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7(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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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윤석열 대통령과 이순신 장군 사즉생
    국민의힘의 비례 위성 정당인 국민의미래는 18석을 얻을 것으로 예측돼 비례를 합쳐 개헌선을 지킬 108석 의석을 가진 여당이 될 것이다. 21대 총선 때는 비례를 포함해 103석이었다. 그때 중앙선거관리위원회에 따르면 2022년 3월 10일 오전 개표율 100% 기준, 윤석열 국민의힘 후보가 득표율 48.56%를 기록해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후보(47.83%)를 앞섰다. 선거 막판까지 1%포인트 차이가 나지 않은 초접전 상황에서 이재명을 누르고 20대 대선에서 대통령에 당선됐다. 그런 그이기에 문재인 휘하 검찰총장으로서도 기죽은 적이 없었다. 그런데 국회의원 수도 5명이 더 늘어난 대한민국 국민의 대통령 윤석열은 그 나름의 능력을 발휘해 이순신 장군의 사즉생(死卽生) 각오로 헤쳐나가리라 믿고 믿음의 사람들은 기도해야 할 것이다. 주님 그리워 기도하는 새벽 벚꽃 피네 벚나무는 아련한 추억처럼 꽃잎을 흩날리며 아득하게 진다. 건축의 기본 단위는 건물이다. 건물을 쪼개면 방들로 나눠지고 방을 쪼개면 가구들로 나눠진다. 반대로 건물이 모이면 거리가 되고 거리가 모이면 동네가 되고 동네가 모이면 도시가 되고 도시가 모이면 국가가 되고 국가가 모이면 세계가 된다. 훌륭한 건축가는 다양한 크기의 스케일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면서 사고하는 사람이다. 여러 가지 스케일에서 검토해야 좋은 의사 결정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건물을 설계할 때도 크게는 도시를, 작게는 가구를 동시에 생각해서 디자인 의사 결정을 만들어야 한다. 그래서 르코르뷔지에, 노먼 포스터 같은 훌륭한 건축가는 건물 디자인뿐 아니라 의자 디자인부터 도시 설계까지 했다. 의사 결정은 가치관이 결정한다. 가치관은 상대적이고 항상 변한다. 가치관을 바꾸는 기준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그중 하나는 공간이다. 고려하는 ‘공간의 크기’가 가치관을 결정한다. 예를 들어서 군부대에서 상관이 강압적인 명령을 내렸다고 하자. 인권 등을 고려해서 명령을 내린 상관이 징계를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배경을 극동아시아로 넓혀 보니 전쟁 중이라면 전쟁에서 이기기 위한 불가피한 명령으로 정당성을 가질 수도 있다. 이처럼 우리 판단의 기준이 되는 공간의 크기에 따라서 가치관의 우선순위가 달라지기도 한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얼마 안 된 해방 후에는 국제 정세가 어지러운 시대였다. 이때는 여러 국가 간 지정학적 공간 스케일이 가장 중요한 판단 기준이었다. 자유 진영에 자리를 잡는 것이 가장 중요한 시대였고 우리나라는 올바른 선택을 했다. 신앙을 가진 이승만 대통령은 개인이 토지를 소유할 수 있는 시대를 만들어서 자유민주주의의 공간적 초석을 놓았다. 1970년대에는 경제 발전이 필요한 시대였다. 산업화를 하였고 아파트를 지어서 고밀화된 도시 공간을 만들고 새로운 일자리를 창출했다. 90년대에 가장 큰 변화는 베를린 장벽과 소련의 붕괴다. 냉전 시대가 끝나고 지정학적 긴장감이 사라지니 민주화의 속도를 높일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지금은 시대의 기류가 바뀌어 미·중 신냉전의 시대다. 우크라이나 전쟁을 시작으로 세계는 본격적으로 양분화되는 중이다. 중국, 러시아를 중심으로 한 세계와 그 외 자유민주주의 진영이라는 새로운 냉전 구도가 구축되고 있다. 이런 시대가 되면 지리적 위치가 국가의 정치와 국제 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지정학의 중요성이 높아진다. 미·중 갈등의 최전선은 중동이 아니라 한반도다. 우리의 의사 결정 가치관의 기준은 작은 국내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건축에 비유하자면 건물 디자인을 결정할 때 가구가 아니라 도시적 스케일에서 의사 결정이 되어야 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아직도 지난 시대의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국민이 많고 이를 악용하는 모사꾼을 감옥에 보낸 허활민 목사보다 못한 이재명이나 조국 같은 정치가들이 많다. 지금은 50년대 건국의 시대도 아니고 70년대 경제 발전의 시대도 아니고 90년대 민주화의 시대도 아니다. 지금은 새로운 지정학의 시대다. 50년대와 비슷한 위기의 지정학적 시대에 인공지능의 변화까지 덮친 시대다. 우리나라의 경우 인구의 노령화까지 겹쳐서 변화에 대응하기 더 어려운 상황이다. 국내라는 좁은 공간적 시각에 갇혀 생각하면 구한말 때 우리 조상이 한 실수를 똑같이 반복하게 될 것이다. 일본은 유럽에 도자기를 팔았던 나라로 바닷길로 해상무역을 했던 나라였기에 더 넓은 공간을 보았고 우리보다 앞서 메이지 유신을 했다. 우리는 한반도에 시선이 머물러서 당파 싸움만 하다 나라를 잃었다. 바다라는 더 큰 공간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계속해서 사고 속 공간을 확장시켜 나가야 한다. 90년대 우리는 어느 나라보다도 빨리 초고속 인터넷망을 통해서 가상공간으로 사고의 공간을 확장했다. 경제학자 찰스 굿하트의 분석에 따르면 1988년부터 2018년까지 일본의 경제 성장률은 전체 인구를 고려했을 때는 주요 국가 대비 최저 수준이지만 노동인구(20~64세) 1인당 연간 평균 경제 성장률은 오히려 미국, 영국, 프랑스를 앞서는 수준이다. 이는 고령층이 적극적으로 사회 참여를 지속하고 있음을 방증한다. 실제로 지난 20년간 일본은 고령층이 꾸준히 일할 수 있는 사회를 추구함과 동시에 후기 고령자(75세 이상)의 신체, 인지 기능 보존을 위한 지역사회의 돌봄 예방 체계를 구축하고 돌봄 요구의 발생을 예방하기 위해 의료-복지를 연계하는 등의 노력을 지속해 왔다. 싱가포르는 일본의 개념에서 더 나아가서 나라 전체를 아예 느리게 나이 들게 만들겠다는 의지를 통해 세계 여섯 번째의 ‘블루존(세계 최고의 장수마을)’ 목록에 추가되기도 했다. 자연적으로 형성된 기존 블루존들에 비해 싱가포르는 정책에 기반한 블루존 2.0의 개념을 도입했다. 사람들이 도시를 걷고 건강하게 식사하도록 장려하고 자동차 보유, 음주, 흡연에는 높은 세금을 매긴다. 노인 의학적 개념을 기저에 둔 연령 친화적인 의료 시스템을 통해 병원이 질병을 치료하는 데 머무르지 않고 질병과 노쇠를 예방할 수 있도록 한다. 나아가 노쇠가 이미 발생한 상황, 즉 내재 역량이 감퇴하는 상황에서도 지역사회에서 공동체 생활을 유지할 수 있도록 지역사회 시스템을 형성한다. 한국의 일하는 고령층 비율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1위다. 노년 빈곤을 원인으로 꼽지만, 통계청의 2023년 고령자 통계에 따르면 일하는 노인은 자신의 건강 상태가 좋다고 생각하며 일상생활에서 스트레스도 비교적 덜 느꼈다. 더 건강한 이들이 일을 지속할 가능성도 높지만, 일이 신체, 인지, 사회적 자극을 유지할 수 있어 내재 역량 유지의 선순환을 만들어 주는 효과가 있기도 하다. 지금 갓 65세를 넘고 있는 분들은 이전 세대보다 더욱 건강하고 부유하고 잘 교육받았다. 이들이 앞으로도 내재 역량을 유지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은 정책의 역할이다. 앞으로 한 나라의 실력은 그 나라 사람들의 나이 드는 모습을 통해 드러날 것이다. 어두운 미래는 확정적이지 않다. 우리의 미래는 우리가 만드는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예언자적 안목을 지니고 있었다. 일본은 미국에 반드시 패한다고 예측하였다. 미국이 주도하는 신국제질서에 신생국인 한국이 따라가야 한다고 보았다. 미국은 군사력 국가이고 경제부국인 데다가 기독교 서구 문명의 중심 국가라고 간파했던 것이다. 미국의 실체를 하나님의 은혜로 요셉처럼 100년 전에 정확하게 파악했던 셈이다. 이승만 대통령 버금가는 전략가는 독일의 비스마르크, 영국의 처칠이다. 철혈재상(鐵血宰相) 비스마르크의 철(鐵)은 군사력이고, 혈(血)은 국민정신이다. 철혈이 없는 나라는 죽도 밥도 안 되고 강대국의 먹잇감이 된다. 처칠이 말했다고 한다. "소련에 평화를 호소하는 것은 악어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것과 같다." 그렇듯 감옥을 눈앞에 두고도 으스대는 이재명과 조국에게 소크라테스가 중요하게 여긴 "너 자신을 알라"는 말을 한다는 건 처칠의 말과 같이 될 것이다. 성경은 말씀한다. 무릇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라 눅 17:33 2024-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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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1
  • 소강석 목사의 날개
    이제 거리 어디에도 시계란 없다. 심지어 서울역에도. 왜? 아무도 시계를 쳐다보지 않기 때문이다. '만들어진 신'(The God Delusion, 신이라는 망상)의 대표적 무신론 작자 리처드 도킨스(Clinton Richard Dawkins, 1941년 3월 26일~ )가 아직 살아 말한다. 비행하는 동물은 왜 나를까. 목적은 적자생존이며 목표는 유전자의 생존이다. 더 잘 날아 먹이를 잘 잡는 새나 박쥐가 후손을 잇고 더 잘 날아 포식자를 잘 피하는 곤충이 자손을 남긴다. 먼저 날기 시작한 것은 곤충이었다. 척추동물보다 2억 년이나 앞선 3억 년 전부터 날기 시작했다. 가볍기 때문이다. 무게에 비해 표면적이 넓을수록 나는 데 유리하다. 몸 크기(길이)가 두 배가 되면 표면적은 네 배, 무게는 8배다. 크기가 열 배가 되면 표면적은 100배, 무게는 1000배가 된다. 어쩌다 날게 되었을까. 포식자를 피하며 몸 일부를 펼치다 붕 떠서 적을 뿌리칠 수 있었고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날개가 생겼을 것이라고 저자는 해석한다. 초기 단계는 날다람쥐 같은 ‘활강’이었지만 이윽고 자신의 힘으로 날아오르는 ‘동력 비행’이 가능해졌다. 동물의 비행과 인간의 비행은 실제 비슷한 방향으로 ‘진화’했다. 맹금류가 먹이를 향해 내리꽂는 광경은 급강하 폭격기를 보는 듯하다. 벌새는 날개를 위로 칠 때 완전히 뒤집어 정지 비행을 할 수 있다. 마치 헬리콥터나 드론을 연상시킨다. 그렇지만 동물과 인간이 만든 기계의 비행에는 차이가 있다. 비행기나 헬기, 드론은 날개를 칠 수 없다. 엔진으로 추력을 얻고 날개로 양력을 얻는 비행기의 원리는 새나 박쥐, 곤충이 날개를 치는 것과 완전히 다르다. 새가 날개를 치면 몸을 앞으로 밀어내면서 공기를 아래로 밀어내 날아오를 수 있지만 그 역학은 비행기의 동작보다 훨씬 분석하기 어렵다. 그는 비행을 넘어 지구 밖을 향하는 인간의 꿈을 격려한다. 원하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이곳을 떠나야만 할 가능성에 대비하기 시작할 때라고 도킨스는 말한다. 분야는 다르지만 과학 대중화에 일생을 바친 천문학자 칼 세이건을 떠올리게 한다. “나는 과학 자체를 미지의 세계로 나아가는 영웅적인 비행이라고 여긴다. 이제 날개를 활짝 펼치고 과학이 우리를 어디로 데려갈지 지켜보자.” 그렇듯 2005년 7월 3일 소강석 목사는 그렇게도 기다리던 약속의 성전 프라미스 콤플렉스에서 날개를 활짝 펼치고 하늘로 날기 위해 첫 예배를 드리는 날이었다. 그런데 아침부터 비가 부슬부슬 내렸다. 소강석 목사는 비가 내리는 창문가에서 흐린 하늘을 보며 하나님께 기도했다. "주여, 새에덴의 성도들 한 사람도 빠짐없이 함께 감격적인 첫 예배를 드리게 하소서..." 그리고 첫 날부터 프라미스 콤플렉스를 향해 들어오는 예배자들 우산의 물결로 장엄한 광경을 이루었다. 몸에 묻은 빗물을 털면서도 성도들의 얼굴은 감격과 환희로 가득했고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약속의 성취를 기뻐하며 환호했다. 첫 예배를 드린 프라미스 콤플렉스의 비전홀은 성도들의 눈물과 하나님의 영광이 가득했다. 시인 소강석 목사는 2023년 12월 4일 '너라는 계절이 내게 왔다'라는 시집을 내고 하나님의 은혜를 이렇게 노래했다. 문득 가을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고 나뭇잎들이 허공 위로 날아가다 나의 발 앞에 떨어졌을 때 그건 나뭇잎이 아니라 편지였다 쓰고 싶은 시였다 불 꺼진 창문 아래서 혼자 부르고 싶은 노래였다 눈을 감아도 보이고 귀를 막아도 들리고 숨을 참아도 부르게 되는 사랑이었다 시인 소강석 목사의 날개는 하나님의 사랑이었다. 성경은 말씀한다.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네째 날이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물들은 생물로 번성케 하라 땅위 하늘의 궁창에는 새가 날으라 하시고 하나님이 큰 물고기와 물에서 번성하여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그 종류대로 날개 있는 모든 새를 그 종류대로 창조하시니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창 1:19-21 2024-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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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05
  • 윤희원의 선거 변혁 제안
    사람이라면 누구나 속한 곳에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 있다. '사람 구실, 아비 구실, 맏형 구실, 며느리 구실'과 같은 말이 그것이다. 그런데 이런 일을 수행하는 것은 지위나 형편에 관계가 없다. 여기서 '구실'이란 자기가 마땅히 해야 할 맡은 바 책임을 이르기 때문이다. 원래 구실은 공적인 의무를 이르던 말이다. 옛말에서는 온갖 세납을 통틀어 말했다. 그래서 '구실을 바치다, 구실을 물다'와 같은 말이 남아 있다. 구실은 어쩌다가 이처럼 강한 의무감을 띠게 되었을까. 구실의 원말은 '그위실'인데 관아 즉 대치동 총회 같은 공공기관을 이르는 우리말이다. 관아에서 맡긴 공적인 업무가 마땅히 있을 테니 그 말이 오늘날에 이어진 셈이다. 이 총회 상비부 임원 같은 구실보다 높은 직이 총회 임원 같은 벼슬이다. ‘벼슬’은 관아에 나가서 나랏일을 맡아 다스리는 자리를 뜻한다. 벼슬이라 하면 우선 ‘높은 벼슬과 후한 봉록’과 같은 예시가 먼저 떠오른다. '벼슬을 지내다', '벼슬 한 자리를 하다'와 같은 말에서 벼슬하는 이의 영광스러움을 어떻게 딴 자리인데 하며 배광식이나 고광석 같은 이는 느낄 것이다. 오늘날 말로 보면 구실과 벼슬은 곧 직무와 직위이다. 물론 직위가 없어도 직무를 잘 수행하는 사람들도 있다. 한 가정의 구석구석을 살피며 빈자리를 채워내는 이름 없는 어머니들이 그러하고 한 사회의 여기저기에서 빛과 소금의 봉사 활동을 하며 기여 하는 많은 분들도 이러한 유형에 속한다. 그러나 자아를 성취하고 올바른 수행 통로를 부여하기 위해서는 직무에 맞는 직위를 부여하는 것이 마땅한 일이다. 그래서 제구실을 한다는 말이 생겨난 것이다. 구실의 다른 말로 ‘임무’나 ‘역할’은 물론 ‘제값’이라는 멋진 표현도 있다. 세상에 존재하는 한 사람으로서 자신의 위치에서 일을 훌륭히 수행하는 이를 제값을 한다고 한다. 이와 달리 ‘종노릇, 총대 노릇’처럼 그 직업과 직책을 낮잡아 이르는 말이 ‘노릇’이다. 흥미롭게도 사전에는 ‘선생 노릇, 관리 노릇’ 등도 나온다. 선생, 관리라는 직업과 연결할 때 언뜻 보면 어울리지 않는 말인데 이런 표현이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목사와 장로들 모임의 총회 관행과 달리 속담에 "벼슬이 높을수록 뜻은 낮추랬다"라고 한다. 직위가 높을수록 겸손해야 한다는 말이다. 관리가 관리자로서의 구실을 충실히 한다면 어떤 벼슬보다 더 잘 모실 것이나, 관리 구실을 못한다면 "관리 노릇한다"라고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문재인 나부랭이 좌파와 달리 직위보다 직무를 더 충실히 앞세운다면 노릇으로 폄하 받는 일은 없을 것이다. 오늘 총회 임원과 상비부 임원들은 총회 안에 서 있는 자리에서 벼슬이 아닌 구실로 일을 잘 맡아 하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할 것이다. 그래야 목사와 장로 같은 직분을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라는(고전 4:2) 말씀의 총회 목사와 장로들이 아니겠는가. 108년 역사의 총회 민주주의의 핵심 기제로 △권력의 견제와 균형 △법치 △소수의견과 절차의 존중 등을 꼽을 수 있다. 그런데 숙의민주주의와 소수의견 및 교회 전통 존중이라는 불문율이 총회 역사상 이처럼 절실한 시절은 없었던 것 같다. 나토 당국자가 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나려면 수년 걸릴 것이라고 말했다 그 전쟁이 터지기 6일 전 2022년 2월 18일 주간 기독신문에 총총 출신의 총회 최고 지성 윤희원 목사는 총회 선거 부정의 실태를 점잖게 밝히는 "지지의 긍정성을 부정성으로"라는 제하의 논단을 실었다. 금권으로 총회장이 되는 현실을 다음과 같이 점잖게 지적한다. 총회의 선거는 내가 보기에는 정치의 장을 떠나 자본이라는 돈의 공간으로 옮겨갔다. 그래서 선거는 가시성에서 비가시성으로, 투명성에서 불투명성으로, 공정성에서 차등성으로, 부정적인 면을 드러내게 되었다. 이러한 선거가 된 것은 선관위가 선거 규정을 적용하고 운영하며 선거를 관리하는 데서 비롯되었다고 보여진다. 본래 선거 규정이란 모임의 대표자나 임원을 공명정대하게 선거를 통해 선출하기 위해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그 규정에 의해서 경쟁하게 하고 더욱이 선거전(戰)이 과열되지 않도록 또 소모적인 마타도어에 휩쓸려가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선거 규정은 상보적이고 그 규정을 운용하는 선관 위원은 중개 적이어야 한다. 더욱이 총회의 선관 위원은 정치적 중개를 넘어서서 개혁신학과 신앙에 걸맞는 중개를 해야 한다. 즉 어느 후보가 더 개혁신앙과 신학의 정체성이 분명한가를 선거운동을 통해서 드러낼 수 있도록 해 총대들이 선택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유감스럽게도 지금까지의 선관위와 선거 규정은 그렇지 못했다. 제107회 선거를 관리하는 선관위가 제106회 선거 규정을 고치지 아니하고 그대로 사용하여 시행한다고 하니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 격이 된다. 왜냐면 제106회 총회처럼 부정선거가 된 선거는 없었다. 총회는 선거가 끝나자마자 부정투표에 휘말렸고 사실상 비상사태가 되었다. 후보자끼리 선거관리 규정에 의해 각서하고 공증까지 했어도 그 선거의 과정이 공정하지 않고 투명하지도 않은 부정선거가 이루어졌는데 공증한 각서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더욱이 선관위는 검표하면 비밀투표한 것이 드러나 선관위 스스로는 할 수 없고 형사 고발을 해서 사법적으로만 할 수 있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그 사이에 장자 교단이라는 시스템을 작동해 어느 유능한 인물이 이 비상사태를 정상상태로 만들어 버렸다. 이런 점에서 나는 개인적으로 솔직히 선거 규정을 바꾸기를 원했다. 다른 것은 몰라도 한번 투표의 방법을 비밀투표가 표로 아닌 공개투표로 바꾸었으면 했다. 왜냐면 비밀투표로 하게 되니 후보자에 대한 지지 긍정성이 과잉 생산되고 있기 때문이다. 찾아와서 만나면 그 면전에서 “나는 당신을 지지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할 수 없어 지지하는 척하고 명목상 주는 여비를 받는다. 만일 공개투표로 바꾸게 되면 이 지지 긍정성이 사라지고 부정성이 드러나서 후보자도 만나보았자 날 지지하지도 않을 사람이니 만나지 말고 여비도 주지 말자고 할 것이다. 당연히 유권자인 총대들은 이제 한 표 가지고 두 사람 아닌 후보자 모두를 지지할 수 없으니 아주 조심할 것이다. 그리고 잘못되면 받은 여비 내놓으라는 소송 아닌 소송에 휘말리게 되니 후보자들에 대한 지지 긍정성은 사라지게 될 것이다. 이렇게 투표의 방법을 바꾸면 종전에 시행했던 제비뽑기 방식의 선거보다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투표의 방식을 이렇게 공개투표로 전환하면 후보들 스스로가 총대들의 지지 긍정성에 현혹되지 아니할 것이다. 지금의 선거 규정은 너무 부정적인 요소가 강하다. 온통 배제와 금지를 규정하고 후보자로서 활동을 못 하게 한다. 그래서 후보자들 스스로가 그 규정 안에서 담합 하거나 아니면 이의제기 또는 고소 고발로 상대를 떨어지게 하려는 비정치적인 행위를 한다. 결국은 자본을 많이 소비한 쪽이 승리하는 경제 행위가 되어 버렸다. 한번 바꾸어 보자. 투표의 방법을 공개투표로 바꾸면 굳이 지금과 같은 선거를 치러야 할 필요성도 사라지고 총회진행 시간도 매우 단축될 것이다. 지금 우리는 선거라는 정치적 행위를 통해 개혁신학과 신앙의 위계를 상황적으로 계승시키지 못하고 위기 적 상황만 고조시키고 있다. 이런 점에서 총대들의 정치적 행위가 되는 선거의 방법을 고쳐야 한다. 그래야 탈 정치 화 되고 탈 신앙 화 되고 탈 신학 화 된 선거문화를 바꿀 수 있다. 아쉽게도 이번 총회가 선거 규정을 바꾸지 않고 선거를 치른다고 하니 걱정이 된다. 걱정이 우려로 끝나면 좋겠지만 기대가 되어 버리면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꼴이 되어 버릴 것이다. 우리 총회의 개혁은 먼저 선거의 변혁을 통해서 이루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선관위와 선거 규정은 참으로 중요하다. 왜냐면 선한 양심을 총대 모두에게 지켜가게 하기 때문이다. 바꾸자. 먼저 우리의 마음을, 그리고 지키자. 선거 속에서 신앙과 신학을. 성경은 말씀한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딤전 6:10 2024-0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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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05
  • 의사 파업과 총회 선거
    구름이 발 아래 머물더니 3월 하늘이 폭설을 쏟아낸다. 가난한 신학생 시절 1970년대 사당동 골짜기엔 태곳적 침묵이 쌓여갔다. 현관의 유리창 밖을 보고 서 있었다. 고요 속에 장엄한 살아있는 천지가 압도해 들어온다. 관입실재(觀入實在)! 마음의 눈으로 실재를 대면하는 순간순간이 이어진다. 만유의 주 하나님께서 만물을 지으시며 말씀하신 “보시기에 좋았다”라는 감탄이 가슴에서 터졌다. 그 시절 3월에 웬일이냐! 만상이 살아있다는 영광을 이렇게 누리다니! 예수께선 ‘들에 핀 백합을 보라! 솔로몬의 영광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다(마태복음 6:29)’ 말씀하셨다. 그날 사당동 골짜기 미완성의 1동짜리 총신대에서 되뇌었다. “오늘은 눈이 열려 솔로몬의 영광보다 더한 영광을 이 골짜기에서 보게 하시니 감사하나이다!” 예수께선 어린이와 같지 않으면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 하셨다. 동심에 온유와 겸손의 도가 있다. 늘 성경을 읽는다는면 우리의 마음엔 그 진리가 벌써 자리한 것일까. 꽃은 봄의 전령(傳令)이다. 그 꽃을 가리키는 대표적 한자는 화(花)다. 영화(榮華)라는 단어의 각 글자는 꽃이다. 식물 형태가 목본(木本)이냐 초본(草本)이냐에 따라 ‘영’과 ‘화’를 구별할 때도 있지만 분명치는 않다. 두 글자는 어쨌든 식물의 가장 아름다운 부분, 정수(精髓)라는 우러름을 받는다. 그 맥락에서 영(英) 또한 꽃의 지칭이다. 가장 빼어난 사내를 영웅(英雄), 그런 능력의 사람을 영재(英才)로 적는 이유다. 꽃이 피었다 시드는 과정을 영고(榮枯)라 적어 성쇠(盛衰)와 흥망(興亡), 흥폐(興廢) 등의 뜻으로 새긴다. 총회선관위(위원장 권순웅 목사)의 유권해석에 따라 4월에 열리는 이번 봄 노회에서 총회 임원의 경우 총회장은 오직 예수 김종혁 목사(울산노회ㆍ명성교회)가 추대될 것이다. 목사부총회장은 장봉생 목사(서울노회ㆍ서대문교회)가 가장 유력한 후보로 나설 것이다. 장로부총회장은 김영식 장로(군산남노회ㆍ익산서두교회), 김형곤 장로(김제노회ㆍ대창교회), 박석만 장로(서수원노회ㆍ풍성한교회)가 경합할 것이라고 한다. 부서기는 서만종 목사(광주전남노회ㆍ광주단비교회)가 앞선 가운데 이종석 목사(동수원노회ㆍ광교제일교회) 배정환 목사(광주노회ㆍ광주미문교회) 등 두 사람이 뒤쫓을 형국이다. 부회록서기는 안창현 목사(군산남노회ㆍ서광교회)와 최찬용 목사(남수원노회ㆍ대덕교회)가 경쟁할 것이다. 서기는 부서기 임병재 목사(경청노회ㆍ영광교회), 회록서기는 부회록서기 김종철 목사(용천노회ㆍ큰빛교회), 회계는 부회계 이민호 장로(경북노회ㆍ왜관교회)가 정임원으로 올라갈 것이다. 기관장 유력 후보는 교육개발원 이사장 송태근 목사(평양제일노회ㆍ삼일교회, 재임), 기독신문 사장 태준호 장로(전서노회ㆍ태인교회, 재임), 총회세계선교회 이사장 김장교 목사(대경노회ㆍ서성로교회), 기독신문 이사장 장재덕 목사(경동노회ㆍ서문교회) 등이 드러나고 있다. 아카데미상을 휩쓴 영화 ‘오펜하이머’의 주인공인 핵물리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철저한 강의 준비로 유명했다. 버클리 교수 시절엔 영감을 불어넣는 강의에 매료된 학생들이 같은 과목을 두세 번씩 수강 신청했다. 오펜하이머는 다른 교수들이 불성실하게 강의하는 것을 참지 못했다. 강의가 마음에 안 들면 수업 중인 교수를 강의실 밖으로 내쫓은 적도 있다고 한다. 강의에 대한 이런 열정은 교수직을 단순한 지식 전달이 아닌 신의 소명으로 보는 서구 대학의 오랜 전통에서 비롯됐다. ‘교수’라는 뜻의 영어 ‘프로페서(professor)’는 라틴어 pro(앞으로)와 fateri(공표하다)에서 왔다. ‘다중 앞에서 공적인 주제로 말하는 사람’이란 뜻이다. 대학의 시초로 꼽히는 11세기 볼로냐 대학에서 처음 개설한 것은 신학이었다. 교수는 신의 진리를 많은 이에게 전하는 신성한 직업이었던 것이다. 중세 이후 교수는 출신에 관계없이 귀족 대우를 받았다. 오늘날 독일 등 중부 유럽에서 교수들이 누리는 사회적 존경에는 깊은 뿌리가 있다. 우리는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직업에 ‘사’를 붙인다. 공적인 일을 하는 판·검사에겐 ‘일 사(事)’를 쓴다. 변호사·변리사·조종사는 전문 지식을 존중하는 의미로 ‘선비 사(士)’를 쓴다. 그런 전문가 중에 특히 사회에 희생하고 봉사하는 직종엔 ‘남을 가르친다’라는 뜻의 ‘스승 사(師)’를 붙인다. 아픈 이들을 돌보는 도덕적 사명을 수행하는 의사에게 ‘師’를 쓰는 이유다. 대한의사협회에서 정한 의사윤리지침 3조에는 의사의 본분이 이렇게 적혀 있다. "의사는 고귀한 사람의 생명과 건강을 보전하고 증진하는 숭고한 사명의 수행을 삶의 본분으로 삼아…." 의사윤리지침이 정한 소명에 충실한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는 의사라면 결국에는 죄책감의 칼날에 양심이 베일 것만 같다. 그 소명에 다가갈수록 환자를 두고 떠난 옛 기억이 그를 괴롭힐 것이다. 그 기억은 '나는 환자의 고귀한 생명을 보전하는 의사'라는 정체성과는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목사(牧師)는 개신교의 성직자이다. 개신교의 예배(禮拜)와 예전(禮典)을 집행하며 신도의 교육과 지도, 비 신도에게 복음을 전해야 할 임무를 갖는다. 역사는 타이밍, 사람, 상황 그리고 우연의 복잡한 얽힘이라고 할 수 있다. 아픈 이들을 돌보는 도덕적 사명을 수행하는 의사가 의대생 숫자 늘린다고 환자가 있는 병원을 떠나 파업을 하는 시대가 됐다. 이런 상황에 우리 목사와 장로는 어떤 삶을 살고 총회를 어떻게 섬겨야 할까. 성경은 말씀한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빌 3:7-14 2024-03-25
    • G.OPIN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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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5
  • 의사와 총선
    영화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As Good As It Gets)는 1997년에 만들어진 미국 영화다. 모두가 싫어하는 괴팍한 작가 멜빈(잭 니콜슨)과 병든 아들에 대한 의무로 자기 삶을 포기해온 식당 종업원 캐럴(헬렌 헌트)의 사랑을 다룬 제임스 브룩스 감독의 로맨틱 코미디 영화이다. 1998년 70번째 아카데미상 수상식에서 7개 부문 수상 후보로 올라 남우주연상(잭 니콜슨)과 여우주연상(헬렌 헌트)을 수상하였다. 다른 한편 이 영화는 미국 의료 시스템에 대한 영화이기도 하다. 영화의 줄거리는 이렇다. 멜빈 유달(Melvin Udall: 잭 니콜슨 분)은 강박증 증세가 있는 로맨스 소설 작가이다. 뒤틀리고 냉소적인 성격인 멜빈은 다른 사람들의 삶을 경멸하며 신랄하고 비열한 독설로 그들을 비꼰다. 그의 강박증 역시 유별나다. 길을 걸을 땐 보도블록의 틈을 밟지 않고, 사람들과 부딪히지 않으려고 뒤뚱뒤뚱 거린다. 식당에 가면 언제나 똑같은 테이블에 앉고, 가지고 온 플라스틱 나이프와 포크로 식사를 한다. 그러나 식당의 웨이트리스로 일하는 캐럴 코널리(Carol Connelly: 헬렌 헌트 분)만은 예외이다. 언제나 인내심 있는 태도로 멜빈을 대하는 그녀는 그의 신경질적인 행동을 참고 식사 시중을 들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그러나 그녀에게도 어려움은 있다. 그녀는 천식으로 괴로워하는 어린 아들이 있지만, 변변한 치료도 못할 정도의 빠듯한 살림을 아이 아빠 없이 혼자 꾸려나가야 한다. 멜빈이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사람들 중의 하나는 이웃에 사는 동성애자 화가인 사이먼(Simon Bishop: 그레그 키니어 분)이다. 그는 멜빈이 자신의 생활 방식을 싫어하며 또한 그의 작고 귀여운 개 버델도 미워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지만 모든 것은 변한다. 사이먼이 강도들로부터 구타를 당하자 멜빈이 사이먼의 애견 버델을 돌봐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처음에 멜빈은 버델을 싫어하지만, 이 작은 강아지로 인해 멜빈의 얼음 같은 심장은 서서히 녹기 시작한다. 동물과 소통하며 공감 능력을 조금씩 배워나가던 그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온다. 캐럴이 일을 그만뒀다는 것이다. 캐럴의 집까지 찾아간 멜빈은 갑작스러운 호흡 곤란에 오래 시달려온 아들을 돌봐야 하는 캐럴의 딱한 사정을 알게 된다. 캐럴의 아들이 앓던 병은 심각한 게 아니었다. 캐럴이 가입한 의료보험으로는 정상적인 검사를 받을 수 없어 응급실에서 증상만 치료했을 뿐이다. 멜빈 덕분에 캐럴의 아들은 제대로 치료받고 완치됐다. 나쁜 의료 시스템이 한 여성과 아이의 삶을 억누르고 있었던 것이다. 매너리즘에 빠진 사이먼의 작품은 더 이상 팔리지 않는다. 그런데 갑자기 큰 수술을 받게 생겼다. 막대한 의료비를 지불할 능력이 없어서 파산할 지경에 놓인 그는 자신을 쫓아낸 부모를 찾아가 손을 벌릴 수밖에 없다. 멜빈은 출판사 사장을 통해 캐롤의 아들을 치료해주고 캐롤과 함께 차로 사이먼을 고향까지 데려다주기에 이른다. 사이먼은 매우 힘든 상황에 있으면서도 건강한 자아를 가진 캐롤과의 만남, 그리고 그녀와의 자유로운 대화들로 조금씩 치유가 되면서 다시 그림에 대한 열정을 보이고 삶의 의욕을 되찾는다. 강박증이 있고 타인을 배려할 줄 모르던 멜빈은 집이 없어진 사이먼을 자기 집에 머물게 하고, 강아지에게 애정을 줄 줄도 알게 되었고 나아가 캐롤에게는 사랑을 느낀다. 캐롤이 자기의 급성 천식을 앓는 아들 스펜서를 돌보기 위해 브루클린에 있는 자기 집에서 가까운 곳에서 일하기로 했을 때 멜빈의 삶은 변화를 맞는다. 다른 종업원들에 적응할 수 없었던 멜빈은 캐롤이 다시 이곳에서 일하기로 동의하면 아들의 상당한 병원비를 자신이 도와주겠다 한다. 캐롤은 멜빈의 너그러움에 마음이 기울긴 하지만 그래도 그를 의심한다. 사이먼은 폭행 사건을 겪고 재활하는 중 베르델이 멜빈을 더 좋아하고 자신의 뮤즈를 잃어 우울증에 빠진다. 그는 의료보험이 없어서 의료비 청구서 때문에 파산에 이르게 된다. 프랭크는 떨어져 사는 부모님께 볼티모어에 가서 돈을 빌려보라고 한다. 프랭크는 사이먼을 볼티모어까지 데려가기는 바빠서 멜빈이 데리고 가기로 한다. 프랭크는 멜빈에게 900 컨버터블을 타고 다녀오라 빌려준다. 멜빈은 어색함을 덜기 위해서 캐롤에게 같이 가자 초대한다. 캐롤은 마지못해 그 초대를 받아들이고 셋의 관계가 발전한다. 세 사람이 동행한 여행길에서 캐롤은 사이먼에게 예술적 영감을 불러일으키고, 멜빈은 여행에서 돌아온 후 캐롤에게 서툰 몸짓으로 사랑을 고백한다. "당신은 내가 더 나은 남자가 되고 싶도록 하네요." 이런 그의 대사는 이런 변화를 잘 보여주는 명대사였다. 영화 마지막에 가서야 멜빈은 비로소 자신을 꽁꽁 싸매고 있던 껍데기를 벗어던지고 진심을 표현하는 사람으로 변모한다. 캐롤은 캐롤대로 가슴에 뻥 뚫려있던 구멍이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을 다시 만남으로서 채워지는 행복감을 맛볼 일만 남았다.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는 사회 고발물이 아니다. 하지만 모든 캐릭터가 미국 의료 체계의 어두운 면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비싼 보험에 가입하지 않으면 인간의 생명에 필수적인 진단과 치료마저 받을 수 없고, 난데없는 사고를 당하면 목숨을 건져도 ‘의료 파산’이 기다리고 있다. ‘이보다 더 나쁠 순 없는’ 의료 시스템의 문제를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의대 정원 확대를 둘러싼 갈등을 보며 나는 문득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를 떠올렸다. 물론 한국은 미국과 다르다. 하지만 관객들은 공감할 수 있다. 내 아이가 아픈데 원인을 모르거나 치료받지 못해 발을 구르거나 사고나 범죄의 피해자가 되어 병원 신세를 지게 되는 건 누구에게나 악몽과도 같은 일이기 때문이다. 국민들은 나나 내 아이가 사이먼이나 캐럴, 그 아들 같은 처지가 될까 불안하다. 의대 정원 확대에 국민의 80% 이상이 찬성하는 건 그래서다. 올해 치러지는 2025학년도 입시부터 전국 의과대학 입학 정원이 2000명 늘어난다. 전국 의대 40곳 입학 정원은 3058명에서 5058명으로 65% 증가한다. 교육부는 20일 의과대학 입학 정원을 2000명 늘리고, 경기·인천 지역 대학에 361명(18%)을, 비수도권 대학엔 1639명(82%)을 신규 배정한다고 밝혔다. 서울 지역 의대엔 신규 정원을 배정하지 않았다. 의대 정원 확대가 필수 의료 회복으로 이어지지 않을 수 있다는 설명도 일리가 있어 보인다. 그렇다면 어떻게 현 체제의 한계를 극복할 것인가? 여기서부터 문제가 난삽해진다. 수련의, 전공의, 개업의, 의대, 대학병원 등이 각기 다른 셈법을 굴리고 있는 가운데, 납득할 만한 대안 로드맵 제시는커녕, 그저 ‘일단 정책 철회하라’는 목소리만 울려 퍼지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몇몇 의사들은 미국에서 푸드트럭을 하겠다는 둥, 용접을 배워 이민을 가겠다는 둥, 보는 사람이 더 부끄러운 자기 연민을 공적으로 늘어놓는다. 사람의 목숨을 다루는 것은 숭고하고 힘든 일이다. 그러므로 의사는 용접공을 신세 한탄의 소재로 삼아서는 안 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아픈 용접공의 병상을 지켜야 한다. 고소득 전문직인 의사가 타 직업을 그런 식으로 언급하는 것 자체가 평범한 국민에 대한 조롱으로 들릴 수밖에 없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공부 잘하는 학생으로 이루어진 사람들이 왜 이 간단한 이치를 생각하지 못할까.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를 마저 짚어보자. 멜빈의 처지는 여러모로 다르다. 부자고, 독신이며, 심지어 한 다리 건너 의사 친구가 있다. 하지만 잘못된 미국 의료 시스템의 피해자가 아닌 건 아니었다. 멜빈에게 의사는 무신경하게 약만 처방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캐럴을 만나지 못했다면 약물 중독자가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다행히 영화는 해피 엔딩으로 끝난다. 잘못된 의료 시스템이 빚어내는 비극 속에서 몹시 삐뚤어진 못된 남자가 공감 능력을 익히며 조금은 괜찮은 사람이 되어간다. 그래서 그는 캐럴에게 말한다. “당신은 내가 더 좋은 남자가 되고 싶게 만들어요.” 믿음으로 사는 우리의 기도가 주님의 은혜로 합력하여 환자를 볼모로 삼은 의사 파업과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인질로 삼은 4월 10일 총선이 좋은 결과를 이루기를 바란다. 성경은 말씀한다.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찌니라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 8:25-28 2024-0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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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0
  • 성경에 잡힌 우주
    “우리 망원경에 잡힌 우주는 누군가에 의해 정교하게 설계된 것처럼 보입니다. 우주는 왜 지금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을까요? 그리고 우리는 왜 존재하게 되었을까요?” 이 질문은 물리학자 스티븐 호킹(1942∼2018)이 1998년 ‘내 연구실에 들어올 의향이 있는지’ 알아보려고 '시간의 기원’의 저자 토마스 헤르토흐를 만나 던진 것이다. 그는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라고 회고했다. 이후 그는 20년 동안 호킹과 함께 연구했다. 호킹은 사망 직전 다중우주 관련 논문도 저자와 함께 썼다. 벨기에 루뱅가톨릭대 이론물리학과 교수인 저자가 호킹과의 공동 연구를 소개하는 '시간의 기원’은 교양과학서이다. 문제는 이렇다. 우주배경복사(우주에 퍼져 있는 우주 탄생 초기의 빛)는 주변 영역과 온도 차가 10만분의 1도밖에 안 된다. 온도 차가 1만분의 1도였다면 우주는 블랙홀 세상이 됐을 것이고, 100만분의 1도였다면 아무것도 없는 텅 빈 공간만 있을 것이다. 우연의 일치라기엔 너무나 ‘생명 친화적인 우주’다. 우주의 인플레이션(팽창) 속도, 공간이 3차원이라는 것, 중성자와 양성자의 질량 비율, 강한 핵력과 전자기력의 강도 비율, 암흑 에너지의 밀도… 이처럼 우주의 각종 변수가 생명체에 유리한 쪽으로 맞춰진 이유를 설명하려는 것을 ‘미세 조정(fine-tuning) 문제’라고 한다. 한 가지 설명은 이런 것이다. 방대한 공간에 수많은 우주가 존재하는데, 우주마다 물리법칙이 다르다. 우리의 우주가 생명 친화적인 이유는 우리가 그런 우주에서 생겨났기 때문이다. 생명 친화적이지 않은 다른 수많은 우주에는 우주를 고민할 생명체가 없다. 지적 생명체의 존재가 우주를 설명한다는 이른바 ‘인류 원리(anthropic principle)’다. 1973년 처음 제기됐다. 단순하지만 강력한 이 주장은 검증과 예측이 불가능하다. 과학의 영역인지 애매하다는 말이다. 신학의 성역이기 때문이다. 취재를 하기 위해 렌즈를 깨끗이 닦아 가방에 넣고 전철을 탔는데 맞은편 자리에 앉아 있는 노부부의 풍경이 예사롭지가 않다. 키가 아주 큰 남편이 고개를 깊이 숙이고 키가 아주 작은 아내의 말을 열심히 귀 기울여 들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초등학교 일 학년 학생 같다. 그렇다, 부부란 키를 맞추는 것이다. 키를 맞추듯 생각도 맞추고 꿈도 맞추고 목적지도 맞추는 것이다. 그렇게 살다가 내릴 역에 다다르면 눈빛으로 신호를 보내 말없이 함께 내리는 것이다. 기업들은 자신들의 제품, 브랜드로 고객에게 어떤 경험을 선사할 것인지 고민한다. 우리 목사들도 이 고민을 해야 하지 않을까. 나는 목회를 충분히 경험하고 있나. 월급 외에 사역 속에 들어 있는 주님이 명하신 소중한 목회를 충분히 다 체험하고 있나. 곧 이승만 대통령이 1948년 8월 15일 믿음으로 건국한 대한민국 민주주의 분수령이 될 22대 국회의원 선거다. 선거가 끝나면 300명의 의원이 새로 뽑힐 것이다. 세상은 그들을 리더, 지도자라 부르지만 지난 세월 국회의원들의 행태를 보면 그들이 과연 리더인지 개탄스럽다. 생산적인 가치는커녕 걱정과 분노를 더 많이 유발하지 않았나. 그들은 왜 국회의원이 되려는지, 국회의원이 되어 어떻게 쓰이고 싶고 어떤 가치를 생산하고 싶은지 한 번이라도 자문해 본 적이 있을까. 우리나라 정치가 여전히 삼류, 사류인 이유 하나는 그들이 이런 본질과 마주하는 대신 오로지 허영의 시장에 정신이 팔려서가 아닐까. 각 당의 후보들은 지금이라도 ‘어떻게 세비 값을 할 것인지’ 고민해야 할 것이다. 휴대폰 렌즈에 잡힌 총회의 목사와 장로도 유권자이기에 2024년 4월 10일 믿음의 눈 밝게 뜨고 조금이나마 그 일에 진심인 사람을 골라 투표해야겠다. 과학자가 주장하는 우주배경복사(우주에 퍼져 있는 우주 탄생 초기의 빛)에 대해 성경은 말씀한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그 빛이 하나님의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두움을 나누사 빛을 낮이라 칭하시고 어두움을 밤이라 칭하시니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창 1:1-5 2024-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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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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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성규 총장의 소명
    우리는 최첨단 망원경과 내비게이션을 가지고도 갈 길을 잃어버리게 된 김영우 같은 이재명의 시대에 살고 있다. 내가 나를 너무 사랑해서 나를 가장 미워하게 되었다는 어처구니없는 경우 말이다. 총신대 신임 박성규 총장은 총신대 운영을 밝히는 총회 앞에서 총신대가 세미나리(seminary) 즉 씨를 뿌려 모를 키우기 위하여 만들어 놓은 묘판(苗板)이라고 했다. 그것을 우리말로 모판 또는 못자리라고 하는데 그 말의 탄생 과정은 이렇다. 먼저 벼를 뜻하는 방언인 나락을 털어서 가장 알찬 것들만 골라 무슨 일이 있어도 이듬해 봄까지 건드리지 않도록 깊숙이 감추어 두는 것이 ‘씻나락’이다. 곡식의 알이 낟인데, 낟알은 껍질을 벗기지 않은 곡식의 알갱이를 말한다. 봄이 오고 사월이 되면 무논에 모판을 마련하는 한편으로 씻나락을 꺼내서 물 채운 항아리에 담근다. 물에 담가 싹이 잘 나도록 돕는 것인데, 물에 들어가는 그때부터 씻나락은 ‘볍씨’로 이름이 바뀐다. 날씨에 따라 다르지만, 하루 이틀 지나면 볍씨는 씨눈 쪽에 껍질을 뚫고 움이 트고 싹이 나서 모판에 내다 뿌려야 한다. 모판에 떨어진 볍씨는 곧장 위로 싹을 밀어 올리고 아래로 뿌리를 내리며 자리를 잡는데 이때부터 볍씨는 다시 이름을 ‘모’로 바꾸어 부른다. 모가 모판에서 한 뼘 남짓 자라면 철에 맞추어 모내기를 한다. 모내기는 아침 일찍 모판에서 모를 쪄서 잘 다듬어 둔 무논에다 옮겨 서너 낱씩 포기를 잡아 못줄에 맞추어 심는다. 이렇게 모심기를 끝내면 그때부터 모는 다시 이름을 ‘벼’로 바꾸어 부른다. 벼는 농사꾼의 갖은 정성을 다 받으며 자라나 마침내 새끼를 배고 몸 안에 밴 새끼가 자라면 위로 솟아올라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데 그 열매가 바로 ‘나락’이다. 그러나 열매만을 따로 떼어서 나락이라고 하지만, 우선 나락을 밴 그날부터 벼를 모두 싸잡아 나락이라 부른다. 그래서 ‘벼농사’라는 말이 곧장 ‘나락농사’라는 말로 이어지고 그것을 옴니암니 가리지는 않고 넘나들며 쓰는 것이다. 우리는 작은 낟알이었다. 총신이라는 모판에서 뿌리를 내리고 말씀을 먹고 세상으로 나와 성령을 받으며 잎을 키웠다. 우리는 그냥 살았을 뿐인데 어느덧 나이든 목사가 되었다. 그냥 믿고 언덕 넘어 전등도 없어 호야불로 밝힌 총신을 다녔을 뿐인데. 박성규 총장의 근황을 보면 총신대를 위한 그 한 번의 성취를 위해 은 자신을 ‘다마스쿠스 검(Damascus blade 劍)’처럼 날카롭게 벼린 모습이다. 다마스쿠스 검은 동시대는 물론 역사상의 어떤 유럽의 강철검보다 뛰어난 검이었다. 비단 손수건을 칼 위에 떨어뜨리면 저절로 베어질 만큼 예리할 뿐만 아니라 탄력성이 커서 바위를 내리쳐도 구부러지거나 부러지지 않았다고 한다. 괴테의 1만 2111행의 시(詩)로짜여 진 장편 희곡 '파우스트'를 한 줄로 요약한다면, ‘인간은 지향이 있는 한 방황한다(Es irrt der Mensch, solang er strebt)’이다. 인간이 길을 잃고 방황한다는 것은 갈 곳, 목표, 지향점이 있다는 말이다. 반대로 방황을 멈추고 자족과 정체(停滯), 그리고 안주(安住)가 일상화된 삶이라면 목숨이 붙어 있어도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독일어로 직업은 ‘Beruf’인데 여기서 파생된 ‘Berufung’은 소명(召命)의식을 뜻한다. 그래서 그런지 독일인은 직업 수행을 자신이 태어날 때 부여받은 ‘소명의 실천’으로 여기는 인식이 견고하다고 한다. 김영우가 총신을 쥐락펴락하던 시절 재단이사장에 자질과 열정을 갖춘 경상도 김승동 목사 대신 모두가 눈을 휘둥그레한 강원도 목회자를 인선한 적이 있다. 지금의 총신 이사회는 자타가 인정할 수 있는 이사들과 이사장으로 진용을 갖추고 있다. 세상이 아프다. 전쟁이 터지고 난민은 떠돈다. 가뭄이 들고 홍수가 난다. 사람이 사람을 미워하고 사람이 사람을 죽이고 사람이 자기 자신을 죽인다. 그에게 딱히 무슨 죄가 있었을까. 죄 많은 이들이 오히려 죄를 외면하는 세상에서 이이복은 스스로를 낮추고 비워내고자 했을 것이다. 이것이 신앙의 뜻이고 신앙의 힘이며 신자의 역할이리라. 그 뜻이 겸허하고 겸허하여 우리는 예수님 오신 날의 의미를 이이복 안에서 발견할 수 있겠다. 이 세상이 돈과 물질로 가득 찬 것이 아니라 의미와 눈빛과 믿음으로 가득 차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땅도 자원도 빈약한 한국은 교육과 똑똑한 인재들 덕분에 이만큼 발전했다. 우리 교단도 마찬가지이다. 그런데 그 교육이 대학부터 무너지고 있다. 최근 만난 한 대학 관계자는 현실을 털어놨다. “학부는 스카이(SKY·서울대 고려대 연세대) 이공계조차 무너졌다. 입학하자마자 반수 시작해서 제주대 약대라도 가려 한다. 메디컬(의약학 계열) 빼고는 초토화됐다. 대학원은 정원도 못 채우고 고도의 학문 연구 기능은 없어진 지 오래다. 국내외 인재를 모셔 오고 싶어도 희망 연봉을 지급할 여력이 없다.” 미국대학경영협회 2021년 자료에 따르면 하버드대 기금은 494억 달러(약 63조9927억 원), 스탠퍼드대가 353억 달러(약 45조7029억 원)다. 한국 최상위권 사립대 작년 수입이 6000억∼9000억 원 수준(이월금 포함)이다. 적립금은 5000억∼7500억 원 수준이다. 영유아 영어학원(일명 ‘영어유치원’) 학비가 연 2000만 원을 넘는데 사립대 연평균 등록금이 그 절반도 안 되는 757만3700원이다. 등록금 싸다고 좋아할 상황이 아니다. 미국이 등록금 비싸기로 유명하지만, 미국 연방교육부가 등록금 상한을 정하진 않는다. 대신 장학금 확대, 학비 대출 지원에 주력하고 소비자(학생)가 좋은 대학을 선택할 수 있도록 정보를 제공한다. 덕분에 미국 대학은 자가발전이 가능하다. 최강 기술 강대국의 원천이다. 우리 교육부는 어떤가. ‘표(票) 떨어질 일’이라며 10년 넘게 대학 재정을 묶어놓고, 얼마 안 되는 재정사업으로 대학을 쥐고 있다. 그 결과 모든 한국 대학이 자생력을 잃고 교육부가 꽂아놓은 ‘지원금 링거’로 연명 중이다. 한국 고등교육이 재기하기 위해서는 이제라도 교육부 권한을 유치원 및 초중고교와 국공립대 범위로 축소해야 한다. 사립대에 대해서는 감사, 감독 권한 정도만 남겨야 한다. 등록금이 가계 부담이라면 조(兆) 단위 대학사업을 장학금으로 돌려 직접 학생을 지원하는 편이 낫다. 교육부가 권한을 놔야 ‘돈값’ 못 하는 대학은 자연스레 퇴출되고 경쟁에서 살아남는 대학은 나라를 먹여 살릴 것이다. 가장 시급한 교육 개혁은 ‘교육부 개혁’이다. 하수상한 시절 총신대는 독일인의 ‘Berufung’ 소명(召命)의식이 충실한 박성규 총장 체제로 내실을 다지며 전진하고 있다. 게다가 이사장 화종부 이사, 송태근 목사 등의 아낌없는 지지와 후원까지 더해지고 있다. 가자 믿음이여 살 맞대고 가자 하기로 작정하면 어딘들 못 가랴 가기로 목숨 걸면 지는 해가 문제랴 캄캄한 밤이라도 하늘 아래선 마주 안을 소망 하나 내리고 있거니 성경은 말씀한다. 귀신이 저를 죽이려고 불과 물에 자주 던졌나이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 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곧 그 아이의 아비가 소리를 질러 가로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하더라 막 9:22-24 2023-12-31
    • G.OPIN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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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2-31
  • 총회 지도자들의 새해를 위해
    베이징 대학에서 사서로 일하면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받아들였고 1927년 추수 봉기를 이끌고 중국공산당의 창립 멤버가 된 마오쩌둥(毛澤東, 1893년 12월 26일~1976년 9월 9일)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종교적 교의(교조)로 여기는 사람들은 맹목적인 무지를 드러내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에게 공개적으로 당신들의 교의는 분(糞)만도 못하다고 말해야 한다.” 표현의 비속함은 차치하고서라도, 여기서 마오는 분명 맞는 말을 했다. 그러나 1949년 10월 1일 마오쩌둥은 중국 공산당이 통제하는 마르크스-레닌주의 일당 국가인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을 선언했던 그 자신조차도 이 금언의 중량감에 끝내 짓눌리고 말았던 것일까. 1966년 참혹한 문혁기(文革期), 손에 ‘마오쩌둥 어록’을 들고 천안문 앞에서 마오 찬가 ‘동방홍’을 부르던 무수한 홍위병들 앞에서 모자를 벗어 천천히 흔들며 답례하던 마오가 이미 새로운 교조 그 자체가 되었음을 부인할 수 있었을까. 어째서 이런 일이. 여기서 우리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유태인이자 독일계 미국인으로 사회심리학자이면서 정신분석학자 에리히 프롬(Erich Seligmann Fromm, 1900년 3월 23일 ~ 1980년 3월 18일)이 ‘자유로부터의 도피’에서 분석했던 마르틴 루터의 심리적 특성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권위를 혐오하고 그것을 뒤집고자 하는 사람은 그 사람의 성격 자체가 원래 권위적이었을 수가 있으며, 권위를 뒤집고 나서는 자신이 다시 권위주의의 화신으로서 군림하게 되기 쉽다." 교조에 대한 저항이 시간이 지나면 새로운 교조로 나타나게 된다는 말이다. 민족주의든, 공산주의든, 한국적 민주주의든, 주체적 사회주의든, 민족적 자본주의든,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든, 개혁주의든 한번 머리에 박힌 ‘당연한 생각’은 그 디테일한 부분까지도 좀처럼 쉽게 바뀌지 않았다. 그러나 불과 10~20년 전의 ‘상식’과 지금을 비교해 보면 어떨까. 로마 제국 시대의 정치인, 사상가, 문학자이며 로마 제국의 황제인 네로의 스승으로도 유명한 세네카(Lucius Annaeus Seneca, 기원전 4년~65년 4월)는 이런 말을 했다. “습관에 구속돼선 안 된다. 가끔 습관은 진리를 짓밟기도 한다. 습관보다는 진리가 우리의 행동을 인도해야만 한다.” ‘세상 참 좋아졌다’고 빈정대는 사람에게는 “세상은 정말 좋아졌다. 당신만 여태 그걸 모르고 있었다”는 대답이 적절해졌고, ‘법은 멀고 주먹과 돈은 가깝다’는 총회 해결사들에게는 “이젠 주먹보다 CCTV가 더 가깝다”는 대답이 들어맞게 됐으며, 이재명처럼 “여태껏 큰일 날 일을 저지르고 살았는데도 무사했음을 다행으로 생각하라”는 말이 어울리는 시대가 됐다. 도시를 가장 도시답게 하는 건 시시각각 변하는 모습이다. 길을 걷다 언제든 발길을 멈추고 낯선 눈을 들어 하염없이 바라보는 도시여행자처럼, 나도 오늘은 내 방식대로 총회가 자리잡고 있는 이 도시를 즐겨야겠다. 세상엔 노력으로 안 되는 일이 없다고 배웠지만, 꼭 그렇진 않다는 걸 어른이 되고 나서 받아들였다. 일찍 일어나는 새가 먹이를 찾는다고 했지만, 부지런하면 피곤을 피하기 어렵단 것도 알게 되었다. 다른 것이 틀린 게 아니란 걸 받아들이는 데에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나의 스무 살 소원은 마흔 살 되는 거였다. 그냥 가만 있어도 시간은 가고 나이를 먹을 텐데, 그런 허무한 소원이 대체 뭐냐 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도 나의 소원은 아흔 살 되는 거다. ‘나이 먹는 것’에 대한 기대는 현재에 붙들린 나의 불완전함에 대한 반성이고 지금보다 조금 더 성숙하고 완성된 나에 대한 바람이다. 죽을 만큼 힘들고 한 걸음도 나아갈 수 없을 것 같은 좌절을 느껴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그런 고통은 이겨내는 것이 아니라 지나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때로 우리 앞에 새로운 깨달음이 나타나거나 오래전의 깨달음이 새삼스럽게 내 의식 속에 자리잡을 수 있다. 그러나 ‘나’라는 아이덴티티를 가진 개인이 그 부분들을 받아들이고, 그 부분들이 모여 온전한 전신상(全身像)을 만들기 전까지 모든 총체적 평가는 유보돼야 하며, 의심받아야 한다. 보편적 진리란 없다. 다만 인생 행로(行路)에 작고 큰 도움의 손길을 말없이 내밀 수 있는 벗으로서의 지혜가 있을 뿐이다. 그래서 타인에게 나의 길을 물을 수 없는 시간을 고스란히 떠안고, 우리는 매일 미지의 세계를 향해 구원의 길을 떠난다. ‘떠남’은 그 자체로 길을 묻는 과정이며 고뇌와 선택으로 지나온 시간과 설렘과 걱정으로 기다리는 시간을 교차시키기 때문이다. 추억은 찰나만을 보여주지만, 무수히 많은 시간의 교차점을 감지하게 한다. 마치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 이 시간처럼 말이다. 이렇게 춥고 바람이 시린데 봄이 오긴 오는 걸까 하고 의심을 품어 보지만 믿음은 마치 봄의 전령처럼 생명을 이야기한다. 다가오는 봄이, 그 생명의 기운이 지금 보이는 것보다 더 크게 은혜롭길 기도해 보자. 힘겹고 지칠 땐 목표를 향해 억지로 힘겹게 내딛는 대신 잠시 멈춰 서서 자연스럽게 때가 이르기를 기다려도 될 것 같다. 빛이 인도하는 곳으로 향하기만 해도 그 너머에 모세 같은 믿음의 꿈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소망이 총회 지도자 한기승 목사, 장봉생 목사 등의 마음을 다독이길 바란다. 성경은 말씀한다. 너의 행사를 여호와께 맡기라 그리하면 너의 경영하는 것이 이루리라 잠 16:3 2023-12-29
    • G.OPIN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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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2-29
  • 크리스마스와 한동훈
    크리스마스는 라틴어 ‘그리스도(Christus)’와 ‘모임(massa)’의 결합을 뜻하는 영어이다. 프랑스어로는 ‘Noel’, 스페인어로는 ‘Navidad’이라고 한다. 1970년 시각 장애인 뮤지션 호세 펠리치아노가 만들고 발표한 이 노래는 스페인어로 ‘Feliz Navidad’가 되겠다. 기독교 공인 이전의 전통 교회 시대부터 예수의 탄생에 대한 신학자들의 관심과 논쟁이 있어 왔다. 삼위일체론으로 유명한 아우구스티누스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수난 날짜인 3월 25일은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를 찾아와서 예수의 탄생을 알렸다는 수태고지일로 간주하고 그로부터 상징적인 9개월간의 잉태 이후인 12월 25일을 탄생일로 본다는 것이다. 서기 350년 로마교회 대주교 율리우스 1세의 크리스마스 선포는 기독교 공인 이후 크리스마스를 교회의 절기로 확립하는 마침표였다. 다른 입장으로는 성경에서 예수의 정확한 탄생일을 적시하지 않았고 이날이 로마제국의 태양신 숭배 축일과 같다는 사실로 크리스마스를 기념하지 않는 일부의 교파도 존재한다. 이날이 정녕 아기 예수가 탄생한 날이 맞느냐 아니냐의 논쟁은 지금 의미가 없다. 동양의 동지와 며칠 차이 나지 않는 크리스마스가 어둠의 시간이 끝나고 빛의 시간이 시작되는 날이 되기를 기원하는, 동서 대륙을 넘는 모든 인류의 염원이 깃들어 있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는 율리우스력을 기준으로 1월 7일을 크리스마스로 맞는 러시아 정교회의 전통을 버리고 올해부터 12월 25일을 크리스마스로 삼는다고 한다. 이렇게라도 러시아의 흔적을 지우겠다는 우크라이나의 의지일 것이다. 전 세계 기독교인들이 12월 25일을 성탄절로 기념하지만, 신약성서 어디에도 예수가 언제 태어났는가 기록은 없다. 누가복음 2:8-20에 다음과 같이 기록됐다. 그 지역에 목자들이 밤에 밖에서 자기 양 떼를 지키더니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홀연히 수많은 천군이 그 천사들과 함께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천사들이 떠나 하늘로 올라가니 목자가 서로 말하되 이제 베들레헴으로 가서 주께서 우리에게 알리신 바 이 이루어진 일을 보자 하고 빨리 가서 마리아와 요셉과 구유에 누인 아기를 찾아서 보고 천사가 자기들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한 것을 전하니 듣는 자가 다 목자들이 그들에게 말한 것들을 놀랍게 여기되 마리아는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새기어 생각하니라 목자들은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가니라 양을 치는 목자들이 그날 밤에 양을 돌보고 있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목자들이 밤에도 양을 돌봐야 하는 건 3월에서 11월까지다. 2세기 중반만 해도 예수의 탄생은 워낙 신비로운 사건이라 인간의 시간 밖에서 일어난 일이 틀림없다는 관념까지 존재했고 초기 기독교인들은 죽은 날만 기념할 뿐 생일을 축하하는 건 이교도 풍습이라 여기기도 했다. '걸어다니는 어원 사전'의 저자 마크 포사이스는 ‘크리스마스는 왜 하필 12월 25일일까’라는 질문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진다. 저자는 이렇게 풀이한다. 2~3세기 기독교인들은 여러 근거에 의해 예수가 춘분 무렵인 3월 25일 ‘세상에 왔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신의 아들이 ‘세상에 왔다’라는 것을 수태(受胎)로 해석해야 할지 탄생으로 해석해야 할지 갑론을박이 일었는데 동정녀 마리아에게 열광했던 사회 분위기가 예수가 수태 당시부터 신의 아들이었다는 이론에 힘을 실어줬다. 그래서 교회력은 3월 25일을 ‘성수태고지절’로 기록했고 예수는 아홉 달 후인 12월 25일에 태어난 것으로 결론 내려졌다는 것이다. 12월 25일이 크리스마스라고 최초로 언급한 기록은 354년에 발간된 ‘연대기(Chronology)’다. 2022년 윤석열의 대선 승리를 전망했던 영국 언론 이코노미스트는 2024년 전망에서 국민의힘이 2024년 4월 10일 치를 총선에서 과반수를 확보할 가능성이 크다고 썼다. 그에 부합하듯 윤석열 대통령의 복심 한동훈 법무장관이 2023년 12월 21일 “서민과 약자의 편에 서고 싶었고 이 나라의 미래를 대비하고 싶었다”라고 이임사에서 밝혔다. 이임식을 마친 한동훈은 누가복음처럼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전했다. “국민의힘을 이기는 정당으로 만들겠습니다. 제가 한 일 중 잘못되거나 부족한 부분은 저의 의지와 책임감이 부족하거나 타협해서가 아니라 저의 능력이 부족해서 일 것입니다. 검사 일을 마치면서도 같은 말을 했는데 이번에도 그렇게 말씀드릴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앞으로 제가 무엇을 하든 그 일을 마칠 때 제가 똑같이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심장은 불규칙하게 뛰고 그래야 정상이다. 고르게 안정적으로 뛰는 심장은 죽은 심장이니 말이다. 우리를 살아 있게 하는 심장이 울퉁불퉁 들쭉날쭉 뛰는 게 정상이듯 우리의 삶 역시 마찬가지이다. 누구에게나 빛나는 거의 모든 젊은 시절을 일반 감옥도 아니고 바다에 떠 있는 요새 같은 감옥에서 보낸 남아프리카공화국의 넬슨 만델라가 한 말이 있다. “삶에서 가장 위대한 영예는 결코 쓰러지지 않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쓰러질 때마다 일어서는 데 있다. 내가 한 성공으로 나를 심판하지 말아 달라. 얼마나 많이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났는가로 심판해 달라.” 민주당은 정말 정신 바싹 차리고 굳게 단합해 혁신해야 할 것이다. 수평선 너머에서 쓰나미가 몰려오고 있다. 파도만 보지 말고 그 너머 바람을 볼 줄 알아야 할 텐데 작가 이재명은 완성도 낮은 소설을 짓느라 못 볼 것이다. 제107회 총회선관위 이모 주모 너희는 복 있는 장로에게 남은 유일한 것을 이용했다. 너희 탐욕을 위해 그의 소망을. 성경은 말씀한다.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저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전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그 부모가 그 아기에 대한 말들을 기이히 여기더라 시므온이 저희에게 축복하고 그 모친 마리아에게 일러 가로되 보라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 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눅 2:25-35 2023-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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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2-27
  • 성경과 기술의 힘
    2024년 4월 10일 총선을 앞둔 대한민국의 국민의힘은 1558년 영국 같고 더불어민주당은 스페인 무적함대 같은 시절에 이런 말이 떠오른다. "그들의 힘은 대단했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의 깃털을 하나씩 뽑았다." 1558년 스페인 무적함대를 무찌른 영국함대 지휘관 하워드(Charles Howard, 1st Earl of Nottingham, 1536 ~1624) 경이 남긴 말이다. 이 해전에서 승리하면서 유럽의 변방에 불과했던 영국은 세계사에서 주도 국가로 올라선다. 만약 스페인이 영국 상륙에 성공했다면 세계사는 완전히 다르게 쓰였을 것이다. 개전 초기 영국은 스페인에 비해 모든 면에서 열세였다. 무적함대는 배 124척에 병력 2만7천 명을 태우고 원정길에 나선 반면, 영국 해군은 배 64척에 병력 8천 명이 전부였다. 부자 나라였던 스페인은 군함도 크고 웅장했으며 엄청난 화력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영국은 어떻게 스페인 무적함대를 무찌를 수 있었을까. 전쟁의 승패를 가른 건 전술이나 용맹이 아닌 기술이었다. 월등한 화력으로 함포를 퍼부어 적의 혼을 빼놓은 다음 갈고리로 배를 연결해 적함에 병력을 투입하는 방식이 스페인의 전술이었다. 그러나 이번엔 통하지 않았다. 영국 배들은 스페인의 사정거리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 아니, 들어갈 필요가 없었다. 영국이 개발한 함포의 사정거리가 더 길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영국 함포에는 바퀴가 달려서 방향을 쉽게 바꿀 수 있었다. 여기서 게임이 끝났다. 아무리 큰 배도, 많은 병력도 기술의 진보 앞에서는 이빨 빠진 맹수였을 뿐이다. 미국 외교위원회 국가안보 분야 선임연구원을 지낸 맥스 부트는 자신의 책 'Made in War'에서 결국 전쟁의 승패는 기술이 갈랐다고 단언한다. 2차 세계대전 초 일본에 치명적인 일격을 당한 미군이 급반전에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도 기술적 차이였다. 미국은 진주만 공습으로 태평양 선단 상당수를 잃은 데다 유럽에서도 전쟁을 해야 하는 사면초가의 상황이었다. 하지만 미국에는 기술이 있었다. 전황을 반전시킨 일등공신은 B29 폭격기였다. 보잉에서 개발한 이 폭격기는 기존 폭격기에 비해 3배 이상 폭탄을 적재할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대단한 건 2600㎞에 달하는 전술 반경이었다. 이것은 곧 미국이 사이판이나 티니언만 확보하면 도쿄를 공습할 수 있다는 걸 의미했다. 결국, B29는 일본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다. 본토에 원폭을 투하한 비행기 역시 B29였다. 부트는 전쟁사를 기술 진보로 설명한다. 찬란한 문명을 보유했던 아시아와 중동 국가들이 유럽에 패권을 내준 결정적인 원인은 화약이나 소총, 대포 제작 같은 기술에서 밀렸기 때문이었고 걸프전이나 이라크전에서 미국이 이길 수 있었던 것도 스마트폭탄, 크루즈 미사일, 위성항법장치, 스텔스 기술 때문이었다는 설명이다. 15세기까지만 해도 유럽인들은 '몽골'이라는 말만 들어도 벌벌 떨었다. 그들의 전술과 용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유럽의 기술 앞에서 몽골의 전술과 용기는 옛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큰 역사로 보면 그렇다. 성경은 분명 과학책이 아니다. 그러나 성경의 하나님이 우주와 생명을 지으신 창조주시라면 성경이 비록 과학책이 아니라고는 하나 과학적으로도 성경은 오류가 있을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과학책이 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진정한 과학은 성경적인 것이다. 사실 자연의 법칙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다루기 위해 정해 놓으신 단순한 질서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오랜 옛날부터 바다를 자주 항해하는 사람들은 바닷물이 가만히 고여있는 것이 아니라 일정하게 흐르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10여 척의 배로 130척이나 되는 왜적의 배를 물리쳐서 유명해진, 명량 대첩 때 사용하였다는 울돌목의 빠른 물살도 일종의 해류였다. 오늘날 이와 같은 바다의 길을 최초로 학문적으로 연구하여 해양학의 아버지라고 불려지는 인물이 바로 매튜 마우리(Matthew maury;1806-1873)이다. 미국 버지니아주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 적부터 바다에 큰 관심을 갖고 일찌감치 선원이 되었다. 그런데 어느 날 항해 도중 뜻하지 않은 큰 부상을 입게 된다. 그 이후 신체적 부상으로 마우리는 선원으로서 배를 탄다는 것이 불가능해졌다. 그렇다고 바다를 향한 집념까지 포기하지는 않았다. 선원으로서 배를 타기가 어려워지자 그가 택한 일은 해양에 대한 연구였다. 1842년, 바다에 대한 사랑을 끝까지 버리지 않았던 마우리는 결국 미국 워싱턴 해양관측소의 소장에 취임하게 되었다. 그리고 훗날 과학적 항로를 개발하고 바다의 길을 연 해양학의 아버지로까지 불리게 되었다. 독실한 기독교인이었던 그가 바다의 길을 발견하게 된 데는 다음과 같은 성경과 관련된 유명한 일화가 전해진다. 1927년, 찰스 루이스라는 사람이 쓴 미 해군 연구소에서 출판한 <해류의 발견자 매튜 마우리>라는 책에 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한번은 마우리가 아파서 침대에 누워 꼼짝 못 하고 있을 때였다. 그의 아들은 병상에 있는 아버지의 부탁으로 밤마다 그에게 성경을 읽어주었다. 하루는 아들이 마우리에게 시편 8편을 읽어주었다. '공중의 새와 바다의 어족과 해로에 다니는 것이니이다' 이 시편 8편 8절의 말씀을 듣는 순간 마우리는 퍼뜩 다음과 같이 중얼거렸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면 틀림없이 해로(paths of the seas 바다의 길)가 있을 것이다. 병상에서 일어나면 바로 그것을 찾아야겠다.' 그 후 마우리는 대서양 바닷물의 온도와 해류, 그리고 바람의 흐름에 대한 광범위한 연구를 시행하였다. 그리고 바람과 해류의 순환 사이에는 상호 관련이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밝혀냈다. 1855년, 그는 항해 일지를 참고하고 바람과 해류에 관해, 보다 자세히 연구한 끝에 북대서양을 가로지르는 항로와 기상도를 작성하였다. 마우리가 작성한 이 항로는 후에 국제 해양 협정의 기초가 되었다. 이것은 최초의 과학적 해도(海圖)와 해상 기상도였던 것이다. 그의 업적으로 인해 해운 선박 회사들은 항해 일수의 단축에 따른 엄청난 비용을 절약하게 되었다. 물론 해상 사고도 크게 줄어들게 되었다. 멕시코만은 미국의 지중해라고도 불리는 미국 남동부의 바다이다. 이곳에는 적도의 북쪽을 흐르던 해류가 쿠바의 남쪽에 위치한 카리브해를 거쳐 흘러들어와서는 플로리다 해협을 지나 대서양으로 나가게 된다. 이 해류는 적도 부근의 따뜻한 바닷물을 몰고와 대서양을 거쳐 멀리 서유럽에까지 이르게 된다. 서부 유럽의 온화한 기후는 바로 이 해류가 만들어내고 있다. 이 해류를 멕시코 만류라고 부르는데 바로 매튜 마우리가 발견한 것이었다. 성경은 말씀한다. 내 아들아 내 말에 주의하며 나의 이르는 것에 네 귀를 기울이라 그것을 네 눈에서 떠나게 말며 네 마음속에 지키라 그것은 얻는 자에게 생명이 되며 그 온 육체의 건강이 됨이니라 무릇 지킬만한 것보다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잠 4:20-23 2023-12-18
    • G.OPIN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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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2-18
  • 이재명과 이종철
    과거엔 우리 곁에 있었으나 지금은 사라져버린 것과 다시 만나면 반갑다. 때론 뭉클하기도 하다. 그런 것 가운데 하나가 ‘기본(基本)’이다. 모든 ‘기본’에는 공통된 요소가 있다. 송태근 목사처럼 ‘단순(simple)하다’라는 것이다. 문재인 같은 지도자는 문제가 풀리기를 기다린다. 윤석열 같은 지도자는 문제를 푸는 사람이다. 숭앙과 추앙의 대상이 김대중·노무현에서 문재인·이재명으로 이동한 이후 민주당이 ‘부도덕병(不道德病)’을 앓는 것은 자연스러운 결말이다. ‘당 대표들의 도덕성이 하나같이 평균 이하’라는 탄식이 당내 소리만이 아니다. 이재명이 ‘밟았던 길’, ’행동하는 방식’, ’토해낸 말’은 김대중-노무현으로 이어졌던 민주당 모습이 아니다. 여러 야당 총재·대표를 겪었지만, 이재명 대표는 총회의 소강석이나 배광식과 달리 듣도 보도 못 한 유형의 정치인이다. 정치하다 보면 특히 군사정권하에선 야당 지도자가 법정에 서는 일이 없지 않았다. 이른바 시국(時局) 사건이었다. 이재명처럼 파렴치(破廉恥)한 죄목(罪目)으로 매주 법정으로 출근하다시피 하는 야당 지도자는 본 적이 없다. 기독신문에 2023년 12월 6일 이런 제하의 기사가 실렸다. 이종철 목사 “주홍동·이이복 장로가 거짓말하고 있다” 나는 이종철의 말 가운데 이이복 장로에 관한 말은 내가 겪고 아는 바로는 전혀 상식에 맞지 않다고 본다. 오히려 그간의 행적과 작금의 행태를 봐서도 이종철의 말이 믿을 수 없다는 생각이 맞을 것이다. 아마 이이복 장로는 이런 심정일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지금 교회의 어두운 기도실에서 잠시 쉬고 있다. 야망에 찬 총회의 그 불빛 어디에도 나는 없다. 믿음도 이상도 모두를 요구하는 것, 모두를 건다는 건 괴로운 거야. 너를 마지막으로 나의 총회 소망은 끝이 났다. 나의 용서는 너를 잊는 것. 너는 나의 인생을 쥐고 있다 놓아 버렸다. 그대를 이제는 내가 보낸다. 나는 장로가 아니라 신자이고 싶다. 총회 높이 올라가 스데반처럼 돌에 맞아 죽는 모래 덮인 아라비아의 그 순교자이고 싶다.' 기독신문은 이종철의 말을 이어서 전했다. “주홍동 장로 코너 몰려 물귀신 작전한다” “합리적으로 이이복 장로도 믿을 수 없다” 주 장로 말만 믿고 심의, 부실 비판 나와 107회기 선관위 심의분과장 이종철이 자신에게 선관위 1000만 원 게이트의 책임이 있다고 밝힌 주홍동 장로의 발언에 1000만 원보다 1000% 강하게 반발하며 사탄보다 낮은 물귀신까지 들먹였다. “주홍동 장로의 주장은 1000% 믿을 수 없다. 주홍동 장로와 이이복 장로가 거짓말하고 있다. 주홍동 장로가 코너에 몰리니까 물귀신 작전을 하고 있다.” 지난 11월 24일 열린 감사부 소환조사에서 주홍동 장로는 “1000만 원은 내 돈이다. 이이복 장로는 무관하다”라면서 “이종철 목사가 (1000만 원을 주도록) 유도했다. 이종철 목사가 판 함정에 빠진 것 같다”라고 증언한 바 있다. 주 장로는 제108회 총회 당일 9월 18일 오전 열린 선관위 마지막 전체회의에서 “1000만 원이 이이복 장로의 돈이 아니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러자 이종철 목사는 선관위원들 앞에서 문제의 각서를 꺼내 읽었다. 당시 본지(기독신문) 기자가 주홍동 장로에게 조사처리위원회가 구성돼 조사받을 수 있다고 하자, 주 장로는 “나뿐만 아니라 이종철 목사에게도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말했다. 2015년 4월 10일, 본인의 트위터에서 이재명은 외쳤다. "썩어 빠진 공직자들이 나랏돈 훔치고 국민을 지배하는 나라. 언젠가 한 번은 꼭 대청소를 해야 합니다." 그렇듯 기독신문 기자에게 이종철은 그 이재명처럼 흥분하며 반박했다고 한다. “말 같은 소리여야 대꾸하지. 클린 선거하자고 한 내가 그 짓을 왜 해. 합리적으로 주홍동 장로가 자기 돈으로 1000만 원을 줬다는 게 말이 되냐. 주 장로가 이이복 장로의 선거운동원이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주홍동 장로를 신뢰하기 힘들다. 주홍동 장로와 주변 사람들의 계좌를 추적하면 1000만 원이 어떻게 들어왔는지 확인할 수 있다.” 현금이 오간 사건에 사법 수사권도 없는 총회 관계자에게 그런 말을 하는 우리의 이종철 작태를 이재명이 알면 뭐랄까. 아마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좀 크게 놀아. 그게 뭐야 '억'도 아니고 '천' 단위로 그런 말을 하고 고생을 해. 다 내려놓고 내 밑으로 와. 그러면 최소 수십억, 수백억이야. 그만 정도는 돼야 내 부하처럼 감옥도 갈만하지. 안 그래 목사님!" 그렇듯 총회에 10년 근무도 하고 15여 년 기자랍시고 총회 드나들고 있지만 이런 후안무치한 사건을 평생 본 적이 없다. 다행히 제106회 총회장 배광식과 달리 제108회 총회장 오정호 목사를 위시해 감사부장 한진희 목사, 조사처리위원회 위원장 전승덕 목사 등의 처리는 시원시원하다. 2016년 6월, 한겨레TV에 매주 금요일 올라온 김어준의 파파이스에서 이재명은 이죽거렸다 "저는 권력 행사는 잔인하게 해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거든요. 좋은 방향으로. 용서나 화해, 화합은 잘못을 뉘우치고 책임지고 반성하는 사람하고 하는 거에요. 강도하고는 화해하는 게 아니야. 불법 범죄를 저지른 부정, 불합리한 집단 인간들하고는 화해하는 게 아니라는 거죠. 그런 면에서 저는 노무현 대통령... 지금 서거하셨는데 너무 안타깝죠. 주어진 권한을 상대가 정말 인간으로 보이고 내가 인간으로서의 최선과 성의를 다하면 그들이 받아들여 줄 거라고 믿은 거예요." 성경은 말씀한다.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마 23:13 2023-12-13
    • G.OPIN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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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2-13
  • 라쇼몽 주역 이종철과 주홍종
    일본 작가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단편소설 '덤불 속'과 '라쇼몽'('나생문'의 일본식 발음)을 원작으로 한 일본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영화 ‘라쇼몽’으로 잘 알려진 작품이다 이 작품은 산적이 사무라이를 죽인 후 그의 부인을 폭행한 사건을 두고 산적과 부인, 사무라이의 혼백, 목격자인 나무꾼이 각각 자신의 입장에 맞춰 다른 진술을 하는 것을 내용으로 한다. 4명의 서로 엇갈린 진술을 통해 보는 관점과 당사자의 욕망에 따라 진실은 얼마든지 왜곡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한 무사가 칼에 찔려 숨지고 그의 아내가 산적에게 폭행당한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는 재판정. 너무나 명백한 사건이기에 진실은 숨을 데가 없어 보인다. 문제는 등장인물 모두가 제107회 선관위와 달리 자신이 범인이라고 주장한다는 데 있다. 재판정에서는 거짓말이 꼬리를 물고 진실은 꼬여만 간다. 어쩌면 산적과 무사, 부인, 목격자 등의 진술은 우발적 사건처럼 보이지만 거기엔 미로 같은 함정이 숨겨져 있다. 전란이 난무하는 헤이안 시대, 억수 같은 폭우가 쏟아지는 '라생문'의 처마 밑에서 나무꾼과 스님이 '모르겠어. 아무래도 모르겠어' 라며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 있다. 잠시 비를 피하러 그곳에 들른 한 남자(어느 하인)가 그 소리를 듣고 궁금해한다. 이들은 이 남자를 상대로 최근에 그 마을에 있었던 기묘한 사건을 들려준다. 사건이 벌어진 배경은 녹음이 우거진 숲속. 사무라이 타케히로가 말을 타고 자신의 아내 마사코와 함께 오전의 숲속 길을 지나가고 있었다. 그늘 속에서 낮잠을 자던 산적 타죠마루는 슬쩍 마사코의 예쁜 얼굴을 보고는 그녀를 차지할 속셈으로 그들 앞에 나타난다. 속임수를 써서 타케히로를 포박하고 타죠마루는 마사코를 겁탈한다. 오후에 그 숲속에 들어선 나무꾼은 이이복 장로처럼 사무라이 타케히로의 가슴에 칼이 꽂혀있는 것을 발견하고 관청에 신고한다. 곧 타죠마루는 체포되고 행방이 묘연했던 마사코도 불려와 관청에서 심문이 벌어진다. 문제는 겉보기에는 명백한 듯한 이 사건이 당사자들의 진술을 통해 다양한 진실을 들려준다는 점이다. 즉 무엇이 진실인지 알 수 없는 상황에 이른다. 먼저 산적 타죠마루는 자신이 속임수를 썼고 마사코를 겁탈한 것은 사실이지만, 사무라이와는 정당한 결투 끝에 죽인 것이라고 떠벌린다. 하지만 마사코의 진술은 그의 것과 다르다. 자신이 겁탈당한 후, 남편을 보니 싸늘하기 그지없는 눈초리였다고 한다. 자신의 잘못이 아님에도 자신을 경멸하는 눈초리에 제정신이 나간 그녀는 혼란 속에서 남편을 죽였다고 진술한다. 하지만 무당의 힘을 빌어 강신한 죽은 사무라이 타케히로는 또 다른 진술을 털어놓는다. 자신의 아내가 자신을 배신했지만, 오히려 산적 타죠마루가 자신을 옹호해줬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스스로 자결했다는 것이다. 헤이안 시대, 폭우가 쏟아지는 어느 날, 폐허가 된 라쇼몽 밑에 승려와 나무꾼이 멍하니 앉아있다. 그러던 중, 한 사내가 비를 피해 라쇼몽 밑으로 들어오고 나무꾼과 승려는 어떤 살인 사건과 그 사건의 재판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나무꾼의 증언 그는 나무를 하러 가다가 산에서 사무라이의 시체를 발견했다. 칼은 보이지 않았으며 여자의 모자, 사무라이의 모자, 잘린 밧줄이 있었고 수풀 안에 밧줄을 두른 부적 상자가 있었다. 산적 타죠마루를 잡은 사람의 증언 그는 이틀 전 강가에 쓰러져 있는 타죠마루를 발견했다. 거기에 있던 활, 화살, 타죠마루가 훔친 말 등은 모두가 죽은 사무라이의 소유물이었다. 그는 타죠마루가 말에서 떨어졌다고 증언했다. 산적 타죠마루의 증언 타죠마루는 말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 목이 말라 샘물을 마셨는데 독이 들었는지 갑작스런 복통 때문에 쓰려져 있었다고 말한다. 그는 악명 높은 산적으로 사무라이의 아내를 보고는 그녀를 빼앗으려 한다. 그 시점까지는 사무라이를 죽일 생각은 없었다고 한다. 타죠마루는 보물을 숨겨뒀다고 속여 사무라이를 데려온 뒤 암습해 포박한다. 그리고는 사무라이의 아내를 속여 데려오는데 이 와중에 그녀의 모자가 나무에 걸린다. 타죠마루는 사무라이가 보는 앞에서 그의 아내를 범한다. 그러자 그녀는 사무라이와 타죠마루 둘 중 하나는 죽어야 한다면서 싸워 이긴 쪽을 따르겠다고 싸움을 부추긴다. 결국 타죠마루는 사무라이와 정정당당하게 싸워서 사투 끝에 이기고 사무라이를 죽이게 된다. 그러나 여자는 그 사이에 사라졌고 여자가 쓰던 단도 역시 어찌 되었는지 모른다고 증언했다. 부인의 증언 산적에게 겁간을 당한 이후 산적은 달아난다. 그러나 사무라이는 아내를 싸늘한 표정으로 계속 노려보았고 아내는 차라리 죽여달라며 자신의 단도를 남편에게 내밀었지만, 남편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계속 노려보기만 했다. 아내는 결국 이성을 잃고 실신한다. 정신이 들었을 때 단도가 남편의 가슴에 꽂혀 있었다. 이후 숲을 빠져나와 산기슭의 연못에 몸을 던지려 했으나 차마 목숨을 끊지는 못했다. 죽은 사무라이의 증언 - 무당에게 빙의되어 증언한다. 아내를 겁탈한 산적은 아내를 꼬셔 같이 도망치려 하고 아내는 산적에게 남편을 죽이라고 다그친다. 그러나 산적은 그런 아내를 괘씸하게 여겨 그를 밀치곤 사무라이에게 아내를 죽일지 살릴지 택하게 한다. 하지만 사무라이는 대답하지 않았고, 아내는 도망친다. 그리고 잠시 후에 돌아온 산적이 오히려 자신을 풀어주자 그는 산적을 마음속으로 용서하고 배신감과 자괴감에 몸서리치다가 결국 떨어져 있던 아내의 단도로 자결한다. 그 후 누군가가 몸에 꽂힌 단도를 빼가는 것을 느낀다. 사실 나무꾼은 시체를 발견한 것이 아니라 사건 당시의 상황을 목격했는데, 관가에는 그대로 말하지 않았다. 나무꾼이 본 진실 산적은 여자를 겁탈한 이후, 그녀를 지극정성으로 꼬셨다. 천둥벌거숭이인 그가 온갖 감언이설로 꾀면서 땅 위에 바짝 엎드려서 절하며 사죄까지 할 정도였다. 그러나 아내는 "여자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다"라며 사무라이를 풀어준다. 타죠마루는 이것을 "남자끼리 결정해라. 서로 싸워 이긴 쪽을 따르겠다"라는 것으로 알아듣고 싸우려 한다. 그러나 사무라이는 "이런 여자 때문에 목숨 걸기는 싫다. 다른 남자와 관계를 가졌으면서 어째서 바로 자결하지 않는 것이냐? 나는 이런 여자는 필요없다"라며 아내를 배척한다. 그러자 산적 역시 아내를 버리고 가버리려 한다. 두 남자에게 모두 버림받자 여자는 갑자기 미친 듯이 웃고는 사무라이와 산적을 남자도 아니라고 비난하며 이간질한다. 그녀의 도발에 흥분해 사무라이와 산적이 칼을 뽑아 들고 서로 싸움을 벌인다. 그러나 두 남자는 서로에게 겁에 질려 칼 든 손을 떨거나 혼자 넘어져 허공에 칼질을 해대는 건 예사고 칼을 놓친 채 도망다니거나 흙을 뿌려대고 서로의 발목을 잡고 늘어지는 등 민망한 개싸움을 벌인다. 이 증언의 시각대로라면 사무라이와 타죠마루 둘 다 각자의 증언에서 자신들의 실력을 과장했던 것이 된다. 결국 싸움은 산적의 승리로 끝나고 사무라이는 "죽고 싶지 않아!"를 외치지만 타죠마루의 칼에 죽는다. 타죠마루는 사무라이의 부인을 데려가려 하지만, 그녀는 지친 타죠마루를 뿌리치며 도망치고 산적은 홀로 남아 자신과 사무라이의 칼을 들고 달아난다. 107회기 선관위 심의분과장 이종철이 자신에게 선관위 1000만 원 뇌물 책임이 있다고 밝힌 주홍동 장로의 발언에 강하게 반발했다. 허활민 시절 설친 총회 문제아 이종철은 “주홍동 장로의 주장은 1000% 믿을 수 없다”라며 “주홍동 장로와 이이복 장로가 거짓말하고 있다”라고 반박했다. 이에 대해 총회 기관지 기독신문은 이렇게 밝히고 있다. 2023년 11월 24일 열린 감사부 소환조사에서 주홍동 장로는 “1000만 원은 내 돈이다. 이이복 장로는 무관하다”라면서 “이종철이 (1000만 원을 주도록) 유도했다. 이종철이 판 함정에 빠진 것 같다”라고 증언했다. 이에 대해 이종철은 “주홍동 장로가 코너에 몰리니까 물귀신 작전을 하고 있다”라고 개탄했다. 그러면서 지난 9월 4일 광주 송정중앙교회에서 열린 선관위 전체회의 당시 상황을 설명했다. 선관위(위원장 배광식)는 오전 전체회의에서 이이복 장로와 주홍동 장로를 불러 심의분과장에게 전달된 1000만 원 건에 대한 소명을 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오후에 선관위원 만장일치로 이이복 장로의 후보 탈락을 결정했다. 재개발을 앞둔 대치동 우성아파트 총무 관사 매각에 앞장섰던 선관위원장 배광식이 주홍동 장로에게 이의가 없냐고 물었지만, 주 장로는 어떠한 얘기도 하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이이복 장로는 교회 앞에서 연좌시위를 했다.) 이종철은 “주홍동 장로는 선관위 회의를 이어오는 과정에서 한 번도 이이복 장로의 후보 탈락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라면서 “선관위원 전체는 주홍동 장로와 이이복 장로가 거짓말하고 있다고 판단했다”라고 말했다. 인간은 자신에 대해 정직해질 수 없다. 자기 자신을 얘기할 때면 언제나 윤색해진다. 이 영화 라쇼몽은 자신을 실제보다 더 나은 사람으로 보이기 위해 거짓말을 하지 않고는 못 배기는 인간을 그리고 있다. 창세기의 아담과 이브처럼 이기주의는 인간이 날 때부터 갖고 있는 본성이다. 검사 출신 윤석열 대통령 시각에 따르면 이 사건으로 누가 이익을 보았는가 생각하면 문제가 풀릴 것 같다. 그들은 김영구, 이종철 등을 먼저 손꼽을 수 있겠다. 사건은 있고 진실은 사라진 이 해괴한 사건은 이재명처럼 반드시 사법 당국에 고발해 시시비비를 가려야 할 사안으로 보인다. 성경은 말씀한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딤전 6:10 2023-12-09
    • G.OPINION
    2023-12-09
  • 이재명과 재물 숨겨두기
    역사는 이야기다. ‘역사의 아버지’ 헤로도토스(대략 기원전 484년경~기원전 425년경)는 엄숙한 역사학자가 아니라 세상 곳곳을 떠돌며 보고 들은 것을 전하는 이야기꾼이었다. 그가 쓴 ‘역사’의 중심에는 ‘페르시아 전쟁’이 있지만, 이 전쟁 이야기의 주변에는 수많은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학문적 역사 서술을 지향한 투키디데스와 다른 점이다. 헤로도토스는 신화들, 여러 민족의 이야기들, 지리학적 기록들, 인간의 본성에 대한 통찰 등을 섞어 ‘역사’의 다채로운 서사를 끌어가는데 리디아의 왕 크로이소스의 이야기가 그런 특징을 잘 보여준다. 그것은 칼빈의 하숙집 밀린 영수증을 들먹인 심창섭과 달리 자신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다고 믿었던 한 사내의 역사적 이야기였다. 대한민국의 그런 역사적 사내들 이야기는 이렇다. 2023년 11월 30일 이재명 민주당 대표 최측근인 김용 전 민주연구원 부원장에 대해 6억 원의 불법 정치자금 수수 및 7천만 원의 뇌물수수 유죄를 인정하고 징역 5년을 선고한 법원은 유동규 전 성남도개공 기획본부장 진술의 신빙성을 인정하며 판결문에서 ‘직접 경험하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사실들’, ‘세부상황에 대한 묘사가 구체적이고 일관되다’ 등의 표현을 썼다. 대장동 사건의 핵심 인물인 유동규 씨는 30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측근 김용(전 민주연구원 부원장) 씨가 ‘불법 대선 경선 자금’ 사건으로 징역 5년을 선고받은 것과 관련해 “수혜자는 이재명. 그 주변인들은 전부 다 이재명을 위한 도구였다”라고 말했다. 철학자 에리히 프롬은 “사랑의 조건은 혼자서도 제정신을 유지하며 외로움을 견딜 수 있는 자아의 강인함과 독립성, 온전함을 갖추는 것”이라고 했다. 머리를 빗고 손톱을 깎듯이 외로움을 잘 관리한 이들만이 비로소 한 사회나 총회에서 타인과 더불어 살아갈 수 있다는 이야기로 들린다. 외로움을 강아지라고 여겨보면 어떨까. 지저분한 털이 중구난방 자란 내 안의 작은 개를 씻기고 다듬는 것, 남에게 함부로 짖거나 달려들지 않도록 잘 훈련 시키는 것이 남은 삶 동안 해야 하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깨끗하고 온순해진 외로움의 개를 쓰다듬다 보면 언젠간 목사와 장로다운 삶을 사랑하게 되는 날도 오지 않을까. 돈은 벌기보다 쓰기가 더 어렵다. 돈 버는 건 기술, 돈 쓰는 건 예술이라고 하는 이유다. 사람은 한기승 목사처럼 어느 때든 베풀지 않으면 궁할 때 받을 것이 없는 법이다. 깊이 보면 나눔과 베품이야말로 자신을 지키는 최고로 유효한 방법이다.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년 ~ 1836년)은 자식에게 쓴 편지에서 말했다. “재물을 비밀스레 숨겨두는 가장 좋은 방법은 남에게 베푸는 것이다.” 2023년 11월 12일 9:30 한국 교회에 모범이 될 삼일교회 2부 예배에서 송태근 목사는 교인들에게 선포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진짜 지식이 있다면 그 사람의 결실에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어떻게 나타나야 할까요. 그 사람이 딱한 처지에 있으면 당연히 우리가 손을 벌려 주고 함께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성경은 사도 바울을 통해 말씀한다. 범사에 여러분에게 모본을 보여준 바와 같이 수고하여 약한 사람들을 돕고 또 주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신 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하심을 기억하여야 할지니라 행 20:35 2023-1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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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2-02
  • 하마스와 이재명
    잡스와 저커버그와 이재명은 천재 중의 천재다. 천재(天才)는 말 그대로 하늘이 내린 재주라 대학에서 뭘 전공하든 대학을 중퇴하거나 안 다녀도 성공한다. 보통의 학생들은 이런 예외적인 천재의 성공 스토리에 현혹되지 말고 인문계의 평균적인 모습을 살펴봐야 한다. 얼마 전 어느 일간지의 조사에 따르면 지난 1년간 서울대, 연세대, 고려대(SKY) 인문사회 계열 졸업생의 취업률은 45.4%로 나타났다. SKY가 이럴 정도니 다른 대학들은 어떻겠는가. 그래서 나온 씁쓸한 신조어가 “인문계 90%가 논다”라는 ‘인(인문계)구(90%)론(논다)’이다. 이것이 신학과 달리 인문학 전공자 인구론의 평균적 모습이다.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적어도 인생에서 일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사람이라면, 자신의 일을 붙들고 제대로 해보려 애쓰는 것과 자신의 인생을 잘살아 보려는 노력이 결코 다른 게 아니라고. 아무리 생계형 정치나 목회라고 할지라도. 투지, 의지, 성실함, 부지런함, 노력…. 우리는 이런 말들과 꽤 멀어진 것 같다. 그러나 일은 물론이고 ‘부목사’든 사랑이든 운동이든 이재명처럼 최선을 다하지 않고 애쓰지 않고 이루는 법이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사람을 대면하기보다 소셜미디어에서 교류하는 현상이 두드러진 것도 외롭다는 감정을 더 많이 느끼게 하는 요인이다. 미국 예방 의학 저널에 따르면 하루 두 시간 이상 소셜미디어에 접속하는 사람은 30분 이하로 접속하는 사람보다 사회적 고립감을 호소할 가능성이 두 배 이상 높았다. 소셜미디어에 의지할수록 외로움이 커진다는 얘기인데 소셜미디어를 이용한다는 미국 성인 비율은 2005년 5%에서 2019년 80%로 높아졌다. 요즘 미국 젊은이들이 연애·결혼을 하지 않는 경향이 뚜렷하다. 퓨리서치센터가 작년 7월 미국인 6천여 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에 따르면 30세 미만 성인 중 47%는 결혼이나 동거를 하지 않은 상태이고 진지한 연애 상대도 없다. 갈수록 인기를 끄는 데이팅 앱은 ‘연애 종말 시대’를 부추기고 있다. 미국 성인의 약 절반이 데이팅 앱을 사용해본 적이 있을 정도이지만 이용자 중 12%만 데이팅 앱을 통해 진지한 연애 관계를 맺었다고 응답한 조사가 있었다. 교회 활동이나 미팅이 아니라 스마트폰에서 쓱쓱 화면을 넘기며 이성을 찾다 보니 만남의 무게가 가벼워졌다는 얘기다. 강한 소속감을 갖게 하는 종교 활동도 줄었다. 오피니언리서치센터는 2020년 미국 성인의 종교 참여도가 47%라고 발표했는데 1937년 통계를 낸 이래 처음으로 50%를 밑돌았다. 1999년만 해도 미국 성인의 70%가 교회 등 종교 단체에 속해 있었다. 이슬람교는 7세기 초 '무함마드'에 의해 완성되었으며 모든 신들을 부정하며 유일신 '알라'를 숭배하는 것이 기본 교리이다. 이슬람이란 ‘절대 순종한다’라는 뜻이며, 이슬람 신도를 가리키는 무슬림(Muslim)이라는 용어는 ‘절대 순종하는 자’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창시자이며 예언자이고 최고 지도자였던 '무함마드'가 죽은 후 후계자 문제로 갈등이 시작되었다. 선거에 의해 최고 지도자(칼리프)를 뽑으려는 기존세력('무함마드'의 측근들과 그의 협력자들)이 수니파이다. 이들에 대항해 '무함마드'의 가계를 중심으로 지도자가 계승되어야 한다는 친 '무함마드'계 세력이 충돌하면서 분열되었다. 여기서 기존세력은 '수니파'('Sunni '무함마드의 모범 'Sunna 순나'를 따르는 사람들'이라는 뜻)로 불리우며 '나의 가문은 노아의 방주와도 같은 것으로 그 방주에 승선한 사람은 구제될 것이나 그렇지 아니한 자는 익사할 것이다'라는 교리를 따르는 친 '무함마드'계 세력은 '시아파'(Shia 분파란 의미)로 불리게 된다. 아이러니하게 ‘절대 순종하는 이’라는 의미를 지닌 무슬림(Muslim)이 이슬람교의 최고 지도자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권력다툼으로 분열되었다. 전 세계 무슬림의 약 83%가 소속된 수니파 무슬림의 수는 2021년 기준으로 사우디를 중심으로 한 전 세계 무슬림의 수를 통상 19억 명으로 생각하면 약 15억 명가량으로 추산된다. 이는 신자 수로 세계 최대의 단일종파인 가톨릭에 맞먹는 신자 수이다. 대한민국 내 이슬람 모스크들 역시 기본적으로 수니파이다. 부족적 전통을 중시하는 사람들과 무함마드 알리의 혈통을 중시하는 사람들로 분열하게 된 것이다. 수니파는 이슬람 제국 주권자를 일컫는 칼리프 제도(계승제)를, 시아파는 이맘(이슬람 교단 지도자) 제도를 고수하면서 1400여 년에 걸쳐 해묵은 종파 갈등이 이어지고 있다. 시아파 종주국 이란이 후원하는 수니파 성향의 무장 테러리스트 단체 하마스가 시아파인 셈이다. 시아파는 무슬림 전체의 15%를 차지하며 주로 이란·이라크에 분포한다. 예언자 마호메트의 적통 계승이 사촌이자 사위인 알리(제4대 칼리프)에게 있다고 보고 알리의 혈통을 이어받은 후계자들만 이맘(Imam 종교지도자)으로 받든다. 여느 이단이나 이재명같이 코란보다는 칼리프를 중요시 여긴다. 아야톨라(Ayatollah)는 시아파 무슬림 사회의 최고위 종교지도자의 성직을 가리키는 말이다. 아야톨라 가운데 더 특별한 존경을 받는 이들은 ‘그랜드 아야톨라’ 즉 ‘마르자(Marja)’가 된다. 시아파 무슬림은 누구나 자신의 ‘마르자’를 선택해야 하고 평생 그의 지침을 따라야 한다. 한마디로 그들에게 마르자의 말은 율법과 맞먹는다. 예언자 무함마드의 직계 후손인 레바논의 마르자 무함마드 후세인 파드랄라(Mohammad Hussein Fadlallah, 1935.11.16~ 2010.7.4)는 마르자들의 마르자로 떠받들던 신학자다. 그가 설교하면 평소에도 예사로 수만 명이 모였다고 한다. 정치적으로는 초강경파인 그였지만 여성 인권에 관한 한 이례적으로 유화적인 입장이었다. 가정 폭력을 줄기차게 비난했고 여성에겐 남편의 폭력에 맞서 자신을 방어할 권리가 있다는 파트와(종교적 해석)를 내놓기도 했다. 그는 신자들의 헌금으로 다수의 학교와 문화시설, 자선 병원 등을 설립했다. 숨지기 전 몇 달간 출혈로 자신이 설립한 병원에 입원한 그에게 한 간호사가 필요한 것을 묻자 그는 테러 무장 단체 하마스 지도자처럼 망설임 없이 “시오니스트들의 씨를 말리는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름 '하마스'는 아랍어 '하라카트 알무카와마 알이슬라미야(Harakat al-Muqawama al-Islamiyya)'의 두 문자 어로 이는 '이슬람 저항 운동(Islamic Resistance Movement)'이라는 의미이다. 더불어 아랍어 어휘 '하마스'는 알라를 따르는 '헌신과 열정'을 뜻하기도 하며 내부에서는 '힘과 용기'로도 해석한다. 그런데 테러를 일삼는다. 하마스는 2023년 10월 7일 이스라엘 국경을 돌파해 민간인 1,200명을 사살하고 어린이 포함 240명을 포로로 납치해 가자지구로 끌고 갔다. 그 결과 이스라엘의 전방위적인 공격으로 가자 지구는 두 쪽 나 점령당했고 팔레스탄인들의 피해는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그런데도 하마스는 야당 대표이면서 법정을 수없이 드나드는 이재명처럼 죄를 인정하지도 않고 그들 시민과 이스라엘 인질을 볼모로 방패 삼고 항복하지 않는다.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측근 김용(전 민주연구원 부원장) 씨가 2023년 11월 30일 대장동 일당에게 불법 정치 자금을 받은 혐의 등으로 1심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고 법정 구속됐다. 대장동 사건과 관련해 법원의 첫 판단이 유죄로 나온 것이다. 법조계에선 “이 대표의 ‘사법 리스크’가 더 커졌다”라는 얘기가 나왔다. 그래도 그는 하마스처럼 끝까지 갈 것이다. 그리고 하마스도 이재명같이 마지막까지 버틸 것이다. 금품이 오갈 당시 김용은 이재명 대선 캠프에서 활동했다고 한다. 픽션(fiction 꾸민 이야기)이 인간의 삶에서 사라지지 않는 까닭은 뭘까. 진화생물학자들은 “진화는 무지막지한 실용주의자”라는 말로 그 수수께끼를 설명한다. 세상은 음모·책략·제휴·인과관계 등 이야기로 가득하며 그것을 탐지하는 게 생존에 유리하다. 인류는 불 주변에 모여 이야기를 시작했고 그림자를 보며 연극이라는 놀이를 발명했다. 이야기는 사람들을 결속하는 사회적 접착제 역할도 한다. 빅토르 위고(Victor-Marie Hugo, 1802년 2월 26일 ~ 1885년 5월 22일)는 ‘레 미제라블’ 서문에 이렇게 썼다. “지상에 무지와 가난이 존재하는 한 이와 같은 성격의 책은 무용지물일 수 없을 것이다." 뮤지컬의 원작 소설을 쓴 작가 빅토르 위고의 말이다. "음악은 말로 담을 수 없는 것, 그렇다고 침묵할 수도 없는 어떤 것을 표현한다." 2010년 노벨문학상을 받은 페루 출신의 스페인 작가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Jorge Mario Pedro Vargas Llosa, 1936년 3월 28일 ~ )는 저서 ‘불가능이라는 유혹’에서 (프랑스 혁명기가 배경) 이렇게 썼다. "레 미제라블’에 담긴 세상은 크고도 섬세하며 작가는 신학자처럼 보인다” 극한의 불행과 사랑, 좌절과 꿈 뒤에 신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는 것이다. 이 소설은 출간 당시 “반(反)사회적이고 위험하다”라는 비판을 받았다. 그러나 현실이 황폐할수록 사람들은 문학이 그려낸 아름답고 이상적인, 그래서 불가능한 세계에 끌린다. 성경은 말씀한다.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그러므로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하였으니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이니라 벧전 1:23-25 2023-1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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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30
  • 이재명의 초밥 또는 스시
    2023.11.18 조선일보에 이런 대담 기사가 실렸다.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법카’ 펴낸 前 경기도청 7급 공무원 조명현 【박돈규 주말뉴스 부장】 -회고록을 쓴 이유를 묻는다면. “2021년 겨울에 1차 제보를 한 뒤로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고발한 정치인은 대선 패배에도 불구하고 곧장 국회의원이 됐고 거대 야당의 대표로 선출됐다. 믿을 수 없을 만큼 멀쩡하게 세상을 휘젓고 다닌다. 그런데 나는 여전히 일상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불이익을 받고 있다. 책을 쓴 이유는 세 가지다. 내 명예를 회복해야 했고, 세금을 쌈짓돈처럼 쓴 사람들에 대해 국민이 실체를 파악하길 바랐다. 공익 제보자들이 신고 후 얼마나 서글픈 삶을 사는지도 알리고 싶었다.” 경기도청 7급 공무원 조명현 씨가 했다는 업무는 지면에 옮기기 민망한 수준이다. 경기도지사 공관에 넣을 샌드위치와 과일 등을 픽업해 냉장고에 채웠다. 이재명 지사의 와이셔츠를 세탁소에 맡겼고 속옷을 빨기도 했다. 성남시 수내동 이재명 지사 자택으로 올라갈 초밥, 소고기 등도 부지런히 실어 날랐다. 성남시 수내동 이재명 경기도지사 자택으로 올린 초밥 역시 법카로 구매했다. 정육식당에서 식사를 한 것처럼 카드를 긁고 스테이크용 소고기를 포장해 가져다주기도 했다. /조명현 제공 -경기도 법카가 ‘마르고 닳도록’ 긁어졌다고 썼는데. “내 제보의 핵심은 불법 의전과 국민 세금으로 초밥, 소고기, 백숙, 샌드위치 사 먹으면서 개인 돈처럼 쓴 법카 유용 의혹이다. 청담동 샴푸, 김혜경 씨 생일 선물 등 법카로 살 수 없는 물품들은 여러 부서에서 갹출한 업무 추진비나 출장비로 구매했다. 과연 공직자 의식이 있는지 묻고 싶다..." 스시(일본어: 寿司) 또는 초밥(醋-)은 일본의 밥 요리이다. 쌀밥에 날생선 등의 해산물이나 달걀 등을 조합한 음식으로 전통적으로 와사비와 함께 먹는다. 손으로 쥐어 만든 스메시(초를 친 밥)에 생선 등을 얹어 만든 니기리즈시가 대표적이다. 초밥 또는 스시는 일본 요리의 하나로 어패류(수산물)의 살이나 유부 달걀 김 등의 식재료를 배합초에 절인 쌀밥 위에 올려 만드는 음식이다. 재료와 밥을 손으로 쥐어서 만든 스시가 가장 기본적이고 일반적인 쥠초밥이다. 초밥의 일본어 명칭 すし('스시')는 '(맛이) 시다'라는 뜻의 일본어 酸し를 그대로 가져온 것이라는 설이 일반적이다. 김기림(金起林, 1907년 4월 5일 ~ 2000년 1월 12일) 시인이 1949년에 잡지 『학풍』에 기고한 「새말의 이모저모」에서는 '초밥'이란 낱말을 신조어로 취급하였다.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당시 김기림 시인은 '초밥'이라는 신조어가 결국 냉소와 조롱 속에 잊힐 것이라고 내다보았지만, 결국 '초밥'이라는 단어는 생명력과 보편성을 잃지 않고 살아남았다는 것. 도시락, 덮밥 등과 함께 성공적으로 정착한 일본어의 한국어 대체표현이다. 사실 음식의 발상지를 존중하자는 취지에서는 '스시'라고 읽음이 바람직하겠지만, 한국에는 '초밥'이 워낙 보편화 되었다. 스시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는 생선과 곡물을 함께 삭혀 보관하는 방법은 농경문화, 더운 날씨와 관련이 깊어 동남아시아에서 민물고기 보존용으로 곡물을 곁들인 것이 시초라고 추정된다. 이런 음식을 법카로 긁어 이재명 부부가 곤욕을 치르고 있다니 안쓰럽다. 그래서 잠실 롯데호텔 뷔페 수준 초밥에 몽고군이 먹었다는 샤브샤브까지 무한리필로 평일 점심 16,900원에 즐길 수 있는 이순신 장군의 고장 아산 소재 '스시야샤브야'(충남 아산시 배방읍 광장로 와이시티 210동 4층)를 이재명 부부에게 추천한다. 정말 좋은 곳이다. 우리 부부도 종종 즐기고 너무 고마워 직원 팁도 잊지 않고 있다. 성경은 말씀한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전 10:31 2023-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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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19
  • 충남노회 사태 미로 또는 미궁
    네 믿음을 살아라. 젊거나 늙거나 저 느릅나무처럼. 봄날엔 푸르게 오르는 풀잎으로 살다가 여름엔 풍성하게 찬양한다. 그리고 가을이 모든 것을 바꿔 놓으면 더 느려진 기도로 다시 뉘우치듯 소망으로 황금빛이 되지. 겨울이면 나뭇잎들이 회개 눈물인 양 서서히 다 떨어져도 보라. 그는 서 있지. 나무의 몸통과 가지 벌거벗은 사랑의 힘으로. 삶은 미로(Maze)일까, 미궁(Labyrinth)일까. 미궁은 하나의 길이 이리저리 돌다가 결국은 귀착지에 이르는 구조이지만, 미로는 갈림길이 도처에 있어 귀착지에 이른다는 보장이 없는 구조다. 삶은 미로인가, 미궁인가. 갈림길에서 갈팡질팡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미로를 닮았고 결국 죽음이라는 귀착지에 이르게 만든다는 점에서 미궁을 닮았다. 그러면 충남노회 사태는 미로인가 미궁인가. 주진만, 김상현, 그리고 이능규 같은 해결사들이 명멸하는 그 갈림길이 도처에 있어 갈팡질팡 귀착지에 이를 수 없다는 점에서 미로를 닮았다. 그리고 윤익세, 이상규, 윤해근 등이 삼각대로 버티고 있는 그 갈림길에서 이상규가 뇌물수수 암수를 스스로 드러내 자멸이라는 귀착지에 이르렀다는 점에서 충남노회 사태는 미궁이다. 소크라테스는 신성 모독과 청년들을 타락시킨 죄로 아테네 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탈옥할 수도 있었지만, 기꺼이 죽음을 택했다. 자신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영혼의 불멸을 믿었기 때문이다. 신념과 믿음, 죽는 순간까지도 그가 흔들리지 않은 이유다. 성경은 말씀한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롬 6:23 2023-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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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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