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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더굳뉴스 제27호 LA의 칼빈 박·헌·성
    예수 믿는 사람은 단순해야 하고 하나님 잘 섬겨야 '우리 교회가 한인사회의 랜드마크가 되자'는 큰 소명을 받아 IRUS(The International Reformed University & Seminary)를 통해 미국과 한국 더 나아가 세계 개혁주의 장로교의 랜드마크로 자리매김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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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5-11
  • 더굳뉴스 제26호 나다니엘 최우식 목사
    청년 때 가정이 어려워지는 바람에 세상 밑바닥을 보면서 하나님을 찾게 돼이영수 목사 시절 총회 회록서기 김원범 목사 영향 해남에서 최우식 목사 혼자만 주류 최우식 목사는 주님의 제자 나다나엘처럼 속임이 없는 진실하고 좋은 목회자 꽃이 피어 세상이 한층 밝다. 온갖 꽃이 피어 하나님 지으신 세계가 화단 같다. 어떤 꽃은 일찍 피고, 또 어떤 꽃은 늦게 핀다. 그러나 각각의 그 꽃핌이 화단을 채색하고, 화단의 봄을 완성한다. 교회 화단에 목련이 피었다. 그 앞에 서본다. 은혜로운 주일 예배에 참여해 사도신경을 고백하듯 서보는 것이다. 만개한 목련 한 송이를 잠깐 바라보다 죽어도 헛것을 산 것은 아니다. 가슴 밑바닥으로부터, 하나님을 모시는 믿음이 있고 추억과 미래라는 느낌 사이 어느 지점에 머물러 있었다는 그 이유 하나로도 너무 가뿐한 삶이다. 젊고 예쁜 얼굴이 웃으며 지나가고 있다. 나를 보고 웃는 것은 아니다. 도착하자마자 사실 그 순간부터 목련처럼 우리도 떠나고 있기 때문이다. 하얀 꽃잎 뒤에 아쉬운 얼굴을 감추고 주일 아침 우리가 예배당 가는 사이 가자! 말하고는 떠나고 있다. 주님 만나 눈뜬 맹인의 지팡이 더듬어 잡은 듯 꽃들이 왔다 가고 있다. 아이들 주먹만 한 꽃숭어리에 꽃잎들이 각각 살아서 재잘대는 듯하다. 모란은 안타깝게도 오래가지 않는다. 가자! 말하고는 떠나는 듯 허무하다. 젊음의 모습 같고 나아가 인생의 모습 같다. 어디로 간단 말인가. 기도는 하늘의 소리를 듣는 것이다. 저기 홀로 서서 제자리 지키는 목련처럼. 기도는 땅의 소리를 듣는 것이다. 저기 흙 속에 뿌리 내리고 꽃 피어내는 목련처럼. 기도는 땅에다 이마를 겸허히 묻고 숨을 죽인 바위들처럼 고개 숙이는 것이다. 기도는 간절한 발걸음으로 한 번도 가보지 못한 깊고 편안한 곳으로 걸어가는 것이다. 목련꽃처럼. 그래서 헨리 데이비드 소로는 "꽃의 매력 가운데 하나는 그에게 있는 아름다운 침묵이다"고 말했는지 모른다. 그래서 기도는 다만 주님의 침묵에 귀 기울여 스스로 고요해지는 것이다. 그리하면 하나님이 지으신 깊고 편안한 꽃나무의 침묵에 도달할 것이다. 성경은 말씀한다. 이튿날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이르시되 나를 좇으라 하시니 빌립은 안드레와 베드로와 한 동네 벳새다 사람이라 빌립이 나다나엘을 찾아 이르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니라 나다나엘이 가로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빌립이 가로되 와 보라 하니라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가라사대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나다나엘이 가로되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또 가라사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 요한복음 1:43-51 예수께서 무화과나무 아래서 빌립이 그에게 주님 만나러 가자고 말하기 전에 나다나엘을 보셨다. 무화과나무는 뽕나무과에 속하는 나무이다. 봄에서 여름에 걸친 시기에 엷은 흥색의 꽃이. 무화과나무의 열매인 무화과는 꽃이 피지 않는 과실이라고 해서 무화과라고 한다. 실제로 꽃은 과실 내에서 피며 외부로 나타나지 않을 뿐이다. 열매는 씨방이 큰 꽃받침 속에 형성되고 살이 많은 은화과(隱花果)이며 가을에 검은 자색으로 익는다. 무화과를 따보면 열매처럼 생겼지만 사실 속의 먹는 부분이 꽃이다. 즉 우리의 눈에 보이는 열매 껍질은 사실 꽃받침이고 내부의 붉은 융털들이 꽃이다 AD 27년경 예수님의 공생애 개시 얼마 후에 제자로 부름 받아 AD 1세기 중반 이후까지 활동한 인물이다. 당시 로마의 식민 통치를 받고 있던 유대인들 사이에는 여러 형태의 종말론적인 메시야 대망 사상이 널리 유행하고 있었다. 대부분의 유대인들이 기대한 메시야는 정치적 메시야로서 이스라엘을 세계 최강국으로 만들어 행복을 누리게 할 자를 기다렸다. 그러나 나다니엘과 같은 일부 경건한 사람들은 구약 성경에서 예언한 대로 자기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하시고 장차는 천국으로 인도하실 메시야를 기다렸다.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이런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예수께서 갈릴리로 나가려 하시다가 빌립을 만나 “나를 좇으라” 말씀하셨다. 빌립은 예수님의 최초의 제자 중 한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빌립은 나다나엘을 만나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라고 증거하며 전도했다. 나다나엘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말했다. 빌립이 “와 보라” 말했다.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보시고 그를 가리켜 말씀하셨다.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나다나엘이 놀라 예수님을 바라보며 말했다. “어떻게 나를 아시나이까.”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빌립이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 있을 때에 보았노라.” 그 날까지 나다나엘은 예수님을 한 번도 만나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나다나엘이 예수님 앞으로 나오는 것을 보시고, 예수님은 그의 이름뿐만 아니라 그가 어떤 사람이며, 예수님께 오기 전에 무슨 일을 하고 있었는가 하는 것까지 다 알고 계셨다. 나다나엘이 더욱 놀라 베드로처럼 외쳤다.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당신은 이스라엘의 왕이십니다.” 간사(奸詐)하다는 것은 나쁜 꾀가 있어 거짓으로 남의 비위를 맞추는 태도를 말한다.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다 말씀하셨다. 나다나엘에게 간사한 것이 없다는 예수님 말씀은 그가 참 이스라엘 사람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구약시대 때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을 받았다. 그러나 구약 역사를 보면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우상숭배를 하며 온갖 죄를 저질렀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우리는 이스라엘 사람이다.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하는 자만과 교만에 빠져 있었다. 말하자면 껍데기만 하나님의 백성인 거짓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 땅에 가득했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눈앞에 나타난 나다나엘을 보시자마자 예수님은 그가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고 하는 사실을 단번에 알아보셨다. 참 이스라엘 사람은 간사함이 없어야 한다는 말은 진실한 하나님의 백성은 거짓이나 위선, 또는 잔꾀를 부리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뜻이다. 간사함이 없는 인격, 이것은 참 이스라엘 사람, 즉 참된 하나님 백성의 특징이다. 그래서 시편 32:2에서 “마음에 간사가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치 않는 자가 복이 있도다”라고 말씀했다. 3월 13일 새벽 5시 예손교회 1층 40여명 교인들 방석에 앉아 조용히 기도하고 있었다. 교회 이름 예손은 마태복음 17장 7-8절 말씀 “예수께서 나아와 저희에게 손을 대시며 가라사대 일어나라 두려워 말라 하신대 제자들이 눈을 들고 보매 오직 예수 외에는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더라”에서 따라 지었다. 신앙고백, 찬송가 279장 인애하신 구세주여, 시편 25편 교독을 했다. 시 25:1 여호와여 나의 영혼이 주를 우러러 보나이다 2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의지하였사오니 나로 부끄럽지 않게 하시고 나의 원수로 나를 이기어 개가를 부르지 못하게 하소서... 21 내가 주를 바라오니 성실과 정직으로 나를 보호하소서 22 하나님이여 이스라엘을 그 모든 환난에서 구속하소서 예손교회 설립 23주년 되는 새벽 최우식 목사(제98회 총회 회록서기)의 설교 음성은 높지도 낮지도 않았다. “다윗의 영혼이 하나님을 진정으로 우러러보고 의지해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게 합니다. 그는 주의 진리로 나를 지도하시고 교훈하소서 간구했습니다. 우리도 그처럼 어쩔 수 없는 어려운 상황 속에서 주님을 우러러볼 때 주의 진리의 지도와 가르침을 간구하게 됩니다. 그럴 때 주께서 성실과 정직으로 우리를 보호해 주십니다. 우리의 삶도 주님처럼 성실하고 정직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의 이스라엘 백성된 우리를 모든 환난에서 구속해 주실 것입니다. 어디에서도 우리의 길이 열릴 것입니다. 다윗처럼 주를 우러러볼 때 주의 은혜가 함께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기도합시다. 23년 동안 우리 교회 지켜 주신 은혜 감사드립니다. 최명률 장로, 박정희 권사 예물을 드립니다. 이경환 장로, 이한순 권사, 양성표 집사 헌물을 바칩니다. 그들의 기도와 소원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주십시오. 그리고 새벽에 무릎 꿇은 성도들 축복하여주십시오. 23년 우리 교회 지켜주신 주님 우리 교회 물댄 동산 같게 해 주십시오. 주님 오실 때까지 복된 교회로 인도해 주십시오. 이 나라도 주님께서 안돈시켜주십시오. 평양에도 길을 내주십시오. 우리 모두가 십자가의 길을 찾게 해 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주기도문 후 불이 꺼지고 찬송 반주 가운데 교인들은 개인 기도를 했다. 새벽기도회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에 차 안에서 최우식 목사와 이야기를 나누었다. -어떻게 신학을 하게 됐습니까. “청년 때 가정이 아주 망가지고 어려움이 생겼어요. 그 바람에 세상의 밑바닥을 보면서 그때부터 하나님을 찾게 되었죠. 군대 가기 전이죠. 그렇게 해서 신학을 하게 되는 길이 열렸 습니다. 신학교는 군대 가기 전에는 지금의 광신대를 다녔어요. 군대 다녀와서는 학교가 나누어졌기 때문에 최기채 목사 측 광주신학교를 나왔죠. 총신은 79회입니다. 제가 86년에 강도사가 됐어요.” -예손교회는 1993년 3월 14일 설립됐는데 23년 됐는데 7년 동안 어디 계셨습니까. “78년 1월 1일부터 전도사 생활 시작을 했어요. 저 해남 시골교회에 있었는데 그 때 주류와 비주류가 갈라지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른바 목포는 아주 비주류 판이었습니다. 목포 시온교회에 김원범 목사가 계셨습니다. 그분은 이영수 목사 시절 1979년 제64회 총회부터 제66회 총회까지 회록서기를 하셨어요. 지금도 살아 계십니다. 그분이 회록서기를 하면서 주류 측에 딱 서서 주도했습니다. 해남에 30교회이상 됐을 겁니다. 그런데 그분 영향으로 나 혼자만 주류 측이었습니다. 버티고 버티다가 무안 일로 초곡교회에 있게 되었습니다. 거기서 전도사를 하다가 목포대학 건너편 청계중앙교회로 부임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큰 교회가 되었죠.” -그런데 어떻게 이 교회로 오시게 되었습니까. “거기서 목회를 하는데 지금 이 작은 교회가 분쟁으로 새로 분립이 되었습니다. 몇 명이 거기서 뛰쳐나왔어요. 나온 사람들이 다락방처럼 어느 처소에서 모여 예배를 드렸습니다. 나온 교회가 비주류 소속이었는데 나온 분들이 주류에 속하기를 원했어요. 나올 때 아예 그러기로 작정을 했던 모양입니다. 교인 몇 명이 백영규 목사를 찾아가 교역자를 보내달라고 청원을 했습니다. 그때는 백영규 목사와 양근실 목사가 주도적으로 일을 하고 아주 힘이 황소처럼 셀 때였습니다. 그래서 양근실 목사가 저보고 가 볼 의사가 없냐고 물었습니다.” -기성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계신데 어떻게 개척교회로 오시게 되었습니까. “갈 이유가 없죠. 청계중앙교회에서 목회를 잘 하고 있으니까요. 아주 평탄한 교회인데요. 목포대학교도 바로 건너편에 있는 목회 환경이 아주 좋은 곳이죠. 그런데 목회자는 이상하더라고요. 아무리 어려운 교회에서 청빙이 와도 고민을 하게 되는 겁니다. 그때 나이가 40이나 41살이었을 겁니다. 그때 그냥 과감하게 개척을 해보겠다는 생각이 든 겁니다. 그래서 사임을 하고 나와 개척을 하게 된 겁니다. 오늘까지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건축을 언제 하게 되었습니까. “막 개척해 나와 1993년 3월 14일 첫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5월에 이곳으로 오게 되고 몇 개월 지나서 지금 있는 땅을 사게 됩니다.” -교인들이 꽤 됐던 모양입니다. “(생각에 잠긴 웃음)땅은 빚으로 샀습니다. 그래서 부지 매입이 가능했죠. 사실 교회 있는 곳이 매립지입니다. 원래는 바다였죠. 그 위에 목포 쓰레기를 다 부었죠. 지하를 파보면 온통 쓰레기입니다. 황무지와 같은 땅이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땅을 사고 1차 건물을 지었습니다. 지하 40평 바닥 100평이었습니다. 그 뒤 2000년도에 지금의 완전한 건물로 증축하게 되었습니다. 2단계로 건축이 이루어졌습니다. 옛날에는 지하실이 본당이었습니다. 오늘 새벽예배 드린 곳 왼편에 사택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은행이 교회 대출을 해주는 제도가 생겼습니다. 아마 목포에서 우리 교회가 처음이었을 겁니다. 그 돈으로 교회 건축을 마무리하게 된 것입니다. 성도들이 헌신적으로 헌금을 해 대출을 거의 다 갚았습니다.” 3월 13일 오전 11시 예손교회 설립 23주년 기념예배 사회 최우식 목사 본문 마가복음 10:35-45찬양대의 마무리는 좋~다였다. 교회 23주년이면서 최우식 목사의 재직 23주년이기도 한 날이다. 그의 높지도 낮지도 않은 중간 어조의 말씀 증거가 시작됐다. 오늘은 특별한 주일입니다. 1993년 3월 13일 창립되어 23년 세월이 숨가쁘게 흘러갔습니다. 수많은 성도가 오고갔습니다. 또 만남이 이루어지기도 하고 세상을 떠나기도 하고 해외로 나가기도 하고 직장 때문에 옮기기도 하는 등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이런 가운데 참으로 23년 동안 하나님께서 지켜 주시고 에벤에셀의 하나님이 되어 주시고 인도해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리는 복된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금년 우리 교회 표어는 하나님 칭찬받는 교회입니다. 첫째 예배를 통해 하나님 칭찬을 받아야 합니다. 둘째 동서남북으로 뻗어나가는 구령사업을 통해 하나님 칭찬을 받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 서로 인정하고 칭찬하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구를 어떻게 섬겨야 할까를 알아야 합니다. 우리의 삶은 관계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은 아담의 갈빗대로 하와를 만드시고 관계를 맺게 해 주셨습니다. 두 사람이 한 몸을 이루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에덴에 죄가 들어오게 됩니다. 사단이 뱀의 모습으로 에덴에 들어와 하와를 유혹해 하나님을 배반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모든 관계가 깨어지게 됩니다. 타락으로 관계가 깨어진 것입니다. 심지어 자연과의 관계도 깨어져 땅은 엉겅퀴를 내고 여인은 해산의 고통을 겪고 남자는 노동을 해야 합니다. 복음만이 죄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죄로 말미암아 깨어진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위해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님을 알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10장 35절에서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이 주께 나아와 “선생님이여 무엇이든지 우리의 구하는 바를 우리에게 하여주시기를 원하옵나이다”라고 말합니다. 주께서 “너희에게 무엇을 하여주기를 원하느냐” 물으셨습니다. 37절에서 그들은 “주의 영광 중에서 우리를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앉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말합니다. 41절에서 열 제자가 듣고 야고보와 요한에 대하여 분히 여겼다고 했습니다. 45절에서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예수님은 인간의 본성과 배치되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우리 마음은 야고보와 요한처럼 욕심을 내는가하면 나머지 열 제자처럼 높아지는 일에서 배제되면 분노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본능입니다. 이것을 통제할 수 있는 방법은 성령을 받아야 가능합니다. 성령이 내 마음을 다스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구원 받은 성도는 성령의 열매를 맺게 되어 있습니다. 그 열매는 모든 관계를 회복시키고 좋아지게 만듭니다. 즉 은혜 받은 사람은 하나님과 사람들과의 관계가 좋아지는 것입니다. 능력도 좋고 집안도 좋아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사람일지라도 관계가 틀어지거나 깨어지면 모든 게 허사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을 잘 하느냐 못 하느냐는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관계의 문제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소원해지거나 깨질 때 교회 안에 생깁니다. 우리 모두 청지기 의식을 가져야 합니다. 23년을 지내고 보니 교인이 떠나는 것은 목사의 설교가 못 마땅해서가 아니라 관계가 깨질 때였습니다. 하나님과 관계없는 상황에서 목사와 장로 직분을 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 그것이 무슨 덕이 있겠습니까. 예수를 잘 믿는다는 것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언제나 자각하고 사는 삶입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성령을 받고 예수님을 볼 수 있고 섬겨야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섬김의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주님은 제자의 발을 씻겨 주셨습니다. 45절에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고 주님 말씀하셨습니다. 주님 말씀대로 섬길 때 기적이 일어납니다. 이제 23주년을 지나 30주년을 향하는 우리 예손교회의 비전은 교회를 세우는 것이 아니라 섬기는 교회가 되게 합시다. 섬김이 우리 성도의 비전이 되게 합시다. 앞의 성도는 눈물을 닦았다. 제98회 총회(총회장 안명환 목사)에서 회록서기를 지낸 최우식 목사(목포서노회)는 목포의 인물 전 대통령 김대중 씨의 풍모를 닮았다. 그는 임원회가 맡겨주는 일은 무엇이든 나다나엘처럼 진실하게 처리했다. 분쟁으로 앓고 있는 전주서문교회와 관련해서 총회결의집행위원회의 위원장을 맡은 최우식 목사는 김승연 목사가 6개월 혹은 1주일 간 한시적으로 당회장직에 복귀하도록 하고, 이후 양측 합의 하에 교회 개척 등의 방식으로 분리가 이루어지도록 하자는 합리적인 제안을 했다. 그러나 김승연 측과 장로 측의 고집스러운 요구조건의 대립으로 서로의 입장차만 확인하고 아쉽게 결렬됐다. 교회 정상화와 합법적인 분립문제에 대해서도 양측의 입장은 위원장 최우식 목사의 설득에도 끝내 변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 사건처리를 통해 호남에서 모처럼 좋은 재목이 될 풍모와 심지를 지닌 총회 정치인이 나왔다는 인상을 전국 교회에 각인시켰다. 예수께서 나다나엘이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다 말씀하셨다. 최우식 목사는 총회 대들보 정용환 목사를 비롯해 모든 사람이 진실하고 좋은 사람이라고 인정하듯 주님의 제자 나다나엘 같은 목회자다. 2016-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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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4-15
  • 더굳뉴스 제 25호 쉐마학당 설립자 설동주 목사
    부모가 아이를 가르치는 ‘쉐마교육’ 다음세대의 교회교육 대안신약의 지상명령이 복음전파라면, 구약의 지상명령은 신앙전수부모가 자녀들의 신앙교육을 책임쳐야 부모와 아이들과의 소중한 데이트 시간-쉐마학당 전두환 시절 1984년 5월 1일 개원한 과천시 막계동의 서울대공원보다 4개월 앞선 1월 7일 과천시 별양동 43-3호 지하에서 설동주 전도사(총신 87회)가 과천약수교회 개척을 시작했다. 2000년 10월 31일 별양동 18-17의 주택을 매입하고 개척 23년만인 2006년 12월 24일 새성전을 완공하고 입당을 했다. 설동주 목사가 유대인의 쉐마교육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2010년 과천약수교회 교육부서가 처한 상황 때문이었다. 당시 설 목사는 여느 목회자들처럼 주일학교와 중고등부서가 줄어드는 현상을 고민했다. 지원을 하고 노력을 해도 변화가 나타나지 않았다. 어느 날 교육부서 재정사용 내역을 본 설 목사는 교육부서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깨달았다. 그는 그것을 이렇게 말했다. “교육부서 재정의 60%를 먹이고 노는데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아이들 간식비와 놀이기구 대여비 등에 많은 재정이 들어가고, 실제 성경을 가르치기 위한 교육은 시키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때부터 다음세대를 위한 교육 방안을 찾기 시작했고, 유대인의 자녀교육 방법인 쉐마에서 대안을 발견한 것입니다. 신약의 지상명령이 복음전파라면, 구약의 지상명령은 신앙전수입니다. 그러므로 부모가 자녀들의 신앙교육을 책임쳐야 합니다.” 이같은 교육 철학에 근거하여 설동주 목사는 2011년부터 교회 내에 쉐마학당연구원을 설립하여 교육프로그램을 가동해 왔다. 쉐마학당연구원의 프로그램은 교회와 함께 학부모가 자녀의 신앙교육을 책임지는 총체적 신앙교육으로써 이 프로그램의 기본은 부모와 자녀의 친밀한 대화에 있다. 쉐마 이스라엘(이스라엘아 들으라)는 신명기 6:4-9, 11:13-21, 민수기 15:37~41에 나오는 성경 구절인데 쉐마는 히브리어로 ‘들으라’는 뜻이다. 유대인들이 매일 아침저녁으로 예배 때에 읊는 기도 구절이다. 이스라엘 사람의 하나님에 대한 열렬한 믿음과 사랑을 표명하는 세 절(節)로 되어 있고, 유대교 신앙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유대인들에게는 아이들에게 이러한 내용을 가르치는 것이 의무로 규정되어 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유일한 여호와이시니”라는 쉐마를 통해서 받는 교훈은 예배의 대상자는 오직 하나님이시라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은 유일하신 분으로서 우리의 구원자이시고 우리의 주권자이시라는 것을 교훈하고 있다. 학당(學堂)은 고려 말기부터 설치되었던 학교이다. 이 제도는 중국에도 없었던 것으로 고려 말 유학 진흥의 현실적 요청에서 설치하여 조선 시대에 발전을 보았던 기관이다. 조선에 들어와서도 고려의 제도를 답습하여 서울을 동·서·중·남·북의 5부로 나누고 여기에 각각 학교를 하나씩 설치하여 5부 학당이라고 하였다. 처음에는 학사(學舍 : 학당 건물)가 없어서 대부분은 사원(寺院)을 이용하였으나, 1411년(조선 태종 11)에 처음으로 남부 학당이 세워지는 것을 계기로 이후 나머지도 모두 건물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북부 학당(北部學堂)은 여러 차례 설치하려고 하였으나 끝내 설치를 보지 못하고, 1445~6년(세종 27~8)경에 폐지되어 4부 학당(四部學堂)만이 존속을 보았다. 보통 이를 4학(四學)이라고도 한다. 학당의 입학 자격은 양반과 서인의 자제로, 학령(學令)은 소학(小學)으로 정하여, 입학하면 소학부터 암송케 했으며 5일마다 시험을 치렀다. 예조에서는 달마다 시험을 치르고, 1년의 성적을 왕에게 보고하였다. 성적이 우수한 생도는 성균관에 진학시키는 것이 교육 목표였으나, 때로는 학당에서 생원시(生員試)·육월회시(六月會試)·알성시(謁聖試)를 통하여 직접 생원·진사시의 회시(會試)에 갈 수도 있어서 뚜렷한 계통은 없었다. 학생 수는 백 명이었다. 임진왜란 때 학당이 불타서 그 뒤 다시 건물을 세웠으나 학생 수가 격감되어 사실상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고종의 대한제국에서도 공립교육이 부진하자 외국인이 사학(私學)을 세웠을 때 이 이름을 따라 배재학당·이화학당이라고 했다. 이들은 후에 학교로 개칭되었다. 설동주 목사가 자녀 성경교육을 위해 창시한 세계 유일의 쉐마학당 이름은 이스라엘과 조선의 학교 명칭이 합쳐진 유래를 갖고 있다고 할 수 있겠다. 2010년 4월 9일 시작한 토요쉐마학당을 2016년 2월 20일 참관했다. 36가정이 참여한 성경공부와 행사는 놀랍고 감동적이었다. 다른 두 교회에서도 참관을 했다. 사무실에서 차를 한잔 나누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이들은 언제부터 성경을 외울 수 있나요. 5세까지는 뇌 구조가 악기라든가 공을 가지고 노는 게 좋고 6세부터는 언어 훈련쪽으로 들어가니까 외우는 것이 가능합니다. 그 때부터는 뇌구조가 암송을 받아들이기가 좋게 되어 있어요. 강의할 때 뇌에 대한 것부터 다 말합니다. 몇 살부터 언어를 습득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을 강의합니다. 3살 이전에는 뇌의 형성이 80프로 된답니다. 5살되면 90프로 6세부터는 100프로 됩니다. 중교등부 때는 외우려고 하지를 않습니다. 사춘기이기 때문이죠. 후두엽이 발달하기 때문에 연예인들 사진을 집에 붙이는 겁니다. 자라면서 뇌의 발달 시기에 따라 아이들이 사는데 부모들은 놀래 쟤가 뭐가 될 거냐 하는 겁니다. -전두엽 때는 그런데 관심이 없는 거군요. 전두엽 때가 가장 좋은 때인데 게임가지고 놀아버리면 전두엽이 망가져 버립니다. 사람을 죽일 수 잇습니다. 죽이는 것만 하니까요. 게임으로. 그래서 게임 중독 아이들이 56만 명이라는 겁니다. 일본 사람들이 쉐마를 무척 좋아합니다. 그들은 매뉴얼화 되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사람들은 함부로 안 해요. 이번에도 일본의 그리스도 교단이 가장 큰데 총회장이 왔어요. 미국에서 공부한 아들과 딸도 데려왔어요. 자기 교단에 실시하려고 말입니다. -어떻게 그들에게까지 알려지게 됐죠. 어쨌든 한국 쉐마가 어떤 루트를 통해서인지 그들에게도 알려진 겁니다. 일본에서는 센세이셔널한 모양입니다. 그들 이야기가 부산에 있는 수영로교회의 정필도 목사에게 교회 성장을 배우러갔더니 다음 세대를 위해서는 쉐마를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는 거예요. -정필도 목사가 교훈을 주는 게 있습니까. 교회 성장에 대해 외국인들에게 전하는 세미나가 있는 모양입니다. 여러 군데서 강의 요청이 와서 여기저기 갑니다. 이번에 327명이 등록해서 사랑의교회 안성수양관에서 제 강의를 들었습니다. 수양관 지배인이 그래요. 제일 많이 모였다고. 요즘 사람들이 잘 안 모인대요. 제자훈련보다 더 많이 모였대요. -수강료가 얼마죠. 2인실은 29만원, 6인실은 25만원입니다. -교회에서 얼마나 지원이 됩니까. 지원 없습니다. 그거면 되니까요. 오히려 거기서 남는 이익금을 우리 노회 어려운 교회에 100만원씩 지원했습니다. -몇 교회나. 열 교회를 돕습니다. 그리고 2월 21일 3부 11시 주일예배를 과천약수교회에서 드렸다. 예배 후 설동주 목사를 만났다. -예배 분위기가 성경 중심적입니다. 우리는 성경 구절을 영상으로 띄우질 않아요. 찬송가 가사만 띄우죠. -네, 참 좋은 것 같습니다. 말씀을 영상으로 띄우면 아무도 성경을 펼치지 않아요. 그렇게 습관이 들어 성경으로 말씀을 보지 않으면 잊어버려요. -그런 관행을 여러 교회에 전하는 계기가 됐으면 합니다. 저희 교회 특징 가운데 매일새벽기도회가 네 번 있고(1부 5시 20분, 2부 6시, 3부 7시, 4부 8시), 매일저녁9시기도회가 있고 9그리고 저희는 주일저녁예배가 있다는 게 좋아요. 주일 저녁예배를 드려 보면 분위기가 너무 좋아요. 새벽 예배, 낮 예배 저녁 예배 분위기가 각기 틀려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하여튼 새벽에는 정말 차분하고 저녁에는 저녁 나름대로 하나님이 주시는 영적 은혜가 달라요. 한국교회 저녁 예배가 없어지고 있어요. 다 오후 예배를 드리죠. 그런데 저희 교회가 저녁 예배를 드리니까 다른 교회 교인들도 참여하는 사람이 많아요. -심령이 갈급하고 허전해서 그렇겠죠. 그렇죠. 저희 저녁 예배 특징 가운데 하나는 아이들이 성가대에 서요. 아이들이 엄마 따라 쉐마학당하다 보니 그렇게 되더군요. -말씀만 가르치는 박영선 목사의 남포교회 가보니까 삼일 저녁인데 아래위로 꽉 차요. 모니터도 없어요. 그리고 성경만 가르치는 겁니다. 2층에만 티비 모니터 하나 있어요. 그런 이야기가 한국 교회에 전달이 돼야 합니다. 그래서 쉐마학당을 배우러 온 이들에게 가장 먼저 할 일은 목회자의 의지가 제일 중요합니다.. 다시 말해 쉐마교육을 실시하기 위해서는 ‘목회자 자신이 준비’가 먼저 되어야 합니다. 쉐마교육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하고 프로그램만 따라하면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습니다. 제9기 쉐마학당 세미나 스케치 쉐마학당연구원이 주최한 제9기 쉐마학당세미나가 지난 2월 15일(월)부터 17일까지 사랑의교회 안성수양관에서 열렸습니다. 그동안 9기까지 진행되어 오면서 많은 목회자들과 교육 종사자들의 관심을 받아온 쉐마학당 세미나였지만 이번 세미나만큼은 어느 때보다 짧은 시간에 많은 인원이 등록하였다. 무려 327명이나 되는 분들이 등록했다. 세미나 당일 오후 1시부터 시작된 접수는 금세 전국 각지에서 몰려온 등록자들로 인해 붐볐지만 과천약수교회 성도들로 이루어진 접수팀과 안내팀의 도움을 받아 순조롭게 접수가 진행되었다. 접수팀과 안내팀뿐 아니라 간식팀, 의전팀, 도서팀, 중보기도팀, 차량봉사팀 등으로 이루어진 과천약수교회의 세미나 도우미들은 능숙한 솜씨로 세미나에 참가한 분들에게 최상의 서비스를 제공하였다. 수양관 직원이 쉐마학당 세미나 주강사로 섬기고 있는 쉐마학당연구원장 설동주목사(과천약수교회 담임)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이곳에서 수많은 세미나가 열리지만 쉐마학당 세미나만큼 많은 분들이 참여하는 세미나는 없는 것 같습니다. 그리고 쉐마학당 세미나 기간에 우리 직원들은 할 일이 별로 없습니다. 과천약수교회에서 오신 많은 봉사자들이 섬겨주셔서 직원들이 해야 할 일이 거의 없습니다.” 첫날 강의는 쉐마교육이 이 시대에 왜 필요한지에 초점을 맞추었다. 2천년 세계교회사 속에서 왜 한때는 부흥했던 교회들이 세대를 거듭하면 소멸되는지, 그리고 현재 한국사회의 청소년문제는 어디서 비롯되었는지 영상을 곁들인 강의를 통해 문제의식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하나님의 명령인 쉐마교육이 결국 해법임을 제시하기 위한 사전 토양작업이었다. 저녁 9시까지 진행된 첫날 일정에 멀리서 오느라 피곤하고 지칠 법도 한데 세미나에 참가한 분들은 하나라도 더 담으려고 신경을 곤두세우고 필기하느라 바빴다. 둘째날 강의는 ‘쉐마교육과 뇌 발달’이라는 강의로부터 시작되었다. 쉐마교육이 무엇인지, 그리고 각 교회에서 쉐마교육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실천할 수 있을지에 초점을 맞추고 둘째날 강의는 진행되었다. 이날 오후에 고려대학교 심리학과 한성렬교수의 특강이 있었다. 심리학자로서 쉐마교육이 이 시대에 왜 필요한지, 그리고 쉐마교육이 어떻게 한국교회 다음세대 문제의 대안이 되는지 학자의 입장에서 설득력 있게 제시하였다. 첫째날과 둘째날 많은 강의가 있었지만 중간 중간에 간증 및 사례발표의 시간도 있었다. 교사 간증과 학부모 간증, 그리고 쉐마교육을 모범적으로 실천하고 있는 은진교회의 사례발표가 세미나에 참가한 분들에게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불어넣었고, 실제적인 도움을 제공하였다. 이뿐 아니라 쉐마학당이 실제로 진행되는 것과 똑같이 쉐마학당에 참여하고 있는 가정이 나와 시연하는 시간도 있었다. 시연을 통해 쉐마학당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그리고 부모가 자녀에게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는지 실제적인 이해를 높이는 시간이었다.마지막날 마지막 강의 시간에는 ‘쉐마교육 매뉴얼’이라는 제목으로 쉐마교육의 시작과 진행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진행하면 좋은지 매뉴얼처럼 정리해서 전달해주었다. 세미나에 참여한 분들에게 실제적인 도움을 주는 강의였다. 마지막날 마지막 강의 때까지 세미나에 끝까지 참여한 분들이 대부분이었고 강의를 듣는 분들의 몰입도가 끝까지 높은 수준으로 유지되었다. 모든 강의를 마치고 폐회예배 때 다함께 부른 ‘부흥’ 찬양은 많은 사람들을 흐느끼게 했고 회개하게 했다. 그동안 하나님이 기성세대에게 맡긴 다음세대에 관한 책임을 다하지 못한 죄를 회개하고, 가정에서도 하나님이 자녀를 부모에게 맡겨주셨는데 그들의 신앙에 관한 책임을 다하지 못한 죄를 자복하는 시간이었다. 2박 3일간 진행된 쉐마학당 세미나는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주관하심 속에서 많은 분들에게 새로운 깨달음과 도전을 준 세미나였다. 토요쉐마학당 체험기 아이들과의 소중한 데이트 시간-쉐마학당(과천약수교회)주 동 진 처음 아내에게 약수교회에서 쉐마학당을 시작한다는 말을 들었고, 가족이 함께 참여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의무감에 신청서를 제출하였다. 그 때까지만 해도, 유일하게 집에서 쉴 수 있는 토요일 오후를 반납해야 한다는 아쉬움과 더불어 아이들의 신앙 교육에 참여해야 한다는 아버지로써의 무거운 의무감에 눌려 썩 즐거운 마음만은 아니었다. 또한 아이들과 함께 보낼 수 있는 잠깐의 주말 시간을, 아빠로서 아이들에게 유쾌하고 즐거운 시간으로 채워주고 싶은 마음이 더 컸기에 토요일 오후의 쉐마 교육 시간이 썩 내키는 것은 아니었다. 또 한편으로는 언제 응급 수술이 발생해서 불려나갈지 모르는 상황 때문에 스스로에게 ‘내가 얼마나 꾸준히 많은 시간을 아이들에게 할애할 수 있겠나?’ 싶어 선뜻 쉐마학당이라는 곳에 발을 들여놓기가 꺼려졌던 것이 사실이다. 신청서를 내 놓고 까맣게 잊고 지내던 중에, 전날의 응급수술로 지친 몸을 이끌고 토요일 오후 집에 돌아오니 쉐마학당에 가야 할 시간이라고 아내가 분주히 아이들 외출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렇게 지친 몸과 마음으로 별 기대감 없이 쉐마학당의 첫 시간을 맞이하였다. 첫 날은 미국의 유태인들이 토요일에 회당에 모여 함께 탈무드와 모세오경을 공부하는 영상을 먼저 보여주셨다. 여러 테이블이 놓여있고 각 테이블 마다 가족 단위로 모여 일대일로 탈무드를 공부하고 토론하는 모습을 보면서 유태인들의 저력의 근간이 무엇인지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2000년 전 열두 살의 예수님도 그 부모가 애타게 찾는 줄도 모른 채 저렇게 예루살렘 성전에서 랍비들과 토론하고 있었을 것만 같았다. 영상물 상영 이후 담임 목사님의 쉐마 학당에 대한 비전에 찬 눈동자와 목소리를 느끼면서 이것이 그냥 형식적으로 진행하는 일회성의 행사가 아니라는 분위기가 온 몸으로 전해졌고, 앞으로의 쉐마 교육이 기대되기 시작하였다. 모태신앙으로 어려서부터 너무나도 익숙하게 접해온 성경, 그와 관련된 수 많은 공부와 제자교육, 전도 훈련…. 첫 주에 시작될 교안을 받아 들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내가 아이들에게 성경을 가르치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나의 이러한 교만함은 그 다음주부터 시작된 쉐마 학당의 첫 시간부터 여지없이 무너졌다. 여섯 살 배기 큰 딸과 이제 막 두 돌이 지난 둘째, 그리고 태어난 지 두 달 밖에 안된 막내를 데리고 쉐마 학당을 시작하였다. 막내는 아내의 무릎에 누워 잠을 청했고, 주로 큰 아이와 둘째 아이를 대상으로 되도록 쉬운 언어로 표현하려고 노력하였지만, 꼬마 숙녀들과 성경을 함께 읽고 천지창조의 과정을 토론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주위를 둘러보았더니 대화와 토론이 가능한 나이의 아이들은 제법 진지하게 부모들과 토론도 하고 성경도 함께 읽는 모습이었다. 그러한 분위기 때문이었는지, 그래도 고마운 것은 몸을 베베 꼬면서도 1시간 30분 가량의 긴 시간 동안 꾹 참고 아빠의 말을 들어준 우리 집 꼬마들이다. 두 번째 주의 십계명에 관한 토론은 나를 더욱 힘들게 하였다. 시중에 나와 있는 많은 영상 자료들을 동원해 볼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지만, 아버지의 말이 아이들의 상상력을 통해 머리 속에 새겨지고 오직 순수한 말씀으로 채워지는 것이 쉐마 학당의 진정한 목적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순간의 편의를 위한 도구는 사용하지 않기로 하였다. 수 천년 동안 그 똑똑하다는 유태인들조차도 멀티미디어를 활용하지 않고 과거의 전통대로 말씀을 상고하고 묵상하고 토론하는 모습에는 이유가 있었으리라. 그러다 보니 많은 내용을 깊이 있게 다루지는 못하게 된다. 하지만, 토요일 오후 예배당에 모여 가족들이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하며 그 신앙을 전수하는 시간이라고 생각을 하니 쉐마 학당에 대한 그 동안의 중압감과 한 편으로는 귀찮음이 기대감과 소망함으로 변하는 것을 느꼈다. 우리 가족뿐만 아니라 다른 가족들과 함께 한 공간 안에 있다는 것, 또 그들의 열정적인 모습을 보면서 그 분위기 속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슴 벅차 오르는 시간이 되어가고 있다. 분주함을 핑계로 많이 나태해있던 나의 신앙도 돌아보게 되고 다시금 하나님 말씀의 위엄 앞에 엎드리게 된다. 돌이켜 보면, 지금은 신앙적으로 많이 퇴보하였지만, 그래도 지금의 내가 있기까지는 어릴 적 어머니로부터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던 성경 이야기, 성경 암송이 내 신앙의 근간이 되었으리라. 이제 막 시작한 쉐마 학당이지만, 이러한 쉐마 교육을 통해 우리 아이들에게 살아 있는 말씀으로 전달 될 것이고, 또한 아이들의 영과 혼, 그들의 두뇌를 바꾸어 어느 곳에서든지 지식보다는 지혜롭게, 편협한 생각보다는 넓은 아량을 베푸는 리더로서의 삶을 살게 될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쉐마 하면, 신명기 6장의 말씀을 떠 올린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우리 하나님 여호와는 오직 하나인 여호와시니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이스라엘 민족이 그토록 오랫동안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고 가죽끈을 달아 팔목과 이마에 붙이고 다녔듯이, 우리 아이들도 이 말씀을 마음판에 새기고, 그들의 삶 속에 말씀의 능력을 드러내기를 간절히 소망해 본다. 어려서부터 철저하게 뼛속까지 말씀이 스며드는 삶을 살게 될 약수교회 쉐마 학당의 아이들에게서 이 나라의 미래 소망과 변화의 물결을 보았다면 지난친 상상일까? 이러한 소중한 시간을 마련해 주신 하나님과 목사님께 다시 한 번 글을 빌어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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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3-02
  • 더굳뉴스 제 24호 필리피노의 사도 김상윤
    그는 자신의 몸에 필리피노의 DNA가 있는 모양이라고 했다.참가비를 내고 모여든 필리피노 교역자와 교인들을 위한 선교집회나눔의교회 교인들은 잘 훈련된 군인들처럼 헌신적으로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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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01-26
  • 더굳뉴스 제 23호 총회 대들보 정용환 목사
    목포시를 지나 황해로 흐르는 영산강(榮山江)이 휘어서 구부러진 곳에 쌓인 모래밭이 보인다. 물에 닦이고 닦여 이루어진 고운 모래가 넓게 덮여 이른 겨울 햇살에 가볍게 잇따라 반짝인다. 목포 시온聖교회 당회는 12월 4일(금) 연말당회를 갖고 수석장로 김민용 장로의 제안으로 당회장 정용환 목사의 제101회 총회 부총회장 후보 추대를 만장일치로 결의했다. 호남 대들보로 알려진 정용환 목사가 총회 대들보로 자리매김할 때가 온 것 같다. 그는 명실상부한 총총 출신의 첫 번째 총회장이 될 것 같다. 더 나아가 그는 총회의 유리창 김선규 목사를 뒤이어 한옥의 기둥과 기둥을 이어주는 큰 들보처럼 교회와 노회를 튼튼하게 이어주는 명실상부한 총회 정도정치의 대들보가 될 역량과 비전을 가진 인물이다. 그 누구와도 소유 관계가 없는 모래밭은 끝없이 흘러가는 강물이 산통을 겪으면서 낳아 품은 것이다. 그 모래밭이 우리 믿음의 영혼이 살다 가는 교회당처럼 보인다. 그래서 그 금빛의 모래밭은 우리 믿음의 영혼이 기도하는 기쁨과 평화처럼 보인다. 하지만 강물처럼, 인생의 시간은 모래밭을 돌아 무심하게 흘러간다. 그렇게 영산강처럼 흘러가며 목포 시온聖교회에서 33여년 목회로 닦이고 닦여 금모래처럼 반짝이는 영혼을 지닌 정용환 목사가 우리 교단의 대들보가 될 것이다. 디트리히 본 회퍼는 그의 시 《나는 누구인가》에서 자신을 이렇게 노래한다. 나는 누구인가그들이 종종 말하기를내가 감방에서 걸어 나올 때왕이 자기 성에서 걸어 나오듯침착하고 활기차고 당당하다고 한다…나는 누구인가이 외로운 물음이 나를 비웃는다하지만 내가 누구이든 하나님은 아신다내가 그의 것임을 《나는 누구인가》의 시처럼 정용환 목사는 자신과 목회관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저는 해군사관학교가 꿈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어머니는 저하고는 한마디 상의도 없이 아들을 낳으면 목사 시키겠다고 서원을 하셨습니다. 그러니 제가 해군사관학교 31기 시험을 봤는데 합격할 리가 있겠습니까. 낙방하고 말았죠. 하는 수 없이 어머니 서원대로 신학대학 가서 목사가 됐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저를 해군 군목이 되게 하시더군요. 목포에서 근무한 그 해군 인연으로 제대하자마자 31살 나이로 목포에서 제일 큰 이 교회에 부임하게 된 것입니다. 참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입니다. 제가 지금 한 교회에서 30년 넘게 목회하고 있는데 성실과 진실로 목회했습니다. 설교 못 해서 실패하는 목사 없어요. 이성 문제 돈 문제 때문에 다 무너져요. 목사는 시무하는 교회에서 그만 둔다는 말을 쉽게 하면 안 됩니다. 끝날 때 끝나더라도 말입니다. 교회에서 집 두 채 사줬어도 다시 헌납했어요. 장로님들이 저를 믿어요. 개인을 위해서 돈을 쓸 목사가 아니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정용환 목사는 《나는 누구인가》의 시에서처럼 언제 어디서나 “침착하고 활기차고 당당하다.” 2015-1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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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2-24
  • 더굳뉴스 제 22호 제99회 총회장 백남선 목사
    비가 그치고 늦가을 바람이 분다. 총회 앞 오래된 은행나무 숲을 쓰다듬으며 가을이 동쪽으로 기울어진 소리를 내며 가을이 제100회 총회 일정 속에 지나가고 있다. 가을 찬비 지나가고 나면 훨씬 스산하고 쓸쓸한 데가 많다. 가을바람은 냉담하다. 가을바람은 옹색하다. 한 채의 빈집 같다. 그러나 가을바람은 으스스하긴 해도 흐리터분하지는 않다. 흐린 정신을 바로 세운다. 가을바람은 서리처럼 흰빛이다. 이처럼 가을이 기울어져 지나가고 나면 나무는 앙상한 가지로 차림차림이 간편해지고, 숲의 살림은 더욱 단출해질 것이다. 그것이 나무와 숲의 본래 면목인지도 모르겠다. 원래 있던 자리인지도 모르겠다. 마치 길을 떠났던 사람이 그 행로를 되짚어 출발지로 다시 돌아오듯이 이제 해는 일찍 떨어진다. 가을의 주위는 점점 일찍 어두워진다. 내 바로 맞은편을 바삐 지나가는 허활민 목사 같은 가을의 얼굴을 본다. 대치동 하늘 아래 총회의 결의가 흐르고 우리들의 시간도 흘러간다. 허나 의견의 대립에 이어서 오는 기쁨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섭리의 세월은 흐르고 우리는 여기 있다. 손과 손을 붙들고 마주 대하자. 우리들의 기억 밑으로 미세한 음성의 영원한 눈길이 지나갈 때 교회는 외로워 보이지만 사랑을 늘 묵상하는 목사 같기도 하다. 사랑의 교회가 사랑을 잃고 난 후의 통성 기도 같기도 하고, 말씀에 대한 사랑 혹은 순종의 자세 같기도 하다. 세상을 떠나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그 날을 몰라 우리는 거기 머물며 교회 밖에서 노회로 총회로 허둥대고 있다. 2007년 9월 12일 분당 수내동에 있는 연정교회(김용실 목사)에서 열린 제92회 총회에서 총회 서기로 선출된 백남선 목사는 이렇게 말했다. “선임자들이 이루어놓은 토대 위에 힘을 더해 교단 행정의 신속성과 신뢰성을 높이는데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의 이 말은 7년 후 2014년 9월 22일 광주 겨자씨교회에서 열린 제99회 총회장이 된 백남선 목사에게 더욱 절실한 말이었던 것 같다. 그는 2013년 9월 23일 수원 라비돌에서 열린 제98회 총회에서 아무도 예상 못한 저력을 보여 주었다. 백남선 목사는 김영우 목사와 경합하여 총 득표수 1446표 중 828표를 얻어 618표를 얻은 김영우 목사를 200여 표차로 당선됐다. 그는 사심 없이 일을 처리하는 것으로 정평이 나있다. 백남선 목사는 당선 후 소감을 이렇게 피력했다. “저를 위해 기도해 주시고 성원해 주신 많은 분들의 기대대로 총회를 바로 세우는 일에 주력할 것입니다. 우리 교단의 추락한 공신력과 도덕성을 다시 회복시켜 반석 위에 올려놓겠습니다. 그러기 위해 우선 인적 쇄신이 필요하며, 총회를 사심 없이 섬길 수 있는 인물들이 제대로 일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는 것이 제 역할이라고 판단하고 있습니다. 제 생각으로는 제도 자체보다는 그 제도를 운영하는 사람들에게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초심을 잃지 않는 지도자가 되고 싶습니다. 불신을 없애 투명한 총회를 만들겠다는 약속, 법이 지켜져 공의가 서는 총회를 이루겠다는 약속을 반드시 지키고, 하나님나라 확장을 위해, 교단의 발전을 위해 생명을 다하는 일꾼이 되고 싶습니다.” 2014년 9월 22일 광주 겨자씨교회에서 열린 제99회 총회에서 총회장 백남선 목사는 길자연 목사 이후 간선제로 인한 15년간의 산적한 문제들을 쾌도난마(快刀亂麻)로 처리했다. 쾌도난마는 잘 드는 칼로 마구 헝클어진 삼 가닥을 자른다는 뜻으로, 어지럽게 뒤얽힌 사물과 사건을 강력한 힘으로 명쾌하게 처리함을 이르는 말이다. 실례로 총회 개회 둘째 날 각 위원회 보고 가운데 납골당에 안치된 임태득 목사 때 시작해 12년을 끌어온 핵심 비리 세력의 사건 은폐 음모를 총회장 백남선 목사의 쾌도난마 사회로 단칼에 베었다. 역대 총회장의 사적인 감정과 생각은 억제되고 공적인 총회 헌법과 신앙이 드러나는 총회장 백남선 목사의 사회는 총회 99년의 역사에서 가장 빛나는 쾌거(快擧)로 기록될 것이다. 가히 그의 쾌거는 그동안 각종 비리로 점철된 죽은 총회가 비리와 의혹을 걷어내고 바르게 다시 일어나는 부활 총회라 칭할만했다. 2014년 11월 25일(화) 대전중앙교회에서 제99회 총회(총회장 백남선 목사) 제1차 실행위원회가 소집되어 97명이 참석했다. 대전중앙교회의 우람한 파이프오르간을 배경으로 총회장 백남선 목사는 예배 후 회의를 시작하면서 차분하고 겸손한 어조와 태도로 입을 열었다. “총회의 결의는 총회의 신학교인 총신대학교가 총회의 필요에 따라 정관을 개정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총신을 위한 총회 결의 시행에 있어서 총회와 재단이사회(이사장 김영우 목사)가 충돌해서는 안 됩니다.” 김영우 목사는 뒷자리에 병풍처럼 앉아 있었다. 첫 발언자 문찬수 목사는 국가가 인정한 사립학교법을 존중해야 한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이어서 그동안 발언에 나서지 않던 위원이 등장했다. 그는 경기남노회의 오인호 목사였다. 그는 총회 결의 사항을 실행위원회에서 변경할 수 있는가? 총회의 결의를 집행하면 된다.”고 말했다. 뒤에 앉아 있던 하귀호 목사는 사회석 앞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형만 목사는 차분한 어조로 발언했다. “총회는 대의정치이고 대의민주제다. 그러므로 운영이사회(이사장 김종준 목사)에 지시를 내려 재단이사회가 정관 개정을 하게 하면 된다. 최병남 목사 때 총신 문제로 2억 3천만원의 소송비가 들어갔다. 더 이상 소모전은 되풀이하지 말자. 총회는 법적 대응을 잘 하고 있는가. 가처분은 가처분일 뿐이다. 이 일은 임원회에서 진행하면 된다. 위원을 내서 은혜롭게 진행했으면 좋겠다.” 정중헌 목사는 간단명료하게 말했다. “실행위원회에서 인사를 다룰 수 없다. 위원 선임은 정관에 위배된다.” 서광호 목사가 부리부리한 눈으로 말했다. “세상법과 총회가 충돌할 때 목사는 총회를 따라야 한다. 그리고 총신 정관과 총회 규칙이 상충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본 위원의 생각은 총회도 존중해야 하고 총신도 살려야 한다는 것이다. 위원을 내서 이 일을 처리하기로 동의합니다.” 백남선 총회장이 말했다. “재청 있습니다.” … 하귀호 목사가 발언에 나섰다. “잘 하자고 모였다. 앞의 동의에 대해 개의를 하겠다. 실행위원회는 소총회라고 할 수 있으니 현장에서 3구도에 따라 3명씩 9명의 위원을 내도록 하자.” 오인호 목사가 다시 발언대에 섰다. “정관 개정 불가라는 말은 웃기는 얘기다. 재단이사들이 사임하기 전에 총회 결의를 준수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한 것은 총회법을 거부하는 무언의 행위다. 총회 결의대로 진행해야 한다.” 총회장이 발언했다. “이사 사임 처리 안 되었다. 아직 교육부에 보고 하지 않은 것으로 안다. 이사회의 이성적 협조가 필요하다.” … 서광호 목사가 다시 발언에 나섰다. “중지를 모을 목적으로 모든 권한을 임원회에 맡겨 처리하기로 동의한다.” 총회장이 가부를 물었다. 가결되었다. 김영우 목사의 도봉산의 바위 같은 병풍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백남선 목사는 평소 앞에 나서 많은 말을 하는 대신, 조용히 일을 진행하고 수습해나가는 성격이다. 그래서인지 그는 논리적이고 냉정한 율사(律師)의 풍모가 풍긴다. 2014년 6월 12일 총신대총장 길자연 목사가 교육부 장관을 상대로 제기한 ‘임원취임승인취소가처분취소’ 소송에서 패소했다. 서울행정법원은 결심공판에서 원고의 청구를 기각한다고 판결했다. 이 소송은 2014년 교육부가 길 목사의 칼빈대 임원취임승인을 취소한다는 공문을 총신대로 보낸데 대해 길 목사가 가처분과 본안 소송을 차례로 제기하므로 진행되어왔다. 재판부는 길 목사의 가처분은 받아들였으나 이번에 본안 소송은 거부했다. 총신대 총장 길자연 목사가 6월 25일 사임했다. 재단이사회(이사장:김영우 목사)는 6월 25일 길자연 총장의 사표를 수리하고 심상법 대학원 부총장을 총장직무대행으로 선임했다. 교계의 일세를 풍미(風靡)한 길자연 목사는 말했다. "총회와 총신대의 화합을 위해 사표를 제출했다. 교단이 정상화 되어 100회 총회가 '화합총회'로 진행되길 바란다." 6월 27일 토요일 오후 4시 총신 이사장실에서 김영우 재단이사장은 기자 간담회를 갖고 제99회총회 총신대 관련 결의 가운데 소급 적용 조항만 빼고 제99회 총회 결의대로 총신대 정관을 개정하겠다는 당연한 입장을 밝혔다. 이 소식이 즉각 전국 교회와 총대들을 뜨겁게 달구었다. 그리고 백남선 총회장의 비선 실세들과 김영우 목사의 밀사가 움직이게 만들었다. 6월 30일 화요일 광주에서 비선 실세들을 통해 물밑에서 백남선 총회장과 총신대 재단이사장이 의견을 나눈 뒤 만나 그들 나름의 측근들이 배석한 가운데 총회와 총신 양측의 이른바 합의서라는 것을 발표했다. 합의서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 백남선 목사와 학교법인 대한예수교장로회 총신대학교 재단이사장 김영우 목사는 아래와 같이 합의한다. 1.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는 김영우 재단이사장을 길자연 전 총장 잔여 임기동안 총장으로 운영이사회에서 선출하여 재단이사회에서 최종결정하는 사항을 추진한다. 2. 총신대학교재단이사장 김영우 목사는 총장으로 선출될 경우 재단이사장직과 이사직을 사퇴 하고 재단이사회에 관한 것을 관여하지 않는다. 3. 최대한 빠른 시일 안에 운영이사회를 소집하여 관련 사항을 처리한다. 2015년 6월 30일 대한예수교장로회 총회장 백남선 목사 학교법인 대한예수교장로회 총신대학교 재단이사장 김영우 목사 총신 문제는 몇 차례의 사퇴 발언 끝에 결국 사퇴한 길자연 총장의 잔여 임기 2년 4개월을 생각지 않게 물려받은 김영우 목사가 제99회 총회장 백남선 목사와 제99회에 이어 제100회의 여전한 실세로 알려진 허활민 목사와의 원만한 타협으로 아름답게 마무리됐다. 즉 김영우 목사의 전임 길자연 총장의 잔여임기는 보장하되 재단이사회의 구성은 전임 총회장 백남선 목사와 현 총회장 박무용 목사에게 맡기기로 한 것이다. 이 결과를 보면 제99회 총회장 백남선 목사는 그의 날카로운 면모대로 오랜 세월 갈고닦은 총회 정치의 올곧은 연륜과 지혜가 돋보인다. 백남선 목사는 제99회 총회 내내 그리고 제100회 총회 벽두의 실세는 소문에 따른 허활민 목사가 아니라 바로 그였다. 그리고 허활민 목사는 소문과 달리 실세(實勢)가 아니라 허세(虛勢보다 許勢)였다. 얽힌 실타래 같은 교착상태의 총신 문제를 제99회 총회장 백남선 목사는 그의 장기(長技)인 쾌도난마(快刀亂麻)로 처리했다. 2015년 7월 6일 오전 10시 30분 유성 관광호텔 8층 스타볼룸에서 전국호남협의회(대표회장 최병남 목사) 제16차 정기총회가 참여한 가운데 열렸다. 전국의 회원들이 좌석이 모자라 따로 식사 자리를 마련할 정도였다. 접수대에는 제100회 총회부서기 후보로 나선 이형만 목사(전호협 회록서기), 총회장로부총회장 후보로 나선 신신우 장로(전호협 회계), 총회부회계 후보로 나선 양성수 장로(전호협 부회계) 등이 전호협 총회에 참석하는 회원들의 접수와 안내를 맡아 봉사하고 있었다. 제16기 대표회장에 백남선 목사가 선임되었다. 그는 취임 인사에서 전국호남협의회의 앞날이 아니라 총신 총장 문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저는 이제까지 누구한테 로비를 받아 일해 본 적도 없고 마음도 없습니다. 저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이냐 총회 결의에 맞는 일이냐 그것만 바라보고 지금까지 일했습니다…총신 정관을 총회 직할이라 고치고 앞으로는 총회 허락 없이는 재단이사들이 마음대로 재단의 법을 고칠 수 없게 하려고 합니다…정부에서 앞으로 서울에 있는 대학들을 구조 조정한다고 합니다. 우리 총신이 지금 316명 허락받아 모집합니다. 10프로 감축이 4개 학년에 적용되면 120여명 줄어들게 됩니다. 지금 우리 총신은 총신 자체로는 운영이 어렵습니다. 타산이 안 맞다고 대학부를 없앨 수도 없습니다. 분규 대학이 되면 형편이 더 어려워집니다. 그런데 마침 기회가 생겨 김영우 목사가 한 2년 총장을 하고 물러나면 재단이사를 다 바꿀 수 있어요. 사실 김영우 목사가 능력은 있어요. 총회 화합도 이루고 총신도 살릴 수 있겠다는 생각에 결단을 내렸습니다. 그렇게 아시고 협력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분쟁과 갈등 해소를 강조하고 실행하는 총회장 백남선 목사는 요엘 선지자 같다. 요엘의 이름은 주는 하나님이시다 라는 뜻이다. 선지자 요엘은 가뭄과 메뚜기 재앙이 살기 어렵게 만든 시절의 유다에서 활동했다. 그는 아주 감정표현이 능숙한 선지자였다. 그는 비유가 풍부하고 묘사가 생생했다. 요엘서에는 잊기 어려운 아주 독특한 두 사건이 비유로 묘사되고 있다. 한 사건은 선지자 당시의 유다를 휩쓴 메뚜기 재앙이었다. 다른 한 사건은 주의 날에 대한 것이다. 주의 날이 메뚜기 재앙의 비유 속에 나타난다. 그것은 현재의 재앙과 온 세상에 내릴 미래의 심판을 묘사하기 위한 것이다. 요엘 선지자의 예언의 목적은 주의 날을 준비하기 위하여 그 나라가 하나님에게 돌아가게 하는 것이다. 그렇듯 제99회 총회 한 회기 동안 분쟁과 갈등 해소에 힘쓴 총회장 백남선 목사는 우리 총회와 노회와 교회가 다시 하나님에게 돌아가게 하기 위해 예언한 요엘 선지자의 영감을 이어갔다고 믿어도 좋을 것 같다. 이제 백남선 목사에게 남아 있는 일은 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과 23개 장로교단이 모여 이루어진 한국장로교총연합회 대표회장이다. 11월 16일 한장총 사무실을 직접 방문해 대표회장 후보 신청서를 접수한 백남선 목사는 말했다. “대표회장이 된다면 장로교단들이 힘을 합쳐 이단에 대처하고 평화통일의 기반을 조성하며 위기 상황에서 한국교회를 지키는 일에 힘쓰고 싶습니다. 회원들의 뜻을 받들어 한국교회가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어 가겠습니다. 특히 한기총이 이단문제로 힘을 잃은 상황에서 한장총은 한교연과 힘을 합해 한국교회의 이미지를 쇄신하는 일에 힘썼으면 좋겠습니다.” 서만종 목사(광주단비교회)가 백남선 총회장은 후배이고 같은 노회원인 우리를 늘 아끼고 키워주셨다고 말하듯 전남노회와 총회를 위해 얼굴에 잔줄이 생긴 사람이 여기 있다. 주름을 펴고 주름을 없애는 이들도 있으나 주름은 솔직해서 얼마나 좋은가. 더울 때에도 추울 때에도 자연스레 맞추어 응할 줄 아는 사람이 여기 있다. 어느 때에는 시원스럽고, 어느 때에는 온화하고 화창한 기색이다. 빙긋이 웃을 때에도 크게 웃을 때에도 주름이 잘 생긴 얼굴에 물결처럼 인다. 그런 백남선 목사에게는 자신의 분신처럼 여기는 두 개의 가방이 있다. 하나는 교인 심방을 갈 때 성경과 찬송가를 담은 어깨에 메는 가방이다. 다른 하나는 주일마다 들고 다니는 가방이다. 그 하늘색 가방에는 성경과 찬송가, 설교 노트, 사탕 등이 담겨 있다. 주일 예배를 마치고 교인들과 인사가 끝나면 교회 어디나 그 가방을 들고 다닌다. 아이들을 만나면 그 가방에서 사탕을 꺼내 준다. 이 가을 제100회 총회 실행위원회의 서늘함을 우리는 이해할 수 없었다. 허공에 제 몸을 던져 날리는 총회 앞 낙엽들 소리를 이해할 수 없었다. 다만 마주할 뿐이다.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주 작은 것들뿐이다. 하나에 하나를 더하면 둘이 된다는 계산 정도다. 총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좀 큰 것들은 이해의 대상을 넘어서 놀라움의 대상이 된다. 아침 기도를 한다. 아침이 어디서 왔지. 여호와께서 폭풍 가운데 욥에게 말씀하셨다. “무지한 말로 이치를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광명이 어느 길로 말미암아 뻗치며 동풍이 어느 길로 말미암아 땅에 흩어지느냐. 까마귀 새끼가 하나님을 향하여 부르짖으며 먹을 것이 없어서 오락가락할 때에 그것을 위하여 먹을 것을 예비하는 자가 누구냐.” 해는 동쪽에서 뜨고 서쪽으로 진다고 말하거나 먹을 것은 고마운 농부의 손에서 왔다고 가르쳐서는 만의 하나만 가르친 것이다.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게 곧 하나님의 섭리고 구원이다. 두 개의 가방을 사랑하는 광주미문교회 목회자이고 제99회 총회장이었고 한장총 대표회장이 될 백남선 목사는 총회 100년 역사의 한 획(劃)을 긋고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의 뜻을 실행한 중요한 인물로 기억될 것이다. 2015-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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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11-21
  • 더굳뉴스 제 20호 제100회 총회장 박무용 목사
    1980년 황금동 허허벌판에서 박무용 목사는 자신을 치료해 준 예쁘고 선한 간호사 출신의 안이자 사모와 단 둘이 예배드리는 개척교회로 출발해 1,000여명 교인의 교회로 성장시킨 대구 황금교회의 목회자이다. 그런 그가 2015년 9월 14일 성역 35년 만에 12,000여 교회의 보수 장자교단의 제100회 총회 총회장으로 대구 반야월교회에서 취임한다. 대낮 한 차례 폭염의 잔류부대가 대전중앙교회 앞 주차장에 집결하고 있는 9월 1일 오후 1시 30분 총회 정치의 전설 이영수 목사 시무 당시 70년대에 새로 지은 대전중앙교회 본당에서 예배 후 제100회 총회장 후보 박무용 목사는 설교단 오른 편 대기석에서 일어나 앞으로 나와 머리 숙여 인사한 뒤 단에 서서 총회장 후보가 아닌 제100회 총회장 당선자 자세로 자신의 실천 사항 공약을 다짐하는 정견발표를 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제100회 총회 총회장 후보로서 지난 한국교회 역사의 100여년을 통해 임한 하나님의 은혜와 우리가 당면한 현재 우리의 모습과 교단의 당면 과제와 교단의 미래와 비전을 생각하는 가운데 다음의 사항에 역점을 두고자 합니다. 그래서 총회가 교회의 본질과 공교회성을 회복해 새로운 한국교회의 미래 선교 100년을 향해서 다시 한 번 힘찬 생명력으로 비상하는 총회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이에 저는 금번 100회 총회가 첫째, 개혁주의 신앙에 기초한 총회 100여년 역사의 정체성 확립에 힘을 쓸 것입니다. 둘째, 깨끗한 총회가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셋째, 총회 중장기 정책 기능을 강화해 미래지향적인 정책 중심의 총회가 되도록 힘쓰겠습니다. 넷째, 총회 산하 기구에 대한 조정과 통제 기능을 강화시켜 나가도록 힘쓰겠습니다. 다섯 째, 총회의 교육, 전도, 구제, 봉사 등에 있어서 교회 본연의 사역 영역과 중복된 기능과 임무를 조정하고 사업의 지속성과 전문성을 강화해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총회 대내외적으로 첫째, 우리 한국교회의 연합 사역에 있어서 명실상부한 공교회적 연합의 질서를 만들어 갈 수 있도록 힘쓰겠습니다. 둘째, 곧 다가올 민족통일의 시대를 앞두고 남북교회가 다함께 기도하며 남북통일을 준비해 갈 수 있도록 힘쓰겠습니다. 셋째, 세계개혁주의 기독교단 단체들과 교류와 협력의 시대를 열어 총회 사역의 지평을 세계로 넓혀가도록 하겠습니다. 제100회 총회장 후보로서 이제 한국교회의 미래를 위한 정책 중심의 총회로 거듭나서 총회 산하 모든 교회가 민족과 국가를 위한 복음의 사역을 힘 있게 전개해 나가기를 바라면서 섬기는 리더십으로 총회를 건강하게 세워나가는 데 혼신의 노력을 다할 것을 다짐합니다. 감사합니다. 작년 2014년 9월 22일 광주 겨자씨교회에서 열린 제99회에서 한 차례의 제비뽑기를 통해 세 후보 가운데 가장 강력한 후보 김승동 목사가 탈락했다. 그는 총회에서의 정치 경력이 별로 없는 정연철 목사를 누르고 제99회 총회 부총회장에 당선된 박무용 목사(대구수성노회·황금교회)는 100년 전통을 이어온 최대 규모의 교단에 필요한 것은 책임감과 강력함을 가진 리더십이라고 강조한다. 그때 그는 말했다. “지도자의 무책임과 리더십 부재가 수많은 생명을 단숨에 죽음으로 몰아넣었고, 큰 배를 바다로 침몰시킨 세월호 사고의 모습을 보며, 최근 몇 년간 혼란을 겪고 있는 우리 교단을 바라보게 됐습니다. 이제 우리 교단이 다시금 위상을 회복하고 한국교회를 이끌어 가기 위해서는 책임을 질 줄 알면서도 거대 교단을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강력한 리더십이 요청되는 시점이라 생각합니다.” 박무용 목사의 말은 배우는 막이 내리면 일이 끝나지만 정치가는 연설이 끝나면 모든 것이 시작된다는 말을 떠오르게 한다. 그것은 연설의 실천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인상이 좋고 인화력이 출중한 그가 섬기는 리더십으로 총회를 건강하게 세워나가는 데 혼신의 노력을 다할 것을 다짐한 약속대로 100년 총회의 드문 지도자가 되길 바란다. 2015-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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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9-10
  • 더굳뉴스 제 19호 예수향기 변우상 목사
    버스 창문 밖으로 교회 건물의 어깨에 여름성경학교를 알리는 긴 천이 걸려 있는 모습이 보인다. 여름이 깊어가면서 산과 들을 찾는 사람이 많다. 나무와 꽃이 내뿜는 여름의 향기에 몸과 마음이 절로 깨끗해진다. 후각은 인간의 감각 중에서 가장 오래된 감각이다. 인체에서 제일 먼저 발달한 감각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후각의 비밀이 밝혀진 것은 최근의 일이다. 미국의 리처드 액설(Axel)과 린다 벅(Buck) 연구팀은 1991년 코에 있는 후각 수용체의 기능을 처음으로 규명했다. 이들은 이 공로로 2004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다. 후각 수용체와 특정한 향기 분자는 마치 열쇠와 자물쇠처럼 결합한다. 맛이나 냄새를 말로 설명하기는 뜬구름 잡기처럼 어렵다. 그래서 맛을 풀이할 때처럼 어떤 특정한 사물을 보기로 들어 설명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짠맛의 풀이는 아주 쉽다. '짠맛: 소금 맛과 같은 맛.' 그래 바로 이거다. 얼마나 간단하고 알기 쉬운가. 신맛은 식초나 설익은 살구, 매운맛은 고추와 겨자, 단맛은 꿀, 고소한 맛은 볶은 참깨나 참기름과 같은 맛이라고 설명된다. 음식이 입에 당기는 맛을 뜻하는 감칠맛도 소중한 맛이다. 감칠맛은 움직씨 '감치다'에서 비롯된 것인데, '감치다'는 '잊혀지지 않고 늘 마음에 감돌다'라는 뜻을 가진다. 감칠맛과 짝을 이루는 그림씨, 다시 말해 감칠맛을 표현하는 그림씨는 '맛깔스럽다'일 것이다. 맛깔은 맛의 빛깔, 곧 맛의 성질을 말하는데, 음식 맛이 입에 맞거나 마음에 들 때 '맛깔스럽다'고 하는 것이다. 맛과 마찬가지로 냄새도 말로 설명하기는 뜬구름 잡기처럼 어렵다. 그래서 맛을 풀이할 때처럼 어떤 특정한 사물을 보기로 들어 설명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냄새를 나타내는 말들은 동시에 사람의 성품이나 하는 짓을 가리키는 말로 쓰이는 경우가 많다. 마음 쓰는 것이나 하는 짓이 다랍고 잔 것을 '고리다'고 하고, '구리다'는 하는 짓이 더럽고 추잡한 것, '노리다'는 마음 쓰는 것이 치사스러운 것을 나타낸다. 하는 일이 아니꼽거나 무엇이 너무 적어서 마음에 차지 않을 때는 '비리다'고 한다. '타분하다'는 생선이나 고기 따위가 약간 상하여 새뜻하거나 신선한 맛이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고리다'와 '타분하다'가 결합하면 '고리타분하다'가 되어 냄새가 고리고도 타분하다는 뜻이 된다. 군내는 제 본맛이 아닌 다른 냄새를 가리키는데, 텁텁한 군내는 군둥내라고 한다. 날내는 날것에서 나는 냄새, 풋내는 새로 나온 푸성귀 같은 것에서 나는 풀 냄새를 말한다. 빨래해서 갓 입은 옷에서 나는 냄새는 새물내, 빨지 않고 오래 둔 더러운 빨랫감에서 나는 쉰내는 자릿내다. 나도향의 본명은 나경손(羅慶孫)이다. ‘경사스런 손자’라는 뜻이 싫어 박종화에게 부탁해 필명을 도향(稻香)으로 지었지만 가족들은 ‘나락의 향기’라는 뜻의 도향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향기란 곧 사라지는 것이라는 게 가족들의 생각이었다. 그런데 변우상 목사의 이름에서는 은퇴하기 전이나 그 후에도 언제나 빨래해서 갓 입은 옷에서 나는 새물내 느낌의 향기가 난다. 언제나 변함없이 나는 그 새물내를 예수향기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꽃이 향기로 말하듯 목사는 예수향기로 말하지 않을까. 그래서 변우상 목사를 생각하면 용인제일교회 교인들은 새물내 느낌의 예수향기에 콧구멍이 그리움으로 벌름거릴 것이다. 변우상 목사의 설교나 삶에서는 꾸미고 덧씌운 듯한 가식이 느껴지지 않는다. 누구나 그의 설교를 듣거나 삶의 이야기를 읽다보면 예수향기를 느낄 수 있을 듯하다. 특별히 목사는 자신의 부인에게 삶과 설교에서 감동을 준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부부란 날마다 서로 가릴 것이 없는 처지이기 때문이다. 변우상 목사의 설교에 대한 고(故) 김영순 사모의 태도를 그들의 딸 변순주 집사가 이렇게 회상한다. 늘 바쁜 남편을 당신의 남자로 욕심내지 않으시고 목사님으로만 모셨던 사모님. 여자이기 보다 목사 부인으로만 사셨던 나의 엄마. 항상 아빠를 사랑하시고 아빠 설교에 은혜 받았다고 행복해 하셨지요. 설교시간이면 예배실 장의자를 잡고 앞으로 달려 나갈 것 같은 자세로 말씀에 집중하시던 엄마 모습이 눈에 선해요. 엄마는 은혜를 간절히 사모하는 신자의 모범이셨어요… 그리스도인은 어떤 존재일까? 세상 속에서 그리스도인의 특징은 어떻게 나타날까? 사도 바울은 특이하게 "냄새"를 가지고 그리스도인을 설명한다.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 이 사람에게는 사망으로 좇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요 저 사람에게는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라 누가 이것을 감당하리요 고린도후서 2:14-16 고린도후서 2:15절에 "우리는 구원 얻는 자들에게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니"라 말씀한다. 생명으로 좇아 생명에 이르는 냄새가 나는 그리스도인을 누가 감당하겠는가. 주께서 나는 길이요 생명이라 말씀하신다. 사람이 살아서 숨 쉬고 활동할 수 있게 하는 힘이 생명이다. 그러므로 생명에 이르는 냄새는 예수의 냄새, 예수향기가 나는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이다. 사도 바울은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온 로마제국 군대가 주피터 신전에서 승전을 기념하며 향을 피우는 장면을 상기시키고 있다. 그래서 14절에서 "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말씀한다." 승리의 향을 피우는 로마 장군들과 같이 죄와 거짓과 사망을 주무기로 싸움을 걸어오는 악한 세력들을 물리치고 구원과 영생을 베푸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를 나타내는 예수향기를 내는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인이다. 마음 쓰는 것이나 하는 짓이 다랍고 잔 '고린' 냄새, 더럽고 추잡한 '구린' 냄새, 마음 쓰는 것이 치사스러운 '노린' 냄새가 진동하는 세상 속에 빨래해서 갓 입은 옷에서 나는 새물내로 신선하고 신령한 예수향기를 발하는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아니겠는가. ‘새물내’는 ‘빨래하여 이제 막 입은 옷’이라는 의미의 ‘새물’에 냄새를 뜻하는 접미사 ‘-내’가 합쳐진 말이다. ‘오래도록 빨지 않은 빨랫감의 쉰 듯한 냄새’를 뜻하는 ‘자릿내’가 그 반대어라 할 수 있다. 어떻게 하면 새물내 같은 예수향기를 내며 살아갈 수 있을까? 어느 날 순례자가 길에서 향내가 나는 한 덩이의 진흙을 발견해서 방에 갔다 났다. 그랬더니 온 방 안에 아름다운 향기로 가득 찼다. 순례자는 그 이유가 궁금했다. 진흙덩이에서 나는 이 놀라운 향기는 무엇일까? 알고 보니 이 진흙 덩이는 백합과 같이 있었다. 진흙에 불과했지만 백합과 함께 있었으므로 놀라운 향기를 방안에 풍기는 흙이 되었다. 진흙 속에 배어 있는 백합의 향기,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예수향기이다. 그렇다. 아무리 질그릇 같은 인생이라도 그 안에 예수님이 계시면 향기로운 인생을 산다. 제3대 안디옥의 총대주교이자 사도 요한의 제자인 이그나티우스(Ignatius of Antioch;50년 ~ 117년)는 그의 고결한 성품으로 데오포로스(Theophoros; 하나님을 닮은 사람)라고 알려졌다. 현재 '가톨릭'이라는 용어가 사용된 가장 오래된 문헌이 바로 이 사람이 쓴 편지이다. 로마 제국의 제13대 황제이고 오현제 중 한 사람인 트라이아누스(Traianus; 53년 9월 18일 - 117년 8월 7일)조차 그의 고매한 인품을 존경했다. 어느 날 황제가 그런 별명을 얻게 된 이유를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황제 폐하, 그것은 제 가슴 속에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시고 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마음에 품은 사람에게서 예수의 아름다운 향기가 넘쳐난다. 찬송가 샤론의 꽃 예수는 이렇게 노래한다. "샤론의 꽃 예수 나의 마음에 거룩하고 아름답게 피소서. 내 생명이 참 사랑의 향기로 간데 마다 풍겨나게 하소서. 예수 샤론의 꽃 나의 마음에 사랑으로 피소서." 작시자 아이다 가이리 여사는 별로 알려지지 않은 무명시인이었다. 그런데 유명한 찬송 작곡자 찰스 가브리엘 목사가 그녀의 찬송시 '샤론의 꽃 예수'를 읽고 난 후, 깊은 감명을 받아 이 곡조를 작곡했다. 이 찬송시의 배경은 "나는 샤론의 수선화요 골짜기의 백합화로구나"(아 2:1)란 구절이다. 신랑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함과 아름다움을 찬양하면서, 그리스도의 능력과 영광을 찬양하는 내용이 시적인 어휘로 표현되어 있다. 아름다운 새로움의 꽃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들은, 먼저 그리스도의 향기를 날리며(고후 2:15), 열매를 맺어야 한다(갈 5:22; 엡 5:9). 이 시대 우리 총회의 그런 표본이 변우상 목사이다. 그래서 나는 그를 예수향기라 부르기로 했다. 그러면 그는 누구인가. 당시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민족의 아픔인 6.25전쟁을 겪으면서 학업이 늦어져 다른 연배보다 2년 늦게야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졸업 후에도 가정형편상 중학교에 입학할 수가 없어 고향에서 꼴을 베고 있던 어느 날, 교복을 입고 학교에 등교하는 친구들을 보고 공부하고 싶은 마음이 북받쳐 올라 비가 유난히 많이 오던 그 날 무작정 서울로 상경했다.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이 처음 서울 큰아버지 댁에 찾아가서 중학교 공부를 시켜달라고 간청했다. 큰아버지의 도움으로 중학교 과정을 마치고 야간 고등학교에 입학하여 신문배달, 과외, 라디오수리공 등 다양한 일을 하면서 고등학교과정을 마쳤다. 신앙은 모태신앙이기에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교회생활에 열심이었다. 김승룡 목사님이 담임하시는 숭인교회를 출석했고, 학생회 회장은 물론이고 중학교 2학년 때부터 주일학교 교사를 하면서 신앙생활에 몰두했다. 중학교 때부터 주일학교 교사 생활을 했기에, 교회에서도 여러 가지 일들을 도맡아 했다. 그렇게 자연스레 목회의 길을 가야겠다고 생각하던 중 목회자로 헌신하게 만든 중요한 계기가 있었다. 고등학교 1학년 때였는데, 학교 담임선생 결혼식에 참여하고자 주일에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지 않고 친구들과 함께 선생님의 결혼식에 갔다. 본인을 제외한 친구들 모두가 술을 마시다가 시간이 늦어져서 막차를 잡기 위해 뛰어가게 되었다. 마침 다리 위를 뛰어가고 있었는데, 맞은편에서 오는 버스 헤드라이트 불빛이 너무 밝아서 길을 잘못보고 다리 밑으로 떨어졌다. 그 순간 기절해버렸고 이것을 본 버스 운전기사와 친구들이 즉시로 달려가 버스에 실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서울로 올라가던 중 버스에서 깨어났다. 그 순간 주일성수를 지키지 않고 결혼식에 갔던 것을 하나님께 회개하고 살려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목사가 되리라 결심했다. 변우상 목사(총신 65회)는 총회신학교 신학생 시절, 2학년 때부터 용인 목회를 시작했다. 숭인교회 고등부 학생시절 고등부를 담당하던 차용식 목사가 후에 신일교회 당회장 목사로 갔는데, 고등부 때 제자였던 변우상 전도사를 기억하고 신일교회 부흥회 강사로 초빙했다. 그래서 그는 낮에는 주일학교 성경학교를, 새벽과 저녁에는 장년부흥회를 인도하게 됐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차 목사가 다른 교회로 가면서 그에게 신일교회를 이끌기를 부탁했고, 신일교회 당회 및 교인들도 간곡히 요청해서 받아들이게 됐다. 그 때로부터 용인에서의 반세기 목회가 시작된 것이다. 그것이 1963년의 일인데, 2년 후인 1965년에는 포곡교회에서도 교회를 이끌어달라고 부탁을 해서 변우상 전도사는 신일교회와 포곡교회(現, 포곡제일교회)를 모두 목회했다. 주간에는 사당동 총신에서 공부하고, 토요일에는 버스를 타고 경기도 광주에서 내려 2시간을 걸어 교회에 도착했다. 용인에 오면 용인기독병원에 가서 매주 환자들에게 말씀을 전하고 위해서 기도했다. 그즈음에 김영순 사모를 만나 결혼했고, 그 시절 신혼여행은 고사하고, 돈이 없어서 신혼방도 어렵사리 마련했다. 1970년대 용인 시내에는 기장과 감리회 교단의 교회 2개만 있었다. 예장합동 교단 소속 교회는 없었다. 변우상 목사는 용인 인근에서 군목으로 사역하던 이기만 목사에게 교회를 개척하고 청소년 선교에 나서도록 독려했다. 1973년 4월 용인제일교회는 이렇게 설립됐다. 그러나 이기만 군목은 근무지변경으로 1년도 안 되어 전근을 떠나게 됐고, 결국 변 목사가 1974년 2월 천막 예배당 용인제일교회에 부임했다. 변우상 목사가 부임한 후 용인제일교회는 놀랍게 성장했다. 변우상 목사가 용인제일교회에 부임한 1970년대는 산업 성장이 한창인 터라 당시 용인 지역은 가죽 의류 염직 등 공장이 많았고, 20살 내외의 청년 노동자들이 일하고 있었다. 변 목사는 그 공장들을 돌아다니며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예배를 드리고, 전도와 구제 사역을 진행했다. 지역에 있는 동광통산, 화일상사, 원진레이온, 대동화학, 중앙염직, 경방, 신원산업 등 용인 관내에 있는 회사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신우회를 조직하여 매주 예배를 드렸다. 그 결과는 바로 나타났다. 노동자들이 주일날 교회로 몰려온 것이다. 이를 통해 산업선교를 확장시켰고, 또한 용인시장에 나가 발로 뛰며 전도하여 시장 복음화를 시작함으로 약 300점포의 많은 상점 주인들이 교회로 나오게 되었다. 그리고 1977년 4월 1일 제일어린이 선교원을 시작으로 지역에 있는 어린이 교육에 앞장섰고, 80년대에 들어서면서 의료혜택이 어려운 인근 면지역 주민들을 대상으로 무료진료를 시작했다. 이 사업은 녹십자병원 원장이었던 박종희 집사가 주축이 되어 용인제일교회에 출석하고 있던 의료관계자들로 의료선교회를 구성, 김정란 산부인과, 에덴 이비인후과, 부부한의원 등 의료에 종사하고 있는 성도들이 동참했다. 교회의 부흥과 더불어 하나님께서 변우상 목사가 전국 수백 교회와 기도원들의 부흥회를 인도하게 하셨다. 부흥회를 통해 성령의 강력한 은혜를 경험하고 그 은혜를 가지고 교회에 돌아와 성도들과 나눔으로 교회는 점점 더 말씀과 성령의 은혜로 강력한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신일교회, 포곡제일교회를 담임했던 전도사 시절에 교회에서 부흥회를 열고자 서울에 있는 큰 교회 목사님들을 강사로 초청했던 적이 있었는데, 용인의 시골 작은 교회여서 모시기가 쉽지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변 목사는 부흥회를 요청받으면 교회가 크든 작든, 멀든 가깝든, 어디든지 가기로 결심했다. 처음의 그 결심대로 땅 끝 마을 해남, 제주도, 미국, 뉴질랜드, 중국, 태국, 미얀마, 나병환자촌 교회 등 어디서든지 말씀을 증거해 달라는 곳이면 평생 거부하지 않고 말씀을 전하기 위해 나갔다. 용인제일교회는 청년을 중심으로 성장을 거듭했다. 교회가 성장하는 가운데 변우상 목사에게 위기가 닥쳤다. 그것은 1980년 당시로서는 용인과 수원 지역에서 최대 규모인 연건평 692평 예배당 건축 때문이었다. 건축비의 어려움으로 용인제일교회가 부도난다는 소문이 용인 전역에 난무할 정도였다. 교인들의 헌금도 한계에 달해 빚은 날로 늘어만 갔다. 그 때 기적이 일어났다. 그것은 용인제일교회 초대 장로 故 박한신 장로가 폐암으로 사형선고를 받고 투병 중에 자신의 눈을 팔아 교회를 건축할 벽돌을 사서 쌓아달라는 유언을 했다. 또 최애현 권찰이 와서 자신의 건강한 눈을 팔아 교회 건축에 필요한 재정을 감당하고 싶다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은 변우상 목사는 강단에 올라가 눈물로써 그분들의 중심을 전했고, 온 교회 성도들은 통곡하며 자신의 것을 아낌없이 하나님께 드리기 시작했다. 당시 청년회 회장이었던 권희용 장로를 중심으로 청년회에서 금품 봉헌 운동이 일어났고, 결혼자금으로 모아둔 통장을 가져오는 청년들, 집을 팔고 전세로, 전세를 월세로 돌려 건축헌금을 하는 성도들이 계속 이어졌다. 예배당 건축은 5년 동안 공사를 할 정도로 힘이 들었다. 그러나 그 열매가 현재 마평동 655번지에 우뚝 서있는 용인제일교회 예배당이다. 교회 건축이 끝나고 1987년부터 시작한 총력 전도를 통해 믿지 않는 사람들이 주께로 돌아와 하나님의 전을 채우고 1000명, 1500명으로 매주일 출석하는 교인수가 증가하게 되었다. 그런 성도들의 성장에는 그림자처럼 목사님을 내조하는 故 김영순 사모가 있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는 그날까지 매일 저녁 금식을 하며 교회와 목사님을 위해 찬 마룻바닥에 엎드려 기도했다. 사모님의 헌신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자신이 가지고 있던 예물은 물론 힘에 지나도록 하나님께 모든 것을 다 드렸다. 병든 환자들의 입원비, 쌀이 없는 가정에 쌀을 가져다주고, 겨울이면 연탄을 배달해 주었다. 본 교회 교육전도사들이 결혼할 때면 일일이 혼수품을 챙기고, 어려운 이웃 교회 목사님 댁에 음식은 물론이고 쌀과 헌금도 베푸는 사랑의 메신저였다. 변우상 목사가 사모와 심방을 하던 초창기는 성도 가정이 모두 어려워 물 한 컵 대접할 여유밖에는 없었다. 그래서 그는 심방이나 전도를 다니실 때는 언제나 주머니에 비스킷을 넣고 다니면서 먹었다. 성도들이 점심을 드셨느냐고 물어볼 때, 가난한 성도들도 배려하고 또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도 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정신병자들도 집에 데리고 와서 날마다 찬양하며 기도하고, 오갈 데 없는 사람들도 좁은 사택에서 함께 머물게 하고, 교회 청년들이 집에 와서 언제든 밥을 먹고 교제를 나누게 하는 등 초대교회의 모습을 몸소 실천했다. 온 마음과 온 몸을 다해 교회와 남편을 위해 헌신하던 2000년 세상을 떠난 고(故) 김영순 사모의 마지막을 그들의 딸 변순주 집사가 2012년에 이렇게 회상했다. 13년 전 2000년 GMS선교대회가 수원에서 열렸습니다. 그 대회 저녁예배 찬양봉사를 위해 용인제일교회 성가대와 변우상 목사님이 교회버스로 교회에서 출발한지 얼마 안 되어 집에서 저한테 전화가 왔습니다. 어머니의 말소리가 분명하지 않았습니다. 저는 한걸음에 집으로 달려갔고 어머니를 진찰하신 한의사는 큰 병원으로 옮기는 게 좋겠다 말했습니다. 119구급차를 타고 아주대병원으로 갔습니다. 구급차 안에서 어머니는 눈이 몹시 아프시다 하면서도 아버지 변우상 목사에게는 선교대회 예배가 끝날 때까지 연락하지 말라 당부하셨습니다. 그 말씀이 유언이 되리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수술 후 중환자실에 계신 어머니를 뵙고 온 가족이 함께 조용히 기도드릴 때 어머니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2012년 12월 1일 토요일 용인제일교회 목회 38년과 예수향기를 날린 평생 사역 50년을 마감하고 기리기 위해 변우상 목사 원로추대 및 임병선 목사 위임 감사예배가 용인시 마평동 용인제일교회 본당에서 거행됐다. 장년 4000명이 출석하는 교회로 성장한 예배당은 용인제일교회 성도는 물론 중부 지역 목회자 및 장로들과 지역 정재계 인사 등으로 가득 찼다. 변 목사가 지역사회와 총회와 교계에서 고결한 성품으로 데오포로스(Theophoros; 하나님을 닮은 사람)로 불린 사도 요한의 제자 이그나티우스 같은 “한국 교회의 예수향기 목사”로 일컬어지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날 감사예배는 축하와 아쉬움이 교차했다. 설교를 한 증경총회장 김준규 목사는 “한 교회에서 사역하시며 목회자로서 정말 잘 달려오셨다. 본분을 다하셨다. 존경을 받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축하했다. 이어 변 목사의 39년 목회 회고영상이 상영되고, 담임목회자로 마지막 인사를 하는 시간이 되자 성도들은 참았던 눈물을 흘렸다. 박한준 장로는 눈물을 삼키며 “목사님은 오직 목양일념으로 우리의 선한 목자가 되어주셨습니다. 감사합니다”라고 인사를 했다. 예수향기 변우상 목사는 눈물 머금은 동안(童顔)의 얼굴로 답사를 했다. “지난 50년, 행복하게 목회했습니다. 먹고사는 일에 신경 쓰지 않고 주님의 일만 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하고 복된 일입니까. 그래서 미치도록 목회를 했고, 후회는 없습니다. 주님 감사합니다. 성도 여러분, 고맙습니다.” 변우상 목사가 원로로 추대된 2013년 7월에 새롭게 담임목사가 된 임병선(총신 92회, 전 신반포교회 청년담당 부목사) 목사는 설립 40주년을 맞아 용인제일교회를 젊은 분위기, 역동적인 분위기로 바꿔 나가며 하나님 나라 확장의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슬하에 6남매가 있고 그중 신학을 공부한 자녀도 있지만 그는 담임목사 초빙공고를 통해 임병선 목사를 후임으로 결정했다. 변우상 목사는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그의 인품이 드러난 후임자 선정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70세 정년을 앞두고 10년 전부터 기도해 왔다. 실제 준비는 5년 전에 시작했다. 공개모집을 통해 후임으로 4명이 지원했다. 장로들이 중심이 된 교회 당회(20명)에서 먼저 이들을 심사했다. 물론 4명 모두 우리 교회나 나하고는 특별한 연고가 없는 사람들이다. 이 가운데 투표를 통해 한 명을 선정했다. 장로님들이 자꾸 내 의중을 알고 싶어 했지만 일체 함구했다. 내 말 한마디가 결정적으로 작용될 것은 빤하지 않겠는가. 당회에서 후보자 1명을 선정했고 이를 온 교인이 참여하는 공동의회에 부쳤다. 3분의 2 찬성을 얻어야만 최종 통과가 되는 것이고 그 이하일 경우에는 다시 모집공고를 내도록 했다. 다행히 교인들이 후임자를 흡족하게 여겼고 임병선 목사를 담임으로 청빙하게 됐다.” 이제 2015년 12월에 용인시청 근처 용인시 처인구 역복동 산 97-1 대지면적 6,176평에 건축 면적 5,000평의 건축 설계를 완료하고 2016년 착공해 2017년 12월 준공을 목표로 새로운 예배당 글로리센터 건축을 추진하고 있다. 용인제일교회의 이런 모든 크고 작은 일에 원로 변우상 목사는 후임 임병선 목사를 적극 후원하고 후임 임병선 목사는 원로 변우상 목사의 기대와 뜻을 살리고 높이는 목회를 한다. 은퇴 이후에도 변우상 목사의 예수향기는 6남매 자녀 모두와 함께 사는 용인의 빌라에서, 용인제일교회에서 한 달 한 번 하는 저녁설교에서, 수원의 은퇴 목회자들이 모이는 경기도 수원시 권선구 덕영대로 1201번길 16 세일프라자 3층의 희망은목교회 등에서 빨래해서 갓 입은 옷에서 나는 새물내처럼 여전히 날리고 있다. 이런 시가 있다. 꽃은 진종일 비에 젖어도 향기는 젖지 않는다 빗방울 무게도 가누기 힘들어 출렁 허리가 휘는 꽃의 오후 꽃은 하루 종일 비에 젖어도 빛깔은 지워지지 않는다 빗물에 연보라 여린 빛이 창백하게 흘러내릴 듯 순한 얼굴 꽃은 젖어도 향기는 젖지 않는다 꽃은 젖어도 빛깔은 지워지지 않는다 라일락꽃 도종환 진정 도종환 시인의 라일락꽃 같은 평생의 반려자 2000년 김영순 사모가 떠나는 그 날, 그 주일(主日)에도 하나님이 주신 사명을 놓을 수 없어서 강단을 비우지 않고 슬픔을 참고 설교하고, 평생 새벽기도를 할 때마다 장로님들로부터 모든 성도와 자녀, 그리고 총회 산하 모든 교회에 이르기까지 기도하고, 맨 마지막에야 자신의 가족들을 위해 기도하는 삶을 현실에서 보이며 살아온 변우상 목사는 진정 예수를 그 가슴에 품었기에 예수향기가 새물내처럼 풍기는 데오포로스(Theophoros; 하나님을 닮은 사람)였다. 2015-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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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7-29
  • 더굳뉴스 제 18호 제1 총신인 김승동 목사
    B.C. 44년 2월 종신 독재관이라는 실질적인 통치자가 된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는 그 모든 권력을 뒤로한 채 한 달 후인 3월 15일 암살당했다. 카이사르를 암살한 자들이 지키려 했던 공화정은 급속히 확대되는 로마의 정세에 대처할 힘을 잃어가고 있었다. 군단을 장악해 그 위력을 그대로 권력으로 삼는 지휘관들이 반목하는 가운데 시민들은 포악한 독재자가 나타날지도 모른다고 두려워했다. 스스로가 단독 지배자가 되려 했던 카이사르가 생전에 제안했던 대규모 개혁은 완성되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게 되었다. 막대한 재산, 그리고 정치적 유산이 방치된 것이다. 암살자 마르쿠스 브루투스는 행위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시민들 앞에서 연설했다. 그 무렵에 카이사르의 사택에서는 유언장이 공개되었다. 그 유언장에는 클레오파트라 7세와 그녀와 카이사르의 아들 프톨레마이오스 카이사르(카이사리온)의 이름은 어디에도 없었고 카이사르의 오른팔인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는 상속인이 아니라 유언 집행 책임자로 지명되어 있었다. 유언장에 의해 재산의 제1 상속인이 되고 또한 후계자인 양자가 되도록 지명된 것은 시민들에게 전혀 알려지지 않았던 무명의 젊은이, 열여덟 살의 옥타비아누스였다. 가이우스 옥타비아누스라는 이름은 그가 평민 출신임을 나타내는데, 지방 도시 벨레트리 출신의 아버지도 같은 이름이므로 구별하기 위해 그는 옥타비아누스(작은 옥타비우스)라 불렸다. 아버지는 그가 어릴 때 사망해 로마의 관습에 따라 어머니는 남편이 죽은 후 곧 재혼했다. 어머니 아티아는 카이사르의 여동생 율리아의 딸이기 때문에 카이사르는 옥타비아누스에게 큰할아버지가 된다. 카이사르도 옥타비아누스를 눈여겨보았던 것 같다. 전쟁의 지휘관 카이사르는 옥타비아누스에게 군사적 재능이 없음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카이사르는 이 소년을 저버리지 않고 보좌역으로서 젊고 우수한 병사 아그리파를 붙여 암살당하는 날 며칠 후에 출발을 예정하고 있던 파르티아국 원정(遠征)에 참가할 것을 허락했다. 옥타비아누스가 카이사르의 죽음을 안 것은 파르티아 원정군의 결집지인 그리스의 아폴로니아에서였다. 카이사르가 암살당한 지 한 달 후에 옥타비아누스는 로마로 귀국했다. 암살자들은 시민들의 지지를 얻는 데 실패했고 이미 로마를 떠난 후였다. 카이사르의 후계자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안토니우스는 입지를 굳히기 위한 행동을 시작했다. 카이사르의 유산을 자택으로 옮겨놓고 자기의 군대를 위한 자금으로 사용했다. 역전(歷戰)의 군인인 서른여덟 살의 안토니우스에게 카이사르의 유언장에서 지명되었다고는 하지만 열여덟 살 소년에 불과한 옥타비아누스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로마의 관습상 죽은 유력한 인물의 후계자는 연극이나 경기 대회를 개최하고 관객을 초대해야만 했다. 옥타비아누스는 그 때문에 안토니우스에게 카이사르의 유산 반환을 요청했는데, 이 요구는 묵살되었다. 그러나 젊은 나이에 고난의 길을 걷기 시작한 옥타비아누스 앞에 그를 카이사르의 정통 후계자로 인정하는 재계(財界)의 유력자들이 잇달아 나타난다. 그들의 자금으로 옥타비아누스가 개최한 카이사르 기념 경기대회는 성공리에 끝났다. 미덥지 않아 보이는 이 젊은이의 무기는 어쩔 줄 몰라 하면서 고심참담(苦心慘憺)하는 모습 그 자체였다. 안토니우스는 자신을 약자로 연출하는 전략을 선택한 옥타비아누스가 얼마나 위험한지 아직 깨닫지 못했다. 카이사르가 옥타비아누스를 후계자로 지명했다는 사실은 절대적인 효력이 있었다. 병사들은 잇달아 그의 군단에 참가했고, 자격 연령에는 스물한 살이나 부족한 옥타비아누스는 집정관에 입후보하여 당선되었다. 열아홉 살의 집정관이 탄생한 것이다. 시민 집회의 지지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원로원이 옥타비아누스가 고심 끝에 편성한 그의 군단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또한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 옥타비아누스가 된 그는 10개 군단 이상의 병력을 움직이는 권한을 손에 쥐었다. 그는 불과 1년 만에 이만큼의 진용(陳容)을 갖추었다. 놀랄 만한 일이었다. 그는 이 힘의 근원이 카이사르의 유언장 덕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B.C. 32년에 로마에서 안토니우스파 사람들을 추방한 옥타비아누스는 클레오파트라에게 선전포고를 하고 사기가 낮은 안토니우스·클레오파트라 연합군을 어렵지 않게 격파했다. 결전 '악티움 해전'에서도 완전한 승리를 거둔 옥타비아누스는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를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자결하게 했다. 안토니우스와의 내전이 종결되자 옥타비아누스는 '질서가 회복되었다'며 비상시에 그에게 집중되었던 군사?정치 결정권을 모두 원로원과 시민에게 돌려주겠다고 선언했다. 이 말에 로마 시민들 사이에서는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공화정으로 복귀하겠다는 이 선언에 감사하며 원로원은 '존엄자'라는 뜻의 아우구스투스라는 칭호를 수여했다. 이후 그는 아우구스투스로 불리게 된다. 초대 황제가 된 옥타비아누스에게 로마 원로원이 수여한 칭호로, '위엄 있는, 존귀한'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아우구스투스 이후 황제들의 칭호가 되었으며, 황제의 아내나 딸들에게는 아우구스타(Augusta)라는 칭호가 붙여졌다. 그리고 이 아우구스투스라는 명칭과 카이사르라는 호칭이 결합해야만 정식으로 인정된 황제였다. 예를 들어 아우구스투스 카이사르 클라우디우스 티베리우스'는 원로원의 정식 동의를 받은 티베리우스 황제라는 의미이다. '자신을 절대 위험한 사람으로 보이게 하지 않는' 아우구스투스의 독특한 재능은 훗날 카이사르조차 죽음으로 내몰았던 로마인들의 '제정(帝政) 알레르기'까지도 중화시켜 버렸다. 하지만 집단 지도체제인 과두제(寡頭制)의 한계를 느끼고 있던 카이사르의 뜻을 아우구스투스는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그는 독재적인 통치에 필요한 몇 가지 결정적 권한을 두드러지지 않게 유지하고자 했다. 우선 집정관으로서의 직무, 그 다음으로 군대의 최고사령관으로서의 칭호 '임페라토르'를 항상 사용하는 권리, 마지막으로 제1 시민이라는 뜻의 '프린켑스' 칭호였다. 특히 이 '프린켑스' 칭호는 아우구스투스의 목적 달성에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아우구스투스는 황제로서의 권한을 필요로 하면서도 국민들로부터 황제로 여겨지지 않도록 최선을 다했다. 어디까지나 원로원에서 제 1 발언권을 지닌 제1 시민 '프린켑스'로서 군대의 통수권을 장악하고 법률 제정을 담당했다. 정연철 목사가 설교집이라도 냈는지 광고비가 만만치 않을 기독신문 돌출 광고를 계속 하고 있다. 그걸 보니 그는 믿음과 총회 정치력이 아니라 로비스트만 잘 활용하면 될 수 있다는 경험에 의지해 총회 발전에 별로 도움이 안 된 서정배나 김용실처럼 다음에 또 부총회장 선거에 나올 모양이다. 2014년 9월 제99회 총회 당시 가장 유력한 김승동 목사가 제비뽑기 암초에 좌초했다. 그러자 김승동 목사의 지지표가 방향을 잃고 정연철을 찍는 바람에 박무용 목사가 정연철을 108표차로 신승했다. 이 소식을 접한 교계와 총회 정치의 원로목사이자 목회자 시인 백영규 목사는 침통한 어조로 말했다. "하나님께서 우리 교단을 사랑하시지 않는 모양이네.” 제비뽑기 덕에 결선 투표에 올라갔던 정연철 목사는 기도의 종이라는 소문과 달리 자신의 받은 표가 자신의 것이 아니었는데도 다시 나오면 그러한 지지를 얻어 총회장이 될 수 있다는 망상에 젖어있는 모양이다. 교계 지도자로서 모든 면에 탁월해 교단 전체 어느 누구와도 이길 수 있는 김승동 목사가 제비뽑기에서 떨어지고 그 덕에 몸도 약한 박무용 목사가 총회 상비부 부장도 되어본 적이 없는 상대를 손쉽게 이기고 부총회장이 되었다. 차제에 총회 선거는 무능력과 무자격자들이 즐기는 제비뽑기는 폐지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건강이 안 좋다는 말이 들리는 박무용 목사가 100회 총회를 치르고 난 뒤 감당할 스케줄들을 생각하면 걱정이 앞선다. 그런 선례가 바로 앞의 탱크 같은 건강과 힘을 자랑하던 총회 총무 황규철 목사일 것이다. 그는 무리한 총회 정치의 여파인지 지금 건강이 상당히 걱정스러운 수준이라는 말이 있다. 그럼에도 총회 총무 말기 총회 상대 재판 패소 건으로 공직을 맡을 수 없는 신분임에도 그는 문제와 사고로 실타래 같이 얽힌 평동노회 노회장이 되었다. 따라서 총회 결의에 따르면 총회 산하 어떤 공직도 맡을 자격이 없는 황규철 목사의 평동노회 노회장 사회로 추천을 받은 장대영 목사의 부총회장 후보 자격을 유지하고 당선까지 노리는 정치의 끈을 놓지 않고 있다. 미국 뉴욕시에서 북쪽으로 80여㎞가량 떨어진 고지대에 있는 미국 육군사관학교는 흔히 웨스트포인트(West Point)라고 한다. 그것은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 영국을 상대로 한 독립전쟁 때 뉴욕의 생명줄이나 다름없는 허드슨강을 지키려고 세운 요새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3대 대통령 토머스 제퍼슨이 1802년 이곳에 육군사관학교를 개교했다. 올해로 213년 됐다. 메릴랜드주 아나폴리스의 해군사관학교는 170년, 콜로라도스프링스의 공군사관학교는 61년 역사를 자랑한다. 미국의 사관학교는 단순한 장교 양성 기관이 아니다. 사관학교 교육의 기본 틀을 만든 인물이 1817년부터 16년간 미 육사 교장을 역임한 테이어 대령이다. '테이어 제도'의 요체는 국가에 대한 의무감, 명예, 헌신, 정직 등 리더에게 필요한 인성 교육에 인문학적 교양과 전문 지식까지 갖추도록 하는 것이다. 미국을 이끌 진정한 리더를 배출하는 교육기관이라는 자부심이 대단하다. 마찬가지로 총신도 세계와 한국을 변화시키고 이끄는 지도자를 배출하는 선지동산이라는 자부심이 드높다. 1901년 평양 대동문 옆 마포삼열(Samuel A. Moffet) 선교사 자택에서 평양조선예수교장로회신학교로 시작하여 1951년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신학교를 거쳐, 1995년 교명을 총신대학교(總神大學校, Chongshin University)로 변경한 총신은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에서 설립하였고, 네덜란드 중심의 화란 개혁주의보다 영미 중심의 웨스트민스터 신학전통을 따르며 바르트주의를 배격한다. 대한민국의 교육이념과 대한예수교장로회(합동) 총회의 개혁주의 교리에 따라 성경을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한 무오하고 절대적인 말씀으로 믿으며, 칼빈주의 혹은 역사적 개혁주의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대·소교리문답의 교리를 바탕으로 학문연구와 영성 및 인성교육을 실시하여 인류사회의 국가 및 교회에 기여할 인재 양성을 사명으로 한다. 1959년 제44회 총회 때 WCC문제로 개혁주의 보수신앙을 지키기 위해 빈손으로 갈라져 나와 세운 총신대학교는 개혁(장로)교단에서 가장 큰 신학교이며, 평양신학교의 정통권을 계승하고 있다. 총신대학교는 개혁(장로)교단에서 가장 큰 신학교이며, 평양신학교의 정통권을 계승하고 칼빈주의를 계승한 개혁주의 요람(搖籃) 114년의 총신의 힘은 바로 그 믿음에 근거한 것이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114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총신의 교훈은 신자가 되라, 학자가 되라, 성자가 되라, 전도자가 되라, 목자가 되라 이다. 이 학교를 통해 한국과 세계 교계에 귀감이 될 박형룡·박윤선·김창인·옥한흠·박영선·김승동 등의 목사들이 배출됐다. 그들 가운데에서도 로마의 제1 시민 옥타비아누스 같은 이 시대의 제1 총신인은 교계와 목회에서 올곧고 두드러진 활약과 업적을 세운 김승동 목사다. 그러므로 김승동 목사가 조선 선비들의 전통에 따라 그의 집 대들보에 글을 적는다면 ‘爲神, 爲如白, 爲詩’가 어울릴 것이다. 그 까닭은 이렇다. 위신(爲神)은 ‘하나님을 위해’라는 뜻이다. 이 글귀는 성경 시편 116편 12절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내가 여호와께 무엇으로 보답할꼬’를 외우며, ‘살아있는 동안 웬 은혜인가, 웬 사랑인가를 신앙으로 고백하며 살겠다’를 입과 몸에 달고 사는 김승동 목사의 신앙관에 맞는 글귀이기 때문이다. 위여백(爲如白)은 '흰빛과 같이 맑다'는 뜻의 ‘맑음을 위해’라는 뜻이다. 이 글귀는 김승동 목사가 평생 실천한 청렴을 나타내는 글귀이기 때문이다. 위시(爲詩)는 ‘시를 위해’라는 뜻이다. 이 글귀는 시를 읽지 않는 시대에 시를 통해 성도를 향한 애절한 사랑을 전하겠다며 시와 글을 써 책을 낸 목사이기 때문이다. 김승동 목사에 대한 세간의 평가는 “박진감 있는 목회, 성령의 역사가 넘치는 강단, 은혜로운 당회, 총회와 지역사회를 사랑하고 섬기는 목회자”이다. 그렇듯 지도력 부재의 이 각박한 시대에 보기 드물게 주일 예배에 눈시울에 눈물이 어리게 하고 마음을 다잡게 하는 설교자가 있다면 그는 구미상모교회의 김승동 목사이다. 그가 설교를 마치고 교회 마당을 지나면 놀던 아이들이 일제히 소리를 지르며 인사하거나 달려와 안긴다. 2015-0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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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6-22
  • 더굳뉴스 제 17호 크리소스톰 김희태 목사
    “교회 안은 온통 열광의 도가니였다. 감동의 절정에서 터져 나온 청중들의 환호와 갈채는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었다. 그의 설교가 정점을 향하여 치달을 때 회중들은 완전히 감동의 도가니에 빠져버렸고, 못된 소매치기들은 이때를 놓칠세라 더욱 눈을 움츠리며 손을 열심히 놀렸다.” 이 설교자는 안디옥과 동방교회가 자랑하는 4세기의 요한(St. John Chrysostom, AD 347~407)이다. 영어명 크리소스톰(Chrysostom)의 헬라명 크리소스토모스(Chrysostomos)라는 그의 통칭(通稱)은 그의 전설적인 웅변 때문에 붙여진 황금의 입(golden-mouthed)이라는 뜻이다. 그 통칭은 그가 너무나도 뛰어난 언변을 지녔던 설교자요, 당대의 사회에 영향을 끼친 인물이었던 탓이다. 위대한 설교자로서 크리소스톰과 관련된 일화 가운데, 그가 설교하는 곳에는 좀도둑이나 소매치기들이 많았던 이유는 그의 설교를 듣느라 사람들이 자기 소지품들을 챙기는 것조차 잊고 있을 정도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크리소스톰은 예의 바르고 다정하고 친절한 성품을 지니고 있었고, 영적으로나 도덕적으로는 거인이었지만, 체구는 왜소했다. 하지만 쾌활한 얼굴, 주름진 이마, 벗어진 머리, 꿰뚫어 보는 듯한 맑은 눈은 그의 설교를 듣는 사람들에게 영속적인 감명을 주었다. 크리소스톰은 주후 347년에 안디옥에서 출생했지만 아주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여의었다. 그는 신앙이 좋은 어머니에게서 경건훈련을 받았다. 어머니 안투사는 오로지 어린 크리소스톰을 키우는 데 헌신하여, 아들에게 최상의 훈련을 받게 하였다. 철저하게 기독교 신앙을 가르쳤고, 가장 훌륭한 교사 문하에 들어가도록 주선했다. 크리소스톰은 어머니 권유로 당시 이교도의 대변자요, 수사학의 대가인 리바니우스 문하에서 헬라 문학과 수사학을 배웠다. 그는 리바니우스의 최우수 학생으로 후계자로 지목될 수도 있었지만 신앙적인 이유로 거절했다. 크리소스톰은 다른 학문으로도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독교 신앙에 대한 연구에 일평생을 바치기로 결심했다. 어머니의 임종 후 그는 시리아에서 수도사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 때 안디옥 학파 지도자인 타르수르의 디오도루스(Diodorus) 밑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디오도루스는 성경을 우화적(Allegory)으로 해석하는 유행 방법을 배격하고, 문자적이고 역사적으로 면밀히 연구하는 법을 가르쳤다. 이러한 교육적 배경은 크리소스톰이 당시에 유행하던 심각한 알레고리 해석에 빠져 들지 않고 본문 해석에 힘쓰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크리소스톰은 6년간의 수도원 생활 가운데 2년 동안 밤낮으로 한 번도 누운 적이 없었다. 이 때문에 그의 건강은 극도로 약화되었다. 그의 위장은 거의 죽은 것과 다름없었고, 신장도 추위로 인해 제 기능을 다하지 못했다. 자기 스스로 몸을 돌볼 수 없게 되자, 결국 그는 교회의 품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때가 AD 380년이다. 그는 훗날, 수도원 생활은 목회자 훈련으로 적당치 못했다고 저서에서 고백했다. 또한 수도자와 목회자를 비교하면서, 목회자는 수도사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어려운 일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크리소스톰이 안디옥으로 돌아오자마자, 안디옥 교회의 부제가 되어 5년간 일하였다. 그는 가난한 사람과 부요한 사람들 등 많은 사람들을 접했고, 교회 실상도 익히게 되었다. 그는 AD 381년에 집사 안수를 받고, 가난한 대중과 접촉하면서 무엇을 설교해야 할 것인지 깨달았다. 그로부터 5년 뒤인 39세 때인 AD 386년 안디옥 교회의 장로 겸 수석 설교자로 임명받아 본격적으로 설교를 시작했다. 그는 무엇보다 심각하게 침체된 영혼들을 회복시키려고 애썼다. 그가 강단에서 쏟아내는 황금 같은 설교를 듣고자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회중들은 그의 설교를 들으면서 온갖 영적 체험을 경험했다. 안디옥의 고통을 묘사할 때는 마음이 녹아내려 눈물을 흘리는가 하면, 그의 격려에는 영혼의 활력을 되찾았다. 그가 설교할 때면 교회는 회중들로 가득했다. 그의 강해설교가 절정에 이르렀을 때 회중들은 자발적으로 박수갈채를 보냈지만 그는 습관적으로 이것을 싫어했다. 크리소스톰은 위대한 설교자로서 세상적이고 정치적인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전한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노력했다. 이생의 자랑과 안목의 정욕, 육신의 정욕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크리소스톰은 위대한 영성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능력 있게 선포하는 위대한 설교자가 될 수 있었다. 그의 설교 강론은 두 가지 형태로 전해온다. 하나는 초고 형식으로, 속기사들이 그의 설교를 들으면서 직접 기록한 것이다. 다른 하나는 후대 사람들이 이 초고를 다듬어서 일관성 있게 재편집한 것이다. 크리소스톰은 전례축일이나 특별한 기회에 맞추어 신구약 성경에 어떤 제목을 발췌하여 강론한 경우가 있는가 하면 신자들의 교육을 위해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강론한 것도 있다. 안디옥 학파의 영향을 받고 자란 크리소스톰이기에 설교는 항상 성경의 문자적, 역사적, 문법적인 해석 방법에서 얻은 영적 통찰을 기반으로 이루어졌다. 그의 강해는 윤리적 권면으로까지 폭을 넓혔다. 그의 설교는 세상과 연결 짓지 않고는 이해되기 어렵다. 설교자는 험한 세상에 다리를 놓는 사람이다. 존 스토트(John R. W. Stott)는 “참된 설교는 성경 세계와 현실 세계 사이에 다리를 놓는 것”이라고 말했다. 즉 다리 한쪽은 하나님의 거룩에, 다른 한쪽은 성도의 삶의 한복판에 연결되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크리소스톰이 주석에서 예화로, 성경 원리에서 실제적인 호소로 설교를 전개시켜 갈 때는 말의 속도가 차츰 빨라지며 제스처가 활발해지고 목소리는 점점 강렬해진다. 그러면 기대감에 부푼 청중들은 숨을 죽이고 긴장하다가 경우에 따라 열광적인 박수갈채를 보냈다. 그러나 크리소스톰은 청중의 박수갈채에 연연해하지 않았다. 그토록 많은 환호를 받은 크리소스톰이 다음과 같은 사실을 고백했다. “설교자가 박수갈채를 좋아한다면 자신뿐 아니라 회중에게 해(害)가 미칠 것이다. 칭찬에 대한 열망 때문에 설교자는 그들에게 보탬이 되는 설교보다 그들을 즐겁게 해 주려는 생각으로 조심스럽게 설교하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이 강단에 섰을 때 갈채를 받는 것은 기쁜 일이라고 솔직히 고백했다. 그렇지만 그것은 ‘잠깐의 전율’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왜냐하면 그를 칭찬했던 많은 사람들이 진심으로 메시지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을 나중에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박수갈채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은 그것을 금지하는 것이라고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크리소스톰의 설교는 본문의 순서를 따라 단순한 전개 형식을 취해 간다. 그럼에도 그가 ‘황금의 입’(크리소스톰)이란 별명을 갖게 된 것도 따지고 보면 어려서부터 최선을 다해 학문에 정진한 까닭이다. 크리소스톰의 설교는 세 가지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첫째, 성경에 대한 풍부한 이해력이 있었다. 둘째, 신학에 대한 심오한 통찰력으로 실생활에 연관시키는 능력을 가졌다. 셋째, 설교를 불붙게 하는 정열이 넘쳐 흘렸다. 이런 4세기의 크리소스톰을 닮은 21세기의 목사가 서울에 한 사람 있다. 그는 동광교회의 김희태 목사다. 1966년 3월 15일 창립된 동광교회에 1987년 12월 25일 김희태 목사가 부임했다. 김희태 목사 부임 당시 200여명의 교인이 2015년 현재 재적 교인 7000여명 장년 주일출석 2500여명으로 성장했다. 동광교회는 2015년 3월 15일 교회 설립 50주년 예배를 드렸다. 이날을 기려 동광교회는 2015년 3월 23일 제주도 조촌읍 대흘리 120-1에 아카페(A Cafe) 교회(담임 권혁선 목사)를 설립했다. 아카페는 아가페와 카페를 합성한 이름이다. 실제로 일반인을 위한 카페가 아담하고 예쁜 교회 뒤에 차를 마실 수 있는 카페가 있다. 교회를 위해 땅을 구입하고 건물을 짓기 전 하나님의 은혜로 제주특별자치도청에서 교회 앞에 삼거리를 만들어 주었다. 교회 주변은 귤 농장과 농토로 둘러싸여 있다. 2015년 4월 5일 부활주일 동광교회 오전 12시 3부 예배. 크리소스톰 같은 황금의 입과 푸른 초장 같은 너른 마음을 지닌 김희태 목사가 활기찬 모습으로 동광교회 설교단에 섰다. 그의 설교는 진지하지만 논리적이고 재미있고 성경적이다. 요한복음 11:21-26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 우리가 부활하면 흰색 세마포 옷을 입고 주님 앞에서 찬양하게 됩니다. 세마포는 아마 섬유로 짠 천인데 그 당시 중국의 비단과 값이 거의 비슷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세마포는 최고의 의상을 의미하며 부(눅 16:19)와 정결의 상징이기도 하였습니다(계 19:8, 14). 우리가 최고의 옷을 입고 주님 앞에 설 그날이 올 것을 기대합니다. 그 기대로 말미암아 오늘 행복하시기를 바랍니다. 좌우의 분들에게 축복해 주시고 행복하세요 인사를 나누시기 바랍니다. 며칠 전에 바람이 세게 불었습니다. 태풍 급 바람이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팔레스타인 북쪽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내려오시기 시작합니다. 이건 태풍입니다. 예루살렘 사람들은 이번 유월절 명절날 예수가 예루살렘에 오겠는가 하는 걸로 내기를 할 정도였습니다. 예수께서는 제자들과 함께 갈릴리를 거쳐 요단강을 따라서 강 서안에 있는 여리고에 오셨습니다. 대단한 바람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마지막 예루살렘에서 5리 동쪽으로 2km 떨어진 작은 촌락 베다니에서 이제 진짜 강한 태풍이 붑니다. 그리고 며칠 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나귀를 타고 입성하십니다. 나귀를 타고 예루살렘에 들어갔다는 것은 왕으로 등극했다는 신호입니다. 사람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환영합니다. 이것은 왕을 영접하는 역사적인 행사입니다. 예루살렘에 강한 태풍이 불었습니다. 유대인은 그걸 잠재우려고 온갖 수단을 다했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시면 끝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니까 더 큰 태풍으로 변했습니다. 그리고 이 태풍은 세계를 뒤엎었습니다. 어떤 분이 말하기를 기독교 2천년 역사 아니 세상 2천년 역사에서 예수님을 뽑아내면 아무것도 안 남는다고 했습니다. 우리는 예수 믿는 것을 크게 자부심을 가질 이유가 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이 초라한 나사렛 예수! 무슨 사건이냐. 그분이 삼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이 감격을 온 세계에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사회가 살아났습니다. 그러자 법이 정의로워졌습니다. 그러자 여자들이 존경받고 아이들도 대접받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날 21세기의 인류문화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그 베다니에서 일어난 사건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오실 때마다 베다니에 들르셨습니다. 그곳에는 참으로 예수님을 환영하는 나사로의 가정이 있었습니다. 성경에는 예수님이 나사로를 사랑하셨다고 했습니다. 나사로는 부모가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두 여동생이 있었습니다. 여동생들은 결혼 이야기가 없는 걸로 미루어 스무 살이 채 되지 않았을 것 같습니다. 언니 마르다는 18살 정도 동생 마리아는 15살 정도로 추측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가정에 큰 근심거리가 생겼습니다. 오라버니가 아픈 겁니다. 그런데 소식을 들어보니 예수님께서 베다니 가까이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사람을 보내 우리 오라버니가 아프니 빨리 오셔서 고쳐달라고 말을 전했습니다. 예수님에게 나사로의 질병은 문제가 안 됩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1장 11절에 보면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말씀하십니다. 제자들이 잠들었으면 낫겠나이다 말합니다. 지금은 잠을 자도 잘 낫지를 않습니다. 수면제가 나오고부터 그렇습니다. 옛날에는 잠자면 병이 다 나았습니다. 정신적으로 맛이 간 사람도 푹 자면 온전해졌습니다. 잠들었으면 병이 다 나을테니 무엇이 문제입니까 하는 생각이었던 겁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 밝히 말씀하십니다.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이 말씀을 보면 예수께서 믿음을 주시기 위해서 일부러 안 가신 것 같습니다. 즉 이 나사로의 사건을 통해 강한 태풍을 만들어 보여 주시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래서 너희가 믿게 하기 위하여 나사로에게 가자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니까 제자 가운데 도마가 말합니다. 그는 의심 많은 도마로 알려진 제자입니다. 기록에 의하면 도마는 집을 짓는 목수였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 가운데 가장 합리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사람이 도마였습니다. 목수가 과학적인 사고를 하지 않으면 집을 지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그는 엉뚱한 소리를 잘 해요. 예수님이 죽은 사람 나사로에게 가자고 말씀하시니까 우리도 죽으러 가는구나 생각하고 도마가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말하는 것입니다. 도마는 결심도 좋고 참 남자다운데 허경영 같은 소리를 합니다. 여러분 어때요. 예수님 부활, 예수님 기적 못 믿겠다고요. 누구는 믿어지는 줄 압니까. 자 사건이 어떻게 진행이 됩니까. 베다니 동네 입구에 마르다가 뛰어나왔습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이 시작됩니다. 그녀가 말합니다. “주께서 여기 계셨더면 내 오라비가 죽지 아니하였겠나이다.” 아마 그때 마르다의 모습은 불만과 원망으로 가득 차 있었을 겁니다. 그녀의 말 그대로 때맞춰 오셨으면 우리 오빠 안 죽었을 텐데 이제 오십니까 하는 원망의 말투입니다. 그런데 22절에 보니까 자기가 너무 했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한발 후퇴합니다. “이제라도 주께서 무엇이든지 하나님께 구하시는 것을 하나님이 주실 줄을 아나이다”라고 말합니다. 마르다가 나사로가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까지 생각했을까요. 아닙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어디까지 해 주기를 바라고 이런 말을 했을까요. 이 어린 두 자매가 남겨져 있으니까 이 슬픔을 가시게 해 줄 예수님의 위로를 기대하고 이런 말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말씀하십니다. 그때부터 엇박자 코미디 대화가 시작됩니다. 마르다가 예수님의 말씀에 “마지막 날 부활에는 다시 살 줄을 내가 아나이다”라고 대답합니다. 이런 교리적인 대답이 문제입니다. 왜 교회가 이렇게 힘을 잃어갑니까. 정답을 알아요. 그런데 가슴에 와 닿는 감동이 없습니다. 신앙은 가장 간단하고 단순한 정답으로 가슴에 사무쳐서 나와야 합니다. 로봇처럼 컴퓨터처럼 스위치만 누르면 정답이 튀어나옵니다. 전혀 도움이 안 됩니다. 지금 예수님의 하시는 말씀은 그런 뜻이 아닙니다. 마르다가 이렇게 코미디 같은 소리를 하니까 진정으로 예수님의 귀한 진리가 나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하는 말씀으로 끝났다면 마르다도 별 고민을 안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주께서 “이것을 네가 믿느냐” 말씀하셨습니다. 참 이것을 믿어야 할지 안 믿어야 할지 얼마나 당황했으면 마르다가 그냥 집으로 가버렸겠습니까. 여러분 혹시 허경영이란 사람 이야기 들어본 적이 있습니까. 1997년 11월 26일 15대 대선 공화당 대선후보로 나섰는데 개표 결과 0.2% 득표를 하였습니다. 그리고 2007년 12월 19일, 17대 대선에 기호 8번 경제공화당 후보로 선거에 참여했으며, 0.4%의 득표율(약 9만7천여표)을 기록하여 7위를 했습니다. 이명박, 정동영, 이회창 등의 주요 후보들과 함께 토론회에 다수 참여했던 이인제 후보가 0.68% 득표를 한 것을 감안하면 상당히 높은 득표율입니다. 자기가 축지법을 쓰고 아이큐가 430이고 박정희 대통령의 비밀보좌관을 했대요. 여기까지 했으면 허풍으로 끝났을 건데 도를 지나쳤어요. 박근혜 대통령과 비밀결혼을 했다고 한 겁니다. 그걸로 박근혜 대통령에 대한 명예훼손과 17대 대선 때 허위 사실 유포 혐의로 체포되어 1년 6개월 동안 수감생활을 하고 나왔습니다. 콩밥을 먹고 정신이 들었는지 요즘은 좀 엄한 소리를 덜 하고 노래를 합디다. 제가 인터넷에서 보니까 어떤 사람이 허경영은 사기꾼이 아니라 미쳤다고 하더군요. 예수님이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말씀하십니다. 사기꾼 아닙니까. 이 말씀을 하신 예수님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하거나 아니면 정신이 이상하신 겁니다. 예수님은 허경영보다 좀 더 하신 겁니다. 여러분 두 가지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진지하게 생각을 해서 예수님을 부활의 주님으로 우리에게 부활을 주실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 구세주로 받아들이시든지 아니면 정신 나간 사람으로 취급하시든지 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정확하게 말씀하십니다. 인간이 부족하다는 걸 알아요. 인간이 예수님의 부활과 몸의 부활을 못 믿어 한다는 걸 알기 때문에 정말 믿게 하시려고 나사로의 무덤까지 오신 겁니다. 지금 나사로는 죽은 지 4일이나 됐습니다. 우리나라는 전통적으로 사람이 죽으면 24시간 안에 입관을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참혹한 모습을 보게 됩니다. 사람은 살았을 때 사람이지 죽으면 끝입니다. 게다가 부패가 시작되면 아무리 사랑하는 자녀라고 해도 아무리 사랑하는 부모라고 해도 간덩이 큰 사람은 3일 동안 밥을 못 먹고 약한 사람은 30년 식사를 못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조상들은 지혜롭게 더 흉악한 꼴 보기 전에 관 두껑 덮고 못질해 버리는 겁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무덤 속의 시체 나사로를 향해서 “나사로야 나오라”하고 부르셨습니다. 이 단순한 말씀 한마디에 죽은 나사로가 수족을 베로 동인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여 있었습니다. 주님은 그런 분이세요. 그냥 내가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하시는 게 아닙니다. 우리 예수님은 생명의 근원이십니다. 이런 사건이 일어나니까 모든 사람이 예수님 믿고 따를 것 같죠. 아닙니다. 예수님을 죽이자는 모의가 공공연하게 일어났습니다. 기적을 통해서 사람의 마음이 변하지는 않습니다. 죽어 냄새나는 나사로를 향해서 한마디로 살려내신 예수님이십니다. 시몬 베드로가 예수님에게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고백을 합니다. 이분은 우리의 구원자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런데 이분을 믿는 게 아니라 죽이고자 합니다. 인간은 참 악합니다. 어쨌든 예수님은 그 모의에 못이기는 체 하고 끌려들어가 죽으십니다.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고 말씀하셨는데 아무도 믿지 않았습니다. 아무도 그 말씀이 수용이 안 되니까 건성으로 들은 겁니다. 예수님 금요일 돌아가셨습니다. 그 다음 날은 유대인의 안식일입니다. 그 다음 날은 오늘 우리가 예배를 드리는 우리의 주일입니다. 당시는 사람이 죽으면 장례를 지낼 때에 일정한 소리를 내며 우는 곡(哭)하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아이고 아이고 하는 게 전통 장례법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시신을 십자가에서 내리니까 아리마대 요셉이라는 사람이 나타나서 섭섭하지 않게 장례를 잘 치를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요셉은 예수님을 자기 가족묘에 안장했던 것 같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신 금요일에 여인들이 그를 위해 울어줄 겨를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 날 안식일은 참고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여인들이 예수님의 무덤에 갔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울어 드리기 위해서 간 겁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축하하기 위해서 간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미 부활하셔서 무덤에서 나와 계셨습니다. 그리고 무덤을 지키던 사람들은 다 기절했습니다. 그러니까 이 여인들이 그를 동산 무덤 관리인으로 알았어요. 예수님 시신이 없으니까 그에게 시신에 기름도 바르고 곡도 해야 하니 시신이 있는 곳을 가르쳐달라고 합니다. 그때 그가 “내가 예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마 예수님 골치 아프셨을 것 같아요. 때마다 자신을 이렇게 소개하셔야 된다면 말입니다. 할아버지가 손자 만날 때마다 “내가 네 할애비다” 해야 한다면 얼마나 슬프겠어요. 이 여인(막달라 마리아와 요안나와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들이 사랑하는 예수님 모습을 보고 모두 최대한의 속도로 제자들에게 달려갔습니다. 예수님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전하려고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 제자들 말고 또 한 사람의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터키 해안 남부 지역 길리기아 다소 사람인데 날 때부터 귀족이고 부자입니다. 그래서 그가 예루살렘의 유명한 학자 가말리엘 문하에 유학을 왔습니다. 그가 거기서 공부를 하는데 이상한 바람이 부는 겁니다. 아니 죽은 사람이 살아났다는 허무맹랑한 소식을 전하면서 세를 불려가는 이상한 무리를 본 겁니다. 그래서 그는 이 사람들을 박살을 냈습니다. 이 사람들이 도망을 가 다 흩어졌습니다. 그들은 도망가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다메섹이라고 하는 다마스커스라고 하는 도시가 있습니다. 로마군이 그 도시를 경계로 이쪽 아시아에 항상 상주하는 국경 도시였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이 그곳에 가서 복음을 전해 신자들이 많아졌다는 소문을 듣고 이것들 봐라 하며 그 사람이 그곳으로 달려갔습니다. 그가 그들을 예루살렘으로 잡아 오려고 거의 다마스커스에 갔는데 홀연히 하얀 빛이 그를 비추는 겁니다. 그가 땅에 엎드러졌습니다. 하늘에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하는 음성이 들립니다. 그는 이해를 못 하고 “주여 뉘시오니이까”라고 물었습니다. 또 음성이 들립니다.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일어나 성으로 들어가라.” 앞을 못 보게 된 그는 사람의 손에 이끌려 다메섹 번화가 직가(straight street)에 있는 유다의 집으로 가게 됩니다. 며칠 안 있어 그는 거기서 또 주님의 음성을 듣고 찾아온 아나니아에게서 안수를 받고 눈을 다시 뜨게 됩니다. 이때 사울의 머릿속에 있던 성경 지식이 재조립되기 시작합니다. 그래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알게 됩니다. 머리가 좋은 사람들은 신앙생활도 잘합니다. 처음 받아들이기가 어렵지 일단 믿기만 하면 머리가 스스로 움직입니다. 스스로 증거를 찾습니다. 스스로 확신에 이를 수 있는 경지에 들어갑니다. 그 뒤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으면서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의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고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명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굴복시켰습니다. 유대인들이 가만있겠습니까. 가말리엘 문하의 바리새인이 왜 이 모양이냐면서 이 배반자를 죽이려고 하니까 예수의 제자들이 밤에 광주리에 사울을 담아 성에서 달아 내려 도망을 시킵니다. 사울은 아라비아 광야로 갔다가 그 후 삼 년 만에 예루살렘으로 갑니다. 이 사람이 큰 자라는 뜻인 사울에서 작은 자라는 뜻인 바울로 이름을 바꿉니다. 바로 이 사람이 바울 사도입니다. 바울 사도가 복음을 들고 서진(西進)할 때 엄청난 태풍이 불게 됩니다. 그러면서 그가 어떻게 변화되었습니까. 그 과정을 고린도전서 15장에 요약해놓았습니다. 3절과 4절에 보면 이 모든 일이 우연히 된 게 아니고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장사 지낸 바 되었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창세전부터 계획하셨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 이야기는 사람이 만들어낸 게 아닙니다. 수천 년 전 창세기에 한 남자가 나옵니다. 그는 뱀의 머리를 상할 자입니다. 그는 사망의 권세를 쳐부술 자이십니다. 이것은 최초의 예수님에 대한 성경의 예언입니다. 예수님이 태어날 때쯤 되면 그 예언이 점점 구체적으로 이루어져 갑니다. 구약 성경은 오실 예수님을 예언합니다. 그러면 이 사실을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많은 증인이 있습니다. 증인 두셋만 있어도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실 때 먼저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 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이 나타나셨다고 사도 바울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요 여러분. 이것도 다 제자들이 지어냈다고 합시다. 그러나 이것만은 부정할 수 없습니다. 로마제국 치하에서 교회는 250년 동안 박해를 받았습니다. 재판의 전문가들이 말합니다. 자기가 이익이 되면 재판에서 거짓말할 수 있답니다. 그러나 자기가 거짓증언해서 손해가 난다면 절대 거짓증언 안 한답니다. 예수님 믿는 것 때문에 재산을 뺏기고, 직장을 잃고, 추방을 당하고, 거지가 되고, 목이 잘려 죽고, 심지어 사자의 밥이 되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하는 데도 아시아보다 로마에서 믿는 사람이 더 많았습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이 예수님 때문에 도망을 다니고, 거지가 되고, 죽었습니다. 그래도 그들은 신앙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아니 버릴 수 없었습니다. 왜냐고요. 부활을 어떻게 부정합니까. 예수님은 부활의 첫 열매이십니다. 우리도 부활합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이 부활의 소망, 부활에 대한 하나님의 언약 이것보다 더 귀한 게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 세상사는 게 행복하다고 생각하십니까.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든다면 우리가 삐삐를 사용하다가 좀 있으니 몽둥이 같은 이동 전화기를 들고 소수의 사람들이 별 쓸 일도 없으면서 으스댄 적이 있습니다. 그러다 이제는 최신식 스마트폰이 나와 누구나 사용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행복해졌습니까. 우리가 핸드폰 없을 때 전화기 없을 때 어떻게 했습니까. 누가 볼 일이 있으면 이웃집에 헐레벌떡 뛰어가서 숨을 몰아쉬며 우리 집 오시라고 합니다 하고 연락하지 않았습니까. 이제 우리가 모두 다 스마트폰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제 묻고 싶습니다. 이렇게 훌륭한 기기가 나왔는데 우리가 행복합니까. 저는 하나도 행복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에게는 죽음에 대한 공포가 있기 때문입니다. 저 미래의 어둠에 대한 공포 때문에 말입니다. 예수님이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말씀하십니다. 이 주님의 부활의 언약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 부활하셨고 재림하실 것입니다. 이 땅의 환란과 핍박을 이긴 성도들이 예수님처럼 부활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늘의 천군천사의 나팔소리와 함께 예수님이 다시 오실 것입니다. 이 세계 사람들이 동시에 다 보게 될 것입니다. 골방에 광야에 산에 어디에 예수님이 오셨다고 해도 믿지 마시기 바랍니다. 진짜 메시아는 모든 사람이 동시에 다 볼 수 있게 오십니다. 이게 성경의 증거입니다. 예수님은 마지막 때에 사기꾼들이 설칠 것을 아시고 미리 말씀하셨습니다. 어느 곳에서 죽었든 다 육체로 부활하여 동시에 천년왕국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이 나라에 들어가기를 바랍니다. 부활의 이야기를 하고 결론으로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58절에서 “그러므로 내 사랑 하는 형제들아 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을 앎이니라”하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가난한 사람을 위해서, 하나님의 교회를 위해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재산, 생명, 젊음, 경륜, 기술을 통해서 다른 사람을 세워주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다 갚아주십니다. 우리의 수고가 주 안에서 절대로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재림의 축복을 기다리는 성도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2015년 4월 9일 오후 2시 제주도 아카페 교회 카페. 제주 제주시 선덕로 바다 앞 도두해수파크 찜질방에서 나와 해안로 정류장에서 제주 시내로 들어가는 17번 버스를 아내와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버스는 쉽게 오지 않았다. 같이 기다리던 다른 한분과 말을 나누게 되었는데 일본 나고야 교회 목사님의 한국 사모님이었다. 그분도 제주 시외버스정류장으로 가시는 중이었다. 일본의 아들들 때문에 제주도 땅을 정리하려고 오셨단다. 정류장 건너에는 아침 선잠에 눈비비고 나온 것 같은 청색의 푸른 파도가 하얀 이를 드러내고 하품하듯 밀려와 마음 깊숙이 할 말이 많은 듯 해안에 부딪혔다. 버스를 기다리는 관광객 차림의 사람들이 늘었다. 마침내 온 17번 버스를 타고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와산행 버스로 갈아타고 달빛빌리지 앞 푸른 초장 팻말이 있는 곳에 내렸다. 제주도 화석 자갈이 깔린 길을 걸어 들어가니 김희태 목사가 아들 목사와 귤 밭을 맨발로 한 고랑씩을 맡아 매고 있었다. 차를 대접받은 뒤 두 달 전 설립된 근처의 아카페(A Cafe) 교회(담임 권혁선 목사)로 갔다. 손님들이 가득한 식당에서 순대국 정식으로 점심을 먹고 교회 뒤 카페로 들어갔다. 커피를 마시며 지나온 이야기를 나누었다. 권혁선 목사는 평안교회 부목을 거쳐 1988년 인천의 희망교회와 풍성교회를 시무했다. 그리고 2008년 그는 캄보디아 선교사로 파송을 받아 사역을 했다. 그러다 그는 2015년 3월 23일 동광교회 50주년을 기려 제주도 조촌읍 대흘리 120-1에 설립한 아카페(A Cafe)교회에 부임했다. 권혁선 목사: 김희태 목사(두 사람은 총신 77회 동창이면서 절친이고 나이는 52년생인 권 목사보다 김 목사가 두 살 위다)가 1987년 동광교회 부임하실 때 제가 그랬죠. 교회 출석 교인이 2000명이 넘을 거다. 제가 말하는 건 장년 주일 예배 참석 교인입니다. 요새 통계로 말하면 7000이지만 주일 출석 장년 교인만 2000이 넘는다고 한 거죠. 그런데 김희태 목사가 안 믿어요. 그래서 제가 뭐랬냐하면.김희태 목사: 그런 일은 절대로 안 일어날 거라고 제가 확신했죠.권혁선 목사: 사실 내가 그 교회를 소개해 줬으니까 그 교회 저력을 알잖아요. 그런데 동광교회는 목사님만 좋은 분이 오면 가능한 교회죠. 문제가 많은 교회이긴 해요. 그런데 제가 소개시켜 주고 싶어서 소개시켜 준 건 아니에요. 그 교회가 어떻게 되었냐하면 목사를 모셔야 하는데 장로님들과 교인들이 의논하다 보니까 모르는 분이 오시면 그게 그거니 우리 교회 출신 가운데서 담임목사를 모시자 그런 겁니다. 그 결과 저를 오라고 했어요. 그런데 저는 저를 잘 알거든요. 제가 가면 감당이 안 되는 교회입니다. 그런데 우리 김 목사님이 가면 이건 틀림없이 감당할 뿐만 아니라 큰 교회가 될 거라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 가시면 2000명 됩니다 그랬습니다. 김 목사님이 저보다 믿음이 없어가지고 그럴리 없다는 겁니다. 사실 저는 동광교회에 대해서는 하나님보다는 목사님에 대한 믿음이 더 컸습니다. 됩니다 하면서 그때 김 목사님과 약속을 했어요. 2000명이 되면 저한테 선교비 천불씩 후원해 주기로. 김희태 목사: 그게 아니라 두당 1불씩 후원해 주기로. 2000명 넘어가면 2000불 하기로.권혁선 목사: 2000명 훨씬 넘어갈 거라고 했더니 안 믿는 거예요. 그래서 로열티 계산 개념으로 두당 1불씩 하기로 했습니다. 하자고 했어요. 그런데 제가 막상 선교지로 갔는데 안 주는 겁니다. 김희태 목사: 저는 두 가지 확신을 가졌어요. 2000명 절대 안 된다. 그리고 목회 잘 하는 목사가 선교사 갈 일이 있겠느냐.권혁선 목사: 저는 겁이 많아요. 그래서 사전에 준비를 해요. 목회를 한 지 한 12년 정도 됐을 때부터 다음 선교지를 어디로 가느냐 여기서 관두면 어디로 갈 것이냐를 생각을 하는 거죠. 저는 일본을 생각했어요. 사실 일본 쪽에 많은 공을 들였죠. 그랬는데.김희태 목사: 특별히 일본 낫토(대두를 낫토균을 이용해 발효시킨 한국의 청국장과 유사한 일본 전통의 식품으로 미소와 함께 중세 일본의 필수적인 영양 공급원이었다)를 좋아하죠. 우리 교인들도 낫토, 낫토해. 나는 안 좋아해요. 권혁선 목사: 여러 나라를 다녔는데 일본에 가서 느낀 건 여기서는 한인 목회를 해야 되겠구나 생각을 했습니다. 한인 목회를 하려면 문제가 뭐냐면 다른 목사들과 부딪칠 것 같은 겁니다. 망설이고 있는데 어느 분이 캄보디아를 가자고 해요. 캄보디아를 도와달라는 거죠. 그래서 가봤는데 캄보디아의 킬링필드를 보면서 지도자를 잘못 만나면 백성이 죽는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 참 나도 하나님 앞에서 영혼을 죽이는 목사가 아닌가 하는 생각도 가졌습니다. 캄보디아 백성이 불쌍했습니다. 외국 나가서 공항에서 울어본 나라는 그 나라가 처음이었습니다. 그 나라 민족이 불쌍했습니다. 그래서 캄보디아로 가야겠다고 마음먹었습니다. 캄보디아에 가서 오래 살려고 했는데 이 친구(김희태 목사를 가리키며)가 문제예요. 친구가 도와주고 그러니까 김 목사님이 많이 도와줬죠. 그 동안 도와준 걸 계산해 보니까 200만불이나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거기에 모든 걸 다 해놓으니까 내가 왕 노릇 할 것 같은 겁니다. 김 목사님이 들어오라고 하니까 들어와서 이 교회를 하게 된 겁니다. 김희태 목사: 우리 교회에서는 선교비 2000불 약속했는데 교회가 도저히 형편이 안 좋아서 50만원씩 보냈습니다. 그리고 우리 집사람이 몇 십만원 보내고. 권혁선 목사: 사실은 2000불 이상 했어. 왜냐면 그건 공식적으로 보내는 거고. 김희태 목사: 제직회에서 권 목사님 아는 집사가 있어요. 그가 막 뭐라고 말을 하는 거예요. 그러면 제가 집사님, 권 목사님한테 선교비 많이 준다고 그 말씀하시는 거죠. 그 집사님이 맞다고 고개를 끄덕여요. 제가 권 목사님한테 얼굴을 들 수가 없습니다. 2000불씩 보내겠다고 했는데 이거 보내는 겁니다. 그 집사님 내려갔어 건강이 안 좋아서. 권혁선 목사: 그랬다고 그러데. 김희태 목사: 그런데 신장하고 간이 안 좋데. 신장 약을 먹으면 간한테 안 좋고 간 약을 먹으면 신장한테 안 좋아서 어떻게 손을 쓸 수 없다네. 그래서 공기 좋은 데로 간다고. 서한결 사모:(제주 해안가에서 만난 일본 나고야 교회 사모)네, 서양 의학적으로는 그런데 동양 의학적으로 진짜 몸의 원리를 알면 신장(腎臟)은 어머니고 간장(肝臟)은 아들입니다. 옛날에 어린애들이 아프면 엄마가 젖을 토해서 아이한테 줍니다. 신장이 약을 먹으면 간장이 저절로 좋아집니다. 그러니까 그 원리를 알고 한의학적으로 하면 아주 좋죠.권혁선 목사: 양약으로 하니까 그런 거죠. 서한결 사모: 한의학에서 그걸 상생상극(相生相剋)이라고 합니다. 김희태 목사: 아이고 사모님 제주도 아카페교회 오시면 우리 노틀(중국어 ‘老頭兒’에서 온 말로 외래어 발음법상 라오터우얼로 소리 나는데 우리나라에 들어와 늙은 남자를 속되게 이르는 말로 ‘노틀’이 됐다) 클래스가 죽음을 한 단계 올리겠네요. ―그래서 동광교회 장년 주일출석 2000명이 넘어서 선교비 지원이 잘 됐습니까. 권혁선 목사: 아니 2000명은 당연히 넘었죠. 넘었는데 500불밖에 안 보내는 겁니다. 제가 캄보디아 간다고 하니까 1000불 보내주겠다고 했어요. 그런데 사실 제가 그걸 안 믿었습니다. 왜냐. 솔직하게 말해서 김 목사님하고 저하고의 관계에 있어서는 친구 사이입니다. 그래서 나 말고 딴 데 선교비를 보내면 선교를 위해서 돈을 쓴다고 해요. 그러나 저하고는 절친이잖아요. 저한테 선교비를 보내면 선교를 위해서 돈 쓰는 게 아니라 친구를 위해서 돈을 쓴다고 합니다. 교인들에게서 당연히 나올 수 있는 말입니다. 그런데 사실 주 파송 교회를 생각해 보면 제가 아무것도 아닙니다. 30만원이 원래 내가 생각했던 후원금입니다. 김희태 목사: 그랬었구나. 20만원 내놔.권혁선 목사: 왜냐면 이건 빤한 계산입니다. 김희태 목사: 친구라 못한 겁니다. 권혁선 목사: 그러나 보통 모르는 목사님들은 친구지간에 안 해 주느냐고 해요. 사실 친구기 때문에 더 어렵다는 걸 생각 못 하는 것 같아요. 제삼자는 오히려 딴 데 도와주면 순수하게 선교를 위해서 한다 이렇게 생각해요. 김희태 목사: 우리가 백 불 이백 불은 수십 군데고. 파송이 일곱 가정이에요. 그래서 더욱 어려운 가운데에서 친구한테 많이 보낸다는 건 명분을 세울 수가 없어요. 서한결 사모: 친구라는 걸 알릴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권혁선 목사: 온 교회가 다 아는 사실입니다. 둘이 아삼륙(마작에서 쓰는 골패의 쌍진아, 쌍장삼, 쌍준륙 이른바 쌍비연이라 하여 좋은 패가 있는데 이 세 쌍의 패 끝 자를 딴 말로 단짝을 비유하거나 서로 호흡이 잘 맞을 때 쓰는 말)이라는 거 다 알아요. 김희태 목사: 게다가 가끔 들어오면 설교시켜야지.권혁선 목사: 그런데 사실은 2000불이 아니라 더 많이 했어요. 왜냐하면 캄보디아 교회 뭐 할 때도 천만 원 헌금해 줬지김희태 목사: 그랬던가.권혁선 목사: 자동차도 두 대 보내줬죠. 뭐 이래저래 하면 솔찬합니다. 제가 자동차 가지고 사기 많이 쳤습니다. (동석자들의 눈이 똥그래졌다.) 차를 일부러 안 사요. 오토바이 타거나 걸어다녀요. 사람들이 캄보디아에 오면 헌금을 해요. 목사님 이렇게 지내시면 되냐고. 일단 그 돈을 받아요. 간 다음에 전화를 해요. 내가 지금 원주민을 위해 그 돈을 써야 되는데 양해해 달라고 말해요. 저한테는 우선순위가 원주민을 위하는 게 먼저니까. 그런데 사람들은 헌금을 하는데 원주민보다는 당장 보이는 대상에 헌금하는 걸 더 좋아해요. 목사님 차 사세요 하고 돈은 줘도 원주민을 위하는 데는 잘 안 주더라고요. 그런데 내가 받은 다음에 원주민을 위해서 쓰겠다고 하면 어떻게 할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제가 그 방법을 많이 우려먹었죠. 그러다보니 차를 안 타고 일부러 걸어 다닌 경우가 많아요. 한국에서 담임 목회할 때도 그랬어요. 여름에 제 방에 에어컨 달겠다고 해서 제가 달지 말라고 했어요. 유아실, 영아실, 사무실까지 다 달고 마지막에 내 방 달아라 그랬습니다. 그랬더니 장로님들이 서둘러요. 목사 방부터 달면 교육부는 안 달고 세월아 네월아 합니다. 사실은 고도의 정치죠. 김희태 목사: 그러다가 평생 못 다는 수가 있어.권혁선 목사: 난 일 년 만에 다 달었어. 김희태 목사: 그거 하나님의 은혜네. 광주의 어느 큰 교회 목사님은 평생 에어컨 없이 지냈어요. 권혁선 목사: 야 진짜 못됐구나. 김희태 목사: 지독한 사람들이에요. 그러니까 그 다음에도 그 교회가 난리더라고요. 그런 사고가 우연히 나온 게 아니에요. 권혁선 목사: 옛날 그 목사님 점잖으시잖아요. 김희태 목사: 부흥회 가면 깜짝 놀래요. 그렇게 큰 교회가 사무실에 에어컨이 없어요. 광주도 여름에 굉장히 덥거든.권혁선 목사: 저 인간이 좋게 이야기했다. 그러다 안 했다가 저 인간이 넥타이 돌려 매면 난리가 난다는 걸 알아요. 그래서 저는 좋게 이야기할 때 서로 잘하자. 넥타이 돌려 매면 막다른 골목이니까 알아서 해라. 김희태 목사: (일본 교회 서한결 사모님을 보며) 사모님 모셔다 드릴게요. 가십시다. 서한결 사모: 제가 한번 걸어 가보죠. (동석자들이 이구동성으로 사모님에게 차를 타고 가시라고 했다. 두 사람이 일어서 카페를 나갔다.) ―(가는 두 사람에게 인사하며)저희는 좀 더 있다 버스 타고 공항으로 가겠습니다. (우리는 남은 커피를 마저 비우며 이야기를 더 나누었다.) 권혁선 목사: 동광교회를 소개해 주었을 뿐인데 김희태 목사는 자기 가족들한테도 제가 가문의 은인이라는 말을 늘 하는 겁니다. 사람들이 사실 저 정도 위치에 올라가면 다른 사람들한테 권혁선 목사가 김 목사한테 어떻게 했다 이런 말 안 합니다. 처음에는 좀 하지만 말입니다. 오히려 수치로 느끼거든요. 목사님도 그런 경우를 많이 느꼈을 것입니다만 제 경우에도 보면 큰 은혜는 하나님과 부모만이 베풀 수가 있고 사람이 베풀면 서로 떠나게 됩니다. 뭐 그것이 인생이죠. 그런데 그런 단계를 넘어가는 사람은 큰 인물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살다 보면 어떤 사람은 절체절명(?體?命)의 일인데 나한테는 손 한번만 내밀면 되는 일이 있잖아요. 제가 그렇게 도와줄 때는 그 사람을 잃는다고 생각하고 도와줘요. 도움 받은 사람은 평생 잊지 않겠다고 말하죠. 그런데 대부분 얼마 안 가서 (내 추임새를 받아서)잊어버릴 정도가 아니고 욕을 합니다. 내가 그 사람을 그렇게 멀리 한 건 이런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고 비난을 합니다. 인간의 심리가 그런 모양입니다. (전화벨이 울렸다.) 그런 문제를 넘어서는 사람은 정말 큰 사람입니다. 사실 김 목사님한테는 제가 오히려 변덕을 많이 부렸습니다. 파닥파닥하는 못된 성질이 제가 있어요. 김희태 목사님하고 40년 우정이 유지된 건 제가 잘 해서가 아니라 김 목사님이 잘 해 주어서 그렇게 된 겁니다. 그래서 제가 평생 도움을 받고 삽니다. 제가 그러죠. 김 목사님 잘된 건 하나님께서 나 도와주라고 그렇게 된 거라고요. 오히려 뭐 한 놈이 큰소리친다는 격이죠. ―같은 서울남노회 회원들 가운데도 그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더군요. 권혁선 목사: 김희태 목사님은 의리를 지켜요. 제가 복이 많아서 김 목사님을 사귀게 된 거죠. 저는 먼저 부모를 잘 만났어요. 아내도 잘 만나고 자식들도 좋아요. 저는 정말 성도들도 잘 만났어요. 그리고 아주 좋은 친구를 만났어요. 어떻게 보면 저한테는 가장 좋은 형님이죠. 나이도 저보다 두 살 위죠. 저는 만 가지가 없는데도 막 채워져요. 저는 참 복이 많은 사람입니다. 김 목사님은 정치도 하는데 막상 총회장은 되고 싶어 하지를 않아요. 순수한 거죠. 시대가 하도 순수하지 않으니까 오해를 받을 수도 있는데 어쨌든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설교도 살아 있어요. 사실 김희태 목사는 설교를 위해 많은 독서와 기도와 삶으로 준비한다. 그래서 그는 설교는 물론이고 크리소스톰의 삶과 정치적 성향도 닮았다. AD 397년에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인 넥타리우스(Nectarius)가 죽자, 후임으로 크리소스톰이 선임되었다. 그러나 크리소스톰은 동방 기독교의 노른자위를 차지할 마음이 없었고, 안디옥 교인들도 위대한 설교자가 떠나는 것을 원치 않았다. 하지만 제국의 지도자들은 명성이 자자한 크리소스톰을 콘스탄티노플로 납치하듯 데려갔다. 안디옥에서는 그를 놓아주지 않으려 애썼지만, 전격적인 조치로 콘스탄티노플 대감독으로 전임되었다. 콘스탄티노플에서의 첫 시작은 만사가 순탄하였다. 이곳 사람들도 그의 설교에 감명을 받았다. 그는 금욕적인 삶을 살면서, 많은 수입을 구제와 다른 경건한 일에 사용하였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플은 정치적인 술수와 교직의 타락이 난무하는 도시였다. 이러한 상황을 알게 된 크리소스톰은, 부패하고 타락한 수하의 성직자들을 한 치의 용서도 없이 치리했고, 사회 개혁을 촉구하였다. 콘스탄티노플의 성도들을 향하여 도덕적이고 검소한 삶을 살아갈 것을 설교했다. 예배당 근처에서 벌어진 황후 유독시아의 은상 헌당식을 기념하는 외설적인 행사와 춤을 크리소스톰이 방관할 수 없었다. 그즈음 세례 요한의 축일에 맞춰 크리소스톰은 다음과 같이 설교했다. “또 다시 헤로디아가 소리쳤습니다. 또 다시 그녀가 난리를 쳤습니다. 또 다시 그녀가 춤을 추었습니다. 또 다시 그녀가 세례 요한의 목을 쳐서 쟁반에 담아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크리소스톰은 위대한 설교자로서 세상과 정치적 지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오로지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고, 전한 그 말씀대로 살아가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이생의 자랑과 안목의 정욕, 육신의 정욕을 원치 않았던 크리소스톰은 위대한 영성을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능력 있게 선포하는 위대한 설교자가 될 수 있었다. AD 407년 크리소스톰은 세상을 떠나게 될 때 전 생애에 걸쳐서 가장 짧고 가장 뛰어난 “모든 일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아멘” 이라는 설교를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이 세상을 떠나 하나님에게로 갔다. 2015-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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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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