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2-08-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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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춘식 목사 종말론
    마음은 자기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간다. 자연스럽게, 마음이 하고 싶은 것을 하되 조금씩 돕는 게 최선이다. 아이를 키우는 것처럼 자신을 친절하게 돌보아야 한다. 소나기 멎자 찬송 소리 젖은 교회 뜰을 다시 적신다. 비 오다 멎고 기도 소리 그쳤다 다시 일고 또 한여름 이렇게 지나가는가. 소나기 소리, 찬송 소리에 아직은 성한 귀 기울이며 1999년 김제에서 시작된 또 한여름 2022년 또 이렇게 지나 보내는가. 그는 생각한다. 누구도 세계 최고의 지도자, 세계 최고의 학생이거나 세계 최고의 목사로서 번듯한 기록 하나 세워놓지 못했음에도 저마다 글로 풀자면 책 몇 권을 써도 부족한 감동과 희열과 분노를 품은 귀한 삶들이라는 사실을 가끔 잊는다. 한때의 세상은 소낙비에 듬뿍 젖어 있고 다음 세상은 찬송 소리에 담뿍 물들어 있을 것이다. 이후의 세상은 또 다른 무엇으로 가득 채워질까. 하나님의 다정한 자연의 원리들이 있어서 이 세상을 차례차례 채우고 사라진다. 그 흐름을 고요히 보고 있는 목사는 ‘그래, 너희가 또 찾아왔구나’ 미소 짓는다. 목사의 창밖에서 만나는 비와 더위는 꼭 와야만 해서 다시 온 것들이다. 잘 왔다가 잘 가기를, 내년에 우리 또 만나기를, 그리운 아버지 김정호 목사님을 꿈에서 만나듯... 그가 부임한 교회는 1910년 7월 7일 김제 옥산리에서 옥산교회로 출발해 1925년 김제읍교회, 1929년에 김제중앙교회로 각각 명칭을 변경했었다. 그가 부임 당시 김제시 인구는 15만이었는데 2022년 7월 지금은 8만 선에 머물고 있다. 2022년 7월 17일 은퇴하는 그는 재직 기간 장례만 600건을 치렀다고 한다. 부임한 뒤 김춘식 목사와 어려울 때 함께한 800여 교인들은 예배에 대한 강한 열정과 사모함을 가지고 있었다. 교회 분립으로 교회 건축을 위해 잠시 천막생활을 하면서도 예배는 뜨겁게 이어졌다. 폭염이 기승을 부리는 한여름에도 천막 하나를 치고 모인 교인이 800여 명이었다. 이러한 교인들의 예배에 대한 사모와 열정은 담임인 김춘식 목사의 목회에서 힘을 얻는다. 김 목사는 남다른 목회 열정을 가지고 있다. 그는 말한다. “목회자 자신이 성경 말씀대로 살아야만 생명력 있는 말씀을 전하고 살아있는 목회를 할 수 있다. 자신이 변화되지 않고서 어떻게 교인들을 변화시킬 수 있겠는가. 목회자의 카리스마는 목회자 개인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겸손과 말씀의 실천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잊지 않고 매일 기도와 말씀으로 무장하여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양떼들에게 생명의 꼴을 먹이려 하고 있다.” 그런 목사를 따르는 교인들은 불평 하나 없이 기쁘게 예배를 드리며 예배당이 새로이 완공되기를 타는 목마름으로 기도했다. 2009년 9월 착공하여 2010년 7월 입당한 지금의 예배당은 강도 7의 지진에도 견디는 내진설계로 시공된 너른 주차장과 부속 건물을 갖춘 복합 건축물이다. 그는 20년째 교인들과 동고동락하며 목회를 했다. 교회 분열의 아픔을 딛고 새 예배당을 완공한 다음 해인 2011년 4월 7일 미국 뉴욕의 기독 언론 '아멘넷 뉴스'(USAamen.net)는 김춘식 목사의 부흥회 초청 기사를 다음과 같이 전했다. 퀸즈장로교회(장영춘 목사) 춘계부흥회의 강사가 화제가 됐다. 이 시대에 꼭 필요한 설교가 이야기의 기교나 억지웃음을 자아내는 예화 없이 진솔하게 전해졌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이라는 주제로 2011년 4월 7일(목)부터 4일간 계속 될 퀸즈장로교회 춘계부흥회는 뉴욕 교계에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김춘식(김제중앙장로교회) 목사를 강사로 초청했다. 첫날 김 목사는 요즘같이 어려운 난세에 "하나님이 우리를 찾고 계신다"라는 강한 메시지를 전달했다. 김 목사는 누가복음 3장 1-14절 말씀을 본문으로 "크고 두려운 날"이라는 제목의 설교에서 세례 요한이 외치는 독사의 자식들이란 파워게임에 눈이 어두워져 있는 세상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향해 외치는 소리임을 깨달아야 한다고 말했다. "어떤 시대를 살고 있는지를 알려면 그 시대의 사람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디베로 가이사가 누구인가. 헤롯은 어떤 사람이었던가. 또한 본디오 빌라도는. 모두 권력에 혈안이 되어 있던 정신병자, 이기주의자, 백성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우민정책을 쓰며 그들을 음란과 타락으로 몰아넣었던 인물들입니다. 바닷물의 소금은 3%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그 3%가 온 바닷물을 짜게 만드는 것입니다. 어둠은 절대 빛을 이기지 못합니다. 우리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세상이 문제가 아니라 나와 여러분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요. 왜 우리는 진실하지 못할까요. 적어도 어디서부터 잘못되어 있는지 돌아보고 돌아서야 합니다. 회개란 구원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의 말씀은 요한을 들어 광야에 임하셨습니다. 우리는 광야라는 단어에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저들이 회개하기를 바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회개하기를 원하시며, 개입하시고 약속하시고 약속을 이루시는 분임을 아멘으로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이미 완성되어있는 것입니다. 단지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서 말씀하시고 하나님의 종들을 통해 이루어 가시는 것뿐입니다.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영원히 자유함을 얻는 것이 구원입니다. 혹시 위험한 회개를 하고 있지는 않은지 주의해야 합니다.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진노하시는 하나님,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나의 위선적인 회개를 돌아봅시다. 한순간에 지푸라기로 변하고 마는 것이 인생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순간순간마다 우리의 모든 삶 속에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회개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회개할 싸인이 느껴지면 과감하게 돌아설 줄 알아야 합니다." 김 목사는 한 시간 동안 회개만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하나님이 간절히 찾고 있는 사람이 우리라는 것을 강조했다. 코로나가 ‘심각한 병’에서 ‘일상의 병’으로 급수가 하향된 2022년 7월 3일 11시 김제 중앙장로교회는 맥추감사절예배를 드렸다. 맥추감사절은 유월절이 끝난후 7주가 끝난 50일째 되는 날 곡식을 처음 거두어 수확의 첫 단을 하나님께 드린 것을 기리는 절기이다. 성도들이 64장 ‘기뻐하며 경배하세’ 찬송 후 이규수 장로가 대표기도를 했다.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아버지 하나님 오늘도 거룩하고 복된 날, 주의 전으로 불러주시고 우리를 구원해 자녀 삼아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지난 한 해 동안도 하나님 은혜 속에서 보호하시고 지켜주시고 오늘 맥추감사주일로 하나님 앞에 영광 돌리게 해주신 것도 감사드립니다. 우리들도 한 제단 한 제단 쌓아갈 때마다 하나님의 영광이 빛나게 해 주시옵소서. (회중 아멘) 죄 많고 허물 많은 우리들은 한 주간 살면서 주님 바라보지 못하고 세상 따라 살다가 주님 앞에 나왔습니다. 이 시간 주님의 십자가 보혈로 우리를 정결하게 씻어 주시옵소서. (회중 아멘) 오늘도 주님의 사자(使者) 목사님 단 위에 세워주셨사오니 강건함으로 붙잡아 주시고 성령으로 붙잡아 주시어 이 시간 능력의 말씀을 증거 하실 때 우리 눈이 열려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시고 우리 귀가 열려 하나님 음성을 듣게 하시고 코로나로 인해 우리 주위를 떠난 자들이 하루속히 주의 전으로 나와 주님 앞에서 찬송할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이 시간 신령과 진정과 찬양으로 경배를 드리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우리들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중앙의 일꾼들은 좌로나 우로나 흔들리지 않고 오직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며 우리 믿음이 세상을 이기게 해 주시옵소서. 연로하신 분들 맑은 영도 주시고 강건함으로 붙잡아 주시고 원치 않는 병으로 치료 중인 우리 성도들을 일일이 기억해 주셔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사의 손을 빌어 깨끗하게 치료해 주시옵소서. (회중 아멘) 일생을 사는 동안 우리들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을 살게 해 주시옵소서. 이 시간 임마누엘 찬양대 세우시고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 저들이 부르는 찬양 기쁘시게 받으실 줄 믿사오며 (회중 아멘) 살아 계신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 받들어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임마누엘 찬양 대의 기도 송이 울렸다. 우리의 기도 들어주시어 우리의 음성 영광되게 하소서 아멘 김춘식 목사가 성경을 봉독했다. “창세기 6장 5절로 8절까지 말씀입니다. 제가 봉독합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아멘. 찬양대 찬양이 있겠습니다.” 임마누엘 찬양대가 단 앞으로 나와 정렬하고 ‘공중 나는 새를 보라’를 찬양했다. 김춘식 목사가 설교단에 서고 입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공중에 나는 새를 먹이시고 들의 백합화를 입히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할 수 있는 믿음의 손을 가지고 은혜의 하나님 앞에 오늘도 헌금을 드렸사오니 마음의 문 열리게 하시고 진리로 충만하게 해 주십시오. 말씀이 어려운 세상을 살아가는 데 능력이 되게 하시고 (회중 아멘) 복이 되게 하시고 고침을 받는 역사가 일어나게 해 주시옵소서. (회중 아멘) 영생을 믿사오며 성령의 도구가 되게 해 주실 것을 믿사오며 예수님 거룩하신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지난 시간 창세기 3장 15절 말씀에서 여인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고 사단이 여인의 후손 발뒤꿈치를 물게 될 것이라고 하는 가운데 열정적으로 사단의 세력을 정복하신 구주 예수가 우리의 구세주이심을 믿고 사단의 무리를 괴롭히는 세력임을 믿고 믿음의 경고에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를 섬겨야 할 것을 말씀했습니다. 오늘 계속해서 창세기 4장 5장 6장 7장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말씀을 묵상하면서 맥추감사절 말씀으로 전하려고 합니다. 창세기 4장과 5장을 지나가는 동안 가정에서 첫 살인사건이 일어납니다. 형제가 형제를 죽이는 비참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사랑하셔서 에덴동산에 살게 하셨지만 불순종함으로 마귀의 종노릇하면서 이제 타락해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아담의 아들 가인을 통해 인생이 점점 악해져 가는 모습을 창세기 4장 5장 6장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버린 인생들에게 충격과 부패와 성적 타락이 따릅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에서도 4장 5장에 보면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가인의 후손 가운데 음악을 하고 기계를 만드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타락하고 불순종했어도 하나님의 형상이 더럽혀지기는 했지만 하나님의 형상이 아직도 남아 있어서 이런 지혜로운 일들을 하면서 음악을 하고 기계를 만들어 삽니다. 대단한 일입니다. 그리고 창세기 5장에 가서 오래 산 사람들 얘기를 합니다. 어떤 사람은 800년을 살고 이제 므두셀라는 187세에 라멕을 낳았고 라멕을 낳은 후 782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고 969세를 살고 죽었다고 합니다. 그 당시 사람들이 800년 900년 969세를 살았다고 하니 근 천 년을 산 겁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천 년을 살았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이 다 죽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도 남김없이 다 죽었습니다. 오래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죽느냐가 중요하다는 걸 보여 주는 것입니다. 단지 그 사람들이 천 년을 살았지만 죽지 않은 에녹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죽지 않고 하늘로 올라간 에녹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장수하시기를 바랍니다. 천 년도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어떻게 죽느냐 하는 것입니다. 죽음이 어디 있느냐. 에녹이 죽음을 보지 않고 천국에 간 것처럼 여러분의 영혼이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 영광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회중 아멘) 그리고 이제 창세기 6장으로 넘어와서 보면 하나님의 인간 죄에 대한 대처방법은 크게 첫째는 심판이고 둘째는 은혜입니다. 창세기 6장 11절에 ‘그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한지라’ 말씀합니다. 5절에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음으로 생각하는 계획이 악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타락하고 부패한 속성을 지니고 사는 인생인 것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회중 아멘) 이렇게 부패하고 폭력적인 사회가 되었을 때 대표적인 것이 성적 문란입니다. 2절에 보면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말씀합니다.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았다는 것이 무슨 문제가 됩니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그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인의 후손과 아벨을 대신해 태어난 셋의 후손을 구별하십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누구입니까.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 가능성은 천사들입니다. 두번 째 가능성은 하나님을 잘 믿는 신실한 가정의 자녀들이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사람들이란 믿음을 잘 지키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은 자녀들이 믿음의 길을 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별되기를 원하십니다. 배우자를 선택하게 될 때도 세상 사람들처럼 사회 신분이나 외모나 세상 적인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을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패한 사람들의 특징은 4절에 나옵니다. '당시에 땅에는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들어와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은 용사라 고대에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더라' 그들은 용사였고 세상 명성이 높았습니다. 네피림은 남을 넘어뜨리는 자들입니다. 건장한 육체를 가지고 남을 죄에 빠지게 하는 영향을 가진 자들입니다. 크고 강하고 소문났을지라도 그 은사를 가지고 죄를 짓게 한다면 파멸입니다. 그들의 대표적 특징은 폭력과 성적 문란입니다.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 폭력과 부패와 성적 타락의 근본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육체가 건강하고 세상 물질이 만족스러울지라도 이것으로 죄를 지으면 차라리 가난하게 사는 것이 낫습니다. 이런 것이 없어도 하나님 앞에서 성실하고 진실하게 사는 것이 행복한 것임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물질적이고 외형적인 것보다 본질은 사람의 마음에 있습니다. 사람 사이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각자의 마음속에 있는 죄를 먼저 해결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예수님은 우리 구주이시고 성령이 우리와 함께하신다고 날마다 믿음으로 고백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전지하시고 전능하신 것처럼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다는 데 하나님을 속이고 불순종하고 세상과 짝하고 사는 사람은 위선자입니다. 부패한 사람입니다. 입으로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은 자기 신앙고백대로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왜 이렇게 세상이 행복하지 못합니까. 믿음의 사람들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라고 얘기하는데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세상의 빛으로 소금으로 감당하지 못해서 그러는 것 아닙니까. 인생의 종말은 두 가지입니다. 내 개인의 종말이 오고 인생 최후 심판이 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한다고 말씀하실 때 세상 사람들은 조롱하고 멸시하고 자기들과 상관이 없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심판은 있습니다. 조롱하고 멸시하는 자들은 한순간에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세월은 너무 빠르게 흐릅니다. 심판은 나와 상관없고 죽음은 나랑 상관없다고 오해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훗날이라고 생각하는 종말이 오늘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오늘 밤에 그 영혼을 거두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심판은 긴급합니다. 주님은 도적같이 오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남자나 여자나 누구에게나 심판은 긴급하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어떤 의미에서 짐승들이 임종과 종말이 가까운 것을 우리보다 더 먼저 알고 피합니다. 신문에서 보면 어디 화산이 터진다든지 지진이 난다든지 하면 쥐가 도망가고 짐승들이 달아납니다. 개미들이 이동을 합니다. 노아의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들과 짐승과 공중에 나는 새들도 다 심판이 있는데 오직 구원받은 사람들 구원받은 짐승들은 구원받은 새들은 노아의 방주로 들어갔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짐승도 심판의 때를 알고 모여들었다는 것입니다. 노아 시대에 물의 심판이 있었던 것처럼 이제는 남은 세계에 불의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불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후서 3장 6절과 7절에 '이로 말미암아 그때에 세상은 물이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었다'라고 말씀합니다. 지금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것은 심판의 때에 교회가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말씀했습니다. '물이 넘침으로 멸망했다'라는 말씀은 노아의 시대를 말하는 것입니다. 물이 넘침으로 다 멸망했습니다.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이라는 것은 물로 세상을 심판하시겠다는 말씀을 하신 하나님의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우리가 지금 존재하고 있는 것은 마지막 심판의 때에 교회 때문에 하나님이 보호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변절하지 아니하는 자들은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하나님이 보존해 주시는데 어렵더라도 두려워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내가 이렇게 가난하고 힘든데 예수 믿는데 되는 것이 없다고 낙심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돼지를 키워 살찌우는 것이 도살하기 위한 것은 인간의 생각입니다. 이 세상을 불사르기 위해서 심판의 때가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잘살고 있는 우크라이나를 이제 침공했습니다. 푸틴이 전세가 불리해 버튼만 누르면 핵전쟁이 일어납니다. 전 세계에서 너도 나도 핵을 터뜨리면 이 세상을 수천 번 폭파하고 불태워버리고 남을 폭탄이 이미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불사르기 위해 보존하셨다고 하는데 그건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고 지금 우리가 이런 환경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 주님 오신다면 아멘 할렐루야 찬미하며 주님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 한 손에 심판이 있지만 다른 한 손에는 은혜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6장 8절에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은혜라는 말을 제일 처음 쓰는 데가 바로 이 구절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다 심판받고 멸망하는데 심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구원받은 백성이 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이 다 멸망하는데 그중에서 노아만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노아가 은혜를 입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 75억 인구(세계 인구는 특정한 시간에 지구상에 살고 있는 인류의 전체 수) 가운데 저와 여러분을 하나님 자녀 삼아 주시고 우리를 하나님 자녀로 불러주신 것을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회중 아멘) 이게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회중 아멘) 또 놀라운 사실은 7장 16절에 '하나님이 그에게 명하신 대로 들어가매 여호와께서 그를 들여보내고 문을 닫아' 넣어주시니라 하신 것입니다. 노아의 여덟 식구와 정결한 짐승들과 부정한 짐승들이 일곱 쌍씩 다 노아의 방주로 싹 들어가게 되니까 하나님이 방주의 문을 닫으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문을 닫아주셨다는 것입니다. 한번 닫힌 문은 열려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방주 안에 있는 노아의 여덟 식구와 짐승들은 하나님이 다 보존하신 줄 믿습니다. 여러분 예수 믿고 구원받고 천국 갈 것을 확신하십니까. 나같이 연약하고 나같이 부족하고 나같이 부끄러움이 많은데 하나님이 날 구원해 주실까 하는 마귀의 속삭임에 넘어가지 말고 믿는 자는 구원을 받고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아니하고 영생을 얻는다고 하는 하나님 약속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회중 아멘) 하나님 약속입니다. 구원 받은 자녀인 것을 확신하십시요. (회중 아멘) 목사님. 예수 믿고 살아가는데 왜 이렇게 답답합니까. 아들딸은 왜 이 모양입니까. 낙심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건강은 왜 이 모양입니까. 실망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노아의 방주 안에 있는 짐승이 비가 오는 기간만 6개월이고 다 마르게 될 때까지 1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습니다. 그 방주 안에서 아주 많은 짐승들과 노아의 가족이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하루하루 지나가는데 보통 괴로운 일이 아니었을 겁니다. 노아도 하나님이 방주 속의 우리를 잊어버리신 게 아닌지 버리신 것은 아닌지 생각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께서 노아를 기억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 믿고 구원받았는데 답답하다고 낙심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노아를 기억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기억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잊어버리신 게 아닌가 생각할 수 있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잊지 않으십니다. 차츰차츰 변화를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히브리어의 바람(루아흐)이라는 말은 영(spirit)이라는 뜻입니다. 바람은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습니다. 영이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지키시고 인도하시고 복 주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회중 아멘) 하나님이 버리시거나 잊어버리신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운행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 하나님의 영이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를 보호하시는지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남편을 믿습니까. 아내를 믿습니까. 이 세상 정치인들을 믿습니까.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약속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변함이 없으신 하나님 말씀 붙들고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회중 아멘) 마지막으로 죽음을 통한 구원입니다. 마침내 하나님은 노아를 새로운 삶으로 초청합니다. 홍수가 다 지나간 다음에 노아는 방주에서 나와 새로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노아를 초청해서 다시 번성하고 성장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한 손에는 심판이 있고 다른 한 손에는 은혜가 있습니다. 노아는 하나님 말씀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방주에 들어가라니 들어갔고 나오라니 나왔습니다. 이게 순종이고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믿음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이 세상에 대해 이미 죽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심판하리라 하셨지만 사람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노아를 멸시하고 조롱하고 업신여긴 사람들이 생각할 때 그는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노아는 세상 사람들에게는 죽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대해서 죽어버린 사람은 세상이 무어라고 한다 할지라도 간섭할 것이 없습니다. 목사로서 제일 듣기 거북한 이야기는 세상 사람이 우리를 멸시하고 조롱한다고 소금과 빛으로 살아야 할 우리가 흔들린다는 것입니다.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정신 바짝 차리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세상에 대해서 죽은 사람들입니다. (회중 아멘) 세상 여론이 어떻고 신문이 어떻고 티브이가 어떻고 세상이 다 우리를 조롱한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입니다. (회중 아멘) 한국 정통 초대 장로교회의 신학을 완성하신 박형용 박사는 그의 조직신학 서론에 이런 글을 쓰셨습니다. '온 세상 사람이 다 두 발을 땅에 딛고 머리를 하늘을 향해 세우고 살아간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라면 두 손을 땅에 대고 두 팔을 하늘로 쳐들고 산다고 할지라도 그렇게 살겠습니다.' 세상 따라 살지 못해 안달인 사람은 자신이 구원받은 사람인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노아가 조롱받고 멸시당할 때 노아는 세상에 대해 죽은 사람이었습니다. 노아는 죽음을 뚫고 은혜를 받은 것이 아니라 죽음을 통해서 구원을 받은 사람입니다. 방주 안에 들어갔을 때 비가 위에서 쏟아지고 땅에서 솟아나고 온 세상 천지가 높은 산꼭대기까지 다 물에 잠겨버렸습니다. 죽을 일만 남았습니다. 그 죽음 속에서 방주에 들어가 있는 노아가 구원받았다는 진리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의 죽음에 휩쓸려 들어가게 될 때 교회라고 하는 구원의 방주 안에서 주님의 보호하심을 받고 천국 가게 된 것을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회중 아멘) 교회 일원 되신 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회중 아멘) 이 교회 떠나면 죽음입니다. 구원의 방주에서 벗어나는 것은 파멸입니다. 사는 길은 주님과 십자가를 지고 묵묵히 걸어가는 것입니다. 자기 영광을 위해서 자기 마음을 위해서 행복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죽음을 통해서 구원의 길을 가시기를 바랍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죽어야 하지만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모두가 심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우리의 모든 심판을 감당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십자가에 죽으셨을 때 그 속에서 나도 죽은 것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회중 아멘) 그래서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믿는 자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고 심판에 이르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할렐루야. (회중 아멘) 베드로는 이 심판에 대해 노아의 홍수를 우리가 세례받는 모습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 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벧전 3:19-20) 죽음이 다 휩쓸어 갈 때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는 것입니다. 노아와 노아의 아내와 세 아들과 그 부인들만 구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고 하는 것입니다. 물세례라는 것은 우리의 죄가 다 물에 잠겨버리고 씻음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죽음에서 살아났다는 표시입니다. 이렇게 구원받은 노아가 창세기 8장 18절에서 20절에 보면 '노아가 그 아들들과 그 아내와 그 자부들과 함께 나왔고 땅 위의 동물 곧 모든 짐승과 모든 기는 것과 모든 새도 그 종류대로 방주에서 나왔더라 노아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 중에서와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취하여 번제로 단에 드렸더니'라고 말씀합니다. 노아는 하나님 앞에 경배와 감사를 드렸습니다. 정결한 짐승을 하나님 앞에 번제로 드렸습니다. 짐승을 잡아 내장을 꺼내고 물로 깨끗이 씻어서 불로 태워서 하나도 남김없이 향기로운 냄새의 연기로 하나님 앞에 올라갔습니다. 다 죄로 가득한 세상에서 은혜를 입고 죽음에서 구원을 받은 감사와 감격을 가지고 이제 하나님 앞에 번제를 드린 것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다 드리는 것입니다. 신약에 가면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장 1절에서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말씀합니다. 너희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맥추감사절입니다. 하나의 행사로 지내지 않기를 바랍니다. 구원받은 감사와 감격을 가지고 너희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번제를 드렸던 노아처럼 형식적이거나 위선적인 것이 아니고 우리가 진심으로 구원받은 은혜를 감사 감격하면서 이 맥추감사절을 지내시기를 바랍니다. (회중 아멘) 이는 우리가 드릴 영적 예배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모든 심판에서 구원하셨습니다. 죽음은 이제 지나갔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우리의 몸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입니다. 신령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속에 이 진리를 확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파스퇴르유업과 민족사관고등학교를 세웠던 최명재(崔明在·95) 민사고 이사장이 2022년 6월 26일 오전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최 이사장은 1927년 전북 김제시에서 태어났다. 만경보통학교, 전주북중을 나와 경성경제전문학교(현 서울대 경영대)를 중퇴했다. 상업은행에서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돈을 더 벌겠다는 각오로 은행도 그만두고 택시 운전에 뛰어들었다. 여기서 얻은 성공 경험을 바탕으로 1960년대 운수회사(성진운수)를 세웠고, 1970년대엔 물류 사업에 뛰어들어 큰돈을 모았다. 60세 되던 1987년 강원 횡성에 파스퇴르유업을 설립하고, ‘저온살균 우유’를 앞세워 기존 우유 업계를 공격하는 직설적 마케팅으로 화제를 모으며 급성장했다. 1996년에는 횡성 파스퇴르유업 공장 옆 127만2700㎡(38만5000평) 땅에 민사고를 세웠다. ‘민족 주체성 교육’을 통해 세계적인 지도자와 노벨상을 탈 수 있는 인재를 키우겠다는 목표였다. 1970년대 영국 이튼스쿨을 방문했을 때 넬슨 제독 전승 기념행사를 보면서 “한국에는 넬슨보다 훌륭한 이순신 장군이 있는데 이튼 같은 학교는 없다”라고 생각하며 가진 필생의 꿈을 실천에 옮겼다. 최 이사장이 파스퇴르유업 수익을 매년 30억~50억 원 민사고에 투자하면서 우수 학생을 뽑아 기숙사비를 포함, 교육비를 받지 않고 운영했다. 모두 천억 원을 쏟아부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전라남도 장흥이 고향인 김춘식 목사는 2010년 7월 김제에 중앙장로교회를 세웠다. 왜냐하면 김춘식 목사가 지난 1999년 7월 16일 미국에서 전라북도 김제시의 김제중앙교회로 부임한 뒤 분쟁을 겪고 분리의 아픔을 이기고 교회를 세웠기 때문이다. 2022년 7윌 19일 김제를 떠나는 김춘식 목사는 김제중앙교회를 거쳐 중앙장로교회를 통해 20년 목회 여정에 너른 곡창 김제에 새로운 건실한 예배당만 아니라 말씀 중심의 설교로 합동 교단에 드문 영적 교회를 세우는 업적을 세웠다. 2022-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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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7-15
  • 송태근의 설교관
    맑은 빛 고운 햇살 소복소복 담아 두고 별들과 나눈 얘기 강물 되어 흐른다. 총신 숲 비어서 풍요롭다. 나목(裸木) 위의 까치집 돌아올 주인을 기다린다. 새해가 왔건만 코로나바이러스가 변이에 변이를 거듭하면서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공포로 교회를 위협하고 있다. 우리는 언제까지 이 병과 함께 살아야 하나. 그러나 양상만 달랐을 뿐 인류의 역사는 병과의 끊임없는 싸움이었다. 고통 속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한다. 병보다 무서운 것이 절망이라는 정신적 재앙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새해는 이렇게 맞을 일이다. 면도 알러지가 있어 이따금 수염을 길러야 하는 송태근 목사는 ‘맑은 빛 고운 말씀’을 ‘소복소복 담아 두자’고 하는 믿음의 전파자다. 하나님과 얘기를 나누면 헐벗은 나무의 텅 빈 까치집도 그의 성근 수염처럼 풍요롭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영국 시인 셸리는 ‘겨울이 오면 봄 또한 멀지 않다’라고 노래했다. 총신대 이사로 헌신을 아끼지 않는 송태근 목사는 이 겨울이 가면 새끼를 데리고 둥지를 찾아올 까치를 미리 보는 예지를 지니고 있다. 총신의 봄은 반드시 온다. 우리는 치유의 새봄을 맞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헌신하고 견디어낸 자들의 축제가 될 것이다. 오늘날의 청중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본문 중심의 강해설교를 하는 송태근의 설교는 폭이 넓고 속이 깊다. 그는 신봉하는 본문 중심 강해설교 틀에다 원숙한 믿음의 관조(觀照)로 가다듬은 말씀을 심한 아픔을 견딘 삼일교회와 치유를 바라는 전국 교회에 전하고 있다. 그는 말한다. 강해 설교자가 성서 권위를 힘입어 자기 우상화를 시도하는 우를 범해선 안됩니다. 강해 설교자의 권위는 그것을 청중을 섬길 때 참 의미가 있습니다. 설교자의 위대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사랑하며 동시에 그 진리를 공동체를 섬기는 사랑으로 담아낼 때 강해설교의 진수가 밝히 보일 것입니다. 송태근 목사는 계시록 8:3-5에 의지해 외친다. 성도의 기도와 함께 올라간 향이, 제단의 기도가 제단의 불과 함께 땅에 쏟아집니다. 이것은 심판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드디어 응답이 이루어지는 겁니다. 응답은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어둠에 잠들어가는 이 시대를 기도의 부글부글 끓는... 그래서 저 에스겔의 골짜기의 마른 뼈들이 생기를 얻고 하나님의 군대로 일어나는 환상을 보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팬데믹으로 시대의 전환점에 선 우리는 기도해야 할 것이다. 그의 메시지 소망대로 설교자가 청중을 섬기는 한해가 되기를···. 그리고 사회와 총회의 모든 것이 제 자리를 찾아 미사일을 쏘아대고 하나님에 대항하는 북한 앞에서 ‘멸공(滅共)’이란 구호가 문제 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사라지기를···. 무엇보다도 우리 사회와 총회에 성경의 정의와 신앙의 안전이 이뤄지기를···. 2022-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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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1-16
  • 팬데믹 시대의 신앙
    경북 영양군 영양에 가면 반딧불이생태공원이 있고 영양서부교회의 박병석 목사가 있다. 반딧불이 노래로 잘 알고 있는 ‘개똥벌레’가 반딧불이다. 옛날에는 어디서나 보일 만큼 흔해서 개똥벌레라 부르기도 했고 개똥이나 소똥에서 서식하는 줄 알아서 개똥벌레라고 불렀다는 이야기도 있다. 영양군은 경상북도 대표적인 산간오지로 사람보다 자연이 더 풍부한 곳이다. 덕분에 오염되지 않은 청정한 자연을 잘 간직하게 되었고 국내에서 밤하늘이 가장 어두워 별자리를 관측하기 좋은 곳이 되었다. 그 중심지가 영양군 생태공원사업소가 관리하는 반딧불이생태공원이다. 사실 반딧불이는 전국 곳곳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다만 하늘의 별처럼 불빛이 강한 도시에서는 발견이 어렵다는 것. 밤하늘을 보호할 정도로 어두컴컴한 영양에서는 별과 반딧불이를 모두 관찰할 수 있다. 코로나가 팬데믹으로 발전한 이 시대 영양의 반딧불이 같은 박병석 목사의 ‘제단에 불을 끄지 마라’는 메시지가 새롭다. 단 위에 불은 항상 피워 꺼지지 않게 할찌니 제사장은 아침마다 나무를 그 위에 태우고 번제물을 그 위에 벌여 놓고 화목제의 기름을 그 위에 사를찌며 불은 끊이지 않고 단 위에 피워 꺼지지 않게 할찌니라 레 6:12-13 성경은 하나님 앞에 나가서 제사를 드리는 백성은 항상 제물이 있어야 하고 그 제물을 태우는 불이 꺼지지 않아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모든 제사에 순서 절차가 다 있더라도 불이 꺼지면 아주 심각합니다. 그 뜻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제단에 불을 끄지 말라는 것은 성령의 역사 때문입니다. 제단은 원래 제물로 바친 짐승이 죽는 장소입니다. 하나님은 그 제물이 탈 때 그 향기를 흠향하십니다. 제단에 불이 꺼지면 하나님이 임재하시지 않게 됩니다. 신약시대에 와서는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고전 6:19)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마음에 성령의 불이 꺼지면 그 사람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이라고 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과 교통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항상 말씀과 기도와 찬양을 통해서 우리 마음의 제단에 성령의 불이 계속 타오르도록 해야 합니다. 둘째, 제단에 불이 꺼지면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는 이가봇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상 3장 1절에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말씀합니다. 이어서 이스라엘의 패역한 시대를 향해 사무엘상 4장 21-22절에서 ‘이르기를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고 아이 이름을 이가봇이라 하였으니 하나님의 궤가 빼앗겼고 그 시부와 남편이 죽었음을 인함이며 또 이르기를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으므로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였더라’ 말씀합니다. 사람들 가운데 한때 은혜를 받고 믿음으로 살고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나타났지만 제단의 불이 꺼지듯 신앙이 식고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는 이가봇의 형편에 처하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그렇게 되지 않도록 항상 말씀과 기도와 찬양을 통해서 우리 마음의 제단에 성령의 불이 계속 타오르도록 해야 합니다. 셋째, 불붙는 제단이 되기 위해서는 항상 불씨를 남겨두어야 합니다. 여러분 영국의 유명한 찰스 스펄전 목사님은 뜨거운 성령의 역사를 일으킨 분입니다. 스펄전 목사님에게 사람들이 찾아와 그 비결을 물었습니다. 스펄전 목사님은 자신을 위해 교회 기도실에서 기도하는 성도들을 보여주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언제나 성령의 불이 꺼지지 않도록 말씀과 기도와 찬양의 삶을 살아서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도 교회 주변을 둘러보면 ‘이가봇’ 시대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듭니다. 믿음 없는 사람일수록 떠들기를 좋아하고 인간의 수단과 방법을 앞세우기 쉽습니다. 날마다 말씀과 기도와 찬양이 없는 삶에서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신앙이 없는 오늘의 팬데믹 시대는 확실히 ‘이가봇’ 시대입니다. 이 팬데믹 시대를 사는 우리의 신앙을 위해 성경은 말씀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성령을 소멸치 말며 예언을 멸시치 말고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 살전 5:16-22 2021-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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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1-21
  • 2021년 종교개혁주일 대표회장 메시지
    2021년 종교개혁주일 대표회장 메시지 오는 10월 31일 주일은 루터의 종교개혁이 504주년을 맞는 날입니다. 루터가 주창한 종교개혁의 정신은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은혜(sola gratia)로 신앙의 기초와 기독교의 본질을 회복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릇된 전통이나 잘못된 종교적 관습을 성경의 가르침대로 고치고 바로 잡는 것이 종교개혁이었습니다. 개혁 운동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성경의 가르침 그대로 믿음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에 의한 기독교의 본질을 회복하고 믿음의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종교개혁 정신의 실천이 오늘날 한국교회에도 꼭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개혁은 단번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고 끊임없이 계속되어야 하기 때문이며 오늘날 한국교회가 스스로 뼈를 깎는 변화와 개혁을 이루어 내지 못하면 살아남을 수 없을 만큼 커다란 위기에 직면해 있기 때문입니다. 504주년 종교개혁 주일을 맞이하며 한국교회는 거룩성과 공교회성을 회복하기 위한 뼈를 깎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루터와 칼빈을 비롯한 개혁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유일성과 절대성을 중심으로 성경적 교리를 확립하고, 성직 교권주의, 교회 안에 파고든 세속주의를 철저히 배격하였던 것처럼 우리도 오늘날 한국교회 안에 스며든 성장지상주의, 황금만능주의, 인본주의 등 온갖 세속주의를 배격하여 교회의 거룩성을 회복합시다. 개교회 중심주의와 교회의 분열과 파벌, 부패와 타락이 가져오는 갖가지 참상들을 바로잡고 교회 연합과 일치의 바탕인 공교회성 회복에 힘씁시다. 코로나19 감염증 대유행을 통해 사회적 신뢰도에 상당한 타격을 입은 한국교회는 교회의 공공성 회복을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한국교회는 지난 100여 년간 개혁주의 신앙에 의한 헌신과 역사의식으로 민족을 사랑하고 헌신하며 신뢰를 바탕으로 크게 성장하였습니다. 이제는 기복주의, 개교회주의, 성장주의, 이기주의에 집착한 나머지 공공성을 상실하므로 사회적 신뢰도가 급격히 낮아지고 영향력이 훼손되며 교회가 외면당하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교회의 공공성이란 교회가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서 역할을 온전히 감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 전파의 진정성이 의심받지 않도록 더 높은 도덕성으로 떳떳해지며, 자기성찰에 엄격해지고, 더 많이 겸손해져야 합니다. 504년 전 루터의 종교개혁은 교회지도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범을 따라 제자리로 돌아갈 것을 요청하는 것이었습니다. 교회지도자들은 주인의 자리를 예수님께 내어드리고 종이 되어 주님의 뜻을 받들어 섬겨야 합니다. 종교개혁의 전통을 바로 세우며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하는 모든 개혁교회는 분열과 분쟁을 회개하고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모든 탐욕을 버리고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하나 되어 이 땅에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를 실현하는 교회로 개혁되어야 합니다. 지도자들이 바르게 앞장서야 모두가 하나가 되어 새로운 시대를 열 수가 있습니다. 한국교회 지도자들이 스스로를 개혁하고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를 지는 정신으로 나갈 때에 한국교회가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하며 교회와 나라의 위기를 능히 극복할 수 있습니다. 2021년 10월 20일 (사) 한국장로교총연합회 대표회장 김종준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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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0-25
  • 장봉생 목사의 간구
    세계보건기구(WHO)가 코로나 바이러스 팬데믹을 선언한 지 1년이 지났다. 1억2000만 명이 넘는 감염자와 270만 명의 사망자, 막대한 경제적 피해를 내고 있다. 큰 위기를 대응하는 과정에서는 혁신이 만들어지고 새로운 시대가 열리기도 한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인류는 유엔을 창설했다. 공동 번영을 추구하는 자유무역, 미 달러 중심 통화 체제, 저개발국 경제 개발을 지원하는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IMF) 등을 낳은 ‘브레턴우즈 체제’도 고안해 냈다. 대한민국이 번영한 것은 이 체제에 올라탄 덕이고 북한이 허덕이는 이유는 그렇지 못한 탓이다. 이 험난한 시대 2021년 9월 2일 오후 2시 익산 북일교회에서 열린 호남 중부지역 장로회협의회(회장 원태윤 장로) 장로 세미나에서 서대문교회 장봉생 목사가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크다'라는 제목의 설교로 우리 신자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깨우쳐주는 메시지를 전했다. 부회장 조길연 장로 기도 후 부회장 송하정 장로가 야고보서 5:16-18 성경을 봉독했다.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맺었느니라 장봉생 목사가 강단에 섰다. "할렐루야. (회중 아멘) 설교를 하는 사람보다 듣는 사람이 더 힘들다는 소리를 듣곤합니다. 주일 설교 여섯 번 하고 집에 들어가서 아내에게 그렇게 말했더니 제 아내가 뭐라고 한 줄 아십니까. '여섯 번 설교 듣기가 얼마나 힘든 줄 압니까' 하는 겁니다. (회중 웃음)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크다'라는 것은 부담입니다. 붙들고 기도해야 하고 지녀야 하는 확신이지만 말입니다. 내가 의인이냐. 나도 의인이냐. 물론 '칭의' 하나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함을 얻기 때문에 신분상 의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너 의인이냐' 물으실 때는 괜히 생각이 많아집니다. 간구, 도대체 어디까지 얼마나 구해야 간구입니까. 지금까지 내 기도의 응답을 보니 수많은 시간을 기도했음에도 불구하고 응답받은 게 몇 개나 될까요.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크다. 이 말씀이 부담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별로 걱정하지 말아야 할 것 같습니다. 엘리야가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입니다. 똑같은 인간입니다. 그런데 3년 6개월 비가 안 내렸는데 엘리야가 기도하니까 비가 내렸습니다. 열왕기상 17장 18장에 아무리 찾아봐도 엘리야가 비 내리지 않기를 기도했다는 구체적인 내용은 없습니다. 그런데 다시 비오기를 갈멜산 꼭대기에서 무릎에 머리를 파묻고 일곱 번 기도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도대체 야고보가 엘리야가 그렇게 기도해서 안 오던 비가 내리게 됐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엘리야나 우리나 똑같은 사람인데 누구는 기도하면 비가 내리고 누구는 안 내립니까. 시나이반도까지 도망갈 수밖에 없는 그런 연약한 사람도 하나님의 뜻을 위해 쓰십니다. 그런 엘리야도 쓰임 받을 수 있다면 우리도 똑같이 하나님 은혜로 의인 됐다 하는데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크다는데 그거 우리에게도 이루어질 수 있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도대체 어떻게 기도했길래 무슨 말이었길래 무엇이 하나님 마음에 들었기에 그렇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여주는 기적이 일어났을까요. 서대문교회가 72년 됐는데 황해도 신천의 깡패 출신 신유 부흥사 김익두 목사님 교회 교인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38선 넘어 내려왔습니다. 그들이 종로 바닥에서 만나 그때 시작한 교회가 지금 서대문교회입니다. 제가 20년 전 부임했을 때 1세대 어르신 몇 분이 살아 있었습니다. 그분들이 힘없는 목소리로 늘 얘기하시는 게 목사는 김익두같이 해야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셨나 물어보니까 손만 대면 병이 나았대요. 기도만 하면 사람들이 푹푹 쓰러졌대요. 그래서 제가 아이고 이 교회 잘못 왔구나... (회중 웃음) 어쩌다 내가 걸려 가지고 나는 이제 죽었다 생각했습니다. 옛날 어른들과 목사님들은 그랬어요. 기도하면 역사가 일어났어요. ... 제가 전도사 때 학생들을 지도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열왕기상 17장과 18장을 설교한 다음에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교회 마당으로 나가자고 했습니다. 나무를 모아 오라고 했습니다. 담이 없는 교회 마당이라 장작을 쌓아 놓고 얘들을 불러모으고 ‘지금부터 기도해서 불을 내리겠다고 말했습니다. 엘리야도 불을 내렸는데 왜 지금 불이 안 내리겠느냐. 사도행전에 말씀하기를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했다. 그렇듯 사도행전 역사는 지금도 일어난다, 불을 내려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다 보고 여호와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알게 해주시옵소서 기도했습니다. 지금도 일어날 줄 믿습니다. (회중을 보며) 장로님들 불이 내렸겠습니까 안 내렸겠습니까.” 앞자리의 원태윤 장로가 대답했다. “내렸습니다. (회중 웃음)” “(원태윤 장로를 바라보며) 이렇게 믿음이 좋으세요. 그러니까 회장을 하시지. 여러분 기도하면 불이 내린다. 그런데 불이 안 내렸어요. 아무리 한 시간 정도 비지땀 흘리며 애들 다 동원해 기도하는데도 불이 안 내리니까 걱정이 되는 겁니다. 얘들이 ’저 전도사 영력도 없는 게 괜히 폼만 잡고 말이야.‘ 그러지 않았겠습니까. 저는 보따리 싸야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해야 할 상황이 됐습니다. 어떻게 합니까. 얘들한테 집에 가자고 했습니다. 오늘은 때가 아닌가 보다. 나중에 한 번 더 하자. 그런데요. 얘들이 일어나지를 않는 겁니다. 불이 내렸어요. 그 장작더미에 불이 내린 게 아니라 아이들의 가슴에 불이 내렸습니다. (회중 아멘) 얘들이 기도가 터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어린아이들인데도 방언이 터지기 시작했습니다. 뜨거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시대에 그 아이들을 통해 큰 부흥을 하도록 경험을 시켜 주셨습니다. (회중 아멘) 여러분 우리 생애에 내 젊은 날에 그런 일이 있었다, 감사하지만 이제 나이가 들어 하나님 앞에 갈 날이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하나님. 세월을 아끼라 하셨는데 이때에 사람들에게 보여주게 해주시옵소서. 하나님 살아 계심을 어떤 식으로든지 내 삶과 내 기도가 보여주는 그런 하나님의 역사를 나타내 주시옵소서.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의 이름과 의를 위해서 기도하는 우리 장로님들 되시면 (회중 아멘) 우리 교회들이 다시 믿음의 불이 붙을 것입니다. (회중 아멘) 불붙이는 사람, 비 내리게 하는 사람, 하나님의 응답을 가져오는 사람 되시기를 바랍니다. 할렐루야! (회중 아멘) 다 일어서시기 바랍니다. 두 손 들고 기도하십시다.” 찬양 후 장봉생 목사의 인도로 ’주여 삼창‘을 외친 뒤 불을 받은 장로들의 뜨거운 통성 기도가 이어졌다. 훗날 총회에 모인 총대들도 이런 불이 내리는 기도가 그가 선 단을 통해 이루어질 것 같은 소망의 불이 타올랐다. 2021-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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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9-11
  • 영광대교회 한국교회 회복의 날
    교인이었던 그는 어디 있을까. 아직 교회 안에 있을까. 아님 사라졌을까. 교회가 그를 사랑하지 않았던 걸 그는 알았을까. 그리고 그는 교회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걸... 2020년 5월 21일 오후 5시 100주년 기념관 그레이스홀에서 한국교회총연합 사회정책위원회(위원장 소강석 목사) 주관으로 “포스트 코로나19 ‘한국교회 예배회복의 날’ 관련 교계 기자 간담회”가 열렸다. 한국교회 목회 생태계 보존과 발전을 위해 불철주야 뛰어다니는 한교총 사회정책위원회 위원장 소강석 목사(새에덴교회)가 ‘한국교회 예배회복의 날’ 취지와 목적을 설명했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고맙습니다. 와 주셔서. 간략하게 설명드리고자 합니다. 첫째 한국교회 예배회복의 날 선포 배경과 취지입니다.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한국교회가 큰 소용돌이 속을 지나는 듯합니다. 세계가 펜데믹으로 마비되고 미궁 속에서 헤매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그나마 당국의 신속한 대응과 의료인들의 창의적이며 헌신적인 희생 그리고 국민의 자발적 동참으로 진정국면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도 예고 없이 닥친 질병으로 지난 10주간 동안 큰 혼란을 경험하였습니다. 한국교회는 준비 없이 생명을 걸고 지켜왔던 주일예배가 중단의 위기를 경험했습니다. 한국교회에 있어 주일예배는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에도 중단되지 않았던 순교 신앙의 유산입니다. 사회적으로 감염병 집단 감염에 대한 두려움과 우려 때문에 ‘사회적 거리 두기’를 강조하던 시기에 몇몇 교회가 정부의 권고를 무시한 채 예배를 드리는 모습이 공영방송에 노출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모든 교회가 사회적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위기는 따로 있습니다. 사태의 장기화로 성도들이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기간 동안 ‘교회와 예배에 대한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 코로나 사태가 해결된다 해도 ‘한국교회가 이전과 같은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인가’하는 질문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위기감을 인지하고 한국교회총연합은 상임회장 회의를 통해 코로나 이후 한국교회가 새로운 변화를 이끌어 갈 수 있는 길과 방향을 모색하기 위하여 오는 5월 31일 주일을 ‘한국교회 예배회복의 날’로 선포하였습니다. 이날은 다음과 같은 의의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첫째, 내부적으로 교회와 성도들이 기도하고 예배하는 마음을 모으게 될 것입니다. 둘째, 대사회적으로 한국교회의 응집된 메시지를 전달하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셋째, 한교총 사회정책위원회에서는 ‘포스트 코로나19’에 대하여 지속적으로 준비해 나갈 것입니다. 우리는 겸손하게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며 국가와 사회, 교회의 변화와 대응방안을 계속 찾아 노력할 것입니다.” 2020년 5월 31일 11시 영광대교회(김용대 목사)는 ‘한국교회 예배 회복의 날’ 예배를 드렸다. 김용대 목사는 ‘예배자의 삶’을설교했다. 본문은 요한복음 4:19-26 ‘여자가 가로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여자가 가로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 하시니라’이었다. 본당은 교인들로 가득했다. “... 아파트에 살면 따뜻하잖아요. 그런데 이사 간 우리 아파트는 추워요. 나중에 알았는데. 제가 집을 나갈 때 보일러 전원 버튼을 끄고 나갔습니다. 외출 버튼을 끄고 나가야 아파트 온도가 일정 수준 유지합니다. 그래야 돌아와 다시 버튼을 정상화 시키면 예열이 되어 있어서 금방 따뜻해집니다. 그런데 아예 꺼버린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와 이 공동체 예배를 통해서 은혜를 받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우리가 믿음의 예열이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배자로서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죄지을 것 다 짓고 나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냉랭한 심령이 되어서는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그래도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며 여러분의 영적 상태를 점검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공동체 예배의 자리에 나오기 전에 개인적인 삶이 중요합니다. 매 순간 주님만 바라보면서 우리 주님과 동행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영적 심장은 다 얼어버리고 맙니다. 악한 생각, 악한 언어와 악한 행동 모두 다 내려놔야 합니다. 우리가 다시 모여 예배를 드릴 때 감격 적인 예배를 드리기를 원한다면 매 순간 주님과 동행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예배자의 삶은 예수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세상 것 보지 말고 예수님만 바라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회중 아멘) 오늘 성령강림절 크게 강조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늘 성령강림절입니다. 오순절에 성령 하나님께서 강림하신 이후에 제자들의 삶이 변화했고 그리고 비로소 교회가 시작됐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확장되어 갔습니다. 오늘은 한국교회가 예배 회복의 날로 지키는데 교회와 성도들이 새롭게 변화되는 출발점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회중 아멘) 초대교회가 무엇을 했습니까. 다른 것 안 했습니다.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고 오직 예수님만 증거했습니다. 세월이 흐른다고 본질이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2천 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교회와 성도는 모두 오직 예수님만 바라봐야 할 줄로 믿습니다. (회중 아멘)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그동안 공동체 예배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절실히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예배 회복의 날로 하나님 앞에 나아왔습니다. 그렇지만 공동체로 나아와 예배당에 나아와 예배를 드리는 것만으로 만족하면 안 됩니다. 공동체로 나아오기 전에 우리는 죄악을 벗어버리고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는 참 예배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회중 아멘) 신랑 되신 우리 주님 맞이하는 성결한 신부, 신실한 신부, 순결한 신부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회중 아멘) 기도드리겠습니다.” 온 회중이 머리 숙였다. 설교자의 간구가 낮게 울렸다. “거룩하신 여호와 우리 하나님 간구합니다.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고 죄악을 벗어버리는 온전한 예배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회중 아멘). 아멘.” 찬송이 울려 퍼졌다. 주의 주실 화평 믿음 얻기 위해 너는 정성껏 기도했나주의 제단 앞에 모두 바치기 전 복을 받을 줄 생각 말라주의 제단에 산 제사 드린 후에 주 네 맘을 주장하여주의 뜻을 따라 그와 동행하면 영생 복락을 누리겠네 축도 후 교인들은 사회적 거리를 두고 질서 있게 퇴장했다. 당회장 실에서 김용대 목사와 물을 부은 컵라면과 김밥을 두고 마주 앉았다. 식사를 나눌 때 김용대 목사는 낮지만 울림이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 총회가 기다려져요. 오늘 한국교회 예배 회복의 날도 소강석 목사가 주창했다고 하는데 그는 늘 업데이트가 되요. 총회 후 소강석 목사가 어떻게 업데이트가 될지 사뭇 기대되요. 그 지식, 식견, 비전이 정말 놀라워요. 나이는 나랑 같은데 신학교는 4년 선배지만...” 2020년 5월 30일 오후 3시 22분(한국 시각 31일 새벽 4시 22분) 미국 플로리다주의 케네디우주센터에서 우주비행사 두 명을 태운 우주선이 발사됐다. 민간 우주기업 스페이스X의 유인우주선 '크루 드래건'이 '팰컨9' 로켓에 실려 우주로 날아갔다. 1969년 이곳에서 인류 최초로 달 착륙에 성공한 유인(有人)우주선 아폴로 11호를 쏘아 올렸는데 이날은 민간 최초의 유인우주선을 발사하는 기록이 만들어졌다. 팰컨9 로켓은 1·2단 발사체가 성공적으로 분리되며 크루 드래건을 우주 궤도에 올렸다. 스페이스X는 재활용 로켓인 팰컨9의 1단 발사체도 바다에서 회수했다. 우주선은 31일 오전 10시 30분(한국 시각 31일 오후 11시 30분) 지구 상공 400㎞에 있는 국제우주정거장(ISS)에 도킹(결합)했다. 스페이스X의 무인 화물선과 마찬가지로 국제우주정거장(ISS)과 도킹하는 전 과정이 컴퓨터에 의해 자동으로 진행됐다. 스페이스X는 우주에 사람을 보낸 첫 민간기업이 됐다. 우주를 향한 첫 도약 배경에는 이 회사 창업자 머스크가 있다. 외신들은 유인 우주선 발사 성공에 대해 "스페이스X 창업자 일론 머스크의 돈키호테식 무모한 도전이 미국 우주개발의 탐험 정신을 되살렸다"고 평가했다. 머스크는 지난 30일(현지 시각) 하루 자신의 성과를 총망라해 자랑했다. NASA의 두 우주인은 머스크가 세운 자동차 업체 테슬라의 전기자동차 '모델 X'를 타고 발사장까지 이동했다. 이들은 이후 스페이스X의 재활용 로켓 '팰컨9'에 실린 우주선 '크루 드래건'을 타고 국제우주정거장(ISS)으로 날아갔다. 일론 머스크는 1971년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태어났다. 1995년 스탠퍼드대 박사과정을 그만두고 인터넷 결제 업체 페이팔을 창업했다. 그는 2002년 페이팔을 매각해 받은 1억6500만 달러(약 1800억 원)로 스페이스X와 테슬라 등을 세웠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현재 그의 재산은 410억 달러(약 50조 원)에 달한다. 머스크는 어릴 적 아이작 아시모프(1920~1992)의 공상과학(SF) 소설 '파운데이션'을 읽고 우주 탐험의 꿈을 갖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스페이스X를 세우며 "화성으로 이주하겠다는 어린 시절 꿈을 이루겠다"고 밝혔다. 우주를 향한 머스크의 꿈은 어릴 적부터 읽었던 아이작 아시모프(1920~1992)의 공상과학(SF) 소설이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진다. 머스크는 최근 트위터를 통해 “아이작 아시모프의 연작 공상과학 소설 ‘파운데이션’은 읽어 볼 가치가 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파운데이션’은 미래 우주에서 거대 행성 간 제국의 몰락과 재탄생을 다룬 소설이다. 테슬라는 작년 한 해 동안 전기자동차 약 37만대를 팔았다. 그런데 같은 기간 242만대를 판 포드 그룹의 주식가격은 6달러가 채 안 되는 반면, 테슬라는 한 주에 무려 822달러다. 이 정도의 가격은 자동차 회사 주식이라고 보기 어렵다. 왜냐하면 주식가격은 성장 가능성으로 정해지기 때문이다. 여기에 수수께끼를 풀어줄 열쇠가 있다. 왜냐하면 주주들이 테슬라를 자동차 기업으로 생각하지 않고 디지털 테크 기업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생각은 틀린 게 아니다. 테슬라는 제조부터 판매, 판매 후 관리까지 전 과정에 디지털 기술을 적용해서 빅3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운영된다. 가령 네바다주에 있는 공장 ‘기가팩토리’는 정북향으로 지어졌다. 공장 내부의 로봇들이 GPS로 쉽게 움직일 수 있게 배치한 것이다. 판매는 딜러망 없이 온라인으로 하고 구매자에게 자동차를 배달한다. 테슬라를 자동차가 아닌 디지털 제품으로 인식하게 하는 것은 구매 후의 경험이다. 테슬라 자동차 소유자들은 차를 구매한 후로 말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차가 더 좋아진다.” 마치 스마트폰처럼 끊임없는 소프트웨어 자동 업데이트로 차가 샀을 때보다 더 똑똑해지기 때문이다. 그처럼 기인 소강석 목사도 호남의 묵직한 지도자 김용대 목사가 말하듯 늘 업데이트되고 있다. 그것은 목사로서 교회와 나라를 사랑하는 소강석 목사의 남북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원대한 비전'과 그를 뒷받침하는 코로나19 이후 ‘한국교회 회복의 날’과 같은 '단기 실행 능력'으로 증명이 되고 있다. 바이러스는 모든 종교를 강타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는 수천 년 내려온 절기의 전통을 중단시켰다. 순례객으로 그득해야 할 바티칸과 예루살렘은 적막하다. 소중한 전통과 제의를 지키지 못하는 안타까움에 신도들은 상심할지 모른다. 그러나 꼭 그럴 필요는 없다. 어쩌면 지금이야말로 소강석 목사가 주장하는 대로 위기를 통해 하나님이 주시는 본질 회복의 기회일 수 있기 때문이다. 생명 걸고 지키려 해 온 신앙의 가치가 성지나 조직이나 제도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교회 신자이어야 한다는 것을 김용대 목사의 ‘오직 주님만 바라보고 살아야 한다’는 설교처럼 담담히 성찰할 때가 아닐까. 그렇기에 비어 있는 메카의 모스크와 예루살렘 성전 통곡의 벽과 로마 베드로 성당 그리고 세계 곳곳 교회의 모습은 묘한 감동을 준다. 물리적으로는 비어 있지만 공허하지 않다. 빈 공간은 사람의 안전을 위한 공동 노력을 상징한다. 신도 간 거리 두기와 공간의 비움을 통해 유월절의 해방과 부활절의 생명 그리고 믿지 않는 자와의 연대를 교회가 누릴 수 있기를 소망한다. 거리 두기의 비움이 곧 교회 발전의 씨앗이 될 영성일 수도 있는 요즈음이다. 2020-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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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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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경원목사 설교 - 삶의 끝자락에서 해야 할 고백
    삶의 끝자락에서 해야 할 고백딤후 4장 1절~8절 사람이 일생을 살고 생의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살아온 삶을 돌아봅니다. 어떤 이는 잘못 살아 후회하면서 생을 끝내기도 하고, 어떤 이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한 삶에 자부심을 느끼기도 합니다. 또는 다른 사람의 죽음을 보고 참 잘 사신 분이라는 평가를 하기도 하고 때로 잘못된 삶이었다는 비난을 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삶을 바로, 가치 있게 살아,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일생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 앞의 많은 분들이 값진 일생을 살았습니다. 그 중 가장 가치 있는 생을, 자랑스러운 일생을 사신 분을 손꼽는다면 아마 사도 바울일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의 고백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사랑하는 제자요,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에게 한 말씀입니다. 자신의 최후를 내다보면서(6절 전제와 같이 내가 벌써 부어지고 나의 떠날 시각이 가까웠도다) 엄숙한 배경에서 자신의 일생을 요약하고 있습니다. 7절에서 간단하게 ‘나는 이렇게 살았다’고 하는데 이 고백이야말로 대단히 가치 있는 일생을 산 고백입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어떤 면에서 오늘 우리 모두가 삶의 끝자락에서 해야 할 고백이 아닌가 싶습니다. 아니, 이런 고백을 할 수 있는 인생을 살아야 합니다. 이 시간, 바울의 일생에 대한 고백을 생각해보고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를 나누기 원합니다. 먼저 ‘믿음을 지켰으니’라는 고백입니다. 가장 귀한 삶은 믿음의 삶이요, 끝까지 바른 믿음을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울도 한때는 예수님을 거부했습니다.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고 유대 전통적 신앙인 율법주의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메섹 길에서(사도행전 9장)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무엇보다도 그의 신앙이 달라졌습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는다는 바른 기독론과 구원론을 확립했습니다. 그래서 지금 그는 그것을 끝까지 지키고 삶의 끝자락에서 믿음으로 살았노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성경에 근거한 바른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 우리 주변에는 거짓되고 잘못된 신학과 신앙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그 중에 소위 종교다원주의 사상이 있습니다. 우리는 오직 예수(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행 4:12),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즉 예수님만이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부활하셨으며 그 이름을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유일 구세주와 구원의 절대성을 믿습니다. 그러나 종교다원주의는 예수님 외에 다른 종교에서도 구원이 있다는 이론입니다. 우리는 성경에 근거한 절대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 교단, 신앙의 선배들이 가졌던 그 믿음의 전통을 이어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으로 가는 지도자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령한 그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우로나 좌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수 1:7). 바로 오늘 우리 신앙이 하나님 말씀, 성경 중심에 서서 결코 좌우로 치우치지 않아야 합니다. 창세기 35장에서 하나님은 야곱에게 벧엘로 올라가라고 명하십니다. 야곱은 세겜에서 10년 사는 동안 그의 신앙이 잘못 되었습니다. 드라빔을 비롯해서 세겜 땅의 우상 신앙의 영향을 받아 하나님 한 분만이 아닌 잡다한 우상을 인정하는 신앙에 빠진 것입니다. 그런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벧엘로 올라가라, 즉, 벧엘에서 가졌던 신앙을 회복하라고 명령하신 것입니다. 이 명령을 받은 야곱은 자신을 살펴보고 회개하고 이방 신상들을 다 제거해 버리고 벧엘로 올라갑니다. 단지 장소적 이동이 아닌 믿음을 바르게 한 것입니다. 바르게 끝까지 믿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 삶의 끝자락에서 믿음을 지켰다는 고백을 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다음으로 ‘선한 싸움을 싸웠다’입니다. 바울의 일생은 어떻게 보면 평생 싸우며 사는 삶이었습니다. 철저한 유대 율법주의로 무장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할 뿐만 아니라 예수를 믿는 자, 십자가와 부활 신앙을 가지고 전하는 자를 잡아 가두며 스데반을 죽이는 현장에서 박해자의 편에 섰습니다. 그러나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주님을 만나고 변화되었습니다. 그 뒤 그의 싸우는 삶은 계속 되었지만 싸움의 방향과 목적이 달라졌습니다. 그 이후의 싸움을 그는 선한 싸움이라고 표현합니다. 선한 싸움이라고 고백한 내용을 보면, 먼저 진리를 위한 싸움입니다. 수많은 이단자들, 바리새인과 사두개인들, 율법주의를 향해서 싸웠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구원과 진리를 위해 대제사장 앞에서 싸우기도 했고 로마 총독에게서 미쳤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습니다. 다른 면에서 선한 싸움은 도덕과 영적 싸움이라고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자신과의 싸움입니다. 그는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라고 고백합니다. 그는 보다 성결하게 살고, 죄에 물들지 않은 성도답게 살기 위해 싸웠습니다. 그래서 그는 나는 날마다 죽노라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전 15:31)고까지 말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 선한 싸움과 성화를 위해 발버둥치는 바울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요소 가운데 하나는 거룩성입니다. 우리는 분명 의신득구를 믿습니다. 오늘 한국 교회가 너무 칭의를 강조하고 성화를 소홀히 했다는 신학자들의 지적을 봅니다. 즉, 믿음만 지나치게 강조하고, 믿은 후의 성도의 삶, 거룩해지거나 세상과 다른 삶의 모습이 약화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한국 교회 안의 부끄러운 일들이 세상에 많이 노출되고 있습니다. 거룩성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답지 못해서 문제입니다. 교회가 교회다워야 하고 목사가 목사다워야 하며 장로가 장로다워야 합니다. 성결의 수준을 더 높여야 합니다. 모세도 출애굽 지도자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을 때 이리로 가까이 오지 말라 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니 네 발에서 신을 벗으라(출 3:5)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많은 해석이 있으나 거룩성을 요구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이사야도 입술의 부정을 고백했습니다(그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사 6:5). 우리 모두가 믿음과 동시에 성도다운 특히 교계 지도자다운 거룩성 회복 운동에 동참해야겠습니다. 끝으로, ‘달려갈 길을 다 달렸다’는 고백입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달려갈 길은 무슨 길입니까? 곧 사명의 길입니다. 즉, 나는 일생을 사명 따라 살았다는 고백입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생명과 직분과 은혜와 은사를 왜 주셨는가? 곧 내게 부여하신 사명이 있고 그 사명을 완수하라고 주셨다. 그러기에 나는 이 사명 따라 산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언제 어디서든 늘 이 사명을 기억했습니다. 그는 다메섹 길에서 변화된 뒤 하나님이 주신 이방인의 전도자로서의 사명을 받았습니다. 그 이후 그는 이 사명의 완수를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세 번에 걸친 전도여행과 죄수의 몸으로 가게 된 로마 등 그가 가는 모든 곳에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우고 일군들을 세우는 것이 모두 그의 사명이었습니다. 그는 이 사명을 생명과도 바꿀 수 있다고 했습니다.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행 20:24). 그러나 이 사명을 따라 사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바울은 이 사명 때문에 옥에 갇혔고, 루스드라에서 돌에 맞기도 했고, 미쳤다는 조롱도 받았고, 여러 차례 태장을 맞고, 투옥과 파선도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감사하면서 섬겼습니다(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딤전 1:12). 하나님께서 나를 목사와 장로로 세우시고 기대하시는 것이 있고 내가 꼭 해야 될 일도 있습니다. 부끄럽게도 오늘 한국 교회의 위기를 많이 말합니다. 한국 교회의 위기는 목회자의 위기에서 온다고 봅니다. 무엇이 오늘 목회자의 위기입니까? 그것은 소명감의 상실과 거룩성의 훼손에서 오는 것입니다. 목사, 그는 목자입니다. 양을 돌보는 목양의 사명을 부여받았습니다. 오늘 우리 목사들이 제대로 사명을 감당하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목사는 목자의 자리를 지켜야 합니다. 우리는 왜 하나님이 나를 목사로 세우셨는가 스스로 묻고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사명의 자리를 떠났다면 다시 돌아와야 합니다. 회복은 말씀과 기도에서 나옵니다. 말씀의 사람, 기도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말씀을 맺습니다. 우리 교단은 한국 교회의 최대 교단이라고 자랑합니다. 그러나 자랑 보다는 책임감을 느껴야 합니다. 우리 교단의 행보에 따라 한국 교회가 큰 영향을 받습니다. 그러기에 책임이 큽니다. 목사, 장로 한 사람, 한 사람의 책임이 큽니다. 우리의 지금까지 삶이 바울의 이 고백 같은 고백을 할 수 있는지요? 안 된다면 하나님 앞에 죄송하고 교회 앞에 부끄러움을 느끼며 회복을 위해 기도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이여 우리를 살리소서, 회복시켜 주소서, 은혜를 베푸소서. 2014-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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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6-23
  • 이승구 박사의 신학논단 - 도둑질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구원함을 받은 거룩한 무리들, 즉 성도(聖徒)들이 이 세상을 살면서 행해야 할 일들 가운데 또 하나로 도둑질하지 말 것을 명하는 명령은 구약에서부터 주어져 있습니다(출 20:15; 레 19:11; 신 5:19). 구약 성도들도 이 말씀을 듣고 지켜야만 했고, 신약의 성도들도 그런 것입니다. 구원받은 성도들이 마땅히 해야 할 일 가운데 하나로 이를 명령하시는 것은 구원받았다고 해서 도둑질할 가능성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받은 구원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구원받는 그 순간에 우리가 온전한 사람이 되는 그런 식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잘 보여 주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이 평생 싸워나갈 일의 하나가 바로 부패한 인간성의 발로의 하나인 도둑질하려는 성향과의 싸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원받은 사람들도 성령님에 의지해서 힘쓰지 않으면 부지불식간에 이런 잘못된 성향에 따라 가기 쉬운 것입니다. 지난번에 생각했던 살인, 간음 등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 -- 하지 말라”는 부정적 형태의 금령은 우리의 상황을 매우 현실적으로 보여주면서 그 상황 가운데서 우리가 어떤 방향을 나아가야 하는 지를 제시하고 명령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죄악의 현실을 매우 현실적으로 다룹니다. 죄악된 인간의 모습을 가장 잘 드러내고 있는 것도 성경이고, 그 죄악과 그 결과로 주어진 비참함으로부터 구원받음을 유일하게 제시하는 것도 성경이고, 구원 받음 인간의 불완전함과 죄악을 잘 드러내는 것도 성경이고, 그런 부패한 인간성과의 힘 있는 투쟁의 필요성과 그 현실을 잘 제시하는 것도 성경인 것입니다. 이 투쟁을 돕기 위해 주어진 금령 중의 하나가 이번에 우리가 생각하는 “도둑질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이제 이 말씀의 의미에로 들어가 보기로 하겠습니다. 도둑질하지 말라는 금령의 단순한 의미 이 금령은 일차적으로 그 어떤 형태의 도둑질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는 다른 정황에도 적용되지만 기본적으로 사유재산을 전제로 하는 말씀입니다. 공동의 재산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말라는 말도 포함되지만, 기본적으로는 개개인들이 가지고 있는 재산을 어떤 방법으로든지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일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인간의 욕심을 한이 없어서 어떤 방법으로라도 다른 사람들의 재산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 의도와 그런 행동이 나타나기 쉬운 것입니다. 그런 인간의 의도를 잘 알기에 성경은 그런 시도를 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금령의 적극적 의미 그렇다면 이 금령은 그저 그렇게 남의 것을 불법적인 방도로 자신의 것으로 만들지 말라는 의미만을 지닌 것일까요? 이 금령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지 많으면 그렇게만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 정도로 생각하고 절대로 남의 것을 자신이 사취하지 않는 것은 그 한도 내에서는 옳고 훌륭한 일입니다. 그래서 그 정도로만 생각하는 사람들 중에서 남의 것을 불법적으로 사취(詐取)하지 않은 사람들은 우리들은 이를 다 지켰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말하기 쉽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어떤 관리는 이 계명을 포함한 말씀을 듣자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고 담대히 말한 일도 있었습니다(눅 18:21, cf. 막 10:20). 이 금령을 표면적으로만 이해한 까닭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과의 모든 논의가 이루어진 후에 결국 그 사람은 이 계명을 다 지킨 사람이 아니었음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것은 이 사람이 살인을 하거나 간음을 하거나 실제로 도둑질을 한 사람이라는 것이 아니라, 이 사람은 이 금령의 더 적극적 의미를 잘 생각하지 않고, 그저 쉽게만 생각했었다는 말이지요. 우리들도 더 깊은 의미에로 들어가지 아니하면 이 사람처럼 이런 금령은 “우리가 다 지켰습니다”라고 잘못 주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 금령을 우리에게 내셨을 때는 단순히 그 정도를 가지고 말씀하신 것이 아닙니다. 다른 분들도 더 나아 가서 생각한 분들이 있지만 특히 16세기와 17세기 우리 개혁신앙의 선배들은 이 금령의 적극적 의미를 깊이 생각하는 일에 앞장섰습니다. 예를 들어서 ,17세기 문서인 웨스트민스터 대요리문답 141문에서는 “제 8 계명이 요구하는 의무는 무엇입니까?”라고 묻는 일을 먼저 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제 8계명이 금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묻는 142문보다 적극적 의미를 더 앞에 놓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이 아주 적극적인 제시를 하고 있습니다. 제 8계명에서 요구된 의무들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계약과 거래에서의 참됨과 신실함과 정의이고, 모든 사람에게 그에게 합당한 것을 주는 것이며, 합법적 소유주로부터 불법적으로 점유된 것들을 그 본 소유주에게 돌려주는 것이고, 우리 자신들의 능력에 따라서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필요에 따라서 거저 주고 빌려주는 것과 세상 재화에 대한 판단과 의지와 감정의 조절(moderation)이고, 우리의 성질의 유지와 우리의 조건에 적합한 필요하고 적절한 재화들을 얻고, 보존하고, 사용하고, 없애는 일에 대한 신중한 관심과 연구, 그리고 합법적인 직업과 그에 대한 열심, 절약, 불필요한 소송이나 보증이나 그와 같은 관여를 피하는 것, 모든 정의롭고 합법적인 수단으로 우리 자신들의 것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재산을 얻고, 보존하고, 증진시키는 일에 대한 열심입니다. 이를 잘 살펴보면, 우리들은 17세기 우리 선배들이 얼마나 깊이 있게 그리고 바르게 생각했는지에 대해서 놀라지 않을 수 없으며,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포괄적인 지를 생각하며 놀라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구원받은 하나님 백성의 재물관이 어떠해야 하며, 직업관이 어떠해야 하며, 이 세상에서 사는 방식이 어떠해야 하는 지에 대해서 상당히 많이 배우게 됩니다. 제 8계명의 적극적 의미의 기본적인 원칙이 제일 앞에 천명되는데, 그것이 바로 구원받은 성도들의 삶의 기본적 원리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계약과 거래에서의 참됨과 신실함과 정의.” 우리는 이 세상에서 살 때 다른 사람과의 관계 가운데서 사는 데 그 때 그 모든 관계 가운데서 참됨(truth)과 신실함(faithfulness)과 정의(justice)를 자기고 드러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관계 속에서 내가 참으로 참된지를, 참으로 신실한지를, 그리고 참으로 정의로운지를 물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은 우리의 모든 것이 죄인 것이고, 그에 대해서 우리는 철저하게 회개하면서 우리의 모든 관계에서의 참됨과 신실함과 의로움을 지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구원 받은 우리의 삶은 적극적으로 그런 참됨과 신실함과 의로움을 간직하고 이 세상에 드러내기 위해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여기 구원 받은 우리의 일상생활의 적극적 의미가 잘 드러납니다. 우리의 일상생활이 참됨과 신실함과 의로움을 간직하고 드러내기 위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여기 구원 받았음의 증거가 있고, 구원 받음 결과인 진정 구원받은 자 다운 삶이 있는 것입니다. 참됨과 신실함과 정의 드러냄의 구체적 의미 이것은 구체적으로 우리에게 어떻게 할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까? 첫째로, 모든 사람에게 그에게 합당한 것을 주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이 일을 했을 때 그에게 보수를 주는 것은 내가 선심을 베풀어 주는 것이 아니고 그에게 적합한 것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업체의 주관자들이 그 사업체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적당한 보수를 줄 때에 우리가 주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각자가 일한 것에 대해서 그에게 합당한 몫을 받는 것입니다. 마땅히 그들의 것을 그들에게 돌려주는 것이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구약에서도 “착취하지 말며, 품꾼의 삯을 아침까지 밤새도록 네게 두지 말며”(레 19:13)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그저 임금 체불을 하지 말 것을 명하는 정도가 아니고, 그 임금을 그가 받을 마땅한 것이라고 생각해야만 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그에 대해서 정당하게 생각하지 않고, 바르게 행하지 않을 때에 하나님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라 너희 밭에서 추수한 품꾼에게 주지 아니한 삯이 소리 지르며, 그 추수한 자의 우는 소리가 만군의 주의 귀에 들렸느니라”(약 5:4). 이것은 또한 우리가 일할 때 어떤 마음으로 해야 하는지에 대한 함의도 지니고 있습니다. 합법적인 직업을 가지는 것과 그에 대한 열심히 제 8계명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의무 가운데 하나로 있다고 하는 것은 17세기 우리 신앙의 선배들이 신앙을 얼마나 포괄적으로 생각하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 주는 것입니다. 합법적인 직업을 가지고 그에 열심을 내는 것이 우리들이 마땅히 할 바이고, 그로부터 우리가 마땅한 몫을 받은 것은 합당한 것이라는 것을 아주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필요하고 적절한 재화들을 얻고, 보존하고, 사용하고, 없애는 일에 대한 신중한 관심과 연구”도 필요하다고 말하며.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책임 있게 살아가는 일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할 때에 주의하지 않으면 우리가 재화에 온통 마음을 빼앗길 수도 있다는 것을 잘 알았던 우리 선배들은 “세상 재화에 대한 판단과 의지와 감정의 조절(moderation)”도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지나치게 재화의 문제에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지요. 주어진 것에 대해서는 성실하게 감당하되 우리 개인적으로는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딤전 6:8)고 말씀하신대로 살며, “돈을 사랑하지 말고 있는 바를 족한 줄로 알”아야 할 것입니다(히 13:5). 또한 구약의 신실한 성도와 같이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잠 30:8)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와 같이 모든 것에서 적절함(moderation)을 추구하는 것이 구원함을 받은 성도의 마땅한 바인 것이지요. 그러므로 기본적으로 절약하여 단순한 삶을 사는 것이 이 계명의 함의에 포함된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여기에는 “불필요한 소송이나 보증이나 그와 같은 관여를 피하는 것”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세상 법정에 호소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고전 6:4)에 대한 고려와 함께 이런 소송이 대개는 재화를 더 얻으려는 마음으로 진행된다는 것을 감안한 생각인 것입니다. 복잡한 현대 사회에서도 상대편이 고소하여 법정에서 다투어야 하는 경우가 아니면 될 수 있는 대로 세상 법정에 호소하지 않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만일에 다른 분들이 갑자기 재화를 필요로 하게 되는 상황에 처하게 된 경우에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경우에도 “우리 자신들의 능력에 따라서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필요에 따라서 거저 주고 빌려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우리의 신앙의 선배들은 고백했습니다. 물론 자신의 능력에 넘치게 거저 주고 빌려 주는 것은 자신의 능력 이상의 것을 하여 자신과 상대 모두를 어려움에 빠지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능력에 넘치는 일을 하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능력이 있으면 다들 이와 같이 하는 것이 옳습니다. 우리에게 재화가 주어진 중요한 목적들 가운데 하나가 결국 사람들을 잘 돕도록 하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형편이 되는 데로 이 런 일을 게을리 하는 것은 과연 왜 우리가 재화를 소유하는 지를 잘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은행 같은 것이 발달된 상황에서 그 어떤 이자도 받지 않는 것이 옳거나 더 정의롭다는 의미는 아닙니다. 단지 잘 아는 개인 간에는 능력의 한계 내에서 거저 주고 빌려 주는 것이 옳다는 것입니다. 앞서 말한 재화에 대한 지나친 집착은 전혀 이를 하지 못하게 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 집착하지 않을 때 우리는 능력이 되는 한도 내에서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에게 거저 주고 빌려주는 일에서 인색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물론 도움을 받은 입장에서는 이런 일에 대해서 참으로 감사히 여기고, 최선을 다해 회복시켜서 자신이 다른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것은 절약과 검소하게 사는 삶의 방식을 통하지 않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8계명의 적극적 의미의 요약 이제까지 말한 8계명의 적극적 의미를 요약한다면 그것은 “모든 정의롭고 합법적인 수단으로 우리 자신들의 것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재산을 얻고, 보존하고, 증진시키는 일에 대한 열심”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도둑질하지 말라”는 말에 자신들의 재산을 정의롭고 합법적인 수단으로 얻고, 보존하고, 증진시키는 일에 열심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 포함 되어 있다는 것을 생각하는 것은 모든 것을 근원적으로 잘 미루어 살피는 사람들의 놀라운 추론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은 8계명을 범하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또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재산이 정의롭고 합법적인 방식으로 얻어지고, 보존되고, 증진되도록 하기도 해야 합니다. 참 하나님의 백성들은 자신의 재화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재화도 그 자체를 부정적으로 보지 않습니다. 합법적으로, 그리고 정의롭게 재산이 얻어 비고 보유되고, 증진 되는 것에 항상 신경 써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재산의 증진을 위해서 다른 사람의 재산이 증진 되는 것을 막는 것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참으로 합법적이고 정의로운 경쟁이 있을 수 있는 것입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들은 그 어떤 형태의 “도둑질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과 다른 사람들의 재산이 합법적으로 그리고 정의롭게 얻어지고, 보유되고, 증진 되는 것에도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위해 애쓰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마 일반적인 사람들이 그리하듯이 재화 자체에 대한 지나친 관심 때문에 그리하는 것이 아니고, 그 모든 것이 주께서 자신들에게 부탁하고 맡기신 것이라는 것을 잘 의식하기에 주께서 맡기신 것을 제대로 활용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 각자는 자신들의 속마음을 깊이 있게 살펴야 합니다. 우리에게 참으로 재물과 재화 자체에 대한 욕심이 없는 지를 말입니다. 그런 욕심이 전혀 없이 주어진 것을 최선을 다해 수행해 가는 사람이 참으로 구원받은 사람입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제 111문은 이 계명의 적극적 의미에 대해서 다음 같이 묻고 대답하고 있습니다. 문: 이 계명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답: 내가 할 수 있고 해도 좋은 경우에는 나의 이웃의 유익을 증진시키며,내가 남에게 대접을 받고 싶ㄹ은대로 이웃에게 행하고,더 나아가 어려운 가운데 있는 가난한 사람을 도울 수 있도록 성실하게 일해야 합니다.다. 2014-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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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2-20
  • 하나님의 연애편지
    멀리 떨어져 있을수록 그리고 오랜 기간 헤어져 있을수록 전달되어온 편지야 말로 그 내용이야 어떻던 기쁘지 않을 수가 없다. 더구나 깊이 사랑하는 애인으로부터 온 편지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기뻐하는 것은 사람들의 공통된 마음일 것이다. 성경은 어쩌면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에게 보내시는 연애편지라 할 수 있겠다. 이 땅에 어느 연인들이 사랑한다고 해서 자신의 생명을 그렇게 쉽게 내 줄 수 있겠는가? 그런데 성경은 한마디로 그런 얘기다. 성경을 전체로 여러 번 읽다 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구구절절한 하나님께서 인간에 대한 사랑 이야기임을 알게 된다. 죄를 범해서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그 원수를 위해서 독생자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고, 원수를 위해서 대신 죽게 하시고, 그 원수를 아들로 삼아서 영원히 함께 사시겠다는 사랑이야기이다. 사람들은 연애편지를 받게 되면 내용이 아무리 길어도, 그리고 아무리 바빠도 단숨에 읽어버린다. 그리고 시간만 나면 읽고 또 읽고 반복해서 읽다가 나중엔 다 외워 버린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신 연애편지(성경)는 어떻게 되고 있을까? 너무도 좋아서 읽고 또 읽고, 그래서 마침내 그 내용을 다 외워 버린 사람이 인류역사가운데서 과연 몇이나 될까? 하나님께서는 자주 자주 우리 자신들의 행복과 형통함을(수1:8) 위해서 날마다 읽고, 마음에 새기고(잠3:3), 묵상하며 지켜 행하라고 명령하셨다.(신6::4-9) 하나님께서는 한국교회를 사랑하셔서 20여년 전부터 요한선교단을 세우시고 성경전체를 한자도 빼지 않고 사람이 다 읽고 암송하는 성경통독암송훈련의 운동을 일으키셨다. 처음에는 일주일간, 다음에는 5박6일, 다음에는 4박5일, 그리고 현재는 3박4일, 때로는 2박3일에 신구약 전체를 통독하게 하셨다. 단숨에 하나님의 사랑의 연애편지를 읽게 하시는 것이 얼마나 감격스러운 하나님의 은혜인지 모르겠다. 우리 사람들은 연애편지를 받아 읽고 기뻐하고 감격해 하면서 행복해 한다. 그리고 반드시 답장을 한다. 왜냐하면 사랑하기 때문에, 그리고 답장을 기다리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성경을 여러 번 읽다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답장을 얼마나 기다리고 계신지를 알게 된다. 너무 너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리고 더욱 더욱 사랑해 주시고 싶으셔서 그러하시단다(요14:21). 그 답장은 무엇일까? 말씀대로 구하는 기도가 아닐까(요15:7)? 하나님께서는 우리나라에서 전 세계로 파송된 선교사님들이 현지에서 현지어로 성경을 통독하고 암송하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마침내 제2의 종교 개혁을 일으키시기를 원하신다. 이 일이 요한 선교단에게 주신 사명이지만 또한 한국교회에 주신 사명이라 확신한다. 2014-01-12
    • G.MISSION
    • G.SERMON
    2014-01-13
  • 이승구 박사의 신학논단 - “간음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는 단순한 말로 표현된 제칠계명은 상당히 포괄적인 함의를 지닌 명령들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가장 포괄적인 제1계명과 제10계명과 함께 7계명이 십계명 가운데서 가장 많이 범해 지고 있는 계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계명의 말씀이 얼마나 포괄적인지를 이해하려면 먼저 이 계명의 적극적 의미부터 생각해야 합니다. 제 7계명의 가장 적극적 의미가장 적극적인 의미에서 생각하자면 제7계명은 하나님께서 내신 성적인 정체성과 성적인 관계를 가장 제대로 드러내라는 뜻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처음부터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신 의도를 가지셨고(창 1:26), 남자와 여자가 함께 사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에 부합하는 것이라는 것을 분명히 하면서(창 2:18)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만드셨습니다(창 1:27; 2:7, 18-22). 그러므로 가장 기본적으로는 남자는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남자로서의 특성(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남성성)을. 그리고 여자는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여자로서의 특성을(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여성성)을 가장 충분히 드러내야 할 사명이 있는 것입니다. 아직까지 구속함을 받은 우리들조차도 무엇이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남성성인지,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여성성인지 잘 모르고 제대로 드러내고 있지 못합니다. 그것을 잘 모르기 때문에, 심지어 하나님을 잘 섬겨나간다는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도 과연 하나님이 의도하신 남성성, 하나님이 의도하신 여성성이라는 것이 별도로 있는지를 묻는 사람들도 있을 정도입니다. 지금까지는 남자는 하지 못하는 일인 아이를 낳는 것에서만 여자의 특성이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를 묻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의 극치 상태에서는 아이 낳는 일이 없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이 다 중성이 되는 것은 아니기에 아이 낳음 이외에 남자의 남자로서의 특성, 여자의 여자로서의 특성이라는 것이 아이 낳은 일이과 그것과 연관도 기능들과 상관없이 있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땅 가운데서 과연 그것이 어떤 것인지를 탐구하고 하나님의 의도에 비추어서 남자는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남자답게, 여자는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여자답게 나타나는 일에 힘을 쓰고, 급기야 부활한 상태에서 하나님이 의도하신 남성성과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여성성의 진정한 모습을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그 때 모든 사람이 다 똑 같은 특성을 가지지 않을 것이므로 극치 상태의 남성성과 여성성에도 다양성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각기 다른 남자들이 참으로 다르지만 모두가 참된 남성성을 드러낼 것이고, 각기 다른 여자들이 역시 각기 다르지만 모두 참된 여성성을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심지어 몸을 가지고 있지 않은 하늘 낙원에 있는 상태에서도 남자의 영혼은 남자의 영혼으로서의 특성을 드러내고 여자의 영혼은 여자의 영혼으로서의 특성을 드러낼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성성과 여성성이 몸의 형태와만 연관된 것도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의도하신 사람의 모습을 잘 드러내되 하나님의 창조에 따라 어떤 사람은 남자로서의 인간적 특성을 드러내고, 어떤 사람은 여자로서의 인간적 특성을 드러내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사는 사람들도 하나님의 의도를 따라 남자로 창조된 사람들은 남자로서의 사람의 온전한 특성을 드러내고, 또 여자로 창조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여자로서의 특성을 드러내려고 애써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의 인간적 특성을 온전히 드러내는 것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자신의 정체성을 온전히 의식하고 구현하는 사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일은 어린 아이들도 해야 할 일이고, 할머니도, 할아버지도 해야 할 일이며, 하늘에 있는 온전케 된 의인들의 영혼도 하는 일이며, 부활한 사람들로 할 일입니다. 우리의 남성성과 여성성의 드러냄은 우리들의 고유한 사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이 땅을 사는 동인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우리들의 정체성을 잘 구현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사춘기에 이른 청소년들과 혼인 이전의 청년들도 그런 의미에서 자신들의 정체성의 한 부분인 성정체성을 잘 의식하고, 앞으로 혼인하여 살 때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성적인 관계를 잘 이루기 위해서 자신들을 순결하게 하며 잘 준비하여 가야 합니다. 그것도 7계명을 잘 지켜 가는 일의 한 부분입니다. 그리고 결혼 적령기에 이른 사람들은 이런 특성의 따라서 서로를 갈망하게 되고, 하나님의 뜻 안에서 만나 혼인하여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남자와 여자의 하나됨의 실현을 모든 측면에서 이루어야 합니다. 영적으로 하나님을 같이 추구하여 하나님의 의도를 이 땅 가운데서 구현하기를 간절히 원하게 되고, 심리적으로 하나됨을 이루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영적인 하나됨과 심리적 하나됨을 나타내는 일종의 표(sign)와 상징(symbol)으로 물리적인 하나됨(육체적 하나됨)인 성적 관계를 하도록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의도를 의식하면서 성적인 관계를 하는 것이 제 7계명의 적극적 함의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적 관계는 혼인 관계 안에서만 허락된 것입니다. 혼인 관계 안에서 주어진 여러 축복들 가운데 하나가 성적인 관계를 가지는 일입니다. 혼인한 사람들은 함께 하나님을 섬겨가며, 함께 공동의 사명을 이루어 가며, 함께 약속의 열매요 생명의 열매를 받아 양육하는 은혜도 얻으며, 평생 서로 의지하며 서로 돕고, 사랑하며, 가장 가까운 친구로 있는 복 등의 여러 복을 누리도록 축복 받았는데 그 중의 하나가 성적인 관계를 가지도록 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각자의 정체성을 분명히 의식하며 드러내는 것의 한 부분으로 자신의 창조 받은 성적인 정체성을 잘 드러내려고 노력하는 것과 하나님께서 혼인 관계 아래 있도록 하신 기간 동안 영적, 심리적 하나됨의 표로 하나님의 의도하신 바에 따라 성적인 관계를 잘 누려 가는 것이 7계명을 적극적으로 지키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성적인 관계는 함께 하나님을 사랑하며 섬기고 하나님의 의도대로 문화 명령을 수행하여 가는 하나님을 섬기는 부부가 하나님 섬겨가는 일의 한 부분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과 관련 없이 자신의 정체성을 생각하는 사람, 하나님과 관계없이 어떤 사람을 사랑하여 하나님과 관련 없이 그 사람과 혼인하여 나름대로 잘 살고 있는 사람도 사실은 하나님과 관련 없이 살고 있다는 점에서 제7계명을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후에 언급할 것들만이 7계명을 범하는 죄가 아니고, 하나님과 상관없이 사는 행위 전체가 다 7계명을 소극적으로 범하는 일이 되는 것입니다. 제 7계명을 적극적으로 범하는 일그렇다면 제7계명을 적극적으로 범하는 일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혼인 관계 밖에서의 모든 성적인 생각과 말과 행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 할 때 인간은 모든 타락한 마음의 생각에 그대로 노출되어(롬 1:21-32) 온갖 성적인 범죄를 범하게 되는 데 그것을 막는 명령이 제 7계명입니다. 물론 가장 현저한 것이 혼인 관계 밖에서의 성적인 행동입니다. 그것을 “간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러한 혼인 관계 밖에서의 성적인 행동만이 간음이라고 하기 쉬운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의 그런 경향을 잘 아시는 우리 주님께서는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 5:28)고 말씀하시면서 타락한 인간들의 문제를 잘 드러내신 것입니다. 혼인 관계 외의 있는 사람에게 대하여 마음속으로 성적인 생각을 하여도 이미 간음한 것이라는 이 말씀의 의미를 잘 생각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혼인 관계 밖에서의 모든 성적인 생각과 말과 행동”을 다 7계명을 어기는 죄라고 한 것입니다. 과거의 거의 모든 시대와 마찬 가지로 우리 시대에도 성적인 죄를 그렇게 심각하게 여기지 않는 성향이 있는 듯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을 섬긴다는 우리들에게도 깊숙히 들어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주변에 성적인 일탈들이 넘쳐납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이 시대에 더욱 더 기도하고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시대를 따라 가는 것은 언제나 심각한 문제라고 성경이 늘 경고하고 있는 것인데(롬 12:1-2), 우리 시대에 우리들도 그런 상황 앞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성적인 문제에 있어서도 이 시대를 따라 가지 않도록 늘 조심하고 경계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마음속으로부터 잘못된 생각이 나타나지 않도록 자신의 마음을 잘 지켜야 합니다. 그리고 그 누구도 믿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만 의지하는 원칙에 충실해야만 우리들은 7계명을 범하는 일에서 멀어 질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문제들과 적극적으로 싸우기 위해서는 (1) 우리 마음을 늘 하나님으로 가득하게 하는 일이 최선입니다. 항상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듣고, 그에 대한 책들을 읽고 묵상하고,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는 세계관을 가지고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바라 보며, 그런 세계관에서 세상과 관여해야 합니다. 근본적으로 구속함을 받은 사람답게 하나님과 함께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2)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가정을 잘 누려가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 (3) 건전한 교회의 구성원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여 가는 일이 큰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교회 공동체의 지체를 역할을 제대로 하여가면 하나님과 함께 살며, 제대로 된 가정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 세 가지는 서로가 서로를 지키는 것이라고 보면 됩니다. 교회 공동체의 지체 역할을 하지 않고, 건전한 가정을 누리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과 함께 사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함께 사는 사람은 교회의 지체 역할을 하여 나가고,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가정을 잘 지키게 되는 것이니 말입니다. 동성애 문제와 7계명그런 뜻에서 보면, 남성이 남성에 대하여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고, 급기야 성적인 관계를 가진다든지, 여성이 여성을 사랑하게 되고 급기야 성적인 관계를 가기게 되는 이른 바 동성애적 정향과 동성애는 하나님께서 내신 창조 원리에 반하는 정향과 행동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로마서 1장 26절-27절을 잘 묵상해 보는 것이 좋습니다. 그러므로 동성애적 정향과 동성애는 7계명을 범하는 성향과 행동의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이를 죄악된 성향과 죄악된 행동으로 인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바울이 이를 인간의 악의 목록 가운데서 현저한 것의 하나로 여기면서 논의하였다는 것은 이것이 현저한 죄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나 동성애만이 7계명을 어긴 죄인 것처럼 취급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동성애도 타락한 사람들의 성적인 죄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이 모든 죄를 다 심각한 죄로 여겨야지 그 중의 어떤 것만이 더 큰 죄라고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영국의 빅토리아 시대의 사람들이 동성애를 비롯한 특정한 죄를 아주 심각하게 여기면서도 그 시대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저런 죄 속에 있음을 잘 고발하는 소설들이 잘 드러내는 그 시대의 분위기를 우리가 경멸하듯이, 우리들이 동성애 같은 것을 심각한 죄라고 하면서도 우리들 가운데 심각한 죄가 있으면 이 세상은 우리들을 경멸하고, 안타깝게도 우리가 전하는 복음도 경멸하고, 심지어 하나님도 경멸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동성애만이 아니라, 동성애를 비롯하여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혼인 관계 밖에서의 모든 성적인 생각과 말과 행동”이 다 7계명을 적극적으로 어기는 죄악이라는 것을 아주 분명히 해야 합니다. 동성애적 성향을 느끼는 사람들은 하나님에 의도와 관련해서 자신들의 성향을 고쳐 주시도록 하나님께 간구하며 모든 수단을 사용해서 바르게 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리고 가장 소극적으로는 그런 성향이 실제화 되지(practice) 않도록 해야 합니다. 성령님께서 우리들은 온전히 하여 주시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말입니다. 나가면서 …하나님께서 우리들에 대하여 의도하신 삶은 "영적이며-심리적이며-육체적인 삶"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그런 모습이 잘 드러나게끔 애쓰는 것이 7계명을 잘 지켜 가는 것입니다. 주님이 원하는 가정을 잘 드러나게 하는 일이 우리가 힘써 행할 일의 하나라는 말입니다. 가정 안에서 사랑도 있고, 같이 식사하는 일도 있듯이, 성 정체성도 있고, 성적인 관계도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도를 생각하며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에는 이 모든 것이 다 포함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7계명의 적극적 의도를 더 깊이 묵상하여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남자들과 여자들과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가정과 자녀와 하나님의 의도하신 자녀 교육과 가정의 모습이 드러나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것이 7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2013-1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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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12-23
  • 이승구 박사의 신학논단 - “살인 하지 말라”
    “살인 하지 말라” 제 육계명은 십계명 안의 많은 금령들과 같이 “-- 하지 말라”는 금령의 형태로 되어 있지만 깊이 있게 생각해 보면 결국 진정한 생명 신학과 생명 운동의 적극적 기초가 되는 말입니다. 현대 사회와 같이 인간의 생명을 매우 중요시하는 것 같으면서도 상당히 무시하는 사회 속에서 우리들이 강조하고 나갈 수 있는 매우 중요한 가치 진술과 운동의 근거가 여기 있다고 여겨집니다. 먼지 이 계명의 단순한 의미를 생각해 보고, 더 적극적인 의미를 찾아 본 후, 우리 사회에 어떻게 적용해 가야 하는 지를 생각해 보기로 하겠습니다. “살인 하지 말라”는 금령의 단순한 의미 일단 이 계명이 명령하는 바는 매우 단순하고 분명합니다(straightforward). 자기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빼앗거나 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 금령을 생각하면서 나는 다른 사람의 생명을 빼앗지 않기만 하면 그의 생명을 해하여도 이 금령을 어긴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런 생각이 옳다고 생각하거나 찬동할 사람은 거의 없을 것입니다. 이 금령을 듣는 사람들은 누구든지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생명의 빼앗는 것뿐만 아니라, 생명에 그 어떤 해를 가하는 것 모두를 이 금령이 금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이 금령은 모든 살인과 살인 교사, 그리고 자살과 사람들을 자살에 이르도록 하는 모든 것을 금하는 것이 됩니다. 이것만으로도 이 금령은 인간 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살인 하지 말라”는 금령의 좀 깊은 의미 여기서 좀더 나아가 보십시다. 그렇게 자신과 다른 사람의 생명을 해하거나 빼앗지 않으면 이 계명을 다 지킨 것일까요? 이 금령을 주신 하나님의 입법자의 의도는 과연 어떤 것이었을까요? 이 명령의 법의 정신은 과연 어떤 것입니까? 예수님께서는 이 법을 내신 하나님의 의도를 잘 밝히시면서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에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 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 5:22)고 하셨습니다. 또한 우리들은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지 않도록 하라고 하시고(마 5:23), 형제들과 화목하고 사화(私和)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하셨습니다(24, 25절).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드러내주신 입법자의 의도에 의하면, 사람을 죽이는 것뿐만 아니라, 사람에게 분노하거나 욕하거나 무시하는 그 모든 일이 금지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분노의 대상, 욕의 대상, 비하의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화목해야 할 상대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입법자의 의도에 의하면 사람들의 사회는 서로 미워하고 분노하고 대립하고 욕하고 비하하는 관계 속에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인간을 창조하고 인간 사회를 주신 하나님의 의도에 의하면 인간들은 서로가 화목하고, 용서하고 감싸 주고, 서로를 높이고 존중하고, 서로 귀하게 여기는 관계를 가지여 한다는 것입니다. 욕하는 우리 사회, 서로 비방하는 우리 사회, 서로 비하하는 우리 사회 속에서 이런 입법자의 의도를 잘 생각해 보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일입니다. “살인 하지 말라”는 명령의 더 적극적 의미 더 나아가서 “살인 하지 말라”는 명령은 그저 사람의 목숨을 빼앗지 말라, 이에서 더 나아가서 사람을 미워해서는 안 된다는 정도에서 멈추는 것도 아닙니다. 진정한 성경의 독자들은 언제나 이 명령에서 우리는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생명의 증진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습니다. 우리들은 그저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빼앗는 것을 하지 않는 정도에 머물러서는 안 되고, 이 명령의 적극적 함의를 생각해서 우리들은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생명이 유지되고, 더 나아가 증진되도록 하는 일을 하도록 명령받은 것입니다. 우리들은 그저 해를 가하지 않거나 하는 정도가 아니라 “형제를 지키는 자”들이라는 것입니다(창 4:9 참조). 자신과 형제의 생명이 보존되고, 더 좋게 되도록 힘쓰는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궁극적으로 생명의 질(quality of life)에 관심을 가지게 됩니다. 그저 사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생명이 있도록 힘쓰는 자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적 의미 이 모든 것의 기독교적 함의는 매우 분명합니다. 궁극적으로 우리들은 자신과 다른 사람의 생명이 가장 온전한 상태에 있도록 힘써야 합니다. 기독교적으로 볼 때 우리 생명의 가장 온전한 상태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지닌 상태에 있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이 생명의 근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버린 것은 결국 생명을 파괴하는 일입니다. 그러기에 이런 기독교적인 관점에서는 스스로 생명을 유지하고 발전시켜 보려는 모든 노력은 다 죄인 것입니다. 인간의 생명의 근원이 무엇인지에 맹목(盲目)인 채 인간의 생명 그 자체에만 몰두 하는 것은 결국 진정한 생명을 빼앗는 일이 됩니다. 이 세상에서의 물리적 생명과 그 생명의 질에 대한 몰두가 어떻게 하면 죄이고, 사실은 진정한 생명을 앗아 가는 것이 되는 지가 여기서 드러납니다. 하나님의 의도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저버리고서 인간 생명의 질을 발전시키는 노력, 인간을 발전 시켜보려는 교육이 사실은 인간을 파괴하며 그들을 진정한 생명으로부터 멀어지게 한다는 것을 우리들은 역사를 통해서도 잘 보아 왔고, 근자의 우리들의 경험을 통해서도 피부에 와 닺게 아주 생생하게 느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무시하고 인간 생명의 증진시키려고 노력을 하여 진정한 생명을 죽이는 자들로 나타날 수도 있는 것입니다. 마치 사단이 사람을 찔러 죽이거나 하지 않고서도 “처음부터 살인한 자”가 된 것처럼(요 8:44), 우리도 여러 방식으로 살인한 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살인하지 말라는 금령을 기독교적으로 실현하려고 할 때는 결국 자신과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온전하게 되도록 힘써야만 합니다. 여기 에서 진정한 생명 운동의 출발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을 “죄와 허물로 죽었던” 사람을 하나님께서 살리신 것이라고 성경은 이야기합니다(엡 2:1, 5).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해서 영적으로 다시 살아 난 사람이 그 안에 진정한 생명을 가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 생명이 그 안에서 약동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참 생명인 영생을 가진 것입니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진정한 생명, 즉 “영생은 곧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고 하는 것입니다(요 17:3). 그렇게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된 사람들은 그것으로 만족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생명의 더 깊은 의미 속으로 날마다 들어가서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과 생명적 교제 관계를 계속 자져 나아가기에 날마다 더 “풍성한 삶”을 향해 나아가게 됩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더 깊이 있게 하나님과 교제하여 나간다는 말뿐이 아니라, 그 결과 이 세상 속에 진정한 생명이 어떤 것인지를 잘 드러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하여 그는 자신이 그리스도를 통해 누리고 있는 이 진정한 생명이 다른 사람들에게도 있어서 그들도 더 풍성한 삶을 살아가도록 하는 일에 지극한 관심을 가지며, 그 일을 위해 힘을 쓰게 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전도와 선교에 힘을 다하는 이유는 이것이 진정한 생명을 전달하는 것임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진정한 생명이 있도록 애쓰는 사람들은 인간의 물리적 삶(physical life)은 무시하지 않고,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물리적인 사람도 주어진 한도 내에서 최선의 상태에 있도록 애를 씁니다. 일단 물리적 삶이 있어야 그 안에 진정한 생명이 있을 수 있고, 하나님의 의도에 의하면 그 어떤 사람의 물리적 생명도 무시해서는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영생을 강조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물리적인 삶도 이 세상에서 일정한 한도 내에서 증진되기를 애쓰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이 땅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생명의 유지와 복지(wellbeing)에도 상당한 관심을 가지고 그 일을 위해 애를 쓰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가는 곳마다 병원을 세우고, 구호 기관을 마련하고, 학교를 세우는 일에 열심을 보인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모든 인간의 생명은 존중 되어야 하고, 그 삶의 질이 점점 더 나아져야 하겠다는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영생을 강조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인간의 물리적인 삶은 정자와 난자가 합쳐지는 수정 순간부터라는 것을 아주 자명한 것으로 여기기에 수정난과 배 속의 배어와 태아들의 생명을 보호하는 일에도 힘을 다하는 것입니다. 낙태 반대 운동에 힘쓰고, 이혼모들이 아이를 낳도록 권면하고, 입양에 앞장서며, 그 모든 것이 잘 이루어 질 수 있도록 사회적 분위기를 만들과 재정적 지원을 감당하는 일에 힘쓰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생명의 끝은 영혼이 몸으로부터 떠나가는 순간인 심폐사의 순간으로 보기에 그리스도인들은 그 어떤 형태의 안락사에 찬동하거나 동의하지 않고, 소위 말하는 존엄사가 진정 존엄사가 아니며, 하나님께서 주신 물리적 생명이 자연스럽게 그쳐질 수 있도록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우리의 생명이 우리의 것이 아니고 생명의 근원이시요 창조자이신 하나님의 것이라는 것을 겸허하게 인정하는 생명의 신앙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육계명과 성경 전체의 뜻에 근거해서 이 땅 가운데 진정한 생명 운동에 힘쓰는 사람이 됩니다. 진정한 생명운동은 생명의 원천이신 하나님께서 시작하여 창조와 구속으로 지금까지 하고 계신 일임을 인정하면서 하나님의 생명 운동, 살리시며 살아가게 하시는 살림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생명 운동, 참된 살림의 꿈틀거림은 인간 스스로가 하는 것도 아니고, 인간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것도 아닌 것입니다. 이는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하시는 운동을 발견하고 하나님에 의해 살게 되었고, 스스로 죽었으나 다시 살게 된 사람들이 하나님의 살리시는 살림 운동에 동참하여 가는 일일 뿐입니다. 일반은총적 함의: 사회적 생명 운동의 토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의도를 생각하면서 인간의 생명을 귀히 여기고, 그 생명이 참으로 인간 생명답게 되도록, 창조하시고 구속하신 하나님께 경배 하며 찬양하고, 기도하고 의존하며, 그 하나님의 뜻을 가르침 받아서 그 뜻이 이 땅 가운데 구현 되도록 하는 일에 힘쓰지만, 불신자들은 믿고 돌아 올 때까지는 계속해서 서로 죽이고 미워하고 비난하는 그 런 사망운동을 계속하도록 내버려 두어야 하는 것일까요? 깊이 있게 살펴보면, 결과적으로 그런 결과가 나타난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지만, 그러나 우리는 이 세상이 복음에로 돌아오기 전까지는 지옥과 같은 사회라고 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이 아무리 악하고 죄악이 성행해도 지옥은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 끝까지 하나님을 믿지 않고, 나아가면 지옥에 던져진다는 사살을 부인해서는 안 됩니다. 궁극적 지옥이 있다는 것은 이 세상이 아직은 지옥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 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여러 차이가 있지만, 첫째로 이 세상에서는 아직도 사람들이 복음을 믿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생명 운동에 동참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리고 둘째로,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일반 은총이 작용해서 죄악이 극단적인 상황에 까지는 가지 않도록 억제 하시는 효과가 어느 정도 작용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살인 하지 말라”는 금령의 일반은총적 함의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살인하지 말라고 하셨기에 살인하지 말아야 하겠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이 아주 극악무도하게 되기 전까지는 그래도 살인을 하면 안 된다는 느슨한 생각이 있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일반 은총 가운데서 이 사회가 그래도 유지되도록 하신 죄의 억제의 한 방편으로 주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은혜가 주어질 때 저할 할 수 없는 특별은총과는 달리, 일반은총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저항할 수 있으므로, 어떤 사회에서는 사람을 죽이면 안 된다는 생각이 좀 더 보편적으로 나타나고, 어떤 사회에서는 그것이 상당히 무시되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로서는 위에서 언급한 기독교적 관점에 근거해서 사람들의 생명을 해하지 않고, 더 온전히 해 가는 진정한 생명 운동의 길로 나아가면서, 그것을 일반 사람들도 어느 정도는 따라 오도록 하는 폭 넓은 사회 운동을 하게 됩니다. 같은 생명 운동인데 그것이 그리스도인 안에서는 구속하신 하나님께 너무 감사하여 자신을 헌신하여 하나님의 생명 운동에 자신을 드리는 것이지만, 이 세상 속에서는 그저 인간 생명을 존중하게 그것을 위한 운동을 펼치는 것입니다. 동기가 다르고 궁극적인 방향이 다르지만, 이 세상 속에서는 그저 인간 생명을 위하는 생명운동에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이 협력해 가는 모습을 보일 수 있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낙태 반대 운동이나 모든 종류의 “생명을 위하는 입장”(pro-life position)에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이 같이 참여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의 다른 비그리스도인들도 이런 생명을 위하는 활동에 참여 할 수 있도록 권하고 노력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이 때에는 기독교에서는 인간 생명을 수정 순간부터 심폐사의 순간까지를 온전한 인간 생명으로 보기에 존중합니다. 그러면서 그런 가치를 보급하기도 해야 하지만, 이런 가치를 확산하는 비기독교적 설명도 같이 시도해야 합니다. 이 세상에 기독교적 이해를 가지지 않고서도 수정 순간부터 심폐사의 순간까지를 인간의 물리적 생명으로 여기면 그것을 보호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도 적기는 하지만 있으므로 그런 분들의 설명의 시도를 도와서 인간의 물리적 생명도 여러 방도로 보호해 가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물론 이런 사유와 활동의 종국적이고 분명한 근거는 이 문제에 대한 기독교적 설명입니다. 그러므로 제 육계명은 오늘도 이 세상 속에서 강하게 선포되어야 합니다. 2013-11-25
    • G.MISSION
    • G.SERMON
    2013-1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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