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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리틀메시지 _느헤미야Nehemiah
    짐실은 노새 느헤미야Nehemiah는 그 공동체를 이어받아 외적 안정을 확보했다. 반면 에스라는 바빌론에서 돌아온 새 공동체의 영적 안정을 확립했다. 그는 아버지가 하가랴이고 형제가 하나니라는 것 말고는 알려진 게 없다. 아마 그의 할아버지는 예루살렘이 멸망했을 때 바빌론으로 끌려온 포로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페르시아에서 태어났을 것이다. 느헤미야서의 생생한 묘사는 그의 개인 일기에 근거한 자료였을 것이다. 그는 아닥사스다 왕의 술 관리관이었을 때 예루살렘 형편이 아주 어렵다는 말을 들었다. 그는 예루살렘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했다. 그리고 얼마 뒤 그는 왕의 술 관리관이 되었다. 이런 시가 있다. 기도 _라반드라나트 타고르 위험으로부터 벗어나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위험에 처해도 두려워하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게 하소서 고통을 멎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말고 고통을 이겨 낼 가슴을 달라고 기도하게 하소서 생의 싸움터에서 함께 싸울 동료를 보내달라고 기도하는 대신 스스로의 힘을 갖게 해달라고 기도하게 하소서 두려움 속에서 구원을 갈망하기보다는 스스로 자유를 찾을 인내심을 달라고 기도하게 하소서 내 자신이 성공에서만 신의 자비를 느끼는 겁쟁이가 되지 않도록 하시고 나의 실패에서도 신의 손길을 느끼게 하소서 그는 유다 총독으로 임명받아 주전 445년 성벽을 재건하기 위해 예루살렘에 부임했다. 하나님의 소명을 성취하기 위한 그의 깊은 신앙은 그의 기도와 강한 확신으로 드러난다. 그 땅에 회복이 이어졌지만 유대 민족은 시련과 비난의 시기를 겪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들을 보고 계셨다. 느헤미야의 강조는 하나님을 신뢰하라는 것이었다. 2024-0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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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20
  • 리틀메시지 _에스라Ezra
    솔로몬의 왕궁건설 에스라Ezra는 역대기하가 끝나는 곳에서 시작한다. 이스라엘을 정복한 바빌론이 주전 587년에서 586년에 많은 백성을 잡아가고 도시와 성전을 파괴했다. 주전 538년 페르시아 왕 고레스가 유대인들이 그들의 땅으로 돌아가 성전 재건을 허락하는 조서를 공포했다. 그때 스룹바벨의 인솔로 5만여 명이 돌아왔다. 바빌론 포로 생활 70년이 끝났다. 어려움이 많았고 지체되기는 했지만 주전 515년 성전이 완성되었다. 이런 시가 있다. 담쟁이 _도종환 저것은 벽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그때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한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 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율법학자 에스라는 주전 458년 2천여 명의 유대인과 예루살렘에 왔다. 에스라의 주요한 일은 율법의 연구와 해석이었다. 그는 자신의 일을 통해 새 시대 공동체의 영적 지도자가 되었다. 바빌론 포로에서 돌아와 성전을 재건하는 이스라엘 백성은 도종환 시인이 노래하는 담쟁이 잎 같았다.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담쟁이 잎 하나가 담쟁이 수 천 개를 이끌고 결국 그 벽을 넘는다.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가는 담쟁이에게 절망의 벽은 없어 보인다. 그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담긴 성경을 믿음으로 붙잡고 성전을 재건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도 절망의 벽은 없어 보였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독려하는 지도자 에스라가 없고 믿음의 동지적 연대가 없었다면 이스라엘 백성은 그 척박하고 방해가 많은 땅에서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2024-0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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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13
  • 리틀메시지_역대기하2Chronicles
    바벨론 포로들 역대기하2Chronicles는 다윗 자손의 통치를 크게 다룬다. 그 기간은 솔로몬 시대부터 주전 586년 시드기야 치하 예루살렘 함락까지다. 역대기서 전체에 걸쳐 남 왕국 유다를 집중적으로 강조한다. 남 왕국 유다의 흥망성쇠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지 안지키는지에 따라 조명이 되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께 신실하지 못하고 그들의 신앙의 의무에 태만해서 망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고향을 떠나 머나먼 바빌론으로 끌려갔다. 이런 시가 있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_이상화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자욱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씨같이 구름 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를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쁘게나 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 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매던 그 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 다오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웃어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지폈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고 오는 봄은 누구도 빼앗을 수 없다. 그것이 천지만물을 들썩이게 하는 봄의 풋내이고 봄의 푸른 웃음이다. 그러나 들을 빼앗긴 자에게 오는 봄은 절박하다. 봄조차 빼앗기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봄의 답답함이고 봄의 푸른 설움이다. 들의 봄과 인간의 봄 자연의 봄과 시대의 봄은 이렇게 갈등한다. 온몸에 햇살을 받고 이들을 발목이 저리도록 실컷 밟아보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이야말로 내 나라 내 땅에 대한 지극한 사랑의 표현이다. 떠나온 길이 멀면 돌아갈 길도 멀다. 바빌론의 유대인들이 그랬을 것이다. 역대기하 마지막에 유대인의 예루살렘 귀환을 허락하는 고레스의 조서가 기록되어 있다. 하나님의 백성이 믿음의 불성실로 하나님의 징벌을 받아 고향을 떠나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또한 하나님의 은혜로 그들의 고향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2024-04-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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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06
  • 리틀메시지_ 역대기상1Chronicles
    바빌로니아 큰 물가 마을 역대기상1Chronicles과 역대기하는 원래 히브리어 원문에서 한 권이었다. 히브리어의 구약 성경을 그리스어로 번역한 사람들이 그것을 두 권으로 나누었다. 본래의 제목은 뒤에 남은 일들이라는 뜻이었다. 그것은 사무엘서와 열왕기서에 들어있지 않은 작은 이야기들이 들어있기 때문이었다. 마찬가지로 영어 제목 '크로니클스Chronicles'도 히브리어 제목처럼 '일상의 일들'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이것은 역대기서가 이스라엘의 지도자들, 특별히 왕들의 생활들에서 일상의 중요한 일들을 차례대로 이야기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초점은 다윗과 유다 왕국에 있다. 그리고 그 관점은 제사장들의 것이다. 유대 민족은 신앙의 불성실로 망해 포로가 되어 예루살렘에서 바빌론으로 끌려갔다. 이런 시가 있다. 바빌론 강가에서 _보니 엠 바빌론 강가에 우리는 앉아서 우리는 울었어요 시온을 생각하며 바빌론 강가에 우리는 앉아서 우리는 울었어요 시온을 생각하며 사악한 무리들이 우리를 포로로 잡아왔어요 그리고 우리에게 노래를 부르라고 했지요 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주의 노래를 부를 수 있나요 이런 낯선 땅에서 사악한 무리들이 우리를 포로로 잡아왔어요 그리고 우리에게 노래를 부르라고 했지요 하지만 우리가 어떻게 주의 노래를 부를 수 있나요 이런 낯선 땅에서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말과 우리 가슴에서의 명상을 여기 오늘밤 그대 앞에서 받아주어요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말과 우리 가슴에서의 명상을 여기 오늘밤 그대 앞에서 받아주어요 바빌론 강가에 우리는 앉아서 우리는 울었어요 시온을 생각하며 바빌론 강가에 우리는 앉아서 우리는 울었어요 시온을 생각하며 바빌론 강가에 바빌론의 어두운 눈물 우리는 앉아서 당신은 노래를 불렀죠 우리는 울었어요 사랑의 노래를 불러요 시온을 생각하며 바빌론 강가에 바빌론의 거친 작은 조각들 우리는 앉아서 당신은 사람들이 우는 것을 듣지요 우리는 울었어요 그들은 그들의 하나님이 필요해요 시온을 생각할 때 오 힘을 가져요 이라크 수도 바그다드 남쪽 약 110km 떨어져 있는 유프라테스 강가에 바빌론이란 고대 국가가 번성했었다. 바빌론이 유대 왕국을 정복하여 많은 횡포를 저질렀다. '바빌론 강가에서'라는 노래는 바빌론에 정복당한 유대인들의 심정을 노래한 메시지가 그 내용이다. 이 노래는 시편 137편을 토대로 작사 작곡을 하였다. 바빌론 포로생활 때 유대인들의 슬픔과 시온의 그리움을 노래한 시가 시편 137편이다. 이 노래를 부른 가수들은 여성 3인과 남성 1인으로 구성된 4인조 보컬 '보니 엠'이다. 그들은 자메이카 출신의 영국 가수들이다. 그들은 악기를 전혀 다루지 않고 순수한 보컬만으로 서인도 제도의 특유한 창법을 구사하는 게 특징이다. 그들은 1978년 이 노래를 불러 세계적인 인기를 얻었다. 역대기상과 역대기하는 바빌론 포로 이후 이스라엘 땅에 돌아온 유대인들에게 중요했다. 그들은 다윗의 신앙 본보기가 필요했고 성전에 대한 강조는 그것을 재건할 때 필요했다. 역대기서는 변화와 어려움의 시기에 성전을 재건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에게 격려와 힘을 주었다. 그것은 다윗의 신앙과 솔로몬의 지혜와 성전 건축의 영광스러운 역사를 통해서였다. 2024-0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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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31
  • 리틀메시지_ 열왕기하2Kings
    예수님과 파도와 배 열왕기하2Kings는 이스라엘 왕국과 유다 왕국이 무너지고 사로잡히는 것을 기록한다. 영적 타락은 정치와 사회의 악화로 이끈다. 선지자들의 끊임없는 사역과 하나님의 적지 않은 징계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 왕국과 유다 왕국은 하나님을 배반하고 심판을 받아야 했다. 이런 시가 있다. 어부의 기도 _작자 미상 주님 내가 죽는 날까지 물고기를 잡을 수 있게 하시고 마지막 날이 찾아와 주님이 던진 그물에 내가 걸렸을 때 바라옵건대 쓸모없는 물고기라 여겨 버림을 당하지 않게 해 주소서 예수 그리스도는 의로운 왕이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신실한 대제사장과 말씀의 선지자이시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주님으로 늘 바라보고 살 때 주님이 던진 그물에 걸리면 버림을 당하지 않게 될 것이다. 열왕기서는 개인이나 나라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따라야 한다는 것을 교훈하는 역사의 기록이다. 이스라엘 백성은 물론이고 특별히 왕들과 제사장들과 선지자들의 행위는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대한 영적인 신실함과 순결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 준다. 이스라엘의 지도자인 그들의 반복되는 영적인 실패의 이야기는 다윗의 왕위를 이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드러낸다. 2024-03-23 신국판 592P @23,000원 /교보.알라딘.예스24.쿠팡 판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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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3
  • 리틀메시지_ 열왕기상1Kings
    열왕기상1Kings과 열왕기하는 원래 히브리어 성경에서 한 권이었다. 열왕기서는 이름 그대로 솔로몬부터 시드기야까지 유대 왕들의 역사를 기록한다. 열왕기서의 사건이 시작될 때 나라는 하나였다. 그러나 솔로몬이 죽고 난 뒤 두 나라로 나뉘었다. 그 뒤 두 왕국은 강대국에 망해 포로 신세가 되었다. 북 이스라엘 백성은 앗수르에 잡혀갔다. 남 유다 백성은 바빌론에 잡혀갔다. 그들은 하나님을 참되게 예배하는 마음으로 돌이키지 않았다. 그들에게 남은 건 하나님의 경고대로 그들의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징계와 훈육뿐이었다. 이런 시가 있다. 담요 한 장 속에 _권영상 담요 한 장 속에 아버지와 함께 나란히 누웠다 한참 만에 아버지가 꿈쩍이며 뒤척이신다 혼자 잠드는 게 미안해 나도 꼼지락 돌아눕는다 밤이 깊어 가는데 아버지는 가만히 일어나 내 발을 덮어주시고 다시 조용히 누우신다 그냥 누워 있는 게 뭣해 나는 다리를 오므렸다 아버지 하고 부르고 싶었다 그 순간 자냐 하는 아버지의 쉰 듯한 목소리 네 나는 속으로만 대답했다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이면서 둘이고 둘이면서 하나다. 그 아버지와 아들이 한 담요 속에 누웠다. 한 담요를 덮고 나란히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는다. 아버지가 몸을 뒤척이고 아들은 돌아누워 다리를 오므렸다. 아버지는 가만히 일어나 담요 바깥으로 빠져나온 아들의 발을 덮는다. 아버지는 평생을 아들의 필요를 채워 주려고 남몰래 애를 쓴다. 아버지는 아들을 가슴에 품고 거두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식들은 그 진실을 모르니 늘 아버지가 어렵고 섭섭하다. 이렇듯 우리의 참된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도 그의 믿음의 자녀들의 필요를 채워 주시려고 마음을 다 하신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큰 축복을 받은 나라였다. 그러나 그 나라는 치욕과 패배로 끝나고 말았다. 그 원인은 죄였다. 솔로몬은 외국의 우상들을 섬겼고 백성은 그를 따랐다. 고작 한 세대 만에 그 나라가 쇠퇴하고 분열했다. 백성들이 하나님을 배신하는 배경에는 거짓 선지자들과 부패한 제사장들이 있었다. 나라의 지도자들과 백성이 그들의 말은 들었지만 하나님의 신실한 선지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우리도 이스라엘의 왕과 백성들처럼 영적인 실패를 거듭하고 하나님께 불평을 일삼는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합의 회개한 모습에 용서의 기회를 주시듯 늘 용서와 축복의 기회를 엿보신다. 2024-03-17 신국판 592P @23,000원 /교보.알라딘.예스24.쿠팡 판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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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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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화적인, 너무나도 신화적인
    신화적인, 너무나도 신화적인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감독 : 미야자키 하야오 음악 : 히사이시 조 인간이 다른 생물과 구별되는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는 자기 모습을 보고 싶어 한다는 점이다. 유독 인간만이 자신을 되돌아본다. 거울의 발명이 좋은 예다. 나르시스의 신화도 같은 맥락이다. 사람들은 거울을 보면서 매무새를 가다듬거나 화장을 한다. 외면의 카무플라주다. 철학은 정신적 거울이다. 사유를 통해 정신의 때를 닦고 마음을 바로잡는다. 예술도 마찬가지다. 그림을 통해, 사진을 통해, 인간은 스스로를 고발하고 되돌아본다. 소설과 영화의 내러티브를 통해 삶을 투영해보고 카타르시스를 얻기도 한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은 인생의 거울로 비견될 만하다. 사랑과 미움, 욕심, 외로움, 두려움과 용기 등 다양한 인간 내면의 풍경이 스크린 위로 산뜻하게 펼쳐진다. 하야오는 <센과 치히로…>의 모티프로써 ‘열 살’이라는 연령을 들었다. 누구나 한때는 열 살이었고, 혹은 곧 열 살이 된다. 하야오에게 열 살은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자의식이 생기기 시작하고, 타인의 존재를 알게 되며, 사회와 세계의 한 자락을 만지기 시작하는 나이. 그렇지만 혼자서 무엇을 하기에는 어리고 무력한 존재. 그래서 낯선 세계에 대한 호기심과 두려움이 혼재하는 나이. “그렇게 자기 테두리 안에 머물며 진보를 두려워하는 아이들을 위해” 만든 애니메이션이다. 무대는 일본의 근대를 상정했다. 힘과 근육은 성장했지만, 진정한 진보의 길로 나아가기를 주저하는 일본에 대한 비유다. 또한 근대는 전통과 현대를 잇는 징검다리다. 하야오는 일본의 고유 종교인 신사의 만신 숭배를 상상의 자양으로 삼아 전통의 문화적 문양을 형상화하고 그 안에 인간 내면의 희로애락을 스펙트럼으로 펼쳐보였다. 그 온축 위에 현대를 향한 진보의 걸음을 내딛어야 한다는 온유한 메시지와 함께. 주인공 치히로는 칭얼거리기 좋아하는 응석받이 열 살 소녀다. 이사가는 날도 어깃장이 나서 온통 투정과 짜증으로 일관한다. 볼멘 표정으로 뒷좌석에 누워 부모에게 뒤틀린 심사를 감추지 않는다. 그러다 차가 길을 잃고 낯선 곳에 멈춰선다. 무성한 수풀 사이로 보이는 긴 둑과 둑 사이로 뚫린 좁은 터널. 전혀 앞이 보이지 않는 꽤 긴 터널이다. 치히로의 부모는 터널 너머를 가보기로 한다. 내키지 않지만 혼자 있는 게 무서운 치히로, 투덜거리며 그 뒤를 따른다. 터널을 지나자 드넓은 풀밭이 펼쳐지고, 풀밭 사이 오솔길을 따라 퇴락한 전통 놀이공원이 황량한 자태를 드러낸다. 여기저기를 둘러보는 사이 허기를 느낀 세 사람, 어디선가 풍겨오는 신비로운 음식 냄새를 맡는다. 모퉁이를 돌자 주인 없는 음식점에 산해진미가 김을 모락모락 피워올린다. “일단 먹고, 주인이 오면 계산하자”며 고기를 뜯기 시작하는 치히로의 부모. 내키지 않는 치히로는 공원의 고샅고샅을 살펴본다. 한참 후 돌아온 치히로는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한다. 음식 더미를 헤치는 두 마리 돼지의 다리 사이에 부모의 옷가지가 걸쳐져 있는 것이다. 낯선 폐허, 마법에 걸린 부모님, 어린 치히로. 뭘 어떻게 해야 하지? 산책의 호흡으로 잔잔하게 흐르던 화면은 이 때부터 팽팽한 긴장감으로 숨가쁘게 돌아간다. 당황한 치히로 앞에 또래의 미소년 하쿠가 등장한다. 하쿠는 처음부터 치히로의 이름을 알고 있다. 놀란 치히로는 언덕을 넘어 터널 쪽으로 달려가나 오솔길이 있던 풀밭은 어느새 바다로 변해 있다. 진퇴양난의 처지에서 치히로는 어쩔 수 없이 하쿠에게 돌아간다. 어쨌든 자기 이름을 알고 있는 하쿠로부터 실마리를 풀어야 하는 것이다. 이 장면에서부터 하야오는 관객의 심리를 완벽하게 장악하고는 미스테리 기법으로 엔딩 장면까지 긴박감을 힘차게 몰고 간다. 어느새 땅거미가 내리고 폐허였던 놀이공원에 하나둘씩 불이 켜진다. 바다 저편에서는 환하게 불을 밝힌 배가 유유히 다가와 손님들을 내려놓는데 사람은 없고 하나같이 기이한 형상을 한 귀신들이다. 하쿠가 치히로에게 알약 하나를 건넨다. 이 곳은 800여 귀신을 모시는 신들의 온천장, 사람은 발각되는 대로 돼지로 만들어버린다. 알약을 먹으면 돼지를 면할 수 있지만 사람으로 되돌아갈 길을 알 수 없다. 그러나 선택의 여지가 없다. 알약을 삼킨 치히로, 하쿠가 시키는 대로 온천장 지하로 내려가 일자리를 구한다.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는 규율에 따라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면 돼지가 되어야 한다. 이 때부터 치히로의 필사적인 구직 몸부림이 시작된다. 긴박하면서도 포복절도할 에피소드가 숨가쁘게 전개되는 사이 하야오의 상상력은 관객의 심장을 쥐락펴락 간단없는 미지의 세계로 몰고간다. 우여곡절 끝에 취직에 성공한 치히로, 대신 새 이름 ‘센’을 써야 한다. 영계의 음식을 먹을수록 원래 이름을 잊게 되는데, 옛 이름 치히로를 기억하지 못하면 사람으로 돌아갈 수 없다. 온천장은 인간사를 함축한 모델하우스다. 욕망과 경쟁, 호불호, 음모와 갈등, 소외와 두려움이 뒤엉켜 있는 전근대의 미니어처다. 숱한 사연을 겪으면서 센은 한결 성숙해가고, 센의 좌충우돌을 통해 하야오는 일본의 차세대에게 삶의 진실을 이야기한다. 자칫 계몽주의로 흐를 위험을 절묘하게 초월하여, 하야오의 전언은 가슴 징한 감동으로 관객의 뇌리에 접수된다. <센과 치히로…>의 또 하나의 승리는 생생한 캐릭터의 형상화에 있다. 그것도 하나둘이 아니라 무더기로 등장하는 캐릭터들이다. 머리와 몸의 비율이 1 : 1인 마녀 유바바와 쌍둥이 언니 제니바, 머리통 괴인 세쌍둥이, 팔이 여섯인 가마할아범, 귀여운 숯검댕이 무리, 흰 용으로 변하는 하쿠, 하쿠를 공격하는 종이 잠자리 떼, 얼굴 없는 요괴, 뚱뗑이 생쥐와 모기만 한 까마귀, 기이하고도 생생한 신들, 바다 위를 달리는 기차, 스스로 길을 안내하는 가로등…. 미스테리로 시작해서 쉴 새 없이 등장하는 다양한 캐릭터와 신비로우면서도 빈틈없는 스토리로 관객의 호기심을 한 순간도 풀어주지 않는 하야오의 진면목. 2002년 베를린영화제는 사상 최초로 애니메이션에게 최우수작품상 ‘금곰상’을 수여했다. 일본에서만 2,400만 명 이상이 <센과 치히로…>를 만나러 극장을 찾고 있다. box : 미야자키 하야오, 일본의 애니메이션의 아버지 데스카 오사무가 일본 애니메이션의 어머니라면 미야자키 하야오는 저패니메이션의 아버지로 불릴 만하다. 하야오는 애니메이션 패러다임의 새 지평을 연 작가로 평가된다. 1941년 1월5일 도쿄에서 태어난 하야오는 큰아버지가 경영하는 비행기회사의 공장장인 아버지 덕분에 부유한 환경에서 성장한다. 고교 때부터 이미 애니메이션 제작에 뜻을 둔 하야오는 대학 시절에 만화 연재를 하며 꿈을 키워간다. 이 시기에 하야오는 사회적 환경과 자신의 정체성 사이에서 갈등하며 훗날 자기 작품의 가치관으로 자리잡을 고뇌와 사유들을 정리하게 된다. 공산당 기관지인 <아카하타>의 청소년판 <소년소녀신문>에 <사막의 백성>이란 좌파적 SF 만화를 기고한 바 있는데, 이는 훗날 <천공의 성 라퓨타>의 아나키스트적 공간,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의 현대문명 비판 등으로 발전한다. 1963년 대학을 졸업한 하야오는 ‘토에이동화’에 입사하여 평생의 동료이자 선배인 타카하타 이사오를 만난다. 1971년 타카하타와 함께 ‘A프로덕션’으로 이적한 하야오는 1978년 저 유명한 TV시리즈 <미래소년 코난>을 제작하며 연출자로 데뷔했다. 이듬해 극장용 애니메이션 <루팡 3세 : 카리오스트로의 성>을 제작, 일본 애니메이션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와 함께 흥행에 대 성공을 거두고 ‘애니메이션의 마이다스’로 등극한다. 1984년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로 선풍을 일으킨 하야오는 타카하타 이사오와 함께 오늘날 저패니메이션의 심장이라 불리는 ‘지브리스튜디오’를 설립한다. 1986년에 지브리스튜디오의 첫 작품으로, <걸리버여행기>의 ‘떠도는 섬 라퓨타’ 편을 모티프로 삼아 기계 문명과 독재 권력을 비판하는 작품 <천공의 성 라퓨타>를 상찬한다. 1988년 미야자키 하야오는 그동안 자기 작품의 분위기가 국적불명이었다는 자아비판과 함께 “가장 일본적인 애니메이션”을 표방한 작품 <이웃의 토토로>를 연출, 일본의 국민작가로서 위상을 공고히 한다. 이후 <마녀 우편배달부>(1989년) <빨간 돼지>(1992) <원령공주>(1997)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2001) 등을 연이어 발표, 세계적인 거장의 반열에 오른다. (fin) 송 준 기자 / 영화평론가 1990년부터 <시사저널> 문화부 기자로 ‘괴로운 글쓰기’의 업을 시작하였고, 1999년 영화전문주간지 <프리뷰>의 창간 편집장으로 숱한 밤을 새웠다. 2003년에는 중견 영화평론가 그룹 ‘젊은영화비평집단’의 회장을 맡아 비상업예술영화를 중심으로 광화문 시네큐브에서 <작은영화제>를 개최하였다. 2004년에는 각색을 맡아 작업했던 황철민 감독의 영화 <프락치>가 제34회 로테르담국제영화제에서 ‘국제비평가협회상’을 수상했으며, 2007년 MBC대한민국영화대상의 심사위원을 역임한 바 있다. 저서로 영화 에세이 『아웃사이더를 위한 변명』(2004, 심산)이 있다.
    • G.QT
    2017-02-21
  • 윤동주 탄생 100주년 시인 소강석
    윤동주 탄생 100주년그 죽음을 생각하지 않고바라볼 수 없는 아름다운 주름으로 덮인 얼굴 시의 원래 뜻은 상제의 말씀을 모시는 신전 하나님 말씀을 모시는 성전 시인이란 슬픈 천명(天命) 아비 충무공 이순신(1545~1598)은 쉰셋 막내아들은 꽃다운 스물한 살. 그의 죽음을 듣고 정유년(1597) 10월에 남긴 난중일기의 기막힌 기록이다. 10월 14일(신미) 저녁에 천안에서 사람이 와 집안 편지를 전하다. 대충 겉봉을 뜯고 본즉 겉에 ‘통곡’ 두 글자가 쓰여 있어 막내 아이 면의 전사를 알다. 간담이 떨어져 목 놓아 통곡하고 통곡하다. 하늘의 어질지 않음이 어찌 이러한가. 슬프다 내 아이야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갔느냐. 내 죄가 많아 네게 미친 것인가. 울부짖을 뿐이다. 하룻밤이 일 년 같다. 10월 16일(계유) 내일로 막내 아이 죽음을 들은 지 나흘째다. 마음대로 통곡할 수 없어 영내의 강막지 집으로 가다. 10월 17일(갑술) 맑다. 자식의 복을 입고 새벽에 곡하니 비통함을 견딜 길 없다. 여기서부터 멀지 않다. 그러나 장장마다 속이 깊은 검은 성경을 타고 새 에덴의 생명나무가 피는 마을까지 천년이 걸릴지도 모른다. 알고 보면 믿음을 가진 우리 모두 여기서부터 캄캄하고 아득하게 먼 길을 가고 있다. 각자의 여기는 다 다르지만 장장마다 속이 깊은 검은 성경의 말씀을 타고 말이다. 그곳은 누더기 같은 우리의 삶을 아름답고도 싱싱한 생명나무로 살리는 곳이다. 윤동주 탄생 100주년은 모질게도 그 죽음을 생각하지 않고는 바라볼 수 없는 아름다운 주름으로 덮인 얼굴이다. 그리고 그 얼굴은 울다가 웃음 반 울음 그친 얼굴이다. 그래서 웃음 반 울음 반 소리는 그릇을 놓쳐 가며 하는 설거지 같은 여울물 소리다. 윤동주는 1917년 12월 30일 만주 명동촌에서 태어나 1945년 2월 16일(28세) 후쿠오카 감옥에서 바닷물을 걸러 생체실험 주사를 맞고 조국 광복을 6개월 앞두고 죽었다. 1945년 8월 15일 정오 일본 천황이 무조건 항복 방송을 웅얼거린 뒤 심훈이 예언자처럼 외쳤던 광복을 했다. 그리고 1948년 1월 그의 유고(遺稿) 31편을 모아 정지용의 서문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정음사 1948) 유고 시집이 간행되었다. 그 뒤에야 우리는 윤동주가 잔혹한 일제 암흑의 시대를 밝힌 순결한 영혼의 시인이라는 걸 알게 됐다. 그 시집에 실린 그의 시에는 소년다운 순결한 의식과 기독교의 참회 정신이 깔려 있었다. 시인 윤동주의 아버지 윤영석은 ‘해’ ‘달’ ‘별’을 유난히 좋아했다. 그래서 자식들 아명도 이와 연관해 지어 주었다. 첫째인 동주에게는 ‘해처럼 빛나라’는 뜻의 해환(海煥), 둘째 일주에게는 달환(達煥), 그 밑에 갓난애 때 죽은 동생에게는 별환이라고. 윤동주 시인은 고향인 북간도 용정 ‘명동’에서 이런 아명을 갖고 28년 생애의 절반인 14년을 보내며 자연을 벗 삼아 시인의 감수성을 키웠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이라고 노래한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는 이미 그때 잉태되고 있었다. 2017년 1월 8일 주일 저녁 7시 새에덴교회 3층 프라미스홀에서 주일 저녁찬양예배를 윤동주 탄생 100주년 기념 추모 예배와 음악회로 가졌다. 사회를 맡은 윤동현 목사가 글로리아 찬양단의 찬양으로 예배 시작을 알렸다. 김연호 목사 지휘로 글로리아 찬양단의 장엄한 찬양이 성도들로 가득한 프라미스홀을 믿음의 언약으로 채웠다. 이어서 “태백산맥”의 작가 조정래의 축하와 격려를 받으며 대하소설 “그래도 강물은 흐른다”(全 5권 2012 해냄)의 소설가로 등단한 장충식(단국대이사장) 장로가 묵직한 바리톤으로 대표기도를 했다.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주신 하나님 우리 민족 역사의 암흑기 일제 잔혹한 만행과 억압으로 캄캄할 때 별의 시인 윤동주를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회중 아멘) 후쿠오카 감옥에서 죽음을 맞고 떠난 님의 시는 여전히 우리 곁에 남아 저항과 사랑의 별빛으로 빛나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 민족은 길을 잃고 황량한 벌판에 서서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고심하고 있습니다. 주여 하루속히 우리 민족이 길을 찾게 하옵소서. (회중 아멘) 거칠고 험한 광야를 지나 주님의 장막에 거하게 하옵소서. (회중 아멘) 윤동주 시인이 남기고 간 사랑과 용서 화해와 저항의 시절이 우리 민족의 가슴을 비추게 하옵소서.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또 다른 별의 시인이 되어 새로운 대한민국 비상하는 대한민국이 되게 하옵소서. 오늘 윤동주 시인의 추모 음악회를 통하여 새로운 사랑과 희망이 꽃피우게 하옵소서. 침묵의 밤을 밝히는 용서와 화해의 소리를 듣게 하옵소서. (회중 아멘) 다시 순례자의 가슴으로 저 새벽길을 걷게 하옵소서. 추모 음악회를 준비한 새에덴교회와 소강석 목사님을 축복하여 주옵소서. (회중 아멘) 새에덴교회가 하나님의 사랑과 나라 사랑을 전하는 민족 구국 제단이 되게 하옵소서. (회중 아멘) 광야의 영성과 순종의 스승으로 복음을 외치고 시를 쓰는 소강석 목사님을 민족적 제사장이요 시대의 선지자로 더 위대하게 사용하여 주옵소서. (회중 아멘) 음악회를 공동주관하는 한국문인협회와도 함께하셔서 우리 민족의 가슴을 문학의 향기로 가득하게 하여 국민들의 정서를 순화하는 귀한 도구로 쓰임 받게 하옵소서. (회중 아멘) 음악회를 인도하는 윤형주 장로님에게 풍요로운 영성과 감성을 주셔서 오늘 음악회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우리에게 큰 감동과 은혜가 되는 시간 되게 하여 주옵소서. (회중 아멘) 음악회를 통하여 윤동주의 정신이 살아나고 이 땅에 저항 시인과 애국 시인이 많이 태어나게 축복하여 주옵소서. 음악회 모든 순서를 주관해 주시고 우리 심장이 다시 뛰게 해 주옵소서. 주님의 별빛 같은 사랑을 따라 허락하게 하옵소서. 하여 우리 민족이 다시 일어서게 내일을 향해 비상하는 꿈과 희망의 음악회가 되게 하옵소서. (회중 아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글로리아 찬양단의 아멘송이 천사들의 환영 소리처럼 장엄하게 이어졌다. 윤동주 시 ‘십자가’에 곡을 붙인 찬양을 새에덴연합찬양대 천사의소리합창단이 새에덴 오케스트라 협연으로 앳된 소리와 여문 소리가 어울려 합창했다.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렸네첨탑이 저렇게도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이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한 예수 그리스도에게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리다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리다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 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리다 윤동주 시인에 각별한 애정을 가진 소강석 목사가 “윤동주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여”라는 제목으로 기념 메시지를 전하기 전 소강석 목사의 요청으로 새에덴연합찬양대가 ‘십자가’ 노래 후렴을 다시 찬양했다. 뜨거운 갈채가 있었고 그리고 시인 소강석 목사의 시론(詩論)과 윤동주 평전(評傳)이 이어졌다. “요즘에야 사람들이 시(詩, poetry)를 개인의 서정성을 운율에 맞춰 표현하는 언어예술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고대에는 시인들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시를 언어예술이기 이전에 신전(神殿)에 임한 말씀으로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시라는 글자를 한문으로 詩이며 이는 말씀 言(언)과 절 寺(사)가 합쳐진 형성자입니다(여기서 言이 의미기호 寺가 소리기호이고 시는 言 즉 언어가 그 의미내용의 핵심을 이루는 이름). 그런데 寺(사)가 우리나라에서는 절 사(寺)이지만 중국에서는 관청 시(寺)입니다. 이곳은 왕과 재상들이 백성을 다스리던 곳입니다. 그런데 복음이 전해지지 않았던 때에는 땅의 왕을 하제(下帝)라고 부르고 하늘의 왕을 상제(上帝)라고 불렀습니다. 그리고 중국의 천자 같이 이 땅에서 통치하는 하제는 하늘의 상제 말씀을 잘 받들어서 백성을 다스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이 땅의 하제가 하늘의 상제의 말씀을 받은 것을 바로 뭐라고 했느냐면 시(寺)라 그랬습니다. ‘寺’는 손 우(又)와 마디 촌(寸)이 합쳐진 것으로 본디 ‘모시다’라는 의미였고 말 그대로 풀이하면 ‘말씀으로 받들어 모시다’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시의 원래 뜻은 상제의 말씀을 모시는 신전(神殿) 즉 하나님 말씀을 모시는 성전(聖殿)이라는 의미가 있었습니다. 후대에 이르러 신탁(神託)을 받아서 왕에게 하늘의 뜻을 전달하고 하나님 말씀을 가르쳐 주는 사람이 생겨났습니다. 그가 바로 고대의 시인이었던 것이죠. 그러므로 고대 시인은 하나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 역할을 했고 신과 인간 사이의 가교(架橋) 역할 즉 제사장 역할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인이란 적어도 시대를 읽고 그 시에 당대의 예언자적 메시지가 담겨 있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윤동주 시인은 우리 민족의 예언자적 시인이고 제사장적 시인이라고 확실하게 단언할 수 있습니다. 윤동주는 명동촌에서 태어났습니다. 당시 그곳은 우국지사들과 선각자들이 몰려드는 집합소였습니다. 윤동주 시인의 할아버지 윤하현은 기독교 신앙의 독실한 장로이고 민족의 선각자이셨습니다. 그래서 윤동주는 할아버지가 독립투사들에게 독립자금을 대주는 것을 보면서 자랐습니다. 그리고 외삼촌 김약연은 명동촌에 교회와 학교를 세운 목사이셨습니다. 그래서 윤동주는 어린 시절부터 깊은 기독교 신앙과 애국혼을 가슴에 지니고 자랐습니다. 그의 시에는 그런 정신이 바탕이 되어 일제에 대한 저항정신의 시로 표현된 것이 아주 많습니다. 그런 정신이 나타난 윤동주의 ‘눈 감고 간다’라는 시가 있습니다. (강대상 벽면 화면에 시가 떴다) ‘태양을 사모하는 아이들아 별을 사랑하는 아이들아 밤이 어두웠는데 눈 감고 가거라 가진 바 씨앗을 뿌리면서 가거라 발부리에 돌이 채이거든 감았던 눈을 와짝 떠라’ 이 시에서 ‘태양과 별’은 조국의 독립을 상징하고 ‘밤의 어둠’은 암울한 일제 강점기를 형상화시켜 주고 있습니다. 밤이 어두운데 눈을 감고 가라는 것은 반항이고 저항입니다. 눈을 감고 가라는 것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절망의 시대이지만 그럴수록 역설적 희망을 ‘가진 바 씨앗을 뿌리면서’ 가고 ‘발부리에 돌이 채이거든 감았던 눈을’ 뜨라는 것이지요. 그것을 계기로 삼아 전진을 하라는 것입니다. 희망을 안고 말입니다. 암울한 일제 강점기를 사는데 윤동주는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이 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했습니다. 나라를 잃어버린 민족의 지성인으로서 스스로가 부끄럽습니다. 자신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삶을 살고 싶어 하지만 비극적인 현실은 바람에도 흔들리는 잎새 같은 유약한 존재일 뿐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섬세하고도 순혈적인 자세로 별을 노래하고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는 것은 조국을 위해 바람과 별을 안고 주어진 길을 가겠다는 것입니다. 그 필연적인 길은 무엇입니까. 저항의 길이요 그리고 민족의 해방을 위한 영혼의 길이 아니겠습니까. 오늘밤에도 별에 바람이 스치운다는 것은 자신이 추구하는 이상의 세계를 바로 해석하는 것이겠지요. 오늘의 괴로운 현실과 시련이 아주 차갑고 냉정하게 스치고 지나가는 것이겠지요. 저보다도 한 평생을 국문학에 헌신한 강희근 교수님도 계시고 오늘 문협의 이사장님도 와 계십니다. ‘십자가’ 시를 1941년에 지었는데 이때는 일제의 압제가 최악으로 치닫던 때입니다. 그는 조국의 해방을 쫓았던 햇빛의 이미지로 말하지만 광복의 축복이 아직은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려 있다는 것입니다. 광복과 해방은 멀었습니다. 오직 광복은 저 십자가에만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안 된다는 겁니다. 그러면 무엇입니까.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는 우리 민족이 더 고난을 당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에 자신의 고난을 하나님의 영광으로 허락하신다면 자신의 꽃처럼 피어나는 젊음의 피를 어두워져 가는 민족의 제단에 아낌없이 드리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더니 결국 그는 그의 ‘서시’와 ‘십자가’에서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가다가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후쿠오카 감옥에서 그의 시와 꽃처럼 피어나는 삶의 피를 제물로 민족의 제단과 하나님에게 바친 것입니다. 그는 예언자적이고 제사장적인 시인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와는 달리 윤동주가 ‘집집마다 간판(看板)이 없어 집 찾을 근심이 없어... 손목을 잡으면 다들 어진 사람들’이라고 노래한 ‘간판 없는 거리’라는 시는 평화로운 세상을 꿈꾸고 있습니다. 이것은 저항정신을 넘어 온 세상이 평화롭게 사는 메시지를 전하는 예언자적 시요 온 세상에 위로를 전하는 제사장적 시입니다. 그리고 그는 후쿠오카 감옥으로 잡혀갔습니다. 윤동주는 서정적 시인으로서 보편적 인간애를 정말 순수하게 표현한 시인으로도 유명해 일본 사람들 가운데도 윤동주 시인을 좋아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러나 윤동주는 청록파 시인처럼 시대 저항과는 아무 상관없는 시인이 아니라 당대의 예언자적이고 제사장적인 시인이었으며 조국의 독립을 염원한 애국 저항의 시인이기도 했다고 평가할 수 있습니다. 그는 후쿠오카 감옥에 갇혀서 생체실험을 당하다 (바닷물을 거른) 생체주사를 맞고 죽습니다. 그가 ‘십자가’라는 시에서 고백하는 것처럼 민족의 제단에 그의 시와 생명을 화제로 바치고 순교의 제물이 되었습니다. 윤동주는 불운한 시대에 태어나 불운한 삶을 살았습니다. 그러니 윤동주하면 비극적 시인 우리 민족을 대표하는 하나의 희생자요 모형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때문에 그의 삶이 더욱 애절하고 더욱 안타깝고 애처롭게 느껴지는 것 아니겠습니까. 올해로 그의 탄생 100주년을 맞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그를 추모하는 마음으로 그의 시에 나타난 시적 화자와 일체화를 이루어 윤동주의 평전(評傳)과 시를 썼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다시 별 헤는 밤”이라는 시집을 펴냈습니다. 오늘 또 추모음악회를 하게 되었는데요. 추모음악회를 통해 윤동주 시인의 저항정신과 애국정신을 깊이 느껴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늘과 바람과 별이 여러분의 가슴을 그야말로 물들일 수 있기를 바라고 글사랑으로 나라를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는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좋은 시간 되시기를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큰 박수) 테너 박완 교수(팝페라 가수 연세대교수)가 소강석 작사 작곡 “윤동주 추모곡”을 불렀다. 님은 갔지만 떠나지는 않았습니다떠나보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한국문인협회 문효치 이사장이 기념사를 하고 소강석 목사가 축도로 1부 기념예배를 마쳤다. 그리고 2부 추모 콘서트가 이어졌다. 시인 윤동주의 육촌 동생이고 70년대 통기타 문화 창시자 윤형주(1947. 11. 19 ~ ) 장로가 기타를 메고 교인들의 열화 같은 박수 속에 강단 왼쪽에서 중앙으로 걸어 나왔다. 그는 마이크 앞에 섰다. 그러면 그는 달변이 된다고 하는데 정말 그랬다. 방송사 마이크를 타고 전국에 퍼졌던 그의 잔잔한 음성이 프라미스 홀을 가득 채운 성도들 귀와 마음을 목마른 사슴이 마시는 물 같이 채웠다. “저는 오늘 두 곡의 찬양을 먼저 부르려고 하는데요. 130년 전 캐나다의 선교사들에게 하나님께서 조선이라는 나라에 가라고 명령하셨던 것 같아요. 그들은 의사이기도 했고 교수이기도 했고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이기도 했습니다. 캐나다 최고 엘리트들이 목선을 타고 진주만을 거쳐 일본을 거쳐서 조선으로 오게 됩니다. 그분들은 용정이라는 곳에 닿게 됩니다. 그분들은 그 흑암 속에 있던 우리 조상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교회가 세워졌고 학교가 세워졌고 병원이 세워졌습니다. 130년 전 우리 고조 중조 할아버지들에게 그분들이 불러주었던 그 찬양은 유산이 돼서 저희 세대까지 흘러왔고 우리 자녀들의 찬송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찬송은 우리 손주들의 찬송이 될 것입니다. 찬송이 유산이 된다는 것은 참 놀라운 일입니다. 그 선교사들을 향해서 명령하셨던 하나님 명령이 이 찬송의 3절 가사에 담겨 있는 데요. 그것은 ‘밤 깊도록 동산 안에 주와 함께 있으려 하나 괴론 세상에 할일 많아서 날 가라 명하신다’입니다. 그 아름답고 광활한 캐나다에서 편안하게 인생을 보내려는 게 아니고 은혜를 받았으면 가라는 것이었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받았으면 전하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왔던 그 선교사들이 불러주었던 이 찬양은 130년 후에 제 찬양이 되었고 150년 200년 후에는 우리 후손들의 찬송이 될 것입니다. 우리 선조들 영혼이 담겼던 이 찬송을 들려드리겠습니다.” 윤형주 장로의 여전히 해맑은 소리가 청아한 주의 음성처럼 들렸다. 저 장미꽃 위에 이슬 아직 맺혀있는 그 때에귀에 은은히 소리 들리니 주 음성 분명하다 주가 나와 동행을 하면서 나를 친구 삼으셨네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은 알 사람이 없도다 그 청아한 주의 음성 우는 새도 잠잠케 한다내게 들리던 주의 음성이 늘 귀에 쟁쟁하다 주가 나와 동행을 하면서 나를 친구 삼으셨네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은 알 사람이 없도다 밤 깊도록 동산 안에 주와 함께 있으려 하나괴론 세상에 할일 많아서 날 가라 명하신다 주가 나와 동행을 하면서 나를 친구 삼으셨네우리 서로 받은 그 기쁨은 알 사람이 없도다 큰 박수. 윤형주 장로의 낭랑한 음성이 친구 삼은 회중을 향했다. “저는 찬양 유산을 누릴 수 있다는 게 큰 축복이라고 생각합니다. (회중 아멘) 말씀이 물려받은 유산이라면 정말 복된 일입니다. 이 세상에 세상적인 것은 물려주려고 애를 쓰는 부모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녀들을 살릴 수 있는 유산은 하나님의 말씀과 여호와 찬양입니다. (회중 아멘) 명동촌에서 주일이면 신자들은 다 흰옷을 입고 교회에 갔습니다. 하얗게 빨아 입은 흰옷을 입고 두루마리를 입고 어른들이 명동촌에 있는 교회를 다녔다고 합니다. 북간도를 이끈 지도자가 한분 계시는데 그분은 김약연 목사님이십니다. 그분의 누이동생이 윤동주 시인의 어머니 김용 여사이십니다. 이분이 윤 씨 집안에 시집와 낳은 첫아들이 윤동주입니다. 김약연 목사님의 유언이 뭔지 아세요. ‘내 행동이 곧 유언이다.’ 여러분 이렇게 말하기가 쉽습니까. ‘내 행동이 곧 유언이다.’ 얼마나 자기 행동이 자신 있으면 그것을 자손들에게 유언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 밑에서 자란 자녀들이 그 교육 속에서 윤동주는 자랐습니다. 그런데요. 저희 집 가훈이 있는데 뭐냐면 딱 두 가지입니다. 하나님 사랑 나라 사랑. 오늘날까지 그 가훈은 계속 이어지고 있습니다. 어려서 자녀에게 무엇을 물려주었는가가 그 자녀의 꿈이 됩니다. 어디를 데려 갔는가 무슨 책을 읽게 했는가 무슨 말을 들려주었는가 그것이 그 자녀들의 전공이 되고 미래가 되더군요. 저는 어른들이 부른 찬양 가운데서 오늘날 우리 가족들이 모이면 즐겨 부르는 또 하나의 찬송이 있습니다. (기타로 간주를 했다) 이 찬송은 전도 집회할 때마다 저도 즐겨 부르는 찬양입니다. 주일날 명동교회에서 흰옷을 입은 성도들이 기도하고 찬양하는 어른들의 모습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하는 어른들의 모습을 윤동주는 보았을 것입니다. 그 찬송입니다.” 그는 왼손 손가락으로 줄을 눌러 음정을 고르고 오른손 손가락으로 줄을 튕기며 “내 영혼이 은총 입어”를 트윈폴리오 옛 모습 그대로 맑고 경쾌하게 노래했다.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짐 벗고 보니슬픔 많은 이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 받고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주의 얼굴 뵙기 전에 멀리 뵈던 하늘나라내맘속에 이뤄지니 날로날로 가깝도다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 받고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 받고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그는 반주하는 기타를 메고 북간도 시절의 찬송을 회상하듯 말했다. “아버지가 즐겨 불렀던 찬양으로 가득 찼을 그 북간도 주일날 명동교회 모습은 참 아름다운 잔치였을 것 같아요. 흰옷을 입은 하나님의 백성들이 교회 모여서 찬양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고 말씀을 듣고. 북간도 명동촌은 이미 천국의 아름다움을 체험한 마을이었을 것 같습니다. 그곳에서 윤동주는 태어나고 자랐습니다... 윤동주는 민족시인 투쟁시인 저항시인이라고 하지만 사실 그는 신앙시인이었습니다. 윤동주는 하나님이 우리 민족을 해방시켜 주신다는 것을 성경적으로 믿었던 시인입니다... (시인 소강석의 시집 ‘다시 별 헤는 밤’을 왼손에 들고)소 목사님은 윤동주의 고향 명동촌을 샅샅이 살피며 윤동주가 보지 못했을 나무의 잎새 흔들림까지 보고 이 시집을 쓰고 펴냈습니다. 이 시집을 보니 윤동주가 이분의 가슴을 들락날락했습니다. 또 이 시집을 쓴 분이 그의 마음속을 들락날락했습니다. 어떻게 윤동주 시와 마음을 이렇게 헤아릴 수 있을까... 시인들은 착해요. 여러분 그런 시인이 여러분의 목회자인 걸 감사하세요. (회중 박수와 아멘) 소강석 목사님은 시인의 눈을 가지셨습니다. 여러분의 아픔과 고민을 연민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그걸 그냥 넘어가는 분이 아닙니다. 왜요. 시인의 눈과 마음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라와 민족의 어려움도 그냥 넘어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분은 목회자로서는 다윗의 마음을 지녔고 시인으로서는 윤동주의 마음을 가졌습니다... 이분 덕에 윤동주가 다시 태어날 수 있었습니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이 시간 여러분 담임목사님 소강석 시인이 이 자리에 올라오셔서 윤동주를 추모하는 시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다시 우리 가족을 대표해 소강석 목사님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소 목사님의 애정을 통해 믿음의 시인 윤동주가 다시 조명을 받고 사랑받게 된 것을 이 자리에서 거듭 감사드립니다. 여러분 소강석 목사님이십니다.” (큰 박수) 꽃잎과 바람과 별을 사랑하는 유쾌하고 융숭한 목사 소강석 시인이 태풍에 쓸려간 뗏장을 손수 다시 입힌 북간도 윤동주 묘에서 읽은 조시(弔詩)를 다시 슬프게 낭송했다. 그 어떤 밤도 흐린 별 하나를 이기지 못하리(윤동주 묘에서 바치는 뒤늦은 弔詩) 님은 후쿠오카 형무소에서싸늘한 시신이 되고 한줌의 백골이... 감히 이 조시대신 윤동주의 추모시로 소강석 시인의 시 가운데 내 마음에 더 애절하고 아련한 “꽃잎과 바람”을 바친다. 꽃잎은 바람에 흔들려도바람을 사랑합니다꽃잎은찢기고 허리가 구부러져도바람을 사랑합니다누구도 손 내밀지 않고 아무도 다가오지 않은 고독의 시간바람은꽃잎을 찾아 왔습니다별들의 이야기를 속삭이고나뭇잎 노래를 들려주고애틋이 어루만져 주셨습니다밤이 깊어도아침이 밝아도꽃잎이 모두 저버려도꽃잎은 바람을 사랑합니다그래서 바람이 불면 꽃잎이 떨어집니다 시(詩)란 무엇인가. 서경(書經)의 순전(舜典)에 “시는 뜻을 말하는 것(詩言志)이고 노래는 말을 길게 늘인 것(歌永言)”이라고 정의되어 있다. 소강석 시인의 “꽃잎과 바람”은 노래로도 지어져 바리톤 고성현(한양대 교수)이 예술의 전당에서 그의 애창곡 “청산에 살리라”에 이어 소강석 목사의 작시 작곡 “꽃잎과 바람”을 참으로 장중하면서도 애절하게 열창했다. 시인이란 무엇일까. '시를 쓰는 마음으로/ 꽃을 꺾는 마음으로/ 자는 아이의 고운 숨소리를 듣는 마음으로/ 죽은 옛 연인을 찾는 마음으로/ 잃어버린 길을 다시 찾은 반가운 마음으로/ 우리가 찾은 혁명을 마지막까지 이룩하자' - 시인 김수영 '기도' 중에서 어느 시인에게 어떤 기자가 물었다. 질의 :시는 뭔가. 정의를 내린다면.응답 :“아무 것도 아닌 아무 것이다.”질의 :시인은.응답 :“글쎄, 힘없는 혁명가?” 그에 답해 윤동주는 일본에 유학 중이던 1942년 이런 시를 남겼다. 쉽게 씌어진 시(詩) 창(窓) 밖에 밤비가 속살거려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시인(詩人)이란 슬픈 천명(天命)인 줄 알면서도한 줄 시(詩)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보내주신 학비(學費) 봉투(封套)를 받아대학(大學) 노―트를 끼고늙은 교수(敎授)의 강의(講義)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를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나는 다만 홀로 침전(沈澱)하는 것일까 인생(人生)은 살기 어렵다는데시(詩)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창(窓)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시대(時代)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最後)의 나, 나는 나에게 적은 손을 내밀어눈물과 위안(慰安)으로 잡는 최초(最初)의 악수(握手). 육첩방(六疊房)은 짚과 돗자리로 만든 다다미 여섯 장을 깐 일본식 방이다. 이 방에서 윤동주는 시인이란 '현실을 직접 움직이는 나'가 아니라 '언어를 다루는 사람'이라는 괴로움에 연유해 슬픈 천명(天命)을 받은 힘없는 혁명가임을 깨닫는다. 부임한 이래 줄곧 같은 시험문제만 낸다는 교수님이 한 분 계셨다. 그 시험 문제란 바로 ‘시인이란 무엇인가’였다. 이와 같은 사실은 위에서 아래로 전해져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지금까지 그 사실은 한 번도 어긋난 적도 없었기에 학생들도 모두 그 문제에 대해서만 시험 준비를 했다. 드디어 시험 날 학생들은 교수님께서 정해진 문제를 칠판에 쓰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모두의 예상과는 달리 교수님께서 쓴 첫 글자는 ‘도’였다.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당황한 학생들로 강의실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작 시험 문제는 ‘도대체 시인이란 무엇인가’였다고 한다. 소강석. 그는 언어의 진정한 연금술사다. 단지 몇 개의 낱말들이 목사인 그의 머리와 가슴을 거치면 언제나 새로운 언어의 세계가 믿음의 세계로 융숭하고 섬세하게 만들어진다. 그 덕분에 시란 그저 영감이 스쳐서 이루어질 뿐이라는 가벼운 낭만적 가치관은 흔들리고 다시 흔들리고 또 다시 흔들린다. 그의 시는 내게 신앙의 언어이자 언어의 신앙이기 때문이다. 찬물로 세례를 받으면서 먹은 믿음의 첫 마음으로 평생을 산다면. 사랑하는 사이가 맞는 첫 성탄절 처음 눈을 맞으며 걷던 날의 떨림으로 계속된다면. 아팠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병이 나은 날의 상쾌한 공기 속의 감사한 마음으로 믿음을 키운다면. 첫 월급을 받고 첫 헌금을 하던 설레임이 가시지 않는다면. 그러면 그때가 언제이든지 늘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소망하며 별을 쳐다보는 목사는 이런 생각을 하지 않을까. 내 너무 별을 쳐다보아 별들이 더럽혀지지 않았을까. 내 너무 하늘을 쳐다보아 하늘이 더럽혀지지 않았을까. 근근이 별빛을 쳐다보며 나날을 견뎌 왔는데 이제 어쩔 것인가. 내가 너무 쳐다봐 저 별들을 더럽히는 것은 혹 아닐까. 착함과 사랑에 한 걸음 더 나아 가려는 믿음이 아니라면 삶은 대체 무엇을 하자고 사는 것이겠는가. 그리고 선하고자 한다면 어찌 부끄럽지 않을 수 있는가. 내 따뜻한 저녁밥이 지중해를 표류하다 죽어 간 시리아 난민 소년의 밥이 아니라고 누가 말할 수 있는가. 내 안락한 잠자리가 포탄이 떨어지는 건물 계단에 웅크린 누군가의 몫이 아니라고 누가 말할 수 있는가. 별아 어찌하랴. 이 세상 무엇을 쳐다보리. 가슴 가득 황홀히 헹구어 부끄럼이 없기를 바라는 이 마음마저 가질 수 없다면 나는 무엇으로 심령이 가난한 자가 되리. 그걸 하나님은 아실 것이다. 그래서 세상의 어려운 사람들에게 부끄럽고 미안해 교회에서 기도한다. 2017-01-15
    • G.QT
    2017-01-15
  • 성깔 있는 ‘강철 무지개’ 이유 있는 ‘크라우드 펀딩’
    ‘목숨은 초개처럼, 의리는 태산처럼.’ 여기 한 사나이가 있다. 스물다섯 아까운 나이를 흔쾌히 조국에 바친 윤봉길 의사. 만주를 삼키고 대륙으로 마수를 뻗쳐가던 일본군은 상하이를 점령한 뒤 1932년 12월 19일 상하이 홍커우공원에서 대대적인 전승기념 군대사열식을 준비한다. 당시 상하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막바지에 몰려 있었다. 일본의 극렬한 탄압으로 비밀연락조직인 연통제가 와해되고, 교포들의 지원도 거의 끊어져 심한 재정난에 시달리느라 저항다운 저항은 꿈도 꾸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그 와중에 일본군의 상징적인 승리 축하 파티장에서 통렬한 폭염이 피어오른다. 기마대와 헌병대 등 1만 명의 일본군이 도열해 있는 호랑이굴로 혈혈단신 홀로 찾아들어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수통폭탄을 적진의 심장부에 꽂아넣은 윤봉길 의사의 홍커우 의거가 작렬한 것이다. 이 한 방의 폭발로 동아시아의 전황이 급변하게 된다. 상해점령군 사령관 시라카와 대장 및 일제의 주요 수괴들이 대거 즉사하거나 치명상을 입었고, 희망마저 시들어가던 독립운동의 불씨가 다시 살아나게 되었다. 중국은 이후로 임시정부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함께 공조하여 항일투쟁을 전개해나간다. 특히 당시 세계지도에는 한반도가 일본 땅으로 표기되어 세상 사람들은 우리나라의 존재를 아예 모르고 있었는데, 윤봉길 의사의 홍커우 공원 의거로 말미암아 비로소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의지를 인지하게 되었다. 나아가 1943년 카이로회담에서는, 독립을 신청한 100여 개의 식민지 국가 중 유일하게 독립을 보장받는 ‘카이로 선언’의 밑거름이 되었다. 만약 윤봉길과 김구의 홍커우공원 의거가 없었다면 대한민국의 독립과 민주주의, 또 오늘날의 번영도 장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열혈청년에게 꽂힌 또 한 사나이가 있다. 영화감독 이민용(59). 1995년 <개 같은 날의 오후>로 데뷔한 뒤 국내외 각종 신인감독상을 휩쓸고 연이어 <인샬라>(1997)와 <보리울의 여름>(2003)을 만든 이민용 감독은 2014년 청년 윤봉길의 이야기에 온통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2년여 동안 ‘매헌윤봉길기념사업회’ ‘매헌윤봉길월진회’ 등 유관 단체들을 찾아다니며 자료를 수집하고 시나리오를 완성한 뒤, 2016년 12월 19일 드디어 영화 제작의 첫 발을 내디딘다.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홍커우 의거’ 84주년 되는 날이었다. 그런데 영화 제작의 출사표가 남다르다. 흔히는 투자사를 찾아다니며 영화 제작기금을 모금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영화 <강철 무지개>는 크라우드 펀딩 전문 사이트 와디즈를 통해 제작기금을 공개 모집한다. 여기 또 가슴 뜨거운 사연이 숨어 있다. 이민용 감독은 영화계에서 흔히 “독도 때문에 신세 망친 감독”으로 불린다. “2004년 3년8개월 동안 독도를 지킨 홍순칠과 33인의 독도의용수비대 이야기를 듣고 의미도 있지만 에피소드들이 재미도 있어서 영화로 만들면 좋겠다”고 생각한 이민용 감독은 덥석 독도 이야기 속으로 몸을 던진다. 거기까지는 기획도, 작업도, 사람들도, 진행도 매우 순조롭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전혀 예기치 못한 반대에 직면하게 된다. “‘독도 영화에 투자를 했다가는 모기업이 일본 시장에서 불이익을 받을 수 있으니 안 된다’라며 대기업 계열 대형 투자사들이 마치 녹음기를 틀어놓은 것처럼 똑같은 답변“을 해온 것이다. 갑자기 제작 분위기가 빙하기처럼 사늘하게 얼어붙었다. 오기가 발동한 이민용 감독은 독도 영화화를 위해 10년 동안 안 해본 일이 없다고 한다. 심지어 2014년 1월에는 오스트리아 빈에서 열린 유럽한인총연합회 정기총회까지 찾아가 제작비를 모금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독도 영화는 무기한 연기되었고, 이민용 감독은 새로운 소재를 찾는 과정에 반일프로젝트에 정통한 사람이 되었다. “10년 동안 독도 프로젝트에 매달렸더니 영화 경력 단절로 여러 어려움을 겪게 됐다. 그러나 역사적 사건에 두루 관심이 많아지면서 더 많은 소재가 생겨났다”. 여기서 이민용 감독이 만난 사람이 바로 윤봉길 의사였다. 그런데 <강철 무지개>에 독도의 악연이 데자뷰처럼 떠오르는 것이었다. 대기업 의존도가 높은 한국 영화계 투자 여건을 다변화하고자 중국 현지 투자도 모색해보았다. 중국 상하이문화투자유한공사와 80억 원대의 한·중 프로젝트 투자 계약이 상당히 훈훈하게 진행되는 와중에 난데없는 사드 배치 파동으로 중국 정부로부터 “모든 투자 허가 보류” 사태를 맞은 것이다. 독도 영화의 운명이 재현되는 것은 아닐까? 모골이 송연해지며 긴장감이 찾아들었다. 이제 더는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그래서 택한 최후의 방안이 크라우드 펀딩이었다. 국민을 믿고, 민족의 이름으로 직접 제작비를 모금해보자는 것. “훙커우공원 의거는 우리 독립운동사에서 새로운 전기를 만든 중요한 사건이었으며, 우리가 이루어낸 현대화의 본질적 문제를 다루는 영화다. 특히 무엇보다도 매력적인 캐릭터를 가진 사람의 이야기“라고 이민용 감독은 힘주어 말한다. 크라우드 펀딩 홈페이지 : www.강철무지개.com 후원계좌 : 우리은행 1005-703-127734 연락처 : 백철기 010-5358-7487
    • G.QT
    2017-01-05
  • 한남중앙교회 최문진 목사
    1977년 11월 4일 부임한 하구봉 목사가 2005년 5월 2일 원로 목사로 추대되고 그 뒤를 이어 최문진 목사(총신 88회)가 위임 목사가 되었다. 전임 하구봉 목사는 총회 활동을 많이 하면서도 인품이 좋고 목회를 충실히 하셨다. 그 뒤를 이은 최문진 목사는 덕과 성실을 겸비한 목회자다. 한남중앙교회가 있는 자리는 옛날 나의 어린 시절 시장이 있고 조금 더 나가면 잠실로 건너가는 나루터가 있었다. 그 시절 여름이면 시장터에서는 무명천을 두른 가설극장이 밤이면 서곤 했다. 겨울이면 한강이 두텁게 얼어 한남동 나루터에서 보광동 너머까지 썰매를 타고 다닐 수 있었다. 오랜 만에 옛날을 생각하며 그리고 총회전도국장 시절 헌신예배도 불러주시던 하구봉 목사도 기리며 후배 목사의 본문 요한복음 4:43-45 제목 “예수님을 환영하십니까”라는 설교로 깊은 은혜를 받고 주일학교 발표회와 교인들 공연으로 성탄의 기쁨을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과 함께 한껏 누릴 수 있었다. 2016-12-26
    • G.QT
    2016-12-27
  • 건강한 겨울나기
    짧은 굴욕을 견디며 미물의 생명조차 아낀 선비의 방식은 이건영 목사처럼 현명 바람 불면 바람만큼 흔들리며 살자 기도하면 기도만큼 주님에게 의지해 살자 새벽이면 서로의 마음에 기도이슬로 맺히자 벌써 올해의 마지막 달을 살고 있다. 한 해가 시작될 때 소원했던 일의 목록을 살펴본다. 잘된 일도 있고, 그렇게 되지 못한 일도 있다. "고요히 앉아 있는 곳에서는 차를 반쯤 우려냈을 때의 첫 향기 같고, 오묘하게 움직일 때는 물 흐르고 꽃 피듯이 하네"라는 말씀을 따라 살고자 했으나 미치지 못한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화를 내며 싸우는 때가 많았다. 대다수 국민과 국회는 최순실의 국정 농단과 박근혜 대통령의 문제를 푸는 길로, 탄핵이라는 속결(速決)을 택했다. 대신 대통령 탄핵을 사법부가 최종 판단토록 했다. 유죄판결 없이도 상·하원이 대통령을 탄핵(impeachment)하는 미국보다는 좀 더 엄격하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소추안’을 접수한 헌법재판소가 12일 세 번째 전체 재판관 회의를 열었다. 회의에서 재판관들은 우선 ‘변론 준비절차’를 갖기로 하고 이를 담당할 수명(受命) 재판관 3명을 지정키로 했다. 또 헌법연구관 20여 명을 투입, 탄핵심판 집중연구팀도 운영키로 했다. 현직 대통령 탄핵이라는 중차대한 사안인 만큼 신속하게 처리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1. 떡집 주인이 사무라이를 찾아왔다. 사무라이 아들이 떡을 훔쳐 먹었다는 것이다. 어린 아들은 먹지 않았다고 했다. 사무라이는 칼을 들어 아들 배를 갈랐다. 떡이 나오지 않자 사무라이는 떡집 주인 목을 치고 자기 배를 그어 자결했다. #2. 세종이 아꼈다는 조선시대 문인 재상 윤회(尹淮)가 젊어 여행길에 올랐을 때 일이다. 여관 주인이 방이 여의치 않다 하여 뜰에 앉아 있었다. 주인의 아이가 진주(眞珠)를 갖고 놀다가 떨어뜨리자 곁에 있던 거위가 진주를 삼켜 버렸다. 주인은 윤회를 의심하여 묶어두고 날이 밝으면 관아에 고발하기로 했다. 윤회는 "저 거위도 내 곁에 매어 두라"고 했다. 이튿날 아침, 거위 뒷구멍에서 진주가 나왔다. 주인이 "어제는 왜 말하지 않았소?" 묻자 윤회가 말했다. "어제 말했다면, 주인장은 필시 거위 배를 갈라 구슬을 찾았을 것 아니오." 일본 무사와 조선 선비는 생각하는 방식과 처리하는 방법, 속도도 다 달랐다. 사무라이 태도에서는 김상윤 목사 같은 청렴하고 결백함에 대한 숭배가 느껴진다. 속전속결 장엄미는 짜릿하다. 그런데 그게 사람 셋의 목숨을 바칠 일인가 의문이 남는다. 얻었지만 잃었다. 짧은 굴욕을 견디며 미물의 생명조차 아낀 선비의 방식은 이건영 목사처럼 현명해 보인다. 그러나 이런 상상을 한번 해본다. 만일 거위를 중간에 잃어버리기라도 했다면, 선비는 누명을 벗을 길이 있었을까. 혹여 선비가 자기가 훔친 진주를 거위에게 먹인 후 다음 날 인격자인 듯 굴었다면 망설이다 결행하지 않은 정의는 때로 정의와 어긋난다. 밥이 설익는 이유는 뜸들이는 1~2분을 못 참기 때문이다. 왕사탕을 다 빨아먹는 습관을 가진 허활민 목사와 다른 엄정한 무사가 이건영 목사 같은 너그러운 마음을 갖기도 쉽지 않다. '단숨에 다 쓸어버리자'는 광장의 목소리는 더 커질 수밖에 없다. 최순실의 국정 농단을 밝혀내는 데 거의 기여하지 않고도 의외의 1승을 얻은 야당에 할 일이 생겼다. 선로에 오른 탄핵 열차가 어느 역에 기착할지 국민이 기다려줘야 한다는 것을 광장에 알리는 일이다. 그렇듯 건강에는 지름길이 없다. 올겨울 강력한 한파가 예고된다. 건강한 겨울을 나기 위한 철저한 대비가 필요하다. 겨울에 잘 생기는 질환과 이를 예방하는 법에 대해 알아보자. ◇겨울 최대의 적 뇌졸중·심혈관질환 겨울에는 뇌졸중과 심혈관질환이 잘 생긴다. 낮은 기온 탓에 혈관이 쉽게 수축하기 때문이다. 뇌졸중은 뇌에 산소를 공급해야 하는 혈관이 막히면서 뇌 기능 장애가 생기는 것으로, 국내 매년 3~4만 명의 환자가 발생한다고 알려졌다. 겨울에는 뇌졸중 환자가 급증하는 탓에 간혹 병실이 모자랄 때가 있을 정도라고 한다. 뇌졸중은 일단 발생하면, 뇌 기능을 망가뜨리기 때문에 언어장애· 사지마비· 인지장애 같은 심각한 후유증을 남긴다. 특히 조심해야 할 사람은 65세 이상의 노인 인구, 고혈압이 있는 사람, 흡연자, 관상동맥 질환자, 부정맥, 당뇨병이 있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뇌졸중 위험인자가 있는 것이어서 평소에 질환을 적극적으로 치료해야 한다. 겨울철 잘 생기는 심혈관질환 중에는 심근경색이 대표적이다. 심근경색은 심장에 혈액을 공급하는 관상동맥이 완전히 막혀 심장 근육이 죽는 질환이다. 심근경색이 발생하면 환자들은 극심한 가슴 통증이나 호흡 곤란을 느끼면서 ‘죽을 것 같다’고 호소한다. 겨울철 뇌졸중, 심혈관질환을 막으려면 외출을 하거나 아침에 활동을 시작하기 전에 몸을 움직이면서 혈액순환을 원활히 하는 게 도움이 되며, 얇은 옷을 여러 개 껴입어 보온에 신경 써야 한다. ◇부상 등으로 인한 관절염 주의해야 겨울 스포츠인 스키 스노보드 겨울 산행 등을 즐길 때 주의가 필요하다. 겨울철 신체가 겪는 변화는 크게 '근육·관절의 경직'과 '혈관의 수축'이다. 이러한 변화로 무시하고 자칫 겨울 스포츠나 레저를 즐기다가 부상이나 사고를 당하기 쉽다. 겨울철 운동을 할 때 가장 주의해야 할 점은 적절한 보호 장비를 갖추고 체온을 유지하는 것이다. 겨울 스포츠 중 손가락·발가락이 따끔거리거나 얼굴이나 코가 시큰거리는 증상이 나타나면 갑자기 뜨거운 불이나 물로 녹이지 말고, 38~43도 정도의 물에 담가 녹인다. 만약 물집이 생기거나 검게 변하면 병원을 찾아야 한다. 동상을 예방하려면 가볍고 느슨한 옷을 껴입는 것이 좋고 목도리와 모자 등을 이용해 방열해야 한다. 모자나 장갑은 동상, 저체온증, 부상 등 다양한 질환을 방지하기 때문에 반드시 착용하는 게 좋다. 스키나 스노보드를 탈 때는 자신의 실력에 맞는 코스를 선택하는 게 안전하다. 예를 들어 스키장에서 초보자가 상급자 코스를 타면 본인만 위험한 것이 아니라 다른 여러 사람을 다치게 할 수 있다. 스키장에서 생기는 사고는 주로 경력 1년 이내의 스키어에게 주말 중에도 특히 사람이 가장 붐비는 오후 1~4시에 발생한다고 한다. 한편 나이 많은 사람들에게 많이 생기는 관절염도 겨울에 악화된다. 춥다고 몸을 움직이지 않으면 관절이 오히려 경직되므로 몸을 잘 보온한 상태로 천천히 산책 하거나 실내에서도 수시로 몸을 늘여주는 유연성 스트레칭을 해주는 것이 도움이 된다. 자전거타기나 수영을 하는 것도 좋다. ◇감기·독감, 피부 질환도 미리 예방해야 겨울에는 좁은 공간에 여러 사람이 모여서 생활하는 경우가 많고, 환기도 잘 안 된다. 따라서 감기나 독감 환자가 늘어난다. 감기는 여러 바이러스와 세균들이 우리의 코, 목 등의 상기도에 감염을 일으켜 콧물, 재채기, 기침, 가래 등의 증상을 일으키는 것이고, 독감은 인플루엔자 바이러스 감염으로 인해서 고열이 나고 근육통이 생기는 것이다. 감기와 독감을 예방하려면 불특정 다수의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을 피해야 한다. 외출 후에는 양치하고 손을 씻자. 겨울에는 피부가 건조해 갈라지거나 트러블이 생기기도 쉽다. 피부건강을 좌우하는 것은 수분·유분의 조화다. 이를 위해서는 가습기 등을 이용해 실내습도를 조절하고 하루 6-8잔의 물을 섭취해 몸 안에서 지속적으로 피부에 수분을 공급해주는 것이 필요하다. 천연크림이라 할 수 있는 유분의 보존을 위해 겨울철에는 뜨거운 물에 오래 머무는 목욕과 때밀기를 삼가고 간단한 샤워로 피부보습에 신경 써야 한다. 겨울마다 피부건조증으로 고생하는 사람은 목욕회수를 줄이고 보습비누를 사용하거나 보습크림을 발라야 한다. 보습 크림은 피부에서 수분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바르는 것이 좋다. 그러나 무엇보다 건강에는 사철 어느 때나 자족의 비결을 배우는 것이다. 성경은 말씀한다.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내가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내가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에 배부르며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립보서 4:11-13 바람 불면 바람만큼 흔들리며 살자. 기도하면 기도만큼 주님에게 의지해 살자. 새벽이면 서로의 마음에 기도이슬로 맺히자. 물보다 낮게 허리 굽히고 고개 숙이면서 살아가자. 작아지므로 커지는 것을 꿈꾸지도 않고 낮아지므로 높아지는 것을 바라지도 않으면서 그렇게 주님을 바라며 살자. 2016-12-14
    • G.QT
    2016-12-15
  • 송준 시네마힐링
    <빵과 장미>감독 : 켄 로치 출연 : 파일러 파딜라, 에이드리언 브로디, 엘피디아 카릴로 음악 : 조지 펜톤 우리에게 빵보다 장미를 달라 어쨌든 평화를 연출하는 건 진실보다 망각인지 모른다. 세상은 언제나 비장한 진실의 시대보다 부조리한 관습의 시대가 외견상으로는 훨씬 평온했다. 망각의 힘, 무감각의 힘이다. 때론 의도적으로, 혹은 미필적으로 사람들은 진실의 경종을 애써 외면하고 살아왔다. 또 그렇게 살고 있다. 왜냐하면 진실은 인간에게 불확실한 ‘내일의 광명’을 위해 핏빛 선연한 ‘오늘의 희생’을 강요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저 휘황한 내일의 광명조차, 실현되기 바쁘게 스러져버리는 찰나적인 가치가 아니었던가. 물론 수천 년 인류사를 통틀어 언제고 진실의 목소리를 기억하는 ‘불구’들이 있었다. 망각할 줄 모르는 불구들. 불구들은 자주 오늘의 평온을 들쑤셔서 내일의 불확실성을 선동하곤 했다. 망각의 행복, 절망과 타협의 안정을 뒤흔들어서 진실의 고통, 두려운 희망 속으로 인간을 밀어넣곤 했다. 불구들은 늘 소수였고, 그들의 목소리는 대부분 다중의 아우성 속에 묻히곤 했다. 여기 망각을 모르는 불구, 영원한 아웃사이더인 한 영화감독이 있다. 그의 영화는 늘 세상의 그늘을 주목한다. 저 포장된 평온의 이율배반적 내면을 향해 카메라를 들이민다. 영국의 켄 로치 감독이다. 영화 속에서 그의 목소리는 시퍼렇게 날이 서 있지만, 사람을 바라보는 눈길만큼은 더없이 따스하다. 웃음을 머금은 고함이고 미소로 외치는 ‘할(喝)’이다. 한국의 잣대로 보면, 켄 로치 감독은 급진 좌파다. 막말로 ‘빨갱이’다. 그의 영화는 늘 무산자.노동자 계급, 약자.소수민족의 마이크 역할을 자처한다. 그러면서도 ‘자본주의 예술의 총아’인 영화판에서 수십 편의 작품을 줄기차게 내놓았다. 한국에서라면 두 번째 작품의 제작비 조달이 불가능했을 감독이다. 그런 그가 이번에는 할리우드를 강습했다. 그것도 ‘빌딩 청소부들의 노조 결성’이란 소재를 들고서. 영화 제목 <빵과 장미>는 영화 속 주인공들이 “우리에겐 빵뿐만 아니라 장미도 필요하다”고 외치는 구호의 함축이다. 노조 조직책인 남자 주인공은 청소원들에게 “아무도 장미를 거저 주지 않습니다. 언제 장미를 얻는 줄 아십니까? 구걸을 멈추고 단결할 때입니다”라며 노조 결성을 선동한다. 그럼에도 이 ‘불손한’ 영화에 대해 미국의 언론들은 극찬의 비평을 게재했다. ‘모순에 대한 날카로운 감각, 스토리텔링의 정밀함’(<뉴욕타임즈>) ‘오스카 투표자들이 말끔히 청소된 건물에서 이 영화를 보았다면 아카데미상을 선사했을 것’(<시카고 선 타임즈>)…. . 신자유주의 경제를 신봉하는, 부자.고용자들의 천국 아메리카에서 어떻게 이런 ‘빨갱이 영화’가 호평을 받을 수 있었을까. 그것은 <빵과 장미>가 바로 ‘사람의, 사람에 의한, 사람을 위한 스토리’이기 때문이다. 켄 로치는 이데올로기적 분류를 하기 이전에 타고난 휴머니스트다. 인간애를 바탕으로 전개되는 로치의 내러티브는 느꺼운 소구력으로 감동의 눈물샘을 자극한다. 켄 로치 영화의 힘은 바로 이 감동에서 샘솟는다. 영화 구석구석에 배치된 유머와 아이러니, 해학과 골계의 에피소드도 더없이 절묘하다. 켄 로치는 무엇보다 인간 사회의 먹이사슬 메커니즘에 대해 눈부신 통찰을 보여준다. 토끼에서 사자에 이르기까지, 먹이사슬의 여러 주체들은 다양한 인간형으로 대유되어 등장한다. 물론 양아치.불량배 같은 주변부의 가해자 그룹을 포함해서. 영화는 여주인공 마야의 밀입국 장면에서 시작된다. 마야는 당돌하고 순박한 멕시코 처녀, 이를테면 무작정 상경한 우리의 또순이다. 마야의 밀입국을 도와준 ‘멋진 싸나이’들은 알고보니 하이에나다. 가족들에게 몸값을 받고서야 밀입국자들을 풀어준다. 돈이 모자란 마야, 하릴없이 끌려가 하룻밤 수청으로부터 인생을 저당 잡힐 판이다. 영등포·청량리의 상경 처녀 사냥꾼과 영락없는 닮은꼴이다. 우여곡절 끝에 마수에서 벗어난 마야는 LA의 언니 집을 찾지만, 궁색하기는 마찬가지. 없는 살림의 곤핍함은 동서고금을 막론하는 법이다. 마야의 첫 취직, (아니나 다를까) 술집 웨이트레스다. 취객의 입담과 손찌검 또한 수컷들의 본능에 충실하다. 아메리카 드림이고 코리아 드림이고 간에 다이애스포라들의 첫걸음은 늘 이렇게 음습한 것이다. 다시 어찌어찌 우여곡절 끝에 마야는 ‘밤의 직장’ 대신 ‘낮의 직장’을 얻는다. 빌딩 청소부다. 말괄량이 마야, 출근 첫날부터 화이트컬러 골탕먹이기로 신고식을 치르고 웃음과 실수와 열패감을 한데 뒤섞어 사회의 쓴맛을 배워나간다. ‘또순이 상경기’의 서문을 꾸미는 와중에, 켄 로치는 ‘서울이라는 피라미드’의 권력 구성인자들을 꼼꼼히 소개하기를 잊지 않는다. 빌딩 소유주와 고소득 입주자들, 빌딩 관리 용역 회사와 청소부들, 그리고 청소부 위에 군림하는 용역회사 간부. 이들 간에 물고 물리는 자본과 권력의 지배 관계. 순수 자본주의보다 더 가증스런 인간의 이기주의. 피라미드 진입을 향한 저층민의 인간 유형들도 생략할 수 없다. 하버드 장학생을 꿈꾸는 주경야독파, 부조리 혁파를 외치는 열혈남녀, 가족 이기주의에 매몰된 프락치, 동료를 고변하지 못하고 해직되는 의리파, 내일의 개혁보다 오늘의 수당이 더 절실한 소시민…. 이쯤에서 켄 로치는 빌딩을 사회라는 소우주의 모델하우스로 삼아 인간의 표리부동한 ‘망각 게임’을 본격적으로 벗기기 시작한다. 이 심각한 주제를 웃음과 눈물의 에피소드로 엮어내는 거장의 솜씨가 눈부시다. ‘빌딩’으로 상징된 LA 혹은 서울이라는 도시는 실상 페어플레이보다 기상천외하게 변형된 갖은 파울플레이로 점철된 정글에 다름 아니다. 자본과 노동의 근본적 불합리, 착취에 가까운 저임금, 중간 간부의 임금 갈취, 성 상납, 노노간의 갈등과 다툼, 사람 사는 모습의 꾀죄죄함은 피부색을 초월하여 어찌나 닮아 있는지. 그 틈바구니에서 켄 로치는 다시 희망을 이야기한다. 사람만이 희망이다. 체온만이 희망이다. 살과 살을 부비고, 온기를 공유하며, 아픔과 슬픔을 나눠갖는 삶. 악다구니의 일상 속에서도 어김없이 새 살처럼 돋아나는 저 끈적끈적한 인간애. 마야와 언니 로사가 화해하는 클라이맥스는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장면으로 꼽힌다. 경쾌한 슬픔, 혹은 은유적 분노로 표현해도 좋을 서정적인 음악도 <빵과 장미>의 백미다. box : 영원한 아웃사이더, 최후의 리얼리스트 '아름다운 빨갱이’ 켄 로치 감독 본명은 케네스 로치. 1936년 영국 워웍셔주 뉴니튼 출생. 옥스퍼드대학에서 법학 전공. 일찍이 노동계급·무산자들의 삶의 진실에 눈을 뜨고 이들의 이야기를 대신하는 데 평생을 바친다. 대학에서 실험연극 활동을 했던 로치는 62년 BBC에서 견습 감독으로 일하면서 영화와 인연을 맺었고, 64년 유명한 경찰 시리즈물 <Z카>(그 중 세 편의 에피소드)로 연출에 데뷔했다. <업 더 정션>(65년)으로 가시화된 로치의 작품 경향은 <커밍아웃 파티>(65) <캐쉬, 집으로 돌아오다>(65) <불쌍한 암소>(67) <케스>(69) 등을 거치면서 선을 분명히 드러낸다. <업 더 정션>은 노동자 소녀들의 낙태 문제를, <캐쉬, 집으로 돌아오다>는 홈리스 가족의 절망과 사회복지의 허상을 다룬 작품이다. 첫 극장용 장편 <불쌍한 암소>에서 노동계급에 대한 본격적인 성찰을 보여준 로치는 영국 북부 요크셔의 광산 노동자들의 암울한 현실을 다룬 다음 작품 <케스>를 통해 대중적 관심을 불러모으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같은 연출 경향은 영화 자본의 환영을 받지는 못했다. 70년대 들어서면서 켄 로치 감독은 매 작품마다 늘 검열에 부닥쳐야 했고, 다음 작품의 제작비를 마련하기 위해 몸부림쳐야 했다. <가족생활>(71)과 <블랙잭>(79)을 영화화했을 뿐 대부분의 시간을 TV 드라마에 바쳤다. 80년대에도 고난은 계속되었다. <사냥감지기>(80)와 <조국>(86) 두 편의 영화를 제외하고는 연출 작품 대부분이 노동 현장 다큐멘터리들이었다. 그러나 말년에 들어서면서 켄 로치의 황금기가 열리게 된다. <하층민>(90)은 그의 최고 걸작 중 하나로 꼽히며, <숨겨진 비망록>(90)과 <레이닝 스톤>(93)은 각각 90년과 93년 칸영화제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한다. <리프 라프>(91)로 91년 <올해의 유럽영화상>을, <레이디버드 레이디버드>(94)로 베를린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랜드 앤 프리덤>(95년)으로 칸영화제 비평가상을 수상하면서 마침내 켄 로치 감독은 거장의 반열에 오른다. 이후 내놓은 작품들 <칼라송>(96) <내 이름은 조>(98) <빵과 장미>(2000) 등을 통해 켄 로치는 농익은 원숙미를 한껏 보여준다. (fin) 송준 기자 / 영화 평론가
    • G.QT
    2016-12-13
  • 소강석의 시와 노래
    세계적 성악가 바리톤 고성현소강석의 “꽃잎과 바람”을 열창그는 오페라의 바리톤 주역들을 소화해낸 음성으로 감탄 “소강석 목사님이 이런 재능을 가지신 줄 몰랐습니다.” 한 어깨가 다른 어깨를 내어주는 곳 그곳은 유쾌한 목사 소강석의 시(詩)와 노래에 배인 신앙(信仰) 가을과 겨울이 겹쳐지는 이 계절 가장 극적인 풍경은 소강석의 고향 전라북도 남원군이 아니라 전라남도 강진만 해안에 있다. 깊은 숲도 아니고 은행잎 깔린 길섶도 아니라 갯벌에서 가을은 가고 겨울이 온다. 이를테면 가을부터 누런 갈대밭 습지에 겨울철새가 떼 지어 날아드는 장면에서 계절의 순환을 목격한다. 바람이 분다. 억새가 흔들린다. 허한 마음에 쓸쓸한 풍경 하나 지나간다. 돌아보니 윤동주가 시를 짓던 용정이 겹친다. 그리고 국회의원 장관 유명한 목사 등이 앉은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이층 중앙 맨 앞자리의 소강석 목사 서너 줄 뒤에 김영우가 팔장을 끼고 앉아 있었다. 기도해 본 사람은 안다. 소강석 목사처럼 삶이 제 머리로 맨 땅에 머리 박아 넣는 일이라는 것을. 그리고 흙벽에 걸린 바가지가 제 살 속에 겨울바람을 밀어 넣어 누런 모습을 지키는 겨울. 빈 거리에 눈이 내리고 칼바람이 분다. 기도란 제 자리에서 꿈쩍할 수 없는 하나님의 요지부동한 명령을 듣는 자리이다. 그래서 기도할 때마다 적막한 세상으로 유배된 죄인처럼 앞산 봉우리 잔설 같은 하나님의 음성에도 마음에 불이 붙는다. 마음속으로 잔잔히 흐르는 그 음성 쫓으면서도 마음은 가끔 세상을 기웃거리다 돌아오곤 한다. 제 몸의 남은 숨으로 목숨을 견뎌야 하는 이 겨울 날마다 몸은 건조하지만 마음은 또 봄이다. 예술의전당은 아직 가을에 머물러 있었다. 채 잎을 떨구지 않은 단풍나무가 우면산 자락에서 예술의전당 근처에 사는 나무답게 조명을 받아 붉게 멋을 부리고 있었다. 돌아서 까치발로 눈을 드니 저 멀리 잘 한 일이 많아도 흔들리는 촛불 앞의 오정현처럼 서초역 사랑의교회가 석양을 받아 금빛으로 가물거렸다. 2016년 11월 1일 오후 8시 소강석 목사의 시에 음표를 매긴 가곡도 선을 보이는 “겨레사랑 2016 한국가곡 페스티벌” 공연을 앞둔 예술의전당 로비와 대기실은 풍요롭고 분주했다. 청중이 가득 찬 콘서트홀 불이 꺼지고 조명이 무대를 밝혔다. 1991년 "대중 속에 사랑 받는 정통 오케스트라" 라는 취지 아래 성악가 출신 김혜란 교수 첼리스트 출신 김봉 교수 그리고 60여명의 유능한 연주자들이 모여 처음 연주 활동을 시작해 교향악단 사상 최고 많은 횟수의 정기연주회와 매년 80회 이상의 공연을 하는 국내 최고의 정통교향악단으로 성장한 서울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무대에 자리 잡았다. 지휘자 류형길이 지휘봉을 들고 무대에 섰다. 지휘봉이 움직였다. 선율이 흘렀다. 서울필하모닉의 “겨레사랑 2016 한국가곡 페스티벌” 공연 첫 곡은 북한의 작곡가 최성환의 “아리랑 환상곡”이었다. 우리에게는 1970년대 말 이 곡이 알려진 곡이다. 스포츠를 통해 남북 단일팀을 구성하고자 할 때 정치적인 이유로 양쪽 국가를 사용하기 어렵다하여 대신에 최성환의 “아리랑 환상곡”을 쓰자며 북쪽에서 들고 나와 낯설지 않은 음악이다. “아리랑 환상곡”은 최성환이 1976년 작곡해 북한에서 가장 널리 연주되는 관현악곡의 대표작이다. 풍부하고 민족적인 선율을 가진 이 곡은 기존의 민요 아리랑 선율의 주제부와 적절한 조화를 이루는 주제부를 섞어가며 풍물패가 풍악 놀이하듯 흥겹게 곡을 전개한다. 고요한 나라의 아침 정경을 묘사하듯 섬세한 하프의 선율로 조심스럽게 시작하는 “아리랑 환상곡”은 여러 악기를 통해 전통 아리랑의 다양한 가락을 선보이면서 그 끝을 맺는다. 참으로 애절하지만 아름다운 여운이 깃든 끝이다. 긴 박수가 이어졌다. KBS 아나운서 한상권(역사스페셜)과 정지원(연예가중계)이 사회자로 무대 왼쪽에 섰다. “아리랑은 우리 민족을 상징하는 우리 민족의 영혼과도 같은 곡입니다. 서울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연주하는 아리랑 환상곡 연주로 오늘 음악회 첫 문을 열었습니다.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겨레사랑 2016 한국가곡 페스티벌 사회를 맡은 KBS 아나운서 한상권입니다.” “KBS 아나운서 정지원입니다. 반갑습니다. (박수) 네. 깊어가는 가을이구요. 날씨도 꽤 쌀쌀해졌습니다. 오늘이 11월의 첫 날이더군요. 여러분과 함께 이 자리에 서게 돼서 진심으로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사단법인 한민족평화나눔재단과 새에덴교회 공동주최로 열리게 되는 오늘의 음악회는 우리의 얼과 우리 역사가 어린 우리 가곡을 통해 나라와 겨레 사랑의 한마음을 일깨우고자 마련한 무대가 되겠습니다. 나라를 잃었던 슬픔 육이오와 같은 참화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우리 민족에게 평화란 끝까지 지켜내야만 하는 소중한 가치일 것입니다.” “네. 정말 날씨가 갑자기 추워진 것처럼 우리 사회가 내부적으로 요즘 소란스럽고 어수선한 나날의 위기 상황을 맞고 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온 국민이 나라사랑 한마음으로 뜻을 모아야 할 때 같습니다. 아마 오늘 이 음악회가 우리 사회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사랑과 화합의 하모니가 되어 온 국민이 힘을 모을 수 있는 자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지금 우리가 누리고 있는 값없이 주어진 소중한 평화를 이름 없이 쓰러져 갔던 그 누군가의 목숨과 희생 위에 지켜진 것임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 음악회 주제 겨레사랑으로 온 국민이 하나 될 수 있는 음악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오늘 오신 분들도 같은 마음일 것입니다. 오늘 방송은 KBS1 텔레비전 KBS 중계석에서도 함께 하고 있습니다. 이제 공연을 빨리 소개해 드려야겠죠.” 가수 남진이 좀 늦게 소강석 목사 옆자리에 앉는 것이 보였다. “1부는 류형길(새에덴교회 상임지휘자 겸 필 심포니 오케스트라 아티스트) 지휘자께서 수고해 주시고 2부는 김덕기(서울대 음대 작곡과 교수) 지휘자께서 수고해 주시겠습니다.” 1부 류형길 지휘로 바리톤 장유상의 “비목”과 “청포도” 소프라노 임지은의 갈대꽃(소강석 시 한지영 곡) 테너 박주옥의 “운동주 추모곡”(소강석 시 소강석 곡) 소프라노 임청화의 상처(소강석 시 소강석 곡) 꽃씨(소강석 시 임긍수 곡) 천사의소리합창단의 십자가(윤동주 시 김대윤 곡) 등이 이어졌다. 2부 김덕기 지휘로 테너 이원준의 산노을(유경환 시 박만길 곡) 가을연가(소강석 시 소강석 곡) 바리톤 려현구의 내 마음 강물되어(소강석 시 소강석 곡) 사명의 곡(소강석 시 김석균 곡) 바리톤 고성현의 청산에 살리라(김연준 시 김연준 곡) 꽃잎과 바람(소강석 시 소강석 곡) 소프라노 김영이의 꽃구름 속에(박두진 작사 이흥렬 곡) 그리운 금강산(한상억 작사 최영섭 곡) 출연자 전체의 함께 걸어요(소강석 시 소강석 곡) 등이 이어졌다. 특별히 서양 오페라에서 동양인의 한계를 극복하고 로베르토 알라냐와 쿠라 등 세계적 성악가들과 어깨에 나란히 하는 바리톤 고성현(한양대 교수)이 그의 애창곡 “청산에 살리라”에 이어 소강석 목사의 작시 작곡 “꽃잎과 바람”을 악보를 보며 열창했다. 그런 뒤 그는 세계무대의 오페라 ‘리골레토’ ‘아이다’ ‘나부코’ ‘오텔로’ 등의 바리톤 주역들을 소화해낸 음성으로 오페라 가사를 읊조리듯 감탄을 자아냈다. “소강석 목사님이 이런 재능을 가지신 줄 몰랐습니다.” 꽃잎과 바람 / 소강석 꽃잎은 바람에 흔들려도바람을 사랑합니다 꽃잎은찢기고 허리가 구부러져도바람을 사랑합니다 누구도 손 내밀지 않고 아무도 다가오지 않은 고독의 시간 바람은꽃잎을 찾아 왔습니다별들의 이야기를 속삭이고나뭇잎 노래를 들려주고애틋이 어루만져 주셨습니다 밤이 깊어도아침이 밝아도꽃잎이 모두 저버려도 꽃잎은 바람을 사랑합니다그래서 바람이 불면 꽃잎이 떨어집니다 소강석의 시는 어떤 글이든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과 신앙이 깃들어 있다. 그의 혼신을 다하는 설교처럼. 간간히 객석을 뒤돌아보면 아내의 “어깨너머”로 노래마다 손바닥을 치며 좋아하는 소강석과 넙죽한 얼굴의 남진이 보였다. 어깨너머는 경계(境界)의 자리다. 이곳에서 저곳으로 넘어가는 자리, 한 사물이 다른 사물을 만나는 접속의 자리. 그러나 “어깨너머”에서 이루어지는 콘서트홀의 모든 모습과 광경은 부드럽고 따뜻하며 은은하고 느리다. 떠난 세계와 떠날 세계가 서로 버티어 맞서지 않는 곳. 한 어깨가 다른 어깨를 내어주는 곳. 그곳은 유쾌한 목사 소강석의 시(詩)와 노래에 배인 신앙(信仰). 2016-11-27
    • G.QT
    2016-11-29
  • 건강수명과 근로수명을 늘리는 방법
    속도가 너무 빠르면 여기에 적응하지 못해 부작용들이 생기는 수가 많다 길어진 수명에 적응하지 못해 건강수명과 근로수명 사이에간격이 벌어지고 있다 주의 종의 건강수명과 근로수명을 위해 우리의 위대한 선배 사도 바울은 그의 마지막 서신 마지막 장에서 말씀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믿음을 지킨 우리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다 낙엽은 총회로 가는 보행로를 덮고 있다. 낙엽 빛깔은 정답고 모양은 쓸쓸하다. 낙엽은 나무에서 비둘기처럼 내려와 땅 위에 흩어져 있다. 해질 무렵 대치동 언덕길 낙엽 모양은 쓸쓸하다. 바람에 흩어지며 낙엽은 바스락거린다. 발로 밟으면 낙엽은 살아있는 생명처럼 소리를 낸다. 모든 진실은 상대성을 갖기 마련이다. 사람이 너무 빨리 달려서 모자만 공중에 남아 있고 몸은 저 멀리 갔다가 다시 돌아와 모자를 가지고 달려가는 만화 장면들을 많이 보았을 것이다. 속도가 너무 빠르면 여기에 적응하지 못해 부작용들이 생기는 수가 많다. 우리나라 평균 수명도 40년 동안 2년마다 1년씩 길어졌다고 하니 엄청난 속도다. 그러다 보니 길어진 수명에 적응하지 못해 건강수명과 근로수명 사이에 간격이 벌어지고 있다. 예를 들어 수명은 길어졌는데 건강수명은 길어지지 않다 보니 아픈 기간이 길어 삶의 질이 떨어고 있다. 그것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그런 일에 능한 한 전문가가 말하는 일반적인 방법은 이렇다. 첫째, 건강수명을 늘려서 평균수명과의 간격을 줄여야 한다. 건강수명이란 평균수명에서 질병이나 부상으로 활동이 불편한 기간을 뺀 수명을 말한다. 세계보건기구(WHO) 기준으로 보면 우리나라는 2015년 건강수명이 73.2세로 평균수명 82.3세와는 약 9세 차이가 있다. 15년 전과 별로 달라진 게 없다. 여자는 남자에 비해 3년 정도 더 아프니 유념해야 할 일이다. 유럽 등은 평균수명과 건강수명의 차이가 7세 정도이다. 건강수명을 늘리는 것은 개인적인 삶의 질뿐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중요하다. 75세 이상 후기 고령자 수가 2030년에는 730만 명이 되고 2040년이면 약 1200만 명으로 증가할 것으로 보고 있다. 만일 이 시기에 평균수명 증가에 비해 건강수명이 따라주지 못한다면 많은 사람이 오랜 기간을 질병을 치료하는 데 보내야 한다. 사회적으로도 감당하기 어려운 부담이 된다. 둘째, 인적자본 수명인 근로수명을 늘려야 한다. 우리나라는 주된 직장에서 퇴직하는 연령이 55세 전후이니 그 이후 활동할 수 있는 기간만도 30년이 남는다. 이 기간 동안 별다른 일을 하지 않다 보니 수명에 비해 정작 인적자본 가치는 일찍 사라져버린다. 나의 가치를 너무 빨리 퇴장시켜버리는 것이다. 사회적으로도 중요한 문제다. 55~74세의 인구가 2030년에 1500만 명, 2040년에는 1450만 명이 된다. 총 인구의 30%에 해당하는 이들 인적자본 가치가 사장될 위험에 있다. 장수사회에서는 제일 수지맞는 것이 인적자본에 대한 투자이다. 일본의 수제구두 명인 키쿠치 다케오는 55세에 대학교에 입학하여 10년 동안 구두공부를 했다. 65세에 공부가 끝났으니 나이 들어 헛일했다고 생각하기 쉬우나, 90세가 넘어서도 일을 하고 있으니 이 투자는 잘한 셈이다. 장수시대에는 이것이 특이한 경우가 아니라 일반적인 게 된다. 북유럽은 고령자 의무교육을 검토 중이라고 한다. 대학교까지의 교육에만 집중되어 있는 우리의 교육체계도 고령화 시대에 맞게 빨리 변해야 한다. 두 명이 어깨동무를 하고 달려갈 때 네 다리가 보조를 맞추어야 한다. 그러므로 건강수명과 근로수명을 늘려 평균수명의 리듬을 따라야 한다고 일반 건강 전문가는 일반인들을 위해 말한다. 그런데 주의 종인 우리의 건강수명과 근로수명을 위해 우리의 위대한 선배 되시는 사도 바울은 그의 마지막 서신 마지막 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하나님 앞과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그리스도 예수 앞에서 그의 나타나실 것과 그의 나라를 두고 엄히 명하노니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근신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인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 관제와 같이 벌써 내가 부음이 되고 나의 떠날 기약이 가까왔도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디모데후서 4:1-8 2016-11-23
    • G.QT
    2016-11-23
  • 송준 시네마 힐링
    영화 제목 : <25시> 글 제목 : 행복, 존재하지 않는 시간 속에 머무는 꿈 감독 : 스파이크 리 출연 : 에드워드 노튼, 로자리오 도슨 어디에도 길은 보이지 않는다. ‘가치’라는 것, 혹은 ‘진실’이라는 것. 결국은 ‘입장’의 다른 이름이 아니었을까. 무사에게는 칼이 길이고, 어부에게는 배가 길이다. 정치인에게는 세 치 혀로 빚어내는 거짓말이 길이다. 어느 길이든 나름의 해가 뜨고 비가 온다. 그 미망의 동아줄을 부여잡고 믿고 의심하고, 사랑하고 슬퍼하며, 죽이고 피 흘린다. 스파이크 리 감독의 <25시>는 묘한 영화다. 거창한 사건도, 뜨끔한 음모도 존재하지 않는데 내면의 울림이 여간 시큰하지 않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저토록 스산한 거리감이 놓여 있었던가. 우정과 타산이 손바닥처럼 뒤집히고, 사랑과 불신이 백지 한 장 차이다. ‘25시’는 미시와 거시라는 두 관점을 절묘하게 아우르며 관계와 입장 사이의 이율배반을 성찰하고, 나아가 집단의 논리, 국가 이데올로기의 허울을 은유적으로 갈파한다. 영화는 주인공 몬티 브로건(에드워드 노튼)의 절박한 하루를 그린다. 마약 밀매상 몬티는 누군가의 밀고로 거실에 숨겨둔 마약과 돈다발이 발각되면서 감옥에 가야 할 처지다. 최소 7년 이상의 중형이다. 곱상한 몬티의 외모는 감옥 안에 횡행하는 동성 강간의 ‘0순위’를 보장할 터이다. 두려움과 불안에 휩싸인 채 신변정리를 위해 주어진 금싸라기 같은 24시간. 그 하루 동안 삶의 미묘한 무늬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25시>의 얼개를 이루는 갈등 구조는 두 축으로 짜여진다. 몬티와 연인 내추럴(로자리오 도슨) 사이에, 그리고 죽마고우인 프랭크와 제이콥 사이에. 몬티와 내추럴의 갈등은 커뮤니케이션 부재라는 시대상의 상징이다. 밀고자가 바로 내추럴이라는 주위의 언질이 반복되자 몬티의 마음은 자꾸 흔들린다. 제 몸보다 더 몬티를 아껴주던 내추럴…. 어디까지 믿어야 하는 걸까. 얼마나 믿어야 흔들리지 않을까. 아니, 믿는 것이 능사일까. 믿을수록 미련한 것 아닐까. 아니 아니, 믿지 않음으로써 먼저 배반하는 것은 아닐까. 아아, 사람 사이의 커뮤니케이션이 존재하기는 하는 것인가. 사랑하는 사람 사이에서마저도. 상념은 꼬리에 꼬리를 문다. 갈등의 또 한 축, 죽마고우들의 관계는 독백 혹은 대화의 형식으로 표면화한다. 같은 아일랜드계의 어릴 적 단짝인 몬티와 프랭크, 제이콥은 미국의 옆모습을 비추는 일종의 아이콘으로 읽힌다. 프랭크(배리 페퍼)는 월스트리트의 잘나가는 펀드매니저, 도박에 가까운 공격적 베팅은 입신의 경지를 구가하나 지나친 우월감으로 일과 후의 인간관계는 젬병인 모습이 영락없이 지구촌의 ‘왕따’ 미국의 위상을 닮았다. 세계 여러 나라의 경제를 쥐락펴락하는 미국의 신자유주의 투기 자본을 상징한다. 고등학교에서 영문학을 가르치는 제이콥(필립 세이무어 호프만)은 부모 덕에 유복한 생활을 누리면서도 그 사실을 수치스러워하는 우유부단한 인간이다. 도발적인 여학생 메리(안나 파킨)에게 은밀한 욕정을 느끼면서도 양심의 가책에 괴로워한다. 한편으로 청교도적 결벽성을 내세우면서 북미 인디언 살육사와 베트남전/이라크전이라는 피의 강을 건너온 미국의 이중적 프로테스탄티즘을 상징한다. 이 상징들을 통해 스파이크 리 감독은 몬티 이야기로 9.11 이후의 미국을 사유한다. ‘그라운드 제로’가 내려다보이는 프랭크의 초고층 호화 아파트에서, 프랭크와 제이콥은 몬티의 행각을 비판한다. 학생시절부터 마약 밀매로 풍족한 생활을 누려온 몬티는 또 하나의 은유다. 몬티의 ‘부적절한 돈’은 아버지가 운영하는 작은 바의 운영자금인 동시에, 가난한 푸에르토리코 출신의 유민 내추럴에게 풍요를 안겨준 ‘신의 선물’이었다. 공작과 음모를 불사하며 아프리카와 아라비아의 석유를 챙겨온 미국 군산복합 세력의 ‘부적절한 열매’가 미국 경제를 풍요롭게 만들어준 ‘신의 선물’이었던 것처럼. 감독은 여기에 ‘아메리칸 드림’을 꿈꾸며 몰려든 이민을 대하는 미국민의 정서를 또 하나의 상징으로 배치한다. 격정에 휩싸인 몬티가 화장실 거울에 적힌 ‘Fuck You'라는 낙서를 보고 “망할 놈(Fucking)의 러시아인, 인도인, 아랍인, 흑인, 히스패닉, 한국인들!!!”이라며 폭발하는 시퀀스다. 데뷔작 ‘똑바로 살아라’에서부터 스파이크 리 고유의 컬러로 인식된 바로 그 득의의 프레임이다. 세계를 ‘미국’과 ‘미국 아닌 것’으로 나누는 이분법, ‘인종의 용광로’라던 미국에서 인종을 나누고 먼저 온 이민자와 늦게 온 이민자를 나누어 일체의 대상을 타자화하는 미국의 배타성에 대한 풍자다. 이처럼 복합적인 상징들을 염두에 두고도 감독은 스피디하고 매끄러운 연출 솜씨를 보여준다. 감각적인 영상과 북받쳐 오르는 스코어의 선율은 에드워드 노튼의 신들린 연기와 맞물리며 묵직한 감정의 선경을 이룬다. 연출과 연기가 서로를 지배하지도 침해하지도 않으면서 이만큼의 ‘상승무공’을 보여주는 예도 드물다. 점진적으로 고조되어 가던 긴장감은 몬티의 송별파티장에서 급격히 클라이맥스로 치닫는데, 한껏 치솟은 엑스터시를 갈무리하는 감독의 연출 맵시가 또한 백미다. 아버지가 모는 차를 타고 감옥을 향해 떠나면서 피떡이 된 얼굴로 차창을 내다보는 몬티의 눈에 비로소 사람들의 얼굴에 피어난 미소가 보인다. 러시아인, 인도인, 아랍인, 한국인들은 더 이상 ‘망할 놈’이 아니었다. 영화 말미에 감독은 9.11 이후의 미국에 대한 은유적 대안을 제시한다. 몬티가 어디론가 멀리 떠나서(탈현실), 새로운 일을 찾고(공생), 사람들과 새롭게 관계를 맺고(상호존중), 그리하여 평화로운 어느날 내추럴을 불러(신뢰 회복) 알콩달콩 살며 자손 수북하게 낳고 만수무강하는 상상. 그리고 아버지의 당부. “절대로 (지금, 여기로) 되돌아오면 안 된다! 무슨 일이 있어도, 아무리 힘들어도!” 저 상상의 피안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25시’다. 동시에 감독은 피안의 풍경 위로 피범벅 몬티의 얼굴을 오버랩시키면서, 현실의 엄중함 또한 잊지 않는다. 자, 어디로 갈 것인가. 길은 어디에도 있다. 마음이 곧 길이다. (fin) 송 준 기자 / 영화평론가 1990~1998년 <시사저널> 문화부/기획특집부 기자 1999~2000년 영화전문주간지 <프리뷰> 편집장 2001~2009년 편집전문회사 <프리앤아이> 편집주간 2010~2015년 프리랜서 작가/칼럼리스트 2016~현재 더굳뉴스 기자 2003년 중견 영화평론가그룹 ‘젊은영화비평집단’ 회장 역임 2004년 비상업예술영화 중심 ‘작은영화제’ 개최/ 장소 시네큐브 2006년 영화 에세이 <아웃사이더를 위한 변명> 출간 2007년 MBC대한민국영화대상 심사위원 역임 1990년부터 <시사저널> 문화부 기자로 ‘괴로운 글쓰기’의 업을 시작하였고, 1999년 영화전문주간지 <프리뷰>의 창간 편집장으로 숱한 밤을 새웠다. 2003년에는 중견 영화평론가 그룹 ‘젊은영화비평집단’의 회장을 맡아 비상업예술영화를 중심으로 광화문 시네큐브에서 <작은영화제>를 개최하였다. 2004년에는 각색을 맡아 작업했던 황철민 감독의 영화 <프락치>가 제34회 로테르담국제영화제에서 ‘국제비평가협회상’을 수상했으며, 2007년 MBC대한민국영화대상의 심사위원을 역임한 바 있다. 저서로 영화 에세이 『아웃사이더를 위한 변명』(2004, 심산)이 있다. e-mail : bullwalk@naver.com 2016-11-11
    • G.QT
    2016-11-08
  • 통합 측 이단 사면
    2016년 9월 12일 서울 연지동 한국교회백주년기념관에서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총회 채영남 총회장은 거룩한 성자의 표정으로 말했다. “제100회기는 희년을 두 번 맞이하는 해로 자유와 해방을 선포해야 할 때다. 성경과 기독교 신앙의 본질을 벗어난 것이 아닌 한 용서는 권리가 아니라 우리가 반드시 지켜야 할 의무이다. 우리는 이단을 해제하려는 것이 아니라 이단적 주장과 행위를 반성하고 뉘우치는 이들을 용서하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김기동·박윤식·변승우·이명범 씨를 특별 사면한다고 공포했다. 총회 결의를 거치지 않고 사면을 공포하면서 세상 사건을 세상 법으로 판단하고 변호하는 법무법인에 이단문제에 대한 자문을 구했다며 그 패역한 행위의 당위성과 합법성을 역설했다. 우리 합동총회는 1959년 9월 24-29 대전중앙교회에서 열린 제44회 총회에서 WCC의 에큐메닉스 신학에 대한 이견으로 비상정회를 했다. 그리고 1959년 11월 24일 서울 승동교회당에서 속회하여 WCC를 영구히 탈퇴하고 통합 측과 분립하기로 결의했다. WCC를 옹호하고 성경과 교리가 아닌 세상 법에 의지해 이단을 사면하는 통합 측과 연합하거나 이단을 수용하고 있는 한기총에 가입하려는 우리 합동 측의 시도가 있다. 이제 그것을 철회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 교단 내에 도사리고 앉아 주일 강단에서 귀신론 교리를 버젓이 설파하는 경남동노회 김신환(아름다운교회) 같은 무리들을 몰아내 우리 선배들의 성경중심 정신을 계승하고 제44회 총회 결의를 지켜야 할 것이다. 2016년 9월 19일 총회이단척결위원회 위원장 김 영 배 목사
    • G.QT
    2016-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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