역이나 섬 지역에서 그를 모르면 간첩이라고 했을 정도였다. 

2015년 1월 10일 10시 수도중앙교회 당회장실에서 장대영 목사를 만났다. 그리 크지 않은 당회장실 벽에 수양관 전경이 찍힌 큰 사진틀이 걸려 있었다. 

―목회는 어떻게 시작하셨습니까.
“목회 시작은 감리교에서 했어요. 그러다 마경일, 윤덕수, 윤창덕 등으로 인해 교단이 갈라지는 바람에 그 바람을 피해 장로교로 왔어요. 그런데 김희보 목사와 박아론 목사가 또 갈라지는 바람에 분열의 아픔과 피해를 또 겪었지요. 어쨌든 이제는 평안해져서 참 은혜롭습니다.”

―사역 기한은 어떻게 되십니까.
“목회사역 45년, 부흥사역 45년입니다.”

―두 사역이 다 같던데 어떻게 된 겁니까.
“나이에 비해 내가 목회를 오래 했어요. 거기에는 군 면제도 한몫 했지요.”

―독자이셨습니까.
“아니요. 대전 병무청에서 누락시키는 바람에 그렇게 됐어요. 그 당시는 전도자나 목회자가 많이 없던 시절이었죠. 하나님 복음 사역이 더 급해서 그렇게 된 모양입니다. 어쨌든 하나님 은혜죠. 그 당시는 박정희 대통령이 병역 문제를 엄히 다스려서 미국 보낸 장관 아들도 불러들이던 시절이었는데 말입니다.”

―선대 때부터 내려온 신앙의 집안이었습니까.
“아닙니다. 내 때부터 시작했기 때문에 사실 핍박도 많이 받았어요. 그 당시 이강산 목사님, 이성봉 목사님 같은 분들에게서 은혜를 받고 열정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니까 하나님께서 은혜를 주신 모양입니다.”
―그럼 몇 살 때부터 믿었습니까.
“저는 그냥 주일학교부터 다녔어요. 육이오 끝난 뒤였는데 여덟 살부터 열심히 교회 다니면서 신앙생활을 하니까 어린애가 별스럽다고 유교 집안에서 핍박받고 그런 거지요.”

―교단 안에서 친한 분은 누구셨습니까.
“최승강 목사. 참 친했죠. 그런데 좀 일찍 떠나고 말았어요. 최은혜라고 딸이 있었는데 굉장히 사랑했죠. 그런데 그 딸때문에도 마음이 많이 아팠던 모양이에요.”

―부흥사는 어떻게들 되시는 겁니까.
“옛날에는 은혜를 받으면 부흥사가 되었어요. 60년대 70년대 성령운동이 일어나니까 그 당시 체험하고 은혜 받으면 사명을 강조하던 시절이었어요. 목회자도 많지 않던 시절이고. 또 성령의 체험 속에서 뜨거워지니까 복음 전하는 일이 인생의 최고 목표로 느껴졌어요. 그러니까 사명감에 대개 부흥사가 된 거죠. 우리나라에서 성령운동이 제일 먼저 일어난 곳이 충청도였어요. 성거산 집회, 흑성산 집회, 계룡산 집회 등에서 이성봉 목사, 박제봉 목사 등의 부흥회로 성령운동이 충청도에서 빨리 일어났어요. 옛날 오관석, 김충식, 강달희 등을 보면 다 충청도 사람들입니다. 그러다가 삼각산에서 집회를 하다보니까 서울에서도 성령운동이 일어나게 된 겁니다. 경상도 쪽에서는 용문산에서 성령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교회사적으로 육이오 이후에 성령운동이 처음 일어난 곳이 사실 충청도입니다. 처음에는 이북출신 부흥사들이었지만 나중에는 충청도에서 제일 많이 부흥사가 나왔죠.”

―그러면 목사님은 몇 살 때 부흥사로 소명을 받으신 겁니까.
“열일곱 살 때.”

―그 때부터 바로 부흥회를 시작하신 겁니까.
“당시는 열일곱 살만 되도 주일학교 선생을 다 맡고 그랬어요. 그러면서 열아홉 살 정도부터 집회를 해달라고 해서 시작하게 된 겁니다. 그러다가 72년에 전도사로 제천에 있는 교회로부터 청빙을 받게 되었어요. 전도사로 시무하면서 정식으로 부흥회를 다니게 되었습니다. 김제 남산교회 부흥회를 시작으로 연줄연줄 계속 나가게 되었어요. 옛날에는 신안 앞바다 섬에 있는 교회는 다 다녔습니다. 그래서 지방에서는 나 모르면 간첩이라고 할 정도였죠. 근래에는 도시 중심으로 부흥회를 다니고 있습니다만. 이렇게 살다보니 벌써 45년이란 세월이 지나가버린 겁니다. 근 반백년 부흥사역입니다.”

―목사님 기록을 보니까 목회사역 기간과 부흥사역 기간이 같더라고요. 그래서 이런 분이 다 계시나 했습니다. 제가 총회 전도국장 시절 일만교회운동을 하느라 부흥사들과 같이 지낸 적이 있었습니다. 부흥사들 설교가 중복되고 한정되어 있는 것같은 느낌을 받았습니다. 목사님은 설교 준비를 어떻게 하십니까.
“부흥사들이 은사를 가지고 설교를 하니까 제한적인 설교를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목회 설교나 부흥회 설교나 폭을 넓혀서 하고 있습니다. 부흥회 설교다 해서 말씀 중심으로 하지 않으면 열매가 없습니다. 부흥사일지라도 설교를 말씀 중심으로 해야지 열매가 있고 생명이 깁니다. 그래서 저는 말씀으로 하지 간증 집회 같은 것은 하지 않습니다. 간증하다보면 내가 드러나게 됩니다. 그게 하다보면 자기를 확대시키게 되요. 거짓말도 하다보면 습관이 돼서 자꾸 하게 되고 결과가 안 좋게 되죠. 게다가 그러면 성령이 역사하시지를 않아요. 내가 좀 부족해도 말씀 중심으로 하면 성령이 역사하셔서 은혜가 있게 되죠. 그러다보니 제 부흥회는 한 교회에서 여러 번 초청해서 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어요. 최승강 목사 교회 같은 경우에는 일곱 번이나 초청을 받았어요. 그런데 일곱 번째 하려는데 최승강 목사가 소천하고 말았어요. 그런데 후임 목사가 초청을 해서 그 교회 부흥회를 일곱 번 하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습니다. 최병헌 목사의 인천 낙원제일교회도 그 정도 했죠.”

―최병헌 목사도 부흥사인데요.
“그 분이 내 어렸을 때 간증 듣고 은혜를 받았다고 하면서 나를 초청했는데 여덟 번인가 했어요. 나는 최 목사를 몰랐는데 최 목사는 나를 잘 아는 겁니다.”

―목사님은 부흥사로서 화려한 경력을 가지신 분인데 선전은 안 하신 것 같네요. 
“나는 나 자신을 선전하거나 하지를 않고 열심히 부흥회를 다녔어요. 그런 걸 하면 죄인 줄 알았어요. 보수적이었죠. 우리는 애를 키워도 품에 안고 다니면 큰일 난 줄 알았으니까요. 성경대로 사명자는 부모형제를 버려야 된다고 믿었죠. 그러다보니까 내 자신을 알리는 일은 꿈도 못 꿨죠. 그런데 그렇게 하다보니까 더 오래 하는 것 같아요.”

―설교는 어떻게 준비하십니까.
“설교는 한 주 전에 본문을 정하죠. 그렇게 해야 부흥회를 주일 저녁부터 나가니까 설교를 준비할 수가 있죠. 마음속에 설교 본문과 내용을 담고 지냅니다.”

―설교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하시는군요.
“그렇죠. 생각을 많이 합니다. 목사가 설교 생각밖에 더 있어요. 사람 보는 것에서도 깨달음을 얻고, 만물을 보면서도 하나님의 교훈과 뜻을 발견하고, 그렇듯 항상 설교 준비에 마음이 꽉 차 있어요. 주부가 식사 준비를 위해 반찬을 늘 생각하듯이 말입니다. 그렇게 하고 설교 원고를 씁니다.”

―설교를 잘하는 김동호 목사도 생각을 많이 한다고 말하더군요. 
“아 그래요. 저도 생각을 많이 합니다. 자나 깨나 설교 생각이죠. 그게 생명이니까요.”

―결혼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우리 집사람하고 여섯 살 차이에요. 내가 좀 늦게 결혼을 했습니다. 33살에 했으니까요. 기다렸다가 했어요. 그때는 시절이 가난하고 세대주의가 강할 때라 주님 빨리 오시기를 바라던 때인데다 저는 빨리 주님 오셔야 한다는 믿음도 있어서 결혼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면 목사 사모하면 되겠다 싶어 기다렸습니다. 믿음도 좋고 얼굴도 예뻤어요. 교회 봉사도 잘 했죠.”

―자녀는 어떻게 되십니까.
“일남일녀입니다. 아들이 재작년에 목사가 됐습니다. 지금 캐나다 유학 가 있습니다. 딸은 예능 쪽인데 여기서 대학 나와 독일 유학 가서 바이올린 전공했어요. 그래서 스투트가르트 필하모니 오케스트라에 있어요. 아직 미혼입니다. 32살인데 유학파들은 결혼이 늦어져요. 독일은 대우가 좋잖아요. 그러니 갈등이 많죠.”

―어떻게 딱 둘만 나셨어요.
“우리 형제가 많아요. 내가 십 남매에 다섯째입니다. 그래서 형제가 많은 건 그렇게 원하지 않게 되죠.”

―자녀는 어떻게 키우셨어요.
“아들은 아내가 하나님께 바친다고 서원을 했어요. 아들이 커서 신학을 하는데 나는 목회자가 하도 많으니까 그만 두는 게 어떠냐고 넌지시 떠봤어요. 내심 안한다고 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은 하면서 말입니다. 그랬더니 본인은 하겠다고 하더라고요. 후회가 되는 건 아들한테 너무 엄하게 대했다는 겁니다. 집에서도 볼 때마다 인사를 할 정도였으니까요. 딸은 그렇지 않았는데 아들은 내가 상당히 어려웠던 모양입니다. 내 앞에서 한번도 아니오라는 말을 해본 적이 없을 정도입니다. 아들이 자신의 감정 표현을 나한테는 전혀 안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아주 자그마한 것까지도 말입니다. 그래서 좀 마음이 아픔니다.”

―목사님이 화를 내셨을 것 같지는 않은데요. 
“내가 잔소리는 안 해요. 그런데도 나를 그렇게 어려워하는 겁니다. 너무 어려워하니까 그 당시는 키우기는 편했는데 나한테 너무 눌리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유학으로 멀리 떠나고 나니까 마음의 빈자리가 더 큰 것 같네요. ”

―어디로 갔습니까.
“캐나다 밴쿠버로. 공부하고 적응하려니까 힘든 모양입니다. 손녀가 둘입니다.”

―며느리는 뭘 하십니까.
“이대 간호학과 나와 이대 부속병원에 있다가 결혼을 했죠. 지금은 내조만 하죠. 애들도 잘 키워요. 우리 손녀가(손톱을 내밀며) 요만큼 한마디도 나한테 반말이 없어요. 백 프로 존댓말을 써요.”

―아드님이나 따님도 목사님한테 존댓말을 쓰게 하셨겠죠.
“교역자도 기도할 때 말씀하게 해 주시옵소서 하는데 그런데 손녀는 말씀하시게 해 주시옵소서라고 말해요. 애가 얼마나 사랑스러운지 몰라요. 며느리가 참 잘 가르친 거겠죠. 그리고 사람이 나이를 먹으니까 손녀 보는 재미로 사는 게 상당해요. 그 아이만 보면 엔돌핀이 나오는 것 모양입니다. 금요일이나 토요일 집에 오면 내 품에서 자고 가곤 했어요. 이제 떠나고 나니 얼마나 허전한지 모르겠어요. 그 아이가 여섯 살 아이인데 나한테 오면 내 수준에 맞춰 이야기를 하는 거에요. 다른 사람들이 그 이야기를 들으면 내가 거짓말 하는 줄 알아요. 못하는 말이 없어요. 그래서 우리가 언어의 마술사라고까지 했어요. 아이한테.”

―목사님은 성격이 어떠십니까.
“우리는 외모로만 차분한 것 같지 내면은 급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설교도 빨리 하고 모든 것이 조금 지체하는 걸 못 보는 성격입니다. 그래서 시간도 칼날 같죠. 내 위치가 목사니까 겉으로 억제하는 것이지 실상 속으로는 성격이 굉장히 빠릅니다. 그래서 어떤 일이 시작되면 잠을 못 잘 때가 많아요. 생각을 거듭 하느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늘 잠이 부족해요.”

―수양관을 보면 규모가 굉장한데요. 지금 이만한 일을 이뤄놓으려면 굉장히 큰 일인데요.
“잔디만 2만 5천평입니다. 은혜의 전당 옥탑까지 내부는 다 대리석을 붙이고 외부는 화강암으로 했어요. 이런 수양관은 전국에 하나뿐입니다. CTS의 내 영혼의 노래 방송도 저기서 몇 번 했어요. 총회 일만교회운동 세미나도 계속 하고 있죠. 수양관에 한 100억 정도 들어갔어요. 저 독수리가 있는 수양관 문만도 2억5천이 들었습니다. 열두 대문처럼 문이 위엄이 있어야 사람들이 무시를 못해요. 문이 하찮으면 사람들이 막 들어와요. 저 설계도 일본의 유명한 건축가가 했습니다.”

―개선문 같아요. 저 독수리는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이사야 40:31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하는 말씀의 독수리를 상징하기 위한 것입니다. 수양관은 좋습니다. 수영장도 있습니다. 집회하는 아이들의 안전을 위해 만든 것입니다. 여름 행사 때마다 아이들이 물 사고를 당하곤 해서 말입니다. 전체가 5만 5천 평인데 나무하고의 싸움도 만만치 않아요. 교인들이 고생이 많습니다. 조경하느라 들어간 흙 값만도 엄청 들었어요. 목요일은 저도 새벽 끝나면 가서 열심히 일 합니다. 운동 부족인데 그걸로 메꿔요.”

―목사님은 집회 때 신유도 행하십니까.
“저는 기도만 해요. 교인들의 생활에 집중해요. 하나님을 섬기면서 복을 받고 누리는 삶을 강조합니다.”

―기억에 남는 집회가 있었습니까.
“그것은 대전에서 1979년도 열린 충북 체육관 집회일 겁니다. 그 집회가 컸어요. 당시 한 3만 명 모였어요. 그 때도 내 나이가 30대 후반의 어린 나이인데 말입니다. 사실 난 유신 반대도 해서 끌려 다니기도 했어요. 그때 이적이 많이 일어났어요. 앉은뱅이도 일어나고 불치병 걸린 사람들도 낫고 그랬어요. 이런 이적이 일어나니까 결신자가 수천 명이나 됐어요. 참 대단했어요. 3박 4일의 연합집회인데 내가 주최를 했어요. 충북 체육관 짓고 얼마 안되었을 때인데 꽉 차고 밖에까지 사람들이 줄 서 있었어요. 그때는 뜨거운 때라 그런 집회가 가능했어요.”

―지금하고는 어떻습니까.
“많이 다르죠. 옛날에는 강단에 서면 교인들이 은혜를 받으려고 눈들이 빛났어요. 그러나 지금은 은혜보다는 이벤트성이 강해요. 은혜를 받으려고 하기 보다는 구경을 하는 자세들이죠. 지금은 믿음이 걱정스러운 지경이 됐습니다.”

―어떻게 해야 믿음을 회복시킬 수 있을까요.
“말세 현상인 것 같아요. 돌리기 힘들 것 같아요. 목회자들이 그렇게 가요. 교역자들 스스로가 교인들 영혼이 아니라 신앙이 아니라 수평 이동을 위해 믿음이 아니라 영웅심으로 목회들을 하는 것 같아요. 숫자 확보나 큰 교회 만들면 된다 하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것 같아요. 교인들 영혼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없는 것 같아 안타까워요. 우리 정신하고는 안 맞아요. 내가 얘기해 봤자 나만 시대에 뒤떨어진 촌스러운 사람이 되는 겁니다. 나이 많은 사람이 말해도 듣지를 않아요. 저마다 잘 났다고 생각하니 말입니다. 말세에 인자가 올 때 믿음을 보겠느냐고 말씀했기 때문에 그냥 말세 현상으로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그렇게 같이 안 가려고 노력하는 것뿐이지 별 수가 없는 것 같아요. 나이도 70이 가까워지니까 말은 바르게 합니다.”

―유신도 반대하셨는데 요즘 정치는 어떻게 보십니까.
“나쁘죠. 세월호에 무슨 법이 필요해요. 애도해야죠. 정치인들도 보면 애국심이 없어요. 너도나도 무료를 부르짖는데 나라 망하면 어떻게 됩니까. 국민들 인기몰이 해 표나 끌어 모으려고 하는 것 아닙니까. 참 걱정스럽습니다. 영화를 보지는 못 했습니다만 애국심을 고취하는 국제시장 같은 영화가 많이 나와야 됩니다. 어떻게 해서 세워진 나라인데 정치인들이 표나 얻으려고 그러면 안 됩니다. 농촌도 잘 사는데 저마다 정부로부터 보상을 받으려고 야단들이에요.”

―교회 분쟁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단이 문제입니다. 또 목회자도 문제가 있고요. 참 목자라고 밥 안 먹는 것도 아니고 삯꾼이라고 해서 밥 안 먹고 사는 것도 아닙니다. 사명감이 있어야 되는데 그게 없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그런 정신이 사라지다보니 자기 것을 챙기려는 성향이 생기는 것 같아요. 그럼 흠점을 이단이 파고 들어오고 분쟁이 일어나게 되는 겁니다.”

―총회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내가 평동노회 총대 30년입니다. 연속으로 총대 30년 한 사람 많지 않을 겁니다. 그렇지만 정치는 하지 않습니다.”

―아니 총대 30년 하셨으면 정치 안 하시고는 안 될텐데요.
“사실 내막이야 다 알죠. 다 보면 총회 돈 눈먼 돈이라고 다 먹지만 다 그 대가를 치르더라고요. 총회를 악용하면 하나님께서 좋아하시지 않는 것 같아요.”

―교회 후계자를 세우는 것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우리 교단은 하나님의 예정과 뜻을 믿기 때문에 다른 교단들처럼 유행을 따라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세습이라는 말 자체를 성경적이지 못하다 생각합니다. 그런 말은 왕조나 독재 정권에서나 쓸 수 있는 용어라고 봅니다. 목회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종이고 노예인데 무슨 세습이라는 말을 붙일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뜻에 맡기는 믿음과 자세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나이를 먹으니까 하나님의 섭리를 더욱 많이 보게 돼요.”

―이제까지의 삶에서 아쉬운 것이 있다면 무엇이었습니까.
“아쉬운 게 있다면 내가 강북에 있었다는 겁니다. 올해가 우리 교회로서는 40주년이라 그간 주변을 사들이긴 했어도 워낙 이 지역이 땅이 없어요. 이 지역은 가난한 곳이에요. 그냥 먹고사는 사람들은 많아도 사업가는 그닥 없어요. 빈촌은 아니면서 모험을 하지 않는 안정적인 사람들로 주종을 이루고 있죠. 그래서 사실 내가 앞장서서 모범을 보여야 되는 지역입니다. 그러다보니 내가 늘 빚이 있습니다. 1월 한 달 바치는 헌금이 한 삼천 됩니다. 감당할 수 있다니 감사할 뿐이죠. 1975년도에 강남으로 나갔어야 했어요. 김선도 목사 같은 이는 여기 있다 그리로 갔어요. 내가 어리다보니까 그런 상황 판단이 덜 됐어요. 내가 스케일이 너무 작았어요. 여기 산도 좋아 기도하기 좋다고 눌러 앉았죠.”

―이제 후배 목사들에게 한 마디 조언을 부탁드립니다.
“목회라는 것은 하나님 앞이나 사람 앞이나 진실인 것 같아요. 재능이 좀 부족해도 진실하게 말씀을 전하고 진실하게 기도하고 진실하게 사람을 대하고 목회하면 목회 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더라고요. 우리가 무슨 목회를 하겠어요.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지. 같은 설교를 해도 진실하게 기도하고 전하면 은혜가 있는데 유행어를 외위 웃기고 인터넷을 이용해 지식을 내보여도 하나님이 역사하시지 않으니까 은혜가 없는 것 같아요. 하나님을 의지해야지 문명의 이기나 내 재주를 의지해서는 안 됩니다.”

2015-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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