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3(토)

G.OPINION
Home >  G.OPINION

실시간뉴스
  • 윤석열 대통령과 이순신 장군 사즉생
    국민의힘의 비례 위성 정당인 국민의미래는 18석을 얻을 것으로 예측돼 비례를 합쳐 개헌선을 지킬 108석 의석을 가진 여당이 될 것이다. 21대 총선 때는 비례를 포함해 103석이었다. 그때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따르면 2022년 3월 10일 오전 개표율 100% 기준,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가 득표율 48.56%를 기록해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47.83%)를 앞섰다. 선거 막판까지 1%포인트 차이가 나지 않은 초접전 상황에서 이재명을 누르고 20대 대선에서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런 그이기에 문재인 휘하 검찰총장으로서도 기죽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국회의원 수도 5명이 더 늘어난 대한민국 국민의 대통령 윤석열은 그 나름의 능력을 발휘해 이순신 장군의 사즉생(死卽生) 각오로 헤쳐나가리라 믿고 믿음의 사람들은 기도해야 할 것이다. 주님 그리워 기도하는 새벽 벚꽃 피네 벚나무는 아련한 추억처럼 꽃잎을 흩날리며 아득하게 진다. 건축의 기본 단위는 건물이다. 건물을 쪼개면 방들로 나눠지고 방을 쪼개면 가구들로 나눠진다. 반대로 건물이 모이면 거리가 되고 거리가 모이면 동네가 되고 동네가 모이면 도시가 되고 도시가 모이면 국가가 되고 국가가 모이면 세계가 된다. 훌륭한 건축가는 다양한 크기의 스케일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면서 사고하는 사람이다. 여러 가지 스케일에서 검토해야 좋은 의사 결정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건물을 설계할 때도 크게는 도시를, 작게는 가구를 동시에 생각해서 디자인 의사 결정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르코르뷔지에, 노먼 포스터 같은 훌륭한 건축가는 건물 디자인뿐 아니라 의자 디자인부터 도시 설계까지 했다. 의사 결정은 가치관이 결정한다. 가치관은 상대적이고 항상 변한다. 가치관을 바꾸는 기준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 하나는 공간이다. 고려하는 ‘공간의 크기’가 가치관을 결정한다. 예를 들어서 군부대에서 상관이 강압적인 명령을 내렸다고 하자. 인권 등을 고려해서 명령을 내린 상관이 징계를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배경을 극동아시아로 넓혀 보니 전쟁 중이라면 전쟁에서 이기기 위한 불가피한 명령으로 정당성을 가질 수도 있다. 이처럼 우리 판단의 기준이 되는 공간의 크기에 따라서 가치관의 우선순위가 달라지기도 한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얼마 안 된 해방 후에는 국제 정세가 어지러운 시대였다. 이때는 여러 국가 간 지정학적 공간 스케일이 가장 중요한 판단 기준이었다. 자유 진영에 자리를 잡는 것이 가장 중요한 시대였고 우리나라는 올바른 선택을 했다. 신앙을 가진 이승만 대통령은 개인이 토지를 소유할 수 있는 시대를 만들어서 자유민주주의의 공간적 초석을 놓았다. 1970년대에는 경제 발전이 필요한 시대였다. 산업화를 하였고 아파트를 지어서 고밀화된 도시 공간을 만들고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했다. 90년대에 가장 큰 변화는 베를린 장벽과 소련의 붕괴다. 냉전 시대가 끝나고 지정학적 긴장감이 사라지니 민주화의 속도를 높일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지금은 시대의 기류가 바뀌어 미·중 신냉전의 시대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시작으로 세계는 본격적으로 양분화되는 중이다. 중국, 러시아를 중심으로 한 세계와 그 외 자유민주주의 진영이라는 새로운 냉전 구도가 구축되고 있다. 이런 시대가 되면 지리적 위치가 국가의 정치와 국제 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지정학의 중요성이 높아진다. 미·중 갈등의 최전선은 중동이 아니라 한반도다. 우리의 의사 결정 가치관의 기준은 작은 국내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건축에 비유하자면 건물 디자인을 결정할 때 가구가 아니라 도시적 스케일에서 의사 결정이 되어야 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아직도 지난 시대의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국민이 많고 이를 악용하는 모사꾼을 감옥에 보낸 허활민 목사보다 못한 이재명이나 조국 같은 정치가들이 많다. 지금은 50년대 건국의 시대도 아니고 70년대 경제 발전의 시대도 아니고 90년대 민주화의 시대도 아니다. 지금은 새로운 지정학의 시대다. 50년대와 비슷한 위기의 지정학적 시대에 인공지능의 변화까지 덮친 시대다. 우리나라의 경우 인구의 노령화까지 겹쳐서 변화에 대응하기 더 어려운 상황이다. 국내라는 좁은 공간적 시각에 갇혀 생각하면 구한말 때 우리 조상이 한 실수를 똑같이 반복하게 될 것이다. 일본은 유럽에 도자기를 팔았던 나라로 바닷길로 해상무역을 했던 나라였기에 더 넓은 공간을 보았고 우리보다 앞서 메이지 유신을 했다. 우리는 한반도에 시선이 머물러서 당파 싸움만 하다 나라를 잃었다. 바다라는 더 큰 공간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계속해서 사고 속 공간을 확장시켜 나가야 한다. 90년대 우리는 어느 나라보다도 빨리 초고속 인터넷망을 통해서 가상공간으로 사고의 공간을 확장했다. 경제학자 찰스 굿하트의 분석에 따르면 1988년부터 2018년까지 일본의 경제 성장률은 전체 인구를 고려했을 때는 주요 국가 대비 최저 수준이지만 노동인구(20~64세) 1인당 연간 평균 경제 성장률은 오히려 미국, 영국, 프랑스를 앞서는 수준이다. 이는 고령층이 적극적으로 사회 참여를 지속하고 있음을 방증한다. 실제로 지난 20년간 일본은 고령층이 꾸준히 일할 수 있는 사회를 추구함과 동시에 후기 고령자(75세 이상)의 신체, 인지 기능 보존을 위한 지역사회의 돌봄 예방 체계를 구축하고 돌봄 요구의 발생을 예방하기 위해 의료-복지를 연계하는 등의 노력을 지속해 왔다. 싱가포르는 일본의 개념에서 더 나아가서 나라 전체를 아예 느리게 나이 들게 만들겠다는 의지를 통해 세계 여섯 번째의 ‘블루존(세계 최고의 장수마을)’ 목록에 추가되기도 했다. 자연적으로 형성된 기존 블루존들에 비해 싱가포르는 정책에 기반한 블루존 2.0의 개념을 도입했다. 사람들이 도시를 걷고 건강하게 식사하도록 장려하고 자동차 보유, 음주, 흡연에는 높은 세금을 매긴다. 노인 의학적 개념을 기저에 둔 연령 친화적인 의료 시스템을 통해 병원이 질병을 치료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질병과 노쇠를 예방할 수 있도록 한다. 나아가 노쇠가 이미 발생한 상황, 즉 내재 역량이 감퇴하는 상황에서도 지역사회에서 공동체 생활을 유지할 수 있도록 지역사회 시스템을 형성한다. 한국의 일하는 고령층 비율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1위다. 노년 빈곤을 원인으로 꼽지만, 통계청의 2023년 고령자 통계에 따르면 일하는 노인은 자신의 건강 상태가 좋다고 생각하며 일상생활에서 스트레스도 비교적 덜 느꼈다. 더 건강한 이들이 일을 지속할 가능성도 높지만, 일이 신체, 인지, 사회적 자극을 유지할 수 있어 내재 역량 유지의 선순환을 만들어 주는 효과가 있기도 하다. 지금 갓 65세를 넘고 있는 분들은 이전 세대보다 더욱 건강하고 부유하고 잘 교육받았다. 이들이 앞으로도 내재 역량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은 정책의 역할이다. 앞으로 한 나라의 실력은 그 나라 사람들의 나이 드는 모습을 통해 드러날 것이다. 어두운 미래는 확정적이지 않다. 우리의 미래는 우리가 만드는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예언자적 안목을 지니고 있었다. 일본은 미국에 반드시 패한다고 예측하였다. 미국이 주도하는 신국제질서에 신생국인 한국이 따라가야 한다고 보았다. 미국은 군사력 국가이고 경제부국인 데다가 기독교 서구 문명의 중심 국가라고 간파했던 것이다. 미국의 실체를 하나님의 은혜로 요셉처럼 100년 전에 정확하게 파악했던 셈이다. 이승만 대통령 버금가는 전략가는 독일의 비스마르크, 영국의 처칠이다. 철혈재상(鐵血宰相) 비스마르크의 철(鐵)은 군사력이고, 혈(血)은 국민정신이다. 철혈이 없는 나라는 죽도 밥도 안 되고 강대국의 먹잇감이 된다. 처칠이 말했다고 한다. "소련에 평화를 호소하는 것은 악어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것과 같다." 그렇듯 감옥을 눈앞에 두고도 으스대는 이재명과 조국에게 소크라테스가 중요하게 여긴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을 한다는 건 처칠의 말과 같이 될 것이다. 성경은 말씀한다. 무릇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라 눅 17:33 2024-04-11
    • G.OPINION
    • G.OPINION
    2024-04-11
  • 소강석 목사의 날개
    이제 거리 어디에도 시계란 없다. 심지어 서울역에도. 왜? 아무도 시계를 쳐다보지 않기 때문이다. '만들어진 신'(The God Delusion, 신이라는 망상)의 대표적 무신론 작자 리처드 도킨스(Clinton Richard Dawkins, 1941년 3월 26일~ )가 아직 살아 말한다. 비행하는 동물은 왜 나를까. 목적은 적자생존이며 목표는 유전자의 생존이다. 더 잘 날아 먹이를 잘 잡는 새나 박쥐가 후손을 잇고 더 잘 날아 포식자를 잘 피하는 곤충이 자손을 남긴다. 먼저 날기 시작한 것은 곤충이었다. 척추동물보다 2억 년이나 앞선 3억 년 전부터 날기 시작했다. 가볍기 때문이다. 무게에 비해 표면적이 넓을수록 나는 데 유리하다. 몸 크기(길이)가 두 배가 되면 표면적은 네 배, 무게는 8배다. 크기가 열 배가 되면 표면적은 100배, 무게는 1000배가 된다. 어쩌다 날게 되었을까. 포식자를 피하며 몸 일부를 펼치다 붕 떠서 적을 뿌리칠 수 있었고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날개가 생겼을 것이라고 저자는 해석한다. 초기 단계는 날다람쥐 같은 ‘활강’이었지만 이윽고 자신의 힘으로 날아오르는 ‘동력 비행’이 가능해졌다. 동물의 비행과 인간의 비행은 실제 비슷한 방향으로 ‘진화’했다. 맹금류가 먹이를 향해 내리꽂는 광경은 급강하 폭격기를 보는 듯하다. 벌새는 날개를 위로 칠 때 완전히 뒤집어 정지 비행을 할 수 있다. 마치 헬리콥터나 드론을 연상시킨다. 그렇지만 동물과 인간이 만든 기계의 비행에는 차이가 있다. 비행기나 헬기, 드론은 날개를 칠 수 없다. 엔진으로 추력을 얻고 날개로 양력을 얻는 비행기의 원리는 새나 박쥐, 곤충이 날개를 치는 것과 완전히 다르다. 새가 날개를 치면 몸을 앞으로 밀어내면서 공기를 아래로 밀어내 날아오를 수 있지만 그 역학은 비행기의 동작보다 훨씬 분석하기 어렵다. 그는 비행을 넘어 지구 밖을 향하는 인간의 꿈을 격려한다. 원하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이곳을 떠나야만 할 가능성에 대비하기 시작할 때라고 도킨스는 말한다. 분야는 다르지만 과학 대중화에 일생을 바친 천문학자 칼 세이건을 떠올리게 한다. “나는 과학 자체를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는 영웅적인 비행이라고 여긴다. 이제 날개를 활짝 펼치고 과학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갈지 지켜보자.” 그렇듯 2005년 7월 3일 소강석 목사는 그렇게도 기다리던 약속의 성전 프라미스 콤플렉스에서 날개를 활짝 펼치고 하늘로 날기 위해 첫 예배를 드리는 날이었다. 그런데 아침부터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소강석 목사는 비가 내리는 창문가에서 흐린 하늘을 보며 하나님께 기도했다. "주여, 새에덴의 성도들 한 사람도 빠짐없이 함께 감격적인 첫 예배를 드리게 하소서..." 그리고 첫 날부터 프라미스 콤플렉스를 향해 들어오는 예배자들 우산의 물결로 장엄한 광경을 이루었다. 몸에 묻은 빗물을 털면서도 성도들의 얼굴은 감격과 환희로 가득했고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약속의 성취를 기뻐하며 환호했다. 첫 예배를 드린 프라미스 콤플렉스의 비전홀은 성도들의 눈물과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했다. 시인 소강석 목사는 2023년 12월 4일 '너라는 계절이 내게 왔다'라는 시집을 내고 하나님의 은혜를 이렇게 노래했다. 문득 가을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고 나뭇잎들이 허공 위로 날아가다 나의 발 앞에 떨어졌을 때 그건 나뭇잎이 아니라 편지였다 쓰고 싶은 시였다 불 꺼진 창문 아래서 혼자 부르고 싶은 노래였다 눈을 감아도 보이고 귀를 막아도 들리고 숨을 참아도 부르게 되는 사랑이었다 시인 소강석 목사의 날개는 하나님의 사랑이었다. 성경은 말씀한다.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네째 날이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들은 생물로 번성케 하라 땅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하나님이 큰 물고기와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창 1:19-21 2024-04-05
    • G.OPINION
    • G.OPINION
    2024-04-05
  • 윤희원의 선거 변혁 제안
    사람이라면 누구나 속한 곳에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있다. '사람 구실, 아비 구실, 맏형 구실, 며느리 구실'과 같은 말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런 일을 수행하는 것은 지위나 형편에 관계가 없다. 여기서 '구실'이란 자기가 마땅히 해야 할 맡은 바 책임을 이르기 때문이다. 원래 구실은 공적인 의무를 이르던 말이다. 옛말에서는 온갖 세납을 통틀어 말했다. 그래서 '구실을 바치다, 구실을 물다'와 같은 말이 남아 있다. 구실은 어쩌다가 이처럼 강한 의무감을 띠게 되었을까. 구실의 원말은 '그위실'인데 관아 즉 대치동 총회 같은 공공기관을 이르는 우리말이다. 관아에서 맡긴 공적인 업무가 마땅히 있을 테니 그 말이 오늘날에 이어진 셈이다. 이 총회 상비부 임원 같은 구실보다 높은 직이 총회 임원 같은 벼슬이다. ‘벼슬’은 관아에 나가서 나랏일을 맡아 다스리는 자리를 뜻한다. 벼슬이라 하면 우선 ‘높은 벼슬과 후한 봉록’과 같은 예시가 먼저 떠오른다. '벼슬을 지내다', '벼슬 한 자리를 하다'와 같은 말에서 벼슬하는 이의 영광스러움을 어떻게 딴 자리인데 하며 배광식이나 고광석 같은 이는 느낄 것이다. 오늘날 말로 보면 구실과 벼슬은 곧 직무와 직위이다. 물론 직위가 없어도 직무를 잘 수행하는 사람들도 있다. 한 가정의 구석구석을 살피며 빈자리를 채워내는 이름 없는 어머니들이 그러하고 한 사회의 여기저기에서 빛과 소금의 봉사 활동을 하며 기여 하는 많은 분들도 이러한 유형에 속한다. 그러나 자아를 성취하고 올바른 수행 통로를 부여하기 위해서는 직무에 맞는 직위를 부여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다. 그래서 제구실을 한다는 말이 생겨난 것이다. 구실의 다른 말로 ‘임무’나 ‘역할’은 물론 ‘제값’이라는 멋진 표현도 있다. 세상에 존재하는 한 사람으로서 자신의 위치에서 일을 훌륭히 수행하는 이를 제값을 한다고 한다. 이와 달리 ‘종노릇, 총대 노릇’처럼 그 직업과 직책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 ‘노릇’이다. 흥미롭게도 사전에는 ‘선생 노릇, 관리 노릇’ 등도 나온다. 선생, 관리라는 직업과 연결할 때 언뜻 보면 어울리지 않는 말인데 이런 표현이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목사와 장로들 모임의 총회 관행과 달리 속담에 "벼슬이 높을수록 뜻은 낮추랬다"라고 한다. 직위가 높을수록 겸손해야 한다는 말이다. 관리가 관리자로서의 구실을 충실히 한다면 어떤 벼슬보다 더 잘 모실 것이나, 관리 구실을 못한다면 "관리 노릇한다"라고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문재인 나부랭이 좌파와 달리 직위보다 직무를 더 충실히 앞세운다면 노릇으로 폄하 받는 일은 없을 것이다. 오늘 총회 임원과 상비부 임원들은 총회 안에 서 있는 자리에서 벼슬이 아닌 구실로 일을 잘 맡아 하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그래야 목사와 장로 같은 직분을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는(고전 4:2) 말씀의 총회 목사와 장로들이 아니겠는가. 108년 역사의 총회 민주주의의 핵심 기제로 △권력의 견제와 균형 △법치 △소수의견과 절차의 존중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런데 숙의민주주의와 소수의견 및 교회 전통 존중이라는 불문율이 총회 역사상 이처럼 절실한 시절은 없었던 것 같다. 나토 당국자가 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나려면 수년 걸릴 것이라고 말했다 그 전쟁이 터지기 6일 전 2022년 2월 18일 주간 기독신문에 총총 출신의 총회 최고 지성 윤희원 목사는 총회 선거 부정의 실태를 점잖게 밝히는 "지지의 긍정성을 부정성으로"라는 제하의 논단을 실었다. 금권으로 총회장이 되는 현실을 다음과 같이 점잖게 지적한다. 총회의 선거는 내가 보기에는 정치의 장을 떠나 자본이라는 돈의 공간으로 옮겨갔다. 그래서 선거는 가시성에서 비가시성으로, 투명성에서 불투명성으로, 공정성에서 차등성으로, 부정적인 면을 드러내게 되었다. 이러한 선거가 된 것은 선관위가 선거 규정을 적용하고 운영하며 선거를 관리하는 데서 비롯되었다고 보여진다. 본래 선거 규정이란 모임의 대표자나 임원을 공명정대하게 선거를 통해 선출하기 위해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그 규정에 의해서 경쟁하게 하고 더욱이 선거전(戰)이 과열되지 않도록 또 소모적인 마타도어에 휩쓸려가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선거 규정은 상보적이고 그 규정을 운용하는 선관 위원은 중개 적이어야 한다. 더욱이 총회의 선관 위원은 정치적 중개를 넘어서서 개혁신학과 신앙에 걸맞는 중개를 해야 한다. 즉 어느 후보가 더 개혁신앙과 신학의 정체성이 분명한가를 선거운동을 통해서 드러낼 수 있도록 해 총대들이 선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유감스럽게도 지금까지의 선관위와 선거 규정은 그렇지 못했다. 제107회 선거를 관리하는 선관위가 제106회 선거 규정을 고치지 아니하고 그대로 사용하여 시행한다고 하니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 격이 된다. 왜냐면 제106회 총회처럼 부정선거가 된 선거는 없었다. 총회는 선거가 끝나자마자 부정투표에 휘말렸고 사실상 비상사태가 되었다. 후보자끼리 선거관리 규정에 의해 각서하고 공증까지 했어도 그 선거의 과정이 공정하지 않고 투명하지도 않은 부정선거가 이루어졌는데 공증한 각서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더욱이 선관위는 검표하면 비밀투표한 것이 드러나 선관위 스스로는 할 수 없고 형사 고발을 해서 사법적으로만 할 수 있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그 사이에 장자 교단이라는 시스템을 작동해 어느 유능한 인물이 이 비상사태를 정상상태로 만들어 버렸다. 이런 점에서 나는 개인적으로 솔직히 선거 규정을 바꾸기를 원했다. 다른 것은 몰라도 한번 투표의 방법을 비밀투표가 표로 아닌 공개투표로 바꾸었으면 했다. 왜냐면 비밀투표로 하게 되니 후보자에 대한 지지 긍정성이 과잉 생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찾아와서 만나면 그 면전에서 “나는 당신을 지지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할 수 없어 지지하는 척하고 명목상 주는 여비를 받는다. 만일 공개투표로 바꾸게 되면 이 지지 긍정성이 사라지고 부정성이 드러나서 후보자도 만나보았자 날 지지하지도 않을 사람이니 만나지 말고 여비도 주지 말자고 할 것이다. 당연히 유권자인 총대들은 이제 한 표 가지고 두 사람 아닌 후보자 모두를 지지할 수 없으니 아주 조심할 것이다. 그리고 잘못되면 받은 여비 내놓으라는 소송 아닌 소송에 휘말리게 되니 후보자들에 대한 지지 긍정성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이렇게 투표의 방법을 바꾸면 종전에 시행했던 제비뽑기 방식의 선거보다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투표의 방식을 이렇게 공개투표로 전환하면 후보들 스스로가 총대들의 지지 긍정성에 현혹되지 아니할 것이다. 지금의 선거 규정은 너무 부정적인 요소가 강하다. 온통 배제와 금지를 규정하고 후보자로서 활동을 못 하게 한다. 그래서 후보자들 스스로가 그 규정 안에서 담합 하거나 아니면 이의제기 또는 고소 고발로 상대를 떨어지게 하려는 비정치적인 행위를 한다. 결국은 자본을 많이 소비한 쪽이 승리하는 경제 행위가 되어 버렸다. 한번 바꾸어 보자. 투표의 방법을 공개투표로 바꾸면 굳이 지금과 같은 선거를 치러야 할 필요성도 사라지고 총회진행 시간도 매우 단축될 것이다. 지금 우리는 선거라는 정치적 행위를 통해 개혁신학과 신앙의 위계를 상황적으로 계승시키지 못하고 위기 적 상황만 고조시키고 있다. 이런 점에서 총대들의 정치적 행위가 되는 선거의 방법을 고쳐야 한다. 그래야 탈 정치 화 되고 탈 신앙 화 되고 탈 신학 화 된 선거문화를 바꿀 수 있다. 아쉽게도 이번 총회가 선거 규정을 바꾸지 않고 선거를 치른다고 하니 걱정이 된다. 걱정이 우려로 끝나면 좋겠지만 기대가 되어 버리면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꼴이 되어 버릴 것이다. 우리 총회의 개혁은 먼저 선거의 변혁을 통해서 이루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선관위와 선거 규정은 참으로 중요하다. 왜냐면 선한 양심을 총대 모두에게 지켜가게 하기 때문이다. 바꾸자. 먼저 우리의 마음을, 그리고 지키자. 선거 속에서 신앙과 신학을. 성경은 말씀한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딤전 6:10 2024-04-05
    • G.OPINION
    • G.OPINION
    2024-04-05
  • 의사 파업과 총회 선거
    구름이 발 아래 머물더니 3월 하늘이 폭설을 쏟아낸다. 가난한 신학생 시절 1970년대 사당동 골짜기엔 태곳적 침묵이 쌓여갔다. 현관의 유리창 밖을 보고 서 있었다. 고요 속에 장엄한 살아있는 천지가 압도해 들어온다. 관입실재(觀入實在)! 마음의 눈으로 실재를 대면하는 순간순간이 이어진다. 만유의 주 하나님께서 만물을 지으시며 말씀하신 “보시기에 좋았다”라는 감탄이 가슴에서 터졌다. 그 시절 3월에 웬일이냐! 만상이 살아있다는 영광을 이렇게 누리다니! 예수께선 ‘들에 핀 백합을 보라! 솔로몬의 영광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다(마태복음 6:29)’ 말씀하셨다. 그날 사당동 골짜기 미완성의 1동짜리 총신대에서 되뇌었다. “오늘은 눈이 열려 솔로몬의 영광보다 더한 영광을 이 골짜기에서 보게 하시니 감사하나이다!” 예수께선 어린이와 같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하셨다. 동심에 온유와 겸손의 도가 있다. 늘 성경을 읽는다는면 우리의 마음엔 그 진리가 벌써 자리한 것일까. 꽃은 봄의 전령(傳令)이다. 그 꽃을 가리키는 대표적 한자는 화(花)다. 영화(榮華)라는 단어의 각 글자는 꽃이다. 식물 형태가 목본(木本)이냐 초본(草本)이냐에 따라 ‘영’과 ‘화’를 구별할 때도 있지만 분명치는 않다. 두 글자는 어쨌든 식물의 가장 아름다운 부분, 정수(精髓)라는 우러름을 받는다. 그 맥락에서 영(英) 또한 꽃의 지칭이다. 가장 빼어난 사내를 영웅(英雄), 그런 능력의 사람을 영재(英才)로 적는 이유다. 꽃이 피었다 시드는 과정을 영고(榮枯)라 적어 성쇠(盛衰)와 흥망(興亡), 흥폐(興廢) 등의 뜻으로 새긴다. 총회선관위(위원장 권순웅 목사)의 유권해석에 따라 4월에 열리는 이번 봄 노회에서 총회 임원의 경우 총회장은 오직 예수 김종혁 목사(울산노회ㆍ명성교회)가 추대될 것이다. 목사부총회장은 장봉생 목사(서울노회ㆍ서대문교회)가 가장 유력한 후보로 나설 것이다. 장로부총회장은 김영식 장로(군산남노회ㆍ익산서두교회), 김형곤 장로(김제노회ㆍ대창교회), 박석만 장로(서수원노회ㆍ풍성한교회)가 경합할 것이라고 한다. 부서기는 서만종 목사(광주전남노회ㆍ광주단비교회)가 앞선 가운데 이종석 목사(동수원노회ㆍ광교제일교회) 배정환 목사(광주노회ㆍ광주미문교회) 등 두 사람이 뒤쫓을 형국이다. 부회록서기는 안창현 목사(군산남노회ㆍ서광교회)와 최찬용 목사(남수원노회ㆍ대덕교회)가 경쟁할 것이다. 서기는 부서기 임병재 목사(경청노회ㆍ영광교회), 회록서기는 부회록서기 김종철 목사(용천노회ㆍ큰빛교회), 회계는 부회계 이민호 장로(경북노회ㆍ왜관교회)가 정임원으로 올라갈 것이다. 기관장 유력 후보는 교육개발원 이사장 송태근 목사(평양제일노회ㆍ삼일교회, 재임), 기독신문 사장 태준호 장로(전서노회ㆍ태인교회, 재임), 총회세계선교회 이사장 김장교 목사(대경노회ㆍ서성로교회), 기독신문 이사장 장재덕 목사(경동노회ㆍ서문교회) 등이 드러나고 있다. 아카데미상을 휩쓴 영화 ‘오펜하이머’의 주인공인 핵물리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철저한 강의 준비로 유명했다. 버클리 교수 시절엔 영감을 불어넣는 강의에 매료된 학생들이 같은 과목을 두세 번씩 수강 신청했다. 오펜하이머는 다른 교수들이 불성실하게 강의하는 것을 참지 못했다. 강의가 마음에 안 들면 수업 중인 교수를 강의실 밖으로 내쫓은 적도 있다고 한다. 강의에 대한 이런 열정은 교수직을 단순한 지식 전달이 아닌 신의 소명으로 보는 서구 대학의 오랜 전통에서 비롯됐다. ‘교수’라는 뜻의 영어 ‘프로페서(professor)’는 라틴어 pro(앞으로)와 fateri(공표하다)에서 왔다. ‘다중 앞에서 공적인 주제로 말하는 사람’이란 뜻이다. 대학의 시초로 꼽히는 11세기 볼로냐 대학에서 처음 개설한 것은 신학이었다. 교수는 신의 진리를 많은 이에게 전하는 신성한 직업이었던 것이다. 중세 이후 교수는 출신에 관계없이 귀족 대우를 받았다. 오늘날 독일 등 중부 유럽에서 교수들이 누리는 사회적 존경에는 깊은 뿌리가 있다. 우리는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직업에 ‘사’를 붙인다. 공적인 일을 하는 판·검사에겐 ‘일 사(事)’를 쓴다. 변호사·변리사·조종사는 전문 지식을 존중하는 의미로 ‘선비 사(士)’를 쓴다. 그런 전문가 중에 특히 사회에 희생하고 봉사하는 직종엔 ‘남을 가르친다’라는 뜻의 ‘스승 사(師)’를 붙인다. 아픈 이들을 돌보는 도덕적 사명을 수행하는 의사에게 ‘師’를 쓰는 이유다. 대한의사협회에서 정한 의사윤리지침 3조에는 의사의 본분이 이렇게 적혀 있다. "의사는 고귀한 사람의 생명과 건강을 보전하고 증진하는 숭고한 사명의 수행을 삶의 본분으로 삼아…." 의사윤리지침이 정한 소명에 충실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는 의사라면 결국에는 죄책감의 칼날에 양심이 베일 것만 같다. 그 소명에 다가갈수록 환자를 두고 떠난 옛 기억이 그를 괴롭힐 것이다. 그 기억은 '나는 환자의 고귀한 생명을 보전하는 의사'라는 정체성과는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목사(牧師)는 개신교의 성직자이다. 개신교의 예배(禮拜)와 예전(禮典)을 집행하며 신도의 교육과 지도, 비 신도에게 복음을 전해야 할 임무를 갖는다. 역사는 타이밍, 사람, 상황 그리고 우연의 복잡한 얽힘이라고 할 수 있다. 아픈 이들을 돌보는 도덕적 사명을 수행하는 의사가 의대생 숫자 늘린다고 환자가 있는 병원을 떠나 파업을 하는 시대가 됐다. 이런 상황에 우리 목사와 장로는 어떤 삶을 살고 총회를 어떻게 섬겨야 할까. 성경은 말씀한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빌 3:7-14 2024-03-25
    • G.OPINION
    • G.OPINION
    2024-03-25
  • 의사와 총선
    영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As Good As It Gets)는 1997년에 만들어진 미국 영화다. 모두가 싫어하는 괴팍한 작가 멜빈(잭 니콜슨)과 병든 아들에 대한 의무로 자기 삶을 포기해온 식당 종업원 캐럴(헬렌 헌트)의 사랑을 다룬 제임스 브룩스 감독의 로맨틱 코미디 영화이다. 1998년 70번째 아카데미상 수상식에서 7개 부문 수상 후보로 올라 남우주연상(잭 니콜슨)과 여우주연상(헬렌 헌트)을 수상하였다. 다른 한편 이 영화는 미국 의료 시스템에 대한 영화이기도 하다. 영화의 줄거리는 이렇다. 멜빈 유달(Melvin Udall: 잭 니콜슨 분)은 강박증 증세가 있는 로맨스 소설 작가이다. 뒤틀리고 냉소적인 성격인 멜빈은 다른 사람들의 삶을 경멸하며 신랄하고 비열한 독설로 그들을 비꼰다. 그의 강박증 역시 유별나다. 길을 걸을 땐 보도블록의 틈을 밟지 않고, 사람들과 부딪히지 않으려고 뒤뚱뒤뚱 거린다. 식당에 가면 언제나 똑같은 테이블에 앉고, 가지고 온 플라스틱 나이프와 포크로 식사를 한다. 그러나 식당의 웨이트리스로 일하는 캐럴 코널리(Carol Connelly: 헬렌 헌트 분)만은 예외이다. 언제나 인내심 있는 태도로 멜빈을 대하는 그녀는 그의 신경질적인 행동을 참고 식사 시중을 들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녀에게도 어려움은 있다. 그녀는 천식으로 괴로워하는 어린 아들이 있지만, 변변한 치료도 못할 정도의 빠듯한 살림을 아이 아빠 없이 혼자 꾸려나가야 한다. 멜빈이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들 중의 하나는 이웃에 사는 동성애자 화가인 사이먼(Simon Bishop: 그레그 키니어 분)이다. 그는 멜빈이 자신의 생활 방식을 싫어하며 또한 그의 작고 귀여운 개 버델도 미워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모든 것은 변한다. 사이먼이 강도들로부터 구타를 당하자 멜빈이 사이먼의 애견 버델을 돌봐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처음에 멜빈은 버델을 싫어하지만, 이 작은 강아지로 인해 멜빈의 얼음 같은 심장은 서서히 녹기 시작한다. 동물과 소통하며 공감 능력을 조금씩 배워나가던 그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온다. 캐럴이 일을 그만뒀다는 것이다. 캐럴의 집까지 찾아간 멜빈은 갑작스러운 호흡 곤란에 오래 시달려온 아들을 돌봐야 하는 캐럴의 딱한 사정을 알게 된다. 캐럴의 아들이 앓던 병은 심각한 게 아니었다. 캐럴이 가입한 의료보험으로는 정상적인 검사를 받을 수 없어 응급실에서 증상만 치료했을 뿐이다. 멜빈 덕분에 캐럴의 아들은 제대로 치료받고 완치됐다. 나쁜 의료 시스템이 한 여성과 아이의 삶을 억누르고 있었던 것이다. 매너리즘에 빠진 사이먼의 작품은 더 이상 팔리지 않는다. 그런데 갑자기 큰 수술을 받게 생겼다. 막대한 의료비를 지불할 능력이 없어서 파산할 지경에 놓인 그는 자신을 쫓아낸 부모를 찾아가 손을 벌릴 수밖에 없다. 멜빈은 출판사 사장을 통해 캐롤의 아들을 치료해주고 캐롤과 함께 차로 사이먼을 고향까지 데려다주기에 이른다. 사이먼은 매우 힘든 상황에 있으면서도 건강한 자아를 가진 캐롤과의 만남, 그리고 그녀와의 자유로운 대화들로 조금씩 치유가 되면서 다시 그림에 대한 열정을 보이고 삶의 의욕을 되찾는다. 강박증이 있고 타인을 배려할 줄 모르던 멜빈은 집이 없어진 사이먼을 자기 집에 머물게 하고, 강아지에게 애정을 줄 줄도 알게 되었고 나아가 캐롤에게는 사랑을 느낀다. 캐롤이 자기의 급성 천식을 앓는 아들 스펜서를 돌보기 위해 브루클린에 있는 자기 집에서 가까운 곳에서 일하기로 했을 때 멜빈의 삶은 변화를 맞는다. 다른 종업원들에 적응할 수 없었던 멜빈은 캐롤이 다시 이곳에서 일하기로 동의하면 아들의 상당한 병원비를 자신이 도와주겠다 한다. 캐롤은 멜빈의 너그러움에 마음이 기울긴 하지만 그래도 그를 의심한다. 사이먼은 폭행 사건을 겪고 재활하는 중 베르델이 멜빈을 더 좋아하고 자신의 뮤즈를 잃어 우울증에 빠진다. 그는 의료보험이 없어서 의료비 청구서 때문에 파산에 이르게 된다. 프랭크는 떨어져 사는 부모님께 볼티모어에 가서 돈을 빌려보라고 한다. 프랭크는 사이먼을 볼티모어까지 데려가기는 바빠서 멜빈이 데리고 가기로 한다. 프랭크는 멜빈에게 900 컨버터블을 타고 다녀오라 빌려준다. 멜빈은 어색함을 덜기 위해서 캐롤에게 같이 가자 초대한다. 캐롤은 마지못해 그 초대를 받아들이고 셋의 관계가 발전한다. 세 사람이 동행한 여행길에서 캐롤은 사이먼에게 예술적 영감을 불러일으키고, 멜빈은 여행에서 돌아온 후 캐롤에게 서툰 몸짓으로 사랑을 고백한다. "당신은 내가 더 나은 남자가 되고 싶도록 하네요." 이런 그의 대사는 이런 변화를 잘 보여주는 명대사였다. 영화 마지막에 가서야 멜빈은 비로소 자신을 꽁꽁 싸매고 있던 껍데기를 벗어던지고 진심을 표현하는 사람으로 변모한다. 캐롤은 캐롤대로 가슴에 뻥 뚫려있던 구멍이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 만남으로서 채워지는 행복감을 맛볼 일만 남았다.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는 사회 고발물이 아니다. 하지만 모든 캐릭터가 미국 의료 체계의 어두운 면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비싼 보험에 가입하지 않으면 인간의 생명에 필수적인 진단과 치료마저 받을 수 없고, 난데없는 사고를 당하면 목숨을 건져도 ‘의료 파산’이 기다리고 있다. ‘이보다 더 나쁠 순 없는’ 의료 시스템의 문제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의대 정원 확대를 둘러싼 갈등을 보며 나는 문득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를 떠올렸다. 물론 한국은 미국과 다르다. 하지만 관객들은 공감할 수 있다. 내 아이가 아픈데 원인을 모르거나 치료받지 못해 발을 구르거나 사고나 범죄의 피해자가 되어 병원 신세를 지게 되는 건 누구에게나 악몽과도 같은 일이기 때문이다. 국민들은 나나 내 아이가 사이먼이나 캐럴, 그 아들 같은 처지가 될까 불안하다. 의대 정원 확대에 국민의 80% 이상이 찬성하는 건 그래서다. 올해 치러지는 2025학년도 입시부터 전국 의과대학 입학 정원이 2000명 늘어난다. 전국 의대 40곳 입학 정원은 3058명에서 5058명으로 65% 증가한다. 교육부는 20일 의과대학 입학 정원을 2000명 늘리고, 경기·인천 지역 대학에 361명(18%)을, 비수도권 대학엔 1639명(82%)을 신규 배정한다고 밝혔다. 서울 지역 의대엔 신규 정원을 배정하지 않았다. 의대 정원 확대가 필수 의료 회복으로 이어지지 않을 수 있다는 설명도 일리가 있어 보인다. 그렇다면 어떻게 현 체제의 한계를 극복할 것인가? 여기서부터 문제가 난삽해진다. 수련의, 전공의, 개업의, 의대, 대학병원 등이 각기 다른 셈법을 굴리고 있는 가운데, 납득할 만한 대안 로드맵 제시는커녕, 그저 ‘일단 정책 철회하라’는 목소리만 울려 퍼지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몇몇 의사들은 미국에서 푸드트럭을 하겠다는 둥, 용접을 배워 이민을 가겠다는 둥, 보는 사람이 더 부끄러운 자기 연민을 공적으로 늘어놓는다. 사람의 목숨을 다루는 것은 숭고하고 힘든 일이다. 그러므로 의사는 용접공을 신세 한탄의 소재로 삼아서는 안 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아픈 용접공의 병상을 지켜야 한다. 고소득 전문직인 의사가 타 직업을 그런 식으로 언급하는 것 자체가 평범한 국민에 대한 조롱으로 들릴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공부 잘하는 학생으로 이루어진 사람들이 왜 이 간단한 이치를 생각하지 못할까.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를 마저 짚어보자. 멜빈의 처지는 여러모로 다르다. 부자고, 독신이며, 심지어 한 다리 건너 의사 친구가 있다. 하지만 잘못된 미국 의료 시스템의 피해자가 아닌 건 아니었다. 멜빈에게 의사는 무신경하게 약만 처방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캐럴을 만나지 못했다면 약물 중독자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다행히 영화는 해피 엔딩으로 끝난다. 잘못된 의료 시스템이 빚어내는 비극 속에서 몹시 삐뚤어진 못된 남자가 공감 능력을 익히며 조금은 괜찮은 사람이 되어간다. 그래서 그는 캐럴에게 말한다. “당신은 내가 더 좋은 남자가 되고 싶게 만들어요.” 믿음으로 사는 우리의 기도가 주님의 은혜로 합력하여 환자를 볼모로 삼은 의사 파업과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인질로 삼은 4월 10일 총선이 좋은 결과를 이루기를 바란다. 성경은 말씀한다.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찌니라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 8:25-28 2024-03-20
    • G.OPINION
    • G.OPINION
    2024-03-20
  • 성경에 잡힌 우주
    “우리 망원경에 잡힌 우주는 누군가에 의해 정교하게 설계된 것처럼 보입니다. 우주는 왜 지금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을까요? 그리고 우리는 왜 존재하게 되었을까요?” 이 질문은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1942∼2018)이 1998년 ‘내 연구실에 들어올 의향이 있는지’ 알아보려고 '시간의 기원’의 저자 토마스 헤르토흐를 만나 던진 것이다. 그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라고 회고했다. 이후 그는 20년 동안 호킹과 함께 연구했다. 호킹은 사망 직전 다중우주 관련 논문도 저자와 함께 썼다. 벨기에 루뱅가톨릭대 이론물리학과 교수인 저자가 호킹과의 공동 연구를 소개하는 '시간의 기원’은 교양과학서이다. 문제는 이렇다. 우주배경복사(우주에 퍼져 있는 우주 탄생 초기의 빛)는 주변 영역과 온도 차가 10만분의 1도밖에 안 된다. 온도 차가 1만분의 1도였다면 우주는 블랙홀 세상이 됐을 것이고, 100만분의 1도였다면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간만 있을 것이다. 우연의 일치라기엔 너무나 ‘생명 친화적인 우주’다. 우주의 인플레이션(팽창) 속도, 공간이 3차원이라는 것, 중성자와 양성자의 질량 비율, 강한 핵력과 전자기력의 강도 비율, 암흑 에너지의 밀도… 이처럼 우주의 각종 변수가 생명체에 유리한 쪽으로 맞춰진 이유를 설명하려는 것을 ‘미세 조정(fine-tuning) 문제’라고 한다. 한 가지 설명은 이런 것이다. 방대한 공간에 수많은 우주가 존재하는데, 우주마다 물리법칙이 다르다. 우리의 우주가 생명 친화적인 이유는 우리가 그런 우주에서 생겨났기 때문이다. 생명 친화적이지 않은 다른 수많은 우주에는 우주를 고민할 생명체가 없다. 지적 생명체의 존재가 우주를 설명한다는 이른바 ‘인류 원리(anthropic principle)’다. 1973년 처음 제기됐다. 단순하지만 강력한 이 주장은 검증과 예측이 불가능하다. 과학의 영역인지 애매하다는 말이다. 신학의 성역이기 때문이다. 취재를 하기 위해 렌즈를 깨끗이 닦아 가방에 넣고 전철을 탔는데 맞은편 자리에 앉아 있는 노부부의 풍경이 예사롭지가 않다. 키가 아주 큰 남편이 고개를 깊이 숙이고 키가 아주 작은 아내의 말을 열심히 귀 기울여 들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초등학교 일 학년 학생 같다. 그렇다, 부부란 키를 맞추는 것이다. 키를 맞추듯 생각도 맞추고 꿈도 맞추고 목적지도 맞추는 것이다. 그렇게 살다가 내릴 역에 다다르면 눈빛으로 신호를 보내 말없이 함께 내리는 것이다. 기업들은 자신들의 제품, 브랜드로 고객에게 어떤 경험을 선사할 것인지 고민한다. 우리 목사들도 이 고민을 해야 하지 않을까. 나는 목회를 충분히 경험하고 있나. 월급 외에 사역 속에 들어 있는 주님이 명하신 소중한 목회를 충분히 다 체험하고 있나. 곧 이승만 대통령이 1948년 8월 15일 믿음으로 건국한 대한민국 민주주의 분수령이 될 22대 국회의원 선거다. 선거가 끝나면 300명의 의원이 새로 뽑힐 것이다. 세상은 그들을 리더, 지도자라 부르지만 지난 세월 국회의원들의 행태를 보면 그들이 과연 리더인지 개탄스럽다. 생산적인 가치는커녕 걱정과 분노를 더 많이 유발하지 않았나. 그들은 왜 국회의원이 되려는지, 국회의원이 되어 어떻게 쓰이고 싶고 어떤 가치를 생산하고 싶은지 한 번이라도 자문해 본 적이 있을까. 우리나라 정치가 여전히 삼류, 사류인 이유 하나는 그들이 이런 본질과 마주하는 대신 오로지 허영의 시장에 정신이 팔려서가 아닐까. 각 당의 후보들은 지금이라도 ‘어떻게 세비 값을 할 것인지’ 고민해야 할 것이다. 휴대폰 렌즈에 잡힌 총회의 목사와 장로도 유권자이기에 2024년 4월 10일 믿음의 눈 밝게 뜨고 조금이나마 그 일에 진심인 사람을 골라 투표해야겠다. 과학자가 주장하는 우주배경복사(우주에 퍼져 있는 우주 탄생 초기의 빛)에 대해 성경은 말씀한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창 1:1-5 2024-03-18
    • G.OPINION
    • G.OPINION
    2024-03-18

실시간 G.OPINION 기사

  • 배광식 "범죄의 재구성" 2
    위대한 인간은 악당과 싸우고 저열한 인간은 악당에게 아부한다. 히틀러를 대하는 태도에서 처칠과 체임벌린의 "급"이 갈렸다. 106회 총회장 배광식은 총회 역사의 처칠이었을까, 체임벌린이었을까, 아니면 국민의 힘 김기현 장로가 대적하는 이재명이었을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능규 목사가 들려주는 녹취록에서 들리는 배광식의 목소리는 화자에게 아부하는 소리로 넘쳤다. 2022년 8월 18일 순천노회 모임에서 참람하게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불의한 자들의 허물을 덮는 "은혜로운 동행"의 빌어먹을 기개는 온데간데 없었다. 거짓말에도 색깔이 있다. 거짓은 부패보다 위험하고 성경이 금하는 것이다. 살다 보면 하얀 거짓말(white lie)처럼 선의로 할 때도 있고 천진한 아이들이 하는 노란 거짓말, 허세에서 나오는 파란 거짓말도 있다. 가장 경악할 일은 표정 하나 안 바꾸고 하는 새빨간 거짓말이다. 작금에는 입만 열면 거짓말을 해대는 한국형 후흑(厚黑 사전적인 의미로는 관리의 파렴치한 작태, 즉 아첨을 일컫고, 윗사람을 속이며 아랫사람을 업신여기는 태도)들이 크게 성업 중이다. 그중 이재명, 문재인, 소강석, 배광식 등이 압권이다. 그러나 앞으로 그들이 받게 될 최고 벌은 그 어떤 말을 해도 아무도 믿어주지 않을 거라는 점이다. 2022년 9월 21일 제107회 총회장 이취임식에서 행한 배광식 이임사에 담긴 거짓은 최악의 프레임이다. 선진국에서 공인의 그런 거짓말은 반드시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되어 있다. 우리 총회도 그렇게 되어야 할 것이다. 미국의 시인이자 사상가인 랠프 월도 에머슨(Ralph Waldo Emerson, 1803년 5월 25일 ∼ 1882년 4월 27일)은 말했다. “정직은 가장 확실한 자본이다.” 더 나아가 성경은 거짓 증언을 십계명 계율로 금하고 있다. 제9계명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 하지 말지니라 출 20:16 주님은 배광식과 이재명 같은 자들을 친히 정죄하셨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 내가 진리를 말하매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아니하느냐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 하였음이로다 요한복음 8:44-47 2022-10-17
    • G.OPINION
    • G.OPINION
    2022-10-17
  • 돌이킬 수 없는 총대들
    ‘둠스데이(최후의 날)’라는 별명을 가진 핵 어뢰를 장착한 러시아 최첨단 스텔스 핵잠수함 ‘벨고로드(Belgorod)’가 러시아 백해 기지에서 돌연 자취를 감췄다고 2022년 10월 3일(현지 시간) 미국 폭스뉴스, 이스라엘 내셔널뉴스 등이 보도했다. 전문가들은 벨고로드의 핵 어뢰가 항공모함뿐만 아니라 해안 도시 전체를 날려버릴 위력을 가졌다고 분석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수세에 몰린 러시아가 미국과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ㆍNATO)를 향해 핵 무력시위에 나설 가능성이 제기되면서 세계가 긴장하고 있다. 문재인이 굽신거리던 북한이 2022년 10월 4일 발사한 중거리 탄도미사일(IRBM)이 일본 상공을 지나 태평양에 떨어졌다. 북한이 일본 상공을 통과하는 탄도미사일을 쏜 것은 2017년 9월 이후 5년 만에 처음이다. 일본은 홋카이도와 아오모리 지역에 한때 피난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김승겸 합참의장은 북한의 탄도미사일 발사 직후 한미 간 공조 회의를 통해 상황을 긴밀히 공유하고 “북한의 어떠한 위협과 도발에도 연합방위태세를 더욱 굳건히 할 것”을 확인했다고 합참이 전했다. 북한이 올해 들어 30차례 넘게 미사일 도발을 감행한 가운데 4일 문제의 당사자는 문제를 삼지 않고 문재인은 딴 나라에 사는 자처럼 “남북한 모두 더이상 상황을 악화시키는 것을 멈추고 대화 모색에 나설 것을 촉구한다”라고 했다고 한다. 참으로 이재명처럼 낯 두꺼운 자다. 유럽연합(EU) 대외관계청 대변인은 10월 3일(현지시각) 성명에서 “북한은 미사일 발사를 멈추고 핵실험을 삼가며 미국과 한국, 그리고 다른 국제사회 구성원들이 표명한 대화 제의에 건설적으로 응해야 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뚱보 김정은은 이판사판이니 삶은 소 대가리 같은 자들의 말을 들을 리 없지만 다행스러운 것은 그럴만한 위인이 못 된다는 것이다. 그처럼 돌이킬 수 없는 목사 칠십 정년제를 반대하는 이순우 같은 교단 총대들이 후회하지 않는 비결은 단 하나, 지금 바로 그들이 북한처럼 신앙적이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다. 14세기 중세 영국의 프란치스코회 탁발수도사, 신학자인 오캄의 윌리엄(William of Occam 1287년경 - 1347년 4월 10일)은 체계적 사색가라기보다는 정치적 성향이 강한 수도사였다. 중세 시대에 성씨는 귀족들이나 가질 시기라 이름은 윌리엄이고 오컴은 성이 아니라 고향 마을의 지명이다. 윌리엄이 죽은 후로도 윌리엄의 방법론은 엄청난 파급력을 가져온다. 마르틴 루터만 해도 윌리엄의 열렬한 추종자라 그를 나의 스승(Magister Meum)이라 부를 정도. 새로운 길은 기존 학문 질서에 대항하여 새로운 학파가 개설되었고 당연히 종교개혁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종교개혁자들은 신학적 방법으로 모두 윌리엄의 새로운 길, 노선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다만 마르틴 루터는 신학적으로는 윌리엄을 비롯한 새로운 길 학자들과 1510년 중반에 완전히 결별했다. 루터의 신학 이신칭의는 기존의 아퀴나스 학문과 오컴주의를 모두 비판하며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으로 돌아간 것이다. "실체를 필요 이상으로 복잡화하여서는 아니 된다"라는 명제는 그의 이름을 따서 '오컴의 면도날'이라 일컬어진다. 오컴의 면도날(Occam's Razor 또는 Ockham's Razor)은 흔히 '경제성의 원리' (Principle of economy), 검약의 원리(lex parsimoniae), 또는 단순성의 원리라고도 한다. 유명한 두 명제는 다음과 같다. "많은 것들을 필요 없이 가정해서는 안 된다." "더 적은 수의 논리로 설명이 가능한 경우 많은 수의 논리를 세우지 말라." 간단하게 오컴의 면도날을 설명하자면 어떤 현상을 설명할 때 불필요한 가정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좀 더 쉬운 말로 번역하자면 '같은 현상을 설명하는 두 개의 주장이 있다면 간단한 쪽을 선택하라(given two equally accurate theories, choose the one that is less complex)'라는 뜻이다. 여기서 면도날은 필요하지 않은 가설을 잘라내 버린다는 비유로, 필연성 없는 개념을 배제하려 한 "사고 절약의 원리"(Principle of Parsimony)라고도 불리는 이 명제는 현대에도 과학 이론을 구성하는 기본적 지침으로 지지받고 있다. 예컨대 새까맣게 그을린 나무가 있다고 가정하자. 이는 나무가 벼락에 맞았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누군가가 어떤 장치를 이용해서 나무가 완전히 잿더미로 변하지 않도록 적절히 그을린 다음 자신이 그을렸다는 흔적을 완전히 없앤 것일 수도 있다. 이 상황을 판단할 다른 증거가 없는 경우 오컴의 면도날을 적용해 본다면 나무가 그을린 것은 벼락에 맞았기 때문이라고 추론하는 것이 옳다. 왜냐하면 나무가 벼락에 맞아서 그을린 것이라고 설명하는 것이 더 적은 수의 가정을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중세의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의 복잡하고 광범위한 논쟁 속에서 오컴은 1324년의 어느 날 무의미한 진술들을 토론에서 배제 시켜야겠다고 결심한다. 그는 지나친 논리 비약이나 불필요한 전제를 진술에서 잘라내는 면도날을 토론에 도입하자고 제안했다. 오컴은 "쓸데없는 다수를 가정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이를 좀 더 알아듣기 쉽게 바꾸면 "무언가를 다양한 방법으로 설명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중에서 가장 적은 수의 가정을 사용하여 설명해야 한다"고 표현할 수 있다. 더 짧게 말하면 설명은 간단할수록 좋다. 오컴의 면도날은 다음과 같이 일종의 계율처럼 말해지기도 한다. "가정은 가능한 적어야 하며 피할 수만 있다면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한다." 적은 가정(假定)으로도 충분하다면 불필요하게 많은 가정은 사유의 면도날로 다 잘라내 버려야 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단순성 내지 간결함의 원리는 오늘날 미니멀리즘의 사조나 이른바 단색화의 미학으로도 우리 주위에 알게 모르게 밀착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심각하다고 할 '정치의 사법화' 현상이 최근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며 검찰과 법원의 독립과 중립성을 근저에서 뒤흔들고 있다. 정치적 분란을 사법부로 가져가는 문제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지만, 양당 구도가 고착화하고 법조인들의 정치권 진입이 늘어나면서 온갖 고소·고발과 가처분의 싸움터로 격화하고 있는 것이다. 정치적으로 정의를 수단화하고 거래하여 법적 정의를 무력화시키는 일들이 서슴없이 도모되고 있는 징후이다. 얼굴의 피부를 상하게 하지 않고 수염을 깔끔히 깎아내려면 면도날이 예리하면 예리할수록 좋을 것이다. 그렇지만 언제든 날카로운 칼날에 자상을 입을 위험성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불의의 치명상을 초래할 수도 있다. 지난 정권 말 쫓기듯이 통과시킨 소위 "검수완박" 입법의 경우와 같이 법이면 다 된다는 도그마로 칼을 휘두르거나 타협과 조정의 정도를 저버리고 사법을 마치 용병처럼 부리려고 한다면 스스로의 존재 이유도 부정될 따름이다. 법은 어디까지나 최후의 수단일지언정 최선의 수단일 수는 없다. 대철학자 칸트가 면도날의 위험성을 경고하며 남긴 말을 오늘의 우리도 음미할 필요가 있다. "실체의 다양성은 섣불리 깎아내려서는 아니 된다." 윌리엄은 신앙 주의자였다. 그는 “오로지 신앙을 통해서만 신학적 진리에 접근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논리나 합리성이 밝혀낼 수 있는 어떠한 법칙도 필요 없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 안에 구원의 길을 마련하셨다. 그러니 하느님의 그 길은 이성에는 열려 있지 않다”라고 말했다. 윌리엄은 학문은 발견의 문제이지만 신은 유일한 존재론적 필연성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윌리엄 본인이 형식화한 오리지널 오컴의 면도날은 다음과 같다. “스스로 증거되거나 경험으로 알려졌거나 신성한 경전의 권위로써 증명되지 않은 한 그 무엇도 이유가 주어지지 않으면 사실로 상정될 수 없다.” 윌리엄에게 있어 유일하게 진실로 필연적인 존재자는 기독교의 신, 하나님 한 분뿐이었고 그 밖에 다른 모든 것은 우발적인 것이었다. 윌리엄이 충족이유의 원리를 수용하지 않은 것, 본질과 실존의 구분을 거부한 것, 토마스주의를 반대한 것이 모두 그런 이유에서였다. 윌리엄의 존재론적 검약성은 인간의 이성이 영혼의 불멸,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다는 회의주의로 이어진다. 그러나 윌리엄의 결론은 그런 것들을 가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무신론이 아니라 그런 것들은 오로지 계시에 의해서만 가르침 받을 수 있는 신앙의 영역이라서 이성이 범접할 수 없다는 신앙 주의였다. 윌리엄이 죽은 후로도 윌리엄의 방법론은 엄청난 파급력을 가져온다. 마르틴 루터만 해도 윌리엄의 열렬한 추종자라 그를 나의 스승(Magister Meum)이라 부를 정도. 새로운 길은 기존 학문 질서에 대항하여 새로운 학파를 개설되었고 당연히 종교개혁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종교개혁자들은 신학적 방법으로 모두 윌리엄의 새로운 길 노선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다만 마르틴 루터는 신학적으로는 윌리엄을 비롯한 새로운 길 학자들과 1510년 중반에 완전히 결별했다. 루터의 신학 이신칭의는 오정호 목사가 좋아할 마태복음 7:21-23 KRV 것 같은 기존의 아퀴나스 학문과 오컴주의를 모두 비판하며 아우구스티누스의 신학으로 돌아간 것이다. 성경은 말씀한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치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 7:21-23 2022-10-04
    • G.OPINION
    • G.OPINION
    2022-10-04
  • 배광식 동행 누구
    1952년 25세에 국왕에 즉위한 엘리자베스 여왕은 70년이라는 영국 최장 재위 기록을 세우고 96세에 영원히 잠들었다. 진단서에는 여왕이 2022년 9월 8일 오후 3시 10분 숨졌다고 나와 있다. 영국 왕실이 서거를 발표하기 3시간 20분 전이다. 엘리자베스 여왕은 세상을 떠나기 이틀 전 보리스 존슨 전 총리와 그의 뒤를 이을 리즈 트러스 총리를 만났다. 이날 트러스 총리와 찍은 사진 속에서 엘리자베스 여왕의 손등은 보라색으로 멍들어 있었다. 지난 70년 동안 영국과 영욕을 함께했던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의 주검을 실은 관이 9월 19일(현지시각) 오전 장례식이 열리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으로 들어섰다. 여왕의 뒤로 국왕 찰스 3세, 왕비 커밀라, 앤 공주 등 왕실 가족의 모습이 보였다. 여왕은 이곳에서 결혼했고 여왕으로 즉위했으며 세상과 작별을 고하게 됐다. 여왕의 관은 이날 저녁 윈저성 안의 세인트 조지 예배당 지하 영묘에 먼저 잠든 남편 필립 공 옆에 놓였다. 런던에는 교회 종소리가 96차례 울려 퍼졌다. 여왕의 생애를 상징하는 종소리는 장례 시작 시각인 오전 11시가 되기 96분 전부터 매분 울려 도시를 가득 채웠다. 오전 11시. 세계 200여 개국이 지켜보는 가운데 웨스트민스터 사원에서 여왕의 장례식이 시작됐다. 찰스 3세 국왕을 비롯한 왕실 일가가 사원 안으로 아주 천천히 들어서는 여왕의 관 뒤를 따랐다. 1947년 ‘젊은 여왕’은 이곳에서 남편 필립 공과 결혼했고 1953년 대관식을 치렀다. 여왕을 마주한 조문객들은 모두 일어나 첫 번째 찬송 ‘주님, 주님께서 주신 날이 끝났습니다’를 함께 불렀다. 왕비 커밀라는 눈물을 훔쳤다.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데이비드 호일 사제가 장례를 집전했다. 저스틴 웰비 캔터베리 대주교는 설교에서 2020년 코로나19 확산 당시 여왕이 전한 “우리는 승리할 것”이다, “우리는 다시 만날 것이다”라는 대국민 메시지를 다시 전했다. 6일 취임한 리즈 트러스 총리가 성경을 읽었다. 이날 장례에선 75년 전 여왕이 필립 공과 결혼식에서 부른 찬송가가 다시 불렸다. 이날 장례식에는 한·미 정상 등 전 세계에서 모인 500여 명의 정상급 인사가 참여했다. 영국 언론들은 장례식이 열린 사원 주변에 100만여 명에 이르는 인파가 모였다고 전했다. 여왕이 얼마나 존경스러웠으면 온 세계와 온 국민이 이토록 큰 애도를 표했을까. 우리 모두는 각자의 방식으로 역경을 딛고 살아간다. 그 끝에는 한 줄기 희망이 있다. “삶은 살아볼 만한 것이다. 주님의 사랑이 우리 모두를 기억해주신다”는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엘리자베스 여왕과 달리 거짓의 아비가 마귀인지 모르는 것 같은 이재명은 9월 30일 당 최고위원회의에서 윤석열 대통령의 ‘비속어 논란’에 대해 “국민도 귀가 있다”라며 “잘못했다고 해야 한다”고 얼굴 한번 붉히지 않고 말했다고 한다. 민주당이 박진 외교부 장관에 대한 해임 건의안을 처리한 데 대해 정부·여당이 반발했다. 그러자 여러 엄청난 거짓말 의혹으로 수사를 받고 기소된 것도 있는 이재명이 직접 나서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러울 게 없어 양심적인 국민과 광야의 소리 전광훈 목사의 신뢰와 지지를 받는 윤석렬 대통령을 비판한 것일까. 그것도 사실이 아니고 광우병 파동처럼 조작에 의한 것임이 밝혀지고 있음에도... 이재명은 이날 자신이 장악한 정당 회의에서 “국민도 귀가 있고 국민도 판단할 지성을 갖고 있다”라며 “거짓말하고 겁박한다고 해서 생각이 바뀌거나 또는 들었던 사실이 없어지지 않는다”고 문재인처럼 뻔뻔하게 말했다. 이어 “지금 들어도 (윤 대통령이 한 논란의 발언은) ‘바이든’이 맞지 않습니까, (이새끼라고) 욕했지 않습니까”라며 “적절하지 않은 말을 했지 않습니까, (그러면) 잘못했다고 해야지요(자기는 하지 않으면서)”라고 말했다. 적반하장의 이재명은 “진상 규명의 첫 번째 길은 ‘내가 뭐라고 말했으니 그것과 다르다’ 이렇게 말을 해야 되는 것 아니냐”면서 “본인이 한 말을 기억하지 못하면 다른 사람이 한 말이 맞는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나는 기억 못하겠는데 틀릴 가능성이 있다는 게 이게 대체 상식에 부합하는 말인가 의문이 간다”라면서 “국민을 존중하기 바란다”라고 했다. 윤 대통령이 뉴욕 순방 때 한 언급이 정확히 무엇인지부터 밝히고 해명하라고 요구한 것이다. 실상 말이 그 사람을 규정할 때 그는 어떤 인물인가. 그는 자신에 대한 수사기관과 언론에 대해 말했다. “먼지 털어도 안 나오니 꼬투리 잡는다.” 자신을 잡으려고 온갖 혐의를 뒤졌지만 허탕을 쳤다는 뜻이다. 수사 대상에 오른 이재명 의혹은 열 손가락으로 꼽아야 할 정도다. 그것이 잔꾀를 모르는 윤석열 정부가 이재명을 어떻게든 엮어 보려고 몸부림친 결과물일까. 이재명 의혹은 작년 여름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 때부터 불거졌다. 2021년 8월 29일 이낙연 캠프 일요 기자 간담회가 신호탄이었다. 캠프 관계자는 “이재명 후보의 형 강제 입원, 아내 김혜경 씨의 ‘혜경궁 김 씨’ 법정 다툼에 이름을 올린 변호사 30여 명의 수임료가 수십억일 텐데 이 대표 재산은 변동이 없다”라고 했다. 누군가 대신 내준 게 아니냐는 뜻이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17년형을 선고받은 핵심 혐의가 변호사비 대납이었음을 상기시키기도 했다. 이재명은 자신의 돈으로 변호사비 3억 원을 부담했다고 해명했다. 그러자 친문(親文) 시민 단체는 이 대표가 검찰 출신 변호사 한 명에게 준 것만도 현금과 주식 20억 원이 넘는다고 폭로했다. 대장동 특혜 의혹이 곧장 뒤를 이었다. 경기도 지역 신문은 8월 31일 자에 “이재명 후보님, 화천대유는 누구 것입니까”라는 칼럼을 게재했다. 과거 민주당이 영리하지만 소심한 이명박에게 “다스는 누구 것이냐”고 추궁했던 것을 패러디한 것이다. 대장동 사업으로 천문학적 수익을 올린 화천대유가 이재명 후보 당신 것 아니냐는 질문이다. 칼럼 필자는 민주당 경선에서 이재명 후보와 경쟁했던 핵심 후보 진영에서 제보해온 내용이라고 밝혔다. 이재명에 대한 대법원 무죄 판결을 이끌어 낸 권순일 대법관이 퇴임 후 화천대유 고문으로 영입된 사실은 2021년 9월 16일 보도됐다. 화천대유 대주주 김만배 씨가 판결 전후로 권 대법관 사무실을 8차례 방문한 사실도 확인됐다. 화천대유 고액 연봉을 사후 뇌물로 재판 거래가 이뤄졌다는 의혹이다. 9월 30일엔 ‘대장동 말고 백현동도 있다’라는 보도가 나왔다. 대장동과 마찬가지로 이재명 성남시장 때 백현동 사업으로 3천억 원대 특혜 수익이 발생했다는 내용이다. 성남시장 선거 때 선대본부장 지낸 사람이 개발 업체로 영입되자 성남시가 부지 용도를 변경해 준 덕분이었다. 이재명 성남시장이 구단주였던 성남FC 축구팀이 성남시 소재 기업 여섯 곳에서 후원금 160억 원을 받고 성남시는 해당 기업에 건축 인허가나 토지 용도변경 등의 편의를 봐줬다는 의혹도 있다. 이 의혹은 당초 2018년 장영하 변호사가 이재명 시장을 특가법 뇌물죄 혐의로 성남지청에 고발했던 것인데 대선 국면에서 다시 쟁점이 됐다. 민주당 출신인 장 변호사는 한때 이재명 변호사와 동지 관계였으나 2010년 성남시장 선거를 계기로 원수 사이로 바뀌었다. 지난 대선을 앞두고는 이 대표를 저격한 ‘굿바이, 이재명’을 발간했다. 모두 문재인 정부 임기에 터져 나온 의혹이다. 윤석열 정부 들어서는 한 건도 없었다. 의혹을 제기한 주체도 윤 정부 쪽 사람들이 아니다. 민주당 경쟁 후보 진영 또는 이 대표와 일했던 사람들이 직접 폭로했거나 언론에 제보했다. 문 정부 사람들은 차기 주자 이 대표를 보호하려고 의혹을 덮고 진상 규명을 막았다. 변호사비 대납 의혹의 열쇠를 쥔 쌍방울그룹 관계자가 검찰 귀띔을 받고 해외로 도피하기도 했다. 윤석열 정부 검찰 라인은 문 정부 때 한직으로 쫓겨났다가 복귀해 막 수사를 시작하는 참이다. 그런데 이 대표는 오랫동안 먼지 털듯 수사했는데도 아무 진척이 없는 것처럼 분위기를 몰아간다. 수사를 종결하라는 압박이다. “대장동 몸통은 윤석열”이라며 제집 쓰레기를 남의 집 앞마당에 던졌던 이재명식 방탄(防彈) 화법의 변주곡이다. 2022년 9월 21일 제107회 총화장 이취임식에서 제106회 총회장 배광식도 이재명처럼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러울 게 없다는 내용의 이임사를 뇌까렸다. 배광식 역시 이재명처럼 마귀가 거짓의 아비라는 성경 말씀을 믿지 않거나 모르는 모양이다. 차마 그 이임사 녹취를 풀지 않는 것은 구역질이 나기 때문이다. 퇴직한 불의한 직원을 계약직으로 고용해 국장대행직을 주고 뭐가 그리 급해 그를 앞세워 대치동 총무 관사도 팔아먹고 총회회관 리모델링도 주관하게 하고 제주도 수양관 부지를 왜 서둘러 매각하려 했는지 조사하면 어찌 될까. 그 교회 장로 김기현 의원이 규탄하는 문재인과 이재명 짝 나지 않을까 싶다. 성경은 말씀한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잡겠느냐 내가 진리를 말하매 어찌하여 나를 믿지 아니하느냐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 하였음이로다 요 8:44-47 2022-09-30
    • G.OPINION
    • G.OPINION
    2022-09-30
  • 총회 불꽃 권순웅의 위엄
    오르막과 내리막을 구분하는 판단력은 개인은 물론이고 총회나 국가의 성쇠(盛衰)를 좌우한다. 눈을 감아도 틀리지 않을 것 같은 오르막과 내리막에 대한 판단은 생각만큼 쉽지 않다. 제106회 총회에서 배광식의 행태나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푸틴의 처지를 보면 분명하다. 배광식처럼 '은혜로운 동행' 어쩌구 하면서 배임 혐의의 일을 저지르거나 푸틴처럼 허울은 '특수 군사 작전'이라면서 이기기 힘든 전쟁을 일으켜선 안 된다. 배광식은 총회 돈을 자기 주머니 돈인양 챙기기도 하고 여기저기 마음대로 쓰고 다녔다고 한다. 총회 재산 현황을 정확하게 판단하고 전횡과 배임 혐의에 대한 책임을 반드시 물어야 할 것이다. 배광식은 울산 큰바위 밑이나 위에서 기도를 제대로 해야 할 것이다. 전황(戰況)이 불리한 전쟁을 질질 끌어선 안 되는데 푸틴의 거듭된 판단 착오는 러시아의 운명을 바꾸고 나아가 유럽과 세계의 판도를 다시 그려야 할지 모를 사태에 이르렀다. 국가와 총회는 왜 오르막 내리막에 대한 판단을 그르쳐 자신을 수렁으로 밀어 넣을까. 한 장로가 산다는 제주에는 경사(傾斜)길 아래 세워둔 자동차가 저절로 언덕을 기어오른다는 ‘도깨비 도로’가 있다. 측량 결과 오르막으로 보이는 쪽이 실제론 경사 3도 정도의 내리막으로 나타났다. 주변 지형 때문에 내리막이 오르막으로 뒤집혀 보이는 착시(錯視) 현상이란 것이다. 국가 역량(力量)이나 총회 상황은 도깨비 도로와 달리 오르막과 내리막을 판단하기 어렵다. 국제 정세나 국내와 총회 정치 수준을 재는 측정 수단이 없기 때문이다. 국가는 경제 상황·교육의 질(質)·노동 효율을 진단하는 수단인 통계가 있고 총회도 나름 교회와 교인 수를 가늠하는 빈약한 자료가 있긴 하나 불완전하다. 국가 상황판의 모든 등(燈)이 온통 빨간불이거나 파란불 일색(一色)인 경우는 드물다. 낭떠러지에 선 나라 상황판에도 파란 등 몇 개는 불이 들어오고 기세(氣勢) 좋게 달리는 나라 상황판에도 빨간불이 섞여 있기 마련이다. 상황판은 과거의 성공 경험과 지나간 실패에서 얻은 교훈을 토대로 읽을 수밖에 없고 총회는 오직 성경의 가르침과 믿음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그것이 각계 지도자의 몫이다. 그런데 배광식과 푸틴은 그러지 않았다. ‘엘리트 없는 사회’ ‘모두가 엘리트인 사회’라고 하거나 '믿음이 없는 총회' '모두가 믿음이 없는 총회'라는 역설은 모든 분야의 지도자 책임이 더 무거워졌다는 하나님의 경고다. 한국과 우리 총회는 오르막을 오르고 있을까, 내리막을 구르고 있을까. 파란불이 많다며 등을 두드리고 용기를 북돋는 소리가 있다. 그런가 하면 빨간 등의 크기가 훨씬 크다며 낙담(落膽)하며 불안해하는 목소리도 과거 어느 때보다 커졌다. 정반대의 두 이야기를 합쳐야 상승(上昇)하면서 추락(墜落)하는 한국과 우리 총회의 모순된 현실이 온전히 드러날 것이다. 희망과 불안의 엇갈린 진단에서 공통된 부분은 추락하는 것의 대표가 정치라는 점이다. 정치는 그 사회가 당면한 여러 문제의 해결책을 찾는 능력이다. 한국의 근본 위기는 문제 해결책을 찾는 능력의 저하(低下)다. 상승하는 힘이 추락하는 힘을 이기고 위기에서 탈출할 것인가 아니면 추락하는 힘이 상승하는 힘을 꺾어 함께 주저앉느냐가 문제다. 다행히 우리는 배광식의 '은혜로운 동행'이 아니라 총회를 살리고 밝힐 불꽃 권순웅 총회장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샬롬 부흥'이 있다. 배광식처럼 허울뿐인 '은혜로운 동행'으로 돈을 탐하는 목사나 장로를 위하는 것이 아닌... 민주 정치에서 선거는 어느 쪽이 민의(民意)인가를 매듭짓는 수단이다. 패자의 승복(承服)으로 선거 결과가 확정된 토대 위에서 승자의 관용(寬容) 범위를 논의하는 순서를 밟는다. 한국 정치에서 선거는 매듭짓는 역할을 상실했다. 실정법 위반으로 여러 수사를 받는 이재명 씨는 대선 패배 후 뻔뻔하게 국회의원이란 방탄복을 입고 이번에는 후안무치의 제1야당 대표 자리에 올라 주위를 모래성 같은 방탄벽으로 둘러쌌다. 피의자 신분으로 거듭 대통령과 양자 영수회담을 제안하는 것도 그 연장선에 있다. 국회의사당 난입 사건 관련으로 수사를 받는 트럼프가 바이든 대통령에게 회담을 제안하는 거나 다름이 없다. 관용이 법치(法治)의 울타리를 넘을 수는 없다. 그건 대통령 권한 밖이다. 문재인 정부의 원전 폐쇄 정책이 얼마나 어리석은 집착(執着)이었는지는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더욱 분명해졌다. 그러나 그 자체로는 범죄가 아니다. 원전 폐쇄를 위해 통계를 조작한 것이 범죄다. 맨돈 소강석이 내려보며 악수를 나눈 문재인은 한일 관계를 완전히 망가뜨리고 나서 대통령이랍시고 남은 임기 내내 일본과 정상회담에 목을 맸다. 그로 해서 양국 역사 문제가 한국이 칼날을 잡고 일본이 거꾸로 칼자루를 쥐는 오늘의 사태를 만들었다. 그래도 그건 범죄는 아니다. 문재인 정부는 중립적 인사를 임명해야 할 중앙선관위·방송통신위와 그 심사위원회의 장(長)에 가장 파당적(派黨的)인 사람을 골라 꽂았다. 그들 대부분이 임기 보장을 방패로 물러나지 않겠다고 버티고 있다. KBS, MBC 등 통칭 공영방송도 그중 하나다. 그 진지(陣地)마다 전 정권 깃발이 펄럭이고 있다. 윤석열 정부가 포위된 꼴이다. KBS 이사회의 야당 측 인사를 쫓아내기 위해 김밥값을 감사하고 집은 물론 강의하는 대학까지 쫓아가 꽹과리를 울렸던 그들이다. 정권에게 최상의 선택은 위엄(威嚴)이 있으면서도 사랑받는 것이다. 하나를 선택하라면 위엄을 골라야 한다. 위엄을 잃으면 모든 것을 잃는다. 총회장 권순웅은 107년 역사 총회의 오르막과 내리막이 갈리는 지금 왜 번번이 총회장들이 위엄을 잃고 있는가를 엄중하게 돌아봐야 한다. 반성과 개혁에 예외(例外)를 둬선 안 된다. 성경은 말씀한다. 내 아들아 내 말에 주의하며 나의 이르는 것에 네 귀를 기울이라 그것을 네 눈에서 떠나게 말며 네 마음속에 지키라 그것은 얻는 자에게 생명이 되며 그 온 육체의 건강이 됨이니라 잠 4:20-22 2022-09-24
    • G.OPINION
    • G.OPINION
    2022-09-24
  • 김종희 칼럼_ 정년문제 처리에 대한 아쉬움
    해마다 총회 때면 정년 문제가 뜨거운 감자가 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헌법대로 만 70세 정년을 주장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현실은 꼭 정년만을 고집할 수 없는 피치못할 여러 사정이 있을 수 있다. 좀 더 대우(?)를 받으며 조기 은퇴하는 경우는 여유 있는 교회일 것이다. 그러나 평생 목회한 목사에게 대우는커녕 보금자리 하나 마련해 줄 수 없는 은퇴가 걱정인 교회가 더 많다. 그러므로 우리 교단은 정년 문제에 대하여 형편이나 경우에 따라서 일을 이리저리 잘 처리하는 능력이 요구된다. 헌법도 살리면서 지 교회 사정도 고려해 주는 신축성이 필요하다고 사료 된다. 제107회 총회 석상에서 한 필자의 동의는 성사되지 못했지만 아래와 같은 필자의 견해를 피력해 보고자 한다. Ⅰ. 정년연장은 헌법 정신에 배치되는 주장인가. ① 정치 제4장 제4조 1항 위임목사는 “한 지 교회나 1구역(4지 교회까지 좋으나 그 중 조직된 교회가 하나 이상 됨을 요함)의 청빙으로 노회의 위임을 받은 목사이니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그 담임한 교회를 만 70세까지 시무한다.”라고 되어 있다.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이란 단서가 붙어 있다.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만 70세까지 시무하지만 특별한 이유가 있으면 시무 연령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만 70세 정년 이전에 사망을 하거나 병고로 더 이상 목회가 불가능한 특별한 사유가 있을 때는 정년 이전에도 물러날 수 있다. 그러나 물러날 사정이 없을 때는 만 70세까지만 시무하고 그만두어야 한다. 라고 해석한다. ② 물론 전항과 같은 해석이 합리적이다. 그러나 특별한 사정이란 꼭 만 70세 이전에만 있으라는 법은 없다. 은퇴할 시점에 가서 특별한 이유가 있을 수 있다. 특별한 이유가 있으면 은퇴 시점이 좀 달라질 수 있다고 해석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가정하여 원래 법이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만 60세까지 한다였는데 만 70세로 연장한 법이라면 만 70세가 되어 특별한 이유가 있다고 더 한다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그러나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종신까지 할 수 있는 것을 만 70세로 줄여 놓은 것이니까 특별한 이유가 있으면 조금 더 할 수 있다는 논리가 억지는 아니다. 목사와 교회 간 합의만 되면 다소 정년연장이 가능하다고 본다. ③ “근로자가 정년이 지난 후에도 사용자의 동의 아래 기간의 정함이 없이 사용자와의 근로관계를 계속 유지하여 왔다면 사용자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단순히 당해 근로자가 정년이 지났다거나 고령이라는 이유만으로 근로관계를 해지할 수는 없다.”라는 판례가 있다(대법원 2002두12809). 물론 목사와 교회의 관계가 근로관계는 아니더라도 목사와 교회도 대한민국 국민으로 참고할 판례임에는 틀림이 없다. 예장대신 51회 총회는 ‘목사 정년 70세는 유지하되 교회에서 원하면 계속 시무할 수 있다’라고 결의하였다. Ⅱ. 정년연장을 위한 신축성 있는 방법은 없는가. ① 정치 제4장 제4조 1항 위임목사는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그 담임한 교회를 만 70세까지 시무한다.”라고 되어 있다. 그러므로 총회는 헌법을 개정하지 않은채로 지 교회에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경우 당회의 결의로 일정 기간 정년을 연장할 수 있도록 결의해 주면 된다. ② 정치 제12장 제5조 1항: ‘총회는 교회 헌법(신조, 요리 문답, 정치, 권징 조례, 예배 모범)을 해석할 전권이 있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항존직 만 70세를 만 71세 생일 전날까지로 해석하여 총회 결의로 시행하고 있다. 그러므로 “특별한 사유가 있을 때 지 교회 시무는 몇 년을 연장할 수 있으되 단, 대외(노회, 총회, 산하기관) 정년은 만 70세를 유지하기로 한다.”로 총회가 결의하여 시행할 수 있다. 총회가 결의하면 바로 시행에 들어갈 수 있다. Ⅲ. 결론 70세 정년제는 성경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법이 아니다. 헌법의 정신을 살리기 위하여 만든 제도도 아니다. 현실 상황과 필요에 따라 만든 제도이다. 그러므로 사회 상황이 바뀌고 문제점이 드러난다면 신축성을 발휘할 수 있다. 최종 결론은 총회나 노회에서의 정년은 현재대로 유지하되 각 지 교회가 합의할 경우 지 교회 목회만 몇 년을 더할 수 있도록 총회가 결의하면 된다. 노회에서 선거 피선거권은 제한하고 시무하는 지 교회 당회장권을 주면 된다. 아무리 총회가 결의하여도 교회가 연장을 원하지 않을 경우에는 구속력이 없으므로 원하지 않는 교회에 피해가 되지도 않는다. 통계상 정년 문제로 인하여 교단을 떠나는 교회들이 많다고 하는데 서로서로 입장을 이해하며 정년 문제를 신축성 있게 처리하였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김종희 목사(총회 정치부장, 헌법자문위원장 역임. 성민교회) 2022-09-22
    • G.OPINION
    • G.COLUMN
    2022-09-22
  • 하나님 총회 공의의 쌀쌀함
    가을은 따스함이 자리를 비키고 쌀쌀함이 찾아오는 큰 길목이다. 따라서 만물이 움을 틔우는 봄과 곧잘 대조를 이룬다. 우리가 맞이했다가 곧 보내는 한 해나 사람의 나이를 춘추(春秋)라고도 적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농사를 지어 키운 것을 거둔다는 뜻에서 가을은 수성(收成)의 계절이라고도 한다. 가을은 따스함이 자리를 비키고 쌀쌀함이 찾아오는 큰 길목이다. 따라서 만물이 움을 틔우는 봄과 곧잘 대조를 이룬다. 우리가 맞이했다가 곧 보내는 한 해나 사람의 나이를 춘추(春秋)라고도 적는 이유가 그 때문이다. 농사를 지어 키운 것을 거둔다는 뜻에서 가을은 수성(收成)의 계절이라고도 한다. 우리나라의 공식 역법은 양력이다. 조선 말기인 1895년 음력 11월 17일을 양력 1896년 1월 1일로 바꾸면서 그레고리력을 공식 채택했다. 그로부터 126년이 지났다. 이제 실생활에서 음력을 사용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부분은 음력의 원리도 모르고 관심도 없다. 실제로 알 필요도 없다. 그런데도 유독 ‘설(1월 1일)’과 ‘추석’은 음력을 쓰고 있다. 설날에 ‘오늘이 며칠이냐’고 물어보면 “1월 1일”이라고 답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영국 여왕이 서거한 올해 추석은 예년보다 2주 정도나 빠르다. 올해 추석(10일)은 2014년 추석(9월 8일) 이후 가장 이른 추석이다. 들판의 벼도 아직 누런 빛조차 들지 않았다. 추석은 음력을 기준으로 쇠는 명절이라 날짜 변동 폭이 크다. 추분(9월 23일 무렵)을 전후로 빠르면 9월 8일(1976년, 2014년), 늦으면 10월 8일(1919년, 1938년)까지 올 수 있다. 윤달이 앞쪽에 가까이 있을수록 추석이 늦어지는데 올해는 그 반대여서 이른 추석을 맞은 것이다. 송편은 그해 수확한 쌀로 빚어야 제맛이라는데 올해는 어려울 것 같다. 추석은 한 해 농사를 끝내고 추수를 하는 것과 관계가 깊은 명절이다. 9월 10일은 추수하는 때가 아니다. 쌀농사 추수 시기는 우리나라에서 언제나 10월 중순 전후다. 미국의 추석이 추수감사절이다. 미국은 추수감사절을 11월 넷째 목요일로 정해 놓았다. 그때쯤이면 미국 많은 지역에서 추수가 끝난다. 매년 추수감사절은 일요일까지 4일간 연휴가 고정된다. 상당히 편리하고 합리적인 제도다. 일본이 미국을 벤치마킹해 2000년 이른바 ‘해피먼데이’ 제도를 도입했다. 공휴일 일부를 월요일로 옮겨 토.일.월 3일 연휴를 만드는 것이다. 연휴는 소비 진작에 도움이 된다. 우리도 미국처럼 추수 시기의 특정 요일을 추석으로 정하는 것은 어떨지 생각해 본다. 겸해서 우리 총회 개회일도 미국 추수감사절같이 11월 넷째 목요일로 정하면 좋을 듯싶다. 그러면 해마다 음력 추석 명절에 맞춘 탓에 몸과 마음이 바쁜 데다 총회 임원 선거 유세와 투표까지 겹친 총회 회기를 추수가 끝나는 11월 넷째 주 목.금.토 2박 3일 총회를 개최하면 선거와 안건 논의와 결정을 여유 있고 은혜롭게 치를 수 있을 것 같다. 가을(秋)에는 만산홍엽(滿山紅葉)의 색감이 두드러진다. 그러나 전통 관념에 따라 가을의 색조를 말할 때는 보통 하얀색, 즉 백(白)이다. 그래서 하얀 가을, 소추(素秋)라고도 한다. 봄의 기운은 식생이 움을 틔운다고 해서 발생(發生)이라는 단어로 표현한다. 우리가 자주 쓰는 말이다. 그에 비해 가을의 기운을 대표하는 말은 숙살(肅殺)이다. 쌀쌀함이 풀이나 나무를 말려 죽인다고 해서 나온 말이다. 차제에 그 수장 정신길이 총회 행사 현장마다 내놓고 횡행하는 불의하고 불법스러운 세칭 ‘총회선거기획단’에 속한 후안무치 임원 후보들이 이 가을 총회 현장에서 하나님 공의의 쌀쌀함을 체험하게 해야 할 것이다. 숙살(肅殺) 즉 쌀쌀함이 풀이나 나무를 말려 죽인다고 해서 나온 말같이... 도대체 14명의 선관위 위원들은 총회 행사 현장과 식사 모임에서 불법한 선거 담합이 횡행하는 데도 뭘 감시하는 것인지... 그러니 보이지 않는 곳에서는 무슨 일들을 벌이고 있을런지 불을 보듯 한할텐데... 바야흐로 깊어지는 공의로운 총회 개회를 앞둔 총회의 가을이다. 성경은 말씀한다. 내가 너희 절기들을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의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네 노랫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아모스 5:21-24 2022-09-10
    • G.OPINION
    • G.OPINION
    2022-09-10
  • 제106회 총회 징비록(懲毖錄)
    마침 올해가 임진왜란이 벌어진 지 그리고 한산대첩이 대승을 거둔 지 430년 되는 해다. 김한민 감독의 영화 ‘한산’에서 물처럼 표정 깊은 배우 박해일을 통해 구현된 이순신 장군은 “이 전쟁은 대체 무엇입니까” 묻는 물음에 “의(義)와 불의의 싸움”이라고 답했다. 징비록(懲毖錄)은 조선 중기의 선조 때 문신, 학자, 의학자, 저술가인 류성룡(柳成龍, 1542년 11월 17일 ~ 1607년 5월 31일)이 쓴 임진왜란에 대한 1592년(선조 25)에서 1598년(선조 31)까지 7년 동안의 일을 수기(手記)한 책이다. 저자가 벼슬에서 물러나 한거(閑居)할 때 저술하였고 1604년(선조 37년) 저술을 마쳤다. 7년 전쟁(임진왜란과 정유재란 1592~1598)의 지옥도(地獄圖)를 해부한 류성룡의 보고서다. 충무공 ‘난중일기’와 함께 구국의 리더십을 증명한 피와 눈물의 기록이다. ‘징비’는 “지난 잘못을 스스로 꾸짖어 후에 환난이 없도록 삼간다”라는 뜻이다. ‘징비’란 ‘시경(詩經)’의 소비편(小毖篇)의 “미리 징계하여 후환을 경계한다(豫其懲而毖後患)”라는 구절에서 따온 것이다. 징비록은 임진왜란 전란사로서 1592년(선조 25)부터 1598년까지 7년에 걸친 전란의 원인, 전황 등을 기록한 책이다. 그는 과거를 통해 관료로 등용되어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직전 군관인 이순신을 천거하여 선조로 하여금 전라좌수사로 임명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이순신이 임진왜란 당시 열세였던 조선의 전세를 역전시키는 데 공을 세우게 했고 임진왜란에 4도 도제찰사, 영의정으로 어려운 조선 조정을 총지휘하였다. 이순신과는 어려서부터 같은 동네에서 함께 자란 절친한 사이로서 후견인 역할을 하였다. 왜장은 부하를 방패막이로 삼지만 우리의 이순신 장군은 부하를 구하기 위해선 자기 목숨도 내놓을 수 있는 리더였다. 이에 감동한 왜병은 항왜(임란 때 조선에 투항한 왜병)가 됐고 충무공은 우리 역사상 전무후무한 성웅으로, 제발 다시 만나고 싶은 이상적 공직자의 표상으로 추앙받는다. 그러나 이순신을 포함한 조명 연합수군이 경상우도 남해현 노량해협에서 일본의 함대와 싸운 노량해전이 발발한 당시 1598년 12월 16일(선조 31년 음력 11월 19일) 정인홍, 이이첨 등의 북인의 상소로 류성룡은 영의정에서 관직 삭탈 당하게 된다. 안동으로 내려가 선조의 부름에도 올라가지 않고 임진왜란 때 겪은 후회와 교훈을 후세에 남기기 위해 ‘징비록’을 저술하였다. ‘징비록’의 첫 장에서 류성룡은 수많은 인명을 앗아가고 비옥한 강토를 피폐하게 만든 참혹했던 전화를 회고하면서 다시는 같은 전란을 겪지 않도록 지난날 있었던 조정의 여러 실책들을 반성, 앞날을 대비하며 왜란을 겪은 후 후세에 길이 남길 쓰라린 반성의 기록으로 ‘징비록’을 저술하게 되었다고 밝혔다. 이처럼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저술되었다. 그런 점에서 ‘징비록’은 우리나라에서 씌어 진 여러 기록문학 중에서도 특히 두드러진다고 하겠다. 류성룡은 양명학의 핵심적 이론인 지행합일설(知行合一說)과 치양지설(致良知說)이 ‘굽은 것을 바로 잡으려다 지나치게 곧아진(矯枉而過直)’ 폐단에 빠진 것으로 불교의 학설과 다름없는 것이라고 단정하고 하나에 치중됨이 없이 병진해야 한다는 지행병진설(知行竝進說)을 주장했다. 그래서 그가 남긴 저작 중 『징비록』(懲毖錄)은 “알면 행하여야 한다”는 지행병진설이 잘 반영된 책으로 알려 있다. 참혹한 국난의 하나였던 임진왜란에서의 아픈 경험을 거울삼아 다시 그러한 수난을 되풀이하지 않도록 후세를 경계하기 위하여 남긴 저술이다. 임진왜란의 전모를 정확하고 생생하게 비춰주고 있어 임진왜란에 관한 많은 기록 가운데서도 귀중한 사료(史料)로 평가되고 있다. 1598년 10월, 노량 앞바다에서 퇴각하는 왜군을 추격해 벌어진 해전에서 통제사 이순신(李舜臣)이 날아오는 탄환에 맞고 숨을 거두었다. 그는 죽기 직전, “싸움이 아직 다급한 판인데 내가 죽었다고 알리지 마라”는 말을 남겼다. 왜군은 조선에서 수많은 살략을 자행하였고 이는 ‘징비록’에 고스란히 묘사되었다. 1597년에 벌어진 정유재란(게이초의 역)에서 전공을 증명하기 위해 잡은 포로나 시신의 목에서 코를 베어내는 장면도 상세히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징비록의 주제가 왜군의 실태보다도 조선군의 허약하기 짝이 없는 국방의식에 대한 비판에 무게가 실려있는 만큼 주된 내용은 왜군에 대응하는 조선 측의 허술함도 비판하고 있다. 무한 당쟁에 매몰돼 세계정세를 외면하다 국망(國亡)에 몰린 비극이 임진왜란이고 6·25 전쟁이다. 미·중 그레이트 게임은 국제연합(UN)에 기초한 세계 거버넌스 체제를 우리 눈앞에서 붕괴시키고 있다. 상호 이익 관계가 얽힌 지구 경제가 전쟁을 막는다는 자유주의적 신념은 망상으로 판명됐다. 지역적 침략전이 준(準) 세계 전쟁으로 비화하고 제한 핵전쟁과 자포리자 원전 재앙까지 운위되는 우크라이나 사태가 생생한 증거다. 우크라이나 전쟁 ‘나비 효과’(butterfly effect 나비의 작은 날갯짓처럼 미세한 변화, 작은 차이, 사소한 사건이 추후 예상하지 못한 엄청난 결과나 파장으로 이어지게 되는 현상)인 에너지·원자재·식량난이 부른 수퍼 인플레이션 태풍은 세계 10대 수출 대국이면서도 소국(小國) 의식과 민족주의 감성에 매인 한국을 강타한다. 대만 사태는 더 심각하다. ‘예정된 전쟁’이 대만해협을 고리로 한반도를 습격하는 것은 가상 시나리오가 아니다. 경제 전쟁·기술 전쟁·군비 경쟁으로 시작한 미·중 대결이 언제 어떻게 열전(熱戰)으로 폭발할지 일촉즉발이다. 인류의 집단 지성이 충돌을 막지 않는 한 대만전쟁이 일어난다면 아마겟돈의 시한폭탄이 될 것이다. 한반도엔 핵 강국 북한이 버티고 있다. 가난하지만 잔혹한 군사 강국이 혼(魂)을 잃은 경제 대국을 복속시키는 사례가 세계사엔 넘쳐난다. 사상적으로 21세기는 비(非)민주적 자유주의와 비(非)자유적 민주주의가 충돌하는 이념 전쟁터이다. 국민과 지도자의 징비가 국가 흥망성쇠를 결정하는 시대다. 모든 국가가 각자도생하는 지옥문이 열렸다. 총체적 위기의 순간엔 징비야말로 국정(Statecraft) 리더십의 핵심이다. 하지만 배광식의 제106회 총회 출범 11개월을 살펴보면 조선 선조의 불의와 무능과 무기력을 만난다. 비판 없는 언론과 상비부를 장악한 총회 권력이 총회 회관을 포위하고 총회를 바로잡으라는 시대정신에 끝내 응답하지 않았다. 그러기는커녕 재판과 감사와 선관위와 언론이 불의와 더 가까워지는 '불의한 동행'을 하게 했다. 수퍼 태풍은 앞으로도 한반도를 강타할 것이다. 세계사적 도전과 민생 문제는 국가 존망을 결정할 정치적 태풍이다. 총회 역시 폭풍 자체를 피할 수는 없다. 그러나 제107회 ‘샬롬 부흥’ 총회가 피눈물의 기도로 폭풍에 대비해 생명과 나라를 살릴 수 있을 것이다. 제11호 태풍 힌남노는 삶과 죽음의 이치를 입증한 성도의 기도가 이룬 징비의 현장이다. 이젠 제107회 총회가 처절한 회개의 징비로써 ‘총회장 권순웅의 시간’을 증명할 때다. 국난(國難)을 함께 넘어 “의(義)와 불의의 싸움”을 위한 선교의 길을 세계로 넓히는 제107회 총회의 ‘샬롬 부흥’을 기다린다. 성경은 말씀한다. 옛적에 주께서 주의 종 모세에게 명하여 가라사대 만일 너희가 범죄 하면 내가 너희를 열국 중에 흩을 것이요 만일 내게로 돌아와서 내 계명을 지켜 행하면 너희 쫓긴 자가 하늘 끝에 있을지라도 내가 거기서부터 모아 내 이름을 두려고 택한 곳에 돌아오게 하리라 하신 말씀을 이제 청컨대 기억하옵소서 느1:8-9 2022-09-09
    • G.OPINION
    • G.OPINION
    2022-09-09
  • 우리 에피소드(episode)로 끝내자!_ 윤희원 목사(전주효성교회)
    이번 총회의 부총회장 선거는 결국은 에피소드(episode)로 끝내야 한다. 에피소드로 끝나지 아니하면 우리 총회에는 미래가 없다. 본래 에피소드란 막간극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시트콤(sitcom)이라고 볼 수 있다. 시트콤은 situation comedy의 줄임말이다. 이 시트콤인 에피소드의 재미는 서브젝트(subject)인 주인공이 프로젝트(project)에 휘말려 결국은 오브젝트(object)가 되어버리는 데 있다. 사실상 어떤 선거든지 선거에 나서는 사람은 그 선거를 통해서 주인공이 되려고 한다. 즉 서브젝트가 되기 위해서다. 그런데 그 선거가 프로젝트를 통해서 계획되고 기획되기에 선거를 관리, 기획하는 선관위는 이 프로젝트 운영에 공정을 기해야 하며 프로젝트 되는 선관위 규정에 스스로가 투명해야 한다. 그래야 선거라는 행위를 통해서 프로젝트화 되지 못한 출마자는 자연히 오브젝트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금번 우리 선관위는 선관위 스스로가 선거를 프로젝트 하는 일에서 처음에는 법과 원칙에 의해서 투명하게 할 것을 공표했다. 그런데 지금은 사안에 따라서 법과 원칙은 적용하고 크게는 정치적 고려를 스스로 하고 법과 원칙을 스스로 무시하고 있다. 그래서 이번 총회의 선거는 에피소드로 끝나야 한다. 희극이 아닌 비극으로 말이다. 결코 희극이 되어서는 안된다. 희극이 되어버리면 계속하여 이런 일이 발생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비극으로 단 한 번 있었던 에피소드로 끝나야 한다. 그러지 아니하면 우리 총회는 미래가 없다. 선거란 양심의 자유에 의해서 행하여 져야 한다. 어떤 의미에서 선거는 ‘지지할 수 있음’과 ‘지지할 수 없음’에서 선택하는 자유의 행동이다. 그런데 이번 부총회장 선거는 이 두 가지를 다 하지 못하게 한 아주 나쁜 선거가 되었다. 처음에는 지지할 수 없음도 지지할 수 있음도 사라져 버린 단독후보로 결정되는가 했는데 이제는 ‘양해서’와 ‘사과문’이라는 요식행위를 거쳐 총대들에게 두 후보를 지지하거나 지지하지 않거나를 선택하라고 한다. 그런 막장 선거가 어디에 있는가? 누가 이렇게 선거를 어렵게 만들고, 힘들게 하고 있는가? 두 후보인가? 아니면 선거를 프로젝트 하는 선관위인가? 나는 선관위라고 본다. 이렇게 행하는 선관위는 없어져야 한다. 총회의 개혁을 위해 장로교의 정치 원리에 입각해서 말이다. 이토록 우리 헌법에 규정된 “양심의 자유”를 제한하고, 변질시키는 일은 지금까지 없었기 때문이다. 좀 더 내밀하게 부총회장 선거를 들여다보자. 누구를 선택해야 할까? ‘선거법을 위반했습니다’라고 사과한 후보를 아니면 선거법을 위반했음을 사과했기에 ‘양해합니다’라고 한 후보를 선택해야 하는가? 사실상 둘 다 문제이다. 이렇게 하려면 정치적인 고려를 처음부터 했어야 한다. 그래야 상생의 정치가 되고 화합과 이해의 정치가 된다. 그런데 한 후보자에게는 자격을 주고 다른 후보자에게는 자격을 주지 않고 미루다가 선거 막판에 선거법을 위반한 후보자에게 ‘선거법을 위반했으니 사과하고’ 이미 자격을 획득한 후보자에게는 무슨 언질(?)을 주어서 양해한다고 ‘양해서’를 쓰게 해서 두 사람 모두를 다 자격 없는 후보(?)로 만들어 버렸는지 알 수 없다. 난, ‘양해서’를 쓴 후보도 자격이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그런 불공정하고, 깨끗하지 못한 선거에 ‘양해서’를 제출하고 나가려고 하는 어떻게 보면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어서 그렇게 하는 사람이라면 총회의 지도자로서는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 같으면 ‘양해서’를 쓰지 않고 후보사퇴를 선언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사과문을 쓰고 후보의 자격을 얻어 부총회장에 출마한 후보에게도 묻고 싶다. ‘선거관리 규정을 어긴 후보입니다’라는 사과문을 쓰고 후보자가 되어야만 했는가를 말이다. 왜, 무엇 때문에 규정을 어겼다고 하는데도 굳이 그 결정을 받아들이고 사과문을 쓰고 후보가 되려고 하는가이다. 후보가 되기만 하면 선거에서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 때문이었다면 더욱 마음이 아프다. 사실상 교회의 선거는 이기고 지는 당선이 목표가 아니다. 누가 더 잘 하나님과 그의 교회를 섬길 수 있는가를 선출하는 것이기에 굳이 사과문까지 쓰고 나서야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더 잘 할 수 있을 것 같아 후보가 되려고 했는데 당신이 더 잘 할 수 있다고 난 선거규정도 지키지 못했다고 해서 후보의 자격도 주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나보다 더 잘하는 일꾼이 되십시오”라는 사퇴의 변을 내고 사퇴했다면 우리 총회의 정치는 성경적이고 헌법적인 정치가 살아났을 것이다. 선거규정 하나도 지키지 못한 후보가 어떻게 헌법을 지키고 교회를 지켜 갈 수 있겠는가 하는 반성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 두 후보자들이 사퇴하지 않고 짜고 치는 무슨 판처럼 선관위에 의해 ‘양해서’와 ‘사과문’을 쓰고 ‘서로 잘해 봅시다’ 하고 있다. 지금 우리 총회는 100회 총회 때부터 교회의 정치가 성경과 헌법에 의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교묘한 신자유주의적 심리정치의 형태를 띠게 되었다. 신자유적인 심리정치란 참으로 매우 효율적이고 영리한 시스템이다. 억압 대신 친절로, 금지 대신 유혹으로, 유권자들의 심리를 조종하는 정치이다. 이 정치는 사실 유권자들에 유리하게 되는 것 같지만 기득권자들에 유리한 정치이다. 그래서 그 심리정치에 의해 수년 전(2016년) 우리는 두 사람의 목사 부총회장 후보를 자격 없음으로 규정하여 탈락시키고 현장에서 두 후보자를 선정하여 투표하는 장로교 역사상 있을 수 없는 투표를 강행했다. 그리고 5년이 지나서는 다시 자격 없는 사람을 탈락시키는 것이 아니라 ‘양해서’와 ‘사과문’을 쓰게 하고 두 사람 모두에게 자격을 주었다. 결과적으로 더 나빠졌는지 더 좋아졌는지는 아직은 알 수 없지만 지금 이 시점에서는 나빠졌다고 볼 수밖에 없다. 모두가 법 규정 앞에서 평등해야 되는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고민한다. 선거에 임하는 나 자신도 투명하지 않고 더욱더 선거가 투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후보자인 두 사람 모두 다 자신의 욕망에 의해서 출마했고 이제 나 역시 내 자신의 욕구에 의해서 선거해야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광, 총회의 바른 정치는 언제나 구호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아예 구호도 되지 못하고 뒷전으로 밀려나 버렸기 때문이다. 선거가 장로교 정치에 맞게 되려면 사실 나와는 상관없이 작성된 ‘성명서’지만 8월 29일 전국호남협의회 이름으로 발표한 “우리의 주장을 철회하지 않을 것이며 총회 참석도 단호히 거부한다”라고 성명했기에 그랬으면 한다. 적어도 그날 참석한 450명 정도 되는 총대들은 부총회장 선거에 투표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하면 호남협의회가 지지하지 않는 후보가 선출될 것이다. 과연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아닐 것이다. 그런 ‘성명서’가 있다면 나 역시 찬조금 들고 그날 참석하지 아니했을 것이다. 우리는 결국 자격이 있든 없든 두 후보들 중에 하나를 선택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에게 우리 총회의 부 대표자와 대표자의 자격을 2년 동안 주게 될 것이다. 심각하지만 아무도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다. 심각하게 여기는 사람만이 바보이다. 사실상 나는 바보, 멍청이가 되었다. 왜냐하면 바보 멍청이가 되지 않고는 투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살다 보니 삶에서 목사로서 터득된 비결이 있다. 믿음이 없는 바보, 신학과 신앙이 없는 멍청이는 항상 세상에서 방황하고 믿음 있는 신학과 신앙에 굳게 선 자는 세상에서 여행하고 산다는 것이다. 선관위는 방황을 해도 우리 총대들은 여행을 했으면 한다.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하면 투표하지 말아야 한다. 왜? 두 후보자에게 ‘양해서’와 ‘사과문’을 쓰고 자격을 주고 우리에게 할 수 없는 투표를 하라고 하는지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투표하지 말아야 한다. 권위주의자에게는 투표하지 말자. 도덕주의자에게도 투표하지 말자. 민주주의자에게도 투표하지 말자. 아니 신본주의, 신앙 제일주의를 부르짖는 자들에게도 투표하지 말자. 수년 동안 나는 권위주의자에게 참 권위가 없고 도덕주의자에게 진정한 도덕이 없고 민주주의를 외쳤던 민주투사에게 정작 민주 의식이 없음을 보아왔고 신본주의, 신앙 제일주의인 개혁주의자들에게 참 신앙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냥 찍자. 누가 한들 나아질 총회가 아니다. 우린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믿는다. 그러나 손가락을 잘라낼 각오로 찍어야 한다. 좋은 놈(?) 중에서 좋은 놈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선관위에 의해서 나쁜 놈(?) 중에서 더 나쁘지 않을 분(?)을 선택해야 하기 때문이다. 선관위가 이렇게 후보자 두 분을 나쁜 분으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나쁘면 자격을 주지 말았어야 한다. 한 분 목사를 선택하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다섯 분의 목사를 선택하는 것이 좋을까를 기도는 하지 말고 화장실에 앉아서 매일 매일 고민해 보자. 어차피 프로젝트 된 선거에서 서브젝트를 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브젝트를 골라야 되는 선거이기 때문이다. 누가 더 개혁신학과 신앙의 반대자인가를 투명성의 원리에서가 아닌 불투명성의 원리 속에서 선택해야 되는 선거이기 때문이다. 사실상 이번 총회의 부총회장 선거는 잘못하면 지역적이고 신학적이고 광신(狂信)적 속성을 가지고 있기에 우리에게 힐링(healing)의 효과를 주지 못할 것이다. 다만 킬링(killing)이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그래서 나는 우리 총대들에게 두 분의 후보 중에서 누가 킬링하지 않을까를 생각해 보라고 하고 싶다. 그리고 그분에게 투표하라고 권하고 싶다. 왜냐하면 총신과 광신의 대결도, 영남과 호남의 대결도, 교갱과 영성의 대결도, W.E.A의 찬성과 반대의 대결이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아주 심각한 신앙적, 신학적 위기 상황에 놓여 있다. 그래서 사실 문화적 위기 상황에 대처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생각해 보자. 왜 신앙이나 신념과 다른 합리적인 견해가 신앙이나 신념의 도그마의 껍데기를 깨고 들어오면 우린 갑각류들이 발작하듯 반발한다. 나 역시 그러하다. 어느덧 내 개혁신앙과 신학이 지적 갑각이 되었고 교조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기에 신앙의, 신학의 순결함을 지키고 방어한답시고 이념적 순결주의가 되어 ‘차이’와 ‘차별’을 구분할 줄 모르면서 내 신앙과 신학의 정당성만 스스로 부여하고 신학적, 윤리적 나르시시즘에 젖어 두 후보에 대한 차이도 차별도 모른 채 내 생각과 판단에 틀리면 조롱, 내면의 비웃음과 반대로 일관하고 있음을 고백한다. 이렇게 프로젝트화 한 선관위원들을 향해 “하나님 없이, 하나님과 함께 어떻게 하느냐”고 물으면서 그들의 정치적 술수를 지켜보고만 있는 비참한 총대일 뿐이다. 이젠 비굴해지기까지 한다. 문화신학자인 리처드 니버는 “교회가 현대의 문화적 환경에 순응하기 위해 애쓰는 동안 교회의 영적 영향력은 급격히 쇠퇴해 왔다”라고 지적했다. 지금 우리 총회가 우리 총회의 정치적 환경에 순응하기 위해 이러한 선거 프로젝트를 만들고 힘쓰는 동안 우리 총회의 영향력은 총회 안에서도 그리고 사회 속에서도 급격히 쇠퇴하게 될 것은 뻔하다. 그러나 주사위는 던져졌다. 내가 투표를 하든 안 하든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은 부총회장이 될 것이다. 부탁한다. 킬링하지 말고, 힐링의 총회 정치를 세워가기를, 그리고 이 선거는 우리 교단 역사에서 한편의 에피소드로 끝나길 기도한다. 누가 부총회장이 될 것인가? 당신이 지지하는 사람, 그리고 선거관리위원장이 지지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그래도 소통할 수 있는 사람을 선택하는 것이 옳을 일일 것이다. 누가 소통할 수 있는 적임자인가를 깊이 생각해 보자. - 이 글은 2022년 9월 6일 기독신문의 ‘선관위 입장, 사과문 감사의 글’이 나기 전에 쓴 글입니다 - 2022-09-07
    • G.OPINION
    • G.COLUMN
    2022-09-07
  • 총회 발전의 지도자 누구
    조선일보와 한국일보에서 기자 생활을 했고 미국 하와이대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서강대 등에서 교수로 일했고 현재 신아시아연구소 이사장으로 있는 이상우 박사에게 이런 일이 있었고 한다. “1970년대 말이었습니다. 그때 저는 서강대에서 북한정치를 강의하고 있었죠. 비 오는 날이었는데 강의가 끝나고 갑자기 삼성 회장 비서실에서 저를 찾는 전화가 왔다는 거예요. 낡은 가방하고 비닐우산을 든 채로 영문도 모르고 삼성 사옥으로 갔죠.” 파란색 비닐우산을 들고 회장실로 들어가 보니 이병철(1910~1987) 삼성 회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 박사, 반갑소. 내가 좀 여쭤보고 싶은 게 있어 모셨어요.” 무슨 얘긴가 긴장했는데 이런 질문이었다. “북한의 논 단보(991.74㎡)당 쌀 생산량이 얼마나 됩니까? 자료를 아무리 찾아봐도 나오지가 않아요.” “확실하지는 않습니다만… 우리나라가 300㎏ 정도니 북한은 비료도 부족하고 관개 시설이 제대로 되지 않아 아마 우리의 반 정도일 겁니다.” “아, 그렇군요!” “...그런데 왜 이 숫자에 관심을 가지시는 겁니까?” 이병철 회장은 정색을 하고 이렇게 말했다. “이 박사, 잘 들으시오. 앞으로 남북 관계는 말입니다. 바로 이 숫자로 판가름 날 겁니다.” 지나고 보니 이 회장의 그 말은 참으로 탁견이었다. 김일성이 만약 남한 수준으로 북한 주민에게 안정적으로 식량을 공급해 ‘이밥에 고깃국’을 먹일 수 있다면 어떻게 되겠느냐는 얘기다. 인민을 통제할 수 있게 된다면 여유 있게 남한을 압박할 수도 있게 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젊은 이상우 박사는 여기서 문득 좀 당돌한 질문을 했다. “회장님께서는 한국에서 가장 성공한 기업인으로서 지금까지 이뤄 놓으신 자산으로 무엇을 하시려 합니까?” 이병철 회장은 조금도 주저 없이 답을 했다. “나머지 인생은 21세기에 한국 국민이 먹고살 수 있는 산업의 기초를 닦는 데 바칠 생각이오. 오랜 검토 끝에… 두 가지를 생각했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전자산업과 항공산업입니다.” 그야말로 ‘기업 활동으로 나라에 보답한다’라는 사업보국(事業報國)의 정신이었다. 40년 넘게 시간이 흐른 지금, 결국 이병철 회장의 꿈은 절반만 거의 완벽하게 성공한 셈이다. 그 바탕에는 먼 앞을 내다보는 창업자의 안목이 있었다고 이상우 이사장은 말했다. 지금 삼성 총수가 된 그의 손자가 꼭 다시 한번 되새겨야 할 일화라고 생각됩니다. 이상우 이사장은 또 예전에 어느 전직 대통령이 취임하기 훨씬 전에 만났던 얘기를 했다. 이 이사장은 이런 충언을 했다고 한다. “대통령이 무엇을 모르는 것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아요. 중요한 것은 사람을 쓰는 일입니다. 그걸 잘 아는 사람에게 제대로 물어볼 줄만 알면 됩니다.” 그러면서 예전 박정희 대통령의 이야기를 해 줬다. 박정희 대통령이 군인 시절부터 친분을 유지했던 인물 중 한 명이 시인이자 언론인이었던 구상(1919~2004)이었습니다. 박 대통령은 대통령 취임 이후에도 한 달에 한 번씩 꼭 구상을 만났다고 합니다. 구상은 박 대통령과의 친분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으로는 그와 노선을 같이 하지 않았습니다. 박 대통령이 그를 만난 것은 바로 그 이유 때문이었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은 항상 옳다는 말만 하니 그들에게선 결코 들을 수 없는 말을 구상이란 양반이 해 준다’라는 것이었다. ‘허물없는 말을 해줄 수 있는 바깥 라인’을 약 10년 동안 소중하게 유지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1974년 육영수 여사가 별세하기 얼마 전부터 더 이상 구상을 만나지 않았다고 한다. 구상 시인은 이렇게 탄식했다고 한다. “대통령의 눈에 암운(暗雲)이 끼었구나!” 암운이란 곧 비가 쏟아질 것 같은 검은 구름으로 좋지 못한 일이 일어날 듯한 낌새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인터뷰 말미에 이상우 이사장은 이렇게 말했다. “예전에 어느 전직 대통령이 취임하기 훨씬 전에 만나 그런 얘기를 했지만 듣지 않았어요.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뜻을 가진 사람들이 만든 산물입니다. 역사 발전의 원동력은 만남과 배움이고 결국 사람이 역사를 만드는 것입니다.” 총회 지도자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정말 필요한 말이 아닐 수 없다. 대내외적으로 밝히기를 꺼리는 것 같은 감투 제106회 총회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 소강석은 9월 1일 경기도 화성 GMS본부에서 제18차 전체 회의를 갖고 제107회 목사부총회장에 입후호한 오정호 목사에 대해 한기승 목사의 결자해지(結者解之) 양보를 얻어 후보 확정을 결정했다고 한다. 소강석 목사의 오랜만의 쾌거다. 이로써 제107회 총회 목사부총회장를 놓고 오정호 목사와 한기승 목사가 영남과 호남을 배경으로 정정당당하게 경쟁하게 됐다. '다윗과 골리앗’ 저자 맬컴 글래드웰(Malcolm Gladwell 1963년 9월 3일 ~ )은 우리가 강점과 약점에 대해 오해할 때가 많다고 설명한다. “약자라는 입장은 종종 문을 열어 기회를 만들어준다. 약자가 아니었다면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들을 가르치고 깨닫게 해주며 가능하게 해줄 수 있다.” 약점은 거인 용사 골리앗에 맞서는 젊은 목자 다윗을 하나님을 향한 마음을 더욱 간절하게 하고 기꺼이 더 큰 노력을 기울이게 하며 그리고 그것이 하찮은 물맷돌일지라도 전에 없던 효과적인 수단이나 도구로 바뀌게 한다. 그래서 우리는 그런 다윗들을 ‘믿음의 작은 거인’이라 부른다는 까닭에서 나온 말이다. 99% 불리해도 잘 보면 1% 유리한 구석이 보인다. 그걸 그냥 넘기지 말고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 상대적으로 불리한 조건을 가진 약자는 강자를 이겨보려고 별별 궁리와 시도를 다 하지만 사실 승리의 열쇠는 내 안에 있다. 왜냐면 당연하게 여겨져 온 자신의 습관을 살짝 비틀고 작은 장점도 극대화하면 누구도 예상치 못한 승리가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최근 국내 복귀한 여자 배구 슈퍼스타 김연경이 학창 시절 키가 작아 늘 벤치 신세였다는 건 잘 알려진 얘기다. 그는 그 시절을 돌아보며 쓴 책에서 말했다. “필사적으로 살길을 찾았다. 내가 가진 조건으로도 꼭 필요한 선수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하루도 고민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벤치에 앉아 경기 흐름을 파악하고 공이 오는 지점을 예측하는 눈썰미를 키웠다. 감각을 익히려고 공을 끼고 밥 먹었고 잘 때도 끌어안고 잤다. 단신 선수가 가장 잘 해낼 수 있는 역할은 수비라고 결론 내리고 혼자서 수도 없이 벽에 공을 던져 받아내는 훈련을 했다. 고2 때부터 기적처럼 키가 크면서 ‘수비가 뛰어난 공격수’로 단숨에 빛을 발했다. 그러나 나만의 무기를 만들고자 노력해오지 않았다면 내게 주어진 기회를 어쩌다 찾아온 운이라 생각하며 두려워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아무리 작은 장점이라도 무게중심을 두고 키워나가면 단점을 돌파할 수 있다. 그것을 완전히 나만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죽을힘을 다했다.” 성경은 말씀한다. 내가 주 안에서 크게 기뻐함은 너희가 나를 생각하던 것이 이제 다시 싹이 남이니 너희가 또한 이를 위하여 생각은 하였으나 기회가 없었느니라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 4:10-13 2022-09-02
    • G.OPINION
    • G.OPINION
    2022-09-02
  • 영감과 마감
    예술가가 돌에 애착을 갖는 까닭. 멈춘 듯 고요하면서도 꽉 찬 밀도의 힘이 느껴지는 비범한 기운. 생명 없는 돌도 그 내용을 알려면 그 형식도 들여다볼 수 있는 안목과 정신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는 지금까지 말과 글은 요란하지만 총회와 교계를 위한 ‘정책적 전문성’도 ‘미래적 통찰력’도 보여주지 못했다. 이제 ‘도덕적 정당성’도 잃고 있다. 그에게 정치는 교회와 총회 안정과 발전을 위한 여정이 아닌 그저 돈 놓고 돈 먹기 ‘게임’처럼 보인다. 3 박사 학위를 지닌 목사이고 시인인 그는 미래 목회 생태계 정책으로 무장된 신학자나 목회자가 아니라 선거신학, 정치신학에만 밝은 ‘꾼’처럼 느껴진다. 노름꾼이나 장삿꾼일지는 몰라도 정치인처럼 보이지 않는 까닭이다. “영감을 기다리는 건 아마추어고 우리는 그냥 일을 하러 간다”라는 미국의 소설가 필립 로스(Philip Milton Roth, 1933년 3월 19일 ~ 2018년 5월 22일)의 말을 금과옥조(金科玉條)처럼 새기고 ‘영감’이 아닌 ‘마감’의 힘으로 버티는 게 이 기레기 업계의 일이다. 삶의 많은 부분이 실은 이런 힘에 의해 움직인다. 그러니 할 수 있고 갈 수 있고 쓸 수 있을 때 힘 내보자는 생각이 든다. 하나님의 섭리는 면죄부 장삿꾼을 통해 루터의 종교개혁을 일으키게 하셨지만... 성경은 말씀한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약 1:15 2022-08-22
    • G.OPINION
    • G.OPINION
    2022-08-22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