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2-08-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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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춘식 목사 종말론
    마음은 자기가 가고 싶은 곳으로 간다. 자연스럽게, 마음이 하고 싶은 것을 하되 조금씩 돕는 게 최선이다. 아이를 키우는 것처럼 자신을 친절하게 돌보아야 한다. 소나기 멎자 찬송 소리 젖은 교회 뜰을 다시 적신다. 비 오다 멎고 기도 소리 그쳤다 다시 일고 또 한여름 이렇게 지나가는가. 소나기 소리, 찬송 소리에 아직은 성한 귀 기울이며 1999년 김제에서 시작된 또 한여름 2022년 또 이렇게 지나 보내는가. 그는 생각한다. 누구도 세계 최고의 지도자, 세계 최고의 학생이거나 세계 최고의 목사로서 번듯한 기록 하나 세워놓지 못했음에도 저마다 글로 풀자면 책 몇 권을 써도 부족한 감동과 희열과 분노를 품은 귀한 삶들이라는 사실을 가끔 잊는다. 한때의 세상은 소낙비에 듬뿍 젖어 있고 다음 세상은 찬송 소리에 담뿍 물들어 있을 것이다. 이후의 세상은 또 다른 무엇으로 가득 채워질까. 하나님의 다정한 자연의 원리들이 있어서 이 세상을 차례차례 채우고 사라진다. 그 흐름을 고요히 보고 있는 목사는 ‘그래, 너희가 또 찾아왔구나’ 미소 짓는다. 목사의 창밖에서 만나는 비와 더위는 꼭 와야만 해서 다시 온 것들이다. 잘 왔다가 잘 가기를, 내년에 우리 또 만나기를, 그리운 아버지 김정호 목사님을 꿈에서 만나듯... 그가 부임한 교회는 1910년 7월 7일 김제 옥산리에서 옥산교회로 출발해 1925년 김제읍교회, 1929년에 김제중앙교회로 각각 명칭을 변경했었다. 그가 부임 당시 김제시 인구는 15만이었는데 2022년 7월 지금은 8만 선에 머물고 있다. 2022년 7월 17일 은퇴하는 그는 재직 기간 장례만 600건을 치렀다고 한다. 부임한 뒤 김춘식 목사와 어려울 때 함께한 800여 교인들은 예배에 대한 강한 열정과 사모함을 가지고 있었다. 교회 분립으로 교회 건축을 위해 잠시 천막생활을 하면서도 예배는 뜨겁게 이어졌다. 폭염이 기승을 부리는 한여름에도 천막 하나를 치고 모인 교인이 800여 명이었다. 이러한 교인들의 예배에 대한 사모와 열정은 담임인 김춘식 목사의 목회에서 힘을 얻는다. 김 목사는 남다른 목회 열정을 가지고 있다. 그는 말한다. “목회자 자신이 성경 말씀대로 살아야만 생명력 있는 말씀을 전하고 살아있는 목회를 할 수 있다. 자신이 변화되지 않고서 어떻게 교인들을 변화시킬 수 있겠는가. 목회자의 카리스마는 목회자 개인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겸손과 말씀의 실천에서 나오는 것이다. 이러한 것을 잊지 않고 매일 기도와 말씀으로 무장하여 하나님께서 맡겨주신 양떼들에게 생명의 꼴을 먹이려 하고 있다.” 그런 목사를 따르는 교인들은 불평 하나 없이 기쁘게 예배를 드리며 예배당이 새로이 완공되기를 타는 목마름으로 기도했다. 2009년 9월 착공하여 2010년 7월 입당한 지금의 예배당은 강도 7의 지진에도 견디는 내진설계로 시공된 너른 주차장과 부속 건물을 갖춘 복합 건축물이다. 그는 20년째 교인들과 동고동락하며 목회를 했다. 교회 분열의 아픔을 딛고 새 예배당을 완공한 다음 해인 2011년 4월 7일 미국 뉴욕의 기독 언론 '아멘넷 뉴스'(USAamen.net)는 김춘식 목사의 부흥회 초청 기사를 다음과 같이 전했다. 퀸즈장로교회(장영춘 목사) 춘계부흥회의 강사가 화제가 됐다. 이 시대에 꼭 필요한 설교가 이야기의 기교나 억지웃음을 자아내는 예화 없이 진솔하게 전해졌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이라는 주제로 2011년 4월 7일(목)부터 4일간 계속 될 퀸즈장로교회 춘계부흥회는 뉴욕 교계에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김춘식(김제중앙장로교회) 목사를 강사로 초청했다. 첫날 김 목사는 요즘같이 어려운 난세에 "하나님이 우리를 찾고 계신다"라는 강한 메시지를 전달했다. 김 목사는 누가복음 3장 1-14절 말씀을 본문으로 "크고 두려운 날"이라는 제목의 설교에서 세례 요한이 외치는 독사의 자식들이란 파워게임에 눈이 어두워져 있는 세상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향해 외치는 소리임을 깨달아야 한다고 말했다. "어떤 시대를 살고 있는지를 알려면 그 시대의 사람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디베로 가이사가 누구인가. 헤롯은 어떤 사람이었던가. 또한 본디오 빌라도는. 모두 권력에 혈안이 되어 있던 정신병자, 이기주의자, 백성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 우민정책을 쓰며 그들을 음란과 타락으로 몰아넣었던 인물들입니다. 바닷물의 소금은 3%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그 3%가 온 바닷물을 짜게 만드는 것입니다. 어둠은 절대 빛을 이기지 못합니다. 우리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은 세상이 문제가 아니라 나와 여러분의 문제입니다. 하나님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요. 왜 우리는 진실하지 못할까요. 적어도 어디서부터 잘못되어 있는지 돌아보고 돌아서야 합니다. 회개란 구원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의 말씀은 요한을 들어 광야에 임하셨습니다. 우리는 광야라는 단어에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저들이 회개하기를 바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회개하기를 원하시며, 개입하시고 약속하시고 약속을 이루시는 분임을 아멘으로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이미 완성되어있는 것입니다. 단지 하나님은 사람을 통해서 말씀하시고 하나님의 종들을 통해 이루어 가시는 것뿐입니다.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영원히 자유함을 얻는 것이 구원입니다. 혹시 위험한 회개를 하고 있지는 않은지 주의해야 합니다.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진노하시는 하나님, 심판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나의 위선적인 회개를 돌아봅시다. 한순간에 지푸라기로 변하고 마는 것이 인생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순간순간마다 우리의 모든 삶 속에서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합니다. 회개는 하나님이 주신 선물입니다. 회개할 싸인이 느껴지면 과감하게 돌아설 줄 알아야 합니다." 김 목사는 한 시간 동안 회개만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하나님이 간절히 찾고 있는 사람이 우리라는 것을 강조했다. 코로나가 ‘심각한 병’에서 ‘일상의 병’으로 급수가 하향된 2022년 7월 3일 11시 김제 중앙장로교회는 맥추감사절예배를 드렸다. 맥추감사절은 유월절이 끝난후 7주가 끝난 50일째 되는 날 곡식을 처음 거두어 수확의 첫 단을 하나님께 드린 것을 기리는 절기이다. 성도들이 64장 ‘기뻐하며 경배하세’ 찬송 후 이규수 장로가 대표기도를 했다.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아버지 하나님 오늘도 거룩하고 복된 날, 주의 전으로 불러주시고 우리를 구원해 자녀 삼아 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지난 한 해 동안도 하나님 은혜 속에서 보호하시고 지켜주시고 오늘 맥추감사주일로 하나님 앞에 영광 돌리게 해주신 것도 감사드립니다. 우리들도 한 제단 한 제단 쌓아갈 때마다 하나님의 영광이 빛나게 해 주시옵소서. (회중 아멘) 죄 많고 허물 많은 우리들은 한 주간 살면서 주님 바라보지 못하고 세상 따라 살다가 주님 앞에 나왔습니다. 이 시간 주님의 십자가 보혈로 우리를 정결하게 씻어 주시옵소서. (회중 아멘) 오늘도 주님의 사자(使者) 목사님 단 위에 세워주셨사오니 강건함으로 붙잡아 주시고 성령으로 붙잡아 주시어 이 시간 능력의 말씀을 증거 하실 때 우리 눈이 열려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시고 우리 귀가 열려 하나님 음성을 듣게 하시고 코로나로 인해 우리 주위를 떠난 자들이 하루속히 주의 전으로 나와 주님 앞에서 찬송할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이 시간 신령과 진정과 찬양으로 경배를 드리며 하나님을 경외하는 우리들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중앙의 일꾼들은 좌로나 우로나 흔들리지 않고 오직 주님 한 분만으로 만족하며 우리 믿음이 세상을 이기게 해 주시옵소서. 연로하신 분들 맑은 영도 주시고 강건함으로 붙잡아 주시고 원치 않는 병으로 치료 중인 우리 성도들을 일일이 기억해 주셔서 하나님의 능력으로 의사의 손을 빌어 깨끗하게 치료해 주시옵소서. (회중 아멘) 일생을 사는 동안 우리들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을 살게 해 주시옵소서. 이 시간 임마누엘 찬양대 세우시고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 저들이 부르는 찬양 기쁘시게 받으실 줄 믿사오며 (회중 아멘) 살아 계신 주 예수 그리스도 이름 받들어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임마누엘 찬양 대의 기도 송이 울렸다. 우리의 기도 들어주시어 우리의 음성 영광되게 하소서 아멘 김춘식 목사가 성경을 봉독했다. “창세기 6장 5절로 8절까지 말씀입니다. 제가 봉독합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아멘. 찬양대 찬양이 있겠습니다.” 임마누엘 찬양대가 단 앞으로 나와 정렬하고 ‘공중 나는 새를 보라’를 찬양했다. 김춘식 목사가 설교단에 서고 입을 열었다. “감사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공중에 나는 새를 먹이시고 들의 백합화를 입히시는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할 수 있는 믿음의 손을 가지고 은혜의 하나님 앞에 오늘도 헌금을 드렸사오니 마음의 문 열리게 하시고 진리로 충만하게 해 주십시오. 말씀이 어려운 세상을 살아가는 데 능력이 되게 하시고 (회중 아멘) 복이 되게 하시고 고침을 받는 역사가 일어나게 해 주시옵소서. (회중 아멘) 영생을 믿사오며 성령의 도구가 되게 해 주실 것을 믿사오며 예수님 거룩하신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지난 시간 창세기 3장 15절 말씀에서 여인의 후손이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고 사단이 여인의 후손 발뒤꿈치를 물게 될 것이라고 하는 가운데 열정적으로 사단의 세력을 정복하신 구주 예수가 우리의 구세주이심을 믿고 사단의 무리를 괴롭히는 세력임을 믿고 믿음의 경고에 있어서 하나님의 나라를 섬겨야 할 것을 말씀했습니다. 오늘 계속해서 창세기 4장 5장 6장 7장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해 말씀을 묵상하면서 맥추감사절 말씀으로 전하려고 합니다. 창세기 4장과 5장을 지나가는 동안 가정에서 첫 살인사건이 일어납니다. 형제가 형제를 죽이는 비참한 일입니다. 하나님은 사랑하셔서 에덴동산에 살게 하셨지만 불순종함으로 마귀의 종노릇하면서 이제 타락해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아담의 아들 가인을 통해 인생이 점점 악해져 가는 모습을 창세기 4장 5장 6장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버린 인생들에게 충격과 부패와 성적 타락이 따릅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에서도 4장 5장에 보면 놀라운 일이 일어납니다. 가인의 후손 가운데 음악을 하고 기계를 만드는 사람들이 나옵니다. 타락하고 불순종했어도 하나님의 형상이 더럽혀지기는 했지만 하나님의 형상이 아직도 남아 있어서 이런 지혜로운 일들을 하면서 음악을 하고 기계를 만들어 삽니다. 대단한 일입니다. 그리고 창세기 5장에 가서 오래 산 사람들 얘기를 합니다. 어떤 사람은 800년을 살고 이제 므두셀라는 187세에 라멕을 낳았고 라멕을 낳은 후 782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고 969세를 살고 죽었다고 합니다. 그 당시 사람들이 800년 900년 969세를 살았다고 하니 근 천 년을 산 겁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천 년을 살았다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들이 다 죽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도 남김없이 다 죽었습니다. 오래 사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죽느냐가 중요하다는 걸 보여 주는 것입니다. 단지 그 사람들이 천 년을 살았지만 죽지 않은 에녹이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죽지 않고 하늘로 올라간 에녹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장수하시기를 바랍니다. 천 년도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어떻게 죽느냐 하는 것입니다. 죽음이 어디 있느냐. 에녹이 죽음을 보지 않고 천국에 간 것처럼 여러분의 영혼이 영원한 영광의 나라에서 영광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회중 아멘) 그리고 이제 창세기 6장으로 넘어와서 보면 하나님의 인간 죄에 대한 대처방법은 크게 첫째는 심판이고 둘째는 은혜입니다. 창세기 6장 11절에 ‘그때에 온 땅이 하나님 앞에 부패하여 포악함이 땅에 가득한지라’ 말씀합니다. 5절에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음으로 생각하는 계획이 악할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타락하고 부패한 속성을 지니고 사는 인생인 것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회중 아멘) 이렇게 부패하고 폭력적인 사회가 되었을 때 대표적인 것이 성적 문란입니다. 2절에 보면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말씀합니다.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았다는 것이 무슨 문제가 됩니까.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그랬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가인의 후손과 아벨을 대신해 태어난 셋의 후손을 구별하십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누구입니까. 대부분의 신학자들은 두 가지로 설명합니다. 첫째 가능성은 천사들입니다. 두번 째 가능성은 하나님을 잘 믿는 신실한 가정의 자녀들이라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사람들이란 믿음을 잘 지키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은 자녀들이 믿음의 길을 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구별되기를 원하십니다. 배우자를 선택하게 될 때도 세상 사람들처럼 사회 신분이나 외모나 세상 적인 기준이 아니라 하나님이 요구하시는 것을 따라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패한 사람들의 특징은 4절에 나옵니다. '당시에 땅에는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에게로 들어와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은 용사라 고대에 명성이 있는 사람들이었더라' 그들은 용사였고 세상 명성이 높았습니다. 네피림은 남을 넘어뜨리는 자들입니다. 건장한 육체를 가지고 남을 죄에 빠지게 하는 영향을 가진 자들입니다. 크고 강하고 소문났을지라도 그 은사를 가지고 죄를 짓게 한다면 파멸입니다. 그들의 대표적 특징은 폭력과 성적 문란입니다. 이 땅에 살아가는 동안 폭력과 부패와 성적 타락의 근본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육체가 건강하고 세상 물질이 만족스러울지라도 이것으로 죄를 지으면 차라리 가난하게 사는 것이 낫습니다. 이런 것이 없어도 하나님 앞에서 성실하고 진실하게 사는 것이 행복한 것임을 깨달으시기 바랍니다. 물질적이고 외형적인 것보다 본질은 사람의 마음에 있습니다. 사람 사이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각자의 마음속에 있는 죄를 먼저 해결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예수님은 우리 구주이시고 성령이 우리와 함께하신다고 날마다 믿음으로 고백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전지하시고 전능하신 것처럼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다는 데 하나님을 속이고 불순종하고 세상과 짝하고 사는 사람은 위선자입니다. 부패한 사람입니다. 입으로만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사람은 자기 신앙고백대로 사는 사람이 아닙니다. 왜 이렇게 세상이 행복하지 못합니까. 믿음의 사람들이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요 빛이라고 얘기하는데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 세상의 빛으로 소금으로 감당하지 못해서 그러는 것 아닙니까. 인생의 종말은 두 가지입니다. 내 개인의 종말이 오고 인생 최후 심판이 옵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심판한다고 말씀하실 때 세상 사람들은 조롱하고 멸시하고 자기들과 상관이 없다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심판은 있습니다. 조롱하고 멸시하는 자들은 한순간에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세월은 너무 빠르게 흐릅니다. 심판은 나와 상관없고 죽음은 나랑 상관없다고 오해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훗날이라고 생각하는 종말이 오늘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오늘 밤에 그 영혼을 거두어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심판은 긴급합니다. 주님은 도적같이 오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남자나 여자나 누구에게나 심판은 긴급하다는 것입니다. 성경을 보면 어떤 의미에서 짐승들이 임종과 종말이 가까운 것을 우리보다 더 먼저 알고 피합니다. 신문에서 보면 어디 화산이 터진다든지 지진이 난다든지 하면 쥐가 도망가고 짐승들이 달아납니다. 개미들이 이동을 합니다. 노아의 시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랑들과 짐승과 공중에 나는 새들도 다 심판이 있는데 오직 구원받은 사람들 구원받은 짐승들은 구원받은 새들은 노아의 방주로 들어갔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합니까. 짐승도 심판의 때를 알고 모여들었다는 것입니다. 노아 시대에 물의 심판이 있었던 것처럼 이제는 남은 세계에 불의 심판이 있을 것입니다. 불의 심판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후서 3장 6절과 7절에 '이로 말미암아 그때에 세상은 물이 넘침으로 멸망하였으되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었다'라고 말씀합니다. 지금 우리가 이 세상에 존재하고 있는 것은 심판의 때에 교회가 경건하지 아니한 사람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하여 두신 것이니라' 말씀했습니다. '물이 넘침으로 멸망했다'라는 말씀은 노아의 시대를 말하는 것입니다. 물이 넘침으로 다 멸망했습니다. '이제 하늘과 땅은 그 동일한 말씀'이라는 것은 물로 세상을 심판하시겠다는 말씀을 하신 하나님의 동일한 말씀으로 불사르기 위하여 보호하신 바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우리가 지금 존재하고 있는 것은 마지막 심판의 때에 교회 때문에 하나님이 보호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변절하지 아니하는 자들은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하나님이 보존해 주시는데 어렵더라도 두려워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내가 이렇게 가난하고 힘든데 예수 믿는데 되는 것이 없다고 낙심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돼지를 키워 살찌우는 것이 도살하기 위한 것은 인간의 생각입니다. 이 세상을 불사르기 위해서 심판의 때가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잘살고 있는 우크라이나를 이제 침공했습니다. 푸틴이 전세가 불리해 버튼만 누르면 핵전쟁이 일어납니다. 전 세계에서 너도 나도 핵을 터뜨리면 이 세상을 수천 번 폭파하고 불태워버리고 남을 폭탄이 이미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불사르기 위해 보존하셨다고 하는데 그건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니고 지금 우리가 이런 환경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우리 주님 오신다면 아멘 할렐루야 찬미하며 주님 만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 한 손에 심판이 있지만 다른 한 손에는 은혜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 6장 8절에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에서 은혜라는 말을 제일 처음 쓰는 데가 바로 이 구절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다 심판받고 멸망하는데 심판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서 구원받은 백성이 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이 다 멸망하는데 그중에서 노아만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노아가 은혜를 입은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세상 75억 인구(세계 인구는 특정한 시간에 지구상에 살고 있는 인류의 전체 수) 가운데 저와 여러분을 하나님 자녀 삼아 주시고 우리를 하나님 자녀로 불러주신 것을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회중 아멘) 이게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회중 아멘) 또 놀라운 사실은 7장 16절에 '하나님이 그에게 명하신 대로 들어가매 여호와께서 그를 들여보내고 문을 닫아' 넣어주시니라 하신 것입니다. 노아의 여덟 식구와 정결한 짐승들과 부정한 짐승들이 일곱 쌍씩 다 노아의 방주로 싹 들어가게 되니까 하나님이 방주의 문을 닫으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문을 닫아주셨다는 것입니다. 한번 닫힌 문은 열려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방주 안에 있는 노아의 여덟 식구와 짐승들은 하나님이 다 보존하신 줄 믿습니다. 여러분 예수 믿고 구원받고 천국 갈 것을 확신하십니까. 나같이 연약하고 나같이 부족하고 나같이 부끄러움이 많은데 하나님이 날 구원해 주실까 하는 마귀의 속삭임에 넘어가지 말고 믿는 자는 구원을 받고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른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아니하고 영생을 얻는다고 하는 하나님 약속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회중 아멘) 하나님 약속입니다. 구원 받은 자녀인 것을 확신하십시요. (회중 아멘) 목사님. 예수 믿고 살아가는데 왜 이렇게 답답합니까. 아들딸은 왜 이 모양입니까. 낙심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건강은 왜 이 모양입니까. 실망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노아의 방주 안에 있는 짐승이 비가 오는 기간만 6개월이고 다 마르게 될 때까지 1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습니다. 그 방주 안에서 아주 많은 짐승들과 노아의 가족이 얼마나 힘들었겠습니까.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하루하루 지나가는데 보통 괴로운 일이 아니었을 겁니다. 노아도 하나님이 방주 속의 우리를 잊어버리신 게 아닌지 버리신 것은 아닌지 생각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께서 노아를 기억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 믿고 구원받았는데 답답하다고 낙심하지 말기를 바랍니다. 노아를 기억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기억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잊어버리신 게 아닌가 생각할 수 있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잊지 않으십니다. 차츰차츰 변화를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히브리어의 바람(루아흐)이라는 말은 영(spirit)이라는 뜻입니다. 바람은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습니다. 영이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이렇게 지키시고 인도하시고 복 주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회중 아멘) 하나님이 버리시거나 잊어버리신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 운행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언제 하나님의 영이 우리와 함께하시고 우리를 보호하시는지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은 신실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남편을 믿습니까. 아내를 믿습니까. 이 세상 정치인들을 믿습니까. 하나님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신실하시고 약속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변함이 없으신 하나님 말씀 붙들고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회중 아멘) 마지막으로 죽음을 통한 구원입니다. 마침내 하나님은 노아를 새로운 삶으로 초청합니다. 홍수가 다 지나간 다음에 노아는 방주에서 나와 새로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노아를 초청해서 다시 번성하고 성장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한 손에는 심판이 있고 다른 한 손에는 은혜가 있습니다. 노아는 하나님 말씀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그대로 순종했습니다. 방주에 들어가라니 들어갔고 나오라니 나왔습니다. 이게 순종이고 믿음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믿음으로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이 세상에 대해 이미 죽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심판하리라 하셨지만 사람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노아를 멸시하고 조롱하고 업신여긴 사람들이 생각할 때 그는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노아는 세상 사람들에게는 죽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대해서 죽어버린 사람은 세상이 무어라고 한다 할지라도 간섭할 것이 없습니다. 목사로서 제일 듣기 거북한 이야기는 세상 사람이 우리를 멸시하고 조롱한다고 소금과 빛으로 살아야 할 우리가 흔들린다는 것입니다.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정신 바짝 차리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세상에 대해서 죽은 사람들입니다. (회중 아멘) 세상 여론이 어떻고 신문이 어떻고 티브이가 어떻고 세상이 다 우리를 조롱한다고 할지라도 우리는 믿음의 길을 걸어가는 사람입니다. (회중 아멘) 한국 정통 초대 장로교회의 신학을 완성하신 박형용 박사는 그의 조직신학 서론에 이런 글을 쓰셨습니다. '온 세상 사람이 다 두 발을 땅에 딛고 머리를 하늘을 향해 세우고 살아간다 할지라도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라면 두 손을 땅에 대고 두 팔을 하늘로 쳐들고 산다고 할지라도 그렇게 살겠습니다.' 세상 따라 살지 못해 안달인 사람은 자신이 구원받은 사람인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노아가 조롱받고 멸시당할 때 노아는 세상에 대해 죽은 사람이었습니다. 노아는 죽음을 뚫고 은혜를 받은 것이 아니라 죽음을 통해서 구원을 받은 사람입니다. 방주 안에 들어갔을 때 비가 위에서 쏟아지고 땅에서 솟아나고 온 세상 천지가 높은 산꼭대기까지 다 물에 잠겨버렸습니다. 죽을 일만 남았습니다. 그 죽음 속에서 방주에 들어가 있는 노아가 구원받았다는 진리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의 죽음에 휩쓸려 들어가게 될 때 교회라고 하는 구원의 방주 안에서 주님의 보호하심을 받고 천국 가게 된 것을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회중 아멘) 교회 일원 되신 것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회중 아멘) 이 교회 떠나면 죽음입니다. 구원의 방주에서 벗어나는 것은 파멸입니다. 사는 길은 주님과 십자가를 지고 묵묵히 걸어가는 것입니다. 자기 영광을 위해서 자기 마음을 위해서 행복을 위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죽음을 통해서 구원의 길을 가시기를 바랍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죽어야 하지만 우리를 구원해 주신 것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 모두가 심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때 우리의 모든 심판을 감당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십자가에 죽으셨을 때 그 속에서 나도 죽은 것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회중 아멘) 그래서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믿는 자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고 심판에 이르지 않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할렐루야. (회중 아멘) 베드로는 이 심판에 대해 노아의 홍수를 우리가 세례받는 모습에 비유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그들은 전에 노아의 날 방주 예비할 동안 하나님이 오래 참고 기다리실 때에 순종치 아니하던 자들이라 방주에서 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 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벧전 3:19-20) 죽음이 다 휩쓸어 갈 때 구원을 얻은 자가 몇 명뿐이니 겨우 여덟 명이라는 것입니다. 노아와 노아의 아내와 세 아들과 그 부인들만 구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고 하는 것입니다. 물세례라는 것은 우리의 죄가 다 물에 잠겨버리고 씻음 받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죽음에서 살아났다는 표시입니다. 이렇게 구원받은 노아가 창세기 8장 18절에서 20절에 보면 '노아가 그 아들들과 그 아내와 그 자부들과 함께 나왔고 땅 위의 동물 곧 모든 짐승과 모든 기는 것과 모든 새도 그 종류대로 방주에서 나왔더라 노아가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 중에서와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취하여 번제로 단에 드렸더니'라고 말씀합니다. 노아는 하나님 앞에 경배와 감사를 드렸습니다. 정결한 짐승을 하나님 앞에 번제로 드렸습니다. 짐승을 잡아 내장을 꺼내고 물로 깨끗이 씻어서 불로 태워서 하나도 남김없이 향기로운 냄새의 연기로 하나님 앞에 올라갔습니다. 다 죄로 가득한 세상에서 은혜를 입고 죽음에서 구원을 받은 감사와 감격을 가지고 이제 하나님 앞에 번제를 드린 것입니다. 모든 것을 하나님 앞에 다 드리는 것입니다. 신약에 가면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장 1절에서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말씀합니다. 너희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맥추감사절입니다. 하나의 행사로 지내지 않기를 바랍니다. 구원받은 감사와 감격을 가지고 너희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번제를 드렸던 노아처럼 형식적이거나 위선적인 것이 아니고 우리가 진심으로 구원받은 은혜를 감사 감격하면서 이 맥추감사절을 지내시기를 바랍니다. (회중 아멘) 이는 우리가 드릴 영적 예배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모든 심판에서 구원하셨습니다. 죽음은 이제 지나갔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우리의 몸을 하나님 앞에 드리는 것입니다. 신령한 예배를 드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마음속에 이 진리를 확신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파스퇴르유업과 민족사관고등학교를 세웠던 최명재(崔明在·95) 민사고 이사장이 2022년 6월 26일 오전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최 이사장은 1927년 전북 김제시에서 태어났다. 만경보통학교, 전주북중을 나와 경성경제전문학교(현 서울대 경영대)를 중퇴했다. 상업은행에서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돈을 더 벌겠다는 각오로 은행도 그만두고 택시 운전에 뛰어들었다. 여기서 얻은 성공 경험을 바탕으로 1960년대 운수회사(성진운수)를 세웠고, 1970년대엔 물류 사업에 뛰어들어 큰돈을 모았다. 60세 되던 1987년 강원 횡성에 파스퇴르유업을 설립하고, ‘저온살균 우유’를 앞세워 기존 우유 업계를 공격하는 직설적 마케팅으로 화제를 모으며 급성장했다. 1996년에는 횡성 파스퇴르유업 공장 옆 127만2700㎡(38만5000평) 땅에 민사고를 세웠다. ‘민족 주체성 교육’을 통해 세계적인 지도자와 노벨상을 탈 수 있는 인재를 키우겠다는 목표였다. 1970년대 영국 이튼스쿨을 방문했을 때 넬슨 제독 전승 기념행사를 보면서 “한국에는 넬슨보다 훌륭한 이순신 장군이 있는데 이튼 같은 학교는 없다”라고 생각하며 가진 필생의 꿈을 실천에 옮겼다. 최 이사장이 파스퇴르유업 수익을 매년 30억~50억 원 민사고에 투자하면서 우수 학생을 뽑아 기숙사비를 포함, 교육비를 받지 않고 운영했다. 모두 천억 원을 쏟아부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전라남도 장흥이 고향인 김춘식 목사는 2010년 7월 김제에 중앙장로교회를 세웠다. 왜냐하면 김춘식 목사가 지난 1999년 7월 16일 미국에서 전라북도 김제시의 김제중앙교회로 부임한 뒤 분쟁을 겪고 분리의 아픔을 이기고 교회를 세웠기 때문이다. 2022년 7윌 19일 김제를 떠나는 김춘식 목사는 김제중앙교회를 거쳐 중앙장로교회를 통해 20년 목회 여정에 너른 곡창 김제에 새로운 건실한 예배당만 아니라 말씀 중심의 설교로 합동 교단에 드문 영적 교회를 세우는 업적을 세웠다. 2022-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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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7-15
  • 송태근의 설교관
    맑은 빛 고운 햇살 소복소복 담아 두고 별들과 나눈 얘기 강물 되어 흐른다. 총신 숲 비어서 풍요롭다. 나목(裸木) 위의 까치집 돌아올 주인을 기다린다. 새해가 왔건만 코로나바이러스가 변이에 변이를 거듭하면서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공포로 교회를 위협하고 있다. 우리는 언제까지 이 병과 함께 살아야 하나. 그러나 양상만 달랐을 뿐 인류의 역사는 병과의 끊임없는 싸움이었다. 고통 속에서도 희망의 끈을 놓지 말아야 한다. 병보다 무서운 것이 절망이라는 정신적 재앙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새해는 이렇게 맞을 일이다. 면도 알러지가 있어 이따금 수염을 길러야 하는 송태근 목사는 ‘맑은 빛 고운 말씀’을 ‘소복소복 담아 두자’고 하는 믿음의 전파자다. 하나님과 얘기를 나누면 헐벗은 나무의 텅 빈 까치집도 그의 성근 수염처럼 풍요롭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영국 시인 셸리는 ‘겨울이 오면 봄 또한 멀지 않다’라고 노래했다. 총신대 이사로 헌신을 아끼지 않는 송태근 목사는 이 겨울이 가면 새끼를 데리고 둥지를 찾아올 까치를 미리 보는 예지를 지니고 있다. 총신의 봄은 반드시 온다. 우리는 치유의 새봄을 맞을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헌신하고 견디어낸 자들의 축제가 될 것이다. 오늘날의 청중이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본문 중심의 강해설교를 하는 송태근의 설교는 폭이 넓고 속이 깊다. 그는 신봉하는 본문 중심 강해설교 틀에다 원숙한 믿음의 관조(觀照)로 가다듬은 말씀을 심한 아픔을 견딘 삼일교회와 치유를 바라는 전국 교회에 전하고 있다. 그는 말한다. 강해 설교자가 성서 권위를 힘입어 자기 우상화를 시도하는 우를 범해선 안됩니다. 강해 설교자의 권위는 그것을 청중을 섬길 때 참 의미가 있습니다. 설교자의 위대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하나님의 진리를 사랑하며 동시에 그 진리를 공동체를 섬기는 사랑으로 담아낼 때 강해설교의 진수가 밝히 보일 것입니다. 송태근 목사는 계시록 8:3-5에 의지해 외친다. 성도의 기도와 함께 올라간 향이, 제단의 기도가 제단의 불과 함께 땅에 쏟아집니다. 이것은 심판의 시작을 의미합니다. 드디어 응답이 이루어지는 겁니다. 응답은 반드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어둠에 잠들어가는 이 시대를 기도의 부글부글 끓는... 그래서 저 에스겔의 골짜기의 마른 뼈들이 생기를 얻고 하나님의 군대로 일어나는 환상을 보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팬데믹으로 시대의 전환점에 선 우리는 기도해야 할 것이다. 그의 메시지 소망대로 설교자가 청중을 섬기는 한해가 되기를···. 그리고 사회와 총회의 모든 것이 제 자리를 찾아 미사일을 쏘아대고 하나님에 대항하는 북한 앞에서 ‘멸공(滅共)’이란 구호가 문제 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사라지기를···. 무엇보다도 우리 사회와 총회에 성경의 정의와 신앙의 안전이 이뤄지기를···. 2022-0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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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1-16
  • 팬데믹 시대의 신앙
    경북 영양군 영양에 가면 반딧불이생태공원이 있고 영양서부교회의 박병석 목사가 있다. 반딧불이 노래로 잘 알고 있는 ‘개똥벌레’가 반딧불이다. 옛날에는 어디서나 보일 만큼 흔해서 개똥벌레라 부르기도 했고 개똥이나 소똥에서 서식하는 줄 알아서 개똥벌레라고 불렀다는 이야기도 있다. 영양군은 경상북도 대표적인 산간오지로 사람보다 자연이 더 풍부한 곳이다. 덕분에 오염되지 않은 청정한 자연을 잘 간직하게 되었고 국내에서 밤하늘이 가장 어두워 별자리를 관측하기 좋은 곳이 되었다. 그 중심지가 영양군 생태공원사업소가 관리하는 반딧불이생태공원이다. 사실 반딧불이는 전국 곳곳에서 살고 있다고 한다. 다만 하늘의 별처럼 불빛이 강한 도시에서는 발견이 어렵다는 것. 밤하늘을 보호할 정도로 어두컴컴한 영양에서는 별과 반딧불이를 모두 관찰할 수 있다. 코로나가 팬데믹으로 발전한 이 시대 영양의 반딧불이 같은 박병석 목사의 ‘제단에 불을 끄지 마라’는 메시지가 새롭다. 단 위에 불은 항상 피워 꺼지지 않게 할찌니 제사장은 아침마다 나무를 그 위에 태우고 번제물을 그 위에 벌여 놓고 화목제의 기름을 그 위에 사를찌며 불은 끊이지 않고 단 위에 피워 꺼지지 않게 할찌니라 레 6:12-13 성경은 하나님 앞에 나가서 제사를 드리는 백성은 항상 제물이 있어야 하고 그 제물을 태우는 불이 꺼지지 않아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모든 제사에 순서 절차가 다 있더라도 불이 꺼지면 아주 심각합니다. 그 뜻은 세 가지입니다. 첫째, 제단에 불을 끄지 말라는 것은 성령의 역사 때문입니다. 제단은 원래 제물로 바친 짐승이 죽는 장소입니다. 하나님은 그 제물이 탈 때 그 향기를 흠향하십니다. 제단에 불이 꺼지면 하나님이 임재하시지 않게 됩니다. 신약시대에 와서는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고전 6:19)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마음에 성령의 불이 꺼지면 그 사람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사람이라고 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하나님과 교통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항상 말씀과 기도와 찬양을 통해서 우리 마음의 제단에 성령의 불이 계속 타오르도록 해야 합니다. 둘째, 제단에 불이 꺼지면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는 이가봇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상 3장 1절에 ‘아이 사무엘이 엘리 앞에서 여호와를 섬길 때에는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았더라’ 말씀합니다. 이어서 이스라엘의 패역한 시대를 향해 사무엘상 4장 21-22절에서 ‘이르기를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고 아이 이름을 이가봇이라 하였으니 하나님의 궤가 빼앗겼고 그 시부와 남편이 죽었음을 인함이며 또 이르기를 하나님의 궤를 빼앗겼으므로 영광이 이스라엘에서 떠났다 하였더라’ 말씀합니다. 사람들 가운데 한때 은혜를 받고 믿음으로 살고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나타났지만 제단의 불이 꺼지듯 신앙이 식고 하나님의 영광이 떠나는 이가봇의 형편에 처하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그렇게 되지 않도록 항상 말씀과 기도와 찬양을 통해서 우리 마음의 제단에 성령의 불이 계속 타오르도록 해야 합니다. 셋째, 불붙는 제단이 되기 위해서는 항상 불씨를 남겨두어야 합니다. 여러분 영국의 유명한 찰스 스펄전 목사님은 뜨거운 성령의 역사를 일으킨 분입니다. 스펄전 목사님에게 사람들이 찾아와 그 비결을 물었습니다. 스펄전 목사님은 자신을 위해 교회 기도실에서 기도하는 성도들을 보여주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언제나 성령의 불이 꺼지지 않도록 말씀과 기도와 찬양의 삶을 살아서 하나님에게 영광을 돌리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도 교회 주변을 둘러보면 ‘이가봇’ 시대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듭니다. 믿음 없는 사람일수록 떠들기를 좋아하고 인간의 수단과 방법을 앞세우기 쉽습니다. 날마다 말씀과 기도와 찬양이 없는 삶에서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신앙이 없는 오늘의 팬데믹 시대는 확실히 ‘이가봇’ 시대입니다. 이 팬데믹 시대를 사는 우리의 신앙을 위해 성경은 말씀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성령을 소멸치 말며 예언을 멸시치 말고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모든 모양이라도 버리라 살전 5:16-22 2021-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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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1-21
  • 2021년 종교개혁주일 대표회장 메시지
    2021년 종교개혁주일 대표회장 메시지 오는 10월 31일 주일은 루터의 종교개혁이 504주년을 맞는 날입니다. 루터가 주창한 종교개혁의 정신은 오직 성경(sola scriptura),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은혜(sola gratia)로 신앙의 기초와 기독교의 본질을 회복하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릇된 전통이나 잘못된 종교적 관습을 성경의 가르침대로 고치고 바로 잡는 것이 종교개혁이었습니다. 개혁 운동을 한마디로 정의하면 성경의 가르침 그대로 믿음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성경 말씀에 의한 기독교의 본질을 회복하고 믿음의 근본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종교개혁 정신의 실천이 오늘날 한국교회에도 꼭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교회의 개혁은 단번에 완성되는 것이 아니고 끊임없이 계속되어야 하기 때문이며 오늘날 한국교회가 스스로 뼈를 깎는 변화와 개혁을 이루어 내지 못하면 살아남을 수 없을 만큼 커다란 위기에 직면해 있기 때문입니다. 504주년 종교개혁 주일을 맞이하며 한국교회는 거룩성과 공교회성을 회복하기 위한 뼈를 깎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루터와 칼빈을 비롯한 개혁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유일성과 절대성을 중심으로 성경적 교리를 확립하고, 성직 교권주의, 교회 안에 파고든 세속주의를 철저히 배격하였던 것처럼 우리도 오늘날 한국교회 안에 스며든 성장지상주의, 황금만능주의, 인본주의 등 온갖 세속주의를 배격하여 교회의 거룩성을 회복합시다. 개교회 중심주의와 교회의 분열과 파벌, 부패와 타락이 가져오는 갖가지 참상들을 바로잡고 교회 연합과 일치의 바탕인 공교회성 회복에 힘씁시다. 코로나19 감염증 대유행을 통해 사회적 신뢰도에 상당한 타격을 입은 한국교회는 교회의 공공성 회복을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한국교회는 지난 100여 년간 개혁주의 신앙에 의한 헌신과 역사의식으로 민족을 사랑하고 헌신하며 신뢰를 바탕으로 크게 성장하였습니다. 이제는 기복주의, 개교회주의, 성장주의, 이기주의에 집착한 나머지 공공성을 상실하므로 사회적 신뢰도가 급격히 낮아지고 영향력이 훼손되며 교회가 외면당하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교회의 공공성이란 교회가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서 역할을 온전히 감당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복음 전파의 진정성이 의심받지 않도록 더 높은 도덕성으로 떳떳해지며, 자기성찰에 엄격해지고, 더 많이 겸손해져야 합니다. 504년 전 루터의 종교개혁은 교회지도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범을 따라 제자리로 돌아갈 것을 요청하는 것이었습니다. 교회지도자들은 주인의 자리를 예수님께 내어드리고 종이 되어 주님의 뜻을 받들어 섬겨야 합니다. 종교개혁의 전통을 바로 세우며 사도신경으로 신앙을 고백하는 모든 개혁교회는 분열과 분쟁을 회개하고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모든 탐욕을 버리고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하나 되어 이 땅에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를 실현하는 교회로 개혁되어야 합니다. 지도자들이 바르게 앞장서야 모두가 하나가 되어 새로운 시대를 열 수가 있습니다. 한국교회 지도자들이 스스로를 개혁하고 예수님과 같이 십자가를 지는 정신으로 나갈 때에 한국교회가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하며 교회와 나라의 위기를 능히 극복할 수 있습니다. 2021년 10월 20일 (사) 한국장로교총연합회 대표회장 김종준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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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0-25
  • 장봉생 목사의 간구
    세계보건기구(WHO)가 코로나 바이러스 팬데믹을 선언한 지 1년이 지났다. 1억2000만 명이 넘는 감염자와 270만 명의 사망자, 막대한 경제적 피해를 내고 있다. 큰 위기를 대응하는 과정에서는 혁신이 만들어지고 새로운 시대가 열리기도 한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인류는 유엔을 창설했다. 공동 번영을 추구하는 자유무역, 미 달러 중심 통화 체제, 저개발국 경제 개발을 지원하는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IMF) 등을 낳은 ‘브레턴우즈 체제’도 고안해 냈다. 대한민국이 번영한 것은 이 체제에 올라탄 덕이고 북한이 허덕이는 이유는 그렇지 못한 탓이다. 이 험난한 시대 2021년 9월 2일 오후 2시 익산 북일교회에서 열린 호남 중부지역 장로회협의회(회장 원태윤 장로) 장로 세미나에서 서대문교회 장봉생 목사가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크다'라는 제목의 설교로 우리 신자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깨우쳐주는 메시지를 전했다. 부회장 조길연 장로 기도 후 부회장 송하정 장로가 야고보서 5:16-18 성경을 봉독했다. 그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백하며 병이 낫기를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맺었느니라 장봉생 목사가 강단에 섰다. "할렐루야. (회중 아멘) 설교를 하는 사람보다 듣는 사람이 더 힘들다는 소리를 듣곤합니다. 주일 설교 여섯 번 하고 집에 들어가서 아내에게 그렇게 말했더니 제 아내가 뭐라고 한 줄 아십니까. '여섯 번 설교 듣기가 얼마나 힘든 줄 압니까' 하는 겁니다. (회중 웃음)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크다'라는 것은 부담입니다. 붙들고 기도해야 하고 지녀야 하는 확신이지만 말입니다. 내가 의인이냐. 나도 의인이냐. 물론 '칭의' 하나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함을 얻기 때문에 신분상 의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너 의인이냐' 물으실 때는 괜히 생각이 많아집니다. 간구, 도대체 어디까지 얼마나 구해야 간구입니까. 지금까지 내 기도의 응답을 보니 수많은 시간을 기도했음에도 불구하고 응답받은 게 몇 개나 될까요.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크다. 이 말씀이 부담스러울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별로 걱정하지 말아야 할 것 같습니다. 엘리야가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입니다. 똑같은 인간입니다. 그런데 3년 6개월 비가 안 내렸는데 엘리야가 기도하니까 비가 내렸습니다. 열왕기상 17장 18장에 아무리 찾아봐도 엘리야가 비 내리지 않기를 기도했다는 구체적인 내용은 없습니다. 그런데 다시 비오기를 갈멜산 꼭대기에서 무릎에 머리를 파묻고 일곱 번 기도했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도대체 야고보가 엘리야가 그렇게 기도해서 안 오던 비가 내리게 됐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엘리야나 우리나 똑같은 사람인데 누구는 기도하면 비가 내리고 누구는 안 내립니까. 시나이반도까지 도망갈 수밖에 없는 그런 연약한 사람도 하나님의 뜻을 위해 쓰십니다. 그런 엘리야도 쓰임 받을 수 있다면 우리도 똑같이 하나님 은혜로 의인 됐다 하는데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크다는데 그거 우리에게도 이루어질 수 있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도대체 어떻게 기도했길래 무슨 말이었길래 무엇이 하나님 마음에 들었기에 그렇게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보여주는 기적이 일어났을까요. 서대문교회가 72년 됐는데 황해도 신천의 깡패 출신 신유 부흥사 김익두 목사님 교회 교인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38선 넘어 내려왔습니다. 그들이 종로 바닥에서 만나 그때 시작한 교회가 지금 서대문교회입니다. 제가 20년 전 부임했을 때 1세대 어르신 몇 분이 살아 있었습니다. 그분들이 힘없는 목소리로 늘 얘기하시는 게 목사는 김익두같이 해야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셨나 물어보니까 손만 대면 병이 나았대요. 기도만 하면 사람들이 푹푹 쓰러졌대요. 그래서 제가 아이고 이 교회 잘못 왔구나... (회중 웃음) 어쩌다 내가 걸려 가지고 나는 이제 죽었다 생각했습니다. 옛날 어른들과 목사님들은 그랬어요. 기도하면 역사가 일어났어요. ... 제가 전도사 때 학생들을 지도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열왕기상 17장과 18장을 설교한 다음에 가슴이 뜨거워졌습니다. 그래서 학생들에게 교회 마당으로 나가자고 했습니다. 나무를 모아 오라고 했습니다. 담이 없는 교회 마당이라 장작을 쌓아 놓고 얘들을 불러모으고 ‘지금부터 기도해서 불을 내리겠다고 말했습니다. 엘리야도 불을 내렸는데 왜 지금 불이 안 내리겠느냐. 사도행전에 말씀하기를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그들이 다 같이 한곳에 모였더니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 했다. 그렇듯 사도행전 역사는 지금도 일어난다, 불을 내려달라고 기도했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다 보고 여호와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알게 해주시옵소서 기도했습니다. 지금도 일어날 줄 믿습니다. (회중을 보며) 장로님들 불이 내렸겠습니까 안 내렸겠습니까.” 앞자리의 원태윤 장로가 대답했다. “내렸습니다. (회중 웃음)” “(원태윤 장로를 바라보며) 이렇게 믿음이 좋으세요. 그러니까 회장을 하시지. 여러분 기도하면 불이 내린다. 그런데 불이 안 내렸어요. 아무리 한 시간 정도 비지땀 흘리며 애들 다 동원해 기도하는데도 불이 안 내리니까 걱정이 되는 겁니다. 얘들이 ’저 전도사 영력도 없는 게 괜히 폼만 잡고 말이야.‘ 그러지 않았겠습니까. 저는 보따리 싸야 되겠구나 하는 생각을 해야 할 상황이 됐습니다. 어떻게 합니까. 얘들한테 집에 가자고 했습니다. 오늘은 때가 아닌가 보다. 나중에 한 번 더 하자. 그런데요. 얘들이 일어나지를 않는 겁니다. 불이 내렸어요. 그 장작더미에 불이 내린 게 아니라 아이들의 가슴에 불이 내렸습니다. (회중 아멘) 얘들이 기도가 터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어린아이들인데도 방언이 터지기 시작했습니다. 뜨거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시대에 그 아이들을 통해 큰 부흥을 하도록 경험을 시켜 주셨습니다. (회중 아멘) 여러분 우리 생애에 내 젊은 날에 그런 일이 있었다, 감사하지만 이제 나이가 들어 하나님 앞에 갈 날이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하나님. 세월을 아끼라 하셨는데 이때에 사람들에게 보여주게 해주시옵소서. 하나님 살아 계심을 어떤 식으로든지 내 삶과 내 기도가 보여주는 그런 하나님의 역사를 나타내 주시옵소서. 하나님을 위해서 하나님의 이름과 의를 위해서 기도하는 우리 장로님들 되시면 (회중 아멘) 우리 교회들이 다시 믿음의 불이 붙을 것입니다. (회중 아멘) 불붙이는 사람, 비 내리게 하는 사람, 하나님의 응답을 가져오는 사람 되시기를 바랍니다. 할렐루야! (회중 아멘) 다 일어서시기 바랍니다. 두 손 들고 기도하십시다.” 찬양 후 장봉생 목사의 인도로 ’주여 삼창‘을 외친 뒤 불을 받은 장로들의 뜨거운 통성 기도가 이어졌다. 훗날 총회에 모인 총대들도 이런 불이 내리는 기도가 그가 선 단을 통해 이루어질 것 같은 소망의 불이 타올랐다. 2021-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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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9-11
  • 영광대교회 한국교회 회복의 날
    교인이었던 그는 어디 있을까. 아직 교회 안에 있을까. 아님 사라졌을까. 교회가 그를 사랑하지 않았던 걸 그는 알았을까. 그리고 그는 교회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걸... 2020년 5월 21일 오후 5시 100주년 기념관 그레이스홀에서 한국교회총연합 사회정책위원회(위원장 소강석 목사) 주관으로 “포스트 코로나19 ‘한국교회 예배회복의 날’ 관련 교계 기자 간담회”가 열렸다. 한국교회 목회 생태계 보존과 발전을 위해 불철주야 뛰어다니는 한교총 사회정책위원회 위원장 소강석 목사(새에덴교회)가 ‘한국교회 예배회복의 날’ 취지와 목적을 설명했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고맙습니다. 와 주셔서. 간략하게 설명드리고자 합니다. 첫째 한국교회 예배회복의 날 선포 배경과 취지입니다.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한국교회가 큰 소용돌이 속을 지나는 듯합니다. 세계가 펜데믹으로 마비되고 미궁 속에서 헤매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그나마 당국의 신속한 대응과 의료인들의 창의적이며 헌신적인 희생 그리고 국민의 자발적 동참으로 진정국면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도 예고 없이 닥친 질병으로 지난 10주간 동안 큰 혼란을 경험하였습니다. 한국교회는 준비 없이 생명을 걸고 지켜왔던 주일예배가 중단의 위기를 경험했습니다. 한국교회에 있어 주일예배는 일제강점기와 한국전쟁에도 중단되지 않았던 순교 신앙의 유산입니다. 사회적으로 감염병 집단 감염에 대한 두려움과 우려 때문에 ‘사회적 거리 두기’를 강조하던 시기에 몇몇 교회가 정부의 권고를 무시한 채 예배를 드리는 모습이 공영방송에 노출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모든 교회가 사회적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위기는 따로 있습니다. 사태의 장기화로 성도들이 예배를 드리지 못하는 기간 동안 ‘교회와 예배에 대한 새로운 경험’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 결과 코로나 사태가 해결된다 해도 ‘한국교회가 이전과 같은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인가’하는 질문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은 위기감을 인지하고 한국교회총연합은 상임회장 회의를 통해 코로나 이후 한국교회가 새로운 변화를 이끌어 갈 수 있는 길과 방향을 모색하기 위하여 오는 5월 31일 주일을 ‘한국교회 예배회복의 날’로 선포하였습니다. 이날은 다음과 같은 의의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첫째, 내부적으로 교회와 성도들이 기도하고 예배하는 마음을 모으게 될 것입니다. 둘째, 대사회적으로 한국교회의 응집된 메시지를 전달하는 계기가 될 것입니다. 셋째, 한교총 사회정책위원회에서는 ‘포스트 코로나19’에 대하여 지속적으로 준비해 나갈 것입니다. 우리는 겸손하게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며 국가와 사회, 교회의 변화와 대응방안을 계속 찾아 노력할 것입니다.” 2020년 5월 31일 11시 영광대교회(김용대 목사)는 ‘한국교회 예배 회복의 날’ 예배를 드렸다. 김용대 목사는 ‘예배자의 삶’을설교했다. 본문은 요한복음 4:19-26 ‘여자가 가로되 주여 내가 보니 선지자로소이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예배하였는데 당신들의 말은 예배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더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이 산에서도 말고 예루살렘에서도 말고 너희가 아버지께 예배할 때가 이르리라 너희는 알지 못하는 것을 예배하고 우리는 아는 것을 예배하노니 이는 구원이 유대인에게서 남이니라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할찌니라 여자가 가로되 메시야 곧 그리스도라 하는 이가 오실 줄을 내가 아노니 그가 오시면 모든 것을 우리에게 고하시리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로라 하시니라’이었다. 본당은 교인들로 가득했다. “... 아파트에 살면 따뜻하잖아요. 그런데 이사 간 우리 아파트는 추워요. 나중에 알았는데. 제가 집을 나갈 때 보일러 전원 버튼을 끄고 나갔습니다. 외출 버튼을 끄고 나가야 아파트 온도가 일정 수준 유지합니다. 그래야 돌아와 다시 버튼을 정상화 시키면 예열이 되어 있어서 금방 따뜻해집니다. 그런데 아예 꺼버린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나아와 이 공동체 예배를 통해서 은혜를 받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예배를 드리기 위해서는 우리가 믿음의 예열이 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배자로서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죄지을 것 다 짓고 나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냉랭한 심령이 되어서는 은혜를 받을 수 없습니다. 그래도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며 여러분의 영적 상태를 점검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공동체 예배의 자리에 나오기 전에 개인적인 삶이 중요합니다. 매 순간 주님만 바라보면서 우리 주님과 동행해야 할 줄로 믿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영적 심장은 다 얼어버리고 맙니다. 악한 생각, 악한 언어와 악한 행동 모두 다 내려놔야 합니다. 우리가 다시 모여 예배를 드릴 때 감격 적인 예배를 드리기를 원한다면 매 순간 주님과 동행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예배자의 삶은 예수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세상 것 보지 말고 예수님만 바라보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회중 아멘) 오늘 성령강림절 크게 강조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늘 성령강림절입니다. 오순절에 성령 하나님께서 강림하신 이후에 제자들의 삶이 변화했고 그리고 비로소 교회가 시작됐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확장되어 갔습니다. 오늘은 한국교회가 예배 회복의 날로 지키는데 교회와 성도들이 새롭게 변화되는 출발점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회중 아멘) 초대교회가 무엇을 했습니까. 다른 것 안 했습니다.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고 오직 예수님만 증거했습니다. 세월이 흐른다고 본질이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2천 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교회와 성도는 모두 오직 예수님만 바라봐야 할 줄로 믿습니다. (회중 아멘)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그동안 공동체 예배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절실히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예배 회복의 날로 하나님 앞에 나아왔습니다. 그렇지만 공동체로 나아와 예배당에 나아와 예배를 드리는 것만으로 만족하면 안 됩니다. 공동체로 나아오기 전에 우리는 죄악을 벗어버리고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는 참 예배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회중 아멘) 신랑 되신 우리 주님 맞이하는 성결한 신부, 신실한 신부, 순결한 신부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회중 아멘) 기도드리겠습니다.” 온 회중이 머리 숙였다. 설교자의 간구가 낮게 울렸다. “거룩하신 여호와 우리 하나님 간구합니다. 오직 예수님만 바라보고 죄악을 벗어버리는 온전한 예배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회중 아멘). 아멘.” 찬송이 울려 퍼졌다. 주의 주실 화평 믿음 얻기 위해 너는 정성껏 기도했나주의 제단 앞에 모두 바치기 전 복을 받을 줄 생각 말라주의 제단에 산 제사 드린 후에 주 네 맘을 주장하여주의 뜻을 따라 그와 동행하면 영생 복락을 누리겠네 축도 후 교인들은 사회적 거리를 두고 질서 있게 퇴장했다. 당회장 실에서 김용대 목사와 물을 부은 컵라면과 김밥을 두고 마주 앉았다. 식사를 나눌 때 김용대 목사는 낮지만 울림이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번 총회가 기다려져요. 오늘 한국교회 예배 회복의 날도 소강석 목사가 주창했다고 하는데 그는 늘 업데이트가 되요. 총회 후 소강석 목사가 어떻게 업데이트가 될지 사뭇 기대되요. 그 지식, 식견, 비전이 정말 놀라워요. 나이는 나랑 같은데 신학교는 4년 선배지만...” 2020년 5월 30일 오후 3시 22분(한국 시각 31일 새벽 4시 22분) 미국 플로리다주의 케네디우주센터에서 우주비행사 두 명을 태운 우주선이 발사됐다. 민간 우주기업 스페이스X의 유인우주선 '크루 드래건'이 '팰컨9' 로켓에 실려 우주로 날아갔다. 1969년 이곳에서 인류 최초로 달 착륙에 성공한 유인(有人)우주선 아폴로 11호를 쏘아 올렸는데 이날은 민간 최초의 유인우주선을 발사하는 기록이 만들어졌다. 팰컨9 로켓은 1·2단 발사체가 성공적으로 분리되며 크루 드래건을 우주 궤도에 올렸다. 스페이스X는 재활용 로켓인 팰컨9의 1단 발사체도 바다에서 회수했다. 우주선은 31일 오전 10시 30분(한국 시각 31일 오후 11시 30분) 지구 상공 400㎞에 있는 국제우주정거장(ISS)에 도킹(결합)했다. 스페이스X의 무인 화물선과 마찬가지로 국제우주정거장(ISS)과 도킹하는 전 과정이 컴퓨터에 의해 자동으로 진행됐다. 스페이스X는 우주에 사람을 보낸 첫 민간기업이 됐다. 우주를 향한 첫 도약 배경에는 이 회사 창업자 머스크가 있다. 외신들은 유인 우주선 발사 성공에 대해 "스페이스X 창업자 일론 머스크의 돈키호테식 무모한 도전이 미국 우주개발의 탐험 정신을 되살렸다"고 평가했다. 머스크는 지난 30일(현지 시각) 하루 자신의 성과를 총망라해 자랑했다. NASA의 두 우주인은 머스크가 세운 자동차 업체 테슬라의 전기자동차 '모델 X'를 타고 발사장까지 이동했다. 이들은 이후 스페이스X의 재활용 로켓 '팰컨9'에 실린 우주선 '크루 드래건'을 타고 국제우주정거장(ISS)으로 날아갔다. 일론 머스크는 1971년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태어났다. 1995년 스탠퍼드대 박사과정을 그만두고 인터넷 결제 업체 페이팔을 창업했다. 그는 2002년 페이팔을 매각해 받은 1억6500만 달러(약 1800억 원)로 스페이스X와 테슬라 등을 세웠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현재 그의 재산은 410억 달러(약 50조 원)에 달한다. 머스크는 어릴 적 아이작 아시모프(1920~1992)의 공상과학(SF) 소설 '파운데이션'을 읽고 우주 탐험의 꿈을 갖게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스페이스X를 세우며 "화성으로 이주하겠다는 어린 시절 꿈을 이루겠다"고 밝혔다. 우주를 향한 머스크의 꿈은 어릴 적부터 읽었던 아이작 아시모프(1920~1992)의 공상과학(SF) 소설이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진다. 머스크는 최근 트위터를 통해 “아이작 아시모프의 연작 공상과학 소설 ‘파운데이션’은 읽어 볼 가치가 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파운데이션’은 미래 우주에서 거대 행성 간 제국의 몰락과 재탄생을 다룬 소설이다. 테슬라는 작년 한 해 동안 전기자동차 약 37만대를 팔았다. 그런데 같은 기간 242만대를 판 포드 그룹의 주식가격은 6달러가 채 안 되는 반면, 테슬라는 한 주에 무려 822달러다. 이 정도의 가격은 자동차 회사 주식이라고 보기 어렵다. 왜냐하면 주식가격은 성장 가능성으로 정해지기 때문이다. 여기에 수수께끼를 풀어줄 열쇠가 있다. 왜냐하면 주주들이 테슬라를 자동차 기업으로 생각하지 않고 디지털 테크 기업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생각은 틀린 게 아니다. 테슬라는 제조부터 판매, 판매 후 관리까지 전 과정에 디지털 기술을 적용해서 빅3와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운영된다. 가령 네바다주에 있는 공장 ‘기가팩토리’는 정북향으로 지어졌다. 공장 내부의 로봇들이 GPS로 쉽게 움직일 수 있게 배치한 것이다. 판매는 딜러망 없이 온라인으로 하고 구매자에게 자동차를 배달한다. 테슬라를 자동차가 아닌 디지털 제품으로 인식하게 하는 것은 구매 후의 경험이다. 테슬라 자동차 소유자들은 차를 구매한 후로 말한다. “시간이 지날수록 차가 더 좋아진다.” 마치 스마트폰처럼 끊임없는 소프트웨어 자동 업데이트로 차가 샀을 때보다 더 똑똑해지기 때문이다. 그처럼 기인 소강석 목사도 호남의 묵직한 지도자 김용대 목사가 말하듯 늘 업데이트되고 있다. 그것은 목사로서 교회와 나라를 사랑하는 소강석 목사의 남북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원대한 비전'과 그를 뒷받침하는 코로나19 이후 ‘한국교회 회복의 날’과 같은 '단기 실행 능력'으로 증명이 되고 있다. 바이러스는 모든 종교를 강타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바이러스는 수천 년 내려온 절기의 전통을 중단시켰다. 순례객으로 그득해야 할 바티칸과 예루살렘은 적막하다. 소중한 전통과 제의를 지키지 못하는 안타까움에 신도들은 상심할지 모른다. 그러나 꼭 그럴 필요는 없다. 어쩌면 지금이야말로 소강석 목사가 주장하는 대로 위기를 통해 하나님이 주시는 본질 회복의 기회일 수 있기 때문이다. 생명 걸고 지키려 해 온 신앙의 가치가 성지나 조직이나 제도가 아니라 보이지 않는 교회 신자이어야 한다는 것을 김용대 목사의 ‘오직 주님만 바라보고 살아야 한다’는 설교처럼 담담히 성찰할 때가 아닐까. 그렇기에 비어 있는 메카의 모스크와 예루살렘 성전 통곡의 벽과 로마 베드로 성당 그리고 세계 곳곳 교회의 모습은 묘한 감동을 준다. 물리적으로는 비어 있지만 공허하지 않다. 빈 공간은 사람의 안전을 위한 공동 노력을 상징한다. 신도 간 거리 두기와 공간의 비움을 통해 유월절의 해방과 부활절의 생명 그리고 믿지 않는 자와의 연대를 교회가 누릴 수 있기를 소망한다. 거리 두기의 비움이 곧 교회 발전의 씨앗이 될 영성일 수도 있는 요즈음이다. 2020-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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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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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교개혁 500주년, 개혁교회의 책임- 정일웅목사(전총신대학교총장)
    종교개혁 500주년, 개혁교회의 책임 (제54회기 목사. 장로기도회 주제 강연) 정일웅목사(전총신대학교총장) 장소: 부산부전교회당 일시: 2017.5.10. 9:30-10:30 존경하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교단의 목사님과 장로님 여러분, 주안에서 다 평안하신지요? 저는 오늘 “종교개혁 500주년, 개혁(장로)교회의 책임”이란 주제 강연을 부탁받은 정일웅목사입니다. 강연주제의 핵심은 혼미한 이 시대에 우리 개혁교회가 짊어져야 할 막중한 복음의 책임이 무엇인지를 밝혀달라는 총회의 요구를 받게 되었고, 그 대답을 준비했습니다. 여러분의 깊은 관용(寬容)과 혜안(慧眼)의 경청을 기대합니다. 그리고 이 시점에 우리 개혁(장로)교회의 책임을 분명히 하려면, 아무래도 우리 합동교단을 비롯하여 현재 경험되고 있는 한국교회전반의 목회실상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판단되어, 먼저 그 방향에서 대화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존경하는 우리 합동교단, 지도자 여러분, 우리가 몸담고 있는 한국(장로/개혁)교회는 지금 어떤 상태에 처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솔직히 말씀드리면, 큰 위기에 직면한 모습입니다. 그리고 한국의 보수적인 교회들 대부분이 그러한 상태에 있는 것으로 판단합니다. 생각해 보면, 그간 한국교회가 지난 60-90년대로 오면서, 대대적인 복음전도운동으로 선교역사상 유례없는 대 성장을 이루었지만, 이제 그러한 성장의 황금기는 지나간 듯합니다. 80년대 초만 해도, 어디든지 십자가만 세우면 교회가 부흥된다던 말이, 이제 다 옛 이야기가 된듯합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그 원인이 무엇일까요? 결코 간단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급변하는 우리사회의 한복판에서 한국교회와 우리 모두 하나님의 말씀보다도 물질적이며, 타락한 인간의 세속적인 가치들에 더 귀를 기울이고, 행동했던 결과가 아닌가 싶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세속화된 모습이며, 하나님의 거룩성을 상실하고 있는 한국교회와 우리 모두의 모습임을 자책해 봅니다. 그래서 전도하기가 이전 같지 않고, 목회하기 또한 참으로 어려운 시대를 맞이하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설상가상으로 지금 한국교회는 사회적으로 매우 불신 받는 대상이 되어 있습니다. 매번 교회 내적인 문제들이 세상 밖으로 노출되면서, 한국교회지도자들의 비인격적이며, 비윤리적인 행위들이 세상언론을 장식하게 되었고, 지도자들뿐만 아니라, 한국교회 전체가 불신 받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심지어 안티 기독교세력까지 등장하여, 적그리스도의 노릇을 하고 있으며, 또한 가나안 성도들이 점점 늘어나 그 수가 약 100만에 이른다는 소리도 듣게 됩니다. 그래도 대형교회들은 성장하지 않느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그곳을 찾는 대부분은 이전 교회들에서 상처받아 수없이 갈등하며 배회하던 우리 평신도들의 수평이동현상으로 설명될 뿐입니다. 생각하면, 이러한 한국교회의 목회실상에 대한 부정적인 평가들은 우리의 자업자득이 아닌가싶기도 합니다. 어쨌든 지금 한국교회의 목회현실은 그렇게 희망적이라고 말할 수가 없고, 그야말로 위기와 한계에 직면한 모습이 분명하다고 하겠습니다. 존경하는 우리 교단 지도자 여러분, 이러한 한국교회 목회실상의 위기 앞에서, 우리는 과연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저는 참으로 지금이야말로 많은 신학적인 성찰과 목회실제의 철저한 반성이 요구된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우리의 신앙실제를 되돌아보고, 500년 전, 루터가 종교개혁을 단행했던 것처럼, 우리의 왜곡되고 뒤틀린 부분을 성경말씀에 근거하여, 부단하게 고처 가는 노력을 과감하게 실천해야 하리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우리가 가진 신학을 되돌아보고, 우리의 신학적인 사고와 이해가 참으로 좁아져 있지 않은지? 그 좁아진 우리의 모습에서 지금 한국교회가 당면한 부정적인 문제들이 연유된 것은 아닌지? 반성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재빨리 좁아진 우리의 신학적인 사고와 이해의 폭을 넓히게 되기를 감히 주문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할 때, 개혁(장로)교회가 짊어져야 할, 복음의 책임이 거기서 확인될 것이며, 나아가 참된 복음의 진리를 책임지는 우리 한국개혁교회의 모습이 거기서 가능하리라 기대하며, 또한 당면한 한국교회의 목회위기와 한계도 거기서 극복되리라 확신합니다. 이제 저는 다음의 5가지 주제를 따라, 좁아진 우리의 신학적인 사고와 이해의 지평을 넓혀야할 개혁교회의 책임과 관련된 구체적인 내용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 우리 합동교단 개혁교회의 신학정체성은 ‘개혁신학’으로 부르기 바랍니다. 지금까지 우리 교단의 신학정체성의 명칭은 주로 ‘개혁주의’ 또는 ‘개혁주의신학’으로 표현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런 언어사용은 피하고, ‘개혁신학’으로 바로 잡기를 바랍니다. 그 이유는 ‘주의’(-ism)로 불리는 ‘이념’, 즉 ‘Ideologie’란 말이 가진 매우 부정적인 이미지 때문이며, 그 개념자체 역시 문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데올로기’란 무엇을 뜻하는 말인지 아시지요? 그것은 “경험을 통하여 획득한 가치를 객관화하고 합리화하여 진리인 것처럼 주장하는 소리”로 봅니다. 물론 ‘사상체계’란 말로도 이해합니다. 그러나 ‘이데올로기’는 어쨌든 인간의 경험에 의존된 사람의 생각이며, 사람의 주장이기에 그 자체는 참된 진리와는 거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만일 그리스도의 복음(Evangelium)과 이념(Ideologie)의 관계에서 우리는 무엇을 믿느냐고 질문하면, 그것은 이념이 아니라,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다고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언제나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믿으며, 인격의 주인이신 그리스도와 성령과의 관계에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신학을 너무 이념적으로 강조하여, 그것을 믿어야 할 대상으로 삼게 되면, 바로 거기서 문제가 생깁니다. 결국 그 믿음은 이념을 믿는 모습이지, 주님의 참된 말씀을 믿는 종의 모습이 아니며, 오히려 이념의 종, 아바타의 모습이 될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개혁주의’니, ‘개혁주의신학’이란 용어는 오늘 이 시대에는 사용하지 않는 것이 우리 개혁교회의 신학정체성을 밝히는데, 큰 도움이 된다고 봅니다. 생각하면, 이러한 신학이념표현은 그간 기독교신앙진리에 대항하는 이단사상이나, 신 존재를 부인하는 무신론사상이 대두될 때, 진리방어목적으로 주로 사용해왔습니다. 그래서 ‘칼빈주의’는 역사적으로 그러한 일에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그리고 칼빈의 훌륭한 생각들은 성경의 진리이해에 큰 도움을 주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여전히 칼빈의 신학을 선호하고, 지금도 ‘칼빈신학’란 이름으로 공부하고 있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진리이해에 도움을 주는 수단이지, 그 자체가 우리가 믿어야 할 신앙의 객체(대상)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역사적으로 이러한 신학이념이 가장 부정적으로 사용된 것은 조금 달리 생각하는 자에 대한 관용적인 태도를 망각하고, 마녀사냥식의 도구가 되었던 것 때문입니다. 그러한 비극적인 역사를 경험한 구미교회들은 오늘날 이념적인 신학사상표현을 극히 자제하며, 그러한 언어사용을 피하고 있습니다. 저의 경험하나 말씀드리면, 실제로 총장재임 시에 서유럽과 북미지역의 우리 총신과 신학사상을 같이한다고 생각된, 신학교총장들을 만나 교제한 일이 있었습니다. 유감스럽게도 그들 아무도, 그들 학교와 자신들의 신학을 우리와 같은 이념신학으로 표현하고 있지 않았습니다. 미국 칼빈신학교나, 웨스트민스터신학교 총장들은 그들 신학교가 지향하는 신학을 모두 ‘개혁신학’(Reformed Theology), 또는 개혁교회의 전통(Reformed Tradition)으로 표현하지, 결코 이념신학으로 말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개혁주의’는 영어로 ‘Reformism’,‘개혁주의신학’은 ‘Theology of Reformism’인데, 유감스럽게도 그들은 그런 용어자체를 알지 못했습니다. 생각하면, 이 말은 순전히 한국교회의 사상 대립적 상황에서 생겨난 것입니다. 오늘날에 와서 이러한 이념적인 신학표현은 자제하고, 그냥 ‘개혁교회의 개혁신학’으로 부르면 충분하다고 봅니다. 총신의 신학정체성은 ‘개혁신학’이며, 개혁교회의 전통을 따르는 신학교입니다. 이런 표현가운데 사상체계는 이미 포함되어 있습니다(조직신학의 책임). 그렇게 표현할 때, 사회적으로 복음전도의 접근이 더 용이하며, 특히 지성인들에게 투쟁적이거나, 분파적이지 않고, 편 가르기가 아닌, 더 설득력을 가진 복음전달이 가능하리고 봅니다. 그런데 또 최근에 ‘복음주의’라는 주장의 소리도 듣습니다. 그것도 매우 이념적인 표현이며,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냥 ‘복음’은 복음이지, 복음주의가 되면 안 됩니다. 그러한 표현은 훨씬 교회공동체의 화해와 화평과 하나 됨을 깨는 일에 크게 기여하리고 봅니다. 더욱이 이념적인 신학사상표현이 정치적인 구호로 사용되는 일은 더더욱 삼가야 합니다. 그것을 너무 강조하면, 정말 복음보다, 이념을 더 믿는 것이 아닌지, 의심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7:20)말씀하였습니다. 구원신앙은 이론이 아니라, 믿음대로 행하는 순종이요, 인격적인 삶의 실천임을 일러준 것입니다. ‘개혁주의’, 또는 ‘개혁주의신학’이란 용어사용이 때때로 그를 대단한 개혁주의자로 여기게 할지모르지만, 자기과시행위일 뿐입니다. 여러분, 지나친 신학이념의 주장에서 제발 자유하시기 바랍니다. 그렇지 않으면, 실제로 그리스도복음의 진리는 이념적인 주장에서부터 왜곡되기 시작한다는 사실을 우리 모두 명심해야 합니다. 이제부터 신학정체성은 ‘개혁신학’으로, ‘개혁교회의 전통’으로 분명히 할 때, 한국의 개혁교회는 한국교회전체를 품는 장자교단의 역할을 거기서 분명히 해 낼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둘째, 개혁교회의 책임은 개인의 영혼구원뿐 아니라, 사회와 자연생태계의 윤리적인 책임을 포함한 전인격적인 삶을 구원하는 복음전도를 힘쓰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개혁교회의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 존경하는 우리 교단 지도자여러분, 현대신학은 기독교구원이 개인의 영혼구원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영혼과 육체의 전인격적인 구원과 삶 전체의 구원으로 이해하고, 특히 사회와 자연생태계의 윤리적인 책임까지를 포함한 우주전체구원의 총체적인 의미가 그리스도복음의 핵심적인 구원임을 밝히고 있습니다(하나님나라와 종말론적인 메시아구원관). 생각하면, 그간 이러한 총체적인 구원이해를 우리 보수적인 교회는 자유주의신학으로 단정하여 그 수용을 거부해 왔습니다. 물론 우리가 거부해야 할 것은 그들의 성경유오설주장과 만인구원론신학입니다. 그러나 되돌아보면, 오래전부터 한국교회의 보수는 개인구원을 강조하며, 진보는 사회구원을 강조하여 서로 대립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 이르러 이 문제는 양자택일이 아니라, 그리스도복음의 전인격적이며, 삶의 총체적인 관점에서 그리스도의 구원을 새롭게 이해하고, 수용해야 할, 개혁교회의 구원론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구원, 즉 그리스도의 복음은 개인과 하나님, 개인과 사회, 개인과 자연까지를 포괄하는 총체적인 창조세계의 구원(창1:28;눅10: 25-37;롬8:19-23)을 폭넓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전 사회문화영역에서 하나님의 주권(통치)이 드러나게 해야 하는 문화신학적인 사명과,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복음의 빛을 비추는 사명수행과 맞물려 있기 때문입니다(코메니우스와 카이펴의 문화신학). 이러한 이해는 신학적으로 그간 기독론적인 관점에서만 이해했던 전통적인 구원론을 뛰어넘어 창조신학의 관점에서 기독교의 구원을 새롭게 해석해 준 통전적인 구원론으로 여겨집니다. 그 때문에 기독교구원은 구체적으로 인간과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로서, 먼저 복음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개인의 전인격적인 변화(회개와 믿음의 중생, 칭의)가 있어야 하며, 그렇게 변화된 사람(영혼구원의 확신)은 인간과 자연과의 관계에서 요구되는 복음의 윤리적인 책임(성화)을 짊어져야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을 실재로 느끼게 해 주는 중요한 증거이기도 합니다. 즉 복음의 빛을 세상에 비추는 일로써, 기독교는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미쳐서 사회를 개혁하는 일에도, 방관자가 아니라, 책임자로 참여해야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오늘날 신학에서도 ‘공공신학(Public Theology)’이란 이름으로 더 잘 설명되고 있기도 합니다. 존경하는 목사님과 장로님들, 솔직히 말하면, 지금까지 우리 개혁교회의 구원론은 전인구원적이며, 이웃과 자연과의 관계에서 요구되는 윤리적인 책임까지를 포함한 총체적인 구원을 우리의 성장세대와 평신도들에게 깨우치거나, 그렇게 잘 인식시켜주지 못했다고 생각합니다. 그 때문에 한국교회는 개인의 영혼구원에만 목표를 두었고, 신앙의 윤리는 하나님사랑의 경건윤리에만 역점을 두어, 우리 모두 경건해지도록 종교심과 기복신앙을 얼마나 부추겨 왔었습니까? 그리고 설사 이웃사랑의 책임을 알려주었다고 해도, 그것은 천천히,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라는 생각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은 매우 인색하고, 매우 이기적이며, 자기영혼구원만 생각하는, 마치나 한 달란트 받은 종들처럼 생활하는 모습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저의 판단이 오해이기를 바랍니다만, 실제로 우리 모두 그간 영혼구원에만 목숨을 걸었고, 영혼만 구원되면, 이웃과 사회에 대한 윤리적인 책임(봉사)은 스스로 알아서 잘하겠지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실제는 정반대였습니다. 그것이 지금 한국교회와 우리 기독인들이 사회로부터 불신 받는 원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참으로 부끄럽지만, 이웃과 사회에 대한 복음적인 사명은 망각한 채, 불신자들과 똑 같이 아옹다옹하면서, 오직 자기 것 획득에 몰두하면서 살아온 것이 우리의 모습이었음을 깊이 뉘우쳐야 할 것입니다. 존경하는 지도자 여러분, 이제 우리의 참으로 좁아진 구원관을 넓히시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자유주의라고 또 오해하지 마시구요! 우리의 ‘영혼구원의 과제실현’이 얼마나 이웃공동체를 사랑해야하는 일과 맞물린 것인지를 되돌아보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복음의 전인격적이며 총체적인 삶을 감당하는 복음전파의 사명을 참으로 책임지는 개혁교회가 되기 바랍니다. 또한 우리의 복음전도방법을 새롭게 시도하기를 부탁드립니다. 이제는 교회의 주변과 사회저변에 소외되어 있는 많은 사람들을 찾아나서는 복음전도를 과감하게 시행하며, 그들을 돌보는 목회사역으로 거듭나기를 바랍니다. 그야말로 어려운 환경에 처한 사람들을 돌보고 품어주는 이웃사랑 복음전도, 사람사랑의 목양사역으로 전도와 목회방향을 새롭게 바꾸기를 바랍니다.(중서울노회 소속인 옥수중앙교회 호용한 목사님의 우유배달사랑전도/달동네의 울보목사란 책). 우리사회의 어려운 환경에 처한 사람들을 돌보는 복음전도와 목회행위가 비록 재빠른 교회성장을 초래하지 못하고, 성장열매가 참으로 더딜지라도, 이러한 전인구원의 복음전도, 전인구원의 총체적인 목회를 실천할 때, 우리 개혁교회는 희망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제야말로 참으로 우리의 좁아진 구원신학에 대한 사고와 이해의 지평을 활짝 넓히기를 희망합니다. 그리하여 총체적인 복음의 폭넓은 구원관을 토대로, 복음전도와 목회를 실현하기 바라며, 또한 우리의 젊은 세대와 평신도들에게도 이러한 총체적인 복음의 전인격적인 구원관을 심어주기를 힘쓰기를 바랍니다. 그럴 때, 개혁교회는 복음전도의 사명을 폭넓게 감당하는 모범적인 교회가 될 것이며, 세상에서 소금과 빛의 역할을 기꺼이 수행하는 우리의 평신도들을 만날 것이며(마5:13-16), 사회와 이웃에 감동을 주며, 마침내 하나님을 감동시켜, 하나님이 보내준 사람들로 교회부흥(행2:47)을 이루는 놀라운 기적을 거기서 경험하게 되리라 확신합니다. 여기서 신학적으로 한 가지 분명히 해야 할 것은 개인의 영혼구원은 오직 성령하나님이 행하시는 독자적인 일이지만, 이웃과 사회와 자연을 돌보는 총체적인 구원의 책임수행은 신인협동적인 관계에서 성취해야 할 인간의 책임이며, 넓은 의미에서 ‘하나님의 총체적인 구원’임을 바르게 이해하기를 바랍니다. 셋째, 개혁교회는 평신도의 만인사제신분을 회복하고, 그들 평신도들이 창조세계의 한 복판에서 복음전파와 사회봉사에 적극적인 섬김의 주인공들로 활동하게 해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개혁교회의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 중세로마가톨릭교회가 성직자의 신분과 권위를 높이고, 계급화하면서, 상대적으로 평신도(Laity)신분을 낮추어 신적인 일에 무식한자들로 소외시키고 있을 때, 루터는 벧2:9-10절의 말씀을 들고 나와, 성직자만 사제가 아니라, 평신도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동일한 사제신분을 가진 자들임을 천명함으로써, 교회개혁을 단행하였던 것입니다. 루터의 ‘만인사제론’은 인간사제의 중보자적인 역할 없이, 믿는 자라면 누구나 중보자 그리스도를 의지하고 하나님께 직접나아가 예배하며, 기도할 수 있는 사제자격이 부여되었음을 밝힌 것입니다. 그것은 복음전도에서 선지자로서의 기능적인 역할과, 형제를 위로하며 돌보며, 축복하는 기도자의 제사장적인 기능과 사회적인 관계에서 하나님의 의와 평화를 실현하는 일에 섬김의 왕적인 기능적 역할을 수행하는 복음전파의 사명자로 보았던 것입니다. 루터의 이러한 만인사제론은 그 당시 성직자 중심의 중세교회구조를 개혁하여, 회중중심의 교회로, 복음을 전파하는 선교중심의 교회로 개혁하였습니다. 칼빈은 루터의 만인사제론을 수용하면서도, 조직된 교회를 섬겨야 할 직분을 네 가지로 구분하였고(목사,교사,장로,집사), 한국장로교회는 3가지 직분(목사,장로,집사)을 항존직으로 적용하고 있습니다. 생각하면, 이러한 직분은 결코 계급적인 관계가 아니라, 각자 믿음의 분량에 따라 성령께서 주님의 교회를 섬기도록 세우신 직책이었습니다. 이 직분은 주님을 섬기는 직분이지, 목사를 개인적으로 섬기는 직분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교회 내에서는 이러한 직분들이 목사를 섬기는 직책인 것처럼, 오해되어 있고, 또한 매우 계급적으로 이해하는 경향에 빠져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교회 안에는 언제부터인가 목사직분의 권한이 강화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점차 그 권위가 높아지면서, 마침내 목사는 신령하고, 특별한 능력의 소유자로, 또한 축복의 전문가로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모든 신자들은 기복신앙의 추종자들로 만들었고, 피축복자들로 전락시켜 놓았습니다. 또한 목사의 권한은 당회장권, 강단권, 축도권, 설교권, 목양권, 안수권 등으로 강화되었고, 상대적으로 평신도는 오늘날 참으로 무능한 신자로만 머물게 해 놓은 모습입니다. 이러한 한국교회의 모습은 개혁의 대상이 되었던 바로 중세로마가톨릭교회의 모습으로 되돌아간 느낌입니다. 그리고 목사의 리더십은 섬기는 주님의 종의 모습이 아니라, 성도들 위에서 지배하고 군림하는 제왕(기업체회장)적인 모습으로 변질되었고, 마침내 목사의 교권남용문제가 여기서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특히 사회적으로 비판받는 목사의 교회재정횡령, 목회세습, 목회자성윤리문제 등, 비도덕성문제들이 다 이와 같은 제왕적인 리더십의 남용에서 파생된 것으로 여겨집니다. 여러분, 이 뿐만 아닙니다. 오늘날 사회적으로 민주화가 이루어지면서, 교회 내적으로, 목사와 장로, 그리고 평신도사이에 발생하는 불화와 대립적인 분쟁은 심각한 상태에 이르고 있는 줄 압니다. 목사님들 모임에 가면, ‘장로다루는 법’이 인기 있는 특강주제라고 하며, 장로님들 모임에서는 역시 ‘목사잡는법’이 인기 있는 강연주제라고 합니다. 이 말은 웃자고 만들어낸 말이 아닌가 싶습니다만, 사실이라면 참 안타까운 목회현실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날 일반법정의 수많은 고소건과 시비 건이 대부분 한국교회에서 발생한 분쟁들이며, 목사. 장로사이에 발생한 고소 건들로 알려져 있습니다. 역시 우리교단은 총회의 결의까지도 효력정지를 당하는 사태가 빈번한 줄 압니다. 존경하는 교단 지도자 여러분, 저는 이러한 행위들에서 한국교회가 사회로부터 불신당하는 연유가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가나안 성도들이 생산되는 원인도 여기서 생겨난 것으로 여겨집니다. 지금 복음전도의 문이 닫히고, 교회성장이 멈추어진 이유가 다 우리의 기득권을 움켜지고, 아옹다옹 하는 모습에서 귀결된 것으로 판단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다 내려놓으시기 바랍니다. 제발 양보하시기 바랍니다. 참으로 교회공동체의 평안을 위해서 자기주장을 내려놓기 바랍니다. 여러분, 왜 우리스스로 교회의 거룩성을 짓밟으며, 왜 하나님의 권위를 스스로 무너뜨리고 있는지요? 지금이라도 이 모든 수치스런 우리의 잘못된 행위를 즉각 중단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개혁교회는 권징의 권위를 시급히 회복하기를 바랍니다. 교회문제를 교회 내에서 해결하지 못하고, 사회법정으로 끌고 가는 분들이 과연 개혁교회의 멤버이며, 하나님나라를 함께 짊어지고 가야할 개혁교회의 동역자인지를 심각하게 돼 물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천국열쇠인 교회의 권징이 지나치게 정치적이며 감정적으로 남용되어서도 안 되겠지만, 우리 모두 교회의 치리와 권징에 순종하지 않는다면, 그것이 우리주님께 대항하는 불신앙의 모습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러므로 이제 개혁교회는 권징을 올바르게 시행하여, 주님교회의 권위를 바로세우기를 진심으로 소원합니다. 존경하는 개혁교회의 목사님들, 이제 우리의 장로님들과 평신도들도 사제의 신분을 가진 자들임을 인정하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그들이 지역교회 내에서의 일꾼만이 아니라, 지역사회와 세상의 한 복판에서 복음의 빛을 비추는 일로, 사회와 자연의 윤리적 책임영역에서 적극적인 섬김으로 활동하는 주인공들이 되도록 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래야만, 그들이 가진 직업을 통하여 창조세계의 한복판에서 만인사제의 역할을 사회적으로 감당하게 될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은 바로 복음전도의 사명수행과 이웃사랑의 책임을 감당하는 모습이 거기서 분명하게 될 것입니다. 물론 루터는 그 당시 만인사제론을 말할 때, 목사와 평신도의 직분이 어떻게 구분되는지를 질문 받았고, 그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목사는 지역의 교회공동체를 이끌어야 하는 선택되고 준비된 하나님사역의 책임자이며, 특히 예배에서 하나님말씀의 선포인 설교와 성례를 거행하는 책임과 성도들의 영혼을 돌보는 목양적인 책임을 성령께서 부여하여, 세워주신 하나님의 사역자임을 밝혀 주었습니다. 그러므로 평신도들은 역시 이러한 목사를 세우신 성령하나님의 권위를 존중하고 따라야 할 것입니다. 존경하는 우리 교단지도자 여러분, 그렇습니다. 목사와 장로, 또는 평신도는 서로 대립적인 관계가 결코 아닙니다. 이 땅에 하나님나라와 주님의 교회를 함께 세워가야 할 복음의 동역자입니다. 목사님은 지역교회공동체를 책임진 사제들이며, 평신도들은 세상을 책임진 사제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개혁교회는 평신도의 만인사제직을 인정하고, 그들이 세상의 한 복판에서 복음을 삶으로 증언하는 하나님의 일꾼의 책임을 당당히 감당하도록, 우리의 평신도들을 격려하고, 다시 깨우시기를 부탁드립니다. 그들 평신도사제들이야말로 이시대의 모든 직업 활동을 통하여, 우리 사회를 복음으로 이끌어가야 할 기독인리더 들입니다. 생각하면, 이들 평신도야말로 우리 사회에서 복음을 전파하며,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해야 할 하나님의 일꾼들이 분명합니다. 이와 같이 그들이 이웃사랑과 사회개혁과 자연생태계보호 등의 사회윤리적인 책임을 감당할 때, 그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요, 진리의 빛을 비추는 예수님의 제자의 모습이며, 바로 지금도 세상을 다스리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통치를 나타내 보이는 ‘영광스러운 일’이 분명하다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간 상실된 한국교회의 거룩성과 신뢰성을 회복시켜야 할 주인공들도 분명히 이들 평신도사제들이라는 사실을 우리 모두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넷째, 개혁교회는 모든 평신도들이 그리스도복음의 총체적인 전인구원신앙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이 시대의 복음사역에 헌신하는 신앙실천의 인물들이 되도록, 그들에게 신앙의 본질인 믿음, 소망, 사랑을 일깨우는 성경교육의 책임을 짊어져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먼저 목사님들이 공부하셔야 합니다. 그것이 배우며 목회하고, 목회하면서 배우는 개혁교회의 목양적인 책임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믿음, 소망, 사랑의 신학입니다. 이것은 기독교신앙의 본질에 관한 것입니다. 신앙의 본질인 믿음, 소망, 사랑은 하나님의 구원계시에 대한 인간의 반응이며, 살아있는 신앙의 참된 모습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은 인격적인 기독신앙인의 모습이 분명합니다. 개혁교회신자들을 이러한 신앙적인 삶으로 응답하며 교회와 세상을 섬기며 사는 복된 자들이 되도록 도와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기독교신앙의 본질적인 모습이 얼마나 믿음, 소망, 사랑에 연결된 것인지를 올바르게 이해하고, 그것을 일깨우는 개혁교회의 목회자들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존경하는 목사. 장로여러분, 기독교신앙은 이론이 아니라, 행동하는 실천입니다. 그 때문에 사도바울은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어야 한다”(고전13: 13)고 하였고,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했습니다. 살전1:2-4절에서도, 바울은 복음전도로 인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된 데살로니가의 성도들을 기억하면서 “너희의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라는 3가지 모습을 하나님께 감사한다고 하였고, 이 세 가지가 하나님의 사랑받는 증거이며, 또한 택함 받은 증거라는 사실도 밝혀주었습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히10:19-25에서는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자....소망을 움직이지 말고 굳게 잡아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으로 격려하며, 모이기를 페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고, 교회를 통한 목양사역이 ‘믿음, 소망, 사랑의 신학과 얼마나 연관된 것인지를 분명히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바울의 믿음 소망 사랑의 신학을 가장 잘 계승했던 인물은 교부시대의 유명한 신학자 어거스틴(A.Augustinus)입니다. 그는 “하나님께 경배할 때, 믿음, 소망, 사랑으로 찬양하라”고 예배의 본질적이며, 실천적인 의미가 무엇인지를 일깨워주었고, 하나님의 말씀의 설교도, 여기에 목표를 두라고 일러주었습니다. 그가 쓴 ‘요리문답교육지침서’(Enchiridion)에서는 ‘믿음’을 일깨우려면 ‘사도신경’을, ‘소망’을 일깨우려면 ‘주기도문’을, ‘사랑’을 실천케 하려면, ‘십계명’을 가르치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어거스틴 이래로, 믿음, 소망, 사랑은 요리문답교육에서 언제나 사도신경, 주기도문, 십계명과 연결하여 교회신앙교육의 근본토대로 삼았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은 이러한 요리문답교육(루터/칼빈)을 그대로 계승하여, 교회신앙교육의 훌륭한 전통을 남겼습니다. 특히 칼빈은 그것을 중심하여 매 주일 오후예배에서 반복적으로 행하여야 할 교리설교의 모범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17세기, 보헤미아-모라비아형제연합교회의 마지막 감독이었던 코메니우스(J.A.Comeni- us)는 그의 유명한 책 ‘대교수학24장’에서, 성경공부의 목표는 믿음, 소망, 사랑에 두어야 할 것을 역설하였습니다. 그는 성경 66권의 내용이 이 세 가지와 관계되지 않는 것이 하나도 없다고 말하면서, 올바른 기독교신앙의 본질적인 모습은 믿음, 소망, 사랑으로 응답하는 삶이어야 함을 강조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에 나타난 구원계시의 핵심이요, ‘정경 중에 정경’(Canon im Canon)이라고까지 말했습니다. 존경하는 우리 개혁교회 지도자여러분, 이러한 신앙본질의 이해를 종합할 때, 믿음, 소망, 사랑이야말로 바울의 구원신학의 핵심이며, 교회를 통하여 실현해가야 할 실천신학(성경교육)의 근본토대요, 전도신학의 토대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믿음, 소망, 사랑의 신학은 우리 목사님들이 재교육과정을 통하여 새롭게 ‘오리엔테이션’ 해야 할 중요한 구원신학과 목회신학의 핵심주제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이러한 실천적인 신앙의 핵심사상이 우리 개혁교회에 와서 지금 실종된 모습입니다. 왜냐하면 그동안 오직 믿음으로 구원 얻음의 교리만 강조하고, 구원신앙의 실천적인 삶의 모습이 어떠해야 할지를 분명히 깨우쳐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믿음을 행함으로 보여주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말만 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말만하고, 행동하지 않는 보수주의는 포기하기 바랍니다. 오히려 말보다 믿음을 행동하며, 실천하는 보수주의가 되기 바랍니다. 또한 구원 얻음의 실체가 믿음의 근거와 열매로서 이 소망과 사랑과 얼마나 깊이 연관된 것인지를 아무도 제대로 알려주지 않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제 믿음, 소망, 사랑의 신학은 오늘날 우리 개혁교회가 짊어져야 할 성경교육의 실제적인 목표이며, 내용이며, 수단이며, 또한 복음전도와 목회사역을 꽃피게 할 실천신학임을 깨닫게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우리 목사님들이 목회자재교육과정을 통하여 새롭게 오리엔테이션을 해야 할 구원신학과 목회신학임을 분명히 알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존경하는 목사님과 장로님들, 믿음, 소망, 사랑의 신학이야말로 오늘 우리 개혁교회를 다시 일으킬 수 있는 구원신학이요, 전도신학이며, 목회신학이요, 실천신학의 근본토대라는 사실을 잊지 않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개혁교회는 믿음, 소망, 사랑을 성경교육의 전체목표로 삼고, 성도들의 신앙 일깨우기에 전력을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우리 목사님들은 성경본문을 해석하고 설교할 때도, 믿음, 소망, 사랑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설교하는 도구로 삼기 바라며, 그것을 주일예배의 목표로 삼아, 그러한 구도를 따라 예배를 시행할 때, 더 이상 은혜를 끼쳐보려고 갖은 방법으로 애쓰지 않아도, 말씀을 통하여 역사하는 성령의 은혜를 회중은 크게 경험하리라 확신합니다. 이러한 모든 사실을 생각할 때, 우리 개혁교회의 막중한 책임 중에 하나가 무엇인지 아세요? 역시 그것은 목회자재교육을 실천하는 일입니다. 한국교회를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은 목사님들이 다시 진리 앞에 머리를 숙이고, 겸손히 복음을 배우는 길이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 지금 한국교회 저변 곳곳을 한번 돌아보세요! 더 이상 한국교회가 이 상태로 주제 앉게 할 수가 없다는 심정으로, 우리 젊은 목회자들이 그룹별로 모여서, 스터디 하는 모임이 자발적으로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설교크리닉’이란 이름으로, ‘율법과 복음’이란 주제로 구원론을 새롭게 공부하고 있습니다. 옛날, 신학교에서 배운 것들이 오늘 목회현장에서 아무런 효력을 발휘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목사님들이 스스로 몸부림치고 있습니다. 존경하는 목사님들, 우리 개혁교회는 지금 뭐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미안합니다만, 총회목회대학원이 원래 우리 총신교단 목회자재교육기관으로 설립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최근에 운영되는 모습은 겨우 타 교단목사 본 교단 가입시키는 편목교육기관으로 전락된 모습입니다. 이전 총장재임 시에 제가 목사재교육과정을 과감하게 개선하여 우리교단목사님들이 적극 참여하도록 해보자고 운영위원회에서 수차례 건의했습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제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바라기로는 앞으로 총신 졸업 후, 7년이 지나면 반드시 목회자재교육과정에 다시 모여, 적어도, 1개월 정도의 연수과정을 실시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장로님들을 위한 지도자연수과정도 제공해야 합니다. 총회가 너무 비대하여 움직이기 힘들면, 각 지역노회들이 서로 연합하여 목회자재교육과정을 자체적으로 각각 운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제발 많은 비용을 지불해야 하는 미국의 무슨 디민 학위프로그램과는 절대로 연계시키지 마시고, 목사와 장로의 직분명칭이 그 어떤 학위 명칭보다 더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최고의 성직임을 기억하시며, 목양사역에 필요한 목회정보와 성경연구와 목회전략과 리더십을 훈련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존경하는 목사님들, 제가 너무 많은 말을 한 것 같습니다. 다만 저의 충정어린 심정을 헤아려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모두 부정할 수 없는 한 가지는, 이 시대는 배우면서 목회하고, 목회하면서 배우는 평생교육의 시대라는 사실입니다. 지도자 여러분, 시간을 선용하여, 그간 잘못배운 구원론이해를 새롭게 회복하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 개혁교회를 살리는 일에 앞장서게 되시기를 간곡히 부탁드리는 바입니다. 그리고 기독교신앙의 본질인 믿음, 소망, 사랑 중에, 특히 이‘소망’과 관련하여 한 가지 첨언한다면, 오늘날 한국교회가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으면서, 루터의 칭의 론에 대한 비판이 강하게 제기되고, 믿음대로 행하지 않는 한국교회의 신앙태도가 큰 문제로 지적되고 있습니다. 어떤 신학자는 루터의 칭의론이 한국교회에서 값싼 은혜가 되었다고 비판하면서, 언약백성들이 율법을 행하지 않으면, 그 칭의는 마지막 심판 날까지 유보된다는 주장을 펴기도 합니다. 생각하면 이러한 주장은 이웃사랑에 너무 인색하고, 행동실천이 없었던 한국교회의 이기적인 신앙을 되돌아보게 하는 도전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주의해야 할 것은 선행(사랑)만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소망을 함께 말해주지 않는다면, 이신칭의의 은혜는 또다시 왜곡될 위험에 처하게 될 것입니다. 그 이유는 선행만을 지나치게 강조할 때, 선행의 공허함의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데, 그 문제는 선행의 대가요구에 대한 질문으로, 그것은 세상의 물질적인 보상이 아니라, 언제나 그리스도가 약속한 하늘의 상급에 있음을 전제해야하기 때문입니다(창15:1,17:1,마6:9-13;계20:6). 그러므로 개혁교회의 구원신앙은 믿음과 선행만을 강조하는 이원적인 사고를 뛰어넘어, 믿음, 사랑, 소망의 올바른 삼각균형과 조화를 가진 전인격적인 삶의 모습이 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그 때문에 개혁교회는 그러한 믿음, 소망, 사랑의 신학에 바탕을 둔 신앙인물을 길러내는 성경교육과 신앙교육의 책임을 지금 짊어져야 합니다. 이러한 책임을 잘 감당할 때, 현재 직면하고 있는 한국교회의 복음전도와 목회사역의 한계가 거기서 극복될 것이며, 한국교회가 새롭게 부흥되는 시대로 도약하게 되리라 확신합니다. 마지막, 다섯 번째, 개혁교회의 책임은 한국교회연합운동의 과제를 기꺼이 짊어지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의 교회는 지역에 세워진 건물로서의 교회에 한정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언약백성들의 영적인 신앙공동체의미가 더 귀중합니다. 칼빈은 가시적인 교회와 불가시적인 교회를 구별하면서, 이러한 영적인 의미를 가진 불가시적인 교회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이러한 시각에서 보면, 지금 한국교회의 나누어진 모습인 교단과 교파의 의미는 매우 좁은 교회관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전 세계의 모든 신자들이, 한 형제자매임을 인정해야하며, 오늘날엔 성도의 교제(Koinonia)가 교파를 뛰어넘어 전 세계에로 향해야 할 것입니다. 생각하면, 칼빈은 종교개혁자들 가운데서 교회연합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고, 그 시대적으로 연합을 가장 많이 힘썼던 대표적인 인물입니다. 그러므로 그분의 정신을 따르는 우리 개혁교회는 한국교회의 연합을 위해서 일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합니다. 그러한 행동이 개혁교회 본래의 모습이요, 책임입니다. 이제 교파를 뛰어넘어 한국교회가 연대하여 이 시대에 주님이 원하시는 일을 책임지는 역할이 필요합니다. 그동안 KNCC는 우리사회의 정치민주화를 이루는 일에 큰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지나친 정치신학과 종교다원주의적인 신학고수로, 한국교회의 다수인 보수그룹과 연대하지 못해서, 그 역할이 끝난 것 같습니다. 한기총은 미안합니다만, 그동안 보수교회를 결집시키는 역할을 어느 정도 수행하다가, 이상하게도 교회의 거룩성과 권위를 상실한 불신 받는 종교단체로 전락된 모습입니다. 다행히도 최근에 ‘한국교회총연합회’란 새로운 연합기구(한교총)의 탄생소식에 저는 개인적으로 감사드리고 싶습니다. 7개 기존교단들이 그들 각각의 역사와 현재를 존중하고, 이 시대적으로 요구되는 더 큰 주님의 일들에 힘을 합하기 위해 연대하게 된다니, 참으로 기대됩니다. 그간 한국교회는 삼삼사오로 분리되어 서로 경쟁하다보니, 힘을 잃고 있었고, 정치적이며 사회적인 문제들에 한목소리로 대변하는 역할을 하지 못해, 우리사회의 혼란에 기여하는 모습이었습니다. 이제 한국교회가 한 교파로의 통합이 아니라, 독립된 각각의 교단을 존중하고, 하나의 협의기구로 연대하면, 우리사회가 분열되지 않고 통합되는 사회적인 안정에도 크게 기여하게 될 것이며, 남북통일에도 기여하리라 기대합니다. 참으로 한국교회가 대 사회, 대 정부, 대 북한, 대 국제관계에서 한 목소리를 내는 역할을 잘 수행해 주기를 바라며, 그렇게 할 때, 우리사회의 한국교회에 대한 불신도 곧 회복될 것입니다. 물론 신학정체성이 빈번히 질문될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념적으로 주장되었던 ‘개혁주의신학’이 아니라, ‘성경적인 개혁신학’과 복음적인 개혁교회의 전통이 한국교회연합에 분명한 빛을 발휘하게 되리라 확신합니다. 이러한 모습이 또한 한국교회 전체를 품는 장자교회의 모습일 것으로 기대합니다. 이제 강연을 마치려 합니다. 존경하는 우리 개혁교회 목사님과 장로님 여러분, 아무쪼록 그간 우리의 참으로 좁아진 이념신학과 구원론과 직분론과 성경교육(믿음, 소망, 사랑의 신학)과 교회론의 신학적인 사고와 이해의 폭을 활짝 넓혀서, 이 시대적으로 요구되는 개혁교회의 막중한 복음적인 과제와 책임을 잘 감당하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끝까지 경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 G.MISSION
    • G.SERMON
    2017-09-16
  • 총회 지도자와 적폐
    어린이 주일 김영우 시무하는서천읍교회 가기는 했을까 갔다면 무엇을 설교했을까 작년 부활 주일에도 총신 총장은 이중직에 해당되지 않는다면서도시무교회에 나타나지도 않아 그는 그 다음 주일 서천읍교회에 나타나 그는 멜 깁슨의 영화 ‘Passion of Christ’‘그리스도의 열정’이라고 번역하며 그리스도의 열정을 가져야 한다 열변 그러나 허활민 목사는 주신교회에 거르지 않고 은혜로운 믿음의 설교를 쉽고 바르게 전해하나님이 주신 명품 중의 명품인 우리 자녀 내 생각 내 방법 내 교육으로 양육하지 말고 하나님 말씀이 명하신 대로 우리가 자녀를 축복하고 하나님에게 맡겨야 제19대 대선에서 문재인 대통령 찍은 이유‘적폐청산·개혁·쇄신’을 주요 선택 이유로 꼽아 총신의 김영우 위임된 총장 직무 총회의 공공선이 아니라 사적으로 사용 5월 7일 오전 11시 대선 후보와 그 선거원들은 연고를 따라 전국 큰 교회들에 얼굴을 내밀고 표를 구하는 마지막 날이었다. 5호선 개롱역 3번 출구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와 10분 거리를 걸어 주신교회에 들어섰다. 주일오전예배는 어린이주일을 지켰다. 담임 허활민 목사가 성경 본문 마가복음 10:16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를 봉독했다. 할렐루야찬양대 찬양 후 허활민 목사가 ‘아이들을 축복합시다’ 제목의 설교를 시작했다. “어떤 목사님이 인도의 한 마을을 방문했는데 예수님을 너무 잘 믿고 있었다고 합니다. 마을의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잘 믿고 있는 사실을 보고 의아해서 방문객이 물었습니다. ‘어떻게 이 마을에 복음이 전파되었습니까.’ 한 마을 사람의 대답이 ‘20년 전 선교사님이 마을에 들어와 전도하면서 작은 신구약 성경 한 권을 주고 간 것이 마을 복음화의 기초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 목사님에게 그 성경을 보여주는 데 오래되어 낡은 표지를 들춰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20년 전 자기 교회 어린아이의 사인이 들어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의 작은 헌신이 그 마을에 복음을 전하는 씨앗이 되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리아이를 통해서도 큰일을 행하시는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겨자씨 같이 작지만 그게 심겨져 싹이 나면 새가 깃들일 나무가 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썩어 죽으면 30배 60배 100배의 놀라운 결실이 맺혀진다는 겁니다. 오늘 우리 주일학교 어린아이를 통해 가정의 어린 생명을 구원하는 역사가 우리 교회에서 일어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그 선물을 통해 주일학교 아이들을 통해서도 우리 가정의 어린 생명을 통해서 그러한 역사가 우리 교회에서도 일어날 수 있기를 소망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그 선물을 통해 그 선물이 우리의 교회를 복되게 하고 자라고 성장할 수 있게 하기를 바랍니다. 20년 후 우리 교회는 근방의 생명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이룰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오늘은 어린이 주일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아름답고 소중한 존재가 있다면 아이들이고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사명이 있다면 아이들을 잘 기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면서 그 아이들을 귀히 여기시고 축복해 주셨습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며 우리가 아이들을 잘 키워야합니다. 어떻게 해야 잘 키우겠습니까. 첫째 자녀를 예수님께로 인도합시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13절에 보니. ‘사람들이 예수님의 만져주심을 바라고 어린아이를 데리고 오매’라고 말씀합니다. 그 당시는 위인이나 훌륭한 사람들에게 아이를 데려와 축복받는 풍습이 있었습니다. 물론 이러한 풍습은 자기 자녀들이 그 사람과 같이 훌륭하게 되고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 풍습대로 사람들은 아이들을 예수님께로 데려왔습니다. 그것은 만져주시기를 즉 안수해 주시기를 바란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아이들이 주님을 믿고 영생 얻기를 바랍니다. 그렇다면 아이들이 어려서부터 주님의 일을 가장 으뜸으로 삼게 하기 위해 주님께로 인도해야하고 그 행할 길을 가르치는 것이 부모의 도리입니다. 잠언 22:6에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말씀합니다. 아이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교육입니다. 사람은 교육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가능성의 존재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면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율법 하나님 말씀입니다. 하나님 말씀은 우리 삶의 법도이기 때문에 마땅히 가르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율법 하나님 말씀의 내용이 무엇입니까. 어떤 율법사가 에수님에게 그것을 물었습니다.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가장 크냐고 물었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마태복음 22:37에서 40절에 무어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우리가 마땅히 가르쳐야 할 것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사탄은 선악과를 따먹게 하면서 하나님처럼 될 수 있다고 유혹했습니다. 그 말에 아담과 하와가 사탄의 유혹에 넘어갔습니다. 그들이 선악과를 따먹고 범죄하게 됩니다. 이때부터 우리 인간의 목적은 하나님이 되지 아니하고 인간 자신이 되었습니다. 나 자신이 삶의 목적이 되는 순간 그 삶은 나락의 길을 걷게 됩니다. 하나님이 내 욕심을 채우는 수단이 되고 사람들은 내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이기고 눌러야만 하는 경쟁 상대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아이들에게 하나님을 가르쳐야 하고 하나님이 우리의 주인이심을 가르쳐야 하고 하나님 사랑을 어릴 적부터 가르쳐야 그 아이의 장래가 하나님의 축복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하여 하나님께 시간을 바쳐 드리는 예배와 하나님께 재물을 드리는 헌금을 어릴 적부터 잘 가르쳐야 하는 겁니다. 아무리 바빠도 거룩한 주일을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을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인생의 순서에 있어 뒤로 밀려 하나님이 주인 되지 못하는 일이 우리 자녀에게 생기지 않도록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돈을 열심히 많이 버는 게 잘못된 거 아닙니다. 돈 많이 벌어야 합니다. 문제는 돈 자체가 아니라 돈의 방향과 목적입니다. 돈의 목적과 방향이 하나님께로 정해져 있다면 그 돈은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어릴 적부터 십일조와 헌금을 가르쳐야 합니다. 또한 이웃 사랑도 가르쳐야 합니다. 공부하고 돈을 버는 목적이 나의 야망과 욕심을 채우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 하나님과 이웃을 섬기기 위해서 애를 쓰고 섬겨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릴 때부터 아이가 예수를 나의 구주로 믿을 수 있도록 본을 보이며 마땅히 행할 것 즉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행하며 살아서 아이들에게 마땅히 행할 것을 가르칠 수 있는 어른이 되는 역사가 있기를 바랍니다. 진정코 우리가 살아가면서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하나님을 이렇게 사랑하고 이웃을 이렇게 사랑하는 그러한 마땅히 행할 것이 내게서 물려진다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보고 축복해주실 것입니다. 둘째 아이들을 축복해야 합니다. 16절에 ‘그 어린 아이들을 안고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많은 아이들을 일일이 품에 안고 축복하셨습니다. 이삭이 아들 야곱을 불러 축복했습니다. 창세기 28장 1절에 ‘이삭이 야곱을 불러 그에게 축복하고’라고 말씀합니다.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삭은 아들 야곱을 축복했습니다. 이삭은 약속과 축복의 아들인데 그렇게 되기까지는 그냥 된 거 아니지요. 큰 시험의 과정을 거칩니다. 이삭이 열다섯 살 때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모리아 산에 데리고 가서 번제로 드리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 명령이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명령하시기에 순종했을 따름입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칼을 들어 바치려 할 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창세기 22장 11절에서 12절에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네 생각대로 네 욕심대로 만들려고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우리가 이 세상 살아갈 때 내 생각대로 해서 일이 되는 게 아닙니다. 여러분 피카소의 그림에 피카소를 도와준다는 생각으로 덧칠을 한다면 어떻게 됩니까. 그 그림 망가지는 겁니다. 아이에게 내 손을 대 도우려고 하지 말고 주인이신 하나님에게 자녀를 맡기고 축복하라는 겁니다. 이 생명이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내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나의 모습 이대로 살아가게 하소서 기도하는 부모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모든 삶 속에 내 생각 내 손으로 키우려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우리의 소원 속에 내 자녀의 삶을 내 손으로 그리고 조각하려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이 세상을 통해서 2017년 아린이 주일을 맞이해 내 자녀를 하나님께 맡길 수 있도록 하나님이 맡으시도록 그를 축복하는 부모될 수 있도록 소원하시기 바랍니다. 스티브 잡스가 어린 나이에 미혼모 부모로부터 버림을 받았습니다. 입양이 되어 양부모를 만나 성장하게 되었는데 어릴 때의 그 사실을 알고 양어머니에게 울면서 물었습니다. ‘내 부모가 나를 버렸나요.’ 그때 양어머니가 대답했습니다. "아니다 너를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에 맡기신 거야. 우리가 복을 받아서 너를 새로 얻은 거야." 이 말에 스티브 잡스가 제대로 성장하게 되어 우리가 쓰는 핸드폰을 만드는 애플이라는 세계적인 기업이 만들어지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진정코 사랑하는 나의 자녀들이 정말 축복을 받고 자라는 아이는 부모가 축복하는 대로 하나님께서 축복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면서 자녀를 양육하시기 바랍니다. 내 자녀가 그렇게 자랄 수 있도록 소원하시기 바랍니다.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번제로 바칠 때 하나님께서 무어라 말씀하십니까. ‘네 손을 대지 말라’는 겁니다. 하나님이 주신 명품 중의 명품인 우리 자녀를 내 생각으로 내 방법으로 내 교육으로 양육하지 말라는 겁니다. 하나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 말씀이 명하신 그대로 자녀를 축복해야 될 줄 믿습니다. 우리 자녀가 어릴 때부터 예수 제일주의로 살아가는 생명으로 바꾸십시다. 우리 자녀들은 항상 주의 테두리 안에 주의 말씀 속에 사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자녀가 내 손 내 생각으로 자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를 세우시는 그 은혜 그 기쁨이 충만할 수 있도록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그 어린이 주일 김영우는 자기가 시무하는 서천읍교회에 가기는 했을까. 갔다면 무엇을 설교했을까. 작년 부활 주일에도 총신 총장은 이중직에 해당되지 않는다며(교수는 해당되지만) 사임하지는 않으면서(총회 정치와 총대직 유지 목적으로) 자신의 시무 교회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는 그 다음 주일에 서천읍교회에 나타났다. 그리고 그는 멜 깁슨이 주연 감독 제작한 영화 ‘Passion of Christ’를 ‘그리스도의 수난’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열정’이라고 번역하며 부활의 신앙을 가지려면 그리스도의 열정을 가져야 한다고 열변을 토했다. 그러나 허활민 목사는 자신의 시무교회 주신교회에 거르지 않고 은혜로운 믿음의 설교를 쉽고 바르게 한다. 제19대 대통령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가 홍준표 자유한국당 후보를 약 557만표 차로 꺾고 대통령에 당선됐다. 이번 대선의 총 투표율은 77.2%로 집계됐으며, 지역별로는 광주가 82%로 가장 높았고, 제주가 72.3%로 가장 낮았다. 문재인 대통령은 10일 국회 중앙홀에서 열린 취임선서식에서 “제 가슴은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열정으로 뜨겁다”며 “이번 선거에서는 승자도, 패자도 없다. 우리는 새로운 대한민국을 함께 이끌어가야 할 동반자”라고 강조했다. 제19대 대통령 선거에서 문재인 대통령을 찍은 유권자들은 ‘적폐청산·개혁·쇄신’을 주요 선택 이유로 꼽았다.최근 우리 교단은 총회의 공공성 쇠락을 경험하고 있다. 총신의 김영우 사태를 통해 우리 목사와 장로 총대들은 위임된 총장 직무를 총회의 공공선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적으로 사용한 김영우에 분노하지만 좌절감도 느꼈다. 그의 때는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 가운데 반 때인 것 같고 결국 말씀대로 ‘심판이 시작된즉 그는 권세를 빼앗기고 끝까지 멸망할’ 것이다. 그 선봉에 하나님의 뜻에 따라 총회 지도자 허활민 목사가 서리라 믿는다. 흔히 ‘군주론’은 지도자 개인의 권력 획득과 유지를 위한 저서로만 이해돼왔다. 하지만 마키아벨리는 국가존립의 위기 상황 속에서 국가 공동체를 부강하게 할 지도자를 위해 군주론을 저술했다. 군주론의 마지막 장에 나오는 말이다. “새로운 군주에게 새로운 법과 제도를 창안하는 것처럼 커다란 명예를 가져다주는 일은 없다.” - 마키아벨리 ‘군주론’ 26장 당시 이탈리아는 분열돼 있었다. 그 기회를 틈타 유럽 강대국들은 이탈리아를 침입했다. 통일되고 강력한 나라 건설이 당시 이탈리아 지도자의 과제였다. 위에 인용한 구절에 이어지는 구절은 이렇다. “이탈리아에서 개개인들에게는 탁월한 역량이 잠재해 있는데 지도자들은 이러한 역량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 결투나 적은 수의 사람들이 싸울 때 이탈리아인들의 힘 능력 및 재주가 얼마나 탁월한가를 보라. 그러나 일단 군대라는 형태로 싸우는 일에서는 결코 두각을 나타내지 못한다. 이 모든 것은 지도자의 유약함에서 비롯된다.” 최근 우리 교단은 총회의 공공성 쇠락을 경험하고 있다. 총신의 김영우 사태를 통해 우리 목사와 장로 총대들은 위임된 총장 직무를 총회의 공공선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적으로 사용한 김영우에 분노하지만 좌절감도 느꼈다. 사적 영역이 공적 영역을 대체하면 그 사회는 혼란에 빠지게 된다. 소수의 권력과 경제를 쥔 사람들만 행복하고 나머지 다수는 좌절과 실망에 빠지게 된다. 공동체의 붕괴는 이렇게 시작된다. 자유와 법 앞의 평등을 유지하는 공공성이 무너진 사회는 시민들의 반목과 질시 속에 속빈 강정이 돼버린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새로운 지도자에게 법과 제도의 정비를 통해 공공성의 회복을 바랬다. 그것만이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는 길이기 때문이었다. 지금 우리 교단의 공공성 회복을 위해 앞장 서야할 사람들이 적폐(積弊)의 온상이 되고 있다. 본연의 임무와 직무를 남용하거나 기피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때 허활민 목사의 지도력에 기대를 거는 소망이 내 소견으로는 클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제19대 대통령 선거에서 문재인 대통령을 찍은 유권자들은 ‘적폐청산·개혁·쇄신’을 주요 선택 이유로 꼽았듯이 허활민 목사만이 총회와 총신의 ‘적폐청산·개혁·쇄신’을 이룰 수 있는 총회의 최상의 적임자이기 때문이다. 그 앞에 어려운 장벽들이 있지만 결국 김영우를 비롯한 적폐 세력들은 믿음과 지략에 뛰어난 그로 말미암아 청산되고 말 것이다. 김영우가 전성기 때 ‘한 때 두 때 반 때’라며 비아냥조로 말하던 이런 말씀이 있다. 그가 장차 말로 지극히 높으신 자를 대적하며 또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도를 괴롭게 할 것이며 그가 또 때와 법을 변개코자 할 것이며 성도는 그의 손에 붙인바 되어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를 지내리라 그러나 심판이 시작된즉 그는 권세를 빼앗기고 끝까지 멸망할 것이요 다니엘 7:25-26 그의 때는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 가운데 반 때인 것 같고 결국 말씀대로 ‘심판이 시작된즉 그는 권세를 빼앗기고 끝까지 멸망할’ 것이다. 그 선봉에 하나님의 뜻에 따라 총회 지도자 허활민 목사가 서리라 믿는다. 2017-05-30
    • G.MISSION
    • G.SERMON
    2017-05-30
  • 한국교회 130년 좌표
    한국교회는 세계 교회가 놀랄 만큼 괄목할만한 성장을 했다. 그것도 비교적 짧은 기간 안에 이루어진 것이어서 많은 주목의 대상이 되어 왔다. 이 글에서는 1945년 해방 이전의 한국교회의 성장에 관해 간략하게 다루고 해방 이후의 한국교회의 성장과 문제점에 관해서는 장로교 중심적으로 다루고 앞으로 나아갈 좌표를 설정해보려 한다. 1. 초기 한국교회의 성경 중심적 기초 한국에 복음이 들어온 해를 1884년으로 잡는다. 그 이유는 최초의 체류 선교사인 의사 알렌(Horace N. Allen)박사가 1884년 9월 20일에 인천에 도착했고, 이틀 후 1884년 9월 22일에 서울에 도착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좀 더 중요한 시점은 장로교 선교사인 언더우드 목사(Rev. Horace G. Underwood)와 감리교 선교사인 아펜젤러 목사(Rev. Henry G. Appenzeller)가 도착한 1885년이다. 두 선교사는 1885년 4월 5일 부활절 날 아침에 인천항에 도착했다. “훗날 감리교인들 이나 혹은 장로교인들이 자기 교파가 먼저 도착했다고 아무도 말할 수 없게 하기 위해 그들이 손을 잡고 함께 해안으로 뛰어 내렸다는 이야기는 매력 만점의 이야기이긴 하지만 사실적인 근거가 있는 것 같지 않다. 실제로 제일 먼저 해안에 발을 디딘 사람은 아펜젤러 부인이었다.” 초기 한국에 온 선교사들은 중국(Cheefoo, China)에서 오랫동안 선교활동을 해 온 요한 네비우스(Rev. John Nevius)의 선교활동 원리를 수용하여 한국에서도 적용했다. 네비우스 원리는 일반적으로 “3자 원리”(three self principles)로 알려져 왔다. 그것들은 “자전”(self-propagation) “자치”(self-government) 그리고 “자립”(self-support)이다. 초기 선교사들은 네비우스 선교활동의 방법을 “오랜 기도와 심사숙고 끝에” 한국교회의 선교정책으로 수용했다. “언더우드 박사는 오랜 기도와 심사숙고 끝에 주로 우리는 네비우스 방법을 수용하도록 인도 받았다”고 전한다. 네비우스(Nevius)선교정책은 사실상 성경공부가 강조된 정책이었다. “진정한 핵심은 성경공부 제도에 있었다. 이 제도는 모든 성도들에게 성경을 공부하도록 격려했으며 성경공부에서 배운 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할 수 있도록 격려했다.” 곽안련은 네비우스 방법의 성공 비결은 자전 자치 자립이상으로 교회 사역의 각 분야에서 성경을 보편적으로 사용한 것이라고 강조한다. 그는 한국교회가 “성경 위에, 단순한 성경 본문 위에 건립되었다”고 확신한다. 초기 한국교회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고 성경에 권위를 부여했다. 성경은 초기 한국교회 성도들의 신앙과 삶에 확실한 기준이 되었다. 초기 한국교회를 섬겼던 선교사들이 그 당시 한국교회의 상황을 평가한 것은 한국교회가 얼마만큼 성경중심으로 성장해 왔는지를 잘 정리해 주고 있다. “물론 성경 그 자체가 모든 나라에서와 마찬가지로 복음화에서 가장 두드러진 요소이다. 그러나 한국의 성경은 좀 독특한 위치를 차지해 온 것이 분명하다... 성경공부와 성경공부 반은 한국교회의 발전에서 가장 독특하고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그것들 속에서 신앙과 지식의 기초를 놓아 왔다”(S. A. Moffett, Bible Society Record of ABS, 1916. 11., p.216). “성경은 한국에서 제일 공부가 많이 되는 책이다. 교회생활의 매우 뚜렷한 특징은 성경공부에 있다. 성경공부 반은 겨울에 열흘에서 2주일 동안 중심지에서 열린다. 겨울마다 족히 12만 5천명의 사람들이 성경을 공부하기 위해 모이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 목적은 단지 개인적인 유익을 위해서가 아니고 배운 것을 출신 교회에 전달해 주기 위한 것이다”(Annual Report of NBSS for 1917, p.32). “한국교회의 주목할 만한 성장과 발전은 성경을 체계적으로 가르친 때문이라는 것이 충분히 관찰한 사람들의 확신이다”(Annual Report of NBSS for 1930, p.104). 그리고 초기 한국교회의 성경 강조는 그들의 신앙의 삶의 전 부분에서 나타나고 있다. 한 선교 보고는 "성경 자체가 물론 다른 모든 나라에서처럼 복음 전도의 가장 큰 요소로 두드러지게 부각되어 왔지만 한국의 사역에서는 이 성경이 유달리 독특한 위치를 점유해 왔다. 한국교회의 능력, 영성, 기도에 대한 큰 믿음, 후한 기부정신은, 전교회가 성경 지식에 깊이 젖어 있다는 사실로부터 나오고 있다”(북장로교 선교회 25주년 보고서, p. 17)고 평가한다. 이처럼 초기 한국교회는 성경을 중심으로 성장해 갔다. 성경말씀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생활한 초기 한국교회는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영적인 성장과 함께 숫자적인 성장도 급속하게 이루어졌다. 2. 한국교회 성장에 기여한 몇 가지 특이한 현상 (1) 천년기 전 재림설과 한국교회 성장 복음이 한국에 들어온 이후 한국은 대단히 어려운 시기에 처해 있었다. 한반도는 19세기에 이르기까지 중국과 일본, 그리고 러시아 사이에 계속적인 충돌의 현장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그리고 1910년 일본에 합병된 후 36년간 계속적인 억압과 핍박 속에 있었다. 일본으로부터 해방 이후도 1950-53년 사이 한국동란과 계속되는 군사 구테타 및 군부 통치는 한국 내에서의 고난과 핍박이 계속되었음을 증거 한다. 새 브리태니카 백과사전은 “정부가 1970년대와 1980년대를 통해 신문과 방송을 철저하게 조종했다. 그러나 1900년대에 들어오면서 남한의 정치적 민주화는 신문 방송에 상응하는 자유를 가져다주었다”(The New Encyclopaedia of Britannica, p.960)라고 기록한다. 대략적인 역사적 사건만 열거해도 복음의 전파가 고난의 때에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의 과거 역사는 복음이 이 땅에 들어 온 이래 이런 저런 모양으로 복음 전파와 한국교회에 시련의 과정이었음을 증거 한다. 이와 같이 과거의 한국 역사는 수난의 역사였다. 적어도 한국의 토양은 복음 전파에 호의적인 것은 아니었다. 김영재 교수는 복음이 전파된 이후의 한국의 상황을 천년왕국 신앙과 연계하여 다음과 같이 요약한다. “천년왕국 신앙과 고난을 견딘 한국교회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을 당시부터 6.25동란을 겪을 때까지 줄곧 불안한 사회적인 상황에서 살아왔으며, 핍박 하에서와 고난 속에서 살아 왔다. 그러므로 불안 속에서 안정을 찾는 백성들은 쉽게 내세 지향적인 종말신앙을 복음으로 받아 들였다”(김영재, 「한국기독교의 재인식」 p.240).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이러한 종말론적인 신앙(전천년설)은 고난을 당하는 성도들에게 위로가 되었고, 특히 신사참배 반대자들에게는 옥고를 이기고 순교의 길을 갈 수 있도록 위로와 활력을 불어 넣어 준 신앙이 되었다”(Ibid). (2) 교회 분열과 한국교회 성장 김의환 박사는 그의 저서 「기독교회사」의 한 장에서 “한국교회의 부흥과 분열”을 다룬다(김의환, 「기독교회사」 pp.405-458). 김의환 박사는 I. 한국교회의 부흥 요인을 1. 외적인 요인들과 2. 교회의 진취적 정신으로 나누고, 교회의 진취적 정신에서 (1) 대부흥운동 (2) 전도 집회들 (3) 네비우스 선교방법 그리고 (4) 군복음화 계획을 열거한다. 그리고 II. 분열의 원인으로서 신학 논쟁에서는 자유주의 신학의 영향으로 한국 장로교회가 어떻게 분열했는지를 기술하고 있다. 처음 장로교 분열은 일본의 한국 점령과 무관하지 않다. 일제는 한국 교회에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신사참배의 문제는 결국 교회를 분열하는데 일조를 했다. “일본인들은 중국과 전쟁을 하고 있을 당시 1937년에 한국 기독교인들을 기밀하게 감시하고 있었다. 1938년에 정부는 모든 교회가 그들의 예배에 참석하기 전에 먼저 신사에 참배해야한다고 명령했다”(Cf. International Review of Missions, January 1939, p.10). 하지만 성경의 하나님을 유일신으로 섬기는 대부분의 한국교회 지도자들이 일제의 강요를 그대로 순응할리 없다. 결국 신학교가 둘이 되고 교단이 나누이게 된다. 한국의 청교도 칼빈주의의 중심인 평양 신학교는 신사참배 문제로 1938년 9월 30일 자진해서 무기휴학 선언을 했고, 1939년 3월부터 조직된 새로운 신학교 설립 기성위원회는 1940년 4월에 정식으로 조선신학교를 서울에서 개교하였다. 조선신학교는 서울 승동교회 하층을 사용했다(김의환, 「기독교회사」 p. 444). 조선 신학교가 시작될 당시 조선신학교는 자유주의라는 이유로 총회의 인정을 받지 못했다. 그리고 1945년 남쪽과 북쪽이 38선으로 나누인 이후 조선신학교가 남쪽 장로교 총회에 속한 유일한 신학교가 되었다. 조선신학교는 1946년 장로교 총회에서 총회 직영신학교(General Assembly Theological Seminary)로 인준을 받았다(G. T. Brown, Mission to Korea, Board of World Missions, Presbyterian Church, U.S, 1962, p.177). 하지만 조선신학교의 신학적 입장은 계속적으로 문제가 되었다. 남쪽 장로교회의 좌경화를 지켜본 신사참배 반대로 옥중에서 핍박을 받은 옥중 성도들과 신앙의 자유를 위해 망명 갔던 보수신학자들이 힘을 합쳐 세운 보수 신학교가 1947년 10월에 부산에서 박형룡박사를 교장으로 모시고 문을 열었다. 이 신학교가 바로 고려신학교였다. 그런데 고려신학교 설립자이신 한상동 목사와 교장 박형룡 박사 사이에 이견이 생기게 되었다. 박형룡 박사는 자유주의 신학과 싸울 전략으로 신학교를 서울로 옮길 것을 주장했다. 한상동 목사는 과거 평양신학교가 평양에 위치해 있으면서도 총회의 유일한 신학교로 역할을 감당한 것처럼 고려신학교가 부산에 있어도 유일한 장로교 신학교로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고려신학교를 서울로 옮길 것을 반대하였다. 결국 박형룡 박사는 부산을 떠나 서울로 상경하여 1948년 6월 옛 평양신학교의 정신을 이어받은 신학교로 장로회신학교를 서울에 설립했다. 그리고 장로회신학교는 1949년 4월 19일 서울에서 모인 제 35회 총회에서 총회 직영신학교로 인준 받았다. 이로써 한 총회 내에 조선신학교와 장로회신학교가 총회 직영신학교로 존재하게 되었다. 총회의 주도권을 찾은 보수 쪽 인사들이 조선신학교와 장로회신학교의 합동을 제안하였고 조선신학교 쪽 인사들은 합동하는 것은 자신들에게 불리함을 알고 신학교 합동을 반대 하였다. 한국동란이 1950년 6.25일 북한의 남침으로 발발하였다. 6.25 한국동란 직후 1951년 5월 26일 부산 중앙교회에서 제 36회 속개 총회가 모였을 때 총회가 직영 신학교로 인정한 양 신학교를 취소하고 새로운 신학교를 설립하자는 안건의 가결을 보았다. 그래서 총회의 결의대로 총회신학교가 1951년 9월 18일 대구에서 교장 감부열 선교사외 교수 박형룡 명신홍 권세열 김치선 한경직 제씨를 모시고 개교하기에 이른다. 총회 내에서 더 이상 영향력을 발휘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른 조선신학교 측 인사들은 1953년 6월 10일 서울 한국신학대학(조선신학교 후신) 강당에 모여 “법통 총회”란 이름하에 제 38회 총회를 속개한 다음 그 다음 해부터 “대한기독교장로회”란 새로운 이름으로 교단을 창설하였다(김양선, 한국 기독교 해방 10년사, p. 227). 이렇게 하여 1947년 10월에 창립된 교려신학교와 1951년 9월 18일 대구에서 개교한 총회신학교와 1953년 6월 10일 시작한 한국신학대학으로 나누어져 세 개의 장로교 교단이 형성되게 되었다. 자연히 한국의 장로교회의 교단은 고려 측 총회 측 기장 측으로 나누어져 존재하게 된다. 그 이후 한국장로교회는 1959년 9월 24일 대전중앙교회에서 제 44회 총회로 모여 WCC 문제로 정회되었는데 WCC를 찬성하는 사람들은 정회되는 그날 1959년 9월 28일 서울로 옮겨 연동교회에서 총회를 속개하였고, WCC를 반대한 사람들은 1959년 11월 24일 서울 승동교회에서 총회를 속개하였다(김의환, 「기독교회사」 pp. 452-457). 이로써 한국장로교회는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측 혹은 승동측)과 대한예수교장로회(통합측 혹은 연동측)으로 둘로 나누이게 되었다. 그 후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측)이 1979년 주류측, 비주류측, 중립측으로 나누어졌고 계속해서 합종연횡(合從連衡)의 과정을 거쳐 현재는 장로교만 100여 교단이 넘는 상황이 되었다. 이처럼 한국교회는 분열이라는 아픔을 통해 숫자적으로 성장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하나님은 인간의 잘못을 사용해서도 그의 뜻을 이루어 가신다. (3) 십일조 강조와 한국교회의 성장 한국교회는 십일조 헌금을 강조한다. 대부분의 목회자들이 십일조 헌금의 강조를 위해 그 근거를 구약에서 찾는다. 특히 목회자들은 헌금 강조를 위해 말라기를 인용하곤 한다. 인용된 성구는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 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말 3:8)와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말 3:10) 등이다. 말라기 3:8의 내용은 헌금을 강요할 때 사용되고, 말라기 3:10은 기복신앙을 조장하는 역할을 해 왔다. 이와 같은 기복신앙을 조장하는 십일조의 강조는 교회 안에 이상한 형태의 헌금제도를 낳게 했다. 어떤 교회는 축복을 기대하는 마음으로 “선 십일조”(prepaid tithe)를 강조하기도 한다. 선 십일조란 십일조의 금액에 따라 하나님이 수입을 보장해 주신다는 생각으로 수입이 있기도 전에 십일조를 바치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과 노름을 하는 셈이다. 하나님이 수입의 십일조를 바치라 명하셨으니 먼저 십일조를 바치면 하나님은 할 수 없이 그 십일조의 십 배를 수입으로 주실 것이라는 생각이다. 이렇게 기복신앙을 조장하는 십일조 헌금과 다른 헌금이 한국교회 내에 깊이 뿌리를 내리게 되었다. 심지어 근래에는 어떤 교회에서 십일조를 내지 않으면 교인 자격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나오기까지 했다. 사실상 십일조의 강조는 1950년대까지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이 말은 일본의 36년 통치기간에 한국교회가 십일조를 많이 강조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러나 1950년 한국동란(6.25동란)을 겪으면서 교회 재정은 극도로 피폐되어졌고 재정확충의 필요가 대두되었다. 한국동란은 한국민족에게 고난과 고통을 안겨 주었고 따라서 고통 속에 처한 한국교회는 기도와 회개를 강조하게 되었다. 그래서 도시 인근 산 속에는 이곳저곳에 불법 기도원이 설립되고 성도들은 자신들의 고통과 나라의 고난을 기도로 분출하게 되었다. (4) 교회당 건축과 성전의식 예배당을 구약성전으로 생각하는 관습은 예배당 건축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일부 목사들은 강대상이 있는 곳을 제단(altar)으로 생각하고 안수 받은 목사이외의 다른 성도들은 올라갈 수 없도록 한다. 특히 여자 성도들은 강대상을 사용할 수가 없다. 이런 관습이 시행되는 교회에서는 때때로 웃음을 자아내는 장면이 연출되곤 한다. 여전도회 헌신예배를 드릴 때 나이 많은 할머니 회장님은 아래 강단에서 사회를 하고 아들정도 되는 젊은 청년 목사는 윗 강단에서 설교를 한다. 이런 관습이 여인은 제단에 올라 갈 수 없다는 구약 교훈에서 기인된 것이다. 이처럼 교회당에 대한 잘못된 인식이 예배당 건축에 자극제 역할을 했고 많은 예배당의 건축은 교인 수를 증가시키는데 일익을 담당했다. 한국에 세계 10대 교회 중의 몇 교회가 있다는 사실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고 생각된다. 하나님은 역사의 주관자이시다. 지금까지의 한국교회의 역사적 진전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잘못을 통해서도 교회를 인도해 주셨음을 증거 한다. 우리는 우리의 잘못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하나님이 역사의 주관자이심을 강조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노력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잘못할 때 하나님은 그의 지혜로 그 잘못을 가장 좋은 방향으로 인도하신다는 뜻이다. 우리는 이 부분에 대해 성경이 “우리가 무슨 말 하리요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거하겠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롬 6:1-2; 참조 롬 3:5-8)라고 말씀하신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3. 한국교회가 지키고 취할 것 고등종교의 타락원인을 고찰하면 첫째 성직자의 급증 둘째 종교 기관수의 급증 셋째 기복주의 성향 그리고 넷째 교회 및 교회 기관들이 권익 집단으로 전환하는 것 등을 들 수 있다. 한국교회는 이런 부분에서 위험 수위에 육박하고 있다. 서구 사회는 후기 기독교 사회로 이미 접어들었다. 한국 교회도 후기 기독교 사회로 들어가는 시기가 곧 다가 올 것이다. (1) 성경 66권을 하나님의 정확무오한 말씀으로 믿고 성경을 귀하게 생각해야 한다. 구약시대나 신약시대나 할 것 없이 하나님은 그의 말씀을 귀하게 생각하고 실천하는 백성을 축복하시고 선한 길로 인도하신다. 한국 교회는 성경을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하면서도 그 말씀의 원리에 따르기보다 편의와 실리에 따라 말씀을 적용하는 경우가 많다. 구약시대 때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너희들이 나에게 제물은 바치지만 마음은 내게서 멀다고 하신 상황과 비슷하다고 사료된다. 의식이 있는 목사들에게 “현재 한국교회의 문제점이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라고 질문을 하면 그들은 한국교회에 현재 팽배한 것은 “원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라고 답변을 한다. 이 말은 성경 말씀이 우리의 신앙과 생활의 규범이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는 뜻이다. 성경의 원리보다는 교회의 숫자가 증가한다면 성경원리에 맞지 않아도 좋고 심지어 이단적인 방법 일지라도 사용하겠다는 분위기이다. 심지어 개혁주의 신학을 표방하는 신학교에서도 “역사적 비평적 해석방법”(The Historical Critical Method)에 호의적인 태도를 취하기도 한다. 역사적 비평적 방법은 성경에서 초자연적인 요소를 제거하고 단순히 인간의 합리를 적용하여 성경을 해석한다. 요즈음 여러 가지 명칭으로 등장한 해석 방법은 계몽주의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하나님 중심적인 접근보다는 인간 이성 중심적인 접근이 많다. 한국 교회는 성경으로 돌아 갈 때 소망이 있다. (2) 순교의 정신을 계승할 것 한국교회는 우상숭배와 같은 신사참배를 거부했다. 이에 일제는 1938년 2월에 아직도 신사 참배를 거부하고 버티는 장로교회를 꺾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다. 일제의 압력에 밀려 1938년 2월부터 9월 총회가 열리기까지 전국의 23개 노회 가운데 17개 노회가 일제에 굴복하고 신사참배를 찬성하고 말았다(김양선, 한국 기독교사 연구, p. 186 이하). 여기서 자세하게 언급할 수 없지만 일제 강점기와 6.25 남침으로 인한 공산당 점령기간에 수많은 목사들과 성도들이 믿음을 지키기 위해 순교했다. 순교한 성도들의 삶은 자신의 생명보다 말씀을 순종하고 하나님을 소유하는 것이 더 가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한국교회는 믿음의 선진들이 생명을 바쳐 지킨 순교의 정신을 이어가야 한다. (3)행사나 프로그램 보다는 하나님 앞에서 잘못을 회개하고 바로 서야한다. 1907년 대부흥운동의 100주년 기념으로 2007년 7월 8일 상암 구장에서 “2007년 한국교회 대 부흥 100주년 기념대회”가 열렸다. 이 대회에서 고 옥한흠 목사(사랑의교회 목사)가 설교하는 가운데 “한국교회는 만 명의 선교사를 파송하고 있고, 구제 사업에도 앞장서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사회는 한국교회를 신뢰하지 않습니다... 목회자로서 설교할 때 죄와 회개 거룩함은 할 수 있으면 언급을 피했습니다. 회개나 반성보다 듣기 좋고 부드러운 말을 골라 설교하는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저도 모르게 복음을 변질시켜 갔습니다. 주여! 이놈이 죄인입니다. 입만 살고 행위는 죽은 교회를 만든 장본인입니다. 겉모양은 돌아가지만 내면은 죄악이 쌓여 있는 한국 교회를 깨끗하게 하옵소서. 한국교회를 살려 주옵소서”(아름다운 동행 제16호)라는 말씀의 설교를 전했다. 옥목사의 이 설교 말씀은 한국 교회 목사들을 대표해서 한 말씀이요 한국 교회가 귀 담아 들어야할 내용이다. 박윤선 목사는 생애의 거의 마지막 부분에서 “나는 83년 묵은 죄인입니다”라고 자신의 죄인 됨을 대중 앞에서 고백했다. 한국교회는 1907년 회개 운동을 통해 부흥운동이 확산된 것처럼 회개 운동이 절실하게 필요한 때에 처해 있다. 우리는 한국교회가 행사와 프로그램으로 성도들을 몰아가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한국교회는 성도들이 성경 말씀 안에서 내면적으로 거룩하고 충실하게 성장하는데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4) 한국교회는 기도의 열정을 계승해 나가야 한다. 한국교회는 기도하는 교회로 유명했다. 하지만 요즈음은 한국교회의 기도의 열기가 점점 식어져 가는 모습을 보게 된다. 한국교회는 새벽기도회로 유명하고, 금요일 철야기도회로 유명했다. 하지만 지금은 거의 모든 교회가 철야기도를 하지 않는다. 금요일 오후 9시나 10시에 모여 12시 전으로 모든 기도회를 마친다. 그리고 예전에는 성도들이 기도할 수 있는 장소로 수많은 기도원이 있었다. 지금은 사회의 발전과 함께 그런 기도처소가 거의 없는 상태이다. 물론 우리는 미신적으로 기도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반드시 기도처소에 가야만 기도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어느 때나 어디에서든지 기도하는 습관을 가져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이 기도하는 백성을 기뻐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한다. 한국교회는 좋은 기도의 전통을 이어 받았으니 이를 계속 전승시켜야 한다. 4. 한국교회가 버리고 개선할 것 우리는 “나는 나의 싸움에 하나님을 끌어 들이는 욕구중심의 신앙인인가?” 아니면 “나는 하나님의 싸움에 나를 헌신하는 소명 중심의 신앙인인가?”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면서 한국교회가 교정해야할 몇 가지를 함께 묵상하도록 한다. (1) 객관적 계시인 성경보다는 주관적 경험을 더 중시하는 경향을 경계해야 한다. 하나님은 특별한 영감의 방법으로 예수님 재림 때까지 교회가 사용할 정경 66권을 주셨다. 하나님은 모든 교회가 예수님 재림 때까지 사용할 공적이고 객관적인 계시를 우리에게 주셨는데 또 계속해서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객관적 계시에 버금가는 계시를 주시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기독교는 혼돈으로 가득 차게 될 것이다. 하지만 인간은 지 정 의를 가진 존재로 창조 받았기 때문에 감정에 많이 좌우된다. 우리가 기억해야할 것은 우리의 감정도 객관적 계시에 조종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객관적 계시인 성경보다 주관적 경험을 중시 할 때 결국 그 결과는 내세 지향적이 되며 윤리성이 약해지는 방향으로 흐른다. (2) 기복신앙의 조장으로 축복받기 위해 헌금하는 경향이 한국교회 내에 많다. 헌금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은혜를 감사하여 마음과 몸을 바치는 뜻에서 드리는 것이다. 사실상 인간이 하나님께 바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세상의 모든 것의 주인이시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국교회의 헌금 경향은 축복을 받았음으로 감사해서 바치기보다는 축복을 받기 위해 바치는 것이다. (3) 한국 교회 예배를 회복해야 한다. 한국교회 예배는 전통적으로 말씀중심의 예배였다. 성도들의 관심이 말씀을 선포하는 강단에서부터 자신들의 몸 운동으로 옮겨진 것이다. 그런데 오순절 운동으로 오순절교회뿐만 아니라 다른 교회에서도 박수치는 것 손을 오리는 것, 무릎을 꿇는 것, 춤을 추는 것 등 육체적인 표현이 빈번하게 되었고, “아멘,” “할렐루야,” “하나님께 영광”(칠레의 오순절 신자들의 경우) 등의 음성적인 표현도 곁들여 하는 경향을 낳게 했다(이재범, “현대 오순절 교회 예배의 특징”, 『성경과 신학』 6권, p. 103). 우리가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목사 혼자서 흥행하는 식의 예배는 바람직스럽지 못하기 때문에 오순절식의 예배처럼 성도들이 육체적 표현과 음성적 표현으로 예배에 참여한다고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도 있으나 오순절 예배의 경우 인간 감정의 촉발을 조장하여 그 자체를 마치 신과 하나 되는 경지에 들어가는 황홀경으로 착각하게 만드는 경우가 많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배드릴 때 예배자의 마음을 가장 소중히 여기신다. (4) 건전한 교회를 정착시켜야 한다. 대형교회는 작은 교회가 하지 못하는 여러 가지 일을 할 수가 있다. 대형교회는 성도들의 필요를 채우는데 더 효과적으로 일을 할 수가 있다. 그러나 대형교회는 항상 겸손한 마음으로 처신하고 다른 교회들의 필요를 채우는데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 때로 대형교회들이 자만에 빠져 질서를 파괴하고 자기들 마음대로 하려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면 대형교회들 중 장로교회들이 한국 명칭은 장로교회로 사용하면서 영어표기로는 “무슨 공동체 교회”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런 식으로 명칭을 사용하는 목사는 정체성에 대한 의식이 희박할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순수하지 못한 것이다. (5) 목사의 직분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바로 잡아야 한다. 종교개혁 사상은 성경에 기초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재발견하여 예수님을 중심으로 삼는 것이었다. 개혁자들은 오직 은혜로만 구원을 얻으며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는다고 믿었다. 죄인이 의인이 되기 위해서는 유일한 중보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개혁자들은 성자숭배를 반대하고 교황주의를 반대하며 목사가 제사장이라는 교권주의도 반대했다. 목사는 말씀의 선포와 성례를 집행하는 직무를 맡은 사람이다(김영재, 한국 기독교의 재인식, p. 287). (6) 예배드릴 때 설교 본문을 교독하는 관습은 하나님의 권위를 침범하는 것이다. 근래에 한국 교회의 예배의식을 살펴보면 목사가 설교 본문을 읽을 때 회중의 참여를 의식하여 교독이나 합독할 것을 제안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성경봉독은 하나님께서 그 말씀봉독을 통해 가장 직접적으로 성도들에게 말씀하시는 방법이다. 성경봉독은 설교보다도 더 직접적으로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말씀하시는 수단이다. 예배드릴 때 시편을 교독하는 것은 바람직하지만 설교의 본문을 교독하는 것은 심하게 말하면 하나님이 말씀하실 기회를 박탈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 봉독은 예배 인도자가 낭독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The Book of Church Order of the Presbyterian Church in America, Chapter 50, Verse 1). (7) 예배드릴 때 목사가 가운을 입는 일과 성찬 집례 시 흰 장갑 끼는 일은 개혁주의 전통이 아니다. 어떤 한국교회는 예배드릴 때 목사가 가운을 입고 예배를 드리는 교회가 있는가 하면 어떤 교회는 목사와 장로가 모두 가운을 입고 예배드리는 광경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영상 매체를 통해 설교하는 대부분의 목사들이 가운을 입고 설교하는 모습을 보게 된다. 그러나 목사가 예배드릴 때 가운을 입는 것은 개혁주의 전통이 아니다. 목사가 예배드릴 때 가운을 입으면 목사와 성도들을 구별하고 목사를 특별 계층으로 인식하게 하는 잘못을 범한다. 가톨릭의 사제들은 가운을 입으므로 일반 성도들과 자신들을 구별시킨다. 그리고 목사가 성찬을 집례 할 때 흰 장갑을 끼고 집례 하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된다. 예식을 성스럽게 인도하기 위한 목적이 있겠지만 “성찬식이 주일 예배보다 더 거룩하다거나 예배가 성찬식보다는 덜 거룩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김영재, 한국 기독교 재인식, p. 289). 성찬식을 예배보다 더 거룩한 것으로 생각하면 중세 교회의 잘못을 답습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께서 처음 성만찬을 제정해 주신 장면을 상기해 보아야 한다(눅 22:13-23). 예수님이 첫 성만찬을 제정하실 때 예수님께서 장갑을 끼셨다든지 아니면 그 당시 할 수 있는 특별한 방법을 동원하셔서 성만찬 집례를 하셨는지 상고해 볼 필요가 있다. 예수님은 보통 식사하시는 방법으로 성만찬을 제정해 주셨다. 목사가 설교할 때는 가운을 입지 않고 성찬을 집례 할 때는 가운을 입으면 성도들이 설교보다 성찬을 더 중요한 은혜의 수단으로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설교나 성찬 모두 성도들이 은혜를 받는 은혜의 수단이다. 그리고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성찬은 구원받은 가족들만이 참여하는 가족 식사이지만 설교는 전도의 역할까지 하는 은혜의 수단이다. (8) 교회 내에 잔존하는 여러 가지 잘못된 행태를 변혁시켜야 한다. ① 성경은 신약교회의 제도 중에 하나로 제비뽑기를 허락하지 않는다. 그런데 어떤 교단은 총회장 선거를 제비뽑기로 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는 선거의 부작용을 피하기 위해 성경을 경시하는 현상이다. 이는 교회 지도자들이 성경의 교훈을 에누리하고 있는 것이다. ② 무자격 신학교의 난맥상을 개선해야 한다. 일 년에 두 차례 학기 초가 되면 기독교 신문에 신학생 모집 광고가 나온다. 그런데 광고에 나온 어떤 신학교는 우리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만든다. 광고도 하지 않고 아름아름 학생을 모집하여 가르치고 있는 신학교도 많다. 이와 같은 신학교는 어떤 한 개인이 주관하거나 어떤 한 교회가 주관하면서 자격 없는 목회자를 배출하고 있다. ③ 후임 목회자를 선정하는데 부자 세습을 지양해야 한다. 근래에 한국교회는 1세대 목사가 은퇴하고 후임 목회자를 모시는 과정에 아버지 목사가 아들 목사에게 교회의 의사와는 다르게 거의 강제로 담임목사로 세우는 경우를 가끔 본다. 아버지 목사가 은퇴할 때 전체 교인들이 아들 목사를 담임목사로 모시겠다고 하여 공동의회를 거쳐 아들 목사를 담임 목사로 모시는 것은 크게 잘못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오늘의 한국교회의 형편을 감안할 때 가능한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사회를 향한 좋은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되리라 사료된다. ④ 목사 장로 집사 권사 직분을 벼슬처럼 생각하는 행태를 개선해야 한다. 교회의 직분들은 봉사의 직분들이다. 교회의 직분들은 벼슬자리가 아니다. 성경 말씀은 분명하게 교회의 직분들이 섬기는 자리요, 봉사의 자리임을 분명히 한다. 예수님도 하나님이시면서도 섬기려 오셨다고 말씀하신다(막 10:45). 나가는 말 우리는 역사의 교훈을 마음 깊이 새겨야한다. 그리고 우리의 잘못은 고치고 버릴 것은 버려야 한다. 우리는 항상 성경말씀에 비추어 우리의 모습을 점검해야 한다. 이것이 130년을 헤쳐 온 우리의 나아갈 좌표가 되어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축복으로 이만큼 성장하고 쓰임을 받고 있는 한국교회에 대해 성급한 평가를 하는 것은 잘못이다. 우리는 먼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항상 겸손, 겸손, 또 겸손의 자세로 우리의 연약성을 개선하여 하나님의 교회를 든든히 세우고 하나님 나라의 확장에 쓰임을 받아야 할 것이다. 박형용 박사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명예교수 2017-0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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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2-13
  • 영적인 만나로 만족하라 - 소강석 목사
    영적인 만나로 만족하라 민수기 11:4-9 2016년 8월 10일 오후 7시 30분 원주 오크밸리리조트 컨벤션 센터. 20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컨벤션 센터 안 입구에는 집회 때 앞자리를 차지하려는 교인들이 의자에 앉아 길게 기다리고 있었다. 컨벤션 센터는 새에덴교회 교인들로 가득 찼다. 유쾌한 목사 소강석은 어려운 시절 말하기 어려운 이면도 솔직하고 재미있게 표현한다. 그는 솔직한 목사다. 2016년 8월 9일부터 12일까지 원주 오크밸리리조트에서 “하나님의 세계로 떠나라”(민 14:6-9) 주제로 열린 장년여름수련회 둘째 날 저녁집회 때 밝힌 그의 미국에서의 카지노 체험기는 참으로 유쾌하다. 7시 30분 저녁집회가 시작됐다. 영적인 만나로 만족하라 민수기 11:4-9 할렐루야! 이 저녁에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새롭게 해주실 줄로 믿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매일 아침마다 새로운 만나를 허락해 주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하늘 양식을 내려주실 것을 믿습니다. 그 만나로 여러분의 영혼이 오늘도 배부르게 먹고 여러분의 삶이 새로워지시길 바랍니다. ♪ 내 주린 영혼 만나로써 먹여 주시니 그 양식 내게 생명 되겠네 이 후로 생명 양식 주와 함께 먹으며 저 생명 시냇가에 살겠네 길이 살겠네 나 길이 살겠네 저 생명 시냇가에 살겠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을 한 지 둘째 달 15일이었습니다. 출애굽을 한 지가 달포 정도가 되었단 말이죠. 그때 그들에게는 애굽에서 가지고 온 양식이 다 떨어져 버렸습니다. 양식이 떨어졌으니 난리가 난 거죠. 애들은 배고프다고 울어대고, 어른들도 허기를 참지 못한 거예요. 그러나 어디 가서 양식을 구해올 수가 있어야죠.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와 아론에게 온갖 불평과 원망을 다 합니다. “아, 우리가 애굽 땅에 있을 때가 좋았는데. 그때는 아무리 중노동을 했다고 하더라도 고기 가마 곁에 있으면서 고기라도 실컷 먹었는데... 왜 우리가 광야로 나와서 이토록 고생을 하는가! 이제 양식도 다 떨어져서 굶어죽게 생겼으니, 차라리 애굽에서 있었으면 좋았을걸... 모세와 아론 때문에 우리가 광야에서 굶어죽게 되었도다! 아, 그리운 애굽이여, 그리운 옛날이여!” 이렇게 이들은 온갖 불평과 원망을 내 쏟았습니다. 그리고 애굽을 그리워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때에 하나님께서 하늘로부터 만나라는 양식을 내려주셨습니다. 저녁에는 하나님께서 메추라기가 진을 덮이게 하셨고 아침에는 광야 지면에 작고 둥글며 서리같이 생긴 만나를 내려주셨습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특별히 내리신 양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때 하나님은 만나를 그냥 내려주시지 않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시험의 계명과 함께 내려주셨습니다. 다시 말하면, 만나를 주시면서 그냥 주시지 않고 만나를 거둘 방법과 계명까지 내려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 계명을 지키나 안 지키나 하나님이 시험을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복을 주실 때 그냥 주시지 않아요. 항상 시험을 하시면서 주시곤 하십니다. 처음에는 복을 좀 주셔놓고 하나님 뜻대로 사는가 안 사는가, 십일조를 잘 하는가, 주일성수를 잘 하는가, 하나님이 항상 시험을 하시면서 복을 주세요.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성령님의 감동에 순종하는가, 얼마나 하나님께 헌신하며 하나님을 위해 일하는가... ♪ 내가 너를 믿고 맡긴 사명 너는 왜 잊어버렸나 나만 따르리라 하던 약속 왜 잊어버렸나 위로받기 보다는 위로하고 사랑받기 보다는 사랑하고 십자가만 면류관만 바라보며 의의 길 간다더니 위로하기 보다는 위로받고 사랑받기 원하네 그러나 백성들 가운데는 쓸데없는 탐욕이 생겨 다음날 먹을 것까지 다 가져오는 자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나게 된 것이죠.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시험에 실패를 한 자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예외를 두실 때가 있었습니다. 바로 안식일 전날에는 안식일에 먹을 것까지 만나를 거두라고 명령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안식일에는 만나를 안 내리시기 때문이죠. 그래서 안식일 전날에는 그 이튿날 먹을 것까지 거두게 하셨습니다. 그때는 절대로 벌레도 안 먹고 냄새도 나지 않게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만나는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로 주신 것이고, 하나님의 간섭 안에 있는 특별한 하늘양식인 것이죠. 그래도 일부 욕심 있는 인간들이 안식일에도 만나를 거두러 간 거예요. 분명히 하나님께서 안식일에는 만나를 안 내리겠다고 약속을 하셨는데, 이 머저리들이 안식일에도 만나를 거두러 간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답답하시겠습니까? 이 사람들도 하나님의 명령과 계명을 범한 사람이요, 하나님의 시험에 불합격한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세계에서 살겠습니까? 어떻게 믿음의 세계에서 살겠습니까? 이런 사람들이 어떻게 참된 가나안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단 말입니까? 하나님은 만나를 통해서 먼저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을 훈련시켰을 뿐만 아니라, 안식일을 잘 지키는 훈련을 하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언약 백성들에게 참 안식과 신령한 복을 허락해 주시기 위해서였지요... 그러므로 여러분은 주일을 잘 성수하시기 바랍니다. 주일을 온전히 성수하시기 바랍니다. 주일은 온전히 예배하는 날이요, 하나님을 섬기는 날이요, 교회에 봉사하는 날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아니, 여러분의 육체와 영혼이 안식을 하는 날로 삼으시기 바랍니다. ♪ 즐겁게 안식할 날 반갑고 좋은 날 내 맘을 편케 하니 즐겁고 기쁜 날 이 날에 천하 만민 다 보좌 앞에서 참 되신 삼위일체 다 찬송부르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그냥 만나를 먹여주셨을까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만나를 먹으면서 어떤 것을 깨닫게 하셨을까요? 그리고 신약시대에 사는 우리에게 만나는 어떤 의미와 교훈을 주는 것일까요? 1) 사람은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을 깨달아야 했습니다. ♪ 주의 말씀 받은 그날 참 기쁘고 복되도다 이 기쁜 맘 못이겨서 온 세상에 전하노라 기쁜날 기쁜날 주 나의 죄 다 씻은 날 늘 깨어서 기도하고 늘 기쁘게 살아가리 기쁜날 기쁜날 주 나의 죄 다 씻은 날 2) 그들은 매일매일 하나님을 간절하게 의지하며 살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잘 알다시피 광야에서는 농사도 지을 수가 없습니다. 장사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만나를 안 내려주시면 그들은 도저히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습니다. 더구나 만나는 한꺼번에 주시는 것이 아니잖아요. 농사를 지으면 양식을 비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매일매일 만나를 딱 하루치 양만 주셨습니다. 그리고 안식일 전날만 이틀 분을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일매일 하나님을 의지해야 했습니다. 그냥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간절히 의지해야 했습니다. 왜냐면 하나님께서 만나를 안 주시면 그날은 당장 굶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만약에 일주일 이상을 안 주시면 그 일주일 동안 그들은 굶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들은 당장 굶어 죽겠죠. 그러니까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내려주신 만나는 그들에게 일용할 양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일용할 양식이라는 표현을 하셨지 않습니까?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마 6:11 그러니까 그들은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매일매일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그냥 의지하지 않아요. 그냥 기도하지 않습니다. 간이 절이도록 간절히 기도하고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왜냐하면 일용할 양식이 없으면 그들은 굶어죽기 때문이죠. 바로 이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의 삶의 현실이었습니다... ♪ 하나님 손길 떠나 버림받은 이 죄인이 하나님 은혜 없인 살 수도 없습니다 죄악과 욕심으로 병들었던 이 내 몸 황홀한 주의 은혜 이 죄인을 고치셨네 십자가 부여안고 주의 사랑 채운 마음 나의 왕 나의 임금 나의 사랑 드립니다 ♪ 내일 일은 난 몰라요 하루하루 살아요 불행이나 요행함도 내 뜻대로 못해요 험한 이 길 가고 가도 끝은 없고 곤해요 주님 예수 팔 내미사 내 손 잡아주소서 내일일은 난 몰라요 장래일도 몰라요 아버지여 날 붙드사 평탄한 길 주옵소서 제가 일식을 싫어하는 이유는 성경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성경적인 음식은 두 가지 음식 즉 양식입니다. 다시 말해 일용할 양식과 한식은 생명의 떡입니다. 일식은 성경적이 아닙니다... ♪ 목마른 사슴 시냇물을 찾아 헤매이듯이 내 영혼 주를 찾기에 갈급 하나이다 주님만이 나의 힘 나의 방패 나의 참 소망 나의 몸 정성 다 바쳐서 주님 경배합니다 3) 이스라엘 백성들을 시험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과연 하나님 보시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얼마나 하나님을 의지하는가.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며 살아가는가. 이것을 하나님이 40년 동안 매일매일 시험하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을 알고 깨닫도록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나님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광야훈련을 시키실 때가 있습니다. 저도 무척이나 광야훈련을 많이 받았습니다. 여러분, 원래 저는 목사 될 사람이 아니고 또 하나님의 은혜로 살 사람이 아닙니다. 절대로 영적으로 살 사람이 아닙니다. 저는 양극단의 성격을 다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저는 엄청나게 인간적인 면이 많이 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광야훈련을 시키실 때가 있습니다. 김문기 장로 젊었을 때 도박으로 집 한 채 날렸대요(웃음). 여러분 내가 했다면 집 한 채만 날리지 않았을 겁니다. 내가 만약 도박을 알고 정말 그 뭡니까 카지노를 알았으면 아이고 배팅을 끝내주게 잘 했을 겁니다. 내가 배짱 있는 거 아시죠. 하나님께서 저를 혹독한 광야훈련을 시키셨어요. 제가 말씀드렸지만 광주 계시는 저희 문 장로님 위해서 기도해 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같이 미국 라스베가스에 갔습니다. 저는 카지노 슬롯머신 앞에 섰습니다. 장로님이 가자고 해서 비위 맞추느라 갔습니다. 가면서 사탄아 물러가라 사탄아 물러가라 했습니다(웃음). 그런데 장로님 돈을 계속 잃어요. 계속 잃어요. 저한테도 해보라고 돈을 주는 겁니다. 속으로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나를 무너지게 하는 자다 계속 그랬습니다. 장로님이 또 하라는 겁니다. 또 속으로 사탄아 물러가라 했습니다. 그런데 옆의 권사님이 저보고 목사님은 복 있는 분이시잖아요 그러는 겁니다(박장대소). 그런데 그게 하나님 음성으로 들리는 겁니다(웃음). 그래서 하나님 믿습니다 하고 장로님이 준 동전을 넣고 딱 땡겼습니다. 지가 떨어지데. 그 동전 떨어지는 소리 있잖아요. 그게 계속 떨어져야 하는데 이 작것이 계속해서 돈만 먹는 겁니다(박장대소). 장로님하고 방에 돌아갔는데 잠이 안 옵니다. 계속 짤각 짤각 소리가 나는 겁니다. 1시가 되고 2시가 되어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이게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모양이다(웃음). 다시 내려가 돈을 바꿔 땡기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장로님이 마누라하고 또 내려온 겁니다(박장대소) 쯧쯧. 그래서 제가 장로님 보고 회개합시다 하고 올라가서 잤습니다. 그러니까 나 자신도 이런 극단적인 데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랜 기간 동안 엄청나고 혹독한 광야훈련을 시키셔서 제가 이렇게 영적인 사람으로 살고,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제가 광주신학교에 다닐 때에는 진짜 하나님이 안 도와주시면 살 수가 없었습니다. 어느 누가 도움의 손길을 주어야 다음 달을 먹고 살 수 있었거든요. 그러니까 매일 매일 하나님을 의지하는 삶을 사는 거죠. 백암교회 시절을 생각해봐도 정말 혹독한 시련의 기간이었습니다. 여러분 다 아시잖아요? 얼마나 제가 많은 고생을 했는지. 무슨 일이든지 그냥 저절로 쉽게 되는 일이 없었습니다. 맨날 기도해야 되고 하나님을 의지해야 됐습니다. 그러니까 간이 절이도록 하나님께 엎드리지 않을 수 없었던 거죠. 우리 교회가 부흥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교회는 쉽게 부흥하고 저절로 부흥하는 교회도 있는데, 저는 하나님께서 무릎을 꿇게 하셨습니다. 힘들게 부흥시키셨습니다. 물론 그 모든 것이 은혜로운 광야 훈련이고 하나님의 축복이었습니다만... 그러니까 제 목회는 마치 일용할 양식을 구하는 것 같습니다. 간절하게 기도하는 거예요. 조금 풍족하면 너무 감사해서 어쩔 줄을 모르고, 또 부족하면 하나님께 간이 절이도록 기도를 합니다. 이건 권용관 장로님과 김찬호 장로님이 잘 알 것입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아, 나는 누구인가? 어떤 사람인가? 왜 나도 이렇게 하나님만 의지하며 살아가게 하는가? 왜 이렇게 영적 만나로 살아가게 하는가? 내가 누군데 하나님은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를 주신단 말인가? 은혜로 살자. 영으로 살자.” ♪ 내가 주님 앞에 무엇입니까 마른 막대기가 아닙니까 내가 주님 앞에 쓸모없었던 타다 남은 재가 아닙니까 나를 도우소서 일으키소서 나와 동행하사 힘주시고 내 영혼 기쁨을 얻게 하시어 내 영혼 만족케 하옵소서 4) 그들은 하나님의 비밀한 은혜가 없으면 살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나를 통하여 떡으로만 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살아야 한다는 교훈을 깨닫는 것도 아주 중요하지요. 또 하나님을 간절하게 의지하고 기도하며 살아야 하는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는 것도 아주 중요한 사실입니다. 그러나 만나에는 더 중요한 의미와 교훈이 있습니다. 바로 그것은, 하나님의 비밀한 은혜가 없으면 우리는 살아갈 수도 없고, 존재할 수도 없다는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감추었던 만나를 주고 또 흰 돌을 줄 터인데 그 돌 위에 새 이름을 기록한 것이 있나니 받는 자 밖에는 그 이름을 알 사람이 없느니라 계 2:17 여러분, 보세요. 이기는 자에게는 하늘 보좌에 감추었던 만나를 주신다고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또 흰 돌의 축복을 주신다고 말씀하고 있어요. 그런데 이 은혜와 축복은 바로, 주는 자와 받는 자만 아는 은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감추었던 만나에는 하나님의 비밀한 은혜와 축복이 숨어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이런 은혜는 남에게 말하기도 곤란하고 또 말해서는 안 될 은혜도 있습니다. 마치 히스기야 왕이 내탕고를 보여주지 말아야 했는데 내탕고를 보여준 것이 실수였잖아요? 그 내탕고는 비밀리에 간직하고 보존했어야 했는데, 그것을 까발리는 바람에 훗날 자신의 후손들이 하나님의 모든 은혜와 축복을 빼앗겨 버리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이 비밀한 은혜는 내탕고와 같은 은혜요, 경외스럽고 신비스러운 은혜입니다. 바로 이런 은혜를 알고, 이런 은혜로 사는 사람은 절대로 주님이 없으면 살 수가 없습니다. 주님의 비밀한 은혜가 없으면 살아갈 수도 없고 존재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이런 사람들은 누가 뭐래도 주님을 떠나갈 수가 없습니다. 은혜로 안 살래야 안 살 수가 없습니다. 물고기가 물을 떠나서 살 수 있다 해도, 하나님의 비밀한 은혜와 축복이 없이는 살아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어떻게 교회를 떠납니까? 주님을 떠날 수가 없죠. 어떻게 이런 사람이 이런 중독성이 강한 은혜를 떠나서 살아갈 수가 있습니까? 절대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주님 없이는 난 못 살아요. 당신의 은혜 없이는 난 못 살아요.” ♪ 밤 깊으면 너무 조용해 책 덮으면 너무 쓸쓸해 불을 끄면 너무 외로워 주님 내 곁에 있으면 좋겠네 이 세상 주님 없이 어이 살 수 있나요 다른 사람 몰라도 주님 없인 난 못살아요 한 낮에도 너무 허전해 사람 틈이 너무 막막해 오가는 말 너무 덧없어 주님 내 곁에 있으면 좋겠네 이 세상 주님 없이 어이 살 수 있나요 다른 사람 몰라도 주님 없인 난 못살아요(회중의 눈시울이 붉어지고 눈물을 훔쳤다.) 오늘 우리도 신앙생활을 하면서 이러한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렇게 깨닫는 사람은 항상 영적인 만나로만 만족하며 삽니다. 물론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돈도 필요합니다. 집도 필요합니다. 힘도 필요하고, 명예도 필요하고, 건강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영적인 만나입니다. 우리는 만나가 없이는 못 살아요. 항상 만나의 비밀한 은혜를 소유하고 살아야 합니다. 바로 그러한 삶이 믿음의 세계에서 사는 삶이요, 하나님의 세계에서 사는 삶입니다. 여러분 모두, 이러한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오직 영적인 만나로 만족하며 행복하게 살아가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저녁 7시 반에 시작해 10시 넘어 집회가 끝나 김문기 장로의 안내를 받아 새에덴교회로 돌아오는 교회버스에 올랐다. 맨 뒷자리에 우리 부부와 같이 탄 성도는 용인에서 서울의 집으로 돌아갈 차편을 걱정하며 딸에게 말했다. “더 들었어야 하는데 짧아서 아쉬운 설교였어. 너무 재미있고 은혜로웠어...” 2016-9-10
    • G.MISSION
    • G.SERMON
    2016-10-05
  • 광복을 넘어 통일로...
    성장주의 교회 사회와 안티크리스천의온갖 비난과 지탄을 받고 있어 이러한 한국교회의 위기유일한 타개책 통일운동 지난 9월 12일 오후 8시32분께 경북 경주시 남남서쪽 8㎞ 지역에서 규모 5.8의 강진이 발생했다. 이는 1978년 계기지진 관측을 시작한 이래 가장 큰 규모의 지진으로 나타났다. 이번 지진으로 경주·대구는 최대 진도 6 수준 인근 지역인 부산·울산·창원은 최대 5 수준을 느낀 것으로 확인됐다. 진도 6은 무거운 가구가 움직이는 정도라 많은 사람이 놀라 밖으로 나가는 수준이다. 진도 5는 거의 모든 사람이 지진동을 느끼며 그릇이나 물건이 깨지는 위력 수준으로 전해졌다. 경주 지진에 온 국민이 놀랐다. 그런데 핵은 수십 배 더 끔찍할 것이다. 사실 한국은 역사상 핵폭탄 같은 피해를 세 번 당했다. 불가항력이 아니었다. 정신 차렸으면 막을 수 있었다. 첫 번째가 1592년 임진왜란이다. 나라 전체가 이순신처럼 방비(防備)했으면 왜군을 물리쳤을 것이다. 유성룡이 쓴 『징비록(懲毖錄)』은 차마 눈뜨고 읽을 수가 없다. 임금이 피신 간 산하(山河)에서 백성들이 죽어 나갔다. 칼에 찔리거나 굶어 죽었다. 일본군이 떠난 한양성에서 “백성의 시체 썩는 냄새가 진동했다”고 유성룡은 적었다. 두 번째 핵폭탄은 1910년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것이다. 선조들은 왜 일본처럼 유신(維新)을 못했나. 3차는 1950년 한국전쟁이다. 똑같이 분단됐는데 남한만 군사력 무장에 허술했다. 그 두 번째 국가 불행에서 벗어난 광복절 71주년을 기리며 ‘광복을 넘어 통일로’ 가자는 결의를 다지는 교계 차원의 행사가 있었다. 8.15 광복절은 임시정부와 애국지사들이 목숨을 걸고 투쟁해서 얻은 민족적 성과다. 광복은 문자 그대로 “빛(光)을 되찾음(復)”을 의미하고, 국권을 되찾았다는 뜻으로 쓰인다. 1945년 8월 15일 일제 식민지에서 해방된 날을 광복절 원년으로 계산한다. 김인기 목사(성장교회, 중부협의회 대표회장)는 교계에서 말과 행실이 바르고 점잖으며 덕이 높고 손까지 큰 사람이라 하여 대인(大人)으로 통한다. 2016년 8월 14일 오후 7시 30분 군포제일교회(권태진 목사)에서 군포시기독교연합회(회장 김인기 목사)는 유쾌한 목사 소강석을 강사로 8·15광복절연합성회를 가졌다. 성장교회 찬양단 찬양인도가 있은 뒤 김인기 목사가 회장 환영사를 했다. “할렐루야! 광복 71주년 감사드리고 남북평화통일이 이루어졌으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을 해봅니다. 군포시기독교연합회에서 이런 집회를 마련해 우리가 예배드리고 은혜받고 기도드리기 때문에 그 날이 속히 오리라 믿습니다. 광복 71년을 기리는 찬양을 통해 성도들과 하나님의 기쁨이 함께할 줄 믿습니다. 특별히 오늘 설교하실 소강석 목사님은 대단히 바쁜 분이시죠. 한 5만 명 목회하고 계십니다. 사실은 이번에 로스앤젤레스에서 8·15연합성회를 인도하셔야 하는데 제 간곡한 부탁으로 오늘 오시게 되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은혜와 기쁨이 넘치시기를 축원합니다. 모든 영광 하나님께 돌립니다.” 에스라 1:1-4 본문을 이창범 목사(큰나무교회)가 봉독했다. 엘림교회(민장기 목사) 찬양대 찬양 후 교회 생태계 회복 선봉장 소강석 목사가 설교단에 섰다. 걸걸하지만 유쾌한 어조가 교회당을 휘감았다. “할렐루야! (우렁찬 박수) 오늘 군포시를 하나님 사랑하셔서 제가 이 자리에 온 줄 믿습니다. (큰 아멘) 아멘이 이 동네만 크고 저 동네는 작으니 어떻게 된 겁니까. (큰 웃음) 오늘 제가 네 번 설교를 하고 도시락을 차에서 먹고 오니 목도 가고 몸도 처지고 물 건너 간 한물 간 사람 같은데(큰 웃음) 하나님 음성 같은 은혜로운 찬양을 듣고 여러분을 보니 새로운 힘이 솟습니다(아멘에 이은 큰 박수). 김인기 목사님 목회 훌륭하게 잘 하시는 분이고 찬양대 참 훌륭했습니다. 우리 권태진 목사님(군포제일교회) 제가 개인적으로 형님이라 부르는데 사실은 아무리 봐도 동생 같아요. (큰 웃음) 잘 생기고 꼭 초등학교 선생님처럼 보이는 목사님이십니다. 사실은 오늘 저녁에 비행기를 타고 로스앤젤레스에 가서 저녁 집회를 하도록 선약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김인기 목사님께서 꼭 와야 된다 말해서 그쪽에 양해를 잘 구하고 이곳에 오게 되었습니다. (박수) 김인기 목사님은 저희 교단에서 ‘기도한국’을 할 때 얼마나 충성스러운 귀한 동역자로 사역하시는지 모릅니다. 저는 의리에 살고 의리에 죽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의리를 따라 이리 왔습니다. 또 믿음이 없으면 의리가 없지요. 어느 장로님이 자기 분수를 알아야 되는데 집에 가서 월권을 했어요. 권사님과 사랑을 하다가 너무 세게 해서 그만 허리가 삐끗했어요. (웃음) 움직이지를 못해서 권사님에게 ‘어이 저 서랍에 파스가 있는데 좀 붙여주면 좋겠다’ 했어요. 그래서 권사님이 파스를 붙이면서 낫게 해 달라고 기도를 했어요. 그런데 허리가 풀려서 그 파스가 좋아서 그랬나 했더니 아 글쎄 중국집 스티커였어요. (큰 웃음) 옆 사람과 인사를 나눕시다. 참 잘 오셨습니다. (모두 복창) 여러분은 덕혜옹주라는 영화를 보셨습니까. 이 영화는 권비영 작가의 베스트셀러 ‘덕혜옹주’라는 소설에 기초해서 만든 영화인데요, 광복절을 전후해서 우리 국민이라면 누구나 한번은 봐야할 영화라고 봅니다. 명성황후가 일본의 사무라이들에 의해서 처절하게 죽임을 당한 후, 고종황제는 다시 양귀인을 왕비로 맞이했습니다. 그리고 덕혜옹주를 낳은 거예요. 그녀는 고종황제의 온갖 사랑을 다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녀를 덕수궁의 꽃이라 불렀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어린 나이에 불행하게도 아버지 고종황제의 독살과 죽음을 목격합니다. 그리고 열세 살에는 내선일체라는 명목 하에 일본으로 끌려가 갖은 냉대와 감시로 점철된 시절을 보냈습니다. 십대를 그렇게 보낸 후, 그녀는 일본 왕가의 다케유키라는 남자와 강제 결혼을 했습니다. 원래 고종황제가 조선에서 짝 지어준 남자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제가 광복절 때 마다 빠뜨리지 않고 하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것은 사할린 동포들의 눈물 젖은 역사입니다. 사할린으로 강제 징용된 사람들은 그야말로 짐승과 같은 취급을 받으며 탄광, 비행장, 도로 건설 현장에서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하루에 주먹밥을 두 개 밖에 못 먹으면서 얼마나 피눈물 나게 일한 줄 아십니까. 그러다가 1945년 8월 15일 조국이 해방 되었을 때 코르사코프 항구로 수 만 명의 사람들이 모여 들었어요. 거기에는 우리 한국 사람도 만여 명이 족히 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배가 세 척이 왔는데 그 배는 일본 배였기에 일본 사람들만 다 태워 간 거예요... 여러분, 안중근 의사(義士) 하면, 어떤 사람은 안중근 의사를 내과 의사(醫師)로 잘못알고 있는 사람이 많은데요, 안중근 의사는 내과 의사가 아니라 독립운동을 하는 의사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대한제국의 국권을 회복하기 위해, 아니 동양의 평화를 위해서 그는 이또 히로부미를 포살하려는 거사를 계획하였습니다. 그래서 1909년 10월 26일 이른 새벽, 안중근은 하얼빈역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이또 히로부미가 나오자 그는 곧바로 권총을 뽑아 들고 통쾌하게 세 발을 쏘아 이또 히로부미를 포살한 후 하늘을 향하여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코레아 우라, 코레아 우라” 이 말은 러시아말인데 우리말로 하면 “대한민국 만세”라는 말입니다. 왜 그렇게 외쳤냐면, 자신의 행위가 대한제국을 위한 정당한 행위였다는 것을 알리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1910년 2월 14일 사형선고를 받습니다. 그때 그에게 가장 그립고 가슴이 사무치도록 보고 싶었던 분이 바로 어머니였다고 합니다. 왜냐면 어머니 보다 일찍 죽는 것이 불효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머니 조마리아 여사가 뭐라고 편지를 보낸 줄 아세요. 조마리아 여사의 편지는 모든 대한민국 국민들의 가슴을 울먹이게도 남을 내용입니다. “아들아, 네가 어미보다 먼저 죽은 것을 불효라고 생각하면, 이 어미는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 너의 죽음은 한사람 것이 아닌 조선인 전체의 공분을 짊어진 것이다. 네가 항소를 한다면, 그건 일제에 목숨을 구걸하는 것이다. 나라를 위해 딴 맘먹지 말고 죽어라!... 윤동주는 어떻습니까? 제가 요즘 시인 윤동주를 연구하며 윤동주 연작시를 쓰고 있어요. 내년이면 그의 탄생 100주년인데요, 제가 윤동주의 시적 화자와 일체화 되어서 윤동주의 고뇌와 시심을 가지고 그에 대한 시를 썼어요. 특별히 그가 쓰고 싶었지만 일제의 탄압 때문에 쓰지 못했던 시들을 제 나름대로 윤동주의 시적 화자가 되어 가지고 40여 편을 썼어요... 그는 시대적 양심과 정신과 사상 앞에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는 삶을 살려고 고뇌하고 저항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 그가 더 큰 시의 세계를 알고 공부하기 위해서 일본으로 유학을 가는데 창씨개명을 해야 했어요. 윤동주는 그러한 일에 대해서도 수줍어하고 고뇌하며 부끄러워했어요. 그러다 결국 일본 릿교대학에서 공부를 하던 중, 일본 순경들에게 잡혀서 후쿠오카감옥 생활을 합니다. 그는 몇 년 수감생활을 하다가 풀려날 줄 알았는데, 생체실험의 대상이 된 거예요. 참 일본은 잔인했습니다... 그래서 이름 모를 주사를 맞고 그가 시들시들 죽어가요. 그는 정신이 가물거리면서도 항일정신을 불태우고 그의 시와 정신을 통해서 독립운동의 꽃을 피운 거예요. 한 마디로 그의 시는 민족의 제단에 화제로 드린 제물과 헌상(獻上)이었어요. 그래서 그는 그의 ‘십자가’라는 시에서 노래하듯 십자가에서 행복하게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처럼 자신의 모가지를 민족 제단에 아낌없이 바치게 됩니다. 쫓아오던 햇빛인데 /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 /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이 시를 윤동주 시인이 1941년에 지었습니다. 이때는 일제의 압제가 최악으로 치닫던 때입니다. 그는 서두에 이렇게 시를 시작합니다.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렸다”고 말입니다. 그는 조국의 해방을 좇아오던 햇빛으로 이미지화했습니다. 그런데 광복의 축복이 아직은 십자가에 걸려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해방의 꿈과 길은 오직 저 십자가 곧 기독교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윤동주 시인은 그 해방과 독립의 길을 십자가로 상징을 했습니다. 십자가가 무엇입니까? 고난의 상징 아닙니까? 그러니까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는 우리 민족이 더 많은 고난을 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니, 그 고난을 한국교회가 당해야 하고 계속해서 민족의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고난은 영광이고 양다리를 걸치는 사람들에게는 절대로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고난도 하나님이 허락해야 합니다. 그런데 자신에게 그 고난의 영광을 하나님이 허락하신다면 아낌없이 자신의 꽃처럼 피어나는 젊음의 피를 하나님 앞에 드리겠다는 것입니다. 그의 시처럼 대한독립을 위한 민족의 제단에 피의 제물이 되어 죽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의 십자가 시를 생각하며 ‘詩의 십자가’라는 시를 썼어요. 동주의 차갑게 식은 가슴 위에 한 가지 선물을 하고 싶네요그토록 목 놓아 울며 바라보았던 저 햇빛 걸려 있는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끝내 가슴에 안아 보지 못하고 머나먼 밤하늘 별이 되어 버린 청년 동주의 시퍼렇게 타들어간 육신 위에 햇빛 보내준 나무십자가를 목에 걸어주고 싶어요다시는 외로워하지 말라고 다시는 괴로워하지 말라고다시는 목 놓아 울지 말라고 그토록 사모했던 행복한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의 곁에 놓아 주고 싶어요야수의 손톱과 발톱에 찢겨나간 검은 하늘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보혈의 붉은 사랑 한 줄기 조용히 흘리며 떠난 외로운 사내 동주에게 내 부끄러운 시(詩)의 십자가 눈물로 바치고 싶습니다. 결국 윤동주가 민족제단에 희생제물이 되던 그 해 1945년 8월 15일 우리는 역사적인 독립을 맞이했어요. 그것도 하나님의 은혜로요. 그러므로 윤동주에게는 인간적으로 얼마나 아쉬운 일입니까... 원자폭탄이 딱 두 개가 있었는데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를 하고 더 이상 투하할 원자폭탄이 없었어요. 그런데 몇 개 더 있는 것처럼 일본에 공갈을 친 것이죠. 그리고 그 공갈에 일본 천황은 항복을 한 거예요. 그 항복으로 우리나라가 대한독립만세를 이루었으니 이 얼마나 하나님의 큰 은혜입니까. 그런데 오늘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가 우리 민족과 너무 비슷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교만하고 죄를 짓다가 바벨론에 망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바벨론에 끌려가기도 하고 이스라엘 땅에 남아 있는 사람은 바벨론의 통치를 받았어요. 그래서 그들은 영영 나라가 망했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나 깨어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멸망의 원인이 그들의 죄 때문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그래서 그들은 회개운동을 하고 말씀운동과 부흥운동을 했습니다. 그리고 민족혼을 일깨우고 독립운동을 했습니다. 그랬을 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도 당신의 은혜로 자유와 해방과 광복의 축복을 맞게 해 주신 것입니다... 이 이야기가 오늘 에스라 1:1-2 본문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레스왕의 칙령으로 고토로 돌아와서 예루살렘 성전을 짓고 제2의 영적 부흥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이렇게 보면 이스라엘 역사와 우리민족의 역사가 비슷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어요. 어쨌든 우리민족은 하나님의 은혜로 자유를 얻고 해방을 맞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공산화의 붉은 야욕이 동아시아 땅 끝까지 밀려오는 위기의 순간에도 이승만 박사를 통해서 자유대한민국을 세우게 되었고 6·25동란을 거쳤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대한민국은 한강의 기적을 이루었어요. 그리고 세계의 유례없는 경제발전을 이루어서 지금은 세계 12, 3위의 경제대국을 이루었어요... 그런데 지금 우리 한국교회는 사회와 안티크리스천들로부터 온갖 비난과 지탄을 받고 있어요. 왜 그렇습니까? 한국교회가 우리 민족의 경제발전에 정신적, 영적 진원이 되고 동력이 되었던 것은 사실이에요. 그러나 경제가 급속하게 발전하면서 한국교회마저 물량주의, 자본주의, 세속주의에 편승을 해 버린 거예요... 이러한 한국교회의 위기를 타개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통일운동을 하는 거예요. 통일은 우리 민족의 역사적 과제이자 사명이에요...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각 교회 목사님들마다 설교를 통해서 먼저 교인들에게 통일 계몽운동을 시켜야 해요. “통일은 우리 민족의 미래와 후손들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통일운동에 우리가 앞장서야 한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한국교회의 그런 통일의 열망과 바램이 국민들에게도 전이 되도록 해야 해요... 무엇보다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 일을 할 때 한국교회가 욕먹는 교회에서 칭송받는 교회가 될 수 있어요. 원래 한국교회는 그런 교회였지 않습니까? 3.1운동을 비롯해서 독립운동을 하고 민족혼을 일깨웠던 것처럼 오늘도 교회가 그래야 해요.” 2016-09-17
    • G.MISSION
    • G.SERMON
    2016-09-16
  • 섬김의 지도자 류명렬
    제90회 총회장 찬송가공회 이사장총회와 오랜 소송을 벌인 황승기 이제까지 한 일 중 가장 잘한 일자신의 후임 류명렬 목사를 세워 대전남부교회 제6대 위임목사 류명렬성경적 설교와 인품으로 그 목양지를 배가시키고 여호와의 이름을 높여 그는 총회도 섬겨 발전시킬섬김의 지도자가 될 것이다 아버지 그 이름만으로도 우리 가족에겐 하늘이다. 우리는 날개를 펴고 마음대로 날 수 있는 새들이다. 그래서 하나님 아버지 하고 불러 보면 내 마음은 금시로 따스해 온다. 아버지라는 이름은 누가 지어냈는지 모르겠다. 아버지 하고 불러 보면 "오냐" 하고 들려오는 목소리. 참말 이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이름. 바위도 오래 되면 깎이는데 변함없는 해와 달보다 더 오랠 하나님 아버지 이름. 2008년 10월 21일 황승기 목사(제90회 총회 총회장) 뒤를 이어 류명렬 목사가 1953년 9월 설립된 대전남부교회 제6대 위임목사로 취임했다. 이 날 원로장로가 된 임해순 장로와 함께 황승기 목사는 원로목사로 추대됐다. 1973년 제58회 총회 총회장이고 아직도 살아계신 박요한 목사가 대전남부교회 제4대 위임목사다. 1991년 8월 4일 전도사로 대전남부교회에 부임해 위임목사가 된 류명렬 목사가 2016년 2월 28일 오전 11시 회중이 배가되어 가득한 본당 설교단에 섰다. 설교 본문 신명기 5장 11절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나 여호와는 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는 줄로 인정치 아니하리라’ 제목 ‘주문과 거룩하신 이름. “오늘 우리가 함께 나눌 말씀은 제3계명이라고 하는 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컫지 말라 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에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했습니다. 앞의 말씀이 명령이었다면 이어서 ‘나 여호와는 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자를 죄 없는 줄로 인정치 아니하리라’ 하신 말씀은 경고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사람을 죄가 없다고 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 계명이 십계명의 다른 계명들보다 지키기가 쉬운 계명이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나는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의외로 우리 생활 가운데서 자주 범하는 계명이 이 세 번째 계명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어떤 것을 가리킵니까. 오늘 이 시간 그것을 같이 나누도록 하겠습니다. 첫 번째는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하셨기 때문에 여호와의 이름만 잘못 부르지 않으면 된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여호와의 이름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인격적인 존재는 모두 이름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이름이 있고 저도 이름이 있습니다. 하나님도 여호와라는 이름이 있으십니다. 여호와는 ‘스스로 있는 자’ 라는 뜻을 가진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그런데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는 것은 이 여호와의 이름만 보호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름은 호칭입니다. 그래서 이름은 그 어떤 존재나 대상을 대리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부르지 말라는 것은 단순히 이름만 보호하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망령되게 대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쳐주신 기도가 있죠. 우리는 그것을 주기도라고 합니다. 주기도에 보면 이렇게 시작합니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여기서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신다는 뜻은 단지 여호와의 이름만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다는 게 아니라 하나님 자체 즉 하나님이 존귀히 여기고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기를 원한다는 뜻입니다. 사도행전 2장 21절 말씀에 베드로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 했습니다. 여기서 구원 받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입니다. 그러면 아무 생각 없이 예수 예수 예수만 하면 구원받느냐 그 말이 아니죠.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라는 뜻은 나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신 그 예수님을 전적으로 의지해서 그 예수님을 대리하는 호칭인 예수여 라고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믿으시면 아멘 하십시오. (회중 아멘.) 그러니까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는 것은 단지 이름만 거론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존재를 훼손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로 정리할 것은 망령되이 일컫는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망령되다는 말은 히브리어로 샤웨입니다. 이 말이 구약에서 분명하게 두 가지 뜻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첫 번째가 거짓되다 입니다.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조금만 내려가면 신명기 5장 20절에 ‘증거하지 말찌니라’ 제9계명이 나옵니다. 이 거짓이라는 말이 망령되다는 말과 동일한 샤웨입니다. 그러니까 망령되이 부르지 말라는 말은 거짓되게 부르지 말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거짓되게 즉 진실하지 않게 부르는 것이 망령되게 부르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전의 마당만 밟는 사람들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회중 아멘.) 수많은 제물을 가져온들 수양 수송아지 기름과 피와 고기를 드려 내가 배부른데 언제 이런 것들을 가져 오라 했느냐. 소용없다. 이런 행위는 너희가 다만 성전의 마당만 밟는 것일 뿐이다. 이렇게 말씀하신 이후 13절에 무어라 말씀하십니까.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 여기서 헛된 이라는 말이 망령되이 라는 말과 같습니다. 그러니까 망령되이 부르지 말라는 말은 헛되게 부르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 우리 생활 가운데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는 모습은 없을까요. 그것을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거짓 맹세 거짓 약속을 하는 것들입니다. 사람들은 자기가 하는 말이나 주장을 확실한 것으로 보이고 또 만들기 위해서 여호와의 이름을 함께 말합니다... 여러분 그렇게 할 수 없는 약속이고 지켜질 가능성이 희박한 약속인데 마치 틀림없이 될 것 같이 여호와의 이름을 끌어들여서 약속을 하는 그것이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입니다... 그런데 헛된 약속 거짓된 약속을 하나님의 이름을 끌어들여 한다면 이것은 심각한 죄입니다. 레위기 19장 12절에 ‘너희는 내 이름으로 거짓 맹세함으로 네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 나는 여호와니라’ 말씀합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하는데 하늘에 두고 맹세하는데 성전을 두고 맹세하는 등 여호와의 이름을 끌어들여 맹세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약속이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이게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들이 진실하기를 원하십니다. 여러분 믿으시면 아멘 하십시오. (회중 아멘.) 하나님은 거짓을 싫어하실 뿐만 아니라 거짓과 함께하실 수도 없습니다. 거짓은 마귀의 습성이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8장 44절에서 예수님이 마귀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장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그러므로 거짓 약속과 거짓 맹세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는 것입니다... 로마서 2장 24절 중요한 말씀입니다. 같이 읽어봅시다. ‘기록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이 너희로 인하여 이방인 중에서 모독을 받는도다’ 여러분 무서운 말씀입니다. 너희 때문에 여호와의 이름이 이방인 가운데서 모독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런 일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정말 이런 일을 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여러분 우리 주변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함부로 훼손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모 종교 집단에서 이런 일을 행하고 있습니다. 지금부터 제가 하는 말을 잘 들으십시오. 이들이 누구인지는 설교 말미에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우리 주변에 많이 있는 이 사람들은 교인들을 자기 교파의 교인들로 만들기 위해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릅니다. 구체적인 예는 이렇습니다. 여러분이 어느 날 어떤 사람을 우연히 만나게 됩니다. 만난 그 사람은 요즈음 보기 드물게 영적이고 신령하고 신실한 사람입니다. 대부분 목사이거나 선교사입니다. 아니면 사역을 하다가 지금 잠간 접어두고 기도원에서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기다리는 신실한 전도사이거나 기도 많이 하는 권사입니다. 그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런데 내가 만난 이 사람이 내가 고민하고 있는 문제나 우리 목사님이 내게 쉽게 이야기해 주지 않는 문제들을 내게 관심을 갖고 하나님 말씀을 가르쳐 줍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인도가 너무 정확하고 확실한 것처럼 느껴지니까 정말 이런 신실한 분을 만나게 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리고 싶은 마음이 들게 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더 배우자고 여러분을 어떤 곳으로 인도합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만난 그 사람은 영적인 목사도 선교사도 전도사도 권사도 아닙니다. 우리가 분명하게 알아야 될 것은 그는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이 아닙니다. 누가 보냈느냐. 그들은 나의 정보를 내 주변에 있는 어떤 사람들로부터 이미 다 전달을 받고 그들의 보냄을 받은 연기자들입니다. 예를 들어 남 집사님이 옆의 조 집사님을 통해 어떤 사람을 만났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나한테 너무 잘 해주고 잘 도와줍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보내주신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보내신 사람이 아녀. 남 집사님의 정보를 조 집사님이 다 알아서 교회 밖의 사람에게 알려준 겁니다. 여러분 이런 겁니다. 어떤 상황이냐. 여러분 주변에 우리 대전남부교회 교인으로 위장해서 들어온 일명 추수꾼들이 있습니다. 이들이 교회 상황도 살피고 교인 상황도 다 파악을 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포섭할 대상을 찍어요. 저 집사님은 이런 문제도 요 집사님은 저런 문제도 있구나 하는 것을 파악하고 지금 이런 상황에서 접근하면 낚이겠구나 하는 판단으로 접근합니다. 그리고 어떤 문제로 고민하는지 어떤 상황에 있는지 미래 기도 제목은 어떤 것인지 하는 데이터와 정보를 내가 신실하다고 믿고 만난 사람에게 다 전달합니다. 그리고 어느 날 우연한 만남을 가장합니다. 나에게 친절하게 대해주고 나를 찾아왔던 그 집사님이 어느 날 영화관 앞이나 커피숍에서 둘이 만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몇 년 동안 만나지 못했던 사람인 것처럼 그 사람을 만나고 나한테 소개시켜 줍니다. 그래서 잠시 인사를 나누었는데 한참 지난 뒤 전화가 옵니다. 어떤 전화이냐 하면 내가 기도하는 중에 당신이 계속 생각이 납디다. 하나님이 나에게 형제에 대한 마음을 계속 주셨습니다. 내가 당신과 처음 만난 뒤 계속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주 안에서 내가 도움을 드리고 싶어 전화를 했습니다. 여러분 표면적으로 보면 얼마나 거룩하고 아름다운 모습입니까. 그런데 이것은 한 마디로 말하면 여호와의 이름을 거짓되게 이용하는 종교적인 사기극에 불과합니다. 여기에 혹하면 여러분은 그들의 낚싯줄에 걸려든 겁니다. 이제부터 그 사람은 아카데미 주연상을 탈 기세로 연기를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을 안내해 데려가는 데가 있습니다. 그곳은 복음방입니다. 그곳에서는 성경의 비유를 가르칩니다. 씨 뿌리는 비유 등을 가르치면서 슬쩍 한마디 던집니다. 교회에 대한 비판이죠. 이 비판에 반응을 보이면 점차적으로 수위를 높여 갑니다. 결론이 어디까지 이르냐하면 교회에 구원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에 동의하면 교회 비판은 중단됩니다. 여러분 이 복음방이라는 곳은 그들의 신분을 노출시키지 않으면서 사람들을 학습하고 세뇌시키는 장소입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들려드리는 이유는 우리 교회에 추수꾼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교회 집사님이 저한테 이런 말을 합니다. ‘어떤 사람이 나한테 자꾸 어떤 만남을 가장해 신령한 목사님을 만나게 해 가라지니 씨 뿌리는 것이니 하는 여러 비유를 듣게 합니다. 그런데 저희 믿음의 교육과는 영 틀려서 안 가겠다고 했습니다.’ 이들이 누구냐 하면 바로 이만희를 교주로 하는 신천지입니다. 이들은 이렇게 거짓말하고 이 거짓을 정당화합니다. 성경에 마귀는 거짓말쟁이고 거짓의 아비라고 했습니다. 거짓을 행하면서도 이것은 죽어가는 사람을 건져내기 위한 전략이고 정당한 거짓말이라고 합니다. 이 신천지의 거짓말은 의를 위해서 하는 거짓말이 아니라 자신들의 목적을 위해서 하나님을 도구화시킨 것입니다. 이만희를 예수님과 동일한 메시아로 만들고 교회에는 구원이 없고 이만희를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기에 속지 마십시오. 여러분 주변에 신령한 사람이 있다고 해도 믿지 마십시오. 정말 신령한 사람은 신령한 티를 내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사람들이 신령한 티를 냅니다. 두 번째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믿음 없이 미신적이고 마술적으로 부르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은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올바른 행위로 인정합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고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는다고 했죠. 그러니까 주의 이름을 부르는 것은 믿음의 행동입니다. 어떤 사람이 고난 중에 있는데 너무 힘들어요. 그런데 이 사람이 고난 가운데 좌절하고 낙심하지 않기 위해 탄식처럼 주여! 불렀다면 주의 이름을 부른 이 외마디는 주님을 의지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아니라 의미 없이 함부로 주의 이름을 부르거나 마치 주의 이름이 어떤 마술을 행하는 주문인 것처럼 부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이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는 것입니다. 도박이나 범죄 행위가 드러났을 때 어떤 사람들이 주여! 읊조리는 것 같은 행위 말입니다. 이런 행위가 믿음입니까. 이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그 하나님을 전락시키는 행위입니다. 이런 행위를 예전에 하신 분들은 회개하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을 ‘금 나와라 뚝딱 금 나와라 뚝딱 수리수리마하수리’ 정도의 주문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주변에도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습니까. 우리가 기도할 때 아무런 의미 없이 생각도 없이 주문처럼 주여! 주여! 해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주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7장 21절에서 예수님이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주여! 라는 말이 입에 붙어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무슨 일이든 주여 주여 주여 했습니다. 예수님 하신 말씀은 주의 이름을 함부로 부른다고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천국에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이름을 주문으로 외는 기독교 무당들이 많이 있습니다. 기도해서 하나님의 뜻을 안다고 점치고 그것을 알려준다는 미신 행위를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모든 것에다 여호와의 이름을 갖다 붙이면 그게 믿음의 일이 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도 아닌 자기의 생각을 하나님의 뜻인 듯 포장해서 말합니다. ‘내가 기도했더니 하나님이 나에게 이런 마음 이런 생각을 주셨다’ 떠벌립니다. 솔직하게 자기 생각인데 하고 말해야지 왜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릅니까. 여러분 하나님이 자신의 뜻을 나타내시는 것을 신학 용어로 계시라고 합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시고 나타내시는 방법을 성경에서 보면 때로는 구름으로 때로는 불로 때로는 음성으로 때로는 환상으로 때로는 꿈으로 하십니다. 어떤 때는 직접 말씀하시기도 합니다. 그런데 오늘날도 꿈과 환상을 보고 예언하는 사람들이 기도원에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꿈과 환상은 불완전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완전한 계시를 주셨습니다. 그게 무엇입니까. 그것은 말씀 즉 성경입니다. 하나님의 뜻의 완전한 계시는 성경입니다. 꿈과 환상이 하나님의 계시의 도구도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마귀의 도구도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꿈과 환상을 자기 마음대로 가공합니다. 거짓 선지자들이 그랬지 않습니까. 거짓 선지자들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가지고 나왔어요. 그런데 그게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어요. 역대하 18장에 보면 남 이스라엘과 북 유다가 연합군을 만들어 동편에 있는 길르앗 라못이라는 공격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신앙의 사람 여호사밧이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선지자에게 물어보자고 제안을 합니다. 그래서 선지자 400명을 불렀습니다. 그때 제일 잘 나가는 선지자가 누구였습니까. 시드기야였습니다. 역대하 18장 10절에 보면 시드기야는 철로 뿔들을 만들어 가지고 ‘여호와의 말씀이 왕이 이것들로 아람 사람을 찔러 진멸하리라’ 말했습니다. 그리고 11절에 보면 다른 선지자들도 ‘길르앗 라못으로 올라가서 승리를 얻으소서 여호와께서 그 성을 왕의 손에 붙이시리이다’ 말했습니다. 여호와의 이름으로 예언을 했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예언을 확고하게 만들기 위해서 철로 뿔을 만들어 여호와께서 이 뿔로 저 아람 사람들을 찔러 진멸하게 할 것입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시청각 교재를 만들어 자기의 예언이 확실하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여러분 이 거짓 선지자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예언이 안 맞았습니다. 전쟁에서 남쪽 이스라엘과 북쪽 유다가 대패를 했습니다. 이스라엘 왕 아합이 전사했습니다. 유다 왕 여호사밧은 간신히 목숨만 부지했습니다. 여러분 가장 정확한 계시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회중 아멘) 이 말씀을 붙잡고 기도해야 합니다. 말씀에 나와 있는 대로 기다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내가 너의 가정을 고난 가운데서 건져 주겠다 붙들어 주겠다’고 하나님께서 말씀을 통해 약속하셨으면 믿고 기다리는 겁니다. 그 말씀으로 만족을 못하니까 어떻게 합니까. 기도원에 가서 신령한 소리를 듣고 싶고 자신의 미래를 내다보고 싶어 하는 이게 뭡니까. 불신앙의 행동 아닙니까. 교회 목사님들은 별로 신령하지 못해서 기도원에 가서 신령한 사람 말을 들어야 속이 좀 시원해지지 하는 겁니다. 어느 게 신앙적인 자세입니까. 말씀을 붙잡는 겁니까. 아니면 말씀에 만족을 못하니까 신령한 소리 듣고 미래에 대한 점을 치는 게 옳은 겁니까. 지금 성경에 있는 문자는 죽은 것이고 기도원의 신령한 분들의 말은 살아 있는 하나님 말씀입니까. 그게 바른 믿음입니까. 그런데도 여러분 기도원 가지 않습니까. 제가 기도원 가는 거 막는 거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나를 쳐 복종시키고 하나님 말씀 붙들고 기도한다면 기도원 가는 거 반대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기도원 가세요. 뭔가 마음이 컬컬해서 점치는 것처럼 미래에 대해 알고 싶어 한다면 기도원 백번 가도 소용없습니다. 옛날 경건한 유대인들은 여호와의 말씀을 귀히 여기고 함부로 대하지 않았습니다. 여호와라는 글자만 나와도 여호와라고 읽지를 않았습니다. 어떻게 하나님 이름을 그냥 부를 수 있느냐는 겁니다. 마치 오늘날 자식이 아버지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당신 아버지 이름이 어떻게 되느냐 듣고 홍길동입니다 라고 대답한다면 그는 예의가 없는 사람입니다. 아버지 성함을 물으면 반드시 홍 길 자 동 자이십니다 라고 대답해야 합니다. 아버지 이름만 해도 우리가 함부로 부를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유대인은 여호와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았습니다. 여호와라고 읽지 않고 아도나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칭호는 나의 주 나의 하나님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이름은 여호와라고 쓰고 아도나이라고 읽은 것입니다. 너무 거룩하신 이름이기 때문입니다. 경건한 서기관들은 오늘날처럼 성경을 출판할 수 없었기 때문에 여호와라는 이름이 나오면 점 넷을 찍어 놓고 붓을 논 다음 목욕을 했습니다. 서기관은 자신을 정결하게 한 다음 그때 다시 여호와라는 글자를 썼습니다. 시편 99편 3절에 ‘주의 크고 두려운 이름을 찬송할찌어다 그는 거룩하시도다’ 라고 했습니다. 주의 크고 두려운 이름이라고 했습니다. 시편 141편 3졀에 보니까 ‘여호와여 내 입에 파수꾼을 세우시고 내 입술의 문을 지키소서’ 라고 했습니다. 함부로 여호와의 이름을 말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부르지 말라고 하는 것은 우리 생활 전반에 미치는 말씀입니다. 나의 행동이 로마서 2장 24절의 ‘너희 행위로 인하여 내 이름이 이방인들 가운데 모욕을 받는구나’ 하는 말씀에 적용이 되면 안 됩니다. 오늘 여호와의 이름을 거짓되게 부르지 말고 여호와의 이름을 경솔하게 마치 주문처럼 부르지 말아야 합니다. 크고 두려우신 하나님 영광을 받으실 하나님이시라는 분명한 생각과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고 찬양하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회중 다 같이 한 목소리로 아멘)” 우리가 성경을 통해 우리의 참 모습으로 주의 영광을 보면 주와 같은 형상으로 변화하게 될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겸손해지고 하나님의 도움을 바라고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게 될 것이다. 그러한 삶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게 되고 드러내게 될 것이다. 그렇듯 류명렬 목사는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기 위해 대전남부교회의 생존한 두 원로 목사 박요한 목사와 황승기 목사를 섬기고 있듯 그 노회와 우리 총회도 섬기리라. 그래서 나는 생각한다. 제90회 총회 총회장을 지내고 찬송가공회 이사장을 지내며 총회와 오랜 소송을 벌인 황승기가 이제까지 한 일 중에 가장 잘한 일이 있다면 그것은 자신의 후임으로 2008년 10월 21일 류명렬 목사를 세웠다는 것이다. 대전남부교회 제6대 위임목사 류명렬은 성경적 설교와 인품으로 그 목양지를 배가시키고 여호와의 이름을 높였다. 그렇듯 그는 총회도 섬겨 발전시키는 섬김의 지도자가 될 것이다. 2016-08-11
    • G.MISSION
    • G.SERMON
    2016-08-13
  • 유태영의 메시지
    김영우와 같은 충청도 생긴 것도 비슷한 반기문 ‘애매 화법’의 한국 1인자 미국인들 가장 싫어하는 욕 “거짓말쟁이(liar)” 서천읍교회 단 1년도 제대로 시무하지 않고 총신총장도 별정직이라 이중직이 아니라는 변명의 달인 김영우 전국을 둘러보면 전국 어디에나 교회가 있고 들어보면 어디에나 메시지가 있다. 설교는 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늘 우리 주위에 있다. 메시지가 반드시 내 안에 들어와 마음을 휘저어 놓고 나갈 필요는 없다. 인생을 진지하게 묻지 않는다고 메시지가 아닌 것은 아니다. 때로는 사소한 메시지, 평범한 메시지가 그립기도 하고 그것이 잔잔히, 그러나 더 오랫동안 마음을 움직이기도 한다. 유태영(서광교회)이 능력 있는 목사라는 소문을 진즉에 들었다. 이제야 인연이 닿아 그의 메시지를 들을 수 있었다. 지난 4월 24일 주일 전주에 있는 서광교회에서였다. 그가 들려준 메시지는 본문 요한복음 14장 6절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제목 ‘길이 있습니다’였다. 유태영의 메시지 자체는 단순하다고도 할 수 있다. 별다른 극적 사건도 없고, 생의 진리를 새삼 만나게 될 만한 기발한 사고 전환도 없다. 유태영이 들려주는 메시지는 주제에 충실하면서 시종일관 조용하게 전하려고 애썼다. 그는 뜨거운 환호보다도 더 오래도록 가슴을 흔드는 잔잔한 마음의 울림이 있는 메시지를 전하려고 했다. 그는 강조할 때도 부드럽게 말했다. 둘러보면 어디에나 메시지가 있고 들어보면 어디에나 메시지가 있다. 그러나 그 메시지가 항상 우리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아니다. 그 메시지와 메시지에 민감하게 귀 기울이고, 우리가 공감할 수 있는 메시지로 만들며 우리 마음에 잔잔히, 오래도록 남을 수 있는 메시지로 바꾸어 놓는 좋은 설교자가 있어야 한다. 그 순간 ‘길이 있습니다’는 어느새 나의 길이 된다. 그것이 목사의 힘이고 좋은 설교의 신비다. 듣기 좋은 중간 톤으로 전한 그의 메시지는 20분 남짓이었다. 야곱의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까. 에서의 길을 걸어가고 있습니까. 인생의 길을 걷는데 내 인생의 종착역이 어디 입니까. ... 길을 크게 나누면 두 가지 길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통행 수단으로서의 길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사람이 다니고 차가 다니고 기차가 다니는 통행로를 길이라고 합니다. 또 하나의 길은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야 할 사람의 도리를 길이라고도 하고 있습니다. 사람은 도덕적 존재이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지켜야 할 도리, 윤리적으로 지켜야 할 도리를 길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 저는 총회에서 교정선교회라고 하는 상비부를 섬기고 있습니다. 부산교도소에 갔습니다. 거기서 설교를 하기 전 찬양 순서가 있었습니다. 모두 너무도 열심히 찬양을 합니다. 교도소 안에 가게 되면 풍금을 치는 분, 기타를 치는 분, 찬양을 인도하는 분 여러 봉사자들이 있습니다. 찬양을 인도하는 한 젊은 분이 너무나 잘 해서 제가 같이 간 목사님에게 말했습니다. “저 청년 너무 잘 합니다.” “저 청년이 누구인 줄 아십니까.” “모르는데요.” “구미 어느 교회 권사님 아들인데 생활금고를 털다가 사람을 죽이고 말았습니다.” 예배가 끝나고 그 청년과 악수를 하면서 말을 나누는데 “목사님, 제가 길을 잘못 들었습니다”고 하는 겁니다. 얼마 전에 순천교도소에 가서 설교를 했습니다. 친구 목사님 교회 다니는 청년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깜짝 놀라 말했습니다. “아니 한 2년 못 봤는데 여기 있었다는 말이냐. 어떻게 여기 왔느냐.” “제가 길을 잘못 들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길을 가는데 자기 길이 맞는 것 같고 옳은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잠언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그것은 사망의 길이다... 여러분 길을 가는데 필요한 게 몇 가지 있습니다. 첫째 목적지가 결정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어딘가로 가고 있습니다. 출발점이 있기 때문에 종착점이 있습니다. 성경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우리 인간을 흙으로 만드셨습니다. 우리 육신이 흙에서 왔기에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죠. 영혼은 하나님께로 왔기에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정신없이 사는 사람은 목적지가 없이 삽니다... 여러분 인생의 종착지는 어디라고 생각하십니까. 천국가든지 지옥가든지 가봐야 알겠습니까. 우리 앞길에는 두 가지 길밖에 없음을 알아야 합니다. 좁은 길과 넓은 길. 마태복음 7장에서 말하는 길입니다. 좁은 길은 좁기 때문에 가기 힘들어 가는 사람이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길은 가면 갈수록 편해지고 축복의 길이 됩니다. 넓은 길은 넓고 평평하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가면 갈수록 그 길은 어두워지고 절망과 멸망의 길이 됩니다. 여기서 좁은 길은 천국 가는 길을 의미합니다. 넓은 길은 지옥 가는 길을 의미합니다. 오늘날 교회에서 천국과 지옥을 말하지 말고 죄를 말하지 말고 헌금을 말하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나 이 세 가지를 빼면 어찌 되겠습니까. 인생의 종착역은 어디입니까. 우리는 알 수가 없습니다. 교도소의 그 형제처럼 ‘내가 길을 잘못 들었습니다’ 말하겠습니까... 인생길에는 안내자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지금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미지의 길을 가고 있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내 영혼아 어찌하여 불안하여 하는고.’ 키르케고르는 ‘우리 인간은 불안이라는 열차를 타고 절망이라는 터널을 지나 죽음이라는 종착역에 도착하는 존재라고’ 말했습니다. 여러분 인생의 안내자 동반자가 누구이십니까. 어려서는 부모 나이가 들어서는 반려자 늙으면 자식들이 안내자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우리의 영원한 안내자는 없습니다. 이걸 아셔야 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에게 영원한 안내자가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분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게 나와 함께하시며 인도해 주시며 붙들어 주시며 위로해 주시며 격려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인생에는 황혼이 다가옵니다. ‘볼지어다 세상 끝 날까지 너와 함께하리라’ 하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십니다. 나를 붙잡아 주실 분 예수 한 분밖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영원한 안내자와 보호자이십니다. 요한복음 14장 18절에서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내가 곧 그 길‘이라는 위대한 선언을 해 주셨습니다... 잘 살 수 있는 사람이 더 잘 살 수 있고 행복한 사람이 더 행복해 질 수 있고 밀려난 사람들이 위로받고 사랑받을 수 있는 길이 바로 있습니다. 왜 사는가. 어디로 가는가. 어떻게 사는 것이 사람답게 사는 것인가. 이것을 모르는 사람들이 올바르게 살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병들고 불행한 사람들이 고침 받고 새롭게 태어나는 아름다운 길이 있습니다. 갈등과 증오와 불평이 사라지고 화해와 사랑이 넘치는 세상을 만드는 길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 길은 바로 ’내가 그 길이다‘ 말씀하신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입니다. 길 되신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그 길이신 그를 따라가는 것입니다. 길 되신 그분 안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기서 길을 찾으십시오. 여기서 길 되신 예수님을 만나십시오. 길 되신 주님과 함께하십시오. 예수님은 우리 길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안내자가 되어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보호자가 되어주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영원토록 함께해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나라에서 느낌표로 끝난 내 영혼이 영원토록 주님과 함께 찬송하게 될 것입니다. 유태영의 메시지가 절대 필요한 김영우와 같은 충청도 출신이고 생긴 것도 비슷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애매 화법’의 한국 1인자다. 그런데 그런 화법의 일본 1인자는 단연 아베 신조 총리다. “지금 현재로선…” 같은 정치인 특유의 ‘조건부 어법’은 기본. 반 총장 저리 가라 할 ‘기름장어 화법’이 주특기다. 그런 아베 총리가 너무나 단호한 표현을 쓰는 걸 보고 깜짝 놀랐던 적이 딱 한 번 있다. 1년 반 전인 2014년 11월 18일 저녁 관저 회견장에 선 아베 총리는 “원래 내년(2015년) 10월에 소비세를 8%에서 10%로 올리기로 약속했지만 연기하려 한다. 하지만 18개월 후(2017년 4월)에는 ‘반드시’ 올린다. 여러분께 분명히 ‘단언’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아베는 1일 또다시 소비세 인상을 2년 반 연기했다. 시무도 하지 않는 서천읍교회 시무목사면서 총신 총장직이 이중직이 아니라는 김영우처럼 아베도 “지금까지의 약속과는 다른 새로운 판단”이란 알 듯 모를 듯한 이유를 댔다. 근데 ‘2년 반’ 뒤면 그가 퇴임한 후다. 더 웃기는 건 핵심 인사들이 하귀호처럼 군소리 없이 “넵. 알겠습니다”를 복창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아베가 용의주도하게 여권 지도부 인사들을 하귀호나 주진만처럼 다독여 주었기 때문이다. ‘네마와시(사전 정지작업)’가 ‘약속’보다 상위 가치인 일본식 ‘배려 문화’의 일단이다. 그들에게 가장 심한 욕은 “예의(배려심) 없는 놈”이다. 한국은 어떨까. 반 총장 방한 당시 야당에서 나온 “노무현과의 의리를 지켜라”는 말에 답이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총선에서 쪽박을 차면서도 손보려 했던 것도 ‘배신의 정치’였다. 우리 사회 전반에 걸쳐 친구, 회사, 심지어 연예인 섭외에서도 으뜸 가치는 의리다. 일부 총회 정치꾼들도 하나님의 믿음이 아니라 시정잡배들의 이해관계에 따르는 의리에 의지해 정치를 한다. 그리고 그들은 총회 정치를 한답시고 부정선거의 금권, 납골당 기금, 아이티 구제 헌금 등을 나누어 가지며 불의한 의리를 다졌다. 그러면 미국은 어떨까. 1987년 미국에 1년 살아보니 예의는 없어도 별문제 없다. 배려심이나 의리 따윈 더더욱 없다. 총회 정치권과 달리 다만 말을 뒤바꾸거나 거짓말을 하는 건 설 자리가 없다. 흥미로운 건 ‘막말 대장 트럼프’보다 ‘거짓말 대장 힐러리’에 대한 상대적 비호감이 더 크다는 사실이다. 트럼프의 막말 100개보다 “(3만 개의 e메일이 있던) 내 개인 e메일 서버는 남편과 e메일을 주고받기 위한 것이었다(힐러리)→난 평생 단 두 통의 e메일밖에 쓴 적이 없다(빌 클린턴)”는 힐러리의 악의적 거짓말 1개에 더욱 분노한다는 말이다. 미국인들이 가장 싫어하는 욕이 “거짓말쟁이(liar)”인 이유를 알 것 같다. 힐러리를 ‘부정직한 힐러리(Crooked Hillary)’라 명명해 공격하는 트럼프의 감각은 개인적 호불호를 떠나 압권이다. 앞으로 5개월 남은 미 대선에서 분명한 건 주위 사람들이 하도 권해서 부총회장 후보로 나왔다는 김영우 같은 반기문의 ‘애매 화법’이나 총신 총장은 별정직이라 이중직과는 하등 상관이 없다는 하귀호 같은 아베의 ‘기름장어 화법’ 같은 건 통하지 않는 진검승부의 전장이란 점이다. 그래서 이제 실제로는 서천읍교회도 제대로 시무하지 않았고 총신총장도 별정직이라 어느 법에도 걸리지 않는 변명의 달인 김영우는 이 찬란한 6월 총회 대들보 정용환과 섬뜩한 진검승부의 결투장 출전을 위해 6월 10일까지 거금 7000만 원을 내고 등록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3개월 뒤 총회 현장에 후보이든 총회 결의 위반자이든 어떤 모습으로든 총회 현장에 반기문 얼굴과 혀로 서야 할 것이다. 그러면 유태영이 전하는 메시지가 그의 귀를 맴돌 것이다. 우리의 인생에는 황혼이 다가옵니다. ‘볼지어다 세상 끝 날까지 너와 함께하리라’ 하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이십니다. 나를 붙잡아 주실 분 예수 한 분밖에 없습니다... 이제는 반기문과 아베 같은 김영우가 사법에 의지하는 가처분이나 정치꾼들을 전부 매수해도 하나님의 심판을 총회 현장에서 피할 수 없을 것이다. 2016-06-06
    • G.MISSION
    • G.SERMON
    2016-06-05
  • 성령세례와 표징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에게 나타나는 중요한 표징은 입이 열리는 것 3월 4일 둘째 날 새벽 5시 전국남전도회연합회 회원 500여명 운집 옥성석 목사 옥한흠 목사가 환생한 듯 은혜 충만 인간의 보잘것없음을 이야기할 때 우리는 주로 자연의 힘을 꺼내든다. 하지만 자연은 우리의 생이 결코 허무하지 않다는 것도 깨닫게 해 준다. 자연은 늘 거기 있기에 그 이야기가 잘 들리지 않을 뿐이다. 어느 때부턴가 매일 해가 뜨고, 때가 되면 비가 오는 세상의 이치가 하나님께서 ‘살아라’라고 말씀해 주고 있는 걸로 받아들였다. 봄날 돋아나는 싹이나 지난밤 비에 젖은 흙이 그렇게 반가웠다. 또 누군가에게 베푸는 것을 나의 아량으로 여기던 마음마저 ‘남에게 줄 수 있는 이 기쁨도 그냥 받은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새벽에 그냥 충만히 받은 옥성석 목사의 말씀의 은혜처럼. 3월 4일(목) 둘째 날 전국남전도회 새벽기도회 강사 옥성석 목사는 생전의 옥한흠 목사가 더욱 성령이 충만하고 말씀이 깊어져 환생한 듯 성령 충만한 말씀으로 성령 충만한 은혜를 끼쳤다. 성경 봉독 담당자가 예배 순서지와 다른 성경 본문을 읽었다.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을 때에 바울이 윗 지방으로 다녀 에베소에 와서 어떤 제자들을 만나 가로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가로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 바울이 가로되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대답하되 요한의 세례로라 바울이 가로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저희가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시므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모두 열 두 사람쯤 되니라 사도행전 19:1-7 옥성석 목사는 날렵한 표정에 초롱에 담긴 촛불의 눈빛으로 입을 열어 불빛이 번지듯 잔잔한 어조로 말씀을 전했다. “제가 일전에 이메일을 하나 받았습니다. 캐나다에 계신 분이 이런 내용의 이메일을 보내왔습니다. 내용을 그대로 읽어드리겠습니다. ‘목사님, 부탁을 드릴 것이 하나 있습니다. 제가 목사님 설교 테이프를 통해 은혜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1990년 6월 3일, 그리고 10일, 그리고 17일, 목사님께서 성령에 대해 설교를 하셨습니다. 이 중 두 개는 지금도 잘 들리는데 그 중 하나는 망가져 그 뒤의 말씀으로 연결이 잘 안 되고 있습니다. 혹시 그 테이프를 구할 수 있는지요. 아니면 혹 설교원고라도 주시면 큰 도움이 되겠습니다. 목사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신앙생활에 큰 도움을 받고 있기에 염치없이 부탁드립니다.’ 저는 이 이메일을 받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여러분 1990년이면 언제 적입니까. 그런데 그 때 설교 테이프를 지금도 듣고 계시다는 것입니다. 너무 듣다 보니까 설교 테이프가 망가져서 연결이 잘 안되는데 설교 테이프를 혹시 하나 다시 구할 수 있는지 없으면 설교 원고라도 보내달라는 그런 부탁이었습니다. 저는 그 이메일을 받고 한참 그 이메일을 들여다보면서 야 오늘날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렇게 영적으로 갈급해 있다. 그런데 나는 과연 강단에서 어떤 내용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가. 너희들이 이렇게 살면 물질적으로 축복 받고 너희들이 이렇게 살면 행복하고 너희들이 이렇게 살면 자녀들이 잘 된다는 혹시 이런 주제만 가지고 표피를 긁어주는 그런 설교만 하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자책감이 저에게 있었습니다.” 옥 목사는 잠시 생각에 잠긴 듯 허공을 응시했다. “여러분들이 잘 아시는 대로 지난 2011년 온누리교회 하용조 목사께서 64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정말 참 귀한 분이셨습니다. 정말 저도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문상을 했습니다. 그 목사님은 걸어 다니는 병동이었습니다. 특별히 그는 간암으로 오래 동안 고생을 했고, 간암으로 무려 일곱 차례나 수술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또 콩팥이 좋지 못해서 투석을 해야만 했습니다. 일주일에 세 번씩 투석을 했고 한번 들어가면 네 시간씩 투석을 해야 했습니다. 그런 일들을 말년에 진행을 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말년에는 자주 강단에 서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어찌어찌하여 주일날 온누리교회 강단에 서게 되었습니다. 성도들은 오랜 만에 하 목사님이 강단에 서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모두 다 기대하는 마음으로 강단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때 강단에 서신 하 목사님은 자신을 주시하는 성도들을 향해 이렇게 하트 모양으로 인사를 하신 뒤 이렇게 외치셨습니다.” 전구 남전도회 회원들은 깊은 바다의 침묵 속에 옥성석 목사를 향해 눈과 귀를 집중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의 관심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자녀들이 가져야 할 관심은 성령입니다. 성령 충만함입니다. 성령으로 생각하고 성령으로 행하고 성령으로 말해야 합니다. 그가 성령의 지배를 받지 못한다면 그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가 생사를 넘나드는 그런 긴 투병의 과정에서 그가 깨달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성령이었습니다. 마지막까지 붙잡고 의지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 하니. 성령이었다는 말입니다. 오늘 나의 관심사는 어디에 있으며 무엇 때문에 교회를 찾으며 무엇 때문에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무엇 때문에 그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옥 목사는 회중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한 부부가 스무 살짜리 아들을 데리고 등록할 교회를 하나 찾고 있었습니다. 섬길 교회를 하나 찾기 위해 이 교회 저 교회 쇼핑을 하고 있습니다. 이 교회가면 여기에 문제가 있고 저 교회 가면 이 문제가 또 눈에 드러납니다. 그래서 예배를 마치고 돌아갈 때 부부는 그 교회에서 느꼈던 생각들을 차 속에서 토해냈습니다. 특별히 남편은 목사의 설교에 대해서 비판을 하는데 일가견이 있고, 아내는 아내대로 불평을 했습니다. 아들은 음악을 전공해서인지 교회 예배 분위기라든지 교회 찬양대라든지 이런 부분에 대한 평가가 아주 탁월했습니다. 그날도 어떤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고 돌아가면서 남편은 남편대로 설교가 어떻다느니 아내는 아내대로 찬양대 곡이 느리니 어쩌니 하며 영 마음에 안 든다느니 했습니다. 그렇게 비판을 하며 가고 있는데 뒷좌석에 앉아 있던 아들이 한마디 던졌습니다. ‘그만 하세요. 천 원짜리 예배가 그렇지 뭐.‘ 이러는 겁니다.” 옥 목사는 잠시 숨을 몰아쉬었다. “오늘 여러분들이 이 장소에 오셨습니다. 이곳에 오신 관심사가 도대체 무엇입니까. 목적이 도대체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혹시 그 옛날 부활하신 주님 가까이에 모여든 제자들과 같은 관심사를 가지고 이 자리에 참석하지는 않았는지요. 예수님이 부활하셨을 때 흩어졌던 수많은 제자들이 다시 주님 곁으로 몰려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질문을 던졌습니다. ‘주께서 이스라엘을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행 1:6). 이 말의 뜻이 도대체 무엇입니까. 드디어 당신이 이 나라의 대통령이 되는 것입니까. 이 나라의 권력을 잡는 것입니까. 우리가 드디어 외무장관도 하고 내무장관도 할 기회가 온 것입니까. 바로 이런 말입니다. 그때 주님께서 호통을 치듯 말씀하셨습니다. 때와 기한은 하나님에게 있는 것이다. 그것은 너희의 알 바 아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너희에게 성령이 임할 때까지 여기에 머물러 있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은 저들의 관심사가 성령 충만해야 함을 말씀하시고 성령 충만에 관심을 가져야 함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옥 목사는 손을 내밀며 새벽을 깨우느라 눈을 밝히는 남전도회 회원들을 둘러보았다. “사랑하는 전국 남전도회 여러분 우리 모두의 관심사가 이 한 가지에 모아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사도행전 19장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을 보시면 에베소교회에 바울이 왔습니다. 바울은 이 에베소교회를 오래 전에 세웠습니다. 그는 이 에베소교회 성도들의 신앙이 어떤지 살펴보기 위해 온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 사도가 이들에게 와서 지금 던지는 질문이 무엇입니까. 2절에 보시면 너희가 믿을 때에 뭐요. 성령을 받았느냐 그렇게 말씀합니다. 여러분 성경을 보면 바울이 누구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습니까.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는 질문을 누구에게 하는 겁니까.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에베소에 와서 제자들에게 말했다 말씀합니다. 너희에게 말했다 말씀합니다. 믿는 자들에게 말했다 말씀합니다. 여기에 너희는 누구입니까. 에베소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하는 신자들입니다. 한걸음 더 나가서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입니다. 한걸음 더 나가서 그들은 제자들입니다.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 사도는 이 제자라는 용어를 어중이떠중이 아무에게나 붙이지 않습니다. 마태는 열두 제자에게만 제자라는 용어를 붙입니다. 누가는 좀 더 광의적으로 제자라는 용어를 쓰고 있습니다. 하지만 처음 믿는 사람에게는 이 제자라는 용어를 쓰지 않습니다. 여러분 바울이 이 제자라는 용어를 쓸 때는 신앙생활을 오래 했던 분들이나 교회 지도자 위치에 있는 분들에게 제자라는 용어를 사용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시면 에베소교회 너희 성도들, 한걸음 더 나가서 예수를 믿는다고 하는 자들, 한걸음 더 나가서 오래 신앙생활을 한 교회 지도급 인사들에게 던진 질문이 무엇이냐. 너희가 믿을 때에 뭐요. 성령을 받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옥 목사는 컵을 들어 목을 축였다. “여기서 충격을 받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지를 모르는 어중이떠중이에게 바울 사도가 이런 질문을 던졌다면 우리는 그냥 넘겨버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오래 한 이 사람들에게, 교회 지도급에 있는 이 사람들에게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하고 질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더 충격적인 사실은 그 다음에 있는 말씀입니다. 이 사람들은 이 질문을 받고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닙니다. 저희들은요. 성령이 계시는 것도 모릅니다.’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성령이 계심도 모른답니다. 이것은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가르쳐 줍니까. 성령을 받지 아니 했음에도 불구하고 얼마든지 가면을 쓰고 신앙생활을 잘 하는 체 할 수 있다는 겁니다. 성령의 사람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얼마든지 교회 목사로 설교를 할 수 있고 장로로 대표 기도를 할 수 있다는 그런 뜻이 담겨 있습니다. 때문에 바울은 그냥 물러서지 않습니다. 본문을 다시 보십시오. 바울은 두 번째 질문을 바꿉니다. 그러면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그렇게 묻습니다. 너희가 성령 받았느냐 그렇게 질문했는데 대답을 못하니까 질문을 바꿉니다. 너희가 무슨 세례를 받았느냐 묻습니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의 대답이 이것입니다. 네, 저희는 요한의 세례를 받았습니다.” 옥 목사는 잠시 생각에 잠긴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바울은 요한의 세례를 받았다고 하는 이 사람들을 향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세례에 대해 설명을 합니다. 그러자 그 자리에 성령께서 임하셨습니다. 그리고 저들에게 방언하는 역사가 일어났다고 본문이 끝을 맺고 있습니다. 오늘 이 새벽 짧은 시간에 여러분과 함께 진지한 이야기를 좀 나누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가 받아야 할 세례는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요한의 세례입니다. 또 하나는 예수님의 세례입니다. 요한의 세례는 무엇입니까. 요한은 요한복음 1장에서 ‘나는 여러분에게 물로 세례를 줍니다. 하지만 내 뒤에 한분이 오십니다. 그분은 여러분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받아야 할 세례가 두 종류가 있다는 겁니다. 하나는 물세례입니다. 이것은 회개하는 것과 연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물세례는 중생과 연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한 모든 분들은 다 예외 없이 물세례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회개했습니다. 왜냐하면 공회 앞에서 나는 죄인입니다 라는 고백을 하고 세례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요한의 물세례로서 만족해야 하는가. 그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중요한 이유는 우리에게 성령으로 세례를 베풀어주시기 위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회중이 크게 아멘을 했다.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하는 이 질문은 요한의 세례 회개하게 하는 물세례를 받았느냐 하는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 바울이 하는 질문은 너희가 성령세례를 받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참석하신 장로님 여러분에게 바울을 대신하여 묻습니다. 여러분이 정말 성령을 받으셨습니까. 성령의 사람이 되어가고 계십니까. 요한의 물세례로 만족해서는 안됩니다. 성령세례를 받으셔야 해요. 성령세례를 어떻게 받을 수 있습니까.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에게 나타나는 표징이 무엇인가. 성령세례를 받은 사람에게 나타나는 중요한 표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입이 열리는 것입니다. 내 입이 열려서 다른 사람에게 예수를 증거하는 것입니다. 내가 성령세례를 받았느냐의 여부를 알 수 있는 중요한 리트머스 시험지는 내 입이 열리느냐 안 열리느냐 하는 것입니다. 이 시간 자기 자신에게 질문을 던져보십시오. 신앙생활을 지금까지 해오시면서 내가 다른 사람들을 향하여 정말 입이 열렸던가. 예수 그리스도를 내가 증거했던가. 그래서 나로 말미암아 믿지 아니 하는 사람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놀라운 역사가 있었던가. 이것이 오늘날 나의 관심사가 되어 있는가. 바로 이 질문입니다. 성령세례를 받으면 아주 중요한 네 가지 역사가 내 안에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첫째, 나에게 불이 일어납니다. 불이 나타납니다. 세례 요한이 말합니다. 그분은 여러분에게 불과 성령으로 세례를 베푸실 것입니다. 불이 나타납니다. 둘째, 성령세례를 받으면 권능이 내게 임합니다. 우리가 권능을 받고 권능이 내게 나타납니다. 셋째, 중요한 것은 내가 능력을 입습니다. 너희들이 능력을 입게 될 때까지 여기서 기다리라. 성령세례를 받게 되면 성령 충만함을 입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령세례를 받으면 뜨거워지게 됩니다. 권능이 나에게 임하는 것입니다. 능력이 나에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한걸음 더 나가서 그 사람에게 충만한 은혜가 나타나 전하지 않으면 안되는 사람으로 변하게 됩니다. 오늘 이 전국남전도회라는 이름으로 참석하신 여러분들에게 오늘 이 아침에 성령 충만한 역사가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입이 열려 돌아가는 은혜가 있기를 소원합니다.” 옥 목사는 두 팔을 벌리고 눈을 지그시 감았다. “에베소 교인들에게 성령이 임하실 때 저들에게 방언이 나타났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방언을 어떻게 이해하고 계십니까. 오순절 성령강림의 역사가 일어났을 때 저들에게 방언의 역사가 나타났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오순절 강림의 현장에 전 세계 흩어졌던 사람들이 몰려왔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방언이었습니다. 때문에 그 자리에 방언의 역사가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방언은 성령세례 받은 자들에게 나타나는 표징이 아니라 그들이 복음을 전하기 위한 수단으로 성령께서 허락해 주신 것입니다. 복음을 전하게 하기 위해 이 놀라운 역사가 일어난 것입니다. 오늘 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난 뒤 나는 입을 열어 과연 몇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전했고 지금 전하고 있는지 진지하게 살펴보셔야 합니다... 입을 열면 하나님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어떻게 하면 입이 열립니까. 너희가 회개하면 성령 충만함을 입을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너희가 말씀을 받으면 말씀을 받는 자에게 성령께서 임하신다고 말씀합니다. 너희가 하나님 앞에 기도하면 기도하는 자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시겠다고 말씀합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 앞에 기도하는 자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성령 충만함을 받아 입이 열려 우리 모두의 삶의 현장으로 돌아갈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해 예수 믿는 사람이 더 많아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는 은혜가 있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016-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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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5-07
  • 김승동 목사 설교- 더 큰 감동의 역사를 경험하라
    더 큰 감동의 역사를 경험하라 백성이 요단을 건너려고 자기들의 장막을 떠날 때에 제사장들은 언약궤를 메고 백성 앞에서 행하니라 (요단이 모맥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에 넘치더라) 궤를 멘 자들이 요단에 이르며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물가에 잠기자 곧 위에서부터 흘러 내리던 물이 그쳐서 심히 멀리 사르단에 가까운 아담 읍 변방에 일어나 쌓이고 아라바의 바다 염해로 향하여 흘러가는 물은 온전히 끊어지매 백성이 여리고 앞으로 바로 건널 쌔 여호와의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요단 가운데 마른 땅에 굳게 섰고 온 이스라엘 백성은 마른 땅으로 행하여 요단을 건너니라여호수아 3 : 14-17절 대부분의 동화는 남자 주인공과 여자 주인공이 만나서 어려운 난관을 헤치고 결혼하게 되고 그리고 행복하게 살았다는 것으로 이야기 끝이 난다. 자신도 동화의 주인공처럼 멋지게 결혼을 해본다. 동화는 동화이지 현실의 삶은 실제 그렇지 아니함을 금방 알게 된다. 실제적 사랑은 결혼식으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결혼식 이후에 가꾸어져 가며 만들어 가야 하는 것이다. 문제는 결혼식 할 때까지의 감동과 기쁨은 서서히 사라져가고 살아갈 수 록 억지로 주먹을 쥐고 의리의 구호를 외치며 살아가는 분들이 많다는 것이다. 좋아서 결혼 했으면 살아 갈수록 서서히 좋아져 가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예수님과 결혼하여 그의 신부가 되었다. 그러면 예수님과의 결혼 생활은 이 땅에서 살아 갈수록 점점 좋아져야 하지 않겠는가? 예수님과의 결혼 생활은 한번 구원 받은 감격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구원 받은 뒤에 그리스도 안에서 약속하신 더 큰 신앙의 감동을 경험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문제는 어떻게 더 큰 감동의 역사를 경험하며 살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우리가 살펴보는 여호수아 3장의 이야기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때, 요단강을 가르시는 기적의 장면을 보여주고 있다. 출애굽 때의 홍해를 가르사 기적적인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은 광야 생활의 끝을 알리며 약속하신 땅으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또 한 번 요단강을 가르시는 기적의 은혜를 베풀어 주게 된다. 간혹 교회 다니는 분들에게 구원의 처음 감동이 사라진 원인을 자세히 살펴보면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받았는데 그 구원 이후에는 하나님의 은혜 없이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려고 하는 것을 보게 된다. 본장에서는 홍해를 가르사 베푸신 구원도 하나님의 은혜요, 구원받은 다음 요단강을 가르신 것도 하나님의 은혜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서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임을 확실히 보여 주고 있다. 우리도 우리의 삶 가운데 더 큰 하나님의 감동의 역사를 경험하려 하면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를 붙들고 살아가야 함을 알아야 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살아간다는 것이 우리가 아무런 일도 안하고 그저 교회만 다니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여러분의 삶 가운데 하나님의 더 큰 은혜의 감동을 경험하기를 원하는가? 하나님 앞에 은혜에 합당한 삶의 반응을 보여 줄 수 있기를 기원한다. 다시 말해서 홍해의 구원 감동을 요단강의 더 큰 감동으로 이어가기 위해서는 요단강을 건너기 전에 이스라엘 백성에게 보이신 하나님의 말씀의 교훈을 잘 새겨들어야 한다. 그르면 구원 받은 우리가 신앙생활 하면서 더 큰 감동을 경험하려면 우리는 어떤 믿음의 반응을 보여야 하겠는가? 더 큰 감동의 역사를 경험하기 위하여! 첫째 : 말씀이 올 때까지 기다려야 하고 성결함을 실천에 옮겨야 합니다. 2절 “삼일 후에 유사들이 진중으로 두루 다니며” 5절 “너희는 스스로 성결케 하라”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 앞에 도달했다. 그런데 하나님은 거기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삼일 동안 더 머물며 기다리도록 하신다. 이 기다림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이다. 왜 하나님께서 거기에서 삼일 동안이나 머물게 하시는가? 15절“요단이 곡식 거두는 시기에는 항상 언덕에 넘치더라” 이 삼일동안 머물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요단강이 최고로 깊어지며 물이 많아지는 시기를 눈으로 확인하게 하려 하신 것이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요단강을 건너고 약속의 땅인 가나안 땅은 광야보다 더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곳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요단강을 건너기 전에 그들이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로만 이 요단강을 건널 수 있으며, 이 요단강을 건넌 후에도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 살아가도록 단단히 훈련시키고 있는 것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더 큰 감동은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더욱 의지하며 그분을 더욱 신뢰할 때 경험할 수 있다. 때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것을 바로 주지 않으시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나님은 내 앞에 가로 막혀 있는 요단강을 가르시기 전에, 하나님께 받은 은혜는 잊지 않고 있는지, 하나님만 더욱 의지하고 있는지 하나님만 완전히 신뢰하고 있는지를 확인하기기를 원하신다. 이것만 확인되면 하나님은 내 앞에 가로 막혀 있는 높고 깊고 넓은 어떤 요단강의 문제도 가르시어 해결해 주실 것이다. 더불어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기전 기다리는 동안 명령하신 것이 있다. 바로 성결이다. 5절 말씀을 보면 하나님께서 큰 은혜를 베푸시기 전에 스스로 성결하기를 원하신다. 성결이란 자신의 힘으로 스스로를 깨끗하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성결이란 하나님의 은혜로 깨끗하게 하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의 구속의 은혜를 의지해서 과거의 잘못과 더러움을 끊어내어야 한다. 하지만 우리 기독교는 불교처럼 자신을 비워내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거룩한 영으로 자신의 마음에 충만하게 채워야 한다. 다시 말하면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성결한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보혈의 은혜를 믿고 자신을 얽매고 있는 죄의 사슬과 흔적들을 끊어내어야 한다. 우리의 힘으로 되지 않는 줄 안다. 성령님에게 맡겨야 한다. 이건 단순히 기도만하라는 말씀이 아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더 큰 은혜를 기다리는 모든 시간, 우리가 쓰는 모든 물질, 우리의 평소의 습관 모두가 거룩의 영이신 성령과 함께 하는 것으로 만들어가라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전적으로 의지하며, 성령으로 나의 삶을 채워가는 기다림과 성결함이 있을 때에 하나님은 더 큰 감동과 은혜로 내 앞에 막힌 요단강의 문제를 가르사 길을 열어주실 것이다. 더 큰 감동의 역사를 경험하기 위하여! 둘째 : 하나님 말씀의 언약궤만 바라보고 따라가야 합니다. 3절 “백성에게 명하여 가로되 너희는 레위 사람 제사장들이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언약궤 메는 것을 보거든 너희 곳을 떠나 그 뒤를 좇으라” 요단강 앞에서 기다리며 성결할 것을 명령하신 하나님은 실제적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너갈 때 해야 할 일을 명령하신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언약궤를 따르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요단강의 수위가 낮은 곳이나 폭이 좁을 곳을 찾으라고 하지 않고, 단 한 가지 하나님의 언약궤를 따르라고 하셨다. 여러분! 그 언약궤 안에는 무엇이 들어있는가? 하나님의 율법의 계명, 말씀이 들어 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아가라는 말씀이다. 또한 이 언약궤를 따를 때 그 언약궤를 2000규빗, 약 900미터 쯤 떨어져서 따라가라고 하신다. 이 말씀은 하나님보다 앞서거나 말씀보다 앞질러서 가지 말고 철저하게 뒤를 따라가라는 말씀이다. 성령이 머물게 하거든 무조건 머물러야 한다. 성령이 가게하거든 좌우로 보지 말고 무조건 가라. 그래야 하나님은 문제의 요단강을 건너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 주실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자 하는 자를 위한 하나님의 마음이다. 하나님은 광야에서도 그들을 불기둥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셨다. 이제 요단강을 건너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는 것에서도 계속 말씀을 따라 살아가라고 하신 것이다. 이것은 처음 여호수아 1장에서 하나님께서 여호수아에게 말씀하신 것과 마찬가지다. 좌로나 우로나 치우지치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 행하면 평안과 형통의 복을 주시겠다는 말씀 그대로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삶 가운데서 더 큰 하나님의 은혜와 감동을 맛보기 원하시는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가기를 기원한다. 항상 변화하는 세상 가운데서 여러분은 누구를 무엇을 따라서 살아가시겠는가? 하나님의 백성들을 인도하시고 앞서가시는 성령님을 따라서, 변함없는 말씀을 따라서, 살아가야 합니다. 신앙인의 삶은 복잡하지 않다. 하나님이 변함없고 그분의 말씀이 변함없음을 믿는다면 그분과 그분의 말씀을 따라가면 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인도하시는 변함없는 방법이다. 여러분 모두가 올 한해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아가셔서 더 큰 감동을 경험하는 한 해가 되시기를 기원한다. 더 큰 감동의 역사를 경험하기 위하여! 셋째 : 말씀에 순종하여 믿음의 발걸음을 내어 딛어야 합니다. 15절 “궤를 멘 자들이 요단에 이르며 궤를 멘 제사장들의 발이 물가에 잠기자”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제사장들이 언약궤를 메고 요단강 앞으로 나간다. 눈앞에는 요단강이 가장 범람해서 물이 출렁이고 있다. 그런데 언약궤를 멘 제사장들은 자신들의 발을 요단강 안으로 들어간다. 그들의 발이 물에 잠긴다. 그 때에 요단강은 갈라지면서 완전한 마른 땅이 나타나게 된다. 여러분! 홍해는 모세가 지팡이를 들어 손을 내밀자 물이 갈라졌다.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건넌 것이다. 하지만 요단강은 아직 흐르는 물에 발을 딛는 순종함으로 건넌 것이다. 둘 다 하나님의 은혜이며 능력이다. 우리가 구원 받은 것이 하나님의 은혜이며, 또한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다. 그러나 구원받은 성도들이 믿음으로 이 세상을 살아갈 때에 구원을 베푸신 분의 능력을 진정으로 믿는다면, 그 하나님의 능력에 나를 맡기고 그분의 명령에 순종의 발걸음을 내어 딛어야 한다. 순종의 걸음이 앞으로 나갈 때, 비로소 하나님의 능력과 더 큰 감동의 역사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는 성도의 능력의 삶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하나님께 “문제를 해결해 주시면 제가 가겠습니다!”라고 말할 때가 많다. 그러나 순종의 신앙인은 “문제가 있어도 저는 주님의 능력과 말씀만 붙들고 갑니다!”라고 고백해야 한다. 여러분! 어느 쪽이 더 믿음의 사람인가? 어느 쪽이 더 큰 감동의 은혜를 경험하게 될까? 예수님은 보고 믿는 것보다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미래의 일이 지금 당장 보이지 않는다고 믿음의 발걸음을 옮기는 것에 주저하지 마라. 믿음으로 순종의 발걸음을 내어 딛으라. 그럴 때에 여러분은 하나님의 약속의 땅에서 더 큰 하나님의 능력과 더 큰 감동의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구원을 위해서 한번만 역사하시는 분이 아니다. 지금도 여러분의 삶 속에서 역사하고 계신다. 그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고, 그분의 말씀을 따라서 순종하며 살아갈 때에 여러분에게는 구원 받은 감동의 삶이 더 큰 역사를 경험하게 될 줄로 믿는다. 첫째, 말씀이 나에게 올 때까지 기다리겠으며 성결함도 실천에 옮기겠습니다. 둘째, 하나님의 말씀만 바라보며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고 따르겠습니다. 셋째, 막힌 문제 앞에는 말씀에 순종하여 믿음의 발걸음을 내어딛겠습니다. 2015-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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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6-22
  • 창세기 어떻게 읽을것인가- 황정길 목사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라 요 5:39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 하시고 이에 그들의 마음을 열어 성경을 깨닫게 하시고 또 이르시되 이같이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고 제 삼일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과 또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모든 족속에게 전파될 것이 기록되었으니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눅 24:44-48 첫째, 우리가 창세기를 읽을 때 주의할 것은 창세기의 독자가 누구인가를 먼저 알아야 합니다. 창세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산 아래로 와서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 사이에 시내산 언약을 맺고 난 후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신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며, 구원함을 받은 언약 백성의 정체성은 무엇인가를 가르치기 위하여 하나님의 언약 백성들에게 주어진 말씀입니다. 시내산 아래에 와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 곧 출애굽을 거쳐서 광야에 와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자신들이 누구인가 하는 명확한 자신들의 정체성과 삶의 방향과 목적의식을 주기 위함이었습니다. 창세기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궁극적으로 자신들이 알고 있는 언약의 하나님이신 여호와 하나님이 바로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즉 창세기는 그 창조주 하나님이 천하 만민 가운데서 오직 이스라엘 백성들만을 택한 선민으로 삼으시고 이들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진행 시키시고 계심을 깨닫게 하기 위하여 기록한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창세기는 애굽 땅 종 되었던 곳에서 구원함을 받고 출애굽을 하여 홍해를 건너 시내산 아래서 하나님과 언약을 맺은 하나님의 언약 백성에게 주신 말씀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시내산 아래에 와 있는 하나님의 언약 백성의 입장에서 보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그 시대에 하나님의 백성들뿐만 아니라 동시에 오늘 우리에게도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둘째, 창세기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며 또한 우주 만물의 기원을 밝혀주는 책입니다. 이 세상의 모든 책은 인간이 인간의 생각과 경험을 기록 하였지만 오직 성경은 하나님이 자신을 인간에게 나타내신 계시의 책인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창세기는 하나님의 특별 계시인 성경의 막을 여는 신적 기원을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창세기 첫 말씀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창 1:1하고 선언하신 것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이 온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가 되시며, 우주 만물과 인간 창조의 역사를 통해 우주 만물과 인간 역사를 주관하시는 분은 오직 유일신이신 여호와 하나님이신 것을 계시하신 것입니다. 창세기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며 우주 만물의 기원과 인류의 기원을 밝혀주는 하나님의 신적권위를 가지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창세기를 통하여 무신론과 유물론과 진화론의 허구성이 밝혀지며 우리의 신앙고백도 창세기 1:1의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말씀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서부터 출발하여야 합니다. 그 창조주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셔서 죄 아래 있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구세주 하나님이시란 것을 고백하고 다시 오실 재림의 주님을 대망하는 신앙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셋째, 창세기는 천지와 만물과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본래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은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처럼 악과 고난이 있고 눈물과 슬픔이 있고 질병과 죽음이 있는 세상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모든 만물을 창조하시고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여섯째 날이니라”(창 1:31)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만물과 인간을 하나님 자신의 영광을 위하여 창조하였습니다. 만물이 그에게서 창조되되 하늘과 땅에서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과 혹은 왕권들이나 주권들이나 통치자들이나 권세들이나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골1:16 해와 달아 그를 찬양하며 밝은 별들아 다 그를 찬양할지어다 하늘의 하늘도 그를 찬양하며 하늘 위에 있는 물들도 그를 찬양할지어다 그것들이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함은 그가 명령하시므로 지음을 받았음이로다 시편 148:3-5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사 43:7 이와 같이 성경은 하나님이 천지와 만물과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지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만물과 사람의 존재의 목적은 ‘하나님을 위하여 지음을 받은 존재’라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땅에 우연히 온 존재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목적에 따라 지음을 받았고 하나님의 뜻에 따라 이 시대에 태어나게 하셨다가 하나님의 사명을 마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야 하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죄가 세상에 들어오므로 인하여 만물은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렸으며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은 범죄 함으로 우리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리고 동물적 본능과 죄의 세력이 지배하는 타락한 지위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한 본래의 목적을 상실하여 방향 감각을 잃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며 우상을 섬기다가 죽음을 맞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우주 만물은 언제부터, 그리고 왜, 어떻게 창조되었는가? 사람은 어디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돌아가는가? 사람이 죽은 후에는 사후의 세계가 있는가? 이것은 인간의 가장 중요한 근본적인 질문입니다. 성경의 첫 번째 책인 창세기부터 요한 계시록까지 전 성경은 바로 이러한 세계관과 인생관과 내세관과 인생의 삶의 의미와 존재의 목적에 대한 가장 중요한 물음에 대한 답변서입니다.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나는 왜 사는가 하는 자신의 존재의 가치와 삶의 목적의식을 갖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신의 존재의 가치와 삶의 목적의식을 알 때 삶의 의미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삶의 목적은 그 사람의 일생을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물음의 답변서인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넷째, 창세기는 인류를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말씀하고 있는 책입니다.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3장에서 죄가 들어오므로 파괴된 세상을 하나님이 회복시키시고 완성시키시는 구원의 전 과정의 역사가 성경의 역사요 구원역사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첫 번째 책인 창세기부터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에 죄가 들어오므로 파괴된 만물의 회복과 잃어버린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하여 가는 구원역사입니다. 창세기에서 잃어버렸던 것이 요한 계시록에서 회복이 됩니다. 그러므로 창세기는 시작이요 요한 계시록은 회복과 완성입니다. 우리가 지금은 비록 헌 누더기 같은 옷을 걸치고 질고를 짊어지고 사는 나약한 몸이지만 우리 주님이 다시 오시면 이 낮은 몸이 주님과 같은 몸을 입을 것입니다(빌 3:21-22). 그리고 썩지 아니할 몸으로, 영광스러운 몸으로, 강한 몸으로, 신령한 몸으로, 그리고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을 것입니다(고전 15:42-44,49). 그러므로 죄 아래 있는 모든 만물이 함께 탄식하며 고통 가운데서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남을 고대하며 허무한데 굴복하며 썩어짐의 종노릇한 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기를 사모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구원 받은 성도들도 악과 고난이 있고 질고와 슬픔이 있고 죽음이 있는 이곳에서 속으로 탄식하며 영화의 몸을 입을 몸의 구속을 기다리며 성화의 과정을 이루어 가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롬 8:19-23). 하나님이 이 구원역사를 이루시기 위한 과정을 기록하고 있는 첫 번째 책이 창세기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이 우리의 구원을 다루어 가시는 구원의 책이라는 전제를 가지고 읽어야 하며 창세기를 근거로 창조에 관한 기사를 다 알려고 하면 무리이며 그 전제가 잘못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범죄를 하자 인간을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구원 계획을 세우시고 여자의 후손을 통하여 메시아를 보내어 죄 아래 있는 인류를 구원하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인류가 땅위에 번성하자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신 본래의 목적과는 다르게 하나님을 거역하며 자기들의 소견에 좋은 대로 행하며 살았습니다. 그 가운데 경건한 셋의 후손들도 불경건한 자손들의 문화에 동화되어 하나님의 자손의 정체성을 상실하고 타락하자 하나님은 세상에 사람 만드신 것을 한탄하시고 경건한 노아의 식구만을 남기고 세상을 물로 심판 하셨습니다. 이 노아 홍수 심판은 하나님이 만드신 이 세상은 언젠가 그 종말이 있음을 보여주는 계시적 사건인 것입니다. 홍수 후에 노아의 후손들도 이 땅위에서 번성하자 교만하여져서 자기들의 이름을 내기 위하여 바벨탑을 쌓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인간의 언어를 혼잡케 하시고 온 지면에 사람들이 흩어져 살게 하십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택하여 이 땅에 하나님 나라를 세우시기를 원하시고 그를 세상 만민을 복 주시려는 복의 통로로 삼으십니다(창 12:1-3).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세우시고, 그 후손들이 그를 통하여 복을 받고 그의 발자취를 따라 믿음으로 살게 하시려고 하십니다. 이 구원의 계보가 아브라함에서 이삭으로, 이삭에서 야곱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이야기는 단순히 그들의 이야기만이 아니고 우리의 믿음의 여정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또한 그것은 우리의 구원의 모형과 예표로서 하나님이 그들을 어떻게 성화의 길로 인도하여 가고 계심을 보여주고 있는 이야기입니다. 창세기 37장 이후부터는 요셉의 이야기가 길게 나오므로 요셉의 이야기처럼 볼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창세기 저자의 의도는 야곱의 가족이 어떻게 애굽으로 내려가게 되었고, 그리고 야곱이 죽어 어떻게 가나안땅 조상의 묘실에 묻히게 되었는가를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앞서 보내어 요셉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셨음을 알게 하기 위하여 요셉의 이야기를 자세히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부분을 놓치면 요셉은 꿈을 가지고 그 꿈을 성취한 아주 위대한 사람으로 젊은이들에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요셉의 생애를 살펴보면 배후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요셉이 총리가 된 것도 하나님이 야곱의 가족을 구원하시고자 하시는 구원의 계획 가운데 들어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창 45:4-8; 50:15-21). 그러므로 성경 전체의 이야기는 하나님이 우리를 어떻게 사랑하셨으며, 우리를 구원하시고자 어떤 계획을 세우시고, 우리에게 무엇을 약속하셨고, 그 약속을 어떻게 성취하여 가시고 계신가 하는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은 이 구원의 계획을 이루시기 위하여 그 시대마다 사람을 사용하시어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시키시는 도구로 삼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일을 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주의 하여야 합니다. 아브라함이 위대해서가 아니고 야곱이 위대해서가 아니고 요셉이 위대해서가 아닙니다. 아브라함을 아브라함 되게 하시고, 야곱을 야곱 되게 하시고, 요셉을 요셉 되게 하신 위대하신 하나님을 보아야 합니다. 잘못 이해하면 아브라함이 위대하고 요셉이 위대하다는 식으로 이야기하고 하나님께서 하신 이야기는 말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사람이 아니라 사람을 통해 역사하시는 위대하신 하나님을 찬양하여야 하겠습니다. 2014-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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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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