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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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BOOK _보스와 함께 신학여행 _박형용 저
    성경의 바른 교훈- 보스의 신학에서 찾다 Theological Journey with Geerhardus Vos 본서는 보스의 질문 전체를 다루지 않았고 우리들에게 개혁주의 신학 이해에 도움이 되는 것들만 골라서 정리했다. 보스는 신학 분야 전체의 내용을 1,233개의 질문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을 함으로 독자들과의 거리감을 좁힌 반면 내용의 설명을 개혁주의적인 입장에서 일목요연(一目瞭然)하게 설명해 주었다. 독자들은 평소에 가지고 있었던 신학 분야의 난제들에 대한 답을 보스의 “개혁교의학”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보스의 “개혁교의학” 전 5권은 화란어에서 영어로 번역한 것인데 어떤 부분들은 영어 자체가 이해하기 힘들어 독자들을 당황하게 만든다. 따라서 본서는 독자들이 좀 더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보스의 개혁교의학의 내용 중 필요한 부분을 요약 소개하기도 하고 또 번역하기도 한 것이다. 편저자는 본서를 통해 보스(Vos)의 신학이 한국교회에 더 많이 알려질 수 있기를 바라고, 궁극적으로 성경의 바른 교훈이 개인 성도와 기독교회 안에 뿌리내리기를 바란다. - 편저자의 말 중에서 - 박형용 국내인물>교육가/인문학자>대학/대학원 교수 국내인물>종교인>신학자 서경대학교와 총신대신대원을 졸업하고 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대학원에서 신학석사 학위, 에모리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총신대학교신학대학원에서 4년 동안 가르쳤고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태동부터 지금까지 40년 넘게 신약학을 가르쳐 왔고 총장을 역임하였다. 서울성경신학대학원대학교의 총장과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의 총장으로 재직하였으며 많은 학문적 연구를 저술로 내놓았다. 영국 Cambridge에 위치한 국제인명록쎈터(International Biographical Centre)로부터 2018년도 신학교육분야의 "최고 100인 전문인"(Top 100 Professionals)으로 선정을 받았다. 저서 <신약 정경론>, <성경해석의 원리>, <신약성경신학>, <복음비평사>(성광), <바울신학>, <빌립보서 주해>, <교회와 성령>, <신약개관>(아가페), <히브리서 주해>(횃불), <정암 박윤선에게서 배우다>, <신학책, 나는 이렇게 읽었다>, <권세 있는 자의 가르침>(SBGST), <시간, 나무가 되다>, <목사님, 이것이 궁금해요!>, <말씀산책> 등이 있다. 목차 편저자의 말 _005 보스의 『개혁주의 교의학』 전 5권 _011 제1권 신론 제1장 하나님을 아는 지식 _021 제2장 하나님의 이름들과 존재 그리고 속성들 _022 제3장 삼위일체 _032 제4장 일반적인 하나님의 작정 _037 제5장 예정교리 _039 제6장 창조 _048 제7장 섭리 _050 제2권 인간론 제1장 인간의 본질 _057 제2장 죄 _061 제3장 은혜언약 _071 제3권 기독론 제1장 서론 _087 제2장 이름들 _090 제3장 위격과 본성 _097 제4장 직책 _103 제5장 신분 _123 제4권 구원론 제1장 구원서정 _143 제2장 중생과 소명 _156 제3장 회심 _164 제4장 믿음 _171 제5장 칭의 _178 제6장 성화 _186 제5권 교회론, 은혜의 수단들, 종말론 제1부 교회론 제1장 본질적인 문제 _206 제2장 조직, 권징, 직분 _219 제2부 은혜의 수단들 제3장 말씀과 성례 _226 제4장 세례 _235 제5장 성찬 _249 제3부 종말론: 마지막 일들과 교리 제6장 개인적인 종말론 _259 제7장 일반적인 종말론 _262 정리하는 말 _284 색인 인명 _288 주제 _291 성구 _298 기본정보 ISBN 9791193395028 발행(출시)일자 2024년 01월 01일 쪽수 306쪽 크기 152 * 224 * 28 mm / 588 g 정가 1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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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10
  • 이흥선 목사 신천지 변증서
    어느 여정으로 가든 ‘내가 이룬 것은 다 내 노력 덕’이라는 함정에서 나와야 시작할 수 있다. 다른 사람에게 관대한 마음을 갖는 것, 그것만으로도 상호부조의 면역력이 생긴다. ‘나쁜’(bad)의 우리말 어원은 ‘나뿐’(only l)이고 ‘좋은’(good)의 우리말 어원은 ‘주는’(give)이다. 그러므로 나쁜 사람은 나뿐인 사람이고 좋은 사람은 나누어주는 상호부조(相互扶助)의 실행력을 가진 사람이 된다. 산다는 것은 사람을 만나는 것과 같은 뜻일지도 모른다. 사는 내내 누군가와 만나고 헤어지는 게 우리네 인생이니까. 그런 까닭에 몇몇 국어학자들은 ‘살다’와 ‘사람’을 같은 어원으로 보기도 한다. 행복한 삶은 오래된 사람이든 새로운 사람이든 인연을 곱게 이어가는 모습이 아닐까.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말이 있다. 짧은 만남이라도 소중히 여기라는 가르침이다. 전통시장에 가면 ‘스치는’ 인연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좁은 시장길을 여럿이 오가니 팔이 부딪히고 옷자락이 닿기도 한다. 그런데 옷깃은 여간해선 스치기 어렵다. 옷깃은 목에 둘러댄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옷깃을 스치려면 꼭 껴안아야 한다. 그래서 누군가를 안는다는 것은 서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할 수 없는 행동이다. 잠시 스치는 만남이라면 옷자락과 소맷귀가 어울린다. 옷자락은 옷의 아래로 길게 드리운 부분이니 누군가와 맞닿을 수 있다. 윗옷의 양쪽에 팔을 꿰는 부분인 소맷귀도 움직임이 많은 팔 부분이라 스치기 쉽다. 신천지(신천지예수교 증거장막성전)는 1984년 3월 14일 이만희가 창설한 사이비 종교다. 교리적 특징은 종말론이다. 1966년 창립한 장막성전(1966년에 유재열이 창설하여 1980년 장막성전은 해체되고 그 자리에 서울랜드 들어섬)을 중심으로 요한계시록의 예언이 성취되기 시작하였다고 주장했다. 이만희(1931년 음력 7월 13일 경상북도 청도군 풍각면 현리리 10남 1녀 중 6남으로 출생)는 1967년부터 1971년까지 장막성전에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고 이만희는 1971년 9월 7일 "1967년 장막성전에서 전 재산을 다 털렸다"며 다른 신도들과 함께 유재열을 고소했고, 이것이 장막성전에 대한 수사와 유재열의 구속으로 이어졌다. 신천지는 핵심 교리 중 하나로 성경이 배도, 멸망, 구원 순으로 이루어진다고 주장하고 해당 교리에 따라 장막성전 창시자 유재열을 배도자로 규정하며 마지막 구원자를 이만희라고 주장한다. 2020년 4월 12일 방영된 ‘그것이 알고 싶다’가 유재열을 찾아 인터뷰를 요청하자 유재열은 카메라 앞에서 하는 인터뷰에 부담을 느낀다며 서면 인터뷰로 대체하였고 방송에서 내용을 공개하였다. 여기서 유재열은 "자신의 잘못된 성경 해석과 교리로 사이비 종교를 만들었던 과거를 후회하고 있다. 신천지에서는 일명 '실상' 교리에 따라 자신을 배도자라고 하는데 자신이 만든 교리를 내가 잘못되었다고 하는 게 무슨 배도인가?"라고 반문하였다. 이흥선 목사가 2020년 7월 3일 "신천지 어떤 곳인가?" 반증서를 출간했다. 신천지와 계시록을 십자가 복음으로 비교 분석한 최초의 비판 반증서이다. 이흥선 목사(총신대 교수)는 신천지 교리를 십자가 복음으로 비교 분석한 한국교회 최초의 반증서 “신천지 어떤 곳인가?”를 집필하여 지난 2020년 6월 29일(오후 4시) 인천시 부평구 장제로 소재 세계로 선민교회(담임 김현두 목사) 본당(2층)에서 출판 감사예배를 드렸다. 김현두 목사는 축사를 했다. "성경이 위대한 것은 성령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 책의 저자인 이흥선 목사님이 훌륭하다면 이 책 또한 훌륭한 책입니다. 이흥선 목사님은 오직 믿음로만 사시는 종입니다. 성경의 뜻대로 진리에서 벗어나지 않으려고 몸부림치는 분입니다. 책의 내용이 알차고, 옳고, 바른 것을 보면 이 책은 분명 성령께서 이끄신 책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책을 읽는 자 모두에게 성령께서 은혜 주실 줄 믿습니다." 시대의 표상이 되는 새에덴교회를 세워 목회하는 소강석 목사는 선지자적인 영상 축하 말씀을 전했다. "코로나 위기 때에 신천지 집단 감염 상태로 온 국민이 페닉 상태에 빠져있어 신천지가 얼마나 비상식적인 집단인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또한, 이들은 교묘한 전략으로 한국교회를 넘어뜨리려는 집단입니다. 이러한 위기 때에 존경하는 이흥선 목사께서 '신천지 어떤 곳인가?'라는 서적을 출간하므로 계시록과 신천지 교리를 비교 분석한 반증서가 나오게 된 것이야말로 뜻깊고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달려가 축하드리고 감사함을 전하고 싶으나 그러지 못하여 아쉽기만 합니다. 한국교회 목회자와 성도들이 꼭 한번 읽으시길 권합니다. 저 역시 많은 책을 구입하여 많이 보급될 수 있도록 협력하겠습니다." 믿음의 변증사 이흥선 목사는 “원래부터 신천지 비판에 관한 책을 쓰려고 했던 것이 아니라 중국에서의 신천지가 극성이라 걱정하는 중국교포 제자를 위해 쓰기 시작했다”라며 “신천지 교리를 비판 반증한 자료를 정리하게 됐다”라고 설명했다. 그리고 그는 “코로나19가 발생하고 신천지가 대구지역 코로나 확산의 주요 원인이 되면서 신천지 비판 자료를 정리해 출판하게 됐다”라고 밝혔다. 악은 가스와도 같다. 눈으로 보기는 어렵지만, 냄새로 식별할 수 있다. 악은 걸핏하면 정체되어 숨 막히는 층을 형성한다. 사람들은 처음에 형태가 없기 때문에 악이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는다고 여긴다. 그러다가 악이 해놓은 일을 발견한다. 악이 차지한 지위와 이룩한 과업을 보고서야 자신이 졌다는 것을 느끼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 아닌가. 가스를 몰아낼 수가 없는 것이다. 사전에는 이렇게 씌어 있다. ‘가스는 팽창, 탄력, 압축, 억압의 특성을 갖고 있다.’ 바로 신천지 같은 악의 특성이 아닌가. 성경은 말씀한다.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찌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이와 같이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고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나니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 아름다운 열매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지우느니라 이러므로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마 7:15-21 2024-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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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13
  • 김영배의 소요리문답_ 주기도문의 끝 말씀
    1) 여호와여 위대하심과 권능과 영광과 승리와 위엄이 다 주께 속하였사오니 천지에 있는 것이 다 주의 것이로소이다 여호와여 주권도 주께 속하였사오니 주는 높으사 만물의 머리이심이니이다 부와 귀가 주께로 말미암고 또 주는 만물의 주재가 되사 손에 권세와 능력이 있사오니 모든 사람을 크게 하심과 강하게 하심이 주의 손에 있나이다 우리 하나님이여 이제 우리가 주께 감사하오며 주의 영화로운 이름을 찬양하나이다 †대상 29:11-13 ……… 2) 주여 들으소서 주여 용서하소서 주여 귀를 기울이시고 행하소서 지체하지 마옵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주 자신을 위하여 하시옵소서 이는 주의 성과 주의 백성이 주의 이름으로 일컫는 바 됨이니이다 †단 9:19 ……… 3) 이것들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주 예수의 은혜가 모든 자들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계 22:20-21 작자 미상의 이런 시가 있다. 내가 보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셨을 때 난 당신이 내가 그린 최초의 그림에 빛을 비춰주시는 걸 보았어요. 그래서 난 또 다른 그림을 그리고 싶었어요. 내가 보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셨을 때 난 당신이 주인 없는 개를 보살펴 주시는 걸 보았어요. 그래서 난 동물들을 잘 대해 주는 것이 좋은 일이란 걸 알았어요. 내가 보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셨을 때 난 당신이 기도하시는 소리를 들었어요. 그래서 난 하나님이 존재하시며 언제나 하나님과 대화할 수 있다는 걸 알았어요. 내가 보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셨을 때 난 당신이 잠들어 있는 내게 입 맞추시는 걸 보았어요. 난 내가 사랑받고 있다는 걸 알았어요. 내가 보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셨을 때 난 당신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 걸 보았어요. 그래서 난 때로는 인생이라는 것이 힘들며 우는 것이 나쁜 일이 아님을 알았어요. 내가 보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셨을 때 난 당신이 날 염려하고 있는 걸 보았어요. 그래서 난 내가 원하는 모든 걸 꼭 이루고 싶어졌어요. 내가 보고 있지 않다고 당신이 생각하셨을 때 사실 난 언제나 보고 있었어요. 그래서 내가 보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셨을 때 내가 본 모든 것들에 대해 당신에게 아멘으로 감사드리고 싶었어요. 하나님이 그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를 창조하셨다는 사실은 인생의 목적에 대한 바른 답을 제시해준다.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이유를 충족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즐거워할 때 하나님도 신랑이 신부를 기뻐하는 것 같이 우리를 기뻐하신다고 말씀하신다. 다시는 너를 버림 받은 자라 부르지 아니하며 다시는 네 땅을 황무지라 부르지 아니하고 오직 너를 헵시바라 하며 네 땅을 쁄라라 하리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를 기뻐하실 것이며 네 땅이 결혼한 것처럼 될 것임이라 마치 청년이 처녀와 결혼함 같이 네 아들들이 너를 취하겠고 신랑이 신부를 기뻐함 같이 네 하나님이 너를 기뻐하시리라 사 62:4-5 스바냐 선지자는 더욱 감동적인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모습을 전해주고 있다.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습 3:17 하나님이 스스로 우리와의 관계를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우리도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게”(벧전 1:8) 된다. 기도는 그리스도의 약속에 대한 우리의 반응이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행하리라 요 14:13-14 이 말씀은 우리가 어리석고 죄스러운 어떤 일들을 요구할 수 있다거나 또 그것을 얻을 수 있다는 의미도 아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뜻에 따라 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뜻에 따라 기도할 때 우리는 확신을 얻게 되고,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인 실례가 있다. 1540년 루터(Martin Luther, 1483. 11. 10. - 1546. 2. 18.)의 절친한 친구이자 조수였던 미코니우스(Friedrich Myconius, 1491. 12. 26. - 1546. 4. 7.)가 병이 들어 죽음이 임박해 있었다. 그는 죽기 전에 루터에게 마지막 남은 기력을 다 모아 편지를 보냈다. 루터는 편지를 받자마자 간절한 내용을 담아 답장을 보냈다. 나는 아직도 교회를 개혁하는 일에 당신이 필요하다. 나는 감히 하나님의 이름으로 당신이 계속 더 살아있기를 명하고 싶다... 나는 주께서 당신을 죽게 내버려 두시지 않고 나를 위해서 당신을 살려두시겠다는 말씀을 해주실 것이라 믿는다. 이것을 위해 나는 지금 기도하고 있다. 이것은 내 뜻이기도 하다. 그러나 나는 내 뜻이 이루어질 것을 안다. 그 이유는 나는 오직 하나님의 이름을 영광되게 하는 일만을 추구해왔기 때문이다. 주님의 이름으로 아멘. 루터의 이러한 확신에 찬 말은 그 당시 신중한 말이 요구되던 시대였던 것을 감안하면 정말 놀라운 말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 뒤 일어난 일을 보면 루터의 이 말들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이 분명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왜냐하면 루터의 편지가 도착했을 때 미코니우스는 이미 말할 능력을 상실했다. 그러나 그는 읽어주는 루터의 편지를 듣고 곧 소생했다. 그리고 며칠 뒤에는 완전히 회복했다. 그 후 미코니우스는 6년을 더 살았다. 게다가 그는 루터보다 두 달을 더 살았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쳐주신 뒤 모든 내용의 마지막에 ‘아멘’을 덧붙일 것을 가르쳐주셨다. 아멘은 원래 긍정을 나타내는 히브리어로 ‘강하게 하다’(strengthen), ‘확증하다’(confirm)를 의미하는 낱말이다. 그래서 아멘은 ‘그렇게 될 것입니다’ 또는 ‘그렇게 되게 하옵소서’라는 뜻을 지니게 되었다. ‘그렇게 될 것입니다’ 라는 의미의 아멘은 우리의 믿음이나 소원에 대한 하나님의 허락을 뜻하는 것이다. 반면에 ‘그렇게 되게 하옵소서’ 라는 의미의 아멘은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거나 우리의 기도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우리의 믿음과 소망을 표현하는 것이다. 즉 우리의 아멘은 하나님이 우리의 간구를 들으시기를 바라는 마음과 들으시리라 하는 확신의 증거로 말하는 것이다. 고대 유대교에서는 랍비가 성경 한 구절을 읽을 때마다 성도들이 그 구절을 따라 말하게 함으로써 성경 교육을 시켰다. 그러나 점차 구절을 되풀이해 따라 말하는 게 번거롭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래서 성도들은 성경 구절을 따라서 반복하는 대신에 그것을 압축한 한 마디 아멘을 말하게 되었다. 그래서 아멘이 기도나 찬송의 맺음말로 사용하게 되었다. 그리스도인들이 기도를 마칠 때마다 아멘이라고 말하는 것은 좋은 습관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이렇게 교훈한다. 그렇지 아니하면 네가 영으로 축복할 때에 알지 못하는 처지에 있는 자가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지 못하고 네 감사에 어찌 아멘 하리요 고전 14:16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할 때 간구한 내용에 대한 이해와 믿음으로 아멘을 하는 습관을 갖도록 해야 할 것이다.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 마 6:13 【핵·심·개·념·정·리】 1) 인생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그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를 창조하셨다는 사실은 인생의 목적에 대한 바른 답을 제시해준다.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이 우리를 창조하신 이유를 충족시키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즐거워할 때 하나님도 신랑이 신부를 기뻐하는 것 같이 우리를 기뻐하신다고 말씀하신다. 2)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한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인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구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뜻에 따라 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뜻에 따라 기도할 때 우리는 확신을 얻게 되고,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다. 3) 어떻게 기도할 때 확신을 얻게 되는가?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쳐주신 뒤 모든 내용의 마지막에 ‘아멘’을 덧붙일 것을 가르쳐주셨다. 아멘은 원래 긍정을 나타내는 히브리어로 ‘강하게 하다’(strengthen), ‘확증하다’(confirm)를 의미하는 낱말이다. 그래서 아멘은 ‘그렇게 될 것입니다’ 또는 ‘그렇게 되게 하옵소서’라는 뜻을 지니게 되었다. ‘그렇게 될 것입니다’ 라는 의미의 아멘은 우리의 믿음이나 소원에 대한 하나님의 허락을 뜻하는 것이다. 반면에 ‘그렇게 되게 하옵소서’ 라는 의미의 아멘은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되거나 우리의 기도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우리의 믿음과 소망을 표현하는 것이다. 즉 우리의 아멘은 하나님이 우리의 간구를 들으시기를 바라는 마음과 들으시리라 하는 확신의 증거로 말하는 것이다. 2024-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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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03
  • 김영배의 소요리문답_ 주기도문의 여섯째 기도
    또 주의 종에게 고의로 죄를 짓지 말게 하사 그 죄가 나를 주장하지 못하게 하소서 그리하면 내가 정직하여 큰 죄과에서 벗어나겠나이다 †시 19:13 ………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 마음에는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도다 †마 26:41 ……… 내가 비옵는 것은 그들을 세상에서 데려가시기를 위함이 아니요 오직 악에 빠지지 않게 보전하시기를 위함이니이다 †요 17:15 영국의 침례교 목사 메이어(F. B. Meyer, 1847. 4. 8. - 1929. 3. 28.)는 몇몇 가까운 친구에게 다음과 같은 자신의 경험담을 들려주었다. 캠벨 몰간(G. Campbell Morgan)이 미국에 있을 때 그의 성공을 위해 기도하는 일은 아주 쉬웠지. 기도가 술술 나오더군. 그런데 몰간이 영국으로 돌아와서 내 교회 근처에 있는 교회를 맡게 되니까 그건 이야기가 영 달라지는 거야. 내 속에 있는 옛 아담이 새록새록 질투를 불러일으키는 거야. 정말 괴롭더군. 그러나 나는 이 시험을 이기기 위하여 열심히 기도하는 가운데 질투로 나를 시험하는 옛 아담을 발길로 걷어차 버릴 수 있었지. 그리고는 내 친구에 대한 내 생각이 옳든지 어떻든지 간에 나의 생각을 즉시 실천에 옮기기로 결심을 했어. 그건 내 교회가 캠벨 모간 환영회를 열어주기로 한 거야. 그래서 성대하게 환영회를 열어주었지. 그러니까 그 친구 정말 좋아하더군. 우리 교인들도 놀라는 눈치였어. 내 기분도 훨씬 가벼워지고 좋더군. 그리고 주일 저녁 설교를 내가 하지 않아도 되는 때면 나는 몰간의 교회로 달려가서 그의 설교를 듣는 것을 낙으로 삼게 됐지. 몰간의 설교야 말로 참으로 훌륭하지 않은가. 설교라면 나는 그의 신발 끈 풀기도 부끄럽다는 생각이 들 정도지. 그러나 목사의 신분과 입장에서만 설교를 하고 설교를 듣던 내가 마음을 비우고 신자의 자세로 몰간의 설교를 들으니까 아주 겸손해지게 되더군. 그러니까 은혜도 받고 몰간에 대한 내 마음도 편해지고 이건 일거양득이더라 말이야. 그런데 교인들은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입을 딱 벌리고 나를 존경까지 하더군. 그런데 주님의 사랑의 은혜는 정말 놀랍더군. 내가 우리 교회를 비우는 날은 천부적인 설교자 스펄젼(Charles Spurgeon) 목사가 내 대신 설교를 하지 뭔가. 스펄젼과 몰간 그 두 사람이 대중들에게 얼마나 인기가 많은 사람들인가. 글쎄 몰간 교회만 사람들이 넘치는 게 아니라 이제는 우리 교회도 사람들로 가득 차는 거야! 참 놀라울 일이지 않은가! 우리 세 사람 다 득을 보게 되었지. 합력해서 선을 이루는 하나님의 은혜는 정말 놀라울 따름이야. 무엇보다도 시험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은 기도와 말씀뿐이더군. “우리를 시험에 들지 말게 마시옵고 다만 악에서 구하시옵소서”(마 6:13) 라고 기도하는 주기도문의 여섯째 기도는 현실적인 기도이다. 그것은 우리가 생활 속에서 겪게 되는 여러 가지 죄의 유혹과 시험을 이기기 위하여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간구이다. 시험과 유혹의 원인은 두 가지이다. 첫째 원인은 소극적인 것인데 우리 자신의 욕심과 정욕으로 생기는 것이다. 성경은,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약 1:14)라고 말씀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자기 욕심에 끌려 시험받게 될 때,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갈 5:24)하는 말씀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 말씀하는 불행을 체험하게 될 것이다. 둘째 원인은 적극적인 것인데 우리를 파멸하려는 사탄으로 생기는 것이다. 사탄은 죄의 원조이다. 사탄이 이브를 유혹한 사실에서 드러나듯이 그는 인간이 죄를 짓게 한 자였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요 8:44)하고 말씀한다. 사탄은 마귀들의 우두머리를 지칭하는 명칭이다. 사탄이라는 명칭은 ‘대적하는 자’를 의미하는 히브리어다. 예수님이 광야에서 시험 받으실 때 “사탄아 물러가라”(마 4:10)대놓고 말씀하신다. 욥의 이야기는 사탄이 하나님의 제한과 통제의 범위에서만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을 드러내준다(욥 1:12;2:6). 마귀들은 영원한 사슬에 매여 있다(유 6).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께서 주신 권세로 마귀들에게 너끈히 대항할 수 있다.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 4:7).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마귀를 대적해서 싸울 때 “능히 악한 자의 모든 불화살을 소멸하는” “믿음의 방패를 가지고” 대적하라고 권면한다(엡 6:16). 이제 믿음은 마귀의 공격을 막아주는 방패의 역할을 한다. 더 나아가서 마귀를 공격할 수 있는 무기를 사도 바울은 이어서 가르쳐준다. 그 무기는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엡 6:17)이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사탄의 시험을 하나님의 말씀의 반복적인 사용으로 물리치셨다(마 4:1-11). 사탄과 벌이는 우리의 영적 싸움에서 믿음은 사탄의 공격을 막아주는 방패이고, 성령의 검인 하나님의 말씀은 사탄을 공격할 수 있는 칼이다. 이 두 무기를 잘 사용할 수 있는 훈련방법은 기도이다. 끊임없는 기도를 통해 성령을 받아 믿음에 굳게 서고, 그 믿음으로 확신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탄의 시험과 악을 무찌를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기도와 간구를 하되 항상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라 엡 6:18 【핵·심·개·념·정·리】 1) 시험과 유혹의 원인은 무엇이 있는가? 첫째 원인은 소극적인 것인데 우리 자신의 욕심과 정욕으로 생기는 것이다. 둘째 원인은 적극적인 것인데 우리를 파멸하려는 사탄으로 생기는 것이다. 2) 사탄에 대항해 신자는 무엇으로 싸워야 하는가? 사탄과 벌이는 우리의 영적 싸움에서 믿음은 사탄의 공격을 막아주는 방패이고, 성령의 검인 하나님의 말씀은 사탄을 공격할 수 있는 칼이다. 3) 사탄을 대항하는 두 무기를 잘 사용할 수 있는 훈련방법은 무엇인가? 기도이다. 끊임없는 기도를 통해 성령을 받아 믿음에 굳게 서고, 그 믿음으로 확신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탄의 시험과 악을 무찌를 수 있을 것이다. 2023-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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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2-27
  • 김영배의 소요리문답_ 주기도문의 다섯째 기도
    하나님이여 주의 인자를 따라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주의 많은 긍휼을 따라 내 죄악을 지워 주소서 †시 51:1 ……… 너희가 각각 마음으로부터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나의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 †마 18:35 ………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롬 3:23-24 나치에 항거해 감옥에 갇힌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가 숨을 거두기 전에 쓴 시라고 한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그들이 종종 말하기를 내가 감방에서 걸어나올 때 마치 왕이 자기의 성에서 걸어나오듯 침착하고, 활기차고, 당당하다고 한다. 나는 누구인가. 그들이 종종 말하기를 내가 간수에게 말을 건넬 때 마치 내가 명령하는 권한이라도 있는 듯 자유롭고, 다정하고, 분명하다고 한다. 나는 누구인가. 그들이 또한 말하기를 내가 불행한 날들을 견디면서 마치 승리에 익숙한 자와 같이 평화롭고, 미소 지으며, 자연스럽다고 한다. 나는 정말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그런 존재인가. 아니면 다만 나 자신이 알고 있는 자에 지나지 않는가. 새장에 갇힌 새처럼 불안하게 뭔가를 갈망하다 병이 들고 손들이 나의 목을 조르고 있는 듯 숨 가쁘게 몸부림치고 빛깔과 꽃들과 새소리를 갈구하며 부드러운 말과 인간적인 친근함을 그리워하고 사소한 모욕에도 분노로 치를 떠는, 그리고 위대한 사건들을 간절히 고대하고 저 멀리 있는 친구들을 그리워하다 힘없이 슬퍼하고 기도하고, 생각하고, 글쓰는 일에 지치고 텅 빈, 무기력하게 그 모든 것과 이별할 채비를 갖춘 그런 존재. 나는 누구인가. 이것인가, 저것인가. 타인 앞에서는 위선자이고, 내 자신 앞에서는 경멸할 수밖에 없는 가련한 약자인가. 나는 누구인가. 이 고독한 물음이 나를 비웃는다. 그러나 내가 누구이든, 하나님은 아신다. 내가 그의 것임을.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라고 기도하는 주기도문의 다섯째 기도는 무슨 뜻인가? 우리가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행위가 하나님의 용서보다 앞선다는 뜻인가? 아니면 우리가 용서하기 때문에 용서 받을 수 있다는 것인가? 아니다. 그 반대다. 우리 자신이 먼저 용서를 받았기 때문에 용서할 수 있고 용서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사랑함은 그가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음이라 요일 4:19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눅 7:47 성경은 우리가 자백만 하면 언제라도 죄를 용서받게 된다고 말씀한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요일 1:9 따라서 다른 사람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있어서도 하나님의 태도를 본받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사랑 받은 것처럼 우리도 용서해야 한다. 베드로가 주님에게 “주여 형제가 내게 죄를 범하면 몇 번이나 용서하여 주리이까 일곱 번까지 하오리이까”(마 18:21)라고 물었다. 예수님은 크게 생각해서 일곱 번의 용서를 말한 베드로에게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마 18:22) 하고 말씀하셨다. 신자가 타인의 용서에 대해 행해야 할 의무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의 은혜를 본받고 나타내야 한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간구하고 있다. 여호와여 주의 긍휼을 내게서 거두지 마시고 주의 인자와 진리로 나를 항상 보호하소서 수많은 재앙이 나를 둘러싸고 나의 죄악이 나를 덮치므로 우러러 볼 수도 없으며 죄가 나의 머리털보다 많으므로 내가 낙심하였음이니이다 시 40:11-12 우리가 이렇게 많은 죄를 용서받듯이 우리도 남을 용서하고 사랑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면서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라고 말씀하시고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다. 그 은혜를 체험한 사도 베드로가 우리에게 권면한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벧전 2:21 그러므로 우리도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용서와 사랑을 실천해야 할 것이다. 【핵·심·개·념·정·리】 1) 주기도문의 다섯째 기도는 무슨 뜻인가? 우리 자신이 먼저 용서를 받았기 때문에 용서할 수 있고 용서해야 한다는 것이다. 2) 우리는 어떻게 죄의 용서를 받는가? 성경은 우리가 자백만 하면 언제라도 죄를 용서받게 된다고 말씀한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9). 3) 우리는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한 용서를 어떻게 해야 하는가? 신자가 타인의 용서에 대해 행해야 할 의무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의 은혜를 본받고 나타내야 한다. 2023-1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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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2-20
  • 김영배의 소요리문답_ 주기도문의 넷째 기도
    1) 내가 두 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내가 죽기 전에 내게 거절하지 마시옵소서 곧 헛된 것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잠 30:7-9 ……… 2)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합 3:17-18 ……… 3)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갖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딤전 6:7-8 언제 아담은 울었는가 _이어령 언제 아담은 울었는가 에덴에 핀 꽃을 처음 보았을 때인가 최초로 이브의 살을 만져 본 순간이었을까 아니면 에덴의 동쪽으로 떠나던 날이었을까 아닐 것이다. 태양이 노을이 되고 노을이 어둠이 되는 처음 맞는 밤에도 공포에 떨었을 뿐 아담은 울지 않았다. 아담은 울지 않았다. 다만 아담이 운 것은 정확하게 천지창조 칠일 째 되는 날 아침 해가 어둠 속에서 불쑥 솟아오를 때 아담은 그때 목놓아 울었으리라. 오랜 장마 끝 어느 맑게 개인 날 이불을 널어 말리듯 태양으로 고개 돌려 심호흡을 할 때 나는 더 이상 가난을 미워하지도 부끄러워하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천지창조의 일곱 번째 날 아침을 생각하면서 산다는 것이 손뼉을 치듯 너무 기뻐서 최초의 남자 아담처럼 소리내어 울었습니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 제 일 권 제 일장에서 이렇게 말한다. 참된 지식은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것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인간을 아는 지식이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을 알고 이해해야 한다. 그러면 우리는 인간의 무가치함을 알고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함을 깨닫게 된다. 칼빈이 말하는 이 참된 지식을 통해 우리는 주기도문의 넷째 기도의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마 6:11)라는 주기도문의 넷째 기도에서 깨우칠 진리는 두 가지다. 첫째, 우리가 일용할 양식을 구할 때, 필요한 것을 주실 수 있고 실제로 주시는 분은 하나님뿐이라는 사실이다. ‘일용할 양식’이라고 번역된 말은 원래 병사 한 사람의 하루 배급식량을 나타내는 말이다. 자연 속에서 사는 모든 생물들이 한 끼 먹을 것을 위해 노력하는 것을 보면 하루하루 산다는 것의 의미를 되새기게 된다. 이러한 사실은 하루하루 살 수 있는 일용할 양식을 위하여 하나님에게 끊임없이 의지해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둘째, ‘오늘 나에게’가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라는 기도의 말씀이다. 이 말씀은 나만 배부르다고 끝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우리는 혹시 내 주위에 아직 배고픈 사람들이 있지나 않은지 돌아보아야 한다. 이론적으로 보면 세상 모든 사람은 굶주리지 않을 수 있다고 한다. 그런데 한 쪽에서는 먹을 것이 남아돌아서 버리고 다이어트 한다고 살을 빼려고 땀을 뻘뻘 흘리며 고생을 한다. 또 다른 한 쪽에서는 먹을 것이 없어 굶주리는 사람들이 배고픔으로 고생하거나 영양실조로 죽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하나님은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의 만나처럼 오늘 우리에게 양식을 넘치게 부어주신다. 그러나 그것은 나의 내일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오늘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사도 바울은 신자의 삶의 태도에 대해 이렇게 권면한다.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갖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딤전 6:7-8 ‘일용할 양식’을 위한 기도에서 우리가 깨우칠 또 다른 진리는 하루하루의 삶의 의미와 생명의 소중함에 감사하고 만족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귀한 생명과 영생을 얻을 수 있는 믿음을 주신 그리스도에게 감사를 드리며 하나님에게 일용할 양식을 날마다 구해야 할 것이다. 【핵·심·개·념·정·리】 1)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을 알게 되면 우리는 무엇을 깨닫게 되는가? 우리는 인간의 무가치함을 알고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함을 깨닫게 된다. 2)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기도는 우리에게 무엇을 깨닫게 해주는가? 첫째, 우리가 일용할 양식을 구할 때, 필요한 것을 주실 수 있고, 실제로 주시는 분은 하나님뿐이라는 사실이다. 이러한 사실은 하루하루 살 수 있는 일용할 양식을 위하여 하나님에게 끊임없이 의지해야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준다. 둘째, ‘오늘 나에게’가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라는 기도의 말씀이다. 이 말씀은 나만 배부르다고 끝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우리는 혹시 내 주위에 아직 배고픈 사람들이 있지나 않은지 돌아보아야 한다. 3) ‘일용할 양식’을 위한 기도에서 우리가 깨우칠 또 다른 진리는 무엇인가? 하루하루의 삶의 의미와 생명의 소중함에 감사하고 만족해야 한다는 것이다. 2023-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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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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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영배의 소요리문답_ 주기도문의 첫째기도
    1)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복을 주시고 그의 얼굴 빛을 우리에게 비추사 주의 도를 땅 위에 주의 구원을 모든 나라에게 알리소서 하나님이여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시며 모든 민족들이 주를 찬송하게 하소서 †시 67:1-3 ……… 2)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아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롬 11:36 ……… 3)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는 것이 합당하오니 주께서 만물을 지으신지라 만물이 주의 뜻대로 있었고 또 지으심을 받았나이다 하더라 †계 4:1 노란 종달새라는 이름의 수우족 인디언이 이런 기도문을 남겼다. 바람 속에 당신의 목소리가 있고 당신의 숨결이 세상 만물에게 생명을 줍니다. 나는 당신의 많은 자식들 가운데 작고 힘없는 아이입니다. 내게 당신의 힘과 지혜를 주소서. 나로 하여금 아름다움 안에서 걷게 하시고 내 두 눈이 오래도록 석양을 바라볼 수 있게 하소서. 당신이 만든 물건들을 내 손이 존중하게 하시고 당신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도록 내 귀를 예민하게 하소서. 당신이 내 부족 사람들에게 가르쳐 준 것들을 나 또한 알게 하시고 당신이 모든 나뭇잎 모든 돌 틈에 감춰 둔 교훈들을 나 또한 배우게 하소서. 내 형제들보다 더 위대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가장 큰 적인 내 자신과 싸울 수 있도록 내게 힘을 주소서. 내가 깨끗한 손, 똑바른 눈으로 당신에게 언제라도 갈 수 있도록 준비시켜 주소서. 그래서 저 노을이 지듯이 내 목숨이 사라질 때 내 영혼이 부끄럼 없이 당신에게 갈 수 있게 해주소서. 시편 기자가 “여호와 우리 주여 주의 이름이 온 땅에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요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시 8:1) 라고 하나님을 찬양한다. 그 찬양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낸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사도 바울은 말한다. 하늘과 땅에 있는 각 족속에게 이름을 주신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고 비노니 엡 3:14-15 하나님이 자연을 통하여 주신 일반계시와 성경을 통하여 주신 특별계시를 깨달으면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알게 된다. 그러면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라는 말씀은 무슨 뜻인가? 우리는 이 말씀에서 참 기도와 거짓 기도의 차이를 발견하게 된다. 참 기도는 하나님의 뜻과 명예를 먼저 생각하는 기도이고, 거짓 기도는 자신의 이익과 명예를 먼저 생각하는 기도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명예롭게 하고 거룩하게 하는 것을 구하는 대신에 우리의 소원만을 위해서 기도하는 경우가 많다. 기도의 역사에 있어서 자기중심적인 기도는 별 효력이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고 높이는 기도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다. 인디언들에게 복음을 전한 브레이너드(David Brainerd)는 이렇게 말했다. 내 즐거움은 하나님을 기뻐하고, 영화롭게 하고, 모든 것을 그에게 드리고, 그의 영광을 위하여 사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간절히 사모하는 즐거움이고, 신앙이고, 행복이다. 내가 신앙을 가진 이후 나의 신앙은 나를 즐겁고 행복하게 해준다. 나는 자신이 잘 되기 위해 즐거움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모든 일을 한다.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태도에 대해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한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롬 14:8 【핵·심·개·념·정·리】 1)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라는 말씀에서 어떤 기도의 차이를 발견하게 되는가? 우리는 이 말씀에서 참 기도와 거짓 기도의 차이를 발견하게 된다. 참 기도는 하나님의 뜻과 명예를 먼저 생각하는 기도이고, 거짓 기도는 자신의 이익과 명예를 먼저 생각하는 기도이다. 2) 어떤 기도가 효력이 있는가? 기도의 역사에 있어서 자기중심적인 기도는 별 효력이 없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고 높이는 기도는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다. 3) 어떤 태도가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가?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는 태도에 대해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한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롬 14:8 2023-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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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22
  • 김영배의 소요리문답_ 주기도문1장_ 기도
    1) 백성들아 시시로 그를 의지하고 그의 앞에 마음을 토하라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 †시 62:8 ……… 2)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롬 8:28 ……… 3)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빌 4:6 2008년 2월 8일 노스다코타(North Dakota)주 비스마크(Bismarck)에 있는 매리 대학교(the University of Mary)의 강당을 2,500명이 꽉 메웠다. 그것은 르완다 자기 나라에서 일리바기자(Immaculee Ilivagiza)가 1994년 르완다의 종족 학살에서 겪은 간증을 듣기 위한 것이었다. 그녀는 대량 학살이 시작되기 전에는 평범한 대학생이었다. 그녀의 가족은 부활절 휴일에 그녀를 집에 오라고 권했다. 그러나 1994년 부활절 휴일인 4월 6일 주베날 하브야리마나 르완다 대통령이 타고 있던 비행기가 추락해 대통령이 숨지는 사건이 발생한 지 몇 시간 만에 르완다 대량 학살이 시작됐다. 죽은 하브야리마나 대통령 지지자들을 중심으로 정권을 쥔 다수파의 후투족이 조직적으로 소수파인 투치족을 표적 공격하면서 100일 동안에 약 100만 명가량이 목숨을 잃었다. 집에 가지 못한 일리바기자는 다른 일곱 여자들과 함께 한 장로교 목사의 집으로 피신했다. 그들은 가로 90센티미터 세로 120센티미터의 반 평도 안 되는 욕실에서 91일을 숨어 지냈다. 그 이유는 그들이 투치족이었기 때문이었다. 목사의 집도 수색을 당했지만 욕실에 숨은 그녀들은 발각되지 않았다. 신자였던 그녀는 공포에 떨며 안전을 비는 기도를 하면서 주기도문을 반복해서 암송했다. 절박한 상황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그녀의 관계가 강해질수록 그녀는 주기도문의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라는 별 의식 없이 외우던 말씀에 회의가 들었다. 즉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라는 말씀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그것은 지금 르완다의 투치족인 자신들에게 종족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살인의 만행을 저지르고 있는 르완다의 후투족을 용서해야 된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목사님에게 성경을 빌려 예수님에 관해 알기 위해 읽고 또 읽었다. 마침내 그녀는 성경이 사랑과 용서의 이야기들로 넘쳐난다는 것을 깨우쳤다. 그녀는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을 위하여 예수님이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라고 하신 말씀과 성경의 다른 가르침들을 깊이 묵상했다. 마침내 그녀는 후투족이 저지르고 있는 것을 자신이 조절할 수 없고, 살인을 저지르고 있는 후투족은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알지 못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는 주기도문도 온전히 받아들이게 되었다. 기도는 하나님이 우리가 무엇이 필요한지를 알아보는 여론수렴이나 민원접수 수단이 아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마 6:8 기도는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신뢰를 표현하고 늘릴 수 있는 수단이기에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그의 피조물인 우리가 그를 의지할 때 기뻐하신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수단의 표현이 바로 기도이다. 그러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기도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세 가지 태도를 가져야 한다. 첫째,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도해야 한다. 사도 요한은 기도에 관해 이렇게 권면한다.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요일 5:14-15 성경의 약속과 명령에 따라 구한 것은 하나님께서 반드시 주신다는 확신을 가져야 한다. 이런 경우에 우리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해주셨기 때문이다. 둘째, 우리는 믿음으로 기도해야 된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막 11:24 이 말씀에서 예수님이 의미하시는 것은 우리가 무엇을 구할 때 그것을 하나님께서 들으신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이 믿음이라는 것이다. 셋째, 우리는 기도할 때마다 죄를 고백해야 한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우리는 하나님이 하라고 명하신 것을 제대로 따르지 못한 죄, 하지 말라고 명하신 것을 어긴 죄를 짓는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용서를 날마다 구해야 한다. 성경은 말씀한다.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 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 하니라 요일 1:8-10 【핵·심·개·념·정·리】 1) 일리바 기자는 절박한 상황 속에서 주기도문을 외우는 가운데 어떤 말씀을 받아들일 수 없었는가? 일리바 기자는 절박한 상황의 기도를 통해 하나님과 그녀의 관계가 강해질수록 주기도문의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라는 별 의식 없이 외우던 말씀에 회의가 들었다. 즉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라는 말씀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2) 하나님은 왜 우리의 기도를 원하시는가? 기도는 하나님을 믿는 우리의 신뢰를 표현하고 늘릴 수 있는 수단이기에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그의 피조물인 우리가 그를 의지할 때 기뻐하신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수단의 표현이 바로 기도이다. 3) 기도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첫째,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도해야 한다. 둘째, 믿음으로 기도해야 된다. 셋째, 기도할 때마다 죄를 고백해야 한다. 2023-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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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15
  • 김영배의 소요리문답_ 제십 계명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1)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 이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자기들이 벗은 줄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로 삼았더라 †창 3:6-7 ……… 2)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 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하지 말라 †롬 12:15-16 ……… 3)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고전 10:24 한 마피아 조직의 두목이 하루는 자기 밑에서 일하는 회계원이 속임수를 써서 1천만 달러나 되는 돈을 빼돌렸음을 알아내게 되었다. 회계사는 귀머거리였다. 두목은 자신이 벌이는 불법적인 사업에 대해 아무 얘기도 들을 수 없고, 따라서 법정에서 진술을 할 수도 없으리라는 생각에 그에게 일을 맡긴 것이었다. 두목은 사라진 돈의 행방을 추궁하려고 회계원에게 가면서 수화를 할 줄 아는 변호사를 대동했다. 두목이 회계원에게 물었다. “나한테 훔쳐간 1천만 달러는 어디에 있지?” 변호사가 두목의 말을 수화로 통역했다. “돈을 어디에 숨겨놨지?” 회계원이 수화로 대답을 했다. “1천만 달러라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변호사가 두목에게 전했다. “무슨 말씀이신지 도통 모르겠다는데요.” 두목은 주머니에서 9밀리 구경 권총을 꺼내들고 회계원의 관자놀이에 갖다 댔다. “다시 한 번 물어봐!” 변호사가 회계원에게 다시 두목의 이야기를 전했다. “사실대로 말하지 않으면 주목이 자네를 죽인다는군!” 회계원이 손짓으로 대답했다. “알았어요, 알았다고요. 보스가 이겼어요. 돈은 가방에 담아 퀸즈에 사는 내 조카 엔조의 온실에 묻어 놓았어요.” 두목이 변호사에게 물었다. “이 녀석이 뭐라고 그래?” 변호사가 전했다. “보스는 방아쇠를 당길 배짱이라고는 없는 물건이라는데요?”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라” 명하는 제십 계명은 모든 계명들 중에서도 가장 계시적이다. 이 계명은 율법의 내적인 성격을 다루고 있다. 탐심이 모든 다른 죄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야고보 사도는 말한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약 1:14-15 주님께서도 이 죄를 조심하라고 말씀하신다.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 하니라 눅 12:15 이 말씀이 교훈하고 경계하는 것은 물질주의에 빠지지 말라는 것이다. 우리가 욕심을 부리게 되면 다른 사람의 필요에 무관심해지고 냉담해지게 된다. 탐심을 가지게 되면 아무리 많은 부를 쌓아도 만족할 줄을 모르게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예수님의 어리석은 부자 비유를 깨닫지 못하는데 그 원인이 있다. 우리의 삶에서 가장 소중하고 고귀한 것은 생명이다. 우리의 탐심을 조절할 수 있는 비결은 우리가 어리석은 부자처럼 많은 것을 쌓았어도 오늘 밤 그 생명을 하나님이 가져가실 수 있다는 진리를 깨우치는 것이다. 또 비유로 그들에게 말하여 이르시되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이르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까 하고 또 이르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곳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눅 12:16-21 그러므로 주님이 말씀하신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마 16:26 【핵심개념정리】 1) 주님은 왜 우리가 탐심을 멀리 해야 한다고 가르치시는가?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 하고, 우리의 삶에서 가장 소중하고 고귀한 것은 생명이기 때문이다. 2) 탐심을 가지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우리가 욕심을 부리게 되면 다른 사람의 필요에 무관심해지고 냉담해지게 된다. 왜냐하면 탐심을 가지게 되면 아무리 많은 부를 쌓아도 만족할 줄을 모르게 되기 때문이다. 3) 어떻게 해야 탐심을 자제할 수 있는가? 우리의 탐심을 조절할 수 있는 비결은 우리가 어리석은 부자처럼 많은 것을 쌓았어도 오늘 밤 그 생명을 하나님이 가져가실 수 있다는 진리를 깨우치는 것이다. 2023-1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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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08
  • 김영배의 소요리문답_ 제구 계명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
    1) 그들이 요셉의 옷을 가져다가 숫염소를 죽여 그 옷을 피에 적시고 그의 채색옷을 보내어 그의 아버지에게로 가지고 가서 이르기를 우리가 이것을 발견하였으니 아버지 아들의 옷인가 보소서 하매 †창 29:31-32 ……… 2) 너희가 행할 일은 이러하니라 너희는 이웃과 더불어 진리를 말하며 너희 성문에서 진실하고 화평한 재판을 베풀고 마음에 서로 해하기를 도모하지 말며 거짓 맹세를 좋아하지 말라 이 모든 일은 내가 미워하는 것이니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슥 8:16-17 ……… 3)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과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라 †엡 4:24-25 50년 금슬지락(琴瑟之樂)이 무용지물이 된 이야기가 있다. 어린 시절부터 어울려 지내던 소년 소녀가 부부가 되어 결혼 50주년을 맞았다. 파티가 끝난 후 두 사람은 아주 먼 옛날 그 시절처럼 함께 거리를 걸어서 옛날에 다니던 학교를 찾아갔다. 학교에서 노부부는 자신들이 함께 앉아서 공부하던 오래된 의자를 발견했다. 그 의자에는 그가 그녀를 위해 새겨 넣었던 글자가 아직도 그대로 남아 있었다. “사랑해, 에스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노부부는 지나가던 현금수송차에서 실수로 떨어뜨린 돈 자루가 자신들의 눈앞에 놓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부인은 재빨리 자루를 집어 들었다. 두 사람은 자루를 어찌해야 할지 몰라서 일단 집으로 가져갔다. 자루 안에는 자그마치 5천만 원이나 되는 돈이 들어 있었다. 남편이 말했다. “이 돈은 돌려줘야 해요.” 그러자 부인이 말했다. “발견한 사람이 임자예요.” 부인은 말을 마치고 나서 돈 자루를 다락방에 감춰놓았다. 다음날 아침, 두 명의 검찰 수사관이 노부부가 사는 동네에서 집집마다 검문수색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마침내 노부부의 집에도 찾아왔다. 검찰 수사관이 노부부에게 물었다. “실례합니다만, 혹시 어제 저녁에 현금수송차에서 떨어진 돈 자루를 못 보셨습니까?” 부인이 대답했다. “아니오, 못 봤는데요.” “아닙니다. 아내는 지금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요.” 남편이 나서서 말했다. “돈은 집사람이 다락방에 감추어두었어요.” 그러자 부인이 다시 남편의 말을 가로챘다. “남편 말은 믿지 마세요. 늙어서 그런지 요즘 정신이 오락가락해요.” 그러나 두 수사관은 서로 마주 눈을 마주 친 뒤 남편의 이야기를 차근차근 들어보기로 했다. “어디 처음부터 이야기를 해주시지요.” 검찰 수사관의 부탁대로 남편은 아내에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에스더는 입을 비죽 내밀었다. 두 수사관은 노부부의 모습을 빙긋 웃으며 바라보았다. 남편은 자세를 바로 하고 어제 벌어진 일을 처음부터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어제 에스더와 내가 학교에 다녀오는 길이었는데 말입니다.” 여기까지 들은 검찰 수사관이 노인의 말을 자르며 동료에게 고갯짓을 하며 말했다. “이제 그만 가지!” 하나님은 진리의 하나님이시다. 그는 “진리의 하나님 여호와”(시 31:5)이시기에 거짓을 말씀하실 수 없다.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나 바울이 사도 된 것은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의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 영생의 소망을 위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딛 1:1-2 신자의 의무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온전하심 같이 온전해져야 한다.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마 5:48 그렇기 때문에 신자는 진실해야 한다. 그러나 온전하지 못하게 되는 까닭은 “모든 거짓은 진리에서 나지 않기”(요일 2:21) 때문이다. 거짓은 진리이신 하나님과 조화될 수 없다. 거짓은 어둡고 불안하고 파멸을 가져온다. 그러나 진실은 밝고 평안하고 구원을 가져온다. 하나님은 진리의 하나님이시고 거짓을 싫어하신다. 이러므로 땅에서 자기를 위하여 복을 구하는 자는 진리의 하나님을 향하여 복을 구할 것이요 땅에서 맹세하는 자는 진리의 하나님으로 맹세하리니 이는 이전 환난이 잊어졌고 내 눈 앞에 숨겨졌음이라 사 65:16 그러므로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사람은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한다”(고전 13:6). 그러나 사탄은 진리를 싫어한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요 8:44 진실해진다고 하는 것은 경험해본 사람은 알고 있듯이 쉬운 일은 아니다. 거짓을 말하거나 진실을 숨기는 일이 더 합당하게 생각되는 경우도 있을 수 있다. 또한 진실을 말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질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불가능하게 보이는 일이 하나님에게는 가능하다. 무릇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눅 18:27 주님이 말씀해주시듯이 사람은 속에 있는 것이 밖으로 나타나게 되어있다.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 마 12:34-35 우리 마음에 믿음과 진실이 아니라 자아만이 가득 차있다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진리를 숨기거나 왜곡시키는 일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우리 마음이 믿음과 진리로 채워진다면 우리의 말은 날로 진실해지고 남을 유익하게 할 것이다. 우리가 날마다 진실만을 말하려고 할 때 명심해야 될 것이 두 가지가 있다. 첫째, 우리는 자신이 진실하다고 믿는 것을 이야기해야 한다. 자신이 믿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은 무책임한 사람이 되고 말 것이다.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딤후 3:14 둘째, 우리는 실제로 일어나고 목격한 일을 말해야 한다. 우리는 남에게 들은 것을 사실인 것처럼 말해서는 안 된다. 그러한 태도를 성경은 금한다. 너는 네 백성 중에 돌아다니며 사람을 비방하지 말라 레 19:16 지혜로운 사람은 듣는 것을 다 믿지 않고 특히 좋지 않은 소문일 때는 더욱 그러하다. 그는 들은 사실을 알아보기 전에는 함부로 말하지 않고 나쁜 이야기는 더욱 입에 담기도 싫어하게 될 것이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약 1:19 【핵심개념정리】 1) 거짓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인 사탄에게서 나온다(참조. 요 8:44). 2) 우리가 진실해지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 마음에 믿음과 진실이 아니라 자아만이 가득 차있다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진리를 숨기거나 왜곡시키는 일을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반대로 우리 마음이 믿음과 진리로 채워진다면 우리의 말은 날로 진실해지고 남을 유익하게 할 것이다. 3) 말할 때 주의해야 할 두 가지가 무엇인가? 첫째, 우리는 자신이 진실하다고 믿는 것을 이야기해야 한다. 자신이 믿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은 무책임한 사람이 되고 말 것이다. 둘째, 우리는 실제로 일어나고 목격한 일을 말해야 한다. 우리는 남에게 들은 것을 사실인 것처럼 말해서는 안 된다. 그러한 태도를 성경은 금한다. 2023-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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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1-01
  • 김영배의 소요리문답_ 제팔 계명 "도둑질하지 말라"
    1) 어떤 행인이 그 부자에게 오매 부자가 자기에게 온 행인을 위하여 자기의 양과 소를 아껴 잡지 아니하고 가난한 사람의 양 새끼를 빼앗아다가 자기에게 온 사람을 위하여 잡았나이다 하니 다윗이 그 사람으로 말미암아 노하여 나단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이 일을 행한 그 사람은 마땅히 죽을 자라 †삼하 12:4-5 ……… 2)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 하였나이까 하는 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 †말 3:8 ……… 3)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 하지 말고 돌이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엡 4:28 유대교 신비주의자 주시아 랍비가 이런 말을 했다. 도둑에게서도 다음의 일곱 가지를 배울 수 있다. 첫째, 그는 밤늦게까지 일을 한다. 둘째, 그는 자신이 목표한 일을 하룻밤에 끝내지 못하면 다음날 밤에 또다시 도전한다. 셋째, 그는 함께 일하는 동료의 모든 행동을 자기 자신의 일처럼 느낀다. 넷째, 그는 적은 소득에도 목숨을 건다. 다섯째, 그는 아주 값진 물건도 집착하지 않고 몇 푼의 돈과 바꿀 줄 안다. 여섯째, 그는 시련과 위기를 견뎌낸다. 그런 것은 그에게 아무것도 아니다. 일곱째, 그는 자신이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며 자기가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 가를 잘 안다. 승리와 명예는 늘 상대보다 더 끈질기고 위의 일곱 가지 특성을 아는 도둑과 같은 사람에게 돌아가게 마련이다. 전화를 발명한 세 사람 가운데 최종적인 승리를 거머쥔 사람은 세 사람 중 가장 비양심적인 인물이었다.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난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Alexander Graham Bell)은 1872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처음에는 발성기관 생리학을 연구하고 농아학교 교사들을 가르치는 전문가로 일했다. 그러던 그가 1876년 2월 14일 전화기에 대한 특허를 신청해서 3주 뒤 특허를 받았다. 독일의 물리교사 필리프 라이스(Philipp Reis)가 1861년에 고안한 전화기가 아직 특허를 받을 만큼 제대로 완성되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벨의 특허권 획득은 정당했다. 라이스의 전화기는 코맹맹이 소리에다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탈리아계 미국인 안토니오 메우치(Antonio Meucci)가 발명한 전화기는 문제가 다르다. 벨은 메우치의 실험실에서 함께 일하면서 제대로 작동하는 전화기를 처음 보았다. 그리고 메우치는 그 전화기로 벌써 1871년에 특허를 따놓은 상태였다. 그러나 메우치의 특허권은 1874년에 효력이 정지되었다. 경제적 어려움으로 메우치는 자신의 발명품에 관심을 기울일 여력이 없었다. 1876년 벨이 특허를 따내자 메우치는 벨을 사기 혐의로 고소했다. 그러나 그 사이 급작스럽게 유명해진 벨이 고용한 유능한 변호사들과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한 남자 사이의 소송은 한없이 이어졌다. 1896년 메우치가 한이 맺혀 숨을 거둘 때까지도 판결이 나지 않았다. 벨이 속이고 기술을 훔친 사람이 또 있었다. 그 사람은 오하이오 주 출신의 전기공학과 교수 엘리사 그레이(Elisha Gray, 1835-1901)였다. 그레이는 우선 운이 지독하게 없는 사람이었다. 그가 특허신청서를 들고 특허청에 도착해보니 벌써 두 시간 전에 벨이 특허 신청을 하고 갔다는 것이다. 이 두 시간이 두 사람의 운명을 갈라놓았다. 그걸 갖고 벨을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데 특허장이 발부된 지 사흘 만에 열린 처음 열린 전화기 시연회에서 벨의 전화기가 그레이의 기술을 도용한 사실이 드러났다. 마이크로폰과 금속진동판이 그레이의 특허신청서에 명시된 기술방식이었다. 이것이 벨의 고유한 기술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과학역사가들 사이에선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렇다면 벨이 특허를 취득한 전화기의 절반은 그레이가 만든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번에는 그레이가 벨을 사기 혐의로 고소했다. 이와 관련된 소송이 무려 100건이 넘었다. 미국 대법원은 그레이의 소송을 모두 기각했다. 그러나 벨에게는 무척 불명예스러운 일이었다. 최종 판결에서는 승리를 얻었지만 대법원 판사들의 의견은 정확히 찬반 동수로 엇갈렸다. 어쨌든 벨은 두 번의 부정을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부와 명성을 한꺼번에 얻었다. 1922년 벨이 숨을 거두자 미국의 전화국들은 1,400만 전화회선을 1분간 정지시키고 그의 죽음을 기렸다. 반면에 그레이는 백과사전 한 귀퉁이에 이름만 올라 있고, 메우치는 그 이름마저 잊혀졌다. 아버지가 없어서 추위에 떨며 굶주리고 있는 일곱 조카들을 위해 빵 한 덩이를 훔친 죄로 체포된 “레미제라블”의 주인공 장발장은 19년 감옥생활을 했다. 도둑질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인류에게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도덕 표준이다. 그러나 성경만이 도둑질하는 것이 왜 나쁜지를 분명하게 밝혀준다. 모든 사람이 제 각각 정당하게 소유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눠주신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한다.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약 1:17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것을 훔치는 것은 하나님에게 죄를 범하는 것이다. 물론 도둑질은 다른 사람에게 죄를 범하는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 훔친 것은 그 사람에게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다윗의 가슴 여미는 고백이 이러한 생각을 잘 드러내고 있다.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의 명예와 정절을 훔치고 그녀의 남편의 생명까지 뺏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렇게 고백한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시 51:4 우리가 장발장처럼 빵을 훔치지 않거나 다윗처럼 다른 사람의 부인을 빼앗지 않았다고 해서 제팔 계명을 어기지 않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그레이엄 벨의 경우처럼 우리도 훔치는 방법과 대상이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다. 즉 그것은 돈, 시간, 명예, 재능, 또는 하나님의 것이 될 수도 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했다고 비난하시고 어리둥절한 그들에게 그것이 무엇인지 가르쳐주신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 하였나이까 하는 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 말 3:8 하나님에게 응당 바쳐야 할 헌금이나 예배나 전도를 태만히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이 된다. 우리가 직장에서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하지 않고 빈둥거린다면 그것도 고용주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이다. 남에게 돈을 빌려 잘못 쓰거나 제때 갚지 않는 것도 남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이다. 또 많은 사람들이 생계유지에도 힘이 모자라 허덕거리고 있는데 자신은 사치에만 몰두하고 있다면 이것도 자신의 것을 자신이 도적질하고 있는 것이다. 제팔 계명을 가장 잘 지킬 수 있는 방법을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가르쳐주신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마 7:12 이 가르침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바는 물질적인 면과 정신적인 면을 다 같이 말씀한다. 이 가르침은 궁핍하고 어려운 사람에게는 물질로 도움을 주어야 하고, 슬픔이나 좌절을 겪는 사람에게는 위로와 격려로 도움을 주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의 실례를 주님은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가르쳐주신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에 의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하리니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이르시되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 하였느니라 하시니 그들도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 하더이까 이에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하시리니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마 25:35-46 【핵심개념정리】 1) 도둑질은 왜 나쁜가? 모든 사람이 제 각각 정당하게 소유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눠주신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한다.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약 1:17).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것을 훔치는 것은 하나님에게 죄를 범하는 것이다. 물론 도둑질은 다른 사람에게 죄를 범하는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 훔친 것은 그 사람에게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2) 도둑질은 어떻게 다양한가? 하나님에게 응당 바쳐야 할 헌금이나 예배나 전도를 태만히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이 된다. 우리가 직장에서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하지 않고 빈둥거린다면 그것도 고용주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이다. 남에게 돈을 빌려 잘못 쓰거나 제때 갚지 않는 것도 남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이다. 또 많은 사람들이 생계유지에도 힘이 모자라 허덕거리고 있는데 자신은 사치에만 몰두하고 있다면 이것도 자신의 것을 자신이 도적질하고 있는 것이다. 3) 제팔 계명을 가장 잘 지키는 방법은 무엇인가? 제팔 계명을 가장 잘 지킬 수 있는 방법을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가르쳐주신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마 7:12). 이 가르침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바는 물질적인 면과 정신적인 면을 다 같이 말씀한다는 것이다. 이 가르침은 궁핍하고 어려운 사람에게는 물질로 도움을 주어야 하고, 슬픔이나 좌절을 겪는 사람에게는 위로와 격려로 도움을 주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2023-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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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0-25
  • 김영배의 소요리문답_ 제칠 계명 "간음하지 말라"
    1) 어떤 남자가 유부녀와 동침한 것이 드러나거든 그 동침한 남자와 그 여자를 둘 다 죽여 이스라엘 중에 악을 제할지니라 처녀인 여자가 남자와 약혼한 후에 어떤 남자가 그를 성읍 중에서 만나 동침하면 너희는 그들을 둘 다 성읍 문으로 끌어내고 그들을 돌로 쳐 죽일 것이니 그 처녀는 성안에 있으면서도 소리 지르지 아니하였음이요 그 남자는 그 이웃의 아내를 욕보였음이라 너는 이같이 하여 너희 가운데에서 악을 제할지니라 만일 남자가 어떤 약혼한 처녀를 들에서 만나서 강간하였으면 그 강간한 남자만 죽일 것이요 †신 22:22-25 ……… 2)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마 5:27-28 ……… 3) 음행을 피하기 위하여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 남편은 그 아내에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 아내는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그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 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가 절제 못함으로 사탄이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고 †고전 7:2-5 조남국 박사는 자신의 병원에 입원 중인 환자 하나와 관계를 하고 나서 죄책감에 시달렸다. 박사는 그 일을 잊어보려고 애를 썼지만 매번 실패했다. 죄의식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심하게 그를 짓눌렀다. 박사는 가끔 자신의 내면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를 듣고 진정을 되찾기도 했다. “조남국, 그렇게 신경 쓸 일도 아니야. 환자와 관계를 가진 의사가 네가 첫 번째도 아니고, 또 결코 마지막도 아닐 거야. 게다가 너는 유부남도 아니고 말이야. 그러니 너무 크게 마음 쓰지 않아도 될 거야.” 그런데 애써 평정을 되찾고 나면 그의 내면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피할 도리 없이 들려왔다. “조남국, 넌 수의사라고!” 프로이드가 쾌락원리를 최초로 공식화한 후 현대의 대중매체는 성(性)을 미끼로 물질주의와 쾌락의 추구를 선동한다. 20세기 쾌락주의는 플레이보이 철학으로 표현될 수 있다. 플레이보이 잡지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성을 시궁창에서 꺼내 쾌락의 철학과 함께 화려한 종이에 인쇄하여 팔았기 때문이다. 쾌락주의는 개인의 쾌락을 선(善)이라고 생각하여 그것을 삶의 가치의 목표로 삼고 도덕은 쾌락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한다. 이것에 덧붙여 성경의 윤리에 도전하는 상황윤리라고 하는 신도덕주의(New Morality)가 있다. 이것을 무슨 중요한 사상이라도 되는 듯이 로빈슨(J, A, T. Robinson), 플래처(Joseph Fletcher), 콕스(James Cox) 등이 주창했다. 이들의 주장은 다음의 두 가지에 근거하고 있다. 첫째, 어떤 주어진 상황에 알맞은 행동 방향은 그 상황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지 미리 결정된 어떤 윤리적 기준이나 성경적 기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둘째, 어떤 윤리적 상황에서나 적용될 수 있는 유일한 기준은 사랑에 대한 요구다. 다른 사람에게 해가 되지 않는다면 무슨 일이든지 옳다고 상황윤리주의자들은 주장한다. 그리고 어떤 일이 다른 사람에게 해가 되느냐 안 되느냐의 여부는 오직 그 상황 여부에 달려있다고 내세운다. 이 주장에 따르면 사통이나 간음도 그 상황 여부에 따라서 반드시 나쁜 일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결론이다. 이 간음조차도 그것의 옳고 그름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느냐 해가 되느냐에 달려있다는 것이다. 쾌락주의를 선동하는 언론매체와 신도덕주의의 영향으로 어떤 일이든 좋으면 실행하라는 외침이 우리 시대의 표어가 되어버렸다. 십계명에 나타난 하나님의 율법과 산상수훈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비추어 볼 때 그리스도인들은 그 외침을 거부해야 한다. 루이스(C. S. Lewis)는 단순한 그리스도교(Mere Christianity)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리스도교의 표준은 너무도 어렵고 우리 자신의 본능과는 크게 어긋나기 때문에 우리 자신과 우리 사회가 다 같이 무엇인가 잘못된 점이 분명히 있다는 사실을 솔직히 인정해야 한다. 쾌락은 근본적으로든 일반적으로든 삶의 성취목표가 아니라 하나의 결과이거나 부차적인 효과에 지나지 않는다. 즉 쾌락은 사람이 의미를 실현하게 되고 가치를 인식하게 되면 부수적으로 얻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쾌락을 목표로 얻고자 하면 그 사람은 반드시 실패한다. 왜냐하면 쾌락은 목표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이브를 만드시고 아담에게 데려왔을 때 아담은 외쳤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창 2:23 하나님은 서로 좋아하는 둘이 한 몸을 이루게 해주셨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창 2:24-25 우리는 성경을 통해 태초에 성적인 욕구가 있었고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적인 욕망이 잘못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대로 이 성욕을 만족시키는 것은 잘못될 것이 하나도 없다. 성경은 사람들이 결혼하고 싶어 하는 것도 이 욕구 때문이란 사실을 솔직히 인정한다. 그러나 성경이 문제 삼는 것은 성욕을 불법으로 만족시키려고 하는 데 있다. 즉 하나님이 정해주신 결혼 밖에서 갖는 성적인 관계를 의미한다. 성경은 합법적으로 결혼한 사람 이외의 성관계는 죄로 규정한다. 더 나아가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마 5:27-28 제칠 계명과 주님의 가르침이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명령하는 것은 결혼 전에는 순결을 지키고 결혼 후에는 결혼생활에 충실하라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것에 대해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교훈한다.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이 사람은 이러하고 저 사람은 저러하니라 내가 결혼하지 아니한 자들과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결혼하라 정욕이 불 같이 타는 것보다 결혼하는 것이 나으니라 고전 7:7-9 결혼 생활을 떠나서 성적 쾌락을 추구하면 추구할수록 목적하는 쾌락은 얻지 못하고 더욱 공허해지고 타락하게 된다. 우리 사회는 점점 성에 대해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풍조로 물들어 가고 있다. 우리가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면 우리는 진정한 기쁨을 얻게 되고 축복된 삶을 누리게 될 것이다. 베드로 사도가 그 방법을 이렇게 지시해준다.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이런 것이 없는 자는 맹인이라 멀리 보지 못하고 그의 옛 죄가 깨끗하게 된 것을 잊었느니라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벧후 1:4-11 【핵심개념정리】 1) 성적인 욕망은 나쁜 것인가? 우리는 성경을 통해 태초에 성적인 욕구가 있었고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적인 욕망이 잘못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대로 이 성욕을 만족시키는 것은 잘못될 것이 하나도 없다. 성경은 사람들이 결혼하고 싶어 하는 것도 이 욕구 때문이란 사실을 솔직히 인정한다. 2) 성경이 성욕에 대해 문제 삼는 것은 무엇인가? 성경이 문제 삼는 것은 성욕을 불법으로 만족시키려고 하는 데 있다. 즉 하나님이 정해주신 결혼 밖에서 갖는 성적인 관계를 의미한다. 성경은 합법적으로 결혼한 사람 이외의 성관계는 죄로 규정한다. 3) 간음을 막고 쾌락을 얻을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무엇인가? 결혼 생활을 떠나서 성적 쾌락을 추구하면 추구할수록 목적하는 쾌락은 얻지 못하고 더욱 공허해지고 타락하게 된다. 우리가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면 우리는 진정한 기쁨을 얻게 되고 축복된 삶을 누리게 될 것이다. 2023-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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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0-20
  • 김영배의 소요리문답_ 제육 계명 "살인하지 말라"
    1)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 †창 9:6 ……… 2)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마 5:21-22 ……… 3) 누구든지 언제나 자기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에게 함과 같이 하나니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임이라 †엡 5:29-30 “여보세요.” 전화기 너머에서 어린 소녀가 말했다. “여보세요. 얘야, 아빠다!” 박태준이 말했다. “엄마 지금 옆에 없고, 셋째 삼촌하고 위층 방에 있어요.” 짧은 침묵이 흐른 뒤. “셋째 삼촌이라고? 너한테 셋째 삼촌이 어디 있다고?” “셋째 삼촌 말야! 지금 위에 엄마랑 같이 있다니까요.” “거 참 이상하구나. 여하튼 알았다. 그럼 지금부터 아빠가 하는 말 잘 들어라. 우선 수화기를 잠깐 내려놓는 거야. 그리고 층계를 달려 올라가 방문을 두드리고, 아빠가 방금 집 앞에 차를 댔다고 외치는 거다. 알았지?” “알았어요!” 몇 분 후, 소녀가 전화기로 돌아왔다. “아빠가 하라는 대로 했어요.” “그랬더니?” “엄마는 옷도 안 입고 침대에서 뛰쳐나와 2층을 마구 헤집고 다니더니, 계단 앞에서 넘어져 굴러 떨어졌어요. 엄만 지금 게단 밑에 누워 있는데, 목이 비뚤어져 있어. 죽었나봐요...” “이걸 어쩌지? 그럼 그 삼촌이란 사람은?” “삼촌도 옷을 하나도 안 입고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막 흥분해서 뒤쪽 창문으로 뛰쳐나가 수영장으로 뛰어들었어요. 그런데 삼촌은 아빠가 지난주에 수영장 물을 빼버린 걸 몰랐나 봐요? 지금 수영장 바닥에 누워 있는데 꼼짝도 안 해요. 삼촌도 아마 죽었나 봐요.” 한참 있다가 박태준이 말했다. “수영장이라고? 우리 집엔 그런 게 없는데. 얘야, 너희 집 전화번호가 혹시 444-4989 아니니?” 가인이 자신의 동생 아벨을 죽인 이후 인간은 살인을 끊임없이 저지르고 있다. 또 위의 웃기는 경우의 이야기에서 보듯이 우리는 뜻하지 않은 살인을 저지를 수도 있다. 성경의 관점에서 볼 때 살인은 매우 넓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살인이라는 말 자체가 누구나 죄의식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요소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에서 산상수훈에서의 예수님의 가르침은 아주 의미심장하다.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살인이란 단지 외적인 행동일 뿐이고, 십계명도 그런 행동만을 지적한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런 것만이 살인의 전부냐고 물으신다. 즉 예수님은 마음과 태도도 문제를 삼고 계시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옛 사람에게 말한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마 5:21-22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성내는 것뿐만 아니라 모욕하는 말조차 살인에 버금가는 죄가 된다. 라가라 하는 말의 원래 뜻은 ‘비었다’를 의미한다. 비었다고 하는 라가(raca)를 사용해 욕을 하게 되면 상대방을 속이 ‘빈 놈’이나 ‘정신 나간 놈’이라는 뜻으로 모욕하는 것이다. 그리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말의 원어 모로스(moros)는 바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이 말들은 도덕적으로 바보이거나 정신 나간 사람을 의미한다. 즉 바보짓을 하거나 정신 나간 짓을 하는 사람을 빗대는 말인 것이다. 그래서 이런 말들을 듣는 사람은 마음과 명예에 심한 상처를 받게 된다. 예수님은 누구를 비방하거나 모욕하는 것조차도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제육 계명을 어기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우쳐주신다. 주님의 이 가르침은 우리의 본성을 적나라하게 밝혀주신다.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 화를 내고, 투덜대고, 비방하고, 무시하는 말을 함부로 한다. 예수님은 우리의 그러한 행위가 살인을 저지르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성향을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을 주님께서 말씀해주신다.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마 5:43-45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고 기도하면 세상을 섭리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자식이 되어 우리의 감정을 다스리게 될 것이다. 그래서 살인하지 말라는 제육 계명을 지키게 될 것이다. 【핵심개념정리】 1) 살인에 대한 이스라엘 지도자와 예수님의 관점은 어떻게 다른가? 예수님 당시의 이스라엘 지도자들은 살인이란 단지 외적인 행동일 뿐이고, 십계명도 그런 행동만을 지적한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은 그런 것만이 살인의 전부가 아니라 마음과 태도도 문제를 삼으신다. 2) 하나님의 관점에서 비방이나 모욕은 어떤 죄에 해당하는가? 예수님은 누구를 비방하거나 모욕하는 것조차도 하나님의 관점에서 볼 때 살인하지 말라는 제육 계명을 어기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우쳐주신다. 3) 우리는 자신을 어떻게 다스릴 수 있는가? 우리가 이웃을 사랑하고 기도하면 세상을 섭리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자식이 되어 우리의 감정을 다스리게 될 것이다. 2023-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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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0-12
  • 김영배의 소요리문답_ 제오 계명 "네 부모를 공경하라"
    1)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 †출 20:12 ……… 2)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조세를 받을 자에게 조세를 바치고 관세를 받을 자에게 관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롬 13:7-8 ……… 3)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이로써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엡 6:1-3 몸빛이 검고 울음소리가 흉측하여 죽음을 알리는 새로 전 세계에 알려진 까마귀는 자기 어미에게 먹이를 물어다 준다. 그래서 까마귀를 효조(孝鳥)라고 해서 일본에서는 상당히 귀하게 여기는 새다. 농경사회에서는 노쇠한 부모를 자식이 까마귀처럼 공양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현대사회에서도 그러한 의미가 좀 쇠퇴한 감이 있기는 하더라도 그 정신은 이어지고 있다. 어느 집에 아들 셋이 있었다. 세 아들은 모두 성장해서 부모님의 집을 떠나 세상 밖으로 나갔고, 저마다 성공하여 부자가 되었다. 70회 어머니의 생일을 앞두고 한 자리에 모인 삼형제는 무슨 선물을 해드리면 좋을지 의논을 하기 시작했다. 첫째가 먼저 말을 꺼냈다. "난 어머니를 위해 커다란 새 집을 지어드리려고 해." 둘째가 말했다. “그러면 난 어머니에게 운전수가 딸린 벤츠를 사드리지.” 그러자 셋째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형들 선물은 내 선물에는 따라오지 못하겠는걸. 잘 알다시피 어머니는 신앙심이 깊고 성경을 즐겨 읽으시잖아. 그런데 이제 글씨를 제대로 읽지 못할 만큼 눈이 나빠지셨다는 것도 알고들 있죠? 나는 어머니에게 모든 성경 구절을 외우는 갈색 앵무새를 보내겠어. 한 수도원의 수도사 스무 명에게 부탁해서 앵무새가 성경을 외울 수 있게 12년간 훈련을 시켜왔거든. 그 대가로 해마다 100만 달러를 성금으로 내야했지. 그래도 그럴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으니까. 어머니가 성경 몇 장 몇 절인지만 말씀하시면 나머지는 앵무새가 다 알아서 암송해 줄 거라고요.” 생일이 지나고 어머니는 세 아들에게 각각 감사의 편지를 보냈다. “마태,” 어머니는 첫째 아들에게 이렇게 적어 보냈다. “네가 지어준 집은 너무 크구나. 나는 기껏해야 하나밖에 방을 쓸 일이 없는데 그 많은 방을 청소하자니 이만저만 벅찬 게 아니란다.” “마가,” 어머니는 둘째 아들에게는 다음같이 써 보냈다. “이 어미는 차를 타고 여기저기 돌아다니기에는 너무 늙었단다. 난 그냥 집에서 지내는 게 더 편하고 좋아.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고급스러운 벤츠는 내가 좋아하지도 않는 차야. 게다가 무슨 운전수가 그렇게 불친절한지 말이다.” “사랑하는 요한,” 어머니는 셋째 아들 요한에게 이렇게 썼다. “이 어미가 무얼 바라는지 아는 아들은 너뿐이다. 네가 보내준 닭, 정말 맛있게 잘 먹었단다!”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부모를 공경하는 효도의 의미는 물질과 육체적인 섬김은 물론이고 부모의 뜻과 생각을 존중한다는 데 더 무게를 두고 있다. 존 스토트(John Stott)는 그의 저서 “그리스도인의 확신”(Confirmation)에서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께서 십계명 두 판을 모세에게 주셨다. 첫째 돌판에는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의무가 새겨져 있다. 둘째 돌판에는 이웃에 대한 인간의 의무가 새겨져 있다. 그런데 하나님은 부모를 공경하라는 제오 계명을 첫째 돌판에 새기셨다. 그 이유는 보이는 육신의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아니하는 부모이신 하나님을 공경할 수 없다는 사실을 하나님이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웃에 대한 우리의 의무는 감당하지 못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의무는 감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온당하지 못한 것 같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하여 이웃들도 섬겨야 한다. 하늘나라에 적합한 사람은 세상에서도 쓸모가 있어야 한다. 제오 계명은 부모에 대한 의무를 지시할 때 다른 종류의 부모들도 내포하고 있다. 즉 정치적인 부모(세상의 권좌에 있는 사람들), 영적인 부모(교회의 목사들), 그리고 연륜과 경험을 통한 가르침을 받아 부모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스승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제오 계명이 특별히 지적하고 있는 것은 육적인 부모이다. 제오 계명은 “네 부모를 공경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 20:12)하고 말씀한다. 이 말씀은 하나님이 우리 위에 있게 하신 이들을 우리가 존경하고 감사하는 마음과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인간은 본질적으로 권위를 싫어한다. 그러므로 자녀들이 부모를 공경하도록 배우지 아니하면 나중에 정당한 권위를 부여받은 대상에게도 거역하게 될 것이다. 더 나아가 자녀들이 자신을 낳아준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다면 하나님도 경외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 22:6)하고 말씀한다. 또한 부모들도 자녀들의 마땅한 공경을 받기에 합당한 부모가 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경 말씀을 따르는 부모가 되어야 할 것이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엡 6:4 【핵심개념정리】 1) 십계명의 두 돌판이 지시하는 주요한 두 의무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십계명 두 판을 모세에게 주셨다. 첫째 돌판에는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의무가 새겨져 있다. 둘째 돌판에는 이웃에 대한 인간의 의무가 새겨져 있다. 그런데 하나님은 부모를 공경하라는 제오 계명을 첫째 돌판에 새기셨다. 그 이유는 보이는 육신의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아니하는 부모이신 하나님을 공경할 수 없다는 사실을 하나님이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2) 제오 계명은 부모에 대한 의무를 지시할 때 다른 종류의 부모들도 내포하고 있는데 그들은 누구인가? 정치적인 부모(세상의 권좌에 있는 사람들), 영적인 부모(교회의 목사들), 그리고 연륜과 경험을 통한 가르침을 받아 부모라고 할 수 있는 사람들(스승들)이 있을 수 있다. 3) 제오 계명을 자녀에게 가르치지 않으면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자녀들이 부모를 공경하도록 배우지 아니하면 나중에 정당한 권위를 부여받은 대상에게도 거역하게 될 것이다. 따라서 자녀들이 자신을 낳아준 부모를 공경하지 않는다면 하나님도 경외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 22:6) 하고 말씀한다. 2023-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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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0-04
  • 김영배의 소요리문답_ 제사 계명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
    1) 하나님이 그가 하시던 일을 일곱째 날에 마치시니 그가 하시던 모든 일을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니라 하나님이 그 일곱째 날을 복되게 하사 거룩하게 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그 창조하시며 만드시던 모든 일을 마치시고 그 날에 안식하셨음이니라 †창 2:2-3 ……… 2) 만일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 내 성일에 오락을 행하지 아니하고 안식일을 일컬어 즐거운 날이라 여호와의 성일을 존귀한 날이라 하여 이를 존귀히 여기고 네 길로 행하지 아니하며 네 오락을 구하지 아니하며 사사로운 말을 하지 아니하면 네가 여호와의 안에서 즐거움을 얻을 것이라 내가 너를 땅의 높은 곳에 올리고 네 조상 야곱의 업으로 기르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 †사 58:13-14 ……… 3) 인자는 안식일의 주인이니라 †마 12:8 1800년대 초반 한 소년이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하기 위하여 뉴욕으로 갔다. 소년은 그가 자란 고향 마을의 인쇄소에서 일을 배웠었다. 그래서 그가 앞으로 자신의 이름을 내고 돈을 버는데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은 평범한 그리스도교 가정에서 철저하게 신앙 훈련을 받은 것 말고는 오직 인쇄 기술뿐이었다. 그는 뉴욕의 아주 큰 인쇄소에 취직이 되었다. 어느 토요일 오후 그는 주일날까지 일하지 않고는 마칠 수 없는 큰 인쇄 일거리를 맡게 되었다. 그는 그 일거리를 한 번 보고 혼자 말을 했다. “오늘 자정까지 이 일을 하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마쳐야겠군. 주일 날 일할 수는 없으니까 말이야.” 그 말을 들은 공장장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럼 자네는 일자리를 잃을 텐데.” 그 말을 들은 소년은 인쇄 원본을 사장에게 넘겨주었다. 영문을 모르는 표정의 사장에게 그는 말했다. “저는 안식일을 반드시 지켜야 된다고 배웠기 때문에 주일날 일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신앙 양심을 어기는 것보다 사직하는 게 차라리 낫겠다고 생각합니다.” 사장은 소년의 정신에 감동을 받았다. 그래서 사장은 다시는 그 소년에게 주일날 근무를 요구하지 않았다. 그 소년이 바로 미국의 가장 훌륭한 문학서들을 출판하고 전 세계에 큰 영향을 끼친 하퍼 브라더스(Harper Brothers) 출판사의 설립자 제임스 하퍼(James Harper, 1795. 4. 13. - 1869. 3. 27.)이다. 안식일의 히브리 원어 사바쓰(Sabbath)는 멈추다, 쉬다 뜻을 지니고 있다. 하나님이 엿새 동안 창조하시고 일곱 째 날에 쉬셨음을 기리기 위해 시작된 것이 안식일이다. 이것은 사람이 휴식하기 위하여 잠을 자듯이 아무런 활동을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은 엿새 동안의 창조를 마치고 쉬셨지만 그의 말씀과 섭리로 세상을 운행하고 다스리셨다. 그렇듯 안식이란 어떤 일을 하다가 손을 놓고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죄 짓는 일을 하다가 거룩한 일을 한다는 것도 아니다. 교리문답이 “세상의 여러 가지 일과 오락에 대하여” 말할 때 하나님이 이러한 일들은 엿새 동안만 하도록 명하신 것이다. 이것은 우리의 삶의 어떤 부분만이 세상적인 것이거나 신앙적이라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모든 삶이 신앙적이다. 우리는 이 세상의 일과 오락을 통해서도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려야 하고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그러나 일주일 가운데 하루는 다른 일을 해야 한다. 하루는 우리의 주 하나님에게 예배드리고 찬양하는 일을 통해 몸이 쉼을 얻고 힘을 얻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주일을 안식일로 삼는 문제에는 세 가지 접근 방법이 있다. 첫째, 그리스도인들은 토요일에 예배를 드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은 안식교와 그 밖의 다른 사람들이 주장한다. 그들의 주장의 핵심은 토요일이 구약의 안식일에 맞는다는 것이다. 둘째, 신약의 주일이 구약의 안식일과 같은 날이기 때문에 구약의 방법과 똑같이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은 주일을 그리스도인의 안식일이라 부르고 이렇게 말하고 있다. 이 안식일은 여호와에게 거룩히 지켜야 한다. 이날 그리스도인들은 일상생활의 용무는 미리 정리한 후에 세상일과 오락에 관한 말이나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온종일 거룩하게 쉬면서 공동예배와 기도와 구제를 행하는 일에 전념해야 한다. 개혁주의 청교도 신학은 이 입장을 강력하게 지지한다. 셋째, 안식일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폐기되었기 때문에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고 나름의 특징을 지닌 새로운 날 주일이 안식일을 대체했다고 주장하는 견해가 있다. 이것은 존 칼빈의 견해이다. 칼빈은 유대인들을 위한 거룩한 안식일은 폐지되고 그 날을 대신하여 다른 새로운 날이 정해졌다고 분명하게 주장한다. 주일도 하나님이 세우신 날이다. 그러나 안식일과 달리 이 날은 이스라엘을 위한 것이 아니라 교회를 위한 날이고 안식일과는 상당히 다른 특징을 지니고 있다. 안식일은 휴식하고 전혀 활동을 하지 않는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엄격한 형벌을 받았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주일은 기쁨과 활동과 기대로 넘치는 날이다. 주일의 특징은 첫 번째 주님의 날에 있었던 사건인 부활을 기리는 것이다. 부활하신 주님은 제자들을 다시 불러 모으고, 그들을 가르치고, 성령을 주고, 그리고 세계에 복음을 전파하라는 임무를 주고 승천하셨다. 안식일이 폐지되고 주일이 세워졌다는 사실은 초대교회의 예배가 안식일이 아니라 주일로 재빨리 대체되었다는 데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사람들은 십계명의 제사 계명이 안식일만 아니라 다른 날과도 연관되어 있음을 잊어버릴 때가 종종 있다. 이 계명은 사실 모든 날에 적용된다.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을 섬기듯이 엿새를 열심히 일하고 하루는 구별하여 하나님에게 예배드리고 다음 엿새를 위하여 거룩하게 쉬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도 바울의 권면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종들아 모든 일에 육신의 상전들에게 순종하되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와 같이 눈가림만 하지 말고 오직 주를 두려워하여 성실한 마음으로 하라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 이는 기업의 상을 주께 받을 줄 아나니 너희는 주 그리스도를 섬기느니라 골 3:22-24 【핵심개념정리】 1) 안식일은 어떻게 지켜야 하는가? 하나님이 엿새 동안 창조하시고 일곱 째 날에 쉬셨음을 기리기 위해 시작된 것이 안식일이다. 이것은 사람이 휴식하기 위하여 잠을 자듯이 아무런 활동을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은 엿새 동안의 창조를 마치고 쉬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쉬시는 날에도 그의 말씀과 섭리로 세상을 운행하고 다스리셨다. 그렇듯 안식이란 어떤 일을 하다가 손을 놓고 아무런 일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죄 짓는 일을 하다가 거룩한 일을 한다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의 어떤 부분만이 세상적인 것이거나 신앙적이라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모든 삶이 신앙적이다. 우리는 이 세상의 일과 오락을 통해서도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려야 하고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 그러나 일주일 가운데 하루는 다른 일을 해야 한다. 하루는 우리의 주 하나님에게 예배드리고 찬양하는 일을 통해 몸이 쉼을 얻고 힘을 얻어야 한다. 2) 안식일과 관련하여 주일에 대한 칼빈의 견해는 무엇인가? 안식일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 폐기되었기 때문에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고 나름의 특징을 지닌 새로운 날 주일이 안식일을 대체했다고 칼빈은 주장한다. 그는 유대인들을 위한 거룩한 안식일은 폐지되고 그 날을 대신하여 다른 새로운 날이 정해졌다고 분명하게 주장한다. 3) 그리스도인들은 제사 계명을 어떻게 따라야 하는가? 그리스도인들은 주님을 섬기듯이 엿새를 열심히 일하고 하루는 구별하여 하나님에게 예배드리고 다음 엿새를 위하여 거룩하게 쉬어야 한다. 2023-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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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09-27
  • 김영배의 소요리문답_ 제삼 계명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1) 내가 주의 성전을 향하여 예배하며 주의 인자하심과 성실하심으로 말미암아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리니 이는 주께서 주의 말씀을 주의 모든 이름보다 높게 하셨음이라 †시 138:2 ……… 2) 네가 만일 이 책에 기록한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지켜 행하지 아니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라 하는 영화롭고 두려운 이름을 경외하지 아니하면 여호와께서 네 재앙과 네 자손의 재앙을 극렬하게 하시리니 그 재앙이 크고 오래고 그 질병이 중하고 오랠 것이라 †신 28:58-59 ……… 3) 주여 누가 주의 이름을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오리까 오직 주만 거룩하시니이다 주의 의로우신 일이 나타났으매 만국이 와서 주께 경배하리이다 †계 15:4 1743년 3월 23일 런던에서 헨델이 작곡한 《메시아》가 초연되었을 때 왕이 많은 청중 속에 앉아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이 작품의 “할렐루야 합창”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그 합창 가운데 “전능하신 여호와 하나님이 다스리시네” 라는 가사가 우렁찬 합창 속에 울려 퍼지자 왕이 자리에 일어섰다. 따라서 모든 청중도 일제히 따라 일어섰다. 그리고 왕과 함께 일어난 사람들은 할렐루야 합창이 다 끝날 때까지 서있었다. 그 때부터 지금까지 이 작품이 어디에서 연주되든지 “할렐루야 합창”이 울리는 대목에서는 모든 사람들이 서서 듣는 것이 관례가 되었다. 이 음악을 서서 듣는 청중들은 “만왕의 왕이시오 만주의 주이신 하나님”에게 경배를 드리게 되는 것이다. 제삼 계명은 이렇게 말씀한다.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 여호와는 그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자를 죄 없다 하지 아니하리라 출 20:7 제삼 계명은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마 6:9) 라고 기도하라고 권고하신 말씀과 함께 생각해 보아야 한다. 주님의 이 권고는 셋째 계명에 부정적인 측면과 긍정적인 측면이 동시에 있음을 나타내준다.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준다. 따라서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는 것은 하나님에게 죄를 짓는 행위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높이는 것은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이다. 성경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여러 이름들은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하나님의 여러 속성들을 나타내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그의 속성에 걸맞게 바르고 경건하게 불러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여러 이름들에는 특별한 의미들이 있다. 엘로힘(Elohim)은 성경에서 가장 많이 나오는 하나님의 이름이다. 엘로힘은 하나님이 만물의 창조주이심을 나타내는 이름이다. 이 이름은 성경의 첫머리에 나온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 1:1 엘 엘리온(El Elion)이라는 이름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의미한다. 이 이름은 아브라함이 여러 왕을 이기고 멜기세덱을 만날 때 사용되고 있다.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창 14:18 야웨(Yaweh)라는 이름은 스스로 있는 자라는 뜻이다. 이 이름은 하나님의 자존성, 자족성, 영원성을 나타낸다. 하나님은 자신을 구속자로 계시하실 때 이 이름을 사용하신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애굽에서 구원하시기 전에 광야에서 모세에게 이 이름을 말씀하셨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 출 3:14 하나님은 여호와 이레(Jehovah Jireh)라는 이름으로도 불리신다. 이 이름은 준비하여 주시는 하나님이란 뜻이다. 이 이름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시험할 때 사용되었다.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창 22:14 이 각각의 이름들이 지닌 의미에 따라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을 모욕하고 그의 계명을 어기게 된다. 더욱이 우리의 행동은 우리의 말 못지않게 중요하다. 우리의 행동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믿음을 고백하는 말과 일치하지 않을 때 우리는 하나님을 모욕하게 된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름에 걸맞게 말하고 행동해야 한다. 그러면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하지 않기 위해 어떻게 생활해야 하는가? 그 방법을 야고보 사도가 분명하게 가르쳐준다. 너희는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고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리거니와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 약 1:22-25 이 말씀은 신자가 왜 성경을 끊임없이 살펴보아야 하는지를 깨우쳐준다. 우리가 성경을 보는 것은 성경 속에서 우리의 자화상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습 속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을 찾기 위해서이다.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그 마음을 덮었도다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겨지리라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그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여 영광에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고후 3:15-18 우리가 성경을 통해 우리의 참 모습 속에 드러나는 주의 영광을 보면 주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겸손해지고, 하나님의 도움을 바라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게 될 것이다. 그러한 삶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게 되고 드러내게 될 것이다. 【핵심개념정리】 1) 우리는 어느 때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게 되는가? 우리의 행동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믿음을 고백하는 말과 일치하지 않을 때 우리는 하나님을 모욕하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름에 걸맞게 말하고 행동해야 한다. 2) 하나님의 여러 이름은 무엇을 나타내는가?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의 속성을 나타내준다. 따라서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는 것은 하나님에게 죄를 짓는 행위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거룩히 높이는 것은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이다. 성경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여러 이름들은 찬송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하나님의 여러 속성들을 나타내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그의 속성에 걸맞게 바르고 경건하게 불러야 할 것이다. 3) 왜 우리는 끊임없이 성경을 보아야 하는가? 우리가 끊임없이 성경을 보아야 하는 것은 성경 속에서 우리의 자화상뿐만 아니라 우리의 모습 속에 들어있는 하나님의 형상과 영광을 찾기 위해서이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 우리의 참 모습 속에 드러나는 주의 영광을 보면 주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겸손해지고, 하나님의 도움을 바라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게 될 것이다. 그러한 삶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게 되고 드러내게 될 것이다. 2023-0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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