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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종희 칼럼_ 정년문제 처리에 대한 아쉬움
    해마다 총회 때면 정년 문제가 뜨거운 감자가 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헌법대로 만 70세 정년을 주장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현실은 꼭 정년만을 고집할 수 없는 피치못할 여러 사정이 있을 수 있다. 좀 더 대우(?)를 받으며 조기 은퇴하는 경우는 여유 있는 교회일 것이다. 그러나 평생 목회한 목사에게 대우는커녕 보금자리 하나 마련해 줄 수 없는 은퇴가 걱정인 교회가 더 많다. 그러므로 우리 교단은 정년 문제에 대하여 형편이나 경우에 따라서 일을 이리저리 잘 처리하는 능력이 요구된다. 헌법도 살리면서 지 교회 사정도 고려해 주는 신축성이 필요하다고 사료 된다. 제107회 총회 석상에서 한 필자의 동의는 성사되지 못했지만 아래와 같은 필자의 견해를 피력해 보고자 한다. Ⅰ. 정년연장은 헌법 정신에 배치되는 주장인가. ① 정치 제4장 제4조 1항 위임목사는 “한 지 교회나 1구역(4지 교회까지 좋으나 그 중 조직된 교회가 하나 이상 됨을 요함)의 청빙으로 노회의 위임을 받은 목사이니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그 담임한 교회를 만 70세까지 시무한다.”라고 되어 있다.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이란 단서가 붙어 있다.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만 70세까지 시무하지만 특별한 이유가 있으면 시무 연령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즉 만 70세 정년 이전에 사망을 하거나 병고로 더 이상 목회가 불가능한 특별한 사유가 있을 때는 정년 이전에도 물러날 수 있다. 그러나 물러날 사정이 없을 때는 만 70세까지만 시무하고 그만두어야 한다. 라고 해석한다. ② 물론 전항과 같은 해석이 합리적이다. 그러나 특별한 사정이란 꼭 만 70세 이전에만 있으라는 법은 없다. 은퇴할 시점에 가서 특별한 이유가 있을 수 있다. 특별한 이유가 있으면 은퇴 시점이 좀 달라질 수 있다고 해석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가정하여 원래 법이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만 60세까지 한다였는데 만 70세로 연장한 법이라면 만 70세가 되어 특별한 이유가 있다고 더 한다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그러나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종신까지 할 수 있는 것을 만 70세로 줄여 놓은 것이니까 특별한 이유가 있으면 조금 더 할 수 있다는 논리가 억지는 아니다. 목사와 교회 간 합의만 되면 다소 정년연장이 가능하다고 본다. ③ “근로자가 정년이 지난 후에도 사용자의 동의 아래 기간의 정함이 없이 사용자와의 근로관계를 계속 유지하여 왔다면 사용자는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단순히 당해 근로자가 정년이 지났다거나 고령이라는 이유만으로 근로관계를 해지할 수는 없다.”라는 판례가 있다(대법원 2002두12809). 물론 목사와 교회의 관계가 근로관계는 아니더라도 목사와 교회도 대한민국 국민으로 참고할 판례임에는 틀림이 없다. 예장대신 51회 총회는 ‘목사 정년 70세는 유지하되 교회에서 원하면 계속 시무할 수 있다’라고 결의하였다. Ⅱ. 정년연장을 위한 신축성 있는 방법은 없는가. ① 정치 제4장 제4조 1항 위임목사는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그 담임한 교회를 만 70세까지 시무한다.”라고 되어 있다. 그러므로 총회는 헌법을 개정하지 않은채로 지 교회에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경우 당회의 결의로 일정 기간 정년을 연장할 수 있도록 결의해 주면 된다. ② 정치 제12장 제5조 1항: ‘총회는 교회 헌법(신조, 요리 문답, 정치, 권징 조례, 예배 모범)을 해석할 전권이 있다’라고 하였다. 그래서 항존직 만 70세를 만 71세 생일 전날까지로 해석하여 총회 결의로 시행하고 있다. 그러므로 “특별한 사유가 있을 때 지 교회 시무는 몇 년을 연장할 수 있으되 단, 대외(노회, 총회, 산하기관) 정년은 만 70세를 유지하기로 한다.”로 총회가 결의하여 시행할 수 있다. 총회가 결의하면 바로 시행에 들어갈 수 있다. Ⅲ. 결론 70세 정년제는 성경을 배경으로 만들어진 법이 아니다. 헌법의 정신을 살리기 위하여 만든 제도도 아니다. 현실 상황과 필요에 따라 만든 제도이다. 그러므로 사회 상황이 바뀌고 문제점이 드러난다면 신축성을 발휘할 수 있다. 최종 결론은 총회나 노회에서의 정년은 현재대로 유지하되 각 지 교회가 합의할 경우 지 교회 목회만 몇 년을 더할 수 있도록 총회가 결의하면 된다. 노회에서 선거 피선거권은 제한하고 시무하는 지 교회 당회장권을 주면 된다. 아무리 총회가 결의하여도 교회가 연장을 원하지 않을 경우에는 구속력이 없으므로 원하지 않는 교회에 피해가 되지도 않는다. 통계상 정년 문제로 인하여 교단을 떠나는 교회들이 많다고 하는데 서로서로 입장을 이해하며 정년 문제를 신축성 있게 처리하였더라면 좋았을 것이다. 김종희 목사(총회 정치부장, 헌법자문위원장 역임. 성민교회) 2022-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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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9-22
  • 우리 에피소드(episode)로 끝내자!_ 윤희원 목사(전주효성교회)
    이번 총회의 부총회장 선거는 결국은 에피소드(episode)로 끝내야 한다. 에피소드로 끝나지 아니하면 우리 총회에는 미래가 없다. 본래 에피소드란 막간극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시트콤(sitcom)이라고 볼 수 있다. 시트콤은 situation comedy의 줄임말이다. 이 시트콤인 에피소드의 재미는 서브젝트(subject)인 주인공이 프로젝트(project)에 휘말려 결국은 오브젝트(object)가 되어버리는 데 있다. 사실상 어떤 선거든지 선거에 나서는 사람은 그 선거를 통해서 주인공이 되려고 한다. 즉 서브젝트가 되기 위해서다. 그런데 그 선거가 프로젝트를 통해서 계획되고 기획되기에 선거를 관리, 기획하는 선관위는 이 프로젝트 운영에 공정을 기해야 하며 프로젝트 되는 선관위 규정에 스스로가 투명해야 한다. 그래야 선거라는 행위를 통해서 프로젝트화 되지 못한 출마자는 자연히 오브젝트가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금번 우리 선관위는 선관위 스스로가 선거를 프로젝트 하는 일에서 처음에는 법과 원칙에 의해서 투명하게 할 것을 공표했다. 그런데 지금은 사안에 따라서 법과 원칙은 적용하고 크게는 정치적 고려를 스스로 하고 법과 원칙을 스스로 무시하고 있다. 그래서 이번 총회의 선거는 에피소드로 끝나야 한다. 희극이 아닌 비극으로 말이다. 결코 희극이 되어서는 안된다. 희극이 되어버리면 계속하여 이런 일이 발생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비극으로 단 한 번 있었던 에피소드로 끝나야 한다. 그러지 아니하면 우리 총회는 미래가 없다. 선거란 양심의 자유에 의해서 행하여 져야 한다. 어떤 의미에서 선거는 ‘지지할 수 있음’과 ‘지지할 수 없음’에서 선택하는 자유의 행동이다. 그런데 이번 부총회장 선거는 이 두 가지를 다 하지 못하게 한 아주 나쁜 선거가 되었다. 처음에는 지지할 수 없음도 지지할 수 있음도 사라져 버린 단독후보로 결정되는가 했는데 이제는 ‘양해서’와 ‘사과문’이라는 요식행위를 거쳐 총대들에게 두 후보를 지지하거나 지지하지 않거나를 선택하라고 한다. 그런 막장 선거가 어디에 있는가? 누가 이렇게 선거를 어렵게 만들고, 힘들게 하고 있는가? 두 후보인가? 아니면 선거를 프로젝트 하는 선관위인가? 나는 선관위라고 본다. 이렇게 행하는 선관위는 없어져야 한다. 총회의 개혁을 위해 장로교의 정치 원리에 입각해서 말이다. 이토록 우리 헌법에 규정된 “양심의 자유”를 제한하고, 변질시키는 일은 지금까지 없었기 때문이다. 좀 더 내밀하게 부총회장 선거를 들여다보자. 누구를 선택해야 할까? ‘선거법을 위반했습니다’라고 사과한 후보를 아니면 선거법을 위반했음을 사과했기에 ‘양해합니다’라고 한 후보를 선택해야 하는가? 사실상 둘 다 문제이다. 이렇게 하려면 정치적인 고려를 처음부터 했어야 한다. 그래야 상생의 정치가 되고 화합과 이해의 정치가 된다. 그런데 한 후보자에게는 자격을 주고 다른 후보자에게는 자격을 주지 않고 미루다가 선거 막판에 선거법을 위반한 후보자에게 ‘선거법을 위반했으니 사과하고’ 이미 자격을 획득한 후보자에게는 무슨 언질(?)을 주어서 양해한다고 ‘양해서’를 쓰게 해서 두 사람 모두를 다 자격 없는 후보(?)로 만들어 버렸는지 알 수 없다. 난, ‘양해서’를 쓴 후보도 자격이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그런 불공정하고, 깨끗하지 못한 선거에 ‘양해서’를 제출하고 나가려고 하는 어떻게 보면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어서 그렇게 하는 사람이라면 총회의 지도자로서는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 같으면 ‘양해서’를 쓰지 않고 후보사퇴를 선언했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사과문을 쓰고 후보의 자격을 얻어 부총회장에 출마한 후보에게도 묻고 싶다. ‘선거관리 규정을 어긴 후보입니다’라는 사과문을 쓰고 후보자가 되어야만 했는가를 말이다. 왜, 무엇 때문에 규정을 어겼다고 하는데도 굳이 그 결정을 받아들이고 사과문을 쓰고 후보가 되려고 하는가이다. 후보가 되기만 하면 선거에서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 때문이었다면 더욱 마음이 아프다. 사실상 교회의 선거는 이기고 지는 당선이 목표가 아니다. 누가 더 잘 하나님과 그의 교회를 섬길 수 있는가를 선출하는 것이기에 굳이 사과문까지 쓰고 나서야 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내가 더 잘 할 수 있을 것 같아 후보가 되려고 했는데 당신이 더 잘 할 수 있다고 난 선거규정도 지키지 못했다고 해서 후보의 자격도 주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나보다 더 잘하는 일꾼이 되십시오”라는 사퇴의 변을 내고 사퇴했다면 우리 총회의 정치는 성경적이고 헌법적인 정치가 살아났을 것이다. 선거규정 하나도 지키지 못한 후보가 어떻게 헌법을 지키고 교회를 지켜 갈 수 있겠는가 하는 반성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 두 후보자들이 사퇴하지 않고 짜고 치는 무슨 판처럼 선관위에 의해 ‘양해서’와 ‘사과문’을 쓰고 ‘서로 잘해 봅시다’ 하고 있다. 지금 우리 총회는 100회 총회 때부터 교회의 정치가 성경과 헌법에 의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일종의 교묘한 신자유주의적 심리정치의 형태를 띠게 되었다. 신자유적인 심리정치란 참으로 매우 효율적이고 영리한 시스템이다. 억압 대신 친절로, 금지 대신 유혹으로, 유권자들의 심리를 조종하는 정치이다. 이 정치는 사실 유권자들에 유리하게 되는 것 같지만 기득권자들에 유리한 정치이다. 그래서 그 심리정치에 의해 수년 전(2016년) 우리는 두 사람의 목사 부총회장 후보를 자격 없음으로 규정하여 탈락시키고 현장에서 두 후보자를 선정하여 투표하는 장로교 역사상 있을 수 없는 투표를 강행했다. 그리고 5년이 지나서는 다시 자격 없는 사람을 탈락시키는 것이 아니라 ‘양해서’와 ‘사과문’을 쓰게 하고 두 사람 모두에게 자격을 주었다. 결과적으로 더 나빠졌는지 더 좋아졌는지는 아직은 알 수 없지만 지금 이 시점에서는 나빠졌다고 볼 수밖에 없다. 모두가 법 규정 앞에서 평등해야 되는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고민한다. 선거에 임하는 나 자신도 투명하지 않고 더욱더 선거가 투명하지 않기 때문이다. 후보자인 두 사람 모두 다 자신의 욕망에 의해서 출마했고 이제 나 역시 내 자신의 욕구에 의해서 선거해야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광, 총회의 바른 정치는 언제나 구호에 불과했지만, 지금은 아예 구호도 되지 못하고 뒷전으로 밀려나 버렸기 때문이다. 선거가 장로교 정치에 맞게 되려면 사실 나와는 상관없이 작성된 ‘성명서’지만 8월 29일 전국호남협의회 이름으로 발표한 “우리의 주장을 철회하지 않을 것이며 총회 참석도 단호히 거부한다”라고 성명했기에 그랬으면 한다. 적어도 그날 참석한 450명 정도 되는 총대들은 부총회장 선거에 투표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하면 호남협의회가 지지하지 않는 후보가 선출될 것이다. 과연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아닐 것이다. 그런 ‘성명서’가 있다면 나 역시 찬조금 들고 그날 참석하지 아니했을 것이다. 우리는 결국 자격이 있든 없든 두 후보들 중에 하나를 선택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에게 우리 총회의 부 대표자와 대표자의 자격을 2년 동안 주게 될 것이다. 심각하지만 아무도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다. 심각하게 여기는 사람만이 바보이다. 사실상 나는 바보, 멍청이가 되었다. 왜냐하면 바보 멍청이가 되지 않고는 투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살다 보니 삶에서 목사로서 터득된 비결이 있다. 믿음이 없는 바보, 신학과 신앙이 없는 멍청이는 항상 세상에서 방황하고 믿음 있는 신학과 신앙에 굳게 선 자는 세상에서 여행하고 산다는 것이다. 선관위는 방황을 해도 우리 총대들은 여행을 했으면 한다. 이 말을 이해하지 못하면 투표하지 말아야 한다. 왜? 두 후보자에게 ‘양해서’와 ‘사과문’을 쓰고 자격을 주고 우리에게 할 수 없는 투표를 하라고 하는지에 대한 이해가 없으면 투표하지 말아야 한다. 권위주의자에게는 투표하지 말자. 도덕주의자에게도 투표하지 말자. 민주주의자에게도 투표하지 말자. 아니 신본주의, 신앙 제일주의를 부르짖는 자들에게도 투표하지 말자. 수년 동안 나는 권위주의자에게 참 권위가 없고 도덕주의자에게 진정한 도덕이 없고 민주주의를 외쳤던 민주투사에게 정작 민주 의식이 없음을 보아왔고 신본주의, 신앙 제일주의인 개혁주의자들에게 참 신앙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냥 찍자. 누가 한들 나아질 총회가 아니다. 우린 하나님의 절대주권을 믿는다. 그러나 손가락을 잘라낼 각오로 찍어야 한다. 좋은 놈(?) 중에서 좋은 놈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선관위에 의해서 나쁜 놈(?) 중에서 더 나쁘지 않을 분(?)을 선택해야 하기 때문이다. 선관위가 이렇게 후보자 두 분을 나쁜 분으로 만드는 것은 아니다. 나쁘면 자격을 주지 말았어야 한다. 한 분 목사를 선택하는 것이 좋을까? 아니면 다섯 분의 목사를 선택하는 것이 좋을까를 기도는 하지 말고 화장실에 앉아서 매일 매일 고민해 보자. 어차피 프로젝트 된 선거에서 서브젝트를 정하는 것이 아니라 오브젝트를 골라야 되는 선거이기 때문이다. 누가 더 개혁신학과 신앙의 반대자인가를 투명성의 원리에서가 아닌 불투명성의 원리 속에서 선택해야 되는 선거이기 때문이다. 사실상 이번 총회의 부총회장 선거는 잘못하면 지역적이고 신학적이고 광신(狂信)적 속성을 가지고 있기에 우리에게 힐링(healing)의 효과를 주지 못할 것이다. 다만 킬링(killing)이 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그래서 나는 우리 총대들에게 두 분의 후보 중에서 누가 킬링하지 않을까를 생각해 보라고 하고 싶다. 그리고 그분에게 투표하라고 권하고 싶다. 왜냐하면 총신과 광신의 대결도, 영남과 호남의 대결도, 교갱과 영성의 대결도, W.E.A의 찬성과 반대의 대결이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아주 심각한 신앙적, 신학적 위기 상황에 놓여 있다. 그래서 사실 문화적 위기 상황에 대처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생각해 보자. 왜 신앙이나 신념과 다른 합리적인 견해가 신앙이나 신념의 도그마의 껍데기를 깨고 들어오면 우린 갑각류들이 발작하듯 반발한다. 나 역시 그러하다. 어느덧 내 개혁신앙과 신학이 지적 갑각이 되었고 교조적인 신앙생활을 하고 있기에 신앙의, 신학의 순결함을 지키고 방어한답시고 이념적 순결주의가 되어 ‘차이’와 ‘차별’을 구분할 줄 모르면서 내 신앙과 신학의 정당성만 스스로 부여하고 신학적, 윤리적 나르시시즘에 젖어 두 후보에 대한 차이도 차별도 모른 채 내 생각과 판단에 틀리면 조롱, 내면의 비웃음과 반대로 일관하고 있음을 고백한다. 이렇게 프로젝트화 한 선관위원들을 향해 “하나님 없이, 하나님과 함께 어떻게 하느냐”고 물으면서 그들의 정치적 술수를 지켜보고만 있는 비참한 총대일 뿐이다. 이젠 비굴해지기까지 한다. 문화신학자인 리처드 니버는 “교회가 현대의 문화적 환경에 순응하기 위해 애쓰는 동안 교회의 영적 영향력은 급격히 쇠퇴해 왔다”라고 지적했다. 지금 우리 총회가 우리 총회의 정치적 환경에 순응하기 위해 이러한 선거 프로젝트를 만들고 힘쓰는 동안 우리 총회의 영향력은 총회 안에서도 그리고 사회 속에서도 급격히 쇠퇴하게 될 것은 뻔하다. 그러나 주사위는 던져졌다. 내가 투표를 하든 안 하든 두 사람 중에 한 사람은 부총회장이 될 것이다. 부탁한다. 킬링하지 말고, 힐링의 총회 정치를 세워가기를, 그리고 이 선거는 우리 교단 역사에서 한편의 에피소드로 끝나길 기도한다. 누가 부총회장이 될 것인가? 당신이 지지하는 사람, 그리고 선거관리위원장이 지지하는 사람이 될 것이다. 그래도 소통할 수 있는 사람을 선택하는 것이 옳을 일일 것이다. 누가 소통할 수 있는 적임자인가를 깊이 생각해 보자. - 이 글은 2022년 9월 6일 기독신문의 ‘선관위 입장, 사과문 감사의 글’이 나기 전에 쓴 글입니다 - 2022-0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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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9-07
  • 맨돈 소강석 선거법 위반 소지素地
    6.1 지방선거를 42일 앞두고 부실 선거관리로 말 많던 노정희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이 사퇴했다. 노 전 위원장은 지난 4월 18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전체 위원 회의에서 “부실 투표 관리 책임을 통감한다”라면서 “국민께 심려를 끼쳐드린 것에 대해 다시 한번 깊이 사과드린다”라며 사퇴 의사를 밝혔다. 공직선거 관리 총책임자인 노 위원장은 진보 성향 판사 모임인 ‘우리법연구회’ 출신 현직 대법관이다. 선관위원장직을 사퇴하더라도, 대법관 직위는 계속 수행한다. 노 위원장은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였던 이재명 전 경기지사의 공직선거법 위반 사건 재판 당시 대법원 주심을 맡아 2020년 무죄 취지 판결을 주도했다. 4월 20일 정치권 등에 따르면 가장 큰 이유로는 사전투표 부실 관리에 대한 검찰 수사가 본격화하고 있다는 점이 꼽힌다. 경기남부청 반부패수사계는 지난 5일 제20대 대선 사전투표 관리 및 운영 부실 논란에 휩싸인 노 선관위원장에 대한 고발 건 수사에 본격 착수했다. 2021년 3월 20일, 4월 7일 지방선거 보궐선거를 앞두고 맨돈 소강석이 내려다보는 문재인 대통령이 “4차 재난지원금은 가급 적 3월 중에 집행되도록 속도 내달라”고 지시한 것에 대해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선거법 위반이 아니라고 했다. 재난 상황에서 대통령이 해야 할 일이라는 것이다. 선관위 사무총장은 작년 국회에서 “총선 전 재난지원금 지급 결정이 선거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본다”라고 했다. 이번 지원금도 선거에 당연히 영향을 미칠 것이다. 선거법은 ‘공무원은 선거 결과에 영향을 미치는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고 하고 있다. 대통령의 선거 전 재난지원금 독촉이 선거법 위반이 아니면 무엇인가. 지난 2021년 2월 이재명 승리를 위해 뛰던 문재인은 여당 대표·장관 등을 대동하고 가덕도를 찾아 “눈으로 보니 가슴이 뛴다”라고 했다. 대통령의 방문 하루 전날 민주당은 ‘가덕도 신공항 건설’이 주요 공약이라고 발표했다. 선관위는 그래도 “대통령 직무 수행”이라고 했다. 선거 심판이 아니라 정권 하수인이다. 총회 소속 목사들의 카톡 여러 모임방에 제3차 합동 포럼 개최에 관한 공고문이 올라왔다. 맨돈 소강석과 맨쇼를 벌여 죽었던 송병원을 제105회 총회 현장에서 부활시켜 장로 부총회장으로 당선시키고 절대 돈 먹은 적 없다는 이승희 사람으로 알려진 김종혁 목사가 대표회장으로 올린 공고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일시 : 2022년 8월 16일(화) 10시 30분 ~ 2시 장소 : 대전인터시티 호텔 대상 : 정회원 및 지역별 게스트 장로 3인씩 특별초청 1부 예배 설교 : 윤영민 목사(대한교회, 총신대 신학대학원 교수) 축도 : 김상현 목사(목장교회, 기독신문 사장대행) 2부 축사 및 특강 축사 : 소강석 목사(새에덴교회, 증경총회장) 현 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 직책이 빠져 있다. 배만석 목사(사랑스러운교회, 전 총신대 신대원 총동창회장) 장봉생 목사(서대문교회, 은혜로운동행기도회 본부장) 환영사 : 대표회장 김종혁 목사 특강 : 송삼용 목사(하늘양식교회, 고려대학교 법학박사 과정)_ 윌버포스와 합동 포럼의 비전 제107회 선거기간에 제106회 선거관리위원장으로서 제107회 선거관리 중책을 맡은 맨돈 소강석이 선거법 개악과 금권 부정 선거 달인임에도 축사를 한다. 이 모임은 선거에 영향을 미치는 총회 정치꾼들의 모임이다. 8월 16일 대전인티시티호텔에서 모인다. 도대체 오비이락의 의혹이 있는 모임을 왜 갖는 것이고 엄정한 선거관리의 책임을 진 선거관리위원장임에도 맨돈 소강석은 누구를 위해 무슨 축사를 하는가. 그 행위가 총회 선거법을 위반하는 소지가 있음을 모른단 말인가. 그 주최 측 핵심인물로 추측되는 언론인은 이번 선거 특정 후보와 아주 가까운 사람으로 알려져 있는데 노예제 폐지 업적을 이룬 영국의 정치인을 내세운 특강은 총회 소속 목사이고 언론인인데 고려대학교 법학박사 과정의 연구생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 의아하다. 대한민국 중앙선거관리위원회의 위원은 특정 정당에 가입하거나 정치 활동 또는 정치에 관여하는 것이 금지되어 정치적 중립성을 지켜야 하며 헌법과 법률로 위원의 임기와 신분을 보장하여 외부의 간섭과 영향을 배제함으로써 직무의 공정성을 확보한다. 총회선거규정은 위원장에 대해 다음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제6조(조직 및 직무) 1. 위원장: 위원회를 대표하여 선거관리의 제반 사항을 총괄한다. 9. 모든 입후보자는 소정의 양식을 따라 “공명선거 서약서”를 위원회에 제출해야 하며, 그 내용은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 헌법과 총회 규칙 및 선거규정 등을 비롯한 제반 결의에 대하여 성실히 준수할 것과 선거와 관련하여 총회와 선거관리위원회 등에 대하여 사회법에 의거 민, 형사상 제소, 고소, 고발 등을 하지 않기로 서약합니다."로 한다. 제26조(선거운동의 범위와 한계) 1. 총회임원, 상비부장, 공천위원장 및 기관장, 재판국원, 선거관리위원(선출직), 총회 총무 입후보자(이하 ‘입후보자’라 함) 및 그 지지자는 선거기간 중 일체의 금품 요구 및 금품 수수(金品授受)를 할 수 없다. 4. 선거운동 기간은 등록 마감일부터 총회 개회 전일까지로 하며, 모든 입후보자는 선거운동 기간 시작일 2개월 전부터 소속 교회, 소속 노회 이외의 교회, 노회, 총회 산하 모든 예배 및 행사에서 일체의 순서를 맡을 수 없다. 선거운동기간이 종료한 후, 총회 개회 일부터는 교인 동원 및 문자 전송 등 일체의 선거운동이 금지된다. 위반 시에는 후보자격이 상실된다. 단, 부임원으로서 정임원 후보인 경우와 단독후보로 출마하여 선거관리위원회의 허락을 받은 경우는 예외로 한다. 총회선거법 제26조 4항은 ‘선거운동 기간은 등록 마감일부터 총회 개회 전일까지로 하며 모든 입후보자는 선거운동 기간 시작일 2개월 전부터 소속 교회, 소속 노회 이외의 교회, 노회, 총회 산하 모든 예배 및 행사에서 일체의 순서를 맡을 수 없다’라고 규정하는데 그것을 관리하고 감시해야 할 선거관리위원장은 온갖 행사에 참여해 맨쇼를 하며 어겨도 되는 것인가. 그러한 특권은 사회법과 총회선거법에서도 금하는 금품 수수의 맨돈 위력에서 나오는 것인가. 제28조(선거규정 위반자 처벌규정) 2항은 다음과 같이 엄하게 규정한다. 본 규정 제26조 1항과 2항을 위반한 자로서 금품제공자는 영구히 총회 총대 및 공직을 제한하고 금품을 요구 및 받은 자는 금액의 30배를 총회에 배상하며 위반 즉시 10년간 총회 총대 및 공직을 제한하되 그 기간은 배상금을 총회 입금일로부터 계수한다. 목사임에도 성이 차지 않아 배광식도 소지한 법학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언론인으로 알고 있다. 총회 선거기간의 정치적인 특강에 앞서 옛 선비들도 금과옥조(金科玉條 금이나 옥처럼 귀중히 여기어 꼭 지켜야 하는 법칙이나 규정)로 삼은 오비이락(烏飛梨落 까마귀 날자 배 떨어진다는 뜻으로 아무 상관도 없이 한 일이 공교롭게도 때가 같아 억울하게 의심을 받거나 난처한 위치에 서게 됨을 이르는 말)의 불미(不美)한 일을 저지르지 않기를 바란다. 특히 맨돈 소강석은 제발 정신을 차리고 총회 선거관리위원장의 본분과 목사의 직분을 되새겨 맨돈과 맨쇼를 삼가 바로 서기를 바란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얻는 데 매우 열심이었다. ‘지혜에 대한 사랑’(philo-sophia)을 하나의 학문으로 만든 사람들이 그리스인들이다. 하지만 그리스인들에게는 지혜에 대한 사랑에 어울려 보이지 않는 관습도 있었다. 그들은 개인적인 일에서나 공무에서나 결정을 내리기 위해 신탁에 조회했다. 지혜로운 사람들이 왜 스스로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신의 계시에 의지했을까? 그들이 신탁에 의지한 것은 지혜의 부족 탓일까, 지혜로움 때문일까. 신탁에 의지한 그리스인들은 어리석은 사람들이었을까. 그들이 중요한 결정을 앞두고 신의 지혜를 구한 까닭은 인간 지혜의 한계를 알았기 때문이다. 인간 지혜의 부족함을 인정한 것이 바로 그들의 지혜였다. 신탁의 뜻을 해석하면서 그리스인들은 더 지혜로워졌다. 신적인 계시의 뜻을 묻고 따지는 과정은 인간적 지혜를 갈고닦는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 세계에 널리 퍼져 있던 신탁의 관습은 신탁의 수수께끼를 풀기 위해 ‘묻고 따지고 시험하는 지혜’, ‘사람들의 지혜를 모으는 지혜’를 가르쳤던 것이다. 델피의 아폴론 신전 입구에는 수많은 권력자의 어리석음을 경계하는 경구가 새겨져 있었다. “너 자신을 알라.” “과도함을 삼가라.” 이 두 경구가 왜 거기 새겨져 있었을지는 역사적 지식을 동원하지 않아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과욕에 사로잡힌 자에게 어떻게 신의 뜻이 올바로 전해질 수 있을까? 자기를 모르는 사람이 무슨 일을 제대로 할 수 있겠나? 그러니 “너 자신을 알라”와 “과도함을 삼가라”는 신탁에 앞서는 신탁, ‘최고의 신탁’이었다. 이를 누구보다 더 잘 알았던 사람들은 그리스 철학자들이다. ‘지혜에 대한 사랑’은 따지고 보면 인간의 한계를 알고 지나침 없는 행동의 지혜를 찾는 일이었으니까. 성경은 말씀한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사람보다 지혜 있고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고전 1:22-25 2022-0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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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G.COLUMN
    2022-08-12
  • 윤석열 대통령 대처 수상처럼
    윤석열 정부의 동시다발적 사정(司正)작업이 속도를 내고 있다. 검찰을 비롯해 경찰과 감사원 등 기존 사정 기관은 물론이고 법무부, 국토교통부, 통일부와 같은 정부 각 부처까지 전 정권 관련 각종 의혹 파헤치기에 나서고 있다. 이전의 경우 정권교체 후 벌어진 사정 작업이 주로 과거 정권에 초점이 맞춰졌다면 윤석열 정부의 사정 작업은 문재인 정부는 물론이고 현 야당 유력주자인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의원을 함께 겨냥하고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난다. 과거와 현재 권력 모두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도덕과 합리주의의 기원을 밝히려는 작업에 매진한 독일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년 10월 15일 ~ 1900년 8월 25일)는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천성적으로 호전적이다. 공격은 내 본능의 일부다. 적이 될 능력을 갖추는 것, 적이 되는 적은 강한 천성을 전제로 하며 그 까닭에 저항을 찾아다닌다... 공격하는 자의 힘에 대한 일종의 척도는 그에게 필요한 적대자에게서 찾을 수 있다. 강력한 맞수를 찾아나서는 과정이나 또는 문제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발전이 이뤄진다. 호전적인 철학자는 승부를 건 문제들에 도전하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어쩌다 우연히 나타나는 저항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힘과 융통성과 무기를 동원해야만 맞설 수 있는 저항들 그리고 자신과 동등한 힘을 지닌 적을 굴복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정치인은 1979년부터 1990년까지 영국의 총리를 지낸 마가릿 대처(Margaret Hilda Thatcher, 1925년 10월 13일 ~ 2013년 4월 8일)가 당수가 된 것을 한 번의 요행으로 여겼고 오래갈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았다. 당을 이끌고 처음 2~3년 동안 노동당이 정권을 잡은 시기에 대처를 바라보는 정치인들의 시선은 거의 바뀌지 않았다. 그녀는 사회주의 체제를 매도했다. 그녀가 보기에 사회주의는 경제적 이니셔티브를 모두 질식시켜서 영국 경제를 사양길로 접어들게 한 주범이었다. 그녀는 당시의 화해 무드를 깨고 소비에트연방을 힐난했다. 1978년과 1979년에 걸친 겨울, 몇 개의 공공부문 조합이 파업을 결의했다. 대처는 정면돌파를 감행하면서 노동당과 제임스 캘러핸 총리를 이 파업과 결부시켰다. 이것은 대담하고 분파적인 발언으로서 저녁 뉴스를 장식하기에 딱 좋았다. 그러나 선거의 승리에는 도움이 안 되는 행동이었다. 문재인처럼 유권자들을 부드럽게 대하고 안심시켜야지 겁을 주어서는 안 될 일이니 말이다. 최소한 좌파가 득세한 당시의 영국은 그것이 전통적인 상식이었다. 대처는 지금까지 유권자들을 당황하게 해왔지만 총리가 된 이상 논조를 절제하고 상처를 치유할 필요가 있었다. 여론 조사에 따르면 지금 윤석열 시대처럼 그것이 대중이 원하는 바였던 모양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의 윤석열 대통령처럼 대처 총리는 언제나 그랬듯이 정반대로 행동했다. 그녀는 예산 삭감 법안을 통과시켰다. 그것도 선거 때 공약한 것보다 훨씬 더 큰 규모의 삭감이었다. 대처 총리의 정책이 진행될수록 캘러핸이 주장했던 대로 경제는 충격에 빠졌고 실업률이 치솟았다. 같은 당의 남성 의원 다수가 수년간 자신들을 대해온 대처의 처신에 더 이상 분개를 참지 못하고 이준석과 이재명처럼 공개적으로 그녀의 능력을 문제 삼았다. 대처는 보수당에서 가장 존경받는 온건한 의원들을 ‘나약하고 감상적인 사람’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들은 대처가 국가 경제를 파탄에 빠뜨림으로써 자신들의 정치 경력에 오점이 남을까 봐 두려워했다. 대처 총리는 그들을 내각에서 추방하는 것으로 대응했다. 그녀가 작심하고 모든 반대자를 밀어낼 기세였다. 적들의 영역은 점점 커졌고 그녀의 인기는 지금의 윤석열 대통령처럼 하락 일로에 놓여 있었다. 벌써 탄핵을 들먹이는 윤석열 반대 여론처럼 다음 선거에 그녀가 끝장날 것이 틀림없었다. 1982년 대서양 반대편에서 아르헨티나 군사정권이 러사아의 푸틴처럼 국내에 산적한 문제로부터 주의를 분산시킬 목적으로 포클랜드섬을 침공했다. 포클랜드는 영국령이었지만 아르헨티나는 자국의 영토임을 주장했다. 군사정권 관리들은 영국이 본토에서 멀리 떨어진 데다 불모지인 포클랜드를 포기할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대처는 주저하지 않고 포클랜드에 해군 특수부대를 파견했다. 1만3천 킬로미터에 달하는 먼 거리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노동당 지도자들은 무의미하고 희생이 큰 이 전쟁을 비난했다. 당내에서도 다수가 두려움에 휩싸였다. 섬의 재탈환에 실패한다면 보수당은 파멸할 것이라는 두려움이었다. 대처는 그 어느 때보다 고독했다. 그러나 다수 대중이 그녀의 자질을 새롭게 보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그들을 초조하게 만들어놓던 바로 그 자질을 말이다. 완고한 고집이 이제는 용기와 고결한 기품으로 보였다. 우유부단하고 겁 많은 데다 제 경력만 챙기는 주위의 남성들에 비하면 대처 총리는 단호하고 강해 보였다. 영국이 포클랜드를 탈환하는 데 성공하자 대처는 그 어느 때보다 더 위대해 보였다. 삽시간에 국내의 사회, 경제적 문제가 잊혀졌다. 대처는 정치무대를 장악했고, 다음 두 번의 선거에서 노동당에 압승을 거두었다. 윤석열처럼 마거릿 대처도 아웃사이더로서 권력의 정점에 도달했다. 중산계급의 여성이고 우익 과격파였기에 주류와는 거리가 멀었다. 대부분의 아웃사이더는 권력을 얻기 위해 본능적으로 우선 인사이더가 되려 하지만(아웃사이더로 살기는 고달픈 일이기 때문이다). 정작 그렇게 하면 자신의 정체성이 모호해지고 윤석열 검찰총장 시절 여느 검찰총장과 달라 세간의 이목을 모으던 차별성을 잃어버리게 된다. 마찬가지로 대처가 주위의 남성들처럼 행동했다면 다른 남성이 그 자리를 빼앗는 것은 시간문제였을 것이다. 그녀의 본능은 아웃사이더로 머무는 것이었다. 실제로 그녀는 가능한 한 멀리까지 아웃사이더로서의 영역을 확장했다. 남성들의 군대에 대항하여 한 명의 여성으로서 자리매김한 것이다. 지금의 윤석열처럼 당당한 대처 역시 덧없고 치상적인 대중적 인기 따위에 영합하지 않았다. 김종인 같은 정치꾼들은 지지도의 수치에 일희일비할지 모른다. 그러나 유권자들의 마음(즉 정치가들이 전쟁을 하면 얻으려고 하는 목표물)은 호감을 주는 인사보다 우위를 차지한 인사에게 끌리게 마련이다. 일부 대중이 미워하더라도 내버려 두어야 한다. 맨돈 소강석처럼 모든 사람을 만족시키려고 맨돈만 뿌릴 수는 없는 법이다. 윤석열 대통령과 첨예하게 대립하는 자들, 거짓의 제왕 이재명이나 내부 총질이나 해대는 자들이야말로 윤석열 대통령이 든든하게 의지할 정치적 토대를 구축하는 데 도움을 줄 존재다. 그래야 피아가 구분되고 적과 아군이 드러날 것이다. 내부 총질이나 해대는 일이나 작금의 이런저런 상황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윤석열 대통령을 눈 가리고 아웅 식 여론 조사 한가운데로 밀어 넣으려고 할 것이다. 이는 정파에 국한된 얘기가 아니다. 그런 허위의 한가운데는 정치꾼과 언론꾼이 설치는 이권 타협의 영역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과 사이좋게 지내는 것도 중요한 기술이긴 하지만 위험이 따른다.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언제나 저항이 가장 적고 우호적인 경로만을 찾다 보면 자기가 누구인지 망각하게 되고 조국과 추미애처럼 우왕좌왕하는 어중이떠중이들과 함께 수렁으로 가라앉고 말 것이다. 스스로를 적들에게 둘러싸인 아웃사이더로, 투사로 여겨야 한다. 끊임없는 전투는 윤석열 대통령을 정의의 용사로 강인하고 기민하게 만들 것이다. 좌파 무리들과의 반목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대처 수상처럼 반목 없이는 전투도 없고 전투가 없으면 승리할 기회도 없기 때문이다. 파업을 즐기는 자들의 호감을 사야 한다는 문재인 패거리의 유혹이 아니라 대처 수상의 정면돌파 대처를 본받아 민노총의 파업 병을 타파해야 할 것이다. 그런 자들에게 양보해지기보다는 불법을 타파하고 이겨 존경받고 심지어 두려움의 대상이 되는 편이 나을 것이다. 대통령은 현재만이 아니라 나라의 미래와 미래 세대(世代)에게도 책임을 져야 하는 자리다. 불법하고 불의한 적들에 대해 승리를 거둘 때 얻는 인기가 더 오래 지속되는 법이기 때문이다. 특수부 검사 출신의 한 변호사는 요즘 진행되고 있는 과거 정권의 수사 정국에 대해 “통상 이런 사정 작업의 최종 종착역은 전직 대통령이 되는 것이 과거의 전례였는데 과연 어느 시점에 전 대통령의 이름이 흘러나오느냐가 정치권의 최대 관심사가 아니겠느냐”라고 말했다. 중국 춘추시대의 전략가 손자(孫子 BC 545년경~BC 470년경)는 '손자병법'에서 대처 수상이 실행한 것처럼 말했다. 적이 오지 않기를 바라지 말고 적이 오기를 대비하라. 윤석열 대통령은 누가 이러니저러니 해도 대처 수상처럼만 하면 영국병을 고친 대처 수상처럼 한국병을 고친 위대한 대통령으로 자리매김하게 될 것이다. 거리로 나서 선동하는 좌파 무리가 있다면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광장의 소리 전광훈 목사의 외침과 기도 그리고 그를 따르는 자들의 함성이 그들을 무너뜨릴 것이다. 2022-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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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8-08
  • 총회 정치가 김상현에게 묻는다
    총회 무게 있는 부서의 장을 용하게 맡는 재주의 정치가 김상현이 총회 화합의 사도 박병석 목사 방장 카톡방에 이런 글을 올렸다. 죄송합니다만 될 수 있으면 정치 이야기하지 말고 은혜받는 혹은 미담 이야기했으면 합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 6:7)에 근거하고 그간의 유력 신문 기사를 살펴 카톡방에 올린 다음과 같은 글 때문이었던 것 같다. 문재인이나 배광식의 서사는 극적이지만 진실에 대한 믿음이 없다. 비겁하기 때문일 것이다. 권력에 집착했으면서 초연한 척하고 사익를 탐했으면서 개결한 척한다. 무사안일을 갈구하면서 당당한 척하고 잘못했으면서 정당한 척한다. 그들의 재임은 의심과 허위의 기간이다. 맥베스에서의 셰익스피어 표현을 빌리면 “아라비아의 향수도 그의 손을 향기롭게 할 수 없을 것이다.” 주님을 내려다보며 손을 씻는 빌라도처럼 능청스레 변명해도 후일 역사는 바르게 기록될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성경 말씀대로 뿌린 대로 거둘 것이다. 정치라는 말은 고대 중국의 유교 경전인 “상서(尙書)”에서 ‘道洽政治’라는 문장으로 처음 등장한다. ‘정치’(政治)에서 ‘정’(政)은 바르게 하기 위해 일을 하거나 바르게 하도록 회초리로 치는 것을 뜻하는 합성어이다. 정(政)은 특히 자신의 부조화스러운 면을 다스려 극복하는 것을 의미한다. 치(治)는 물(水)이 넘쳐 생긴 피해를 잘 수습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치(治)는 특히 다른 사람들이 스스로 자신들의 부정하고 부조화한 면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을 뜻한다. 따라서 정치(政治)는 자신과 다른 사람의 부조화와 부정적인 것을 바로잡아 극복하는 일이다. 이러한 의미에는 다른 사람을 지배한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돕는다는 의미가 주를 이루고 있다. 따라서 정치(政治)는 자신과 다른 사람의 부조화와 부정적인 것을 바로잡아 극복하는 일이다. 다른 말로는 수기치인(修己治人) 즉 자신을 닦은 후 남을 돕는 게 정치다. 따라서 정치가(政治家)는 먼저 세상과 자연의 이치에 조화하지 못하는 자신의 부정적인 측면을 다스려 극복한 후 그것을 바탕으로 다른 사람의 어려움, 곤란함, 부조화로운 면을 제거하는 것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 즉 군자 또는 의인을 의미한다. 배광식이 총신 졸업생들에게 전한 성경 말씀 내용이 정치의 본뜻이고 유교 경전인 “상서(尙書)”에서 ‘道洽政治’라는 문장도 그런 뜻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총신 졸업식장의 배광식을 통해 성경은 말씀한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롬 12:2 김상현의 말이나 행동과 달리 1907년 9월 17일 평양 장대재교회에서 소집된 대한예수교장로회 제1회 노회(독 노회) 시 신경과 규칙을 정식 채용한 최초의 헌장에 근거해 제정되고 공표된 총회 헌법 정치편에서 정치에 대해 이렇게 규정하고 있다. 제1장 원리 예수교 장로회 정치의 일정한 원리 8개 조가 있으니 이것을 이해하여야 교회의 성질을 알 것이다 제1조 양심 자유 양심의 주재는 하나님뿐이시라, 그가 양심의 자유를 주사 신앙과 예배에 대하여 성경에 위반되거나 과분(過分)한 교훈과 명령을 받지 않게 하셨나니 그러므로 일반 인류(人類)는 종교에 관계되는 모든 사건에 대하여 속박을 받지 않고 각기 양심대로 판단할 권리가 있은즉 누구든지 이 권리를 침해(侵害)하지 못한다. 제2조 교회 자유 1. 전조(前條)에 설명한 바 개인 자유의 일례(一例)로 어느 교파 어느 교회든지 각기 교인의 입회 규칙과 입교인 및 직원의 자격과 교회 정치의 일체(一切)조직을 예수 그리스도의 정하신 대로 설정(設定)할 자유권이 있다. 2. 교회는 국가의 세력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오직 국가에서 각 종교의 종교적 기관을 안전 보장하며 동일시(同一視)함을 바라는 것뿐이다. 제3조 교회의 직원과 그 책임 교회의 머리 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지체된 교회에 덕을 세우기 위하여 직원을 설치(設置)하사 다만 복음을 전파하며 성례를 시행하게 하실 뿐 아니라 신도로 진리와 본분을 준수하도록 관리(管理)하게 하신 것이라. 이러므로 교우 중에 거짓 도리를 신앙하는 자와 행위가 악한 자가 있으면 교회를 대표한 직원과 치리회가 당연히 책망하거나 출교할 것이라. 그러나 항상 성경에 교훈한 법례(法例)대로 행한다. 제4조 진리와 행위의 관계 진리는 선행의 기초라 진리가 진리 되는 증거는 사람으로 성결하게 하는 경향(傾向)에 있으니 주 말씀하시되 ‘과실로 그 나무를 안다’ 하심과 같으니 진리와 허위(虛僞)가 동일(同一)하며 사람의 신앙이 어떠하든지 관계없다 하는 이 말보다 더 패리(悖理)하고 더 해로운 것은 없다. 신앙과 행위는 연락하고 진리와 본분은 서로 결탁(結託)되어 나누지 못할 것이니 그렇지 아니하면 진리를 연구하거나 선택할 필요가 없다. 또한 김상현의 말대로라면 세례 요한은 당시 집권자인 헤롯의 비리를 정치적으로 지적한 죄로 목이 잘렸다. 성경은 그 사건을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전에 헤롯이 그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로 요한을 잡아 결박하여 옥에 가두었으니 이는 요한이 헤롯에게 말하되 당신이 그 여자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 하였음이라 헤롯이 요한을 죽이려 하되 민중이 저를 선지자로 여기므로 민중을 두려워하더니 마침 헤롯의 생일을 당하여 헤로디아의 딸이 연석 가운데서 춤을 추어 헤롯을 기쁘게 하니 그가 제 어미의 시킴을 듣고 가로되 세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담아 여기서 내게 주소서 하니 왕이 근심하나 자기의 맹세한 것과 그 함께 앉은 사람들을 인하여 주라 명하고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옥에서 목 베어 그 머리를 소반에 담아다가 그 여아에게 주니 그가 제 어미에게 가져가니라 요한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가져다가 장사하고 가서 예수께 고하니라 마 14:3-12 성경은 김상현의 말대로라면 그가 지적하는 정치 기사로 넘친다. 그것은 어떻게 해야 할까. 성경에서 그 부분들은 제하고 읽고 따라야 하는 것인가. 총회 산하 수도노회 소속 목사인 김상현은 무엇을 믿고 살고 총회 정치인으로서 무엇을 위해 왜 정치하는지를 총회 정치가 김상현에게 묻는다. 세례 요한처럼 목이 잘릴 염려는 전혀 없겠지만 대한민국의 법정에 피소당할 수도 있는 각오는 가지고... 2022-0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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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G.COLUMN
    2022-02-16
  • 총회장이 되려는 이유
    얼마 전 미국의 존경받는 정치인 밥 돌(Robert Joseph "Bob" Dole, 1923년 7월 22일~2021년 12월 5일) 전 공화당 상원의원이 별세했다. 제2차 세계대전 참전용사로 신체적 장애를 극복하고 정계에 진출해 미국의 공화당 정치인으로 캔자스주를 대표하여 연방 하원 (1961년~1969년)과 연방 상원(1969년~1996년)을 지냈으며 1996년 미국 대통령 선거 공화당 후보였다. 2021년 12월 5일 (98세) 그의 별세 소식에 추모의 물결이 이어졌다. 워싱턴 내셔널 몰에서 열린 공식 추모식에 영화배우 톰 행크스가 참석했다. 영화 ‘라이언 일병 구하기’에 출연했던 그는 과거 돌 전 의원이 이끌었던 제2차 세계대전 기념비 건립 운동에 참여한 바 있다. 그는 추모사에서 돌 전 의원이 들려준 삶의 교훈에 대해 얘기했다. “바르게 말하라, 그것이 당신을 곤란하게 만들지라도. 정치적 견해 차이가 공동의 선을 추구하는 데 방해가 돼서는 안 된다.” 조 바이든 대통령은 워싱턴 국립대성당에서 열린 장례식에서 20여 분에 걸쳐 매우 긴 추모사를 낭독했다. 함께 의회를 누비며 우정을 쌓아온 오랜 정치 지기의 별세 소식에 침통한 모습이었다. 추모사 중에서 조문객들의 웃음을 자아낸 대목이 있다. “우리 솔직히 말하자. 밥 돌은 언제나 솔직한 사람이었다. 결점이 될 때까지(to a fault).” 사람의 좋은 성격을 나타내는 형용사 뒤에 붙은 ‘to a fault’ ‘결점이 될 때까지’라는 표현은 밥 돌에게 과한 측면이 있었다는 것이다. 돌 전 의원의 솔직함에 대해 흉을 보려는 의도가 아니라 매우 고결한 성품이었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것이다. 분열의 정치를 염려하며 “타협(compromise)은 결코 더러운 단어가 아니다”라고 누누이 강조했던 노(老) 정객이 남긴 마지막 메시지라고 한다. 그는 “아이들이 너무 빨리 좌절하거나 꿈꾸기를 포기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나의 모자란 어린 시절을 얘기하는 것”이라고 했다. 담임선생님의 평가를 앞세웠던 그의 소개 글은 이렇게 이어진다. ‘그 당시에 나는 책을 읽으며 공상하는 걸 좋아하고 예쁜 것에 관심이 많은 학생이었다. 지금도 나는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 기죽지 않고 신나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 유쾌한 그 고백은 아이들을 향해 있다. 자신이 아닌 다른 이를 위해 기꺼이 부족함을 드러내는 그의 용기가 더 빛나게 느껴지는 이유다. 고등학교 2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성적표에 써 준 글이다. ‘책을 많이 읽는 듯하나 이해력이 떨어지고 외모에 무지 신경을 씀.’ 공부를 못했고 초중고교 시절을 통틀어 글짓기상은 단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다. 오락부장을 도맡아 소풍, 수학여행을 가면 먼저 나가 노래하고 춤췄다. 총회장을 지낸 소강석, 현재 총회장 배광식, 그리고 2년 뒤 총회장이 되고 싶은 장봉생 등에게 총회장을 하려는 이유를 물으면 이렇게 답할 수 있을까. “목사가 되어 총회장이 되려면 공부 잘하고 성공해야 한다고 생각하잖아요. 믿음의 아이들에게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말해주고 싶었어요. 공부 못하고 좋은 평가를 못 받아도 미래의 내 모습을 마음껏 꿈꿀 수 있다고요.” 그리고 그들은 이런 추모사를 다른 총회장에게서 들을 수 있을까. 조문객들의 웃음을 자아낼 수 있는... “우리 솔직히 말하자. 죽음 앞에 선 이번 증경 총회장은 언제나 솔직한 사람이었다. 결점이 될 때까지(to a fault).” 2022.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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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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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효상 칼럼 - 한국교회싱크탱크, 어떻게 만들 것인가?
    한국교회싱크탱크, 어떻게 만들 것인가? ‘정체’및 ‘침체’라는 한계상황에 놓인 한국교회는 다른 전략이 없는 것인가? 그래도 향후 미래 생존과 부흥의 가능성은 있는 것인가? 지금처럼 지성인과 다음세대는 그냥 방치 할 것인가? 한국교회는 이런 여러 담론생성의 한계에 갇혀 있다. 이슈에 대한 공론화의 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간혹 필요시 외부 여론조사기관에 의뢰, 의미 있는 통계자료를 제공해왔지만 이 또한 간헐적이었다. 총체적으로 볼 때 한국 기독교는 교회 영역을 뛰어넘어 대정부, 대사회를 향한 소통자가 되기엔 힘이 부친다. 현실은 안티 기독교 운동, 동성애차별금지법 논란, 교회를 교묘하게 파고드는 이단의 발호 등 풀어야 할 과제들이 녹록지 않다. 이슈가 되고 있는 여러 사안에 무조건 일방적으로 한쪽 편을 들 것이 아니라 균형감을 지닌 대안제시로 기독교내 지성인들이나 젊은 세대들을 움직일 수 있는 전략적 사고가 필요한 상황이다. 그러면 ‘한국교회싱크탱크가 정말 필요한가?’라고 반문할 것이다. 현재 교계는 다양한 기관과 그룹을 보유하고 있다. 정치행위로서의 연합은 있었지만 구체성을 띤 아젠다 설정에는 후진성을 보여 왔다. 역량을 극대화하기 위한 전략적 네트워크로 한국사회를 견인하는 동력이 되고 있는지는 의구심이 드는 게 사실이다. 그러기에 지도자들이 교회를 위해 쏟는 에너지의 100분의 1만이라도 기독교 공동체를 위한 아젠다를 설정할 수 있는 싱크탱크를 만드는 데 참여한다면 안티 기독교 득세, 타 종교와의 갈등 등을 적잖이 해소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싱크탱크란 특정 사항에 대한 조사, 분석 및 연구 등을 통해 각종 정책 계발뿐 아니라 정책 실행 피드백, 지속적인 개선 유도까지 수행할 수 있는 고급 두뇌집단을 일컫는다. 그러면 싱크탱크의 방향성은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 라는 질문을 던져본다. 그런 점에서 보면 교회의 싱크탱크모델로는 미국의 여론조사를 담당하는 ‘바나리서치그룹’은 미국 교회 및 사회에 객관적인 데이터를 제공, 사회의 변혁을 이끄는 데 도움을 줄 뿐 아니라 교회 밖에서 기독교를 이해할 수 있는 통로가 되고 있다. 또 영국에서는 CCFON(Christian Concern For Our Nation)이 있다. 안드레 월리엄스 변호사가 설립한 이 단체는 영국의 정체성을 훼손하는 정책 및 법률이 국회에서 제정되지 못하도록 막는다. 미국의 기독법조인단체 ADF(Alliance Defense Fund)도 교 자유와 관련한 소송과 법률, 분쟁 등을 다루고 있다. 이런 서구 기독교의 다양한 형태의 경험을 배워 한국은 물론 세계적인 담론까지 형성할 수 있는 지속가능한 ‘한국교회싱크탱크’를 만드는 일은 교계 지도자들에게 의미있고 가치있는 사안이다. 한국교회의 ‘기독교윤리실천운동’이나 ‘기독교세계관’은 NGO형태이면서도 목회자 중심을 넘어 학술 전문가들이 참여한 복합적이고 균형적인 싱크탱크의 가능성을 어느 정도 보여주었다. 그러나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새로 출범할 ‘한국교회싱크탱크’는 좌표설정을 명확히 해야 한다. 비정치지향의 전문인 사역자들로 구성된 다양한 본부(NGO)와 네트워크하여 앞으로 변화와 그 변화를 가리킬 방향을 가늠할 수 있도록 나침반의 역할을 찾아야 한다. 그러므로 앞으로 ‘한국교회싱크탱크’로 불확실성의 시대에 향후 10년을 준비하려 는 것이다. 현재 당면한 한계상황을 극복하고 대안을 제공하며 실마리를 풀어가야 한다. 지금 교회의 모습을 넘어 다음세대의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좀 더 보다 명확하게 앞을 예측하고 함께 고민하고 그 답을 찾으려는데서 출발해야 한다. 여론조사와 학술포럼을 통해 대안을 모색하고 출판과 언론. 방송의 콘텐츠를 통하여 다원화, 글로벌화 된 사회에서 교회는 고유의 복음전파 외에도 성경적 가치를 변증하고 예언자적인 목소리를 내야 할 사회적 책임을 떠안고 있다. 가능하다면 국가에 정책을 건의하고 법안과 입법 과정을 면밀히 검토하며 외국의 입법사례까지 사전 조사, 검토, 정책제시까지 나갈 수 있기를 기대한다. 통전적 시각에서 교단과 교파, 개교회 주의를 뛰어넘는 객관적인 데이터 산출과 의미 분석, 정책계발과 추진 등을 위한 기독교내 고급자원의 네트워킹과 더불어 미래의 전문가와 언론. 방송의 전문사역자들 양성도 병행되도록 해야 한다. ‘한국교회싱크탱크’ 출범을 위해 종교교회 최이우 목사와 거룩한 빛 광성교회 정성진 목사님을 비롯한 각 교단의 여러 중견목회자들과 의견을 나누었고, 또 각 기관, 단체의 오랜 경험을 가진 다수의 브레인들이 함께 참여하여 다양한 대화의 시간을 가졌다. 그런데 중견 목회자들보다 차세대목회자들이나 평신도 지도자들이 오히려 더 적극적으로 필요성에 공감하고 관심을 가졌다. 그들의 관심은 쇠락하는 한국교회가 과연 기독교 가치관을 수호할 수 있는 싱크탱크를 어떤 형태로 보유할 수 있는가에 있었다. ‘한국교회싱크탱크’는 하나의 방향, 하나의 길이 아니라 전체를 아우르며 다양한 안목과 방식으로 내일을 준비하며, 한국교회가 세상의 흐름을 선점하며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싱크탱크가 될 것을 예상하기에, 여기에 교회 목회자만이 아니라 평신도지도자들의 반응과 관심이 집중되는 것 같다. 3.1운동 100주년을 넘어 향후 10년을 내다보고 한국교회 안에 변화를 이끌 차세대 공동체리더십이 절실하다. ‘대안’없는 ‘미래’에 ‘전략’과 ‘동역’이라는 양면을 지닌 싱크탱크와 함께 가는 것이 필수적 조건이 될 것이다. 리더십 발휘 영역이 크면 클수록 지도자는 혼자가 아닌 지혜자들과 함께 가야 한다. 그런 점에서 한국교회싱크탱크는 없어서는 안될 ‘한국교회전략발전소’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효상 원장(한국교회건강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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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10-30
  • 김종희 칼럼 - 총회 후보 살리기
    억울한 후보, 총회 현장에서 살리면 된다. 선거관리위원회(이하 선관위)의 입후보자 심사가 오는 금요일 오후 3시로 연기되었다고 들었다. 만약 선관위가 떨궈서는 안되는 후보를 떨궈 억울한 후보가 있다면 총회에서 살리면 된다. 총회에서 살릴 수 있는 경우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필자의 견해를 밝히고자 한다. Ⅰ. 총대 자격을 문제삼아 떨군 후보는 총회 현장에서 살릴 수 있다. ①총회 규칙 제3장 제10조 2. 위원의 임무 6)항에 보면 “천서검사위원은 총회 총대의 천서를 검사하여 적당하지 못한 총대가 있을 때에는 해 노회에 통고하여 재 보고토록 하고 이를 이행치 않을 경우 총회에 보고하여 그 지시대로 한다.”고 되어 있다. ②그러므로 총대의 자격이 있느냐 없느냐는 천서검사위원(이하 천서위)의 권한이다. 아무리 선관위가 후보자격이 있다고 합격을 시켜도 천서위가 총대 자격이 없다고 천서를 하지 않으면 후보 자격은 무산이 된다. 그러나 만약 선관위가 총대 선출에 이런 저런 흠을 잡아 후보 자격을 박탈하였는데 천서위가 총대 선출에 문제가 없다고 하면 후보 자격은 다시 살아난다. 그러므로 선관위는 입후보자의 총대 자격에 대하여 의문점이 있을 때는 천서위가 총대 자격에 대하여 결론을 내리기까지 유보해야 하며 섣불리 결정을 내려서는 안된다. ③헌법 제12장 제6조는 다음과 같이 명시되어 있다. “총회는 매년 1회 정례로 회집하되 예정한 날짜에 회장이 출석하지 못할 때는 부회장 혹은 전회장이 개회하고 신 회장을 선거할 때까지 시무할 것이요, 각 총대는 서기가 천서를 접수 호명(呼名)한 후부터 회원권이 있다.” ④또한 제12장 제7조에는 “...지금 총회는 파(罷)함이 가한 줄로 알며...” 라고 되어 있다. 그러므로 본 교단 총회는 폐회하는 것이 아니라 파회하기 때문에 총대권이 없어지고 다시 총회가 회집되어 서기가 호명을 한 후 총대권이 다시 부여된다. ⑤그러므로 선관위가 모든 후보를 확정하여 발표한다 할지라도 총대권을 아직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서기로부터 호명을 받아 총대권(회원권)을 받을 것으로 간주하여 발표하는 것이다. 총대권의 심사는 천서위에 있다. 그러므로 선관위는 총대 선출 과정의 문제나 총대권에 흠집을 잡아 후보자를 떨궈서는 안된다. 천서위가 선관위와 견해를 달리하여 총대권을 주고 이 사실을 서기가 총회 현장에서 보고하면 뒤집혀진다. Ⅱ. 개혁교단 때 총대권 문제로 떨군 후보는 총회 현장에서 살릴 수 있다. ①2005년 6월 21일 합동교단 총회장 서기행목사님과 개혁교단 총회장 홍정이목사님이 작성한 문건에는 ‘합동 원칙 합의서’라고 되어 있다. 또한 제90회 총회때 받은 보고에 보면 “ 1) 본 교단 영입위원(합동)의 보고는 받고 합동한다.”로 되어 있다. ②개혁교단과 합동교단이 합동하였다는 사실을 총회 현장에서 한번 더 확인하고 개혁교단에 있을 때 총대권을 인정하자고 가결하면 총대 횟수 때문에 떨어진 후보를 살릴 수 있다. ③Ⅰ항 Ⅱ항 모두 총회장이 선관위원장에게 선거에 대한 업무를 넘기기전에 해야 한다. 선관위원장이 바톤을 받으면 선거에 영향을 주는 발언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선관위가 총회 화합에 해되게 행한 것을 바로 잡으려는 총회장님과 총대들의 열심이 있기에 가능하다. Ⅲ. 선관위원장에게 총회 현장에서 살릴 억울한 후보가 없는 심사를 주문한다. ①모노회가 총회 임원회에 청원하기를 선관위원장인 이목사가 속한 한서노회가 임시목사 신분이었던 이 목사를 6차례나 총대로 파송하고, 노회장으로 선출했다며, 이는 “미조직교회(임시목사)는 노회장과 총대가 될 수 없다”는 제87회 총회 결의를 위반한 것이라고 주장하며 선관위원장 교체를 요구하였다. ②그러나 선관위원장은 과거 이 문제로 98회 총회에 부서기로 출마했다가 후보 자격을 얻지 못하고 말았다. 총회 결의를 위반한 것에 대하여 댓가를 받은 셈이다. 헌법 제13조 “...동일한 범죄에 대하여 거듭 처벌받지 아니한다.”고 되어 있다. 이중처벌금지의 원칙이 있다. 한번 댓가를 받은 과거사를 꺼내 인격적 모독을 주는 것은 옳지 않다. 앞으로 남은 업무를 현명하게 처리하여 역대 존경받는 선관위원장으로 남기를 바란다. Ⅵ. 결론 ①선관위는 무조건 밀어 붙이면 끝난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 아무리 확정을 해도 본 회에서 뒤집혀지면 망신을 당할 수 있다는 두려움을 가져야 한다. ②제100회 총회때 선관위에서는 다 확정된 후보였지만 본 회에서 자격이 없는 것으로 결론이 난 적이 있다. 반대로 선관위가 자격이 없는 것으로 탈락시켰지만 본 회에서 후보가 될 수도 있다. 특히 총대 선출 문제나 총대권에 흠을 잡아 탈락시켰을 경우 본회에서 뒤집힐 수 있다. 총대권에 대한 유권 해석을 내리는 권한은 천서위에 있기 때문이다. ③털어 먼지 안나는 사람이 없다는 말이 있다. 왠만하면 모두 후보가 되게하여 총대들의 선택을 받도록 하자. 단일후보 만들고 붙일려고 하는 측에 더 큰 흠이 있을 수 있다. 김종희목사(부산 성민교회 당회장)2018-0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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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8-14
  • 김종희 칼럼 - 선거관리 제언
    ‘목사안수 증명서’ 안수 받은 노회에서 발급받아야 편목과정 한 분들 과거 교단 안수증명서 제출해야 가입 노회 안수증명서 제출한다면 안수 받지 않은 노회 안수 받은 듯 허위 서류 제출해 떨궈야 모든 총대원이 인정할 결정적 하자 아니라면 단일 후보 만들려 하지 말고 모두 후보자가 되게 하여 하나님 뜻 따라 선출 바람직 팔이 안으로 굽어서는 안 된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는 속담이 있다. 팔이 자기 쪽으로 굽듯이 누구나 친한 사람을 더 챙겨주고 싶고 정이 더 간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문제는 공적인 문제를 다루는 일에도 이 속담이 끼어들 때가 많다는 것이. 이왕이면 같은 기수를, 같은 지역 사람을, 같은 모임의 멤버를, 평소 안면이 있는 사람을, 챙겨주고 덕을 볼 수 있는 사람 쪽으로 팔은 굽으려고 한다. 그래서 혈연과 지연과 학연을 따져 가며 팔을 뻗치고, 아예 다른 팔들은 접근할 수 없도록 막아낸다. 팔이 안으로 굽을 경우는 이미 누구 손을 들어 줄 것인가를 정해 놓고 하는 까닭이다. 이기게 하려는 쪽은 어떤 이유로든 이기게 하고 지게 할 쪽은 이런 저런 흠을 잡아 기어이 지게하고 만다. 선관위가 모든 후보를 동일 선상에 놓고 팔이 안으로 굽는 심사만 하지 않는다면 지탄받을 일이 없다. 사전에 누구는 이런 저런 사유로 떨궈야 하고 누구는 붙여야 한다는 식으로 이미 팔이 안으로 굽어 있다면 비난받을 결과가 나올 수밖에 없다. Ⅰ. 총대 선출 문제로 떨궈서는 안 된다. ① 총대 선출방법은 각 노회가 정한 투표 방법으로 하면 되는 것이 총회 결의이다. 이렇게 결의한 것은 총회 때마다 총대 선출에 대한 문제로 발목을 잡으려는 시빗거리를 없앤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투표 방법에는 무기명 비밀투표만 있는 것은 아니다. 기명 공개투표, 기립투표, 거수투표 등등. 어떤 투표로 했든 상관이 없다. ② 또한 임원회, 증경회장단, 전형위원회 등에 맡겨 해도 상관없다. 노회가 대표자를 선정하여 선출하는 간접투표 방법을 선택하였기 때문이다. 자신의 권리를 대표자를 선정하여 맡겼기 때문에 곧 자신이 투표한 원리이다. 선출의 방법을 해당 노회가 만장일치 결의로 했다면 문제 될 것이 없다. 각 노회가 방법을 정하여 할 수 있도록 한 것이 총회 결의이기 때문이다. ③ 혹 이의가 있어 소원을 할 때는 권징조례 제86조에 의하여 노회에서 결정할 때 참석하였던 자 중에 3분의 1이 연명하여 소원을 선언하면 소원이 성립하지만 소수의 회원이 하는 소원은 성립될 수 없다. 그리고 소원을 할 때도 하회 결정 10일 이내 해야 한다. ④ 또한 노회에서 올린 총대 중 문제성이 있는 인물이 있다고 하여 전체 총대를 무효로 할 수 없다. 총회규칙 제3장 10조 2. 6에 보면 “천서검사위원은 총회 총대의 천서를 검사하여 적당하지 못한 총대가 있을 때에는 해 노회에 통고하여 재 보고토록 하고 이를 이행치 않을 경우 총회에 보고하여 그 지시대로 한다.”고 되어 있기에 다시 보고토록 하면 된다. 총대 교체는 헌법 제22장 제2조에 따라 총회 현장에서까지 할 수 있으므로 해당 노회 총대 중에 문제성이 있는 총대가 혹 있다하여도 그 총대가 입후보자가 아닌 이상 입후보자에게 불이익을 줄 수 없다. Ⅱ. 개혁교단 때 총대 횟수를 인정하지 않는 심사(審査)로 떨궈서는 안 된다. ① 이미 필자는 지난 글에서 “개혁교단과 합동이 합동했기 때문에 두 교단의 헌법과 역사는 총회가 하나 되기로 한 가결 속에 두 교단 헌법과 역사가 일시 정지되거나 일시 폐기되면서 합동교단 헌법과 역사를 따라 다시 시작하였다. 역사와 헌법을 공유하고 있다”고 말씀 드렸다. ② ‘합동원칙 합의서’ 3항은 “합동총회 대의원(총대)은 제90회 합동 총회에 한하여 양 교단이 인정한 자로 한다.”고 되어 있다. 3항의 의미는 이전에는 양 교단이 아닌 자기 교단에서 인정받으면 되었다. 합동을 하고 난 후에도 한 교단이 되었으니 한 교단에서 인정받으면 된다. 그러나 유일하게 합동하는 총회에는 서로 각자 교단에서 뽑아 왔으므로 이 총회에서 만큼은 양 교단이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 조항은 개혁교단의 총대 횟수가 90회 총회부터 출발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합동교단이나 개혁교단 구성원 모두가 90회 총대는 양 교단이 인정하므로 허락되었다는 것이고 그 이전이나 이후는 한 교단에서 허락하면 인정된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합동 전 개혁교단에 있을 때 나간 개혁교단 총대횟수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합동 전 합동교단에 있을 때 나간 합동교단 총대횟수도 인정해서는 안 된다. ③ 개혁교단으로 있을 때 총대로 나간 것을 증명할 수 있는 회의록이 있으면 좋을 것이다. 그러나 회의록이 없다면 다른 증거로 증명력을 보이면 된다. 증거의 종류에는 크게 3종류가 있다. 회의록이나 계약서나 확인서 등으로 증명하는 서증이 있다. 사건 현장을 목격하거나 함께 참석한 증인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검증이나 사실조회 등을 통한 기타증거들이 있다. ④ 당시 총대로 나간 것을 확인할 수 있는 증인을 세우면 된다. 그 증인의 말이 논리적 경험칙에 반하지 않으면 된다. 그 증인의 말이 논리적 경험칙에 부합한가를 판단하는 것은 선관위 몫이다. 오로지 서증(書證)만을 고집해서는 안 된다. 문서에는 있는데 그 당시 사정으로 참석하지 않았을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서증의 방법보다 증인의 증명력이 더 신뢰가 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선관위에 ‘사실조회신청서’를 청구하여 선관위가 어떤 방법으로든 사실 조회를 하여 총대권을 인정하여 주는 것이 합동의 정신을 살리는 길이다. ⑤ 상황보다는 사람이 중요하다. 이미 출생을 하였는데 부모가 출생신고를 할 수 없을 때는 동거하는 친족이나 분만에 관여한 의사나 조산사 기타의 자가 출생 신고를 할 수 있다는 법이 있다. 사람과 현실은 존재하고 있는데 과거 상황이 문제라면 여러 가지 방법을 동원하여 사람과 현실을 인정해 주는 것이 중요하다. 이미 합동이 되었고 합동정신을 살려 나가야 한다면 꼭 서증의 방법만을 고집할 것이 아니라고 사료된다. Ⅲ. 팔이 안으로 굽어 반드시 떨궈야 할 입후보자를 붙여서는 안 된다. ① 회전문(回轉門) 입후보자는 누구든 떨궈야 한다. 총회규칙 8조 7항 정치, 교육, 고시, 신학, 재판, 재정, 감사(7개) 등의 상비부에서 나온 후 2년 이내 그 부서에 들어갈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단 감사부에는 평생 1회만 들어갈 수 있다.) 회전문 인사는 총회 사무국에 자료를 요청하면 금방 알 수 있다. ② 노회 당회수를 정확히 파악하여 21당회 미만 노회에서 입후보한 후보자는 떨궈야 한다. 총회 일을 해 보면 애로사항이나 의심점이 있는데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 것인가가 참으로 문제이다. 과연 21당회가 되는 노회인가 하는 의심스러운 노회에 대하여는 선관위, 교회실사후속처리위원회, 천서위원회가 합동으로 조사하기를 제안하며 사실로 들어나면 총대 파송도 할 수 없고 해당 노회의 입후보자도 떨궈야 한다. ③ ‘목사안수 증명서’는 반드시 목사안수를 받은 노회에서 발급받아야 한다. 편목과정을 한 분들은 과거 안수 받은 교단에서 안수증명서를 떼서 제출해야 한다. 만약 가입 노회에서 안수증명서를 받아 제출한다면 안수를 받지도 않은 노회에서 안수를 받은 것처럼 허위 서류를 제출한 것이기에 떨궈야 한다. Ⅳ. 동일노회에서 기관장과 임원이 출마할 경우는 떨궈야 하나? 붙여야 하나? ① 총회 선거규정 제5조 5항에 “위원이 시무하는 동일노회에서 총회임원 및 기관장 입후보자 등록과 동시에 자동으로 해임된다.”는 규정이 있다. 이는 선관위원과 임원 또는 선관위원과 기관장을 동일 노회에서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논리라면 임원과 기관장이 같은 위치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임원과 기관장이 동일노회에서 입후보하는 것은 동일노회에서 임원이 두 명 입후보하는 것, 또는 기관장이 두 명 입후보하는 것으로 간주된다고 사료된다. ② 총회 선거규정 제4장 제14조 4항에 “동일 노회에서 총회임원 1인과 상비부장 1인을 초과한 경우(단, 입후보자 중 총회 임원이 목사인 경우 상비부장은 장로로 하고 총회 임원이 장로인 경우 상비부장은 목사로 한다.)”로 되어 있다. 이는 동일 노회에서 임원 1명과 상비부장 1명이 나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 명은 목사여야 하고 한 명은 장로여야 한다. 목사 둘이 임원과 상비부장으로 나오거나 장로 둘이 임원과 상비부장으로 나오면 안 된다는 것이다. 둘이 나올 수는 있으나 목사 1인 장로 1인의 규정을 지켜야 한다. 그렇다면 동일노회에서 목사 두 명이 기관장과 임원으로 나오거나 장로 두 명이 기관장과 임원으로 나오는 것은 이 법정신에 맞지 않는다. 백분 이해하여 임원이 목사이면 기관장이 장로이거나 임원이 장로이면 기관장이 목사인 경우라면 몰라도 동일노회 동일직분으로 2명은 설득력이 없다. ③ 또 총회 선거규정 제20조에 보면 총회장과 부총회장을 제외한 여타 임원은 입후보자 발전기금 및 등록금이 2천만 원이고 기관장도 2천만 원이다. 임원과 기관장 금액이 동일하다. 2천만 원 등록금인 임원과 2백만 원 등록금인 상비부장이 동일 노회에서 나올 경우도 직분이 중복되지 않도록 하였다면 하물며 동일한 2천만 원의 임원과 기관장이 동일노회에서 동일 직분으로 나오는 것을 허락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Ⅴ. 결론 금번 선관위는 팔이 안으로 굽지 않기를 기대한다. 필자가 과거 정치부장으로 나왔을 때 경쟁후보가 4명이었다. 이런 저런 이유로 상대 후보가 다 떨어지고 나 혼자 단독 후보가 되어 제비도 뽑지 않고 투표도 없이 당선이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4명 모두 후보자가 되어 제비도 뽑고 투표도 하여 당선되니 일절 잡음이 없고 기쁨도 컸다. 털어보면 조금씩은 다 먼지가 나게 마련이다. 모든 총대원이 인정할 수 있는 결정적인 하자가 아니라면 단일 후보 만들려고 하지 말고 모두 후보자가 되게 하여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선출되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사료된다. 김종희목사(부산 성민교회 당회장) 2018-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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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8-04
  • 보수의 침몰과 기독교의 가치
    기독공보 황규학기사입력 2018-06-14 무너진 보수의 가치 더불어민주당은 14곳, 자유한국당은 2곳, 무소속 후보가 1곳에서 승리를 하여 사실상 보수는 침몰했다. 더불어 진보판이다. 보수의 가치는 이명박, 박근혜 전대통령의 구속과 홍준표의 리더십부재, 문재인 대통령의 한반도 평화리더십 부상으로 무너졌다. 더욱 불행한 것은 참패로 끝나지 않고 멸망으로 끝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보수는 정치에 실패한 것보다 그동안 기득권을 누렸던 보수의 가치가 침몰한 것이다.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박근혜, 이명박 대통령으로 말미암은 50년 동안의 재임시절로 인해 한국의 기득권을 형성했던 보수의 가치는 여지없이 무너져 내렸다. 보수의 가치를 유지했던 것은 안보의 가치였다. 그것은 북한을 주적으로 삼고 항시 북한이 남한을 쳐들어 올 것처럼 선전하고 홍보하여 개혁이나 진보적 사고를 말하면 모두 좌파나 빨갱이로 모는 레드가치였다. 레드가치는 보수의 옷을 입고 기득권자들의 입장을 대변하였다. 그러나 디지털 혁명과 4차 산업혁명시대가 오면서 보수적 가치는 과거의 가치로 전락, 미래의 가치를 대변하지 못하자, 국민들은 보수적 가치를 버리고 새로운 진보적 가치를 선택했다. 대부분의 국민들이 북한을 주적으로 생각하고 늘 두려운 존재로 살아가고 있었다. 북한은 천안함사태, 연평도 폭격, 핵무기 실험 등으로 항시 남한사람들을 불안에 떨게 했다. 그러나 문재인 정부가 김정은과 소통함으로 안보를 무기로 삼았던 보수의 가치는 허구임이 드러났다. 보수정권은 이러한 허구적 가치를 이용하여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시켜 왔다. 그러나 문재인정권은 허구적 가치를 걷어내고 북한을 활용하여 북미대화를 이끌어 내어 한반도 비핵화를 선언하게끔 했다. 보수당은 김정은을 주적으로 삼았지만 문재인 정권은 김정은을 친구로 삼았다. 김정은 위원장을 친구로 삼자, 국민들은 문재인 대통령을 좌파나 빨갱이로 모는 것 보다 오히려 평화의 사도로 판단했다. 50년동안 한반도를 지배해왔던 기득권적 보수의 레드가치는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던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노무현, 문재인대통령의 공로를 인정해야 한다. 보수당은 난공불락의 영남에서 마져 패배하여 보수의 가치는 영락없이 무너져 내렸다. 영남은 기득권적 보수의 가치보다 새로운 개혁을 선택하였던 것이다. 기득권적 보수의 가치는 주변인들과 약자들, 혁신적 사고를 사는 사람들, 개혁자들을 멀리하였다. 그들은 늘 주변으로 가기를 멀리하고 중심에서 놀기를 좋아했다. 그러자 주변인들은 중심에 머무르지 않고 주변으로 향하는 문재인 대통령의 신념을 선택했다. 국민들은 박근혜, 이명박 전대통령이 추구했던 어설픈 기득권적인 보수와 레드가치가 실체가 없는 허구인줄 알게 되었다. 그들은 보수와 레드가치를 말하면서 주변인들을 멀리하고 뒤로는 자기의 것만 챙기고 있었다. 중심에서 내려오지 않기를 원했다. 그러는 동안 천안함, 연평도, 세월호 사태로 민중들만 죽어갔다. 그러나 그들은 호화호식을 누렸다. 주변인들을 희생시키면서 중심인들의 유익을 챙긴 것이 보수의 가치였다. 그러나 문재인대통령은 주변 북한과 중심 미국까지 포용하는 아량을 발휘했다. 이는 진보의 가치였다. 세계의 가장 외톨이 주변국인 북한과 가장 중심국인 미국이 서로 소통하고 교제할 때 세계평화는 이룩되는 것이다. 여하튼 김정은은 비핵화를 선언하고 미국은 북한의 체제보장을 선언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위대성은 주변과 중심을 순환하게끔 한 것이다. 주변은 중심으로 갔고 중심은 주변으로 갔던 것이다. 보수의 기득권적 가치를 뛰어넘었다. 기독교, 주변으로 가야 한다. 기독교도 이제 변할 필요가 있다. 지금까지 중심에 머무르려고만 하다보니 국민들이 외면하였다. 기독교는 잘못된 허구의 교리적 가치로 인해 주변교회들과 약자교회들을 이단으로 몰고, 중심으로 올 기회조차 주지 않았다. 이단감별사들의 기득권적 태도로 인해 허구의 교리적 가치는 기독교의 중심에 있었고 본질을 이탈하고 있었다. 추상적인 율법적 가치로 인해 기득권을 형성하였던 유대인들처럼, 한국의 기독교는 추상적인 허구의 교리적 가치로 인해 이단감별사들이 기득권을 형성하고 있었다. 교리적 가치는 무너져야 한다 이단감별사들은 바리새인들처럼 종교적 가치로 자신들의 기득권을 누리고 있었다. 그러나 통일의 시대를 맞이하여 사회에서는 이미 왜곡된 이념적 가치가 무너지듯이 기독교에서도 허구의 교리적 가치도 무너져야 한다. 본질적인 것이 다르지 않는 이상, 비본질적인 것은 조금 다르더라도 교정을 해서라도 더불어 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더불어 기독당이 되어야 한다. 중심교단은 주변으로 가야하고, 주변교단은 중심교단과 교류해야 한다. 국가는 좌우의 이념적 가치가 무너지다 보니 평화가 찾아오듯이, 교단은 문자주의적인 교리적 가치가 무너져야만 서로 화해하고 포용하는 하나님나라가 실현될 것이다. 레드가치처럼 허구의 교리적 가치만을 중시하다보면 형제도 이단으로 매도하여 기독교의 분열만 가져올 뿐이다. 국가는 이미 평화와 통일로 가고 있는데 기독교는 여전히 허구의 교리의 틀에 갇혀 화해도 하지 못하고 평화의 맛도 보지 못하고 교파적 경쟁만 하고 있다. 여전히 WCC 지지, WCC 반대 이다. 이는 교리적 가치에서 한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기독교를 지배했던 교리적, 보수적, 이념적, 중심적, 기득권적 가치는 무너져야 진정한 성경의 가치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여자나 남자나 주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한다. 예수처럼 기득권을 버리고 주변으로 가야하고, 주변인들은 중심이신 예수에게로 와야 한다. 문자적 가치, 교리적 가치에만 머물다 보면 역사성, 사회성, 인간성, 복음성을 상실하고 모두 율법사들이나 바리새인들이 될 것이다. 지금까지 기독교를 지배했던 가치는 보수우익, 안보, 주적 북한, 교리적 이단의 가치였다. 그러나 4차 산업시대를 맞이하여 그동안 기독교를 지배했던 교리적 가치, 이념적 가치, 추상적 가치, 기득권적 가치는 무너져야 한다. 교리적 가치대신 신앙 고백적 가치, 좌우 이념적 가치대신 중도적 가치, 추상적 가치대신 현실적 가치, 기득권적 가치대신 나눔의 가치, 중심적 가치대신 주변적 가치로 선회해야 한다. 그래야만 기독교가 사는 것이다. 기독교는 그동안 우신예찬을 했고, 물신예찬을 했다. 이단감별사들은 달신 예찬을 했다. 그러나 이제 기독교도 우신대신 성신예찬을 해야 하고, 중심대신 주변예찬을 하고, 가짐보다 나눔 예찬을 해야 한다. 국가는 통일을 거대한 담론으로 삼았고 통일담론으로 국민들을 일치시키고 있다. 중심인들의 기득권적 보수의 가치를 버리자 주변인들을 통한 새로운 민족의 가치가 우러나오는 것이다. 기독교 역시 미래를 이끌고 갈 거대한 담론이 있어야 한다. 중심과 주변이 순환되는 성경적 가치가 필요하다. 더불어 민주당이 아니라 더불어 예수당이 필요하다. 예수처럼 중심인과 주변인들이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 말이다. 기독교의 에큐메니칼 가치 기독교는 이제 허구의 교리적 가치와 보수우익적 가치, 안보가치, 레드가치, 대형교회적, 대형 교단적 중심의 가치를 버리고, 소형교회와 군소교단과 일치되는 즉 중심과 주변이 일치되는 진정한 에큐메니칼적인 가치가 있어야 한다. 지상에서 가장 위대한 성경의 가치는 예수처럼 중심은 주변으로 가고, 어부와 세리, 죄인들 같은 주변은 중심으로 가는 가치이다. 기독교가 기득교(旣得敎)로 전락할 때, 기독교는 이원화 되지만, 旣得敎를 버릴 때, 기독교는 진정 새로운 가치로서 부활하는 것이다. 기독교가 성경의 가치로 갈 때 기독교는 다시 부활할 수 있다. 성경은 약자가 하나님나라의 중심으로 가는 가치를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허구의 율법적 가치, 정신이 빈약한 문자적 가치, 내용이 없는 권위적 가치. 신앙고백 없는 교리적 가치, 주변과 동떨어진 중심적 가치는 반기독교의 가치였는데 지금까지 참기독교의 가치라고 착각하고 살아왔다. 그러다 보니 기독교는 침몰했던 것이다. 문재인 정권은 비핵화라는 평화의 가치로서 온 민족을 하나로 이끌었다. 기독교는 중심과 주변이 하나 되는 일치의 가치로서 다시 부활해야 한다. http://kidogkongbo.com/885 2018-06-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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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6-14
  • 이효상 칼럼 - 기독교문화로 신(新) 르네상스시대 열자
    한국교회는 구한말 한국사회의 교육과 의료시설을 통하여 근대화의 문을 열었다. 105인사건과 3?1운동, 신간회운동, 신사참배반대운동, 독립신문 등 모든 중심에 기독교가 자리하고 있었다. 알렌과 언더우드, 아펜젤러와 스크랜턴 등 선교사들과 남강 이승훈 선생과 월남 이상재 선생, 서재필 박사, 안창호 선생 등 선각자들이 먼저 한 알의 밀알이 되겠다며 일어섰기에 해방과 독립은 물론이고 교육, 문화, 의료, 복지 분야 등에서 우리나라는 세계사에서 전례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눈부신 성장과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기독교는 한국근대 문화의 중심이 되었고, 기독교는 근현대 문화를 꽃 피웠다. 한국의 근현대사를 보면 여러 나라의 선교사들이 전혀 상관도 없는 미개한 땅에 건너와서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수 없이 죽어간 것을 보게 된다. 그런데 이렇게 일구어 놓은 꽃씨를 다시 피게 할 수 있을까? 어떻게 근현대사의 콘텐츠를 발전시켜 다음세대에게 전승하고 소통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은 다음세대를 고민하는 한국교회가 풀어가야 할 과제임에는 분명하다. 한국교회에 시급한 것은 한국교회가 선도한 근대문화의 가치에 대한 재평가 작업과 사료들을 발굴, 연구하여 다시 콘텐츠로 발전시켜 다음 세대에까지 전달하는 일이다. 다음세대를 향한 역사계승은 처절한 고난의 현장을 방문하여 고난의 역사를 시험을 위해 암기하는 것만이 아니라 가슴으로 직접보아야 고난의 역사는 되풀이 되지 않는다. 고통 속에 한국을 지켜내고 믿음을 지켜낸 이들을 마음에 새기면서 민족의 자긍심을 찾게 되고 평화와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하겠다는 당위성을 스스로 갖게 한다. 더 나아가 민족의 자긍심과 고난의 역사관 그리고 선교사들의 발자취를 통해 빚진 자의 마음으로 나라와 복음전파에 큰 비전을 갖게 한다. 그러나 한국기독교의 근대 역사와 문화 진흥, 정말 시급하다. 그런데 현실은 근대문화에 대한 교회나 목회자의 이해부족과 무관심으로 먼 이야기가 되고 있다. 한국기독교가 근대사의 주인공이자 주류종교임에도 역사 문화적 접근에 대한 이해부족으로 인하여 사회와 소통하지 못하고 교회안에 갇힌 형국이다. 어찌보면 교회는 역사와 문화의 흐름에서 도태될 지경에 놓이고 있는 것은 아닐지 자문하게 된다. 그래서 한국교회는 지금의 상황을 정확하게 직시하고 뼈아픈 자기평가와 대처가 필요하다. 교회학교가 사라져가는 현실에서 폭풍전야와 같은 한국교회는 기독교 역사를 조명하고 문화의 신(新)르네상스시대를 열어야 한다. 한국교회 전체가 지혜와 힘을 모아 잊혀진 역사와 문화의 기초를 다시 세우려는 교회 안팎의 여러 가지 방안들을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아니 거기에 헌신하고 투자해야 한다. 한국교회는 다음세대를 위한 대안과 전략을 가지고 있는가? N세대와 함께하는 기독교 역사와 문화의 신(新)르네상스를 여는 일, 늦지 않았다. 사실 우리는 교회성장에 주력하며 세상의 흐름에 대해 비판할 줄 알았지 역사를 바로잡고 문화를 회복하는 일에는 소홀했다. 하지만 지금도 너무 늦지 않았다. 한국교회 속에는 잃어버린 소금의 ‘짠맛’을 되찾게 해줄 ‘불씨’가 아직 살아 있다. 그 불씨이자 대안으로 ‘문학의 밤’을 재현하고, 세대를 통합한 ‘성탄축제’를 지역별로 활성화했으면 하는 것이다. 지난 날 매년 가을이면 교회마다 열린 ‘문학의 밤’은 기독교 문화를 확산하며 많은 청소년들에게 문화적 소양과 기독교적 영성을 키우는 계기를 만들었다. 청소년들이 사회, 춤, 노래, 시, 성극, 콩트, 듀엣, 몸찬양, 시낭송, 댄스워십, 연주 등 여러가지 모양으로 공연과 시화전, 사진전, 작품전을 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축제를 통해 그들이 가진 ‘끼’를 펼칠 수 있게 하였다. 일종의 ‘문학의 밤’은 기독교 문화를 선보이는 장이었고, 다음세대가 자리할 ‘멍석’을 깔아주는 일이었다. 매년 가을 추수감사절을 전후해 가졌던 그 소중한 행사가 언제부턴가 점점 사라져 찾기가 쉽지 않을 정도이다. 도한 부산지역에서 성공적으로 실행하고 있는 ‘성탄축제’는 지역교회가 나눠야할 최상의 콘텐츠 사례가 될 것이다. “청소년들이 스마트폰에 빠졌다”고 한탄만 할 것이 아니라 청소년들이 말씀을 묵상하고 시를 낭송하며 그들이 가진 문학적 감수성을 열고 재능, 소질, 은사 등을 마음껏 펼칠 수 있도록 지금부터라도 준비하자. ‘문학의 밤’을 재현하고, ‘성탄축제’를 지역별로 실행하는 일은 기독교 문화의 기초를 놓는 일이자 믿지 않는 청소년들을 다시 교회로 돌아오게 하는 징검다리, 즉 통로가 된다. 다음세대가 자리할 멍석을 깔아주자. 다양한 분야의 인재들이 좋아서 할 수 있는 다양한 사역의 장을 만들어 보자. 그래서 처음부터 거창하지 않아도 좋다. 가끔은 이런 꿈을 꾸고 환상을 가져보면 안되는 것일까? 크리스천 청소년들, 즉 젊은이들이 기독교 문화를 가지고 신촌과 홍대에 들어가 그 땅을 정복하고 다음세대를 회복시키는 거룩한 열정으로, 그래서 이 민족을 새롭게 하는 그런 꿈과 환상 말이다. 그런 점에서 홍대 합정역에서 기독교문화와 대중문화를 접목한 ‘수상한 거리 페스티벌’은 기독교 문화를 세상에 꽃 피우자는 운동으로 1년에 카페 90%가 문 닫는 상황에서 생존하며 자립한 여섯걸음교회는 미션얼 처치(missional church)와 함께 생소한 상황에서 플랫폼처럼 문화나 콘텐츠를 수용하고 담을 수 있는 또 하나의 새로운 형태로써 기독교 가치와 문화가 교회를 넘어 사회와 소통하며 세상으로 흘러간다는 점에서 우리를 주목하게 만든다. 다음세대를 위한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도록 기독교 문화의 신(新) 르네상스시대를 열자. N세대부흥과 기독교문화의 르네상스 재현, 결코 불가능하지 않다. ‘얼’빠진 기독교가 되지 않도록 지금부터라도 말씀으로 돌아가 되새김하며 역사와 문화를 바로 세워나가는 일 ‘문학의 밤’에서부터 시작해 보면 어떨까? 단재 신채호 선생(1880-1936)은 “영토를 잃은 민족은 재생할 수 있어도 역사를 잃은 민족은 재생할 수 없다”고 했다. 역사나 문화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는 말이다. 민족정신을 깨우친 정인보 선생은 '조선사연구'에서 그것을 ‘얼’이라고 했다. 대한민국에서 태어났다면 마땅히 역사를 알고 선조들의 빛난 얼을 되살리고 본받아야 할 그것이 없으면 ‘얼’빠진 사람이라는 것이다. 믿음의 선배들이 흘린 뜨거운 피와 그 정신의 역사와 문화를 가르치고 계승하고 진흥시켜 나가는 것은 얼이 살아 숨 쉬게 하는 것이요, 그 정체성을 유지해 나가는 길이 된다. 2018-05-23 글쓴이: 이효상 원장(한국교회건강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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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5-23
  • 김종희 칼럼 - "오정현목사 백서와 좋으신 하나님"
    얼마 전 오정현목사 목사직에 대하여 글을 쓴 후에 ‘오정현목사 백서’라는 소책자가 우편으로 배달되었다. 오정현목사가 총신에 입학하는 과정부터 총신을 졸업하기까지의 온갖 내용들을 적었다. 물론 안 좋은 내용들이다. 그동안 필자가 총회와 총신의 갈등속에서 몇 번의 글을 썼다. 누가 전해 주기를 필자가 총신쪽에 가깝고 총신을 두둔하는 글을 쓴다는 것이었다. 그럼 오정현목사에 대하여 글을 쓰면 오정현목사를 두둔하기 위함인가? 필자는 누구를 두둔하기 위하여 글을 쓰지 않는다. 필자의 양심에 어긋나지 않게 양심껏 글을 쓴다. 금번에 배달된 ‘오정현목사 백서’의 내용을 훓어보면서 ‘좋으신 하나님’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Ⅰ. 오정현목사의 총신과정이 그렇게 중요한가? ①오목사는 안수를 받은 목사이다. 오목사가 목사의 신분으로 총신에 입학한 것은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개강수련회 강사로도 세운 것이다. 목사후보생을 강사로 세울리는 만무하다. ②그렇다면 목사의 신분이 어떤 과정을 밟았느냐에 따라 변하지는 않는다. 안수증을 제출했던 목사후보생 증명서를 제출했던 목사가 제출하고 과정을 했기에 문제가 없다. ③고린도교회는 바울의 사도권에 대하여 시비를 걸었다. 하나님은 인간이 시비하는 것을 초월하여 바울을 쓰셨다. 좋으신 하나님이다. 오목사의 목사직에 대하여 시비를 넘어 그를 하나님이 세우신 사람으로 보는 것이 신앙적이다. Ⅱ. 오정현목사를 죽여야 하나? 살려야 하나? ①하나님은 인간이 살아 온 과정이나 그 결과로 인하여 그를 죽이신 일이 없다. 다윗이 살아 온 과정은 죽을 일을 했을지라도 그 과정을 따지지 않으시고 그를 살려 쓰셨다. ②오목사가 총신 과정을 밟으면서 설사 많이 부족했던 점이 있다고 치자, 그러나 그 부족은 하나님을 향한 그의 몫으로 남겨주자. ③지난날 살아 온 삶을 율법 조문으로 따지면 뭔가에 걸리고 살아 남을 사람이 없다. ‘오정현목사 백서’를 만든 이들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오목사를 살려야 한다. 고후3:6 “그가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일꾼 되기에 만족하게 하셨으니 율법 조문으로 하지 아니하고 오직 영으로 함이니 율법 조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니라” ④아주 기본 진리, 하나님은 죽을 죄인을 위하여 독생자를 보내셔서 살리셨다. Ⅲ. 목사된 우리는 임직 서약을 기억하고 있는가? ①목사는 임직할 때 정치 제15장 10조 서약 3항에서 “본 장로회 정치와 권징조례와 예배 모범을 정당한 것으로 승낙한다”는 서약을 하고 목사가 되었다. 그렇다면 자신이 속한 치리회가 아니라도 동일치리회 원칙에 따라 동서울노회와 본교단 총회가 인정한 오목사의 신분에 대하여 승낙을 하고 시비를 걸어서는 안된다. ②또한 목사 서약 7항에 “...복음을 영화롭게 하며...” 라고 하였다. 오목사에 대한 지난날 총신과정을 들춰내는 것이 한국 사회앞에 복음을 영화롭게 하는 일인가. ③목사들의 입에서 좋은 말이 나오도록 하자. 엡4:29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Ⅳ. 상대방의 양심자유를 존중해야 하지 않겠는가? ①정치 제1장 1조 “양심의 주재는 하나님뿐이시라. 그가 양심의 자유를 주사 신앙과 예배에 대하여 성경에 위반되거나 과분(過分)한 교훈과 명령을 받지 않게 하셨나니 그러므로 일반 인류(人類)는 종교에 관계되는 모든 사건에 대하여 속박을 받지 않고, 각기 양심대로 판단할 권리가 있는즉 누구든지 이 권리를 침해(侵害)하지 못한다” 고 되어 있다. ②필자는 고 옥한흠목사님을 존경한다. 지난번 교갱수련회에 잠시 들려 비오는 날 우산을 받쳐들고 옥목사님 묘소에서 예배를 드린 기억이 있다. 그 분은 한국교회를 바로 세우기 위하여 교회 갱신운동에 앞장섰던 선구자이다. 그 분이 오목사를 후임자로 선정하고 세울 때 후임자의 자격이나 도덕성에 불의한 일이 있었다면 용납할 수 없었을 것이다. ③오정현목사가 안수를 받았으면서도 안 받은 것처럼 하거나 또 안 받은 안수를 받았다고 할 수 없다. ④전임자와 후임자가 양심의 자유를 존중받지 못할만큼 파렴치(破廉恥) 하지 않다. Ⅴ. 우리 교단의 가족들이 무엇을 원하고 있을까? ①가정에서 아빠와 엄마는 나름대로 누가 옳으냐를 가지고 싸우지만 그 가정에 자녀들은 아빠 엄마가 싸운다는 자체가 싫다. 오목사의 문제로 싸우는 것 같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지켜 보는 우리는 식상(食傷)하고 싫다. ②더구나 오목사 문제를 타 기관이 지적하는 것도 아니고 어찌 그를 공부시킨 총신에서 들고 나오는가? 마치 ‘우리 집에 이런 일이 있었다’라며 동네 방네 떠 벌리는 식이다. 집안의 명예는 다 실추되는데 무엇을 얻겠다는 것인가? ③사랑의교회를 축복함이 우리가 할 일이다. “내가 섬기는 교회도 잘되고 사랑의 교회도 잘되고 한국교회가 다 잘돼서 이 땅에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기를...” ”좋으신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2019-05-14 김종희목사(부산 성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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