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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정희와 김태현의 성막과 건축
    바람이 불어 - 윤동주 바람이 어디로부터 불어와 어디로 불려 가는 것일까 바람이 부는데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다. 내 괴로움에는 이유가 없을까 단 한 여자를 사랑한 일도 없다. 시대를 슬퍼한 일도 없다. 바람이 자꼬 부는데 내 발이 반석 우에 섰다. 강물이 자꼬 흐르는데 내 발이 언덕 우에 섰다. 물건은 사용되는(be used) 것이고, 사람은 사랑받는(be loved) 존재다. 그런데 오늘날 세상에선 사람이 사용되고, 물건이 사랑을 받는다. 그 반대가 성막과 건축의 디자이너 tBD(The Basic Design) 대표 서정희와 총괄대표 김태현 건축가의 관계다. 건축가(Architect)의 영어 어원은 '계획과 과제를 도안하고 지도하는 사람'(a person who designs and guides a plan, project, etc.)이다. 실제로 고대 건축가들은 '건축'일만 하지 않았다. 이런 전통은 현대까지도 이어지며 지폐에 자국의 건축가를 새긴 나라도 많다. 사실상 고대에는 거의 모든 왕이 통치자이자 동시에 건축가였다. 자신의 업적과 신에 대한 찬양, 자신의 예술 감각을 나타내기 위한 용도로 건축을 이용하였다. 물론 이런 왕들 중에 대중을 위한 건축을 한 왕들도 있다. 성막은 길이가 약 45.6m(100규빗), 폭이 약 22.8m(50규빗)인 뜰 가운데 세워졌고 뜰 사면은 휘장으로 가려져 있었으며 이 휘장은 청동으로 만든 기둥 60개로 지탱되었다(출 27:9-19). 뜰(마당) 안에는 번제를 위한 큰 제단이 있었고(출 27:1-8), 제사장들이 제사를 위하여 자기 몸과 제물을 씻는 청동 물두멍이 있었다(출 30:17-21). 뜰의 서쪽 끝에 세워진 성막의 성소는 목재 구조로 길이 약 14m(너비 1규빗 반의 판자 20개) 너비 약 4m(1규빗 반 되는 판자 6개를 나란히 놓은 폭)였으며, 두꺼운 휘장으로 성소와 지성소를 구분하였다(출 26:15-30). 성소 지붕은 제일 안쪽(덮개)에 청색 자색 홍색 실로 그룹 모양의 자수를 놓은 휘장으로 덮여 있었고(출 26:1-6), 그 바로 위에는 보온을 위해 염소 털 휘장이(출 26:7-13), 또 그 위에는 붉은 물 들인 숫양 가죽이(출 26:14), 그리고 제일 바깥에는 방수를 위해 해달의 가죽(출 26:14)이 덮인 4중 지붕 구조를 하고 있었다. 또 성소 내부에는 휘장 오른편에 진설 병상, 휘장 왼편에 금 등대, 그리고 휘장 바로 앞 가운데 분향 단이 놓여 있었다(출 25장). 또 휘장 안으로 들어가면 지성소가 있는데 거기에는 오직 언약궤만 있었다. 성소에는 제사장이 매일, 그리고 안식일마다 제사를 드릴 때 들어갔지만(출 27:21; 30:7; 24:3,8) 지성소에는 일 년에 한 번 속죄일에 들어갔다 (레 16:1-34, 히 9:7). 이것은 성소와 지성소의 거룩함의 차이 때문이었다. 즉 성소에는 제사장들이 봉사하는 예물과 기구가 놓여 있었으나 지성소에는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거룩한 언약궤(법궤, 증거궤)가 놓여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 두 장소는 단지 휘장 하나로만 가려져 있을 뿐인데 이 휘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를 예표하는 것으로서 따라서 훗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운명하셨을 때 이 휘장은 둘로 찢겨 졌다.(마 27:51, 막 15:38) 따라서 이제는 제사장과 일반인 사이의 구별이 없어지고 누든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가능해졌다(히 10:19-22). 이 사건은 성도들이 대제사장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이제까지 제한되었던 하나님의 존전(尊前)에 그 어떤 제약도 받지 않고 나아갈 수 있음을 시사한다.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히 10:20). 2023년 11월 21일 11:00 아차산로 345 tBD 사무실. tBD(the Basic Design) 대표 서정희 총괄대표, 김태현(콜롬비아 건축대학원 졸업) 기독언론인협회(회장 황규학) 회원 고정양, 김영배, 김효정, 소재열 간의 신앙과 교회 건축에 대한 대담이 이루어졌다. 김영배: 서정희 씨는 전공을 안 하셨는데 건축에 대해 많이 아시는 것 같은데요. 황규학: (총괄대표 김태현) 옆에 따라 다니다 보니까. (일동 웃음) 서정희: (손사래를 치며) No, No. 정보를 잘 아시고 말하세요. 김효정: 허위 보도. 허위 보도. (일동 웃음) 서정희: 저는 젊었을 때부터 집에 관심이 많아서 집안에서 많은 일들을 했잖아요. 김태현: 공간 디자인에 관심이 많았어요. 서정희: 그렇죠. 공간 디자인에 워낙 관심이 많았고 저는 그 기초가 성령의 감동을 받았다, 믿고 있습니다. 김영배: 그 기초가 언제부터 시작된 것이죠? 서정희: (1962년생) 1981년 19살 때 주님을 믿고 지금까지 저는 예화를 들 때 누구한테 얘기를 하면 브살렐과 오홀리압(출 31:2-6)을 꼭 예로 들어요. 모세가 시내산에서 내려와서 브살렐과 오홀리압에게 성막 건축을 맡기잖아요. 성소(聖所, Sanctuary)는 '거룩한 장소'라는 뜻으로, 하나님이 백성 중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처소(處所)'다. 성소는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인 십계명을 보관하는 장소였고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 사함이 이루어지던 곳이었다. 외소(外所)와 내소(內所)로 분리된 구조였고 최초의 성소는 이동이 가능한 천막 형태였기 때문에 성막이라고 불렸다. 성소를 지을 때 실을 꼬아서 만든 천막으로 지었기 때문에 이를 장막(帳幕)이나 성막(聖幕)이라고 했다. 서정희 씨가 말을 이었다. 서정희: 그 성막을 그에게 맡긴 이유가 딱 하나예요. 많은 사람에게 성막 짓는 이야기를 해봐야 성령의 감동이 있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알아들을 수가 없는 거잖아요. 그런데 브살렐과 오홀리압은 성령 감동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그 감동 때문에 여러 가지 일 그러니까 여러 가지 재주가 있었다고 출애굽에 기록되었습니다. 그래서 실 짜는 일 가구 짓는 일 모든 것들에 브살렐과 오홀리압에게 성령께서 임했던 것처럼 저에게도 그들의 영을 부어달라고 기도를 했습니다. 그래서 그 영이 제게 임해서 남들보다 확대해서 볼 수 있는 눈을 주시고 그 다음에 성막을 보지 않아도 성령의 감동으로 지은 것처럼 우리 건축가 선생님들이 하지 못 하는 것까지도 눈으로 볼 수 있는 눈과 마음을 열어주셨고 계시의 영을 부어주셨고 그것을 실현할 수 있는 창의적인 영도 주셨다고 저는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오랜 세월 살림하면서 훈련을 했더니 그 열매로 국제대학원에서 초빙교수로 공간디자인을 3년 가르칠 수 있는 기회도 받았습니다. 저도 외부로 다니면서 강사를 했었는데 결국 정교수가 될 정도로 주님이 인도해주신 거로 알고 있습니다. 제가 배워서 한 것보다 더 많은 일곱 권의 책을 냈는데 다 집에 관련된 것이었습니다. 사실 제가 웰빙(well-being)이라는 단어도 처음 만들었고 무크 형태의 책을 우리나라에서 처음 만들었고, 그리고 글을 써도 자서전을 쓰든 에세이를 쓰든 다 집 안에서 썼고 묵상도 집 안에서 했습니다. 이렇게 하다 보니까 결국은 우리의 가정 교회가 점점 확대되어 작은 교회가 되는 것처럼 작은 것을 귀히 여기고 그 작은 것에 무엇을 담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만 담겨진다면 크든 작든 금그릇이든 은그릇이든 질그릇이든 저는 같다고 봅니다. 어렸을 때부터 기도했던 것들이 꾸준한 훈련과 그 공교함과 정교함이 결국은 건축팀을 만나서 더 성숙 되고 확대된 것 같아요. 그래서 감히 제가 함께할 수 있는 이런 영광을 누린 거죠. 김태현 대표님이 저를 써주신 거죠. (웃으며) 감사하게 된 거죠. 소재열: 궁금한 게 있는데 저는 항상 실익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돈을 벌 수 있습니까? 서정희: 저는 그걸 어떻게 생각하느냐면 우리가 정말 묵직하게... 주님은 간사함을 싫어하시잖아요.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요 1:47, 48) 말씀하시잖아요. 간사하지 않고 성실하고 정말 주님의 눈을 바라보고 흔들리지 않고 요동하지 않는 그런 자세로 열심히 하다 보면 결국 실익이 생기지 않을까요. 황규학: 신앙적으로 굉장히 훌륭하네요. 서정희: 내가 이 건으로 당장 이익이 없어도 그러나 결국에는... 소재열: 믿음이 좋은 분들하고 대화하면 제가 힘들어하거든요. 그러나 이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유지되기 위해서는 뭔가 이익이 창출되어야 하거든요. 서정희: 그렇지 않으면 엄청 고달프죠. 김태현: 건축 디자인 회사가 베이직(기본)을 잘 고수하면 큰돈을 벌 수가 없습니다. 벌 수 있는 방향으로 나아가면 자기가 하고자 하는 것을 버려야 합니다. 저희는 이 건축 디자인 공동체를 만들었을 때 돈을 버는 문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 우리가 기본에 충실하고 인내하면서 디자인을 해나가면서 우리(회사) 식구들이 먹고 살면 돼요. 황규학: 철학이 분명하네. 서정희: 그러면 우리는 하늘나라의 상급이 많고 하나님이 보고를 열으시면... 김태현: 이걸 사업으로 일으키고 하는 문제보다 저희는 신앙으로 멀리 보고... 소재열: 그렇게 말씀하셔야 돼요. 그러면 하나님께서 주시죠. 서정희: 주님이 보고를 열으셔야지, 사람을 통해 사람을 설득시키고 싶지 않다는 거예요. 황규학: 소 박사가 보고 배워야 돼요. 소재열: 그러니까 나머지는 하나님 주신다니까. 그러나 그걸 무시할 수는 없어요. 김태현: 부끄러운 과거지만 소위 명예와 돈 이런 걸 건축 디자인의 하나님 주시는 달란트로 여기고 그것들에 접근하려고 노력했던 세월이 많이 있었어요. 선배님들 앞에서 죄송한 말씀인데 제가 부끄러운 과거를 지나고요. 느낀 것이 많이 있어요. 서정희: (웃으며) 깨졌다는 얘기에요. 김태현: 그걸 쫓아 올라가다가 상당히 어느 정도까지 접근을 했어요. 그런데 한순간에 무너지더라고요. 한순간에. 전혀 예기치 못했던 이유로 그렇게 됐어요. 해외 일을 많이 했었어요. 제가 주로 일했던 나라들이 러시아 연방 우즈베키스탄, 카지스탄 전쟁 나기 전 우크라이나, 몽골, 이런 러시아 언어를 쓰는 나라들, 러사아를 큰형님으로 여기는 나라들, 중앙아시아를 포함해서 최근까지도 우즈베키스탄에서 대통령 관련 프로젝트를 했었어요. 새로운 정부 출범과 동시에 건설부에 자리가 있었어요. 그래서 그런 일들을 해나가면서 그때 당시 명예와 돈을 하나님 주신 달란트를 이용해서 추구를 했어요. 그렇게 여러 일을 추진하다 자금력이 모자라 중단을 하게 됐어요. 그래서 중국과 터키 정부가 들어오게 됐어요. 그 두 정부가 들어오면 프로젝트만 들어오는 게 아니라 자기들 자원과 인력이 전부 들어와요. 그렇게 되니까 제가 했던 일이 중국과 터키 기업들이 들어와서 다 넘어가게 되죠. 그런 과정에서 우즈베키스탄 대통령도 어쩔 수 없이 저랑 멀어지게 되죠. 그렇게 되면서 2, 3년 어렵게 되죠. 싱가폴에 본사가 있고 거의 100명 정도 직원이 있었는데 다 손을 놓게 됩니다. 그런 과거가 있었습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 일의 공간을 만들어 주셨다는 생각을 합니다. 이제 tBD를 기점으로 작지만 성실하게 노력을 하려고 합니다. 황규학: 건축과 다른 문제인데 두 사람이 언제부터 알게 되었습니까? 서정희: 이 문제는 30년 전으로 돌아가야 돼요. 우리 친정하고 같은 지역에서 함께 살았어요. 그런 거는 지금 중요한 게 아니니까 개인적으로 나중에 알려드릴게요. 소재열: 교회를 상대로 일을 하시면 아까 말한 것처럼 돈이 개입되잖아요. 시험 많이 듭니다. 감당하셔야 될 겁니다. 서정희: 그런데 우리는 지금 꼭 교회만 하는 건 아니예요. 교회는 저도 개인적으로 겪어봤는데 경력이 40년이니 안 겪어봤겠습니까. 그러나 주님이 저희에게 주신 것들이 다른 거예요. 저는 어제도 묵상하면서 '주님 저를 영화롭게 하시옵소서. 주님께서 제게 주신 것들 다 주님께로부터 온 것을 알았고 그것들을 통해서 제가 흘려보내야 될 것들도 주님이 주신 것임을 알았습니다. 주님 주신 말씀을 통해서 전파되는 것으로 저를 다시 영화롭게 해주소서. 저는 그렇게 기도를 해요. 그러니까 모든 기준을 세상으로 삼으면 저는 시험 들어서 하루도 못 살아요. 그러나 주님과 저와의 교제 가운데서만 머물면 이길 수 있다고 봅니다. 어차피 이 세상은 사단이 밀 까부르듯 우리를 까부를 것입니다(눅 22:31-32). 그러나 내가 믿음으로 무장되어 있다면 전신갑주를 입고 나아가야 될 것입니다. 이길 수 없다면 들어서지도 말았어야죠. 전쟁터에 나갈 때는 무장하고 나가듯 영적으로 기도하며 나아가는 겁니다. tBD를 세우셨을 때는 주님께서 믿고 맡기실 일들이 있을 거고, 보내주시는 사람이 있을 것이고, 맡겨주시는 기업들이 있을 것입니다. 또 저를 유방암에서 다시 살리셨다면 주님이 저에게 주시는 일이 있다는 것으로 믿습니다. 또 주님 앞에 갈 때는 어떤 말들을 해야 될까, 생각한다면 제가 부끄럽지 않도록 하루를 더 열심히 살아야겠지요. 그런 마음과 각오로 지금 살고 있습니다. 어쨌든 중요한 건 우리는 하나님이 일하시고 행하시고 성취하신다는 겁니다. 누가 물 주고 자라게 합니까. 여호와께서 자라게 하시는 거잖아요. 내가 감히 어떻게 합니까. 주님 그렇지 않습니까. 안도 다다오(安藤忠雄, Tadao Ando, 1941년 9월 13일~ )는 일본의 세계적인 건축가이다. 안도는 한 편의 소설 같은 삶을 살았는데, 건축가가 되기 전에 트럭 운전사와 권투선수로 일했고, 건축에 대해서 전문적인 교육을 받은 일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1969년에 그는 회사를 설립했고(firm Tadao Ando Architects & Associates), 1995년에는 프리츠커 건축상을 수상했다. 그는 수상 상금 십만 달러를 고베 지진 고아들에게 기부하였다. 그의 건축은 자연과의 조화가 두드러진다. 그의 건축물 속의 '물'은 얕고 조용하며 잔잔하다. 또한, 건축물과 매우 인접하여 하나로써 인식된다. 그렇기 때문에 편안함과 경건함을 준다. 자연과의 조화와 함께 큰 특징으로 보여지는 것은 건축작품이 기하학적으로 완벽하다는 것이다. 근대건축의 아버지라 불리는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그의 작품과 유사한 면을 보이고 있다. 건축교육을 제대로 배운 적이 없는 오사카 '촌놈' 안도는 건축 여행을 하면서 롱샹과 라투레트를 오랜동안 혼자 공부했다. 스위스 예술고등학교에서 배운 그림이 건축교육의 전부였던 시골뜨기 코르뷔지에는 안도의 롤모델이자 영웅이었다. 안도 다다오의 대표적인 설계작품으로는 1988년에 지은 오사카의 갤러리아 아카와 1989년에 건설된 '빛의 교회'(光の教会, 히카리노쿄카이)가 있는데 그의 건축적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교회의 정식 명칭은 '이바라키 가스가오카(茨木春日丘)'로 1989년 준공되었다. 예배당, 홀, 목사관은 모두 안도 다다오 씨의 설계다. 보통의 경우라면 십자가가 걸려있는 예배당 대신에 정면 벽면에 십자 모양의 틈을 만들어 놓아 그곳으로부터 빛이 들어와 아름다운 십자가가 나타나도록 설계됐다. 예배당 제단 뒤 벽면에 가로와 세로로 만들어진 틈, 외부로부터 빛이 들어와 찬란하게 빛나는 빛의 십자가가 나타난다. 예배당의 바닥과 의자 등은 빛의 십자가가 자아내는 빛을 효과적으로 보이기 위해 일부러 검은색으로 칠해져 있다. 심플한 구조인 만큼 모든 것이 철저히 계산된 설계, 간소하면서 작은 예배당이면서도 명암의 조절로 차분해지고 마음이 평온해지는 공간이다. 끌려서 안으로 들어가 음미하기 시작하면 계속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떠나기가 어려워진다. 빠져나오기가 힘들다. 모든 걸작들이 그렇듯이... 서정희 씨는 tBD 건축사무소 대표이며 국제대학교 산업디자인 초빙교수, 영동대학교 협력 교수이다. 김태현 씨는 우즈베키스탄 건설부 수석자문이면서 콜럼비아대학원을 졸업하고 현재 아주대학교 건축학과 겸임교수이다. 서정희 씨는 첫 프로젝트로서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측에 소속된 캠퍼스 복음화와 온 가족을 위한 전략적인 교회로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대전의 오메가교회를 건축하게 되었다고 한다. tBD 대표 서정희 씨는 "시골이든지, 작은 교회이든지, 그 공간에 맞게 인테리어나 교회 건축을 할 수 있다"라고 했다. tBD 총괄대표 김태현 씨는 "하나님 말씀, 십자가로 이루어진 예배당, 자연, 미래에 대한 공간을 만드는 경건성과 실용성에 관심을 갖고 있다"라고 했다. 윤동주 시인은 ‘바람이 불어’에서 "바람이 자꾸 부는데 내 발이 반석 위에 섰다. 강물이 자꾸 흐르는데 내 발이 언덕 위에 섰다"라고 자신의 괴로움을 성찰했다. 성경은 말씀한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단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눅 22:31-32 2023-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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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8
  • 함신익의 전도 심포니
    함신익(咸信益, 1957년 10월 27일 ~ )은 대한민국의 관현악단 지휘자이다. 현재 함신익과 심포니 송 예술감독이며 그 외 국내에서는 대전시립교향악단과 KBS 교향악단에서 지휘봉을 잡았었다. 그는 1995년 한국인 최초로 예일 대학교 음악대학 지휘학과 교수가 됐다. 2010년 10월 뉴욕 카네기홀에서의 상임 지휘자 함신익과 KBS 교향악단의 연주는 New York Times로부터 “존경받을 만한 연주”라는 평론을 받았다. 영국의 The Financial Times는 함신익과 대전시향의 카네기홀 연주를 "확실한 자부심과 확실한 헌신, 열정과 뛰어난 정교함이 어울린 음악"으로 평가하였다. 예일대 명물 교수 함토벤으로도 불리는 세계적 지휘자 함신익은 합동 교단의 중진 함성익 목사의 친동생이다. 심포니 송(Symphony S.O.N.G; Symphony Orchestra for the Next Generation) 오케스트라는 2014년 8월 23일 예술의 전당에서 창단연주회를 개최하였다. 그 오케스트라가 2023년 10월 29일 국립현대미술관 창동 레지던시 인근 창성교회(담임 함성익 목사)에서 연주를 했다. 함성익 목사가 성경 누가복음 15:11-24 제목 '돌아온 둘째 아들' 설교하고 축도했다. 이어진 창성교회 행사는 삼양교회 설립자 성자의 풍모를 지닌 함영진 목사의 둘째 아들로 세계적 지휘자가 된 함신익의 '심포니 송' 연주가 이어졌다. 그와 함께 피날레로 '새 생명 축제 VIP 초청 주일'을 위해 창성찬양대도 피터슨의 '아름답다 저 동산'을 함신익 지휘로 찬양했다. '베토벤 바이러스'의 강마에의 모델로도 알려진 바가 있는 마에스트로 함신익은 그의 친형 함성익 목사가 젊은 찬양대 지휘자 시절 제일 좋아하는 '아름답다 저 동산'으로 각종 경연대회에 참여해 상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함신익은 예일대 지휘과 교수로 20년 넘게 교육현장에서 우수한 오케스트라 단원들을 배출시켰고 그의 지휘 문하생들은 세계 주요 무대에서 활동하고 있다. 새로운 시대에 적응하는 오케스트라를 구축하기 위해 함신익은 현대음악에 깊은 관심을 갖고 한국오케스트라에 기품 있는 새로운 음악을 전달하는데 힘을 기울이고 있다. 매년 상하이 심포니와의 현대음악제 개막연주를 지휘하고 있으며 우루과이 국립오케스트라를 비롯한 세계 유수의 오케스트라의 초청을 받아 세계 무대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다. 베토벤의 음악은 보편적이다. 전 세계 어디를 가더라도 그의 음악은 모든 사람에게 통한다는 말이 있다. 그렇듯 함토벤이라는 평을 받는 함신익이 연주 홀이 아닌 교회 '새 생명 축제 VIP 초청 주일' 연주회에서 지휘하는 전도 심포니 음악을 듣고 지휘 몸짓을 보니 감흥이 달랐다. 그는 선율 자체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지휘자가 아니라 성령의 감동으로 선율을 발전시켜 나가는 측면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능력을 발휘한 지휘자 같았다. 성경은 말씀한다. 아직도 상거가 먼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들이 가로되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 하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저희가 즐거워하더라 눅 15:20-24 2023-1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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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0-31
  • 이승만은 누구인가
    광주에서 서울로 가는 고속열차에 탔다. 첫 번째 정차 역은 전 총신재단이사장 김기철 목사가 목회하는 정읍. 1946년 6월 3일 이승만이 ‘남한만이라도 선거해서 정부 세우자’고 연설한 정읍동초등학교가 있는 곳이다. 지금 돌아보면 참 훌륭한 역사적 용단이었다. 그러나 요즘 같은 또래의 목사일지라도 우파와 좌파가 만난다면 그것에 대해 이런 말이 오갈 수 있을 것 같다. “6·25 터지니깐 국민들 보고 안심하라 방송해놓고 다리 끊고 도망쳤는데 뭘 잘해?” “전쟁 나면 당연히 ‘우리 군이 잘할 테니 걱정 마세요’라고 방송하지 ‘큰일 났으니 도망가세요’라고 방송하냐? 갑자기 밀고 내려오니깐 반복해서 틀어주던 라디오도 못 끄고 화급히 후퇴한 거지. 한강 철교도 이승만이 끊으라고 한 게 아니고 군에서 안 되겠다 싶어 끊은 거야.” “이승만은 반민특위(제헌국회에서 1948년 9월 7일 국권강탈에 적극 협력한 자, 일제 치하의 독립운동가나 그 가족을 악의로 살상·박해한 자 등을 처벌하는 목적으로 제정한 반민족행위처벌법)를 해산시킨 친일파잖아.” “그때는 국민 80%가 글도 못 읽고, 제주 4·3 여순 사건 터져서 혼란스러운데 정치인들끼리 테러하고 조폭이 주름잡던 시대였어. 그런 상황에서 일본이랑 일 좀 같이 했다고 관료들 다 내쳐버리면 나라가 어떻게 되겠냐? 이승만은 일본이 반대해도 독도를 실효적으로 지배하고 대마도도 우리 땅이라 주장하면서 대한해협에서 고기 잡던 일본 어선들 막 잡아들였어. 이래도 이승만이 친일파냐? 네 말대로면 이승만보다 친일파 훨씬 많이 기용한 김일성도 친일파겠다.” “미국 꼭두각시 노릇 하느라 민족이 분열되고 전쟁까지 했는데?” “남한에서 선거도 하기 전에 김일성은 이미 소련 지원 받아서 군대 만들고 정부 만든 상태였어. 이런 상황에서 김구랑 김규식이 김일성을 만나봐야 협상이 되겠냐? 난 전 세계 절반이 공산화되는 이 거대한 물줄기를 조그만 반도 끄트머리에서 온몸을 바쳐 막아내고 자유민주주의를 지켜낸 게 민족을 위한 최선의 선택이라고 봐. 그 과정에서 이승만은 미국에 전혀 순종적이지 않았어. 오히려 빨리 휴전하고 싶은 미국이 이승만을 없애버리고 새로운 정권 세우려 했을 정도지. 굴하지 않고 직선제 개헌해서 2대 대통령이 된 이승만은 불리하게 진행되는 휴전 협상을 뒤집으려 반공 포로를 석방해버리는 벼랑 끝 전술을 썼어. 그렇게 미국한테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얻어 내 대한민국 침범은 곧 최강대국 미국 침범과 같게 되는 시스템을 만든 거라고. 강대국들 사이에서 언제 먹힐지 모르던 나라가 안보 문제를 해결해서 번영의 기반을 마련한 거야. 우크라이나 봐. 미군이 주둔했다면 감히 러시아가 쳐들어오기나 했을까?” “어떻게 부정선거 저지른 독재자를 전광훈처럼 옹호하냐?” “뜬금없이 전광훈은 왜 나오냐. 이승만은 경쟁 후보였던 조병옥 사망으로 당선 확정이었어. 부통령 선거에서 자유당 사람들이 장난친 거지. 독재자는 말이야, 국민의 재산을 국유화해놓고 제 맘대로 해. 김일성이 한 무상 몰수, 무상 분배가 바로 그거야. 맘대로 매매·상속도 못 하는데 뭔 분배? 독재 강화 수단이지. 이승만은 유상 몰수, 유상 분배해서 국민이 자유롭게 처분할 수 있는 사유재산을 늘려줬어. 국민에게 ‘지켜야 할 나의 것’을 만들어줘서 6·25 때 용감히 싸울 원동력이 된 거야. 그리고, 세상 어느 독재자가 시위 좀 한다고 하야하냐? 소강석이 칭송하는 등소평이 천안문에서 한 것처럼 탱크로 밀어버리지. 이승만은 시위하다 다친 학생이 있는 병원에 가서 ‘부정을 보고 일어서지 않는 백성은 죽은 백성이다. 학생들이 참으로 장하다’라고 말했어. 게다가 국민이 한 사람이라도 더 똑똑해지길 바라며 부족한 재정에도 초등 의무교육을 시행한 이승만이 과연 독재자일 수 있을까.” “그래도 초대 대통령은 목숨 바쳐 무장 투쟁한 김구였어야 해!” “당신은 왜 잘사는 대한민국에서 문재인처럼 누릴 거 다 누리면서 건국에 몸 바친 이승만은 싫어하고 김구만 좋아하냐? 국제정세를 잘 알고 활용한 이승만 아니었으면 우리는 김씨 왕조 밑에서 노예로 굶주리고 있었을 거야. 이승만이 원자력을 육성했으니깐 이렇게 싼값에 고속열차도 탈 수 있는 거지. 물론 이승만이 잘못한 점도 있었지만 넌 구구단도 못하는 상태에서 바로 미적분 할 수 있냐? 미국도 1965년에 흑인한테 처음 투표권 줬고 스위스는 1971년에 여성한테 처음 투표권 줬어. 식민지를 막 벗어나서 모든 게 취약했던 나라의 첫 지도자가 생존 문제를 해결했으면 잘한 거 아니야. 지금의 대한민국을 있게 한 게 ‘정읍 선언’이야. 이승만이 옳았다고!” “와, 너 고등학생 때는 안 그랬을 것 아니야. 이해찬과 달리 같은 용고 나온 놈이 어쩌다 극우로 변해버렸냐.” “이승만 존경하면 다 극우냐? 3대 대통령 선거 때 보면 오히려 대구가 좌익 조봉암을 72% 지지하고 전라남도가 이승만을 72% 지지했어. 전라도가 우파의 본산이었다고.” 이승만 대통령은 어떤 인물이었을까. 이승만은 독립협회가 해산된 뒤 아버지 흥선 대원군과 달리 무능하고 비굴한 고종의 양위 문제에 연루돼 1899년 1월 체포되어 한성감옥에 투옥되었다. 해방 후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을 지낸 이승만은 근대 한국의 대표적인 ‘기독교 정치인’이라 할 수 있다. 1875년 전주이씨 몰락, 양반의 ‘6대 독자’로 출생하여 아버지 종교인 유교와 어머니 종교인 불교에서 영향을 받아 유년기를 보낸 그는 어려서부터 과거시험을 위해 유학을 공부하였으나 1894년 갑오개혁으로 과거제도가 폐지되자 ‘영어를 배워 출세할 목적으로’ 배재학당에 입학하였다. 미감리회 선교부가 설립한 이 학교에서 수학하는 동안 영어공부에 몰두하였고 선교사와 토착 전도자들이 전하는 기독교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하지만 선교사들이 소개한 서구 국가의 정치적 기본 개념인 ‘자유와 평등’ 가치에 눈을 뜨게 되었다. 이것을 바탕으로 협성회와 독립협회에 관여, 급진적 정치 개혁 운동에 적극 참여하게 되었고 결국 그 일로 1899년 수구파에 의해 체포되어 한성감옥에 갇혔다. 어두운 감방 안에서 “사형을 받을 수도 있다.”라는 절망과 두려움 속에 배재학당 시절 들었던 선교사의 설교가 기억나면서 기도를 하였고 몰래 들여온 성경을 읽으면서 마음의 평안을 느끼는 ‘이상한 체험’을 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선교사와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인 선입견이 사라지고 오히려 절대자의 손에 자신의 운명을 맡기기로 종교적 개종을 하였다. 그런 이승만이 1904년 2월 7일 수감 된 한성감옥에서 러일전쟁 발발 소식을 전해 들었다. 그리고 깊은 생각에 잠긴 그는 12일 뒤인 2월 19일부터 넉 달 동안 비장한 심정으로 '독립정신'(獨立精神, The Spirit of Independence)을 저술했다. 당시 대한제국의 문제점과 주변 열강의 움직임 및 대한제국 사람들이 해야 할 일들을 저술하였으며 기독교 입국론을 주장하였다. 그는 조선 성리학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서구 열강이 기독교에 기초하여 발전된 문명을 이룩한 것을 서술하면서 한반도에 기독교를 이념으로 한 새로운 국가를 건설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중등 이상 사람이나 한문깨나 안다는 사람은 대부분 다 부패하고 타락하여 대한의 장래가 맨 아래 인민들에게 달려 있기에 이승만은 무식하고 천하고 어리고 약한 형제자매들을 위해 순 한글로 이 책을 집필했다. 집필 중 이승만의 지인들을 중심으로 읽혔으며 탈고한 1904년에는 그에게 적대적이었던 환경 때문에 대한제국 내에서 출판할 수 없었다. 이후 이승만이 미국으로 건너간 뒤 1910년 2월 10일 로스앤젤레스 대동신서관에서 발간되었다. 이 책은 일제강점기 내내 일본 제국에서 금서로 지정되었다. 서문에서 그는 집필 동기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지금 우리나라에 독립이 있다, 없다 함은 외국이 침범함을 두려워 함도 아니요, 정부에서 보호하지 못함을 염려함도 아니요, 다만 인민의 마음속에 독립 두 글자가 있지 아니함이 참 걱정이라...” 구성은 51장과 후록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1~10장에는 조선이 처한 상황을, 11~25장에는 민주주의와 자유·백성의 권리·의무를, 26장부터는 국제정세를 기록했다. 주요 내용은 외국의 침범이나 정부의 무능보다 더 큰 문제는 백성이 독립심을 갖지 못하는 상태, 곧 인민의 심성에 뿌리내린 노예근성이라는 지적이다. 인민이 독립심을 갖기 위해선 스스로 고귀하고 존엄한 존재라는 믿음을 가져야만 한다. 그러한 강렬한 믿음 위에서만 백성은 권리를 가진 근대적 자유인으로 거듭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승만의 주장은 모든 것의 근본을 기독교로 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청년 이승만은 감옥 속에서 근대 구미 문명의 기초에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실천하는 계몽된 개인(enlightened individual)이 놓여 있음을 보았다. 그는 사람들 모두가 계몽된 개인으로 거듭나지 않고선 제대로 된 근대국가가 세워질 수 없음을 내다보았다. 조선은 한때 노비의 수가 전체 인구의 30~40%를 넘어섰던 신분제 사회였다. 소수 엘리트를 제외한 기층 민중은 신분적 억압과 경제적 빈곤 속에서 정신적 노예근성을 벗어날 수 없었다. 이승만은 바로 그런 평범한 사람들을 향해서 스스로 자기 의지를 발휘해 자신의 운명을 개척하는 독립적인 인간으로 태어나야 한다고 촉구했다. 그는 “무식하고 천하고 어리고 약한 형제자매들”이 모두 스스로 하늘이 준 인권을 갖고 태어난 자유인임을 자각해야만 국가의 독립이 유지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승만은 몰락한 왕족의 후예로 태어나 유교 경전을 익히며 과거시험을 준비했던 인물이다. 그런 이승만은 감옥 속에서 갖은 고문을 당하며 생사의 갈림길에 섰을 때, 간절한 기도 속에서 내면의 절대자 하나님과 직면하고 스스로 독립적 개인으로 거듭나는 체험을 했다. 이승만은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으로 건국의 기초를 닦은 인물이다. 그의 내면에서 일어난 전향의 체험은 단순한 개인사에 머물 수 없다. 이따금 한 사람의 온전한 전향은 역사적 큰 변화의 동력이 되기도 한다. 1945년 분단 이래 북한의 지도부는 공산주의 명령경제, 폐쇄적인 고립주의, 반민주적 집단주의, 일인 지배 수령유일주의, 공격적 종족주의를 채택해왔고 그 결과 오늘날까지 세상에서 가장 억압적이고 가난한 전체주의 세습 전제 정권으로 남아 있다. 정반대로 남한의 지도부는 인류적 보편가치를 선양하며 자유민주주의의 이념 아래 개방적 시장 경제, 수출주도 산업화 전략, 창의적 개인주의, 경쟁적 다원주의, 범인류적 국제 연대를 추구했기에 자유롭고 민주적인 세계 10위권의 경제 부국으로 성장해 있다. 결론적으로 김일성의 주체사상은 오늘날 북한을 만든 악마적 이념이었고 이승만의 독립정신은 대한민국의 발전을 이끈 건전한 국가 철학이었다. 중국의 문화혁명 당시 홍위병들은 모택동이라는 독재자의 정신적 노예가 되어 좀비 떼처럼 날뛰었다. 마찬가지로 1980-90년대 대한민국에도 김일성의 홍위병을 자처했던 주사파가 있었다. 중국의 홍위병과 한국의 주사파는 과연 왜 그토록 어리석은 개인숭배의 노예가 되고 말았나? 독립정신을 버린 채 좀비 정신에 빠져 스스로 생각하길 멈췄기 때문이다. 예나 지금이나 독립심을 잃은 개인은 자유와 인권을 빼앗긴 채 전체주의 정권의 노예가 되고 만다. 청년 이승만이 7년 감옥살이에서 깨달은 진리다. 그러나 베이징에서 중국을 “높은 산봉우리”라 칭송했던 전직 대통령 문재인이 새로 책방을 열은 모양이다. 그 책방 맨 앞 진열대에 이승만의 '독립정신'을 놓아두고 그곳을 찾는 사람들에게 파는 것은 고사하고 그런 책이 있다는 사실이라도 알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 성경은 말씀한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롬 8:31-32 2023-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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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6-27
  • 하나님 외교관 손문수 목사
    19세기 프랑스 외교관 샤를 모리스 드 탈레랑 페리고르는 외교적 수사의 의미를 이렇게 정리했다. "외교관의 '그렇다'라는 말은 '고려해 본다'라는 의미이고 '고려해 보겠다'라고 말하는 건 '안 된다'는 의미다. ‘기도해 보겠습니다’도 그런 의미의 범주에 들어간다. 하지만 '안 된다'고 말하는 자는 외교관이 아니다. 그렇듯 목회에 있어서도 손문수 목사의 경우처럼 외교적 수사의 효용은 여전히 유효하다. 그래서 손문수 목사의 행동 지침은 'When they go low, we go high.' 저들이 저급하게 가도 우리는 품위 있게 가자는 외교관을 닮았다. 순복음영산목회대학원(원장 장혜경 박사) 총동문회 회장연임 감사예배 및 정기총회가 2023년 6월 12일 오전 순복음영산목회대학원 대예배실에서 개최되어 손문수 목사(동탄순복음교회)가 취임감사예배를 드리고 정기총회를 가졌다. 이날 감사예배는 이평수 목사(총무, 다산충만한교회)의 사회로 드렸다. 편정자 목사(부회장, 주신은혜교회)의 대표기도 후 주미 목사(서기)가 마 28:18-20 성경을 봉독했다. 예수께서 나아와 일러 가라사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손문수 목사(회장, 동탄순복음교회)가 ‘지상명령’ 제목의 말씀을 전했다. “목회자들이 실천해야 할 유일한 목회방법이 지상명령입니다. 예수님의 지상명령의 가장 중요한 핵심내용을 알아야합니다. 먼저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는 것으로 그 방법은 눅 24:49(능력), 행 1:4-5, 8(성령), 2:1-4 말씀의 약속대로 성령이 임하면 권능이 생겨 귀신을 쫓아내고 병든 자를 고치는 역사가 일어나 사람들이 몰려오게 됩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예수 그리스도 이름을 믿게하고 제자를 삼아야 합니다. 그리고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모든 말씀을 한 말씀도 빼지 않고 가르쳐 지키게 하는 것입니다.” 환영사는 장혜경 박사(순복음영산목회대학원 원장), 박영숙 목사(순복음삼마교회)와 연충복 목사(증경회장, 금촌순복음교회)가 축사하고 주술람미 목사(증경회장)와 윤석원 목사(1기 회장)가 격려사를 하고 손문수 목사(회장, 동탄순복음교회)가 순복음영산목회대학원(원장 장헤경 박사)에 장학금을 전달했다. 이평수 목사(총무, 다산충만한교회)가 광고 후 헌금축복 및 축도로 감사예배를 마쳤다. 정기총회는 손문수 회장의 진행으로 서기 주미 목사가 회원 점검, 부회장 문명자 목사가 대표기도, 서기 주미 목사가 서기보고, 재무 조순옥 목사가 재무보고, 회계 조미자 목사가 회계보고, 감사 정길영 목사가 감사보고, 회장 손문수 목사가 안건처리, 총무 이평수 목사가 광고 후 하나님 외교관 손문수 목사의 폐회선언으로 정기총회를 마쳤다. 예술계 거장들의 운명에서 아주 큰 공통점은 그 예술의 스펙트럼이 평범한 이가 가늠하기 힘들 정도로 넓고 실체가 단단하다는 것이다. 반면 정작 예술가는 스스로 부족하다고 여겨 조바심을 내며 일평생을 예술에 헌신하는 삶을 살았다. 성경은 말씀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고전 4:20 2023-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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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6-25
  • 김종철 목사 총회 임원 추천
    미켈란젤로(Michelangelo di Lodovico Buonarroti Simoni, 1475년 3월 6일 ~ 1564년 2월 18일)가 2년여 공들여 조각한 "다윗" 상을 거의 마무리할 무렵, 작업을 의뢰한 피렌체 시장이 방문해 코가 조금 큰 것 같다고 지적한다. 사실 이 작품은 높이가 5미터에 달하는 데다 좌대 위에 올려질 것이기 때문에 관객들이 아래에서 조각을 올려다보게 되면 원근감으로 인해 얼굴이 작게 보일 것을 계산해 일부러 조금 크게 만든 것이다. 미켈란젤로는 원리를 설명하는 대신 조각대 위에 올라가서 코를 손보기 시작했다. 이 정도면 됐는지 한번 봐 달라고 묻자, 시장은 한결 낫다고 말하고 자리를 떠난다. 미켈란젤로는 사실 조각을 전혀 건드리지 않았다. 대리석 가루를 가지고 올라가서 조금씩 뿌리면서 작업하는 척 연기를 했을 뿐이다. 시장과 논쟁을 벌여봐야 그가 한낱 예술가의 말에 자신의 주장을 굽힐 리도 없고 또한 설사 그랬다고 한들 미켈란젤로에게는 아무 득이 될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탁월한 예술가 한 명이 한 도시를 얼마나 위대하게 만드는가! 베르니니(Giovanni Lorenzo Bernini, 1598년 12월 7일 ~ 1680년 11월 28일)는 오늘날 로마의 모습을 거의 완성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도처에 장대한 교회와 회화, 조각과 분수가 있는 로마는 도시 공간 전체가 극적이어서 여행자 자신이 로마라는 거대한 우상숭배의 연극에 동참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그 분위기를 만드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 중 한 명이 베르니니다. 베르니니의 "다윗"(1624) 상과 120년 전의 미켈란젤로의 "다윗" 상(1504)을 비교해 보자. 미켈란젤로는 다윗이 골리앗과 싸움을 하기 직전 팽팽한 긴장의 순간을 포착하고 있다. 투석기와 돌을 어깨너머로 멘 채 형형한 눈으로 적을 노려보는 모습이다. 미켈란젤로가 이처럼 정적(靜的)인 모습을 표현한 데 비해 베르니니는 몸을 틀어 골리앗을 향해 투석기로 돌을 던지는 역동적 장면을 표현했다. 입술을 깨물고 있는 다윗의 표정은 목숨 걸고 싸우는 전사의 투혼(fighting spirit)이 그대로 드러난다. 사실 이 작품은 일종의 자화상으로 거울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보며 만들었다고 한다. 조각이 멈추어 있는 상태를 표현하는 예술이라는 고정관념을 깨고 작가 베르니니 자신의 내적 에너지를 담아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모습을 만들어낸 것이다. 베르니니는 바로크 예술의 선두에 서 있었다. 바로크 예술은 이 시대 가톨릭 종교개혁의 강렬한 에너지를 표출한다. 16세기에 시작된 종교개혁으로 인해 유럽의 기독교는 신교(프로테스탄트)와 구교(가톨릭)로 양분되었다. 가톨릭으로서는 신교의 충격으로 한 세기 정도 휘청거렸다. 그러다 그에 대한 대응으로 자체의 개혁(예전에는 ‘반동 종교개혁’이라고 불렀으나 이제는 ‘가톨릭 종교개혁’이라는 용어를 주로 쓴다)을 추진하여 교리와 조직을 재정비했다. 그 결과 17세기에 들어서서 자신감을 회복한 가톨릭계의 열망이 바로크 예술로 나타났다. 신교라는 ‘이단’이 패배하고 성상 숭배에 쪄든 가톨릭 신앙이 승리했다고 스스로 선언하고 이를 화려하고도 장엄하게 확인하는 의미라 할 수 있다. 이 시대에 새로 정비한 로마의 성당들이 그것이 우상숭배인 줄도 모르고 조각이나 회화, 장식예술을 총동원하여 놀라운 정도로 장대한 분위기를 연출하는 게 그런 이유다. 그 가운데 최정상의 활약을 선보인 예술가 중 한 명이 베르니니다. 예장합동 김종철 목사(큰빛교회)가 2023년 9월 제108회 총회 부회록서기에 출마한다. 용천노회(노회장 채수영 목사)는 2023년 4월 10일 경기 성남시 세광교회(채수영 목사)에서 제131회 정기회를 갖고 31대 노회장을 지낸 김종철 목사를 총회 부회록서기 후보로 추천했다.. 노회원들의 만장일치 기립박수 속에 추천을 받은 김종철 목사는 말했다. “노회원들께서 부족한 종을 너무 아껴주시고 사랑해 주셨습니다. 작년에 낙마했을 때도 너무 안타까워해 주시고 다시 도전하면 당선될 것이라 전폭적으로 지지해주셨습니다. 용천노회의 위상을 높이고 총회를 최선을 다해 섬기겠습니다.” 이날 총회 부회록서기 후보로 추천받은 김종철 목사는 총신대 신대원 85회 졸업생이다. 총회 주요 활동은 2014년 총회 아이티사법처리전권위원회(위원장 신규식 목사) 서기, 교단교류협력위원, 교회실사처리위원회 서기, 총회선거관리위원 등을 역임했다. 현재는 제107회 총회(총회장 권순웅 목사) 연기금제도연구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으며 서북지역노회협의회 상임총무로도 활동하고 있다. 뿐만아니라 고양시기독교총연합회와 일산기독교연합회 임원으로도 봉사하고 있다. 무엇보다 2005년 고양시에 개척한 큰빛교회를 18년째 섬기며 지역사회를 밝히는 큰 빛이 되고 있다. 성경은 말씀한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산 위에 있는 동네가 숨기우지 못할 것이요 사람이 등불을 켜서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러므로 집안 모든 사람에게 비취느니라 이같이 너희 빛을 사람 앞에 비취게 하여 저희로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라 마 5:14-16 2023-0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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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4-13
  • 제비뽑기 사도 박광재 목사
    남들이 하지 않는 것, 남들보다 잘할 수 있는 것, 오랫동안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 탁월한 예술가 한 명이 한 도시를 얼마나 위대하게 만드는가. 잔 로렌초 베르니니(Gian Lorenzo Bernini, 1598-1680)는 오늘날 로마의 모습을 거의 완성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도처에 장대한 교회와 회화, 조각과 분수가 있는 로마는 도시 공간 전체가 극적이어서 여행자 자신이 로마라는 거대한 연극에 동참하는 느낌을 받는다. 그 분위기를 만드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 중 한 명이 베르니니다. 교황 우르바노 8세는 말했다. “로마는 당신을 위해 있고 당신은 로마를 위해 있다.” 여러 개체에 무언가를 표기하고 그 가운데 일부를 뽑아 벌칙이나 차례를 정하는 놀이를 이른다. 한자어로는 추첨(抽籤)이라고 한다. 제비뽑기에 쓰이는 물건을 '제비'라고 한다. '제비' 자체로도 '제비뽑기'의 뜻이 된다. 주로 운에 맡기는 놀이이고 승부를 쉽게 내고 싶을 때 쓰는 놀이이다. 어원상 조류 제비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제비뽑기에서 '제비'는 중세 한국어에서 '져비'로 나타난다. 종이에 내용을 적어놓은 뒤 접어놓고 섞어서 뽑은 것에서 따와, 접다의 옛말 '졉다'에 접미사 '-이'를 붙인 '져비'가 되어 지금의 '제비'가 됐다고 한다. 로마 제국이 유대 지역을 지배할 때 한 유대인이 누명을 쓰고 사형 판결을 받게 되었다. 그의 형 집행일이 되자 로마 병사가 그에게 다가와서 제비를 내밀며 말했다. "여기 제비 2개 중에 하나를 뽑아라. 이 두 제비 중 하나엔 붉은 표시가 있는데 네가 뽑은 제비에 붉은 표시가 되어 있으면 넌 죽을 것이지만 표시가 없으면 넌 풀려날 것이다." 하지만 사실 그 제비들은 모두 붉은 표시를 한 것들이었고 유대인 또한 그걸 예상하고 있었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 농락당하게 된 그는 고민 끝에 제비 하나를 뽑고는 확인도 하지 않고 그것을 곧바로 입안에 넣고 삼켜버렸다. 당황한 병사는 눈을 부라리며 소리쳤다. "이게 무슨 짓인가! 제비를 삼켜버리면 네가 죽을지 살지 알 수 없지 않느냐." 그러자 유대인이 말했다. "병사님의 손안에 있는 남은 제비를 보십시오. 둘 중 하나에만 표시가 되어 있다고 병사님이 말하셨으니 그 남은 제비에 표시가 있으면 제가 뽑은 것은 표시가 되지 않은 것일 테고 표시가 없으면 그 반대겠지요." 당연히 병사의 손안에는 표시된 것이 있었고 유대인은 풀려났다. 구약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을 정복한 후에 그 땅을 각 지파에게 분배할 때 제비뽑기를 실시했던 것을 찾아볼 수 있다(수 14-19장). 그리고 아간이 범죄했을 때 범인을 찾아내는 데에도 제비뽑기가 사용되었다(수 7:14-18). 뿐만 아니라 속죄제를 위해 바쳐진 두 염소 중에서도 제비를 뽑아 한 마리를 제물로 드리고 다른 한 마리는 아사셀을 위하여 광야로 보냈다(레 16:7-10). 그 밖에도 이스라엘의 초대 왕인 사울을 세울 때도 제비를 뽑았다(삼상 10:21,22). 그리고 제사장, 찬양하는 자, 성전 문지기 등의 직무를 위임할 때에도 제비를 뽑았으며(대상 24:5; 25:8; 26:13) 정해진 기간 동안 하나님의 전에서 봉사하는 데에도 제비를 뽑았다(느 10:34; 11:1). 구약 성경과 달리 신약 성경에서 제비뽑기를 시행한 예가 사도행전 1:26에 '제비뽑아 맛디아를 얻으니 저가 열 한 사도의 수에 가입하니라' 한 번 언급되어 있다. 가룟 유다를 대신해서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할 사도를 세울 때였다. 이때 열한 명의 사도들은 기도를 한 후 제비를 뽑았다. 그렇듯 총회 공정 선거 개혁을 위해 성경의 '제비뽑기'를 시행해야 한다고 평생 외친 인물이 있다. 그는 영광교회 박광재 목사이다. 오늘날 교회나 노회나 총회에서는 어떤 일을 처리하는 데 있어서 주로 거수나 투표를 한다. 이것은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는 방식이며 인본주의적인 결정 방법이라는 것이 박광재 목사의 주장이다. 물론 그 가운데에도 하나님께서 개입하실 수야 있겠지만, 전폭적으로 하나님께 결정권을 맡기는 제비뽑기 방법을 시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 그의 소신이다. 그가 40년 목회 사역을 마치고 2023년 4월 1일 오전 11시 영광교회 본당에서 원로목사 추대를 받고 제비뽑기로 결정된 후임 하만규 목사의 위임 감사예배를 드리고 또한 박광재 목사 기념관 개막식도 가졌다. 1부 예배는 박광재 목사의 사회로 남평양노회 전 부노회장 김승석 목사의 기도, 사회자의 성경 봉독, 영광교회 시온 성가대의 감동적인 메들리 찬양으로 은혜를 끼쳤다. 전 총신대 총장 정성구 목사가 히 11: 24-26을 본문으로 ‘거룩한 꿈을 꾸자’란 제목의 힘찬 말씀을 예전보다 더 알차고 은혜롭게 전했다. 2부 원로목사 추대식은 남평양노회 전 노회장 임중근 목사의 사회 가운데 사회자의 추대 기도, 김지영 장로의 추대사, 사회자의 공포, 추대 패 전달, 축하 패 전달로 마쳤다. 3부 담임목사 임직식은 위임국장 한창호 목사의 사회 가운데 후임 제비뽑기 영상 시청, 위임 기도, 목사 서약, 교인 서약, 위임국장 공포, 위임 패 전달로 마쳤다. 제4부 축하 및 인사는 옥토교회 원로목사 김신성 목사의 권면, 총신신대원 전 총동창회장 이춘복 목사의 축사 및 자랑스런 동문 상패 증정, 총신신대원 총동창회장 김진하 목사의 축사 및 축하 패 증정, 총신신대원 제75회 동창회장 오세광 목사의 축사 및 축하 패 증정, 총아협 대표회장 배만석 목사의 축사 및 축하 패 증정, 필리핀복음주의신학교 이갑형 교수, 증경 부총회장 이완수 장로의 축사, 박재천 목사, 소망교회 원로 이실태 목사의 축시, 박광재 원로목사의 회고사, 하만규 위임 목사의 답사, 성문교회 성자 풍의 원로 황정식 목사가 축도로 모든 순서를 은혜롭게 마무리했다. 성경은 말씀한다. 사람이 제비는 뽑으나 일을 작정하기는 여호와께 있느니라 잠 16:33 2023-0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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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4-07

실시간 G.PEOPLE 기사

  • 주신교회 허활민 목사
    2016년 12월 18일 오전 11시 주신교회에서 총회와 기독신문의 구조조정 대임을 맡은 허활민 목사는 설교에 앞서 기도했다.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할 수 있도록 아둔한 입술을 풀어주시고 우리 사랑하는 성도들의 심령에 잘 박힌 못과 같이 아로새긴 말씀을 들을 수 있도록 성령님께서 주장해 주시옵소서. 멀리 출타해서 또 여러 가지 세상 일로 나오지 못한 자들 불쌍히 여겨주시고 있는 그 처소에서도 기도하는 믿음을 갖게 해 주셔서 우리와 같은 은혜를 받게 해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허활민 목사가 고개를 들었다. “올해가 갈 때까지는 지난 주 뭐라고 했죠. 마주 보고 한 사람이 ‘사랑합니다’ 말하면 맞은 편 사람은 ‘미안합니다’ 말한다고 했죠. (성도들이 마주 보고 반복했다.) 우리가 한 해를 보내면서 크리스마스를 앞에 두고 사랑을 받았는데 그만치 보답하지 못한 것에 대해 미안한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이 주시는 축복의 자리에 나갈 수 있는 줄 압니다... 임마누엘은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와 가족을 이루어주시고 돌보아주시고 지켜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게 복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 복음은 예수님이 우리와 함께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하나님 말씀으로 복음으로 받아들이고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육신으로 임하셔서 나를 도와주시기 위해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임마누엘의 축복이 축복 중의 축복으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년 구조조정 대상이 될 대상들은 허활민 목사의 이 설교 말씀을 어떻게 받아들일까... 2016-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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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2-27
  • 창원반석교회 박종희 목사
    경남동노회 분규 당시 노회장을 맡아 박종희 목사(총신 82회)는 갈팡질팡하는 서광호 대신 분규의 중심에 서서 이단 마귀론에 빠질 뻔한 경남동노회 정통성을 잘 지키고 총회와 협력해 정치력을 입증받았다. 1997년 11월 서광호를 이어 부임한 박종희 목사는 전통적인 목회자의 자세로 교회를 안정시키고 성장시켰다. 2016-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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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2-27
  • 광주의 어거스틴 채규현 목사
    뉴욕 주립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영학 석사 과정을 마치고 박사학위 논문을 쓸 때 소명을 받아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로 방향을 바꿔 세상이 아닌 교회를 위해 목회학 석사와 박사 학위를 취득 채 목사는 시계수리공 김상술의 톱니에 걸리면서 지옥과 천국을 오가 김상술 정규남 김삼봉 서기행 권재호 이승희 등 조직폭력배부터 최순실까지 이어져 온 나라를 격랑 속으로 몰아넣은 '최순실 게이트'를 닮아 바람이 나무에게 말하거나 나무가 바람에게 말할 때 서로의 몸을 포갠다. 말귀를 알아듣는다는 건 상대의 마음을 그렇게 움직여주는 것이다. 소통은 마음과 마음이 서로 닿아 한결 후련해지는 것이다. 몸은 대상이 ‘의식’되고 지각되는 통로다. 인생이란 어떻게 보면 삶과 역사 그리고 연극이고 그 사이에는 구획이 없다. 왜 세상에는 악(惡)이 존재할까. 어거스틴(Aurelius Augustinus, 354. 11. 13 ~ 430. 8월. 28)은 악이 선(善)과 별도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선의 부재(不在)’ 상태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그의 라틴어 이름 아우구스티누스는 ‘좋은 징조의’ 또는 ‘덕망 있는’이란 뜻의 라틴어 아우구스툼(Augustum)에서 유래하였다. 인류의 과거와 미래를 두고 세계 영성계를 강타한 책이 있다. 그것은 어거스틴의 “고백록”(Confessiones)이다. 이 책은 아우렐리우스 어거스틴의 수많은 저서 가운데 가장 많이 알려지고 가장 많이 읽히는 기독교의 중요 고전 중의 하나다. 참회록이라고도 할 때가 있지만 이것은 적절한 제목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 책에서 어거스틴이 하나님께 자기의 “죄”를 고백하는 것 이상으로 하나님께 “찬양”의 고백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 책 제10권 이하에서 어거스틴은 그의 인간론 시간론 성경해석 방법론 등을 개진하기 때문에 그의 신학 사상과 철학 사상을 이해하는 데에도 매우 중요한 책이다. "고백록"의 전반부는 젊은 시절의 방황에서 벗어나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만나기까지 기나긴 회심의 과정을 진솔하게 기록하고 있다. 또 "고백록"의 후반부는 세계의 기원과 시간문제에 대한 철학적 성찰이 주를 이룬다. 그의 고백은 이렇게 시작된다. 나의 이름은 어거스틴이고 이 책은 나의 생애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나는 나의 하나님이신 당신을 찬미하기 위해 이 책을 씁니다. 나는 당신을 잃어 비참했고 당신을 찾아 행복했기 때문입니다. 이제 나는 당신을 찬미하고 싶습니다. 나는 나와 같은 다른 죄인들을 위해서도 이 책을 씁니다. 그리하여 그들도 평화를 찾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버리고 이집트 사막에서 기도하며 사는 안토니오의 이야기는 비수처럼 나의 마음을 꿰뚫었습니다. 나는 나 자신이 사악하고 추잡했음을 알았습니다... 나는 우리 집 뒤에 있는 정원으로 달려 나갔습니다. 나는 땅 위에 쓰러져 이마를 때리고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소리 내어 울었습니다. “하나님 나는 왜 지금 하지 못합니까. 왜 지금 나의 온 마음으로 당신을 의지하지 못합니까. 하나님 지금 그렇게 되게 해주십시오.. 갑자기 나는 근처 정원에서 한 어린 아이가 ‘그것을 손에 들고 읽어라. 들고 읽어라’ 노래하는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나는 아이들이 이런 말로 하는 놀이가 있는지를 기억해 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생각나지 않았습니다. 그때 나는 그것이 성서를 펴서 읽으라는 하나님의 거룩한 명령이라고 생각하고 성서를 펴자 내 눈에 로마서 13:13-14 말씀이 들어왔습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나는 더 이상 읽지 않았습니다. 그럴 필요가 없었습니다. 넘치는 기쁨이 나의 마음에 가득 찼습니다. 나의 의심덩어리들과 두려움들은 끝났습니다... 어거스틴의 “고백록”을 지배하는 사상은 "그때까지 나의 생활은 나 자신의 것이었으나 그 후부터 나의 생활은 내 안에 계시는 예수님의 생활"이었다는 것이다. 어거스틴은 신앙을 가지기 전 세계 도처에서 온 사람들로 붐비고 온갖 사악함으로 가득 찼던 당대의 명문 카르타고 대학을 다녔다. 그처럼 채규현 목사도 신앙을 가지기 전에는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한 뒤 1981년 미국 뉴욕 주립대학교 대학원에서 경영학을 전공하기 위해 아내와 함께 미국유학을 떠났다. 그런데 그곳 버팔로에는 어거스틴의 카르타고와는 달리 한국 학생 12명이 있었는데 10명이 예수쟁이였다. 그들은 그에게 끈질기게 전도했다. 그는 그들의 전도와 아내의 임신을 통해 생명의 신비를 체험했다. 그 뒤 그는 예수를 영접하고 교회를 다니게 되었다. 그리고 경영학 석사 과정을 마치고 박사 과정 2년차에서 박사학위 논문을 쓸 때 소명을 받게 되었다. 그는 아무런 미련 없이 웨스트민스터 신학교로 방향을 바꿔 세상이 아닌 교회를 위해 목회학 석사와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무엇보다 그는 어거스틴의 고백처럼 "그의 삶은 그 안에 계시는 예수님의 생활"을 살았다. 그는 귀국해 개신대학대학원 실천신학 교수로 재직하다 안식년을 맞았다. 그러다 2004년 5월 광주중앙교회의 청빙을 아무 연고 없이 받고 변한규 목사 뒤를 이어 후보자 가운데 제일 높은 점수(청빙위원 34명 중 31명 찬성)를 받아 부임하게 되었다. 당시 그의 청빙에 가장 앞장 선 사람은 김상술 장로였다. 그리고 그의 퇴장에 앞장 선 사람도 시계수리공 김상술이었다. 어거스틴이 반달족의 침입으로 하나님의 도성과 세상의 도성을 생각하고 “신국론”을 썼듯 채 목사는 시계수리공 김상술의 톱니에 걸리면서 지옥과 천국을 오갔다. 김상술은 총신대 재단이사 관계로 당회에서 치리를 당해 원로가 될 수 없게 됐다. 거기서 문제가 꼬였다. 부임하고 5년은 요셉이 예언한 풍년처럼 좋은 세월이었다. 그러나 6년 되는 해 2010년 1월 14일부터는 요셉이 예언한 흉년처럼 악한 세월이었다. 그 대략을 살펴보자. 좋은 세월 2006년 5월 8일부터 10일까지 2박 3일간 광주중앙교회(채규현 목사)에서 열린 제43회 전국목사장로기도회가 은혜의 분위기 속에 폐회됐다. 광주중앙교회 채규현 목사는 이번 목사장로기도회는 광주중앙교회가 호남지역은 물론 구 개혁교단의 '상징'이기 때문에 신경 써서 준비했다고 밝히고 모든 공을 장로님을 비롯한 전 성도들에게 돌리며 말했다. "우리 교회 나름대로 손님을 맞는다고 최선을 다했는데 불편한 점은 없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앞으로도 우리 교회가 필요하다면 교단행사에 적극 협조하겠습니다." 2006년 5월 8일 총신 운영이사회(이사장 김동권 목사)는 광주중앙교회에서 임원회와 이사회 전체회의를 잇달아 열었다. 그리고 현 재단이사 예종탁 목사(동현교회)가 오는 8월 정년퇴임할 경우 재단이사 결원이 발생하는 것에 대비 채규현 목사(광주중앙교회)를 재단이사로 미리 선임했다. 2007년 7월 16일 ~ 7월 24일 세례교인헌금(총누계: 20억 5454만 9122원)의 전국 최고 납부 4교회 중 광주중앙교회 2위를 차지했다.1. 충현교회(김성관) 50,000,000 2. 광주중앙교회(채규현) 12,185,0003. 대한교회(김삼봉) 9,000,000 4. 동광교회(김희태) 7,357,000 2009년 11월 28일 오전 10시 광주중앙교회는 장로 10명의 장립식을 비롯해 직원 131명의 임직식을 거행했다. 악한 세월 사실 교회 분쟁을 낳은 악한 세월의 씨앗은 2006년 5월 8일 열린 총신 운영이사회에서 재단이사 예종탁 목사(동현교회)가 그 해 8월 정년퇴임할 경우 재단이사 결원이 발생하는 것에 대비 채규현 목사(광주중앙교회)를 재단이사로 미리 선임한 것이었다. 이때부터 시계수리공 김상술이 총신과 총회를 상대로 시계 조립하듯 교회 돈을 가지고 비리를 조립했기 때문이다. 김상술은 채규현 목사가 총신 재단이사 선임 예정 빌미로 총신 발전기금 3000만원을 낸다고 교회에서 받아갔다. 그런데 그 돈 가운데 2000만원은 총신 공식 발전 기금이 아닌 운영자금으로 둔갑하고 나머지 1000만원은 행방을 감췄다. 그리고 그는 당회장 재정 결제 불가와 인사권 포기 등을 시작으로 채규현 목사를 10개 항목의 문서로 겁박하고 급기야 이단 시비까지 걸어 일사천리 전남제일노회의 목사 면직처리와 교회분쟁 사태로 몰고 갔다. 2010년 4월 22일 전남제일노회(노회장 김광현 목사)는 제110회 1차 임시회를 빛고을중앙교회에서 열고 광주중앙교회 채규현 목사를 면직처리했다는 재판국 보고를 받았다. 노회는 또한 광주중앙교회 임시당회장으로 광신대 총장인 정규남 목사를 파송하기로 했다. 2010년 5월 10일 전남제일노회(노회장 김광현 목사)는 제110회 2차 임시회를 담양 봉산교회에서 열고 성명서를 냈다. 광주중앙교회 사태와 관련해 전남제일노회의 재판을 불법으로 규정한 총회재판국에 헌법을 준수하고 법을 바르게 적용하고 채규현 목사와 관련된 예심판결에 대해서도 즉시 취소하라고 요구했다. 이어서 총회 재판국의 예심판결의 용어 사용이 잘못됐다고 신문에 글까지 올린 김상술 측 변호인 신현만은 자신의 책 “교회 재판 이렇게 하라”에서 예심판결의 필요성을 역설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총회재판국 양 측 심문 과정에서 재판국 임원 가운데 한 지혜로운 장로가 정작 예심판결의 필요성을 기록한 그의 책 페이지를 딱 짚어 들이대자 신현만은 김상술이 웃으며 건네는 꿀을 받아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2010년 5월 27일 헌의부(부장 노승욱 목사)는 총회회관회의실에서 실행위원회를 열고 전남제일노회 광주중앙교회 채규현 목사의 상소 건을 이미 재판국에서 예심판결을 내렸으면 확정판결이 날 때 까지 기다려야 한다며 상소장을 기각했다. 2010년 6월 29일 헌의부는 총회회관 소예배실에서 실행위원회를 열고 전남제일노회 광주중앙교회 채규현 목사가 제출한 ‘목사 면직에 대한 상소장’을 재심의했다. 그 결과 “상소장 서류에 문제가 없으면 재판국에 이첩하는 것이 헌의부의 임무다”, “재판국 구성 요건 및 절차 문제로 인해 이미 재판국에서 예심판결을 내렸기 때문에 상소 건은 취급할 이유가 없다”등의 의견이 맞서 투표를 진행, 찬성 11명, 반대 4명, 기권 4명으로 재판국에 이첩했다. 2010년 7월 16일 재판국(국장 김영길 목사)은 총회회관회의실에서 회의를 열고 광주중앙교회 채규현 목사의 상소 건을 다뤘다. 이 자리에서 상소인 채규현 목사는 전남제일노회의 재판국 구성은 불법이며 적법절차에 따라 노회 재판국에 소원장을 제출했는데 노회서기가 재판에 계류 중이기 때문에 받을 수 없다고 말했다고 진술했다. 특히 채 목사는 이단사상과 이신칭의를 부정했다는 질의에 대해 전혀 사실이 아니라고 밝히고 예수님은 신성과 인성을 가진 분이라고 전제하고 어렸을 적에 하나님을 몰랐다고 설교한 부분을 이단으로 정죄했다고 말했다. 이 표현이 오해를 주었다면 정중히 사과하겠다고 밝혔다. 2010년 7월 6일 서울중앙지방법원은 재단이사장 김영우 목사에게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 총회 부총회장 김삼봉 목사에게는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각각 선고했다. 이관용 판사는 “피고인들이 재단이사로 재선임 되기 위한 목적으로 정관개정안 논의 과정에서 이사회 회의록을 변조한 죄가 인정된다”고 밝혔다. 이 선고가 다음 재판에서 뒤집히기는 했지만 이 이사회 회의록 변조 사건에는 채규현 목사 재단이사 선임이 다른 사람으로 바뀐 의혹도 묻혀 있었다. 2011년 2월 14일 광주중앙교회중재위원회(위원장 김준규 목사)는 총회회관회의실에서 회의를 열고 채규현 목사 측과 정규남 목사 측을 각각 불러 현 상황을 청취했다. 채규현 목사 측 관계자로 참석한 고인식·류성선 장로는 “성도들은 현재 채 목사를 중심으로 끝까지 함께 하겠다는 입장이다”라고 밝혔다. 정규남 목사 측 관계자로 참석한 김상술·고용태 장로는 “채 목사의 신학적 문제 해결 없이 조정은 무의미 하고 채 목사가 교회를 떠나고 교회를 나누는 방법이 바람직하다”고 설명했다. 광신대 총장이면서 광주중앙교회 불법 임시당회장이 된 정규남 목사는 채 목사와 웨스트민스터 동문임에도 “채 목사가 신학적으로 그릇된 견해를 가지고 있는 한 쉽게 받아들이기는 곤란하다”며 나름 학자로서의 어려움을 토로했다. 2011년 9월 30일 광주지방법원 제4민사부는 광주중앙교회 임시당회장 정규남 목사와 고용태 장로 등이 채규현 목사를 상대로 낸 소송에서 “피고는 광주중앙교회의 대표자로서 하는 일체의 행위를 하여서는 아니 된다”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또한 채 목사에 대해 정규남 목사가 광주중앙교회 임시당회장 직무를 수행하는 것을 방해하는 일체의 행위를 하여서는 아니 되며 광주중앙교회 구내에 당회장이나 담임목사로서 직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출입하여서는 아니 된다고 판결했다. 김상술은 기고만장했다. 그러나... 2013년 7월 10일 광주고등법원 제1민사부는 선고심에서 광주중앙교회 임시당회장 조경묵 목사 등이 채규현 목사의 교회출입금지 등을 청구한 항소를 각하하고 원고들의 청구를 모두 기각한다고 판결했다. 재판부는 전남제일노회 재판국의 채규현 목사에 대한 면직 결정은 효력이 상실되었다고 판단했다. 그 이유를 채 목사에 대한 면직을 무효화한 총회 재판국의 예심판결이 2010년 9월 30일 열린 총회 석상에서 ‘유효한 절차가 행하여지지 않은 채 그대로 종결’되면서 효력이 확정되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2013년 12월 26일 대법원 민사2부는 광주중앙교회 채규현 목사의 교회출입 금지 등을 취지로 한 2013다62018 사건에 대해 상고기각 결정을 내리고, 채규현 목사의 당회장 지위 회복을 인정한 광주고등법원의 판결을 확정했다. 2016년 4월 29일 광주지방법원 제11민사부는 원고 황윤수가 피고 채규현을 상대로 한 소송에서 원고 패소 주문을 하고 다음과 같은 판결을 했다. 이 사건 교회의 적법한 대표자는 피고(채규현)라 할 것이므로 황윤수를 대표자로 한 원고 교회 명의의 이 사건 소는 대표권 없는 자에 의하여 제기된 것으로서 부적법하다. 그렇다면 이 사건 소는 부적법하므로 각하하기로 하여 주문과 같이 판결한다. 2016년 10월 27일 채규현 목사의 일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한 장로가 이렇게 말했다. “총회가 채 목사를 떠나서 진정 교회와 교인을 사랑한다면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느냐는 겁니다. 론은 총회가 해줄 수 있는 걸 못하고 구실을 못했다는 거예요. 상회비를 납부했고 세례교인 헌금을 전국 2등으로 총회에 냈어요. 채 목사에 대한 총회 결의도 있고 재판도 이겼어요. 채규현 목사가 광주중앙교회를 얼마나 매일 눈물로 기도했고 그 사모가 눈물로 기도하고 여기까지 지켜왔어요. 하나님이 함께하시지 않으면 못했을 겁니다. 채규현 목사님이나 사모님을 보면 정말로 진실한 교역자구나 하는 걸 알 수가 있어요. 채규현 목사의 핵심이 무엇이냐 하면 성추문이나 어떤 문제도 없고 그만큼 깨끗하고 신학적 학식도 높은 분이라는 겁니다. 내가 정말 사람 잘 봤습니다. 사람들은 내가 채 목사님 곁을 7년 동안 왜 떠나지 못하고 맴도느냐고 이야기들을 합니다. 제가 채 목사님한테 이야기했어요. 목사님 내가 하나님 곁으로 가면 내가 삼 일 동안 외롭지 않고 내 가족이 삼 일 동안 쓸쓸하지 않도록 내 빈소를 지켜주실 것을 약속할 수 있겠습니까. 내가 이걸 말했어요. 아무 것도 없어요. 나와 함께한 목사님하고 교인들 장로님들이 있지만 채규현 목사님이 끝까지 저를 지켜줄 수 있겠습니까 물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약속했습니다. 이걸로 다예요. 나한테는 이게 전부였는데 총회에서는 그 고난과 역경과 이 아픔을 누가 보상하느냐 하는 것이지요. 나는 그걸 물어보고 싶어요. 이 분에 대한 보상은 누가 해요. 제일 무서운 게 이거거든요. 총회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본 사람은 누구냐. 첫째는 광주중앙교회고 둘째는 채 목사 사모예요. 왜냐하면 목사는 당사자이지만 사모님은 얼마나 눈물로 기도하고 얼마나 힘드셨겠습니까. 모든 그 사업 그 선교원 교육관을 불법으로 차지하고 내주지 않고 버티며 소송하고 대항하니 이 무서운 죄를 누가 다 져야 합니까. 그런데도 하나님은 오래 참으셨습니다. 지금까지 지켜주셨습니다. 하나님 두려워하고 살아계심을 알아야 합니다. 목사님 건강하고 참 바르시죠. 진즉 끝날 것인데 대법 판결 난 지 3년 됐고 제99회 총회 때 각하됐으니 그때 끝났어야 해요. 끝난 것인데 또 손대면 안 돼요. 손대면 이건 불법이에요. 일사부재리에 의해 또 하면 안 돼요. 한 사람이라도 억울한 일이 있으면 안 되고 총회가 판결했으면 시행하면 돼요.” 채규현 목사가 말을 이었다. “우리 교회 성도들이 내 편이 아닙니다. 저쪽 이쪽 갈라진 편이 아니고 그냥 교회에서 하나님을 믿고 신앙생활을 바르게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 장로님들도 확인 위원을 했잖아요. 거기서 뭐가 하나라도 나왔으면 (신앙적으로) 내 편에 설 사람은 없어요. 자기네들이 다 확인했어요. 재정이고 뭐고 다 무혐의가 되니까 마지막에는 이단까지 들고 나온 겁니다. 사실은 이단이 제일 쉬운 건입니다. 나는 그렇게 표현 안했다 하면 끝나는 겁니다. 이미 다 끝난 이야기인데 그것밖에 없는데 이번 제101회 총회 때도 뒤집으려고 별 짓을 다했죠. 그런데 다 끝나고 나니까 지금까지 아무 이야기도 없습니다.” 2년 동안 당회장 채 목사에게서 결재권을 빼앗기 위하여 시계수리공 김상술은 나름대로 완벽하게 준비했다. 그리고 2010년 1월 14일 다른 장로와 함께 그를 찾아 왔다. 그들은 자기들 나름대로 그의 약점이라고 생각하는 10가지를 내밀며 당회장의 재정결재권과 인사권을 포기하지 않으면 목회를 못하도록 교회에서 내 보내겠다며 겁박했다. 그때 그는 단호히 거부했다. 그 뒤 채규현 목사가 지금까지 고소당한 것이 형사와 민사 합쳐서 47건이다. 심지어 어떤 한 건은 10가지 문제로 고발했기에 10건의 고발 건이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약 60건이라고 말해도 될 것이다. 이 중에 3분의 1 정도가 형사 고발 건인데 채 목사가 고발당해 기소된 적이 한 건도 없이 다 무혐의 처분을 받고 모든 민사소송은 다 이겼다. 2010년 1월 14일에 광주중앙교회는 분쟁이 시작됐으니 약 7년여 가까운 세월동안 고통을 겪었다고 볼 수 있다. 그 와중에 교회 노회 총회와 연관되어 일어난 일은 참으로 많다. 김상술 정규남 김삼봉 서기행 권재호 이승희 등으로 이어지는 일은 조직폭력배부터 최순실까지 이어져 온 나라를 격랑 속으로 몰아넣고 있는 '최순실 게이트'와 닮은 점이 있다. 이 최순실 게이트처럼 김상술 정규남 김삼봉 서기행 권재호 이승희 등에 대한 검찰 조사가 이루어진다면 광주중앙교회 게이트로 비화할까 아니면 김상술 게이트로 번질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 사건이 종결되면 ‘히포의 어거스틴’이 어려움을 겪으면서 그리스도를 위한 헌신적인 목회자와 위대한 학자가 되었듯 채규현 목사도 ‘광주의 어거스틴’이 되어 우리 교단과 교계를 위한 헌신적인 목회자가 되고 위대한 목회 저술을 남기리라 믿는다. 2016-1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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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1-29
  • 다윗의 별 전계헌 목사
    9월 26일 101회 총회 오후 8시 30분 부총회장 입후보자 정용환 김영우 목사 총회 현장에서 후보자격 상실 9월 27일 오전 11시 20분 전계헌 목사 총 투표수 1294표 중 757표 득표 534표의 나학수 목사 눌러 제101회 부총회장 당선 다윗처럼 제101회 부총회장 된 전계헌 목사 제102회 총회에서 우리 총회를 지키고 하나님의 영광 드러내는 다윗의 별이 되기를 옛날 총신엔 성경 하나 나 하나 신약 구약 언약 둘 교육전도사들 있었다. 지금은 총회 하나 나 하나 성경 총회헌법 둘 목사들이 있을 뿐이다. 정신도 육체도 돈을 향해 있고 우리들의 피는 위대한 칼빈주의를 위한 빈 칼이 되고 있다. 최근의 밤하늘을 보라. 아무도 기억하지 않고 말하지 않는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들의 고통과 죽음을 별들은 자기들의 빛으로 가슴 깊이 감싸 주고 있다. 실제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우리들을 향하여 시내산의 영광 같은 모세의 얼굴빛을 가림 없이 던지고 있다. 근대 이전까지 별은 낭만과 이상(理想)의 상징이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 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노래하고 스물여덟 살에 생을 마감하고 북간도 용정 교인묘역에 시인 윤동주는 묻혔다. 시인이기도 한 유쾌한 목사 소강석은 한 점 부끄럼이 없이 시인 윤동주를 사랑한다. 그는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는 시인 윤동주의 묘역이 초라한 것에 부끄러워 그 바쁜 틈을 내 제101회 총회 한 주 전에 직접 중국 북간도로 찾아가 그 묘역을 새로 단장했다. 그래서 윤동주는 그의 시 “별을 헤는 밤”에서 생전에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나린 언덕 위에 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덮어 버리었습니다...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거외다.’ 라고 붉은 눈시울로 노래했던 모양이다. 오늘밤에도 별에 바람이 스치우는 게 괴로워 별을 헤던 윤동주와 달리 우리는 별 밝은 밤에 돈을 센다. 이 지독한 물화(物化)의 터널을 관통하면서 우리들의 믿음은 복을 구걸하는 미신으로 변했다. 타자의 고통에 응답하지 않는 우리를 대신해 별이 아픈 자들을 껴안는다. 별이 ‘너 무엇하고 있느냐’고 물을 때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다’고 응답하면 우리의 마음에 다윗의 별이 탄생할 것이다. 다윗의 별은 헥사그램이라고 하는 삼각형 두개를 엇갈리게 그려놓은 별모양이다. 이것은 ‘다윗 왕의 방패’라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이스라엘 국기에 새겨진 다윗의 별은 하나님의 백성과 그 믿음을 지키는 상징이다. 소강석 목사가 사랑하는 윤동주의 고백처럼 별을 헤는 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 가을로 가득 차 있다. 9월 26일 101회 총회 첫째 날 그 밤 8시 30분 충현교회 총회 현장에서 부총회장 입후보자인 정용환 목사와 김영우 목사 모두 총회 현장에서 후보자격을 잃었다. 9시 40분 목사부총회장에 대해서는 후보자 유고시 해당 지역 총회실행위 소집해 후보 추천 받아 선거 진행 한다는 선거규정에 따라 중부호남지역 실행위원들이 모여 제3의 후보를 추천했다. 실행위원들은 총 57명으로 추천 후보수 제한이 없다. 10시 20분 목사부총회장 후보로 나학수 목사(빛고을노회 광주겨자씨교회)와 전계헌 목사(이리노회 동산교회)가 추천됐다. 제100회 호남중부권역 총회실행위원들은 자체 선거를 통해 두 사람을 최종 목사부총회장 후보로 추천했다. 두 사람에 대한 선거는 시간 관계상 다음 날 치르기로 했다. 9월 27일 오전 11시 20분 전계헌 목사가 목사부총회장에 당선됐다. 전계현 목사는 총 투표수 1294표 중 757표를 득표하여 534표를 얻은 나학수 목사를 누르고 제101회 목사부총회장에 당선됐다. 뜻하지 않게 제101회 목사 부총회장에 당선된 전계헌 목사는 9월 내내 동산교회에서 다윗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런데 다윗도 전라북도 익산의 전계헌 목사처럼 뜻하지 않게 이스라엘 왕이 될 기름부음을 받았다. 성경은 사무엘상 16:1-13에서 이렇게 말씀한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이미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거늘 네가 그를 위하여 언제까지 슬퍼하겠느냐. 너는 기름을 뿔에 채워가지고 가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보내리니 이는 내가 그 아들 중에서 한 왕을 예선하였음이니라.” 사무엘이 말했다. “내가 어찌 갈 수 있으리이까. 사울이 들으면 나를 죽이리이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너는 암송아지를 끌고 가서 말하기를 내가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러 왔다 하고 이새를 제사에 청하라. 내가 너의 행할 일을 가르치리니 내가 네게 알게 하는 자에게 나를 위하여 기름을 부을찌니라.” 사무엘이 여호와의 말씀대로 행하여 베들레헴에 이르매 성읍 장로들이 떨며 그를 영접하여 말했다. “평강을 위하여 오시나이까.” “평강을 위함이니라. 내가 여호와께 제사하러 왔으니 스스로 성결케 하고 와서 나와 함께 제사하자.” 그리고 이새와 그 아들들을 성결케 하고 제사에 청했다. 그들이 오매 사무엘이 엘리압을 보고 마음에 이르기를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그 앞에 있도다 하였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말씀하셨다. “그 용모와 신장을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이새가 그 아들 일곱으로 다 사무엘 앞을 지나게 하나 사무엘이 이새에게 말했다. “여호와께서 이들을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네 아들들이 다 여기 있느냐.” “아직 말째가 남았는데 그가 양을 지키나이다. “보내어 그를 데려오라. 그가 여기 오기까지는 우리가 식사 자리에 앉지 아니하겠노라.” 이에 보내어 다윗을 데려오매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다웠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다.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 사무엘이 기름 뿔을 취하여 그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신에게 크게 감동되었다. 다윗은 혈색이 좋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다웠다(삼상 16:12). 아버지의 명령으로 양을 지키고 있을 때 덤벼드는 사자나 곰을 쳐 죽여 임무에 대한 충실성과 용기를 가지고 있었다(삼상 17:34-36). 음악적 소질이 비상하여 이 무렵 수금을 잘 탄다는 것이 알려졌고 후에는 시도 많이 쓸 정도로 예술적 재능도 있었다. 이것은 다윗의 인생에 있어서 제 1의 전기(轉機)이며,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크게 임하셨다. 그러나 그는 일상 자기 일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제101회 부총회장으로 선택받은 전계헌 목사는 여러 면에서 다윗을 닮았다. 10월 9일 익산 동산동에 있는 동산교회에서 수요예배를 마치고 당회장실에서 전계헌 목사를 만났다. -어떻게 신학을 하시게 되셨습니까. “군산 개복교회 담임하셨던 김종석 목사님이 총신 대학원 다니시고 야간에 숭실대 사회복지과를 다니셨어요. 군목으로 제대하신 뒤였죠. 그때 이영주 사모님이 초등학교 교사이신데 저희 고향 전라북도 완주군 경천면 소재 가천초등학교 근무를 하셨어요. 그 학교에 저희 큰 형님이 같이 근무를 하셨어요. 형님은 정말 전형적인 인격을 갖추신 교육자이셨어요. 그래서 이영주 사모님이 형님과 같은 학교 근무를 하시다 보니까 저희 형님을 보시고 저를 잘 아시지도 못하면서 이런 분 동생이면 목사님 한 분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하신 겁니다. 제가 고등학교 졸업할 무렵부터 만나기 시작해서 졸업하자마자 저한테 신학을 하라고 자꾸 권하시는 거예요. 저는 신학을 한다는 건 상상도 못했어요. 목사라면 하늘에 닿는 분이라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제가 막연하게나마 고등학교 시절 전주에서 이어령 교수나 김형석 교수 강연만 있으면 가방 들고 찾아가 참석을 하는 겁니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김종필 씨가 공화당 당의장일 때 전주 삼남극장에서 강연을 하는데 고등학교 때 교복입고 가방 들고 무엇 때문에 거길 참석했는지 모르겠어요. 그때 교훈 한 가지를 배웠어요. 뭐라고 했느냐면 그 걸쭉한 목소리로 ‘정치란 됫박 속에 있는 된장을 둥근 바가지로 푸는 것’이라고 하는 겁니다. 무슨 말인 줄 몰랐는데 나중에 신학을 하고 목사가 되서 정치라는 게 당회 정치가 됐건 노회 정치가 됐건 하면서 겪어보니 그 생각이 많이 나요. 됫박 속에 있는 된장을 바가지로 푸면 된장이 됫박에 좀 남잖아요. 뭐든 완벽하게 청소하려고 하면 안 된다는 의미 같아요. 고등학교 졸업하고 김종석 목사님하고 이영주 사모님 때문에 신학을 하게 된 셈이죠. 어떻게 보면 처음에는 권유를 받고 목사 된다는 건 아이쿠 상상도 못하죠. 그때는 목사님이 하늘에 닿는 분인 줄 알았어요. 그리고 전주 동부교회 김지선 목사님한테 학습 세례 받았는데 고등학교 때도 신앙생활 열심히 잘 했어요. 학생회 활동도 하고 잘 했는데. 고등학교 졸업할 무렵에 그분들 만나 자연스럽게 신학으로 연결이 된 겁니다.” -고등학교는 어디 나오셨어요. “전주 신일고등학교요. 때마침 미션스쿨이었어요. 지내놓고 보니까 이래저래 제가 신학을 하게끔 연결이 되었던 거 같아요. 그래서 신학을 하게 되었고 목사 교역자 생활은 광주 군산 익산 세 군데에서 했어요.” -그럼 군산에서 교역자 생활하신 게 두 번째입니까. “군산 그렇죠. 두 번째 교역자 생활한 곳입니다.” -거기 계시다 담임으로 익산에 오신 겁니까. “군산 개복교회 갈 때 80년 1월 14일 강도사로 갔다가 거기서 목사 되고 딱 4년 있다 83년도 12월 28일 여기 동산왔습니다. 그때 와서 34년째 있어요.” -지금 이 건물은 목사님 때 지으신 겁니까. “제가 와서 건축을 했죠. 옛날에는 교회가 하도 어려우니까 교역자가 한 달 있다가 온다 간다 말도 없이 갈 때도 있었어요. 그런데 위임목사는 1대가 백남주 목사 6년 계시다 나주 제일교회로 가셨다가 광주 서현교회로 가셔서 개혁 측 총회장도 하셨습니다. 2대는 11년 계시다 미국으로 가셨어요. 제가 3대 34년 재직하고 있는 거예요. 너무나 오래 있네. 하하.” -목회 신념이 있으시다면. ”제가 신학교 다닐 때 몇 년도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어요. 추석 명절에 어디들 가는데 나는 기도원에를 갔습니다. 그때 세 가지 기도제목을 정하고 기도를 했어요. 그게 평생 기도제묵이 될 줄 몰랐습니다. 말씀의 능력 기도의 능력 성령의 충만을 달라고 기도했는데 그게 평생 기도제목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이것저것 시도해보다가 여기 와서 굳어진 표어가 ‘하나님이 디자인하신 동산교회’입니다. 목사가 원하는 교회도 아니고 교인이나 장로가 원하는 교회도 아니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동산교회입니다. 이것과 더불어 ‘죽어도 예배’ ‘굶어도 십일조’ ‘쓰러져도 새벽기도’ ‘힘들어도 복음전도’ 이것들을 평생 교회 푯대로 삼고 있습니다.“ -언제부터 이 표어들을 시작하셨습니까. “햇수는 잘 기억이 안 나는데 여기 다녀간 분들이 좋다고 채용한 분들이 많아요. 그 중에 목포 백동조 목사님은 부흥회 가는 데마다 전해 아주 그분 것이 되었고 광주 백남선 목사도 세 가지 ‘죽어도 예배’ ‘굶어도 십일조’ ‘쓰러져도 새벽기도’ 딱 써서 액자로 걸어놨더군요.” -목사님이 원조시군요. “그런 셈이죠. 전북기독신문이 있어요. 2년 동안 칼럼을 썼는데 거기에서도 언급을 했고 방송에서도 한번 밝혔죠. 원조라면 원조죠. 백남선 목사도 친구다 보니까 취향이 같을 수 있죠.” -인생에서 어려운 적이 있으셨습니까. “74년 2월 7일 오후 8시 광주 적십자병원 옆 삼거리가 있어요. 친구하고 지나가다 우측으로 커브를 도는데 어떤 차가 나를 쳐서 넘어졌어요. 그런데 나는 어느 상가 윈도우에 박혀버렸습니다. 충격을 받으면서 순간 정신을 잃었어요. 전혀 기억을 못해요. 나중에 병원에서 보니까 삼손처럼 두 손을 침대에 묶어놨어요. 나는 아파서 몸부림을 하고. 나중에 얘기 들어보니까 친구가 업고 적십자병원에 갔는데 없어요. 원장도 없는데 왔다 갔다 하다 길에서 원장을 만났대요. 원장이 군의관 출신인데 군대에서 환자가 교통사고로 오면 충격으로 왼쪽 가슴 아래 있는 비장이 터져 죽는 경우가 많았던 모양이에요. 그분이 그 생각을 해서 가운도 안 입고 사람들이 다 보는데서 수술을 한 겁니다. 배를 활짝 열고 보니 비장이 터져 피가 응고되어 있어 비장을 적출하고 내장을 소독약으로 다 소독했다는 겁니다. 좀 안정이 된 뒤에 다리도 수술했어요. 우리 큰형님이 내 수술비 대느라 참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그때가 몇 살이셨습니까. “스물여덟 살이었죠.” -결혼은 언제 하셨습니까. “스물아홉 살. 결혼 사고 난 그 해 74년 12월 그 사람을 만났어요. 허허. 우리 장인이 박현국 목사님이시고 처남이 박효배 목사님입니다. 당시 어른들은 신학생이 고생 많이 한다는 것 다 알잖아요. 결혼은 안 시키고 싶은 대상이고 본인도 그럴 생각은 도무지 없었어요. 그때 당시 내 모습이 내가 생각해도 교통사고 나서 1년도 안됐지 광주에서 가난한 신학생 졸업반이지 얼마나 볼만 했겠어요. 그런데다 너무 어려워서 1년 쉬기까지 했어요. 그런 뒤 총신을 갔죠. 허허. 그런데도 1년 후 결혼이 됐어요. 74년도 교통사고 75년도 결혼 78년도 총신 71회 졸업. 하하.” -후유증은 없으셨어요. “감사하게도 운동도 하고 건강해요. 정말 감사하죠. 다 그러잖아요. 살다보면 한 번씩 얻어터지고 정신 차리는 것처럼 교통사고가 나를 목사로 만든 겁니다. 신학교는 갔지만 목사가 되기까지 교통사고가 나를 만들었어요. 결혼할 때도 사람이 염치가 있지 뭐라도 하면서 결혼을 해야 하는데 나는 아무것도 없었어요. 내가 아내한테 말했어요. ‘일생을 살면서 돈이 있든 없든 행복한 사람 별로 없는데 어차피 결혼해 사는데 평생 복음 전하고 살면 얼마나 복된 것입니까.’ 그 말이 좋게 들렸는지 부모님 처남 다섯 처제 한 명 모두 우리 결혼에 반대했어요. 그런데 본인만 결혼한다고 하는데도 본인이 한다니까 결혼이 되더군요. 껄껄. 결혼할 때 우리 집이 전혀 안 믿는 가정이었어요. 큰형님이 총각 집사도 하시고 했는데 나중에 안 다녔어요. 그런 환경이다 보니 나는 신앙적으로 외롭잖아요. 결혼 조건이 무엇보다 믿는 가정이어야 할 것. 둘째 본인이 믿어야 할 것. 그것만 충족되면 되는 거였어요. 결혼도 엄청난 하나님 은혜였는데 정말 믿음만 가진 저를 하나님이 우리 교단의 총회장으로 삼아주셨어요. 총회 다녀와서 처음 새벽기도하며 하나님께 말씀드렸어요. ‘하나님 일 핑계대지 않고 할 수 있는 대로 열심히 하겠습니다. 총회 일을 맡겨 주셨으니 제가 할 수 있는 한 하나님께 영광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다짐을 했습니다.” -붙잡고 사시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시편 23편 1절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도다. 살면서 그것밖에 할 말이 없더군요. 내가 잘 나서 목회하고 내가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다 하나님의 은혜로 이제까지 살 수 있었던 거죠. 형제들 중에 목사가 된다면 형님이 되던 동생이 되던 했어야 하는데 제일 모자란 제가 됐어요. 옛날에 내 이름이 무슨 뜻인 줄 몰랐어요. 계수나무 계(桂) 법 헌(憲) 뭔가 그런가 보다 했는데 나중 목사 되고 가만 생각하니까 ‘하늘의 법’으로 살아라 하는 뜻이구나 하고 깨달았어요.” -사모님과 평생 같이 사랑으로 사신 비결은 무엇입니까. “저는 아내와 모든 걸 같이 했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입니다. 운동을 해도 같이 하고 테니스도 같이 배워 같이 치고 탁구도 같이 배워 같이 쳤어요. 다 처음 배운 겁니다. 나중에 테니스도 잘 하고 탁구는 저보다 더 잘 해요. 저희 노회 대표 선수로 나갑니다. 부부 간에 취미가 달라 따로 놀면 안 되잖아요. 우린 연속극은 별로 안 보고 부담 없이 보고 웃는 개그 프로를 같이 봐요. 런닝맨 개그콘서트 같은 것(좋아하는 음식을 대하는 것처럼 만면에 웃음이 가득해진다) 둘이 같이 보고 웃고 그래요. 우리 애들도 같이 보고 웃어요. 나는 공부를 하든 뭐를 하든 교회에서 합니다. 그게 제 생활 원칙입니다. 저는 집에 들어가면 아주 자유인으로 돌아가 편하게 지냅니다. 아내나 아이들도 다 알아요. 집은 휴식하는 곳이라 책을 가지고 들어가지 않습니다. 허물과 격의 없이 가족들과 지냅니다. 아내도 편안하게 해 주려고 (빨래나 설거지도 거든다고 사모님이 말을 거들었다) 노력합니다.” -사모님은 목사님의 어떤 점이 좋으세요. “목사님은 유머스러워요. 그게 좋아요. 노회 행사 때 사모님들도 목사님이 같이 가시면 재미있다고 아주 좋아해요.” 전계헌 목사의 제101회 총회 부총회장 취임을 기념하는 감사예배가 10월 6일 익산 동산교회에서 열렸다. 이리노회 제67회 정기회 순서로 마련된 이날 노회원들과 조배숙 국회의원, 총회서기 서현수 목사 호남협의회장 윤희원 목사 전북교회협의회장 이리노회 1번 손범성 목사(전계헌 목사 2번) 등 하객들이 참석해 전계헌 목사의 당선을 축하했다. 이날 전계헌 목사의 두 아들도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 자리에서 전계헌 목사는 말했다. “사람이 헤아리기 어려운 하나님의 주권적 역사로 뜻밖에 제101회 부총회장 당선의 영예를 누리게 됐습니다. 모든 동역자들과 함께 직책을 감당하며 하나님의 영광과 교회의 거룩성 회복을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이리노회(노회장 정창호 목사)에서는 전계헌 목사에게 기념패를 전달하며 제102회 총회를 준비하는데도 만전을 기할 것을 다짐했다. 다윗처럼 부총회장이 된 전계헌 목사가 제102회 총회에서 우리 총회를 지키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다윗의 별이 되기를 소망한다. 2016-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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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0-28
  • 총회 뉴 스파크 권순웅 목사
    제101회 총회 뉴 스파크 새 불꽃 총회 부서기 권순웅 목사 3R 공약 첫 번째 R Reformation! 개혁 절대 이권에 개입하지 않고 청탁을 받지 않겠다 두 번째 R Rebuild 재건축 총회를 다시 세우는 일에 최선 노회와 교회가 잘 되게 섬겨 세 번째 R Respect 존중 품격을 세우는 총회 되도록 최선을 다해 섬기겠다 1517년 독일의 마르틴 루터가 종교개혁을 했던 비텐베르크 시는 마르틴 루터 시로 개명된 지 오래다. 오늘날 독일 전 국민의 98%가 루터교인이다. 하나님이 함께한 종교개혁자 한 사람의 영향은 시대를 초월한다. 독일 학교의 방학은 모두 기독교와 연관되어 있다. 매년 10월1일부터 두 주간은 추수감사절 방학이고 추수감사절과 성탄절, 부활절에도 각각 두 주간 방학을 한다. 모든 국민은 교회를 위해 종교세를 낸다. 목사는 정부 공무원이며 모든 아이는 유아세례를 받고 13세가 되면 1년간 매주 두 시간씩 100시간 이상 성경을 배워서 14세가 되면 입교식을 한다. 이 날은 부모님과 일가친척이 다 모여 축하잔치를 연다. 독일은 결국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통일을 이루었다. 한 사람의 영향이 새 역사를 만든다. 9월 26일 오후 10시 20분 총회임원 선거로는 유일하게 정상적인 경선이 이루어진 부서기 선거에서 권순웅 목사(평서노회 주다산교회)가 총 1369표 중 808표를 얻어, 558표에 그친 김상현 목사(수도노회 목장교회)를 제치고 부서기에 당선됐다. 능금이 그 스스로의 무게로 떨어지는 이 가을에 권순웅 목사는 제101회 총회 New Spark 새 불꽃이다. 불꽃은 연소(燃燒) 반응 시 빛나는 밝은 바깥 부분이거나 타는 불에서 일어나는 붉은빛을 띤 기운이다. 그는 경기도 화성시 반송동 160에 2014년 4월 19일 종교부지 2000평 건평 2500평 2500석의 예배당을 최대 저렴하게 최고의 기능을 지향해 세워 2500명 성도를 목회하는 주다산교회의 담임목사다. 세계선교회 전 이사장 김재호 목사는 온갖 비리로 몸살을 앓던 GMS를 바르게 세우고 성장시켰다. 그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총회 정치 현장에 3R을 외치며 불꽃처럼 총회 제101회 부서기로 등장한 같은 평서노회의 권순웅 목사에 대해 말했다. “송파구 오금동에서 오금을 못 펴다 동탄 신도시에서 오금을 펴 2500여명의 주다산교회를 목회하는 열정적인 목회자입니다.” 실제로 오금동은 병자호란 때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난을 갈 때 백토고개에서 잠시 쉬었다가 신하에게 무릎 안쪽의 ‘오금이 저린다’고 말하여 그 후 ‘오금골’이라 불리어 졌다는 설이 있는 지역이다. 1992년 송파구 오금동 30평 상가 교회에서 10여년 목회하다 2001년 8월 천신만고 끝에 동탄 신도시에 땅 640평 매입하고 천막교회를 시작했다. 선교활동에 열심이던 그가 목회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있다. 그것은 전 총신대 김의환 총장이 “권 목사 외부 활동을 하는 은사가 있는데 목회를 해라” 하는 권면을 따른 것이었다. 그는 영남대 경제과 재학시절 이념서클을 이끌었던 운동권 출신으로 대기업 마케팅 업무를 보다가 회심했다. 그 후 강력한 성령의 역사를 체험하고 이 땅 가운데 하나님 나라의 진정한 신앙공동체를 만들겠다고 결심하고 1989년 총신대 신대원에 들어갔다. 그는 보기와 달리 1955년생이라 총신 78회 정도 되어야 하는데 84회다. 총신대 신대원에 진학한 그는 학교 뒷동산에서 기도하던 중 하나님의 감동을 받고, ‘SPARK(성령의 불씨) 운동’을 목회비전으로 세웠다. SPARK의 S는 scrioture 성경이고 P는 prayer 기도고 A는 action 삶이고 R은 reformation 개혁이고 K는 korea 한국이다. 민족의 개혁운동은 성경과 기도와 삶으로 바꿔야 한다. 스파크는 성령의 불이다. 제101회 총회에 뉴 스파크 새 불꽃으로 등장한 총회 부서기 권순웅 목사가 앞으로 지켜야 할 공약 3R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 R은 Reformation! 개혁입니다. 우리 개혁주의 신학의 정체성을 공고히 하되 개혁주의 적용은 프로테스탄트입니다. 절대 이권에 개입하지 않겠습니다. 청탁을 받지 않겠습니다. 깨끗하게 하겠습니다. 이것이 개혁의 첫걸음입니다. 두 번째 R은 Rebuild입니다. 총회를 다시 세우는 일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총회가 생산자 지향주의의 지도적 리더십을 가질 것이 아니라 소비자적 섬김의 지도력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노회가 잘 되고 교회가 잘 될 수 있도록 섬겨야 합니다. 세 번째 R은 Respect입니다. 존중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품격을 세우는 총회가 되도록 최선을 다해 섬기겠습니다.” 한 사람의 영향이 새 역사를 만든다. 제101회 총회 새 불꽃 권순웅 목사가 그의 3R 공약대로 개혁주의 장자 교단 총회의 새 역사를 쓰기를 바란다. 2016-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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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10-28
  • 유쾌한 목사 소강석
    유쾌한 사람은 자기 일에만 몰두하지 않아 타인의 문제에 전력을 쏟는 열정적 사람 유쾌한 목사 소강석은 극소수의 존경받는 리더 중 하나 대통령도 국회의원도 수많은 교인들도 만나고 싶어 해 정곡을 찌르는 웃음은 강력한 무기가 된다. 보카치오(1313-1375)가 '수세기동안 어둠 속에 갇혀 있었던 회화예술에 빛을 던진 사람'이라고 높이 평가했던 사람이 있다. 그는 14세기 이탈리아의 화가와 건축가 조토(Giotto di Bondone, 1267-1337)이다. 그는 재치 있는 응수로 사회적 지위의 경계선을 허물고 나폴리 군주와 우정을 맺었다. 어느 찌는 여름날 군주가 조토에게 말했다. “내가 자네라면 그림을 그만 그리겠네.” 이에 조토가 이렇게 응했다. “저도 그럴 것입니다. 제가 폐하라면 말이지요.” 세계 처음으로 본격적인 자기계발서를 만들어낸 사람이라고 할 수 있는 데일 카네기(Dale Breckenridge Carnegie, 1888-1955)는 미주리 주 매리빌의 농장 출생이며 미주리주 워렌스버그에 위치한 중앙 미조리 대학교(University of Central Missouri)를 졸업한 뒤 네브래스카에서 교사, 세일즈맨 등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1912년 YMCA에서 성인을 대상으로 하는 대화와 연설 기술을 강연하면서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사례를 중심으로 진행하는 것이 특징이며 책 또한 그러하다. 그는 그의 저서 <생각이 사람을 바꾼다>에서 말했다. “유쾌한 사람은 자기 일에만 몰두하는 사람이 아니다. 때론 자신의 일을 전부 제쳐놓고 타인의 문제에 전력을 쏟는 열정이 있는 사람이다. 타인에게 자신의 힘을 나누어주고 마음을 열어주는 것은 자신의 삶을 행복하게 만드는 방법이다.” 그런 경구에 딱 맞는 유쾌한 목사가 바로 새에덴교회 소강석(蘇康錫, 1962. 2. 22 ~ )이다. 유쾌한 사람은 농담을 적절하게 잘 활용한다. 소강석 목사는 전 세계 교인을 사로잡는 설교에서 박근혜 대통령도 스스럼없이 웃게 하는 유쾌한 유머로 시작해 누구나 감동하는 명쾌한 말씀으로 마무리한다. 2016년 3월 3일 오전 7시 서울 코엑스 D홀에서 열린 제48회 대한민국 국가조찬기도회는 국가의 번영과 국민의 평안을 기원하는 3.000여 명의 국내외 각계 지도자들이 모인 가운데 성공적으로 열렸다, 이날 기도회에는 박근혜 대통령도 함께 참석해 ‘통일을 가슴에 품고 기도하는 민족’이란 주제와 ‘성경적 섬김, 나부터 개혁, 새 마음 국민통합, 경제 재도약, 한반도와 세계 평화’라는 부제 아래 진행되었다. 이날 설교자는 소강석 목사였는데 성경적 세계관과 가치관을 기반으로 대한민국의 근대사에 기여한 한국교회의 역할과 미래의 통일비전을 제시했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소강석 목사의 특기인 즉흥 멘트가 박근혜 대통령을 환하게 웃게 만들었다. “세계의 몇몇 유명 여성 정치인들이 있는데 박근혜 대통령께서는 완전 차별화가 되셨습니다, 그들도 다 나름대로 성공한 정치인들이지만 대부분 육중한 몸매를 자랑하고 튼튼한 거구를 자랑하는 분들입니다. 그러나 우리 대통령님께서는 여성으로서의 미와 그리고 모성애적인 따뜻한 미소까지 갖고 계십니다.” 1963년 8월 중순 무려 25만 명의 사람이 미국 워싱턴에 있는 쇼핑몰 앞에 모였다. 초대장도 없고 날짜를 확인할 수 있는 웹 사이트도 없었던 시절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Jr. 1929. 1. 15. ~ 1968. 4. 4.) 목사의 연설을 듣기 위해서였다. 킹 목사는 미국에서 가장 연설을 잘하는 사람도 아니었고 또 인권 탄압으로 고통을 받던 유일한 흑인도 아니었다. 하지만 킹 목사가 다른 인권운동가와 다른 점이 딱 하나 있었다. 그는 이것이 잘못되었다, 저것을 바꿔야 한다고 주문하지 않았다. 대신 “나에겐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라며 자신의 신념을 사람들에게 이야기했다. 그의 신념을 믿은 사람들은 그걸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고, 주변 사람들에게 열광적으로 전파했다. 워싱턴의 여름 뙤약볕 아래 그 많은 사람이 모여든 것은 흑백 갈등 차원을 넘어 미국의 미래에 대한 신념을 공유했기 때문이었다(25%의 관중이 백인이었다고 한다). 유쾌한 목사 소강석은 킹 목사처럼 자신의 신념을 전하는 목사이기도 하다. 그는 본래 영성에 도취된 퓨리티(purity) 지향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법무장관과 국정원장을 지낸 김승규 장로를 만나 반기독교 세력들의 전략과 공격 그리고 사상적 배경을 알게 되었다. 그 뒤부터 소강석 목사는 교회 생태계를 파괴하는 반기독교 세력에 맞서 이슬람 세력 억제와 동성애 입법 방지 등을 위한 사상전(思想戰)의 선봉장으로 교계 유니티(unity) 지향의 목사가 되었다. 그래서 그의 신념의 두 축 퓨리티와 유니티를 위해 한국교회를 섬기고 교계 연합을 위한 한 줌의 중보와 불씨가 되고자 헌신하고 있다. 유쾌한 목사 소강석의 삶과 설교 앞에 독자는 즐거운 마음의 준비를 하고 앉아야 할 것이다. 그는 한국의 대표 목사들 가운데 한 사람이지만 어떤 흠이나 결이 없는 가장 유쾌한 목사이기 때문이다. 그런 그를 순복음교회 원로 조용기 목사도 아주 좋아한다. 유쾌한 목사 소강석은 인류 역사상 가장 뛰어난 대중 소통 매체인 시성(詩性)을 지닌 시인이기도 하다. 2015년 천상병귀천문학상 대상 수상 시집 〈어느 모자의 초상〉에 이런 시가 있다. 빈 의자 지하상가 개척교회 예배 시간이 되어도 사람 한 명 없어 장모님과 아내, 아이만 놓고 설교를 하려면 마음이 곤고하여 어디론가 숨어버리고 싶을 정도로 가슴 아팠던 나날들 토요일 저녁이면 지하상가 교회 차가운 빈 의자들을 붙잡고 눈물로 드렸던 기도 “주여, 사람을 보내주소서, 한 명이라도 보내주시면 생명을 걸고 사랑하겠습니다“ 그 눈물의 기도 하늘에 닿아 목자의 피리소리를 따라 몰려오는 양떼들처럼 구름 같은 성도들을 돌보는 당신의 목동이 되었으니 아, 지하실 교회 차가운 빈 의자여 어둠 속에서 빛나던 영혼의 별빛이여 고독한 소명자의 눈물이 적신 사랑의 목마름이여 이 시에 대해 문학평론가 김순진 시인은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빈 의자」는 소강석 시인이 가락동의 개척교회 시절 겪은 이야기다. 소강석 목사는 1988년 가락동의 한 상가 지하에서 개척교회를 시작했다. 정말 피눈물 나는 이야기다. 시인의 말처럼 “예배 시간이 되어도 사람 한 명 없어 장모님과 아내, 아이만 놓고” 설교를 해야만 했던 심정은 어떠했을까. “지하상가 교회 차가운 빈 의자들을 붙잡고 눈물로” “주여, 사람을 보내주소서, 한 명이라도 보내주시면 생명을 걸고 사랑하겠습니다”라는 구절은 어쩌면 예수님께서 직접 들려주시는 음성으로 들린다. 소강석 목사의 간증을 들으면 ‘하나님은 꼭 이루어주신다’는 말씀을 믿게 된다. 다음은 소강석 목사의 간증 중 일부이다. “저는 88년도 가락동에서 월세로 처음 교회 개척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함께할 개척 멤버나 경제적인 지원 없이 분당으로 옮겨와 그야말로 맨손으로 지금의 새에덴교회를 시작했습니다. 개척 3년 만에 300명 장년 성도를 돌파하게 되었고 4년 만에 교회 건축 대지 400평을 구입했습니다. 그리고 7년 만에 1030평에 달하는 교회 건물을 건축하게 되었으며 1500명 성도를 이루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제가 특별해서도 아니고 지역적인 조건이 좋아서도 아닙니다. 오직 7년 동안 하나님 앞에 엎드렸던 눈물의 기도와 전적인 하나님 은혜일뿐입니다.” 지금은 4만여 명의 성도가 새에덴교회에서 예배를 드린다. 새에덴교회가 이렇게 빠른 기간 내에 큰 성장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세계 교회 역사에서도 이례적인 일이다. 여기에는 이 시에서 보이듯 성도들을 내 부모님이나 형제처럼 아끼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감사하는 마음을 잊지 않았기 때문이라 생각해 본다. 내가 발전하고 싶은 것처럼 성도들의 발전을 돕고 그들의 미래와 행복을 같이 고민했기 때문이라 생각해 본다. 그리고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무조건 믿고 의지하여 따랐기에 가능할 수 있었다고 본다. 2016년 8월 14일 새에덴교회에서 광복을 기리는 주일예배를 마치고 당회장실에서 물었다. -피곤하신데 사모님하고 어떻게 결혼을 하시게 되었습니까. 키도 더 크시던데. “그건 내가 책 한 권 드릴 게요. 책에 그 이야기가 다 있습니다.” 그는 차를 가지고 들어온 사무 간사에게 〈맨발의 소명자〉라는 책을 가져오게 해 건넸다. -결혼 이야기가 이 책에 다 있나요. 그는 지친 표정으로 대답했다. “네.” 그 책에는 그의 장모 정금성 권사님을 만나게 된 이야기부터 있었다. 광주 신학교 시절 그는 어느 날 무등산 기도원에서 금식 겸 굶식을 하고 있었다. 그때 그가 기도하는 곳 위쪽에서 여자 성도 열대여섯이 기도하고 있었다. 기도하는 소리나 모습이 영적 고단자들이었다. 그들 가운데 리더로 보이는 사람의 얼굴이 환하게 빛났다. 그는 그분에게 다가가 말을 건넸다. “집사님! 저를 위해 기도 좀 해 주십시오. 저는 기도가 고픈 신학생입니다.” 그러자 그분은 가만히 눈을 뜨고 그를 조용히 보더니 말했다. “주의 종이 되려면 사도 바울과 같이 목숨 내놓고 가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만 두는 게 좋을 겁니다. 요즘 신학생들을 보면 한숨 나올 때가 많아요.” 그리고 그녀는 다시 기도를 했다. 순간 자손심이 상한 그는 중얼거렸다. ‘세상에 저렇게 쌀쌀 맞을 수가 있을까. 나 같은 사람에게 그런 말을 하다니... 저 사람은 영통을 한게 아니라 먹통을 했구먼.’ 그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소리소리 지르며 기도를 했다. “주여! 나를 저런 사람보다 7배 70배 더 큰 기도의 영력을 주옵소서. 능력 있는 지도자가 되게 하옵소서. 그리고 저 사람들보다 더 큰 사랑의 종이 되게 하옵소서.” 지금 이 기도에는 억울함이 배어 있다. 그런데 스피노자는 진(眞)보다도 선(善), 인간의 행복에 커다란 관심을 기울인 철학자라는 것은 자주 지적된다. 그의 저서 라틴어 제목 〈에티카〉(윤리학')가 가리키는 바와 같이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도덕을 해명하는 시도(試圖)이다. 그래서 ‘감정의 윤리학자’로 불린 스피노자가 〈에티카〉에서 정의한 인간의 48가지나 되는 감정엔 ‘억울함’이 들어 있지 않다고 한다. 아니 이게 말이 되나. 우리가 얼마나 많은 상황에서 억울함을 느끼나. 교통사고가 나도 갑자기 상사에게 혼이 나도 심지어 말싸움을 하다 이겨도 어딘가 손해 본 거 같은 느낌이 드는데 말이다. 그 이유는 한국인은 억울함을 감정이라고 생각하지만 서양인은 부당한 대우나 불이익을 받았다는 자기 나름의 ‘판단’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강석 전도사도 무시당한 기분이 들어 억울해서 씩씩거리며 한참 기도하고 있는데 누가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누군가 보니 아까 그분이었다. 아까는 쌀쌀 맞았는데 지금은 부드럽게 그를 대하니 그는 어리둥절했다. “기도하시는 데 실례합니다만 아까는 정말 죄송했습니다. 깊이 기도하고 있는 데 말을 걸어 그만 무심코 그런 말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인연으로 알게 된 정금성 권사님은 교회를 사랑하고 주의 종을 잘 섬기시는 분이었다. 세월이 흘러 광주에서 신학교를 마치고 서울에서 신학원을 다니게 되었다. 그 당시 그는 기회만 있으면 남산에 올라가 서울 시가지를 내려다보고 기도하며 이상을 키웠다. “저 넓은 서울 땅! 과연 하나님은 나를 어느 쪽으로 인도하실까. 어느 쪽에서 개척을 하게 하실까. 아브라함에게 동서남북을 바라보라고 하신 하나님! 저도 동서남북을 바라봅니다. 저의 갈 길을 보여주소서. 제가 가야 할 곳을 가르쳐주소서. 그리고 개척에 필요한 물질도 예비해 주실 줄 믿습니다.” 서울을 내려다보며 이런 기도의 영감 속에 취하다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흘러나오곤 했다. 그때마다 당시 유쾌한 전도사 소강석에게 생각나는 노래가 있었다. “영등포로 갈까요, 청량리로 갈까요...” 신학원 졸업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은 서울에서 개척할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동안 그는 데이트 한번 하지 못하고 서울에서 치열한 삶을 살았다. 신앙생활에 너무 바쁘고 또 전남 화순군 백암리에서 개척한 백암교회를 돌보느라 정신이 없어서 그는 연애할 기회가 없었다. 그때까지 여자 손목 한번 잡아보지 못했고 게다가 그것이 죄인 줄 알았다. 그는 이제는 데이트를 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교회 개척을 하려면 결혼을 해야 한다는 많은 목사님들의 조언도 뒤따랐다. 총각 신분으로는 힘들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기왕에 결혼을 할 거라면 개척 전에 해야 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결혼할 대상자는 있는데 그 자매가 그하고는 죽어도 결혼을 안 하겠다는 것이다. 안 하겠다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만나주지도 않고 전화도 안 받는 것이었다. 그 자매는 기도원에서 만나 알게 된 정금성 권사님의 딸인데, 어머니가 아무리 달래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목사 사모는 절대로 안 하겠으며, 특히 소강석 전도사 같은 사람과는 죽어도 결혼을 안 하겠다는 것이다. 아무리 자식이라도 어머니 마음대로 마음까지 돌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방법은 기도하는 것밖에 없었다. 그 자매가 저에게 그토록 거부반응을 보인 이유는 어렸을 때 자기 어머니가 지나칠 정도로 열심히 믿었다는 것 때문이었다. 닭을 잡아도 자녀들에게는 국물도 맛보이지 않고 목사님께 갖다드리고, 농사를 지어 추수를 해도 교회에 먼저 갖다 바치고, 소 팔고 논 팔아서 앞장서서 교회 건축헌금을 드렸다는 것이다. 가난한 목사님과 어려운 교회는 보이는 대로 도와주면서 자녀들을 먹이고 입히는 데는 거의 신경을 못 썼단다. 그래서 어느 때부터인가 목사에 대한 피해의식이 생기게 되었고 절대로 엄마처럼 믿지 않겠다고 결심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자기 엄마보다 더 했으면 더했지 절대 덜하지 않는 열성파 예수쟁이 전도사와 결혼을 하라니 펄펄 뛰는 것은 당연했다. 게다가 키도 작고 못생기고 가진 것 하나 없는 남자니... 그때까지만 해도 저는 키 작은 줄 모르고 살았습니다. 가난이 뭔지도 모르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때 비로소 제가 키가 작고 못났으며 가난한 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저는 밀어붙였습니다. 그런데 전화를 해도 받지 않고 편지를 써도 뜯어보지도 않고 찢어버렸습니다. 편지를 아무리 잘 써도 한 자도 안 읽어보니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그녀가 간호사로 근무하는 종합병원 옆 다방에서 7시에 기다리겠다고 편지하고 나가면 8시, 9시가 되도록 어항 옆에 앉아 물고기만 바라보다 오기가 일쑤였습니다. 직접 찾아가면 욕세례를 퍼부으며 모욕을 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다고 같이 맞받아치지도 못하는 형편이었습니다. 사실 그것은 그녀가 욕을 잘해서 그런 게 아니라 저와 죽어도 결혼을 안 하기 위한 쇼였습니다. 그렇게 무식하게 행동하면 포기할 줄 알았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어림없는 생각이지요. 저는 그녀를 절대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연애 경험이 없는 저는 데이트도 믿음으로 밀어붙였습니다. 그러나 너무 밀어붙이니까 그녀가 이제는 해외근무 수속을 밟기 시작했습니다. 너무나 귀찮고 스트레스를 받는다고 아예 해외로 도망을 가버리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미래의 장모님이 되실 정금성 권사님께 무작정 매달렸습니다. 그랬더니 권사님께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닙니까. “딸이 내 말을 들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런데 저렇게 결혼 하지 않겠다고 날고뛰니 나라고 어떻게 할 방법이 없네. 차라리 거시기 해 불소.” “예? 거시기라고요?” “내가 방 열쇠를 줄 테니까 거시기 해 블란 말이시...” “아, 네... 거시기요...” 저는 그제야 거시기의 의미를 파악하고 열쇠를 받아 장모님의 뜻을 받들어 거시기(?)를 하기 위해 밤에 그녀의 방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열쇠를 따고 들어가자마자 귀청이 찢어질 듯한 고함소리와 함께 물건들이 날아 왔습니다. 얼마나 모질게 욕을 하고 물건을 던지며 발버둥을 치던지 거시기는 고사하고 본전도 못 챙기고 도망 올 수 밖에 없었습니다. 아무래도 방법이 틀렸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일주일을 작정 기도하면서 전략을 세웠습니다. 먼저 하나님께 충분한 자금을 신청했습니다. 그것을 일주일 내에 주시면 제 전략이 먹혀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3일 만에 하나님께서 주셨습니다. 그것도 미국에 계시던 박종삼 목사님으로부터 돈이 송금 된 것입니다. 미국에서 돈을 송금하면 며칠 이상이 걸리는데 하나님이 저의 기도를 들으시고 이미 그 이전부터 예비를 해 주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드디어 일주일 후 토요일이었습니다. 그녀가 근무하는 적십자병원 앞에 저는 뭉칫돈(?)을 주고 택시 한 대를 대기시켜 놓고 잠복근무를 하였습니다. 물론 이 전락은 그녀의 어머니 정 권사님과 짜낸 지혜이기도 합니다. 드디어 잠복근무를 시작한 지 정확히 33분 후 병원에서 다섯 명의 여자들이 나왔습니다. 그중에 권사님의 딸인 배정숙 자매도 있었습니다. 어쩌면 저의 기도대로 일이 착착 진행되는지... 저는 그들을 계속 미행하였습니다. 물론 제 뒤로 멀찌감치 택시가 따라오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적십자병원에서 충정로 쪽으로 가던 중 한 여자가 전화를 하기 시작합니다. 무슨 약속이나 모임이 있어 보입니다. 바로 그때였습니다. 머리 모양도 특별히 신경을 쓴 데다 양복에 구두까지 맞춰 잘 차려입은 저는 배정숙 자매 앞으로 가서 입을 열었습니다. “정숙 씨! 어떻게 된 겁니까? 나하고 1시 30분에 만나기로 약속해놓고 지금 2시가 되었는데, 어디 가는 거예요? 미스 배가 먼저 나에게 만나자고 했잖아요?” 그녀는 얼빠진 사람처럼 아무 말도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간호과장과 수간호사가 있는 곳에서 평소처럼 제게 욕을 퍼부을 수도 없었으니 답답했을 것입니다. 그때 얼굴이 홍당무가 된 그녀의 손을 자연스럽게 잡았습니다. 그 순간 대기시켜 놓은 택시가 제 앞에 와서 섰습니다. 저는 자연스럽게, 그러나 엄중한 자세로 그녀를 택시로 밀어 넣었습니다. 그녀는 그 순간부터 제 일방적인 태도에 압도당했는지 아무 말도 못했습니다. 저는 속으로 침이 마르고 초조했지만 겉으로는 품위 있는 모습을 지키며 여유 있는 체했습니다. 택시는 내장산으로 달렸습니다. 택시 안에서 침묵은 계속되었고 저는 다소곳한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있었습니다. 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모습이 벌어진 것입니다. 드디어 내장산에 도착했습니다. 금방 눈에 띄는 벤치로 가서 나란히 앉았습니다. 가을바람이 산들산들 불어왔습니다. 한 1분쯤 침묵의 시간이 흘렀을까? 미리 꾸며진 거룩한 각본대로 일어나 정숙 씨의 머리에 손을 얹고 안수기도를 해버렸습니다. “주여! 주의 종이 사랑하는 딸의 머리에 손을 얹었습니다. 오늘 사랑하는 딸에게 도장 찍어주소서. 결재하여주소서. 목사 사모로 이미 인을 쳐주신 줄로 믿습니다. 특별히 소명이 확실한 저 같은 목사 후보생 사모로 도장 찍어주신 줄로 믿습니다. 할렐루야!” 내 평생 그렇게 온 힘을 다해 안수기도를 해본 적은 없었습니다. 그 기도 덕분에 배정숙 자매를 설득할 수 있었습니다. 기도를 마치고 자연스럽게 데이트를 하기도 어색해져서 더 이상 내장산에 있을 필요가 없어진 우리는 바로 차를 타고 다시 광주로 왔습니다. 광주로 오면서 창밖을 내다보며 주님과 이런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주여! 연애하는 데도 뜨거운 소명감이 필요하고 우직한 믿음이 필요하군요. 이제 저의 개척도 절반은 이루어졌네요.” 저는 그 당시 아무리 인간적인 노력이나 지혜로 발버둥 쳐도 하나님이 도와주시지 않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하나님의 은혜를 앞장세우고 영적 생명력을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며 목회를 합니다. 돌아오자마자 저는 결혼 날짜부터 잡았습니다. 12월 26일! 딱 50일을 앞두고 결혼 날짜를 정한 셈입니다. 그러자 이번에는 그쪽 집에서 펄쩍 뛰었습니다. 방 얻을 돈도 준비해놓지 않은 데다 언제 준비해서 결혼을 하느냐는 것입니다. 방 한 칸 얻을 돈도 없는 주제에 무슨 결혼이냐는 의미였습니다. 그러나 그게 무슨 큰 의미가 있느냐고 하며 저는 밀어붙였습니다. 감사하게도 그때마다 항상 정 권사님은 제 편이 되어주셨습니다. 드디어 결혼식. 평소에 존경하던 김창래 목사님의 주례로 결혼식을 치렀습니다. 당시 신부는 빌려서라도 드레스를 입었지만 저는 헌 양복을 입었고, 길거리 리어카에서 산 1500원짜리 모조 반지가 결혼 예물의 전부였습니다. 안타깝게도 특별한 사연이 담긴 우리의 결혼 예물은 지금은 사라지고 없습니다. 도선생(?)께서 특별 심방을 와 가져가버렸기 때문입니다. 1500원짜리 모조 반지라는 것도 모르고 그 반지를 가져간 사람은 얼마나 실망을 했을까요. 지금부터 30년 전인 1986년 소강석 목사는 신학교 전 과정을 수박과 오이를 팔거나 허드렛일을 하는 가운데 소명의 길을 밟은 뒤 목사안수를 받으면 비전이 현실로 나타날 것이란 기대는 몽상이었다, 소 목사는 부교역자로 받아주는 교회 하나 없는 척박한 현실을 다시 한 번 경험하고는 하나님의 비전을 기억하고 기도하며 소망 중에 살아가야 했다. 서울에서 개척한다는 믿음을 갖고 물색한 지역은 그마나 가장 적은 비용으로 개척을 할 수 있는 ‘가락동’일대였다. 1,000만원 보증금에 월세 48만원. 지하 23평 공간에서 소강석 목사는 첫 예배를 시작했다. 주일 낮 예배는 몇몇 주민들의 참석이 있었지만 저녁예배는 장모님과 부인 그리고 어린 자녀들만 참석해 힘겨웠다. 그나마 부인은 어린 자녀 뒤치다꺼리 하느라 뒤편에 있어서 장모님과 마주 대하는 설교시간은 매우 어정쩡한 상황이었다고 회고하곤 한다. 심지어 예배시간에 오가는 쥐새끼들 때문에 경건해야 할 예배는 어수선 그 자체였다. 그는 목회자로서 소명을 받은 자신의 삶을 기억하며 낮에는 전도하면서 밤에는 교회당에서 새우잠을 청하고 ‘작정기도 100일 작전’에 돌입하기로 결심한다. 이 때가 비로 후원자는 오직 하나님뿐임을 새롭게 각성했던 시기였다. 더 많은 신자를 보내달라고 호소하며 밤을 지새고 또 낮에는 전도하는 반복된 생활하기를 수 백회, 소 목사는 하나님이 주신 부흥의 비전을 확신하는 가운데 고달픈 하루하루를 믿음으로 버텨나갔다. 94년 6월 분당 시대의 개막과 함께 순식간에 부흥하기 시작한 성도들은 5000여 명에 달하고 2005년 7월 3일 용인시 죽전동 산 50번지에 1만여 평 규모의 프라미스 콤플렉스(promise complex :언약복합건물)에서 첫 예배 1988년 11월 가락동 지하에서 처음 예배를 시작한 이후 94년 6월 분당 시대의 개막과 함께 순식간에 부흥하기 시작한 성도들은 5000여 명에 달하고 있었다. 그래서 더 이상 비좁은 공간 속에서 다음 세대를 책임질 민족의 지도자를 양성하는 교육 시설이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었다. 그러던 중 소강석 목사는 2001년 3월 평양을 방문할 기회를 통해 통일한국 시대의 비전을 볼 수 있었다. 특별히 평양에 있는 창광 유치원을 방문하면서 통일한국시대를 대비한 인재 양성의 절실함을 깨닫게 된다. 북한은 영향력 있는 지도자를 창광 유치원에서부터 기르고 있었다. 그래서 북한에서 교회에 돌아온 순간부터 우리의 자녀들을 말씀으로 훈련시켜 통일 한국 시대를 짊어지고 갈 지도자로 배출시켜야 한다고 외쳤다. 그 결과 3M(맨손, 맨몸, 맨땅)으로 시작된 새에덴교회의 역사는 창립 17년 만인 2005년 7월 3일 용인시 죽전동 산 50번지에 1만여 평 규모의 프라미스 콤플렉스(promise complex :언약복합건물)에서 첫 예배를 드렸다. 2016년 7월 27일 약속보다 반시간 늦은 오후 2시 30분 지하철과 버스를 갈아타며 도착한 새에덴교회 집무실에서 소강석 목사를 만났다. 그는 내가 늦는 바람에 점심을 여유 있게 먹었다고 웃으며 예의 그 달변의 입을 먼저 열었다. -목장 기도회 때 제 설교 들으셨나요. “광명교회에서 못 들었습니다.” -뭐냐면 지금 한국 교회가 빨리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목회 생태계 교회 생태계 환경을 지키고 복원하는 것입니다. 왜 여기에 관심이 있느냐. 생태계가 무너지면 우리 생존이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환경이 사막화 되고 황폐하게 됩니다. 우리 한국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교회 생태계가 급속도로 무너져가고 있습니다. 지금 이걸 모르니까 교단 안에서 분쟁이 잦은 겁니다. 이거 아는 사람 우리나라에서 몇 안되요. 이건 내가 국정원장을 지내신 김승규 장로에게서 배웠습니다. “명성교회 장로죠.” -네 아닙니다. 할렐루야 교회 장로죠. 그분한테 배워가지고 또 따로 전문가들한테도 배웠습니다. 제가 얘기 좀 쭉 하겠습니다. (인쇄물을 보이며) 여기 있지만 글과 말은 또 다릅니다. 영국이 어떤 나라였습니까? 전 국민이 크리스천이었습니다... 소강석 목사의 기억력은 뛰어났다. 영국교회는 사상전과 영전을 하지 못해서 망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세계의 부흥 운동과 선교 운동을 주도한 나라였습니다. 그래서 영국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런 영국에도 성경의 권위에 도전을 하고 교회 생태계를 파괴하려고 하는 반기독교적인 정서가 몰려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반기독교적인 정서는 반기독교적인 문화와 제도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문화와 제도가 입법화로 가게 되었습니다. 영국교회는 입법화로 가기 전에 사상전과 영전을 잘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영국교회는 이런 시대적 트렌드를 읽지 못했습니다. 이런 시대적인 흐름을 알고 교회들이 함께 연합하여 쓰나미처럼 밀려오는 반기독교적인 사상과 정서를 막아냈어야 하는데 그러지를 못했습니다. 영국교회의 대부분의 성직자들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사회적 이슈에 대해서는 노터치하겠습니다. 정치적인 사안에 대해서는 정치인들에게 맡기겠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저 기도하고 복음을 전하고 개교회의 목양을 하는 데만 집중을 하겠습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한 결과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35년, 40년 후에는 영국교회가 완전히 박살나 버리게 되었습니다. 전 국민이 기독교인이나 다름없던 나라가 지금은 기독교 인구가 겨우 2% 밖에 안 되는 나라가 되어 버리고 말았어요. 반대로 이슬람은 8%가 되어 버렸습니다. 게다가 얼마나 테러문제로 몸살을 앓고 두려워 떨고 있지 않습니까,,, 한국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교회도 사상전을 하고 영전을 잘해야 할 때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한국교회가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세 가지 당면 과제가 있습니다. 첫째, 목회 생태계와 교회 환경을 복원해야 합니다. 한국교회에 반기독교적인 정서와 공격이 쓰나미처럼 밀려오고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교회를 개혁하고 부흥의 터보 엔진을 달아야 합니다. 아무리 목회 생태계가 복원되어도 교회가 개혁되지 않고 부흥하지 않으면 안 돼요. 셋째, 다음세대를 준비해야 합니다. 한국교회는 어린이와 청소년, 청년들을 교회로 끌어들이고 신앙을 계승해주는 목회를 해야 합니다. 과감하게 교회 교육에 투자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 중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가 바로 목회 생태계를 복원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왜 생태계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줄 아십니까? 왜 세계 각국의 정상들이 기후변화협약까지 하며 자연 생태계 복원을 위해 목매고 있습니까? 환경, 생태계가 파괴되면 우리의 생존이 위협을 받고 생명 사회가 타격을 받기 때문입니다... 관상이라는 영화를 보면 조선 최고의 천재 관상가 김내경이 어느 바닷가에서 한명회를 만나 이런 이야기를 하잖아요? “파도를 일으키는 것은 바람이거늘, 나는 파도만 보았지 바람은 보지 못했다.” 눈에 보이는 사람들의 관상만 보았지, 보이지 않는 시대정신과 흐름을 읽지 못했다는 거예요. 우리 한국교회도 파도만 보았지 바람은 보지 못했어요. 다시 말하면 반기독교적인 정서와 공격이 왜 불어오는가, 그런 파도를 일으키는 원인인 바람을 볼 수 있어야 했어요. 그리고 그걸 보고 한국교회가 깨어 일어나고 연합하여 사상전, 영전을 잘해야 한다는 것을 깨우쳤어야 해요. 그런데도 한국교회는 계속해서 이러한 사상전, 영전을 할 필요성을 못 느꼈어요. 다 개교회 목회와 개교단 위주의 각개전투에만 머물러 있었어요. 아니, 한국교회는 다툼과 분열의 블랙홀에 빠지게 된 거예요. 개교회도 계속 서로 내부 파워게임을 하는 교회가 많았고 교계가 교권 싸움으로 연속을 했어요... 그러면 우리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목회 생태계를 지키고 복원할 수 있습니까? 1) 미자립교회를 지원하는 일에 앞장서야 합니다. 저도 가락동 23평 지하실에서 개척교회를 할 때 그런 경험을 많이 했어요. 개척 멤버 한 명 없이 지하실에서 개척해서 죽어라고 전도하여 양육해 놓으면 주변에 깨끗하고 시설 좋은 교회로 가 버리는 거예요. 저도 과거에 이런 아픔을 겪어 보았어요. 목회생태계가 살아 있을 때는 작은 교회에서 큰 교회로 사람이 옮겨도 또 다시 새로운 성도들이 왔지만, 지금은 더 이상 작은 교회에 교인들이 오지 않아요. 왜냐면 이런 수평이동의 선순환 생태계가 다 깨져버렸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는 로칼 처치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에요. 공교회로 존재해야 해요. 우리 지역에도 공교회가 이루어져야 하고 교단 안에서도, 한국교회 안에서도 공교회를 이루어야 해요. 선교신학자 랄프 네이버는 오늘날의 대부분의 지역교회 담임목사들은 교회가 성장할수록 자신만의 성을 쌓으려고 한다고 지적하였습니다. 그러지 말고 그 지역 안에 하나님의 도성을 쌓아야 한다고 권면을 합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만의 캐슬 빌더(castle builder)가 되지 말고 하나님의 킹덤 빌더(kingdom builder)가 되라고 하는 거예요. 2) 신앙과 신학의 순수성을 지켜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고 신앙생활 하는데 신앙의 순수성과 신학의 퓨리티(purity)가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요. 그러므로 우리는 이 퓨리티의 신앙에 목숨을 걸어야 해요. 마귀가 교회를 무너뜨리는 전략 중의 하나가 신앙의 순수성과 신학을 무너지도록 하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구약에서는 언약백성들에게 가장 중요한 게 정결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레위기의 가르침대로 정결을 갖추어야 하나님의 거룩에 참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레위기를 보면 거룩(holiness)은 하나님의 영역이고 순결(purity)이나 정결(cleaness)은 인간의 영역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거룩하니 우리도 거룩하라고 하지 않습니까? 레위기의 목표는 거룩이지만 거룩에 참여하고 이르기 위해서는 반드시 전제 조건이 있어요. 그것이 바로 정결이라는 거예요. 그러므로 하나님을 섬기고 신앙생활 하는데 정결한 영성, 순결한 신앙에 목숨을 걸어야 합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더렵혀진 신부가 어떻게 신랑 앞에 떳떳하게 설 수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우리가 신앙의 정결, 순수성을 잃어버리면 하나님의 거룩에 참여할 수 없어요. 일제시대 때도 얼마나 신사참배 문제나 이런 것을 가지고 한국교회를 더럽혔습니까? 영적 간음을 하게 된 것이에요. 당시 조선의 지식인들뿐만 아니라 종교인들까지 신사참배는 우상숭배가 아니라 문화적 행위라고 변명하며 신사참배에 동참했어요. 그때 주기철 목사님은 아녀자에게 정절의 의무가 있듯 신앙인에게는 믿음의 정절이 있어야 한다며 끝까지 신사참배를 거부했어요. 그러나 계속되는 일제의 폭압으로 감리교, 성결교, 구세군 등 대부분의 개신교단들이 신사참배를 결의했고 조선예수교장로회마저 1938년 9월 총회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하고 말아요. 그때 주기철 목사님은 “한국교회가 세상의 명예와 권력 앞에 믿음의 정절을 포기하고 무릎을 꿇었다”며 통회합니다. 그리고 “칼날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한, 내가 그 칼날을 향해 나아가리라”고 외치며 순교의 길을 가다가 결국 광복을 1년 앞둔 1944년 옥중에서 죽음을 맞습니다. 부족하지만 저희 교회가 지원을 해서 일사각오라는 영화로 제작이 되어 상영이 되었어요. 저는 그 영화를 보면서 얼마나 마음속으로 울고 또 울었는지 모릅니다. “과연 우리는 주 목사님의 발끝이라도 따라갈 수 있겠는가. 산정현교회를 생각할 때, 오늘날 한국교회의 자화상이 얼마나 부끄러운가.” 오늘날 우리의 잘못으로 목회 생태계가 깨져가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3) 서로 연합하여 반기독교적인 정서를 막아내야 합니다. 지금 전 세계적으로 반기독교 정서가 교회를 에워싸고 있습니다. 특별히 한국은 반기독교적인 정서뿐만 아니라 안티크리스천의 공격이 얼마나 주도적이고 전략적으로 공격해 오는지 몰라요. 물론 이런 일은 어제 오늘만의 일이 아닙니다. 초대교회 때는 핍박과 박해로 무너뜨리려고 했어요. 그런데 지금은 아주 보이지 않게 사상전 영전으로 공격해 오고 있어요. 그런데 이 사상의 기본은 신마르크스주의입니다. 신마르크스주의(Neo Marxism)는 마르크스주의와 프로이드 심리학을 아주 교묘하게 접목하여 만든 것인데 한마디로 무신론적 사회주의와 휴머니즘이 절묘하게 결합된 사상입니다. 내용은 무신론이지만 겉으로는 평등, 인권, 박애, 나눔, 섬김, 정의, 소수자의 권익보호, 공동체 등을 추구합니다. 바로 이 네오마르크스주의가 우리나라에 유입되면서 새로운 진보 사상과 신좌파 그룹을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평등 인권 박애 나눔 섬김 정의 소수자 권익보호 공동체 등 얼마나 좋습니까. 그런데 여기에 무신론적 사상이 끼어 있어요. 그러다보니까 성도 평등을 부르짖으면서 동성애를 주장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아니 동성애를 통한 성정치를 펼치기 시작한 거예요. 신마르크스주의를 창안한 빌헬름 라이히가 근로자들의 정신치료를 해주다가 발견한 사실이 있었는데, 좁은 국민주택에서 사는 노동자들이 신경증이나 노이로제에 많이 걸려있더라는 거예요. 그 이유를 분석해보더니 성적인 억압 때문이었다는 겁니다. 작은 집에서 부모님도 모시고 애들도 우글우글하지요, 그러다보니 부부간에 원만한 성생활을 못해 성적 억압이 되어 있더라는 겁니다. 그 때 그는 깨달았어요. “아, 이것이다. 사람은 성적 욕구를 잘 풀어줘야 한다. 누구나 평등하게 성적 욕구를 발산시켜줘야 한다.” 그래서 그는 성정치를 주장하기 시작했어요. “정치가 무엇인가? 인간의 삶의 문제를 현실적으로 해결해 주는 것이 정치가 아니던가? 그렇다면 인간에겐 성적인 억압부터 풀어줄 필요가 있다. 제한받고 있는 성적문제부터 해방시켜줘야 한다.” 바로 이것이 그가 주장한 성정치 이론이었습니다. 성정치 이론에 의하면 억압된 성적 욕구는 사람을 더 불행하게 만들고 파괴적으로 만든다는 거예요. 그래서 개인의 성적 욕구를 자연스럽게 발산하고 자유롭게 분출할 때 개인도 행복하고 이 세상 누구나 평등하게 사는 새로운 마르크스주의의 세상을 맞는다는 거예요. 그러니 그들은 가정의 고정관념부터 깨는 운동을 합니다. 가정은 남자와 여자가 결합해서 이루는 것만이 아니라는 겁니다. 동성애를 하는 사람도 얼마든지 남자끼리 부부가 되어 가정을 이루고 여자끼리도 마음만 맞으면 얼마든지 가정을 이룰 수 있다는 거지요. 따라서 신마르크스주의의 가장 큰 공격 목표는 기존 제도권의 가정과 학교에요. 그래서 어떻게든지 가정과 학교를 무너뜨리려고 해요. 그리고 교회를 공격해요. 특별히 대형교회를 공격해요. 그래서 이러한 마인드를 가진 사람은 학교에서 가르치는 전통 교육부터 공격하는 거예요. 그리고 전통적인 성의 규범과 구조에서 해방을 하도록 충동하고 선동을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지자체에서는 어떻게든지 학생들의 인권조례를 만들려고 하는 거예요. 그리고 교회를 무너뜨리려고 안절부절 합니다. 교회가 동성애를 반대하고 간음하지 말라고 가르치거든요. 이것이 바로 성정치와 네오마르크스주의의 목표이거든요. 그러면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지 모릅니다. “목사님! 그래도 그 사람들 불쌍하니까 그냥 자기들 맘대로 살도록 놔두면 안 됩니까.” 물론 저도 그러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꾸 그들이 소수차별금지법을 만들려고 하니까 그런 거예요. 자기들 좋은 대로 살면 누가 뭐라 하겠어요. 동성애자들을 보호한다고 소수차별금지법이 통과되면 다수의 인권이 역차별을 받게 되거든요. 특별히 소수차별금지법이 통과되면 목사가 교회에서 이런 설교도 못해요. 이런 설교 했다간 당장 조사를 받고 처벌을 받게 돼요. 그러면 목회 생태계가 저절로 파괴될 수밖에요. 또 어떤 분은 우리나라에 동성애자들이 몇 명이나 되고 영향력이 얼마나 있다고 그렇게 난리를 피느냐고 생각할 분도 있을 거예요. 그런데 동성애를 연구를 하다 보니까 동성애가 이슬람이나 이단, 안티 세력과도 다 연결이 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갈수록 이 세력이 엄청나게 커져가고 있습니다. 이슬람에 대해 말하려면 한이 없겠습니다. 이슬람은 절대로 기독교를 용납하지 않는 종교입니다. 그런데 더구나 이러한 세력이 안티크리스천들과 연합을 해서 한국교회를 전략적이고 주도면밀하게 공격을 해 오고 있어요... 그래서 반기독교적인 정서와 공격을 막아내는 일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하고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그런 교회라면 함께 연대해서 이슬람을 막아내고 동성애를 막아내고 이단을 막아내야 해요. 그렇게 해서 목회 생태계를 보존하는 것이 필요해요. 물론 이 일이 어려운 일이기도는 합니다. 기독교 2000년의 역사는 퓨리티(purity)와 유니티(unity)의 갈등의 연속이라고 말할 수 있어요. 이 둘이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지 못하니까 내부의 소모전을 하다가 공멸의 나락으로 추락했던 거예요... 물론 우리 한국교회도 과거에는 암묵적으로 교회 간의 경쟁, 교단 간의 경쟁이 있었어요. 그러나 지금은 달라요. 미국도 보십시오. 미국이 기독교 국가였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런 기독교 국가도 빌리 그래함 이후에 연합의 리더십을 발휘하는 지도자가 없으니까 다 개교회주의로 빠져 버렸어요. 개교회, 개교단주의에 빠지고 큰 교회 목사들 간에 스타플레이를 하다 보니까 세상에 동성결혼법이 통과되어 버리고 말았어요. 여러분은 〈신은 죽지 않았다〉라는 영화를 보셨습니까. 세상에 수업시간에 교사가 예수님 이야기를 했다고 고소를 당해 법정까지 서게 돼요. 미국도 이런 나라가 되어 버렸습니다. 제가 작년에 미국 연합집회를 갔을 때 동성결혼법이 통과 되었어요. 그런데 제가 집회를 했던 교회에 7천 만이나 되는 큰 교단을 이끄는 총회장이 참석을 한 거예요. 우리나라 인구보다 더 많은 성도들을 이끄는 총회장이에요. 그래서 그날도 총회장 전용기를 타고 올 정도예요. 그런데 그 사람이 인사말을 하는데 자기는 변호사 출신이라 동성결혼법이 통과된 것에 대해 법에 저촉되지 않을 정도로 성명서를 냈다는 거예요. 제가 그 말을 듣고 하도 열이 받아서 강단에 올라가 예정에 없었던 동성애 설교를 해 버렸어요. 그랬더니 성도들이 태어나서 이런 설교는 처음 들어본다고 가슴이 뻥 뚫리는 것 같다고 얼마나 좋아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저와 동행했던 기자들이 동성결혼법 통과에 대한 미국 교회들의 반응을 살펴보기 위해서 몇몇 교회들을 탐방하고 왔는데, 한 군데도 동성결혼법 통과에 대한 주보 광고나 반대 설교를 하지 않았다는 거예요. 제가 강단에서 설교하면서 그 총회장님께 공개적으로 질문을 했습니다. “총회장님, 성도가 7천만이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함께 연합해서 동성결혼법을 막아야지요. 만약에 워싱턴 광장에서 미국 교회 성도들이 백만 명만 모여서 반대 집회를 했다면 절대로 동성결혼법은 통과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랬더니 총회장도 내 말이 맞다는 거예요... 영국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1966년 런던목회자협의회에서 존 스타트목사가 로이드 존스 목사를 강사로 세웠어요. 그런데 로이드 존스 목사가 너무 독선적 강의를 한 거예요. 그러자 그 후로 존 스타트 목사가 로이드 존스와 결별 선언을 해버렸습니다. 그때부터 영국교회가 갈라지면서 힘을 잃고 사회적 정치적 이슈나 현안에 대해서 전혀 노터치를 한 거예요. 그리고 뿔뿔이 흩어져 개교회 목회만을 한 거예요. 그러다가 영국교회도 망한 것이 아닙니까? 장자교단이라면 이런 장자의 역할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신학과 교리가 다르면 큰 형님이 야단도 치고 가르치면서 우리를 따라오라고 하면서라도, 이런 일을 해야 할 것이 아닙니까? 너네들은 우리와 다르니까 니들끼리만 하라고 하면 되겠습니까? 옛날에도 종갓집이 종갓집 역할을 잘해야 집안이 잘 되었어요. 장손이 장손 역할을 잘 해야지 무능하고 역할을 못하면 못난 동생 놈들이 육갑을 떠는 경우가 있어요. 동생들이 육갑을 떨면 집안이 자칫 망하는 경우가 있어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미자립교회를 지원하고 목회 생태계를 지키고 복원해야 해요. 그리고 우리 신앙의 순수성과 신학의 퓨리티를 지키면서 함께 연대해서 반기독교적인 정서와 공격을 막아내야 해요. 그러려면 사상전, 영전을 잘해야 해요. 그리고 때로는 정책적 연합을 해야 해요. 우리 교단이 좀 영향력도 발휘하고 기수가 되어야 해요. 저는 이러한 일을 10여 년 전부터 해 왔어요. 10여 년 전부터 동성애를 막기 시작했고 8-9년 전부터 이슬람을 막기 시작했어요. 이러한 일을 하면서 테러 위협도 받았어요. 심지어는 어느 국가 기관에서 테러를 대비해서 신변보호를 해 준 적도 있어요. 뿐만 아니라 목회 생태계를 복원한다고 언론 대 사역을 했습니다. 그리고 정치인들을 만나려고 국회를 들락날락했어요. 모든 제도와 문화는 사상과 철학에서 나옵니다. 그리고 그 사상과 철학은 반드시 입법화로 갑니다. 그래서 저는 국회를 들락날락하며 동성애법을 막고 작년에는 교회 과세 문제를 은밀하게 막았어요. 그러다보니까 저 보고 정치목사라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그러나 지금은 그런 소리를 듣지 않습니다. 교회 생태계를 보호하고 반기독교적인 정서와 세력의 공격을 막는다는데, 누가 정치 목사라고 하겠습니까? 이 모든 일이 목회 생태계와 관련이 되어 있는 거예요. 그러므로 이제는 우리 교단이 앞장서서 한국교회의 목회 생태계를 지키는 일을 해야죠. 우리 교단이 자기 왕국을 세우는 캐슬 빌더가 아니라 킹덤 빌더가 되어 한국교회를 주도적으로 이끌어가면서 생태계를 복원하고 보호하는 일에 앞장서야 합니다. 1시간 40분에 걸친 유쾌한 목사 소강석의 나만을 위한 열정적인 일인(一人) 특강이 끝났다. 오후 5시 그는 수요예배를 준비해야 한다. 그는 3층 당회장실에서 교회 밖 건널목까지 배웅해 주었다. 2016년 8월 14일 광복을 기리는 예배를 드린 뒤 교회를 방문한 문인들과 담소를 나누며 식사를 한 뒤 간신히 짬을 내 만났다. 피곤해 한숨을 쉬는 소강석 목사는 내가 물을 두 가지가 뭐냐고 힘든 표정으로 물었다. -한 가지는 생략하고 앞으로 건강관리는 어떻게 하실 겁니까. “아! 정말 건강관리가 제 숙제입니다. 건강에는 먹는 것도 중요하지만 쉬는 게 제일 중요하더군요. 내가 해 보니까. 그래서 그래도 내가 버틸 수 있는 게 말입니다. 나는 골프도 못 치고 다른 특별한 운동도 못 합니다. 뒷산이 있어요. 뒷산 가서 장로님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친교합니다. 때로는 혼자라도 밤에 산에 가서 명상하는 그것이 아직까지 버티게 하는 것 같아요. 어쨌든 제 과제는 휴식입니다.” -그런데 시간 관리가 무리이신 것 같은데요. “아! 휴식. 지금 사실은 월요일은 뮤지컬도 가야하고 그리고 모임들 8·15 행사...” -주보에 나온 목사님 일정만 봐도 숨이 막히던데요. “또 동성애 모임 뭐라더라 아 그 지난번에 집회한 것에 대한 뒷관리...” -저는 예배드리고 뵈면서 이렇게 하시면 앞으로 얼마나 가시겠나 하는 생각이 들던데요. 지도자이신데 지쳐 계시고. 메시지에서도 강단 위에서도 너무 안타깝고... “아휴.” -목사님 설교를 세계 사람들이 보는데 힘들어 하시는 모습이 보이면... 설교 횟수를 좀 줄이셔야겠어요. 주일 설교를 두 번만 하셔야 할 것 같아요. 부목사들도 많던데(32명). “부교역자들이 많이 있지만 설교는 은사가 있어야 됩니다.” -물론 은사가 있어야 되죠. 그래도 소 목사님이 줄이시면 참석 교인이 두 배로 늘어날 겁니다. 세 번 나눠 참석하던 교인들이 두 번에 다 모여들 겁니다. 한 번이라도 쉬시면 건강에 도움이 되지 않겠습니까. “1부는 중직자들이 참여해요. 세 번 해도 아무 문제없어요. 김삼환 목사도 세 번 해요. 일단은 제가 4부하고 5부는 영상예배로 드리고 축도해요. 저녁예배 때는 여섯 번 하게 되니까 정말 죽어요. 저번 수요일 오셨던가요. 그때는 여덟 번 설교했어요.” -사람들이 말하듯이 건강할 때 건강을 지켜야 합니다. 앞을 바라보셔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 말 좀 드려야겠다 싶어 그냥 가려다가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겁니다. 지도자는 가급적 시간과 건강을 아끼셔야 합니다.“ 2016년 8월 31일 오후 8시 70을 바라보는 김문기 장로가 르디님 성가대에서 찬양하는 수요예배 설교 중 소강석 목사는 말했다. “참 옛날에 점쟁이가 예언을 하는데 큰 아들은 관운이 많고 그렇게 만사형통을 한다는데 나는 빌어먹게 생겼다고 하는 겁니다. 그런데 나는 정말 하나님한테 빌어먹고 살고 있어요.” (양손을 모아 비는 시늉을 한다. 회중 박장대소.) 세상에 소강석처럼 유쾌한 목사는 없을 것이다. 출퇴근 시간 지하철에서 숨을 참고, 손을 가지런히 하고, 이리저리 떠밀리다 보면 문득 ‘나는 누굴까’ ‘여긴 어딜까’ 따위의 존재론적 의문에 휩싸이게 된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왜 사냐고 묻거든 그저 웃지요’다. 그러나 유쾌한 목사 소강석이 3M 목회 과정에서 자신의 벽 앞에서 취한 믿음의 자세는 내가 보기에 사뮈엘 베케트의 장편소설〈이름 붙일 수 없는 자〉중의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소설에서 이름도 없고 팔다리도 없는 주인공이 몸통과 머리만 남은 채 단지에 들어가 어느 식당의 메뉴판 노릇을 하면서 말한다. “나는 계속 나아갈 수 없어. 그래도 계속 나아갈 거야.” 위대한 정신은 늘 임계점(臨界點) 가까이에서 그 너머를 꿈꾼다. 사상이 한 경계를 넘을 때 세계가 발전한다. 그래서 세상엔 아직도 다른 세계를 꿈꾸는 자들이 남아 있다. 우리 주변에는 극소수의 존경받는 리더와 대다수의 실망스러운 리더가 존재한다. 늘 그래왔고, 또 늘 그럴 것이다. 유쾌한 목사 소강석은 극소수의 존경받는 리더 중 하나다. 그래서 대통령도 국회의원도 수많은 교인들도 그를 즐겨 만나고 싶어한다. 유쾌한 목사 소강석 그가 교단 지도자 되어 우리를 유쾌하게 해 주고 우리 믿음을 명쾌하게 해 주기를 소망한다. 성경은 말씀한다. 그 후에는 이스라엘에 모세와 같은 선지자가 일어나지 못하였나니 모세는 여호와께서 대면하여 아시던 자요 여호와께서 그를 애굽 땅에 보내사 바로와 그 모든 신하와 그 온 땅에 모든 이적과 기사와 모든 큰 권능과 위엄을 행하게 하시매 온 이스라엘 목전에서 그것을 행한 자더라 신명기 34:10-12 2016-09-11
    • G.PEOPLE
    • G.PEOPLE
    2016-10-05
  • 지혜자의 마음 이건영 목사
    이건영 목사 이전이나 이후에도 위대한 설교자나 목회자는 많을 것이다. 그러나 말씀을 깨우치고 실천하는 지혜자의 마음을 지닌 이건영 목사에게 목회 성공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에게 목회는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에 알리는 하나의 수단일 뿐이기 때문이다. 화장터에 가서 뼈 몇 줌으로 바뀌어 나온 어머니를 상수리나무 아래 뿌리던 일은 크나큰 슬픔이다. 전도국장 시절 원자력병원에 가서 환자복 입고 곧 나을 것이라며 다짐하는 독일 병정 허봉춘 목사를 보던 기억은 기나긴 슬픔이다. 내 삶의 원천이며 원동력인 슬픔은 남의 슬픔을 이해하기 위해 고개 숙이고 몸 더욱 낮추어 눈물을 삼키게 한다. 미워할 수 없는 사랑은 나를 끊임없이 구속했으나 사랑할 수 없는 미움은 이날 이때껏 나를 키웠다. 그리고 대상을 알 수 없는 막막한 슬픔이 나를 일으켜 세우곤 했다. 어금니 꽉 깨물고 응시하리. 목사로서 오늘이 있게 한 선지동산 총신과 목사인 우리를 두른 거룩한 총회를. 2016년 1월 8일(금) 3월 6일(주일) 두 차례 이건영 목사(총신 75회)를 인천시 중구 인중로에 있는 인천제2교회 당회장실에서 만나 대담을 했다. -선교나 전도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십니까. “우리도 보편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저희 교회는 이제 지역사회와 함께하는 사회복지 정도로 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사회복지가 상당히 많은 효과를 거두는 모양이던데요. “그러니까 효과가 이제 갑자기 나타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저희들이 장애우들을 평일에 교회로 초청을 합니다. 교육관에서 하고 있습니다. 장애우 사역을 하다보면 말을 못하는 사람이 아버지라고 얘기할 수 있는 게 사오 년 걸립니다. 금방 효과가 나타나는 건 아닙니다. 꾸준히 하고 있기는 합니다.” -어떻게 그런 사역을 생각하시게 되었습니까. “이제 인천제2교회 1대 이승길 목사님은 전쟁 직후 남편 없고 모자들만 불쌍하게 사는 사람들을 교회 안에서 돌보는 마르다 모자원을 운영하셨습니다. 미군 부대에서 나오는 물품이나 식품을 가지고 불쌍한 모자들을 돌보셨는데 그것이 우리 교회 사회복지의 시작입니다. 그 다음은 우리 교회 2대 이삼성 목사님 그분은 우리 교회 내에 그 당시(70년대) 드물던 교회에 삼일유치원을 열었습니다. 우리 이 지역에서는 사립 유치원으로 꽤 유명한 유치원이었습니다. 지금이야 유치원이니 유아원 선교원이 많지만 말입니다. 그 당시는 거의 없다시피 했죠. 그런 사회복지를 이삼성 원로목사님이 하셨죠. 그 정신을 물려받은 것입니다. 몇 가지 사역을 교육관을 중심으로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사회복지 사역에 우리 교인들 마음이 많이 열려 있고 헌금도 많이 합니다. 그 종류가 열 몇 가지가 됩니다. 지역사회를 어떻게 보셨는지 모르지만 이 지역은 재개발 지역입니다.” (인천제2교회는 숭의로터리를 중심으로 주변에 공구업체와 인천중앙여자상업고, 인천시립도원체육관이 있다. 인천에서 두 번째로 세워진 장로교회라는 뜻에서 ‘인천제2교회’란 이름으로 1948년 세워진 교회는 68년이 됐다. 도시화와 산업화가 가속화되면서 인천 주변 지역은 숨 가쁘게 변했다. 많은 이들이 주변 신도시로 떠났고, 관련 기관과 시설도 자리를 옮겼다. 교회가 있던 지역은 점점 문화 혜택에서 소외된 지역으로 남았다. 그래서 2010년 새 예배당을 건축하며 지역사회를 향한 사역의 지향점을 더 분명히 했다. 주 중에도 주민에게 열린 교회, 지역과 함께 호흡하는 교회를 지향한 것이다. 과감하게 4000석 규모의 예배당을 1700석으로 줄였다. 그 대신 주민들을 위한 다양한 공간을 확보했다. 완공된 예배당에선 어린이 도서관, 장애인을 위한 특수교육센터, 노숙인과 어르신을 위한 목욕탕, 외국인 노동자를 위한 치과와 미용실, 헬스장 등에서 21가지 사역이 활발하게 진행 중이다.) -공장 가게들 공구 상가들이 많더군요. “공구 상가 음식점들이 많죠. 사실 이 지역은 인천에서 아주 낙후된 지역입니다. 그래서 사회복지에 관심을 가지게 됐고 눈을 뜨게 된 겁니다. 저희 교회가 송도 신도시라든지 영종 신도시에 있다 하면 사회복지가 필요 없죠. 재개발지역이라 사회복지가 필요합니다.” -지금 이 교회 오신 지 몇 년 되셨어요. “저는 여기에서 태어났어요. 이 교회 유아세례 출신입니다.” -아버님이 장로님이셨나 보죠. “장로님이셨죠. 돌아가셨습니다.”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이준경 장로님이라고 옛날에 경기도 제5대 교육감(1980. 2. 11. ~ 1983. 2. 27)을 하셨죠. 한명수 목사님 계실 그 때 경기도 교육감을 하셨습니다. 그 이후 교회가 점점 성장을 했어요. 저는 27살까지 여기 교인으로 있었죠. 그러다 소명을 받아 총신 신대원가서 서울서 칠팔 년 부교역자 생활을 했습니다.” -서울 어디서 하셨습니까. “혜성교회 박광옥 목사님 밑에 있었고 장충체육관 앞 장충교회 이규일 목사님 밑에도 있었죠. 거기서 부목사로 있다가 여기 이삼성 목사님이 내려오라고 해서 오게 됐습니다. 그 당시야 목사님 말씀하시면 하나님 하시는 걸로 알았죠. 장충교회에서 여기 본교회로 오라고 하니까 그냥 온 겁니다. 어르신 말씀이니까. 그때 와서 부목사(부임 1987. 6. 28) 6년 그리고 담임목사 23년(위임 1993. 12. 9) 넘어가네요. 그러니까 거의 30년 됐네요. 제가 52년 2월 14일 생이거든요. 제가 64세죠. 64세 가운데 이 교회에서 교인으로 27년 목회자로 30년 그러니 57년을 여기 있는 겁니다. 그러니까 여기는 뭐 권위도 없어요. 여기는 다 동기들 선배 스승 같으신 어른들인데 어느 날 건영이가 목사로 온 겁니다. 그래서 여기서 키워주신 어르신이 오시라고 해서 왔지만 몇 년 있다 서울로 도로 올라가려고 했어요. 그런데 한 2년 지나니까 초청해 주신 이삼성 목사님(1992. 9. 22 제77회 총회장 취임)이 저한테 후임자가 돼주면 좋겠다고 하신 겁니다. 그리고 저를 유학을 보내 주셨습니다.” -이삼성 목사님이 대단하시네요. “유학 다녀온 다음에 본인이 만 70세에 은퇴하시겠다고 하더니 정말 그러셨어요. 그때부터 지금까지 사역하고 있는 거죠.” -그 때가 언제죠. “그러니까 그게 87년입니다. 장충교회에서 87년에 왔습니다. 한참 민주화 운동할 때죠. 설마 제가 이렇게 오래 있을 줄 몰랐어요. 있을 수가 없는 건데 교인들이 좋아서 있을 수 있었죠. 시골 교회처럼 순수해요.” -이삼성 목사님이 언제 돌아가셨죠. “한 7년 넘었죠. 제가 여기 재직한 것도 부목사 6년 담임목사 23년 29년이네요. 정말 꿈만 같네요.” (그는 파안대소했다.) -총신은 몇 회세요. “75회입니다. 지금은 제 마음속에 하나님 은혜 주시면 이 교회에서 은퇴하자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아니 그러시면 지금 또 어디로 부임해 가시겠다는 겁니까. “저는 좀 일찍 은퇴를 해 힘이 있을 때 다른 사역을 좀 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장로님들이나 교인들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시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마음을 접었습니다.” -제가 보니 한 교회에서 지도력을 키우신 목사는 영적 지도자라 연륜이 더할수록 더 지도력이 성숙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 지도력을 다른 데 쓰는 건 좀 문제가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은혜지만 인천에는 신도시가 많이 생겼습니다. 여기 교회 근처에서 걸어 교회 나오는 교인은 5퍼센트도 안 됩니다. 나머지는 상상을 초월하는 먼 데서 오는 분들도 있습니다. 교회가 어느 정도 복음의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 지역에서 오시는 분들을 위한 것입니다. 여기는 청계천처럼 공구상가가 많습니다. 500개가 넘어요. 저 구석구석까지 성탄절 날 수건을 돌리면 500개가 부족해요. 장사하는 사람들은 그 자리를 죽어도 안 옮기려고 해요. 이미 다 자리가 잡혔으니까요. 저희 교회는 공구상가와 주위 식당들과 같이 갈 수밖에 없습니다.” -제임스 보이스가 30년간을 담임목사로 섬긴 필라델피아 제10장로교회는 장장 현재는 190년을 개혁주의 청교도 신앙을 전수하고 있는 뿌리 깊은 교회입니다. 그런데 그 교회가 필라델피아의 명동이라는 월넛 스트리트에 있습니다. 제임스 보이스는 선교를 위해 교회가 그 지역 중심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죠. “여기가 중구니까 옛날에는 인천의 번화가였죠. 제 어렸을 때 추억이 다 있습니다. 학교도 가고 병원도 가고 음식점도 많았습니다. 지금은 그런 것들이 다 신도시로 나갔습니다.” -교회로서는 딱 좋은 환경이네요. 교회가 땅값이 오르면 문제가 생기더군요. “교회가 땅 사기는 좋습니다. 평당 600이면 삽니다. 다른 지역은 굉장히 비싸지요. 그런데 파는 데는 600밖에 안 하니까요. 내놓으면 팔리는 건 공구상가입니다. 그러나 안 팔려고 하지요.” -시카고의 무디 바이블 교회도 시내에 있는데 목회자에 따라 교회로 사람들이 몰려온답니다. 거기 교인이 말하길 온 지역에서 몰려오는 교인들을 보면 아름답다고 하더군요. 그 교회는 변두리로 이사 가려고 하지를 않아요. 인천제2교회도 그럴 것 같네요. “아멘. 목사님 잘 모르시겠지만 실제로 송도 신도시하고 연수동에 수 만 채 아파트 대단지가 있습니다. 고 가운데 3000평 땅이 나왔어요. 경매로 80억에 나온 거예요. 일부 장로님들이 그 쪽으로 가자고 말씀 했어요. 한 10년 전일 겁니다. 그 때 거기로 갔다면 지금 엄청난 교회가 됐을 겁니다. 송도 신도시가 엄청나고 연수동 수 만 채 아파트 단지 한 가운데이니까요. 많은 교인들이 가자고 했는데 최종적으로 장로님들을 설득해 가지 말자고 했습니다.” -왜 그러셨습니까. “나중에 장로님들이 이유라도 좀 알자고 했어요. 내가 이유를 말씀 드릴 테니까 그 이유를 듣고 포기하는 것으로 하면 말씀 드리겠다고 했어요. 장로님들이 그렇게 하시겠다고 했어요. 아내랑 그 곳에 가봤더니 이미 작은 교회 개척교회 상가교회들이 많이 있더라고요. 그런 작은 교회들이 없다고 하면 가도 괜찮을 겁니다. 그러나 그런 교회들이 반경에 엄청나게 많은 데 이 대지를 팔고 거기 가서 큰 교회를 지어놓으면 교인 간에 수평이동이 생기고 작은 교회 개척 교회 상가 교회들이 엄청나게 타격을 받을 겁니다. 장로님들 아시지 않느냐 우리 교회가 나쁜 소문이 있는 것도 아니고 좋은 평판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가 그곳으로 가면 우리는 엄청 큰 교회가 될 것이지만 주위에 많은 교회들이 말로 할 수 없는 피해를 볼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런 일을 하지 맙시다. 제가 연구하고 현장 조사를 한 걸 말씀 드리는 겁니다. 여기에서라도 오겠다는 교인만 받읍시다. 우리가 인천에서 제일 큰 교회가 된다고 해서 천국 가서 더 큰 면류관을 교인들이나 장로님들이 받는 건 아닙니다. 목사가 받는 것도 아닙니다. 인천에서 제일 큰 교회가 못 되더라도 여기서 오는 교인만 받고 거기 작은 교회들 살려줍시다. 그랬더니 이제 많이 얘기들이 있었습니다만 결국 장로님들이 제 말씀을 들어주셨어요.” -그런 일이 있었군요. “저희 교회는 34년 된 아주 낡은 건물이었습니다. 여기다 새로운 건물을 짓자 해서 지금 이 교회를 건축하게 된 겁니다. 입당해서 5년 됐습니다. 그런데 이제 마음속에서는 제 나이로 보면 하나님께서 주신 마지막 기회였는데 하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결정하고 나서 그 땅 근처로 심방 가는 일이 생기면 가슴이 아려오면서 잘못했나 하는 자책이 생기는 겁니다. 이거 결정을 잘못 한 것이 아닌가 하는 후회와 아쉬움이 교차하는 겁니다. 6개월이 지나니 괜찮아지더군요.” -정말 잘 하신 일이죠.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결정을 하신 거죠. “장로님들에게 감사하죠. 그분들이 저희 교회 제 선배님들이시고 주일학교 스승들이십니다. 그런데 제가 그분들에게 말씀을 드렸더니 목사님 말씀이 옳은 듯 하다고 교회 앞에 광고하라고 하시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다음 주 광고해도 될까요 물었더니 그렇게 하라는 겁니다. 저희들이 목사님 말씀이라면 인정하고 따라야죠 하는 겁니다. 그래서 그 다음 주 신도시로 안 간다고 광고하고 우리 교회에 오시는 분들만 받자고 했더니 교인들도 다 따라주는 겁니다. 지금 돌이켜보면 잘 한 일이다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 당시는 지금보다 더 젊었으니까 잘못 결정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곤 하는 겁니다.” -그게 주님이나 사도들의 정신이 아니겠습니까. “결정을 하고 나니 그 땅값이 70억으로 내려오는 겁니다. 3000평이라는 땅이 학교도 안 되고 큰 식당도 안 되고 천상 교회 거예요. 그 유혹이 내 마음속에서 많은 투쟁을 일으켰습니다. 내 자신과 싸우는 거죠.” -제 생각에 교회는 가난한 사람이 많아야 된다고 봅니다. 그런 지역으로 가면 가난한 사람이 적어요. 병원에 환자가 많아야 하듯 교회에는 가난한 사람이 많아야죠. “(차를 한 모금 마시고 크게 웃었다.) 여기는 그냥 평범한 지역이라 제가 골프를 안 쳐요. 제가 미국 미시시피주 잭슨에 있는 리폼드신학교를 다녔는데 당시 환율이 1달러에 800원이었습니다. 그런데 5달러면 하루 종일 골프를 칠 수 있는 겁니다. 그러니 누구나 골프를 치는 겁니다. 그 당시 그곳에 노수길 집사님이라고 가발 사업을 하는 분이 계셨는데 골프를 치라고 골프채를 선물하더라고요. 그래 그 정성에 못 이겨 골프채를 그냥 놔둘 수도 없어서 미국에서 한 3년 골프를 쳤습니다. 금요일과 토요일 주말에 골프를 쳤습니다. 제가 잘 쳐요. 저희 교회에 와서 느낀 게 뭐냐 하면 여기서 골프 쳤다가는 귀족 중에 귀족이겠구나. 그래서 골프채를 버리고 오늘까지 동기들 후배들 골프 치자고 얼마나 전화가 오는지 모릅니다. 수원에 있는 모 목사님은 골프채를 하나 선물로 가져왔어요. 그가 이거 가져왔는데 내가 전도사입니다 말하는 거예요. 무슨 전도사냐고 했더니 골프전도사라는 겁니다(그가 누군지 아는지라 같이 웃었다). 내가 이 사람도 전도했고 저 사람도 전도했다고 해요. 그러면서 골프채를 받으라고 하는데 나는 안 받는다고 했습니다. 그래도 한사코 받아 두시기만 하라는 겁니다. 제가 골프를 한 달만 치면 그 분들 따라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교회에 여러 가지로 덕이 안 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골프는 치지 않습니다. 은퇴하면 칠겁니다. 워낙 제가 운동을 좋아해 은퇴하면 잘 치겠죠. 이 지역을 생각하면 골프 친다 안 친다를 떠나 제가 섬기는 이 교회 교인 수준하고 안 맞습니다.” -신도시도 안 맞습니다. “(웃는다) 그래요.” -미국에서도 영적으로 사는 목사는 골프 안 칩니다. 이게 사실은 운동이 되질 않습니다. 왜 그러냐하면 골프는 점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근육을 단련하는 헬스클럽은 점수가 없어요. 이건 자기 혼자하고의 싸움이고 훈련인데 골프는 점수가 있어 반드시 내기로 가게 되어 있습니다. 미국에서도 가난한 노인들도 몇 불이라도 걸거나 식사 내기라도 하더군요. 게임이라 경쟁심이 생겨요. 우리 목사들도 골프를 치면 내기를 합니다. 게다가 필드에서 목사라고 할 수 없으니까 교수니 박사니 하며 젊은 캐디들한테 정치인이나 기업인들처럼 농담 던지고 합니다. 무엇보다 골프는 목사에게 덕이 안 됩니다. 골프 전도사 필리핀 가서 뭐 하고 지내는지 잘 압니다. “잘 아시네요.” -그 전도사 주선으로 필리핀에 골프 약속들 잡아놓고 주일 예배 끝나면 골프채들 챙겨들고 공항에 모여 있는 모습 본 적 있습니다. 참으로 목사들에게 어울리지 않는 일입니다. 언제 우리 목사들이 돈이 많아졌다고 그러는 겁니까. 그거 영적인 성직자 목사들이 할 짓이 아닙니다. 사도 시대 말씀과 기도에 전념하기 위해 구제는 집사를 뽑아 맡긴 건 아닙니까. 그처럼 목사도 말씀과 기도에 전념하기 위해 골프도 집사들에게 맡기는 건 성경적이 아니겠습니까. 건강이라는 게 사실 경건에 힘쓰면 더 건강해지는 거 아닙니까. “(쾌할하게 웃으며) 어쨌든 저는 제 자신 목회 현장이라든지 형편이 골프가 맞질 않습니다. 골프치는 다른 분들을 뭐라고 할 마음은 없습니다. 우리 교회 십일조 내시는 분들을 봐서 나는 골프를 쳐서는 안 된다는 생각입니다.” -하실 수 있는데 안 하시는 건 굉장한 결단입니다. 그거 한번 빠지면 재미 탓에 못 빠져나옵니다. “정말 재미있긴 하죠.” -좋아하시는 말씀은 무엇입니까. “잠언 16장 9절입니다.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는 자는 여호와시니라.” 목사가 ‘지혜자의 마음’을 가졌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이는 그가 목회나 설교에 탁월한 테크닉을 가졌다는 뜻이 아니다. 비범한 지성과 의지를 가졌다는 의미도 아니다. ‘마음’을 가졌다는 건 특별하고 고귀한 정신을 가졌다는 걸 의미한다. 그렇다. 이건영 목사의 경이로움은 그의 정신적 위대함에 있다. 지극히 평범하다고 생각되는 사람이 이뤄낸 위대함이라 더욱 값지다. 그는 세상의 시선에 얽매이지 않고 성경의 진리를 앎으로 얻은 자유인이었기 때문이다. 이건영 목사가 지난 2월 16일자 국민일보 인터뷰에서 행한 그의 자유로운 마음을 보여 주는 말 한마디를 소개한다. “교회가 마련한 공간과 시설들은 이용자의 대다수가 교회 외부 사람들이므로 그 공간에서 단 한 순간이라도 하나님의 사랑을 느낄 수 있도록 온기를 유지하는 것이 교회가 해야 할 일이라 생각합니다.” 슬픔을 경유하지 않고 믿음의 바닥에 이를 수 없다. 성경은 말씀한다. 슬픔이 웃음보다 나음은 얼굴에 근심함으로 마음이 좋게 됨이니라 지혜자의 마음은 초상집에 있으되 우매자의 마음은 연락하는 집에 있느니라 전도서 7:3-4 슬픔은 이웃의 아픔에 ‘나’를 겹쳐놓는 일이다. 슬픔을 “응시”할 때, ‘나’는 이웃에게로 건너가 이웃과 하나가 된다. 그리하여 슬픔은 사랑의 다른 이름이다. “기나긴 미움”은 “막막한 슬픔” 앞에 무력하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권면한다.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 이루었나니 갈라디아서 5:14 이건영 목사 이전이나 이후에도 위대한 설교자나 목회자는 많을 것이다. 그러나 말씀을 깨우치고 실천하는 지혜자의 마음을 지닌 이건영 목사에게 목회 성공은 아무것도 아니다. 전혀 중요하지 않다. 그에게 목회는 하나님의 사랑을 세상에 알리는 하나의 수단일 뿐이기 때문이다. 2016-06-26
    • G.PEO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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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6-27
  • LA의 칼빈 박헌성 목사
    예수 믿는 사람은 단순해야 하고 하나님 잘 섬겨야 '우리 교회가 한인사회의 랜드마크가 되자'는 큰 소명을 받아 IRUS(The International Reformed University & Seminary)를 통해 미국과 한국 더 나아가 세계 개혁주의 장로교의 랜드마크로 자리매김하길 심리학자 카렌 호나이는 이렇게 말했다. 환자가 치료자를 찾는 이유는 신경증을 치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를 완성하기 위해서라고. 그러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따르는 우리는 스스로를 완성하기 위해, 더 나아가 매 순간 새로 태어나기 위해, 매일매일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하나님을 닮은 나 자신과 만나기 위해 끝없이 노력한다. 그 소중한 하루하루가 모여 ‘나다움’을, ‘내 나이’를 만들어 갈 것이다. 칼빈(John Calvin)은 1509년 7월 10일 프랑스 파리에서 약 100km 떨어진 피카데리(Picardy) 지방 노용(Noyons)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제라드 칼빈(Gerard Calvin)은 부모가 경영하는 통을 만드는 공장에서 도제 교육을 받은 평민 출신이었지만 후에는 시청 서기와 교구의 서기 임무를 거쳐 교구 성직자의 사업 담당자가 됨으로써 귀족계급으로 신분이 상승한 사람으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고 한다. 그의 어머니 잔느(Jeanne Le Franc)도 음식점을 경영했던 노용 시의회 의원의 딸로서 신앙심이 돈독했지만 안타깝게도 그만 젊은 나이에 요절하고 말았다. 칼빈은 사리를 판단하는 데에는 정확했다. 그리고 그의 지적 능력은 아주 뛰어났으므로 아버지의 깊은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그의 아버지는 칼빈에게 좋은 교육의 기회를 주는 것이 가장 좋은 투자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그는 칼빈을 파리에 있는 대학으로 보냈다. 14세 때 그는 파리로 가서 라 마르셰 대학에 등록했다. 그곳에서 그는 라틴어를 배웠다. 그러나 칼빈은 다시 몽테규 대학으로 옮겼는데, 몽테규 대학은 중세 수도원의 엄격한 규율에 따라 금욕적이고 엄격한 훈련을 요구하는 대학이었다. 새벽 4시에 기상하여 6시 아침 미사를 드릴 때까지 2시간 강의, 미사 후에는 아침 식사, 그리고 8-10시까지는 오전 강의, 그리고 1시간 동안 토론, 11시에 점심 식사(점심시간에는 성경이나 위인전기가 읽혀지고 기도하고 대학 내의 광고 사항을 알려줌), 12시에는 오전을 반성하고, 1-3시까지는 일반 독서시간과 자유시간, 3-5시 다시 오후 강의, 5시에 저녁 식사, 그리고 기도회를 가진 후, 다시 오후 강의에 대한 토론을 하고 겨울에는 8시, 여름에는 9시 취침을 하는 등 아주 엄격하고 꽉 짜인 교육을 실시했다. 여기에서 그는 금욕주의적인 삶과 장시간 공부하는 습관을 익혔다. 그는 5년간의 대학생활을 통해 종교개혁의 새로운 사상들을 접하게 되었다. 하지만 19살의 칼빈은 대학을 졸업하고 사제가 되기 위한 다음 단계로써 신학 연구 자격시험에 통과하게 된다. 그런데 칼빈의 아버지는 처음에는 칼빈을 성직자로 키우기 위해 무척 노력했지만 갑자기 마음을 바꿔 아들에게 신학에서 법학으로 전공을 바꿀 것을 요구하였다. 그 이유로는 흔히 칼빈의 아버지가 재정문제로 교회 참사회와의 사이가 벌어졌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칼빈의 자서전적인 시편 주석의 서론을 보면, 법조계로 나가는 것이 부와 명성을 얻게 하는데 확실한 보장이 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1532년 법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그는 23세의 나이로 세네카의 <관용론> 주해서를 출판하게 되는데, 세네카의 <관용론>은 로마 황제 네로가 기독교를 무참하게 박해하자 네로의 마음을 돌이키려는 의도에서 쓴 책이었다. 칼빈이 주해서를 쓴 것은 프랑스 왕 프란시스1세가 개신교도들을 박해하는 것에 대한 의분에 왕의 마음을 돌이키기 위해 유창한 라틴어로 이 책을 기록했다고 한다. 1533년경에 칼빈은 가톨릭에서 개신교로 개종하였으며 종교개혁 운동에 합세했다. 그는 자신의 개종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칼빈의 회심은 사도 바울이나 성 어거스틴, 그리고 루터와 같이 자세하고 극적인 것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또 언제 정확히 회심의 경험을 했느냐에 대해서도 기술하지 않고 있다. 다만 시편 주석 서문에서 그는 자신의 회심에 대해 ‘뜻밖의 회심’이란 말을 쓰고 있다. 하나님께서 예기치 못한 회심으로 오랫동안 완악해져 있던 마음을 온순하게 길들이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칼빈은 철저히 말씀에 순종하고 열심히 연구함으로 하나님을 알고자 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계시한 대로 이해하고자 했고, 이러한 생활을 위해서 자기 부정과 자기 십자가를 지며 통회하는 생활을 했다. 1533년 11월 1일에 파리 대학 총장으로 취임하는 콥의 취임 연설의 원고를 칼빈이 작성하게 되는데, '기독교 철학'이란 제목의 이 연설은 루터가 주장한 것과 마찬가지로 복음과 율법을 비교해서 복음의 절대성을 강조하고 하나님이 값없이 베풀어주시는 은혜를 강조했다. 그리고 종교의 이름으로 상대방을 박해해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이 연설 이후 그들에 대한 비난과 핍박이 가해졌다. 콥은 바젤로 피신하였고 칼빈도 파리 남서부 400km에 위치한 친구의 집으로 피신하게 되는데, 그 집에는 약 4천여 권의 장서가 있었다. 여기에서 칼빈은 세상 편하게 연구를 계속할 수 있었다. 바로 이곳에서 칼빈은 개혁주의 신학의 핵심을 이루는 ‘기독교 강요’라는 대저작의 체계를 세웠다. 1534년 스물다섯의 칼빈은 공식적으로 가톨릭교회와 결별하게 되는데, 그해 10월 개신교인들에 대해 비난하는 삐라가 프랑스 전역에 살포되었고, 개신교인들에 대한 박해가 예상되는 가운데, 칼빈도 결국 망명자가 되어 고국 프랑스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1534년 공식적으로 제네바의 목사가 된 파렐은 칼빈이 제네바에 들어왔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는 칼빈에게 찾아가 제네바에 남아서 이 도시의 종교계를 더 발전시킬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간청했다. 거절하던 칼빈은 결국 승낙하지 않을 수 없었다. 후에 그는 이 사건을 다음과 같이 썼다. “기욤 파렐은 조언과 간곡한 경고가 아니라 무시무시한 저주로 나를 제네바에 붙들어 두었다. 이는 마치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서 자신의 손을 나에게 얹어 잡으시려는 것 같았다.” 1534년 당시의 제네바는 약 1만 명의 주민이 거주하는 도시였다. 프랑스 사람인 칼빈이 스위스 제네바에서 개혁운동을 전개하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칼빈은 참으로 수없이 많은 어려움을 당했다. 칼빈의 저술이나 설교에 대해 트집 잡고 비판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반대파들의 공갈과 협박은 끊일 새가 없었고, 주민들 중에는 자기 개의 이름을 칼빈이라고 부를 정도로 그를 혐오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는 단 하루도 빠짐없이 하루에도 열 번씩이나 죽음을 동경할 정도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상황 속에서도 칼빈은 개혁을 추진해 나갔다. 미사 대신 예배를 갱신해 나갔으며, 어른은 물론 어린이의 신앙 교육을 위해서도 심혈을 기울였다. 특히 칼빈은 어린이에게 신앙의 핵심인 요리문답을 가르치지 않고는 교회 개혁이란 있을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27세인 1536년 ‘기독교강요’ 초판을 출판한 2년 후 제네바에서 추방되어 바젤로 갔다. 1538년 9월에 마르틴 부서와 볼프강 카피토는 그에게 슈트라스부르크로 올 것을 여러 차례 종용했다. 칼빈은 마침내 부서의 강요에 승복하고 말았다. 그리고 400-500명의 프랑스 망명객으로 설립된 교회의 목사가 되었다. 쟝 스또르되르는 재세례파였지만 칼빈의 영향을 받아 부인과 두 아이(아들 하나 딸 하나)와 함께 슈트라스부르크의 회중에 합류했다. 1540년 봄에 그가 흑사병으로 죽자 1540년 8월 6일에 칼빈은 그의 부인이었던 이델레뜨 드 뷔르와 결혼했다. 1542년 7월 28일 칼빈과 이델레뜨 사이에 아들이 태어났다. 그 이름은 자끄(Jacques)였다. 하지만 조산아였던 자끄는 오래 살지 못하고 죽었다. 이델레뜨 역시 1549년 3월 29일에 세상을 떠났다. 칼빈은 아내에 대해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언제나 그녀는 나의 직무를 완성시키는 조력자였습니다. 그녀는 아주 사소한 것조차도 나의 길을 방해한 적이 없습니다.” 칼빈의 저서 ‘기독교강요’(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는 사도신경의 순서를 따라 주제별로 저술하였는데, 그 내용의 탁월한 구성이나 내용의 깊이를 후대의 수많은 신학자들은 한결같이 감탄해 마지않았다. 이 저술로 칼빈은 종교개혁시대의 유일한 신학자로 꼽히게 된다. 앞서 언급했듯이, 마틴 루터가 행동을 통해 종교개혁을 실천해 나갔다면, 칼빈은 개혁신학을 통해 종교개혁을 완성시킨 개혁자였다. ‘기독교강요’를 비롯, 그의 탁월한 저서들이 있었기 때문에 이후에 종교개혁은 유럽전역으로 확산되어 나갈 수 있었고, 시대를 초월해서 개혁교회의 전통을 세울 수 있었다. 이 책에서 그는 개혁교회(Reformed Church)의 시각에서 그 때까지 드러난 기독교 진리를 종합적이고 체계적으로 논술하려고 하였다. 개혁교회라는 말은 쯔빙글리와 칼빈을 따른 스위스, 독일, 그리고 프랑스의 교회들을 가리킨다. 개혁이란 말은 그들이 루터주의를 다시 개혁하려 했음을 의미한다. 즉 개혁이란 종교개혁의 개혁을 의미한다. 다시 말하면 개혁주의란 루터주의(Lutheranism)보다 더 철저한 성경중심을 위한 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개혁주의는 성경에 기초하여 신관과 우주관, 신앙관,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관계를 규명한다. 개혁주의를 보통 칼빈주의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것은 칼빈이 성경의 가르침을 해설하고 이 신학을 체계화하였다는 점에서 비롯된 말이다. 쯔빙글리가 칼빈보다 한 세대 앞선 인물이었으나, 칼빈이 보다 선명히 이 신학을 해설하고 체계를 세웠기 때문에 칼빈주의로 불리게 된 것이다. 결국 개혁주의는 성경을 신앙과 생활의 절대적인 그리고 유일한 권위로 삼기 때문에 성경의 권위를 강조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며, 그리스도인의 구체적인 삶을 통해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자 하는 신학이라고 할 수 있다. 교회정치제도에 있어서도 인간 중심의 위계제도나 특권층을 인정하지 않는다. 따라서 로마 가톨릭의 사제주의나 교권주의를 배격한다. 이 개혁주의 신학을 보통 하나님 중심, 성경중심, 교회중심 사상으로 말하고 실제적 삶의 신학으로 강조해 왔는데 이것은 개혁주의 신학을 따르는 교회적 삶을 간명하게 정리한 마디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나님 중심(God-centered)이란 한마디로 말하면 인간이 중심일 수 없다는 점을 의미한다. 16세기 상황에서 말하면 교황이 중심일 수 없다는 점을 의미한다. 개혁주의는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 인간을 엄격하게 구별해 인간을 특수한 위치에 두는 신학을 용납하지 않는다. 하나님 중심이란 바로 하나님의 주권사상을 의미한다. 그래서 개혁주의는 창조주 하나님은 자연과 인간과 우주의 통치자이시며, 구원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에 있음을 강조한다. 이것이 하나님 중심 사상이다. 성경중심(Bible-centered)이란 오직 성경만이 신앙과 삶의 유일한 규범이란 점을 강조한다. 성경 외의 그 어떤 것도 신앙의 표준일 수 없고 신학의 원천일 수 없다. 개혁주의는 “성경은 성경 자신이 해석한다”(Scripturae scriptura interpretum)는 원리를 고수한다. 루터나 칼빈 등 개혁자들은 자신이 주장하는 복음주의 혹은 개혁주의 신학이 옳다는 점을 성경에 근거하여 성경에 호소하였다. 개혁주의는 바로 성경중심주의 신학이다. 그래서 개혁주의자들은 성경의 신적 권위를 강조한다. 교회중심(Church-centered)이란 개혁주의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관심은 하나님의 교회였고, 그것은 하나님의 교회 건설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개혁주의자들에게 신학은 근본적으로 교회를 위한 학문이며, 교회를 섬기는 학문이다. 개혁주의 신학은 이 점을 강조한다. 로마 카톨릭은 하나님의 나라가 가견적 교회안에서 실현된다고 하여 가견적 교회와 신국을 동일시하지만, 칼빈을 비롯한 개혁자들은 오직 선택된 자들로 구성되는 우주적인 교회, 곧 무형교회 혹은 불가견적 교회(invisible church)를 말한다. 그와 동시에 그들은 선택받지 못한 사람도 회원이 될 수 있는 제도적인 지상의 교회, 곧 유형교회 혹은 가견적 교회(visible church)로 구분했다. 지상의 교회는 완전할 수 없다. 개혁주의는 지상교회의 불완전성을 인정하면서도 교회의 완전을 향한 추구를 경시하지 않는데, 이것이 교회개혁운동이다. 교회중심사상은 그리스도의 초림과 재림사이에 서 있는 이 교회를 중심으로 신앙적 삶을 추구하며 교회에 주어진 사명을 완수하려고 힘쓴다. 개혁주의는 현재의 삶과 무관한 공허한 이념이나 관념이 아니라 실제적 삶의 신학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하나님의 주권 하에서 사는 삶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은 이 땅의 삶속에서도 하나님의 주권이 행사되도록 해야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 속에 살면서도(conform) 이 세상을 변화시키는(transform) 문화적 소명을 지니고 있음을 고백한다. 그래서 신자의 삶의 궁극적 목표는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인데, 이것이 개혁주의 신학의 목표라고 할 수 있다. 흔히 개혁주의 신학을 복음주의, 근본주의, 혹은 보수주의와 혼돈하거나 혼용하고 있음을 본다. 이런 한국의 현실에서 개혁주의가 근본주의나 보수주의 혹은 복음주의와 어떻게 다른 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복음주의란 그 이름처럼 헬라어 ‘복음’이란 말에 어원을 두고 있는데, 이미 16세기 개혁자들이 주창했지만 18세기 영국과 미국의 부흥운동 혹은 대각성운동이라는 역사적 배경에서 구체적으로 생성되었고, 20세기 후반인 1952년 조직된 세계복음주의 협의회와 1974년의 로잔 세계복음화 위원회에 의해 보다 명료하게 발전된 신학을 의미한다. 복음주의는 역사적 기독교의 신앙과 가르침을 중시하면서 전도나 선교를 강조하고, 신자의 사회적 책임을 동시에 강조하는 신앙체계를 의미한다. 기독교의 근본교리를 무시하거나 배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근본주의, 보수주의, 복음주의 그리고 개혁주의는 동일하다. 그러나 개혁주의나 복음주의는 분리주의적 혹은 반문화적 입장을 취하지 않고 복음전도와 함께 신자의 사회적 책임과 봉사를 강조하는데, 이 점은 근본주의와 다르다. 복음주의 신앙은 사회에 대한 분리주의적 입장을 취하지 않지만 개인적 체험을 강조하는 개인주의적 성향의 감성주의라는 점이 그 약점으로 지적되기도 한다. 그래서 교회의 전통이나 의식에 무관심하고 이를 간과함으로 개인주의에 빠질 위험이 있다. 결국 이런 입장은 교회관의 약화를 가져올 수 있다. 그러나 개혁주의는 교회의 신앙전통에 대한 관심을 배제하지 않는다. 특히 개혁주의는 하나님의 주권과 선택, 하나님의 영광을 신자의 삶의 목표로 여긴다. 개혁주의자들이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기 때문에 삶의 전 영역에서 그리스도의 주권을 강조하는 문화변혁의 성격을 지닌다. 이제 그러한 노정에 선 목회자 한 사람을 개혁주의 관점에서 살펴보자. 미국시간 2016년 2월 12일 오전 6시 로스앤젤레스 중심가 지하철역 윌셔 앤 버몬(Wilshire/Vermont) 근처에 있는 나성열린문교회(LA Open Door Presbyterian Church; 1993년 2월28일 설립, 3281 W. 6th st. Los Angels, CA 90020) 새벽기도회. 주일 대예배처럼 성가대 찬양이 끝나고 담임 박헌성 목사가 1층 예배실을 가득 채운 회중과 누가복음 20장을 교독했다. 박 목사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라는 주제로 설교를 시작했다. “예수님은 언제나 우리의 좋은 면을 보십니다. 좋게 보면 항상 좋고 나쁘게 보면 늘 나쁘기 마련입니다. 오늘 읽은 본문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은 항상 예수님에게 질문을 합니다. 공관복음 전체를 보면 항상 나쁜 의도를 가지고 그들은 예수님에게 질문을 합니다. 자신들의 질문에 걸려들기를 바라는 것이지요. 그런 마음은 사단의 마음입니다. 성도는 항상 선한 마음으로 긍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매사를 보아야 합니다. 성도에게는 예와 아멘만 있어야 합니다. 그들이 22절에서 묻습니다. ‘우리가 가이사에게 세를 바치는 것이 가하니이까 불가하니이까.’ 이런 말은 함정적 질문이라고 합니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치지 말라고 하면 법을 어기는 것이고 바치라 하면 반민족적이라는 비난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간계가 담긴 속을 다 알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25절에서 말씀하십니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 말씀하십니다. 얼마나 지혜로우신 대답입니까. 우리 성도들은 악한 간계나 시험에 빠지지 않도록 항상 말씀과 성령으로 무장하고 있어야 합니다. 쓸데없는 일에 논쟁하는 일은 아무 유익이 없습니다.” 박 목사의 강론에 회중은 자주 아멘으로 화답했다. “사단에게 빠진 사람과 아무리 얘기해도 소용이 없어요. 나만 힘들고 상처받습니다. 우리도 예수님 말씀대로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라는 믿음의 지혜로운 태도가 필요합니다. 요즘 한국에서는 성직자가 세금을 바쳐야 되냐 안 바쳐야 되냐 하는 논쟁이 있습니다. 미국은 성직자들이 대부분 바칩니다. 80년대 미시시피에서 리폼드 신학대학원 다닐 때 반 올랜이라는 교수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서를 가르치시면서 강의시간에 ‘세금 바치는 것이 옳으냐’ 물었습니다. 미국은 거의 다 바칩니다. 그런데 그분도 바치는 게 좋다 말하셨습니다. 미국이라는 나라는 성직자가 세금을 안 바친다고 제재를 가하지는 않습니다. 신앙적으로 나라에 세금을 바치는 것이 싫은 사람은 안 바쳐도 됩니다. 이것이 미국의 정책입니다. 그러나 성직자 거의가 세금을 바치죠. 국가에 세금을 안 바치면 혜택을 못 받습니다. 옛날에는 그러지 않았어요. 1970년대까지만 해도 병원 같은 공공장소에 가면 장애인 주차석이 있고 성직자 주차석도 있었어요. 미국이 그렇게 좋은 나라입니다. 그런데 이게 점차 줄어들고 있어요. 미국은 돈에 하나님을 믿는다(We trust in God)고 새긴 나라지만 무신론자들이나 다원주의자들이 성직자에 대한 혜택이나 예우를 없애자고 자꾸 주장하는 겁니다. 그래도 미국은 아직도 중부나 동남부 쪽으로 가면 보수 성향이 강합니다. 미국은 성직자의 세금 문제는 자율적입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교회 직원은 세금을 떼는 걸 원칙으로 알고 있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정장 차림을 해 로스앤젤레스의 랍비라는 별명을 가진 단정한 모습의 박 목사는 잠시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지었다. “성경적으로 보면 세금을 떼는 게 정상입니다. 성직자라고 해서 국가의 의무를 피하는 건 맞지 않다고 봅니다. 성도는 국가의 의무를 다 감당해야 합니다. 국방의 의무, 납세의 의무 등 모든 의무를 감당하는 게 당연한 것입니다. 천국의 시민권 가진 사람은 미국의 법을 다 지켜야 합니다. 그런 게 성직자라고 해서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하나하나 자기에게 주어진 일들을 감당해야 합니다. 가이사의 것이라고 하는 세상의 일들을 담당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이든 아니든 똑같이 사회와 국가의 의무를 똑같이 짊어져야 합니다. 그런가하면 또 우리는 천국시민이기 때문에 교회일도 다 감당해야 합니다. 교회 오면 장로나 권사나 집사 직분을 가지고 교회를 섬기지 않습니까. 세상은 일을 하면 보수를 받는데 교회는 일을 해도 보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훨씬 힘든 삶을 삽니다. 한 세상의 일을 더 해야 하기 때문이죠. 우리는 이 세상의 일을 등한시할 수도 없고 저 세상의 일도 게을리할 수 없습니다. 예수 안 믿는 사람들은 저 세상의 일을 모르니까 한 세상의 일만 하면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믿는 사람이라 이 세상과 저 세상 두 세상의 일을 다 해야 합니다. 그 일을 적당히 해서는 안됩니다.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보고 기도해 더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그래야 힘이 생기는 겁니다. 우리는 두 세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이 세상 살아가는 것만 해도 얼마나 힘들어요. 그래도 우리는 늘 힘들다 생각을 안 합니다.” “보다 더 까다로운 문제가 있는데 국가와 교회의 관계입니다. 국가가 미국 같은 선한 정부면 별 문제가 없습니다. 국가가 기본적으로 교회에 대해 간섭을 하지 않습니다. 미국에서는 정부와 교회가 분리되어 선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공산주의나 사회주의의 중국 같은 나라에서는 정부와 교회 간에 대립이 생기게 됩니다. 미국 같은 국가에는 우리가 감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교회가 국가로부터 어떤 압박을 받지 않으니까요. 중국 같은 국가는 선교사를 감시하고 추방하기도 합니다. 미국은 선한 정부입니다. 우리는 사실 너무 좋은 세상에 와서 사는 겁니다. 정부가 신앙을 압박하면 우리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 투쟁을 해야 합니다. 정부가 예수를 믿지 못하게 하면 안 믿으면 되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예수님만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세상마다 다 좋은 나라가 아니라 조금씩 다르고 억압하는 나라들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가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교회가 국가에 협조한다든가 무조건 반대한다든가 해서는 안됩니다. 국가의 장점은 감사하고 격려해야 됩니다. 그러나 국가가 단점이 있고 신앙을 핍박하면 당연히 맞서야 합니다. 교회사에 신앙을 위해 순교한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우리가 일본 식민지 시절 1938년 제27회 총회(총회장 홍택기)는 신사참배를 가결했습니다. 1941년 제30회 총회(총회장 최지화)는 총대 일동이 개회 다음 날 아침 신사참배를 했습니다. 그리고 반대하는 주기철 목사님은 면직을 당하고 투옥을 당해 감옥에서 순교하셨습니다. 자기들이 우상한테 절해놓고 거기에 절하지 않겠다는 목사를 벌주었습니다. 지금에 와서 그거 잘했다는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다 회개했습니다. 지금 주기철 목사님은 추앙받고 순교자로 기리고 있지 않습니까. 그때 절했던 사람들은 얼굴을 들 수 없습니다. 한경직 목사님 같은 분은 나중 잘못했다고 회개하셨습니다.” “미국을 보면 동쪽은 그래도 양반들이 좀 사는데 서쪽은 그렇지 못한 것 같아요. 우리가 여기 살기는 하지만 여기는 교회 건축을 하면 세금을 붙여요. 동쪽에는 세금이 없어요. 그런데도 사람들이 여기 살기가 좋으니까 자꾸 몰려와요. 동쪽에 있는 교회는 5천명이 모여도 남자들이 다 양복을 입고 여자들은 정장을 해요. 여기는 더워서 그런지 그렇지 않아요. 어쨌든 미국은 아직도 하나님 믿는 사람이 많아요. 우리가 이런 걸 보면서 미국이 하나님 더 잘 섬기는 나라가 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잘 섬겨야 복을 받아요. 미국은 기독교 정신으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를 잘 다니고 하나님을 잘 섬기면 문제가 저절로 잘 해결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 잘 섬기는 사람이 남자가 남자끼리 살면 되겠어요. 그런데 그렇게 사는 사람들을 보면 둘 중에 하나는 여자 역할을 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보고 신앙으로 살면 그런 문제로 갈등할 필요가 없어요. 미국에서 교육받은 사람들에게 물어보세요. 그러면 태어나길 그러니 불쌍하다는 겁니다. 아니 그런 말이 어디 있어요. 성경을 보고 믿음으로 기도하고 남자는 남자로 살아가고 여자는 여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연극을 해보면 여자 역을 잘하는 남자가 있어요. 그러나 그것은 연극이지 삶을 그렇게 살면 안되는 겁니다. 아무리 편하다고 해도 남자가 여자 옷을 입고 화장하고 다니면 되겠어요. 체질적으로 그렇게 맞는 사람이 있다는 겁니다. 아니 그렇다고 그렇게 살면 됩니까. 우리 예수 믿는 사람은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바치며 살아야 합니다. 남자는 남자 여자는 여자 정확하게 살아가야 합니다. 세상과 교회가 정확하게 구분되어 믿음으로 살아가야지 이것저것 섞어서 살면 안 되는 겁니다. 유대인들 유대주의가 제일 싫어하는 게 혼합주의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단순해야 하고 하나님 잘 섬겨야 하고 세상 것이 들어오면 버려야지 갈등하면 안 되는 겁니다. 세상 것이라면 탁 거절할 줄 알아야 합니다. 바르게 살아야 합니다. 할렐루야.” 박헌성 목사는 총신대를 졸업한 뒤 미국에 건너와 공부를 하고 부목사로 사역을 한 뒤 38살 되던 1993년 2월28일 로스엔젤레스에서 가장 중심지인 윌셔에 나성열린문교회(The Los Angeles Open Door Church)를 개척 설립했다. 그는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예배, 교육, 선교, 봉사라는 교회의 비전을 가지고 나성열린문교회를 설립해 3천여 명의 성도가 모이는 신앙의 공동체로 크게 부흥시킨 탁월한 목회자다. 2001년 교인수 3500여명으로 성장한 나성열린문교회는 LA 동쪽 끝자락인 6가와 보니브레아 스트리트가 만나는 부지에 2011년 3월 LA한인타운 인근 최대 규모의 한인교회 성전이 건축 10년 만에 완공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5000만달러가 투자된 건축 규모는 압도적이었다. 풋볼구장(5만8000스퀘어피트) 2개가 들어가고도 남는 12만6000스퀘어피트 부지위에 빌딩 11층 높이의 성전이 솟아있다. 타운 인근 한인교회 예배당 중 가장 크다. 건물 외벽과 강단 계단도 모두 이스라엘에서 특별 주문한 화강암으로 장식했다. 2001년 1월 성전 부지와 현재 예배장소인 교육센터를 540만 달러에 구입하고 공사는 2005년 5월 시작했다. 땅 매입부터 따진다면 꼭 10년이고 공사는 6년 걸렸고 공사비만 5000만 달러 투입됐다. 본당은 1층과 2층 합해 2000석, 친교실은 1000석, 주차장은 500대 주차할 수 있는 대형 파킹장에 실내 체육관까지 완비한 예배당이었다. 본당은 빌딩 11층 높이로 천장이 높아 시원하고 내부에 기둥이 하나도 없과 외벽과 강대상 계단은 모두 이스라엘에서 특별 주문한 화강암을 입혔다. 햇빛을 받으면 황금색을 띈다. 본당 정면 벽에는 관이 22개인 대형 파이프 오르간도 놓여진다. 타운 한인교회로는 가장 컸다. 그 완공을 몇 달 앞두고 박헌성 목사는 2011년 3월 1일 당시 로스앤젤레스 중앙일보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그 건축의 소명에 대해 말했다. "지난 18년간 우리 교회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큰 어려움 없이 성장을 거듭했습니다. 교인이 많아졌고 큰 예배당이 필요했습니다. 장소를 찾다보니 LA 한인타운 내 대형집회를 열 만한 예배장소가 하나도 없더군요. 기도 중에 '우리 교회가 한인사회의 랜드마크가 되자'는 큰 소명을 받았습니다.“ 또한 눈물어린 어려움에 대해서도 술회했다. "융자금 이자만 매달 16만달러다. 공사가 한달 연기되면 7~8만달러 추가된다. 난 집이 없다. 팔아서 건축헌금으로 냈다. 성도들의 눈물로 기적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2011년 5월말 입주 예정이던 교회는 7년간 5000만 달러를 투자한 초대형 성전을 차압당했다. 당시 은행 측이 밝힌 차압 이유는 8개월간 180만 달러의 융자 페이먼트를 연체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2012년 9월 사용 중이던 건물에서도 퇴거를 당하고 채권은행인 ‘기독교 신용조합’(ECCU) 측과 2016년 지금까지 소유권을 놓고 소송 중에 있다. 박헌성 목사는 교회 성장과 교회 건축을 위해 앞만 보고 달려오다 이제 61세가 되었다. 지금은 모든 것이 반으로 줄어들었다. 이러한 역경 속에서도 박헌성 목사는 힘차게 목회를 하고 있다. 그리고 한인 목회자 양성을 위한 신학교가 문을 닫을 위기에 처하자 그 학교를 맡아 IRUS(The International Reformed University & Seminary; 125 S. Vermont Ave. Los Angeles, CA 90004)라는 어엿한 대학으로 성장시켰다. IRUS(The International Reformed University & Seminary)는 1977년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설립되어 지난 38년 동안 이민교회에 필요한 개혁주의 지도자를 배출, 양성해 왔다. 총신대 총장을 지낸 김의환 목사를 초대 교장으로, 이진태 목사를 초대 학감으로 시작된 이 신학대학은 1987년 캘리포니아 주정부로부터 정식학위 (B.A., M.A., M.Div., D.Min.)를 줄 수 있는 학교로 인가를 받았고, 1997년 미국 국토안보부로부터 F-1 비자를 발급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또한 2013년 2월에는 연방정부교육부가 인정하는 신학대학 인준기관인 ABHE로부터 정회원 인준을 받았다. 2016년 2월달에는 연방정부 교육부 인준기관인 ABHE로부터 BACM (교회음악 학사) MACM (교회음악 석사) MAC (상담학 석사) 학위과정을 인가받았다. 현재는 총장에 박헌성 박사가 섬기고 있다. IRUS는 개혁주의 신학과 성경이 지향하는 신학을 교회와 세상에 가르침으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성취함에 있다. 본교는 칼빈주의 유산인 하나님 주권, 하나님 중심적 예배, 성경중심적 교육과 교회중심적인 사역에 그 근거를 두고 있으며, 전 세계에 열린교육을 통하여 개혁주의 신학을 가르침으로 실질적인 사역의 능력을 갖춘 사역자와 평신도 지도자로 하여금 세계선교에 이바지하는 데 있다. 이제 박헌성 목사는 어느 목회자도 감당하기 힘든 성장과 역경을 체험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모태에서부터 60여년의 신앙의 삶을 통해 더욱 성숙해진 신앙과 개혁주의 신학으로 제네바의 개혁주의 창시자 칼빈처럼 LA의 개혁주의자 칼빈 박헌성 목사가 될 것이다. 그래서 그는 미국과 한국의 칼빈주의 랜드마크로 우뚝 서리라 믿는다. 랜드마크(landmark) 또는 경계표(境界標)는 원래 탐험가나 여행자 등이 특정 지역을 돌아다니던 중에 원래 있던 장소로 돌아올 수 있도록 표식을 해둔 것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제 그 뜻이 더 넓어져 박헌성 목사가 IRUS(The International Reformed University & Seminary)를 통해 미국과 한국 더 나아가 세계 개혁주의 장로교의 랜드마크로 자리매김하길 바란다. 2016-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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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5-11
  • 나다나엘 최우식 목사
    청년 때 가정이 어려워지는 바람에 세상 밑바닥을 보면서 하나님을 찾게 돼이영수 목사 시절 총회 회록서기 김원범 목사 영향 해남에서 최우식 목사 혼자만 주류 최우식 목사는 주님의 제자 나다나엘처럼 속임이 없는 진실하고 좋은 목회자 꽃이 피어 세상이 한층 밝다. 온갖 꽃이 피어 하나님 지으신 세계가 화단 같다. 어떤 꽃은 일찍 피고, 또 어떤 꽃은 늦게 핀다. 그러나 각각의 그 꽃핌이 화단을 채색하고, 화단의 봄을 완성한다. 교회 화단에 목련이 피었다. 그 앞에 서본다. 은혜로운 주일 예배에 참여해 사도신경을 고백하듯 서보는 것이다. 만개한 목련 한 송이를 잠깐 바라보다 죽어도 헛것을 산 것은 아니다. 가슴 밑바닥으로부터, 하나님을 모시는 믿음이 있고 추억과 미래라는 느낌 사이 어느 지점에 머물러 있었다는 그 이유 하나로도 너무 가뿐한 삶이다. 젊고 예쁜 얼굴이 웃으며 지나가고 있다. 나를 보고 웃는 것은 아니다. 도착하자마자 사실 그 순간부터 목련처럼 우리도 떠나고 있기 때문이다. 하얀 꽃잎 뒤에 아쉬운 얼굴을 감추고 주일 아침 우리가 예배당 가는 사이 가자! 말하고는 떠나고 있다. 주님 만나 눈뜬 맹인의 지팡이 더듬어 잡은 듯 꽃들이 왔다 가고 있다. 아이들 주먹만 한 꽃숭어리에 꽃잎들이 각각 살아서 재잘대는 듯하다. 모란은 안타깝게도 오래가지 않는다. 가자! 말하고는 떠나는 듯 허무하다. 젊음의 모습 같고 나아가 인생의 모습 같다. 어디로 간단 말인가. 기도는 하늘의 소리를 듣는 것이다. 저기 홀로 서서 제자리 지키는 목련처럼. 기도는 땅의 소리를 듣는 것이다. 저기 흙 속에 뿌리 내리고 꽃 피어내는 목련처럼. 기도는 땅에다 이마를 겸허히 묻고 숨을 죽인 바위들처럼 고개 숙이는 것이다. 기도는 간절한 발걸음으로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깊고 편안한 곳으로 걸어가는 것이다. 목련꽃처럼. 그래서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꽃의 매력 가운데 하나는 그에게 있는 아름다운 침묵이다"고 말했는지 모른다. 그래서 기도는 다만 주님의 침묵에 귀 기울여 스스로 고요해지는 것이다. 그리하면 하나님이 지으신 깊고 편안한 꽃나무의 침묵에 도달할 것이다. 성경은 말씀한다.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나다나엘이 가로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가로되 와 보라 하니라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가라사대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나다나엘이 가로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또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1:43-51 예수께서 무화과나무 아래서 빌립이 그에게 주님 만나러 가자고 말하기 전에 나다나엘을 보셨다. 무화과나무는 뽕나무과에 속하는 나무이다. 봄에서 여름에 걸친 시기에 엷은 흥색의 꽃이. 무화과나무의 열매인 무화과는 꽃이 피지 않는 과실이라고 해서 무화과라고 한다. 실제로 꽃은 과실 내에서 피며 외부로 나타나지 않을 뿐이다. 열매는 씨방이 큰 꽃받침 속에 형성되고 살이 많은 은화과(隱花果)이며 가을에 검은 자색으로 익는다. 무화과를 따보면 열매처럼 생겼지만 사실 속의 먹는 부분이 꽃이다. 즉 우리의 눈에 보이는 열매 껍질은 사실 꽃받침이고 내부의 붉은 융털들이 꽃이다 AD 27년경 예수님의 공생애 개시 얼마 후에 제자로 부름 받아 AD 1세기 중반 이후까지 활동한 인물이다. 당시 로마의 식민 통치를 받고 있던 유대인들 사이에는 여러 형태의 종말론적인 메시야 대망 사상이 널리 유행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기대한 메시야는 정치적 메시야로서 이스라엘을 세계 최강국으로 만들어 행복을 누리게 할 자를 기다렸다. 그러나 나다니엘과 같은 일부 경건한 사람들은 구약 성경에서 예언한 대로 자기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하시고 장차는 천국으로 인도하실 메시야를 기다렸다.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이런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나를 좇으라” 말씀하셨다. 빌립은 예수님의 최초의 제자 중 한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빌립은 나다나엘을 만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라고 증거하며 전도했다.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말했다. 빌립이 “와 보라” 말했다.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말씀하셨다.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나다나엘이 놀라 예수님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 그 날까지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나다나엘이 예수님 앞으로 나오는 것을 보시고, 예수님은 그의 이름뿐만 아니라 그가 어떤 사람이며, 예수님께 오기 전에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가 하는 것까지 다 알고 계셨다. 나다나엘이 더욱 놀라 베드로처럼 외쳤다.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왕이십니다.” 간사(奸詐)하다는 것은 나쁜 꾀가 있어 거짓으로 남의 비위를 맞추는 태도를 말한다.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다 말씀하셨다. 나다나엘에게 간사한 것이 없다는 예수님 말씀은 그가 참 이스라엘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구약시대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을 받았다. 그러나 구약 역사를 보면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숭배를 하며 온갖 죄를 저질렀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우리는 이스라엘 사람이다.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자만과 교만에 빠져 있었다. 말하자면 껍데기만 하나님의 백성인 거짓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 땅에 가득했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눈앞에 나타난 나다나엘을 보시자마자 예수님은 그가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하는 사실을 단번에 알아보셨다. 참 이스라엘 사람은 간사함이 없어야 한다는 말은 진실한 하나님의 백성은 거짓이나 위선, 또는 잔꾀를 부리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뜻이다. 간사함이 없는 인격, 이것은 참 이스라엘 사람, 즉 참된 하나님 백성의 특징이다. 그래서 시편 32:2에서 “마음에 간사가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는 자가 복이 있도다”라고 말씀했다. 3월 13일 새벽 5시 예손교회 1층 40여명 교인들 방석에 앉아 조용히 기도하고 있었다. 교회 이름 예손은 마태복음 17장 7-8절 말씀 “예수께서 나아와 저희에게 손을 대시며 가라사대 일어나라 두려워 말라 하신대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에서 따라 지었다. 신앙고백, 찬송가 279장 인애하신 구세주여, 시편 25편 교독을 했다. 시 25:1 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 보나이다 2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의지하였사오니 나로 부끄럽지 않게 하시고 나의 원수로 나를 이기어 개가를 부르지 못하게 하소서... 21 내가 주를 바라오니 성실과 정직으로 나를 보호하소서 22 하나님이여 이스라엘을 그 모든 환난에서 구속하소서 예손교회 설립 23주년 되는 새벽 최우식 목사(제98회 총회 회록서기)의 설교 음성은 높지도 낮지도 않았다. “다윗의 영혼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우러러보고 의지해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게 합니다. 그는 주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교훈하소서 간구했습니다. 우리도 그처럼 어쩔 수 없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 주님을 우러러볼 때 주의 진리의 지도와 가르침을 간구하게 됩니다. 그럴 때 주께서 성실과 정직으로 우리를 보호해 주십니다. 우리의 삶도 주님처럼 성실하고 정직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의 이스라엘 백성된 우리를 모든 환난에서 구속해 주실 것입니다. 어디에서도 우리의 길이 열릴 것입니다. 다윗처럼 주를 우러러볼 때 주의 은혜가 함께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기도합시다. 23년 동안 우리 교회 지켜 주신 은혜 감사드립니다. 최명률 장로, 박정희 권사 예물을 드립니다. 이경환 장로, 이한순 권사, 양성표 집사 헌물을 바칩니다. 그들의 기도와 소원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주십시오. 그리고 새벽에 무릎 꿇은 성도들 축복하여주십시오. 23년 우리 교회 지켜주신 주님 우리 교회 물댄 동산 같게 해 주십시오. 주님 오실 때까지 복된 교회로 인도해 주십시오. 이 나라도 주님께서 안돈시켜주십시오. 평양에도 길을 내주십시오. 우리 모두가 십자가의 길을 찾게 해 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주기도문 후 불이 꺼지고 찬송 반주 가운데 교인들은 개인 기도를 했다. 새벽기도회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차 안에서 최우식 목사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떻게 신학을 하게 됐습니까. “청년 때 가정이 아주 망가지고 어려움이 생겼어요. 그 바람에 세상의 밑바닥을 보면서 그때부터 하나님을 찾게 되었죠. 군대 가기 전이죠. 그렇게 해서 신학을 하게 되는 길이 열렸 습니다. 신학교는 군대 가기 전에는 지금의 광신대를 다녔어요. 군대 다녀와서는 학교가 나누어졌기 때문에 최기채 목사 측 광주신학교를 나왔죠. 총신은 79회입니다. 제가 86년에 강도사가 됐어요.” -예손교회는 1993년 3월 14일 설립됐는데 23년 됐는데 7년 동안 어디 계셨습니까. “78년 1월 1일부터 전도사 생활 시작을 했어요. 저 해남 시골교회에 있었는데 그 때 주류와 비주류가 갈라지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른바 목포는 아주 비주류 판이었습니다. 목포 시온교회에 김원범 목사가 계셨습니다. 그분은 이영수 목사 시절 1979년 제64회 총회부터 제66회 총회까지 회록서기를 하셨어요. 지금도 살아 계십니다. 그분이 회록서기를 하면서 주류 측에 딱 서서 주도했습니다. 해남에 30교회이상 됐을 겁니다. 그런데 그분 영향으로 나 혼자만 주류 측이었습니다. 버티고 버티다가 무안 일로 초곡교회에 있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전도사를 하다가 목포대학 건너편 청계중앙교회로 부임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큰 교회가 되었죠.” -그런데 어떻게 이 교회로 오시게 되었습니까. “거기서 목회를 하는데 지금 이 작은 교회가 분쟁으로 새로 분립이 되었습니다. 몇 명이 거기서 뛰쳐나왔어요. 나온 사람들이 다락방처럼 어느 처소에서 모여 예배를 드렸습니다. 나온 교회가 비주류 소속이었는데 나온 분들이 주류에 속하기를 원했어요. 나올 때 아예 그러기로 작정을 했던 모양입니다. 교인 몇 명이 백영규 목사를 찾아가 교역자를 보내달라고 청원을 했습니다. 그때는 백영규 목사와 양근실 목사가 주도적으로 일을 하고 아주 힘이 황소처럼 셀 때였습니다. 그래서 양근실 목사가 저보고 가 볼 의사가 없냐고 물었습니다.” -기성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계신데 어떻게 개척교회로 오시게 되었습니까. “갈 이유가 없죠. 청계중앙교회에서 목회를 잘 하고 있으니까요. 아주 평탄한 교회인데요. 목포대학교도 바로 건너편에 있는 목회 환경이 아주 좋은 곳이죠. 그런데 목회자는 이상하더라고요. 아무리 어려운 교회에서 청빙이 와도 고민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때 나이가 40이나 41살이었을 겁니다. 그때 그냥 과감하게 개척을 해보겠다는 생각이 든 겁니다. 그래서 사임을 하고 나와 개척을 하게 된 겁니다. 오늘까지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건축을 언제 하게 되었습니까. “막 개척해 나와 1993년 3월 14일 첫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5월에 이곳으로 오게 되고 몇 개월 지나서 지금 있는 땅을 사게 됩니다.” -교인들이 꽤 됐던 모양입니다. “(생각에 잠긴 웃음)땅은 빚으로 샀습니다. 그래서 부지 매입이 가능했죠. 사실 교회 있는 곳이 매립지입니다. 원래는 바다였죠. 그 위에 목포 쓰레기를 다 부었죠. 지하를 파보면 온통 쓰레기입니다. 황무지와 같은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땅을 사고 1차 건물을 지었습니다. 지하 40평 바닥 100평이었습니다. 그 뒤 2000년도에 지금의 완전한 건물로 증축하게 되었습니다. 2단계로 건축이 이루어졌습니다. 옛날에는 지하실이 본당이었습니다. 오늘 새벽예배 드린 곳 왼편에 사택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은행이 교회 대출을 해주는 제도가 생겼습니다. 아마 목포에서 우리 교회가 처음이었을 겁니다. 그 돈으로 교회 건축을 마무리하게 된 것입니다. 성도들이 헌신적으로 헌금을 해 대출을 거의 다 갚았습니다.” 3월 13일 오전 11시 예손교회 설립 23주년 기념예배 사회 최우식 목사 본문 마가복음 10:35-45찬양대의 마무리는 좋~다였다. 교회 23주년이면서 최우식 목사의 재직 23주년이기도 한 날이다. 그의 높지도 낮지도 않은 중간 어조의 말씀 증거가 시작됐다. 오늘은 특별한 주일입니다. 1993년 3월 13일 창립되어 23년 세월이 숨가쁘게 흘러갔습니다. 수많은 성도가 오고갔습니다. 또 만남이 이루어지기도 하고 세상을 떠나기도 하고 해외로 나가기도 하고 직장 때문에 옮기기도 하는 등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참으로 23년 동안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고 에벤에셀의 하나님이 되어 주시고 인도해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복된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금년 우리 교회 표어는 하나님 칭찬받는 교회입니다. 첫째 예배를 통해 하나님 칭찬을 받아야 합니다. 둘째 동서남북으로 뻗어나가는 구령사업을 통해 하나님 칭찬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 서로 인정하고 칭찬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구를 어떻게 섬겨야 할까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은 관계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의 갈빗대로 하와를 만드시고 관계를 맺게 해 주셨습니다. 두 사람이 한 몸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에덴에 죄가 들어오게 됩니다. 사단이 뱀의 모습으로 에덴에 들어와 하와를 유혹해 하나님을 배반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모든 관계가 깨어지게 됩니다. 타락으로 관계가 깨어진 것입니다. 심지어 자연과의 관계도 깨어져 땅은 엉겅퀴를 내고 여인은 해산의 고통을 겪고 남자는 노동을 해야 합니다. 복음만이 죄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깨어진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위해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알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10장 35절에서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의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주께서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물으셨습니다. 37절에서 그들은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말합니다. 41절에서 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분히 여겼다고 했습니다. 45절에서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예수님은 인간의 본성과 배치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 마음은 야고보와 요한처럼 욕심을 내는가하면 나머지 열 제자처럼 높아지는 일에서 배제되면 분노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능입니다. 이것을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은 성령을 받아야 가능합니다. 성령이 내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구원 받은 성도는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그 열매는 모든 관계를 회복시키고 좋아지게 만듭니다. 즉 은혜 받은 사람은 하나님과 사람들과의 관계가 좋아지는 것입니다. 능력도 좋고 집안도 좋아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사람일지라도 관계가 틀어지거나 깨어지면 모든 게 허사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을 잘 하느냐 못 하느냐는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의 문제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소원해지거나 깨질 때 교회 안에 생깁니다. 우리 모두 청지기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23년을 지내고 보니 교인이 떠나는 것은 목사의 설교가 못 마땅해서가 아니라 관계가 깨질 때였습니다. 하나님과 관계없는 상황에서 목사와 장로 직분을 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 그것이 무슨 덕이 있겠습니까. 예수를 잘 믿는다는 것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언제나 자각하고 사는 삶입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성령을 받고 예수님을 볼 수 있고 섬겨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섬김의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주님은 제자의 발을 씻겨 주셨습니다. 45절에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주님 말씀하셨습니다. 주님 말씀대로 섬길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이제 23주년을 지나 30주년을 향하는 우리 예손교회의 비전은 교회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교회가 되게 합시다. 섬김이 우리 성도의 비전이 되게 합시다. 앞의 성도는 눈물을 닦았다. 제98회 총회(총회장 안명환 목사)에서 회록서기를 지낸 최우식 목사(목포서노회)는 목포의 인물 전 대통령 김대중 씨의 풍모를 닮았다. 그는 임원회가 맡겨주는 일은 무엇이든 나다나엘처럼 진실하게 처리했다. 분쟁으로 앓고 있는 전주서문교회와 관련해서 총회결의집행위원회의 위원장을 맡은 최우식 목사는 김승연 목사가 6개월 혹은 1주일 간 한시적으로 당회장직에 복귀하도록 하고, 이후 양측 합의 하에 교회 개척 등의 방식으로 분리가 이루어지도록 하자는 합리적인 제안을 했다. 그러나 김승연 측과 장로 측의 고집스러운 요구조건의 대립으로 서로의 입장차만 확인하고 아쉽게 결렬됐다. 교회 정상화와 합법적인 분립문제에 대해서도 양측의 입장은 위원장 최우식 목사의 설득에도 끝내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 사건처리를 통해 호남에서 모처럼 좋은 재목이 될 풍모와 심지를 지닌 총회 정치인이 나왔다는 인상을 전국 교회에 각인시켰다.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다 말씀하셨다. 최우식 목사는 총회 대들보 정용환 목사를 비롯해 모든 사람이 진실하고 좋은 사람이라고 인정하듯 주님의 제자 나다나엘 같은 목회자다. 2016-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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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4-15
  • 함성익 목사 모친 소천
    함성익 목사(황해노회 노회장, 창성교회)의 모친 김영숙(故 함영진 목사의 사모)께서 2015년 12월 26일 오후 3시 45분 88세를 일기로 소천하셨다. 입관예배는 12월 27일 오후 5시 30분 고려대 안암병원 장례식장에서 총회 부총회장 김선규 목사의 주례로 드렸다. 발인 및 천국환송예배는 12월 28일 오전 9시 창성교회(도봉구 창동 448-42)에서 음악예배로 드린다. 세계적인 성악가 김순영, 추희영, 김세일 등과 현악 4중주와 금관 5중주의 협연으로 故 김영숙 사모의 천국 환송식이 아름다운 선율 속에 이루어질 예정이다. 아들로는 함성익 목사 외에 세계적인 지휘자 함신익(미국 예일대 교수)이 있고 사위로는 김일규 목사(광명소하교회 담임)가 있다. 2015-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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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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