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2-11-2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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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종희 칼럼_ 정년문제 처리에 대한 아쉬움
    해마다 총회 때면 정년 문제가 뜨거운 감자가 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헌법대로 만 70세 정년을 주장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현실은 꼭 정년만을 고집할 수 없는 피치못할 여러 사정이 있을 수 있다. 좀 더 대우(?)를 받으며 조기 은퇴하는 경우는 여유 있는 교회일 것이다. 그러나 평생 목회한 목사에게 대우는커녕 보금자리 하나 마련해 줄 수 없는 은퇴가 걱정인 교회가 더 많다. 그러므로 우리 교단은 정년 문제에 대하여 형편이나 경우에 따라서 일을 이리저리 잘 처리하는 능력이 요구된다. 헌법도 살리면서 지 교회 사정도 고려해 주는 신축성이 필요하다고 사료 된다. 제107회 총회 석상에서 한 필자의 동의는 성사되지 못했지만 아래와 같은 필자의 견해를 피력해 보고자 한다. Ⅰ. 정년연장은 헌법 정신에 배치되는 주장인가. ① 정치 제4장 제4조 1항 위임목사는 “한 지 교회나 1구역(4지 교회까지 좋으나 그 중 조직된 교회가 하나 이상 됨을 요함)의 청빙으로 노회의 위임을 받은 목사이니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그 담임한 교회를 만 70세까지 시무한다.”라고 되어 있다.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이란 단서가 붙어 있다.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만 70세까지 시무하지만 특별한 이유가 있으면 시무 연령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만 70세 정년 이전에 사망을 하거나 병고로 더 이상 목회가 불가능한 특별한 사유가 있을 때는 정년 이전에도 물러날 수 있다. 그러나 물러날 사정이 없을 때는 만 70세까지만 시무하고 그만두어야 한다. 라고 해석한다. ② 물론 전항과 같은 해석이 합리적이다. 그러나 특별한 사정이란 꼭 만 70세 이전에만 있으라는 법은 없다. 은퇴할 시점에 가서 특별한 이유가 있을 수 있다. 특별한 이유가 있으면 은퇴 시점이 좀 달라질 수 있다고 해석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가정하여 원래 법이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만 60세까지 한다였는데 만 70세로 연장한 법이라면 만 70세가 되어 특별한 이유가 있다고 더 한다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그러나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종신까지 할 수 있는 것을 만 70세로 줄여 놓은 것이니까 특별한 이유가 있으면 조금 더 할 수 있다는 논리가 억지는 아니다. 목사와 교회 간 합의만 되면 다소 정년연장이 가능하다고 본다. ③ “근로자가 정년이 지난 후에도 사용자의 동의 아래 기간의 정함이 없이 사용자와의 근로관계를 계속 유지하여 왔다면 사용자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단순히 당해 근로자가 정년이 지났다거나 고령이라는 이유만으로 근로관계를 해지할 수는 없다.”라는 판례가 있다(대법원 2002두12809). 물론 목사와 교회의 관계가 근로관계는 아니더라도 목사와 교회도 대한민국 국민으로 참고할 판례임에는 틀림이 없다. 예장대신 51회 총회는 ‘목사 정년 70세는 유지하되 교회에서 원하면 계속 시무할 수 있다’라고 결의하였다. Ⅱ. 정년연장을 위한 신축성 있는 방법은 없는가. ① 정치 제4장 제4조 1항 위임목사는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그 담임한 교회를 만 70세까지 시무한다.”라고 되어 있다. 그러므로 총회는 헌법을 개정하지 않은채로 지 교회에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경우 당회의 결의로 일정 기간 정년을 연장할 수 있도록 결의해 주면 된다. ② 정치 제12장 제5조 1항: ‘총회는 교회 헌법(신조, 요리 문답, 정치, 권징 조례, 예배 모범)을 해석할 전권이 있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항존직 만 70세를 만 71세 생일 전날까지로 해석하여 총회 결의로 시행하고 있다. 그러므로 “특별한 사유가 있을 때 지 교회 시무는 몇 년을 연장할 수 있으되 단, 대외(노회, 총회, 산하기관) 정년은 만 70세를 유지하기로 한다.”로 총회가 결의하여 시행할 수 있다. 총회가 결의하면 바로 시행에 들어갈 수 있다. Ⅲ. 결론 70세 정년제는 성경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법이 아니다. 헌법의 정신을 살리기 위하여 만든 제도도 아니다. 현실 상황과 필요에 따라 만든 제도이다. 그러므로 사회 상황이 바뀌고 문제점이 드러난다면 신축성을 발휘할 수 있다. 최종 결론은 총회나 노회에서의 정년은 현재대로 유지하되 각 지 교회가 합의할 경우 지 교회 목회만 몇 년을 더할 수 있도록 총회가 결의하면 된다. 노회에서 선거 피선거권은 제한하고 시무하는 지 교회 당회장권을 주면 된다. 아무리 총회가 결의하여도 교회가 연장을 원하지 않을 경우에는 구속력이 없으므로 원하지 않는 교회에 피해가 되지도 않는다. 통계상 정년 문제로 인하여 교단을 떠나는 교회들이 많다고 하는데 서로서로 입장을 이해하며 정년 문제를 신축성 있게 처리하였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김종희 목사(총회 정치부장, 헌법자문위원장 역임. 성민교회) 2022-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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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9-22
  • 우리 에피소드(episode)로 끝내자!_ 윤희원 목사(전주효성교회)
    이번 총회의 부총회장 선거는 결국은 에피소드(episode)로 끝내야 한다. 에피소드로 끝나지 아니하면 우리 총회에는 미래가 없다. 본래 에피소드란 막간극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시트콤(sitcom)이라고 볼 수 있다. 시트콤은 situation comedy의 줄임말이다. 이 시트콤인 에피소드의 재미는 서브젝트(subject)인 주인공이 프로젝트(project)에 휘말려 결국은 오브젝트(object)가 되어버리는 데 있다. 사실상 어떤 선거든지 선거에 나서는 사람은 그 선거를 통해서 주인공이 되려고 한다. 즉 서브젝트가 되기 위해서다. 그런데 그 선거가 프로젝트를 통해서 계획되고 기획되기에 선거를 관리, 기획하는 선관위는 이 프로젝트 운영에 공정을 기해야 하며 프로젝트 되는 선관위 규정에 스스로가 투명해야 한다. 그래야 선거라는 행위를 통해서 프로젝트화 되지 못한 출마자는 자연히 오브젝트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금번 우리 선관위는 선관위 스스로가 선거를 프로젝트 하는 일에서 처음에는 법과 원칙에 의해서 투명하게 할 것을 공표했다. 그런데 지금은 사안에 따라서 법과 원칙은 적용하고 크게는 정치적 고려를 스스로 하고 법과 원칙을 스스로 무시하고 있다. 그래서 이번 총회의 선거는 에피소드로 끝나야 한다. 희극이 아닌 비극으로 말이다. 결코 희극이 되어서는 안된다. 희극이 되어버리면 계속하여 이런 일이 발생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비극으로 단 한 번 있었던 에피소드로 끝나야 한다. 그러지 아니하면 우리 총회는 미래가 없다. 선거란 양심의 자유에 의해서 행하여 져야 한다. 어떤 의미에서 선거는 ‘지지할 수 있음’과 ‘지지할 수 없음’에서 선택하는 자유의 행동이다. 그런데 이번 부총회장 선거는 이 두 가지를 다 하지 못하게 한 아주 나쁜 선거가 되었다. 처음에는 지지할 수 없음도 지지할 수 있음도 사라져 버린 단독후보로 결정되는가 했는데 이제는 ‘양해서’와 ‘사과문’이라는 요식행위를 거쳐 총대들에게 두 후보를 지지하거나 지지하지 않거나를 선택하라고 한다. 그런 막장 선거가 어디에 있는가? 누가 이렇게 선거를 어렵게 만들고, 힘들게 하고 있는가? 두 후보인가? 아니면 선거를 프로젝트 하는 선관위인가? 나는 선관위라고 본다. 이렇게 행하는 선관위는 없어져야 한다. 총회의 개혁을 위해 장로교의 정치 원리에 입각해서 말이다. 이토록 우리 헌법에 규정된 “양심의 자유”를 제한하고, 변질시키는 일은 지금까지 없었기 때문이다. 좀 더 내밀하게 부총회장 선거를 들여다보자. 누구를 선택해야 할까? ‘선거법을 위반했습니다’라고 사과한 후보를 아니면 선거법을 위반했음을 사과했기에 ‘양해합니다’라고 한 후보를 선택해야 하는가? 사실상 둘 다 문제이다. 이렇게 하려면 정치적인 고려를 처음부터 했어야 한다. 그래야 상생의 정치가 되고 화합과 이해의 정치가 된다. 그런데 한 후보자에게는 자격을 주고 다른 후보자에게는 자격을 주지 않고 미루다가 선거 막판에 선거법을 위반한 후보자에게 ‘선거법을 위반했으니 사과하고’ 이미 자격을 획득한 후보자에게는 무슨 언질(?)을 주어서 양해한다고 ‘양해서’를 쓰게 해서 두 사람 모두를 다 자격 없는 후보(?)로 만들어 버렸는지 알 수 없다. 난, ‘양해서’를 쓴 후보도 자격이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그런 불공정하고, 깨끗하지 못한 선거에 ‘양해서’를 제출하고 나가려고 하는 어떻게 보면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어서 그렇게 하는 사람이라면 총회의 지도자로서는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 같으면 ‘양해서’를 쓰지 않고 후보사퇴를 선언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사과문을 쓰고 후보의 자격을 얻어 부총회장에 출마한 후보에게도 묻고 싶다. ‘선거관리 규정을 어긴 후보입니다’라는 사과문을 쓰고 후보자가 되어야만 했는가를 말이다. 왜, 무엇 때문에 규정을 어겼다고 하는데도 굳이 그 결정을 받아들이고 사과문을 쓰고 후보가 되려고 하는가이다. 후보가 되기만 하면 선거에서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 때문이었다면 더욱 마음이 아프다. 사실상 교회의 선거는 이기고 지는 당선이 목표가 아니다. 누가 더 잘 하나님과 그의 교회를 섬길 수 있는가를 선출하는 것이기에 굳이 사과문까지 쓰고 나서야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더 잘 할 수 있을 것 같아 후보가 되려고 했는데 당신이 더 잘 할 수 있다고 난 선거규정도 지키지 못했다고 해서 후보의 자격도 주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나보다 더 잘하는 일꾼이 되십시오”라는 사퇴의 변을 내고 사퇴했다면 우리 총회의 정치는 성경적이고 헌법적인 정치가 살아났을 것이다. 선거규정 하나도 지키지 못한 후보가 어떻게 헌법을 지키고 교회를 지켜 갈 수 있겠는가 하는 반성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 두 후보자들이 사퇴하지 않고 짜고 치는 무슨 판처럼 선관위에 의해 ‘양해서’와 ‘사과문’을 쓰고 ‘서로 잘해 봅시다’ 하고 있다. 지금 우리 총회는 100회 총회 때부터 교회의 정치가 성경과 헌법에 의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교묘한 신자유주의적 심리정치의 형태를 띠게 되었다. 신자유적인 심리정치란 참으로 매우 효율적이고 영리한 시스템이다. 억압 대신 친절로, 금지 대신 유혹으로, 유권자들의 심리를 조종하는 정치이다. 이 정치는 사실 유권자들에 유리하게 되는 것 같지만 기득권자들에 유리한 정치이다. 그래서 그 심리정치에 의해 수년 전(2016년) 우리는 두 사람의 목사 부총회장 후보를 자격 없음으로 규정하여 탈락시키고 현장에서 두 후보자를 선정하여 투표하는 장로교 역사상 있을 수 없는 투표를 강행했다. 그리고 5년이 지나서는 다시 자격 없는 사람을 탈락시키는 것이 아니라 ‘양해서’와 ‘사과문’을 쓰게 하고 두 사람 모두에게 자격을 주었다. 결과적으로 더 나빠졌는지 더 좋아졌는지는 아직은 알 수 없지만 지금 이 시점에서는 나빠졌다고 볼 수밖에 없다. 모두가 법 규정 앞에서 평등해야 되는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고민한다. 선거에 임하는 나 자신도 투명하지 않고 더욱더 선거가 투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후보자인 두 사람 모두 다 자신의 욕망에 의해서 출마했고 이제 나 역시 내 자신의 욕구에 의해서 선거해야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광, 총회의 바른 정치는 언제나 구호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아예 구호도 되지 못하고 뒷전으로 밀려나 버렸기 때문이다. 선거가 장로교 정치에 맞게 되려면 사실 나와는 상관없이 작성된 ‘성명서’지만 8월 29일 전국호남협의회 이름으로 발표한 “우리의 주장을 철회하지 않을 것이며 총회 참석도 단호히 거부한다”라고 성명했기에 그랬으면 한다. 적어도 그날 참석한 450명 정도 되는 총대들은 부총회장 선거에 투표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하면 호남협의회가 지지하지 않는 후보가 선출될 것이다. 과연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아닐 것이다. 그런 ‘성명서’가 있다면 나 역시 찬조금 들고 그날 참석하지 아니했을 것이다. 우리는 결국 자격이 있든 없든 두 후보들 중에 하나를 선택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에게 우리 총회의 부 대표자와 대표자의 자격을 2년 동안 주게 될 것이다. 심각하지만 아무도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다. 심각하게 여기는 사람만이 바보이다. 사실상 나는 바보, 멍청이가 되었다. 왜냐하면 바보 멍청이가 되지 않고는 투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살다 보니 삶에서 목사로서 터득된 비결이 있다. 믿음이 없는 바보, 신학과 신앙이 없는 멍청이는 항상 세상에서 방황하고 믿음 있는 신학과 신앙에 굳게 선 자는 세상에서 여행하고 산다는 것이다. 선관위는 방황을 해도 우리 총대들은 여행을 했으면 한다.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하면 투표하지 말아야 한다. 왜? 두 후보자에게 ‘양해서’와 ‘사과문’을 쓰고 자격을 주고 우리에게 할 수 없는 투표를 하라고 하는지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투표하지 말아야 한다. 권위주의자에게는 투표하지 말자. 도덕주의자에게도 투표하지 말자. 민주주의자에게도 투표하지 말자. 아니 신본주의, 신앙 제일주의를 부르짖는 자들에게도 투표하지 말자. 수년 동안 나는 권위주의자에게 참 권위가 없고 도덕주의자에게 진정한 도덕이 없고 민주주의를 외쳤던 민주투사에게 정작 민주 의식이 없음을 보아왔고 신본주의, 신앙 제일주의인 개혁주의자들에게 참 신앙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냥 찍자. 누가 한들 나아질 총회가 아니다. 우린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믿는다. 그러나 손가락을 잘라낼 각오로 찍어야 한다. 좋은 놈(?) 중에서 좋은 놈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선관위에 의해서 나쁜 놈(?) 중에서 더 나쁘지 않을 분(?)을 선택해야 하기 때문이다. 선관위가 이렇게 후보자 두 분을 나쁜 분으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나쁘면 자격을 주지 말았어야 한다. 한 분 목사를 선택하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다섯 분의 목사를 선택하는 것이 좋을까를 기도는 하지 말고 화장실에 앉아서 매일 매일 고민해 보자. 어차피 프로젝트 된 선거에서 서브젝트를 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브젝트를 골라야 되는 선거이기 때문이다. 누가 더 개혁신학과 신앙의 반대자인가를 투명성의 원리에서가 아닌 불투명성의 원리 속에서 선택해야 되는 선거이기 때문이다. 사실상 이번 총회의 부총회장 선거는 잘못하면 지역적이고 신학적이고 광신(狂信)적 속성을 가지고 있기에 우리에게 힐링(healing)의 효과를 주지 못할 것이다. 다만 킬링(killing)이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그래서 나는 우리 총대들에게 두 분의 후보 중에서 누가 킬링하지 않을까를 생각해 보라고 하고 싶다. 그리고 그분에게 투표하라고 권하고 싶다. 왜냐하면 총신과 광신의 대결도, 영남과 호남의 대결도, 교갱과 영성의 대결도, W.E.A의 찬성과 반대의 대결이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아주 심각한 신앙적, 신학적 위기 상황에 놓여 있다. 그래서 사실 문화적 위기 상황에 대처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생각해 보자. 왜 신앙이나 신념과 다른 합리적인 견해가 신앙이나 신념의 도그마의 껍데기를 깨고 들어오면 우린 갑각류들이 발작하듯 반발한다. 나 역시 그러하다. 어느덧 내 개혁신앙과 신학이 지적 갑각이 되었고 교조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기에 신앙의, 신학의 순결함을 지키고 방어한답시고 이념적 순결주의가 되어 ‘차이’와 ‘차별’을 구분할 줄 모르면서 내 신앙과 신학의 정당성만 스스로 부여하고 신학적, 윤리적 나르시시즘에 젖어 두 후보에 대한 차이도 차별도 모른 채 내 생각과 판단에 틀리면 조롱, 내면의 비웃음과 반대로 일관하고 있음을 고백한다. 이렇게 프로젝트화 한 선관위원들을 향해 “하나님 없이, 하나님과 함께 어떻게 하느냐”고 물으면서 그들의 정치적 술수를 지켜보고만 있는 비참한 총대일 뿐이다. 이젠 비굴해지기까지 한다. 문화신학자인 리처드 니버는 “교회가 현대의 문화적 환경에 순응하기 위해 애쓰는 동안 교회의 영적 영향력은 급격히 쇠퇴해 왔다”라고 지적했다. 지금 우리 총회가 우리 총회의 정치적 환경에 순응하기 위해 이러한 선거 프로젝트를 만들고 힘쓰는 동안 우리 총회의 영향력은 총회 안에서도 그리고 사회 속에서도 급격히 쇠퇴하게 될 것은 뻔하다. 그러나 주사위는 던져졌다. 내가 투표를 하든 안 하든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은 부총회장이 될 것이다. 부탁한다. 킬링하지 말고, 힐링의 총회 정치를 세워가기를, 그리고 이 선거는 우리 교단 역사에서 한편의 에피소드로 끝나길 기도한다. 누가 부총회장이 될 것인가? 당신이 지지하는 사람, 그리고 선거관리위원장이 지지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그래도 소통할 수 있는 사람을 선택하는 것이 옳을 일일 것이다. 누가 소통할 수 있는 적임자인가를 깊이 생각해 보자. - 이 글은 2022년 9월 6일 기독신문의 ‘선관위 입장, 사과문 감사의 글’이 나기 전에 쓴 글입니다 - 2022-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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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9-07
  • 맨돈 소강석 선거법 위반 소지素地
    6.1 지방선거를 42일 앞두고 부실 선거관리로 말 많던 노정희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이 사퇴했다. 노 전 위원장은 지난 4월 18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전체 위원 회의에서 “부실 투표 관리 책임을 통감한다”라면서 “국민께 심려를 끼쳐드린 것에 대해 다시 한번 깊이 사과드린다”라며 사퇴 의사를 밝혔다. 공직선거 관리 총책임자인 노 위원장은 진보 성향 판사 모임인 ‘우리법연구회’ 출신 현직 대법관이다. 선관위원장직을 사퇴하더라도, 대법관 직위는 계속 수행한다. 노 위원장은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였던 이재명 전 경기지사의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 재판 당시 대법원 주심을 맡아 2020년 무죄 취지 판결을 주도했다. 4월 20일 정치권 등에 따르면 가장 큰 이유로는 사전투표 부실 관리에 대한 검찰 수사가 본격화하고 있다는 점이 꼽힌다. 경기남부청 반부패수사계는 지난 5일 제20대 대선 사전투표 관리 및 운영 부실 논란에 휩싸인 노 선관위원장에 대한 고발 건 수사에 본격 착수했다. 2021년 3월 20일, 4월 7일 지방선거 보궐선거를 앞두고 맨돈 소강석이 내려다보는 문재인 대통령이 “4차 재난지원금은 가급 적 3월 중에 집행되도록 속도 내달라”고 지시한 것에 대해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선거법 위반이 아니라고 했다. 재난 상황에서 대통령이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이다. 선관위 사무총장은 작년 국회에서 “총선 전 재난지원금 지급 결정이 선거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본다”라고 했다. 이번 지원금도 선거에 당연히 영향을 미칠 것이다. 선거법은 ‘공무원은 선거 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고 하고 있다. 대통령의 선거 전 재난지원금 독촉이 선거법 위반이 아니면 무엇인가. 지난 2021년 2월 이재명 승리를 위해 뛰던 문재인은 여당 대표·장관 등을 대동하고 가덕도를 찾아 “눈으로 보니 가슴이 뛴다”라고 했다. 대통령의 방문 하루 전날 민주당은 ‘가덕도 신공항 건설’이 주요 공약이라고 발표했다. 선관위는 그래도 “대통령 직무 수행”이라고 했다. 선거 심판이 아니라 정권 하수인이다. 총회 소속 목사들의 카톡 여러 모임방에 제3차 합동 포럼 개최에 관한 공고문이 올라왔다. 맨돈 소강석과 맨쇼를 벌여 죽었던 송병원을 제105회 총회 현장에서 부활시켜 장로 부총회장으로 당선시키고 절대 돈 먹은 적 없다는 이승희 사람으로 알려진 김종혁 목사가 대표회장으로 올린 공고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일시 : 2022년 8월 16일(화) 10시 30분 ~ 2시 장소 : 대전인터시티 호텔 대상 : 정회원 및 지역별 게스트 장로 3인씩 특별초청 1부 예배 설교 : 윤영민 목사(대한교회, 총신대 신학대학원 교수) 축도 : 김상현 목사(목장교회, 기독신문 사장대행) 2부 축사 및 특강 축사 : 소강석 목사(새에덴교회, 증경총회장) 현 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 직책이 빠져 있다. 배만석 목사(사랑스러운교회, 전 총신대 신대원 총동창회장) 장봉생 목사(서대문교회, 은혜로운동행기도회 본부장) 환영사 : 대표회장 김종혁 목사 특강 : 송삼용 목사(하늘양식교회, 고려대학교 법학박사 과정)_ 윌버포스와 합동 포럼의 비전 제107회 선거기간에 제106회 선거관리위원장으로서 제107회 선거관리 중책을 맡은 맨돈 소강석이 선거법 개악과 금권 부정 선거 달인임에도 축사를 한다. 이 모임은 선거에 영향을 미치는 총회 정치꾼들의 모임이다. 8월 16일 대전인티시티호텔에서 모인다. 도대체 오비이락의 의혹이 있는 모임을 왜 갖는 것이고 엄정한 선거관리의 책임을 진 선거관리위원장임에도 맨돈 소강석은 누구를 위해 무슨 축사를 하는가. 그 행위가 총회 선거법을 위반하는 소지가 있음을 모른단 말인가. 그 주최 측 핵심인물로 추측되는 언론인은 이번 선거 특정 후보와 아주 가까운 사람으로 알려져 있는데 노예제 폐지 업적을 이룬 영국의 정치인을 내세운 특강은 총회 소속 목사이고 언론인인데 고려대학교 법학박사 과정의 연구생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 의아하다. 대한민국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위원은 특정 정당에 가입하거나 정치 활동 또는 정치에 관여하는 것이 금지되어 정치적 중립성을 지켜야 하며 헌법과 법률로 위원의 임기와 신분을 보장하여 외부의 간섭과 영향을 배제함으로써 직무의 공정성을 확보한다. 총회선거규정은 위원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제6조(조직 및 직무) 1. 위원장: 위원회를 대표하여 선거관리의 제반 사항을 총괄한다. 9. 모든 입후보자는 소정의 양식을 따라 “공명선거 서약서”를 위원회에 제출해야 하며, 그 내용은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헌법과 총회 규칙 및 선거규정 등을 비롯한 제반 결의에 대하여 성실히 준수할 것과 선거와 관련하여 총회와 선거관리위원회 등에 대하여 사회법에 의거 민, 형사상 제소, 고소, 고발 등을 하지 않기로 서약합니다."로 한다. 제26조(선거운동의 범위와 한계) 1. 총회임원, 상비부장, 공천위원장 및 기관장, 재판국원, 선거관리위원(선출직), 총회 총무 입후보자(이하 ‘입후보자’라 함) 및 그 지지자는 선거기간 중 일체의 금품 요구 및 금품 수수(金品授受)를 할 수 없다. 4. 선거운동 기간은 등록 마감일부터 총회 개회 전일까지로 하며, 모든 입후보자는 선거운동 기간 시작일 2개월 전부터 소속 교회, 소속 노회 이외의 교회, 노회, 총회 산하 모든 예배 및 행사에서 일체의 순서를 맡을 수 없다. 선거운동기간이 종료한 후, 총회 개회 일부터는 교인 동원 및 문자 전송 등 일체의 선거운동이 금지된다. 위반 시에는 후보자격이 상실된다. 단, 부임원으로서 정임원 후보인 경우와 단독후보로 출마하여 선거관리위원회의 허락을 받은 경우는 예외로 한다. 총회선거법 제26조 4항은 ‘선거운동 기간은 등록 마감일부터 총회 개회 전일까지로 하며 모든 입후보자는 선거운동 기간 시작일 2개월 전부터 소속 교회, 소속 노회 이외의 교회, 노회, 총회 산하 모든 예배 및 행사에서 일체의 순서를 맡을 수 없다’라고 규정하는데 그것을 관리하고 감시해야 할 선거관리위원장은 온갖 행사에 참여해 맨쇼를 하며 어겨도 되는 것인가. 그러한 특권은 사회법과 총회선거법에서도 금하는 금품 수수의 맨돈 위력에서 나오는 것인가. 제28조(선거규정 위반자 처벌규정) 2항은 다음과 같이 엄하게 규정한다. 본 규정 제26조 1항과 2항을 위반한 자로서 금품제공자는 영구히 총회 총대 및 공직을 제한하고 금품을 요구 및 받은 자는 금액의 30배를 총회에 배상하며 위반 즉시 10년간 총회 총대 및 공직을 제한하되 그 기간은 배상금을 총회 입금일로부터 계수한다. 목사임에도 성이 차지 않아 배광식도 소지한 법학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언론인으로 알고 있다. 총회 선거기간의 정치적인 특강에 앞서 옛 선비들도 금과옥조(金科玉條 금이나 옥처럼 귀중히 여기어 꼭 지켜야 하는 법칙이나 규정)로 삼은 오비이락(烏飛梨落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는 뜻으로 아무 상관도 없이 한 일이 공교롭게도 때가 같아 억울하게 의심을 받거나 난처한 위치에 서게 됨을 이르는 말)의 불미(不美)한 일을 저지르지 않기를 바란다. 특히 맨돈 소강석은 제발 정신을 차리고 총회 선거관리위원장의 본분과 목사의 직분을 되새겨 맨돈과 맨쇼를 삼가 바로 서기를 바란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얻는 데 매우 열심이었다. ‘지혜에 대한 사랑’(philo-sophia)을 하나의 학문으로 만든 사람들이 그리스인들이다. 하지만 그리스인들에게는 지혜에 대한 사랑에 어울려 보이지 않는 관습도 있었다. 그들은 개인적인 일에서나 공무에서나 결정을 내리기 위해 신탁에 조회했다. 지혜로운 사람들이 왜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신의 계시에 의지했을까? 그들이 신탁에 의지한 것은 지혜의 부족 탓일까, 지혜로움 때문일까. 신탁에 의지한 그리스인들은 어리석은 사람들이었을까. 그들이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신의 지혜를 구한 까닭은 인간 지혜의 한계를 알았기 때문이다. 인간 지혜의 부족함을 인정한 것이 바로 그들의 지혜였다. 신탁의 뜻을 해석하면서 그리스인들은 더 지혜로워졌다. 신적인 계시의 뜻을 묻고 따지는 과정은 인간적 지혜를 갈고닦는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 세계에 널리 퍼져 있던 신탁의 관습은 신탁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묻고 따지고 시험하는 지혜’, ‘사람들의 지혜를 모으는 지혜’를 가르쳤던 것이다. 델피의 아폴론 신전 입구에는 수많은 권력자의 어리석음을 경계하는 경구가 새겨져 있었다. “너 자신을 알라.” “과도함을 삼가라.” 이 두 경구가 왜 거기 새겨져 있었을지는 역사적 지식을 동원하지 않아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과욕에 사로잡힌 자에게 어떻게 신의 뜻이 올바로 전해질 수 있을까? 자기를 모르는 사람이 무슨 일을 제대로 할 수 있겠나? 그러니 “너 자신을 알라”와 “과도함을 삼가라”는 신탁에 앞서는 신탁, ‘최고의 신탁’이었다. 이를 누구보다 더 잘 알았던 사람들은 그리스 철학자들이다. ‘지혜에 대한 사랑’은 따지고 보면 인간의 한계를 알고 지나침 없는 행동의 지혜를 찾는 일이었으니까. 성경은 말씀한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고전 1:22-25 2022-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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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G.COLUMN
    2022-08-12
  • 윤석열 대통령 대처 수상처럼
    윤석열 정부의 동시다발적 사정(司正)작업이 속도를 내고 있다. 검찰을 비롯해 경찰과 감사원 등 기존 사정 기관은 물론이고 법무부, 국토교통부, 통일부와 같은 정부 각 부처까지 전 정권 관련 각종 의혹 파헤치기에 나서고 있다. 이전의 경우 정권교체 후 벌어진 사정 작업이 주로 과거 정권에 초점이 맞춰졌다면 윤석열 정부의 사정 작업은 문재인 정부는 물론이고 현 야당 유력주자인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의원을 함께 겨냥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과거와 현재 권력 모두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도덕과 합리주의의 기원을 밝히려는 작업에 매진한 독일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년 10월 15일 ~ 1900년 8월 25일)는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천성적으로 호전적이다. 공격은 내 본능의 일부다. 적이 될 능력을 갖추는 것, 적이 되는 적은 강한 천성을 전제로 하며 그 까닭에 저항을 찾아다닌다... 공격하는 자의 힘에 대한 일종의 척도는 그에게 필요한 적대자에게서 찾을 수 있다. 강력한 맞수를 찾아나서는 과정이나 또는 문제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발전이 이뤄진다. 호전적인 철학자는 승부를 건 문제들에 도전하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어쩌다 우연히 나타나는 저항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힘과 융통성과 무기를 동원해야만 맞설 수 있는 저항들 그리고 자신과 동등한 힘을 지닌 적을 굴복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정치인은 1979년부터 1990년까지 영국의 총리를 지낸 마가릿 대처(Margaret Hilda Thatcher, 1925년 10월 13일 ~ 2013년 4월 8일)가 당수가 된 것을 한 번의 요행으로 여겼고 오래갈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당을 이끌고 처음 2~3년 동안 노동당이 정권을 잡은 시기에 대처를 바라보는 정치인들의 시선은 거의 바뀌지 않았다. 그녀는 사회주의 체제를 매도했다. 그녀가 보기에 사회주의는 경제적 이니셔티브를 모두 질식시켜서 영국 경제를 사양길로 접어들게 한 주범이었다. 그녀는 당시의 화해 무드를 깨고 소비에트연방을 힐난했다. 1978년과 1979년에 걸친 겨울, 몇 개의 공공부문 조합이 파업을 결의했다. 대처는 정면돌파를 감행하면서 노동당과 제임스 캘러핸 총리를 이 파업과 결부시켰다. 이것은 대담하고 분파적인 발언으로서 저녁 뉴스를 장식하기에 딱 좋았다. 그러나 선거의 승리에는 도움이 안 되는 행동이었다. 문재인처럼 유권자들을 부드럽게 대하고 안심시켜야지 겁을 주어서는 안 될 일이니 말이다. 최소한 좌파가 득세한 당시의 영국은 그것이 전통적인 상식이었다. 대처는 지금까지 유권자들을 당황하게 해왔지만 총리가 된 이상 논조를 절제하고 상처를 치유할 필요가 있었다. 여론 조사에 따르면 지금 윤석열 시대처럼 그것이 대중이 원하는 바였던 모양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윤석열 대통령처럼 대처 총리는 언제나 그랬듯이 정반대로 행동했다. 그녀는 예산 삭감 법안을 통과시켰다. 그것도 선거 때 공약한 것보다 훨씬 더 큰 규모의 삭감이었다. 대처 총리의 정책이 진행될수록 캘러핸이 주장했던 대로 경제는 충격에 빠졌고 실업률이 치솟았다. 같은 당의 남성 의원 다수가 수년간 자신들을 대해온 대처의 처신에 더 이상 분개를 참지 못하고 이준석과 이재명처럼 공개적으로 그녀의 능력을 문제 삼았다. 대처는 보수당에서 가장 존경받는 온건한 의원들을 ‘나약하고 감상적인 사람’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들은 대처가 국가 경제를 파탄에 빠뜨림으로써 자신들의 정치 경력에 오점이 남을까 봐 두려워했다. 대처 총리는 그들을 내각에서 추방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그녀가 작심하고 모든 반대자를 밀어낼 기세였다. 적들의 영역은 점점 커졌고 그녀의 인기는 지금의 윤석열 대통령처럼 하락 일로에 놓여 있었다. 벌써 탄핵을 들먹이는 윤석열 반대 여론처럼 다음 선거에 그녀가 끝장날 것이 틀림없었다. 1982년 대서양 반대편에서 아르헨티나 군사정권이 러사아의 푸틴처럼 국내에 산적한 문제로부터 주의를 분산시킬 목적으로 포클랜드섬을 침공했다. 포클랜드는 영국령이었지만 아르헨티나는 자국의 영토임을 주장했다. 군사정권 관리들은 영국이 본토에서 멀리 떨어진 데다 불모지인 포클랜드를 포기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대처는 주저하지 않고 포클랜드에 해군 특수부대를 파견했다. 1만3천 킬로미터에 달하는 먼 거리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노동당 지도자들은 무의미하고 희생이 큰 이 전쟁을 비난했다. 당내에서도 다수가 두려움에 휩싸였다. 섬의 재탈환에 실패한다면 보수당은 파멸할 것이라는 두려움이었다. 대처는 그 어느 때보다 고독했다. 그러나 다수 대중이 그녀의 자질을 새롭게 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그들을 초조하게 만들어놓던 바로 그 자질을 말이다. 완고한 고집이 이제는 용기와 고결한 기품으로 보였다. 우유부단하고 겁 많은 데다 제 경력만 챙기는 주위의 남성들에 비하면 대처 총리는 단호하고 강해 보였다. 영국이 포클랜드를 탈환하는 데 성공하자 대처는 그 어느 때보다 더 위대해 보였다. 삽시간에 국내의 사회, 경제적 문제가 잊혀졌다. 대처는 정치무대를 장악했고, 다음 두 번의 선거에서 노동당에 압승을 거두었다. 윤석열처럼 마거릿 대처도 아웃사이더로서 권력의 정점에 도달했다. 중산계급의 여성이고 우익 과격파였기에 주류와는 거리가 멀었다. 대부분의 아웃사이더는 권력을 얻기 위해 본능적으로 우선 인사이더가 되려 하지만(아웃사이더로 살기는 고달픈 일이기 때문이다). 정작 그렇게 하면 자신의 정체성이 모호해지고 윤석열 검찰총장 시절 여느 검찰총장과 달라 세간의 이목을 모으던 차별성을 잃어버리게 된다. 마찬가지로 대처가 주위의 남성들처럼 행동했다면 다른 남성이 그 자리를 빼앗는 것은 시간문제였을 것이다. 그녀의 본능은 아웃사이더로 머무는 것이었다. 실제로 그녀는 가능한 한 멀리까지 아웃사이더로서의 영역을 확장했다. 남성들의 군대에 대항하여 한 명의 여성으로서 자리매김한 것이다. 지금의 윤석열처럼 당당한 대처 역시 덧없고 치상적인 대중적 인기 따위에 영합하지 않았다. 김종인 같은 정치꾼들은 지지도의 수치에 일희일비할지 모른다. 그러나 유권자들의 마음(즉 정치가들이 전쟁을 하면 얻으려고 하는 목표물)은 호감을 주는 인사보다 우위를 차지한 인사에게 끌리게 마련이다. 일부 대중이 미워하더라도 내버려 두어야 한다. 맨돈 소강석처럼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려고 맨돈만 뿌릴 수는 없는 법이다. 윤석열 대통령과 첨예하게 대립하는 자들, 거짓의 제왕 이재명이나 내부 총질이나 해대는 자들이야말로 윤석열 대통령이 든든하게 의지할 정치적 토대를 구축하는 데 도움을 줄 존재다. 그래야 피아가 구분되고 적과 아군이 드러날 것이다. 내부 총질이나 해대는 일이나 작금의 이런저런 상황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윤석열 대통령을 눈 가리고 아웅 식 여론 조사 한가운데로 밀어 넣으려고 할 것이다. 이는 정파에 국한된 얘기가 아니다. 그런 허위의 한가운데는 정치꾼과 언론꾼이 설치는 이권 타협의 영역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과 사이좋게 지내는 것도 중요한 기술이긴 하지만 위험이 따른다.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언제나 저항이 가장 적고 우호적인 경로만을 찾다 보면 자기가 누구인지 망각하게 되고 조국과 추미애처럼 우왕좌왕하는 어중이떠중이들과 함께 수렁으로 가라앉고 말 것이다. 스스로를 적들에게 둘러싸인 아웃사이더로, 투사로 여겨야 한다. 끊임없는 전투는 윤석열 대통령을 정의의 용사로 강인하고 기민하게 만들 것이다. 좌파 무리들과의 반목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대처 수상처럼 반목 없이는 전투도 없고 전투가 없으면 승리할 기회도 없기 때문이다. 파업을 즐기는 자들의 호감을 사야 한다는 문재인 패거리의 유혹이 아니라 대처 수상의 정면돌파 대처를 본받아 민노총의 파업 병을 타파해야 할 것이다. 그런 자들에게 양보해지기보다는 불법을 타파하고 이겨 존경받고 심지어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편이 나을 것이다. 대통령은 현재만이 아니라 나라의 미래와 미래 세대(世代)에게도 책임을 져야 하는 자리다. 불법하고 불의한 적들에 대해 승리를 거둘 때 얻는 인기가 더 오래 지속되는 법이기 때문이다. 특수부 검사 출신의 한 변호사는 요즘 진행되고 있는 과거 정권의 수사 정국에 대해 “통상 이런 사정 작업의 최종 종착역은 전직 대통령이 되는 것이 과거의 전례였는데 과연 어느 시점에 전 대통령의 이름이 흘러나오느냐가 정치권의 최대 관심사가 아니겠느냐”라고 말했다. 중국 춘추시대의 전략가 손자(孫子 BC 545년경~BC 470년경)는 '손자병법'에서 대처 수상이 실행한 것처럼 말했다. 적이 오지 않기를 바라지 말고 적이 오기를 대비하라. 윤석열 대통령은 누가 이러니저러니 해도 대처 수상처럼만 하면 영국병을 고친 대처 수상처럼 한국병을 고친 위대한 대통령으로 자리매김하게 될 것이다. 거리로 나서 선동하는 좌파 무리가 있다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광장의 소리 전광훈 목사의 외침과 기도 그리고 그를 따르는 자들의 함성이 그들을 무너뜨릴 것이다. 2022-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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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8-08
  • 총회 정치가 김상현에게 묻는다
    총회 무게 있는 부서의 장을 용하게 맡는 재주의 정치가 김상현이 총회 화합의 사도 박병석 목사 방장 카톡방에 이런 글을 올렸다. 죄송합니다만 될 수 있으면 정치 이야기하지 말고 은혜받는 혹은 미담 이야기했으면 합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 6:7)에 근거하고 그간의 유력 신문 기사를 살펴 카톡방에 올린 다음과 같은 글 때문이었던 것 같다. 문재인이나 배광식의 서사는 극적이지만 진실에 대한 믿음이 없다. 비겁하기 때문일 것이다. 권력에 집착했으면서 초연한 척하고 사익를 탐했으면서 개결한 척한다. 무사안일을 갈구하면서 당당한 척하고 잘못했으면서 정당한 척한다. 그들의 재임은 의심과 허위의 기간이다. 맥베스에서의 셰익스피어 표현을 빌리면 “아라비아의 향수도 그의 손을 향기롭게 할 수 없을 것이다.” 주님을 내려다보며 손을 씻는 빌라도처럼 능청스레 변명해도 후일 역사는 바르게 기록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성경 말씀대로 뿌린 대로 거둘 것이다. 정치라는 말은 고대 중국의 유교 경전인 “상서(尙書)”에서 ‘道洽政治’라는 문장으로 처음 등장한다. ‘정치’(政治)에서 ‘정’(政)은 바르게 하기 위해 일을 하거나 바르게 하도록 회초리로 치는 것을 뜻하는 합성어이다. 정(政)은 특히 자신의 부조화스러운 면을 다스려 극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치(治)는 물(水)이 넘쳐 생긴 피해를 잘 수습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치(治)는 특히 다른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들의 부정하고 부조화한 면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정치(政治)는 자신과 다른 사람의 부조화와 부정적인 것을 바로잡아 극복하는 일이다. 이러한 의미에는 다른 사람을 지배한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돕는다는 의미가 주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정치(政治)는 자신과 다른 사람의 부조화와 부정적인 것을 바로잡아 극복하는 일이다. 다른 말로는 수기치인(修己治人) 즉 자신을 닦은 후 남을 돕는 게 정치다. 따라서 정치가(政治家)는 먼저 세상과 자연의 이치에 조화하지 못하는 자신의 부정적인 측면을 다스려 극복한 후 그것을 바탕으로 다른 사람의 어려움, 곤란함, 부조화로운 면을 제거하는 것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 즉 군자 또는 의인을 의미한다. 배광식이 총신 졸업생들에게 전한 성경 말씀 내용이 정치의 본뜻이고 유교 경전인 “상서(尙書)”에서 ‘道洽政治’라는 문장도 그런 뜻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총신 졸업식장의 배광식을 통해 성경은 말씀한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롬 12:2 김상현의 말이나 행동과 달리 1907년 9월 17일 평양 장대재교회에서 소집된 대한예수교장로회 제1회 노회(독 노회) 시 신경과 규칙을 정식 채용한 최초의 헌장에 근거해 제정되고 공표된 총회 헌법 정치편에서 정치에 대해 이렇게 규정하고 있다. 제1장 원리 예수교 장로회 정치의 일정한 원리 8개 조가 있으니 이것을 이해하여야 교회의 성질을 알 것이다 제1조 양심 자유 양심의 주재는 하나님뿐이시라, 그가 양심의 자유를 주사 신앙과 예배에 대하여 성경에 위반되거나 과분(過分)한 교훈과 명령을 받지 않게 하셨나니 그러므로 일반 인류(人類)는 종교에 관계되는 모든 사건에 대하여 속박을 받지 않고 각기 양심대로 판단할 권리가 있은즉 누구든지 이 권리를 침해(侵害)하지 못한다. 제2조 교회 자유 1. 전조(前條)에 설명한 바 개인 자유의 일례(一例)로 어느 교파 어느 교회든지 각기 교인의 입회 규칙과 입교인 및 직원의 자격과 교회 정치의 일체(一切)조직을 예수 그리스도의 정하신 대로 설정(設定)할 자유권이 있다. 2. 교회는 국가의 세력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오직 국가에서 각 종교의 종교적 기관을 안전 보장하며 동일시(同一視)함을 바라는 것뿐이다. 제3조 교회의 직원과 그 책임 교회의 머리 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지체된 교회에 덕을 세우기 위하여 직원을 설치(設置)하사 다만 복음을 전파하며 성례를 시행하게 하실 뿐 아니라 신도로 진리와 본분을 준수하도록 관리(管理)하게 하신 것이라. 이러므로 교우 중에 거짓 도리를 신앙하는 자와 행위가 악한 자가 있으면 교회를 대표한 직원과 치리회가 당연히 책망하거나 출교할 것이라. 그러나 항상 성경에 교훈한 법례(法例)대로 행한다. 제4조 진리와 행위의 관계 진리는 선행의 기초라 진리가 진리 되는 증거는 사람으로 성결하게 하는 경향(傾向)에 있으니 주 말씀하시되 ‘과실로 그 나무를 안다’ 하심과 같으니 진리와 허위(虛僞)가 동일(同一)하며 사람의 신앙이 어떠하든지 관계없다 하는 이 말보다 더 패리(悖理)하고 더 해로운 것은 없다. 신앙과 행위는 연락하고 진리와 본분은 서로 결탁(結託)되어 나누지 못할 것이니 그렇지 아니하면 진리를 연구하거나 선택할 필요가 없다. 또한 김상현의 말대로라면 세례 요한은 당시 집권자인 헤롯의 비리를 정치적으로 지적한 죄로 목이 잘렸다. 성경은 그 사건을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전에 헤롯이 그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로 요한을 잡아 결박하여 옥에 가두었으니 이는 요한이 헤롯에게 말하되 당신이 그 여자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 하였음이라 헤롯이 요한을 죽이려 하되 민중이 저를 선지자로 여기므로 민중을 두려워하더니 마침 헤롯의 생일을 당하여 헤로디아의 딸이 연석 가운데서 춤을 추어 헤롯을 기쁘게 하니 그가 제 어미의 시킴을 듣고 가로되 세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담아 여기서 내게 주소서 하니 왕이 근심하나 자기의 맹세한 것과 그 함께 앉은 사람들을 인하여 주라 명하고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옥에서 목 베어 그 머리를 소반에 담아다가 그 여아에게 주니 그가 제 어미에게 가져가니라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하고 가서 예수께 고하니라 마 14:3-12 성경은 김상현의 말대로라면 그가 지적하는 정치 기사로 넘친다. 그것은 어떻게 해야 할까. 성경에서 그 부분들은 제하고 읽고 따라야 하는 것인가. 총회 산하 수도노회 소속 목사인 김상현은 무엇을 믿고 살고 총회 정치인으로서 무엇을 위해 왜 정치하는지를 총회 정치가 김상현에게 묻는다. 세례 요한처럼 목이 잘릴 염려는 전혀 없겠지만 대한민국의 법정에 피소당할 수도 있는 각오는 가지고... 2022-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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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G.COLUMN
    2022-02-16
  • 총회장이 되려는 이유
    얼마 전 미국의 존경받는 정치인 밥 돌(Robert Joseph "Bob" Dole, 1923년 7월 22일~2021년 12월 5일) 전 공화당 상원의원이 별세했다. 제2차 세계대전 참전용사로 신체적 장애를 극복하고 정계에 진출해 미국의 공화당 정치인으로 캔자스주를 대표하여 연방 하원 (1961년~1969년)과 연방 상원(1969년~1996년)을 지냈으며 1996년 미국 대통령 선거 공화당 후보였다. 2021년 12월 5일 (98세) 그의 별세 소식에 추모의 물결이 이어졌다. 워싱턴 내셔널 몰에서 열린 공식 추모식에 영화배우 톰 행크스가 참석했다.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 출연했던 그는 과거 돌 전 의원이 이끌었던 제2차 세계대전 기념비 건립 운동에 참여한 바 있다. 그는 추모사에서 돌 전 의원이 들려준 삶의 교훈에 대해 얘기했다. “바르게 말하라, 그것이 당신을 곤란하게 만들지라도. 정치적 견해 차이가 공동의 선을 추구하는 데 방해가 돼서는 안 된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워싱턴 국립대성당에서 열린 장례식에서 20여 분에 걸쳐 매우 긴 추모사를 낭독했다. 함께 의회를 누비며 우정을 쌓아온 오랜 정치 지기의 별세 소식에 침통한 모습이었다. 추모사 중에서 조문객들의 웃음을 자아낸 대목이 있다. “우리 솔직히 말하자. 밥 돌은 언제나 솔직한 사람이었다. 결점이 될 때까지(to a fault).” 사람의 좋은 성격을 나타내는 형용사 뒤에 붙은 ‘to a fault’ ‘결점이 될 때까지’라는 표현은 밥 돌에게 과한 측면이 있었다는 것이다. 돌 전 의원의 솔직함에 대해 흉을 보려는 의도가 아니라 매우 고결한 성품이었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분열의 정치를 염려하며 “타협(compromise)은 결코 더러운 단어가 아니다”라고 누누이 강조했던 노(老) 정객이 남긴 마지막 메시지라고 한다. 그는 “아이들이 너무 빨리 좌절하거나 꿈꾸기를 포기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나의 모자란 어린 시절을 얘기하는 것”이라고 했다. 담임선생님의 평가를 앞세웠던 그의 소개 글은 이렇게 이어진다. ‘그 당시에 나는 책을 읽으며 공상하는 걸 좋아하고 예쁜 것에 관심이 많은 학생이었다. 지금도 나는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 기죽지 않고 신나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 유쾌한 그 고백은 아이들을 향해 있다. 자신이 아닌 다른 이를 위해 기꺼이 부족함을 드러내는 그의 용기가 더 빛나게 느껴지는 이유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성적표에 써 준 글이다. ‘책을 많이 읽는 듯하나 이해력이 떨어지고 외모에 무지 신경을 씀.’ 공부를 못했고 초중고교 시절을 통틀어 글짓기상은 단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다. 오락부장을 도맡아 소풍, 수학여행을 가면 먼저 나가 노래하고 춤췄다. 총회장을 지낸 소강석, 현재 총회장 배광식, 그리고 2년 뒤 총회장이 되고 싶은 장봉생 등에게 총회장을 하려는 이유를 물으면 이렇게 답할 수 있을까. “목사가 되어 총회장이 되려면 공부 잘하고 성공해야 한다고 생각하잖아요. 믿음의 아이들에게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말해주고 싶었어요. 공부 못하고 좋은 평가를 못 받아도 미래의 내 모습을 마음껏 꿈꿀 수 있다고요.” 그리고 그들은 이런 추모사를 다른 총회장에게서 들을 수 있을까. 조문객들의 웃음을 자아낼 수 있는... “우리 솔직히 말하자. 죽음 앞에 선 이번 증경 총회장은 언제나 솔직한 사람이었다. 결점이 될 때까지(to a fault).” 2022.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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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G.COLUMN
    2022-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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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효상 칼럼_ ‘트롯’ 전성시대가 주는 것?
    요즘은 ‘트롯(trot)’이 대세다. 전성시대를 맞이하고 있다. <미스 트롯>,<미스터 트롯>이 코로나 감염이 폭증하던 한복판에서 TV조선에서 방송되며 시청률 28.6%(분당 최고 시청률 30.2%)로 종합편성채널 10년 역사 이래 지상파를 포함한 전 채널 예능 프로그램 첫 방송 역대 최고 시청률 기록하며 대한민국 트롯 오디션의 신기록을 보여주었다. 그동안 ‘트롯’은 명절이면 씨름대회와 함께 텔레비전에서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요즘은 TV만 틀면 트롯이 나온다. 뉴스(news) 팔이가 본업인 종편 매체가 트롯 쇼 프로그램 하나로 먹고 산다. 1년 전에 뽑은 <미스터 트롯> 가수들로 재탕, 3탕, 4탕 계속 찐하게 수익을 짜내고 신상 <미스 트롯2>까지 대박이다. 기가 막힌 사업모델이요, 아이템이다. 방송 채널마다 앞다투어 트롯이다. 시청률 고공행진 못지않게 얼마 전 열렸던 <미스 트롯2> 경선에서는 시청자의 문자투표가 400만 명을 넘어 섰다니 놀랄 노 자(字)다. 팬심이 나무라면 응원 문자투표는 열매인 셈이다. 국민들이 응원하고 국민들이 우승자를 선택하는 말 그대로 오픈(open) 경선(競選)이다. 민심을 읽지 못하는 어느 정당도, 정치도 이를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대단하다. 요즘 유행을 창조하는 대세는 레트로(retro)가 아닌 뉴트로(new-tro)다. 복고(retro)를 새롭게(new) 즐기는 뉴트로(new-tro)다. 트롯이 그렇다. ‘옛것’의 가치에 ‘요즘것’의 새로움을 더한 뉴트로는 잊혀졌던 옛것의 재발견이라고 할까. 도대체 <미스 트롯>, <미스터 트롯>이 어떤 매력이 있기에 이토록 사람들이 빠져들고 열광할까. 사람들은 트롯에서 무엇을 찾고 있는가. 이 시대 트롯이 주는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 시청자들이 선택하는 공정한 오디션(audition)이다. 무명가수의 삶에서 오디션을 통해 일약 스타가 되었다. 세상사 ‘새옹지마(塞翁之馬)’라고 했던가. 한 치 앞을 알 수 없다. 미스 트롯에서 발견한 것은 생계형 행사장 가수의 가슴 아픈 모습이었다. 노래가 생업이지만 오를 무대가 없어 생계가 어려워지고 살아갈 희망마저 포기했던 그들에게 기회가 온 것이다. 그런 모습으로 장터, 행사장을 뛰어다니는 트롯 가수들의 아픔을 진솔하게 많은 시청자에게 전달됐고 그들을 다시 보게 되는 그런 의미가 있었다. 치열한 패자의 부활전, 인생 역전에 도전한 그들의 삶이 담겨 있었다. 노래만이 아니라 인생이 그렇다. 마이크 하나 들고 전국을 떠돌며 노래 하나로 살아온 그들이 시청자들의 선택에 의해 영웅으로 등장했다. 신선했고 자랑스러웠다. 박수받아 마땅하다. 그 중심에는 공정한 오디션 프로라는 장 <미스 트롯>의 송가인, 홍자 이후, <미스터 트롯>의 임영웅이 나왔다. 또 <미스 트롯2>의 양지은과 새로운 인물들이 계속 등장하고 있다. 추운 겨울이 가고 봄이 오듯 우리네 인생도 그러하다. ‘트롯’이라는 노래는 얼마나 어떻게 숙성시켰는지에 따라 깊이와 감동이 다르다. 남의 노래를 흉내 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노래를 자신의 이야기로 풀어가는 것이 실력이었다. 아픔을 딛고 저마다 가진 인생 스토리를 풀어내고 있다. 우리와 다르지 않다. 그들은 어려운 여건에서도 꿈을 갖고 성실히 노력하면 언젠가는 눈부시게 아름답게 비상한 날이 온다는 것을 보여줬다. 그들은 젊은이들에게 또 다른 꿈을 품게 하였고 세상에 희망이 되었다. 최근 몇 년 동안 ‘금수저’라는 신조어가 논란되었고, 우리 사회에는 ‘공정’과 ‘정의’가 깨어지고 노력한 것이 결과로 나타나지 않는 우울함을 던져 주었다. 부모의 힘과 재력으로 노력 없이 무임승차해서 누리는 삶을 사는 이들을 보며 평범한 젊은이들은 삶의 의욕을 잃고 좌절할 때 자신의 가진 재능 하나로 다시 재기하는 역전의 드라마는 보는 이들을 황홀케 했다. 얼마 전 연세가 있으신 지인께서 요즘 트롯에 심취하여 카세트테이프(cassette tape)를 찾으셔서 예전의 70~80년대의 테이프를 어렵게 구해 드렸다. 트롯에 감동을 받고 영혼과 마음이 위로를 받는다는 것은 감사한 일이다. 하지만 부르는 가수들 역시 스스로가 자신의 노래에 사람들에게 위로가 되고 있다는 사실에 기뻐하고 감사해 한다. 우리나라 사람만큼 노래를 즐기는 민족도 드물다. <미스 트롯>이나 <미스터 트롯>의 주인공들이 주는 것은 위로만이 아니다. ‘연예인’이라는 특수성이 아닌 우리와 같다는 친근한 대중성에 있다. 마치 동생 같고, 옆집의 아들딸 같아 친근스럽다. 그들은 요즘 또래의 청년들이 놓치기 쉬운 아름다운 품성과 함께 겸손과 배려가 묻어 있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앞이 보이지 않는 오랜 무명시절을 겪으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보여준 반듯한 삶의 자세는 그들의 노래와 함께 보는 이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감동이 된다. 출전자는 모두 경쟁자다. 그러나 경쟁이 의미가 없다. 다들 눈물의 시간을 보내며 밑바닥을 경험하였기에 이미 경쟁자가 아니라 함께 하는 동역자가 된다. <미스터 트롯>의 임영웅과 영탁, 장민호도 세 사람은 경쟁자다. <미스 트롯2>의 양지은, 홍지윤, 은가은, 별사랑 등 하지만 그들은 서로 격려하고 칭찬하고 상대의 잠재능력을 끄집어내서 높여 준다. 그들의 끈끈한 우정과 의리는 함께 가야 오래 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더불어 우리는 그들을 보며 경쟁 관계에서 잃어버린 건전한 파트너쉽(partnership)이 얼마나 소중한지 깨닫게 된다. 그들은 무명시절을 겪으며 갈증과 결핍으로 포만감을 느껴 본 순간이 별로 없었을 텐데도 이제 비로소 받은 진수성찬 앞에서 허겁지겁 자신만의 욕심을 채우지 않는다. 상대방의 빈 접시에 음식을 덜어주고 서로서로 맛있게 먹는 걸 지켜보며 미소 짓는 여유와 배려가 있다. 감성의 시대다. 서로 경쟁하고 제압하고 자기편을 만들어야 살아남는 현실에 국민은 피곤하다. ‘트롯’은 코로나로 일상에서 피곤하고 지친 세대에 위로를 주었다. 우리는 오랫동안 성악이나 가곡처럼 악을 쓰듯 내지르는 큰소리에 긴장하고 지쳐 있었는데 비로소 이야기하듯 30초에서 90초 매직(magic)으로 다가와 다정다감한 노래를 만나 위로를 받기 시작했다. 노래를 통해 위로받을 수 있다는 건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그들의 노래를 듣고 있노라면 마치 누군가가 내 언 손을 잡아주고, 시린 가슴을 덥혀주고, 퉁퉁 부은 발이 푹신한 털신 속으로 쏙 들어갈 때의 그런 편안함과 따뜻함이 있다. 하루하루 인기가 하늘을 찌르고 있는 <미스 트롯> <미스터 트롯>, 하지만 최근 많은 문제가 없는 건 아니다. 지나친 팬심이 경쟁이 되어 악성 댓글이 양산되기도 했고 과거의 일 때문에 하차를 하는 참가자도 등장하고 있다. 사실 음악성보다 지나친 노출의 선정성, 가벼운 노래만으로 흥행성을 돋우려는 진행에는 한계가 있어 보인다. 정통 트롯이라면 어린이들의 재롱 잔치를 넘어 세대를 아우르는 노력이 더 필요해 보인다. 정통 트롯을 말하는 시청자, 관객 중 <미스 트롯2> 오디션에서 별사랑은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정통 트롯의 교과서라고 할 수 있는 자신만의 노래를 불렀다. 힘들게 코로나를 견디는 지금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건강한 삶을 살아가려는 그런 이들을 보고 싶어 한다. 그래야 지치지 않고 위로받고 힘을 얻을 수 있으니까. 그들이 그런 역할을 착실히 해내고 있다. 코로나의 불안 속에서 트롯의 열풍으로 이어지는 대중의 마인드를 읽는 것은 중요하다. 문화 현상, 문화 코드를 제대로 읽어야 사회가 발전한다. 보고 읽고 생각하고 글 쓰고 발표하고 몸부림치므로 세상을 읽는 혜안을 가지게 되는 것 아닐까. 트롯 전성시대를 방송을 보며 교회를 다니다 보니 본의 아니게 문뜩 이런저런 생각이 들었다. 교회도 은혜로운 찬양을 이 시대에 맞게 편곡해서 대중에게 다가가 보면 어떨까. 클래식(classic)한 곡만이 주님이 영광을 받으실까. 국악찬양은 되고 힙합(hiphop)이나 랩(rap)으로 찬양하면 안되는 걸까. 트롯 찬양, 뽕짝 찬송은 커트라인(cut line)에 걸리는 것인가. 성령 뽕필 트롯 찬양 가수가 찬양 트롯을 들고 <미스 트롯>에 과감하게 도전을 한 그 용기에 큰 박수를 보내며 기독교TV 방송들도 천편일률(千篇一律)적인 설교 방송만 할 게 아니라 다양한 콘텐츠(contents) 개발의 대안은 없을까. 꼭 교회만이 아니라 한국사회 전반에 굳어진 생각의 변화, 사고의 유연성이 필요하지는 않는가. 우리가 그들에게 열광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동안 편견적 시각에 갇혀 있던 ‘트롯’이라는 그 벽을 깨며 향토성 짙은 트롯의 깊은 맛을 보게 해준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사람 냄새 풀풀 나는 젊은이들이 보여준 훈훈한 삶의 소통 자세 때문 아닐까. 그래서인지 ‘트롯은 장년층의 레퍼토리(repertory)’라는 가설은 이제 통하지 않을 것 같다. 어느덧 세대를 넘어 청소년들까지 열광하며 국민가요로 등장한 것 아닐까. 글쓴이 이효상 원장(시인, 칼럼니스트, 근대문화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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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4-17
  • 이효상 칼럼_ 정약전의 ‘자산어보’, 영화로 만나다.
    최근 화제가 되는 영화가 개봉됐다. 볼만하다. 영화 ‘자산어보(玆山魚譜)’다. 배우 설경구가 주인공 정약전(丁若銓, 1758~1816) 역(役)으로, 그의 형제 다산 정약용(丁若鏞) 역(役)에 류승룡이, 그리고 변요한이 흑산도 청년 장창대(張昌大) 역(役)으로 나온다. 이들이 받아들인 서학(西學)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밑바탕에 깔고, 약전의 생애를 다루고 있다. 영화 ‘동주(東柱)’를 예전에 찍은 이준익 감독이 흑백영화로 만들었다. 그림 같은 풍경에 사람 냄새와 바닷냄새가 물씬 나는 볼수록 진한 여운이 묻어나는 영화다. 컬러 시대를 넘어 3D/4D 시대에 다시 흑백영화를 본다는 것이 조금은 이상하게 들리기도 하지만, 흑백 사진이나 영화에서 느낄 수 있는 특유의 아날로그 감성(感性)을 되살린 참 좋은 영화다. 조선 후기를 살았던 정약전의 책 이름을 영화 제목으로 삼았다. 주자의 성리학을 더럽히고 백성을 현혹하는 서학(西學)을 했다는 이유로, 신앙의 배교자가 되어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부지하며 흑산도로 유배 간 약전과 약용, 그리고 그와 함께 훗날 백성을 이롭게 하는 실용서를 쓴 창대와의 우정이 영화 ‘자산어보’의 주요 골격이다. 정약전은 진주목사를 지낸 정재원의 차남으로, 조선 후기의 유명한 실학자인 정약용의 형이다. 일찍이 ‘성호사설(星湖僿說)’의 성호 이익(李瀷)에게 지도를 받으며 서양의 신(新)학문을 익혔고 이 집안은 천주실의(天主實義)를 통해 일명 서학으로 불리는 기독교(天主敎)를 받아들인다. 이렇게 그 집안과 관련된 인사들은 이승훈, 이벽, 황사영 등이 모두 매형, 처남, 사위 등으로 연결된다. 정조 7년(1783) 생원시, 정조 14년 증광 별시에 합격하여 승문원 부정자(종9품)에 제수되었다. 정조는 정약전의 직급이 먼저 급제한 동생보다 낮은 것을 안타깝게 여겨 재위 21년 정약용을 곡산 부사에 제수하면서 정약전을 특진시켜 사관(정6품)에 제수했다. 약전.약용 형제의 인품과 탁월한 능력을 잘 알고 있는 정조의 애정 어린 배려였다. 그러나 재위 24년(1800) 정조가 독살당하면서 약전.약용 형제의 관운도, 조선의 명운도 함께 끝났다. 1800년은 조선의 실질적인 마지막 해였다. 순조(純祖) 원년(1801)에 일어난 신유박해, 그리고 황사영 백서사건 등이 터지자 수많은 명신들과 함께 약전.약용 형제도 서학과 신앙을 받아들인 죄목으로 기약 없는 유배길에 올랐다. 이때 전라도까지 함께 내려간 형제는 나주에서 길이 갈려 정약전은 흑산도로, 정약용은 강진으로 갔다. 흑산도(黑山島)에서 유배 생활을 하던 정약전은 이곳 주민 문순득(文淳得)이 해상에서 표류하다가 오키나와, 필리핀, 마카오와 중국을 거쳐서, 만 3년만인 순조(純祖) 5년(1805)에 조선으로 돌아오자,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그를 찾아갔다. 문순득에게서 표류의 전 말을 듣고 조선 시대 홍어장수 표류기인 『표해시말(漂海始末)』을 저술(著述)했는데 이는 조선시대판 ‘하멜표류기’다. 순조(純祖) 원년(1801) 제주도(濟州島)에 낯선 배 한 척이 표류해 왔다. 배에는 외국인 5명이 타고 있었는데, 나라이름을 쓰라하니 막가외(莫可外)라고만하여 몰라서 중국 요녕성 성경으로 보냈다. 1802년(임술년, 순조 2년) 10월. 중국 성경의 예부에서 어느 나라 사람이 알 길이 없다며 조선으로 다시 보냈다. 그 와중에 5명 중 1명 병사했다. 관청의 건물과 먹거리를 내주고 조선의 풍토와 언어를 익히라 하였다. 그러면서 4명 중 1명 또 사망하게 된다. 1807년(순조 7년) 8월 10일. 제주 목사 한정운이 표류인들이 ‘여송인(呂宋人, Luzon(현재 필리핀의 루손섬)’임을 알고, 본국 송환을 상계한다. 이들 표류인을 제주에 표류해온 ‘유구인(琉球人(현재 일본 오키나와)‘들과 만나게 하니 유구인 궁평(宮平)이 여송인임을 알아차렸다. 유구 사람 통사 경필진이 궁평에게 물으니, 문순득의 표류 이야기를 하며 문순득 일행에게 들은 이야기를 회상하며 알려주었다. 여송국과의 외교 소통이 없고, 중국에서 이들을 송출한 예가 있어서 유구인에게 부탁하여 보내라 명하였으나, 유구인은 이미 떠나고 없었다. 1809년(순조 9년) 6월 26일. 통역관 문순득을 만나게 하여 여송국 방언으로 문답하니 딱 들어맞았다. 비로소 여송국의 표류인을 송환시켰던 이야기를 기술했다. 흑산도에 와서 무서움이 많았던 약전은 창대를 만나 어류에 대한 호기심이 많은 삶을 살게 된다. 흑산도의 정약전은 생업도 외면한 채 오로지 물고기 연구에 평생을 바쳐오고 있는 장덕순(張德順) 또는 장창대(張昌大)라 불리는 사람의 “홍어 다니는 길은 홍어가 알고, 가오리 다니는 길은 가오리가 안다‘는 말에 도전을 받아 어류에 대해 널리 알려 백성을 이롭게 할 목적으로 함께 연구해 이 어류도감을 만들게 된다. 집으로 불러 함께 기거하며 물고기에 대한 공동 연구를 계속해나갔다. 그의 도움으로 자신이 평생 관찰해온 결과를 체계적으로 분류하고 이론을 붙여 순조(純祖) 14년(1814), 그는 각종 물고기와 해조류를 포함해서 수중생물 226종(種)의 명칭, 크기, 형태, 외형의 특징, 생태, 맛, 어획 시기와 방법 등이 자세히 기록한 『자산어보』를 펴낸다. 자산(玆山)은 흑산도의 다른 이름이고, 어보(魚譜)는 물고기 백과사전이라는 뜻이다. 정약전은 흑산도라고 하면 서신을 받아보는 가족들이 무섭게 여길까 싶어 섬 이름을 자산으로 바꾸었다. 그는 『자산어보』 서문에서 자신을 ‘박물자(博物者)’, 요즘 말로 하면 과학자라고 표현했다. 영화에서는 창대가 『자산어보』보다 『목민심서』의 길을 택하여 진사로 공직에 나가게 된다. 창대는 권력이 있으면 더 많은 이들을 도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정약전은 유배 생활 16년 만인 순조(純祖) 16년(1816)에 끝내 유배지를 벗어나지 못한 채 우이도(牛耳島)에서 자신의 생(生)을 마감한다. 그런데 동생인 정약용은 강진에서 유배 중이라 형의 장례(葬禮)에 참석할 수 없었다. 이때 정약전의 장례를 대신 치러준 사람이 바로 『표해시말(漂海始末)』의 주인공 문순득(文淳得)이다. 조선 후기는 실학의 영향으로 백과사전류의 책이 저술된다. 건축, 의학, 과학, 수학, 천문학, 생물학, 음악, 미술 등 다양한 분야에 걸친 19세기 조선의 지식을 집대성한 서유구(徐有榘)의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도 출판된다. 이렇게 명작들이 나오자 그동안 사서삼경(四書三經)에 매달려 있던 조선의 유학자들에겐 충격이었다. 실학의 영향으로 『자산어보』나 『임원경제지』처럼 손에 잡히는 실질적인 내용의 책을 저술했던 것은 근대화를 위한 조선 나름의 최선의 노력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를 받아들이지 못한 조선은 이후 쇠락의 길을 벗어나지 못했고, 결국 망국에 이르게 되면서 아쉽게도 이러한 노력은 모두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조선 시대 유배지에서 정약전이 유배지에서 『자산어보』를, 동생 정약용은 강진에서 유배 생활을 하며 『경세유표(經世遺表)』와 『목민심서(牧民心書)』 등 수 많은 저서들을 집필했다. 고난의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았던 그들과 함께, 순창 군수와 전라 감사를 지낸 서유구도 순조(純祖) 6년(1806)부터 헌종(憲宗) 8년(1842)까지 36년에 걸쳐 일평생 집필로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며 길을 열어갔다. 약전과 약용이 꿈꾸던 세상은 어떤 세상이었을까. 그들이 꿈꾸던 세상은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는 것 아니었을까. 또 한 그들에게 신앙과 순교는 또 어떤 의미가 있는가. ‘주자의 나라 조선’이라는 틀에 갇혀 서학을 못 받아들이고 변화를 거부하는 그 시대에 “누가 주인이냐”는 약전의 외침은 진한 메아리가 되어 울려온다. 그에게 어보는 어떤 의미였을까. 약용에게 『목민심서』나 약전에게 『자산어보』는 죽지 않고 살아남아 해야 할 일 즉 사명이 아니었을까. 상하(上下)를 따지고, 나와 다름을 거부하는 시대가 조선 시대인데도 약전은 자신을 창대보다 낫다고 여기지 않는 듯했다. 창대의 스승이 아닌 '우리 거래하자'라고 하며 서로에게 배우는 관계를 만들어 갔다. 그 시대를 앞선 사상이 있었으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어느 시대든 시대 문화발전과 성숙은 다양성의 차이를 이해하고 인정하며 받아들이고 소통하고 공감하며 이를 즐길 줄 아는 수용의 마음과 태도를 가지는 데서 시작되는 것 아닐까. 이는 창의성의 근원이자 새로운 도약을 위한 출발점이다. 서로 다른 생각과 표현의 차이에 대해 열린 마음을 가지고 이해하고 배려했으면 좋겠다. 그렇게 다양함이 공존하는 풍요로운 사회를 함께 이루려는 것이 건강한 시민들의 꿈이었으면 한다. 글쓴이 이효상 원장 (시인, 칼럼니스트, 서지학자, 근대문화진흥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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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4-09
  • 이효상 칼럼_ 부활의 아침에 시를 읽다
    부활의 아침에 넘어서야 할 것? 오지 않을 것만 같던 봄이 오고 고난의 시간이 지나 부활의 아침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친히 오셔서 우리 인생을 위하여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것은 은혜중의 은혜다. 부활 사건은 하늘길을 열고 영원한 세계로 들어가는 문을 열었다. 죄로 인한 사망의 자리에서 살 희망으로 막힌 담을 허물어 소통케 하는 새로운 길이었다. 사실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가로막는 장벽이나 돌무더기가 있다면 그것은 ‘우상숭배’다. 인간을 사망의 길로 몰아내고, 하나님께로부터 떨어져 나간다는 것을 보여주는 표지이자 하나님 나라로 가는 길을 막는 장벽이다. 이스라엘 역사에서 보면 우상의 문제가 가장 심각하고 날카로운 현안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만든 물체나 이교도들의 신들을 섬기곤 했다. 성경에 주로 나오는 우상은 바알과 아세라, 아스다롯 등이다. 아세라는 바알의 어미이다. 바알은 천둥과 번개의 우상이다. 아스다롯은 농사의 우상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영향력을 끼치는 우상이 황금 송아지 우상이다. 한편 초대 교회 안에서는 복음을 받아들인 이방인들의 옛 관습이나 문화가 우상의 문제로 대두되기도 했다. 신약시대에는 우상숭배 개념이 더욱 넓어졌다. 재물, 탐욕, 음행 등 성도들의 마음을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게 만드는 모두를 우상과 동일하게 간주했다. 그런 우상은 세계 도처에 아직도 자리 잡고 있다. 세상을 움직이는 힘과 교회를 움직이는 힘에는 공통 적으로 작동하는 두 가지가 있다. 그 첫째가 교회가 입버릇처럼 말하는 ‘맘몬’의 힘이다. 이른바 ‘물질(돈)’이다. 오죽하면 ‘유전무죄(有錢無罪) 무전유죄(無錢有罪)’라는 말이 생겼을까. 이것은 교회에서도 힘을 발휘하고 성도들의 마음속만이 아니라 목회자의 마음속에서도 이미 자리하고 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 첫 행하신 일은 성전에서 돈 매매하거나 돈 바꾸는 장사치들의 좌판을 둘러 엎으신 것이다. 그렇게 성전을 청소하시고 몸과 영혼이 병들고 상한 자들을 고치셨다. 그때나 지금이나 실로 교회의 장래를 밝게 볼 수만은 없는 현상이 아닌가 싶다. 예수님의 이름을 팔아 부귀와 명예를 취하는 일들이 난무하다. 교회나 교계도 마찬가지이다. 주님을 사랑하는 맘에서 시작한 일이 어느 날 장사가 되고 영업이 되고 있지는 않은가. 행여나 혹시나 어쩌다 금송아지를 주님보다 더 사모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어느 종교든 비우는 성빈(聖貧)생활이 없는 종교는 타락하게 되어 있다. 출력이 없이 입력만 하면 반드시 탈나게 되어 있다. 이런 금송아지 우상을 넘어서야 산다. 코로나 보다 더 무서운 탐욕이 우리 사회를 망치고 있다. 코로나에도 매년 재산이 몇억씩 불어나는 공무원들은 투자의 귀재들인가. 최근에 연일 언론에 오르내리는 LH 부동산투기는 인간의 탐욕은 과연 끝이 없는 것인가를 보여준다. 여의도에 봄 향기를 가득 머금은 벚꽃이 만발하였지만 ‘가짜농부’는 왜 그리 많은가. 여야 할 것 없이 다 썩은 것인가. 공직자와 법관이, 정치인과 종교 지도자가 부패하면 건강한 사회라 할 수 있나. 인간이 추구하는 욕심은 돈, 권력, 명예로 분류할 수 있다. 우리를 치열하게 만드는 원초적 욕망이다. 하지만 이 세 가지 중 어느 하나에서 이룬 성과에서 스스로 만족하지 않고, 또 다른 하나나 둘을 가지려는 순간이 탐욕이다. 그만큼 삶의 존재 자체가 불안정해지고 쉽게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것이 삶의 역설이다. 지금도 주변엔 돈 많은 재벌이 권력이나 명예를 더 갖고 싶고, 권력을 가진 공직자가 그 권력을 이용해서 돈이나 명예도 갖고 싶고, 사회적인 명예를 충분히 가진 사람이 돈과 권력을 더 가지려 하다가 소중히 일궈온 삶이 탐욕으로 한순간에 추락하는 모습을 무수히 보게 된다. ‘무소유’를 강연하던 어느 종교인이 페라리자동차와 건물주로 ‘풀 소유’로 추락하였으니 말이다. 사람에게 있어 가장 큰 병폐는 끝없는 욕심이 아닐까. 코로나가 소멸되어야 한다. 길가의 개나리와 벚꽃은 만발하였지만, 코로나로 일상의 회복을 맛보지 못한다. 모두들 참으로 어렵다. 사회와 교회의 양극화는 더 심각해지고 있다. 혹자는 우스개로 말하기를 종말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아마 겟돈(?) 전쟁으로 일어날 것’이라고 예견한다. 부활의 아침을 만나니 달라진다. 우리가 너무나 좋아했던 세속적인 것들, 우상들을 제거하는 변화의 은혜가 임하게 된다. ‘미니멀 라이프(minimal life)’라는 말이 요즘 여기저기서 들린다. 천상병 시인은 그의 시집 ‘귀천’에서 이 땅에서의 삶을 ‘소풍’이라고 했다.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을 끝내고 하늘로 돌아갈 집이 있는 사람은 행복하지 않을까. 지금 우리는 무엇을 위해 기도하고, 기도한 대로 소중한 삶과 물질들을 드리며 살아가고 있는가. 소외되고 가난한 이들의 눈물을 닦아주는 것은 나와는 전혀 무관한 일인가. 모든 연약함과 부족함을 고치고 다스리고 버려야 할 그 모든 것을 거듭나고 깨끗케 하시는 은혜를 사모하고 있는가. 사월의 봄, 부활의 봄에 코로나로 위기를 맞은 이 시대 백성들에게 교회는 물질이 아닌 영적인 복음으로 교회 됨을 보여줘야 한다. 교회가 교회다워지고 주님과 함께 하는 교회로 가기 위해선 금송아지 우상을 넘어서 다시 복음으로 가야 산다. 고난 가운데 탄식하고 신음하는 사회과 교회와 이 백성들에게 ‘평안하라’ 하시는 주님의 위로와 음성이 다시 들려지기를 기대하며 아직도 세상 가치에 함몰되지 않고 저 영원한 하늘나라와 신령한 은혜를 사모하며 달려가야 할 사명이 우리에게 아직 남아 있지 않은가. 부활의 아침에 닭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유안진 시인이 쓴 ‘내 믿음의 부활절’이란 시를 다시 읽는다. “지난겨울/ 얼어붙은 그루터기에도/ 새싹이 돋습니다./ 말라 죽은 가지 끝/ 굳은 티눈에서도/ 분홍 꽃잎 눈부시게 피어납니다./ 저 하찮은 풀 포기도/ 거듭 살려내시는 하나님/ 죽음도 물리쳐 부활의 증거 되신 예수님/ 깊이 잠든 나의 마음/ 말라죽은 나의 신앙도/ 살아나고 싶습니다./ 당신이 살아나신/ 기적의 동굴 앞에/ 이슬 젖은 풀 포기로/ 부활하고 싶습니다./ 그윽한 믿음의 향기/ 풍겨내고 싶습니다./ 해마다 기적의 증거가 되고 싶습니다.” 이런 부활에 참여하므로 개인이 살아나고 민족이 살아나는 역사를 꿈꾼다. 나사로처럼 사망의 자리를 털고 나온 부활은 우리 모두의 소망이다. 이효상 원장 (시인, 칼럼니스트, 근대문화진흥원 원장/한국교회건강연구원 원장) 2021-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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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4-03
  • 김종희 칼럼_ 부목사 투표권 논쟁에 대한 정리
    D 노회에서 정기노회를 앞두고 부목사 투표권에 대한 문의가 있었다. D 노회뿐만 아니라 정기노회를 앞두고 노회마다 투표권 문제로 대립이 되는 경우가 있다. 임원이나 총대를 선출할 때 소수의 표에 의하여 당락이 결정되는 경우에는 더욱 그렇다. 특히 부목사인 경우 이미 이사는 다른 노회로 하였는데 이명은 하지 않았다면 투표권이 있는가. 또 한 시무를 하지 않거나 기관 목사나 교육목사로 파송한 경우 투표권이 있는가를 정리해 본다. Ⅰ. 이명 하지 않은 부목사는 투표권이 없다. ① 권징조례 제109조에 보면 “목사도 전조와 같이 다른 회에 옮길 이명서를 수취한 후에 그 노회에 가입하기까지 여전히 본 노회 관할에 속하고(이명서 수취일로부터 본 노회 안에서 언권과 투표권이 없다) 1년 내로 이명서를 본 노회에 환부하면 노회는 이 사건을 회록에 기입하고 그 회원권은 여전히 지속한다.”라고 되어 있다. 상기 내용을 근거로 부목사가 다른 노회로 임지를 옮겨 이사를 갔지만 아직 이명 처리를 안 한 경우라면 투표권이 있다고 착각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명서를 수취한 날부터 본 노회 안에서 언권과 투표권이 없다고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투표권이 없는 이유를 아래에서 설명하고자 한다. ② 정치 제4장 제4조 3항 “부목사는 위임목사를 보좌하는 임시 목사니 당회의 결의로 청빙하되 계속 시무하게 하려면 매년 당회장이 노회에 청원하여 승낙을 받는다.”라고 되어 있다. 이미 다른 노회로 이사를 간 부목사는 위임목사를 보좌하는 임시 목사의 위치에 있지 않기 때문에 부목사라고 할 수 없다. 즉 시무하지 않는 부목사이기에 투표권을 행사할 수 없다. ③ 원칙적으로 부목사가 이사를 갈 때 이명 허락을 받고 가야 한다. 그러나 노회의 사정상 회집이 어려우므로 이명을 허락받고 가는 것으로 묵인하고 보낸다. 그리고 노회 때 사무처리만을 남겨 놓고 있을 뿐이므로 이사를 할 때 이명서를 수취한 것으로 간주해야 한다. ④ 너그럽게 양보하여 이명서를 수취하기 전에 투표권이 있다고 하자. 그러나 이명서를 수취하는 날부터 투표권이 없다고 했으므로 수취하는 그날에는 투표권이 없다. 즉 이명서 수취를 오후에 하여도 오전부터 그날은 투표권이 없다. 대게 임원 선거나 총대 선거는 이명서를 취급하는 날에 다 한다. 그러므로 투표권을 행사할 수 없다. ⑤ 제88회 총회에서 평남 노회장 송행식 씨의 질의의 건에 대하여 “이명하지 않은 부목사에게 전 소속 노회 선거권 있는가: 할 수 없다.”로 결의하였기에 투표권이 없다. Ⅲ. 시무하지 않는 부목사는 투표권이 없다. ① 정치 제4장 제4조 3항 “부목사는 위임 목사를 보좌하는 임시 목사니 당회의 결의로 청빙하되 계속 시무하게 하려면 매년 당회장이 노회에 청원하여 승낙을 받는다.”라고 되어 있다. 어느 당회가 당사자의 사정에 의해 부목사로 청빙을 해 주었지만 청빙한 교회에서 시무하지 않으면 투표권이 없다. 시무하는 증거는 담당하는 부서가 있어야 하며 매월 급여가 지급되고 있다는 내역을 제시해야 한다. 정치 제3장 제3조 “남·녀 전도사를 당회의 추천으로 노회가 고시하여 자격을 인가하면 유급 교역자로 당회나 목사의 관리하는 지교회 시무를 방조하게 한다.”고 하였다. 시무를 방조하는 자도 유급이어야 한다면 위임목사를 보좌하며 시무하는 부목사는 당연히 시무하는 교회로부터 급여를 받아야 한다. ② 해 교회에서 부목사로 청빙을 하여 기관 목사로 파송하거나 교육 목사로 파송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해 교회가 임의로 파송한 경우는 기관 목사나 교육 목사로 인정을 받지 못한다. 정치 제4장 제4조 7항(교단 기관 목사) “노회의 허락을 받아 총회나 노회 및 교회 관계 기관에서 행정과 신문과 서적 및 복음 사역에 종사하는 목사이다.” 10항(교육 목사) “노회의 허락을 받아 교육기관에서 성경과 기독교 교리를 교수하는 목사이다.”라고 하였다. 노회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고 분명하게 명시되어 있다. 그러므로 노회의 허락 없이 해 교회가 파송한 경우는 부목사로 인정하여 투표권을 줄 수 없다. 사실상 이런 경우는 부목사로 청빙하는 척하며 노회를 기망한 경우이므로 해 교회 당회장을 문책해야 한다. Ⅳ. 결론 해 교회에서 노회에 계속 부목사 청빙 청원을 한 경우는 투표권이 있다. 제96회 총회에서 “계속 부목사 청빙 청원을 한 부목사이면 시무 목사이므로 정회원으로 인정하는 것으로 가결하다.”로 정리하였기에 투표권이 있다. 그러나 이명을 하지 않는 부목사, 청빙해 준 교회에서 시무하지 않는 부목사, 노회의 허락 없이 기관 목사나 교육 목사로 해 교회가 임의로 파송한 경우는 투표권이 없다. 투표권 논쟁을 정리하여 시비를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김종희 목사(헌법자문위원장.정치부장역임.성민교회) 2021-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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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4-03
  • 이효상 칼럼_ 빌 게이츠에게 듣는 기후 위기(재앙) 대처법
    코로나19의 팬데믹(pandemic)은 273만 명이라는 사망자를 내고 전 세계 인구의 1억 2342만 명(2021년 3월 25일 기준)을 감염시켰다. 미래학자들은 전염병은 코로나가 끝이 아니며 앞으로도 코로나와 같은 변종이 계속 생길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그 중심에 지구환경의 변화 즉 기후 위기가 자리하고 있다. 최근 세계적으로 여러 재난 가운데서 지구의 창조환경을 복원하고 건강한 환경을 만드는 문제에 굉장한 관심을 쏟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MS) 창업자 빌 게이츠(Bill Gates,1955~)도 1995년 ‘미래로 가는 길’을, 1999년 ‘생각의 속도’에 이어 금 년 ‘기후 재앙을 피하는 법(원저: How to avoid a climate disaster, 김영사)’이라는 책을 출간했다. 앞선 두 권이 모두 IT, 디지털 정보통신 혁명 등의 미래를 예견한 책이라면, 이번에는 ‘기후’ 문제다. 저자가 다른 사람이 아닌 빌 게이츠라는 것, 그 책 제목이 ‘기후 재앙을 피하는 법’이라니, 빌 게이츠는 도대체 왜 기후변화를 말하기로 했을까? 빌 게이츠가 왜 이렇게 기후 문제에 관심을 가질까. 그것은 전 세계 사람들에게 알려 변화와 혁신을 이끌어내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그래서 관심 집중! 전 세계가 주목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빌 게이츠는 책에서 20년 전 소프트웨어(software)를 본업으로 했던 그가 부인과 함께 2000년 게이츠 재단을 설립하고 저개발국을 여행하며 에너지 빈부 격차를 해결하고 싶었다는 얘기로부터 풀어간다. “기후변화에 대해 알아야 할 두 가지 숫자가 있는데, 첫 번째는 ‘510’이고, 다른 하나는 ‘0(제로)’”라고 설명한다. 510억 톤(t)은 전 세계가 매년 대기권에 추가로 배출하는 온실가스의 양이다. 0(제로)는 지구 온난화를 막고 기후변화로 인한 최악의 상황을 막기 위해 인류가 목표로 해야 하는 숫자다. '넷-제로(Ner-zero)'라 부른다. 그는 말한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에너지 기술이 청정에너지 기술보다 저렴하기 때문"에 "이토록 많은 온실가스를 배출"하고 있다고. 그에 따르면 우리는 가까운 미래에 탄소를 배출하지 않는 깨끗한 에너지를 만들어내야만 온실가스 배출량을 "0"으로 만들 수 있다. '510억'이 '0'이 되는 게 가능하기나 할까? 빌 게이츠는 어렵지만, 실현 가능한 일이라고 말한다. 기후변화로 인한 재앙을 피하기 위해서는 온실가스 배출을 없애는 탄소 제로(carbon zero)를 달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매년 배출하는 510억 톤의 온실가스, 사실 그 양이 도대체 얼마나 어마어마한 양인지 가늠조차 안 된다. 온실가스를 제때 줄이지 못한다면 지구 전체에 대규모 혼란이 벌어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이런 탄소를 줄이지 않으면 기후 재앙으로 코로나 사망자의 5배의 인구가 숨질 것으로 예측하며 그 해법을 제시하고자 했다. 혁신과 새로운 아이디어를 상용화한 경험을 바탕으로 게이츠는 ‘탄소 제로’ 달성을 위한 구체적인 청사진을 제시한다. '그린 프리미엄'이라는 용어로 온실가스를 배출하지 않고, 친환경 청정에너지를 사용하는 데 드는 추가적인 비용을 의미한다. 빌 게이츠는 '더러운' 에너지를 '깨끗한' 에너지로 바꾸기 위해 드는 비용, 즉 '그린 프리미엄'을 낮추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말한다. 깨끗한 에너지 기술이 정부의 정책이 되고 시장에서 활성화된다면 그린 에너지가 차지하는 비중은 점점 높아질 것이고 결국엔 그린 프리미엄이 낮아져서 탄소 감축이 아닌 탄소 배출 제로에 도달할 수 있다고. 그럼 그린 프리미엄을 어떻게 낮추나? 510억 톤의 이산화탄소 중 가장 큰 비율을 차지하는 것은 31%를 차지한 제조 분야이다. 다음은 전기 생산(27%), 동물 사육과 농업 재배(19%), 교통과 운송(19%), 냉난방(7%) 순이다. 이 중에서 어느 부분을 먼저 바꿔야 그린 프리미엄을 효율적으로 바꿀 수 있을까? 전기차만으로 안된다. 철강, 시멘트, 육류 등의 탄소 제거가 시급하다. 책에서 ‘여러 수단들이 여전히 탄소 제로의 목표 중 일부만 달성하게 되므로 나머지 목표 달성에 필요한 획기적인 기술을 개발하고 출시해야 한다"고 제시하며 가장 적극적인 해법으로 기술혁신을 들고 있다. 기술혁신은 삶의 편리함을 유지하면서 대기 오염을 획기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란다. 또 하나는 태양광과 풍력 등 이미 보유한 수단들을 더 빨리, 그리고 현명하게 사용할 것을 제시한다. 그중 가장 비용이 싸면서도 효율적인 방법은 무엇일까? 원자력 발전에 대한 그의 견해다. 인도와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일부 지역을 방문했을 때, “왜 이렇게 어둡지? 조명은 어디에 있나?”라고 생각했는데 결국 빈곤의 본질 중 하나는 전기의 부족임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빌 게이츠는 “사무실, 공장, 콜 쎈터 등에서 글을 읽을 수 있는 조명과 백신을 24시간 냉장고에 냉각시킬 수 있는, 믿을 만하고 저렴한 전기는 어디에 있는가”하고 묻는다. 그러면서 원전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기술과 발을 맞추지 못하는 (에너지)정책의 대표적인 예는 원자력 산업이다. 원자력은 거의 모든 곳에서, 매일 24시간 동안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무 탄소 에너지원이다. 새로 개발하는 원자로는 더 안전하고 더 저렴하다. 하지만 올바른 정책이 부재하고 적절한 시장이 형성되어 있지 않으면 이런 차세대 원자로 기술과 과학은 무용지물이다” 원자력은 매일 24시간 사용 가능한 유일한 무 탄소 에너지원이라고 한다. 그가 제시하는 깨끗한 에너지 기술인 풍력, 지열, 태양열, 배터리, 바이오 연료, 탄소 포집 등에 대한 기술혁신과 정부 지원, 민간투자가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에는 공감하게 된다. 세계적으로 2015년 파리기후변화협정 이후 선진국들은 탄소 제로 실천을 위해 화석연료를 친환경 대체에너지로 전환하는 일에 주력해왔다. 탄소 배출 7위 국가로서 모범을 보여야 할 한국은 탈원전 기조하에 재생에너지에 집중해왔지만 사실 기후 악당 국으로 인식되고 있다. 탄소 배출 측면에서 효율성이 가장 높은 것은 원자력 발전이다. 무분별하게 태양광 발전을 보조하는 것이 혁신의 전부가 아니다. 태양광 설비에서 발생하는 탄소 배출과 그로 인한 간접적인 건강 위험까지 없애는 노력이 진정한 혁신이다. 또한 작은 위험 때문에 원전을 포기하기보다는 원전 위험 제로 기술에 도전하는 것이 혁신이다. 빌 게이츠는 책의 마무리에서 기술 변화와 혁신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삶의 방식에 많은 변화가 찾아와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다. 그러기에 '각자가 할 수 있는 것'을 제시하고 있다. “유권자들이 한목소리로 기후변화 정책을 요구할 때 정치인들은 움직인다”라고 말한다. 정치인들은 맑은 공기를 마시고 싶은 유권자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정부는 기술혁신을 주도하고 기업 활동을 자극하고 시장을 유인해야 할 것이다. 종말이 오고 있는 건가. 지구가 점점 뜨거워지고 있다. 미래가 불타고 있다. 자연이 우리에게 SOS(구조신호)를 보내고 있다. 인간과 자연의 관계회복을 위한 ‘회복으로의 전환’이 시급하다. 미국 지구 물리학보에 따르면 ‘지구 온난화로 여름은 길어지고 더 더워지며 겨울은 짧아지고 더 추워지는 것으로 나타났다’라고 소개했다. 2100년이면 1년 365일 중 절반인 174일이 여름이고, 가을은 57일, 겨울은 27일로 한 달도 채 안 되는 것으로 예측했다. 프랑스는 최근 헌법 1조 "기후변화에 맞서 싸운다"를 통과시키고 "공화국은 생물 다양성과 환경 보전을 보장하고, 기후변화와 맞서 싸워야 한다"를 추가하기로 했다. 이렇게 지구 온난화 등 기후 위기에 대응하기 위해 전 세계 100여 국, 400여 개의 도시에서 2050년까지 탄소 배출 제로를 목표에 힘을 쏟고 있다. 미국 조 바이든(Joe Biden, 1942~) 대통령은 취임 직후, 트럼프가 탈퇴했던 파리 협정에 재가입했고, 각 나라와 연구소마다 풍력발전소, 저탄소 제트 연료 등 복잡한 계산을 통해 다양한 해결책을 내놓고 있다. 이러한 문제의 해결을 위해 전 세계가 노력하는 가운데 탄소 포집 기술 개발하는 팀에 테슬라의 CEO 일론 머스크(Elon Musk, 1971~)가 1억 달러를 상금을 주겠다는 기사도 보았다. 이산화탄소를 땅속에 주입하고 봉인하거나 이산화탄소를 잘 흡수하는 물질로 탄소를 줄이는 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서울시도 그린 뉴딜(Green New Deal)로 2050년까지 탄소 배출, 제로 도시로 만들려는 플랜 (plan)을 계획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기후 재앙을 실감하지 못하는 것도 가장 큰 문제이나 제대로 방향을 못 잡고 실현 가능한 노력조차 하지 않는 것은 더 큰 문제이다. 대중도 물질적 욕구가 우선되다 보니 환경은 아직 관심 대상에서 제외되는 측면이 크다. 적절하게 제어할 수단도 부족하니 기업에겐 그저 환경과 관련된 비용지출은 세금 걷는 명목 정도로만 받아들여진다. 하지만 ‘기후 위기’는 사실 다음 세대에 물려줄 것이라기보다 당장 살아가는 이번 세대의 이야기라고 이해되어야 한다. 그나마 돈이 개입되니 사람들이 환경문제에 관심을 가지게 되는 것 같다. 그런 비용을 가장 적게 하는 방법을 찾는 것도 이제 우리 모두의 몫이다. 요즘 기업들도 ESG(환경 Environment·사회 Social· 지배구조 Governance) 경영을 확대하고 비중을 늘려가는 추세다. 예를 들어, 전자제품을 만들 때 에너지소비효율 1~5등급으로 나눠서 생산할 것이 아니라 1등급만 만드는 식으로 바꾸는 것도 대안이 될 것이다. 물론 현재도 1등급을 구매하는 이들에게는 보조금이 지급되지만 모든 전자제품을 1등급으로 만든다면 빌 게이츠가 말했듯이 그린 프리미엄이 낮아지지 않을까? 우리 삶이 더욱 변화해야 한다. 숨 막히는 미세먼지부터 가뭄과 폭염, 슈퍼태풍, 식량 폭동과 테러, 대규모 환경 난민 발생까지. 코앞에 닥친 기후 위기의 현실 앞에서 그리고 대안은 찾고 그런 노력을 할 순 없을까. 창틀에 정원을 만들고, 한 그루의 나무를 심어보는 것은 어떨까. 탄소 금식을 실천해보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탄소 제로는 단순한 의무가 아니라 생존을 위한 기회다. 탄소 문명을 청정에너지 문명으로 전환하기 위한 전 세계인의 공동노력이 그 어느 때보다 시급하다. 먼 훗날의 기후 재앙에 미리 대처하려면... 글쓴이 이효상 원장(시인, 칼럼니스트, 근대문화진흥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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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3-28
  • 이효상 칼럼_ 커피(coffee)) 한잔의 유혹에서
    아침이면 쓴맛을 보며 하루를 연다. 마치 인생의 쓴맛처럼, 다름 아닌 ‘커피(coffee)) 한잔’의 유혹(템프테이션 Temptation)으로 시작된다. 눈 뜨자마자 또는 출근과 동시에 마시는 커피 한잔은 직장인들의 즐거움이자 적(敵)이다. 언제부터인가부터 커피는 일상이 되었고 습관이 되었다. 중독이 따로 있나. 선택이 아니라 반복되면 중독이다. 베토벤(Beethoven)은 매일 의식을 치르듯 커피를 내리는 것으로 아침을 시작했다고 한다. “매일 아침 나는 더할 수 없는 내 벗과 만난다. 아침에 커피보다 더 좋은 것은 있을 수가 없다. 한잔의 커피에 담긴 60알의 원두는 내게 60개의 아이디어를 가르쳐 준다.”라고 말했다는데. 커피 한 잔이 예술가들의 혼을 일깨우고, 귀가 들리지 않는 베토벤에게 누구보다 소중한 친구가 되어주었으리라 생각된다. 대한민국 국민 1인당 1년에 몇 잔의 커피를 마실까. 2018년 조사에 따르면, 우리나라 성인 기준 1년에 커피 353잔을 마신다고 한다. 하루에 1잔은 마신다는 의미인데, 세계 평균 소비량 132잔의 2배 이상이다. 하지만 커피를 안 마시는 사람도 다수 있으니 엄청난 양이다. 커피는 예전 ‘숭늉’의 자리를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했다. 커피의 고향이 어디일까? 커피의 원조국은 아프리카 북동부에 위치한 에티오피아(Ethiopia)다. 커피의 3대 품종 중 가장 향미가 뛰어난 아라비카종([라틴어]Arabica種)의 주산지로 이슬람 문화권인 아랍과 함께 아프리카 북동부에서 재배를 시작했다. 사실 커피를 마시게 된 기원에 관해서는 에티오피아의 옛 이름인 아비시니아(Abyssinia)에 ‘칼디’라는 목동이 있었다. 어느 날 염소들이 빨간 열매를 따먹고는 흥분하며 잠을 못 자는 것을 본 그는 직접 빨간 열매를 따서 먹어봤다. 목동은 열매를 먹고 나자 온몸에 힘이 나면서 이상한 기운을 느끼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 씨앗을 이슬람 사제에게 가져다주었는데 부정한 음식을 먹기 전, 의식으로 빨간 열매를 불에 태웠더니 그윽한 커피 향이 퍼지면서 사제들과 이슬람교도들이 커피 열매를 먹기 시작했다. 이후 척박한 땅에서 양이나 염소를 치며 유목 생활을 하는 이슬람교도들은 힘이 나는 열매를 가지고 다니며 약으로 사용하기도 하고 사제들은 밤에 기도를 드릴 때 잠을 쫓기 위해 즐겨 먹게 되었다고 한다. 또 다른 이야기는 홍해 바로 건너편 나라인 예멘(Yemen)에서 비롯됐다. 이슬람 대사제인 오마르는 모함을 받아 쫓겨 모카(Mocha)라는 항구 도시로 건너오게 되었다. 너무나 배가 고팠던 그는 새가 먹고 있던 빨간 열매를 보고 알라의 계시라 생각해 그 열매로 허기를 달랬다. 그랬더니 배고픔도 사라지고 기운이 나서 그 뒤 그 열매로 병약한 이들을 치료했다. 예멘의 모카 항은 그 뒤로 커피를 수출하는 주요 항구로 이름을 알려지며 모카커피(Mocha coffee))의 원조가 되었다. 그렇다면 커피는 어떻게 세계적으로 보급되었을까. 그 시간은 천년이 넘게 걸렸다. 아랍인은 지중해를 넘나들며 유럽과 활발히 교역을 이어나갔고 그 와중에 커피가 점차 유럽인에게 퍼져나갔다. 유럽에서는 한때 커피를 금하기도 했다. 그 당시 유럽은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황이 가진 힘이 막강했는데 이교도들이 들여온 음료 때문에 밤에 잠을 안 자고 범죄와 음탕한 생활을 한다고 믿었기에 커피를 ‘악마의 음료’라 부르고 금지하기도 했다. 17세기경부터 유럽 전역에 유행처럼 번져 나갔으며 네덜란드와 프랑스 사람들을 통해 아시아와 중남미로 보급되며 브라질과 콜롬비아, 베트남과 인도네시아 같은 커피 최대 생산지들이 생겨나게 된다. 1900년대 초 미국에서는 인스턴트(instant) 커피가 나왔는데, 1차 세계대전 당시 군인들에게 휴대용 커피를 마시게 하므로 전쟁에서 승패가 결정되기도 하였다고 전한다. 전쟁 후에는 인스턴트 식품의 물결을 타고 널리 일반화되었다. 우리나라에는 고종 황제가 러시아 공관에 머물 당시 커피를 마셨다는 기록이 있다. 이 문서로 봐서 우리나라 최초의 커피 드링커(Drinker)는 고종황제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언제부터 커피를 마시게 되었을까? 최초의 커피를 마신 기록은 미국의 천문학자 퍼시벌 로월(Percival Lowell, 1855.3.13-1916.11.12)은 그의 저서『Choson: The Land of the Morning Calm』에 보면 1884년 1월의 추운 어느 날, 조선 고위관리의 초대를 받아 한강변 별장으로 유람을 가게 되었는데 꽁꽁 얼어붙은 겨울 한강의 정취를 즐기던 중 “우리는 다시 누대 위로 올라 당시 조선의 최신 유행품이었던 커피를 마셨다.”라는 기록을 남겼다. 우리나라 최초의 커피 전문점은 20세기 초, 독일인 러시아 공사의 처형인 손탁(Antoniette Sontag, 1854-1925)이라는 독일계 러시아 여인에 의해 들어섰다. 정동에 세운 한국 최초의 호텔인 손탁호텔 안에 첫 커피숍을 개업한 이후 일제 강점기에는 명동과 소공동 등지에 일본식 다방들이 생겨났다. 대중 보급은 6.25 전쟁 이후 미군들의 식량에 속해 있던 인스턴트커피가 익숙해지고 인기를 얻어 본격적으로 시판되면서부터다. 다방식 커피든 인스턴트커피든 요즘 유행하는 브랜드 커피든 간에 커피는 그 향미를 즐기며 소통하는 접촉점임에는 틀림없다. 우울한 날에는 달달한 커피가 좋다. 사람도 커피를 잘 사는 사람이 더 좋다. 그런 사람은 대개 소통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 따뜻한 나눔이 행복이다. 우아하게 함께 나누는 커피 한잔의 여유로움은 일상의 소소한 행복이다. 사람은 그렇게 행복하기로 마음먹은 만큼 행복해진다. 커피 한 잔이 주는 선물은 분명 매혹적이다. “커피 한잔하시죠?” 사람들을 자주 만나다 보면 그럴 때마다 커피를 권하고 마시는 일들이 생긴다.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소통할 때, 으레 마실 커피를 권하는 것이 예의처럼 여겨진다. 좋은 이미지를 지닌 매너 있는 사람으로, 통찰력을 겸비한 에너지 넘치는 사람으로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 맑은 정신을 갖게 하는 도구 역할도 톡톡히 해내서 바쁜 현대인들과 쉽게 친숙해진다. 모든 만남과 거래에서 첫인상은 매우 중요한데 커피 한 잔은 상대방이 보여주는 태도와 매너가 그 사람에 대한 이미지를 결정하거나 첫인상을 다지는 데 중요한 기여를 한다. 누군가와의 첫 만남이나 미팅 자리에서 마시는 한 잔의 커피는 소통을 열어주고 거래를 성공적으로 성사시키며 멋진 이미지를 심어주는 데 도움을 준다. 에덴동산부터 사람은 누구나 유혹에 약하다. 커피 한잔의 유혹은 쉬지 않고 다가온다. 주일에 출석하는 교회는 로비에 커피숍(coffee shop)을 차리신 담임 최 목사님은 바리스타(barista) 교육까지 받고 커피 머신(coffee machine)을 신나게 당기신다. 커피 나누는 즐거움을 누리신다. 일회용 컵은 이 장로님이 제공하셨다. 그런가 하면 남양주 다산동 자치위원회 사무실에도 새해부터 커피 머신을 설치하고 별다방(?) 커피가 항상 제공된다. 당연히 안 마실 수 없는 구조다. 대학로 사무실에 나오면 주로 점심을 사먹는데 식후에 단맛 좀 보려고 달달한 자몽차로 마셔야지 하다가도 식당에서 주는 공짜 커피인 믹스 커피(mix coffee)나 지인들이 사는 아메리카노(Americano)의 유혹에 넘어가게 된다. 이런 유혹에는 후유증이 반드시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혹에 쉽게 넘어가는 이유는 중독성 때문이다. 한 잔 마시면 기분이 업그레이드(upgrade) 되는 것 같고 집중이 잘 된다. 가끔 안 마시면 뭔가 허전하고 집중이 안 되는 이 느낌은 뭐지 싶다. 어찌 보면 ‘카페인 부작용’이나 ‘카페인 중독’ 같기도 하다. 정말 커피 한잔은 약일까? 독일까? 커피를 마시면 정신이 맑아지고 집중력이 생기는데 반해 너무 많이 마시면 밤에 깊은 숙면을 하지 못한다. 필자의 경우, 커피의 민감성은 오후 2~3시 이후에 커피를 마시면 수면의 질이 떨어져 밤 12시경 잠깐 잠들었다가 새벽 2,3시경에 깨면 화장실에 갔다오면 그다음부터는 다시 잠들기 힘들어진다. 그래서 아침이면 몽롱하고 그 잠에서 깨기 위해 다시 커피를 마시는 일이 반복된다. 커피가 가진 카페인 성분은 두 얼굴로 나타난다. 뇌를 각성시키지만 반면 두통과 신경과민, 불안, 현기증을 가져다준다. 심장박동수를 증가시켜 가슴 두근거림, 혈압상승을 유발하기도 한다. 위산 분비를 촉진시키다 오히려 위궤양, 역류성 식도염 등 위 질환을 주기도 하고, 철분과 칼슘을 흡수를 방해해 빈혈이나 뼈의 성장을 저해한다. 한국인들은 칼슘섭취가 부족한데 하루에 3잔 이상 커피를 마시면 칼슘의 배출로 오히려 독이 되기도 한다. 이런 커피가 알츠하이머 질환을 예방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는 연구결과도 흥미롭다. 건물마다 커피 전문점이 많이 생겨나고 점심시간이면 직장인들이 테이크아웃 컵을 손에 든 채 길을 걷는 광경을 보게 된다. 매일 마시는 일회용 잔에 들어있는 커피, 간편하게 먹는 컵라면, 배달음식의 랩 포장은 공통점이 있다. 이들은 코팅용 환경호르몬의 영향을 받는다. 그래서 휴대용 개인 텀블러를 이용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환경호르몬을 완벽하게 배제하면서 살기는 어렵지만 최대한 멀리하는 습관이 중요하다.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사용하는 일회용 컵, 캡슐과 캔 음료 등에서 나오는 쓰레기를 생각하면 커피가 만들어내는 폐기물의 양은 엄청나다. 음악을 들으며 마시는 커피 한잔의 여유와 사색이 인생을, 열정을 쏟은 창조적 에너지로 승화되기를 기대하지만 1g의 원두에서 커피는 0.002g, 나머지는 커피 찌꺼기로 버려진다. 기후위기의 환경 변화에서 비상행동이 필요한 때에 지구의 미래를 생각하며 이것을 재활용하는 지혜가 필요해 보인다. 일회용 컵 등 쓰레기를 최소화함으로 환경호르몬도 줄이고 지구도 보호할 수 있다. 한잔 커피의 유혹 앞에서 지혜롭게 일회용 컵 대신 머그컵이나 텀블러를 사용해 일회용품의 사용을 줄이는 습관은 어떨까 싶다. 글쓴이: 이효상 원장(시인, 칼럼니스트, 사진작가, 서지학자, 근대문화진흥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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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3-12
  • 이효상 칼럼_ 이슈에서 정치인의 침묵과 소신
    4·7 보궐선거를 앞두고 후보자들의 토론이 뜨겁다. 부동산 정책에 이어 초저출산율도 화제가 되었고, 지난달 가진 ‘3지대 후보 토론’에서 안철수 후보와 금태섭 후보 간의 퀴어(Queer)축제를 두고 차별금지와 혐오 논쟁도 이슈가 확산되었다. 선거에 출마한 여야 예비후보들의 가세함으로 '퀴어축제' 찬반 입장을 둘러싼 논란이 정치권 전반으로 확산된 바 있다. 퀴어축제는 대한민국의 성소수자 행사로써, 현재 2000년부터 ‘서울퀴어문화축제’라는 이름으로 대구, 부산, 전주, 인천 등 각 지역에서 매년 열리고 있다. 일정 기간 퍼레이드와 영화제, 파티를 중심으로 강연이나 전시회, 마켓, 토론회 등의 행사를 통해 성적 자유를 누리고 있다. 특히 퀴어 퍼레이드(Queer Parade)는 성소수자들의 권리를 주장하며 시가행진을 진행한다. 예비후보자 토론에서 금 후보가 “‘퀴어축제’에 참가할 의향이 있는가”라고 묻자 안 후보는 TV토론에서 “인권은 자기의 인권 뿐 아니라 타인의 인권도 중요하다.”라며 매년 서울광장에서 개최해온 ‘퀴어축제’에 반대한다는 발언을 했다. 안 후보는 차별에 대해서 반대하는 건 당연하다”라고 전제한 뒤 미국의 예를 들어가며 서울 한복판에서 열리는 ‘퀴어축제’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그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일종의 퀴어축제를 카스트로 스트리라는 곳에서 한다. 거기는 중심에서 조금 떨어진 샌프란시스코의 남부 쪽에 있다. 그러다 보니까 거기에서 축제를 하시는 분들 뿐만 아니라 본인이 보겠다는 의지를 가지고 있는 분들이 거기 가서 보신다. 샌프란시스코 중심에서 하지 않는다는 그 말씀을 드리고 싶다”라고 답했다. 안 후보가 샌프란시스코의 예를 든 것은 서울 퀴어축제가 서울의 중심인 시청 광장과 광화문, 남대문 등 사람들의 방문과 왕래가 많은 곳에서 열리기 때문에 축제 참가자가 아닌 일반 시민들에게 불편과 거부감을 줄 수 있다는 문제점을 지적한 것이다. 그러면서 성소수자들의 표현의 자유도 중요하겠지만 그것을 거부할 권리도 존중해야 한다는 의미로 분명한 메시지를 내놓았다. 안 후보가 퀴어축제와 관련해 밝힌 '거부할 권리'의 중요성을 두고 정치권이 시끌벅적하다. 그동안 금기시됐던 성소수자 관련 이슈에 안철수 예비후보가 소신 발언으로 성소수자 문제가 핵심 이슈로 떠오른 바 있다. 진보진영은 일제히 비판을 쏟아냈다. 자신의 발언이 논란으로 확대되자 안 후보는 “저 역시 소수자 차별에 누구보다 반대하고 이들을 배제하거나 거부할 권리는 누구한테도 없다”라면서 “서울 퀴어 퍼레이드를 보면 신체 노출이나 성적 표현 수위가 높은 경우가 있었다”라며 “성적 수위가 높은 축제가 도심에서 열리면 아동이나 청소년이 무방비하게 노출되는 걸 걱정하는 시민들 의견도 있다. 그래서 미국 사례를 들어 말한 것뿐”이라고 설명했다. 후보라면 마땅히 이런 소신이 있어야 한다. 이런 안 후보에 긍정적 평가의 목소리도 적지 않다. 특히 안 후보자가 “자기의 인권뿐 아니라 타인의 인권도 소중하다. 거부할 수 있는 권리도 존중받아야 한다”고 한 대목에 공감을 표시하는 의견이 다수를 이루고 있다. 모처럼 안 후보가 분명하고 시원한 메시지를 내놓았다는 느낌이다. 인물이 없다는 야권에 인물로 부각되는 모양새다. 여기에 국민의힘 후보 오세훈 전 시장이 발을 올렸다. 모 라디오 방송에서 "다만 퀴어축제가 서울광장이나 광화문광장 등 인근 도심에서 행해져 논쟁이 있었던 것 같은데, 서울시에는 서울시광장사용심의위원회라는 결정기구도 있고 규정도 있다"라며 "이 기구에서 심의 사용 규칙을 기준으로 결정한다"라며 "시장 개인이 '해도 된다, 하면 안 된다' 결정할 문제는 아니다"라고 말했다. 광장사용심의위원회는 '열린광장운영시민위원회'를 가리킨다. 이 위원회는 지난 2019년에도 퀴어문화축제의 서울광장 개최 여부를 심의하고, 퀴어문화축제의 부대행사인 '서울핑크닷'과 '서울퀴어퍼레이드' 행사의 서울광장 사용허가 여부를 승인한 바 있어 바꾸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오세훈 전 서울시장 측은 “반인권적 대우나 차별은 없어야 하지만, 남녀노소가 모이는 시청 광장에서 동성애자 축제는 바람직하지 않다는 게 오 전 시장 입장”이라고 덧붙였다. 더불어민주당 민주당의 박영선 후보는 퀴어축제에 대해 명확한 답변을 피하고 있다. 박 후보는 기자간담회에서 차별금지법에 대한 입장이 바뀌었다는 보도에 대한 생각을 묻는 질문에 "제가 이야기한 것은 2016년으로 5년 전인데 그때와 지금 사회가 많이 바뀌었다"라며 "사람들 생각도 바뀌었기 때문에 우리도 시대 흐름과 같이 바뀌는 것이 맞는다"라고 말했다. 성소수자, 동성애, 동성혼, 차별금지법 등 논쟁의 중심에서 정치인의 소신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과녁에 맞추지 않은 채 구렁이 담 넘어가듯 그냥 흘러가는 얘기는 아무리 많은 시간을 투자해 들어줘도 국민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분명한 논쟁은 다르다. 치열한 논쟁 끝에 타당하다고 인정되는 것, 수긍할 수 있는 지점이 생기면 의미가 있지 않을까. 그런 소신에 국민의 선택과 평가는 또 어떨까. 성소수자 문제, 특히 ‘퀴어축제’에 대해 인권 차원에서 표현할 자유와 거부할 권리를 동시에 언급한 것을 가지고 일부 진영에서 무조건 차별, 혐오로 몰고 가는 것을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이렇듯 일부 정치인들이 성소수자 문제를 자신의 정치 유불리에 따라 침묵하거나 때론 정치 수단화하는 바람에 인권이 마치 특정 소수의 전유물처럼 변질돼 가고 있는 것 같다. 그것이 보편적 인권을 헌신짝처럼 내던지고 편향적 인권 편에 슬쩍 발을 담그는 국가인권위원회와 정치인들의 어정쩡한 처신 앞에서 동전의 양면과 같은 인권의 중요성을 강조한 정치인의 소신이 새롭게 평가되기를 기대해 본다. 현재 ‘포괄적 차별금지법’이 국회에 계류 중이다. 여기에 더불어민주당 이상민 의원이 발의한 ‘평등 및 차별금지에 관한 법률안“에 20여 명의 의원들이 가세하며 법적 요건을 갖췄다. ‘동성애 조장’, ‘동성 혼합법 화’, ‘포괄적 차별금지법 독소조항’과 싸우고 있는 한국교회로서는 주목할 만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교계가 아무리 떠들어도 잔 안의 태풍처럼 전달되지 않던 것이 정치인의 분명한 소신 메시지에 여론이 달라지고 국민들이 호응하고 있다. 이참에 특히 퀴어축제에 대해 서울시민 절대다수의 뜻에 반하는 광장 사용을 지속적으로 허락하는 '열린광장운영시민위원회'도 재검토가 필요해 보인다. 이슈에 대하여 침묵하는 정치인과 소신을 분명히 밝히는 정치인을 보며, 자기 정체성과 표심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된다. 글쓴이: 이효상 원장(시인, 칼럼니스트, 근대문화진흥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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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3-10
  • 이효상 칼럼_ 인구 데드크로스(dead cross), 출산율 재고(再考)가 필요하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인구 문제 중 하나는 사회 전반적으로 아이를 적게 낳아 출산율이 감소하는 저출산 문제이다. 저출산 현상이 지속될 경우 장차 경제 활동 인구가 감소하게 되어 경제 성장이 둔화되고 고령화에 따른 노년층의 부양 부담이 상승하게 되는 등의 문제가 발생하게 된다. 인구와 경제는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유엔 미래 보고서 2040」에서 “인구 감소가 이미 시작된 선진국은 예외 없이 국력 감소가 나타났다”고 경고한다. 그리고 일본의 인구 감소와 경기 침체를 사례로 들었다. 이에 우리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에서는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출산 장려정책을 추진하고 있지만 출산장려를 위한 예산은 매년 증가하는데 전혀 출산율은 오르지 않고 오히려 추락하고 있다. 출산을 강조하지만 실제 출산에 대한 직접지원이 굉장히 낮은 수준이다. 문제는 정부의 출산장려예산이다. 2021년도 현재 저출산 명목의 예산은 꾸준히 증가해 2021년도 지난해보다 6조 원 늘어난 46조 원이 편성됐다. 이렇게 정부가 돈은 많이 쓰고 있다는데 아이 키우는 환경도 함께 나아지고 있을까. 2006년 저출산·고령화 사회 기본계획이 수립된 이후, 저출산 지원예산은 모두 200조 원 넘게 투입됐다. 예산은 지난 10년간 연평균 21.1%나 증가했다. 예산은 매년 늘어나는데, 정작 주변에서 '아이 키우는데 저출산 예산의 덕을 봤다'라는 가정은 찾기 어렵다. 오히려 출생보다 사망자가 더 많은 이른바 ‘인구 데드크로스(dead cross)’는 지난해 이미 현실화됐다. 2020년 강원도 내 모든 시.군에서 사망자 수가 출생자 수를 앞지르는 ‘인구 데드크로스’ 현상이 일어났다. 도내 전역에서 일어난 건 사상 처음으로 저출산과 고령화가 심화되고 있다. 2021년 행정안전부 주민등록인구통계에 따르면 2020년 비교적 인구가 많은 춘천시, 원주시, 강릉시를 포함 도내 18개 전 시.군에서는 사망자 수가 출생자 수를 앞섰다. 2019년에는 원주시, 화천군을 제외한 16개 시.군에서 인구 데드크로스 현상이 발생했다. 2020년 원주시 화천군에서 사망자 수가 출생자 수를 역전하면서 도내 전역으로 인구 데드크로스 현상이 확대되었다. 강원도만 그런 게 아니다. 전국적으로 출생자 수가 27만여 명으로 역대 최저치를 기록한 데 비해 사망자 수는 30만 명을 넘으면서 인구가 자연 감소했다. 세대수는 1인 세대 급증으로 사상 최다를 기록했다. 60대 이상 인구가 전체의 4분의 1 수준에 달해 고령화가 심화했으며 수도권 인구 집중 현상도 심해졌다. 2020년 12월 31일 기준 우리나라 주민등록 인구는 모두 5천182만9천23명으로 전년도 말보다 2만838명(0.04%) 감소했다. 연간 기준으로 주민등록인구가 감소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란다. 활력을 잃어가는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우리나라 주민등록 인구가 사상 처음으로 감소하면서 각 지방자치단체가 인구 늘리기에 비상이다. 그럼 출산장려지원을 젊은이들이 체감하고 있을까. 그렇지 않다면 이유가 무엇일까. 정부는 저출산 예산이 매년 늘었다고 하는데, 정작 젊은 부부들은 왜 체감하지 못할까. 2018년 이후 처음 1명대로 떨어진 합계출산율은 2020년 0.9명에도 못 미쳤다. 계속 출산율은 떨어지고 있다. 국민소득 300달러에서 3만 달러로 성장하면서 출산율은 오히려 4.5에서 1 미만으로 추락했다. 결혼과 출산을 당연시 여기던 기존 생각들이 여성의 지위 향상과 자기 결정권이 생기면서 비혼과 출산은 이제 선택사항이 되었다. 서울시장 선거전이 뜨겁다. 후보들의 정책이슈는 단연 ‘출산 지원’이 화두이다. 나경원 서울시장 예비후보는 “서울에서 독립해 결혼하고 아이까지 낳으면 총 1억1700만 원의 보조금 혜택을 주겠다”라고 밝히며 이슈를 선점했다. 그녀의 공약은 결혼하면 4500만 원, 아이를 낳으면 추가로 4500만 원을 지원하고, 여기에 대출이자를 9년간 100% 대납해 총 1억 원 넘는 혜택으로 ‘내 집 마련의 꿈’을 이뤄주겠다는 정책을 제시했다. 이에 여러 후보들이 공격하고 나섰지만 정작 상응하는 대안을 제시하지 못했다. 나 후보의 공약이 오히려 주목받는 이유다. 나 후보자는 “저출산 문제는 이번에 당선될 서울시장이 무엇보다도 먼저 해결해야 할 최우선 과제이기 때문”이라며 “저출산·고령화가 얼마나 재앙적이고 심각한지 뼈저리게 체감했다.”라고 밝혔다. 17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돼 20대까지 4선 의원을 지내며 재임 시 저출산·고령화 특별위원회 위원장을 지낸 이 분야에선 전문가의 공약이어서 수긍하고 공감하게 된다. 그는 “주택문제는 저출산에 가장 큰 원인 중 하나”라며 “단순히 현금을 주겠다는 것이 아니라 저소득 신혼부부가 토지 임대부 주택을 마련할 때까지 이자를 지원하겠다는 것”이라며 “현금 살포하고는 다르다”라고 잘라 말했다. 저출산과 고령화를 극복할 수 있는 일·가정 양립제도의 성공적인 정착을 위해서는 이미 선진화된 복지정책을 시행하고 있는 해외사례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특히 프랑스와 스웨덴, 덴마크는 성공적인 가족 정책 사례로 손꼽힌다. 프랑스는 저출산·고령화를 정책의 힘으로 극복한 대표적 사례이자 이미 선진국에 진입한 나라 가운데 독보적으로 출산율을 끌어올린 사례이다. 다양한 가족 구성에 따라 `맞춤형 지원`을 하는 점이 프랑스의 특징이다. 그렇다고 신혼부부 모두 들 서울이나 프랑스로 이사할 수도 없는 것 아닌가. 지방자치단체별로 들쑥날쑥한 출산장려금을 정리하고 가족 정책 전반적인 큰 틀에서 시행할 컨트롤타워(control tower)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적이다. 충청남도의 경우 결혼한 지 2년 안 된 청년 부부가 공공아파트에 입주한 뒤 자녀 두 명을 낳으면 임대료를 전액 감면해주는 '더 행복한 주택'을 공급한다. 방 규모는 기존 임대아파트보다 큰 최대 59㎡(17.8평형)이다. 주거문제를 해결해 준다. 충북 제천시의 사례도 눈여겨 볼만하다. 최대 5,150만 원까지 주택구매 대출금을 내주는 ‘3쾌(快)한 주택자금지원’ 사업을 도입했다. 결혼 후 5,000만 원 이상 주택자금을 대출한 가정이 아이를 낳으면 첫째 150만 원, 둘째 1,000만 원(2년 4회 분할 지급), 셋째 4,000만(4년 8회 분할 지급)을 지원한다. 셋째까지 낳으면 총 5,150만 원의 은행 빚을 지자체가 대신 갚아준다고 한다. 사실 한국은 경제개발협력기구(OECD) 중 출산장려 관련 현금지원 비율이 멕시코 다음으로 낮다. 저출산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주거 지원, 현금 지원, 육아 서비스 공급, 조세 정책 등 맞물려 돌아가야 할 요소들이 있다. 가족 구성원들이나 사회 시스템이 함께 결혼, 가사노동, 출산, 양육, 교육 등의 몫을 함께 감당해 주지 않으면 경제, 직장, 주거, 세금 등의 장벽을 뚫고 결혼과 출산으로 나가긴 어렵다. 그래서 출산 때부터 대폭 지원하는 획기적인 정책 변화가 필요하다. 세액공제 혜택도 주로 중산층 이상에 쏠리는 만큼 저소득층 젊은 신혼부부의 출산율 재고를 위해 현금 지원 형태는 늘려야 한다. 저출산 문제는 포기한 것 아니냐는 말이 돈다. 저출산 너머를 볼 수 있는 비전, 미래로 나가기 위한 시스템,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려는 앞장선 정치적 결단, 제대로 된 컨트롤타워(control tower)가 없다. 백수가 태반인 젊은이들이나 수입이 없는 서민들의 삶이 이토록 팍팍한 것은 경제도, 부동산 정책도, 저출산과 고령화 문제도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닌가. 이제 출산은 ‘취업-결혼-육아’ 등 라이프 싸이클(Life Cycle)과 관련된 문제로 장기적으로 투자해야 한다. 우리 사회에 일·가정 양립이 안정적으로 정착되는 사회로 나가기 위해서 재정적인 지원뿐만 아니라 가족 친화적인 사고를 가지려는 노력도 병행되어야 한다. 이러한 노력은 ‘비용’이 아닌 ‘내일을 위한 투자’이다. 우리 정부의 여성부, 복지부 등 여러 부처와 지자체들도 우물가에서 숭늉 찾는 식의 뜬구름 잡는 캠페인이 아니라 산재해 있는 가족 정책을 모은 컨트롤타워로 피부에 와 닿는 직접적이고 효과 있는 지원에 나서야 한다. 문경시의 경우 신축년 첫 넷째아 출산 가정이 탄생해 3천만 원의 출산장려금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문경시 점촌2동 김모(35)·강모 씨(34) 부부의 남아로 2남 2녀의 막내가 됐다. 문경시의 출산장려금은 첫째 360만 원, 둘째 1천400만 원, 셋째 1천600만 원, 넷째 이상 3천만 원이다. 이러한 출산장려정책에 힘입어 문경시는 2019년부터 출생아 수가 2년 연속 증가세를 이어가고 있다. 2020년 출생아는 328명으로 전년도 대비 14명이 증가했고 이는 경북도 내 유일한 출산증가 기록이다. 출산 절벽시대에 ‘한 생명이 천하보다 귀하다’는 말을 실감하면서 다음 세대가 대한민국의 미래라는 생각은 나만의 생각일까. 글쓴이: 이효상 원장(시인, 칼럼니스트, 근대문화진흥원, 한국교회건강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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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2-19
  • 배재군 칼럼_ 정부의 우한발 바이러스 코비드-19에 대한 비과학적, 비합리적, 비상식적 방역수칙에 대한 지적!
    정부의 우한발 바이러스 코비드-19에 대한 비과학적, 비합리적, 비상식적 방역수칙에 대한 지적! 1. 4명 모임은 허용하고, 5명의 모임은 불허함의 근거가 무엇인가? 2. 부모와 함께 하는 모임은 인원 제한 없이 허용하고, 형제자매의 모임은 불허함의 근거가 무엇인가? 3. 직계가족 모임은 허용하고, 사적 모임은 불허함의 근거가 무엇인가? 4. 대형마트, 영화관, PC방 영업시간 해제하고, 식당, 카페의 영업시간은 제한하는 근거가 무엇인가? 이와 같은 방역수칙은 과학적, 합리적, 상식적이지 않기에 방역수칙의 부당함을 지적한다. 제 안 1. 획일적 방역수칙을 철회하고 합리적으로 수용할 수 있는 방역 수칙(면적당 인원 제한)을 마련하라. 2. 우한발 바이러스 코비드-19 확진자 수가 300~500명 그 이상의 증가에 따른 단계별 상향 조치보다 확진자의 급증할 상황에 대비한 의료 수용 시설을 충분히 준비하여 의료 수용 능력에 따른 단계별 방역수칙을 통해 방역조치를 예측, 가능하게 하라. 정부는 국민의 집합 및 경제활동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는 일이 기본적으로 해야 할 직무가 아니겠는가! 대한예수교장로회 동원교회 배재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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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2-18
  • 이효상 칼럼_ 한국교회여! 트렌드(trend)를 멀리하라
    “카페인(caffeine)을 하세요?”라고 묻는다. 예전에 마시던 박카스나 커피같은 각성 물질의 마시던 그 카페인이 이미 아니다. 이 카페인은 젊은이들이 소통하는 생활방식인 카카오톡(kakao tok), 페이스북(facebook), 인스타그램(instagram)을 줄여 뜻한다. 그동안 웹(web) 2.0을 기반으로 하는 소셜미디어(social media)는 블로그(blogs), 소셜 네트워크(Social Networks), 메시지 보드(Message Boards), 팟캐스트(Podcasts)등으로 참여, 공유, 개방이 특징으로 네티즌들이 적극 참여해서 정보를 만들고 공유하는 사회적인 연결성을 중시했다. 웹(web) 3.0은 데이터의 의미를 중심으로 서비스되는 시대를 말한다. 개인화, 지능화, 상황인식 등이 엄청난 양의 정보 중에 내가 지금 필요한 정보와 지식만을 추출해서 보여주는 맞춤형 웹의 시대가 웹 3.0 시대다. 컴퓨터가 사람을 대신해서 정보를 모으고 필요한 정보만을 편집하여 새로운 정보를 만들어내는 인공지능(AI) 웹이다. 가령 예를 들어, 웹 3.0에서는 우리가 여행을 가고 싶을 때 그 여행지에 대한 정보를 찾기 위해 여러 웹사이트를 일일이 들어가서 정보를 모으고 예약하는 과정 대신 우리의 휴가 일정과 좋아하는 여행 스타일 등을 입력하면 컴퓨터가 정보를 다 찾아보고 그것에 맞춰 알려준다. 코로나와 4차 산업혁명이 사회에서 회자 되면서, 많이 쓰이는 용어 중 하나가 ‘메가트렌드’와 ‘빅데이터’라는 단어이다. 인공지능(AI) 기술과 사물인터넷 등 첨단 정보통신기술이 사회 전반에 융합돼 혁신적 변화가 나타나는 코로나로 인한 변화와 4차 산업혁명이 일상 속으로 빠르게 파고들고 있다. 어찌 보면 변종(變種)이 생겨날 정도이다. 교회는 이같은 변화에 어떻게 대응하고 있고 대응해야 할까? 1980년대는 산업화의 뒤를 이어 ‘경영’과 ‘부흥회’가 목회의 필수 키워드(Keyword)가 된 적도 있고. 1980년 후반에는 ‘제자훈련’이, 1990년대는 ‘빈야드’사역이 2000년대에는 ‘복지’가 유행이었다. 2010년경부터는 인간 이해를 전제로 ‘상담’이 목회의 필수 과정처럼 어필(appeal)되기도 했다. 어찌 보면 한국교회가 트렌드(Trend)라는 호랑이 등에 올라타 롤러코스터를 해 왔다. 한때는 미국의 어떤 교회가 성공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 마치 그것이 교회 성공의 비결인 것처럼 여겨지고 유행처럼 번져 교회 강단과 세미나를 독점하고 필수코스로 탐방하며 그 과정은 그대로 국내 도입되었다. 교회와 목회, 사역에 뭔 트렌드가 있을까마는 강조점이 사회와 소통하기 위한 한때의 흐름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물론 트렌드를 잘 선용하면 교회의 여러 활동에 도움 되는 측면도 있다. 그러나 교회가 너무 트렌드에 민감하고 트렌드에 맞추느라 요란스럽지 않아도 좋을 것 같다. 트렌드는 그때그때 다르다. 선택은 자유겠지만 존재의 가벼움보다는 존재의 진중함이 더 종교가 가진 고유의 성질과 맞다. 어찌보면 트렌드는 ‘유행’이고, 왔다가 사라지는 ‘바람’ 같은 것이다. 짧게는 3년 길어야 10년을 못 넘긴다. 왔다가 반짝하고 지나가는 허상이다. 영원한 것이 아니기에 사람들을 열광케 한다. 혹자는 ‘교회가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면 결국 도태되고 기술에 매몰된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교회가 그리 단순하지만은 않다. 교회는 기술적 가치에 의존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다움’이라는 영성 적 기준이 있다. 이런 기능에도 불구하고 트렌드가 어떤 방향이나 모습으로 변화할지 정확히 예측하는 게 어려운 만큼 지금의 교회는 신기술과의 접점을 넓혀가면서도 초대교회의 영성과 공동체성, 공교회성과 공공성을 오히려 강화하는 노력이 더 필요해 보인다. 물론 전통적인 교회문화 안에도 인공지능의 문화가 도입될 수 있다. 교회가 트렌드에 민감하여 교회 안에 백화점 문화센터와 비슷한 방식으로 교양 아카데미, 카페와 서점, 꽃집 등을 만들어 교회를 '거룩한 공간'이라기보다 평일에도 쉽게 찾을 수 있는 '생활 공간화'함으로써 교회의 대중접근, 특히 교회와 거리를 두는 젊은 세대들을 끌어들였다. 긍정적으로 보면 대중의 일상적 삶에 접근하기 위한 노력으로 볼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종교 고유의 색깔을 잃어버리고 비즈니스나 마케팅 지상주의에 빠지는 부정적인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 트렌드를 파악하고 알아차리는 일은 중요하되 그것이 정말 필요한지는 또 다른 문제이다. 미래학자의 책을 100여 권 읽고 여러 강의를 들었지만 그들의 예측도 틀린 경우가 허다했다. 미래학자들의 헛발질을 보며 그들의 말이 꼭 맞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그렇다고 시대의 트렌드를 외면하고 모른다고 잘한 일도 아니다. 줌(Zoom)이나 화상회의가 그렇다. 현 시세를 읽고 사회와 소통하기 위해 트렌드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트렌드를 따르는 순간, 트렌드에 휩쓸려 결국은 트렌드와 함께 추락할 수 있다. 오늘날 너무 많은 크리스챤들이 그런 함정에 빠지고 있다. 세상 문화가 추구하는 많은 것들에 동조하고 세상 풍속을 따라간다. “자기 스스로 사색하지 않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사색과 주장과 선동에 따르게 된다. 자신의 사색을 그 누구에게 공물로 바치는 일은 자기 육체를 공물로 바치는 것보다 천하다.”라고 러시아의 문호 톨스토이(Leo Tolstoy)는 말했던가. 세상과 소통하고 문화를 접목하며 꼭 트렌드를 앞서가고 주도하고 트렌드에 맞춰가기보다 중요한 것은 시대를 넘어선 교회가 가진 영성의 깊이에 달려 있다. 교회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영혼의 갈급함과 방황하는 그 영혼을 어떻게 하나님의 사람으로 붙들어 세울 것인가 하는 데 더 큰 고민을 가져야 한다. 트렌드는 포장지 정도의 효과를 발휘한다. 화려한 포장지에 정작 그 알맹이가 허당이면 사람들은 금방 실망하고 떠나가게 된다. 알맹이 즉 내공이 없으면 무슨 사회적 영향력이 있겠는가? 이미지라는 이름으로 유행하는 문화 시류에 맹목적으로 편승하려는 것은 어찌 보면 남의 뒤에 서겠다는 것과 같다. 그런데 그런 문화 현상에 동조하지 않을 경우 거친 반발과 비판을 두려워해 세속적인 현상을 맹목적으로 받아들인다. 그래서인지 트렌드를 멀리하고 시대를 거슬러 ‘수도원 적 영성’으로 나가야 하는 것이 오히려 역설적 대안일 수 있다. 트렌드의 옷을 입고 젠틀(gentle)한 교회의 모습은 지녔지만 은혜가 메마른 교회보다는, 트렌드를 멀리하고 영성의 깊이를 더해 영혼을 향한 눈물과 가슴이 뜨거운 교회가 그래도 더 건강하고 희망적이다. 한국교회여! 트렌드를 멀리하자. 트렌드는 본질이 아니다. 4차 산업혁명 시대라고 여기저기 세미나 돌아다니며 들은풍월로 따라 한들 언제 전문가가 되겠나. 빌게이츠처럼 한다고 첨단목회가 되겠나. 4차 산업혁명은 이미 전문가인 평신도들의 몫으로 역할 분담을 해야 한다. 그렇게 그들에게 맡기고 목회자는 차라리 목회의 본질을 부여잡아야 한다. 교회여! 영성과 능력을 지닌 교회로 가자. ‘다시 복음으로’, 트렌드와는 결이 다른 길을 가자. 코로나 위기 속에 한 영혼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깨달으며, 다시 말씀을 깊이 파 실력을 쌓고, 다시 기도의 분량을 채우며 핵심역량을 강화하고 극대화하는 쪽으로 가야 산다. 시세를 읽고 실력을 쌓으며 트렌드와 반대로 갈 용기를 가진 사람만이 남다른 생존과 탁월함을 이뤄낼 수 있다. 어느 시대나 시대정신을 읽고 성공하는 사람은 그 생각과 가는 길이 이미 다르다. 그래서 남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감으로써 시대를 열고 새로운 트렌드를 만들어낸다. 이효상 원장 (근대문화진흥원 원장/ 한국교회건강연구원 원장) 2021-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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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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