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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독교강요 영어 수업_ 칼빈의 마지막 안녕
    Lesson XXIII 칼빈의 마지막 안녕 Calvin’s Final Farewell 칼빈의 만년(15551564)에 그의 권위는 실제로 겨룰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는 종교개혁자로서 마틴 루터(Martin Luther)와 다른 국제적인 평판을 누렸습니다. 칼빈의 전기 작가 파커(Parker 2006, pp. 161164)는 그의 마지막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Last illness In late 1558, Calvin became ill with a fever. Since he was afraid that he might die before completing the final revision of the Institutes, he forced himself to work. The final edition was greatly expanded to the extent that Calvin referred to it as a new work. The expansion from the 21 chapters of the previous edition to 80 was due to the extended treatment of existing material rather than the addition of new topics. Shortly after he recovered, he strained his voice while preaching, which brought on a violent fit of coughing. He burst a blood-vessel in his lungs, and his health steadily declined. He preached his final sermon in St. Pierre on 6 February 1564. On 25 April, he made his will, in which he left small sums to his family and to the collge. A few days later, the ministers of the church came to visit him, and he bade his final farewell, which was recorded in Discours d'adieu aux ministres. He recounted his life in Geneva, sometimes recalling bitterly some of the hardships he had suffered. Calvin died on 27 May 1564 aged 54. At first his body lay in state, but since so many people came to see it, the reformers were afraid that they would be accused of fostering a new saint's cult. On the following day, he was buried in an unmarked grave in the Cimetire des Rois. The exact location of the grave is unknown; a stone was added in the 19th century to mark a grave traditionally thought to be Calvin's. 1558년 칼빈은 열병을 앓게 되었습니다. 그는 『기독교강요』 마지막 판을 완성하지 못하고 죽을까봐 두려웠기 때문에 일에 매달렸습니다. 마지막 판은 그것이 새 저작이라고 말했을 정도로 굉장히 많은 양이 늘어났습니다. 이전 판의 21장에서 새로운 주제들을 더하는 정도가 아니라 현존하는 자료를 광범위하게 다루어 80장으로 확대되었습니다. 병 회복 직후라 칼빈은 발작적인 심한 기침을 유발하는 설교를 할 때 목소리를 억제했습니다. 그는 폐의 피를 한 통이나 쏟았고 그의 건강은 꾸준히 나빠졌습니다. 그는 1564년 2월 6일 세인트 피에르 교회에서 마지막 설교를 했습니다. 4월 25일 그는 가족과 대학에 약간의 돈을 남기는 유언장을 작성했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 교회 목사들이 그를 방문했고 목사들과의 고별 대화(Discours d'adieu aux ministres)에 기록된 마지막 인사를 전했습니다. 그는 제네바에서의 그의 생활을 조목조목 말하면서 그가 겪은 고통과 역경을 간간히 씁쓸하게 회상하기도 했습니다. 칼빈은 1564년 5월 27일 54세의 나이로 죽었습니다. 처음에 그의 유해가 공개적으로 안치되었지만 너무 많은 사람들이 그 묘지를 보러 오는 바람에 개혁자들이 새로운 성자숭배를 조장한다는 비난이 생길까 두려웠습니다. 그 다음 날 그는 시메티에르 데 루아(Cimetire des Rois) 공동묘지에 표시가 없는 무덤에 묻혔습니다. 무덤의 정확한 장소는 아무도 모릅니다. (300여년이 지난) 19세기에 이르러서야 전통적으로 칼빈의 무덤이라고 생각하는 무덤 하나에 돌을 하나 세웠습니다. 칼빈은 느보산의 모세처럼 그 무덤을 아는 자 없이 죽었습니다. 모세가 모압 평지에서 느보산에 올라 여리고 맞은편 비스가산 꼭대기에 이르매 여호와께서 길르앗 온 땅을 단까지 보이시고 또 온 납달리와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땅과 서해까지의 유다 온 땅과 남방과 종려의 성읍 여리고 골짜기 평지를 소알까지 보이시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이는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그 후손에게 주리라 한 땅이라 내가 네 눈으로 보게 하였거니와 너는 그리로 건너가지 못하리라 하시매 이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어 벧브올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골짜기에 장사되었고 오늘까지 그 묘를 아는 자 없으니라 신명기 34:1-6 2021-0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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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독교강요 영어수업
    2021-02-08
  • 기독교강요 영어 수업 - 제십 계명 탐욕
    Lesson XXII 제십 계명 탐욕 Tenth Commandment Greed 제발 좀 더 주세요. 올리버 트위스트는 성이 안 찬 표정으로 접시를 내밀었습니다. 무엇이라구. 범블은 도저히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올리버를 노려보았습니다. 올리버 트위스트(Oliver Twist)는 1837년에 출판된 찰스 디킨스의 소설이 묘사한 굶주림은 사람을 용감하게 만듭니다. 즉 굶주림은 고아원에 있는 소년들처럼 필사적이고 무모하게 만듭니다. 이삭의 쌍둥이 아들 에서는 허기를 메우기 위해 죽 한 그릇에 자신의 장자 상속권도 동생 야곱에게 팔았습니다. 음식에 굶주린 사람이 용감해지듯 돈에 허기진 사람도 필사적이고 무모하게 돈을 갈구합니다. 중국 공산당이 정부를 수립한 이래 최악의 부패 스캔들로 불리는 화룽자산그룹의 라이샤오민전 회장 집에서 무려 3톤에 달하는 현금이 발견됐습니다. 중국 매체들은 역대 발견된 현금 은닉 재산 중 최고액이라고 전했습니다. 주요 일간지에 실린 기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중국 경제 매체 차이신(財新)은 2018년 8월 10일 중국 최대 자산관리회사인 화룽자산그룹의 전 회장 라이 샤오민의 수사 뒷얘기를 전했다. 이달 초 있었던 화룽그룹의 비공개회의를 통해 알려진 것이다. 라이 전 회장은 지난 4월 부패 혐의로 수사를 받으면서 회장직에서 사임했다. 중국 사정 당국이 라이 전 회장 소유의 집 여러 곳을 급습했을 때 방 곳곳에 쌓여 있던 현금 다발을 발견했다고 한다. 한곳에 모으면 무려 3톤에, 부피로는 3㎥에 달하는 양이었다. 중국 100위안(약 1만6500원)짜리 지폐 한 장의 무게는 약 1.15그램이다. 위안화뿐 아니라 외화도 섞여 있어 총 금액은 2억7000만위안(약 444억4000만원)이 넘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자택에 은닉한 재산의 최고액을 경신한 것이다. 이전까지는 2014년 4월 국가에너지국 석탄사(司)의 웨이펑위안 부사장(副司長) 집에서 발견된 2억3000만위안(약 378억6000만원)이 최고액이었다. 당시 현장에서 수사관들이 지폐를 세기 위해 지폐계수기 16대를 동원했는데 이 중 4대가 과열로 고장이 났을 정도였다. 중국 매체들은 라이 전 회장의 집에서 3t 분량의 현금을 압수했지만 이는 전체 횡령 금액 중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고 전했다. 라이 전 회장은 금융업계의 요직을 역임한 인물로 그가 화룽그룹의 회장직을 맡은 2009년 회사의 순자산은 156억위안(약 2조6000억원)에 불과했지만 작년 순자산은 1826억위안(약 30조550억원)으로 10배 이상 늘었다. 탐내지 말라는 제십 계명에 대해 칼빈은 『기독교강요』 제2권 제8장 49항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Tenth Commandment THOU SHALT NOT COVET THY NEIGHBOUR'S HOUSE, THOU SHALT NOT COVET THY NEIGHBOUR'S WIFE NOR HIS MAN-SERVANT, NOR HIS MAID-SERVANT, NOR HIS OX NOR HIS ASS, NOR ANYTHING THAT IS THY NEIGHBOUR'S. 49. The purport is: Since the Lord would have the whole soul pervaded with love, any feeling of an adverse nature must be banished from our minds. The sum, therefore, will be, that no thought be permitted to insinuate itself into our minds, and inhale them with a noxious concupiscence tending to our neighbour’s loss. To this corresponds the contrary precept, that every thing which we conceive, deliberate, will, or design, be conjoined with the good and advantage of our neighbour. But here it seems we are met with a great and perplexing difficulty. For if it was correctly said above, that under the words adultery and theft, lust and an intention to injure and deceive are prohibited, it may seem superfluous afterwards to employ a separate commandment to prohibit a covetous desire of our neighbour's goods. The difficulty will easily be removed by distinguishing between design and covetousness. Design, such as we have spoken of in the previous commandments, is a deliberate consent of the will, after passion has taken possession of the mind. Covetousness may exist without such deliberation and assent, when the mind is only stimulated and tickled by vain and perverse objects. As, therefore, the Lord previously ordered that charity should regulate our wishes, studies, and actions, so he now orders us to regulate the thoughts of the mind in the same way, that none of them may be depraved and distorted, so as to give the mind a contrary bent. Having forbidden us to turn and incline our mind to wrath, hatred, adultery, theft, and falsehood, he now forbids us to give our thoughts the same direction. 이 영어 원문의 대략적인 해석은 다음과 같습니다. 제십 계명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 출 20:17 49. 이 계명의 목적은, 우리의 영혼 전체가 사랑하는 마음을 갖는 것을 하나님이 원하시므로, 우리는 사랑과 반대되는 욕망을 모두 마음속에서 배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약하면 이웃의 손해를 초래할 만한 탐욕을 우리의 마음속에 일으키는 생각이 엄습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 대응하는 것은 반대되는 교훈입니다. 즉 우리가 계획하며 숙고하며 결심하며 시도하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이웃의 행복과 이익에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외관상 심히 복잡한 문제에 직면합니다. 간음과 도둑질이라는 말에는 간음하려는 욕망과 해치며 속이려는 의도가 포함된다고 이미 말했습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여기서 따로 다른 사람의 재산을 탐내지 말라는 금지를 받는 것은 불필요한 것같이 생각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의도(意圖)와 탐심의 차이를 생각하면 문제는 곧 해결될 것입니다. 앞에 있는 계명들에 관련해서 우리가 말한 의도는 마음이 정욕에 굴복한 때에 의지가 의식적으로 찬동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런 의식적인 찬동이 없어도 탐욕이 있을 수 있습니다. 즉, 마음이 허망하고 패악한 것에 찔리거나 유혹을 받기만 할 때에도 탐욕이 있을 수 있습니다. 주께서는 앞에 있는 계명들에서 사랑의 원칙이 우리의 의지와 노력과 행동을 지배하도록 명령하셨습니다. 여기서는 같은 목적으로 우리의 마음속의 생각을 제어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즉 우리의 마음을 반대 방향으로 몰아갈 수 있는 타락한 생각이나 비뚤어진 생각이 전혀 생기지 못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분노나 증오심이나 음란이나 강탈이나 거짓말 등에 기울어 끌리는 것을 금하신 그는 지금 우리의 생각을 동일한 방향으로 향하는 것을 금하십니다. 로마 제국에서 부유층은 흥청망청 연회를 벌여 1인당 3kg의 숭어를 먹어 댔지만, 물고기의 진가는 도시 시장과 군대 식당에서 발휘되었습니다. 로마 제국이 전성기일 때는 고등어 같은 하급 어종이 선원이나 군인의 식사 메뉴였는데, 가벼워서 대량으로 운반하기가 수월한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만약 어부와 어부가 잡은 물고기가 없었다면 인류의 문명은 어떻게 됐을까요. 아마도 파라오는 피라미드를 세우지 못했을 테고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 사원도 웅장한 위용을 뿜지 못했을 것입니다. 인간의 초기 문명은 대부분 강어귀, 호수, 연안 아니면 대양에 접근하기 쉬운 자리에서 꽃피었습니다. 작은 무리에서 마을, 도시, 제국, 국가로 성장하려면 무엇보다 사람들을 먹여 살릴 식량이 중요한데 강어귀나 호수 등은 어부들이 식량원을 지속해서 구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곡물을 재배하기 전까지 인류는 사냥, 채집, 고기잡이로 식량을 획득했습니다. 이중 사냥과 채집은 인류가 발전하면서 각각 목축과 농경에 그 자리를 내주었지만 고기잡이는 고대부터 지금까지 인류에게 식량 획득 수단으로서 위상을 잃지 않고 있습니다. 인류사에서 농경과 목축이 인간의 정착을 이끌었다면, 고기잡이는 탐험, 교역, 항해 등 인간의 이동 생활을 자극했습니다. 물가 근처에서 사는 사람들은 물고기나 조개 등 바다 식량원이 고갈되거나 홍수나 가뭄 등 자연재해로부터 식량 처가 훼손되면 풍요로운 어장을 찾아 이동했습니다. 또 고기잡이에 수반된 기술, 특히 배와 관련된 기술은 새로운 대륙을 탐험하고 대양을 건너 더 먼 곳에서까지 무역 활동을 펼칠 수 있도록 북돋웠습니다. 게다가 물고기는 건조하거나 염장 처리하면 가벼우면서도 영양분이 풍부한 식품이 되었습니다. 여기에 오랫동안 보존할 수 있다는 장점까지 갖춰 교역자, 탐험가, 정복자 등에게 이상적인 식량원이었습니다. 『난중일기』에 보면 이순신 장군도 이 고기잡이와 엄격한 관리로 군사들의 식량을 해결했습니다. 인류는 여전히 물고기를 마구 잡고 있고 어획량은 걷잡을 수 없이 급감했습니다. 저자는 "풍요로웠던 바다를 사막화시키고 싶지 않다면 인류의 탐심을 자제해야 바다에서 계속해 물고기를 구경할 수 있을 것"이라고 권면합니다. 율법에서 십계명이 차지하는 위치는 중요합니다. 율법이 죄를 깨닫게 해주기 위해서는 우리가 지은 개별적인 죄들을 구체적으로 먼저 깨닫게 해주어야 합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자신이 완전한 자가 아니라는 것과 같은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자신이 우상 숭배자와 살인자와 간음자와 도둑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바로 십계명은 이러한 역할을 담당합니다. 앞서 말했지만 십계명이 특별히 가치가 있는 것은 종합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주신 첫째 판의 계명들은 그리스도께서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에 관한 우리의 의무의 범주에 속합니다. 이 계명들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 22:37)는 말씀으로 요약이 됩니다. 둘째 판의 계명들은 우리의 이웃에 대한 우리의 의무의 범주에 속합니다. 이 계명들은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마 19:19)는 말씀으로 요약이 됩니다. 예수님은 더 나아가서 이 요약된 계명들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40)고 정의하셨습니다. 제십 계명은 모든 계명들 중에서도 가장 계시적입니다. 이 계명은 사람의 마음에 관한 율법의 내적인 성격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악이 마음에서 비롯되는 탐심이 모든 다른 죄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말합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4-15). 주님께서도 이 죄를 조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눅 12:15 이 말씀이 교훈하고 경계하는 것은 물질주의에 빠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욕심을 부리게 되면 다른 사람의 필요에 무관심해지고 냉담해지게 됩니다. 탐심을 가지게 되면 아무리 많은 부를 쌓아도 만족할 줄을 모르게 됩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어리석은 부자 비유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가장 소중하고 고귀한 것은 생명입니다. 우리의 탐심을 조절할 수 있는 비결은 우리가 어리석은 부자처럼 많은 것을 쌓았어도 오늘 밤 그 생명을 하나님이 가져가실 수 있다는 진리를 깨우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마 16:26 2021-0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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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독교강요 영어수업
    2021-02-01
  • 기독교강요 영어 수업 - 제구 계명 거짓말
    The Feast of Absalom, Niccolo Tomioli, 17th century Lesson XXI 제구 계명 거짓말 Ninth Commandment Lie 사상 최대의 거짓 인생을 산 사람의 하나가 미국의 페르디난드 왈도 테마라(1921~1982)였습니다. 그는 타인 이름을 훔쳐 신학자, 심리학자, 철학박사, 교도관, 교사, 그리고 의사로서 행세하며 일생을 사기로 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의사로 행세하면서 한국전쟁에 참전한 군의관으로 세운 공로로 캐나다의 국민 영웅으로까지 칭송을 받을 기회도 있었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토니 커티스가 주연한 영화 위대한 악당으로 제작되기도 했습니다. 미국이 1941년 12월에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던 터라 그는 이름을 바꿔 프레드 W. 테마라라는 이름으로 해군에 입대했습니다. 테마라는 승선 근무를 하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의무 학교의 훈련생으로 지원했습니다. 훈련 뒤 그는 버지니아의 노퍽 인근의 해군대대에 위생병으로 배속됐습니다. 거기에서 그는 공식 서류들을 잔뜩 훔쳤습니다. 그는 아이오아 주립대학교의 졸업 앨범에서 의사 자격증을 가진 사람을 찾아냈습니다. 그는 그 사람의 이름으로 필요한 서류들을 꾸미고 사진을 붙여서 해군 의무장교 복무 신청서를 제출했습니다. 복무 결정서를 기다리는 몇 주 동안 테마라는 위조 신분증을 쉽게 얻을 수 있는 방법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얼마 뒤 그는 스탠퍼드 출신 심리학 박사 로버트 린턴 프렌치를 입증하는 서류를 손에 넣었습니다. 그는 고향 로렌스로 돌아가서 교구의 신부 사무실에서 빈 서류더미를 훔쳤습니다. 테마라가 노퍽에 있는 해군부대로 돌아왔을 때 보안 조회가 끝나는 대로 장교로 임관될 것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가 보안 조회라는 말을 들었을 때 겁을 먹고 그 날 밤에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그는 메인의 가톨릭 학교에서 근무하는 동물학자 C. B. 해먼으로 변신했습니다. 그곳에 있는 동안 그는 의사 조셉 시르 박사의 모든 신상 정보를 훔쳐냈습니다. 테마라는 조셉 시르 박사라는 신분으로 캐나다 뉴브런즈윅의 세인트존으로 갔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왕립 캐나다 해군의 중위 계급장을 단 군의관이 되었습니다. 어떤 여자와 사랑에도 빠졌습니다. 그는 군인 복무를 마친 뒤 결혼해서 캐나다의 한적한 시골에서 개업하고 정착을 하겠다는 계획도 세웠습니다. 그런데 한국전쟁이 발발했습니다. 달콤한 생활에 젖어있던 그에게 구축함 카유가 호에 승선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테마라를 태운 구축함은 한국을 향해 유유히 출항했습니다. 사랑하는 여인은 부두에서 눈물에 젖은 하얀 손수건을 흔들었습니다. 군의관 테마라는 감기나 배탈 같은 가벼운 질병만 치료하면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부상당한 한국군 세 명을 태운 배가 카유가 호에 다가왔습니다. 중상을 입은 이 세 명을 테마라가 치료해야 했습니다. 그 중 한 명은 심장 부근에 총알까지 박혀 있었습니다. 그는 기절하고 싶을 지경이었지만 달리 뾰족한 수가 없었습니다. 외과 수술 경험은커녕 구경도 해본 적이 없는 군의관 테마라는 진땀을 흘리며 수술을 했습니다. 그런데 기적적으로 수술은 대성공이었습니다. 총알 제거 수술을 받은 한국군 병사는 며칠 만에 회복되었습니다. 다른 한국군 두 명도 적절한 치료로 회복이 되었습니다. 테마라 자신도 놀랄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 기적이 그에게 화근이 되었습니다. 캐나다 해군의 홍보 담당자는 이 소식을 캐나다 신문에 자세하게 게재하였습니다. 함장은 그에게 표창을 주기 위해 해군본부에 그의 이름을 상신했습니다. 이 와중에 진짜 조셉 시르 박사가 신문을 보고 이 소식을 들었습니다. 테마라의 의사 행세는 그것으로 끝이 났습니다.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해서 정착을 하려던 그의 꿈도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습니다. 그의 정체를 알게 된 사랑하던 여자도 눈물 자국 없는 메마른 하얀 손수건을 흔들며 그를 떠났습니다. 데마라는 캐나다로 송환되어 파면되고 국외 추방명령도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경험담을 잡지사 라이프에 팔아 많은 돈을 번 다음 유랑하던 그는 마침 텍사스주의 휴스톤에서 교도소 직원 모집 광고를 보자 응모했다. 벤 W.존스라는 이름이었다. 자기가 전에 썼던 수많은 이름으로 신원보증을 섰습니다. 교도관으로서의 그의 역량은 뛰어났습니다. 수감자를 위해 쓰기공부반을 만들고 체육의 날을 만들자는 그의 구상이 텍사스주 교도행정국장 엘리스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그는 흉악범을 수용한 헌츠빌 교도소의 개혁안을 맡기까지 해 엄청난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이런 성공이 잡지에 실리자 어느 수감자가 그가 가짜임을 알아냈습니다. 결국 그는 교도소를 떠났습니다. 그를 고용했던 다른 사람들처럼 엘리스 교도소 행정국장도 그가 진짜 증빙서류만 갖추고 돌아온다면 다시 받아들이겠다고 했습니다. 교도관으로 일한 사람 가운데 최고였다는 거였습니다. 테마라처럼 훌륭한 재능을 지닌 사람이 어째서 정식 자격을 얻으려고 하지 않았을까요. 그는 이런 질문을 받자 “순전히 악당 근성 때문이지”라고 쾌활하게 답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는 정식으로 목사가 되었습니다. 드디어 자기 이름으로 신분을 얻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생애의 마지막에는 캘리포니아의 애너하임에 있는 한 병원에서 환자와 죽어가는 사람들을 돌보는 목사로 일했습니다. 그러나 테마라의 이 마지막 직업은 가짜가 아닌 진짜였습니다. 그는 61세 때 심장 발작으로 사망했습니다. 움베르토 에코는 그의 저서 『거짓말의 전략』에서 거짓말 방법의 원칙은 ‘모호함을 피하라’는 것이고 거짓말로 생긴 관계의 원칙은 ‘적절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그가 말하는 인생은 이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언제나 침대에서 끝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침대에서 태어남으로써 시작하고, 30분 뒤에 사람들은 우리를 침대에 다시 누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매일 규칙적인 간격으로 침대로 돌아갑니다. 피곤하거나 매우 슬플 때 우리는 침대 위에 몸을 던집니다. 그러다 어느 멋진 날 우리는 한 아가씨를 사랑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한숨과 산책, 달콤한 말들로 시작하고, 나중에는 친척들이 개입하고, 급기야 옷들, 속옷들, 가구들, 주방용품들을 준비합니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침대에 누워 있게 될 날이 올 것입니다. 그 때가 되면, 예외 없이 우리는 우리 옷들 중에 가장 좋은 수의를을 입을 것입니다. 집 안에서 가장 중요한 가구 위에 누운 채 우리는 그 총체적인 혼란에 대해 완전히 무관심할 것이며 주위 사람들의 감정들을 전혀 공유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종류의 생각도 아주 조그마한 생각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이제 모든 것이 해결되었을 것입니다. 맨 처음 침대 위에 있게 되었을 때 우리는 몹시도 울었는데 이제 마지막이 될 때 우리는 입가에, 비록 최상의 미소는 아닐지라도 분명 우리의 미소 중에서 가장 섬세하고 모호하고 아이러니한 미소를 띨 것입니다. 거짓말로 형제 왕자들을 잔치에 초청해 죽인 다윗의 아들 압살롬처럼 바로 그 미소를 갖고 태마라는 자신의 전 생애에 걸쳐 사람들을 속였고 또 위로하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심장발작으로 죽을 때 그는 진짜 목사였습니다. 거짓말하지 말라는 제구 계명에 대해 칼빈은 『기독교강요』 제2권 제8장 47항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THOU SHALT NOT BEAR FALSE WITNESS AGAINST THY NEIGHBOUR 47. The purport of the commandment is, since God, who is truth, abhors falsehood, we must cultivate unfeigned truth towards each other. The sum, therefore, will be, that we must not by calumnies and false accusations injure our neighbour's name, or by falsehood impair his fortunes; in fine, that we must not injure any one from petulance, or a love of evil-speaking. To this prohibition corresponds the command, that we must faithfully assist every one, as far as in us lies, in asserting the truth, for the maintenance of his good name and his estate. The Lord seems to have intended to explain the commandment in these words: “Thou shalt not raise a false report: put not thine hand with the wicked to be an unrighteous witness." "Keep thee far from a false matter”(Exod. 23:1, 7). In another passage, he not only prohibits that species of falsehood which consists in acting the part of tale-bearers among the people, but says, “Neither shalt thou stand against the blood of thy neighbour,"(Lev. 19:16). Both transgressions are distinctly prohibited. Indeed, there can be no doubt, that as in the previous commandment he prohibited cruelty unchastity, and avarice, so here he prohibits falsehood, which consists of the two parts to which we have adverted. By malignant or vicious detraction, we sin against our neighbour's good name: by lying, sometimes even by casting a slur upon him, we injure him in his estate. It makes no difference whether you suppose that formal and judicial testimony is here intended, or the ordinary testimony which is given in private conversation. For we must always recur to the consideration, that for each kind of transgression one species is set forth by way of example, that to it the others may be referred, and that the species chiefly selected, is that in which the turpitude of the transgression is most apparent. It seems proper, however, to extend it more generally to calumny and sinister insinuations by which our neighbours are unjustly aggrieved. For falsehood in a court of justice is always accompanied with perjury. But against perjury, in so far as it profanes and violates the name of God, there is a sufficient provision in the third commandment. Hence the legitimate observance of this precept consists in employing the tongue in the maintenance of truth, so as to promote both the good name and the prosperity of our neighbour. The equity of this is perfectly clear. For if a good name is more precious than riches, a man, in being robbed of his good name, is no less injured than if he were robbed of his goods; while, in the latter case, false testimony is sometimes not less injurious than rapine committed by the hand. 이 영어 원문의 대략적인 해석은 다음과 같습니다. 제구 계명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 출 20:16 47. 이 계명의 목적은, (진리이신) 하나님이 거짓말을 증오하시므로 우리는 서로 진실을 실행하여 속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요약하면, 우리는 남을 중상하지 말며 거짓으로 남의 재산에 해를 끼치지 말아야 합니다. 간단히 말해, 함부로 거짓된 험담을 해서 남을 해쳐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금지에 연결된 명령은, 모든 사람의 명예와 소유에 손상이 없도록 보호하기 위해서, 진실한 말로 될 수 있는 대로 충실하게 남을 도우라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23장에 있는 주의 말씀은 이 계명의 뜻을 표명하시려고 한 것 같습니다. “너는 허망한 풍설을 전파하지 말며 악인과 연합하여 무함하는 증인이 되지 말며”(출 23:1). 마찬가지로, “거짓 일을 멀리하며”(출 23:7). 다른 구절에서는 중상과 풍설을 퍼뜨리고 다닌다는 의미의 거짓말뿐 아니라(레 19:16) 형제를 속이는 것도 금하십니다(레 19:11). 이 두 가지 일을 특별한 계명으로 금하십니다. 바로 앞의 계명들에서 야비함과 음란과 탐욕을 금지하신 것과 같이 여기서도 거짓을 금하시는 것이 확실합니다. 방금 언급한 것과 같이, 여기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악의와 악한 중상모략으로 이웃의 명예를 해치는 것이며 또 하나는 거짓말이나 심지어 훼방으로 남의 재물을 빼앗는 것입니다. 엄숙한 법적 증언으로서 하거나 사적인 대화중에서 하거나, 나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언제나 문제의 귀착점은 같습니다. 여러 가지 가운데서 특히 추악한 죄 하나를 예로 들어 나머지는 같은 종류에 포함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웃을 부당하게 해치는 중상과 훼방도 여기 포함시키는 것이 일반적으로 편리합니다. 법정에서의 거짓 증언에는 항상 거짓 맹세가 내포됩니다. 거짓 맹세는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것으로 셋째 계명에서 충분히 설명됩니다. 그러므로 이 계명을 올바로 지키려면, 진실을 말함으로써 이웃의 명예와 이익을 지켜 주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공정하다는 것은 명약관화합니다. 많은 재물보다 명예가 더욱 귀하다면(잠 22:1) 명예 훼손은 재물 탈취보다 더 큰 상해가 됩니다. 그러나 재물을 약탈할 때에도 손으로 빼앗는 것에 못지않게 거짓 증언으로 횡령하는 때가 있습니다. 칼빈의 가르침은 항상 성경에 근거합니다. 하나님은 진리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는 진리의 하나님 여호와(시 31:5)이시기에 거짓을 말씀하실 수 없습니다(딛 1:2). 신자의 의무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온전하심 같이 온전해져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신자는 진실해야 합니다(마 5:48). 그러나 온전하지 못하게 되는 까닭은 모든 거짓은 진리에서 나지 않기 때문입니다(요일 2:21). 거짓은 진리이신 하나님과 조화될 수 없습니다. 거짓은 어둡고 불안하고 파멸을 가져옵니다. 그러나 진실은 밝고 평안하고 구원을 가져옵니다. 하나님은 진리의 하나님이시고 거짓을 싫어하십니다(사 65:16). 그러므로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사람은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고전 13:6). 그러나 사탄은 진리를 싫어합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요 8:44). 진실해진다고 하는 것은 경험해 본 사람은 알고 있듯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거짓을 말하거나 진실을 숨기는 일이 더 합당하게 생각되는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또한 진실을 말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질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불가능하게 보이는 일이 하나님에게는 가능합니다(눅 18:27). 주님이 말씀해 주시듯이 사람은 속에 있는 것이 밖으로 나타나게 되어있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마 12:34-35). 우리 마음에 믿음과 진실이 아니라 자아만이 가득 차있다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진리를 숨기거나 왜곡시키는 일을 마다하지 않을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 마음이 진리로 채워진다면 우리의 말은 날로 진실해지고 남을 유익하게 할 것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진실만을 말하려고 할 때 명심해야 될 것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우리는 자신이 진실하다고 믿는 것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자신이 믿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은 무책임한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딤후 3:14 둘째 우리는 실제로 일어나고 목격한 일을 말해야 합니다. 우리는 남에게 들은 것을 사실인 것처럼 말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한 태도를 성경은 금합니다. 너는 네 백성 중에 돌아다니며 사람을 비방하지 말라(레 19:16). 지혜로운 사람은 듣는 것을 다 믿지 않고 특히 좋지 않은 소문일 때는 더욱 그러합니다. 그는 들은 사실을 알아보기 전에는 함부로 말하지 않고 나쁜 이야기는 더욱 입에 담기도 싫어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합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약 1:19 2021-01-18
    • G.QT
    • 기독교강요 영어수업
    2021-01-18
  • 기독교강요 영어 수업 - 제팔 계명 도적질
    Constant Wauters, The Caught Thief Servant Lesson XX제팔 계명 도적질Eighth Commandment Robbery 승리와 명예는 늘 상대보다 더 끈질기고 비정한 사람에게 돌아가게 마련입니다. 전화를 발명한 세 사람 가운데 최종적인 승리를 거머쥔 사람은 세 사람 중 가장 비양심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난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Alexander Graham Bell 1847년 3월 3일 ~ 1922년 8월 2일)은 1872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처음에는 발성기관 생리학을 연구하고 농아학교 교사들을 가르치는 전문가로 일했습니다. 그러던 그가 1876년 2월 14일 전화기에 대한 특허를 신청해서 3주 뒤 특허를 받았습니다. 독일의 물리교사 필리프 라이스(Philipp Reis)가 1861년에 고안한 전화기가 아직 특허를 받을 만큼 제대로 완성되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벨의 특허권 획득은 정당했습니다. 라이스의 전화기는 코맹맹이 소리에다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탈리아계 미국인 안토니오 메우치(Antonio Meucci 1808 ~ 1889)가 발명한 전화기는 문제가 다릅니다. 벨은 메우치의 실험실에서 함께 일하면서 제대로 작동하는 전화기를 처음 보았습니다. 그리고 메우치는 벨보다 5년 앞서 그 전화기로 벌써 1871년에 특허를 따놓은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메우치의 특허권은 1874년에 효력이 정지되었습니다. 경제적 어려움으로 메우치는 자신의 발명품에 관심을 기울일 여력이 없었습니다. 1876년 벨이 특허를 따내자 메우치는 벨을 사기 혐의로 고소했습니다. 그러나 그 사이 급작스럽게 유명해진 벨이 고용한 유능한 변호사들과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한 남자 사이의 소송은 한없이 이어졌습니다. 1896년 메우치가 한이 맺혀 숨을 거둘 때까지도 판결이 나지 않았습니다. 벨이 속이고 기술을 훔친 사람이 또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오하이오 주 출신의 전기공학과 교수 엘리사 그레이(Elisha Gray 1835-1901)였습니다. 그레이는 우선 운이 지독하게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특허신청서를 들고 특허청에 도착해보니 벌써 두 시간 전에 벨이 특허 신청을 하고 갔다는 것입니다. 이 두 시간이 두 사람의 운명을 갈라놓았습니다. 그걸 갖고 벨을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그런데 특허장이 발부된 지 사흘 만에 열린 처음 열린 전화기 시연회에서 벨의 전화기가 그레이의 기술을 도용한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마이크로폰과 금속진동판이 그레이의 특허신청서에 명시된 기술방식이었습니다. 이것이 벨의 고유한 기술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과학역사가들 사이에선 이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벨이 특허를 취득한 전화기의 절반은 그레이가 만든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이번에는 그레이가 벨을 사기 혐의로 고소했습니다. 이와 관련된 소송이 무려 100건이 넘었습니다. 미국 대법원은 그레이의 소송을 모두 기각했습니다. 그러나 벨에게는 무척 불명예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최종 판결에서는 승리를 얻었지만 대법원 판사들의 의견은 정확히 찬반 동수로 엇갈렸다. 어쨌든 벨은 두 번의 부정을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부와 명성을 한꺼번에 얻었습니다. 1922년 벨이 숨을 거두자 미국의 전화국들은 1400만 전화회선을 1분간 정지시키고 그의 죽음을 기렸습니다. 반면에 그레이는 백과사전 한 귀퉁이에 이름만 올라 있고 메우치는 그 이름마저 잊혔습니다. 벨은 자신의 행적에 어울리는 말을 남겼습니다. “What this power is I cannot say; all I know is that it exists and it becomes available only when a man is in that state of mind in which he knows exactly what he wants and is fully determined not to quit until he finds it.”나도 이 힘이 무엇인지 말할 수 없습니다. 내가 아는 전부는 이 힘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정확히 알고 그것을 발견할 때까지 그만두지 않겠다는 완전한 결의를 마음속에 가진 사람에게만 쓸모가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도둑질하지 말라는 제팔 계명에 대해 칼빈은 『기독교강요』 제2권 제8장 45항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THOU SHALT NOT STEAL 45. The purport is, that injustice being an abomination to God, we must render to every man his due. In substance, then, the commandment forbids us to long after other men's goods, and, accordingly, requires every man to exert himself honestly in preserving his own. For we must consider, that what each individual possesses has not fallen to him by chance, but by the distribution of the sovereign Lord of all, that no one can pervert his means to bad purposes without committing a fraud on a divine dispensation. There are very many kinds of theft. One consists in violence, as when a man's goods are forcibly plundered and carried off; another in malicious imposture, as when they are fraudulently intercepted; a third in the more hidden craft which takes possession of them with a semblance of justice; and a fourth in sycophancy, which wiles them away under the pretence of donation. But not to dwell too long in enumerating the different classes, we know that all the arts by which we obtain possession of the goods and money of our neighbours, for sincere affection substituting an eagerness to deceive or injure them in any way, are to be regarded as thefts. Though they may be obtained by an action at law, a different decision is given by God. He sees the long train of deception by which the man of craft begins to lay nets for his more simple neighbour, until he entangles him in its meshes--sees the harsh and cruel laws by which the more powerful oppresses and crushes the feeble--sees the enticements by which the more wily baits the hook for the less wary, though all these escape the judgment of man, and no cognisance is taken of them. Nor is the violation of this commandment confined to money, or merchandise, or lands, but extends to every kind of right; for we defraud our neighbours to their hurt if we decline any of the duties which we are bound to perform towards them. If an agent or an indolent steward wastes the substance of his employer, or does not give due heed to the management of his property; if he unjustly squanders or luxuriously wastes the means entrusted to him; if a servant holds his master in derision, divulges his secrets, or in any way is treacherous to his life or his goods; if, on the other hand, a master cruelly torments his household, he is guilty of theft before God; since every one who, in the exercise of his calling, performs not what he owes to others, keeps back, or makes away with what does not belong to him. 이 영어 원문의 대략적인 해석은 다음과 같습니다. 제팔 계명 도적질하지 말지니라 출 20:15 45. 이 계명의 목적은, 하나님이 불의를 미워하시므로, 우리는 각 사람의 소유를 그에게 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출 13:7). 요약하면, 이 계명은 다른 사람들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고 금지하며, 결과적으로 모든 사람이 각각 자기의 소유를 보존하도록 충실히 애써 노력하라고 명령합니다. 사람의 소유는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라, 만물의 최고의 주인이신 분이 분배해 주셨다는 것을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사악한 계략으로 남의 물건을 빼앗는다면 그것은 반드시 사기 수단으로 하나님의 경륜을 배제하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도둑질도 여러 가지입니다. 폭력을 쓰는 노골적인 강도 행위, 기만수단으로 남의 소유를 가로채는 흉악한 사기 행위, 외관상 법적인 수단으로 남의 것을 빼앗는 더욱 음흉하고 간교한 것 등이 있습니다. 아첨하며 선물로 받는 체하면서 속여 빼앗는 것도 있습니다. 도둑질의 종류는 자세히 말하지 않겠습니다. 이웃의 소유나 돈을 우리가 취득하는 방법은 그것이 진지한 애정을 떠나서 속이거나 해하겠다는 욕망이 될 때에 모두 도둑질로 간주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법적 절차를 통해서 남의 재산을 얻는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심판은 변하지 않습니다. 간교한 사람이 복잡한 사기 수단으로 단순한 사람 앞에 올무를 놓아 결국 끌어넣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사기 수단으로 보십니다. 세력 있는 자들이 약한 사람들을 법으로 압박하며 꺾어 버릴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가혹하고 잔인한 법을 보십니다. 간악한 자가 부주의한 사람들을 미끼로 호려 낚시에 걸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간교한 꼬임을 보십니다. 이 모든 일은 인간의 심판을 받지 않으며 눈에 띄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런 불의는 돈이나 상품이나 토지에 관해서 있을 뿐만 아니라, 각 사람의 권리까지도 침범합니다. 우리가 이웃에 대해 지고 있는 의무를 거부할 때 우리는 그들의 재산을 횡령하는 것입니다. 만약 게으른 관리인이 주인의 재산을 소비하며 주인의 살림을 돌보지 않을 때 맡은 재산을 부당하게 소비하거나 함부로 허비할 때 하인이 주인을 조롱할 때 주인의 비밀을 폭로할 때 주인의 생명이나 재산에 대해서 배신행위를 할 때 그러나 반대로 주인이 집안사람들을 난폭하게 괴롭힐 때, 이 모든 경우는 하나님 보시기에 도둑질입니다. 자기가 소명 받은 책임에 따라 남에게 해야 할 일을 실행하지 않는 사람은 남의 것을 주지 않고 자기가 횡령하고 차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없어서 추위에 떨며 굶주리고 있는 일곱 조카들을 위해 빵 한 덩이를 훔친 죄로 체포된 레미제라블의 주인공 장발장은 19년 감옥생활을 했습니다. 도적질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인류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이는 도덕 표준입니다. 그러나 성경만이 도적질하는 것이 왜 나쁜지를 분명하게 밝혀줍니다. 모든 사람이 제 각각 정당하게 소유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눠주신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약 1:17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것을 훔치는 것은 하나님에게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물론 도적질은 다른 사람에게 죄를 범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그 훔친 것은 그 사람에게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가슴 여미는 고백이 이러한 생각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의 명예와 정절을 훔치고 그녀의 남편의 생명까지 뺏었음에도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시 51:4)라고 고백합니다. 우리가 장발장처럼 빵을 훔치지 않거나 다윗처럼 다른 사람의 부인을 빼앗지 않았다고 해서 제팔 계명을 어기지 않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훔치는 방법과 대상이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즉 그것은 돈 시간 명예 재능 또는 하나님의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했다고 비난하시고 어리둥절한 그들에게 그것이 무엇인지 가르쳐주십니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 하였나이까 하는 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 말 3:8 칼빈의 가르침을 따른다면 하나님에게 응당 바쳐야 할 헌금이나 예배나 전도를 태만히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이 됩니다. 우리가 직장에서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하지 않고 빈둥거린다면 그것도 고용주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입니다. 남에게 돈을 빌려 잘못 쓰거나 제때 갚지 않는 것도 남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입니다. 또 많은 사람들이 생계유지에도 힘이 모자라 허덕거리고 있는데 자신은 사치에만 몰두하고 있다면 이것도 자기 자신의 것을 자신이 도적질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팔 계명을 가장 잘 지킬 수 있는 방법을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가르쳐주십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마 7:12 이 가르침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바는 물질적인 면과 정신적인 면을 다 같이 말씀합니다. 이 가르침은 궁핍하고 어려운 사람에게는 물질로 도움을 주어야 하고 슬픔이나 좌절을 겪는 사람에게는 위로와 격려로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의 실례를 주님은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가르쳐주십니다. 주님이 마태복음 25:35-46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에 의인들이 대답했습니다.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그리고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 하였느니라.” 그들도 대답했습니다.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 하더이까.”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2020-01-04
    • G.QT
    • 기독교강요 영어수업
    2021-01-04
  • 기독교강요 영어 수업 - 제칠 계명 간음
    Susannah accused of adultery, by Antoine Coypel Lesson XIX제칠 계명 간음Seventh Commandment Adultery 교도 계율이 신대륙을 지배하는 17세기. 뉴잉글랜드 형무소 근처에 교수대가 서있습니다. 그 교수대 위에 한 젊은 여자가 서있습니다. 많은 구경꾼들이 눈초리를 빛내고 있습니다. 교수대 위의 여자는 진홍빛 A(간음을 나타내는 adultery의 머리글자)자를 수로 곱게 새긴 가슴에 갓난아이를 안고 서있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헤스터 프린입니다. 그녀는 훨씬 나이가 많은 남자와 결혼했습니다. 그녀는 지금 남편보다 먼저 신대륙에 왔는데 암스테르담에서의 남편의 일처리가 늦어져 혼자 지내고 있었습니다. 소식도 없이 헤어져 있는 기간이 이제는 너무나 오래돼 그녀는 남편이 죽은 것이 아닌가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그 사이에 그녀가 아이를 낳게 되었습니다. 남편과 오래 헤어져 있는 사이에 아이를 낳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헤스터 프린이 간음을 했음을 단번에 알았습니다. 엄격한 청교도들은 그녀를 재판에 회부했습니다. 그녀는 한사코 간음의 상대자를 밝히지 않았습니다. 간음을 범한 헤스터 프린은 교수대 위에서 죄의 열매인 아이를 안고 세 시간 동안 사람들의 구경꺼리가 된 뒤 평생 간음죄의 표식인 A자를 가슴에 달고 살라는 선고를 받았습니다. 헤스터 프린의 아이의 아버지는 그 마을의 존경받는 젊고 학식 많은 목사 딤즈데일이었습니다. 딤즈데일은 헤스터 프린과 형벌을 함께 받아야 했지만 망설임과 두려움으로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는 자수해서 형벌을 받을 용기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죄의식으로 불면에 시달리고 쇠약해져 갔습니다. 오래 소식이 없던 그녀의 남편 칠링월스가 아내가 사는 마을에 나타났습니다. 그는 신대륙으로 오던 중 태풍을 만나 온갖 고생 끝에 간신히 도착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내는 아버지도 모르는 아이를 안고 있었습니다. 그는 아내를 찾아가 만나지 않고 이를 갈며 복수를 다짐합니다. 딤즈데일에게서 몇몇 수상한 점을 발견한 칠링월스는 그를 점점 의심하게 됩니다. 그는 이름도 바꾸고 의사로 자리를 잡습니다. 그는 고뇌로 쇠약해진 목사에게 접근했습니다. 그는 치료약이라 속이고 목사를 서서히 독약으로 중독시킵니다. 그런데 그의 복수가 무르익어 성공할 무렵 딤즈데일 목사가 양심의 가책을 견디지 못하고 군중 앞에서 헤스터 프린의 손을 잡고 자신의 죄를 고백합니다. 항상 나를 사랑해주시던 여러분. 나를 거룩하다고 존경해주시던 여러분. 이 자리에 죄인이 섰습니다. 나는 마땅히 7년 전에 이 자리에 서야 했습니다. 보십시오. 헤스터가 달고 있는 주홍글씨를. 여러분은 이 글씨를 볼 때마다 떨었습니다. 이 여인이 어디를 가나 주위에 이 글씨의 무섭고 끔찍한 광선을 비추었습니다. 그러나 그 죄와 수치의 표적을 보고 떨지 않은 죄인이 여러분 속에 숨어 살아왔습니다. 모든 죄를 고백한 딤즈데일 목사는 그 자리에서 숨집니다. 회개와 고백을 통하여 그의 영혼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헤스터는 나머지 생애를 딸을 키우며 이웃에 대한 헌신적인 봉사로 보내다 마감합니다. 그녀의 묘비에는 이름 대신에 검은 바탕에 붉은 주홍 글씨가 새겨집니다. 『주홍 글씨(The Scarlet Letter)』는 미국 소설가 호손(Nathaniel Hawthorne 1804년 7월 4일 - 1864년 5월 19일)의 대표작으로 1850년 발표되었습니다. 세무서에서 근무하다가 실직한 호손이 배우자의 격려를 받아서 쓴 소설이라고 알려져 있는 이 소설에는 청교도 신자 호손의 죄와 인간의 위선에 대한 통찰력이 담겨 있습니다. 청교도 목사 딤즈데일의 죄책감과 그와 간음한 헤스터의 순수한 마음을 대비시켜서 17세기 미국 청교도들의 위선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간음한 헤스터에게 A라는 붉은 낙인을 찍는다는 설정에서 붉은 낙인 ‘주홍 글씨’는 인간을 얽매는 굴레를 뜻합니다. 이 의미에 대해 칼빈은 『기독교강요』 제2권 제8장 41항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THOU SHALT NOT COMMIT ADULTERY 41. The purport of this commandment is, that as God loves chastity and purity, we ought to guard against all uncleanness. The substance of the commandment therefore is, that we must not defile ourselves with any impurity or libidinous excess. To this corresponds the affirmative, that we must regulate every part of our conduct chastely and continently. The thing expressly forbidden is adultery, to which lust naturally tends, that its filthiness(being of a grosser and more palpable form, in as much as it casts a stain even on the body) may dispose us to abominate every form of lust. As the law under which man was created was not to lead a life of solitude, but enjoy a help meet for him, and ever since he fell under the curse the necessity for this mode of life is increased; the Lord made the requisite provision for us in this respect by the institution of marriage, which, entered into under his authority, he has also sanctified with his blessing. Hence, it is evident, that any mode of cohabitation different from marriage is cursed in his sight, and that the conjugal relation was ordained as a necessary means of preventing us from giving way to unbridled lust. Let us beware, therefore, of yielding to indulgence, seeing we are assured that the curse of God lies on every man and woman cohabiting without marriage. 이 영어 원문의 대략적인 해석은 다음과 같습니다. 제칠 계명 간음하지 말찌니라 출 20:14 41. 이 계명의 목적은, 하나님이 정숙과 순결을 사랑하시므로, 우리는 모든 부정을 멀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약하면, 우리는 육의 추악이나 정욕의 난무에 더럽혀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 대응하는 적극적인 계명은 우리 생활의 모든 부분을 정결과 극기로 지속적으로 제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음행은 모든 정욕의 귀착점이며, 육체에 그 낙인을 찍는 점에서 그 추악상은 더욱 현저히 저열한 것인데, 그 음행을 명백히 금하심으로써 주께서는 우리가 모든 정욕을 타기 하도록 인도하려 하십니다. 인간이 이런 상태로 창조된 것은 고독 생활을 하지 않고 돕는 사람과 함께 즐겁게 살도록 하시려는 뜻입니다(참조, 창 2:18). 사람은 죄의 저주를 받아 더욱 이렇게 할 필요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이 문제에 대한 충분한 대책으로서 결혼 제도를 제정하시고, 그의 권위에서 출발한 결혼 생활을 축복으로 성별 하셨습니다. 따라서 결혼이 아닌 남녀 결합은 모두 하나님 보시기에 저주받은 것이며, 우리가 무절제한 정욕에 빠지는 것을 막는 데 필요한 대책으로서 결혼생활이 제정되었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면 결혼하지 않은 남녀의 동거 생활은 반드시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다고 들을 때 우리는 자기를 속이지 말아야 합니다. 프로이드가 쾌락원리를 최초로 공식화한 후 현대의 대중매체는 성(性)을 미끼로 물질주의와 쾌락의 추구를 선동합니다. 20세기 쾌락주의는 플레이보이 철학으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플레이보이 잡지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성을 시궁창에서 꺼내 쾌락의 철학과 함께 화려한 종이에 인쇄하여 팔았기 때문입니다. 쾌락주의는 개인의 쾌락을 선(善)이라고 생각하여 그것을 삶의 가치의 목표로 삼고 도덕은 쾌락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합니다. 이것에 덧붙여 성경의 윤리에 도전하는 상황윤리라고 하는 신도덕주의(New Morality)가 있습니다. 이것은 로빈슨(J A T. Robinson) 플래처(Joseph Fletcher) 콕스(James Cox) 등에 의해 주창되었습니다. 이들의 주장은 다음의 두 가지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첫째 어떤 주어진 상황에 알맞은 행동 방향은 그 상황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지 미리 결정된 어떤 윤리적 기준이나 성경적 기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둘째 어떤 윤리적 상황에서나 적용될 수 있는 유일한 기준은 사랑에 대한 요구다. 다른 사람에게 해가 되지 않는다면 무슨 일이든지 옳다고 상황윤리주의자들은 주장합니다. 그리고 어떤 일이 다른 사람에게 해가 되느냐 안 되느냐의 여부는 오직 그 상황 여부에 달려있다고 내세웁니다. 이 주장에 따르면 사통(私通)이나 간음도 그 상황 여부에 따라서 반드시 나쁜 일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결론입니다. 이 간음조차도 그것의 옳고 그름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느냐 해가 되느냐에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쾌락주의를 선동하는 언론매체와 신도덕주의의 영향으로 어떤 일이든 좋으면 실행하라는 외침이 우리 시대의 표어가 되어버렸습니다. 십계명에 나타난 하나님의 율법과 산상수훈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비추어 볼 때 그리스도인들은 그 외침을 거부해야 합니다. 루이스(C. S. Lewis)는 『단순한 그리스도교』(Mere Christianity)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교의 표준은 너무 어렵고 우리 자신의 본능과 크게 어긋나기 때문에 우리 자신과 우리 사회가 무엇인가 잘못된 점이 분명히 있다는 사실을 모두 솔직히 인정해야 합니다. 쾌락은 근본적으로든 일반적으로든 삶의 성취목표가 아니라 하나의 결과이거나 부차적인 효과에 지나지 않습니다. 즉 쾌락은 사람이 의미를 실현하게 되고 가치를 인식하게 되면 부수적으로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쾌락을 목표로 얻고자 하면 그 사람은 반드시 실패합니다. 왜냐하면 쾌락은 목표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와를 만드시고 아담에게 데려왔을 때 아담은 외쳤습니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창 2:23 하나님은 서로 좋아하는 둘이 한 몸을 이루게 해주셨습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창 2:24-25 우리는 성경을 통해 태초에 성적인 욕구가 있었고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적인 욕망이 잘못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대로 이 성욕을 만족시키는 것은 잘못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성경은 사람들이 결혼하고 싶어 하는 것도 이 욕구 때문이란 사실을 솔직히 인정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문제 삼는 것은 성욕을 불법으로 만족시키려고 하는 데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정해주신 결혼 밖에서 갖는 성적인 관계를 의미합니다. 성경은 합법적으로 결혼한 사람 이외의 성관계는 죄로 규정합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마 5:27-28 제칠 계명과 주님의 가르침이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명령하는 것은 결혼 전에는 순결을 지키고 결혼 후에는 결혼생활에 충실 하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에 대해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교훈합니다.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이 사람은 이러하고 저 사람은 저러하니라 내가 결혼하지 아니한 자들과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결혼하라 정욕이 불 같이 타는 것보다 결혼하는 것이 나으니라 고전 7:7-9 결혼 생활을 떠나서 성적 쾌락을 추구하면 추구할수록 목적하는 쾌락은 얻지 못하고 더욱 공허해지고 타락하게 됩니다. 우리 사회는 점점 성에 대해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풍조로 물들어 가고 있습니다. 이런 풍조에 대한 반발로 미투 운동(Me Too movement)이 촉발되었습니다. 이 운동은 미국에서 시작된 해시태그 운동인데 2017년 10월 할리우드 유명 영화제작자인 하비 와인스타인의 성추문을 폭로하고 비난하기 위해, 소셜 미디어에 해시태그(#MeToo)를 다는 행동에서 출발했습니다. 해시태그 운동(Hashtag activism 해시태그 활동주의)는 단순히 홍보 수단이나 가벼운 주제를 묶어 보여주는 역할에서 확대되어 정치·사회 이슈를 만들어내는 해시태그의 사회운동 역할을 말합니다. 초기엔 놀이문화로만 이용되던 해시태그가 일종의 콘텐츠를 생산하는 역할을 맡았고 사회운동 역할로 확장된 것입니다. 해시태그를 중심으로 한 시민들의 용기 있는 고백이 모이고 모여 변화의 물꼬를 텄으며 이게 오프라인으로 결집이 이어지면서 ‘집단 지성’으로써 힘을 증명한 것입니다. 언론에 의해 형성된 여론 아니라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에 의해 시민들 스스로가 주도하는 여론입니다. 한국에서는 2018년 1월 29일 현직 검사 서지현이 JTBC 뉴스룸에 출연하여 검찰 내의 범죄자를 비롯한 성폭력 실상을 고발하면서 미투 운동을 촉발시켰습니다. 연극연출가에게 성추행을 당했다는 고발이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를 통해 널리 퍼지면서 ‘위력에 의한 성폭력’ 피해 고발 움직임이 대한민국을 강타했습니다. 2018년 2월 26일 문재인 대통령이 “미투 운동을 무겁게 받아들인다”며, “피해 사실을 폭로한 피해자들의 용기에 경의를 표하고, 미투 운동을 적극 지지한다”고 지지 의사를 밝히고 “피해자들의 폭로가 있는 경우 형사고소 의사를 확인하고, 친고죄가 폐지된 2013년 6월 이후의 사건은 고소 없이도 적극 수사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칼빈의 제칠 계명에 대한 가르침의 요지는 우리가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하나님 말씀으로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면 우리는 진정한 기쁨을 얻게 되고 축복된 삶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그 방법을 구체적으로 이렇게 지시해줍니다.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이런 것이 없는 자는 맹인이라 멀리 보지 못하고 그의 옛 죄가 깨끗하게 된 것을 잊었느니라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벧후 1:4-11 2020-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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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독교강요 영어수업
    2020-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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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독교강요 영어수업 - Lesson III 돌연한 회심
    Lesson III돌연한 회심A sudden conversion ‘존재하는 모든 것은 선(善)합니다’라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오래 침묵한 뒤에 하는 말로 이런 말도 있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신자임에도 우리의 다른 모든 사랑하는 사람들 멀어지거나 죽을 수 있습니다. 싸늘한 사랑은 추억 아래 숨고 이제는 사라진 교회의 커튼도 무심한 밤 위에 드리웁니다. 그러한 허무 속에서도 우리는 이 개혁주의 신학과 믿음의 드높은 주제를 말하고 또 말함이 옳을 것입니다. 아쉽게도 육체의 노쇠야말로 하나님이 주신 지혜입니다. 젊은 날 우리가 사랑하고 믿고 설교했지만 무지했음을 이제 우리는 압니다. 논쟁은 때론 좋은 것 같습니다. 당연한 것이라도 다시 자료를 찾아보고 새롭게 판단할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입니다. 교과서 용어로 풀어쓰자면 논쟁에는 ‘건강한 회의론자’(healthy skeptic )의 자세를 환기시켜 ‘증거에 기반한’(evidence-based) 합리성과 ‘비판적 사고’(critical thinking)를 배양하도록 도와주는 순기능이 있습니다. 칼빈이 가톨릭 신자에서 종교 개혁 결과 생긴 프로테스탄트(Protestant prtstnt 신교도, 항의자) 교도로 회심한 것에 대한 논란이 있습니다. 인터넷 시대 누구나 편집할 수 있고 5,693,164 영어 항목의 무료 백과사전 Wikipedia(하와이어로 빠른‘quick’을 의미하는 ‘wiki’와 백과사전을 의미하는 ‘encyclopedia’가 합쳐진 이름)에 칼빈의 회심에 대한 논란을 이렇게 서술했습니다. Alternate theories have been suggested regarding the date of Calvin's religious conversion. In this view, his resignation is the direct evidence for his conversion to the evangelical faith. Some have placed the date of his conversion around 1533, shortly before he resigned his chaplaincy. However, T. H. L. Parker argues that while this date is a terminus for his conversion, the more likely date is in late 1529 or early 1530. 칼빈의 종교적 회심(conversion knvːrn 회심, 개종, 전환) 날짜에 관하여(regarding) 서로 엇갈리는(alternate ːltrnit) 이론(theory θːri)들이 암암리에 주장되어(suggest sgdst 암시합니다) 왔습니다. 칼빈이 자신의 지도 신부직(chaplaincy tplinsi 수도회·학교·병원·고아원·교도소·군대 따위 특정한 부류의 사람을 다스리고 이끄는 사제)을 사임하기 바로 직전인 1533년 경 회심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 견해에 따르면(in this view) 칼빈의 사임(resignation rzignin)이 복음주의(evangelical ːvændlikl) 신앙으로 그가 회심한 것에 대한 직접적인 증거가 됩니다. 하지만 파커(Parker, T. H. L)는 그의 『칼빈 전기』(John Calvin: a Biography, Louisville, KY 199-203. Westminster John Knox: 2006)에서 이렇게 주장합니다(argue ːrgjuː). 이 날짜가 그의 회심의 종점(terminus tːrmns)이라고는 해도 1529년 말이나 1530년 초가 훨씬 더 가능한(likely likli) 날짜인 것 같습니다. The main evidence for his conversion is contained in two significantly different accounts of his conversion. 그의 회심에 대한 주요 증거(evidence vidns)는 그의 두 중요한 다른 회심 사건들에 들어있습니다. In the first, found in his Commentary on the Book of Psalms, Calvin portrayed his conversion as a sudden change of mind, brought about by God:그의 시편 주석(Commentary on the Book of Psalms, vol. 1, p. 67, Grand Rapids: Eerdmans, 1948) 서문(preface prfis)에서 발견되는 첫 번째 사건에서(In the first) 칼빈은 자신의 회심을 하나님이 주신(brought about by God) 마음의 돌연한 변화(a sudden change of mind)로 묘사했습니다(portray pːrtri): God by a sudden conversion subdued and brought my mind to a teachable frame, which was more hardened in such matters than might have been expected from one at my early period of life. Having thus received some taste and knowledge of true godliness, I was immediately inflamed with so intense a desire to make progress therein.하나님께서 돌연한 회심(conversion knvːrn)을 통해 나의 마음(mind maind)을 가르칠 수 있는(teachable tiːtibl) 구조(frame freim)에 복종하게(subdue sbdjː) 인도해 주셨습니다. 그것은(a teachable frame) 그러한 문제들에 있어서 내 인생 초기에 기대할 수 있었던 구조보다 훨씬 더 강하게(harden hːrdn) 하는 구조였습니다. 참된 경건(godliness 신앙)의 어떤 맛과 지식을 이렇게 얻게 되자(Having thus received) 나는 그 속에서(therein 그 구조 속에서) 전진하고자(progress prgres) 하는 아주 격렬한(intense intns) 열망(desire dizir 욕구)에 즉시(immediately imːditli) 불타게(inflame inflim) 되었습니다. 이 첫 번째 사건에서 칼빈은 참된 경건(true godliness)의 어떤 맛과 지식이 그를 변화시켰다고 말했습니다. 그가 언급한 경건(godliness 또는 ‘하나님 됨’)이라는 단어 godliness에 대해 『웹스터 대사전』(WEBSTER’S THIRD NEW INTERNATIONAL DICTIONARY)에서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godliness(gdliːnis): the conforming one’s life to the revealed character and purpose of God. 그 해석은 이렇습니다. 경건(godliness gdliːnis)은 ‘하나님의 계시된(revealed) 성품(character kriktr)과 목적(purpose pːrps)에 자신의 삶(one’s life)을 일치시키는(conform knfːrm) 것입니다.’ 이 경건에 대해 칼빈은 『기독교강요』 제2장 2. 하나님을 아는 것은 무엇인가 - 이 지식의 성향(WHAT IT IS TO KNOW GOD - TENDENCY OF THIS KNOWLEDGE)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For, first of all, the pious mind does not devise for itself any kind of God, but looks alone to the one true God; nor does it feign for him any character it pleases, but is contented to have him in the character in which he manifests himself always guarding, with the utmost diligences against transgressing his will, and wandering, with daring presumptions from the right path. 무엇보다도(first of all) 신앙심이 깊은(pious pis) 마음은 하나님을 아는 그 자체를 하나님의 어떤 종류로 궁리하지(devise diviz) 않고 한 참되신 하나님에게만 향합니다. 그것(하나님을 아는 것)을 좋아하는 어떤 성품(character kriktr)으로 가장하지도(feign fein) 않고 하나님의 뜻을 어기는(transgress trænsgrs) 것을 아주(utmost tmust) 부지런히(diligence dldns) 그리고 감히(daring driŋ) 건방지게(presumption prizmpn) 올바른 길(path pæθ)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항상 경계하며(guard gːrd) 하나님이 자신을 나타내시는(manifest mnfst) 그 성품 속에서(in the character)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만족합니다(content kntnt). 회심의 두 번째 사건에서 칼빈은 정신과 마음의 고통으로 말미암은 내적 분투의 오랜 과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Being exceedingly alarmed at the misery into which I had fallen, and much more at that which threatened me in view of eternal death, I, duty bound, made it my first business to betake myself to your way, condemning my past life, not without groans and tears. 영원한(eternal itːrnl) 사망(death deθ)을 생각하면(in view of) 내가 빠졌고 나를 아주 많이 위협했던 비참함(misery mzri)에 극도로 놀라게 된 나는 자신의 과거 생활을 비난하면서(condemn kndm) 반드시(duty bound) 신음하고 우는 게(not without groans and tears) 나의 첫 번째 일이었습니다. And now, O Lord, what remains to a wretch like me, but instead of defense, earnestly to supplicate you not to judge that fearful abandonment of your Word according to its deserts, from which in your wondrous goodness you have at last delivered me그리고 오 주여, 나같이 비참한 자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변호(defense difns)하는 대신에(instead of) 공적에 따라(according to its deserts) 주님 말씀의 무서운 유기(abandonment bndnmnt)로 심판하시지 말고 마지막에 주님의 놀라운 은혜(your wondrous goodness)로 거기에서 나를 제발 구원해 주시라고 열심히(earnestly ːrnistli) 애원할(supplicate splkit) 뿐이었습니다. Scholars have argued about the precise interpretation of these accounts, but most agree that his conversion corresponded with his break from the Roman Catholic Church(Ganoczy 2004, pp. 910; Cottret 2000, pp. 6570; Parker 2006, pp. 199203; McGrath 1990, pp. 6972). 학자들이 이 두 사건에 대한 정확한(precise prisis) 해석(interpretation intːrprtin)에 논란을 해왔습니다. 그러나 대부분(most moust) 칼빈의 회심이 로마 가톨릭 교회와의 결별(break breik)과 일치한다(correspond kːrspnd)는 데 동의합니다(agree grː). The Calvin biographer Bruce Gordon has stressed that “the two accounts are not antithetical, revealing some inconsistency in Calvin's memory, but rather [are] two different ways of expressing the same reality”(Bruce Gordon, Calvin, New Haven; London 2009, p. 34.).칼빈의 전기 작가 고든(Bruce Gordon)은 “두 사건(account kunt)들이 칼빈의 기억과 어떤 불일치(inconsistency nknsstnsi)가 나타나기는 하지만 정반대(antithetical æntiθtikl)의 것은 아니라는 것을 강조했습니다(stress stres).” 이신칭의 교리를 발견하는 루터 칼빈의 회심은 사도 바울이나 아우구스티누스 그리고 루터와 같이 자세하고 극적인 것으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또 언제 정확히 회심의 경험을 했느냐에 대해서도 기술하지 않고 있습니다. 다만 시편 주석 서문에서 그는 자신의 회심에 대해 ‘돌연한 회심’이란 말을 쓰고 있을 뿐입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예기치 못한 회심으로 오랫동안 완악했던 마음을 온순하게 길들이셨다고 기록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칼빈은 철저히 말씀에 순종하고 성경을 열심히 연구해 하나님을 알고자 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계시된 대로 이해하고자 했습니다. 그는 이러한 생활을 위해서 자기 부정과 자기 십자가를 지며 통회하는 생활을 했습니다. 성경은 우리를 변화시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밀라노 근처에 사는 친구의 정원을 거닐며 로마서 13장을 읽을 때 변화되었습니다. 루터도 바르트부르크 성에 머물면서 성경을 읽고 다시 태어나게 되었습니다고 고백했습니다. 존 웨슬리는 날마다 성경의 묵상을 통하여 엘더스게이트에서 열린 작은 모임에서 회심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이 제일 요긴하게 교훈하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첫째 교훈은 성경이 우리에게 어떻게 믿어야 할지를 강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무엇을 믿든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풍조가 있습니다. 무엇을 믿든지 바르게 살기만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무엇을 믿든 그것은 자유입니다. 그러나 무엇을 믿든 차이가 없다고 하는 말은 이치에 닿지 않습니다. 우물가에서 예수님은 물을 길러온 여인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요 4:23 인간이 바른 믿음이 없이도 바르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만큼 잘못된 생각은 없습니다. 성경은 우리가 어떻게 믿어야 할지를 교훈하고 있습니다.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롬 10:8-10 둘째 교훈은 하나님이 주신 믿음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이 명한 것을 행해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믿음의 올바른 행위와 실천의 열매와 결과가 없다면 참 믿음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약 2:26 우리는 무엇을 행해야 할까요. 무엇보다도 우리는 두 가지 행함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마 22:37-40 믿음이 있는 사람의 행함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2020-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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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기독교강요 영어수업
    2020-07-27
  • 기독교강요 영어수업 - Lesson II 성공의 아주 작은 기대
    Lesson II성공의 아주 작은 기대The least expectation of the success 프랑스 작가와 정치가 앙드레 말로(Andr Malraux 1901년 11월 3일 ~ 1976년 11월 23일)가 프랑스의 대표적인 인상주의 화가 르누아르(Pierre Auguste Renoir 1841년 2월 25일~1919년 12월 3일)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1차 대전이 일어나기 두어 해 전 동양어학교에 다니던 청년 말로가 남프랑스의 지중해 해변에서 바캉스를 즐기기 위해 여관에 짐을 풀었습니다. 이국적인 마르세유(Marseille)나 막 요란하기 시작한 칸느(Cannes 프랑스어)를 피해 굳이 이곳에 온 것은 고운 모래에 얕은 수심을 지닌 한적한 바다가 산악과 맞닿아 있어 훨씬 드라마틱했기 때문입니다. 여관의 벨보이가 알려주는 말에 말로는 가슴이 뛰었습니다. 르누아르가 해변에서 그림을 그리는 것을 봤다는 것입니다. 말로는 프랑스 미술을 대표하는 거장 르누아르를 어쩌면 대면하게 될 것이라는 기대를 가졌습니다. 당시 말로는 한창 문학·미술·역사에 대한 관심이 불타올랐고 동양 문화를 탐사하기 위해 중국어와 산스크리트어까지 훈련하는 중이었으며 동시대 예술가들과 교류하기 시작한 때였습니다. 하루는 아침 식사를 마친 말로가 해초 냄새로 뒤덮인 벼랑 끝 오솔길을 산책하다가 은빛 수염을 휘날리는 한 노인의 뒤통수를 봤습니다. 노인은 잔물결 이는 바다를 마주한 채 캔버스에 몰입하는 중이었습니다. 말로는 종업원이 일러준 그 대가임을 이내 알아챘습니다. 지난 세기의 역사를 한 몸으로 지탱하고 인상주의의 한 영역을 개척한 위인을 이런 휴양지에서 단둘이 조우하게 되다니 그야말로 큰 행운이었습니다. 말로는 르누아르의 그림을 보기 위해 조심조심 그의 등 가까이 다가갔습니다. 그의 집중을 흩뜨리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위대한 미술가의 제작 과정을 보기 위해서 숨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말로가 그의 캔버스에서 본 것은 바다가 아니었습니다. 그를 만나는 벅찬 놀라움은 차치하고 캔버스에서 벌어지는 사건에 말로는 아연실색했습니다. 바다가 그려져야 할 캔버스엔 어느 계곡을 배경으로 목욕하는 소녀가 그려져 있었습니다. 말로는 시선을 여러 번 그 캔버스와 그 너머 바다를 오가며 바꾸어 봤지만 그려진 장면과 그 앞의 현실은 달랐습니다. 이 일화는 회화의 상상력을 이야기할 때 곧잘 인용되곤 합니다. 르누아르는 망막한 바다에서 깊은 계곡을 상상했고 인간 부재의 환경에서 아리따운 소녀를 상상했습니다. 그리고 상상한 그대로 천연덕스럽게 그렸습니다. 열심히 대상을 집중해 그것과 다른 사실을 내놓은 셈입니다. 이 일은 르누아르의 의식과 그것에 반응하는 물감과 붓질에 의해 상식의 질서와 전혀 다른 논리로 진행되었습니다. 마치 꿈과 같습니다. 칼빈의 신학은 그의 평생에 걸쳐 사실상 변하지 않았습니다. 마찬가지로 『기독교강요』도 그 내용에 관한 한 수정을 하지 않았습니다. 이 책의 시간은 기억의 시간, 믿음의 시간, 개혁의 시간입니다. 마지막 판 서문에서 그는 그 개혁의 시간을 시작하고 마무리하는 『기독교강요』 저술 순간을 이렇게 말합니다. 이것은 그가 죽기 5년 전 1559년 8월 1일 쓴 그의 평생의 개혁주의(Protestantism prtstntizm) 회오(會悟)가 담긴 『기독교강요』 마지막 서문입니다. 뜻깊은 순간이니 기도하는 자세로 읽고 감동을 촘촘히 되새기시기 바랍니다. EPISTLE TO THE READER.[prefixed to the last edition, revised by the author.] 독자에게 드리는 서신[저자의 개정 마지막 판에 덧붙인 서문] In the first edition of this work, having not the least expectation of the success which God, in his boundless goodness, has been pleased to give it, I had, for the greater part, performed my task in a perfunctory manner(as is usual in trivial undertakings); but when I understood that it had been received, by almost all the pious with a favor which I had never dared to ask, far less to hope for, the more I was sincerely conscious that the reception was beyond my deserts, the greater I thought my ingratitude would be, if, to the very kind wishes which had been expressed towards me, and which seemed of their own accord to invite me to diligence, I did not endeavor to respond, at least according to my humble ability.성공(success skss)의 아주 작은 기대(expectation kspektin)조차 갖지 않은 이 저작(work wːrk)의 처음 판(edition idn)에 하나님께서 그의 무한하신 선하심(goodness gdnis)으로 기꺼이 그것(success)을 주셨습니다. 나는 거의 대부분 형식적인(perfunctory pːrfŋktri) 태도(manner mnr)로(평소 하찮은trivial trvil 일들을 하듯이) 내 일(task tæsk)을 수행했었습니다(perform prfːrm). 그러나 내가 감히 결코 요하지도 않았고, 아주 조금도 바라지 않았던 어떤 호의(favor fivr)를 거의 모든 경건한(pious pis) 사람들에게서 받게 된 것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그 대접(reception rispn)이 내 공적(desert)는 발음과 악센트 위치에 따라 뜻 다른데 여기서는 세 번째 것을 선택 (des·ert¹ dzrt 사막) (desert² dizːrt버리다) (desert³ dizːrt 공적)에 넘치는 대우라는 것을 정말 의식하면 할수록(more mːr the ~ ..., the ~ …하면 할수록 더욱 더 ― The ~ I know Jesus, the ~ I like him. 나는 예수님을 알면 알수록 더욱 좋아집니다) 내게 표현해 주었고 그리고 내가 노력하도록 그들이 자발적으로 부탁하는 것 같은 아주 친절한 소망들에 최소한 내 변변찮은(humble hmb) 능력에 맞는 보답이라도 하고자 노력하지(endeavor endvr) 않는다면 나의 더 큰 배은망덕(ingratitude ingrttjːd)이 되리라 생각했습니다. This I attempted not only in the Second Edition, but in every subsequent one the work has received some improvement. But though I do not regret the labour previously expended, I never felt satisfied until the work was arranged in the order in which it now appears.이것을 나는 제2판에서뿐만 아니라 모든 다음(subsequent sbsikwnt) 판에서도 그 저술에 다소 개선(improvement imprːvmnt)이 이루어지도록 시도했습니다(attempt tmpt). 그러나 내가 이전에 들인(expend ikspnd) 노동(labour libr)을 후회하지는(regret rigrt) 않을지라도 그 저작이 현재의 모습으로 정리될(arrange rind) 때까지 만족한(satisfied stisfid) 느낌을 받은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Now I trust it will approve itself to the Judgment of all my readers. As a clear proof of the diligence with which I have laboured to perform this service to the Church of God, I may be permitted to mention, that last winter, when I thought I was dying of quartan ague, the more the disorder increased, the less I spared myself, in order that I might leave this book behind me, and thus make some return to the pious for their kind urgency. 이제 나는 그 책이 모든 나의 독자들의 판단(judgment ddmnt)에 스스로 입증하리라(approve prːv) 믿습니다(trust trst). 하나님의 교회를 위한 이 봉사를 실행하기 위하여 내가 기울인 노력의 명백한 한 증거로 다음의 것을 언급할 수 있도록 허락을 구합니다(permit pːrmt). 지난겨울 나흘마다 앓는(quartan kwːrtn) 오한(ague igjuː)으로 죽는다고 생각했을 때 그 질환(disorder disːrdr)이 더 심해질수록, 이 책을 내 사후에 남길 수 있고 그들 나름의 절박한 필요(urgency ːrdnsi)를 위해 경건한 신자들에게 무언가를 보답하기(return ritːrn) 위하여(in order that) 나 자신을 더 아끼지(spare spεr) 않게 되었습니다. I could have wished to give it sooner, but it is soon enough if good enough. I shall think it has appeared in good time when I see it more productive of benefit than formerly to the Church of God. This is my only wish.나는 그것을 더 빨리(sooner suːnr) 주기를 바랄 수 있었지만 그러나 어지간히(enough inf) 좋다면 그것도 상당히(enough) 빠른 것입니다. 이 책이 하나님의 교회에 이전보다(formerly fːrmrli) 더 생산적인(productive prdktiv) 이익(benefit bnfit)을 주는 걸 내가 보게 될 때 그것이 알맞은 시기에(in good time) 출판되었습니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이것이 나의 유일한 소원(wish wi)입니다. And truly it would fare ill with me if, not contented with the approbation of God alone, I were unable to despise the foolish and perverse censures of ignorant as well as the malicious and unjust censures of ungodly men. 그리고 참으로 하나님의 허가(approbation prbin)만으로 만족하지(content kntnt) 않고, 내가 믿음이 없는(ungodly ngdli) 자들의 악하고(malicious mls) 불의한 비난들뿐만 아니라 무지한(ignorant gnrnt) 자들의 어리석고 심술궂은(perverse prvːrs) 비난(censure snr)들도 무시할(despise dispiz) 수 없었다면, 그 일이 여의치 않았을(fare fεr It has ~d ill with him. 그는 일이 여의치 않았다) 것입니다. For although, by the blessing of God, my most ardent desire has been to advance his kingdoms and promote the public good, -although I feel perfectly conscious, and take God and his angels to witness, that ever since I began to discharge the office of teacher in the Church, my only object has been to do good to the Church, by maintaining the pure doctrine of godliness, yet I believe there never was a man more assailed, stung, and torn by calumny. 왜냐하면 하나님의 축복(blessing blsiŋ)으로 나의 가장 열렬한(ardent ːrdnt) 갈망이 주님의 왕국(kingdom kŋdm)들을 전진시키고(advance ædvns) 공공의 선을 증진시키기(promote prmut) 위한 것이었고, 그 이후 내내 교회에서 교사(teacher tːtr) 직무(office (ː)fis)를 수행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내가 완전히 자각하고(conscious kns) 있음을 느끼고 그리고 하나님과 그의 천사(indl)들 증거(witness wtnis)에 전념하고(take teik ~ to study 연구에 전념하다), 경건(godliness gdlinis)의 순수한 교리를 옹호함(maintain meintin)으로써 교회에 유익을 주는 것이 나의 유일한 목적(object bdikt)이었습니다. 하지만(yet jet) 나만큼 비방(calumny klmni)으로 공격받고(assail sil) 찔리고(stung stŋ ‘sting stiŋ의 과거·과거분사’) 찢긴(torn tːrn ‘tear tεr의 과거분사’ 같은 단어이지만 발음의 차이로 뜻이 달라짐 ‘tear tir’ 눈물) 사람이 일찍이 하나도 없었다고(never nvr) 나는 믿습니다(believe bilːv). [as well by the declared enemies of the truth of God, as by many worthless persons who have crept into his Church - as well by monks who have brought forth their frocks from their cloisters to spread infection wherever they come, as by other miscreants not better than they]. 하나님의 진리의 공공연한(declared diklrd) 원수(enemy nmi)들뿐만 아니라(well wel ‘as well as’ He gave me money s ~ s advice. 그는 조언뿐만 아니라 돈도 주었습니다. ‘as ~ ... as _’ ―하느니 차라리 …하는 편이 낫다, One might s ~ throw money away s spend it in betting. 내기에 돈을 거느니 차라리 그냥 내다버리는 게 낫겠다.) 주님의 교회에 몰래 들어온 많은 무익한 사람들에 의해서도 가는 곳마다 전염병(infection)을 퍼뜨리기(spread spred) 위해 그들의 수도원(cloister klistr)들에서 성직자 옷(frock frk 여기서 ‘성직’을 의미)들을 만들어낸(bring briŋ ‘~ forth 산출하다’) 수도사들뿐만 아니라 그들이나 다름없는(not better than) 다른 이단자(miscreant mskrint)들에 의해서도 (비방을 받았습니다). After this letter to the reader was in the press, I had undoubted information that, at Augsburg, where the Imperial Diet was held, a rumour of my defection to the papacy was circulated, and entertained in the courts of the princes more readily than might have been expected. 독자에게 쓰는 이 편지가 신문(the press pres)에 실린 후에 제국(imperial impril) 의회(diet dit 식이 요법, Diet 의회: the Imperial Diet 제국 의회는 세 개의 계열로 나뉜 신성 로마 제국의 제후들이 참여한 신성 로마 제국의 입법 기관이자 자문 기관. 가장 유명한 의회로는 제국 개혁이 이뤄진 1495년 의회, 루터를 이단으로 선포한 1521년 의회)가 열리는 아우구스부르크에서 내가 교황파(papacy pipsi)로 변절(defection difkn)했다는 소문(rumour rːmr)이 퍼졌고(circulate sːrkjlit) 그리고 기대할 수 있는 것보다 더 쉽게(readily rdli) 군주(prince prins)들의 궁전(court kːrt)들에서 환대를 받았다는(entertain ntrtin) 확실한(undoubted ndautid]) 정보(information nfrmin)를 받았습니다. This, forsooth, is the return made me by those who certainly are not unaware of numerous proofs of my constancyproofs which, while they rebut the foul charge, ought to have defended me against it, with all humane and impartial judges. 이것(소문)은 정말이지(forsooth frsːθ) 내 지조(constancy kn -stnsi)에 대한 수많은(numerous njːmrs) 증거(proof pruːf)들을 확실히(certainly sːrtnli) 알지 못하는(unaware nwr) 자들이 나에 대해 지어낸 보고서(return ritːrn)입니다. 한편으로(while hwail) 그들이 비열한(foul faul) 비난(charge tːrd)으로 반박하면서도 그것에 반대하는 나를 아주 인도적(humane hjuːmin)이고 공평한(impartial impːrl) 재판관(judge dd)들과 함께 변호하는(defend difnd) 것이 당연한(ought ːt) 증거들 말입니다(대적자들의 비난으로 활용하는 증거들이 오히려 칼빈이 반대하는 주장들을 그들의 판사들과 함께 변호해 준다는 역설). But the devil, with all his crew, is mistaken if he imagines that by assailing me with vile falsehoods, he can either cool my zeal, or diminish my exertions. I trust that God, in his infinite goodness, will enable me to persevere with unruffled patience in the course of his holy vocation. Of this I give the pious reader a new proof in the present edition.그러나 마귀(devil dvl ‘교황 지칭’)가 모든 그의 패거리(crew kruː)와 함께 야비한(vile vail) 거짓말(falsehood fːlshd)들로 나를 공격하는(assail sil) 것으로 나의 열정(zeal ziːl)을 식히거나(cool kuːl) 내 노력(exertion igzːrn)들을 감소(diminish dimni)시킬 수 있다고 상상한다면(imagine imdin) 착각(mistaken mistikn ‘mistake’의 과거분사)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무한하신(infinite nfnit) 선하심(goodness gdnis) 가운데 내가 그의 거룩하신 소명(vocation voukin)을 수행하는 동안에(in the course of) 흔들리지 않는(unruffled nrfld) 인내로 견딜(persevere pːrsvr) 수 있게 해 주실 것이라고 나는 믿습니다(trust trst]). 이것에 대해(Of this) 나는 경건한(pious pis) 독자에게 『기독교강요』 현재(pres·ent prznt) 판에서 새 증거를 드리고자 합니다. I may further observe, that my object in this work has been, so to prepare and train candidates for the sacred office, for the study of the sacred volume, that they may both have an easy introduction to it, and be able to prosecute it with unfaltering step; for, if I mistake not, I have given a summary of religion in all its parts, and digested it in an order which will make it easy for any one, who rightlycomprehends it, to ascertain both what he ought chiefly to look for in Scripture, and also to what head he ought to refer whatever is contained in it. 더 나아가(further fːrðr) 나는, 이 저술에 있어서의 나의 목적(object bdikt)이, 성직(聖職) 후보자(candidate kndidit)들이 신성한(sacred sikrid) 두루마리(volume vljuːm) 공부를 위해 그것(성경)의 쉬운 개론(introduction ntrdkn)에 접할 수 있고, 그리고 흔들리지 않는(unfaltering nfːltriŋ) 걸음으로 그것을 실행할(prosecute prskjːt) 수 있게 그들을 준비시키고(prepare pripr) 훈련시키기 위한 의견이라고 해도(observe bzːrv) 좋습니다. 왜냐하면, 내가 실수한(mistake mistik) 것이 아니라면, 기독교(religion)의 모든 분야의 개요(槪要)를 나는 제시해 주었고, 그리고 그것(성경)을 바르게 파악하는(comprehend kmprihnd) 사람을 위해 그가 성서(scripture skrptr)에서 주로 무엇을 찾아야 하고, 성경 속에 담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 어떤 표제로 언급해야 하는지도 확인하게 해 주기 위하여 성경이 어렵지 않게 차례대로 요약해(digest daidst) 주었기 때문입니다. Having thus, as it were, paved the way, as it will be unnecessary, in any Commentaries on Scripture which I may afterwards publish, to enter into long discussions of doctrinal points, and enlarge on commonplaces, I will compress them into narrow compass. 이렇게 해버리고 나니, 이를테면(as it were), 불필요하게 될 것이지만, 내가 나중에 출판할 수도 있는 어떤 성경 주석서(commentary kmntri)들에서 다룰 교리적(doctrinal dktrnl) 논점(discussion diskn)들에 대한 긴 토론(discussion diskn)들에 들어가고 그리고 내가 좁은(narrow nrou) 범위(compass kmps)로 압축하게(compress kmprs) 될 인용구(commonplace kmnplis)들에 대해 상술할(enlarge enlːrd)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습니다(pave the way 길을 깔다). In this way much trouble and fatigue will be spared to the pious reader, provided he comes prepared with a knowledge of the present work as an indispensable prerequisite. The system here followed being set forth as in a mirror in all my Commentaries, I think it better to let it speak for itself than to give any verbal explanation of it. 이렇게 하여 경건한 독자는 많은 수고(trouble trbl)와 노고(fatigue ftːg)를 아끼게(spare spεr) 될 것입니다. 만일(provided prvidid) 그가 없어서는 안 될(indispensable ndispnsbl) 기초 필수 과목(prerequisite prirkwzit)으로 현재 저서『기독교강요』의 지식을 갖추고 온다면 말입니다. 모든 나의 주석들에서 거울에서처럼(as in a mirror) 분명하게 설명하게 될 다음의 체계(system sstm)는 그것에 대한 말의(verbal vːrbl) 설명(explanation ksplnin)보다 그것이 스스로 말하게 하는 게 더 낫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Farewell, kind reader: if you derive any benefit from my labours, aid me with your prayers to our heavenly Father. 친절한 독자여 안녕(farewell frwl). 당신이 내 노작(labour libr)들에서 어떤 이익을 얻는다(prayer prεr)면 우리의 하늘의(heavenly hvnli) 아버지께 당신의 기도(prayer prεr)로 나를 도와주시기 바랍니다. Geneva, 1st August 15591559년 8월 1일 제네바 이렇게 죽기 5년 전 『기독교강요』 마지막 판 서문에서 칼빈 자신의 모든 심정을 털어놓은 뒤 마지막 개정 서문을 쓰고 독자들에게 안녕(Farewell, kind reader)이라는 인사까지 합니다. 그러나 칼빈은 무언가 아쉬움이 남아서인지 추신(追伸)과 더불어 아우구스티누스의 글쓰기 경구(警句)를 덧붙입니다. The zeal of those whose cause I undertook, has swelled a short defense into a book.내가 맡아서 돌보는 사람들의 주장(cause kːz)을 위한 열정(zeal ziːl)이 간단한 변호(defense difns)를 부풀려 한 권의 책이 되게 하였습니다. “I profess to be one of those who, by profiting, write, and by writing profit.”-Augustine, Epist. 7. “나는 이익(profit prfit)을 얻음으로 글을 쓰고(write rait), 그리고 글을 씀으로 이익을 얻는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임을 고백합니다(profess prfs).” -아우구스티누스 서한집 7. 칼빈의 추신은 믿음으로 신자들이 당하는 오해와 어려움을 변호하다보니 그게 한 권의 책이 됐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열심히 진실하게 변호하고 옹호했으면 우리 개혁주의의 경전이 될 『기독교강요』를 저술해 이 세상에 남기고 전하게 됐을까요. 마치 르누아르가 망막한 바다에서 깊은 계곡을 상상했고 인간 부재의 환경에서 아리따운 소녀를 상상하고 상상한 그대로 천연덕스럽게 그렸는데 말로가 보기에도 놀랄 인상주의를 대표하는 작가의 작품이 나온 것처럼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 개혁신학의 시조 칼빈 자신도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을 빌어 믿음의 글을 쓰는 것이 얼마나 유익된 것임을 고백한 것입니다. 너무도 감동적인 경구라 다시 한 번 더 인용합니다. 외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대학이나 기업이 표방하는 모토 중에 영어로 된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아마도 ‘영어로 말한 것은 무엇이든 지성적인 것처럼 보인다’는 생각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렇듯 다른 사람에게 영어로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을 들려준다면 그 사람은 감격하고 당신을 올려다볼지도 모를 일입니다. “I profess to be one of those who, by profiting, write, and by writing profit.”“나는 이익을 얻음으로써(by bai profiting prfitiŋ ‘바이 프라휘팅’) 쓰고 그리고 씀으로써(by bai writing raitiŋ ‘바이 라이팅’) 이익을 얻는(profit prfit ‘프라휘트’) 사람들(those ðouz ‘도우즈’) 가운데 한 사람임을 고백합니다(profess prfs ‘프러훼스’).” 『기독교강요 영어수업』을 읽는 여러분도 아우구스티누스처럼 ‘이익을 얻음으로써(by profiting) 쓰고 씀으로써(by writing) 이익을 얻는’ 그런 목사나 신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칼빈은 『기독교강요』를 저술하면서 성공의 아주 작은 기대(the least expectation of the success)도 갖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세계를 개혁주의로 변화시키는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여러분도 이 책을 통해 아주 작은 성공의 기대도 없이 출발하실 수 있지만 칼빈처럼 노력하는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로 좋은 열매를 얻기를 바랍니다. 2020-07-20
    • G.QT
    • 기독교강요 영어수업
    2020-07-20
  • 기독교강요 영어수업 - Lesson I 칼빈은 누구
    Lesson I칼빈은 누구Who is Calvin 내가 처음 다닌 학교는 칠판도 없고 숙제도 없고 벌도 없는 주일학교였습니다. 교회와 집 사이는 후다닥 걸어서 가면 단 오 분 거리 비바람이 불고 눈보라가 쳐도 걱정이 없는 늘 포근하고 선물도 심심찮게 주는 학교였습니다. 나는 내가 살아가면서 마음 깊이 새겨 두어야 할 귀한 것들을 이 주일학교에서 배웠습니다. 주일 저녁 텅 빈 교회 마당 구석에 한 아이가 쪼그리고 앉아 있습니다. 산 위에서 보면 교회가 나뭇가지에 달린 하얀 박꽃입니다. 새장처럼 얽어 놓은 창문에 참새 같은 아이들이 쏙쏙 얼굴을 내밉니다. 분반 공부 끝나면 오늘 외운 성경 한 절 오늘 배운 찬송 한 곡 오늘 받은 과자 한 봉지로 불룩한 마음 교회 창밖을 보면 벚나무에 새 한 마리가 앉아있습니다. 주일학교엔 숙제도 시험도 없습니다. 고함 한번 치지 않는데 회초리 한번 들지 않는데 하나님의 말씀으로 온갖 꽃나무 어린 싹들 찬송하며 자랍니다. 그리고 때 되면 열매 맺어 서로 나누며 믿음의 제 몫을 합니다. 나는 교인 누구나 목사님의 말을 듣는 게 좋아서 목사가 되었고 새벽기도가 좋아서 목사가 되었습니다. 목사님 그 한 마디가 좋아서 가진 것 다 주어도 아깝지가 않습니다. 목사님 그 한 마디 외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습니다. 목사님 그 한 마디가 좋아서 평생을 웃습니다. 믿음 향기가 가득한 교회에서. 제 동창 친구 하나는 대학에 갈 때 영어가 싫어서 수학과에 진학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대학에서 수학을 전공하다보니 교과서가 전부 영어 원서였습니다. 영어는 라틴어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만 문법이 꽤 복잡합니다. 간단한 예로 be 동사의 경우만 보더라도 그 복잡함에 머리가 아플 겁니다. 대략 이렇습니다. ⑴ 변칙(變則)동사(anomalous verb)의 하나로 어형(語形)변화에 특징이 있음.⑵ 의문문을 만드는 데 주어와 도치되며 조동사 do를 쓰지 않음: He is busy.→Is he busy?⑶ 부정문으로 할 때에도 do를 안 씀: That is nice.→That is not 〔isn’t〕 nice. 다만, 명령형에서는 흔히 do를 쓰며, do를 쓰지 않는 것은 옛 형태: Don’t be a fool. 바보 같은 짓을 하지 마라. Be not afraid. 《고어》 두려워하지 말지어다.⑷ 강조할 때 do를 사용치 않고 be 동사를 세게 발음함: She is [-z-] kind, indeed. 그녀는 정말 친절합니다. 다만, 긍정(肯定) 명령형을 강조할 때에는 do를 씀: Do be gentle to them. 제발 그들에게 부드럽게 대해 주게나. be 동사의 문법 일부가 이러니 사람들은 지레 겁을 먹고 영어 공부의 가시적인 성과를 보기도 전에 이미 질려버립니다. 하지만 이 고비들을 잘 넘기고 복잡한 문법 체계를 어느 정도 익히고 나면 확실히 공부하는 훈련이 됩니다. 어렵고 미묘한 문제와 마주해도 별로 힘들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오래 해보면 깨닫게 되겠지만 영어 공부는 평범한 두뇌를 공부에 최적화된 두뇌로 활성화시키고 사고 체계를 넓혀줍니다. 실제로 영어가 필요한 진짜 이유는 영문 자료를 접하기 위해서입니다. 영어를 사용하는 인구는 대략 5-10억 명 정도로 추산됩니다. 이들은 대부분 선진국 국민이거나 그렇지 않더라도 각 나라의 엘리트들입니다. 중요한 것은 이들이 생산해 내는 정보입니다. 신문, 잡지, 도서, 학계, 인터넷 등을 통해 영어 사용 인구가 생산해내는 정보는 질적으로도 양적으로도 엄청납니다. 그러니 우리가 현대를 살면서 영어를 떠날 수는 없습니다. 칼빈의 『기독교강요』를 읽는 사람은 개혁주의 신봉자를 의미합니다. 그리고 『기독교강요』를 영어 번역본을 통해 그 진수(眞髓)를 맛보고자 하는 사람은 뛰어난 능력이 있거나 교계에서 지도적 입장에 있는 엘리트(elite eilːt) 개혁주의자이거나 그것을 지향하는 신자일 것입니다. 개혁주의의 선구자(forerunner)는 누구입니까. 칼빈(John Calvin)입니다. 칼빈은 누구입니까. 인터넷 시대 누구나 편집할 수 있고 5,693,164 영어 항목의 무료 백과사전 Wikipedia(하와이어로 빠른‘quick’을 의미하는 ‘wiki’와 백과사전을 의미하는 ‘encyclopedia’가 합쳐진 이름)는 칼빈에 대해 이렇게 서술했습니다. John Calvin(French: Jean Calvin; born Jehan Cauvin; 10 July 1509 27 May 1564) was a French theologian, pastor and reformer in Geneva during the Protestant Reformation. He was a principal figure in the development of the system of Christian theology later called Calvinism, aspects of which include the doctrines of predestination and of the absolute sovereignty of God in salvation of the human soul from death and eternal damnation, in which doctrines Calvin was influenced by and elaborated upon the Augustinian and other Christian traditions. Various Congregational, Reformed and Presbyterian churches, which look to Calvin as the chief expositor of their beliefs, have spread throughout the world. 칼빈(John Calvin: 프랑스 이름 쟝 칼빈 Jean Calvin; 兒名 제앙 코뱅 Jehan Cauvin; 1509년 7월 10일 1564년 5월 27일)은 개신교 종교개혁(Protestant Reformation) 기간 제네바의 프랑스인 신학자(theologian θːludin) 목회자(pastor pstr) 개혁가(reformer rifːrmr)였습니다. 그는 나중 칼빈주의(Calvinism klvinizm)라고 불리는 기독교 신학의 체계를 발전시킨 주요 인물이 되었습니다. 칼빈주의는 죽음과 영원한 저주로부터 인간 영혼의 구원에 하나님의 예정(predestination pridstnin)과 절대(absolute bslːt) 주권(sovereignty svrinti) 교리들을 포함시키는 견해(aspect spekt)들입니다. 그 견해들은 칼빈이 아우구스티누스주의(Augustinian)와 다른 기독교 전통들의 영향을 받고 잘 다듬은 것들입니다. 세계로 퍼져나간 회중교회 개혁교회 장로교회 등의 여러 교파가 칼빈을 그들 신조(belief bilːf)의 대표(chief tiːf) 해설자(expositor ikspztr)로 생각합니다. Calvin was a tireless polemic and apologetic writer who generated much controversy. He also exchanged cordial and supportive letters with many reformers, including Philipp Melanchthon and Heinrich Bullinger. In addition to his seminal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Calvin wrote commentaries on most books of the Bible, confessional documents, and various other theological treatises. 칼빈은 많은 논쟁을 일으킨 지칠 줄 모르는 논증(polemic plmik)과 변증(apologetic pldtik) 저술가(writer ritr)였습니다. 그는 조직신학자 멜란히톤Philipp Melanchthon(개신교 최초의 독일 루터교 조직신학자)과 불링어Heinrich Bullinger(16세기 스위스 종교개혁가)를 포함해 많은 종교개혁가들과 서신들도 주고받았습니다. 칼빈은 가장 독창성이 풍부한(seminal smnl) 『기독교강요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외에도 거의 대부분의 성경 주석(commentary kmntri)들과 신앙고백(confessional knfnl) 문서(document dkjmnt)들 및 다양한 신학 논문(treatise trːtis)들도 저술했습니다. Originally trained as a humanist lawyer, he broke from the Roman Catholic Church around 1530. After religious tensions erupted in widespread deadly violence against Protestant Christians in France, Calvin fled to Basel, Switzerland, where in 1536 he published the first edition of the Institutes. In that same year, Calvin was recruited by Frenchman William Farel to join the Reformation in Geneva, where he regularly preached sermons throughout the week; but the governing council of the city resisted the implementation of their ideas, and both men were expelled. At the invitation of Martin Bucer, Calvin proceeded to Strasbourg, where he became the minister of a church of French refugees. He continued to support the reform movement in Geneva, and in 1541 he was invited back to lead the church of the city. 원래 인문주의(humanist hjːmnist) 법률가(lawyer lːjr)로 훈련받은 그는 1530년 경 로마 가톨릭 교회와 결별했습니다. 프랑스에서 개신교 그리스도인들을 반대하는 대폭적인 격렬한 폭력 사태로 종교적 긴장이 촉발된 후 칼빈은 스위스 바젤로 피신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27살 되는) 1536년 『기독교강요』 초판을 발행했습니다. 같은 해 칼빈은 제네바 종교개혁에 동참하라는 프랑스인 파렐(William Farel)의 권유를 받았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빠지지 않고 주일 내내 설교를 했습니다. 그러나 제네바 시의회는 그들 사상이 시행(implementation)되는 것을 거부했고 두 사람을 추방했습니다. 부서(Martin Bucer 16세기 독일 스트라스부르의 종교개혁가)의 초청으로 칼빈은 스트라스부르(Strasbourg)로 내려갔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프랑스 피난민 교회의 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제네바 개혁 운동을 계속 지원했습니다. 그리고 1541년 제네바 교회로 돌아와 지도해 달라는 청빙을 받았습니다. Following his return, Calvin introduced new forms of church government and liturgy, despite opposition from several powerful families in the city who tried to curb his authority. During this period, Michael Servetus, a Spaniard regarded by both Roman Catholics and Protestants as having a heretical view of the Trinity, arrived in Geneva. He was denounced by Calvin and burned at the stake for heresy by the city council. Following an influx of supportive refugees and new elections to the city council, Calvin's opponents were forced out. Calvin spent his final years promoting the Reformation both in Geneva and throughout Europe. 돌아온 뒤 칼빈은 그의 권위를 꺾으려는 그 도시의 몇몇 세도 가문들(several powerful families)의 반대를 무릅쓰고 새로운 형식의 교회 정치(church government)와 예배 모범(liturgy)을 소개했습니다. 이 시기에 로마 가톨릭과 개신교 양쪽 다 이단 사상이라고 생각하는 삼위일체(the Trinity)론을 지닌 스페인 사람(Spaniard spnjrd) 세르베투스(Michael Servetus)가 제네바에 왔습니다. 그는 칼빈의 탄핵을 받고(denounce dinuns) 시의회의 이단(heresy hrsi) 판결로 화형을 당했습니다(burned at the stake). 우호적인 피난민들의 유입(influx nflks)과 시의회의 새 선거들이 이어져 칼빈의 반대자들이 밀려나게 되었습니다. 칼빈은 종교개혁(the Reformation rfrmin)을 제네바와 유럽 전역에 촉진시키면서 만년(final years 1564년 5월 27일 55세 소천)을 보냈습니다. Geneva 돈키호테가 그의 충실한 시종에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여보게, 내 친구 산초. 세상을 바꾸는 것은 유토피아도 광기의 행동도 아니야. 그건 정의라네.” 돈키호테처럼 저도 제 후배 목사와 신학생들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습니다. "여보게, 내 동료와 후배들. 칼빈이 개혁주의로 세상을 바꾼 것은 사상도 행동도 아니네. 그건 정의로우신 하나님의 말씀(the Word of Righteous God)이라네. 2020-07-12
    • G.QT
    • 기독교강요 영어수업
    2020-07-12
  • 기독교강요 영어수업 1 - 들어가는 글
    베이지색이 섞인 부드러운 느낌의 분홍색 입술을 가졌을 안나 카레니나가 젊은 귀족 장교 브론스키에 대한 믿음의 상실로 절망합니다. 그녀가 실연(失戀)에 마음을 잃고 몸을 던진 기차는 한 번 출발하면 종착점을 향해 달려갈 수밖에 없는 동물(動物)입니다. 그러나 그녀와 달리 세상에서 소망을 잃었지만 주님 은혜로 믿음을 가진 교인들이 모인 교회도 믿음과 소망이 뒤엉키는장소이자 신자들을 싣고 한 번 출발하면 하나님 나라 종착역 까지 달려갈 수밖에 없는 구원열차(救援列車)입니다. S. 프로이트의 기본원리에서 출발하면서도 생물학적 충동보다는 환경과 사회적 상황이 개인 성격의 많은 부분을 결정한다는 여성심리학자 카렌 호니(Karen Horney 1885~1952)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환자가 치료자를 찾는 이유는 신경증을 치유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스스로를 완성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듯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고 따르는 신자는 스스로의 성화(聖化)를 완성하기 위해 믿음의 길을 걷습니다. 그리고 매 순간 거듭 태어나기 위해 날마다 성경을 읽고 기도하며 하나님을 닮은 나 자신과 만나기 위해 끝없이 노력합니다. 그 소중한 하루하루가 모여 ‘신자다움’과 ‘내 믿음의 나이’를 만들어 갈 것입니다. 사실 이 책은 영어를 가르치는 책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 책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우선 성경대로 살고 싶은 교인이라면 그리고 그 삶을 전하고 싶은 전도자라면 개혁신학의 모태 『기독교강요』를 읽고 개혁주의 사상을 익히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 다음 현대 신앙인이라면 알아두면 좋을 진리를 『기독교강요』 영어수업을 통해 인생을 공부하고 싶게 만들고 스스로 배운다는 것을 진지하게 돌아보게 만들기 위한 책입니다. 영어는 그 자체의 학습이 목적이기보다는 하나의 도구로서의 목적이 더 강하기 때문입니다. 세네카는 ‘학교를 위해서가 아니라 삶을 위해서 배운다’고 말했습니다. 시편 기자는 시편 8편 4절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질문을 던집니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 사람이란 무엇일까요.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니라 창 2:7 이렇게 생령으로 만들어진 사람은 아담과 이브의 타락 이후 동물의 본성까지 내려갈 수 있는 동시에 성자의 영혼까지 올라갈 수 있는 존재입니다. 사람은 동료 인간을 죽이기 위하여 가스실을 만든 존재이면서 그 죽음의 가스실로 들어가면서 머리를 똑바로 들고 주기도문을 외우거나 찬송가를 부를 수 있는 존재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입니다. 에덴을 나온 이래 사람은 살기 위한 목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목적이란 이루거나 도달하려고 하는 목표나 방향입니다. 사람의 목적은 살기 위한 것입니다. 이것을 잊어버리고 사는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께서 간명하게 일깨워주십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마 16:26 이 진리를 깨우친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무엇이든지 자신에게 유익하던 것을 다 해로 여길뿐더러 모든 것을 포기하고 배설물로 여긴다고 고백합니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지 영원히 사는 부활에 이르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아는 것만이 자신에게 유익하다고 선언합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서 난 의라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빌 3:7-11 바로 이러한 바울의 삶의 태도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영화롭게 한다는 것은 어떤 것을 더 중요하게 여기거나 더 존경하고 숭배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은 인생의 다른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더 중요하게 여기거나 하나님을 더 존경하고 숭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즐거워한다거나 즐기는 것은 무엇을 좋아하여 거기에 마음을 쏟는 것입니다. 음악을 즐기는 사람은 음악을 좋아하고 음악에 마음을 쏟게 됩니다. 이것은 쾌락을 추구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쾌락은 욕망을 만족시키는 즐거움입니다. 그런데 이 쾌락은 근본적으로 삶의 성취목적이 될 수 없습니다. 쾌락이란 목적을 위해 노력할 때 충족되고 얻게 되는 부차적 효과입니다. 즉 쾌락은 사람이 삶의 의미를 실현하고 삶의 가치를 인식하게 되면 자연히 얻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이 쾌락을 얻는 것을 자기의 목표로 삼으면 반드시 실패하게 됩니다. 그 까닭은 쾌락은 목표의 대상이 아니라 목표의 부산물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알기 이전에 자신에게 유익하던 것을 배설물과 같은 해로운 것으로 여기고(빌 3:8) 하나님과 그의 뜻을 추구하기 위하여 언제나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하는 삶의 습관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사람이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는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는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성경이 가르치는 구원의 진리를 배워야 합니다. 즉 인생의 목적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알아야 합니다. 제네바의 칼빈(John Calvin 1509년~1564)은 죽기 5년 전 1559년 8월 1일 자신의 라틴어판 저서 『기독교강요』(Institutio Christianae Religionis)를 위해 쓴 ‘저자의 개정 마지막 판에 덧붙인 서문’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I may further observe, that my object in this work has been, so to prepare and train candidates for the sacred office, for the study of the sacred volume, that they may both have an easy introduction to it, and be able to prosecute it with unfaltering step; 이 저술에 있어서 나의 목적은 신성한 두루마리(the sacred volume 성경) 공부를 위하여 성직후보자들(聖職候補者 candidates for the sacred office)을 준비시키고 훈련시키기 위해(so to prepare and train) 계속 말하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들이 그것(성경)의 쉬운 개론(槪論)에 접할 수 있고 단호하게(with unfaltering step) 그것을 적용할(prosecute)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칼빈의 말처럼 그의 저서 『기독교강요』를 공부하면 성경의 지식과 적용의 힘이 늘어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믿음의 삶과 성직자로서의 능력을 배가시켜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칼빈의 저서가 모태인 칼빈주의 교회의 특성과 유익은 한 가정의 모계 가족과 부계 가족의 종교 내력을 따지지 않는 식구 간의 유대(紐帶)와 결합에 있습니다. 칼빈은 신자들에게 하나님 말씀의 순종을 가르치고, “우리는 풍부하든 풍부하지 않든 사람들을 돌보아야 한다”며 신자들이 서로 협력하며 살게 했습니다. 총신대 시절 꿈에 그리던 『기독교강요』 원서 강독시간이 되었습니다. 두 권으로 된 『기독교강요』 두툼한 영어 원서를 당시 형편으로 거금을 들여 구입했습니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한 학기 내내 담당 교수는 미국 유명 대학교에서 박사까지 되신 분인데 무슨 이유인지 두 페이지밖에 나가지 못했습니다. 그는 교수이신데 학교 밖의 일로 늘 바쁘셨고 정작 시간이 되면 영어 원문 해석이 와 닿지를 않고 다른 이야기만 했습니다. 그 시간 기억이라고는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말밖에 남은 게 없습니다. 그래 하는 수 없이 혼자서 『기독교강요』 영역본 두 권을 붙들고 읽고 또 읽어 1년 반 만에 독파했습니다. 그 뒤 어지간한 영어 원서는 쉽게 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강요』는 다시 보지 않아 독파할 때도 미흡하기 그지없었는데 그 내용은 다 흘러가버린 아련한 추억이 되어버렸습니다. 종교개혁 500주년을 기해 칼빈의 『기독교강요』의 핵심을 간추려 영한(英韓) 역본으로 내게 되었습니다. 수업의 종류로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수업은 주고 받는 授를 써서 교사가 학생에게 지식이나 기능을 가르쳐 주는 수업(授業)이 있습니다. 둘째 수업(修業)은 닦을 修를 써서 작가 수업처럼 혼자서 교재 등을 이용해 기술이나 학업을 스스로 익히고 닦는 수업입니다. 본서 『기독교강요 영어수업』은 둘째 수업(修業) 방식을 위한 책입니다. 즉 혼자서 『기독교강요』의 영어역(영어역본은 칼빈이 쓴 『기독교강요』의 원본 라틴어나 프랑스어를 번역한 것)과 한글역을 대조해 가며 우리를 성경의 삶으로 이끄는 칼빈의 개혁주의 사상을 깨우치는 한편 영어 원서를 읽고 영어 구조를 익히기 위해 『기독교강요 영어수업(修業)』이라는 제목의 책을 펴내게 되었습니다. 내 후배 목사나 후보생들에게 그것이 가능하게 하기 위해 영어 번역에 있어서 가능한 문장의 순서에 따른 직역을 하고 교리적인 설명을 덧붙였습니다. 덧붙여 본서의 전반부 11과까지는 영어 원문 읽기의 편이성과 습관을 익히기 위해 필요한 단어마다 발음을 달았습니다. 영어의 기본 중의 기본이 발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기독교강요』(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에서 강요(綱要)로 번역된 단어 institute[nsttjːt (단기의) 강습회, 규칙, 관습, 원리가 어미에 s가 붙어 institutes 복수가 되면 (법률의) 적요(摘要), 원리의 강요(綱要)를 뜻합니다. 다시 말해 『기독교강요』는 기독교에 대한 강령(綱領) 즉 기독교의 으뜸이 되는 진리의 큰 줄거리를 서술한 책입니다. 먼저 칼빈은 제1권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지식에 대하여(Of The Knowledge of God THE Creator)’ 제1장 ‘서로 연결된 하나님과 우리 자신에 대한 지식(the knowledge of God and ourselves mutually connected)’ - 그 연결의 본질(nature of the connection)에서 ‘하나님과 인간의 성호 관계’를 다룹니다. 이제 칼빈이 개혁주의 체계를 세운 『기독교강요』 라틴어판을 영어로 번역한 역본의 일부분을 읽으면서 그의 사상과 영어의 맛을 보도록 합시다. 이 영역본은 가장 최근의 『기독교강요』 1960년 영역판(Philadelphia, Penna. 1960,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in Two Volumes. Translated by Ford Lewis Battles. Philadelphia: Westminster Press)입니다. 이것은 『기독교강요』 라틴어 원본을 베틀즈(Ford Lewis Battles)가 번역하고 맥닐(John T. McNeill)이 편집하고 웨스트민스터 출판부가 출판한 것입니다. 학자들이 이 영역본을 일반적으로 가장 권위 있는 것으로 여깁니다. 교회의 역사는 언제나 전진의 역사입니다. 예수님은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을 향하여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말씀하셨습니다. 계속 전진할 것을 이르셨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유대로 사마리아로 전진했습니다. 다시 유럽으로 아시아로 전 세계 교회로 전진했습니다. 2020-07-06
    • G.QT
    • 기독교강요 영어수업
    2020-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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