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4-17(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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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권순웅 목사 저출산 대책
    저출생·고령화가 맞물리면서 인구 통계는 점점 드라마틱해진다. 행정안전부에 따르면 2023년 지난해 70대 이상 인구가 631만여 명으로 20대 인구(619만여 명)를 처음 추월했다. “하나님 저출산 문제를 위해 간구하는 기도를 들어주소서!” 프랑스 작가 베르나르 베르베르(Bernard Werber, 1961년 9월 18일 ~ )는 소설 ‘웃음’에서 인생의 구간별 자랑거리를 꼽은 적이 있다. 2세 때는 대소변을 가리는 게, 3세 때는 치아가 나는 게, 12세 때는 친구들이 있다는 게, 18세 때는 자동차를 운전할 수 있다는 게, 20세 때는 섹스할 수 있다는 게, 35세 때는 돈이 많은 것 등이 자랑거리다. 그런데 인생이 반환점을 돌면 자랑거리가 뒤집힌다. 60세 때는 섹스할 수 있다는 게, 70세 때는 자동차를 운전할 수 있다는 게, 75세 때는 친구들이 남아 있다는 게, 80세 때는 치아가 남아 있다는 게, 85세 때는 대소변을 가릴 수 있다는 것 등이 자랑거리다. 삶은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우리는 너나없이 대소변 가리는 것부터 배우고 인생의 마디마디를 통과하다가 삶을 마감하기 전에는 다시 대소변 가리기가 어려워진다. 2024년 국내외적으로 한국이 마주한 도전은 심상치 않다. 미국과 중국 갈등이 심화되고 대만해협과 한반도를 둘러싼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는 가운데 저성장, 저출산, 고령화, 불평등과 양극화로 심한 몸살을 앓고 있다. 한국의 국력이 피크를 지났다는 주장이 나오는 이유다. 2024년 세계는 전쟁 2개와 50여 국의 선거로 갈등의 몸살을 앓고 있다.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과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이 새해로 이월돼 살상과 파괴로 치닫고 있다. 세계 인구의 4분의 1인 20억 명이 50여 국에서 선거로 정치적 전쟁을 치를 예정이다. 20억이라는 숫자는 세계 경제 총생산의 60%에 해당한다(뉴욕타임스 집계). 선거가 있는 나라는 인도·인도네시아·멕시코·남아프리카·미국·대한민국 그리고 유럽 27국(의회) 등이다. 우리는 여전히 ‘배달의 민족’일 뿐 아니라 ‘바람의 민족’이기도 해서 바람이 불면 죄다 그쪽으로 쏠리고 바람의 방향이 바뀌면 언제 그랬냐는 듯 또 새 방향을 좇는다. 이런 데 자유가 있을까. 뜻에 맞지 않는 것을 하지 않을 자유, 수긍하지 않는 것에 머리 숙이지 않을 자유, 원치 않을 때 웃지 않을 수 있는 자유를 생각했던 것 같다. 돌아보니 (항상 그렇진 못했지만) 품은 뜻에 따라 사느라 더러 외로웠지만 자유는 외로움에 지지 않을 때 얻어진다는 체험 또한 했다. 그러니 당신이 지금 외롭다면 이렇게 생각해 보면 어떨까. ‘내가 자유로워지는 중이구나’라고. 맞다. 당신도 믿음의 자유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2)는 말씀대로. 2024년 2월 18일 다음세대목회운동본부가 ‘한국교회 저출산 극복을 위한 전국연합기도회’를 경기도 화성시 10용사로 532 육탄10용사 공원 근처 주다산교회에서 드렸다. 진용훈 목사(중앙위 서기)의 인도로 케리그마 및 기도회가 진행됐다. 다음세대목회운동본부는 오는 5월 19일 생명존중 주일이 있는 날까지 100일 기도 행전을 통해 하나님께 간구하는 시간을 마련하고 권역별로 지역교회가 연합해 ‘특별기도회’로 모일 수 있도록 계획했다고 밝혔다. 인문고전을 읽는 천재들의 공통점은 보이지 않는 것의 중요성을 안다는 점이다. 일반인들은 보통 보이는 것(sight)에 주목한다. 그러나 천재들은 보이지 않는 것(insight)에 주목한다. 통찰력을 의미하는 “insight”는 “sight”에 “in”이라는 접두어가 붙어 있다. 통찰력이란 보이는 것보다 더 깊은 곳에 있는 것을 보는 것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그러한 의미의 총회 불꽃 제107회 총회장 권순웅 목사가 강단에 서자 청년과 장년 신자들이 환호했다. 그가 그 가운데 외쳤다. "샬롬! 저한테 너무 큰 박수하면 오해합니다. (회중 웃음) 지금 대한민국은 축구협회를 고발했습니다. 저는 오늘 대한민국의 야구계를 고발하려 합니다. 대한민국 야구 문제가 있습니다. 어떤 문제가 있을까요. 이종범(李鍾範, 1970년 8월 15일 ~ 전 KBO 리그 KIA 타이거즈의 내야수, 외야수) 감독 때문에 이 야구계는 큰 문제가 있습니다. 그는 무엇을 잘못했는가. 그분의 아들이 이정후(李政厚, 1998년 8월 20일 ~ MLB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외야수) 선수입니다. 이정후 선수가 1490억 이상 그렇게 전속계약이 된 선수입니다. 큰 문제가 있습니다. 무슨 문제입니까. 이런 뛰어난 아들을 한 명밖에 못 낳았다는 것입니다. (회중 큰 웃음) 그런 좋은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아들을 둘 낳고 다섯을 낳았으면 한국 야구계가 달라졌을 것입니다. (회중 아멘) 우리가 3년 전 저출산 극복 헌신예배에서 ‘홈런 가족’에 대해 말씀했습니다. 우리가 야구를 보면 안타가 있는데 야구의 꽃은 홈런입니다. 우리가 가족을 보면 이 저출산 환경에 아기가 없는 가정은 스리(three) 아웃입니다. 그러나 아기를 낳아 다산하고 생육하고 번성하면 홈런입니다. 여러분 출산은 무엇입니까. 성경은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회중 아멘) 하나님이 복을 주셔서 그런 좋은 유전자를 가지고 있는 출산은 하나님이 주신 축복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출산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셔서 생육하고 번성하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는 번성의 복을 주셨습니다.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번성하게 될 것이라고 하나님은 축복의 말씀을 주셨습니다. 애굽에 살 때도 이스라엘 백성이 이민족의 핍박 가운데 살지라도 하나님은 번성하게 해주셨습니다. 아무리 바로(Pharaoh)가 이스라엘인의 출산을 압박해도 막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대한민국은 어떻습니까. 대한민국은 하나님의 큰 축복을 받아 하나님의 허락하심 가운데 기도로 시작한 국가입니다. 애국가가 찬송가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나타난 줄 압니다. 크게 복을 받은 나라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저출산 국가로 전 세계의 큰 근심이 되었습니다. 대한민국이 지금 OECD(Organization for Economic Cooperation and Development 경제 협력 개발 기구) 가운데 가장 먼저 인구가 소멸이 될 국가일 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사라질 제1위 국가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제가 다녀본 제삼세계(第三世界 제2차 세계 대전 후,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 등지의 개발도상국을 일컫는 말)가 가난하고 못사는 나라지만 아이들이 거리마다 가득합니다. 어디가 못사는 나라입니까. 대한민국은 미래가 있습니까, 비전을 가지고 있습니까, 역사의식을 가지고 있습니까. 제 생각에 한국교회가 그 중심에 있다고 봅니다. 한국교회가 회개해야 합니다. 대한민국 정부가 산아제한을 했습니다. 맬서스주의(Malthus主義: 맬서스가 저서 ‘인구론’에서 주장한 학설로 인구와 식량과의 관계에 관한 이론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데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하므로 빈곤과 악덕이 불가피하게 초래된다’라는 내용)를 따라 한국이 주창한 ‘산아제한’과 정부의 실책에 한국교회가 침묵했습니다. 제가 30여 년 전 신학교 갈 때 신학교 전도사 한 분이 ‘산아제한, 하나님 앞에 범죄입니다’라는 대자보를 크게 써 붙였습니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창 1:28)대로 생육하고 번성해야 합니다. 그런데 소돔 사람들이 소돔의 멸망을 예고하는 하나님의 경고를 농담으로 여겼습니다(여호와께서 이 성을 멸하실 터이니 너희는 일어나 이곳에서 떠나라 하되 그의 사위들은 농담으로 여겼더라 창 19:14). 그렇듯이 생육하고 번성해야 한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농담으로 여기는 잘못을 우리 한국교회가 지금도 범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 앞에 순종하지 못한 죄를 회개하지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볍게 여기고 불순종한 죄를 한국교회가 회개하지 않고 있습니다. 저출산을 극복하기 위한 정부의 여러 시책을 제안하고 여러 사람이 대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통해 답을 얻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사람들의 생각을 바꿔주셔야 합니다. (회중 아멘) 하나님보다 자기를 더 사랑하는 생각, 돈을 더 사랑하는 생각, 쾌락을 더 사랑하는 생각, 우상을 버리지 않는 미련을 경고하지 않는 한국교회는 회개해야 합니다. 오늘 이 백성이 하나님의 징계 아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말씀대로 순종하지 못한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이 민족에게 성령의 바람으로 말씀 순종할 수 있도록 불붙는 마음을 부어 주실 줄 믿습니다. 우리 청년들이여, 하나님 주신 가정의 비전을 가져야 합니다. 후손의 비전을 가져야 합니다. 생육하고 번성한 복된 가정의 비전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자 하는 소망을 가져야 될 줄 믿습니다. (회중 아멘) 우리 한국교회가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회개입니다. 우리 총회다음세대 운동본부에서는 이 일을 지금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 주다산교회부터 시작해 전국 교회가 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모였습니다. 먼저 느헤미야같이 조상의 죄를 회개하고 한국교회의 죄를 회개하고 우리가 불순종하고 말씀을 전하지 못하고 다음 세대를 바르게 세우지 못한 죄를 회개하기를 원합니다. (회중 아멘) 회개하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우리가 사명을 감당할 때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 나타나도록 우리가 선포하고 섬기며 나아가기를 원합니다. 우리 기도합시다.“ 이어서, 2강 ‘다자녀 출산의 복’은 이승준 목사(경기총연합회 사무총장) 부부가, 3강 돌봄시설 입법화는 강유진 교수(총신대학교)가, 4강 비혼주의 극복은 이용희 교수(에스더기독운동 대표)가 강연했다. 이승준 목사 부부는 네 자녀를 세 번의 제왕절개와 한 번의 인공수정을 통해 어렵사리 출산했던 경험을 간증하며 하나님의 복을 전했다. “인간적인 환경에서는 아이를 낳을 수 없었으나 생육하고 번성하라는 주님의 응답을 통해 태의 열매를 다시금 주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사랑을 몸소 느낄 수 있었던 기적이자 은혜였습니다. 아이는 계획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으로 받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축복을 다음 세대가 누리기를 바랍니다.” 끝으로 이해중 장로(회계)의 헌금기도와 김영구 장로(부총회장)의 사명자 구호제창이 있었고 김진하 목사(부본부장)의 축도로 마쳤다. 우리나라 초저출산은 그 수준(2021년 기준 0.81로 OECD 최저, 홍콩 제외 세계 최저)과 지속기간(2002년부터 1.3 미만 21년 지속) 면에서 유례를 찾기 힘들 정도로 심각한 수준이다. 합계출산율은 1960년 5.95명에서 2021년 0.81명으로 약 86.4% 감소하여 전 세계 217개 국가·지역 중 가장 큰 폭의 하락률을 보이고 있다. 많은 학자들이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단서 중 하나로 인구 통계를 꼽는다. 지방대학의 붕괴, 주거 불안, 연금 고갈, 노년 부양비 등은 모두 인구문제와 연관돼 있다. 세계에서 유례없이 빠른 속도의 인구 감소로 5년째 출산율 0%대의 ‘초저출산의 덫’에 걸린 대한민국, 문제는 ‘마땅한 대응 방안이 있는가’일 것이다. 총회 불꽃 권순웅 목사의 회개와 더불어 다음의 교회 사례를 보면 그 방안이 있을 것 같다. 2023년 11월 8일 조선일보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시작은 벽보 한 장이었다. ‘한 아이가 아파 병원에 데려가야 할 때, 다른 아이는 어찌하십니까? 위급하고 답답할 때 아이를 정성을 다하여 돌보아 드립니다. 믿고 연락주시기 바랍니다. 당진 동일교회 이수훈 목사.’ 27년 전인 1996년 충남 당진의 야산 입구에 비닐하우스를 치고 교회를 개척한 이수훈 목사(67)는 인근 아파트에 이런 벽보를 붙였다. 야산에서 캔 칡으로 차를 끓여 가가호호 나누며 전도에 애썼지만 비닐하우스 교회는 ‘경쟁력’이 떨어졌다. 그때 그 자신 육아의 어려움을 떠올리며 ‘아이 돌봄’ 벽보를 붙인 것. 붙이면서도 반신반의했다. ‘이런 비닐하우스 교회에 누가 아이를 맡길까?’ 며칠 후 두세 살짜리 아이 셋을 데리고 주부 둘이 찾아왔다. ‘시장 다녀올 동안 1시간 정도만 맡아달라’던 엄마들은 해가 진 후에야 나타났다. 미안해했지만 얼굴엔 해방감 가득했다. 이후로 아이를 맡기러 오는 부모가 줄을 이었다. 다 받았다. 부모가 천안, 대전, 서울의 병원에 아이를 입원시킬 땐 안 아픈 아이를 며칠씩 이 목사 부부가 먹이고 재웠다. 돌봄 수요는 계속 늘었고 자연스럽게 교회를 중심으로 교인들끼리 품앗이 돌봄도 이뤄졌다. 2004년 주 5일제가 도입될 때 ‘토요 돌봄’을 시작한 것도 부흥의 한 계기가 됐다. 현재 등록 교인 1만 5천여 명, 평균 연령 29세, 2자녀 이상 가정 3천 세대, 평균 자녀 수 2.07명, 당진 초등학생 12% 정도가 출석하는 교회, 어린이집 2백 명, 비전스쿨(방과 후 학교) 2백 명이 매일 교회 안에서 자라며 ‘저 출생 극복의 모델’로 전국 교회의 탐방이 끊이지 않는 당진 동일교회의 시작은 소박했다. 이 교회는 어린이가 중심이다. 입구에서 보면 오른쪽엔 어린이집, 왼쪽엔 교육관(비전스쿨), 정면엔 비전센터(청소년수양관)가 자리 잡았다. 예배당 건물 따로 없이 비전센터 강당 8백석을 대예배실로 쓰는데 주일 오전 9시 ‘온 세대 예배’에서도 어린이들이 주요 역할을 맡는다. 어린이들은 예배 시간에 성경 구절을 암송해 봉독하고 어린이 찬양대가 찬양하고 매주 1명씩 자기 ‘꿈’을 발표한다. 다른 교회에선 보기 힘든 풍경이다. 어린이집과 비전스쿨은 오후 7시 반까지 돌본다. “불 꺼진 빈집에 부모보다 아이들이 먼저 들어가지 않도록 하고자”가 ‘교회 이모’ 마음이다. 비전스쿨은 교회 버스가 하교 시간에 맞춰 당진 초등학교 10곳을 돌면서 교문 앞에서 교회 마당까지 안전하게 데려온다. 영어, 수학뿐 아니라 인성 교육도 강조한다. ‘명심보감’을 전 학년이 배우고 밥상머리 예절도 지도한다. 어린이들은 바이올린과 피아노를 배워 3학년 때와 졸업할 때 연주회도 갖는다. 방학이면 영미권 대학생들을 교사로 초빙해 영어 회화 교육을 한다. 2017년엔 ‘시내산 중고등학교’라는 대안 학교도 열었다. 이 교회 성장 비결은 ‘역발상’이다. 20~30년 전만 해도 개신교계 사역은 장년 위주였다. 저 출생 문제가 지금처럼 심각하지도 않았다. 이수훈 목사는 말했다. “개척 당시는 한보철강이 들어왔다가 부도나면서 당진 경제가 휘청하고 어려운 가정이 많았을 때 그저 어려운 이웃을 돕는다는 마음으로 시작한 일이었습니다. 지금 교회가 다음 세대를 건강하게 길러주는 것만큼 중요한 일이 있을까요? 자신과 이웃에게 정직한 다음 세대를 길러내는 것이 목회의 핵심입니다. 출산과 육아는 한 생태계로 봐야 합니다. 정확히 어린이 양육에 예산이 쓰여야 저 출생 문제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성경은 말씀한다. 자식은 여호와의 주신 기업이요 태의 열매는 그의 상급이로다 젊은 자의 자식은 장사의 수중의 화살 같으니 이것이 그 전통에 가득한 자는 복되도다 저희가 성문에서 그 원수와 말할 때에 수치를 당치 아니하리로다 시 127:3-5 2024-0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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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28
  • 소강석 목사의 설교론
    식탁에 갓 씻은 젓가락 한 쌍 나란히 올려두고 감사의 감동을 기다릴 때 저녁의 허기와 저녁의 평안이 나란하고 마주 모은 두 손이 나란하다. 나란해서 서로 기댄다. 식은 소망을 데우려 눈감을 때 믿음이 두 입술에 나란히 맴돈다. 사랑이 새어나가지 않도록 입술을 나란히 다독일 때 한 끼가 영원과 나란하다. 시는 마음의 조각이다. 낯 모르는 누군가가, 내가 모르는 때에, 내가 모르는 장소에서 날려 보낸 한 조각이 바로 시다. 그러니 익숙할 리가 없다. 타인의 마음 한 조각은 내 것이 아니니까 익숙하지 않아야 맞다.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이 사실 때문에 시를 읽게 되고 시를 좋아하게 된다. 결코 내 것이 아닌 남의 마음인데, 그건 절대 익숙한 것이 아니어야 하는데, 읽는 순간 그 조각에 내 마음이 박힌다. ‘어? 여기 내 마음이 나보다 먼저 도착해 있었네.’ 이런 생각이 든다. 그 순간 이 외로운 지구는 외롭지 않다. 내 마음을 알아주는 단 하나의 마음만 있어도 우리는 외롭지 않게 된다. 저녁의 허기와 저녁의 안식이 나란하게 놓여 있는 하루의 끝. 지쳤으나 겸허하게 마주 잡은 손. 허기가 안식을 돕고 안식이 허기를 돌보는 다행스러움이 이 소박한 시를 꽉 채우고 있다. 이것이야말로 보통의, 그러나 가장 감사한 우리의 모습 아닐까. 특히 “나란해서 서로 돕는다”라는 말이 오래 남는다. 아픈 사람은 타인의 아픔을 알아보고 상처받은 사람은 타인의 상처를 알아볼 수 있다. 우리는 대단치 않은 보통의 사람들이지만 나란히 나란히 나아갈 수 있다. 나란히 나란히 옆 사람 손을 잡아줄 수 있다. 참 다행이다. 2023년 4월 3일 오후 2시 한국교회100주년기념관 1층 그레이스홀에서 세계성령운동중앙협의회(대회장 소강석) 창립 34주년 성령포럼이 한국기독교성령역사연구원(이사장 소강석 목사, 원장 안준배 목사) 주관으로 열렸다. 문학평론가 안준배 박사가 개회사를 했다. "세계성령운동중앙협의회 창립 34주년 성령포럼을 개회하겠습니다. 1988년 3월 27일 그해 부활절 다음날 아침 40대 목사 19명이 중심으로 모여 세계성신클럽 창립을 했습니다. 그리고 첫 번째 사역 중에 1992년 8월 15일 여의도 광장에서 이틀 동안 연인원 백만 명이 참여하는 성령 운동, 성령으로 인도하는 그런 기도성회를 가진 바 있습니다. 우리 본회 34년 역사 속 세계 성령 운동사에 표지가 되시는 조용기 목사가 2021년 9월 14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영훈 목사를 내세워 여의도순복음교회를 승계하게 하셨고 또 김삼환 목사(여의도순복음김포교회 담임)를 통해 조용기 목사의 핵심적인 신앙을 정리해 이끌게 하셨고 그런 가운데 한국 교회는 소강석 목사(새에덴교회 담임)를 내세워 성령 운동과 말씀전파를 통해 한국 교회를 연합하고 견인해나가는 그런 역할을 맡기셨습니다. 세계 성령 운동 역사 34년 역사 속에 가장 귀하게 쓰임 받은 조용기 목사의 일을 이어가고 있는 소강석 목사의 성령 사역에 대해 함께 나누고자 이 자리를 마련했습니다. 이렇게 많은 분이 2백 석을 가득 채워 함께 해주신 것을 감사드립니다." 테너 박주옥 백석대 교수가 언제부터인지 꽃씨가 시랑스러워 천국에 가져가고 싶다는 소강석 작사 작곡 '꽃씨'에 이어 요즘 교회마다 애창하는 '은혜'를 열창했다. 대회장이고 주제 강연자인 소강석 목사가 ‘나는 문학, 음악, 이야기로 성경을 전한다’라는 제목으로 동영상을 곁들인 화려한 강연을 펼쳤다. "어제 정말 바쁜 부활주일을 보내시고 쉬시는 날에 이 자리에 오신 여러분에게 격려와 존경을 표합니다. 저는 설교학자도 아니고 설교를 연구하는 전문교수도 아닙니다. 현장에서 뛰는 한 목회자일 뿐입니다. 그런데 안준배 목사께서 이런 강연을 해보지 않겠느냐는 주제를 주신 겁니다. '나는 문학과 음악과 이야기를 통해 성경을 전한다.' 제가 들어보니까 굉장히 매혹적이고 제가 한번 해보고 싶은 욕심이 비롯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워낙 목회자가 바쁘지 않습니까. 부지런히 탈고를 했지만 보니 부족한 부분이 많았습니다. 어쨌든 우리나라 목회자에게는 설교하면 강해 설교가 머리에 각인되어 있을 것입니다. 이것은 강해 설교 창시자로 알려진 해돈 로빈슨(Haddon W. Robinson, 1931년 3월 21일 - 2017년 7월 22일)의 영향일 것입니다." 그는 뉴욕시에 출생하여 미국의 고든 콘웰 신학교의 교수를 지냈다. 달라스 신학교, 써던 메쏘디스트 대학교에서 석사를 일리노이 대학교에서 철학박사(Ph.D.) 학위를 받았다. 설교학의 대가로 2006년 크리스처니티 투데이에 '영향력있는 설교자'로 선정되기도 했었다. 2006년 한국을 방문하여 강해 설교 컨퍼런스를 가졌다. 그의 강해 설교론은 성경 본문의 의미를 충분히 탐구해 오늘의 청중에게 적용하는 것이다. 그는 특히 성경 본문의 중심사상이 곧 설교의 주제가 돼야 한다는 이론을 강조하고 있다. 로빈슨 교수의 강해 설교 교본으로 알려진 저서 '성경적 설교(Biblical Preaching)'는 전 세계 목회자들이 탐독했으며 현재도 120개가 넘는 학교에서 설교학의 주교재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많은 분들이 강해 설교하면 설교의 구성 방식으로만 이해를 합니다. 예컨대 성경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그리고 설교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 3대지냐 4대지냐, 혹은 구절을 풀어 설교할 것이냐(주해설교), 그리고 삶에 어떻게 적용할 것이냐, 대부분 한국 목회자는 여기에 머물러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입니다. 강해 설교에 대한 이해는 형식이 우선이 아닌 중요한 설교 신학에 대한 믿음에 근거를 두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미국의 개혁주의 목사이며 청교도 신학자 조엘 비키(Joel R.Beeke, 1952년- )의 저서 '설교에 관하여(Reformed Preaching)'로 번역되어 있는데 강해 설교의 특징을 이렇게 말합니다. 형식도 중요하고 구성 요건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뭐냐. 그것은 설교자의 마음에서 청중의 마음으로 어떻게 그 설교 내용이 전달될 것이냐에 포커스를 맞춘 걸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설교는 구성방식도 중요하고 콘텐츠(contents) 정말 중요하죠. 우리가 복음을 전해야지 무엇을 전해야 되겠습니까. 그런데 이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바로 전달방식입니다. 요즘 현대인은 문화가 다르고 라이프 스타일이 다르고 인지성향 등 여러 가지가 다릅니다. 그래서 저는 양자를 다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안준배 박사가 시인 소강석 목사의 설교에 관해 말했다. "페르소나(persona 가면mask이나 인격person을 뜻하는 그리스어로 개인이 실제 성격과는 다르지만 연극이나 법정에서 다른 사람들의 눈에 비치는 한 개인의 모습을 의미)라는 말이 있는데 가면이라는 뜻도 있고 삼위일체의 성부 성자 성령(삼위 3person)을 가리키기도 합니다. 그리고 작가주의 영화감독들 대표적으로 봉준호 감독이 있습니다. 이분이 자기작품 '살인의 추억' 이후 오스카상은 받은 '기생충'에 이르기까지 그 감독의 페르소나(영화계에선 어떤 감독이 자신의 분신 혹은 상징처럼 선호하는 배우를 뜻한다)로 배우를 썼는데 송강호입니다. 이 배우는 감독의 모든 생각과 뜻을 받아들여 연기합니다. 그래서 그런 역할을 하는데 우리 한국 교회도 1960년대부터 90년대까지 하나님께서 조용기 목사를 그 시대의 성령의 페르소나로 사용하셨고 2000년대로 넘어가면서 하나님께서 소강석 목사를 성령의 페르소나로 세우셨습니다. 소 목사님은 어디에 가서 어떤 설교를 하든 그 현장에 딱 맞는 설교를 합니다. 저는 소 목사님과 함께 라틴 아메리카 중에 '상 파울교회'에서의 설교를 들었고 그리고 여러 군데에서 들었는데 그 현장을 딱 파악해서 거기에 맞는 설교를 합니다. 그다음에 2017년 종교개혁 5백 주년 기념대회 때 소 목사님이 주 강사로 설교를 했는데 '말씀의 근원으로' 그러니까 완전히 핵심적인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어떤 분들은 주제와 영 관련이 없는 메시지를 전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소 목사님은 어느 현장, 어떤 대회, 어떤 형식의 모임이 됐든 거기에 딱 맞는 메시지를 전합니다. 2017년 12월 소 목사님과 대만에 초청을 받아 갔습니다. 대만 까오씽이라는 곳인데 그 도시에서 성회를 인도하고 열차로 타이페이로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늘 책을 갖고 다니는데 덩리쥔(鄧麗君, 1953년 1월 29일~1995년 5월 8일 대만 출신 가수)의 전기를 읽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소 목사님이 관심을 보이더라고요. 저한테 물어봤습니다. '안 목사님은 이선희가 뛰어나다고 생각합니까. 아니면 덩리쥔이 뛰어나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래서 나는 이렇게 말했어요. 중화권이 사랑하는 '위에 량 따이 뺘오 워 더 신'(月亮代表我的心) '달빛이 내 마음을 대신하죠.' 이 노래를 부른 덩뤼쥔이라고 그랬죠. 그러니 소 목사님이 뭐라고 하냐면 '나는 이선희야. 이선희는 '별처럼 수많은 사람 중에 그대를 만나' (회중 웃음) 소 목사님은 별을 참 좋아하세요. 이선희를 가장 좋아한다는 거예요. '별처럼 수많은 사람들, 그중에 그대를 만나 꿈을 꾸듯 서로를 알아보고 주는 것만으로 벅찼던 내가 또 사랑을 받고 그 모든 건 기적이었음을.' 그날 저녁 때 타이페이에 5천 명 모이는 따워줘이라는 대만 최고의 교회에서 소 목사님이 설교를 했어요. 그런데 소 목사님이 나와 나눈 대화 가운데서 덩뤼쥔의 노래 '첨밀밀' (蜜蜜 '티엔미미' 달콤해요)' '니 샤오 더 티엔미미(笑得蜜蜜 그대 미소는 달콤하지요) 달콤해요. 이 노래를 듣는 순간 대만 사람들이 음악으로 대단히 감동을 했어요. 대만 사람이 사랑하는 덩뤼쥔 자기들 노래로 불러주니까 감동을 한 겁니다. 그래가지고 그다음 해에 한 8천 명 수용할 수 있는 대만에서 제일 큰 허핑체육관에서 열린 성회에 초청을 받았습니다. 그때는 소 목사님이 그 노래만 부른 게 아니라 하모니카로 '위에 량 따이 뺘오 워 더 신'을 연주하니까 대만 사람들이 박수갈채를 보내고 아니 소 목사님은 우리 대만인이네 그러는 겁니다. 그러면서 동질감을 느끼더라고요. 큰 성령의 역사가 일어난 것을 제가 목격했습니다. 소 목사님은 시대를 해석하고 말씀으로 치유하는 설교를 전해오고 있습니다. 2021년 12월 1일 여의도순복음교회 국민일보 창간 33주년 감사예배에서 소 목사님이 설교했습니다. 조용기 목사님 소천하신 이후인데 그때 '고래를 위하여'라는 설교를 했습니다. 정호승 시인의 '고래'라는 시를 인용한 설교였습니다. '푸른 바다에 고래가 없으면 푸른 바다가 아니지'라고 설교를 하면서 조용기 목사님이 한국 교회 고래였고 그 고래가 국민일보를 낳았고 또 이영훈 목사를 낳았고 또 조민재 국민일보 회장을 낳았고 또 한국 교회 목회자와 성도들을 낳았다고 설교했습니다. '고래'라는 시적 언어를 가지고 설교를 하는데 그때도 이선희 노래를 불렀는데요. (회중 웃음) '그 모든 것 기적이었네. 은혜였네. 눈물이였네. 이렇게 개사를 해서 노래를 불렀거든요. 얼마나 많은 감동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여의도순복음교회 교인들이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소 목사님 그 음악을 그 현장에 맞게끔 사용하면서 참, 소 목사처럼 국민일보 창간 33주년 기념 예배에 딱 맞게끔 하면서 설립자 조용기 목사 그리고 이영훈 목사와 국민일보 회장을 비롯해 여의도순복음교회 성도들을 모두 아우릅니다. 이렇게 해박하고 탁월하게 설교를 하는 설교자가 이 시대에 또 누가 있겠습니까. 유럽에도 같이 가서 성회를 지켜봤고 춘천순복음교회 성회도 지켜봤는데 그때마다 그 현장에 딱 맞는 설교를 하셨습니다. 우리는 오늘 성령 포럼을 통해서 소 목사님의 그 메시지를 우리가 잘 수용해서 발전시켜 나가길 바랍니다." 앞서 안준배 박사가 그 자질을 실제 목격하고 증언했다. 그렇듯 “이 세상의 광대들도 사람들을 웃기고 울리기 위해 그토록 애틋함과 애절함을 갖고 노래하고 연기하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구원 복음을 전하는 설교자에게 애틋함과 애절함이 없다면 어떻게 되겠는가”라고 스스로 광대임을 밝히고 그것을 실제로 입증해 성공한 소강석 목사는 자신의 설교관을 세 가지로 압축해 말했다. "최근 경영계에선 기업 현장에. 예술가 혹은 예술적 요소를 도입하는 예술적 개입 사례가 늘고 있습니다. 하물며 설교에도 예술적 개입을 도입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1. 나는 문학의 옷을 입혀 성경 말씀을 전합니다. 2. 음악의 옷을 입혀 성경을 전합니다. 3. 성경을 이야기로 전합니다." 성숙(成熟)이란 ‘나’와 ‘남’ ‘우리’와 ‘그들’을 객관적으로 보게 되는 발전의 한 단계다. ‘남’과 ‘그들’은 ‘나’와 ‘우리’를 비춰주는 거울이다. 상대를 객관적으로 정확히 아는 것은 나에게 득(得)이 된다. 상대를 부정확하게 아는 지도자는 지형(地形)을 모르고 뛰어내리는 낙하산병(落下傘兵)과 같다. ‘과거를 기억하는 방식’은 지도자의 성숙과 직결돼 있다. ‘기억의 감옥’에 갇히면 ‘기억의 포로(捕虜)’가 되기 십상이다. 성경은 말씀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찌어다 히 4:12-14 2024-0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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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09
  • 서울·서북 장로연합회 선지자 김창원 메시지
    여름이면 공원 가로등에는 언제나 수십 마리의 나방들이 가로등 불빛 주변에 날아다니고 있는 걸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불나방’처럼 인공조명 주변을 날아다니는 곤충의 비밀이 일부 풀렸다. 인공조명으로 인해 감각 혼란이 일어나며 조명의 불빛을 떠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서울·서북지역장로회연합회가 제54회 정기총회를 2023년 11월 4일 남서울중앙교회(여찬근 목사)에서 열었다. 신임 회장은 직전 회기 수석부회장을 역임한 안재권 장로(남서울중앙교회)가 이병우 장로를 이어 취임했다. 2024년 1월 25일 오후 6시 승동교회에서 서울·서북지역장로회연합회(회장 안재권 장로) 제54회기 1월 월례회가 열렸다. 제1부 예배는 수석부회장 이해중 장로가 인도했다. 서울강남노회장로회 회장 강헌식 장로가 '선교사의 핏값으로 세운 국가의 공의 경제 총선'을 위해 기도했다. 서울강남노회장로회 서기 정영호 장로가 이사야 66:15-21 봉독했다. 보라 여호와께서 불에 옹위되어 강림하시리니 그 수레들은 회리바람 같으리로다 그가 혁혁한 위세로 노를 베푸시며 맹렬한 화염으로 견책하실 것이라 여호와께서 불과 칼로 모든 혈육에게 심판을 베푸신즉 여호와께 살륙 당할 자가 많으리니 스스로 거룩히 구별하며 스스로 정결케 하고 동산에 들어가서 그 가운데 있는 자를 따라 돼지고기와 가증한 물건과 쥐를 먹는 자가 다 함께 망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그들의 행위와 사상을 아노라 때가 이르면 열방과 열족을 모으리니 그들이 와서 나의 영광을 볼 것이며 내가 그들 중에 징조를 세워서 그들 중 도피한 자를 열방 곧 다시스와 뿔과 활을 당기는 룻과 및 두발과 야완과 또 나의 명성을 듣지도 못하고 나의 영광을 보지도 못한 먼 섬들로 보내리니 그들이 나의 영광을 열방에 선파하리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이스라엘 자손이 예물을 깨끗한 그릇에 담아 여호와의 집에 드림 같이 그들이 너희 모든 형제를 열방에서 나의 성산 예루살렘으로 말과 수레와 교자와 노새와 약대에 태워다가 여호와께 예물로 드릴 것이요 나는 그 중에서 택하여 제사장과 레위인을 삼으리라 여호와의 말이니라 서울강남노회장로회 장로찬양단이 찬양했다. 내주 하나님 넓고 큰 은혜는 저 바다보다 깊다 너 곧 닷줄을 끌러 깊은 데로 저 한가운데 가보라 언덕을 떠나서 창파에 배 띄워 내주 예수 은혜의 바다로 네 맘껏 저어가라 서울강남노회 증경노회장 김창원 목사(대남교회)가 기만적 시대를 깨우는 이사야 선지자의 메시지 '만든 거룩의 기만'을 설파했다. "승동교회가 왜 영광스럽습니까. 승동교회가 신천지에 팔리고 이곳에 신천지 건물이 세워졌다면 영광스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복음의 그 영광스러운 그 본질을 지금도 지키고 있기 때문에 승동교회 영광이 지금도 빛난다고 말할 수 있을 겁니다. 눈에 보이는 세상의 것들은 반드시 종말을 맞이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심판이 있습니다. 모든 것이 아무 문제가 없는 멀쩡한 것이라면 왜 심판을 받겠습니까. 이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은 끝나게 되어 있습니다. 모두 심판대 앞에 서게 될 것입니다. 인간도 천사도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교회 출석하는 사람 중에서 그리고 교회 지도자들 중에서도 지옥의 형벌을 받을 자들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끝없는 경고의 말씀입니다. 이 세상의 종말과 경고는 구약 선지자들부터 시작해서 지금까지 예언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오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이 세상 종말이 주는 교훈을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심판이 정확하려면 공정해야죠. 정확한 것에서부터 심판의 공정성이 나올 수 있겠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애먼 사람, 죄를 뒤집어씌우고 죄인은 활보하고 그런 나라라고 한다면 공의로운 나라라고 할 수가 없겠죠. 세상 모든 나라는 일정 부분 공의롭지 않습니다.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심한 나라, 그렇지 않은 나라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공의롭습니다. 일점일획도 틀림없이 하나님은 공정하게 심판하실 것입니다. 세상에 정의를 따지는 곳이 법정인데요. 무엇을 따지죠. 사실입니다. 진짜 정확한 사실이 뭐냐를 따집니다. 그래서 치열하게 다투고 사실이라고 판단되는 것에 근거해 정의로운 판결을 하려고 노력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말씀하십니다. 재판 필요 없습니다. '내가 그들의 행위와 사상을 아노라.' 이것으로 끝나는 겁니다. 온 세상 사람이 무슨 얘기를 해도 하나님께서 옳다고 하시면 옳은 것이고 세상 사람이 맞다고 해도 아니라고 하시면 아닌 것입니다. 이겁니다. (회중 아멘) 이게 무섭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것을 붙잡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초대교회의 많은 성도가 콜로세움에서 죽임을 당할 때 수많은 사람이 구경 와서 손가락질하고 비웃고 조롱할 때도 당당하게 하늘을 우러러 죽음을 맞을 수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진리를 붙잡고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나를 옳다 하시면 누가 나를 송사하리요. 그 믿음으로 섰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은밀한 동산에 들어가서 하는 온갖 가증스러운 우상숭배를 철저히 아시고 심판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이 어떤 죄를 졌고 얼마만큼 범죄했는지 아십니다. 이게 무서운 일입니다. 스스로 죄 없다 하는 자들이 하나님의 밝은 빛 앞에서 감추어놓고 잊어버렸던 그 모든 죄 기억 속에 묻어버리고 사람들이 잊어버리고 또 사람들 입을 막았다고 해서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믿는 사람들에게 이러한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은 참으로 위로가 되죠. 우리는 보든지 안 보든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마음을 살피면서 하나님이 나를 어찌 보실까 생각하며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것은 반드시 심판을 통해 보상을 받을 것입니다. 우리 믿음과 헌신과 충성을 하나님 앞에 충성한 것을 보상을 받을 것입니다. 남들은 세상의 영광을 따라가고 부귀명예를 따라갈 때 교회 나와서 예배드린다고 앉아있고 기도한다고 앉아있는 이것도 하나님을 위한 헌신이고 희생입니다. 재미있습니까. 재미 하나도 없죠. 재미없어도 하나님 앞에서 마땅한 일을 하려고 하나님 앞에서 예배드리고 헌신하고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 다 기억하시고 다 갚아주실 겁니다. (회중 아멘)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심판 가운데 우리 안에 이루어진 일도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가운데에서 징조를 세워서 이렇게 말씀한 것이 신약시대에 다 이루어졌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나의 영광을 뭇 나라에 전파하리라는 말씀은 이루어지고 있죠. 이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전파하지 않으면 죄가 된다는 뜻을 깔고 있습니다. 이사야 66장 21절 말씀을 보십시오. ‘나는 그 가운데에서 택하여 제사장과 레위인을 삼으리라.’ 아마 이사야 선지자도 이 말씀이 무슨 뜻인가 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사야가 알고 있는 구약 율법의 말씀과 조화시키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아직 그리스도에 대해 완전하게 알고 있지 않으니까. 그리스도께서 자기 안에서 다 완성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누구든지 예수를 믿는 자는 제사장처럼 말씀을 가르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레위인처럼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섬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직접 섬길 수 있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 그것을 우리가 물려받아 감당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에 민족적 배교가 있을 그때에 세상의 종말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때까지 시대를 살피면서 복음의 사명을 힘써 감당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요즘 이런 게 트랜드고 저런 게 유행이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이 시대에 무엇을 기뻐하시는가, 이 시대에는 어떻게 복음을 전해야 되고 어떻게 복음을 지켜야 할 것인가를 우리는 고민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그래야 마땅하다고 ‘그들이 나의 영광을 뭇 나라에 전파하리라’ 이사야 66장 19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돼야 마땅하다고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그렇게 기대하고 계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많은 사람이 하지 않으면 어떻습니까. 나 하나라도 하면 되는 것입니다. 여호수아와 같은 믿음의 배짱이 있어야 합니다. 다 안 해도 나는 한다, 그겁니다. 다 이상한 믿음 따라가도 나는 바른 믿음 지킨다는 그런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회중 아멘) 우리는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그 교회인가. 그 교회다운가. 우리는 오늘 그 생각을 해보고 돌아가야 합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예물을 깨끗한 그릇에 담아 여호와의 집에 드린 것 같이 우리가 깨끗한 예물과 같은 존재인가. 아닙니다. 이사야 선지자 말씀처럼 ‘스스로 거룩히 구별하며 스스로 정결케 하고 동산에 들어가서 그 가운데 있는 자를 따라 돼지고기와 가증한 물건과 쥐를 먹는 자가’ 아닌가. 나는 혹사 그 길로 끌려가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이 마지막 때에 이 혼란스러운 때에 내게 주신 사명을 끝까지 감당하고 있다고 몸부림치고 있는 그리고 작은 충성이라도 하나 더 보태려고 하는 그런 하나님의 종인가. 우상숭배로 하나님께 반역하고 있는 존재인가. 내가 교회 다니는데 합동 측 장로인데 조심하셔야 합니다. 총신 팔십몇 회 기수는 그 기수 단톡방이 폭파됐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목사끼리 싸움이 붙었습니다. 여러분 교회 목사님도 자유주의자일 수 있습니다. 장로님들 무서워 감추고 있을 뿐이지 자유주의자입니다. 동기들 앞에서는 거침없이 말합니다. 여러분 동성애 문제가 아닙니다. 동성애 앞에 있는 걸 살펴보셔야 합니다. 동성애 바로 앞에 뭐가 있는 줄 아십니까. 지금 동성애 허락하는 교단들 있죠. 그 앞에 뭐가 있는 줄 보셔야 됩니다. 먼저 여성 장로가 등장할 겁니다. 그다음에 여성 목사가 등장합니다. 그다음 동성애가 나옵니다. 성경이 그렇게 무너져가는 겁니다. 미국교회가 그랬습니다. 대만교회가 그랬습니다. 모든 교회가 다 그렇습니다. 순서는 하나도 틀리지 않습니다. 정확하게 그 순서대로 갑니다. 지금 모 장로교단에서 신대원 학생들이 동성애 지지하는 그런 행동을 하다가 발각이 돼서 처벌을 받았습니다. 무슨 처벌을 받았는지 아십니까. 반성문 썼습니다. 놀랍더라고요. 반성문 쓰고 끝입니다. 조만간 한 20년 뒤 그들이 그 교단의 담임목사들이 됐을 때 어떤 모습일지 상상해 보십시오. 지금 어떤 장로교 교단은 ‘하나님 동성애를 사랑하십니다’라는 플래카드를 걸고 집회를 하기도 합니다. 얼마 안 있어 그 교단도 그렇게 될 겁니다. 동성애 앞에 오는 걸 보셔야 됩니다. 얼마나 무서운 일입니까. 하나님 말씀을 따라 거룩한 삶을 사는 데 전혀 힘쓰지 않으면서 우상숭배를 스스로 합니다. 우상숭배에 얼마나 정성을 다하는지 모릅니다. 오늘날 주의 진리의 말씀이 무엇인지 사도들은 무엇을 위해 죽었는지 종교개혁자들은 무엇을 위해 목숨을 걸었는지 관심이 없습니다. 요즘 새로 나온 거 유행하는 거 사람이 좋아 박수치는 일에 관심이 많습니다. 사랑하는 장로님 여러분 교회를 지키셔야 합니다. 교회를 지키라고 여러분을 지도자로 세우셨습니다. 그러면 주님이 원하지 않으시는 거, 사도들이 하지 않는 거, 종교개혁자들이 하지 않은 거, 박윤선 박사님, 박형용 박사님 이런 분들이 하지 않은 거를 하자고 하는 것을 경계해야 합니다. 뭔가 새로운 이야기를 할 때 과연 이것이 무엇인가 살펴보셔야 합니다. 아무리 목사가 하고 싶어도 장로님이 아니라고 하면 할 수 없는 게 사실 아닙니까. 사실입니다. 장로님들이 교회를 지키셔야 합니다. (회중 아멘) 목사는 이상한 걸 많이 배우다 보니까 이상한 소리 하는 목사가 나오기 쉬워요. 장로님들은 말씀만 듣고 성경만 보고 말씀만 붙들고 살아가시니까 이상한 소리 듣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장로님들이 교회를 꼭 지키셔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 신앙의 선배들로부터 물려받은 그 온전한 신앙을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온갖 철학들 사상들에 물들어 복음보다 그걸 더 중요하게 여기는 목사들이 있습니다. 복음을 변질시켜 버렸습니다. 한쪽에서는 자유주의 신학이, 패미니즘(feminism 女性主義) 신학이, 해방신학이, 다른 한쪽에서는 자본주의 신학까지 동원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르치신 일이 없는 ‘돼지고기와 가증한 물건과 쥐’와 같은 것들을 먹고 또 다른 사람에게 먹이는 일들에 온 정성을 다하면서 하나님의 참된 진리와 오직 성경의 정신을 내버린 지 오래인 사람들이 흔한 시대입니다. 나는 예수 믿는다고 나는 목사요 장로라고 말한다고 그들이 다 우리처럼 온전한 믿음의 지조를 갖고 살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이라고 무조건 신뢰하시면 안 됩니다. 좌우를 둘러보십시오. 오직 성경의 믿음을 붙들고 신앙생활을 하는 교회들이 많습니까. 어느 교회를 가도 오직 성경, 이런 소리 듣기 쉽지 않습니다. 오직 믿음, 오직 은혜, 오직 예수 그리스도,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듣기 쉽습니까. 우리 교단 교회 가도 그런 소리 듣기 어렵습니다. 정말 우리가 지켜야 되고 붙들어야 되는 것이 무엇인지 중요한 것을 말하고 가르치는 사람들 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언젠가 하나님 보좌 앞에 끌려갈 것입니다. 아니 불려가겠죠. 심판을 받을 것입니다. 그때 사람들이 만든 가짜 거룩을 가진 사람들은 심판받을 것입니다. 너 무엇 하다 왔느냐 했을 때 ‘내가 뭐 하다 왔지’하고 그때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그때 가서 말할 것을 그때 가서 심판받을 것을 지금 준비하셔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이 주신 말씀만 거룩하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만 구원받고 마지막 때까지 사도들이 전해주고 종교개혁을 지켜낸 오직 성경, 오직 예수의 신앙을 이 시대에도 지켜내고 다음 세대에도 전해주는 교회가 되도록 세우고 지키시는 영적 지도자들로 쓰임 받는 우리 장로님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온 회중 큰 아멘)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감사합니다. 악하고 혼란스럽고 어지럽습니다. 세상에 온갖 말들이 난무하고 달콤한 이야기들이 우리 귀에 들어옵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직 기록된 성경의 주께서 하신 모든 말씀을 다 믿고 살고 또 죽기로 다짐하고 구원받는 자들이 아니겠습니까. 주님의 교회를 지키라고 주여 장로로 삼아주셨사오니 하나님이여 주님의 교회를 지키고 주님의 교회를 섬기고 주님의 복음을 전하고 다음 세대를 가르치게 해주시옵소서. 그리고 주님 부르셔서 하나님의 엄위하신 심판대 앞에 섰을 때 내가 잊어버린 일까지도 기억하시고 찾아내셔서 상 주시고 칭찬하시는 주님 앞에 영광을 받는 종들로 쓰임 받게 해주소서. 그리고 장로님들의 걸음걸음을 인도하시고 이 모든 일을 함께 이루어가는 일에 선봉에 서는 우리 귀한 서울서북 지역장로연합회가 되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사회자 이해중 장로가 나와 선지자 김창원 목사의 메시지를 압축해 말했다. ”은혜와 도전의 말씀 감사합니다.“ 총무 이희근 장로가 광고하고 승동교회 담임 최영태 목사의 축도로 1부 예배를 마치고 이어서 회장 안재권 장로의 사회로 2024년 1월 23일 개포동 구룡마을 ‘사랑의 연탄 나누기’ 사업보고와 2월 월례회 회무를 진행했다. 영국 임페리얼 컬리지 런던대 연구팀은 곤충이 인공조명에 이끌리는 것이 아니라 감각 혼란으로 조명 주변에서 비정상적인 비행을 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곤충이 불빛을 향해 날아와 비행한다는 사실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그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었다. 지금껏 빛이 오는 방향을 탈출구로 여긴다거나 인공조명에서 나오는 열에 이끌린다는 등 다양한 가설이 제기돼 왔다. 연구팀은 곤충의 비행 패턴을 분석하기 위해 초고속 적외선 카메라 등으로 곤충의 비행을 촬영했다. 그 결과 곤충들은 인공조명 주변을 비행하면서 갑자기 몸을 비틀고 뒤집어 방향을 바꾸는 등 불규칙한 패턴을 보였다. 마치 인공조명 주변에서 ‘현기증’을 일으킨 듯 혼란스럽게 날아다닌 것이다. 연구팀은 곤충의 이러한 반응이 자연적인 습성에 의한 것으로 보고 있다. 곤충은 비행할 때 자신의 등을 빛이 비춰지는 쪽으로 돌리려는 습성이 있기 때문이다. 태양이나 달빛 아래서 비행할 때는 등이 위를 향해야 안정적으로 비행할 수 있지만, 인공조명이 있으면 감각 혼란이 일어나 비행 패턴이 들쭉날쭉해지는 것이다. 실제로 연구팀이 천막을 설치하고 마치 하늘에서 빛이 내리는 것처럼 조명을 반사하자 곤충이 안정적으로 비행했다. 연구팀은 “곤충들이 인공조명을 향해 날아가는 게 아니라 그 빛에 갇혀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것”이라며 “야행성 곤충들을 위해 빛 공해를 줄이는 방안을 연구해야 한다”고 했다. 이렇듯 공해와 같은 세상의 혼탁한 사조를 교회에서 걷어내기 위해 선지자 김창원 목사의 메시지대로 오직 말씀, 오직 은혜, 오직 예수로 무장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21세기의 어떤 교회와 목사와 장로로 남을까. 성경은 말씀한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창 1:1-4 2024-0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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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03
  • 송태근 목사의 병렬 설교
    넓이와 높이보다 내게 깊이를 주소서. 나의 믿음에 맞는 산비탈과 먼 교회들에 불을 밝히시고 가까운 곳에서 내가 기도하게 하소서. 나의 믿음을 위하여 오늘은 저 황금빛 소망마저 그 자리에 머물게 하소서. 주님께서 내게 약속하신 시간이 이르렀습니다. 지금은 사랑을 해가 뜨는 거친 곳으로 보내소서. 많은 진리 가운데 위대한 좁은 길을 선택하여 그 뜻을 알게 하소서. 기도는 언제 필요할까. ‘감사의 기도’라는 말은 있지만, 행복할 때 기도는 의외로 짧게 끝난다. 반대로 우리의 마음이 무너져 내릴 때, 붙잡을 것이 없을 때, 기도의 힘은 자연스럽게 나온다. 이대로 끝낼 수는 없을 때, 견뎌서 다시 일어날 힘을 구할 때, 기도는 찾아온다.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의 아이큐는 대단하지 않다. 가장 똑똑하다는 동물은 돌고래와 문어다. 그들의 아이큐는 70~80 정도 된다고 한다. 그러니 우리 아이큐가 160이 넘지 않는다면 문어보다 2배 이상 똑똑한 것은 아니다. 그런 인류가 어떻게 동물들은 하지 못하는 인공위성, 유전공학, 인공지능을 만들 수 있었을까. 인간의 뇌는 병렬로 연결되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럼 어떻게 케이블도 없이 우리의 뇌는 병렬로 연결될 수 있었을까. ‘언어’를 통해서다. 대화를 하면 서로의 뇌가 연결되는 효과가 생긴다. 그런데 언어는 같은 장소, 같은 시간에 있어야만 연결된다는 한계가 있다. 그런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서 인간은 ‘문자’를 발명했다. 플라톤의 책을 읽으면 나는 9000㎞ 떨어진 그리스에 2500년 전에 살았던 엄청나게 똑똑한 사람과 뇌가 연결되는 효과가 생기는 것이다. 우리가 12년 정규교육을 받고 졸업하면 인류 문명사 5000년 동안 가장 똑똑한 사람 수천 명의 뇌와 병렬로 연결되는 효과가 생겨나는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과의 연결로 똑똑해진다고 한다. 2023년 11월 12일 9:30 한국 교회에 모범이 될 삼일교회 2부 예배 성찬식 뒤 송태근 목사가 속삭이듯 입을 열었다. "우리 이제 영상을 하나 볼텐데 아시는 것처럼 지난주 선교팀하고 케냐를 다녀왔습니다. 세 군데를 다녀왔는데 첫 번째는 절대 물이 부족한 아니 물이 아예 없어요. 그래서 어린 소녀들이 가족 식수를 위해서 수십 킬로를 왕복을 해야 됩니다. 걸어서 가다가 들판에서 못된 사람들에게 성폭행을 당하기도 하는 이런 처참한 곳이 케냐 전역에 널려있습니다. 이 물 문제는 한두 번에 해결될 수 있는 문제도 아니고 몇천만 원으로 해결해줄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또 한 문제는 케냐 북단에 가면 세계 최대 난민촌이 있습니다. 카푸마라는 지역인데 덩치가 한 도시 규모이다 보니 네 군데로 흩어 놨어요. 한 30만 명이 7만여 명씩 네 캠프촌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것들이 유엔 관리하에 각 나라에서 온 식량을 배급받는데 저걸 먹고 어떻게 사나 할 정도입니다. 정말 안 죽을 만큼만 배급이 됩니다. 그럴 수밖에 없죠. 그래도 그 사람들은 그나마 그거라도 있죠. 그걸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캠프 밖의 케냐 원주민들입니다. 그게 부러워 캠프를 습격하고 싸우고 그럽니다. 케냐 수도 나이로비 외에는 정부 차원에서도 손 놓고 방치돼 있어요. 모든 기간 산업이 무너진 상태입니다. 처참해요. 인권이고 뭐고 없어요. 벌판에 아무것도 없어요. 난 세상에 없다 없다 해도 여러 곳 다녀봤지만 이런 곳은 처음 봤어요. 지난번 바라나시가 지옥이었다면 이곳은 생지옥이에요. 그리고 마지막 간 데가 학교인데 같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영상실을 향해) 영상을 좀 띄워주세요." 영상이 떴다. 영어와 스와힐리어가 공용인 케냐 어린이들의 '날 세우시네 You Raise Me Up' 영어 합창 소리가 울렸다. You raise me up, so I can stand on mountains You raise me up, to walk on stormy seas I am strong, when I am on your shoulders You raise me up to more than I can be… 당신이 나를 일으켜 주시기에, 나는 산에 우뚝 서 있을 수 있고 당신이 나를 일으켜 주시기에, 나는 폭풍의 바다도 건널 수 있습니다. 당신이 나를 떠받쳐 줄 때 나는 강인해 집니다. 당신은 나를 일으켜, 나보다 더 큰 내가 되게 합니다. 화면이 바뀌고 수용 교실 건물만 온전한 모습이고 여기저기 파인 돌투성이 운동장과 턱없는 외부 화장실이 보였다. 송태근 목사가 입을 열었다. "이 학교를 저희 교회 출석하시는 정인희 권사님이 계속 섬겨오셨습니다. 이제 더 이상 여력이 없어서 거의 손 놓고 있는 상태입니다. 저 학교의 구체적인 상태를 볼까요. 5000명이 모여 공부하는 학교인데 운동장 상태가 저 모양이고 채석장에 지은 학교입니다. 아마 싸서 그랬던 것 같습니다. 학교 운동장인데 턱이 지고 비탈입니다. 또 볼까요. (화면이 바뀐다) 학교 운동장 상태가 어떤 줄 아시겠죠. 이런 곳에서 아이들이 뛸 수도 없고 많이 다친다고 해요. 5000명이 사용하는 화장실인데 상태가 저렇습니다. 열악하고 비참합니다. 웬만하면 말로 설명을 드리고 싶었는데 표현하기 어려워 영상으로 보여드립니다. 아이들 특히 여자아이들 인권이라는 건 뭐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비참한 상태입니다. 여러분 다음 주 추수감사 헌금은 두 가지 목적으로 사용이 될 겁니다. 아이들 운동장을 트랙터로 갈아엎어 평평하게 만들고 다치지 않게 만들어줘야겠습니다. 두 번째는 화장실을 보수하고 증축하는데 사용할 겁니다. 여러분 마음이 닿는 한도 안에서 추수감사 헌금에 동참해주시고 이렇게 선하게 사용되도록 기도라도 해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좌우 인사를 나눌까요." 교우들이 좌우 교우와 인사를 나누었다. "지난주는 하나님께서 세 나라에 대한 심판을 예고하셨습니다. 첫째가 앗수르, 둘째가 유다, 셋째가 이스라엘입니다. 이 세 나라 심판의 공통점이 무엇이었습니까. 교만입니다. 교만이라는 것은 여호와를 경외하지 않는 태도가 어떻게 나타났습니까. 연약한 자들 무고한 자들 가난한 자들을 학대하고 악한 법을 만들어 짓밟는 패역한 태도로 나타났습니다. 이 일을 하나님께서 벌하실 텐데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리라고 약속하셨습니다. 그것이 오늘 11장에 넘어오면서 어떻게 나타나는가 설명해 드릴 텐데 이사야서 강의는 다음 주로 마무리가 될 겁니다. 11장 1절을 보면 이렇게 돼있어요. '이새의 줄기에서' 앞을 보실까요. '이새'는 누구입니까. 그렇죠. 다윗의 아버지입니다. '줄기'는 무슨 뜻입니까. '가문'을 말합니다. 즉 '다윗의 가문'에서 그 뜻입니다. 이사야는 문학적 감성이 풍부해서 그런지 하나님의 모든 경륜과 역사에 대해서 식물로 비유해 표현한 게 굉장히 많아요. 우리 기억나나요. 하나님께서 농부가 되셔서 극상품 포도를 심으셨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무슨 포도가 맺혔죠, 들포도. 들포도는 쓰고 시어 먹을 수 없습니다. 결실된 게 아닙니다. 적어도 결실이라고 했을 때는 주인이 심은 의도대로 열매 맺는 게 결실입니다. 그게 진짜 열매입니다. 그런데 들포도가 맺어졌습니다. 이렇게 농산물과 식물로 하나님의 경영과 마음을 묘사한 데가 굉장히 많습니다. '이새의 줄기에서' 가문에서 '한 싹이 나며'라는 것은 어떤 과정을 말하는 것이겠죠. 그것을 좀 더 강화하는 측면에서 '그 뿌리에서' 뭐가 나요. '한 가지가 나서' 무얼 할 것입니까. 이 하나님께서 직접 손대시는 농사는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을 구원하시고 경영하시는 역사는 반드시 열매를 맺을 것이고 결실할 것을 확고하게 방점을 찍고 들어가는 겁니다. 이 일은 어떤 중간에 인간의 변수에 따라 결과에 변수가 생긴다는 겁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열심이 일을 이루신다는 것입니까. 하나님의 열심이 반드시 결실하고 원하시는 열매를 맺도록 하신다는 확고하신 하나님 의지를 이렇게 담아내고 있는 겁니다. 하나님은 열매 맺게 하십니다. (회중 아멘) 하나님은 결실하시는 분이십니다. (회중 아멘) 그 언약에 여러분과 제가 붙들려 있습니다. 할렐루야! (회중 아멘) 2절을 잘 보시면 '그 위에' 누가? '여호와의 영'이 계십니다. 여호와의 영이라는 것은 성령님을 얘기해요. 그러니까 이 일은 하나님이 혼자 하신다는 게 아닙니다. 누구와 같이 하신다는 얘기입니까. 성령님이십니다. 그러면 여기서 놀랍게도 '이새의 줄기'에서 '한 씨'가 나요. 앞으로 이 씨는 누구로 열매 맺을까요. 예수 그리스도 성자 하나님으로 열매 맺을 거예요. 그러면 성자 예수님, 성부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 여기 한꺼번에 등장하십니까 안 하십니까. 예. 성부 하나님 혼자 이거 못 하시나. 이렇게 다른 위격, 성령 하나님의 손을 빌리셔야 되나. 예, 그래야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능력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본래 하나님의 속성은 무엇이든지 함께하시는 걸 좋아하십니다. 참 놀라워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교회 공동체를 이 땅에 설립하신 것도 그 일을 어떻게 하시겠다는 겁니까. 함께, 성도끼리 함께 하나님과 교회가 함께 세상 경영을 우주적 경영을 만들어 성취하고 이루어가시기를 바라시는 겁니다. 그리스도인의 라이프 스타일(生活 樣式)은 함께하기를 즐거워해야 해요. '아냐 다 귀찮아 나 혼자 할 거야. 난 고독한 게 좋아.' 이건 잘못된 거예요. 우리 다 '함께 합시다'라고 인사합시다. (회중 모두 좌우를 보며 '함께 합시다.') 한번 더 '함께 갑시다.' (회중 모두 웃고 좌우를 보며 '함께 갑시다.') 오늘따라 이상하게 왜 옆에 앉았나 이러면 안 되겠죠. (일동 웃음) 함께 해야 합니다. 얼마나 좋아요. 정말 우리가 하나님 앞에 관계만 바로 되어 있다면 교회 공동체만큼 행복한 곳이 없어요. (그의 비겁한 전임자 시절만큼은 좀 달랐던 것 같다.) 수많은 분들이 내 어머니고 내 아버지고 우리는 자녀들이지 않습니까. 이런 공동체가 이 땅 어디에 있겠습니까. 케냐에 가도 우리 형제들이 있고 북극 끝에 가도 우리 형제들이 있고 예수님 깃발 아래라면 모든 사람이 형제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흥겨움으로 만나지 않습니까. 하나님 본성은 함께하기를 즐거워하세요. 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에도 하나님 혼자 하셨어요? 삼위 하나님이 함께 하셨어요. 같이 하셨어요. 믿습니까? (회중 아멘) 뭔 일도 혼자 하면 효율이 좋을 것 같은데 하나님은 효율보다 함께하는 일을 더 좋아하는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회중 아멘) 성경을 볼까요.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이사야서 9장에 보면 6절에 이렇게 되어 있습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통치권)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지혜자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누구라고 표현이 되죠)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그런데 이 전능하다는 말은 어떤 개념을 전제하고 있을까요. 전쟁 개념입니다. 오늘 이사야 11장 2절을 보시면 '모략과 재능의 영'이라는데 이것은 재능에 능하다는 뜻입니다. 할렐루야! (회중 아멘) '한 아기가 나와서 우리를 위해 영적인 거대한 전쟁을 누구와 맞붙으실 건가요? 사탄과 맞붙으실 것입니다. 그분은 전쟁에 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사야 선지자가 9장 6절에서 그렇게 설명했죠. '모략과 재능의 영'이라는 말은 전능하신 하나님, 전쟁에 능하신 하나님, 그런 의미가 됩니다.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리니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자 여러분.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이게 무슨 뜻입니까. 자 여러분. 이게 본업이라는 겁니다. 아기 예수님은 십자가의 대속의 죽기까지 하는 진짜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 일이 여호와를 즐겁게 하시는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즐거워하시는 일은 우리의 회복과 우리의 구원과 우리의 성장과 우리의 성숙과 우리의 완성이에요. (회중 아멘) 그걸 예수님이 아셨어요. 자기 목숨을 내어서 그의 아버지를 즐겁게 하시는데 그것이 무엇이냐면 성경에서 말씀하는 참지식이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일입니다. 잠언 1:7에 보면 이런 표현이 있죠. 유명한 구절인데 (영상실을 향해) 띄워주세요. (회중을 향해) 여호와를 시작!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자 보세요.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뭐예요. 근본, 즉 뿌리라는 말입니다. 이 뿌리에서 뭐가 나온다는 것입니까.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나온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좀 더 실제 적으로 그 지식이라는 뿌리에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열매가 나오는데 도대체 여호와를 경외하는 게 뭘까요. 이게 막연하잖아요. 추상적이지 않아요. 표현 자체가 여호와를 경외한다는 게 뭡니까. 어렵게 생각하지 마세요. 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 하나님의 마음과 형상을 담아 창조하셨어요.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실 때 '우리의 형상'을 따라 만드셨어요. 그런데 여호와를 경외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그 하나님의 형상을 사랑하고 존중하고 함께할 수 있는 것이 여호와를 경외하는 태도입니다. 그 사람이 세상을 구분해 놓은 어떤 계급과 제도를 다 걷어내고 온전히 뭘로 만나야 되요. 그 사람을 높은 사람으로 만나는 것이 아니고 잘사는 사람 못사는 사람으로 만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으로 만날 때 그 태도가 바로 누구를 경외하는 것입니까. 여호와를 경외하는 태도예요. 우리는 이 땅의 질서와 가치에 따라 구분되는 세상에 계층에 따라서 우리 태도가 얼마나 달라집니까. 그건 올바른 신학적 태도도 아니고 신앙적 모습도 아닙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진짜 지식이 있다면 그 사람의 결실에서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어떻게 나타나야 할까요. 그 사람이 딱한 처지에 있으면 당연히 우리가 손을 벌려 주고 함께해주어야 할 것입니다. 저는 케냐에 다녀 돌아오면서 나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쉬며) 무슨 고백이 삐져 나왔는지 아세요. '한국은 너무 잘살아. 한쪽은 배터져 죽고 한쪽은 대한민국 온 나라가 살 뺀다고 다이어트 열풍에 빠져 있고 말이 안되요. 케냐 그 들판에 아이들이 돌아다니는 허허로운 모습을 보면 빼짝 말라 어떻게 저럴 수가 있나. 난민촌에 있는 아이들이나 난민 처지에서 정착촌으로 옮긴 아이들이나 보면 먹지를 못해 가지고 피부도 검은데 더 볼 수가 없어요. 그런데 한국으로 오는 비행기만 타도 너무 잘 먹고 잘 살아요. 한국이 5000년 반만 년 역사 속에 이렇게 넘치는 시대를 살았던 적이 없었잖아요. 이제 우리에게 허락한 이 은혜들을 쌓아 두고, 모아 두고, 고여 놓아서는 안 돼요. 흘려보내고 나눠 줘야 돼요. 믿습니까. (회중 아멘) 오늘 성경을 잘 보세요. 3절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눈에 보이는 대로 심판하지 아니하며 그의 귀에 들리는 대로 판단하지 아니하며' 무슨 얘기냐면 세상을 눈에 보이는 것만 '법이잖아' 그 법이 어떤 법입니까. 이사야 10장 절 2절을 보세요. 유다 고관들이 만들어 놓은 법을 보세요. '불의한 법령을 만들며 불의한 말을 기록하며 가난한 자를 불공평하게 판결하여 가난한 내 백성의 권리를 박탈하며 과부에게 토색하고 고아의 것을 약탈하는 자는 화 있을진저' 이게 세상이 모든 사람이 평화롭게 고루고루 살도록 설정해 놓은 법이 아니예요. 더 잘사는 사람들에게 편리한 법을 고위층 사람들이 책상에 앉아서 어디 부동산 정보나 빼갈려고 그러고 그런 걸 미리미리 다 알아 가지고 미리 땅을 사 놓고 남의 잠자리 다 빼앗고 투기 바람이 불어 정권이 바뀌고 정책이 바뀔 때마다 부동산 값이 폭등을 하고 모든 젊은이가 희망을 잃었어요. 우리는 열심히 벌어서 안 먹고 안 써도 집을 살 수가 없어요. 집이란 인간에게 기본적인 안정감을 주는 공간 아니겠어요. 그런데 서울에서는 집을 살 수가 없어요. 이런 말이 있더라구요. 어떻게 하든 서울 안에서 버텨라. 뭔 소린지 모르겠어요. 또 엉뚱하게 김포까지 서울로 만들려고 하지를 않나. 그건 어느 머리에서 나왔는지 잘 모르겠지만 하여간 이렇게 정책을 뱉어내니 나라가 안정이 되는 게 아니라 흔들리고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정치에 소망이 없어요. 제가 목사라 하는 얘기가 아니라 교회밖에 소망이 없어요. 문제가 많아도 교회밖에 소망이 없어요. (회중 아멘) 하나님이 그래서 교회를 통해 하나님의 우주적 경영을 꿈꾸신다고요. (회중 아멘) 내가 교회에 소속돼 있고 그리스도 안에 소속돼 있다는 게 얼마나 특권이고 은혜인지 아세요. 그게 복인지 아세요. 놀라운 일입니다. 두 달에 한 번 오후 5시에 모이는 전체 리더 청년들 모임 시간에 말했어요. '여러분들 참 복입니다. 주 안에 머물러 있는 것이 청년 때의 특권입니다.' 그런 얘기를 나눴어요. 여러분도 마찬가지예요. 그 하나님의 영이 임해서 이 땅을 제대로 판결하고 정의롭게 심판하기 시작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결론입니다. 성경을 보십시다. 11장 6절 아주 유명한 본문입니다. '그 때에 이리가 어린 양과 함께 살며 표범이 어린 염소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어린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에게 끌리며' “7절 다 같이 시작.”(회중 일동 합독)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가 함께 엎드리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을 것이며' "젖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장난하며 젖뗀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라. 자 이건 문학적 표현이긴 하지만 어떤 초점을 강조하고 있습니까. 이것은 진정한 평화! 힘이 유지해주는 평화가 아니라 그런 힘이 없어도 유지되는 진정한 평화, 약자를 돌봐주고 함께 해주고, 그리고 진정한 조화를 지닌 가장 이상적인 나라를 설명하는 겁니다. 그런 나라가 도래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강한 자로 오시지 않았습니다.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고 흠모할 만한 것이 없는 가장 연약한 모습으로 오시어 가장 처참한 현장에서 우리 주님께서 우리 죄를 대신해 죽으시는 겁니다. 그 나라를 꿈꾸기 위해서 힘이 받쳐주는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과 자비가 은혜가 통치하는 나라가 도래할 것이라고 설명하고 싶었던 겁니다. 마지막 구절. 다 같이 시작." 회중이 이사야 11:9을 다 같이 읽는다.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해됨도 없고 상함도 없을 것이니 이는 물이 바다를 덮음같이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세상에 충만할 것임이니라' "여러분! '여호와를 아는 지식이' 결론으로 뭐라고요. (회중 묵묵부답) 아이 5분도 안됐는데. '하나님을 경외하는 거'라고 했잖아요. 기억나시죠. (회중 '네') 자 그런데 하나님을 경외하는 실제는 뭐라구요? '고아와 과부와 나그네'를 함께해주고 돌봐주는 것! (회중 아멘) 그 얘기죠. (그 말을 매주 했던 모양) 한 주는 거를 수 없나. (회중 웃음) 안돼요. 매주 해도 잊어버리잖아요. (회중 웃음) 이것이 내가 사는 이유가 되는 게 미셔널 처치(missional church 선교하는 교회)입니다. (회중 아멘) 믿습니까? (회중 아멘) 이것이 하나님의 경영이예요. 할렐루야! (회중 아멘) 이것이 겨레가 이 땅에 존재하는 진짜 이유입니다. 이 말씀이 여러분의 남은 순례길을 걸어가는 이유고 호흡하는 이유고 살아내는 이유이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하고 축복합니다. (회중 아멘) '물이 바다 덮음같이' 찬양합시다." 삼일교회 회중이 일어서 아말렉을 대적하는 여호수아의 군대같이 찬양했다. 세상 모든 민족이 구원을 얻기까지 쉬지 않으시는 하나님 주의 심장 가지고 우리 이제 일어나 주 따르게 하소서 세상 모든 육체가 주의 영광 보도록 우릴 부르시는 하나님 주의 손과 발 되어 세상을 치유하며 주 섬기게 하소서 물이 바다 덮음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온세상 가득하리라 물이 바다 덮음같이 물이 바다 덮음같이 물이 바다 덮음같이 보리라 그날에 주의 영광 가득한 세상 우리는 듣게 되리 온 세상 가득한 승리의 함성 물이 바다 덮음같이 여호와의 영광을 인정하는 것이 온 세상 가득하리라 물이 바다 덮음같이 물이 바다 덮음같이 물이 바다 덮같이 송태근 목사가 믿음이 바다를 덮음같은 삼일교회 회중을 향해 홍해 앞의 모세같이 양손을 들어 축복의 입을 열었다. "지금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우리 아버지의 높고 깊으신 사랑하심과 성령님의 교통하심이 오늘 머리 숙여 경배를 드리는 사랑하고 사랑하는 삼일 권속들 해외와 군대 멀리 출타해 있는 가족들 그리고 태중의 생명까지 영원토록 함께 있을지어다. 아멘" 송태근 목사는 성경을 읽고 듣고 은혜받는 신자에게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 세 분과 성경을 통해 연결시켜 채워주는 병렬 설교에 능하다.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이 그 위에 강림하시기 때문이리라... 성경은 말씀한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영으로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저희가 예언할 것이요 또 내가 위로 하늘에서는 기사와 아래로 땅에서는 징조를 베풀리니 곧 피와 불과 연기로다 주의 크고 영화로운 날이 이르기 전에 해가 변하여 어두워지고 달이 변하여 피가 되리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하였느니라 행 2:17-21 2023-11-24
    • G.MISSION
    • G.SERMON
    2023-11-24
  • 함성익 목사의 행복론
    저 푸른 하늘과 태양을 볼 수 있고 교회를 다니며 내가 자유롭게 산책할 수 있는 나는 아주 행복하다. 총회장이 되지 않아도 이것만으로 나는 주님에게 감사할 수 있다. 그 끝과 시작. 나는 믿는다. 그러므로 사라질 것이다. 나는 사라진다. 그러므로 구원받을 것이다. 十字架 _ 윤동주 쫓아오든 햇빛인데 지금 敎會堂 꼭대기 十字架에 걸리었습니다. 尖塔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수 있을가요. 鍾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왓든 사나이, 幸福한 예수그리스도에게처럼 十字架가 許諾된다면 목아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여나는 피를 어두가는 하늘 밑에 조용이 흘리겠읍니다. 一九四一. 五. 三一. 2023년 10월 15일 오전 11시 창성교회 본당 함성익 목사가 성경 마태복음 5:1-12 봉독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입을 열어 가르쳐 가라사대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 "오늘 여러분에게 주님이 주신 팔복의 말씀을 중심으로 '행복의 본질'에 대해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오늘 말씀을 드리기 전에 중동 지역에서 일어난 이스라엘 전쟁에 대해 왜 일어났고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설명을 드리고자 합니다." 함성익 목사는 이스라엘과 테러 집단 하마스 간의 전쟁 내력을 다음과 같이 전했다. 지난 2023년 10월 7일 이스라엘의 3대 절기 중 하나인 초막절(추수감사절)이 끝나는 축제의 안식일 새벽 6시 반, 하마스가 이스라엘을 공격했다. 예상 보유량을 넘는 수천 발의 미사일을 발사하는 전면전 수준의 도발이었다. 하마스는 지상으로도 직접 침투, 이스라엘 국민 수백 명을 포로로 잡아 가자지구에 억류했다. 처음 있는 일이다. 이날은 욤키푸르 전쟁(4차 중동전쟁) 50주년 다음 날이었다. 당시 아랍 연합군의 공격 징후를 놓쳐 패배 직전까지 갔던 이스라엘의 트라우마가 떠오른다. 그만큼 하마스가 이번 공격을 오래 준비했고 상징성을 담은 것으로 보인다. 바이든 대통령의 말처럼 홀로코스트 이후 최악의 날이었다. 미국 정부는 즉각 하마스를 테러리스트로 규정하고 알카에다에 기습적으로 당했던 9·11테러를 소환했다. 이어 '9·11(나인 원 원)'처럼 '10·7(텐 세븐)'이란 고유명사가 통용되기 시작했다. 팔레스타인 자치 구역 가자(Gaza)에서 벌어지는 피의 분쟁 역사는 3천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성경에서 ‘젖과 꿀이 흐른다’고 했던 가나안의 주인 자리를 놓고 이집트를 탈출한 유대인과 에게해를 통해 들어온 해양 민족 블레셋인이 맞붙었다. 가자는 블레셋인들이 가나안에 세운 도시였다. 구약의 유대인 사사 삼손을 죽음으로 내몬 델릴라는 가자에 살던 블레셋 사람이다. 사울 왕은 블레셋과 싸우다 전사했고 다윗은 블레셋 장군 골리앗을 무릎 꿇린 전쟁 영웅이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이스라엘 때문에 2천 년간 살던 땅에서 쫓겨났다’는 주장은 역사적 사실과 딱 맞지 않는다. 용맹한 블레셋인은 기원전 4세기 동방 원정에 나선 알렉산더에게 저항하다가 패퇴한 뒤 역사에서 사라졌다. 지금의 팔레스타인 민족은 블레셋의 후예가 아니란 뜻이다. 그 땅에 팔레스타인이란 이름을 붙인 이는 2세기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였다. 유대인 반란을 평정한 뒤 징벌로 그들을 고향에서 내쫓고 팔레스타인(블레셋의 땅이란 뜻)이라 부르게 한 게 시초다. 가자 분쟁의 불씨는 1948년 신생국 이스라엘과 아랍연합의 1차 중동전쟁에서 다시 타올랐다. 이 전쟁으로 서안 지구(West Bank)는 요르단 차지가 됐고 가자는 이집트 수중에 떨어졌다. 이스라엘이 1967년 3차 중동전쟁(6일 전쟁)에서 승리한 뒤 이 두 곳을 전리품으로 챙기고 여기에 이스라엘 정착촌을 만들기 시작하면서 팔레스타인 독립운동인 인티파다(봉기)가 불붙었다. 하지만 가자와 서안 지구는 그 후 다른 길을 갔다. 인티파다로 자치권을 갖게 된 팔레스타인은 파타와 하마스로 분열했다. 2006년 팔레스타인 총선에서 무장 테러 단체 하마스가 승리하고 파타가 불복하면서 가자는 하마스가 지배하고 서안 지구는 파타가 통치하는 이중 권력 상태에 들어갔다. 이스라엘도 하마스 수중에 떨어진 가자에서 정착촌을 철수하고 물과 전기를 제외한 모든 물품 공급을 중단하는 봉쇄를 시작했다. 가로 10㎞, 세로 40㎞인 강원도 크기 지역이 ‘세계에서 가장 큰 감옥’이란 별명을 갖게 됐다. 싸움이 격화되면 이스라엘 초정통파 유대교 세력의 팔레스타인 궤멸 논리가 힘을 얻고, 이슬람 극단주의 하마스가 이스라엘 소멸론을 주장하며 이란을 포함하는 반시오니스트 연대를 강화하는 시나리오가 될 수 있다. 상대를 배척하는 종교의 교리가 담긴 종말론 즉 아마겟돈의 서사(敍事)다. 이 서사는 현실이 되면 안 된다. 비유로만 남아야 한다는 주장이 있다. 함성익 목사는 이스라엘 사태 설명을 끝내고'행복의 본질' 설교를 이어갔다. "이스라엘 전쟁은 종교적인 갈등, 기독교와 이슬람의 갈등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겠습니다. 이 모든 갈등은 모두가 행복하기 위해서입니다. 내 집안, 내 가족이 어울려 살기 위해 벌어진 다툼입니다. 어쨌거나 전쟁은 행복을 위해 싸우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원래 이 팔복의 말씀 역시 어떻게 행복할 것인가를 말씀해주고 있죠. 유대인의 탈무드(미쉬나-Mischna, 반복/가르침-와 게마라-Gemara, 보완/보충-가 합쳐진 책이다. 미쉬나는 토라인 타낙<히브리 성경>에 대응되는 구전 토라로 AD 200년경 편집된 최초의 권위 있는 종교적 법규 모음집이다. 게마라는 미쉬나에 관한 랍비들의 논구와 해설들의 전승을 지칭하며 이 게마라가 미쉬나와 합쳐져서 탈무드를 형성)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어떤 사업가가 행복을 위해 열심히 일합니다. 돈도 많이 벌고 사회적 지위도 얻게 됩니다. 그러나 행복을 느끼지 못하다가 어느 날 중병을 얻어 눕게 됩니다. 그의 자녀들이 아버지 병을 고치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다하나 차도가 없고 점점 몸만 더 나빠집니다. 어느 날 자녀들이 랍비를 찾아가게 됩니다. 당시의 선생님을 찾아가 도움을 청합니다. 랍비가 가르쳐 주기를 '나는 정말 행븍합니다' 고백하는 사람을 만나서 그의 외투를 빌려 아버지를 덮어주라. 그러면 당신 아버지 병이 낫게 될 것입니다. 그들이 온갖 곳을 찾아다닙니다. 그러나 나는 행복하다고 하는 사람을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어느 날 저녁 산중의 한 수도원을 방문했는데 굴속에서 기도하는 한 수도사의 기도 소리를 듣게 됩니다. '하나님 오늘도 행복한 하루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정말 행복합니다. 이제 안식에 들겠습니다.' 그 소리를 듣고 너무 반가워 굴에 들어가 그의 외투를 빌리려고 합니다. 그런데 수도사는 외투는커녕 걸치고 있는 옷이 속옷뿐이었습니다. 그들이 아버지의 병을 어떻게 고쳤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 자녀들이 그때 깨우친 교훈은 분명했습니다. 역시 행복은 소유에 있는 게 아니구나. 내가 가지고 있는 것 내 안에 있는 것으로 물질로 행복한 것이 아니구나 하는 것을 느꼈을 것입니다. 오늘 우리 교우들 가운데 ‘목사님 저는 행복해요’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되겠습니까. 오늘 저와 함께 읽은 마태복음 5장 1-12절의 말씀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행복론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인류를 위해 진정한 행복의 교훈을 가르쳐주신 진정한 행복은 갈릴리에 있는 소위 팔복산으로 가야 할 겁니다. 팔복산은 가버나움에서 한 10킬로 떨어진 갈릴리 북서쪽에 있는 아주 작은 산입니다. 그 산에 팔복 기념교회도 있습니다. 아름다운 교회입니다. 교회에 들어가면 둥근 천장 중앙 팔각형 안의 여덟 개 창문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창문들에는 라틴어로 팔복 말씀이 새겨져 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어느 나라 사람이 이스라엘 관광을 제일 많이 가는 줄 아십니까. 우리 대한민국 사람입니다. 그래서 대한민국 사람에게 서비스하기 위해 라틴어 팔복 말씀이 한글로도 번역되어 있습니다. 창문 밖으로는 그림 같은 갈릴리 바다가 펼쳐집니다. 교회가 세워진 이 장소에서 주님께서 사랑하시는 제자들에게 행복의 중요한 교훈을 말씀해주셨다고 합니다. 팔복의 첫 번째 말씀은 무엇입니까.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원문 성경에 보면 ‘복이 있도다 심령이 가난한 자여’라고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참된 행복의 본질을 말씀해주시면서 제자들이 아니라 인류를 향해 진정한 행복의 본질이 무엇인가 알기를 원하셨습니다. 1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예수께서 무리를 보시고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 제자들이 나아온지라’ 많은 무리가 예수님에게 나왔습니다. 제자들이 나아오자 예수님이 입을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이 팔복의 교훈이라는 것은 모든 사람 인류 전체에 적용되는 말씀이지만 특별히 자신을 따르는 예수님 제자들 복음을 위해 헌신하기로 작정한 사람들에게 주시는 교훈이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제자들이 추구해야 할 행복의 본질이 이 말씀 속에 다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의 사람이 된 저와 여러분, 우리 모두가 추구해야 할 참된 행복의 본질은 무엇인가를 이 팔복에서 찾아보려 합니다. 행복은 마음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마음의 상태인 것입니다. 첫째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이요’ 심령의 상태 즉 마음의 상태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첫 번째 복, 심령이 가난한 자만 아니라 두 번째 복, 애통함도 마음의 상태, 세 번째 복 온유함도 마음의 상태, 네 번째 복, 의에 주리고 목마름도, 다섯 번째 복 긍휼히 여김도 따지고 보면 다 마음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여섯 번째 복은 어떻게 시작합니까.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예수님은 철저하게 행복은 결코 외적인 상태 즉 환경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음먹기에 다시 말하면 내 마음의 다스림에 있다고 말씀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떻게 삽니까. 조금만 더 돈을 벌면 행복할 것이다. 조금만 더 넓은 집을 가지게 되면 행복할 것이다. 조금만 더 출세하고 조금만 더 지위가 높아지면 행복하게 될 것이다. 그런 허상의 바램 속에서 제각각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진정한 행복은 외적인 환경에 의해 생기는 것이 아니라 너희 안에 있느니라 말씀합니다. 하나님의 나라와 행복은 여기 있다 저기 있다 할 것이 아니라 너희 안에 있느니라 우리 마음속에 있다고 강조해주고 계십니다. (회중 아멘) 우리의 마음이 참으로 가난해지면 마음이 청결해지면 하나님의 나라와 행복이 내 마음속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움직이고 사는 것 하나님의 선물이 아니겠습니까. (회중 아멘)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 하나님의 선물이 아니겠습니까. (회중 아멘) 우리 가운데 새벽에 늘 나오는 분이 계세요. 폐가 안 좋으신데 저하고 얘기할 때 숨을 가쁘게 쉬십니다. 그런데 매 주일 감사헌금을 내면서 ‘하나님 한 주간도 건강하게 해주셔서 감사하고 새벽기도 나와서도 감사하다고 기도하고 가십니다. 하루하루와 매시간이 하나님의 소중한 선물입니다. 그럼에도 행복해하지 못하고 불평하고 원망하고 있습니다. 참된 행복은 마음속에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회중 아멘) 두 번째로 행복은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을 때입니다. (회중 아멘) 좀 전에 말씀드린 대로 팔복은 복이 ‘있도다’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성경의 축복은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 축복입니다. ‘복이 있도다’라는 말은 영어로 블레스(bless)입니다. 어원은 블리드(bleed) ‘피 흘리다’ 입니다. 이 단어는 피의 제사에서 유래된 단어라 볼 수 있습니다. 구약에서 제사장이 제사를 드릴 때 피 흘리는 제사를 드립니다. 제사 드리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인생이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피 흘려 드리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고 우리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피 흘림이 없은즉 사함이 없느니라(히 9:22) 말씀했습니다. 팔복이 바로 이런 하나님하고의 바른 관계를 가리키는 마음의 덕목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사람이 심령이 가난한 사람입니다. 애통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안목으로 자신의 깊은 내면을 성찰하고 자신이 죄지은 것 하나님 앞에서 올바르지 못한 것을 마음 아파하고 하나님 앞에 참회하는 사람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아 하나님의 통치 속에 자기 자신을 절제하며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하나님의 가치와 하나님의 표준만을 기뻐하고 거기서 만족을 추구하는 사람입니다. 영성을 오늘의 언어와 이야기로 풀어내는 데 탁월한 유진 피터슨(Eugene H. Peterson, 1932년 11월 6일 ~ 2018년 10월 22일)이라는 유명한 미국의 성경 번역가가 있습니다. 그의 대표적인 작품으로 복음주의 기독교출판협의회로부터 상을 받은 책 ‘메시지 성경’(The Message: The Bible in Contemporary Language)이 있습니다. 이 성경을 풀어준 책에 첫 번째 심령이 가난한 자의 복을 이렇게 해석하고 있습니다. ‘벼랑 끝에 서 있는 너희는 복이 있도다. 너희가 작아질수록 하나님과 그분의 다스림은 커진다. (회중 아멘) 애통하는 자의 복, ‘가장 소중한 것을 잃었다고 느끼는 너희는 복이 있다. 그때야 너희는 가장 소중한 분의 품에 안길 수 있다.’ (회중 아멘) 두 번째,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입맛에 당기는 자는 복이 있다. 평생에 너희 음식이요 음료로다. (회중 아멘) 참 의미 있는 번역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를 위해 늘 애곡하고 하나님에 대해 더 깊이 알고 싶고 그리고 하나님 앞에 나와 그의 인생을 경험하는 것으로 세상에 아무것도 부러울 것이 없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 그래서 배부름을 얻는 자가 되기를 원합니다. (회중 아멘)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죄인인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포기하고 주 앞에 엎드려 주의 인도하심을 구하며 하나님을 자신의 주인으로 의지하고 거기서 경험하는 것을 영적인 만족으로 추구하는 이런 사람이 진정한 사람이라는 것을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평생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통해 진정한 만족을 경험하는 창성교회 교우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회중 아멘) 세 번째 행복의 본질은 이웃과 바른 관계를 맺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팔복의 가장 중요한 점을 말씀하실 때 하나님과의 마음부터의 올바른 관계를 강조하시면서 동시에 팔복에는 이웃과의 관계도 말씀하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성경의 가장 중요한 계명을 연상시켜 주고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가장 큰 계명이 무엇입니까.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주 너희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다음에 뭐죠. (회중과 함께)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그러니까 결국 행복이라는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그다음이 이웃 사랑이 있다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아주 중요한 강조점이고 팔복의 핵심입니다. 이웃 사랑이 팔복의 핵심이라는 것입니다. 팔복에서 이웃에 대한 배려가 얼마나 많습니까. 특히 다섯 번째 복과 일곱 번째 복을 보십시오. 다섯 번째 복이 무엇입니까. 이웃에 대하여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일곱 번째 복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성경‘에 보면 ’남을 돌보는 너희는 복이 있다. 정성을 들여 돌보는 너희는 돌봄을 받는다. 화평케 하는 자, 경쟁하거나 다투는 대신 협력하는 모습을 보이는 너희는 복이 있다. 그때 너희는 진정 자신이 누구이며 하나님의 집에서 자신의 자리가 어디인지 알게 된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나 자신의 이기적 목적을 달성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야망을 이루어 가는 것이 아니라 거기서 행복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진정한 행복은 내 이웃을 배려해주고 섬기는 것에 있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신앙의 선배 청교도들은 행복에 관해 이런 얘기를 자주 했습니다. 여러분 잘 아는 말입니다. 하루가 행복하려면 뭘 하라? 이발하라. 우리가 이발소나 미장원에 다녀오면 하루는 깨끗하고 멋지지 않습니까. 한 주간 행복하려면 여행해라. 여행을 떠나기 전부터 들뜨고 행복합니다. 신바람이 납니다. 여행 가서 일주일 지나면 무엇이 생각납니까. 집 생각이 나죠. 한 달 행복하려면 새집으로 이사 가라. 새집으로 이사 가도 수리하고 뭐하고 해도 한 달밖에 행복하지 않다는 겁니다. 한 해 행복하려면 결혼해라. 뭐 처녀하고 총각끼리 평생 사느니 죽느니 해도 결혼하고 일 년 사니까 다 그게 그거 아닙니까. (회중 웃음) 그러나 일생 행복하려면 이웃을 섬기라는 겁니다. 그러면 일생 행복하다는 겁니다. 때로 어려움도 있지만 말로 다할 수 없는 희열과 행복이 있습니다. 우리 예수님이 그런 삶을 사시지 않았습니까. 예수님이 뭐라 말씀하셨습니까.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 여러분 예수님 행복하셨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무엇보다도 그는 우리를 행복하게 해주셨습니다. 저는 예수님이 섬기시면서 자신도 무척 행복하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짧은 생애를 사셨지만 우리 예수님은 행복하게 사신 겁니다. (회중 아멘) 이 땅의 사명을 완수하시면 떠나실 때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다 이루었다.’ 여러분 인간 가운데 마지막 순간 ‘다 이루었다’ 하고 떠날 사람이 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가장 탁월하게 묘사한 분이 있다면 시인 윤동주라고 생각합니다. 그의 ‘십자가’라는 시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괴로왓든 사나이, 幸福한 예수·그리스도’ 참 잘 썼다고 생각합니다. 그분의 삶에는 고통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놀라운 행복을 누리셨습니다. 섬김에는 아픔과 고통도 따르지만, 그 섬김의 건너편에는 세상이 알 수 없는 희열과 놀라운 행복이 약속되어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팔복을 붙잡고 간다는 것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고 그를 닮아가는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합니다. (회중 아멘) 예수님이야 말로 참으로 마음이 가난하셨던 분이요 인류의 죄 때문에 애통하셨던 분입니다. 그러나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셨다고 고백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참된 행복이란 무엇입니까. 여러분 예수님을 나의 구주와 주님으로 붙잡고 그분만을 바라보고 살아가는 삶이 아니겠습니까. (회중 아멘) 행복은 우리의 가진 것에 있지 않습니다. 행복은 어떻게 옵니까. 주님을 영접할 때 옵니다. 주님만이 내 인생의 주인이십니다. 내 모든 삶도 주님께 맡겨야 합니다. (회중 아멘) 주님께 기도하고 주님 뜻대로 살고 주님을 섬기며 내 인생의 진정한 의미를 느끼며 살아야 합니다. (회중 아멘) 저는 우리 창성교회 교우들이 팔복을 붙잡고 팔복이 주는 행복을 만끽하며 팔복의 주인공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회중 아멘) 오늘도 하나님 앞에 예배드린 여러분 한 주간 동안 행복은 멀리 있지 않고 내 안에 있음을 알고 행복한 그리스도인 행복한 창성교회 교우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회중 큰 아멘) 데뷔 50주년을 맞은 홍콩 배우 주윤발(1955-), 그가 얼마 전 부산국제영화제에 참석했을 때 여전히 ‘따거(大哥)’로 불리며 지금껏 뭇 남성들의 낭만적 존경을 받는 이유를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수년 전 자신의 모든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기로 공언했다. 현재 기준 약 1조 원에 달하는 거액이다. 왜 기부를 결정했느냐는 질문이 나오자 이 남자는 “아내가 했다”라고 대답했다. “저는 기부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제가 힘들게 번 돈입니다. 액수도 모릅니다.” 그러나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그 의미를 헤아릴 수 있다. 배우가 이웃인 남을 살리는 것. 나는 이것이 함성익 목사가 전하는 ‘예수님 팔복의 본보기’라고 생각한다. 2023-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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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0-29
  • 박희천 목사의 총회를 위한 ‘성령과 우리는’
    살아 있음에는 ‘그냥’이 없다. ‘그냥’ 살라치면 ‘그냥’ 사라지기 때문이다. 죽음은 산 자들을 위해 죽은 이가 남기고 가는 깨달음의 선물이다. 우리는 후회할까 봐 두려워하면서 살아간다. 그러나 죽는 순간, 그때 용기를 내서 사랑하거나 맞서 싸워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것을 가장 후회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게 아무리 어렵게 보이는 무엇이었건 간에. 가을이다. 심은 대로 거두는 수확의 날들 속에서 ‘문득’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날들을 세어보자. 그러면 ‘성령과 우리는’ 햇빛에 여문 밤송이가 때마침 지나가는 바람의 도움으로 툭 떨어지듯.’ 저 멀리서 샬롬의 축복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릴 것이다. 제107회 제108회 총회장 이·취임 감사예배가 2023년 9월 20일(수) 저녁 7시 30분 새로남교회 본당에서 거행됐다. 예배는 새로남교회 성가대 장엄한 아멘송으로 열렸다. 서기 김한욱 목사가 사도행전 2:25-28 다윗의 성시를 낭독했다.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웠음이여 나로 요동치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입술도 즐거워하였으며 육체는 희망에 거하리니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치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셨으니 주의 앞에서 나로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회중 아멘)" 신앙고백 후 새로남교회 연합성가대가 독창 · 중창 · 합창과 악기 반주가 동반되는 장엄한 칸타타 '여호와는 위대하시다'로 예배당을 6분 동안 은혜와 감동으로 채웠다. 감격한 회중은 우렁찬 박수와 아멘으로 화답했다. 조용하고 티나지 않는 회록서기 전승덕 목사가 강단에 섰다. "오늘밤 주신 말씀은 사도행전 15장 28절 29절입니다. 말씀 봉독해 드리겠습니다.” 성령과 우리는 이 요긴한 것들 외에 아무 짐도 너희에게 지우지 아니하는 것이 가한 줄 알았노니 우상의 제물과 피와 목매어 죽인 것과 음행을 멀리 할찌니라 이에 스스로 삼가면 잘 되리라 평안함을 원하노라 하였더라 (회중 아멘) 사회자 김한욱 목사가 설교자를 소개했다. "내수동교회 원로목사님이시고요. 아마 우리 총회장님의 영적 멘토인 줄 알고 있습니다. '성령과 우리는'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하실 때 모두 하나님의 큰 역사 속에 은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총신대에서 설교학과 헬라어를 강의했던 96세의 박희천 목사가 부축을 받고 강단으로 안내를 받았다. 그는 디모데후서 3장 17절의 말씀처럼 목사는 성경으로 교훈과 책망을 받고 바른 길로 돌아오는 삶을 반복해야 한다는 말씀을 평생 실천한 목회자였다. 이제 2023년 9월 20일(수) 저녁 7시 30분 96세 그가 새로남교회에서 휠체어에 앉아 명징한 얼굴 모습을 산마루에 걸린 보름달처럼 강단에 드러냈다. 회중이 뜨거운 박수를 쳤다. 소리가 잦아들자 그가 온 회중의 시선과 귀를 사로잡고 잔잔히 또박또박 입을 열었다. "여러분 만나 뵙게 돼서 감사합니다. (회중 아멘) 예루살렘 공회는 주후 50년에 모였는데 예루살렘 공회에 모였던 사람들이 말하기를 '성령과 우리는' (좀 있다 다시) '성령과 우리는' 이렇게 말씀을 했습니다. (서북 어투로) 무슨 말씀입니까. 예루살렘 공회에 모였던 사람들이 성령님은 제쳐놓고 인간들끼리만 모여서 회의를 한 것이 아닙니다. 거! 묘하지요. 예루살렘 공회에 모였던 사람들은 사람들끼리만 모인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 성령님을 같이 모시고 회의를 했습니다. (회중 큰 아멘) '성령과 우리는' 거 참 묘한 모임이지요. 보통 회의에는 사람들이 모이는데 예루살렘 공회는 사람들끼리만 모인 것이 아니라 그곳에 성령님께서 함께 모여서 회의를 했습니다. 그래서 '성령과 우리는' 이렇게 말씀이 나오는 겁니다. 섭섭하게도 이사야 시대는 '성령과 우리가' 아니었습니다. 이사야 30장 1절 이하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화 있을진저 패역한 자식들이여 그들이 계교를 베푸나 나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맹약을 맺으나 나의 신으로 말미암지 않았다. 얼마나 섭섭합니까. 이사야 시대의 회의는 그들이 맹약을 맺어도 하나님의 성령은 제쳐놓고 뭐요 그들이 어떤 결정을 지어도 하나님의 성령을 제쳐놓고 자기들끼리만 모였던 겁니다. 이사야 시대의 모임은 ‘성령과 우리는’이 아니었습니다. 섭섭하게도 이사야 시대만 그랬던 것이 아니라 선지자 호세야 시대 때도 그랬더군요. 호세아 8장 4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저희가 왕들을 세웠으나 내게서 말미암지 아니하였고 저희가 방백들을 세웠으나 나는 모르는 바이다’ 호세아 시대의 사람들은 ‘성령과 우리는’이 아니었습니다. 여호수아가 모든 일 다 잘 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가 한 가지 크게 실수한 게 있습니다. 무엇인고 하니 가나안 땅을 점령할 때에 기브온 족속이 있어요. 여호수아에게 점령을 당하지 않기 위해 이 족속이 꾀를 부렸습니다. 어느 날 다 떨어진 옷을 입고 곰팡이 난 음식을 가지고 여호수아 앞에 왔습니다. ‘여호수아여 우리는 당신의 점령 지역 안에 있는 족속이 아닙니다. 하도 길이 멀어서 고향을 떠날 때는 깨끗한 옷을 입었고 따끈따끈한 음식을 가지고 떠났는데 오는 중에 옷이 다 떨어지고 음식이 다 곰팡이 났습니다. 우리는 당신 점령 지역 안에 있지 않으니 우리하고 화목합시다.’ 여호수아서 9장 14절에 보니 여호수아가 ‘어떻게 할지를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고’ 맹약을 맺었다고 했습니다. 여호수아가 중요한 계약을 하면서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고 덜컥 맹약을 맺었습니다. 이것이 여호수아의 실수입니다. ‘성령과 우리는’이 아니었습니다. 이것 때문에 후에 어려움을 당하게 됩니다...” (96세의 박희천 목사가 생각을 더듬느라 2분 20초 침묵이 이어졌다. 그 침묵의 중간에 ‘성령과 우리는’의 의미를 말없이 되새기며 회중의 박수가 있었다) “미안합니다. 갑자기 생각이 안 나서. (회중 박수) (침묵이 끝나고) 그러면 ‘성령과 우리는’ 이렇게 결정할 때 어떤 결과가 나타났습니까. 우리가 회의를 할 때 사람들끼리만 모이지 아니하고 ‘성령과 우리는’ 성령을 모시고 회의를 할 때 세 가지 결과가 나타났습니다. 하나는 사도행전 15장 30절에 그 결정을 듣고 모든 사람이 ‘기뻐하더라’ 했습니다. (회중 아멘) 야 참 예루살렘 사람들이 회의를 잘 했구나. 어떻게 그런 결정을 했노. 예루살렘 회의의 결정을 듣고 모든 사람이 기뻐했다고 했습니다. (회중 아멘) 둘째로 사도행전 16장 5절에 보면 ‘이에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욱 굳어지고’라 했습니다. ‘성령과 우리’가 결정을 하니까 여러 교회가 믿음이 굳어졌다고 했습니다. (회중 아멘) 그런데 어느 한 교회만 믿음이 굳어진 것이 아니라 여러 교회 ‘성령과 우리’가 결정한 그 소식을 들은 여러 교회가 믿음이 더욱 굳어졌다고 했어요. (회중 아멘) 또 그 다음에 ‘날마다 수가 더하더라’ 했습니다. 여러 교회가 날마다 수가 더하더라 했습니다. 수가 확 늘어났다가 그친 것이 아니라 날마다 늘어났다고 했습니다. 어제도 늘어나고 (회중 아멘) 오늘도 늘어나고 (회중 아멘) 내일도 늘어나고 (회중 아멘) 모레도 늘어나고 날마다 늘어납니다. (회중 아멘) 예루살렘 공회가 사람들끼리만 모이지 아니하고 ‘성령과 우리가’ 같이 모일 때 그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기뻐하였고 한 교회가 아니라 여러 교회 믿음이 굳어지고 어제, 오늘, 내일, 날마다 수가 늘어났다고 했습니다. (회중 아멘) 오늘 이 자리가 총회가 모인 자리인 줄 아는데 우리 교단의 총회가 모일 때마다 미안합니다. 사람들끼리만 모이는 총회가 되지 않고 ‘성령과 우리는’ 이러한 총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성령과 우리가’ 모여서 결의하고 그 결의한 결의가 전국 교회 위에 공포될 때 야! 이번 총회가 잘 결의했구나! 하는 소식을 듣는 모든 교회가 기뻐하고 (회중 아멘) 교회가 이 결의들을 행할 때 많은 교회가 믿음이 더 굳어지고 (회중 큰 아멘) 또 이 소식을 들을 때에 날마다 수가 더하는 이런 결과가 나타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회중 큰 아멘) 또 이 총회 장소가 오정호 목사님 시무하시는 새로남교회인데 우리 오정호 목사님 목회하실 때 미안합니다. 오 목사님 혼자 목회하시는 것이 아니라 ‘성령과 목사님’ 목회해서 (회중 아멘) 그 결과 새로남교회 모든 교인들이 기뻐하고 (회중 아멘) 그 결과 새로남교회 교인들이 믿음이 굳어지고 (회중 큰 아멘) 날마다 수가 더하는 (회중 큰 아멘) 그러한 교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회중 큰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옛날에 예루살렘 교회가 자기네들끼리만 모인 것이 아니고 성령님을 모시고 회의할 때 그 결과를 듣고 많은 사람이 기뻐했고 (회중 아멘) 모든 교회의 믿음이 굳어지고 수가 날마다 더해진 것 같이 교인과 오 목사가 성령님과 동행해서 역사함으로 (회중 아멘) 온 교회가 기뻐하고 교회의 믿음이 굳어지고 (회중 아멘) 수가 날마다 더해지는 놀라운 결과가 나타날 수 있게 하옵소서. (회중 큰 아멘)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회중 아멘)” 회중의 큰 박수 속에 박희천 목사 부축을 받으며 강단을 내려왔다. 총회 108년 되는 삼일 밤 예배 역사에서 가장 놀라운 은혜와 축복이 임한 예배였던 것 같다. 96세 박희천 목사의 설교 ‘성령과 우리는’이 전하는 은혜와 축복의 결과 제108회 총회 보고서는 이런 사실을 전했다. 제107회 총회장 권순웅 목사의 '샬롬 부흥' 전도 운동에 힘입어 성도 숫자는 전년 대비 59,151명 증가한 2,351,896명(2021년 12월 31일 기준)으로 집계됐다. 팬데믹 전인 2019년 2,556,182명에서 2년 사이 26만여 명이 감소하며 심각한 위기에 봉착했던 상황에서 벗어나 성장을 기록했다. 칼빈주의를 따르는 우리 교단의 교인 증감률은 2019년 -6.8%에서 이듬해 -3.8%로 줄어든 데 이어 이번에 +2.6%로 다시 증가세로 반전했다. 특별히 5년 연속 교인이 줄고 있던 흐름을 바꾼 것이 개혁적인 은혜와 샬롬이다. 코로나 팬데믹 기간 어려움을 겪던 미자립 개척교회들이 문을 닫으며 감소세를 보이던 교회도 1년 사이 11,262개에서 제107회 총회(총회장 권순웅)에서 11,920개로 658개 증가하며 역시 증가세로 돌아섰다는 사실을 제108회 총회(총회장 오정호)는 보고했다. ‘성령과 우리’가 샬롬부흥운동본부(본부장 김진하 목사) 임역원의 수고에 함께했음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인간 한 사람 한 사람의 아이큐는 대단하지 않다. 가장 똑똑하다는 동물은 돌고래와 문어다. 문어의 아이큐는 80 정도 된다고 한다. 그러니 우리 아이큐가 160이 넘지 않는다면 문어보다 2배 이상 똑똑한 것은 아니다. 그런 인류가 어떻게 동물들은 하지 못하는 인공위성, 유전공학, 인공지능을 만들 수 있었을까? 인간의 뇌는 병렬로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그럼 어떻게 케이블도 없이 우리의 뇌는 병렬로 연결될 수 있었을까? ‘언어’를 통해서다. 대화를 하면 서로의 뇌가 연결되는 효과가 생긴다. 그런데 언어는 같은 장소, 같은 시간에 있어야만 연결된다는 한계가 있다. 그런 단점을 극복하기 위해서 인간은 ‘문자’를 발명했다. 플라톤의 책을 읽으면 나는 9,000㎞ 떨어진 그리스에 2,500년 전에 살았던 엄청나게 똑똑한 사람과 뇌가 연결되는 효과가 생기는 것이다. 우리가 12년 정규교육을 받고 졸업하면 인류 문명사 5,000년 동안 가장 똑똑한 사람 수천 명의 뇌와 병렬로 연결되는 효과가 생겨나는 것이다. 우리는 다른 사람과의 연결로 똑똑해진다. 그렇듯 말씀을 믿고 전하는 우리는 어떻게 지혜로워지고 믿음이 굳건해질 수 있을까. 그것은 성부 성자 성령, 삼위일체 하나님과 연결될 때 가능하다. 삼위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이 한 분이시라는 것을 어떻게 예증할 수 있겠는가. 아마 삼위일체에 대해 인간이 들 수 있는 적절한 실례는 빛, 열, 공기일 것이다. 당신이 손을 내밀어 그것을 본다면 바로 거기에 빛과 열과 공기가 각기 존재하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곳에는 빛이 있다. 그 이유는 당신은 빛을 통하여 자신의 손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어두운 밤일지라도 그곳에는 여전히 빛이 존재한다. 그리고 당신의 머리와 손 사이에는 열이 존재한다. 그 열은 장소가 달라질 때마다 변하게 된다. 그리고 당신이 손을 휘저으면 바람을 느낄 수 있다. 요점은 빛과 열과 바람 이 세 가지가 각각 구별된다는 것이다. 그것들은 각기 자신의 성향을 지니고 있다. 그것들을 각각 분리해서 연구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세 가지 가운데 다른 두 가지가 없이 한 가지만 존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들은 각각 다른 세 가지이지만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이다. 이 실례가 지닌 흥미로운 사실은 성경이 이 세 요소를 하나님과 연관시켜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빛: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 요일 1:5 열: 우리 하나님은 소멸하는 불이심이라 히 12:29 바람: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 요 3:8 성경은 말씀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 28:19-20 2023-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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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3-1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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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석큐티 더굳뉴스 발행 축하 - 장봉생 목사
    서양음악에서 새로움을 추구한 역사는 오래지 않은 18세기 후반부터의 일입니다. 바흐만 해도 그의 작품이 새로워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읍니다. 그에게는 좋은 음악 기술을 습득해서 필요한 음악을 잘 쓰는 것이 중요했읍니다. 마침 그의 시대에는 유럽 전반에 걸쳐 통용되는 보편적인 음악 언어가 있었고 그는 그 언어들을 모두 마스터한 마이스터였읍니다. 바흐는 봉직했던 궁정과 교회에 필요한 음악을 성실히 작곡해 많은 음악을 남기면서도 스스로를 음악의 봉행자라고 여겼지 창조자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읍니다. 19세기 초에 활동한 베토벤은 궁정이나 교회를 위하여 일하지 않았읍니다. 누구의 요청을 받지 않고 교향곡을 작곡하였읍니다. 새로운 착상이 생기기 전에는 교향곡을 착수하지 않았던 그는 창조자로서의 자신을 의식하고 있었읍니다. 그의 음악은 의식이나 행사를 위해서 쓰인 후 남은 것이 아니었고 오로지 감상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미적 대상’이었읍니다. 그 안에는 시간이 있었고 새로운 것과 낡은 것이 교차했고 정신과 역사가 공존했고 오히려 인간보다 더 인간다운 무엇이 꿈틀댔읍니다. 그는 그러한 대상물의 창조자였고 음악은 그 손에 빚어진 작은 우주였읍니다. 베토벤 이후의 작곡가들에게 새로움이란 그 자체로서 하나의 가치였읍니다. 그들이 만든 작은 우주들은 제각기 새로운 질서로 움직이는 소우주였읍니다. 그렇지 못한 작품은 중심 없이 우주공간을 떠다니는 의미 없는 물질처럼 취급되었읍니다. 새로움의 추구는 작곡가마다 개성 있는 언어를 사용하도록 만들었읍니다. 보편적인 음악 언어는 차츰 개인적인 언어로 대체되었고 19세기말, 20세기 초에 이르면서 보편적인 언어 자체를 거부하고 완전히 혁신적인 새로운 언어로 자신의 음악을 만드는 작곡가들이 나타났읍니다. 새로움을 위한 새로움을 추구하는 작업도 있었읍니다. 이러한 흐름이 지속된 20세기 후반에는 급기야 새로움의 추구 자체가 진부한 패션이라는 반성까지 나오게 됩니다. 새해 새 날이라고 하지만 실은 수억 년 반복되고 있는 현상의 일순간입니다. 새 싹의 움틈과 새 아기의 탄생도 지구상에 생명이 나타난 이래 수없이 되풀이 되는 일입니다. 나는 어제 또는 지난해와 다름없이 나의 몸과 나의 기억을 지닌 채 해와 달과 날을 관통하며 살고 있읍니다.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나니’ 라고 솔로몬의 전도서 1장 8절이 말씀하지만 우리는 해돋이를 보러 얼어붙은 어둠을 무릅쓰고 동해로 갑니다. 또 새 아기를 보면 마음이 두근거립니다. 왜 우리는 이렇게 새로움을 찾는가요. 나의 몸과 나의 기억은 늘 그대로인 것 같아도 조금씩 변합니다. 몸은 하루만큼 나이를 먹고 기억은 하루 어치의 정보를 저장합니다. 또 내 몸 안에서 세포들은 매순간 죽고 또 태어납니다. 그렇게 해서 나의 생명이 지속되고 있읍니다. 그렇다면 새로움은 지속됨과 더불어 생명을 있게 하는 두 계기 중 하나라는 말이 됩니다. 새로움을 찾는 것은 살아있는 것들의 본능인가요. 진리를 깨우치고 전달하기 위해 날마다 성경 주석을 필요로 하는 목회자들도 그와 마찬가지 아닐까요. 흥미롭게도 오늘 우리 시대의 음악 사회를 특징하는 것 중의 하나가 옛날 음악에 대한 소비입니다. 18~19세기의 청중들이 대체로 당대에 만들어진 새로운 음악을 들었던 것과는 달리 우리 시대의 청중은 과거의 음악을 신자의 성경처럼 듣습니다. 예레미야서나 마태복음처럼 바흐, 베르디, 말러를 들으러 연주회장을 찾고 미디어를 통해 듣습니다. 지치지도 않고 반복해서 듣습니다. 한 곡 안에는 수백만 수천만 개의 음들이 들어 있읍니다. 베토벤의 음악 뿐 아니라 바흐의 음악, 또 그 이전의 음악에도 들어있는 그 음들은 작곡된 이래 변함없이 있지만 그 소리 하나를 내는 방법 또한 무한합니다. 사실 음악이 기록된 악보는 음악이 아니라 음악의 설계도면입니다. 이 설계도에 의거하여 소리의 집을 지어 들리는 음악으로 만드는 것이 연주가입니다. 그들은 자신의 음악적 경험과 맥락 속에서 그 설계도를 이해합니다. 지휘자마다 곡의 빠르기와 강약이 달라지고 섬세한 표현법이 달라지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이러한 새로운 해석에 의하여 음악은 새로운 생기를 얻습니다. 지금까지 보이지 않던 것을 보고 들리지 않던 것을 들리게 합니다. 나는 풀러신학대학원에서 공부하던 중 2001년 4월 첫 주일 서울 서대문교회 담임목사로 청빙을 받고 부임하게 되었습니다. 서대문교회에 부임하면서 예배부흥, 거목양성, 세계선교 3대 비전을 제시하고 예배와 교육과 선교의 균형 잡힌 목회철학을 유지하려고 노력했읍니다. 1949년에 설립된 서대문교회는 정통신앙과 열린 의식의 균형을 잘 유지하는 건실한 교회였습니다. 나는 제6대 담임목사로 19년째를 맞이했읍니다. ‘더디 가도 함께 한다’는 목양정신으로 하나님의 가족성을 강조하는 교회를 세워가고 있습니다. 나의 목회 사역에는 교인들과 함께하는 큐티 책을 통한 목회를 빼놓을 수 없읍니다. 그 사역을 통해 교인들의 영적 성장과 교세 성장도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더굳뉴스'의 김영배 목사가 작년 말 서대문교회를 방문했다가 나의 그 사역에 감동을 받고 '더굳뉴스'에 큐티를 접목시키겠다고 하더니 이제 해가 바뀌어 2019년 12월부터 ‘주석큐티 더굳뉴스’ 발행을 시작하게 된 모양입니다. 김영배 목사가 주도하는 ‘주석큐티 더굳뉴스’는 교인이 아닌 목사 중심의 목회 전문인 대상이라고 합니다. 목회자인 나로서도 기대가 됩니다. 그리고 그 발행을 축하합니다. 2019-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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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11-19
  • 칼빈의 신앙수업 - Lesson III 돌연한 회심 A sudden conversion
    Lesson III 돌연한 회심A sudden conversion ‘존재하는 모든 것은 선(善)합니다’라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래 침묵한 뒤에 하는 말로 이런 말도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신자임에도 우리의 다른 모든 사랑하는 사람들 멀어지거나 죽을 수 있습니다. 싸늘한 사랑은 추억 아래 숨고 이제는 사라진 교회의 커튼도 무심한 밤 위에 드리웁니다. 그러한 허무 속에서도 우리는 이 개혁주의 신학과 믿음의 드높은 주제를 말하고 또 말함이 옳을 것입니다. 아쉽게도 육체의 노쇠야말로 하나님이 주신 지혜입니다. 젊은 날 우리가 사랑하고 믿고 설교했지만 무지했음을 이제 우리는 압니다. 논쟁은 때론 좋은 것 같습니다. 당연한 것이라도 다시 자료를 찾아보고 새롭게 판단할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교과서 용어로 풀어쓰자면 논쟁에는 ‘건강한 회의론자’(healthy skeptic)의 자세를 환기시켜 ‘증거에 기반한’(evidence-based) 합리성과 ‘비판적 사고’(critical thinking)를 배양하도록 도와주는 순기능이 있습니다. 칼빈이 가톨릭 신자에서 종교 개혁 결과 생긴 프로테스탄트(Protestant 신교도, 항의자) 교도로 회심한 것에 대한 논란이 있습니다. 인터넷 시대 누구나 편집할 수 있고 5,693,164 영어 항목의 무료 백과사전 Wikipedia(하와이어로 빠른‘quick’을 의미하는 ‘wiki’와 백과사전을 의미하는 ‘encyclopedia’가 합쳐진 이름)에 칼빈의 회심에 대한 논란을 이렇게 서술했습니다. Alternate theories have been suggested regarding the date of Calvin's religious conversion. In this view, his resignation is the direct evidence for his conversion to the evangelical faith. Some have placed the date of his conversion around 1533, shortly before he resigned his chaplaincy. However, T. H. L. Parker argues that while this date is a terminus for his conversion, the more likely date is in late 1529 or early 1530. 칼빈의 종교적 회심(conversion 회심, 개종, 전환) 날짜에 관하여(regarding) 서로 엇갈리는(alternate) 이론(theory)들이 암암리에 주장되어(suggest 암시합니다) 왔습니다. 칼빈이 자신의 지도 신부직(chaplaincy 수도회·학교·병원·고아원·교도소·군대 따위 특정한 부류의 사람을 다스리고 이끄는 사제)을 사임하기 바로 직전인 1533년 경 회심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견해에 따르면(in this view) 칼빈의 사임(resignation)이 복음주의(evangelical) 신앙으로 그가 회심한 것에 대한 직접적인 증거가 됩니다. 하지만 파커(Parker, T. H. L)는 그의 『칼빈 전기』(John Calvin: a Biography, Louisville, KY 199-203. Westminster John Knox: 2006)에서 이렇게 주장합니다(argue). 이 날짜가 그의 회심의 종점(terminus)이라고는 해도 1529년 말이나 1530년 초가 훨씬 더 가능한(likely) 날짜인 것 같습니다. The main evidence for his conversion is contained in two significantly different accounts of his conversion. 그의 회심에 대한 주요 증거(evidence)는 그의 두 중요한 다른 회심 사건들에 들어있습니다. In the first, found in his Commentary on the Book of Psalms, Calvin portrayed his conversion as a sudden change of mind, brought about by God: 그의 시편 주석(Commentary on the Book of Psalms, vol. 1, p. 67, Grand Rapids: Eerdmans, 1948) 서문(preface)에서 발견되는 첫 번째 사건에서(In the first) 칼빈은 자신의 회심을 하나님이 주신(brought about by God) 마음의 돌연한 변화(a sudden change of mind)로 묘사했습니다(portray): God by a sudden conversion subdued and brought my mind to a teachable frame, which was more hardened in such matters than might have been expected from one at my early period of life. Having thus received some taste and knowledge of true godliness, I was immediately inflamed with so intense a desire to make progress therein. 하나님께서 돌연한 회심(conversion)을 통해 나의 마음(mind)을 가르칠 수 있는(teachable) 구조(frame)에 복종하게(subdue)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것은(a teachable frame) 그러한 문제들에 있어서 내 인생 초기에 기대할 수 있었던 구조보다 훨씬 더 강하게(harden) 하는 구조였습니다. 참된 경건(godliness 신앙)의 어떤 맛과 지식을 이렇게 얻게 되자(Having thus received) 나는 그 속에서(therein 그 구조 속에서) 전진하고자(progress) 하는 아주 격렬한(intense) 열망(desire 욕구)에 즉시(immediately) 불타게(inflame) 되었습니다. 이 첫 번째 사건에서 칼빈은 참된 경건(true godliness)의 어떤 맛과 지식이 그를 변화시켰다고 말했습니다. 그가 언급한 경건(godliness 또는 ‘하나님 됨’)이라는 단어 godliness에 대해 『웹스터 대사전』(WEBSTER’S THIRD NEW INTERNATIONAL DICTIONARY)에서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godliness the conforming one’s life to the revealed character and purpose of God. 그 해석은 이렇습니다. 경건(godliness)은 ‘하나님의 계시된(revealed) 성품(character)과 목적(purpose)에 자신의 삶(one’s life)을 일치시키는(conform) 것입니다.’ 이 경건에 대해 칼빈은 『기독교강요』 제2장 2. 하나님을 아는 것은 무엇인가 - 이 지식의 성향(WHAT IT IS TO KNOW GOD - TENDENCY OF THIS KNOWLEDGE)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For, first of all, the pious mind does not devise for itself any kind of God, but looks alone to the one true God; nor does it feign for him any character it pleases, but is contented to have him in the character in which he manifests himself always guarding, with the utmost diligences against transgressing his will, and wandering, with daring presumptions from the right path. 무엇보다도(first of all) 신앙심이 깊은(pious pis) 마음은 하나님을 아는 그 자체를 하나님의 어떤 종류로 궁리하지(devise) 않고 참되신 하나님에게만 향합니다. 그것(하나님을 아는 것)을 좋아하는 어떤 성품(character)으로 가장하지도(feign) 않고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transgress) 것을 아주(utmost) 부지런히(diligence) 그리고 감히(daring) 건방지게(presumption) 올바른 길(path)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항상 경계하며(guard) 하나님이 자신을 나타내시는(manifest) 그 성품 속에서(in the character)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만족합니다(content). 회심의 두 번째 사건에서 칼빈은 정신과 마음의 고통으로 말미암은 내적 분투의 오랜 과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Being exceedingly alarmed at the misery into which I had fallen, and much more at that which threatened me in view of eternal death, I, duty bound, made it my first business to betake myself to your way, condemning my past life, not without groans and tears. 영원한(eternal) 죽음(death)을 생각하면(in view of) 내가 빠졌고 나를 아주 많이 위협했던 비참함(misery)에 극도로 놀라게 된 나는 자신의 과거 생활을 비난하면서(condemn) 반드시(duty bound) 신음하고 우는 게(not without groans and tears) 나의 첫 번째 일이었습니다. And now, O Lord, what remains to a wretch like me, but instead of defense, earnestly to supplicate you not to judge that fearful abandonment of your Word according to its deserts, from which in your wondrous goodness you have at last delivered me. 그리고 오 주여, 나같이 비참한 자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변호(defense)하는 대신에(instead of) 공적에 따라(according to its deserts) 주님 말씀의 무서운 유기(abandonment)로 심판하시지 말고 마지막에 주님의 놀라운 은혜(your wondrous goodness)로 거기에서 나를 제발 구원해 주시라고 열심히(earnestly) 애원할(supplicate) 뿐이었습니다. Scholars have argued about the precise interpretation of these accounts, but most agree that his conversion corresponded with his break from the Roman Catholic Church(Ganoczy 2004, pp. 910; Cottret 2000, pp. 6570; Parker 2006, pp. 199203; McGrath 1990, pp. 6972). 학자들이 이 두 사건에 대한 정확한(precise) 해석(interpretation)에 논란을 해왔습니다. 그러나 대부분(most) 칼빈의 회심이 로마 가톨릭 교회와의 결별(break)과 일치한다(correspond)는 데 동의합니다(agree). The Calvin biographer Bruce Gordon has stressed that “the two accounts are not antithetical, revealing some inconsistency in Calvin's memory, but rather [are] two different ways of expressing the same reality”(Bruce Gordon, Calvin, New Haven; London 2009, p. 34.). 칼빈의 전기 작가 고든(Bruce Gordon)은 “두 사건(account)들이 칼빈의 기억과 어떤 불일치(inconsistency)가 나타나기는 하지만 정반대(antithetical)의 것은 아니라는 것을 강조했습니다(stress).” 칼빈의 회심은 사도 바울이나 아우구스티누스 그리고 루터와 같이 자세하고 극적인 것으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또 언제 정확히 회심의 경험을 했느냐에 대해서도 기술하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시편 주석 서문에서 그는 자신의 회심에 대해 ‘돌연한 회심’이란 말을 쓰고 있을 뿐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예기치 못한 회심으로 오랫동안 완악했던 마음을 온순하게 길들이셨다고 기록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칼빈은 철저히 말씀에 순종하고 성경을 열심히 연구해 하나님을 알고자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계시된 대로 이해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이러한 생활을 위해서 자기 부정과 자기 십자가를 지며 통회하는 생활을 했습니다. 성경은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밀라노 근처에 사는 친구의 정원을 거닐며 로마서 13장을 읽을 때 변화되었습니다. 루터도 바르트부르크 성에 머물면서 성경을 읽고 다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존 웨슬리는 날마다 성경의 묵상을 통하여 엘더스게이트에서 열린 작은 모임에서 회심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이 제일 요긴하게 교훈하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교훈은 성경이 우리에게 어떻게 믿어야 할지를 강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무엇을 믿든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풍조가 있습니다. 무엇을 믿든지 바르게 살기만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믿든 그것은 자유입니다. 그러나 무엇을 믿든 차이가 없다고 하는 말은 이치에 닿지 않습니다. 우물가에서 예수님은 물을 길러온 여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요 4:23 인간이 바른 믿음이 없이도 바르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만큼 잘못된 생각은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어떻게 믿어야 할지를 교훈하고 있습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롬 10:8-10 둘째 교훈은 하나님이 주신 믿음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이 명한 것을 행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믿음의 올바른 행위와 실천의 열매와 결과가 없다면 참 믿음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약 2:26 우리는 무엇을 행해야 할까요. 무엇보다도 우리는 두 가지 행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마 22:37-40 믿음이 있는 사람의 행함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RECOLLECTION 되·새·김 1. 논쟁의 유익은 무엇입니까. 당연한 것이라도 다시 자료를 찾아보고 새롭게 판단할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교과서 용어로 풀어쓰자면 논쟁에는 ‘건강한 회의론자의 자세를 환기시켜 ‘증거에 기반한’ 합리성과 ‘비판적 사고’를 배양하게 도와주는 순기능이 있습니다. 2. 하나님께서 그의 회심을 통해 그를 어떻게 변화시켰다고 고백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돌연한 회심을 통해 나의 마음을 가르칠 수 있는 구조에 복종하게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것은(a teachable frame) 그러한 문제들에 있어서 내 인생 초기에 기대할 수 있었던 구조보다 훨씬 더 강하게 하는 구조였습니다. 참된 경건의 어떤 맛과 지식을 이렇게 얻게 되자 나는 그 속에서 전진하고자 하는 아주 격렬한 열망에 즉시 불타게 되었습니다. 3. 칼빈이 언급한 경건이라는 단어 godliness에 대해 『웹스터 대사전』에서 어떻게 정의하고 있습니까. godliness: the conforming one’s life to the revealed character and purpose of God. 경건: 하나님의 계시된 성품과 목적에 자신의 삶을 일치시키는것. 2019-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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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4-16
  • 칼빈 신앙수업 - 성공의 아주 작은 기대 The least expectation of the success
    Lesson II 성공의 아주 작은 기대The least expectation of the success 프랑스 작가와 정치가 앙드레 말로(Andr Malraux 1901년 11월 3일 ~ 1976년 11월 23일)가 프랑스의 대표적인 인상주의 화가 르누아르(Pierre Auguste Renoir 1841년 2월 25일~1919년 12월 3일)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1차 대전이 일어나기 두어 해 전 동양어학교에 다니던 청년 말로가 남프랑스의 지중해 해변에서 바캉스를 즐기기 위해 여관에 짐을 풀었습니다. 이국적인 마르세유(Marseille)나 막 요란하기 시작한 칸느(Cannes 프랑스어)를 피해 굳이 이곳에 온 것은 고운 모래에 얕은 수심을 지닌 한적한 바다가 산악과 맞닿아 있어 훨씬 드라마틱했기 때문입니다. 여관의 벨보이가 알려주는 말에 말로는 가슴이 뛰었습니다. 르누아르가 해변에서 그림을 그리는 것을 봤다는 것입니다. 말로는 프랑스 미술을 대표하는 거장 르누아르를 어쩌면 대면하게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졌습니다. 당시 말로는 한창 문학·미술·역사에 대한 관심이 불타올랐고 동양 문화를 탐사하기 위해 중국어와 산스크리트어까지 훈련하는 중이었으며 동시대 예술가들과 교류하기 시작한 때였습니다. 하루는 아침 식사를 마친 말로가 해초 냄새로 뒤덮인 벼랑 끝 오솔길을 산책하다가 은빛 수염을 휘날리는 한 노인의 뒤통수를 봤습니다. 노인은 잔물결 이는 바다를 마주한 채 캔버스에 몰입하는 중이었습니다. 말로는 종업원이 일러준 그 대가임을 이내 알아챘습니다. 지난 세기의 역사를 한 몸으로 지탱하고 인상주의의 한 영역을 개척한 위인을 이런 휴양지에서 단둘이 조우하게 되다니 그야말로 큰 행운이었습니다. 말로는 르누아르의 그림을 보기 위해 조심조심 그의 등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그의 집중을 흩뜨리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위대한 미술가의 제작 과정을 보기 위해서 숨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말로가 그의 캔버스에서 본 것은 바다가 아니었습니다. 그를 만나는 벅찬 놀라움은 차치하고 캔버스에서 벌어지는 사건에 말로는 아연실색했습니다. 바다가 그려져야 할 캔버스엔 어느 계곡을 배경으로 목욕하는 소녀가 그려져 있었습니다. 말로는 시선을 여러 번 그 캔버스와 그 너머 바다를 오가며 바꾸어 봤지만 그려진 장면과 그 앞의 현실은 달랐습니다. 이 일화는 회화의 상상력을 이야기할 때 곧잘 인용되곤 합니다. 르누아르는 망막한 바다에서 깊은 계곡을 상상했고 인간 부재의 환경에서 아리따운 소녀를 상상했습니다. 그리고 상상한 그대로 천연덕스럽게 그렸습니다. 열심히 대상을 집중해 그것과 다른 사실을 내놓은 셈입니다. 이 일은 르누아르의 의식과 그것에 반응하는 물감과 붓질에 의해 상식의 질서와 전혀 다른 논리로 진행되었습니다. 마치 꿈과 같습니다. 칼빈의 신학은 그의 평생에 걸쳐 사실상 변하지 않았습니다. 마찬가지로 『기독교강요』도 그 내용에 관한 한 수정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 책의 시간은 기억의 시간, 믿음의 시간, 개혁의 시간입니다. 마지막 판 서문에서 그는 그 개혁의 시간을 시작하고 마무리하는 『기독교강요』 저술 순간을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은 그가 죽기 5년 전 1559년 8월 1일 쓴 그의 평생의 개혁주의(Protestantism prtstntizm) 회오(會悟)가 담긴 『기독교강요』 마지막 서문입니다. 뜻깊은 순간이니 기도하는 자세로 읽고 감동을 촘촘히 되새기시기 바랍니다. EPISTLE TO THE READER.[prefixed to the last edition, revised by the author.] 독자에게 드리는 서신[저자의 개정 마지막 판에 덧붙인 서문] In the first edition of this work, having not the least expectation of the success which God, in his boundless goodness, has been pleased to give it, I had, for the greater part, performed my task in a perfunctory manner(as is usual in trivial undertakings); but when I understood that it had been received, by almost all the pious with a favor which I had never dared to ask, far less to hope for, the more I was sincerely conscious that the reception was beyond my deserts, the greater I thought my ingratitude would be, if, to the very kind wishes which had been expressed towards me, and which seemed of their own accord to invite me to diligence, I did not endeavor to respond, at least according to my humble ability. 성공의 아주 작은 기대조차 갖지 않은 이 저작의 처음 판에 하나님께서 그의 무한하신 선하심으로 기꺼이 그것을 주셨습니다. 나는 거의 대부분 형식적인 태도로 내 일을 수행했었습니다. 그러나 내가 감히 결코 요하지도 않았고, 아주 조금도 바라지 않았던 어떤 호의를 거의 모든 경건한 사람들에게서 받게 된 것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 대접이 내 공적에 넘치는 대우라는 것을 정말 의식하면 할수록 내게 표현해 주었고 그리고 내가 노력하도록 그들이 자발적으로 부탁하는 것 같은 아주 친절한 소망들에 최소한 내 변변찮은 능력에 맞는 보답이라도 하고자 노력하지 않는다면 나의 더 큰 배은망덕이 되리라 생각했습니다. This I attempted not only in the Second Edition, but in every subsequent one the work has received some improvement. But though I do not regret the labour previously expended, I never felt satisfied until the work was arranged in the order in which it now appears. 이것을 나는 제2판에서뿐만 아니라 모든 다음 판에서도 그 저술에 다소 개선이 이루어지도록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전에 들인 노동을 후회하지는 않을지라도 그 저작이 현재의 모습으로 정리될 때까지 만족한 느낌을 받은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Now I trust it will approve itself to the Judgment of all my readers. As a clear proof of the diligence with which I have laboured to perform this service to the Church of God, I may be permitted to mention, that last winter, when I thought I was dying of quartan ague, the more the disorder increased, the less I spared myself, in order that I might leave this book behind me, and thus make some return to the pious for their kind urgency. 이제 나는 그 책이 모든 나의 독자들의 판단에 스스로 입증하리라 믿습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위한 이 봉사를 실행하기 위하여 내가 기울인 노력의 명백한 한 증거로 다음의 것을 언급할 수 있도록 허락을 구합니다. 지난겨울 나흘마다 앓는 오한으로 죽는다고 생각했을 때 그 질환이 더 심해질수록, 이 책을 내 사후에 남길 수 있고 그들 나름의 절박한 필요를 위해 경건한 신자들에게 무언가를 보답하기 위하여 나 자신을 더 아끼지 않게 되었습니다. I could have wished to give it sooner, but it is soon enough if good enough. I shall think it has appeared in good time when I see it more productive of benefit than formerly to the Church of God. This is my only wish. 나는 그것을 더 빨리 주기를 바랄 수 있었지만 그러나 어지간히 좋다면 그것도 상당히 빠른 것입니다. 이 책이 하나님의 교회에 이전보다 더 생산적인 이익을 주는 걸 내가 보게 될 때 그것이 알맞은 시기에 출판되었습니다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이것이 나의 유일한 소원입니다. And truly it would fare ill with me if, not contented with the approbation of God alone, I were unable to despise the foolish and perverse censures of ignorant as well as the malicious and unjust censures of ungodly men. 그리고 참으로 하나님의 허가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내가 믿음이 없는 자들의 악하고 불의한 비난들뿐만 아니라 무지한 자들의 어리석고 심술궂은 비난들도 무시할 수 없었다면, 그 일이 여의치 않았을 것입니다. For although, by the blessing of God, my most ardent desire has been to advance his kingdoms and promote the public good, -although I feel perfectly conscious, and take God and his angels to witness, that ever since I began to discharge the office of teacher in the Church, my only object has been to do good to the Church, by maintaining the pure doctrine of godliness, yet I believe there never was a man more assailed, stung, and torn by calumny. 왜냐하면 하나님의 축복으로 나의 가장 열렬한 갈망이 주님의 왕국들을 전진시키고 공공의 선을 증진시키기 위한 것이었고, 그 이후 내내 교회에서 교사 직무를 수행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내가 완전히 자각하고 있음을 느끼고 그리고 하나님과 그의 천사들 증거에 전념하고, 경건의 순수한 교리를 옹호함으로써 교회에 유익을 주는 것이 나의 유일한 목적이었습니다. 하지만 나만큼 비방으로 공격받고 찔리고 찢긴 사람이 일찍이 하나도 없었다고 나는 믿습니다. [as well by the declared enemies of the truth of God, as by many worthless persons who have crept into his Church - as well by monks who have brought forth their frocks from their cloisters to spread infection wherever they come, as by other miscreants not better than they]. 하나님의 진리의 공공연한 원수들뿐만 아니라 주님의 교회에 몰래 들어온 많은 무익한 사람들에 의해서도 가는 곳마다 전염병을 퍼뜨리기 위해 그들의 수도원들에서 성직자 옷들을 만들어낸 수도사들뿐만 아니라 그들이나 다름없는 다른 이단자들에 의해서도 비방을 받았습니다. After this letter to the reader was in the press, I had undoubted information that, at Augsburg, where the Imperial Diet was held, a rumour of my defection to the papacy was circulated, and entertained in the courts of the princes more readily than might have been expected. 독자에게 쓰는 이 편지가 신문에 실린 후에 제국 의회(제국 의회는 세 개의 계열로 나뉜 신성 로마 제국의 제후들이 참여한 신성 로마 제국의 입법 기관이자 자문 기관. 가장 유명한 의회로는 제국 개혁이 이뤄진 1495년 의회, 루터를 이단으로 선포한 1521년 의회)가 열리는 아우구스부르크에서 내가 교황파로 변절했다는 소문이 퍼졌고 그리고 기대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쉽게 군주들의 궁전들에서 환대를 받았다는 확실한 정보를 받았습니다. This, forsooth, is the return made me by those who certainly are not unaware of numerous proofs of my constancyproofs which, while they rebut the foul charge, ought to have defended me against it, with all humane and impartial judges. 이것(소문)은 정말이지 내 지조에 대한 수많은 증거들을 확실히 알지 못하는 자들이 나에 대해 지어낸 보고서입니다. 한편으로 그들이 비열한 비난으로 반박하면서도 그것에 반대하는 나를 아주 인도적이고 공평한 재판관들과 함께 변호하는 것이 당연한 증거들 말입니다(대적자들의 비난으로 활용하는 증거들이 오히려 칼빈이 반대하는 주장들을 그들의 판사들과 함께 변호해 준다는 역설). But the devil, with all his crew, is mistaken if he imagines that by assailing me with vile falsehoods, he can either cool my zeal, or diminish my exertions. I trust that God, in his infinite goodness, will enable me to persevere with unruffled patience in the course of his holy vocation. Of this I give the pious reader a new proof in the present edition. 그러나 마귀가 모든 그의 패거리와 함께 야비한 거짓말들로 나를 공격하는 것으로 나의 열정을 식히거나 내 노력들을 감소시킬 수 있다고 상상한다면 착각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무한하신 선하심 가운데 내가 그의 거룩하신 소명을 수행하는 동안에 흔들리지 않는 인내로 견딜 수 있게 해 주실 것이라고 나는 믿습니다. 이것에 대해 나는 경건한 독자에게 『기독교강요』 현재 판에서 새 증거를 드리고자 합니다. I may further observe, that my object in this work has been, so to prepare and train candidates for the sacred office, for the study of the sacred volume, that they may both have an easy introduction to it, and be able to prosecute it with unfaltering step; for, if I mistake not, I have given a summary of religion in all its parts, and digested it in an order which will make it easy for any one, who rightly com-prehends it, to ascertain both what he ought chiefly to look for in Scripture, and also to what head he ought to refer whatever is contained in it. 더 나아가 나는 이 저술에 있어서의 나의 목적이 성직(聖職) 후보자들이 신성한 두루마리 공부를 위해 그것(성경)의 쉬운 개론에 접할 수 있고 그리고 흔들리지 않는 걸음으로 그것을 실행할 수 있게 그들을 준비시키고 훈련시키기 위한 의견이라고 해도 좋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실수한 것이 아니라면 기독교의 모든 분야의 개요(槪要)를 나는 제시해 주었고 그리고 그것(성경)을 바르게 파악하는 사람을 위해 그가 성서에서 주로 무엇을 찾아야 하고 성경 속에 담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 어떤 표제로 언급해야 하는지도 확인하게 해 주기 위하여 성경이 어렵지 않게 차례대로 요약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Having thus, as it were, paved the way, as it will be unnecessary, in any Commentaries on Scripture which I may afterwards publish, to enter into long discussions of doctrinal points, and enlarge on commonplaces, I will compress them into narrow compass. 이렇게 하고 나니, 이를테면 불필요하게 될 것이지만 내가 나중에 출판할 수도 있는 어떤 성경 주석서들에서 다룰 교리적 논점들에 대한 긴 토론들에 들어가고 그리고 내가 좁은 범위로 압축하게 될 인용구들에 대해 상술할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습니다. In this way much trouble and fatigue will be spared to the pious reader, provided he comes prepared with a knowledge of the present work as an indispensable prerequisite. The system here followed being set forth as in a mirror in all my Commentaries, I think it better to let it speak for itself than to give any verbal explanation of it. 이렇게 하여 경건한 독자는 많은 수고와 노고를 아끼게 될 것입니다. 만일 그가 없어서는 안 될 기초 필수 과목으로 현재 저서 『기독교강요』의 지식을 갖추고 온다면 말입니다. 모든 나의 주석들에서 거울에서처럼 분명하게 설명하게 될 다음의 체계는 그것에 대한 말의 설명보다 그것이 스스로 말하게 하는 게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Farewell, kind reader: if you derive any benefit from my labours, aid me with your prayers to our heavenly Father. 친절한 독자여 안녕. 당신이 내 노작(labour)들에서 어떤 이익을 얻는다면 우리의 하늘의 아버지께 당신의 기도로 나를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Geneva, 1st August 15591559년 8월 1일 제네바 이렇게 죽기 5년 전 『기독교강요』 마지막 판 서문에서 칼빈 자신의 모든 심정을 털어놓은 뒤 마지막 개정 서문을 쓰고 독자들에게 안녕(Farewell, kind reader)이라는 인사까지 합니다. 그러나 칼빈은 무언가 아쉬움이 남아서인지 추신(追伸)과 더불어 아우구스티누스의 글쓰기 경구(警句)를 덧붙입니다. The zeal of those whose cause I undertook, has swelled a short defense into a book. 내가 맡아서 돌보는 사람들의 주장을 위한 열정이 간단한 변호를 부풀려 한 권의 책이 되게 하였습니다. “I profess to be one of those who, by profiting, write, and by writing profit.”-Augustine, Epist. 7. “나는 이익을 얻음으로 글을 쓰고 그리고 글을 씀으로 이익을 얻는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임을 고백합니다.” -아우구스티누스 서한집 7. 칼빈의 추신은 믿음으로 신자들이 당하는 오해와 어려움을 변호하다보니 그게 한 권의 책이 됐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열심히 진실하게 변호하고 옹호했으면 우리 개혁주의의 경전이 될 『기독교강요』를 저술해 이 세상에 남기고 전하게 됐을까요. 마치 르누아르가 망막한 바다에서 깊은 계곡을 상상했고 인간 부재의 환경에서 아리따운 소녀를 상상하고 상상한 그대로 천연덕스럽게 그렸는데 말로가 보기에도 놀랄 인상주의를 대표하는 작가의 작품이 나온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 개혁신학의 시조 칼빈 자신도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을 빌어 믿음의 글을 쓰는 것이 얼마나 유익된 것임을 고백한 것입니다. 너무도 감동적인 경구라 다시 한 번 더 인용합니다. 외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대학이나 기업이 표방하는 모토 중에 영어로 된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아마도 ‘영어로 말한 것은 무엇이든 지성적인 것처럼 보인다’는 생각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렇듯 다른 사람에게 영어로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을 들려준다면 그 사람은 감격하고 당신을 올려다볼지도 모를 일입니다. “I profess to be one of those who, by profiting, write, and by writing profit.” “나는 이익을 얻음으로써 쓰고 그리고 씀으로써 이익을 얻는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임을 고백합니다..” 『칼빈 신앙수업』을 읽는 여러분도 아우구스티누스처럼 ‘이익을 얻음으로써(by profiting) 쓰고, 씀으로써(by writing) 이익을 얻는’ 그런 목사나 신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칼빈은 『기독교강요』를 저술하면서 성공의 아주 작은 기대(the least expectation of the success)도 갖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세계를 개혁주의로 변화시키는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여러분도 이 책을 통해 아주 작은 성공의 기대도 없이 출발하실 수 있지만 칼빈처럼 노력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로 좋은 열매를 얻기를 바랍니다. RECOLLECTION 되·새·김 1. 르누아르는 망망한 바다를 바라보며 무엇을 상상했습니까. 르누아르는 깊은 계곡을 상상했고 인간 부재의 환경에서 아리따운 소녀를 상상했습니다. 2. 르누아르는 바다를 보며 어떻게 했습니까. 그는 상상한 그대로 천연덕스럽게 그렸습니다. 열심히 대상을 집중해 그것과 다른 사실을 내놓은 셈입니다. 이 일은 르누아르의 의식과 그것에 반응하는 물감과 붓질에 의해 상식의 질서와 전혀 다른 논리로 진행되었습니다. 3. 『기독교강요』를 처음 발간했을 때 칼빈은 어떤 기대를 했습니까. 성공의 아주 작은 기대조차 갖지 않은 이 저작의 처음 판에 하나님께서 그의 무한하신 선하심으로 기꺼이 그것을 주셨습니다. 2019-02-18 LA 열린문교회 박헌성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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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2-18
  • 칼빈 신앙수업 - 칼빈은 누구 Who is Calvin
    Lesson I칼빈은 누구Who is Calvin 내가 처음 다닌 학교는 칠판도 없고 숙제도 없고 벌도 없는 주일학교였습니다. 교회와 집 사이는 후다닥 걸어서 가면 단 오 분 거리 비바람이 불고 눈보라가 쳐도 걱정이 없는 늘 포근하고 선물도 심심찮게 주는 학교였습니다. 나는 내가 살아가면서 마음 깊이 새겨 두어야 할 귀한 것들을 이 주일학교에서 배웠습니다. 주일 저녁 텅 빈 교회 마당 구석에 한 아이가 쪼그리고 앉아 있습니다. 산 위에서 보면 교회가 나뭇가지에 달린 하얀 박꽃입니다. 새장처럼 얽어 놓은 창문에 참새 같은 아이들이 쏙쏙 얼굴을 내밉니다. 분반 공부 끝나면 오늘 외운 성경 한 절 오늘 배운 찬송 한 곡 오늘 받은 과자 한 봉지로 불룩한 마음 교회 창밖을 보면 벚나무에 새 한 마리가 앉아있습니다. 주일학교엔 숙제도 시험도 없습니다. 고함 한번 치지 않는데 회초리 한번 들지 않는데 하나님의 말씀으로 온갖 꽃나무 어린 싹들 찬송하며 자랍니다. 그리고 때 되면 열매 맺어 서로 나누며 믿음의 제 몫을 합니다. 나는 교인 누구나 목사님의 말을 듣는 게 좋아서 목사가 되었고 새벽기도가 좋아서 목사가 되었습니다. 목사님 그 한 마디가 좋아서 가진 것 다 주어도 아깝지가 않습니다. 목사님 그 한 마디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습니다. 목사님 그 한 마디가 좋아서 평생을 웃습니다. 믿음 향기가 가득한 교회에서. 제 동창 친구 하나는 대학에 갈 때 영어가 싫어서 수학과에 진학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대학에서 수학을 전공하다보니 교과서가 전부 영어 원서였습니다. 영어는 라틴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문법이 꽤 복잡합니다. 간단한 예로 be 동사의 경우만 보더라도 그 복잡함에 머리가 아플 겁니다. 대략 이렇습니다. ⑴ 변칙(變則)동사(anomalous verb)의 하나로 어형(語形)변화에 특징이 있음.⑵ 의문문을 만드는 데 주어와 도치되며 조동사 do를 쓰지 않음: He is busy.→Is he busy?⑶ 부정문으로 할 때에도 do를 안 씀: That is nice.→That is not 〔isn’t〕 nice. 다만, 명령형에서는 흔히 do를 쓰며, do를 쓰지 않는 것은 옛 형태: Don’t be a fool. 바보 같은 짓을 하지 마라. Be not afraid. 《고어》 두려워하지 말지어다.⑷ 강조할 때 do를 사용치 않고 be 동사를 세게 발음함: She is [-z-] kind, indeed. 그녀는 정말 친절합니다. 다만, 긍정(肯定) 명령형을 강조할 때에는 do를 씀: Do be gentle to them. 제발 그들에게 부드럽게 대해 주게나. be 동사의 문법 일부가 이러니 사람들은 지레 겁을 먹고 영어 공부의 가시적인 성과를 보기도 전에 이미 질려버립니다. 하지만 이 고비들을 잘 넘기고 복잡한 문법 체계를 어느 정도 익히고 나면 확실히 공부하는 훈련이 됩니다. 어렵고 미묘한 문제와 마주해도 별로 힘들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오래 해보면 깨닫게 되겠지만 영어 공부는 평범한 두뇌를 공부에 최적화된 두뇌로 활성화시키고 사고 체계를 넓혀줍니다. 실제로 영어가 필요한 진짜 이유는 영문 자료를 접하기 위해서입니다. 영어를 사용하는 인구는 대략 5-10억 명 정도로 추산됩니다. 이들은 대부분 선진국 국민이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각 나라의 엘리트들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생산해 내는 정보입니다. 신문, 잡지, 도서, 학계, 인터넷 등을 통해 영어 사용 인구가 생산해내는 정보는 질적으로도 양적으로도 엄청납니다. 그러니 우리가 현대를 살면서 영어를 떠날 수는 없습니다. 칼빈의 『기독교강요』를 읽는 사람은 개혁주의 신봉자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기독교강요』를 영어 번역본을 통해 그 진수(眞髓)를 맛보고자 하는 사람은 뛰어난 능력이 있거나 교계에서 지도적 입장에 있는 엘리트(elite) 개혁주의자이거나 그것을 지향하는 신자일 것입니다. 개혁주의의 선구자(forerunner)는 누구입니까. 칼빈(John Calvin)입니다. 칼빈은 누구입니까. 인터넷 시대 누구나 편집할 수 있고 5,693,164 영어 항목의 무료 백과사전 Wikipedia(하와이어로 빠른‘quick’을 의미하는 ‘wiki’와 백과사전을 의미하는 ‘encyclopedia’가 합쳐진 이름)는 칼빈에 대해 이렇게 서술했습니다. John Calvin(French: Jean Calvin; born Jehan Cauvin; 10 July 1509 27 May 1564) was a French theologian, pastor and reformer in Geneva during the Protestant Reformation. He was a principal figure in the development of the system of Christian theology later called Calvinism, aspects of which include the doctrines of predestination and of the absolute sovereignty of God in salvation of the human soul from death and eternal damnation, in which doctrines Calvin was influenced by and elaborated upon the Augustinian and other Christian traditions. Various Congregational, Reformed and Presbyterian churches, which look to Calvin as the chief expositor of their beliefs, have spread throughout the world. 칼빈(John Calvin: 프랑스 이름 쟝 칼빈 Jean Calvin; 兒名 제앙 코뱅 Jehan Cauvin; 1509년 7월 10일 1564년 5월 27일)은 개신교 종교개혁(Protestant Reformation) 기간 제네바의 프랑스인 신학자(theologian) 목회자(pastor) 개혁가(reformer)였습니다. 그는 나중 칼빈주의(Calvinism)라고 불리는 기독교 신학의 체계를 발전시킨 주요 인물이 되었습니다. 칼빈주의는 죽음과 영원한 저주로부터 인간 영혼의 구원에 하나님의 예정(predestination)과 절대(absolute) 주권(sovereignty) 교리들을 포함시키는 견해(aspect)들입니다. 그 견해들은 칼빈이 아우구스티누스주의(Augustinian)와 다른 기독교 전통들의 영향을 받고 잘 다듬은 것들입니다. 세계로 퍼져나간 회중교회 개혁교회 장로교회 등의 여러 교파가 칼빈을 그들 신조(belief)의 대표(chief) 해설자(expositor)로 생각합니다. Calvin was a tireless polemic and apologetic writer who generated much controversy. He also exchanged cordial and supportive letters with many reformers, including Philipp Melanchthon and Heinrich Bullinger. In addition to his seminal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Calvin wrote commentaries on most books of the Bible, confessional documents, and various other theological treatises. 칼빈은 많은 논쟁을 일으킨 지칠 줄 모르는 논증(polemic)과 변증(apologetic) 저술가(writer)였습니다. 그는 조직신학자 멜란히톤Philipp Melanchthon(개신교 최초의 독일 루터교 조직신학자)과 불링어Heinrich Bullinger(16세기 스위스 종교개혁가)를 포함해 많은 종교개혁가들과 서신들도 주고받았습니다. 칼빈은 가장 독창성이 풍부한(seminal) 『기독교강요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외에도 거의 대부분의 성경 주석(commentary)들과 신앙고백(confessional) 문서(document)들 및 다양한 신학 논문(treatise)들도 저술했습니다. Originally trained as a humanist lawyer, he broke from the Roman Catholic Church around 1530. After religious tensions erupted in widespread deadly violence against Protestant Christians in France, Calvin fled to Basel, Switzerland, where in 1536 he published the first edition of the Institutes. In that same year, Calvin was recruited by Frenchman William Farel to join the Reformation in Geneva, where he regularly preached sermons throughout the week; but the governing council of the city resisted the implementation of their ideas, and both men were expelled. At the invitation of Martin Bucer, Calvin proceeded to Strasbourg, where he became the minister of a church of French refugees. He continued to support the reform movement in Geneva, and in 1541 he was invited back to lead the church of the city. 원래 인문주의(humanist hjːmnist) 법률가(lawyer)로 훈련받은 그는 1530년 경 로마 가톨릭 교회와 결별했습니다. 프랑스에서 개신교 그리스도인들을 반대하는 대폭적인 격렬한 폭력 사태로 종교적 긴장이 촉발된 후 칼빈은 스위스 바젤로 피신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27살 되는) 1536년 『기독교강요』 초판을 발행했습니다. 같은 해 칼빈은 제네바 종교개혁에 동참하라는 프랑스인 파렐(William Farel)의 권유를 받았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빠지지 않고 주일 내내 설교를 했습니다. 그러나 제네바 시의회는 그들 사상이 시행(implementation)되는 것을 거부했고 두 사람을 추방했습니다. 부서(Martin Bucer 16세기 독일 스트라스부르의 종교개혁가)의 초청으로 칼빈은 스트라스부르(Strasbourg)로 내려갔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프랑스 피난민 교회의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제네바 개혁 운동을 계속 지원했습니다. 그리고 1541년 제네바 교회로 돌아와 지도해 달라는 청빙을 받았습니다. Following his return, Calvin introduced new forms of church government and liturgy, despite opposition from several powerful families in the city who tried to curb his authority. During this period, Michael Servetus, a Spaniard regarded by both Roman Catholics and Protestants as having a heretical view of the Trinity, arrived in Geneva. He was denounced by Calvin and burned at the stake for heresy by the city council. Following an influx of supportive refugees and new elections to the city council, Calvin's opponents were forced out. Calvin spent his final years promoting the Reformation both in Geneva and throughout Europe. 돌아온 뒤 칼빈은 그의 권위를 꺾으려는 그 도시의 몇몇 세도 가문들(several powerful families)의 반대를 무릅쓰고 새로운 형식의 교회 정치(church government)와 예배 모범(liturgy)을 소개했습니다. 이 시기에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 양쪽 다 이단 사상이라고 생각하는 삼위일체(the Trinity)론을 지닌 스페인 사람(Spaniard) 세르베투스(Michael Servetus)가 제네바에 왔습니다. 그는 칼빈의 탄핵을 받고(denounce) 시의회의 이단(heresy) 판결로 화형을 당했습니다(burned at the stake). 우호적인 피난민들의 유입(influx)과 시의회의 새 선거들이 이어져 칼빈의 반대자들이 밀려나게 되었습니다. 칼빈은 종교개혁(the Reformation)을 제네바와 유럽 전역에 촉진시키면서 만년(final years 1564년 5월 27일 55세 소천)을 보냈습니다. 돈키호테가 그의 충실한 시종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여보게, 내 친구 산초. 세상을 바꾸는 것은 유토피아도 광기의 행동도 아니야. 그건 정의라네.” 돈키호테처럼 저도 제 후배 목사와 신학생들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여보게 내 동료와 후배들. 칼빈이 개혁주의로 세상을 바꾼 것은 사상도 행동도 아니네. 그건 정의로우신 하나님의 말씀(the Word of Righteous God)이라네.” RECOLLECTION 되·새·김 1. 영어 공부의 유익은 무엇입니까.영어 공부는 평범한 두뇌를 공부에 최적화된 두뇌로 활성화시키고 사고 체계를 넓혀줍니다. 2. 실제로 영어가 필요한 진짜 이유는 무엇입니까.영문 자료를 접하기 위해서입니다. 3. 칼빈주의는 무엇입니까.죽음과 영원한 저주로부터 인간 영혼의 구원에 있어서 하나님의 예정(predestina)과 절대(absolute) 주권(sovereignty) 교리들이 포함된 견해(aspect)입니다. 2019-02-04 나성열린문교회 박헌성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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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2-04
  • 칼빈 신앙수업 - 제이 계명 우상숭배
    제이 계명 우상숭배 Second Commandment Idolatry 색이 바랜 5센티 가량의 송곳니를 4억 불교도들이 지상의 가장 신성한 것으로 숭배합니다. 이 치아는 주전 543년 석가모니를 화장할 때 태운 장작더미에서 나온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800년이 지난 뒤 실론(Ceylon)으로 그 치아를 가져왔다고 합니다. 오늘 날에는 그 치아가 실론의 칸디(Kandy)에 휘황찬란하게 건립된 치아 사원 안의 황금 연꽃 위에 얹혀있습니다. 황금 연꽃 둘레는 수많은 루비와 꽃들로 장식되어 있습니다. 해마다 여러 나라에서 10만의 신실한 불교도들이 이 신성한 치아를 바라보려고 찾아옵니다. 그들은 사원에 금과 은과 보석들의 예물들을 가지고 와 바칩니다. 이와 비슷한 일들을 가톨릭에서도 자행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가톨릭교도들이 "성물"이라고 숭배하고 보관하는 것들에는 이런 것들이 있습니다. - 나폴리와 로마의 교회들에 안치된 동정녀 마리아의 머리털.- 페루기아 대성당(Cathedral Perugia)에 안치된 동정녀 마리아의 결혼반지.- 프라토(Prato)의 교회에 안치된 동정녀 마리아의 거룩한 허리띠. - 나폴리의 산 가우디오소 에파트리찌오 교회와 로마의 백성들의 마리아 교회에 보관되어 있는 동정녀 마리아의 젖 방울들. - 주님의 마지막 만찬 때 사용된 대야가 제노아의 성 로렌조 대성당에 안치되어 있습니다. - 예수님의 옆구리를 찌른 창 그리스도의 얼굴 모습이 새겨진 베로니카의 면사포 그리고 안드레 사도의 두개골이 모두 베드로 대성당의 돔을 떠받치고 있는 네 개의 거대한 돌기둥 속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수의 세마포가 투린의 세례 요한 대성당에 보관되어 있습니다. 그 의미에 대해 칼빈은 ‘기독교강요’ 제2권 제8장 17항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Second Commandment THOU SHALT NOT MAKE UNTO THEE ANY GRAVEN IMAGE, OR ANY LIKENESS OFANYTHING THAT IS IN HEAVEN ABOVE, OR THAT IS IN THE EARTH BENEATH, OR THAT IS IN THE WATER UNDER THE EARTH: THOU SHALT NOT BOW DOWN THYSELF TO THEM, NOR SERVE THEM. 제이 계명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그것들에게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출 20:4-5 17. As in the first commandment the Lord declares that he is one, and that besides him no gods must be either worshipped or imagined, so he here more plainly declares what his nature is, and what the kind of worship with which he is to be honoured, in order that we may not presume to form any carnal idea of him. 제일 계명에서 여호와께서 그는 하나이시고 그 이외에 신들을 하나도 예배하거나 상상해서 안 된다고 선포하신 것처럼 그는 여기에서 무엇이 그의 본성이시고, 그리고 그가 영광받으셔야 될 예배의 종류가 무엇이고, 순서를 따라(in order) 우리가 그에 대한 어떤 육체적인(carnal) 사상을 만들려고 추정해서는(presume) 안 된다는 것을 더 자세히 선포하십니다. The purport of the commandment, therefore, is, that he will not have his legitimate worship profaned by superstitious rites. Wherefore, in general, he calls us entirely away from the carnal frivolous observances which our stupid minds are wont to devise after forming some gross idea of the divine nature, while, at the same time, he instructs us in the worship which is legitimate, namely, spiritual worship of his own appointment. 그러므로 이 계명의 의미는 하나님께서 그의 정당한(legitimate) 예배를 미신적인 의식(rite rait)들로 불경스럽게(profane) 되게 하지 않으실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대체로 그는 우리가 육체적인 하찮은(frivolous) 계율(observance)들에서 완전히 떠날 것을 요청하십니다. 우리의 멍청한 마음은 신성에 대한 어떤 막돼먹은(gross grous) 사상을 따라 그런 계율들을 고안하는 데 익숙합니다(wont). 한편 그와 동시에 그는 정당한 예배 즉 그 자신이 지정하신 영적 예배 안에서 우리를 가르치십니다. The grossest vice here prohibited is external idolatry. This commandment consists of two parts. The former curbs the licentious daring which would subject the incomprehensible God to our senses, or represent him under any visible shape. The latter forbids the worship of images on any religious ground. 여기에서 금지하는 가장 막돼먹은 악은 형식적인(external) 우상숭배(idolatry)입니다. 이 계명은 두 부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첫 부분은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을 우리의 감각에 예속시키거나 하나님을 어떤 보이는 형상으로 나타내는 방자한(licentious) 대담무쌍(daring)을 억제합니다. 둘째 부분은 어떤 종교적인 구실(religious ground)을 붙인 성상(image)들의 예배를 금지합니다(forbid). There is, moreover, a brief enumeration of all the forms by which the Deity was usually represented by heathen and superstitious nations. By “any thing which is in heaven above” is meant the sun, the moon, and the stars, perhaps also birds, as in Deuteronomy, where the meaning is explained, there is mention of birds as well as stars(Deut. 4:15). 더욱이 여기에는 이교도와 미신적인 국가들이 일반적으로 표현하는 모든 형태의 조물주(Deity)에 대한 간결한(brief briːf) 목록(enumeration)도 있습니다. “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로 의미하는 것은 해, 달, 별들, 새들입니다. 아마도 별들뿐만 아니라 새들도 언급하고(신 4:15) 그 의미를 설명도 하는 신명기(Deuteronomy)에서처럼 말입니다. I would not have made this observation, had I not seen that some absurdly apply it to the angels. The other particulars I pass, as requiring no explanation. We have already shown clearly enough(Book 1. chap. 11, 12) that every visible shape of Deity which man devises is diametrically opposed to the divine nature; and, therefore, that the moment idols appear, true religion is corrupted and adulterated. 내가 이 목록을 천사들에다 터무니없이(absurdly) 갖다 붙인 어떤 것을 보지 않았다면 이런 소견(observation)을 말하지 않았을 겁니다. 우리는 이미 인간이 고안한 신에 대한 모든 형태의 보이는 모양은 하나님 신성에 전혀(diametrically) 반대되는 것(Book 1. chap. 11, 12)이라는 사실에 대해 분명하게 충분히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우상들이 나타나는 순간 참 종교는 부패하고 변질된다는(adulterate) 사실을 말입니다. Recollection 되.새.김 1. 제이 계명에서 금지하는 가장 막돼먹은 악은 무엇입니까. 여기에서 금지하는 가장 막돼먹은 악은 형식적인 우상숭배입니다. 2. 제이 계명에 "나 네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는 하나님인즉 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로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라고 엄중한 경고가 붙을 정도로 심각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어떤 형상이든지 하나님을 나타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3. 왜 칼빈은 ‘우상이 나타나는 순간 참된 종교가 부패하며 변질한다’고 가르칩니까. 제이 계명은 우리가 참 하나님을 섬길지라도 알맞지 않은 방법으로 예배를 드리는 것을 금하고 올바른 방법으로 드릴 것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019-01-17 나성열린문교회 박헌성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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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1-17
  • 칼빈 신앙 수업 - 제일 계명 유일신
    제일 계명 유일신First Commandment 지난 2018년 7월 5일은 마르크스 탄생 200주년이었습니다. 그의 고향인 독일 트리어와 중국 공산당, 그리고 한국 일부에서 크게 의미를 두었습니다. 그의 공산주의는 그것을 따르는 사람에게 증오와 굶주림을 안겨줍니다. 그를 따르는 좌파 정권의 베네주엘라는 산유국(產油國)임에도 경제 붕괴로 망하기 일보 직전에 있습니다. 중세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한 권의 책만 읽은 사람을 조심하라.” 1980년대 운동권 학생 책꽂이엔 주로 한 종류 책이 꽂혀 있었습니다. 마르크스 저작과 마르크스주의에 토대를 둔 ‘사회구성체론’과 ‘정치경제학’ 같은 책입니다. 서클 세미나에서 토론하려면 그런 책을 읽지 않을 수 없었지요. 그 시대 청년 대학생들은 하나님을 부인하는 ‘한 권의 책만 읽은 사람’이었습니다. 좌파 정권의 베네주엘라 지도자들처럼. 성경은 말씀합니다. 이 재앙에 죽지 않고 남은 사람들은 손으로 행한 일을 회개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여러 귀신과 또는 보거나 듣거나 다니거나 하지 못하는 금 은 동과 목석의 우상에게 절하고 또 그 살인과 복술과 음행과 도둑질을 회개하지 아니하더라 계 9:20-21 세계에서 가장 많은 신들을 섬기는 사람들은 힌두교도들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물경 3억 3천만에 달하는 신들과 여신들을 모시고 있습니다. 그들은 한 세대 당 여덟 신을 섬긴다고 합니다. 힌두교는 동물의 생명이 신성하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그들은 언제나 비참하게 가난한 생활을 살면서도 동물들과 한 집에서 같이 생활하며 부양을 합니다. 동물들은 아무 하는 일 없이 그들의 집에서 하인을 둔 부자 주인 노릇을 하며 빈둥빈둥 살아갑니다. 인도의 4억 5천만 힌두교도들은 거의 7천 5백만에 달하는 소들을 경배하고 섬깁니다. 더욱이 그들은 그들의 농작물들을 먹어치우고 해를 주는 원숭이들과 쥐들과 여러 해충들까지도 내버려 둔다고 합니다. 제일 계명은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말하는 영역에서 시작합니다. 이 계명은 우리가 오직 하나님만을 힘을 다해 섬길 것을 요구합니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출 20:2-3). 이 말씀은 다른 신이나 현대의 무수한 우상들뿐만 아니라 어떤 사물이나 사람을 섬기는 것도 이 계명을 어기는 것입니다. 또한 성공 소유 명예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는 것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 계명을 얼마나 잘 지키고 있는가요. 그것을 위해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 22:37). 그 의미에 대해 칼빈은 ‘기독교강요’ 제2권 제8장 16항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First Commandment. I AM THE LORD THY GOD, WHICH BROUGHT THEE OUT OF THE LAND OF EGYPT, OUT OF THE HOUSE OF BONDAGE. THOU SHALT HAVE NO OTHER GODS BEFORE ME. 제일 계명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 16. The authority of the Law being founded and established, God delivers his First Commandment THOU SHALT HAVE NO OTHER GODS BEFORE ME. The purport of this commandment is, that the Lord will have himself alone to be exalted in his people, and claims the entire possession of them as his own. That it may be so, he orders us to abstain from ungodliness and superstition of every kind, by which the glory of his divinity is diminished or obscured; and, for the same reason, he requires us to worship and adore him with truly pious zeal. The simple terms used obviously amount to this. 16. 창시되고 설립된 율법의 권위를 하나님께서 그의 제일 계명 “THOU SHALT HAVE NO OTHER GODS BEFORE ME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하지 말지니라”(출 20:3)는 말씀으로 전하십니다. 이 계명의 의미(purport)는 여호와(the Lord)께서 그의 백성 가운데에서 스스로 높임을 받으시고, 그리고 그들의 전체 소유를 그 자신의 것으로 요구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될 수 있도록(That it may be so), 그는 모든 종류의 불신앙(ungodliness)과 미신을 끊을 것을(abstain æbstein) 우리에게 명하십니다. 그것으로(by which) 그의 신성의 영광이 감하거나(diminish) 흐려지게(obscure) 됩니다. 그래서 같은 이유로, 그는 참 경건한 열정으로 그를 경배하고(worship) 숭배하라(adore)고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require). 명료하게 사용된 단순한 말씨(terms)가 결국 그 의미입니다(amount to this). For seeing we cannot have God without embracing everything which belongs to him, the prohibition against having strange gods means, that nothing which belongs to him is to be transferred to any other. The duties which we owe to God are innumerable, but they seem to admit of being not improperly reduced to four heads: Adoration, with its accessory spiritual submission of conscience, Trust, Invocation, Thanksgiving. 왜냐하면 우리가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받아들이지(embrace embreis) 않고는 하나님을 믿을 수 없으므로 이상한 신들을 갖지 말라는 금지(prohibition)는 그에게 속한 것은 무엇이든 어떤 다른 것에 결코 옮겨서는 안 된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위해 감당해야 할 의무들이 헤아릴 수 없지만(innumerable) 이것들을 네 가지로 줄인다고 해서 부적절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숭배(Adoration), 양심(conscience)의 보조적인(accessory) 영적 복종(submission)과 함께, 신뢰(Trust), 기원(Invocation), 감사(Thanksgiving) By Adoration, I mean the veneration and worship which we render to him when we do homage to his majesty; and hence I make part of it to consist in bringing our consciences into subjection to his Law. Trust, is secure resting in him under a recognition of his perfections, when, ascribing to him all power, wisdom, justice, goodness, and truth, we consider ourselves happy in having been brought into intercourse with him. Invocation, may be defined the retaking of ourselves to his promised aid as the only resource in every case of need. Thanksgiving, is the gratitude which ascribes to him the praise of all our blessings. 숭배로 내가 의미하는 것은 우리가 그의 위엄(majesty)에 경의를 표할(homage) 때 우리가 그에게 바치는 존경(veneration)과 예배(worship)입니다. 그래서 지금부터 나는 숭배를 우리의 양심이 하나님의 법에 복종하게 하는 요소로 생각하겠습니다. 지혜, 정의, 선, 및 진리 등의 모든 능력을 그의 것으로 돌리는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하게(intercourse) 되는 것으로 스스로 행복하다고 생각할 때 신뢰는 그의 완전하심(perfections)에 대한 인식(recognition) 하에 하나님 안에 머무는 보증(secure)입니다. 기원은 모든 종류의 필요의 유일한 자원(resource)으로 그의 약속의 도움에 우리 자신을 다시 맡기는 것으로 정의할 수 있습니다. 감사는 모든 우리의 축복의 찬양(praise)을 하나님에게 돌리는 보은의 마음(gratitude)입니다. As the Lord does not allow these to be derived from any other quarter, so he demands that they shall be referred entirely to himself. It is not enough to refrain from other gods. We must, at the same time, devote ourselves wholly to him, not acting like certain impious despisers, who regard it as the shortest method, to hold all religious observance in derision. 여호와께서 이것들이 어떤 다른 진영(quarter)에서 나오는 것을 허용하시지 않는 것처럼 그는 그것들이 온전히(entirely) 그 자신에게만 돌려질 것을 요구하십니다(demand). 다른 신들을 삼가는(refrain rifrein)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그에게 우리 자신을 완전히 헌신해야만 합니다. 모든 종교적 관례를 아주 헤식은 수단으로 우습게 아는 불경건한(impious) 조롱꾼들처럼 행동해서는 안 됩니다. But here precedence must be given to true religion, which will direct our minds to the living God. When duly imbued with the knowledge of him, the whole aim of our lives will be to revere, fear, and worship his majesty, to enjoy a share in his blessings, to have recourse to him in every difficulty, to acknowledge, laud, and celebrate the magnificence of his works, to make him, as it were, the sole aim of all our actions. 그러나 여기에는 우리의 마음을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 인도할 참 종교에 선행(precedence)되어야 할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지식에 알맞게 젖게 될 때 우리 삶의 모든 목적이 그의 위엄을 존경하고(revere) 두려워하고 예배하게 될 것이고, 그의 축복의 한 몫(share)을 향유하고(enjoy) 모든 어려움에서 그를 의지하게(recourse) 되고, 그의 솜씨(work)들의 장엄함(magnificence)을 인정하고 기리고(laud) 경축하게(celebrate) 되고, 여호와를, 말하자면(as it were), 모든 우리 행위의 유일한(sole soul) 목적으로 삼게 될 것입니다. Next, we must beware of superstition, by which our minds are turned aside from the true God, and carried to and fro after a multiplicity of gods. therefore, if we are contented with one God, let us call to mind what was formerly observed, that all fictitious gods are to be driven far away, and that the worship which he claims for himself is not to be mutilated. Not a particle of his glory is to be withheld: everything belonging to him must be reserved to him entire. 그 다음 우리는 미신을 조심해야(beware) 합니다. 그것으로 우리의 마음이 참 하나님에게서 돌아서게 되고 많은 신들을 이리저리 쫓아다니게 됩니다. 그런 까닭에(therefore) 우리가 한 하나님으로 만족한다면 앞에서 말했던 것을 회상하도록 합시다. 모든 가공의 신들은 멀리 쫓아버리고 하나님께서 그 자신을 위해서 요구하신 예배가 훼손되어서는(mutilate) 안 된다는 것을 말입니다. 그의 영광의 한 미립자(particle)도 공제돼서는(withhold) 안 됩니다. 그의 모든 것은 온전히 그의 것으로 확보되어야(reserve) 합니다. The words, “before me,” go to increase the indignity, God being provoked to jealousy whenever we substitute our fictions in his stead; just as an unfaithful wife stings her husband's heart more deeply when her adultery is committed openly before his eyes. “내 앞에(before me)”라는 말은 무례(indignity)가 늘어나지 못하게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우리의 가공물들을 그를 대신해 바꿀 때마다 질투를 일으키십니다. 마치 부정한 아내가 남편이 보는 데서 간음을 범할 때 그녀 남편의 심장을 아주 깊이 찌르는 것처럼 말입니다. Therefore, God having by his present power and grace declared that he had respect to the people whom he had chosen, now, in order to deter them from the wickedness of revolt, warns them that they cannot adopt strange gods without his being witness and spectator of the sacrilege. To the audacity of so doing is added the very great impiety of supposing that they can mock the eye of God with their evasions. 그러므로 그가 선택하신 백성을 그의 현존하는 권능과 은혜로 존중하신다고 선포하셨던 하나님께서 이제 반역(revolt rivoult)의 불의(wickedness wikidnis)를 제지하기 위해서 하나님 자신이 신성 모독(sacrilege)의 증인과 목격자가 되지 않고는 그들이 이상한 신들을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그들이 이상한 신들을 받아들이면 하나님 자신이 그 신성모독의 증인과 목격자가 되신다는 것)을 그들에게 경고하십니다. 그들은 그런 짓을 하는 뻔뻔함(audacity)에 더해 그들의 핑계(evasion)들로 하나님의 눈을 속일(mock) 수 있다고 상상하고 아주 큰 불신앙(impiety)을 더합니다. Far from this the Lord proclaims that everything which we design, plan, or execute, lies open to his sight. Our conscience must, therefore, keep aloof from the most distant thought of revolt, if we would have our worship approved by the Lord. The glory of his Godhead must be maintained entire and incorrupt, not merely by external profession, but as under his eye, which penetrates the inmost recesses of his heart. 이러기는커녕(Far from this) 여호와께서는 우리가 구상하고(design dizain) 설계하고 또는 실행하는(execute eksikjuːt) 모든 것을 그가 환히 보고 계시다고 선포하십니다(proclaim proukleim).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의 찬성을 받는 예배를 드리려고 한다면 우리의 양심은 그런 반역의 아주 먼 생각조차 계속 초연해야(aloof) 할 것입니다. 여호와의 신성(Godhead)의 영광은 외적인 신앙고백(profession)뿐만 아니라 마음의 가장 깊은 곳까지 꿰뚫으시는 여호와의 눈앞에서도 온전하고 청렴하게 유지되어야 할 것입니다. 칼빈의 이 가르침을 따르는 태도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고 하나님과 관계된 일이 아니면 어떤 일도 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우리의 지침으로 삼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의 목표로 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생각하고 사귀고 일하는 모든 것에서 하나님을 언제나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까지 이 계명을 온전히 지키신 분은 예수님 이외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기에 이러한 의무를 요구하시는가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는"네 하나님 여호와니라"(출 20:2)는 말씀에 담겨있습니다. 이 말씀은 히브리어로 야웨 엘로헤카(Yaweh Eloheka)라고 합니다. 우리에게 이 계명을 말씀하시는 분이 바로 참되신 하나님이시고 시작도 끝도 없으신 하나님이시기에 우리가 그에게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출 3:14)고 말씀하시는 스스로 존재하시는 유일한 신이십니다. 하나님을 존재하시게 한 존재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아무에게도 책임이 없으시고 스스로 충족하십니다. 이렇지 못한 존재는 진정한 신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무슨 신이라고 하는 열등한 존재들과 완전히 다르시기에 우리에게 최고의 예배를 요구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조상이 되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우르를 떠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것은 메소포타미아의 아무런 가치도 없는 잡다한 신들을 섬기기보다는 참되신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고 복 받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창 12:1-3 2019-01-09 나성열린문교회 박헌성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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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1-09
  • 칼빈의 결혼 - 박헌성 목사
    제네바는 사계절이 분명한 곳입니다. 중세를 갓 지난 16세기 신앙 때문에 촘촘하게 중층적으로 서로 얽히게 되는 칼빈 시대에 물 같이 담백한 관계 맺음은 어떤 것일까요. 휘어진 달리아 이파리 하나가 허공에 몸을 기댑니다. 허공도 따라서 휘어지면서 달리아 이파리를 살그머니 보듬어 안습니다. 그들 사이에 누구도 모르는 잔잔한 기쁨의 강물이 흐릅니다. 부부 사이의 주고받음이 달리아 이파리와 허공 같으면 어떨까 싶습니다. 조용한 요구에 조용한 응답이 있는 것, 어떤 부름에 낮은 목소리의 대답이 있는 것, 모자라는 것을 가만히 채워주는 것, 말하지 않아도 짐작하고 헤아리는 것, 거만하지 않고 정중한 것, 들으면서 기다리는 것, 마음이 굳어지지 않게 살피는 것 등이 관계를 담백하게 가꾸지 않을까 싶습니다. 관계는 말로써 이뤄지는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얼음이 녹으면 봄이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불완전하기에 세상이 풍요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칼빈은 정숙하고 자상하고 까다롭지 않고 검약하고 근면하고 그리고 자신의 건강 에 세심한 여인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친구들에게 부탁했습니다. 칼빈은 그런 여인과 결혼을 했습니다. 샤프(Philip Schaff)는 그의 ‘기독교 교회사’(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8권에서 칼빈의 유일한 아내 이델레트에 대한 글이 이어집니다. Idelette bore Calvin one son and possibly a few daughters, all of whom died in infancy. In response to the slander of Catholics who took this for a judgment upon them for being heretics, Calvin said he was content with his many sons in the faith. 이델레트는 칼빈에게 한 아들과 아마 몇 명의 딸을 낳아주었습니다. 그들 모두 유년기에 죽었습니다. 이것을 두고 이단이 된 것 때문에 그 아이들에게 심판이 내린 것이라는 가톨릭교도들의 비방에 답하여 칼빈은 믿음 안의 많은 아들들로 만족한다고 말했습니다. Idelette busied herself attending to Calvin in his many illnesses, faithfully visiting the sick and afflicted, and making her home a refuge for those who fled for their lives and their faith. 이델레트는 칼빈 자신의 많은 질병들에도 아프고 어려운 사람을 성실하게 심방하는 칼빈의 시중을 들고 그리고 삶과 신앙을 위해 도망친 사람들을 위해 그녀의 집을 피난소로 제공하는 등의 일로 분주했습니다. Though she survived the plague when it ravaged Geneva, Idelette died after a lengthy illness in 1549. Upon her deathbed she was patient, and her words, 전염병이 제네바에 창궐했을 때 살아남긴 했지만 이델레트는 오랜 질병으로 1549년 사망했습니다. 임종에 임해서도 인내심이 강한 그녀는 말했습니다. “O God of Abraham, and of all our fathers, in thee have the faithful trusted during so many past ages, and none of them have trusted in vain. I also will hope.” “아브라함과 우리 모든 조상의 하나님이시여. 수많은 과거 시대에도 신자들이 하나님을 신뢰했고 그들의 신뢰가 한 사람도 헛되지 않았습니다. 저도 소망합니다.” What Calvin wrote to Pierre Viret some days after her death will illustrate her character further. 그녀가 죽고 며칠 뒤 칼빈이 비레(Pierre Viret 1511~1571 스위스 개혁주의 신학자)에게 이델레트의 성품에 대해 아주 깊이 설명하는 편지를 썼습니다. I have been bereaved of the best companion of my life, of one who, had it been so ordered, would not only have been the willing sharer of my indigence, but even of my death. During her life she was the faithful helper of my ministry. 나는 내 생애 가장 훌륭한 동반자를 잃었습니다. 그렇게 정해진 도리였다면 그녀는 내 가난뿐만 아니라 내 죽음의 자발적인 공유자이기도 했습니다. 살아 있는 동안 그녀는 내 목회 사역의 신실한 조력자였습니다. From her I never experienced the slightest hindrance. She was never troublesome to me throughout the entire course of her illness; she was more anxious about her children than about herself. As I feared these private cares might annoy her to no purpose, I took occasion, on the third day before her death to mention that I would not fail in discharging my duty to her children. 그녀에게서 나는 한 번도 아주 사소한 방해도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아픈 전체 기간 내내 한 번도 나를 귀찮게 한 적이 없습니다. 그녀는 자신보다 그녀의 아이들을 더 염려했습니다. 이런 사사로운 걱정들이 그녀를 괴롭힐까봐 걱정을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을 때 그녀의 임종 사흘 전 내가 그녀의 자녀들에 대한 나의 의무를 저버리지 않겠노라고 언급할 기회를 잡았습니다. Taking up the matter immediately, she said, ‘I have already committed them to God.’ When I said that that was not to prevent me from caring for them, she replied, ‘I know you will not neglect what you know has been committed to God.’ Lately, also, when a certain woman insisted that she should talk with me regarding these matters, I, for the first time, heard her give the following brief answer: 그 문제를 즉시 잡고 그녀는 말했습니다. ‘저는 이미 그 애들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또한 나중에 이 문제에 대해 그녀가 나와 이야기를 나누었어야 한다고 (칼빈이 재혼할 경우를 생각하고) 어떤 여인이 주장할 때 그녀에게 다음의 짤막한 대답을 들려주라는 말을 처음으로 들었습니다. ‘Assuredly the principal thing is that they live a pious and holy life. My husband is not to be urged to instruct them in religious knowledge and in the fear of God. If they be pious, I am sure he will gladly be a father to them; but if not, they do not deserve that I should ask for aught in their behalf.’ This nobleness of mind will weigh more with me than a hundred recommendations. ‘확실히 제일 중요한 일은 그 아이들이 신앙심이 깊고 거룩한 생활을 사는 것입니다. 제 남편(칼빈)이 그 아이들에게 종교 지식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경외를 가르치려고 애쓰지 말아야 합니다. 그 아이들이 신앙심이 깊다면 그가(칼빈) 그 아이들에게 기꺼이 아버지가 되 주실 것이라는 것을 확신합니다. 그러나 만일 그렇지 않다면 제가 그 아이들을 위해 무언가를 요청해야 할 가치가 그들에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 고매한 마음은 내게는 100개의 권고보다 더 무게가 나갈 것입니다. -John Calvin, Letter to Pierre Viret, 1549 -존 칼빈, 비레(Pierre Viret)에게 보내는 편지, 1549 아내의 유언을 전하는 칼빈의 편지는 그녀가 얼마나 고결한 마음의 신앙을 가졌는지를 동료 개혁자에게 편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임종을 앞둔 아내의 마음은 자녀들의 신앙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 아이들이 신앙심이 깊고 거룩한 생활을 살지 않는다면 양아버지 칼빈이 그 아이들에게 종교 지식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경외를 가르치려고 애쓰지 말아야 한다고 죽음을 앞둔 자리에서조차 말할 정도로 자녀의 신앙과 삶을 칼빈의 아내 이델레트는 무엇보다 강조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우리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히 11:6). 이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엡 2:8-9). 진정한 성경적 믿음은 지적인 만족을 포함하게 됩니다. 이 점에 대해 칼빈은 <기독교강요>에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가 주장하는 것은 믿음의 대상은 그리스도이며 그 믿음은 경건한 무지가 아니라 올바른 지식에 근거를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지식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오고 믿음은 확신을 포함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믿음의 방패가 되어야 합니다. 한 남녀가 결혼에 이르는 과정을 그리스도인의 믿음에 비유해보면 이렇습니다. 구혼의 첫 단계는 믿음의 첫 번째 요소인 알게 되는 과정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남녀가 처음 만나게 되면 서로에 대해 알게 되고 상대가 좋은 결혼 생활에 필요한 것을 가지고 있는지의 여부를 배우게 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단계입니다. 이 단계에서 상대방이 신뢰할만한 사람인지를 판단하지 못하게 되면 나중에 문제가 생기게 될 것입니다. 구혼의 두 번째 단계는 믿음의 두 번째 요소인 마음의 감동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알게 되는 것을 넘어선 사랑에 빠지게 되는 단계입니다. 서로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된 남녀는 서로를 이해하고 좋아하고 사랑하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사랑에 빠진 두 남녀는 결혼하기로 약속하고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서로 사랑하고 신실하기를 약속합니다. 두 남녀는 그 약속이 변하지 않을 것을 확신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신부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몸과 마음과 뜻을 다해 사랑하는 신랑 되신 그리스도에게 칼빈의 아내 이델레트처럼 신앙과 삶으로 헌신해야 할 것입니다. 나성열린문교회 박헌성 목사 <기독교강요 영어수업> 중에서2018-0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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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9-28
  • 총회 무지개 이승희 총회장
    103회 총회가 개회하기까지 온갖 설 난무했지만 도우시는 하나님이 삼 일 동안에 이 회무를 마감하게 해 우리의 희망의 근거가 되는 그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 첫째 희망의 하나님둘째 도우시는 하나님셋째 약속하시는 하나님 저는 이 말씀 붙들고 103회 총회 한 회기여러분이 주신 총회장의 권위로 희망의 교단으로 이끌어 나가겠습니다 하늘의 무지개를 보면 나는 뛰는 가슴을 안고 하늘을 올려다보곤 했다. 나 어릴 적에 그러했다. 그리고 지금은 잘 못 보지만 그 생각만 해도 가슴이 설렌다. 하늘은 우리의 아버지 계신 곳. 기도하건대 총회를 위한 우리의 하루하루가 하나님을 위한 희망으로 이어지기를 꿈꾼다. 무지개(색동다리)는 하늘에 보이는 호(弧)를 이루는 색 띠다. 색 경계가 분명하지 않아 각 문화권마다 색의 개수가 다르게 인식되기도 한다. 대부분 지표로부터 하늘에 걸쳐서 나타나는 반원형 고리로 나타난다. 공기 중에 떠 있는 수많은 물방울에 햇빛이나 달빛이 닿아 물방울 안에서 굴절과 반사가 일어날 때, 물방울이 프리즘과 같은 작용을 하여 분산되어 나타나는 현상이다. 세계에서 가장 오랫동안 관측된 무지개는 2017년 11월 27일 중화민국 타이베이에서 관측된 것으로 9시간 내내 무지개가 떠올랐다. 103년 총회 역사에 무지개가 관측된 것은 2018년 9월 12일 반야월교회에서다. 제103회 총회가 대구 반야월교회에서 오후 2시 개회했다. 총회는 전체 1592명 총대 중 1447명 출석했다. 총회임원 선거에 앞서 제102회 선걱관리위원회 해괴한 관리 속에 호남의 새로운 지도자로 부상한 김용대 목사의 총회임원회 부서기 입후보 건과 관련해 강재식 목사와 한기승 목사가 발언에 나섰다. 즉 구개혁 측과의 합동 정신에 따라 총대 경력을 인정해 김용대 목사를 부서기 후보로 추대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제102회 다윗의 별 총회장 전계헌 목사는 단호하게 “발언하신 취지나 아픔도 이해하지만 선관위 결정에 따라 달라”며 선거관리위원회에 진행을 맡겼다. 곧이어 총회임원 선거가 시작됐다. 부총회장 이승희 목사가 총회장으로 추대됐다. 이어서 김종혁 목사가 서기 진용훈 목사가 회록서기 이대봉 장로가 회계로 추대됐다. 장로부총회장 강의창 장로가 단독 출마 당선됐다. 경청의 지도자 김종준 목사가 비상하는 독수리 민찬기 목사를 총 1431표 중 720표 대 461표로 누르고 제103회기 목사부총회장으로 당선됐다. 부서기에는 예상을 깨고 정창수 목사가 605표를 얻어 이형만 목사(484표)를 제쳤다. 제103회 총회가 9월 12일 수요일 저녁회무를 끝으로 파회했다. ‘변화와 희망으로 다음 세대를 응원하라’는 배너가 강단 오른쪽에 걸려있었다. 농어촌 목회자 자녀 장학금 수여식을 마친 이승희 목사의 어조는 잔잔했지만 깊은 울림이 있었다. 103년을 기다려 듣는 음성이었다. “어쩌면 오늘 이 예배가 총회를 파회하는 마지막 예배가 될 것입니다. 오늘 저녁 총회 모든 회무를 마치려고 합니다. (어색한 박수) 우리가 똑같은 시대 똑같은 공간을 살면서도 절망의 울음을 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희망을 노래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무엇이 절망과 희망을 나누는가. 절망은 희망을 꿈꿀 수 없을 때 생기고 희망은 절망을 이겨낼 수 있을 때 생겨납니다. 그렇다면 지금 103회 총회를 드리고 있는 우리는 절망을 노래하는가 아니면 희망을 노래하는가. 여러분은 희망을 노래하고 계십니까. 절망을 노래하고 계십니까. 우리에게 절망을 이길 수 있는 근거가 없는가. 절망이 희망을 꿈꿀 수 없을 때 생긴다고 하면 우리에게 절망을 이길 수 있는 근거가 없어 절망을 노래하는가. 우리가 믿는 성경이 말하기를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가르칩니다. 우리는 그 하나님을 믿습니다. (아멘) 그래서 제103회 총회는 희망을 꿈꾸고 있습니다. (아멘) 또한 자라는 다음 세대 자녀 세대를 희망으로 응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희망의 근거가 되는 하나님 그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십니까. 세 가지만 말씀을 드리고 오늘 총회를 마쳐야 되니까 설교를 5분내에 마치려고 합니다. 우리가 그 하나님을 근거로 해서 절망을 이기고 희망을 노래할 수 있는가. 첫째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희망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아멘) 103회 총회 주제 성구이기도한데 오늘 읽은 이사야서 44장 1절과 2절의 말씀을 같이 읽도록 합시다. 나의 종 야곱, 내가 택한 이스라엘아 이제 들으라 너를 만들고 너를 모태에서부터 지어 낸 너를 도와 줄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의 종 야곱, 내가 택한 여수룬아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께서 내가 너를 만들었고 내가 너를 지어냈다. 그러므로 내가 만들고 택한 너희들은 두려워하지 말라 말씀하십니다. (아멘) 아무리 우리가 절망스럽고 희망을 노래할 수 없는 상황일지라도 우리를 만드시고 택하신 그 하나님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우리가 두려워하지 말라 하신 것은 우리가 희망을 꿈꿀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멘) 그러므로 하나님은 어떤 하니님이신가. 우리가 희망을 갖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동시에 우리에게 희망을 주시는 희망의 하나님이십니다. (아멘) 그 하나님 때문에 우리는 희망을 노래할 수 있습니다. 지금 내 눈 앞에 보이는 것이 희망스럽지 않고 절망스러울지라도 우리의 손에 잡히는 것이 도저히 희망을 꿈꿀 수 없는 그런 절망의 것이라고 할지라도 우리가 생각하고 판단하는 모든 것들이 희망을 찾을 수 없는 절망의 상황일지라도 하나님이 두려워하지 말라 하시는 희망의 하나님이시라면 희망을 꿈꿀 수 있는 줄 믿습니다. (아멘) 103회 총회를 통해 우리 합동 측 교단이 희망을 노래할 수 있는 교단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우렁찬 아멘) 둘째 우리가 희망을 근거할 수 있는 근거로 우리가 믿는 그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신가. 그 하나님이 희망의 하나님이신 동시에 그 하나님은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이십니다. (힘찬 아멘) 오늘 읽은 3절 본문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같이 읽으십시다. 나는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며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며 나의 영을 네 자손에게, 나의 복을 네 후손에게 부어 주리니 그 하나님은 목마른 자에게 물을 주시는 하나님이라고 말씀하고 있고 마른 땅에 시내가 흐르게 하시는 하나님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마른 땅에 필요한 것이 물이요 또 목마른 자에게 필요한 것이 물이라면 하나님은 그 필요한 것들을 채워주시는 우리에게 도움을 주시는 하나님이시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으로 우리의 하나니이 되신다고 하면 우리는 어떤 상황에서도 어떤 궁핍 가운데서도 어떤 절망의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꿈꿀 수 있다고 믿습니다. (강한 아멘) 그러므로 도우시는 하나님을 인하여서 우리 모두가 소망을 가지며 꿈을 꿀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런 육신적인 필요만 채워주시는 게 아니라 내 영을 네 후손에게 나의 복을 네 자손에게 부어주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도우시는 그 하나님은 내 육신의 필요를 도우실뿐만 아니라 우리 영의 필요한 것까지도 도외주시겠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큰 아멘) 영육 간에 필요를 채워주시는 도우심의 하나님이 우리의 하나님이시라고 하면 여러분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는 희망을 노래할 수 있습니다. (아주 강한 아멘) 우리가 총회를 섬기면서 우리 앞에 여러 상황이 복잡하게 놓여있다 할지라도 희망을 포기하지 않기를 축복합니다. (천장이 떠나갈듯 아멘) 영과 육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그 하나님 우리 교단의 필요를 모두 채워주실 줄 믿습니다. (아주 강한 아멘) 103회 총회가 개회하기까지 온갖 설이 난무했지만 도우시는 그 하나님이 도우셨기에 우리는 오늘 삼 일 동안에 이 회무를 은혜롭게 마감하게 된 줄 믿습니다. (끊어질듯 아멘) 우리의 필요만 채워주는 게 아니고 무엇이라고 성경은 기록합니까. 나의 복을 네 후손에 나의 영을 네 자손에게 부어주겠다고 말씀합니다. 여러분 힘들게 목회를 하시지만 우리 자녀를 키우는 상황이 어렵지만 오늘 장학금을 수여한 우리 모든 자녀들이 목회자의 자녀로 태어나 갖고 싶은 것 갖지 못하고 해보고 싶은 것 하지 못하고 교회에서 이 눈치 저 눈치 보며 제한된 삶을 살았지만 하나님이 우리의 자손된 여러분에게 도움을 주신다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세찬 아멘) 여러분이 희망을 가질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셋째 우리가 믿는 하나님 그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이신가. 약속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오늘 4절의 말씀 103회 총회 주제 성구가 되는 말씀입니다. 같이 읽어보시죠. 그들이 풀 가운데에서 솟아나기를 시냇가의 버들 같이 할 것이라 여러분 이 말씀을 믿습니까. (아멘) 하나님의 자녀들을 향하여서 오늘 여기 있는 우리를 향하여서 ‘풀 가운데에서 솟아나기를 시냇가의 버들 같이 할 것이라’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시냇가의 버들 같이 하겠다고 약속하고 계십니다. (아멘) 풀 가운데에서 솟아나는 나무가 되도록 만드시겠다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십니다. 이 약속하시는 하나님이 우리 하나님 되심으로 우리는 지금의 상황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이 하나님의 약속 때문에 내일을 기대하며 내일을 소망하며 우리는 내일을 꿈꿀 수 있음을 믿습니다. (아멘) 저는 이 말씀 붙들고 103회 총회 한 회기 동안 여러분이 주신 총회장의 권위로 교단을 힘차게 희망의 교단으로 이끌어 나가겠습니다. (힘찬 바람의 아멘) 여러분 우리 모두가 함께 이 약속하시는 하나님 우리를 도우시는 하나님 그리고 희망의 하나님 이 하나님을 믿고 함께 힘을 모아 우리 교단이 104회기에 이르기까지 전례에 없는 변화를 이루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우리 교단을 새롭게 하고 이 교계에 다시 한 번 소망을 새롭게 하는 그런 교단으로 함께 힘을 모아 세워가기를 소원합니다. (아주 힘찬 아멘) 이 하나님을 위해 희망의 꿈을 꿉시다. 희망의 총회를 꿈을 꿉시다. (아멘) 하나님의 은혜로 인해 다음 세대를 응원하십시다. (아멘)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분명히 믿습니다. (아멘) 기도하겠습니다. 사랑하시는 아버지 저희들에게 다시 한 번 이 말씀을 기억하게 하시고 우리의 상황만 보고 탄식하며 절망하지 않고 우리가 믿는 이 하나님으로 인하여서 희망을 노래하며 희망을 꿈꾸는 저희들이 되게 해 주시옵소서. 103회 총회가 희망을 꿈꾸는 총회가 되게 하시고 희망의 총회가 되게 하시어 교회와 민족의 희망이 되는 귀한 교단 되게 해 주시옵소서. (큰 아멘)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유럽 고산(高山) 지대나 북아프리카 사막 언저리 목축민(牧畜民) 생활을 찍은 필름을 볼 때마다 목동(牧童) 한 사람과 몰이 개 두어 마리로 수백 마리 소 떼와 양 떼를 이끌고 이동하는 것이 신기했다. 이치는 간단했다. 맛있는 풀과 깨끗한 물을 좇아 움직이는 것이 소와 양의 본성(本性)이다. 이 본성이 이끄는 대로 놓아두고 무리에서 멀리 벗어나는 것만 막아주면 되니 일손이 많이 필요하지 않은 것이다. 본성과 반대 방향으로 몰아가려면 목동 열 명과 몰이 개 열 마리로도 힘이 부칠 것이다. 그래서 시편 23편의 노래가 기록되었을 것이다. 총회는 당초 9월 10일부터 14일까지 5일간 진행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제103회 총회는 9월 12일 수요일 저녁 9시 58분 파회했다. 이 말을 하면 싫어하는 사람이 더러 있는데 어쨌든 총신대 6회 총신연구원 72회 출신의 내가 생각하는 총회의 희망을 좌우하는 요소는 세 가지이다. 첫째 개혁주의 교단의 말씀에 근거한 신앙 활력(活力)이다. 둘째 총회장의 유능한 리더십이다. 셋째 총대의 판단력과 기백(氣魄)이다. 제103회 총회는 이 세 가지가 모두 충족된 총회였다. 이런 글이 있다. ‘슬픔은 바다와 같아서 때로는 잔잔하고 때로는 거세다. 슬픔을 이기는 길은 헤엄치는 것을 배우는 것뿐이다(Grief is like the ocean. Sometimes the water is calm, and sometimes it is overwhelming. All we can do is learn to swim).’ 제103회 총회 무지개 이승희 목사의 폐회 예배 메시지를 적용하면 이 말을 이렇게 바꿀 수도 있을 것이다. ‘절망은 바다와 같아서 때로는 잔잔하고 때로는 거세다. 절망을 이기는 길은 기도하는 것을 배우는 것뿐이다(Desperation is like the ocean. Sometimes the water is calm, and sometimes it is overwhelming. All we can do is learn to pray).’ 나는 이번 103회 총회장의 눈빛에서 항상 무지개를 느꼈다. 당신은 목사들 속에 빛없는 빛으로 묻혀 있었다. 그러나 당신은 오늘 총대들의 눈빛에서 무지개로 반짝인다. 총회 기간 내내 사흘 저녁이 온통 푸를 때마다 숲속 식물처럼 강단에서 반짝이는 당신은 제103회 총회를 변화시켰다. 2019년 9월 서울 꽃동산교회의 제104회 총회에서의 그런 저녁 우리는 2018년 9월 12일 대구 반야월교회의 제103회 총회의 변화에 대한 흐뭇한 그리움에 사로잡힐 수도 있을 것이다. 홍수 후 하나님께서 땅에 발을 디딘 노아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너희와 언약을 세우리니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 땅을 침몰할 홍수가 다시 있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내가 나와 너희와 및 너희와 함께하는 모든 생물 사이에 영세까지 세우는 언약의 증거는 이것이라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의 세상과의 언약의 증거니라 내가 구름으로 땅을 덮을 때에 무지개가 구름 속에 나타나면 내가 나와 너희와 및 혈기 있는 모든 생물 사이의 내 언약을 기억하리니 다시는 물이 모든 혈기 있는 자를 멸하는 홍수가 되지 아니할찌라 무지개가 구름 사이에 있으리니 내가 보고 나 하나님과 땅의 무릇 혈기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된 영원한 언약을 기억하리라 하나님이 노아에게 또 이르시되 내가 나와 땅에 있는 모든 생물 사이에 세운 언약의 증거가 이것이라 하셨더라 창 9:11-17 무지개는 성경을 믿고 전하는 우리에게 언약의 다리이자 문이다. 그 너머에서 하나님께서 무한히 손짓하신다. 그래서 무지개는 인간의 가슴에 설렘을 안겨주고 믿는 우리에게 소망을 보여준다. 설렘과 소망이 여전한 우리는 그 순간 주일학교 어린이로 거듭 태어난다. 그런데 문득 우리는 이렇게 목사와 장로가 되었다. 제103회 부총회장에 선출된 꽃동산 교회 김종준 목사가 사랑하는 어린이를 보라. 그 눈에 빛나는 먼 무지개를 보라. 불현듯 뛰기 시작하는 심장에 손을 얹고. 2018-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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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9-18
  • 총회장 취임사 - 이승희목사(반야월교회)
    칼빈 탄생 509주년 개혁과 변화 새 물결 흐르게 할 것 제103회 총회장 이승희목사 존경하는 총대 여러분, 그리고 만 이천 교회, 삼백만 성도 여러분! 저는 오늘, 대한예수교 장로회 합동교단의, 103회 총회장으로 이 자리에 섰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교단 앞에서, 역사의 책임감을 느낍니다. 급변하는 역사는, 교회의 환경을 점점 더 비관적으로 만들고, 사회적 이슈는, 반(反)기독교적 정서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새로운 시대의 준비에 무관심하며, 우리 스스로, 자정(自淨)하는 일에도 실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신뢰를 잃어가고, 미래를 빼앗기고 있습니다. 총신사태와 끝 모르는 은급재단 문제, 수많은 분쟁과 송사들은, 사람들의 마음을 총회로부터 점점 더 멀어지게 만들고 있습니다. 예배와 성찬으로 개회하는 총회 역시, 성(聖) 총회라고 부르기에, 우리 스스로가 민망스럽지 않습니까? 그래서, 총회는 변해야 합니다. 우리가 새로워져야 합니다. 목사와 장로인 우리를 향해, 세상보다 조금도 나은 것이 없다는 비난의 소리를 이제는 멈추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교회가 살고, 빼앗긴 다음세대를 되찾을 수 있습니다. 존경하는 총대 여러분, 지난 102회 총회에서, 여러분은 저에게 전례 없는 전폭적인 신뢰를 보내 주셨습니다. 그것은, 총회의 변화에 대한, 여러분의 갈망이며 응원이라는 것을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103회 총회는 이제 그 변화에 도전을 선포합니다. 불가능을 생각하지 마십시오. 우리에겐 전능하신 하나님이 살아 계십니다. 길이 없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저와 여러분이 함께 걸어가면 그곳이 길이 될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거짓이 아니고, 우리의 기도가 가짜가 아니라면 총회는 반드시 새롭게 변화될 줄 믿습니다. 하지만 변화는, 아침이 오듯 그냥 찾아오지 않습니다. 누군가 변화의 문빗장을 열어야 합니다. 제가 그 일에 앞장서겠습니다. 쉽지 않을 것입니다. 시행착오도 있고, 조직적인 저항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반드시 총회는 변화해야 합니다. 만 이천 교회와, 삼백만 성도들이 총회를 새롭게 하라고 우리를 지금 이 자리에 보낸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고 기대하며 기도하고 있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총대 여러분, 여러분은 103회 총회에 무엇을 원하십니까? 저는 그 목소리를 듣기위해, 전국을 권역별로 소통투어를 가졌습니다. 총대들의 요구는 분명했습니다. 그것은 회무진행의 변화였습니다. 좀 더 현실적이고 생산적인 회무를 진행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소수의 발언 독점을 제한하고, 여론의 왜곡을 막아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실천하겠습니다. 총대 여러분께서도 협력해 주실 줄 믿습니다. 또한, 총회를 공의로 이끌겠습니다. 소위 말하는 작전총회를 차단하겠습니다. 우리 총회가 특정 정치세력에 의해 끌려가거나 정치적 의도로 사전에 기획되는 총회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총대 여러분 또한, 세력에 편승하지 말고 신앙양심에 따라 하나님의 의와 총회의 공의를 세우는 거룩한 총회를 만들어 주십시오. 정치는 생각들끼리의 다툼이지 사람과의 싸움이 아닙니다. 절제된 감정으로, 타협하고 양보하며, 공통점을 찾을 때, 건강한 정치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이것이 없으면 정치는 무력해지거나 타락하게 됩니다. 103회 총회를 건강한 정치의 장(場)으로 만들어 주십시오. 그래야 우리 모두가 살고, 교회와 총회를 살릴 수 있습니다. 저는, 총회장의 권한을 충분히 활용하겠습니다. 그러나 권한(權限)을 권력(權力)으로 남용하지는 않겠습니다. 불법과 반칙을 막아내고, 질서와 원칙을 세우는데 사용하겠습니다. 동시에, 관용이 필요할 때는 과감하게 그 권한을 사랑으로 사용하겠습니다. 103회에서는 여러분이 세운 총회장과 임원들을 흔들지 마십시오. 흔든다고 흔들리지도 않을 뿐더러, 그것은 옳지 못한 일이며 청산되어야 할 아주 나쁜 구습입니다. 그런 일에 대하여는 오히려 총대 여러분들이 꾸짖어 주셔서 총회의 질서를 세우며, 임원들이 총회의 권위로 일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십시오. 언론에도 부탁드립니다. 하나님의 선한 나팔이 되어 주십시오. 개혁이란 이름을 생산적 방향으로 사용해 주십시오. 자칫 오용되면 우리 모두를 무너지게 할 수 있습니다. 올바른 방향을 제시하고, 역사에 남을 교훈을 외치며, 그리스도와 그 몸인 교회에 아름다운 덕을 전달해 주시기 바랍니다. 총신문제는, 현재 임시이사가 선임이 되었습니다. 참으로 가슴 아픈, 교단의 부끄러움입니다. 그러나 이 또한 문제를 풀어가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총신사태는, 어른들이 학생들에게 못할 짓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총장과 이사들의 반 총회적인 행동은, 도저히 용납될 수 없고, 어떤 변명도 있을 수 없습니다. 지금이라도 선한 결단을 한다면 저는 더 이상 이 문제를 지속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또한 총신에 대해서만큼은 어떤 정치적 계산도, 야욕도 버려야 합니다. 총신의 혼란에는, 욕심을 가진 사람들의 불신조장과 편 가르기도 한몫을 했습니다. 총회장인 저에 대해서도 도를 넘는 음해를 일삼았습니다. 이제는, 그 모든 불순함 들을 중단하십시오. 모두가 한 마음으로, 속히 학교를 정상화 하는데 전력합시다. 총회 임원회가 앞장서겠습니다. 총신 정상화를 위해전폭적인 지원을 실행하겠습니다. 은급재단 문제도 이제는 분명한 결론을 내려야 합니다. 더 이상 현란한 주장들이나, 현실성 없는 계산들은 멈추어 주십시오. 과거보다는 미래를 생각해야, 더 이상의 것들을 잃지 않습니다. 이 진통을 앓은 지 벌써 17년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한걸음도 나아가지 못한 채 오히려 더 복잡한 상황들만 만들고 있습니다. 아픔도 있고, 분노도 있겠지만 이제는 여기서 미래적 결단을 내립시다. 과감한 기구 정비와 제도 혁신이 필요합니다. 너무 많은 위원회가 있습니다. 총회는 상비부(常備部)가 중심조직이 되어야 합니다. 상비부는 허수아비로 만들어버리고 해마다 논공행상(論功行賞)식위원회를 양산하는 것은, 너무도 잘못된 총회의 기형적(畸形的)현상입니다. 이로 인한 불필요한 재정의 출혈도 심각합니다. 또한 소수의 사람들과 특정세력이, 총회의 여러 직책들을 독식(獨食)하는 것도 잘못된 폐단이며, 하루빨리 고쳐야 할 제도개선입니다. 총대가 1700여명입니다. 다른 사람도 일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고, 양보도 해야 합니다. 그 사람이 그 사람인 총회가 되었기에 우리들이 변화와 개혁을 열망하고 있는 것 아닙니까? 금 번 총회에서 과감하게 결심하여 기구와 제도의 혁신을 이룹시다. 그래야 총회가 발전하고, 건강해 집니다. 사랑하는 총대 여러분, 저는 이 한 주간의 회무를 마치면, 곧 희망행보(希望行步)를 시작할 것입니다. 총회본부는3S운동(SMILE, SPEED, SPIRIT)을 전개하겠습니다. 이 운동은, 모든 행정을, 친절하게, 빠르게, 신앙으로 섬겨가자는 운동입니다. 또한 임원들과 직원들 전체가 신앙수련회로 부터 영적무장(靈的武裝)을 하고 103회기 업무를 시작할 것입니다. 일 년 뒤, 이 자리를 떠날 때에는, 퇴장하는 뒷모습이 아름다운 총회장이 되겠습니다. 돌아가는 교회와 가정에서 환영받는 목사와 가장이 되겠습니다. 함께하실 하나님을 찬양하며 기도의 동역자인 저희 교회 성도들에게 감사하고, 저와 함께 희망의 총회를 만들어 주실 총대 여러분께 감사를 드립니다. 꼭 기억합시다. Be the Change! (*) 2018-09-12
    • G.MISSION
    • G.SERMON
    2018-09-12
  • 칼빈은 누구인가 - 박헌성 목사
    칼빈이 개혁주의로 세상을 바꾼 것은 사상도 행동도 아냐 그건 정의로우신 하나님의 말씀 내가 처음 다닌 학교는 칠판도 없고 숙제도 없고 벌도 없는 주일학교였습니다. 교회와 집 사이는 후다닥 걸어서 가면 단 오 분 거리 비바람이 불고 눈보라가 쳐도 걱정이 없는 늘 포근하고 선물도 심심찮게 주는 학교였습니다. 나는 내가 살아가면서 마음 깊이 새겨 두어야 할 귀한 것들을 이 주일학교에서 배웠습니다. 주일 저녁 텅 빈 교회 마당 구석에 한 아이가 쪼그리고 앉아 있습니다. 산 위에서 보면 교회가 나뭇가지에 달린 하얀 박꽃입니다. 새장처럼 얽어 놓은 창문에 참새 같은 아이들이 쏙쏙 얼굴을 내밉니다. 분반 공부 끝나면 오늘 외운 성경 한 절 오늘 배운 찬송 한 곡 오늘 받은 과자 한 봉지로 불룩한 마음 교회 창밖을 보면 벚나무에 새 한 마리가 앉아있습니다. 주일학교엔 숙제도 시험도 없습니다. 고함 한번 치지 않는데 회초리 한번 들지 않는데 하나님의 말씀으로 온갖 꽃나무 어린 싹들 찬송하며 자랍니다. 그리고 때 되면 열매 맺어 서로 나누며 믿음의 제 몫을 합니다. 나는 교인 누구나 목사님의 말을 듣는 게 좋아서 목사가 되었고 새벽기도가 좋아서 목사가 되었습니다. 목사님 그 한 마디가 좋아서 가진 것 다 주어도 아깝지가 않습니다. 목사님 그 한 마디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습니다. 목사님 그 한 마디가 좋아서 평생을 웃습니다. 믿음 향기가 가득한 교회에서. 인터넷 시대 누구나 편집할 수 있고 5,693,164 영어 항목의 무료 백과사전 Wikipedia(하와이어로 빠른‘quick’을 의미하는 ‘wiki’와 백과사전을 의미하는 ‘encyclopedia’가 합쳐진 이름)는 칼빈을 이렇게 서술했습니다. John Calvin(French: Jean Calvin; born Jehan Cauvin; 10 July 1509 - 27 May 1564) was a French theologian, pastor and reformer in Geneva during the Protestant Reformation. He was a principal figure in the development of the system of Christian theology later called Calvinism, aspects of which include the doctrines of predestination and of the absolute sovereignty of God in salvation of the human soul from death and eternal damnation, in which doctrines Calvin was influenced by and elaborated upon the Augustinian and other Christian traditions. Various Congregational, Reformed and Presbyterian churches, which look to Calvin as the chief expositor of their beliefs, have spread throughout the world. 칼빈(John Calvin: 프랑스 이름 쟝 칼뱅 Jean Calvin; 兒名 제앙 코뱅 Jehan Cauvin; 1509년 7월 10일 - 1564년 5월 27일)은 개신교 종교개혁(Protestant Reformation) 기간 제네바의 프랑스인 신학자(theologian) 목회자(pastor) 개혁가(reformer)였습니다. 그는 나중 칼빈주의(Calvinism)라고 불리는 기독교 신학의 체계를 발전시킨 주요 인물이 되었습니다. 칼빈주의는 죽음과 영원한 저주로부터 인간 영혼의 구원에 하나님의 예정(predestination)과 절대(absolute ǽbsəlùːt) 주권(sovereignty sάvərinti) 교리들을 포함시키는 견해(aspect ǽspekt])들입니다. 그 견해들은 칼빈이 아우구스티누스주의(Augustinian)와 다른 기독교 전통들의 영향을 받고 잘 다듬은 것들입니다. 세계로 퍼져나간 회중교회 개혁교회 장로교회 등의 여러 교파가 칼빈을 그들 신조(beliefs)의 해설자로 생각합니다. Calvin was a tireless polemic and apologetic writer who generated much controversy. He also exchanged cordial and supportive letters with many reformers, including Philipp Melanchthon and Heinrich Bullinger. In addition to his seminal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Calvin wrote commentaries on most books of the Bible, confessional documents, and various other theological treatises. 칼빈은 많은 논쟁을 일으킨 지칠 줄 모르는 논증과 변증 저술가(polemic and apologetic writer)였습니다. 그는 조직신학자 멜란히톤(Philipp Melanchthon 개신교 최초의 독일 루터교 조직신학자)과 불링어(Heinrich Bullinger 16세기 스위스 종교개혁가)를 포함해 많은 종교개혁가들과 서신들도 주고받았습니다. 칼빈은 독창적인 ‘기독교강요’ 외에도 거의 대부분의 성경 주석들과 신앙고백서들 및 다양한 신학 논문들도 저술했습니다. Originally trained as a humanist lawyer, he broke from the Roman Catholic Church around 1530. After religious tensions erupted in widespread deadly violence against Protestant Christians in France, Calvin fled to Basel, Switzerland, where in 1536 he published the first edition of the Institutes. In that same year, Calvin was recruited by Frenchman William Farel to join the Reformation in Geneva, where he regularly preached sermons throughout the week; but the governing council of the city resisted the implementation of their ideas, and both men were expelled. At the invitation of Martin Bucer, Calvin proceeded to Strasbourg, where he became the minister of a church of French refugees. He continued to support the reform movement in Geneva, and in 1541 he was invited back to lead the church of the city. 원래 법률가로 훈련받은 그는 1530년 경 로마 가톨릭 교회와 결별했습니다. 프랑스에서 개신교 그리스도인들을 반대하는 대폭적인 격렬한 폭력 사태로 종교적 긴장이 촉발된 후 칼빈은 스위스 바젤로 피신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27살 되는) 1536년 기독교강요 초판을 발행했습니다. 같은 해 칼빈은 제네바 종교개혁에 동참하라는 프랑스인 파렐(William Farel)의 권유를 받았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빠지지 않고 주일 내내 설교를 했습니다. 그러나 제네바 시의회는 그들 사상이 시행(implementation)되는 것을 거부했고 두 사람을 추방했습니다. 부서(Martin Bucer 16세기 독일 슈트라스부르크의 종교개혁가)의 초청으로 칼빈은 슈트라스부르크(Strasbourg)로 내려갔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프랑스 피난민 교회의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제네바 개혁 운동을 계속 지원했습니다. 그리고 1541년 제네바 교회로 돌아와 지도해 달라는 청빙을 받았습니다. Following his return, Calvin introduced new forms of church government and liturgy, despite opposition from several powerful families in the city who tried to curb his authority. During this period, Michael Servetus, a Spaniard regarded by both Roman Catholics and Protestants as having a heretical view of the Trinity, arrived in Geneva. He was denounced by Calvin and burned at the stake for heresy by the city council. Following an influx of supportive refugees and new elections to the city council, Calvin's opponents were forced out. Calvin spent his final years promoting the Reformation both in Geneva and throughout Europe. 돌아온 뒤 칼빈은 그의 권위를 꺾으려는 그 도시의 몇몇 세도 가문들(several powerful families)의 반대를 무릅쓰고 새로운 형식의 교회 정치(church government)와 예배 모범(liturgy)을 소개했습니다. 이 시기에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 양쪽 다 이단 사상이라고 생각하는 삼위일체(the Trinity)론을 지닌 스페인 사람(Spaniard spǽnjǝrd) 세르베투스(Michael Servetus)가 제네바에 왔습니다. 그는 칼빈의 탄핵을 받고(denounced by Calvin) 시의회의 이단(heresy hérǝsi) 판결로 화형을 당했습니다(burned at the stake). 우호적인 피난민들의 유입(influx ínflʌ̀ks)과 시의회의 새 선거들이 이어져 칼빈의 반대자들이 밀려나게 되었습니다. 칼빈은 종교개혁(the Reformation rèfǝrméiʃən)제네바와 유럽 전역에 촉진시키면서 만년(final years 1564년 5월 27일 소천)을 보냈습니다. 돈키호테가 그의 충실한 시종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여보게, 내 친구 산초. 세상을 바꾸는 것은 유토피아도 광기의 행동도 아니야. 그건 정의라네.” 돈키호테처럼 저도 제 후배 목사와 신학생들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여보게 내 동료와 후배들. 칼빈이 개혁주의로 세상을 바꾼 것은 사상도 행동도 아니네. 그건 정의로우신 하나님의 말씀(the Word of Righteous God)이라네.” 박헌성 목사(나성열린문교회) 2018-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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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0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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