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3-28(목)

G.QT
Home >  G.QT  >  기독교강요 영어수업

실시간뉴스
  • 기독교강요 영어 수업_ 칼빈의 마지막 안녕
    Lesson XXIII 칼빈의 마지막 안녕 Calvin’s Final Farewell 칼빈의 만년(15551564)에 그의 권위는 실제로 겨룰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는 종교개혁자로서 마틴 루터(Martin Luther)와 다른 국제적인 평판을 누렸습니다. 칼빈의 전기 작가 파커(Parker 2006, pp. 161164)는 그의 마지막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Last illness In late 1558, Calvin became ill with a fever. Since he was afraid that he might die before completing the final revision of the Institutes, he forced himself to work. The final edition was greatly expanded to the extent that Calvin referred to it as a new work. The expansion from the 21 chapters of the previous edition to 80 was due to the extended treatment of existing material rather than the addition of new topics. Shortly after he recovered, he strained his voice while preaching, which brought on a violent fit of coughing. He burst a blood-vessel in his lungs, and his health steadily declined. He preached his final sermon in St. Pierre on 6 February 1564. On 25 April, he made his will, in which he left small sums to his family and to the collge. A few days later, the ministers of the church came to visit him, and he bade his final farewell, which was recorded in Discours d'adieu aux ministres. He recounted his life in Geneva, sometimes recalling bitterly some of the hardships he had suffered. Calvin died on 27 May 1564 aged 54. At first his body lay in state, but since so many people came to see it, the reformers were afraid that they would be accused of fostering a new saint's cult. On the following day, he was buried in an unmarked grave in the Cimetire des Rois. The exact location of the grave is unknown; a stone was added in the 19th century to mark a grave traditionally thought to be Calvin's. 1558년 칼빈은 열병을 앓게 되었습니다. 그는 『기독교강요』 마지막 판을 완성하지 못하고 죽을까봐 두려웠기 때문에 일에 매달렸습니다. 마지막 판은 그것이 새 저작이라고 말했을 정도로 굉장히 많은 양이 늘어났습니다. 이전 판의 21장에서 새로운 주제들을 더하는 정도가 아니라 현존하는 자료를 광범위하게 다루어 80장으로 확대되었습니다. 병 회복 직후라 칼빈은 발작적인 심한 기침을 유발하는 설교를 할 때 목소리를 억제했습니다. 그는 폐의 피를 한 통이나 쏟았고 그의 건강은 꾸준히 나빠졌습니다. 그는 1564년 2월 6일 세인트 피에르 교회에서 마지막 설교를 했습니다. 4월 25일 그는 가족과 대학에 약간의 돈을 남기는 유언장을 작성했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 교회 목사들이 그를 방문했고 목사들과의 고별 대화(Discours d'adieu aux ministres)에 기록된 마지막 인사를 전했습니다. 그는 제네바에서의 그의 생활을 조목조목 말하면서 그가 겪은 고통과 역경을 간간히 씁쓸하게 회상하기도 했습니다. 칼빈은 1564년 5월 27일 54세의 나이로 죽었습니다. 처음에 그의 유해가 공개적으로 안치되었지만 너무 많은 사람들이 그 묘지를 보러 오는 바람에 개혁자들이 새로운 성자숭배를 조장한다는 비난이 생길까 두려웠습니다. 그 다음 날 그는 시메티에르 데 루아(Cimetire des Rois) 공동묘지에 표시가 없는 무덤에 묻혔습니다. 무덤의 정확한 장소는 아무도 모릅니다. (300여년이 지난) 19세기에 이르러서야 전통적으로 칼빈의 무덤이라고 생각하는 무덤 하나에 돌을 하나 세웠습니다. 칼빈은 느보산의 모세처럼 그 무덤을 아는 자 없이 죽었습니다. 모세가 모압 평지에서 느보산에 올라 여리고 맞은편 비스가산 꼭대기에 이르매 여호와께서 길르앗 온 땅을 단까지 보이시고 또 온 납달리와 에브라임과 므낫세의 땅과 서해까지의 유다 온 땅과 남방과 종려의 성읍 여리고 골짜기 평지를 소알까지 보이시고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이는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여 그 후손에게 주리라 한 땅이라 내가 네 눈으로 보게 하였거니와 너는 그리로 건너가지 못하리라 하시매 이에 여호와의 종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어 벧브올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골짜기에 장사되었고 오늘까지 그 묘를 아는 자 없으니라 신명기 34:1-6 2021-02-08
    • G.QT
    • 기독교강요 영어수업
    2021-02-08
  • 기독교강요 영어 수업 - 제십 계명 탐욕
    Lesson XXII 제십 계명 탐욕 Tenth Commandment Greed 제발 좀 더 주세요. 올리버 트위스트는 성이 안 찬 표정으로 접시를 내밀었습니다. 무엇이라구. 범블은 도저히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올리버를 노려보았습니다. 올리버 트위스트(Oliver Twist)는 1837년에 출판된 찰스 디킨스의 소설이 묘사한 굶주림은 사람을 용감하게 만듭니다. 즉 굶주림은 고아원에 있는 소년들처럼 필사적이고 무모하게 만듭니다. 이삭의 쌍둥이 아들 에서는 허기를 메우기 위해 죽 한 그릇에 자신의 장자 상속권도 동생 야곱에게 팔았습니다. 음식에 굶주린 사람이 용감해지듯 돈에 허기진 사람도 필사적이고 무모하게 돈을 갈구합니다. 중국 공산당이 정부를 수립한 이래 최악의 부패 스캔들로 불리는 화룽자산그룹의 라이샤오민전 회장 집에서 무려 3톤에 달하는 현금이 발견됐습니다. 중국 매체들은 역대 발견된 현금 은닉 재산 중 최고액이라고 전했습니다. 주요 일간지에 실린 기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중국 경제 매체 차이신(財新)은 2018년 8월 10일 중국 최대 자산관리회사인 화룽자산그룹의 전 회장 라이 샤오민의 수사 뒷얘기를 전했다. 이달 초 있었던 화룽그룹의 비공개회의를 통해 알려진 것이다. 라이 전 회장은 지난 4월 부패 혐의로 수사를 받으면서 회장직에서 사임했다. 중국 사정 당국이 라이 전 회장 소유의 집 여러 곳을 급습했을 때 방 곳곳에 쌓여 있던 현금 다발을 발견했다고 한다. 한곳에 모으면 무려 3톤에, 부피로는 3㎥에 달하는 양이었다. 중국 100위안(약 1만6500원)짜리 지폐 한 장의 무게는 약 1.15그램이다. 위안화뿐 아니라 외화도 섞여 있어 총 금액은 2억7000만위안(약 444억4000만원)이 넘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자택에 은닉한 재산의 최고액을 경신한 것이다. 이전까지는 2014년 4월 국가에너지국 석탄사(司)의 웨이펑위안 부사장(副司長) 집에서 발견된 2억3000만위안(약 378억6000만원)이 최고액이었다. 당시 현장에서 수사관들이 지폐를 세기 위해 지폐계수기 16대를 동원했는데 이 중 4대가 과열로 고장이 났을 정도였다. 중국 매체들은 라이 전 회장의 집에서 3t 분량의 현금을 압수했지만 이는 전체 횡령 금액 중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고 전했다. 라이 전 회장은 금융업계의 요직을 역임한 인물로 그가 화룽그룹의 회장직을 맡은 2009년 회사의 순자산은 156억위안(약 2조6000억원)에 불과했지만 작년 순자산은 1826억위안(약 30조550억원)으로 10배 이상 늘었다. 탐내지 말라는 제십 계명에 대해 칼빈은 『기독교강요』 제2권 제8장 49항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Tenth Commandment THOU SHALT NOT COVET THY NEIGHBOUR'S HOUSE, THOU SHALT NOT COVET THY NEIGHBOUR'S WIFE NOR HIS MAN-SERVANT, NOR HIS MAID-SERVANT, NOR HIS OX NOR HIS ASS, NOR ANYTHING THAT IS THY NEIGHBOUR'S. 49. The purport is: Since the Lord would have the whole soul pervaded with love, any feeling of an adverse nature must be banished from our minds. The sum, therefore, will be, that no thought be permitted to insinuate itself into our minds, and inhale them with a noxious concupiscence tending to our neighbour’s loss. To this corresponds the contrary precept, that every thing which we conceive, deliberate, will, or design, be conjoined with the good and advantage of our neighbour. But here it seems we are met with a great and perplexing difficulty. For if it was correctly said above, that under the words adultery and theft, lust and an intention to injure and deceive are prohibited, it may seem superfluous afterwards to employ a separate commandment to prohibit a covetous desire of our neighbour's goods. The difficulty will easily be removed by distinguishing between design and covetousness. Design, such as we have spoken of in the previous commandments, is a deliberate consent of the will, after passion has taken possession of the mind. Covetousness may exist without such deliberation and assent, when the mind is only stimulated and tickled by vain and perverse objects. As, therefore, the Lord previously ordered that charity should regulate our wishes, studies, and actions, so he now orders us to regulate the thoughts of the mind in the same way, that none of them may be depraved and distorted, so as to give the mind a contrary bent. Having forbidden us to turn and incline our mind to wrath, hatred, adultery, theft, and falsehood, he now forbids us to give our thoughts the same direction. 이 영어 원문의 대략적인 해석은 다음과 같습니다. 제십 계명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 출 20:17 49. 이 계명의 목적은, 우리의 영혼 전체가 사랑하는 마음을 갖는 것을 하나님이 원하시므로, 우리는 사랑과 반대되는 욕망을 모두 마음속에서 배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약하면 이웃의 손해를 초래할 만한 탐욕을 우리의 마음속에 일으키는 생각이 엄습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 대응하는 것은 반대되는 교훈입니다. 즉 우리가 계획하며 숙고하며 결심하며 시도하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이웃의 행복과 이익에 연결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외관상 심히 복잡한 문제에 직면합니다. 간음과 도둑질이라는 말에는 간음하려는 욕망과 해치며 속이려는 의도가 포함된다고 이미 말했습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여기서 따로 다른 사람의 재산을 탐내지 말라는 금지를 받는 것은 불필요한 것같이 생각될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의도(意圖)와 탐심의 차이를 생각하면 문제는 곧 해결될 것입니다. 앞에 있는 계명들에 관련해서 우리가 말한 의도는 마음이 정욕에 굴복한 때에 의지가 의식적으로 찬동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이런 의식적인 찬동이 없어도 탐욕이 있을 수 있습니다. 즉, 마음이 허망하고 패악한 것에 찔리거나 유혹을 받기만 할 때에도 탐욕이 있을 수 있습니다. 주께서는 앞에 있는 계명들에서 사랑의 원칙이 우리의 의지와 노력과 행동을 지배하도록 명령하셨습니다. 여기서는 같은 목적으로 우리의 마음속의 생각을 제어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즉 우리의 마음을 반대 방향으로 몰아갈 수 있는 타락한 생각이나 비뚤어진 생각이 전혀 생기지 못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분노나 증오심이나 음란이나 강탈이나 거짓말 등에 기울어 끌리는 것을 금하신 그는 지금 우리의 생각을 동일한 방향으로 향하는 것을 금하십니다. 로마 제국에서 부유층은 흥청망청 연회를 벌여 1인당 3kg의 숭어를 먹어 댔지만, 물고기의 진가는 도시 시장과 군대 식당에서 발휘되었습니다. 로마 제국이 전성기일 때는 고등어 같은 하급 어종이 선원이나 군인의 식사 메뉴였는데, 가벼워서 대량으로 운반하기가 수월한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만약 어부와 어부가 잡은 물고기가 없었다면 인류의 문명은 어떻게 됐을까요. 아마도 파라오는 피라미드를 세우지 못했을 테고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 사원도 웅장한 위용을 뿜지 못했을 것입니다. 인간의 초기 문명은 대부분 강어귀, 호수, 연안 아니면 대양에 접근하기 쉬운 자리에서 꽃피었습니다. 작은 무리에서 마을, 도시, 제국, 국가로 성장하려면 무엇보다 사람들을 먹여 살릴 식량이 중요한데 강어귀나 호수 등은 어부들이 식량원을 지속해서 구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곡물을 재배하기 전까지 인류는 사냥, 채집, 고기잡이로 식량을 획득했습니다. 이중 사냥과 채집은 인류가 발전하면서 각각 목축과 농경에 그 자리를 내주었지만 고기잡이는 고대부터 지금까지 인류에게 식량 획득 수단으로서 위상을 잃지 않고 있습니다. 인류사에서 농경과 목축이 인간의 정착을 이끌었다면, 고기잡이는 탐험, 교역, 항해 등 인간의 이동 생활을 자극했습니다. 물가 근처에서 사는 사람들은 물고기나 조개 등 바다 식량원이 고갈되거나 홍수나 가뭄 등 자연재해로부터 식량 처가 훼손되면 풍요로운 어장을 찾아 이동했습니다. 또 고기잡이에 수반된 기술, 특히 배와 관련된 기술은 새로운 대륙을 탐험하고 대양을 건너 더 먼 곳에서까지 무역 활동을 펼칠 수 있도록 북돋웠습니다. 게다가 물고기는 건조하거나 염장 처리하면 가벼우면서도 영양분이 풍부한 식품이 되었습니다. 여기에 오랫동안 보존할 수 있다는 장점까지 갖춰 교역자, 탐험가, 정복자 등에게 이상적인 식량원이었습니다. 『난중일기』에 보면 이순신 장군도 이 고기잡이와 엄격한 관리로 군사들의 식량을 해결했습니다. 인류는 여전히 물고기를 마구 잡고 있고 어획량은 걷잡을 수 없이 급감했습니다. 저자는 "풍요로웠던 바다를 사막화시키고 싶지 않다면 인류의 탐심을 자제해야 바다에서 계속해 물고기를 구경할 수 있을 것"이라고 권면합니다. 율법에서 십계명이 차지하는 위치는 중요합니다. 율법이 죄를 깨닫게 해주기 위해서는 우리가 지은 개별적인 죄들을 구체적으로 먼저 깨닫게 해주어야 합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자신이 완전한 자가 아니라는 것과 같은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자신이 우상 숭배자와 살인자와 간음자와 도둑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바로 십계명은 이러한 역할을 담당합니다. 앞서 말했지만 십계명이 특별히 가치가 있는 것은 종합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주신 첫째 판의 계명들은 그리스도께서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에 관한 우리의 의무의 범주에 속합니다. 이 계명들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 22:37)는 말씀으로 요약이 됩니다. 둘째 판의 계명들은 우리의 이웃에 대한 우리의 의무의 범주에 속합니다. 이 계명들은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마 19:19)는 말씀으로 요약이 됩니다. 예수님은 더 나아가서 이 요약된 계명들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40)고 정의하셨습니다. 제십 계명은 모든 계명들 중에서도 가장 계시적입니다. 이 계명은 사람의 마음에 관한 율법의 내적인 성격을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악이 마음에서 비롯되는 탐심이 모든 다른 죄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는 말합니다.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4-15). 주님께서도 이 죄를 조심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들에게 이르시되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 눅 12:15 이 말씀이 교훈하고 경계하는 것은 물질주의에 빠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욕심을 부리게 되면 다른 사람의 필요에 무관심해지고 냉담해지게 됩니다. 탐심을 가지게 되면 아무리 많은 부를 쌓아도 만족할 줄을 모르게 됩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어리석은 부자 비유를 깨닫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가장 소중하고 고귀한 것은 생명입니다. 우리의 탐심을 조절할 수 있는 비결은 우리가 어리석은 부자처럼 많은 것을 쌓았어도 오늘 밤 그 생명을 하나님이 가져가실 수 있다는 진리를 깨우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 사람이 무엇을 주고 제 목숨과 바꾸겠느냐 마 16:26 2021-02-01
    • G.QT
    • 기독교강요 영어수업
    2021-02-01
  • 기독교강요 영어 수업 - 제구 계명 거짓말
    The Feast of Absalom, Niccolo Tomioli, 17th century Lesson XXI 제구 계명 거짓말 Ninth Commandment Lie 사상 최대의 거짓 인생을 산 사람의 하나가 미국의 페르디난드 왈도 테마라(1921~1982)였습니다. 그는 타인 이름을 훔쳐 신학자, 심리학자, 철학박사, 교도관, 교사, 그리고 의사로서 행세하며 일생을 사기로 산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의사로 행세하면서 한국전쟁에 참전한 군의관으로 세운 공로로 캐나다의 국민 영웅으로까지 칭송을 받을 기회도 있었습니다. 그의 이야기는 토니 커티스가 주연한 영화 위대한 악당으로 제작되기도 했습니다. 미국이 1941년 12월에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던 터라 그는 이름을 바꿔 프레드 W. 테마라라는 이름으로 해군에 입대했습니다. 테마라는 승선 근무를 하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의무 학교의 훈련생으로 지원했습니다. 훈련 뒤 그는 버지니아의 노퍽 인근의 해군대대에 위생병으로 배속됐습니다. 거기에서 그는 공식 서류들을 잔뜩 훔쳤습니다. 그는 아이오아 주립대학교의 졸업 앨범에서 의사 자격증을 가진 사람을 찾아냈습니다. 그는 그 사람의 이름으로 필요한 서류들을 꾸미고 사진을 붙여서 해군 의무장교 복무 신청서를 제출했습니다. 복무 결정서를 기다리는 몇 주 동안 테마라는 위조 신분증을 쉽게 얻을 수 있는 방법을 발견했습니다. 그래서 얼마 뒤 그는 스탠퍼드 출신 심리학 박사 로버트 린턴 프렌치를 입증하는 서류를 손에 넣었습니다. 그는 고향 로렌스로 돌아가서 교구의 신부 사무실에서 빈 서류더미를 훔쳤습니다. 테마라가 노퍽에 있는 해군부대로 돌아왔을 때 보안 조회가 끝나는 대로 장교로 임관될 것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가 보안 조회라는 말을 들었을 때 겁을 먹고 그 날 밤에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그는 메인의 가톨릭 학교에서 근무하는 동물학자 C. B. 해먼으로 변신했습니다. 그곳에 있는 동안 그는 의사 조셉 시르 박사의 모든 신상 정보를 훔쳐냈습니다. 테마라는 조셉 시르 박사라는 신분으로 캐나다 뉴브런즈윅의 세인트존으로 갔습니다. 그는 그곳에서 왕립 캐나다 해군의 중위 계급장을 단 군의관이 되었습니다. 어떤 여자와 사랑에도 빠졌습니다. 그는 군인 복무를 마친 뒤 결혼해서 캐나다의 한적한 시골에서 개업하고 정착을 하겠다는 계획도 세웠습니다. 그런데 한국전쟁이 발발했습니다. 달콤한 생활에 젖어있던 그에게 구축함 카유가 호에 승선하라는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테마라를 태운 구축함은 한국을 향해 유유히 출항했습니다. 사랑하는 여인은 부두에서 눈물에 젖은 하얀 손수건을 흔들었습니다. 군의관 테마라는 감기나 배탈 같은 가벼운 질병만 치료하면 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부상당한 한국군 세 명을 태운 배가 카유가 호에 다가왔습니다. 중상을 입은 이 세 명을 테마라가 치료해야 했습니다. 그 중 한 명은 심장 부근에 총알까지 박혀 있었습니다. 그는 기절하고 싶을 지경이었지만 달리 뾰족한 수가 없었습니다. 외과 수술 경험은커녕 구경도 해본 적이 없는 군의관 테마라는 진땀을 흘리며 수술을 했습니다. 그런데 기적적으로 수술은 대성공이었습니다. 총알 제거 수술을 받은 한국군 병사는 며칠 만에 회복되었습니다. 다른 한국군 두 명도 적절한 치료로 회복이 되었습니다. 테마라 자신도 놀랄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이 기적이 그에게 화근이 되었습니다. 캐나다 해군의 홍보 담당자는 이 소식을 캐나다 신문에 자세하게 게재하였습니다. 함장은 그에게 표창을 주기 위해 해군본부에 그의 이름을 상신했습니다. 이 와중에 진짜 조셉 시르 박사가 신문을 보고 이 소식을 들었습니다. 테마라의 의사 행세는 그것으로 끝이 났습니다. 사랑하는 여자와 결혼해서 정착을 하려던 그의 꿈도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습니다. 그의 정체를 알게 된 사랑하던 여자도 눈물 자국 없는 메마른 하얀 손수건을 흔들며 그를 떠났습니다. 데마라는 캐나다로 송환되어 파면되고 국외 추방명령도 받았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끝이 아니었습니다. 자기 경험담을 잡지사 라이프에 팔아 많은 돈을 번 다음 유랑하던 그는 마침 텍사스주의 휴스톤에서 교도소 직원 모집 광고를 보자 응모했다. 벤 W.존스라는 이름이었다. 자기가 전에 썼던 수많은 이름으로 신원보증을 섰습니다. 교도관으로서의 그의 역량은 뛰어났습니다. 수감자를 위해 쓰기공부반을 만들고 체육의 날을 만들자는 그의 구상이 텍사스주 교도행정국장 엘리스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그는 흉악범을 수용한 헌츠빌 교도소의 개혁안을 맡기까지 해 엄청난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이런 성공이 잡지에 실리자 어느 수감자가 그가 가짜임을 알아냈습니다. 결국 그는 교도소를 떠났습니다. 그를 고용했던 다른 사람들처럼 엘리스 교도소 행정국장도 그가 진짜 증빙서류만 갖추고 돌아온다면 다시 받아들이겠다고 했습니다. 교도관으로 일한 사람 가운데 최고였다는 거였습니다. 테마라처럼 훌륭한 재능을 지닌 사람이 어째서 정식 자격을 얻으려고 하지 않았을까요. 그는 이런 질문을 받자 “순전히 악당 근성 때문이지”라고 쾌활하게 답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는 정식으로 목사가 되었습니다. 드디어 자기 이름으로 신분을 얻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의 생애의 마지막에는 캘리포니아의 애너하임에 있는 한 병원에서 환자와 죽어가는 사람들을 돌보는 목사로 일했습니다. 그러나 테마라의 이 마지막 직업은 가짜가 아닌 진짜였습니다. 그는 61세 때 심장 발작으로 사망했습니다. 움베르토 에코는 그의 저서 『거짓말의 전략』에서 거짓말 방법의 원칙은 ‘모호함을 피하라’는 것이고 거짓말로 생긴 관계의 원칙은 ‘적절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그가 말하는 인생은 이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언제나 침대에서 끝나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침대에서 태어남으로써 시작하고, 30분 뒤에 사람들은 우리를 침대에 다시 누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매일 규칙적인 간격으로 침대로 돌아갑니다. 피곤하거나 매우 슬플 때 우리는 침대 위에 몸을 던집니다. 그러다 어느 멋진 날 우리는 한 아가씨를 사랑하게 됩니다. 처음에는 한숨과 산책, 달콤한 말들로 시작하고, 나중에는 친척들이 개입하고, 급기야 옷들, 속옷들, 가구들, 주방용품들을 준비합니다. 우리가 마지막으로 침대에 누워 있게 될 날이 올 것입니다. 그 때가 되면, 예외 없이 우리는 우리 옷들 중에 가장 좋은 수의를을 입을 것입니다. 집 안에서 가장 중요한 가구 위에 누운 채 우리는 그 총체적인 혼란에 대해 완전히 무관심할 것이며 주위 사람들의 감정들을 전혀 공유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어떤 종류의 생각도 아주 조그마한 생각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이제 모든 것이 해결되었을 것입니다. 맨 처음 침대 위에 있게 되었을 때 우리는 몹시도 울었는데 이제 마지막이 될 때 우리는 입가에, 비록 최상의 미소는 아닐지라도 분명 우리의 미소 중에서 가장 섬세하고 모호하고 아이러니한 미소를 띨 것입니다. 거짓말로 형제 왕자들을 잔치에 초청해 죽인 다윗의 아들 압살롬처럼 바로 그 미소를 갖고 태마라는 자신의 전 생애에 걸쳐 사람들을 속였고 또 위로하기도 했습니다. 어쨌든 심장발작으로 죽을 때 그는 진짜 목사였습니다. 거짓말하지 말라는 제구 계명에 대해 칼빈은 『기독교강요』 제2권 제8장 47항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THOU SHALT NOT BEAR FALSE WITNESS AGAINST THY NEIGHBOUR 47. The purport of the commandment is, since God, who is truth, abhors falsehood, we must cultivate unfeigned truth towards each other. The sum, therefore, will be, that we must not by calumnies and false accusations injure our neighbour's name, or by falsehood impair his fortunes; in fine, that we must not injure any one from petulance, or a love of evil-speaking. To this prohibition corresponds the command, that we must faithfully assist every one, as far as in us lies, in asserting the truth, for the maintenance of his good name and his estate. The Lord seems to have intended to explain the commandment in these words: “Thou shalt not raise a false report: put not thine hand with the wicked to be an unrighteous witness." "Keep thee far from a false matter”(Exod. 23:1, 7). In another passage, he not only prohibits that species of falsehood which consists in acting the part of tale-bearers among the people, but says, “Neither shalt thou stand against the blood of thy neighbour,"(Lev. 19:16). Both transgressions are distinctly prohibited. Indeed, there can be no doubt, that as in the previous commandment he prohibited cruelty unchastity, and avarice, so here he prohibits falsehood, which consists of the two parts to which we have adverted. By malignant or vicious detraction, we sin against our neighbour's good name: by lying, sometimes even by casting a slur upon him, we injure him in his estate. It makes no difference whether you suppose that formal and judicial testimony is here intended, or the ordinary testimony which is given in private conversation. For we must always recur to the consideration, that for each kind of transgression one species is set forth by way of example, that to it the others may be referred, and that the species chiefly selected, is that in which the turpitude of the transgression is most apparent. It seems proper, however, to extend it more generally to calumny and sinister insinuations by which our neighbours are unjustly aggrieved. For falsehood in a court of justice is always accompanied with perjury. But against perjury, in so far as it profanes and violates the name of God, there is a sufficient provision in the third commandment. Hence the legitimate observance of this precept consists in employing the tongue in the maintenance of truth, so as to promote both the good name and the prosperity of our neighbour. The equity of this is perfectly clear. For if a good name is more precious than riches, a man, in being robbed of his good name, is no less injured than if he were robbed of his goods; while, in the latter case, false testimony is sometimes not less injurious than rapine committed by the hand. 이 영어 원문의 대략적인 해석은 다음과 같습니다. 제구 계명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 출 20:16 47. 이 계명의 목적은, (진리이신) 하나님이 거짓말을 증오하시므로 우리는 서로 진실을 실행하여 속이지 말라는 것입니다. 요약하면, 우리는 남을 중상하지 말며 거짓으로 남의 재산에 해를 끼치지 말아야 합니다. 간단히 말해, 함부로 거짓된 험담을 해서 남을 해쳐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 금지에 연결된 명령은, 모든 사람의 명예와 소유에 손상이 없도록 보호하기 위해서, 진실한 말로 될 수 있는 대로 충실하게 남을 도우라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23장에 있는 주의 말씀은 이 계명의 뜻을 표명하시려고 한 것 같습니다. “너는 허망한 풍설을 전파하지 말며 악인과 연합하여 무함하는 증인이 되지 말며”(출 23:1). 마찬가지로, “거짓 일을 멀리하며”(출 23:7). 다른 구절에서는 중상과 풍설을 퍼뜨리고 다닌다는 의미의 거짓말뿐 아니라(레 19:16) 형제를 속이는 것도 금하십니다(레 19:11). 이 두 가지 일을 특별한 계명으로 금하십니다. 바로 앞의 계명들에서 야비함과 음란과 탐욕을 금지하신 것과 같이 여기서도 거짓을 금하시는 것이 확실합니다. 방금 언급한 것과 같이, 여기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악의와 악한 중상모략으로 이웃의 명예를 해치는 것이며 또 하나는 거짓말이나 심지어 훼방으로 남의 재물을 빼앗는 것입니다. 엄숙한 법적 증언으로서 하거나 사적인 대화중에서 하거나, 나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언제나 문제의 귀착점은 같습니다. 여러 가지 가운데서 특히 추악한 죄 하나를 예로 들어 나머지는 같은 종류에 포함시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웃을 부당하게 해치는 중상과 훼방도 여기 포함시키는 것이 일반적으로 편리합니다. 법정에서의 거짓 증언에는 항상 거짓 맹세가 내포됩니다. 거짓 맹세는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는 것으로 셋째 계명에서 충분히 설명됩니다. 그러므로 이 계명을 올바로 지키려면, 진실을 말함으로써 이웃의 명예와 이익을 지켜 주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공정하다는 것은 명약관화합니다. 많은 재물보다 명예가 더욱 귀하다면(잠 22:1) 명예 훼손은 재물 탈취보다 더 큰 상해가 됩니다. 그러나 재물을 약탈할 때에도 손으로 빼앗는 것에 못지않게 거짓 증언으로 횡령하는 때가 있습니다. 칼빈의 가르침은 항상 성경에 근거합니다. 하나님은 진리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는 진리의 하나님 여호와(시 31:5)이시기에 거짓을 말씀하실 수 없습니다(딛 1:2). 신자의 의무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온전하심 같이 온전해져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신자는 진실해야 합니다(마 5:48). 그러나 온전하지 못하게 되는 까닭은 모든 거짓은 진리에서 나지 않기 때문입니다(요일 2:21). 거짓은 진리이신 하나님과 조화될 수 없습니다. 거짓은 어둡고 불안하고 파멸을 가져옵니다. 그러나 진실은 밝고 평안하고 구원을 가져옵니다. 하나님은 진리의 하나님이시고 거짓을 싫어하십니다(사 65:16). 그러므로 하나님에게 순종하는 사람은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합니다(고전 13:6). 그러나 사탄은 진리를 싫어합니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요 8:44). 진실해진다고 하는 것은 경험해 본 사람은 알고 있듯이 쉬운 일은 아닙니다. 거짓을 말하거나 진실을 숨기는 일이 더 합당하게 생각되는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또한 진실을 말하는 것이 불가능한 것으로 여겨질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에게는 불가능하게 보이는 일이 하나님에게는 가능합니다(눅 18:27). 주님이 말씀해 주시듯이 사람은 속에 있는 것이 밖으로 나타나게 되어있습니다. 독사의 자식들아 너희는 악하니 어떻게 선한 말을 할 수 있느냐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마 12:34-35). 우리 마음에 믿음과 진실이 아니라 자아만이 가득 차있다면 자신의 이익을 위해 진리를 숨기거나 왜곡시키는 일을 마다하지 않을 것입니다. 반대로 우리 마음이 진리로 채워진다면 우리의 말은 날로 진실해지고 남을 유익하게 할 것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진실만을 말하려고 할 때 명심해야 될 것이 두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 우리는 자신이 진실하다고 믿는 것을 이야기해야 합니다. 자신이 믿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은 무책임한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너는 배우고 확신한 일에 거하라 딤후 3:14 둘째 우리는 실제로 일어나고 목격한 일을 말해야 합니다. 우리는 남에게 들은 것을 사실인 것처럼 말해서는 안 됩니다. 그러한 태도를 성경은 금합니다. 너는 네 백성 중에 돌아다니며 사람을 비방하지 말라(레 19:16). 지혜로운 사람은 듣는 것을 다 믿지 않고 특히 좋지 않은 소문일 때는 더욱 그러합니다. 그는 들은 사실을 알아보기 전에는 함부로 말하지 않고 나쁜 이야기는 더욱 입에 담기도 싫어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합니다.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약 1:19 2021-01-18
    • G.QT
    • 기독교강요 영어수업
    2021-01-18
  • 기독교강요 영어 수업 - 제팔 계명 도적질
    Constant Wauters, The Caught Thief Servant Lesson XX제팔 계명 도적질Eighth Commandment Robbery 승리와 명예는 늘 상대보다 더 끈질기고 비정한 사람에게 돌아가게 마련입니다. 전화를 발명한 세 사람 가운데 최종적인 승리를 거머쥔 사람은 세 사람 중 가장 비양심적인 인물이었습니다. 스코틀랜드에서 태어난 알렉산더 그레이엄 벨(Alexander Graham Bell 1847년 3월 3일 ~ 1922년 8월 2일)은 1872년에 미국으로 건너가 처음에는 발성기관 생리학을 연구하고 농아학교 교사들을 가르치는 전문가로 일했습니다. 그러던 그가 1876년 2월 14일 전화기에 대한 특허를 신청해서 3주 뒤 특허를 받았습니다. 독일의 물리교사 필리프 라이스(Philipp Reis)가 1861년에 고안한 전화기가 아직 특허를 받을 만큼 제대로 완성되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벨의 특허권 획득은 정당했습니다. 라이스의 전화기는 코맹맹이 소리에다 의사소통이 불가능한 상태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탈리아계 미국인 안토니오 메우치(Antonio Meucci 1808 ~ 1889)가 발명한 전화기는 문제가 다릅니다. 벨은 메우치의 실험실에서 함께 일하면서 제대로 작동하는 전화기를 처음 보았습니다. 그리고 메우치는 벨보다 5년 앞서 그 전화기로 벌써 1871년에 특허를 따놓은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메우치의 특허권은 1874년에 효력이 정지되었습니다. 경제적 어려움으로 메우치는 자신의 발명품에 관심을 기울일 여력이 없었습니다. 1876년 벨이 특허를 따내자 메우치는 벨을 사기 혐의로 고소했습니다. 그러나 그 사이 급작스럽게 유명해진 벨이 고용한 유능한 변호사들과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한 남자 사이의 소송은 한없이 이어졌습니다. 1896년 메우치가 한이 맺혀 숨을 거둘 때까지도 판결이 나지 않았습니다. 벨이 속이고 기술을 훔친 사람이 또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오하이오 주 출신의 전기공학과 교수 엘리사 그레이(Elisha Gray 1835-1901)였습니다. 그레이는 우선 운이 지독하게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가 특허신청서를 들고 특허청에 도착해보니 벌써 두 시간 전에 벨이 특허 신청을 하고 갔다는 것입니다. 이 두 시간이 두 사람의 운명을 갈라놓았습니다. 그걸 갖고 벨을 탓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그런데 특허장이 발부된 지 사흘 만에 열린 처음 열린 전화기 시연회에서 벨의 전화기가 그레이의 기술을 도용한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마이크로폰과 금속진동판이 그레이의 특허신청서에 명시된 기술방식이었습니다. 이것이 벨의 고유한 기술이 아니었다는 사실은 과학역사가들 사이에선 이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벨이 특허를 취득한 전화기의 절반은 그레이가 만든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이번에는 그레이가 벨을 사기 혐의로 고소했습니다. 이와 관련된 소송이 무려 100건이 넘었습니다. 미국 대법원은 그레이의 소송을 모두 기각했습니다. 그러나 벨에게는 무척 불명예스러운 일이었습니다. 최종 판결에서는 승리를 얻었지만 대법원 판사들의 의견은 정확히 찬반 동수로 엇갈렸다. 어쨌든 벨은 두 번의 부정을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부와 명성을 한꺼번에 얻었습니다. 1922년 벨이 숨을 거두자 미국의 전화국들은 1400만 전화회선을 1분간 정지시키고 그의 죽음을 기렸습니다. 반면에 그레이는 백과사전 한 귀퉁이에 이름만 올라 있고 메우치는 그 이름마저 잊혔습니다. 벨은 자신의 행적에 어울리는 말을 남겼습니다. “What this power is I cannot say; all I know is that it exists and it becomes available only when a man is in that state of mind in which he knows exactly what he wants and is fully determined not to quit until he finds it.”나도 이 힘이 무엇인지 말할 수 없습니다. 내가 아는 전부는 이 힘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정확히 알고 그것을 발견할 때까지 그만두지 않겠다는 완전한 결의를 마음속에 가진 사람에게만 쓸모가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도둑질하지 말라는 제팔 계명에 대해 칼빈은 『기독교강요』 제2권 제8장 45항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THOU SHALT NOT STEAL 45. The purport is, that injustice being an abomination to God, we must render to every man his due. In substance, then, the commandment forbids us to long after other men's goods, and, accordingly, requires every man to exert himself honestly in preserving his own. For we must consider, that what each individual possesses has not fallen to him by chance, but by the distribution of the sovereign Lord of all, that no one can pervert his means to bad purposes without committing a fraud on a divine dispensation. There are very many kinds of theft. One consists in violence, as when a man's goods are forcibly plundered and carried off; another in malicious imposture, as when they are fraudulently intercepted; a third in the more hidden craft which takes possession of them with a semblance of justice; and a fourth in sycophancy, which wiles them away under the pretence of donation. But not to dwell too long in enumerating the different classes, we know that all the arts by which we obtain possession of the goods and money of our neighbours, for sincere affection substituting an eagerness to deceive or injure them in any way, are to be regarded as thefts. Though they may be obtained by an action at law, a different decision is given by God. He sees the long train of deception by which the man of craft begins to lay nets for his more simple neighbour, until he entangles him in its meshes--sees the harsh and cruel laws by which the more powerful oppresses and crushes the feeble--sees the enticements by which the more wily baits the hook for the less wary, though all these escape the judgment of man, and no cognisance is taken of them. Nor is the violation of this commandment confined to money, or merchandise, or lands, but extends to every kind of right; for we defraud our neighbours to their hurt if we decline any of the duties which we are bound to perform towards them. If an agent or an indolent steward wastes the substance of his employer, or does not give due heed to the management of his property; if he unjustly squanders or luxuriously wastes the means entrusted to him; if a servant holds his master in derision, divulges his secrets, or in any way is treacherous to his life or his goods; if, on the other hand, a master cruelly torments his household, he is guilty of theft before God; since every one who, in the exercise of his calling, performs not what he owes to others, keeps back, or makes away with what does not belong to him. 이 영어 원문의 대략적인 해석은 다음과 같습니다. 제팔 계명 도적질하지 말지니라 출 20:15 45. 이 계명의 목적은, 하나님이 불의를 미워하시므로, 우리는 각 사람의 소유를 그에게 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출 13:7). 요약하면, 이 계명은 다른 사람들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고 금지하며, 결과적으로 모든 사람이 각각 자기의 소유를 보존하도록 충실히 애써 노력하라고 명령합니다. 사람의 소유는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라, 만물의 최고의 주인이신 분이 분배해 주셨다는 것을 우리는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사악한 계략으로 남의 물건을 빼앗는다면 그것은 반드시 사기 수단으로 하나님의 경륜을 배제하는 것이 됩니다. 그런데 도둑질도 여러 가지입니다. 폭력을 쓰는 노골적인 강도 행위, 기만수단으로 남의 소유를 가로채는 흉악한 사기 행위, 외관상 법적인 수단으로 남의 것을 빼앗는 더욱 음흉하고 간교한 것 등이 있습니다. 아첨하며 선물로 받는 체하면서 속여 빼앗는 것도 있습니다. 도둑질의 종류는 자세히 말하지 않겠습니다. 이웃의 소유나 돈을 우리가 취득하는 방법은 그것이 진지한 애정을 떠나서 속이거나 해하겠다는 욕망이 될 때에 모두 도둑질로 간주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법적 절차를 통해서 남의 재산을 얻는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심판은 변하지 않습니다. 간교한 사람이 복잡한 사기 수단으로 단순한 사람 앞에 올무를 놓아 결국 끌어넣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사기 수단으로 보십니다. 세력 있는 자들이 약한 사람들을 법으로 압박하며 꺾어 버릴 때에 하나님께서는 그 가혹하고 잔인한 법을 보십니다. 간악한 자가 부주의한 사람들을 미끼로 호려 낚시에 걸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간교한 꼬임을 보십니다. 이 모든 일은 인간의 심판을 받지 않으며 눈에 띄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런 불의는 돈이나 상품이나 토지에 관해서 있을 뿐만 아니라, 각 사람의 권리까지도 침범합니다. 우리가 이웃에 대해 지고 있는 의무를 거부할 때 우리는 그들의 재산을 횡령하는 것입니다. 만약 게으른 관리인이 주인의 재산을 소비하며 주인의 살림을 돌보지 않을 때 맡은 재산을 부당하게 소비하거나 함부로 허비할 때 하인이 주인을 조롱할 때 주인의 비밀을 폭로할 때 주인의 생명이나 재산에 대해서 배신행위를 할 때 그러나 반대로 주인이 집안사람들을 난폭하게 괴롭힐 때, 이 모든 경우는 하나님 보시기에 도둑질입니다. 자기가 소명 받은 책임에 따라 남에게 해야 할 일을 실행하지 않는 사람은 남의 것을 주지 않고 자기가 횡령하고 차지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가 없어서 추위에 떨며 굶주리고 있는 일곱 조카들을 위해 빵 한 덩이를 훔친 죄로 체포된 레미제라블의 주인공 장발장은 19년 감옥생활을 했습니다. 도적질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인류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이는 도덕 표준입니다. 그러나 성경만이 도적질하는 것이 왜 나쁜지를 분명하게 밝혀줍니다. 모든 사람이 제 각각 정당하게 소유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나눠주신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부터 내려오나니 약 1:17 그러므로 다른 사람의 것을 훔치는 것은 하나님에게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물론 도적질은 다른 사람에게 죄를 범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그 훔친 것은 그 사람에게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의 가슴 여미는 고백이 이러한 생각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다윗은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의 명예와 정절을 훔치고 그녀의 남편의 생명까지 뺏었음에도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시 51:4)라고 고백합니다. 우리가 장발장처럼 빵을 훔치지 않거나 다윗처럼 다른 사람의 부인을 빼앗지 않았다고 해서 제팔 계명을 어기지 않았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훔치는 방법과 대상이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즉 그것은 돈 시간 명예 재능 또는 하나님의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했다고 비난하시고 어리둥절한 그들에게 그것이 무엇인지 가르쳐주십니다.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둑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 하였나이까 하는 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 말 3:8 칼빈의 가르침을 따른다면 하나님에게 응당 바쳐야 할 헌금이나 예배나 전도를 태만히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이 됩니다. 우리가 직장에서 능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다하지 않고 빈둥거린다면 그것도 고용주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입니다. 남에게 돈을 빌려 잘못 쓰거나 제때 갚지 않는 것도 남의 것을 도적질하는 것입니다. 또 많은 사람들이 생계유지에도 힘이 모자라 허덕거리고 있는데 자신은 사치에만 몰두하고 있다면 이것도 자기 자신의 것을 자신이 도적질하고 있는 것입니다. 제팔 계명을 가장 잘 지킬 수 있는 방법을 예수님이 산상수훈에서 가르쳐주십니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라 이것이 율법이요 선지자니라 마 7:12 이 가르침이 우리에게 가르쳐주는 바는 물질적인 면과 정신적인 면을 다 같이 말씀합니다. 이 가르침은 궁핍하고 어려운 사람에게는 물질로 도움을 주어야 하고 슬픔이나 좌절을 겪는 사람에게는 위로와 격려로 도움을 주어야 합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의 실례를 주님은 다음과 같이 구체적으로 가르쳐주십니다. 주님이 마태복음 25:35-46에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이에 의인들이 대답했습니다.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 오른편에 있는 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그리고 또 왼편에 있는 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영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 하였느니라.” 그들도 대답했습니다.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 하더이까.”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니라.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2020-01-04
    • G.QT
    • 기독교강요 영어수업
    2021-01-04
  • 기독교강요 영어 수업 - 제칠 계명 간음
    Susannah accused of adultery, by Antoine Coypel Lesson XIX제칠 계명 간음Seventh Commandment Adultery 교도 계율이 신대륙을 지배하는 17세기. 뉴잉글랜드 형무소 근처에 교수대가 서있습니다. 그 교수대 위에 한 젊은 여자가 서있습니다. 많은 구경꾼들이 눈초리를 빛내고 있습니다. 교수대 위의 여자는 진홍빛 A(간음을 나타내는 adultery의 머리글자)자를 수로 곱게 새긴 가슴에 갓난아이를 안고 서있습니다. 그녀의 이름은 헤스터 프린입니다. 그녀는 훨씬 나이가 많은 남자와 결혼했습니다. 그녀는 지금 남편보다 먼저 신대륙에 왔는데 암스테르담에서의 남편의 일처리가 늦어져 혼자 지내고 있었습니다. 소식도 없이 헤어져 있는 기간이 이제는 너무나 오래돼 그녀는 남편이 죽은 것이 아닌가 생각할 정도였습니다. 그 사이에 그녀가 아이를 낳게 되었습니다. 남편과 오래 헤어져 있는 사이에 아이를 낳았기 때문에 사람들은 헤스터 프린이 간음을 했음을 단번에 알았습니다. 엄격한 청교도들은 그녀를 재판에 회부했습니다. 그녀는 한사코 간음의 상대자를 밝히지 않았습니다. 간음을 범한 헤스터 프린은 교수대 위에서 죄의 열매인 아이를 안고 세 시간 동안 사람들의 구경꺼리가 된 뒤 평생 간음죄의 표식인 A자를 가슴에 달고 살라는 선고를 받았습니다. 헤스터 프린의 아이의 아버지는 그 마을의 존경받는 젊고 학식 많은 목사 딤즈데일이었습니다. 딤즈데일은 헤스터 프린과 형벌을 함께 받아야 했지만 망설임과 두려움으로 기회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는 자수해서 형벌을 받을 용기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죄의식으로 불면에 시달리고 쇠약해져 갔습니다. 오래 소식이 없던 그녀의 남편 칠링월스가 아내가 사는 마을에 나타났습니다. 그는 신대륙으로 오던 중 태풍을 만나 온갖 고생 끝에 간신히 도착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내는 아버지도 모르는 아이를 안고 있었습니다. 그는 아내를 찾아가 만나지 않고 이를 갈며 복수를 다짐합니다. 딤즈데일에게서 몇몇 수상한 점을 발견한 칠링월스는 그를 점점 의심하게 됩니다. 그는 이름도 바꾸고 의사로 자리를 잡습니다. 그는 고뇌로 쇠약해진 목사에게 접근했습니다. 그는 치료약이라 속이고 목사를 서서히 독약으로 중독시킵니다. 그런데 그의 복수가 무르익어 성공할 무렵 딤즈데일 목사가 양심의 가책을 견디지 못하고 군중 앞에서 헤스터 프린의 손을 잡고 자신의 죄를 고백합니다. 항상 나를 사랑해주시던 여러분. 나를 거룩하다고 존경해주시던 여러분. 이 자리에 죄인이 섰습니다. 나는 마땅히 7년 전에 이 자리에 서야 했습니다. 보십시오. 헤스터가 달고 있는 주홍글씨를. 여러분은 이 글씨를 볼 때마다 떨었습니다. 이 여인이 어디를 가나 주위에 이 글씨의 무섭고 끔찍한 광선을 비추었습니다. 그러나 그 죄와 수치의 표적을 보고 떨지 않은 죄인이 여러분 속에 숨어 살아왔습니다. 모든 죄를 고백한 딤즈데일 목사는 그 자리에서 숨집니다. 회개와 고백을 통하여 그의 영혼은 구원을 받았습니다. 헤스터는 나머지 생애를 딸을 키우며 이웃에 대한 헌신적인 봉사로 보내다 마감합니다. 그녀의 묘비에는 이름 대신에 검은 바탕에 붉은 주홍 글씨가 새겨집니다. 『주홍 글씨(The Scarlet Letter)』는 미국 소설가 호손(Nathaniel Hawthorne 1804년 7월 4일 - 1864년 5월 19일)의 대표작으로 1850년 발표되었습니다. 세무서에서 근무하다가 실직한 호손이 배우자의 격려를 받아서 쓴 소설이라고 알려져 있는 이 소설에는 청교도 신자 호손의 죄와 인간의 위선에 대한 통찰력이 담겨 있습니다. 청교도 목사 딤즈데일의 죄책감과 그와 간음한 헤스터의 순수한 마음을 대비시켜서 17세기 미국 청교도들의 위선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간음한 헤스터에게 A라는 붉은 낙인을 찍는다는 설정에서 붉은 낙인 ‘주홍 글씨’는 인간을 얽매는 굴레를 뜻합니다. 이 의미에 대해 칼빈은 『기독교강요』 제2권 제8장 41항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THOU SHALT NOT COMMIT ADULTERY 41. The purport of this commandment is, that as God loves chastity and purity, we ought to guard against all uncleanness. The substance of the commandment therefore is, that we must not defile ourselves with any impurity or libidinous excess. To this corresponds the affirmative, that we must regulate every part of our conduct chastely and continently. The thing expressly forbidden is adultery, to which lust naturally tends, that its filthiness(being of a grosser and more palpable form, in as much as it casts a stain even on the body) may dispose us to abominate every form of lust. As the law under which man was created was not to lead a life of solitude, but enjoy a help meet for him, and ever since he fell under the curse the necessity for this mode of life is increased; the Lord made the requisite provision for us in this respect by the institution of marriage, which, entered into under his authority, he has also sanctified with his blessing. Hence, it is evident, that any mode of cohabitation different from marriage is cursed in his sight, and that the conjugal relation was ordained as a necessary means of preventing us from giving way to unbridled lust. Let us beware, therefore, of yielding to indulgence, seeing we are assured that the curse of God lies on every man and woman cohabiting without marriage. 이 영어 원문의 대략적인 해석은 다음과 같습니다. 제칠 계명 간음하지 말찌니라 출 20:14 41. 이 계명의 목적은, 하나님이 정숙과 순결을 사랑하시므로, 우리는 모든 부정을 멀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약하면, 우리는 육의 추악이나 정욕의 난무에 더럽혀져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기 대응하는 적극적인 계명은 우리 생활의 모든 부분을 정결과 극기로 지속적으로 제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음행은 모든 정욕의 귀착점이며, 육체에 그 낙인을 찍는 점에서 그 추악상은 더욱 현저히 저열한 것인데, 그 음행을 명백히 금하심으로써 주께서는 우리가 모든 정욕을 타기 하도록 인도하려 하십니다. 인간이 이런 상태로 창조된 것은 고독 생활을 하지 않고 돕는 사람과 함께 즐겁게 살도록 하시려는 뜻입니다(참조, 창 2:18). 사람은 죄의 저주를 받아 더욱 이렇게 할 필요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주께서는 이 문제에 대한 충분한 대책으로서 결혼 제도를 제정하시고, 그의 권위에서 출발한 결혼 생활을 축복으로 성별 하셨습니다. 따라서 결혼이 아닌 남녀 결합은 모두 하나님 보시기에 저주받은 것이며, 우리가 무절제한 정욕에 빠지는 것을 막는 데 필요한 대책으로서 결혼생활이 제정되었다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러면 결혼하지 않은 남녀의 동거 생활은 반드시 하나님의 저주를 받는다고 들을 때 우리는 자기를 속이지 말아야 합니다. 프로이드가 쾌락원리를 최초로 공식화한 후 현대의 대중매체는 성(性)을 미끼로 물질주의와 쾌락의 추구를 선동합니다. 20세기 쾌락주의는 플레이보이 철학으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플레이보이 잡지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성을 시궁창에서 꺼내 쾌락의 철학과 함께 화려한 종이에 인쇄하여 팔았기 때문입니다. 쾌락주의는 개인의 쾌락을 선(善)이라고 생각하여 그것을 삶의 가치의 목표로 삼고 도덕은 쾌락을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 생각합니다. 이것에 덧붙여 성경의 윤리에 도전하는 상황윤리라고 하는 신도덕주의(New Morality)가 있습니다. 이것은 로빈슨(J A T. Robinson) 플래처(Joseph Fletcher) 콕스(James Cox) 등에 의해 주창되었습니다. 이들의 주장은 다음의 두 가지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첫째 어떤 주어진 상황에 알맞은 행동 방향은 그 상황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지 미리 결정된 어떤 윤리적 기준이나 성경적 기준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둘째 어떤 윤리적 상황에서나 적용될 수 있는 유일한 기준은 사랑에 대한 요구다. 다른 사람에게 해가 되지 않는다면 무슨 일이든지 옳다고 상황윤리주의자들은 주장합니다. 그리고 어떤 일이 다른 사람에게 해가 되느냐 안 되느냐의 여부는 오직 그 상황 여부에 달려있다고 내세웁니다. 이 주장에 따르면 사통(私通)이나 간음도 그 상황 여부에 따라서 반드시 나쁜 일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결론입니다. 이 간음조차도 그것의 옳고 그름이 다른 사람에게 도움이 되느냐 해가 되느냐에 달려있다는 것입니다. 쾌락주의를 선동하는 언론매체와 신도덕주의의 영향으로 어떤 일이든 좋으면 실행하라는 외침이 우리 시대의 표어가 되어버렸습니다. 십계명에 나타난 하나님의 율법과 산상수훈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비추어 볼 때 그리스도인들은 그 외침을 거부해야 합니다. 루이스(C. S. Lewis)는 『단순한 그리스도교』(Mere Christianity)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교의 표준은 너무 어렵고 우리 자신의 본능과 크게 어긋나기 때문에 우리 자신과 우리 사회가 무엇인가 잘못된 점이 분명히 있다는 사실을 모두 솔직히 인정해야 합니다. 쾌락은 근본적으로든 일반적으로든 삶의 성취목표가 아니라 하나의 결과이거나 부차적인 효과에 지나지 않습니다. 즉 쾌락은 사람이 의미를 실현하게 되고 가치를 인식하게 되면 부수적으로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이 쾌락을 목표로 얻고자 하면 그 사람은 반드시 실패합니다. 왜냐하면 쾌락은 목표가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와를 만드시고 아담에게 데려왔을 때 아담은 외쳤습니다.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창 2:23 하나님은 서로 좋아하는 둘이 한 몸을 이루게 해주셨습니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 창 2:24-25 우리는 성경을 통해 태초에 성적인 욕구가 있었고 그것이 자연스러운 것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적인 욕망이 잘못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대로 이 성욕을 만족시키는 것은 잘못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성경은 사람들이 결혼하고 싶어 하는 것도 이 욕구 때문이란 사실을 솔직히 인정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문제 삼는 것은 성욕을 불법으로 만족시키려고 하는 데 있습니다. 즉 하나님이 정해주신 결혼 밖에서 갖는 성적인 관계를 의미합니다. 성경은 합법적으로 결혼한 사람 이외의 성관계는 죄로 규정합니다. 더 나아가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 마 5:27-28 제칠 계명과 주님의 가르침이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명령하는 것은 결혼 전에는 순결을 지키고 결혼 후에는 결혼생활에 충실 하라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것에 대해 우리에게 구체적으로 교훈합니다.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이 사람은 이러하고 저 사람은 저러하니라 내가 결혼하지 아니한 자들과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결혼하라 정욕이 불 같이 타는 것보다 결혼하는 것이 나으니라 고전 7:7-9 결혼 생활을 떠나서 성적 쾌락을 추구하면 추구할수록 목적하는 쾌락은 얻지 못하고 더욱 공허해지고 타락하게 됩니다. 우리 사회는 점점 성에 대해 하나님의 뜻에 반하는 풍조로 물들어 가고 있습니다. 이런 풍조에 대한 반발로 미투 운동(Me Too movement)이 촉발되었습니다. 이 운동은 미국에서 시작된 해시태그 운동인데 2017년 10월 할리우드 유명 영화제작자인 하비 와인스타인의 성추문을 폭로하고 비난하기 위해, 소셜 미디어에 해시태그(#MeToo)를 다는 행동에서 출발했습니다. 해시태그 운동(Hashtag activism 해시태그 활동주의)는 단순히 홍보 수단이나 가벼운 주제를 묶어 보여주는 역할에서 확대되어 정치·사회 이슈를 만들어내는 해시태그의 사회운동 역할을 말합니다. 초기엔 놀이문화로만 이용되던 해시태그가 일종의 콘텐츠를 생산하는 역할을 맡았고 사회운동 역할로 확장된 것입니다. 해시태그를 중심으로 한 시민들의 용기 있는 고백이 모이고 모여 변화의 물꼬를 텄으며 이게 오프라인으로 결집이 이어지면서 ‘집단 지성’으로써 힘을 증명한 것입니다. 언론에 의해 형성된 여론 아니라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에 의해 시민들 스스로가 주도하는 여론입니다. 한국에서는 2018년 1월 29일 현직 검사 서지현이 JTBC 뉴스룸에 출연하여 검찰 내의 범죄자를 비롯한 성폭력 실상을 고발하면서 미투 운동을 촉발시켰습니다. 연극연출가에게 성추행을 당했다는 고발이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를 통해 널리 퍼지면서 ‘위력에 의한 성폭력’ 피해 고발 움직임이 대한민국을 강타했습니다. 2018년 2월 26일 문재인 대통령이 “미투 운동을 무겁게 받아들인다”며, “피해 사실을 폭로한 피해자들의 용기에 경의를 표하고, 미투 운동을 적극 지지한다”고 지지 의사를 밝히고 “피해자들의 폭로가 있는 경우 형사고소 의사를 확인하고, 친고죄가 폐지된 2013년 6월 이후의 사건은 고소 없이도 적극 수사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칼빈의 제칠 계명에 대한 가르침의 요지는 우리가 이 세상을 본받지 말고 하나님 말씀으로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면 우리는 진정한 기쁨을 얻게 되고 축복된 삶을 누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그 방법을 구체적으로 이렇게 지시해줍니다.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이런 것이 없는 자는 맹인이라 멀리 보지 못하고 그의 옛 죄가 깨끗하게 된 것을 잊었느니라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벧후 1:4-11 2020-12-28
    • G.QT
    • 기독교강요 영어수업
    2020-12-28

실시간 기독교강요 영어수업 기사

  • 기독교강요 영어 수업 - Lesson XIII 제일 계명 유일신
    Holy Trinity, depicted by Szymon Czechowicz(1756-1758) Lesson XIII 제일 계명 유일신First Commandment One God 지난 2018년 7월 5일은 마르크스 탄생 200주년이었습니다. 그의 고향인 독일 트리어와 중국 공산당, 그리고 한국 일부에서 크게 의미를 두었습니다. 그의 공산주의는 그것을 따르는 사람에게 증오와 굶주림을 안겨줍니다. 그를 따르는 좌파 정권의 베네주엘라는 산유국(油國)임에도 경제 붕괴로 망하기 일보 직전에 있습니다. 중세 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1225~1274)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한 권의 책만 읽은 사람을 조심하라.” 1980년대 운동권 학생 책꽂이엔 주로 한 종류 책이 꽂혀 있었습니다. 마르크스 저작과 마르크스주의에 토대를 둔 『사회구성체론』과 『정치경제학』 같은 책입니다. 서클 세미나에서 토론하려면 그런 책을 읽지 않을 수 없었지요. 그 시대 청년 대학생들은 하나님을 부인하는 ‘한 권의 책만 읽은 사람’이었습니다. 좌파 정권의 베네주엘라 지도자들처럼. 성경은 말씀합니다. 이 재앙에 죽지 않고 남은 사람들은 손으로 행한 일을 회개하지 아니하고 오히려 여러 귀신과 또는 보거나 듣거나 다니거나 하지 못하는 금 은 동과 목석의 우상에게 절하고 또 그 살인과 복술과 음행과 도둑질을 회개하지 아니하더라 계 9:20-21 세계에서 가장 많은 신들을 섬기는 사람들은 힌두교도들이라고 합니다. 그들은 물경 3억 3천만에 달하는 신들과 여신들을 모시고 있습니다. 그들은 한 세대 당 여덟 신을 섬긴다고 합니다. 힌두교는 동물의 생명이 신성하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그들은 언제나 비참하게 가난한 생활을 살면서도 동물들과 한 집에서 같이 생활하며 부양을 합니다. 동물들은 아무 하는 일 없이 그들의 집에서 하인을 둔 부자 주인 노릇을 하며 빈둥빈둥 살아갑니다. 인도의 4억 5천만 힌두교도들은 거의 7천 5백만에 달하는 소들을 경배하고 섬깁니다. 더욱이 그들은 그들의 농작물들을 먹어치우고 해를 주는 원숭이들과 쥐들과 여러 해충들까지도 내버려 둔다고 합니다. 제일 계명은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말하는 영역에서 시작합니다. 이 계명은 우리가 오직 하나님만을 힘을 다해 섬길 것을 요구합니다.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출 20:2-3). 이 말씀은 다른 신이나 현대의 무수한 우상들뿐만 아니라 어떤 사물이나 사람을 섬기는 것도 이 계명을 어기는 것입니다. 또한 성공 소유 명예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는 것이 우리의 하나님이 되기도 합니다. 우리는 이 계명을 얼마나 잘 지키고 있는가요. 그것을 위해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 22:37). 그 의미에 대해 칼빈은 『기독교강요』 제2권 제8장 16항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First Commandment I AM THE LORD THY GOD, WHICH BROUGHT THEE OUT OF THE LAND OF EGYPT, OUT OF THE HOUSE OF BONDAGE. THOU SHALT HAVE NO OTHER GODS BEFORE ME. 16. The authority of the Law being founded and established, God delivers his First Commandment THOU SHALT HAVE NO OTHER GODS BEFORE ME. The purport of this commandment is, that the Lord will have himself alone to be exalted in his people, and claims the entire possession of them as his own. That it may be so, he orders us to abstain from ungodliness and superstition of every kind, by which the glory of his divinity is diminished or obscured; and, for the same reason, he requires us to worship and adore him with truly pious zeal. The simple terms used obviously amount to this. For seeing we cannot have God without embracing everything which belongs to him, the prohibition against having strange gods means, that nothing which belongs to him is to be transferred to any other. The duties which we owe to God are innumerable, but they seem to admit of being not improperly reduced to four heads: Adoration, with its accessory spiritual submission of conscience, Trust, Invocation, Thanksgiving. By Adoration, I mean the veneration and worship which we render to him when we do homage to his majesty; and hence I make part of it to consist in bringing our consciences into subjection to his Law. Trust, is secure resting in him under a recognition of his perfections, when, ascribing to him all power, wisdom, justice, goodness, and truth, we consider ourselves happy in having been brought into intercourse with him. Invocation, may be defined the retaking of ourselves to his promised aid as the only resource in every case of need. Thanksgiving, is the gratitude which ascribes to him the praise of all our blessings. As the Lord does not allow these to be derived from any other quarter, so he demands that they shall be referred entirely to himself. It is not enough to refrain from other gods. We must, at the same time, devote ourselves wholly to him, not acting like certain impious despisers, who regard it as the shortest method, to hold all religious observance in derision. But here precedence must be given to true religion, which will direct our minds to the living God. When duly imbued with the knowledge of him, the whole aim of our lives will be to revere, fear, and worship his majesty, to enjoy a share in his blessings, to have recourse to him in every difficulty, to acknowledge, laud, and celebrate the magnificence of his works, to make him, as it were, the sole aim of all our actions. Next, we must beware of superstition, by which our minds are turned aside from the true God, and carried to and fro after a multiplicity of gods. herefore, if we are contented with one God, let us call to mind what was formerly observed, that all fictitious gods are to be driven far away, and that the worship which he claims for himself is not to be mutilated. Not a particle of his glory is to be withheld: everything belonging to him must be reserved to him entire. The words, “before me,” go to increase the indignity, God being provoked to jealousy whenever we substitute our fictions in his stead; just as an unfaithful wife stings her husband's heart more deeply when her adultery is committed openly before his eyes. Therefore, God having by his present power and grace declared that he had respect to the people whom he had chosen, now, in order to deter them from the wickedness of revolt, warns them that they cannot adopt strange gods without his being witness and spectator of the sacrilege. To the audacity of so doing is added the very great impiety of supposing that they can mock the eye of God with their evasions. Far from this the Lord proclaims that everything which we design, plan, or execute, lies open to his sight. Our conscience must, therefore, keep aloof from the most distant thought of revolt, if we would have our worship approved by the Lord. The glory of his Godhead must be maintained entire and incorrupt, not merely by external profession, but as under his eye, which penetrates the inmost recesses of his heart. 이 영어 원문의 대략적인 해석은 다음과 같습니다. 제일 계명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여호와로라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찌니라 16. 하나님께서는 율법의 권위에 대해서 그 근거를 마련하시고 확립하신 후에, 제일 계명을 말씀하십니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하지 말지니라”(출 20:3). 이 계명의 목적은, 주께서는 자기만이 자기 백성 사이에서 최고의 지위를 가지시며, 그들에 대해서 완전한 권위를 행사하고자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 일을 실현하시기 위해서, 그의 신성의 영광을 감하거나 흐리게 하는 불경건과 미신을 일소하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십니다. 같은 이유로, 우리에게 진실하고 열렬한 경건으로 자기를 경배하며 찬양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계명의 단순한 용어가 거의 이 뜻을 표현합니다. 하나님을 있게 하면 반드시 그에게 속한 것도 동시에 받아들이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다른 신이 있게 하지 말라고 금지하시는 것은 하나님에게 속한 것을 다른 신에게로 옮겨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에게 드려야 할 것이 수없이 많지만, 그 모든 것을 편의상 네 가지로, 즉, 숭배, 신뢰, 기원(祈願), 감사로 분류하는 것이 편리하겠습니다. 우리 각 사람이 하나님의 위대성에 머리를 숙여 공경과 경배를 드리는 것을 나는 숭배(adoration)라고 부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율법에 우리의 양심을 바치는 것을 숭배의 일부라고 생각하는 것은 옳습니다. 하나님의 모든 속성을 인정하고서 그를 굳게 믿고 안심하는 것을 신뢰라고 부릅니다. 그에게 모든 지혜와 의와 힘과 진리와 인애가 있다고 생각해서, 그와 연결될 때에만 우리에게 행복이 있다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곤란한 일이 닥칠 때마다 하나님의 신실과 도움만을 우리의 의지할 것으로 믿어 구하는 마음의 습성을 나는 기원이라고 부릅니다. 모든 선한 일에 대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태도를 감사라고 부릅니다. 주께서는 이런 일들이 조금이라도 다른 신에게 옮겨지는 것을 허락하시지 않으므로, 모든 것을 전적으로 자기에게 드리라고 명령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신을 위하지 않는 것만으로는 아직 충분하지 못합니다. 종교를 멸시하는 악인들은 흔히 모든 종교를 통틀어 조롱하며 무시하지만, 우리는 그들을 본받지 말아야 합니다. 진정한 경건이 가장 앞에 서서, 우리의 마음이 살아 계신 하나님을 향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깊이 알고, 그 존엄성을 명상하며 경외하며 경배하며, 그의 축복에 참여하며, 항상 그의 도움을 구하며, 그의 역사(役事)의 위대성을 인정해서 찬양으로 축하하는 것을 이 세상에서 하는 모든 활동의 유일한 목표로서 갈망해야 합니다. 다음에 우리는 사악한 미신을 경계해야 합니다. 미신은 우리의 마음을 진정한 하나님에게서 떠나게 하며, 여러 가지 신들 사이를 방황하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한 분 하나님으로 만족한다면, 우리가 전에 말한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즉, 우리는 모든 날조된 신을 몰아내야 하며, 유일하신 하나님이 자기의 것으로 친히 요구하시는 경배를 부분적으로 만들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티끌만큼이라도 감축하는 것은 부당하며, 하나님에게 속한 것은 모두 항상 하나님에게 있어야 합니다. 다음에 있는 ‘내 앞에’라는 어구는 계명 위반을 더욱 가증한 것으로 생각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을 제쳐놓고 우리가 날조한 신으로 대신할 때에, 하나님의 질투심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파렴치한 여자가 자기 남편 앞에 정부를 끌어들여 더욱 그의 마음을 괴롭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권능과 은총으로 항상 자기의 택한 백성을 지켜 주신다고 증언하신 것은, 그들이 새 신을 끌어들이면 반드시 하나님이 그 모독행위를 보시리라고 경고하며, 그들의 반역죄를 더욱 효과적으로 막으시려는 뜻입니다. 이런 대담한 행위에는 불경건한 짓이 많이 첨가됩니다. 즉, 사람들은 하나님을 버려도 하나님의 눈을 속일 수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무엇을 하며 무엇을 계획하며 무엇을 만들든 간에, 자기에게는 모두 보인다고 선언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경건이 하나님의 시인을 받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반역에 대한 극히 은밀한 생각도 없는 맑은 양심을 가져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께서는 그의 신성(Godhead)의 영광이 외면적 고백에서 뿐 아니라, 그 자신의 목전에서 완전하며 부패하지 않기를 요구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눈은 우리 마음의 가장 비밀한 구석까지도 꿰뚫어 보십니다. 칼빈의 이 가르침을 따르는 태도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고 하나님과 관계된 일이 아니면 어떤 일도 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우리의 지침으로 삼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의 목표로 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생각하고 사귀고 일하는 모든 것에서 하나님을 언제나 먼저 생각해야 합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까지 이 계명을 온전히 지키신 분은 예수님 이외에는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시기에 이러한 의무를 요구하시는가요.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는 네 하나님 여호와니라(출 20:2)는 말씀에 담겨있습니다. 이 말씀은 히브리어로 야웨 엘로헤카(Yaweh Eloheka)라고 합니다. 우리에게 이 계명을 말씀하시는 분이 바로 참되신 하나님이시고 시작도 끝도 없으신 하나님이시기에 우리가 그에게 순종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니라(출 3:14)고 말씀하시는 스스로 존재하시는 유일한 신이십니다. 하나님을 존재하시게 한 존재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아무에게도 책임이 없으시고 스스로 충족하십니다. 이렇지 못한 존재는 진정한 신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의 하나님은 무슨 신이라고 하는 열등한 존재들과 완전히 다르시기에 우리에게 최고의 예배를 요구하실 수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의 조상이 되는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 우르를 떠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것은 메소포타미아의 아무런 가치도 없는 잡다한 신들을 섬기기보다는 참되신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고 복 받게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창 12:1-3
    • G.QT
    • 기독교강요 영어수업
    2020-10-26
  • 기독교강요 영어 수업 - Lesson XII 도덕의 법칙
    Lesson XII 도덕의 법칙Moral Law 서울이 39.6도로 역대 최고를 기록한 올해의 여름날처럼 연일 혹독한 무더위가 이어지다 보면 사람을 대하는 일이 내 마음처럼 되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마음도 지치고 고달프게 됩니다. 그러나 문제는 내 밖이 아니라 내 안에 있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옆을 돌아보면서 안부를 묻고 작은 것이라도 챙겨줄 일입니다. 여름이 익으면 가을이 된다는 말이 나를 살게 합니다. 불완전하기에 은혜가 넘친다는 말이 나를 살게 합니다. 그중에서도 나를 신나게 살게 하는 건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우리는 사람을 사랑할 수밖에 없으니 사람 사이에 잔잔한 믿음의 강물이 흐르도록 할 일입니다. 가장 어리석어 보이는 질문을 하는 사람. 그 사람이 가장 힘 있는 사람입니다. 왜 그럴까요. 가장 근본적인 질문은 어리석어 보이기 때문이지요. 그러나 그런 질문을 하지 않는 저기 깨지기 쉬운 그러나 세상에서 드세기로 유명한 사람이 갑니다. 그러나 믿음이 부족해 명예가 무너지고 재산이 파손되고 건강이 부서진 ‘파손주의’라고 써진 등짝을 보세요. 잔소리에 깨지고 뼈있는 말에 파손되고 속임 말에 넘어간 가슴에 ‘취급주의’가 새겨진 사람을 보세요. 슬픔에 갇힌 질그릇 하나가 갑니다. 어느 때 사람은 유리 같습니다. 어찌 할 사이 없이 명예와 재산과 건강을 잃기도 하고 무정한 말들에 찔리고 부서지기도 합니다. 그는 골고다의 그리스도처럼 걸음마다 피를 흘리는 것 같습니다. 어떻게 취급할까요. 이 슬픈 질그릇을. 이 연약한 폭발물을. 우선 모두가 생각보다 쉽게 파손되지는 않는다고 말해야겠습니다. 서로 어지간히는 ‘주의’하므로. 깨졌다고 그냥 주저앉으려 하는 사람도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어떻게든 자기를 고치고 붙여서 다시 걸으려 하니까요. 진리를 알기 위해 애쓰던 초기에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저의 죄에서 구원해주십시오. 그러나 아직 다는 아닙니다.” 얼마 뒤 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한 가지 죄만 빼고 저의 죄에서 구원해주십시오. " 얼마 뒤 그는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저의 모든 죄에서 지금 구원해주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로 아우구스티누스가 죄와 악을 떠나기로 굳게 마음을 먹자 그렇게 되었습니다. 사실 죄와 악에 끌리는 사람은 이런 말에 절어있는 사람일 수 있습니다. “중독성 없이는 쾌락이란 없지. 허무로 먼지로 죽음으로 사라지고 있다는 느낌 없이는 중독성이란 없지.” 칼빈의 신학은 그의 평생에 걸쳐 사실상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1536년 라틴어 초판이 나온 이래 1559년 마지막 판에 이르기까지 『기독교강요』의 내용은 확장되었습니다. 초판은 단 1권 6장에서 출발해 마지막 판은 4권 80장으로 끝났습니다. 4권 각 책은 사도신경(creed kriːd])의 신앙고백을 따라 이름을 붙였습니다. 1권(Book 1) 창조주 하나님에 대해(on God the Creator), 2권(Book 2) 그리스도 안의 구세주(on the Redeemer in Christ), 3권(Book 3) 성령을 통한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 것에 대해(on receiving the Grace of Christ through the Holy Spirit), 4권(Book 4) 그리스도 또는 교회의 사회(on the Society of Christ or the Church) 등의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 책의 시간은 기억의 시간, 믿음의 시간, 개혁의 시간입니다. 칼빈의 전기 작가 파커(Parker 1995, pp. 1314)는 이렇게 말합니다. The first statement in the Institutes acknowledges its central theme. It states that the sum of human wisdom consists of two parts: the knowledge of God and of ourselves. Calvin argues that the knowledge of God is not inherent in humanity nor can it be discovered by observing this world. The only way to obtain it is to study scripture. Calvin writes, “For anyone to arrive at God the Creator he needs Scripture as his Guide and Teacher.”『기독교강요』의 첫 진술이 그 책의 중심 주제를 나타냅니다. 그것은 인간의 지혜는 하나님과 우리 자신의 지식(the knowledge of God and of ourselves) 두 요소로 이루어져 있다고 진술합니다. 칼빈은 하나님의 지식은 인간 본성에 본래 있는 것이 아니고 또한 이 세상을 관찰함으로써 발견할 수도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것을 얻는 유일한 길은 성경을 공부하는 것입니다. 칼빈은 “창조주 하나님에게 도달하려고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그의 인도자와 선생으로 성경이 필요합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칼빈은 『기독교강요』 제2권 제8장 1항에서 우리의 죄와 연관이 있는 도덕의 규칙에 대해 설명합니다. 1. I believe it will not be out of place here to introduce the Ten Commandments of the Law, and give a brief exposition of them. In this way it will be made more clear, that the worship which God originally prescribed is still in force a point to which I have already adverted; 나는 여기에서 율법의 십계명을 소개하고 간략한(brief briːf) 설명(exposition kspzn)을 하는 것이 부적절하지(out of place) 않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렇게 하여(In this way) 하나님께서 원래 규정하신(prescribe priskrib) 예배(worship wːrip)는 내가 이미(제7장 ‘율법의 목적’에 대해) 언급했던(advert ædvːrt) 요점(point pint)이 여전히 유효합니다(in force). and then a second point will be confirmedviz. that the Jews not only learned from the law wherein true piety consisted, but from feeling their inability to observe it were overawed by the fear of judgments and so drawn, even against their will, towards the Mediator. 그리고 다음에 둘째 요점이 확증((confirm knfːrm))될 것입니다. 즉(viz 리틴어 videlicet ‘비데리케트’의 약어인데 보통 영어로 ‘namely nimli’ ‘네임리’라고 읽음) 유대인들은 그 곳에(wherein hwεrn) 참된 경건(piety piti)이 들어있는(consist knsst) 율법에서 배웠을 뿐만 아니라 자기들이 그것을 준수할(observe bzːrv) 수 없다는 것(inability nblti)을 감지했기 때문에(from feeling) 심판의 두려움으로 억눌렸고(overawe uvrː) 심지어(even ːvn) 그들의 의지에 반하면서도(against their will) 중보자(mediator mːdiitr)에게 마음이 끌리게(drawn drːn ‘draw drː’의 과거분사) 되었다는 것이 확증될 것입니다. In giving a summary of what constitutes the true knowledge of God, we showed that we cannot form any just conception of the character of God, without feeling overawed by his majesty, and bound to do him service. In regard to the knowledge of ourselves, we showed that it principally consists in renouncing all idea of our own strength, and divesting ourselves of all confidence in our own righteousness, while, on the other hand, under a full consciousness of our wants, we learn true humility and self-abasement. 그런데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을 이루고 있는 것을 요약(summary smri)했을 때 우리가 그의 존엄(majesty mdisti)에 위압되고(overawed uvrːd) 그를 섬겨야 한다는(bound to do him service) 느낌을 받지 않으면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어떤 바른 개념(conception knspn)도 품을(form fːrm) 수 없다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 자신에 대한 지식과 관련하여(regard rigːrd) 우리 자신의 힘(strength streŋkθ)에 대한 모든 사상을 포기하고(renounce rinuns), 우리 자신의 의에 대한 모든 신념을 스스로 벗어버리는(divest divst) 한편(while hwail) 이와 반대로(on the other hand) 우리 자신의 빈곤에 대한 완전한 자각(consciousness knsnis)하에(under ndr) 우리는 진실한 겸손(humility hjuːmlti)과 자기 비하(self-abasement bismnt)를 배우게 된다는 사실을 보았습니다. Both of these the Lord accomplishes by his Law, first, when, in assertion of the right which he has to our obedience, he calls us to reverence his majesty, and prescribes the conduct by which this reverence is manifested; and, secondly, when, by promulgating the rule of his justice, he charges us both with impotence and unrighteousness. ...첫째로 그가 우리의 복종을 받으셔야 하는 권리의 주장(assertion sːrn)에 있어서 그는 우리에게 그의 위엄에 대한 숭배(reverence rvrns)를 요구하시고, 그리고 주님은 이 숭배가 나타나는(manifest mnfst) 행위(conduct kndkt)를 규정하는(prescribe priskrib) 그의 율법으로(by his Law) 이 두 가지 일을 다(both of these) 이루십니다(accomplish kmpli). 그리고 둘째로, 그는 무기력(impotence mptns)과 불의(unrighteousness)로 우리를 책망하실 때 그의 정의(justice dsti)의 규칙을 공표(promulgate prmlgit)하심으로써 이 두 가지 일을 다 이루십니다. ... 소요리문답은 이렇게 묻고 대답합니다. 문 39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본분이 무엇인가.답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요구하시는 본분은 그 나타내 보이신 뜻을 복종하는 것입니다. 문 40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복종할 규칙으로 사람에게 처음 나타내 보이신 것이 무엇인가.답 하나님께서 자기에게 복종할 규칙으로 사람에게 처음 나타내 보이신 것은 도덕의 법칙입니다. 문 41 이 도덕의 법칙이 어디에 간략히 포함되었는가. 답 이 도덕의 법칙은 십계명에 간략히 포함되었습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정의의 여신은 디케(Dike)입니다. 디케는 정의(正義) 혹은 정도(正道)라는뜻입니다. 로마시대에는 유스티티아(Justitia)로 대체됐는데 정의를 뜻하는 영어 저스티스(justice)는 여기서 유래했습니다. 디케는 칼을 들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졌고 유스티티아는 여기에 형평을 지킨다는 의미로 저울이 더해졌습니다. 정의의 여신은 오른손에는 칼 왼손에는 저울을 들고 있는 것으로 묘사됩니다. 칼은 정확한 판정에 따라 정의가 실현되기 위해서는 힘이 필요하다는 뜻이며 저울은 엄정한 정의의 기준을 상징합니다. 디케가 안대로 눈을 가리고 있는 이유는 정의와 불의의 판정에 있어 사사로움을 떠나 공평함을 유지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런데 스위스 대법원 건물에 거대한 그림이 하나 걸려있습니다. 폴 로버트(Paul Robert)라는 화가가 그린 그 그림의 제목은 재판관들을 가르치는 정의의 여신(Justice Instructing Judges)입니다. 그림의 전경에는 소송 당사자들이 그려져 있습니다. 남편을 고소한 아내 건축주를 고소한 건축가 주정뱅이를 고소한 술집 주인 등이 그려져 있습니다. 소송 당사자들 위에는 작은 하얀 장식용 가슴판이 달린 법의를 입은 스위스 재판관들이 서있습니다. 이 재판관들이 다양한 소송 당사자들을 어떻게 재판해야 할까요. 이 그림에 그 답이 그려져 있습니다. 정의의 여신은 대개 눈을 가린 채 손에 든 칼을 위로 치켜들고 서있습니다. 그런데 이 그림에 그려진 정의의 여신은 눈을 가리지 않고 손에 든 칼을 아래로 향하고 서있습니다. 그 칼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적힌 책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 책 The Bible에 인간이 복종해야 할 하나님의 십계명이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에게 복종하는 것은 인간의 의무입니다. 하나님은 창조자이시고 인간은 그의 피조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셨으므로 그에게 원하시는 것을 요구할 권리가 있습니다. 사람은 피조물이기에 자기 멋대로 할 권리가 없습니다. 오히려 사람이 할 수 있는 유일한 권리는 하나님이 말씀하신 법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율법의 주요 목적은 우리가 죄인이라는 것과 우리에게 구세주가 필요하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이 율법은 그리스도가 모든 인간의 죄를 위해서 죽으셨던 십자가의 대속 형벌을 통하여 종식되었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렘 31:31 율법에서 십계명이 차지하는 위치는 중요합니다. 율법이 죄를 깨닫게 해주기 위해서는 우리가 지은 개별적인 죄들을 구체적으로 먼저 깨닫게 해주어야 합니다.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자신이 완전한 자가 아니라는 것과 같은 뜻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자신이 우상 숭배자와 살인자와 간음자와 도둑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바로 십계명은 이러한 역할을 담당합니다. 그리고 십계명이 특별히 가치가 있는 것은 종합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주신 첫째 판의 계명들은 그리스도께서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라고 말씀하신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의무의 범주에 속합니다. 이 계명들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 22:37)는 말씀으로 요약이 됩니다. 둘째 판의 계명들은 우리의 이웃에 대한 우리의 의무의 범주에 속합니다. 이 계명들은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마 19:19)는 말씀으로 요약이 됩니다. 예수님은 더 나아가서 이 요약된 계명들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40)고 정의하셨습니다. 2020-10-19
    • G.QT
    • 기독교강요 영어수업
    2020-10-19
  • 기독교강요 영어 수업 - Lesson XI 등대
    헤라클레스 등대 Lesson XI 등대Lighthouse 우리가 사는 행성은 차라리 수구(水球) ‘물로 된 공’ 또는 해구(海球) ‘바다로 된 공’이라 불러야 옳습니다. 바다가 지구 표면 70%를 차지하기 때문입니다. 그 옛날 항해에 나선 바다 사나이는 어두운 밤 별빛을 따르며 마음 졸이다 멀리 땅에서 오는 한 줄기 불빛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을 것입니다. 등대가 언제 생겼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등대(lighthouse lithus)는 배를 위험에서 벗어나도록 안내해주기 위해 해안 가까이 세워진 강력한 빛을 비추는 탑입니다. 항해의 역사와 비슷할 것으로 짐작됩니다. 해안 마을의 불빛도 갈 길을 알려주는 표지 역할을 했습니다. 스페인에는 1900년이 넘은 등대가 있었습니다. 이름은 토레 데 에르쿨레스(Torre de Hercules) 바로 헤라클레스의 탑이지요. 헤라클레스의 탑은 ‘코스타 다 모르테(Costa da Morte)’ 즉 ‘죽음의 해변’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진 위험한 해안선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로마인들에게 세계는 평평했습니다. 해안선은 세상의 끝을 의미한다고 믿었습니다. 코스타 다 모르테 죽음의 해변이 그러했습니다. 세상의 끝에 세워진 탑을 보며 그들이 무슨 생각을 했을지 궁금합니다. 몇 세기 동안 수천 명의 선원들의 목숨을 구해주었던 헤라클레스의 탑은 오늘날 국제적으로 명성이 높은 랜드 마크가 되었습니다. 중세와 그 이전에 제작된 지도에도 이 탑이 그려져 있습니다. 등대 이름에 왜 ‘헤라클레스’(Herakles)가 들어가는지 궁금하시죠. 그는 그리스 신화의 제우스 아들인데 미쳐서 아내와 아들을 죽여 그 죗값으로 신으로부터 열두 가지 명령을 받았습니다. 그 명령 가운데 하나로 헤라클레스는 머리 3개 몸 3개인 거대 괴수 게리오네스(Geryon)와 격투를 벌여 쓰러뜨리고 현재 라 코루나(La Coruna)에 해당되는 장소에 괴물의 머리를 묻어 그 자리에 탑을 지을 것을 명했다고 합니다. 이 같은 이유로 헤라클레스의 탑이라는 이름이 붙었습니다. 헤라클레스의 탑은 18세기에 개조되었는데 지금도 등대로 작동되고 있습니다. 이 탑은 높이 57m의 암석 위에 서 있으며 탑 자체의 길이는 55m입니다. 탑 안에는 242개의 계단이 있으며, 수면으로부터 112m 높이에서 깜빡이는 불빛은 50㎞가 넘는 거리에서도 눈에 잘 들어온다고 해요. 기원전 62년 카이사르가 이곳을 정벌한 후 등대는 로마 제국 선단(船團)이 영국·아일랜드로 가는 길목을 밝혔습니다. 로마의 대서양 진출을 보여주는 기록물입니다. 등대는 예술가에게도 영감을 줬습니다. 스페인 남부 출신으로 라 코루나 예술학교를 다닌 소년 파블로 피카소(Pablo Ruiz Picasso 1881년 10월 25일 1973년 4월 8일)는 헤라클레스 등대가 서 있는 해변을 거닐며 예술혼을 꽃피웠습니다. 피카소 본인 스스로 “12살 때 라파엘로만큼 그렸다”고 말한 그가 헤라클레스 등대가 있는 풍경을 그린 초기 작품도 있습니다. 해변과 연관된 이런 일화도 있습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피카소가 바닷가에 놀러갔는데 어떤 아이가 종이와 펜을 들고 나타나 그림을 그려달라고 했습니다. 물론 아이의 부모가 피카소를 알아보고 아이에게 시킨 것입니다. 피카소는 종이 대신 아이의 등에다 그림을 그려서 돌려보내고 낄낄거리며 말했다고 합니다. “저 애 부모는 저 그림 지우지 못 할걸.” 물론 이전에도 등대는 있었습니다.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파로스(Pharos) 등대는 14세기 지진으로 무너지기 전까지 1500년간 지중해를 밝혔습니다. 파로스 등대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기원전 280~247년 사이 파로스 섬에 세워졌습니다. 그 높이가 40층 건물 규모의 120~140m에 달해 기자의 피라미드와 함께 고대 7대 불가사의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이 등대가 956년부터 1323년 사이 이곳에서 발생한 세 번의 지진으로 크게 훼손되었습니다. 낮에는 햇빛을 거울로 반사하고 밤에는 장작을 때 불을 밝혔다고 합니다. 알렉산더 대왕이 이 도시를 건설하라고 명령한 것이 기원전 332년이고 죽은 것이 323년이니 그로부터 약 50년쯤 후 등대가 세워졌습니다. 등대는 가로 세로 8m의 사각형 기단 위에 2단의 원통형 구조물로 이루어졌고 그 위로 굴뚝이 있어 불이 나오도록 했습니다. 이러한 등대 구조가 후대 모든 등대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안달루시아 출신의 아라비아 여행가 이븐 무하마드 엘 발라위(Ibn Mohammed el-Balawi)는 1165년 알렉산드리아를 방문해 파로스 등대를 보고 다음과 같은 기록을 남겼습니다. 파로스 등대는 섬의 끝에 솟아 있다. 건물은 한 변이 8.5m인 육면체다. 동남쪽으로 바다가 감싸고 있다. 등대의 둘레로는 높이 6.5m의 벽이 감싸고 있다. 바닥은 등대를 향해 올라가는 형태로 되어 있고 안으로 183m의 경사로가 나 있다. 이 길은 곡선의 아치 형태로 등대 꼭대기까지 이어진다. 아치는 16개나 된다. 파로스 등대는 사라졌지만 그 모습은 알렉산드리아 시의 상징으로 남아있다. 시의 깃발과 문장에 모두 파로스 등대가 들어있다. 이탈리아 제노바엔 1128년 점등한 란테르나(Lanterna) 등대가 있었습니다. 제노바는 베네치아와 함께 중세 지중해 패권을 다툰 해양 세력이었습니다. 당대 제노바의 무역 수입은 프랑스 왕국 전체 세입의 3배였다고 합니다. 신대륙을 찾은 콜럼버스 고향이 제노바입니다. 1449년 란테르나 등대 책임자는 콜럼버스의 삼촌 안토니오 콜롬보였습니다. 콜럼버스 집안이 바다 일과 깊은 관련이 있었습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탐험가 콜럼버스가 태어난 토양이 있었던 것입니다. 등대 가까운 구도심에 콜럼버스 생가가 있습니다. 란테르나 등대는 우리에게도 친숙합니다. 일본 만화영화 엄마 찾아 삼만리는 19세기 제노바가 배경입니다. 아르헨티나로 돈 벌러 떠난 엄마를 그리며 주인공 마르코가 앉아 있던 곳이 란테르나 등대였습니다. 2018년 긴긴 폭염의 여름 끝에 아침저녁으로 가을의 서느런 발소리가 들립니다. 가을은 풍요와 조락(凋落)의 계절입니다. 하나님이 베푸시는 풍요를 인간이 얻듯 하나님이 예정하신 조락도 인간의 기회가 돼야 합니다. 그 고독한 시간을 갈아 믿음의 씨앗을 뿌려야 합니다. 정결하고 단단한 성화의 소망을 낙엽 지는 거리에 내놓는 일. 꼿꼿하게 기도하는 일. 등대는 그저 역사만이 아니라 문학적 상상력을 자극하고 신앙적 은유를 나타내는 상징물입니다. 한 치 앞도 내다보기 어려운 시절 2018년 갈 길을 밝힐 등대는 어디에 있을까요. 삶의 등대와 같은 좌우명(座右銘)은 개인이나 단체나 국가에서 특별한 동기 부여를 위해 만드는 표어입니다. 좌우명이라는 말은 후한(後漢)의 학자 최원(崔瑗)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자리(座)의 오른쪽(右)에 일생의 지침이 될 좋은 글을 쇠붙이에 새겨 놓고(銘) 생활의 거울로 삼은 데서 유래되었습니다. 그렇게 우리 믿음의 자리(座) 오른쪽(右)에 마음에 새겨 놓고(銘) 믿음의 거울로 삼을 좌우명(motto mtou)을 칼빈은 『기독교강요』 제3권 제21장 2항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칼빈은 총신 출신이면 거의 말씀이 가는 데까지 가고 멈추는 데서 멈춘다(Where the Word goes we should go, where the Word stops we should stop.)고 되뇌는 그의 좌우명을 아우구스티누스의 말로 시작합니다. “We have come into the way of faith,” says Augustine: “let us constantly adhere to it. It leads to the chambers of the king, in which are hidden all the treasures of wisdom and knowledge. For our Lord Jesus Christ did not speak invidiously to his great and most select disciples when he said, I have yet many things to say unto you, but ye cannot bear them now(John 16:12). We must walk, advance, increase, that our hearts may be able to comprehend those things which they cannot now comprehend. But if the last day shall find us making progress, we shall there learn what here we could not”(August. Hom. in Joann). 아우구스티누스는 말합니다. “우리는 믿음의 길로 가고 있습니다. 항상(constantly knstntli) 그 길을 고수합시다(adhere ædhr). 그 길은 왕의 방(chamber timbr)들로 인도합니다. 그 방들에는 지혜와 지식의 보물(treasure trr)들이 숨겨져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치 못하리라’(요 16:12) 말씀하셨을 때 그의 중요하고 아주 엄선한(select silkt) 제자(disciple disipl)들에게 차별적으로(invidiously invdisli)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제자들이 지금 이해할 수 없는 이것들을 우리의 심장이 이해할 수 있도록 우리는 걷고(walk wːk) 전진하고(advance ædvns) 늘려야(increase inkrːs) 합니다. 그러나 만일 마지막 날 우리가 전진(progress prgres)한 것을 발견하게(find faind) 된다면 우리는 여기에서 배울 수 없었던 것을 거기에서 배우게(learn lːrn) 될 것입니다.” (August. Hom. in Joann). If we give due weight to the consideration, that the word of the Lord is the only way which can conduct us to the investigation of whatever it is lawful for us to hold with regard to himis the only light which can enable us to discern what we ought to see with regard to him, it will curb and restrain all presumption. 주의 말씀이(the word of the Lord) 주를 존중하기 위해 우리에게 합법적인(lawful lːfl) 것은 무엇이든 조사하게 인도할(conduct kndkt) 수 있는 유일한 길이고, 우리가 주에 관해 무엇을 보아야 할지를 분별할(discern disːrn) 수 있게 해주는 유일한 빛이라는 고려의 대상(consideration knsdrin)에 우리가 정당한(due djuː) 값어치(weight weit)를 쳐준다면 그것(주의 말씀)이 모든 억측(presumption prizmpn)을 제어하고(curb kːrb) 억제할(restrain ristrin) 것입니다. For it will show us that the moment we go beyond the bounds of the word we are out of the course, in darkness, and must every now and then stumble, go astray, and fall. Let it, therefore, be our first principle that to desire any other knowledge of predestination than that which is expounded by the word of God, is no less infatuated than to walk where there is no path, or to seek light in darkness. Let us not be ashamed to be ignorant in a matter in which ignorance is learning.왜냐하면 우리가 말씀의 경계(bound baund)들을 넘어서(beyond bijnd) 가는 순간(moment mumnt) 우리는 암흑(darkness dːrknis) 속에서 경로(course kːrs)를 벗어나게 되고(out of utv) 그리고 때때로(every now and then) 넘어지고(stumble stmbl) 길을 잃고(astray stri) 그리고 떨어진다(fall fːl)는 것이 틀림없다는(must mst) 것을 그것(the word of the Lord)이 우리에게 보여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정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해석하기(expound ikspund)보다 예정에 대한 어떤 다른 지식을 갈망하는(desire dizir) 것은 길이 전혀 없는 곳을 걷거나 어둠 속에서 빛을 찾는 것 못지않게 분별을 잃는(infatuate inftuit) 것과 마찬가지(no less ... than …못지않게 …와 마찬가지로)라는 것을 우리의 첫째(first fːrst) 원칙(principle prnspl)으로 삼도록 합시다. 무지(ignorance gnrns)가 학식(learning lːrniŋ)이 되는 어떤 문제(matter mtr)에서 무지하게 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ashamed imd) 맙시다. Rather let us willingly abstain from the search after knowledge, to which it is both foolish as well as perilous, and even fatal to aspire. If an unrestrained imagination urges us, our proper course is to oppose it with these words, “It is not good to eat much honey: so for men to search their own glory is not glory,”(Prov. 25:27). There is good reason to dread a presumption which can only plunge us headlong into ruin. 오히려(rather rðr) 그것을 열망하는(aspire spir) 것이 위험할(perilous prls)뿐만 아니라 어리석기(foolish fːli)도 하고 심지어 치명적(fatal fitl)이기까지 한 지식을 쫓는 탐구(search sːrt)를 자진해서(willingly wliŋli) 삼가도록(abstain æbstin) 합시다. 만일 억제되지 않은(unrestrained nristrind) 상상(imagination imædnin)이 우리를 다그치게(urge ːrd) 된다면 우리의 올바른(proper prpr) 행로는 “꿀을 많이 먹는 것이 좋지 못하고 자기의 영예를 구하는 것이 헛되니라”(잠 25:27)는 말씀과 반대가 될 것입니다. 다만 우리를 앞뒤 가리지 않고(headlong hdlːŋ) 파멸로 몰아넣을 수 있는 억측(presumption prizmpn)을 두려워할(dread dred) 합당한(good gud) 이유(reason rːzn)가 거기(말씀)에 있습니다. 칼빈은 우리가 말씀의 경계들을 넘어가는 순간 우리는 어둠 속에서 경로를 벗어나게 되고 그리고 때때로 넘어지고 길을 잃고 떨어지는 것이 틀림없다는 것을 주의 말씀이 우리에게 보여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래서 칼빈의 가르침에 따라 개혁주의를 따르는 우리의 좌우명 즉 모토는 말씀이 가는 데까지 가고 말씀이 멈추는 데서 멈춘다(Where the Word goes we should go, where the Word stops we should stop)입니다. 우리에게도 이것이 우리의 좌우명이 되도록 합시다. “꿀을 많이 먹는 것이 좋지 못하고 자기의 영예를 구하는 것이 헛되니라”(잠 25:27)는 말씀처럼 되지 않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러기 위해 말씀이 우리의 등대가 되어야 합니다. 영영 사전은 등대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A lighthouse is a tower with a powerful light that is built on or near the shore to guide ships away from danger.등대(lighthouse lithus)는 배를 위험에서 멀리 떨어지도록(away wi) 안내해주기 위해 해안(shore ːr) 가까이 세워진 강력한(powerful purfl) 빛을 비추는 탑(tower tur)이다. 그래서 칼빈은 『기독교강요』 제3권 제21장 2항에서 성경의 경계를 벗어난 해석을 하려는 자세에 대해 가르칩니다. “It(the word of God) will show us that the moment we go beyond the bounds of the word we are out of the course, in darkness, and must every now and then stumble, go astray, and fall.”“우리가 말씀의 경계들을 넘어가는 순간 우리는 어둠 속에서 경로를 벗어나게 되고 그리고 때때로 넘어지고 길을 잃고 떨어지는 것이 틀림없다는 것을 주의 말씀이 우리에게 보여줄 것입니다.” 2020-10-05 주의 말씀이 배를 인도하는 등대처럼 우리의 눈과 마음을 밝혀 줄 것입니다.
    • G.QT
    • 기독교강요 영어수업
    2020-10-05
  • 기독교강요 영어 수업 - Lesson X 어떤 사람은 구원에 그리고 다른 사람은 멸망에
    1589년 제네바성경의 문답 형식 예정론 Lesson X 어떤 사람은 구원에 그리고 다른 사람은 멸망에Some to salvation and others to destruction 주여, 구원의 때가 왔습니다.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마지막 예배들이 무르익도록 명해주시고 이틀만 더 은혜의 날을 베푸시어 믿음 열매들의 무르익음을 재촉하시고 진한 꿀물에는 마지막 회개가 스미게 하소서. 지금 믿음이 없는 사람은 무섭게 더운 이 여름 예배를 드리지 않습니다. 더위 속 혼자인 사람은 그렇게 오래 남아 깨어서 믿음과 뜨겁게 다투며 긴 변명으로 부채질할 것입니다. 혹간 태풍이 길을 잃은 날에는 강한 불안이 가로수들 사이로 이리저리 헤맬 것입니다. 풍경이 계절이 세상이 우리만 빼고 자전하는 듯 시간은 끊임없이 앞을 향해 뻗어나가는데 예정에 없던 어느 한 순간에 붙들린 채 제자리에 멈춰 설 수밖에 없을 때 그때 우리는 어디로 갈 수 있을까요. 마음 안에선 하얀 눈이 흩날리는데 바깥은 온통 붉은 여름일 때 말입니다. 김애란의 소설 『바깥은 여름』에 실린 일곱 단편 가운데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에서 주인공 명지는 남편 도경을 사고로 잃고 에든버러로 여행을 떠납니다. 그녀는 남편을 잃은 후 ‘고통에 대해’ ‘인간에 대해’ 묻던 ‘나’가 끝까지 붙들고 있던 질문은 ‘나를 남겨두고 어떻게 다른 사람을 구하려 자기 삶을 버릴 수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남겨질 사람은 생각하지 않은 채 계곡에 빠진 제자를 구하기 위해 어떻게 물속에 뛰어들 수 있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제법 알려진 관광지임에도 그는 관광 명소를 찾지 않고 신문을 보지 않고 운동을 하지 않고 친구를 사귀지 않고 티브이를 켜지 않고 운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숙소에 틀어박히다시피 한 그의 유일한 말벗은 스마트폰 인공지능 음성 앱이었습니다. 주위 인간들에게선 찾을 수 없던 예의를 갖춘 이 앱에게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되나요’라는 질문을 던지자 기계는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라고 반문합니다. 여행을 끝내고 돌아온 명지는 죽은 남편이 구하려 했던 학생의 누나한테서 “겁이 많은 지용이가 마지막에 움켜쥔 게 차가운 물이 아니라 권도경 선생님 손이었습니다는 걸 생각하면 마음이 조금 놓여요”라는 내용이 담긴 편지를 받습니다. 몸이 불편한 지용 누이가 서투르게나마 보내준 편지 덕분에 명지는 남편의 선택을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게 됩니다. 탁상공론을 좋아하는 신학자들이 어느 더운 날 모여 『바깥은 여름』에 나오는 학생을 구하려다 죽은 남편이 하나님의 예정에 의한 것이냐 인간의 자유의지에 의한 것이냐에 대해 토론하고 있었습니다. 갈수록 논쟁이 뜨겁게 달아올랐습니다. 급기야 그들은 예정파와 자유의지파로 패가 갈리어 격렬하게 토론을 벌였습니다. 그런데 한 신학자가 어느 쪽에 가담해야 될지를 결정 못 하고 잠시 엉거주춤 서 있었습니다. 마침내 마음을 정한 그 신학자는 예정파가 있는 쪽으로 갔습니다. 그가 그 쪽으로 갔을 때 예정파의 신학자들이 그에게 물었습니다. 누가 당신을 이리로 보냈습니까. 그는 대답했습니다. 아무도 나를 보내지 않았습니다. 내 자유의지로 여기 왔습니다. 예정파의 사람들이 외쳤습니다. 자유의지라니요. 이쪽은 당신 자신의 자유의지로 올 수 있는 데가 아니요. 다른 데로 가보시오. 그는 몸을 돌려 자유의지파 쪽으로 갔습니다. 그가 그 쪽에 끼어들려고 하자 누군가 질문을 던졌습니다. 언제 당신은 우리와 함께하기로 결정했습니까. 그는 짜증난 얼굴로 퉁명스레 대꾸했습니다. 내가 결정하지 않았습니다. 저 쪽 사람들이 이리 보내서 왔습니다. 그들이 눈을 부라리며 외쳤습니다. 당신이 자신의 자유의지로 결정하지 않는다면 우리 쪽에 가담할 수가 없습니다. 그 사람은 예정파와 자유의지파 양 쪽에서 다 제외되고 말았습니다. 예정은 다음과 같이 정의할 수 있습니다. 예정은 하나님께서 피조물이 어떤 공로를 나타내기 이전에 하나님의 주권적이고 선하신 뜻으로 구원받을 사람을 미리 정하시고 선택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구원받을 자들을 예정하셨음을 분명하게 확증하는 것으로 보이는 말씀들이 있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안디옥에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을 때 사도 누가가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방인들이 듣고 기뻐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찬송하며 영생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는 다 믿더라 행 13:48 또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롬 8:28-30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구원을 받은 사람이 있고 그렇지 못한 사람이 있는 것에 대해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느니라 그런즉 어떠하냐 이스라엘이 구하는 그것을 얻지 못하고 오직 택하심을 입은 자가 얻었고 그 남은 자들은 우둔하여졌느니라 롬 11:6-7 이 말씀에서 바울은 택하심을 입은 자가 구원을 얻은 반면에 택하심을 입지 못한 자는 구원을 얻지 못하고 우둔하여졌다고 주장합니다. 바울은 또한 하나님의 예정이 이 세상의 창조 이전에 이루어졌음을 분명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의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 엡 1:4-6 더 나아가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하심을 받은 형제들아 너희를 택하심을 아노라 이는 우리 복음이 너희에게 말로만 이른 것이 아니라 또한 능력과 성령과 큰 확신으로 된 것임이라 살전 1:4-5 이 말씀에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사람들이 믿게 된 것은 하나님의 선택하신 예정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가 분명하게 알 수 있는 사실은 우리가 하나님의 예정을 받았느냐 못 받았느냐의 여부는 현재의 믿음을 통해서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지금 우리가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믿으면 창조 이전에 우리가 택함을 받은 것이고 믿지 않으면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고 부르신 이유를 우리의 행위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은혜 때문이라고 분명하게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딤후 1:9 『기독교강요』 제3권 제21장 1항에서 칼빈은 예정론을 다음의 표제 하에 다루고 있습니다. BOOK THIRD CHAPTER 21 OF THE ETERNAL ELECTION, BY WHICH GOD HAS PREDESTINATED SOME TO SALVATION, AND OTHERS TO DESTRUCTION.영원한(eternal itːrnl) 선택(election ilkn)에 대해, 그것으로(eternal election)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은 구원(salvation sælvin)에 그리고 다른 사람은 멸망(destruction distrkn)에 이르도록 예정하셨습니다(predestinate pridstnit). The covenant of life is not preached equally to all, and among those to whom it is preached, does not always meet with the same reception. This diversity displays the unsearchable depth of the divine judgment, and is without doubt subordinate to God's purpose of eternal election. 생명의 언약(covenant kvnnt)이 모두에게 동등하게(equally ːkwli) 전파된 것이 아니고 그리고 그것이 전파된 사람들 가운데에도 동일한 입회허가(reception rispn)를 반드시 받았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not always 반드시…라고는 할 수 없다 The rich are not always happy. 부자라고 해서 반드시 행복하다고는 할 수 없다). 이 차이(diversity divːrsti)는 신성한(divine divin) 심판(judgment ddmnt)의 헤아릴 수 없는(unsearchable nsːrtibl) 심원함(depth depθ)을 나타내고 그리고 하나님의 영원한 선택 목적을 확실히 중시하는 것입니다(subordinate sbːrdnit] ~ work to pleasure 일보다도 즐거움을 중시하다). But if it is plainly owing to the mere pleasure of God that salvation is spontaneously offered to some, while others have no access to it, great and difficult questions immediately arise, questions which are inexplicable, when just views are not entertained concerning election and predestination. To many this seems a perplexing subject, because they deem it most incongruous that of the great body of mankind some should be predestinated to salvation, and others to destruction. 그러나 만일 구원이 어떤 사람에게는 자동적으로(spontaneously spntinisli) 주어지면서 다른 사람은 그것에 전혀 접근조차 하지 못하는 것이 순전히(plainly pleinli) 하나님의 단순한 즐거움(pleasure plr) 때문이라면(owing to) 크고 난감한 의문들이 즉시(immediately imːditli) 일어나게(arise riz) 될 것입니다. 그리고 정당한 견해(view vjuː)들이 선택과 예정에 관해 받아들이지(entertain ntrtin) 못할 때 그것은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inexplicable inksplikbl) 의문(question kwstn)들이 될 것입니다. 많은 사람에게 이것은 당혹스러운(perplexing prplksiŋ) 주제(subject sbdikt)로 생각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어떤 사람에게는 구원을 예정하고 다른 사람에게는 멸망을 예정했다는 것은 거대 집단(great body) 인류(mankind mænkind)의 생각과 대부분(most moust) 일치가 안 되는(incongruous inkŋgrus) 말이라고 간주할(deem diːm) 것이기 때문입니다. (...중략) But before I enter on the subject, I have some remarks to address to two classes of men. 그러나 본 주제에 들어가기(enter ntr) 전에 나는 두 부류(class klæs) 사람들에 대한 어떤 소견(remark rimːrk)을 말하고자 합니다. The subject of predestination, which in itself is attended with considerable difficulty is rendered very perplexed and hence perilous by human curiosity, which cannot be restrained from wandering into forbidden paths and climbing to the clouds determined if it can that none of the secret things of God shall remain unexplored. 그 자체로 상당한(considerable knsdrbl) 어려움(difficulty dfiklti)이 수반되는(attend tnd) 예정의 주제는 아주 난감하게(perplex prplks) 만들고(render rndr) 그리고 금지된(forbidden frbdn) 길(path pæθ)들에 들어가고 구름 위로 올라가 헤매는 것을 억제할 수 없는 인간의 호기심(curiosity kjristi)이 생길 위험이(perilous prls) 있기 때문에 할 수 있다면(if it can) 하나님의 비밀(secret sːkrit)에 속하는 것(thing θiŋ)들은 아무도 탐구하지 못하게(unexplored niksplːrd) 그대로 두자는(remain rimin) 결심을 했습니다(determine ditːrmin). When we see many, some of them in other respects not bad men, every where rushing into this audacity and wickedness, it is necessary to remind them of the course of duty in this matter. 어디든 이러한 무모함(audacity ːdsti)과 사악함으로 돌진하는(rush r) 많은 사람을 우리가 볼 때 그들 가운데 다른 점(respect rispkt)들에서 나쁜 사람들이 아닌 사람들도 있지만 이 문제(matter mtr)에 있어서는 (지켜야 할) 의무(duty djːti)의 행로(course kːrs)를 그들에게 상기시켜 줄 필요(necessary nssri)가 있습니다. First, then, when they inquire into predestination, let then remember that they are penetrating into the recesses of the divine wisdom, where he who rushes forward securely and confidently, instead of satisfying his curiosity will enter in inextricable labyrinth. 그러면 먼저 그들이 예정(predestination pridstnin)에 대해 문의할(inquire inkwir) 때 그들이 신성한 지혜의 깊숙한 곳(recess rːses)으로 침투하고 있다는(penetrate pntrit) 것을 상기시켜(remember rimmbr) 주세요. 그가 안심하고 자신 있게 앞으로 돌진하는 곳은 그의 호기심(curiosity kjristi)을 만족시키기는커녕(instead of satisfying) 헤어날 수 없는(inextricable inkstrikbl) 미로(labyrinth lbrnθ)에 들어갈(enter ntr) 것이라는 것을 말입니다. For it is not right that man should with impunity pry into things which the Lord has been pleased to conceal within himself, and scan that sublime eternal wisdom which it is his pleasure that we should not apprehend but adore, that therein also his perfections may appear. Those secrets of his will, which he has seen it meet to manifest, are revealed in his word--revealed in so far as he knew to be conducive to our interest and welfare.왜냐하면 인간이 주님께서 자신 속에 감추고(conceal knsːl) 싶어하신(please pliːz) 것들에 벌을 받지 않고(impunity impjːnti) 파고들고(pry prai) 그리고 우리가 이해해야(apprehend æprihnd) 하는 것이 아니라 경모해야(adore dːr)하는 숭고하신(sublime sblim) 영원한 지혜를 자세히 조사하겠다고(scan skæn) 하는 것은 올바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거기에도(therein ðεrn) 주의 완전하심(perfection prfkn)이 나타날(appear pr) 수 있는 데 말입니다. 주께서 나타내기(manifest mnfst) 위해 보여주고 계시는 그의 뜻이 담긴 이 비밀들은 그가 아시는 한에 있어서(in so far as) 우리의 이익(interest ntrist)과 복지(welfare wlfr)에 이바지하기(conducive kndjːsiv) 위해 계시된(reveal rivːl) - 그의 말씀 속에 계시된 것들입니다. 칼빈은 예정과 유기에 대한 논증을 이론적으로 알기 위해 성경의 경계를 벗어나지 말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예정이 어떤 사람들을 구원하기 위한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이라면 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이해해야 될까요. 이것을 신학적인 용어로 유기(遺棄)라고 하는데 이렇게 정의할 수 있습니다. 유기(reprobation reprbin)란 창세 전에 하나님이 어떤 사람은 구원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그리고 하나님의 공의를 나타내기 위하여 그들의 죄를 심판하기로 정하신 하나님의 주권적인 결정입니다. 여러 가지 면에서 유기 교리는 성경의 모든 가르침 가운데에서 가장 이해하기 어렵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교리입니다. 성경은 이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옛적부터 이 판결을 받기로 미리 기록된 자니 경건하지 아니하여 우리 하나님의 은혜를 도리어 방탕한 것으로 바꾸고 홀로 하나이신 주재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니라 유 4 또한 바울 사도도 이것을 뒷받침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바로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으니 곧 너로 말미암아 내 능력을 보이고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그런즉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 혹 네가 내게 말하기를 그러면 하나님이 어찌하여 허물하시느냐 누가 그 뜻을 대적하느냐 하리니 이 사람아 네가 누구이기에 감히 하나님께 반문하느냐 지음을 받은 물건이 지은 자에게 어찌 나를 이같이 만들었느냐 말하겠느냐 토기장이가 진흙 한 덩어리로 하나는 귀히 쓸 그릇을 하나는 천히 쓸 그릇을 만들 권한이 없느냐 만일 하나님이 그의 진노를 보이시고 그의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또한 영광 받기로 예비하신 바 긍휼의 그릇에 대하여 그 영광의 풍성함을 알게 하고자 하셨을지라도 무슨 말 하리요 롬 9:17-23 우리가 유기 교리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겠지만 그것을 생각할 때마다 두려워 떨면서 하나님의 공의를 받아들이고 믿는 태도를 지녀야 할 것입니다. 선택의 근거는 하나님의 은혜인 반면 유기의 근거는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다시 말해서 선택의 원인은 하나님에게 있지만 유기의 원인은 죄인들에게 있다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선택과 유기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생각할 때마다 우리의 삶에 그것을 적용시켜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날마다 자신에게 물음을 던져야 합니다. 나는 왜 그리스도인인가. 하나님이 나를 구원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성경이 가르치는 예정 교리는 내가 그리스도인이 된 까닭이 영원 전에 하나님이 그의 사랑을 베풀어 주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기로 작정하셨을까요. 그것은 내가 사랑받을 만한 어떤 선한 것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사랑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설명이 필요 없는 이유입니다. 이 진리를 깨달으면 우리는 하나님 앞에 더욱 겸손해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요구할 아무런 자격이 없습니다. 우리의 구원은 온전히 하나님의 은혜에 기인합니다. 이 은혜에 우리가 보답할 수 있는 행위는 하나님을 즐거워하고 찬송하는 일 뿐입니다. 그래서 소요리문답 1조는 이렇게 묻고 답합니다. 1.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이 무엇인가.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하늘에서는 주 외에 누가 내게 있으리요 땅에서는 주 밖에 내가 사모할 이 없나입니다 내 육체와 마음은 쇠약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요 영원한 분깃이시라 시 73:25-26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아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롬 11:36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고전 10:31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알기 이전에 자신에게 유익하던 것을 배설물과 같은 해로운 것으로 여기고(빌 3:8) 하나님과 그의 뜻을 추구하기 위하여 언제나 기뻐하고 기도하고 감사하는 삶의 습관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이러한 삶의 습관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과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을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으로 삼는 삶의 태도입니다. 그 이유는 항상 기뻐하고 쉬지 않고 기도하고 범사에 감사하는 생활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칼빈의 『기독교강요』는 사람이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기 전에는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는 삶을 살 수가 없다고 가르칩니다. 이러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성경이 가르치는 구원의 진리를 배워야 합니다. 즉 인생의 목적에 대한 성경의 가르침을 알아야 합니다. 2020-09-21
    • G.QT
    • 기독교강요 영어수업
    2020-09-21
  • 기독교강요 영어 수업 - Lesson IX 신실한 조력자
    Idelette Stordeur de Bure (Boer) Calvin Lesson IX 신실한 조력자the faithful helper 제네바는 사계절이 분명한 곳입니다. 중세를 갓 지난 16세기 신앙 때문에 촘촘하게 중층적으로 서로 얽히게 되는 칼빈 시대에 물 같이 담백한 관계 맺음은 어떤 것일까요. 휘어진 달리아 이파리 하나가 허공에 몸을 기댑니다. 허공도 따라서 휘어지면서 달리아 이파리를 살그머니 보듬어 안습니다. 그들 사이에 누구도 모르는 잔잔한 기쁨의 강물이 흐릅니다. 부부 사이의 주고받음이 달리아 이파리와 허공 같으면 어떨까 싶습니다. 조용한 요구에 조용한 응답이 있는 것, 어떤 부름에 낮은 목소리의 대답이 있는 것, 모자라는 것을 가만히 채워주는 것, 말하지 않아도 짐작하고 헤아리는 것, 거만하지 않고 정중한 것, 들으면서 기다리는 것, 마음이 굳어지지 않게 살피는 것 등이 관계를 담백하게 가꾸지 않을까 싶습니다. 관계는 말로써 이뤄지는 것만은 아닐 것입니다. 얼음이 녹으면 봄이 된다는 말이 있습니다. 불완전하기에 세상이 풍요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관계라는 말이 나온 김에 영어의 관계대명사에 대해 알아보고자 합니다. 관계대명사(relative pronoun)란 두 문장을 연결하는데 관계하는 대명사로 앞의 명사를 설명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접속사 역할과 대명사 역할을 동시에 하게 됩니다. 관계대명사는 영어의 몇 문장만 읽어내려 가더라도 반드시 나올 정도로, 실제로 대단히 많이 사용됩니다. 따라서 반드시 읽혀 둘 필요가 있습니다. He's reading a book. 그는 책을 읽고 있습니다. The book has useful information. 그 책에는 유용한 정보가 있습니다. 이를 한 문장으로 쓰면 다음과 같이 쓰일 수 있습니다. He's reading a book which has useful information. 그는 유용한 정보가 있는 책을 읽고 있습니다. which가 서로 다른 두 문장을 붙였다는 데서 접속사 성격을 가지며, which가 ‘a book’ 대신에 쓰였다는 데서 대명사 성격도 있습니다. 그런데 종속절의 일부 대상을 관계대명사로 대신해서 쓰는 것이라서 관계대명사 뒤에 오는 말은 불완전한 문장일 수밖에 없습니다. 위의 문장을 다시 봅시다. which 뒤에 있는 ‘has useful information.’은 주어가 비어있으므로 불완전한 문장입니다. 참고로 관계대명사로 특정 대상을 받았는데 관계사절 맨 끝에 전치사가 목적어 없이 혼자 남는다면 그 전치사는 관계대명사 앞으로 보낼 수 있습니다. 한국어에선 관계사가 따로 없기에 해석할 때 관계사에도 뜻을 붙여 해석해야 합니다. 그런데 저게 영어 용법 자체에도 그리 뜻이 있지 않다 보니 적당히 재량으로 넘기는 게 좋습니다. 위의 예시로 예를 들자면 이렇습니다. He's reading a book which has useful information. 그는 그것에(which) 어떤 유용한 정보가 있는 책을 읽고 있습니다. 정도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그러나 정말로 직역하자면 '그는 책을 읽고 있는데 그것은 어느 유용한 정보가 있습니다'로 해석되나 이는 비제한적 용법에 따른 해석이 돼버리니 올바르게 해석하자면 틀리는 해석이 됩니다. 사실 관계대명사만 해석이 되면 웬만한 원서를 독해하는 것이 문법 면에서 크게 어렵지는 않게 됩니다. 관계대명사도 대명사이므로 앞에 오는 명사가 있게 되는데 그게 바로 선행사입니다. 이 선행사가 관계대명사가 받는 대상이며, 사람일 경우 who, 사람이 아닐 경우 which를 써야 합니다. that은 사람이나 사물 다 사용 가능하지만 소유격으로 쓰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사람이 아니면 원칙적으로 소유를 할 수 없으니 소유격이 없지만, 소유격을 써야 하는 경우가 많으니 사람의 소유격인 whose나 전치사와 함께 오는 of which를 빌려 쓰게 됩니다. 여기서 주격, 소유격, 목적격, 즉 격을 결정하는 것은 선행사가 아니라 관계대명사절 안에서의 기능과 위치에 달려 있습니다. 1. 선행사 뒤의 관계사절에서 주어 역할을 하면 주격 2. 관계사절에서 소유격 역할을 하면 소유격 3. 관계사절에서 목적어 역할을 하면 목적격입니다. 관계대명사가 받는 대상(선행사)이 사람인 경우에 씁니다. 주격은 who, 소유격은 whose, 목적격은 whom입니다. 주격 : This is my friend who is very kind. 이쪽은 아주 친절한 친구입니다. 소유격 : I met Leah whose eyes are attractive. 나는 눈이 매력적인 레아를 만났습니다.목적격 : The criminal was her husband she had trusted. 범인은 그녀가 신뢰했었던 남편이었습니다. 선행사가 사람이 아니면 which를 씁니다. 주격과 목적격은 which, 소유격은 whose입니다. 주격 : We built the house which has three rooms. 우리는 3개의 방이 있는 집을 지었습니다.소유격 : At the zoo, I saw many animals whose legs are four. 동물원에서 나는 다리가 4개인 많은 동물들을 보았습니다.목적격 : I'm going to make chocolate which she likes. 나는 그녀가 좋아하는 초콜릿을 만들려고 합니다. that은 선행사가 사람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다 쓸 수 있습니다. 위의 예문들에 쓰인 who, whom, which를 that으로 바꾸면 됩니다. 주격과 목적격은 that이고 소유격은 없습니다. 관계대명사 what은 ‘the thing(s) which/that’이 한 단어로 줄어든 것으로 지 혼자서 선행사까지 다 포함합니다. That과 마찬가지로 소유격이 없습니다. 주격 : Most girls prefer what is cute. 대부분의 소녀들은 귀여운 것을 선호합니다.목적격 : Rachel likes Jacob very much, because I've often done what she likes. 라헬이 야곱을 매우 좋아하는 이유는 그가 그녀가 좋아하는 일을 자주 해왔기 때문입니다. 관계대명사는 영어 원서를 읽다보면 많이 접하게 될 것이니 이 정도로 끝내고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이 정도만 알면 문장 해독 실력이 곧 늘어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칼빈은 정숙하고(chaste teist) 자상하고(obliging blidiŋ) 까다롭지(fastidious fæstdis) 않고 검약하고(economical ːknmikl) 근면하고(patient pint) 그리고 자신의 건강(health helθ)에 세심한(careful krfl) 여인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help help) 친구들에게 부탁했습니다. 칼빈은 그런 여인과 결혼을 했습니다. 샤프(Philip Schaff)는 그의 『기독교 교회사』(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8권에서 칼빈의 유일한 아내 이델레트에 대한 글이 이어집니다. Idelette bore Calvin one son and possibly a few daughters, all of whom died in infancy. In response to the slander of Catholics who took this for a judgment upon them for being heretics, Calvin said he was content with his many sons in the faith. 이델레트는 칼빈에게 한 아들과 아마 몇 명의 딸(daughter dːtr)을 낳아주었습니다. 그들 모두 유년기(infancy nfnsi)에 죽었습니다. 이것을 두고 이단(heretic hrtik)이 된 것 때문에 그 아이들에게 심판(judgment ddmnt)이 내린 것이라는 가톨릭교도들의 비방(slander slndr)에 답하여(in response to) 칼빈은 믿음 안의 많은 아들들로 만족한다(content kntnt)고 말했습니다. Idelette busied herself attending to Calvin in his many illnesses, faithfully visiting the sick and afflicted, and making her home a refuge for those who fled for their lives and their faith.이델레트는 칼빈 자신의 많은 질병(illness lnis)들에도 아프고 어려운(afflict flkt) 사람을 성실하게 심방하는 칼빈의 시중을 들고(attend tnd) 그리고 삶과 신앙을 위해 도망친 사람들을 위해 그녀의 집을 피난소(refuge rfjuːd)로 제공하는 등의 일로 분주했습니다. Though she survived the plague when it ravaged Geneva, Idelette died after a lengthy illness in 1549. Upon her deathbed she was patient, and her words, 전염병(plague pleig)이 제네바에 창궐했을(ravage rvid) 때 살아남긴(survive srviv) 했지만 이델레트는 오랜(lengthy lŋkθi) 질병(illness lnis)으로 1549년 사망했습니다. 임종(deathbed deθbed)에 임해서도 인내심이 강한(patient pint) 그녀는 말했습니다. “O God of Abraham, and of all our fathers, in thee have the faithful trusted during so many past ages, and none of them have trusted in vain. I also will hope.”“아브라함과 우리 모든 조상의 하나님이시여. 수많은 과거 시대에도 신자들이 하나님을 신뢰했고 그들의 신뢰가 한 사람도 헛되지 않았습니다. 저도 소망합니다.” What Calvin wrote to Pierre Viret some days after her death will illustrate her character further.그녀가 죽고 며칠 뒤 칼빈이 비레(Pierre Viret 1511 1571 스위스 개혁주의 신학자)에게 이델레트의 성품(character kriktr)에 대해 아주 깊이(further fːrðr) 설명하는(illustrate lstrit) 편지를 썼습니다. I have been bereaved of the best companion of my life, of one who, had it been so ordered, would not only have been the willing sharer of my indigence, but even of my death. During her life she was the faithful helper of my ministry.나는 내 생애 가장 훌륭한 동반자를 잃었습니다. 그렇게 정해진 도리였다면(had it been so ordered) 그녀는 내 가난(indigence ndidns)뿐만 아니라 내 죽음의 자발적인(willing wliŋ) 공유자(sharer rr)이기도 했습니다. 살아 있는 동안 그녀는 내 목회 사역(ministry mnistri)의 신실한(faithful fiθfl) 조력자(helper hlpr)였습니다. From her I never experienced the slightest hindrance. She was never troublesome to me throughout the entire course of her illness; she was more anxious about her children than about herself. As I feared these private cares might annoy her to no purpose, I took occasion, on the third day before her death to mention that I would not fail in discharging my duty to her children. 그녀에게서 나는 한 번도 아주 사소한(slightest slaitist) 방해(hindrance hndrns)도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아픈 전체(entire entir) 기간(course kːrs) 내내(throughout θruːut) 한 번도 나를 귀찮게(troublesome trblsm) 한 적이 없습니다. 그녀는 자신보다 그녀의 아이들을 더 염려했습니다(anxious ŋks). 이런 사사로운 걱정들이 그녀를 괴롭힐까봐(annoy ni) 걱정을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을(fear to no purpose 걱정을 해도 전혀 성과가 오르지 않다) 때 그녀의 임종 사흘 전 내가 그녀의 자녀들에 대한 나의 의무를 저버리지(discharge distːrd) 않겠노라고 언급할(mention mnn) 기회(occasion kin)를 잡았습니다. Taking up the matter immediately, she said, ‘I have already committed them to God.’ When I said that that was not to prevent me from caring for them, she replied, ‘I know you will not neglect what you know has been committed to God.’ Lately, also, when a certain woman insisted that she should talk with me regarding these matters, I, for the first time, heard her give the following brief answer: 그 문제(matter mtr)를 즉시 잡고 그녀는 말했습니다. ‘저는 이미(already ːlrdi) 그 애들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commit kmt).’ 또한 나중에 이 문제에 대해 그녀가 나와 이야기를 나누었어야 한다고 (칼빈이 재혼할 경우를 생각하고) 어떤 여인이 주장할 때 그녀에게 다음의 짤막한(brief briːf) 대답(answer nsr)을 들려주라는 말을 처음으로(for the first time) 들었습니다. ‘Assuredly the principal thing is that they live a pious and holy life. My husband is not to be urged to instruct them in religious knowledge and in the fear of God. If they be pious, I am sure he will gladly be a father to them; but if not, they do not deserve that I should ask for aught in their behalf.’ This nobleness of mind will weigh more with me than a hundred recommendations.‘확실히(Assuredly ːridli) 제일 중요한(principal prnspl) 일은 그 아이들이 신앙심이 깊고(pious pis) 거룩한 생활을 사는 것입니다. 제 남편(칼빈)이 그 아이들에게 종교 지식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경외(fear fir)를 가르치려고(instruct instrkt) 애쓰지 말아야 합니다. 그 아이들이 신앙심이 깊다면 그가(칼빈) 그 아이들에게 기꺼이 아버지가 되 주실 것이라는 것을 확신합니다. 그러나 만일 그렇지 않다면(if not) 제가 그 아이들을 위해 무언가를(aught ːt) 요청해야 할 가치가(deserve dizːrv) 그들에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 고매한 마음(nobleness of mind)은 내게는 100개의 권고(recommendation rkmndin)보다 더 무게가 나갈(weigh wei) 것입니다. John Calvin, Letter to Pierre Viret, 1549 존 칼빈, 비레(Pierre Viret)에게 보내는 편지, 1549 칼빈이 피신한 바젤 현대교회아내의 유언을 전하는 칼빈의 편지는 그녀가 얼마나 고결한 마음의 신앙을 가졌는지를 동료 개혁자에게 편지로 말하고 있습니다. 임종을 앞둔 아내의 마음은 자녀들의 신앙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그 아이들이 신앙심이 깊고(pious pis) 거룩한 생활을 살지 않는다면 양아버지 칼빈이 그 아이들에게 종교 지식과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경외를 가르치려고 애쓰지 말아야 한다고 죽음을 앞둔 자리에서조차 말할 정도로 자녀의 신앙과 삶을 칼빈의 아내 이델레트는 무엇보다 강조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우리는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히 11:6). 이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엡 2:8-9). 진정한 성경적 믿음은 지적인 만족을 포함하게 됩니다. 이 점에 대해 칼빈은 『기독교강요』에서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가 주장하는 것은 믿음의 대상은 그리스도이며 그 믿음은 경건한 무지가 아니라 올바른 지식에 근거를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지식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나오고 믿음은 확신을 포함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믿음의 방패가 되어야 합니다. 한 남녀가 결혼에 이르는 과정을 그리스도인의 믿음에 비유해보면 이렇습니다. 구혼의 첫 단계는 믿음의 첫 번째 요소인 알게 되는 과정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남녀가 처음 만나게 되면 서로에 대해 알게 되고 상대가 좋은 결혼 생활에 필요한 것을 가지고 있는지의 여부를 배우게 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단계입니다. 이 단계에서 상대방이 신뢰할만한 사람인지를 판단하지 못하게 되면 나중에 문제가 생기게 될 것입니다. 구혼의 두 번째 단계는 믿음의 두 번째 요소인 마음의 감동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알게 되는 것을 넘어선 사랑에 빠지게 되는 단계입니다. 서로에 대해 자세히 알게 된 남녀는 서로를 이해하고 좋아하고 사랑하게 됩니다. 마지막으로 사랑에 빠진 두 남녀는 결혼하기로 약속하고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서로 사랑하고 신실하기를 약속합니다. 두 남녀는 그 약속이 변하지 않을 것을 확신합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신부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몸과 마음과 뜻을 다해 사랑하는 신랑 되신 그리스도에게 칼빈의 아내 이델레트처럼 신앙과 삶으로 헌신해야 할 것입니다. 2020-09-14
    • G.QT
    • 기독교강요 영어수업
    2020-09-14
  • 기독교강요 영어 수업 - Lesson VIII 하나님, 새가 되게 해주세요
    Lesson VIII 하나님, 새가 되게 해주세요 Dear God, make me a bird “바보라서 바보처럼 한 행동을 바보도 아닌 당신은 왜 못 합니까.” 윈스턴 그룸(Winston F. Groom 1943년 3월 23일 ~ )의 1986년 동명 소설을 각색한 1994년 코미디 드라마 영화 포레스트 검프(Forrest Gump)는 새털 하나가 바람에 실려 소도시의 거리와 하늘을 떠도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감미로운 음악과 함께 거리의 이곳저곳을 날아다니던 새털(즉 카메라 시점)은 미국 조지아 주 서배너의 버스 정류장에 앉아 있던 버스 정류장 벤치에 앉아 있는 포레스트 검프 발 옆에 떨어집니다. 포레스트 검프는 그 옆에 앉아 있던 한 여성에게 그의 삶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이야기를 하는 가운데 버스 정류장에서 그의 이야기를 듣던 사람들이 계속 바뀝니다. 이야기를 듣던 어떤 사람은 믿지 못하겠다는 태도를 취하기도 하고 무관심한 태도를 짓던 사람도 있었으며 또 재미있게 듣고 관심을 보이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포레스트 검프가 유일하게 그리고 변함없이 사랑한 제니는 알코올중독 홀아버지의 학대에 시달리던 어린 시절 아버지를 피해 옥수수 밭에 숨어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새가 되게 해주세요. 여길 벗어나 멀리멀리 날아갈 수 있게요.”“Dear God, make me a bird. So I could fly far. Far far away from here.” 새의 몸통에서 떨어져 나와 이리저리 흩날리는 깃털은 새의 부재(不在)를 상징합니다. IQ 75인 포레스트 검프는 척추가 휘어져 다리마저 불편합니다. 대대로 물려받은 앨라배마 집에 여행객을 상대로 단기 세를 놓아가며 생계 문제를 해결하고 있는 현명한 홀어머니는 다리 교정기를 착용한 외아들 검프를 헌신적으로 돌봅니다. 초등학교 첫 등교 때 스쿨버스에서 아이들의 배척 탓에 자리를 못 찾고 있던 검프는 함께 앉기를 청한 제니와 짝이 됩니다. 돌을 던지며 못되게 구는 아이들에게 시달리는 검프에게 제니는 “어서 달려”를 외칩니다. 그 말에 무작정 달리던 검프는 교정기가 필요 없는 훌륭한 러너(runner)가 되어 덕분에 미식축구 특기자로 대학까지 진학합니다. 특히 베트남전에서 동료 5명을 구하고 부상을 당한 검프가 군병원에서 우연히 탁구를 접하고 천부적 재능 덕분에 당시 중화인민공화국에까지 날아가 ‘핑퐁 외교’(ping-pong diplomacy diplumsi 1971년 미국 탁구팀의 중공 방문을 계기로 1979년 미·중 전격 수교에까지 이른 스포츠 외교)를 돕게 됩니다. 이로써 그는 유명 인사의 자리로 올라갈 수 있었으며 뒤에 중국 팀들과 탁구 경기를 겨루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병장으로 진급합니다. 워싱턴 D.C.에서 반전 모임이 일어나는 가운데 병장 검프는 히피족 스타일로 살고 있던 제니와 다시 만나게 됩니다. 포레스트는 그녀의 남자 친구가 그녀에게 뺨을 때리는 것을 목격합니다. 포레스트는 그를 공격하지만 제니는 그 남자 친구와 떠날 것이라고 포레스트에게 말합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포레스트는 탁구 패들(라켓)을 만드는 회사와 연계하여 스스로 25,000 달러를 법니다. 이 돈으로 전시에 죽었던 친구 버바와의 약속대로 새우잡이 배를 삽니다. 이때 댄은 포레스트와 고기잡이에 합류합니다. 초기에는 새우잡이에 어려움을 겪습니다. 그러다가 허리케인 카르멘이 나타났지만 포레스트의 배만 살아남습니다. 거기다 엄청난 양의 새우를 잡아 새우잡이 배 한 척을 살 만큼의 돈을 법니다. 댄은 스티브잡스의 애플사에 돈을 투자해 수익을 남겨 포레스트는 그의 여생을 재정적으로 안전하게 보낼 수 있게 됩니다. 또 그가 벌어들인 돈 절반을 버바의 가족에게 기부합니다. 그는 집으로 돌아와 며칠 동안 그의 어머니의 죽음을 맞습니다. 그러는 내내 자신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사는 제니와 다시 만날 날만을 꿈꿉니다. 한편 존 바에즈(Joan Baez) 같은 포크송 가수를 꿈꾸며 캘리포니아로 떠난 제니는 히피문화에 기울어 술과 마약에 빠져 지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제니는 포레스트를 만나러 돌아오고 포레스트는 그녀에게 청혼합니다. 그녀는 이를 거절하지만 사랑의 뜻으로 그와 잠자리를 같이 합니다. 그녀는 다음 날 아침에 일찍 그를 떠납니다. 포레스트는 달리기를 다시 시작합니다. 그는 3년 반에 걸쳐 국가를 가로질러 달리기로 마음먹습니다. 그가 유명하게 되자 다른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그의 뒤를 따라 달리기 시작합니다. 현재로 돌아와 포레스트는 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까닭이 텔레비전에서 포레스트를 본 제니가 자기를 방문해 달라는 내용의 편지를 받았기 때문이라는 것임을 되새깁니다. 그가 제니를 만나던 가운데 그녀는 포레스트라는 이름의 아들을 그에게 소개시켜 줍니다. 포레스트는 그 아이가 자기 아들임을 깨닫고 순간 놀랍니다. 제니는 포레스트에게 그녀가 지금 한 바이러스로 인하여 고통을 받고 있다고 포레스트에게 말합니다. 가족 세 명은 앨라배마 주의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그린보우(Greenbow)로 돌아옵니다. 제니와 포레스트는 마침내 결혼하지만 머지않아 그녀는 죽음을 맞습니다. 영화는 포레스트와 그의 아들 포레스트가 처음 등교하는 날 학교 버스를 기다리는 것으로 끝을 맺습니다. 엄마와 검프 자신이 반복하는 “바보는 바보처럼 행동하는 거지(Stupid is as stupid does)”라는 말은 바보로 상징되는 장애인들에 대한 편견을 꼬집는 대사입니다. 포레스트 검프를 통해 로버트 제메키스(Robert Zemeckis, 1952년 5월 14일 ~ )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지능이 떨어지는 바보라서 벌인 일들(화염에 휩싸인 정글로 동료를 구하러 무작정 뛰어들고, 아무런 기약도 없이 사랑하는 여성이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는 등)이야말로 ‘정상’이라는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들이 아니었던가 하는 질문일 것입니다. 즉 “바보라서 바보처럼 한 행동을 바보도 아닌 당신은 왜 못 합니까” 하는 반문 말입니다. 감독 로버트 제메키스는 IQ 75인 검프에 대해 이런 말을 했습니다. “... 영화에서 검프는 완전히 점잖고 그의 말에는 진실한 인물입니다. 그에게는 제니와 그의 어머니 그리고 하나님 말고는 어떠한 계획도 의견도 없습니다.” 영화를 통해 드러난 진실한 포레스트 검프에게는 제니와 그의 어머니 그리고 하나님 말고는 어떠한 계획도 의견도 없었습니다. 그렇듯 칼빈의 저서와 파커의 전기(Parker, T. H. L. 1995, Calvin: An Introduction to His Thought, London: Geoffrey Chapman)를 통해 드러난 경건한 칼빈에게 1540년 8월 이전까지는 오직 하나님과 개혁운동뿐이었습니다. 『기독교강요』가 앞선 시기의 저술가들에 신세를 졌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이 어떤 새로운 목소리를 느끼고 일 년도 안 되어 재판의 요구가 잇따랐습니다. 이 요구에 부응하여 1539년 30세 되는 해 칼빈은 특별히 성경의 권위뿐만 아니라 인간의 타락 선택 유기(遺棄) 등도 다룬 증보판을 출판했습니다. 이 증보판은 성만찬 부분에 있어서 루터와 보다 타협적인 성향도 드러냈습니다. 그런 가운데 파커의 전기는 그 다음 해 1540년 칼빈의 결혼 과정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Calvin's friends urged him to marry. Calvin took a prosaic view, writing to one correspondent:칼빈의 친구들이 그에게 결혼을 권했습니다. 칼빈은 한 기자(corres -pondent kːrspndnt)에게 보내는 글을 쓰면서 담백한(prosaic prouziik) 견해를 취했습니다. I, who have the air of being so hostile to celibacy, I am still not married and do not know whether I will ever be. If I take a wife it will be because, being better freed from numerous worries, I can devote myself to the Lord. “독신주의(celibacy slbsi)에 아주 적대적인(hostile hstil) 태도를 지닌 나는 아직 결혼을 하지 않고 있고 언젠가(ever vr) 할지 안할지(whether hwðr) 모릅니다. 내가 수많은(numerous njːmrs) 걱정(worry wːri)에서 자유로워질 것이기 때문에 아내(wife waif)를 취하지 않는다면 주님에게 헌신할(devote divut) 수 있을 것입니다.” Several candidates were presented to him including one young woman from a noble family. Reluctantly, Calvin agreed to the marriage, on the condition that she would learn French. Although a wedding date was planned for March 1540, he remained reluctant and the wedding never took place. 귀족 가문(noble family) 출신의 한 젊은 여자를 포함해 칼빈에게 몇몇 후보자(candidate kndidit)들을 선보였습니다(present priznt). 마지못해(reluctantly rilktntli) 칼빈이 신부 후보가 프랑스어(French frent)를 배운다는(learn lːrn) 조건으로(on the condition kndn) 결혼(marriage mrid)에 동의했습니다(agree grː). 혼례(wedding wdiŋ date) 날짜(date deit)가 1540년 3월(March mːrt)로 잡혔지만 그는 계속 꺼렸고 혼례식은 결코(never nvr) 거행되지(take place) 않았습니다. He later wrote that he would never think of marrying her, “unless the Lord had entirely bereft me of my wits.” Instead, in August of that year, he married Idelette de Bure, a widow who had two children from her first marriage. 그는 후일 “주께서 나의 재치(wit)들을 앗아가지(bereft birft bereave birːv의 과거·과거분사) 않으시면(unless nls)” 나는 그녀와 결혼할 생각이 전혀 없었을 것입니다. 그 대신에(Instead instd) 그 해 8월(August ːgst) 그는 첫 결혼에서 두 아이들을(children tldrn) 낳은 미망인(widow wdou) 이델레트(Idelette de Bure 1500 - 1549)와 결혼했습니다. 샤프(Philip Schaff)는 그의 『기독교 교회사』(History of the Christian Church) 8권에서 칼빈의 유일한 아내에 대해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Idelette de Bure came from Flanders and first married John Stordeur from Lige. At some stage they moved to Strasburg where they were recorded as being Anabaptists. Idelette and John Stordeur had two children (Charles, Judith) before Stordeur died after a brief illness, leaving Idelette a widow. 이델레트(Idelette de Bure)는 플랑드르(Flanders flndrz)에서 왔고 리지(Lige) 출신 스토르되르(John Stordeur)와 첫 결혼을 했습니다. 어떤 시기에 그들은 재세례파가 된 것으로 기록이 된 스트라스부르로 이사했습니다. 이델레트와 스토르되르는 두 아이(Charles, Judith)를 낳았습니다. 그 뒤 스토르되르는 짧은(brief briːf) 기간의 병으로 이델레트를 미망인으로 남기고 죽었습니다. Calvin was so caught up in his labors that he did not seem to consider marriage until age 30 or so. He asked friends to help him find a woman who was “chaste, obliging, not fastidious, economical, patient, and careful for (his) health.” 칼빈은 일에 너무 매달린(so caught up) 나머지 서른 즈음까지 결혼을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는 “정숙하고(chaste teist) 자상하고(obliging blidiŋ) 까다롭지(fastidious fæstdis) 않고 검약하고(economical ːknmikl) 근면하고(patient pint) 그리고 자신의 건강(health helθ)에 세심한(careful krfl) 여인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help help) 친구들에게 부탁했습니다. His fellow laborer Martin Bucer had known Idelette and recommended her to Calvin in confidence that she would fit the bill. They married in August 1540.그의 동료 사역자 부서(Martin Bucer 1491년 11월 11일 1551년 2월 28일)가 이델레트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녀가 (칼빈이 제시한) 그 목록(bill)에 안성맞춤이라고 자신하고(confidence knfidns) 그녀를 칼빈에게 추천했습니다(recommend rkmnd). 서른한 살되는 해 1540년 8월 서른한 살 칼빈은 결혼하였습니다. 스물여섯 1990년에 결혼한 가수 김광석(1964년 1월 22일 ~ 1996년 1월 6일)은 어느 콘서트에서 자신의 노래 서른 즈음에를 부르고 관객들에게 이런 말을 합니다. “반갑습니다. 안녕하시지요. 네. 어... 처음 보내 드린 곡이서른 즈음에라고 하는 곡이었습니다. 공감하시는지요. (관객 웃음) 누구나 스스로의 나이에 대한 무게는 스스로 감당해내면서 지냅니다. 10대 때에는 거울처럼 지내지요. 자꾸 비추어보고 흉내 내고 선생님 부모님 또 친구들. 그러다 20대 때 쯤 되면 뭔가 스스로를 찾기 위해서 좌충우돌 부대끼면서 그러고 지냅니다. 가능성도 있고 나름대로 주관적이든 일반적이든 뭐 객관적이든 나름대로 기대도 있고. 그렇게 지내지요. 자신감은 있어서 일은 막 벌이는데 마무리를 못해서 다치기도 하고 아픔도 간직하게 되고 그럽니다. 그래도 자존심은 있어서 유리처럼 지내지요. 자극이 오면 튕겨내 버리든가 스스로 깨어지든가. 그러면서 아픔 같은 것들이 자꾸 생겨나고 또 비슷한 일들이 일어나면 더 아프기 싫어서 조금씩 비켜나가죠. 피해가고. 일정 부분 포기하고 일정 부분 인정하고. 그러면서 지내다 보면 나이에 'ㄴ'자 붙습니다. 서른이지요. 뭐 그때쯤 되면 스스로의 한계도 인정해야 하고 주변에 일어나는 일들도 뭐 그렇게 재미있거나 신기하거나 그렇지도 못합니다...”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가 ‘스물여덟 즈음에’나 ‘서른둘 즈음에’로 발표됐어도 그토록 큰 사랑을 받을 수 있었을까요. 스무 명 넘는 가수들에 의해 리메이크되고 음악평론가들에 의해 최고의 노랫말로 선정되고 있습니다. 발표된 지 25년이 지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의 18번으로 불리는 이 노래는 현대인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노래 중 하나입니다. 서른 즈음인 사람들만이 이 노래를 좋아하는 것은 아닙니다. 마흔 즈음이나 쉰 즈음이 된 사람들 심지어 스물 즈음의 젊은이들도 삶이 울적할 때 이 노래를 부른다고 합니다. 또 하루 멀어져 간다./ 내뿜은 ... 연기처럼/ 작기만 한 내 기억 속엔/ 무얼 채워 살고 있는지/ 점점 더 멀어져 간다./ 머물러 있는 청춘인 줄 알았는데/ 비어 가는 내 가슴속엔/ 더 아무것도 찾을 수 없네. ‘또 하루 멀어져 가는’ 시간의 흐름은 늘 그리고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자연 현상입니다. ‘무얼 채워 살고 있는지’라며 삶의 의미를 고민하는 행위도 나이와 상관없이 누구나 할 수 있는 정신 작용입니다. ‘아무것도 찾을 수 없’다는 공허함을 느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왜 유독 서른 즈음일까요. 서른한 살에 결혼한 칼빈은 어떠셨을까요. 인간은 스스로의 나이를 10년 단위로 끊어서 생각하는 경향이 강합니다. 모든 범주적 사고가 그렇듯이 사람들은 10대 20대 30대 40대 50대 등으로 나이를 범주화합니다. 그리고 같은 연령대 사람들끼리는 서로 유사하다고 생각합니다. 반면 다른 연령대 사람들은 마치 극복하기 어려운 차이점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곤 합니다. 인간은 왜 이처럼 10년 단위로 삶을 구분하고 10년의 경계 지점에서 때로는 흔들리고 때로는 성장하는 것일까요. 이는 인간이 의미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의미란 무질서해 보이는 것들 속에서 특별한 패턴을 발견하는 일입니다. 시간의 흐름은 늘 일정합니다. 특별한 패턴이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시간의 일정한 흐름을 구분하여 의미 있는 패턴을 만들어냅니다. 그리고 그 패턴에 삶을 맞추어 살아갑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은 의미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이고 인간의 뇌는 의미를 발견하도록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포레스트 검프가 유일하게 그리고 변함없이 사랑한 제니는 알코올중독 홀아버지의 학대에 시달리던 어린 시절 아버지를 피해 옥수수 밭에 숨어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새가 되게 해주세요. 여길 벗어나 멀리멀리 날아갈 수 있게요.”“Dear God, make me a bird. So I could fly far. Far far away from here.” ‘노래가 나의 힘이라고’ 노래하던 가수 김광석이나 포레스트 검프가 사랑한 제니는 젊은 나이에 일찍 죽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칼빈은 55년 평생 하나님과 성경만을 믿고 살았습니다. 2020-09-08
    • G.QT
    • 기독교강요 영어수업
    2020-09-08
  • 기독교강요 영어 수업 - Lesson VII 교육의 목적
    Lesson VII교육의 목적The purpose of education 1960년대 영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영화 ‘언 에듀케이션’(An Educa -tion)에서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옥스퍼드대학 진학을 목표로 공부하는 16살 모범생 제니가 교장에게 묻습니다. “교육의 목적이 무엇인가요.” 교장은 답합니다. “교육은 의무란다.” 오케스트라 연습을 마치고 돌아오던 어느 날 갑자기 비가 쏟아집니다. 무거운 첼로를 옆에 둔 채 비에 흠뻑 젖은 그에게 멋진 자동차를 탄 신사 데이비드가 다가옵니다. 제니는 “비싼 첼로가 불쌍하니 첼로만 차에 태워주겠다”는 데이비드의 위트에 호감을 느끼고 그의 유려한 말솜씨와 예술적 감각 그리고 물량 공세에 점차 빠져들기 시작합니다. 지루한 학교 교육보다 재미있는 그 체험을 통해 인생의 의미를 깨우치게 되는 그런 소녀가 당신에게도 똑같은 질문을 한다면 어떻게 대답하겠습니까. 교육(敎育)이란 말은 본래 맹자의 '得天下英才而敎育之(득천하영재이교육지)'라는 글에서 유래하였습니다. 각 한자의 기원을 살펴보면, ‘가르칠 교(敎)’ 자는 회초리로 아이를 배우게 한다는 뜻이고, ‘기를 육(育)’ 자는 갓 태어난 아이를 기른다는 뜻입니다. 좀 섬뜩하죠. 그러나 교육(educate dukit)의 영어 어원은 라틴어 educere인데 뜻은 ‘앞으로 인도합니다’(lead forth)입니다. 교육에 대한 한자보다 라틴어의 뜻이 훨씬 부드럽죠. 칼빈이 말하는 그리스도교 교육의 목적은 성경을 통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자라는 데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디모데후서 3:17에서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the man of God may be perfect, thoroughly furnished unto all good works) 하신 말씀과 일치합니다. 어쨌든 교육 또는 가르침은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요한 지식이나 기술 등을 가르치고 배우는 활동입니다. 칼빈은 무지렁이 프랑스인을 훈련에 적합하게 ‘단순한 초등교육의 형식으로 저술한’(written in a simple and elementary form adapted for instruction) 『기독교강요』 제1권 제1장 1항에서 ‘서로 연결된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우리 자신에 대한 지식-연결의 본질’(THE KNOWLEDGE OF GOD AND OF OURSELVES MUTUALLY CONNECTED - NATURE OF THE CONNECTION)에서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지식을 이렇게 가르칩니다. Our wisdom in so far as it ought to be deemed true and solid Wisdom, consists almost entirely of two parts: the knowledge of God and of ourselves. But as these are connected together by many ties, it is not easy to determine which of the two precedes and gives birth to the other. 우리의 지혜(wisdom wzdm)는, 참되고 견고한(solid slid) 지혜라고 생각해야 하는 한에서는(in so far as), 거의(almost ːlmoust) 완전히(entirely entirli) 두 요소(part pːrt)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나님과 우리 자신에 대한 지식. 그러나 이것들이(두 요소) 많은 끈(tie tai)들로 함께(together tgðr) 연결되어(connect knkt) 있기 때문에 둘 가운데 어느 것이 다른 것보다 앞선(precede prisːd) 것이고 다른 것을 생기게(give birth bːrθ) 하는 것이라는 걸 결정하기란(determine ditːrmin) 쉽지(easy ːzi) 않습니다. 왜냐하면(for fːr) 첫째로(in the first place) 아무도(no man) ‘그 분 안에서 그가 살고 움직이는’(in whom he lives and moves 참조. 행 17:28) 하나님에게 자기 생각을 즉시(forthwith fːrθwith) 돌리지(turn tːrn) 않고는(without wiðut) 자기 자신을(himself himslf) 관찰할(survey sːrvi) 수 없기 때문입니다. For, in the first place, no man can survey himself without forthwith turning his thoughts towards the God in whom he lives and moves; because it is perfectly obvious, that the endowments which we possess cannot possibly be from ourselves; nay, that our very being is nothing else than subsistence in God alone. 왜냐하면 첫째(in the first place) 우리가 소유한(posses pzs) 재능(endowment endumnt)은 우리 자신에게서(from ourselves) 도저히(possibly psbli 부정문에서 can과 같이 사용할 때 ‘아무리 해도’, ‘도저히’ …않다는 뜻 I cnnot possibly do it. 도저히 할 수 없다) 나올 수 없다는 게 아주 명백하기 때문입니다. 아니(nay nei 오히려), 바로 우리의 참(very vri) 존재(being bːiŋ)는 오직 하나님 안에서만 실제 존재(subsistence sbsstns ‘real being’)일 따름입니다. In the second place, those blessings which unceasingly distil to us from heaven, are like streams conducting us to the fountain. Here, again, the infinitude of good which resides in God becomes more apparent from our poverty. In particular, the miserable ruin into which the revolt of the first man has plunged us, compels us to turn our eyes upwards; not only that while hungry and famishing we may thence ask what we want, but being aroused by fear may learn humility. 둘째로(in the second place) 하늘에서 우리에게 끊임없이(unceasingly nsːsiŋli) 방울져 떨어지는(distil distl) 이러한 축복들은 우리를 원천(fountain funtin)으로 인도하는(conduct kndkt) 개울(stream striːm)들 같습니다. 이 점이 또 하나님에게 있는 한없는(infinitude infntjːd) 선하심이 우리의 부족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게 됩니다. 특히(In particular prtkjlr) 우리를 비참한 파멸로 몰아넣은(plunge plnd) 첫 사람의 반역이 우리의 눈이 위로(upward pwrd) 향하지 않을 수 없게 합니다. 그 때부터 우리가 배고프고(hungry hŋgri) 굶주릴지라도(famish fmi) 원하는 것을 요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두려움으로 각성이 되어 겸손(humility hjuːmlti)도 배울 수 있게 됩니다. For as there exists in man something like a world of misery, and ever since we were stript of the divine attire our naked shame discloses an immense series of disgraceful properties every man, being stung by the consciousness of his own unhappiness, in this way necessarily obtains at least some knowledge of God. 왜냐하면 인간 속에 비참한(miserable mzrbl) 세상(world wːrld)과 같은 어떤 것이 실재하고 있는 것처럼 그리고 우리가 신성한 의복(attire tir)이 벗겨진(strip strip) 이후 우리의 벌거벗은(naked nikid) 수치심(shame eim)이 인간 자신의 불행(unhappiness nhpinis)의 자각(consciousness knsnis)으로 찔림을 받는 모든 인간에게 끝없이(immense imns) 이어지는(series sriːz) 수치스러운(disgraceful disgrisfl) 소유 본능(property prprti)들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disclose diskluz). 이렇게 해서(in this way) 우리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knowledge nlid)을 아주 조금이라도(at least liːst) 반드시(necessarily nssrli) 얻게 됩니다(obtain btin). 칼빈이 그의 저서 첫머리 첫줄에서 언급한 ‘참되고 견고한 지혜라고 생각해야 하는 한에서의 우리의 지혜’라고 말할 때 그 지혜(wisdom wzdm)는 무엇일까요. 웹스터 영영사전은 지혜를 이렇게 정의했습니다. ‘wisdom wzdm ability to discern inner qualities and relationships.’ 즉 지혜는 내적 특성(quality kwlti)들과 관계(relationship rilinp)들을 분별하는(discern disːrn) 능력(ability blti). 성경은 지혜를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어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 잠언 1:7 The fear of the Lord is the beginning of knowledge: but fools despise wisdom and instruction. 영영 사전과 성경의 정의대로 지혜가 내적 특성(quality kwlti)들과 관계(relationship rilinp)들을 분별하는(discern disːrn) 능력(ability blti)이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the fear of the Lord is the beginning of knowledge)을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칼빈은 『기독교강요』 제1권 제1장 1항 상반부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아무도(no man) ‘그 분 안에서 그가 살고 움직이는’(in whom he lives and moves 참조. 행 17:28 개역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 하나님에게 자기 생각을 즉시(forthwith fːrθwith) 돌리지(turn tːrn) 않고는(without wiðut) 자기 자신을(himself himslf) 관찰할(survey sːrvi) 수 없습니다(no man can survey himself without forthwith turning his thoughts towards the God in whom he lives and moves). 칼빈은 우리가 하나님에게 자신의 생각을 즉시 돌려야만 비참한 우리 자신을 관찰하고 알 수 있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경외심이 생긴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혜를 소유할 수 있는 관건(關鍵 문빗장과 자물쇠)은 무엇보다 하나님을 먼저 바라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참된 경건(piety piti)과 분별 능력의 원칙(principle prnspl)이라는 것이 칼빈주의(Calvinism)의 시조 칼빈의 지혜로우신 가르침입니다. “아무도 ‘그 분 안에서 그가 살고 움직이는’(참조. 행 17:28) 하나님에게 자기 생각을 즉시 돌리지 않고는 끝없이(immense imns) 이어지는(series sriːz) 수치스러운(disgraceful disgrisfl) 소유 본능(property prprti)을 드러내는 인간 자신을 관찰할 수 없습니다.” 2020-08-31
    • G.QT
    • 기독교강요 영어수업
    2020-08-31
  • 기독교강요 영어 수업 - Lesson VI 지중해와 중세
    Lesson VI지중해와 중세Mediterranean and the Middle Ages 젊은 시절의 알베르 카뮈(Albert Camus, 1913년 11월 7일 ~ 1960년 1월 4일)에게 큰 영향을 준 장 그르니에(Jean Grenier, 1898년 - 1971년)는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작가이다. 그르니에는 아름다운 산문을 여럿 남긴 수필가이기도 했다. 카뮈는 스승의 문체에 대해 말했다. “그 언어는 빠르게 흐르지만 그 메아리는 긴 여운을 남깁니다.” 그르니에 산문의 정수(精髓)가 담긴 『지중해의 영감』(Inspirations mdi -terranennes, 1941)은 그가 북아프리카와 남부 유럽을 품고 있는 지중해 연안 지역을 돌아다니며 쓴 산문집이다. 알제리의 카스바를 찾았던 그르니에는 그 영감을 이렇게 서술했습니다. “모르는 사이에 날빛이 푸른색 타일들의 색깔에서 노란색 타일들 색깔로 변해가도 그들(카스바 주민들)에게는 하루의 시간이 그냥 그대로 멈추어 있습니다. 식물들의 삶처럼 그렇게 늘어져 느리게 흐르는 삶이 무엇보다 시(詩)에 어울린다는 상상을 해보곤 했습니다. 마음에 와 닿는 어떤 하나의 지형(地形), 그것이 바로 지중해(Mediterranean mdtrinin)의 정신을 만들어냅니다. 공간일까요. 그것은 어깨의 둥그런 곡선이며 얼굴의 타원형 윤곽입니다. 시간일까요. 그것은 해변의 이쪽 끝에서 저쪽 끝으로 달리는 한 젊은이의 질주입니다.” 그르니에는 책 서문에서 “지중해는 절대의 숭배로부터 그리고 행복의 숭배로부터 등거리에 위치할 수 있는 어떤 형이상학의 계시를 줄 수 있습니다”라고 했습니다. 한때 그런 지중해를 ‘우리의 바다’라 호언하던 로마도 3세기 말에 이르자 디오클레티아누스(Gaius Aurelius Valerius Diocletianus 245년 312년 재위 284년 - 305년)는 위기에 빠진 로마 제국의 혼란을 수습하고 황제 중심의 통치 체제를 회복시켰습니다. 그리고 제국의 방위를 위해 사두정치체제를 창안하고 여러 가지 개혁으로 제국의 쇠퇴를 막아보려 했습니다. 그의 일환으로 기독교를 탄압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황제의 필사적인 재건 개혁도 헛되이 쇠퇴 일로를 걸었습니다. 인구는 감소되고 경제는 굳어 화폐거래보다 실물경제(實物經濟: 돈이 될 만한 가치를 지닌 물건만 중시되는 물물경제)화 했습니다. 토지는 일부 대토지 소유자에 독점되어 자유농민과 중간층은 몰락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왕년에 막강함을 자랑하던 로마군이 게르만 용병으로 채워져 무력화(無力化)하고 마침내는 475년 서고트족이 동로마의 국경을 침입하자 사상 유례가 드문 일대 민족 이동을 유발하고 말았습니다. 제일 먼저 국경을 침입한 서고트족은 아드리아노플 전투에서 동로마군을 격파, 콘스탄티노플을 위협했고 서진하여 서로마군을 격퇴, 이탈리아 반도로 남하했습니다. 이리하여 410년 ’영원한 도성‘ 로마가 함락되고 잇따라 게르만의 여러 부족들이 로마의 다른 영토를 유린하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시작된 약 일천 년의 중세(Medium aevum 476-1453)는 유럽 역사에서 서로마 제국이 476년 멸망하고 동로마 제국 즉 비잔티움 제국이 멸망한 1453년까지 즉 5세기부터 15세기까지의 시기입니다. 이 시기에는 그리스 정교회와 로마 가톨릭 교회의 분열에도 불구하고 종교계의 지배자인 가톨릭 교황의 권력이 강대해졌으며, 이에 세속계의 최고 권력자인 신성 로마 황제와의 사이에 권력투쟁이 전개되었습니다. 성직의 서임을 둘러싸고 교황 그레고리 7세와 하인리히 4세 사이에 벌어졌던 정면충돌은 그 두드러진 예였습니다. 이 충돌의 결과로 헨리 4세는 카노사에서 그레고리 7세에게 항복하게 되었습니다. 이 사건이 있은 다음부터는 교황권이 절대적인 것으로 된 반면에 속세의 황제권은 점차 쇠퇴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강대한 교황권을 바탕으로 그리스도교권 국가가 회교권 국가에게 반격을 가하기 시작한 것이 십자군의 원정으로 나타났습니다. 회교도들에게 점령된 성지 예루살렘의 탈환과 동로마 구원의 명분을 가졌던 십자군 원정은 1096년에서 1100년에 이르기까지 3회에 걸쳐서 단행되었습니다. 중세는 암흑기가 아니었고 르네상스의 씨앗이 이미 그 시대에 뿌려져 있었습니다. 중세 후기는 결코 르네상스의 예고편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어둠과 광기의 시대도 아니었습니다. 성(聖)과 속(俗)은 달뜬 활기 속에 섞여 있었습니다. 성지순례는 데이트 여행이었고 교회 안에서 매춘부가 호객 행위를 했습니다. 성 유물을 전시하는 건너편에서 알몸 공연이 벌어졌습니다. 중세인들은 자주 울었고 쉽게 감동받았고 잔인했고 무절제했습니다. 죄수에게 가하는 고문은 최고의 구경거리였지만 사형수의 마지막 참회에는 다 같이 눈물을 흘렸습니다. 방탕에 가까울 정도로 향락을 즐기는 동시에 종말론과 염세주의에 사로잡혀 있기도 했습니다. 현대인의 기준으로는 이런 모순이 너무 낯설어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순진한 정서가 한 사회를 지배하는 분위기가 될 수도 있습니다. 어쩌면 눈물을 부끄러워하고 감정을 다스리고 무관심을 미덕으로 받드는 현대가 중세보다 더 기괴한 시대인지도 모릅니다. 인간은 세계를 인식하기 위해 지도를 만들었고 이 지도를 이용해 세계를 바꿔나갔습니다. 지도는 당대인들의 세계관을 볼 수 있는 거대한 텍스트이기도 합니다. 중세 지도에선 수도원 중심으로 모든 생활이 이뤄지던 당시 인류의 자기 인식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특정 구역 건물부터 골목까지 범죄율을 일대일로 매핑해 표시한 19세기 샌프란시스코 ‘범죄 지도’에선 모든 것을 수치화하던 근대적 인간의 욕망과 자신감을 엿볼 수 있습니다. 스마트폰 위치 정보 버튼을 '온(ON)'으로 켜놓고 다니는 요즘 사람들은 매일매일 새로운 지도를 만들어가기도 합니다. 한편 칼빈이 태어난 1509년 16세기 초엽 독일에서는 인문주의자와 신학자들이 중심이 되어 중세 로마 교회의 미신적 교리와 교권에 항거하고 초대 교회의 정신으로 복귀하기 위한 개혁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이와 같은 개혁운동은 보헤미아의 후스(Jan Hus, 1372년 ~ 1415년 7월 6일), 영국의 위클리프(John Wycliffe, 1320년 ~ 1384년)를 거쳐 마침내 루터(Martin Luther, 1483년 11월 10일~1546년 2월 18일)에 이르러 실현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제네바의 칼빈과 스위스의 츠빙글리(Ulrich Zwingli, 1484년 1월 1일 - 1531년 10월 11일) 등은 각각 타당한 명분을 내걸고 로마 교회와 대결하여 개혁운동을 촉진시켰습니다. 이 개혁 운동은 단순히 로마 교회에 대한 항거라는 차원에서 끝난 것이 아니고 정치·경제·사회 각 방면의 개혁에도 적지 않은 공헌을 하였습니다. 독일에서는 13, 14세기 이래 연방국가 체제가 더욱 진전되고 성속(聖俗)의 제후나 도시는 자립했으며 국내의 분열은 점점 심해져갔습니다. 쇠퇴해 가고 있던 교황권은 국가적 통일이 약한 나라에 기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교황 레오 10세(Leo PP. X, 제217대 교황 재위: 1513년 3월 9일 - 1521년 12월 1일)에 의한 면죄부의 판매가 독일을 목표로 한 것도 그와 같은 사정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이 면죄부 판매에 반대한 루터의 95개 조항의 논제 발표(1517)와 함께 종교개혁(Reformation rfrmin)이 시작되었습니다. 봉건사회의 해체가 늦어진 독일에서도 농민의 계층 분화가 진행되고 해방을 요구하는 농민들은 15세기 이래 농민 폭동으로 번지기 시작하였으며 루터의 개혁을 통해 그들의 사회적 해방을 기대하였습니다. 1524년과 1525년 재세례파(Anabaptist nbptist) 지도자 뮌처(Thomas Mnzer, 1489년 ~ 1525년 5월 27일)의 민중적인 설교를 신봉한 서남 독일의 농민들은 격렬한 농민전쟁을 전개했습니다. 그러나 루터의 격려로 태세를 정비한 제후들은 이 반란을 잔혹하게 진압하였고, 더욱이 이들은 종교개혁을 정치 대립에 이용했습니다. 이 혼란한 종교개혁 시기에 1536년 3월 『기독교강요』를 저술한 칼빈이 열정과 달변의 뛰어난 신학자였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 없습니다. 그러나 그보다 신학자의 과업이 성서의 제자가 되기 위해 겸손하고 고결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칼빈보다 더 통렬하게 자각하고 있던 인물이 아무도 없었습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영어 입문 과정에서 to 부정사는 아주 중요합니다. 영어의 부정사(infinitive)란 시제나 수에 따라 변화하지 않은 동사 다시 말해 동사의 원형을 말합니다. 영어의 부정사 구문은 크게 세 가지 종류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부정사는 ‘수와 인칭 등이 정해지지 않은 말’이란 뜻입니다. 아래에 용법 같은 게 나오긴 하지만 큰 의미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to 부정사 자체가 문장의 일부를 대체 혹은 추가하는 문구이므로 가장 자연스럽게 해석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주어부분에 오면 주어처럼 해석합니다. I want to eat이면 먹고 싶다라든가... 그냥 ‘이런 게 있구나’ 하는 정도만 알고 실생활에서 느낌을 익히는 것이 훨씬 유용합니다. to부정사는 70~80%가 하기 위해 부사적 용법으로 사용됩니다. to 자체가 어딘가로 항하는 방향성을 띄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to부정사가 부사절, 형용사절, 명사절로 쓰여도 결국 모두 ‘to 이하를 하려는’ 또는 ‘to 이하로 가려는’ 의미로 귀결됩니다. 왜냐하면 본래 부정사가 형태가 정해지지 않아 동사적 특성을 띤 명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to 이하 문장구조와 내용에 따라 그 뜻은 달라집니다. 간단한 예로 다음과 같습니다. Calvin lived to be 55 years old. 칼빈은 55세까지 살았습니다. Jesus came to my rescue. 예수님은 나를 구하러 오셨습니다.Lord has been pleased to give His life. 주께서 기꺼이 자기 생명을 주셨습니다. 이제 『기독교강요』 영어 본문으로 들어가 볼까요. 다음의 본문에서 실제로 to부정사가 사용된 ‘My intention was only to furnish a kind of rudiments’(제 의도는 단지 기초 원리를 제공해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라는 문장을 대하게 될 것입니다. 1536년 바젤에서 처음 출판된 『기독교강요』의 프랑스 왕 프랑수아 1세에게 바친 헌사 첫 머리에 JOHN CALVIN PRAYS PEACE AND SALVATION IN CHRIST.’(존 칼빈은 그리스도 안에서 평화와 구원을 기도드립니다)는 왕에 대한 인사에 이어 칼빈의 헌정 저서 『기독교강요』의 저작 의도를 말합니다. 프랑수아 1세 Sire,--When I first engaged in this work, nothing was farther from my thoughts than to write what should afterwards be presented to your Majesty. My intention was only to furnish a kind of rudiments, by which those who feel some interest in religion might be trained to true godliness. 폐하(Sire sair]) 제가 이 일을 처음 착수하게(engage engid) 됐을 때 나중에(afterwards ftrwrdz) 폐하(your Majesty mdisti)께 헌정(present priznt ‘선물합니다’ 뜻의 단어 악센트는 뒤에 붙음)해야 할 것을 쓴다고는 전혀(nothing nθiŋ) 생각(thought θːt)하지 못했습니다. (여기에서 ‘Nothing ~ 비교급 than’의 용법을 잠깐 살펴봅시다. Nothing is easier than to cheat him. 그를 속이는 것만큼 쉬운 일은 없다. Nothing was farther from my thoughts than to write 쓰는 것만큼 내 생각에서 먼 것은 없다.) 제 의도(intention intnn)는 종교에 어떤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참된 경건(godliness gdlines)의 훈련을 받을 수 있는 기초 원리(rudiment rːdmnt)와 같은 것((a kind of))을 제공해(furnish fːrni) 주기 위한 것이었을 뿐입니다. And I toiled at the task chiefly for the sake of my countrymen the French, multitudes of whom I perceived to be hungering and thirsting after Christ, while very few seemed to have been duly imbued with even a slender knowledge of him. That this was the object which I had in view is apparent from the work itself, which is written in a simple and elementary form adapted for instruction.그리고 저는 주로(chiefly tːfli) 제 동포(countrymen kntrimen) 프랑스인들을 위해서(for the sake of) 그 고된 일(task tːsk)을 수고했습니다(toil til). 저는 그들 가운데 많은 사람이(multitude mltitjːd) 그리스도에 굶주리고(hunger hŋgr) 목마른(thirst θːrst) 것이 보였습니다(perceive prsːv). 그러면서도(while hwail) 그리스도에 관한 빈약한(slender slndr) 지식조차도 제때(duly djːli) 받는(imbue imbjː) 사람이 아주 소수(few fjuː)였던 것 같습니다. 제가 목표했던(in view vjuː) 대상이 본 저서에서 드러난(apparent prnt)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이 책을 훈련(instruction instrkn)에 적합하게(adapt dpt) 단순한 초등교육의(elementary lmntri) 형식으로 저술한 것입니다. 칼빈이 프랑수아 1세에게 보내는 헌사에서 말하듯이 『기독교강요』의 저술 목적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굶주리고 목마르지만 그 양식을 제때 공급을 받지 못하는 무지렁이 프랑스인을 세종대왕처럼 어여삐 여겨 훈련에 적합하게 ‘단순한 초등교육의 형식으로 저술한’(which is written in a simple and elementary form adapted for instruction) 것입니다.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디모데후서 3:15-17에서 말씀합니다.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And that from a child thou hast known the holy scriptures, which are able to make thee wise unto salvation through faith which is in Christ Jesus. All scripture is given by inspiration of God, and is profitable for doctrine, for reproof, for correction, for instruction in righteousness: That the man of God may be perfect, thoroughly furnished unto all good works. 이 말씀처럼 『기독교강요』는 믿음이 어린 사람들을 위한 쉬운 교리문답서 수준의 것이었습니다. 2020-08-24
    • G.QT
    • 기독교강요 영어수업
    2020-08-24
  • 기독교강요 영어 수업 - Lesson V 성서의 제자
    Lesson V 성서의 제자A disciple of the Scripture “네가 얼마나 대단한 소녀인지 생각해 보아라. 네가 오늘 얼마나 먼 길을 왔는지 생각해 보아라. 지금 몇 시인지 생각해 보아라. 아무것이라도 좋으니 생각해 보아라. 그리고 울지 마라.” 영국의 수학자이자 작가인 도지슨(Charles Lutwidge Dodgson)이 루이스 캐럴(Lewis Carroll)이라는 필명으로 1865년에 발표한 소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Alice's Adventures in Wonderland)에 나오는 구절입니다. 낯선 장기판 왕국에 떨어져 비참함을 느끼는 앨리스에게 백색 여왕이 한 말입니다. 바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돌연한 회심’으로 가톨릭과 결별한 지 6년이 지났습니다. 마침내 칼빈이 스물일곱 살 되던 1536년 3월 바젤에서 『기독교강요』 라틴어 초판을 출판했습니다. 사실 이 저서는 그의 신앙의 변증서이고 종교개혁자들의 교리에 대한 진술서였습니다. 그리고 책을 출판하고 얼마 안 있어 그는 바젤을 떠나 이탈리아의 포강(Po River)이 흐르는 페라라(Ferrara)로 여행을 갔습니다. 그곳에서 편안한 여행을 즐기고 있었지만 프랑스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낙담스러웠습니다. 칼빈은 프랑스에 자신을 위한 희망이 전혀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1536년 8월 마음을 굳힌 그는 신성로마제국(Holy Roman Empire)의 자유로운 제국의 수도이고 종교개혁자들의 피난처 스트라스부르로 출발했습니다. 그러나 신성로마제국과 프랑스 군대의 군사 작전 때문에 그는 자신을 제네바로 안내하는 스트라스부르로 가는 남쪽 우회로를 어쩔 수 없이 택하게 되었습니다. 1536년 당시의 제네바는 약 1만 명의 주민이 거주하는 도시였습니다. 1526년 사보이아 공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했으며 베른과 프라이부르크의 주들과 시민연대라 불리는 상호 방위 동맹을 맺고 있었습니다. 1532년 이후 개신교 주가 된 베른을 계기로 삼아 파렐(William Farel 1489년 - 1565년 9월 13일)과 그를 돕던 사람들은 1532년 10월 이래 줄곧 제네바에 종교개혁운동을 도입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파렐은 1534년 공식적으로 제네바의 목사가 되었습니다. 베른의 도움에 힘입어 제네바는 이 시기에 사부와 공작과 로마 가톨릭 교회 주교로부터 완전히 독립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1536년 5월 21일 제네바의 모든 시민은 파렐의 지휘 아래 종교개혁을 수용하기로 맹세했습니다. 1536년 8월 그 당시 파렐은 칼빈이 슈트라스부르로 가는 길에 하룻밤을 묵고자 제네바에 들렸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는 칼빈을 찾아가 제네바에 남아서 이 도시의 종교계를 더 발전시킬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거절하던 칼빈은 결국 승낙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후에 그는 이 사건을 『시편 주석』 서문(Autobiographical Sketch from the Dedication of the Commentary on the Psalms, in Calvin: Commentaries, 1979, Joseph Haroutunian, ed., Westminster John Knox Press, p. 53.)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Then Farel, who was working with incredible zeal to promote the gospel, bent all his efforts to keep me in the city. And when he realized that I was determined to study in privacy in some obscure place, and saw that he gained nothing by entreaty, he descended to cursing, and said that God would surely curse my peace if I held back from giving help at a time of such great need. 그 당시(then ðen) 복음(gospel gspl)을 장려하기(promote prmut) 위해 믿을 수 없는(incredible inkrdbl) 열정(zeal ziːl)으로 사역하던 파렐은 그 도시에 나를 붙잡아 두기 위해서 온갖 노력(effort frt)을 다 기울였습니다. 그러나 내가 개인적으로(in privacy privsi) 어느 궁벽한(obscure bskjr) 장소에서 공부하기로 마음먹었다는 사실을 그가 깨닫고(realize rːliz) 간청(entreaty entrti)으로 얻을(gain gein)게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봤을(saw sː see의 과거) 때 그는 저주(curse kːrs)를 내리퍼붓고(descend disnd) 그리고 그토록 크게 어려울 때(at a time of such great need) 내가 도움을 망설인다면(hold back) 하나님께서 나의 침묵(peace piːs)을 반드시 저주하실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Terrified by his words, and conscious of my own timidity and cowardice, I gave up my journey and attempted to apply whatever gift I had in defense of my faith. 나는 그의 말에 간담이 서늘해지고(terrify trfi) 나의 소심(timidity timdti)과 비겁함(cowardice kurdis)을 자각하고(conscious kns) 나의 여행(journey dːrni)을 포기하고 나의 신앙(faith feiθ)을 변호하기(defense difns) 위해 어떤 은사(gift)를 가졌든(whatever hwtvr) 활용하기로(apply pli) 마음먹었습니다(attempt tmpt). 파렐의 어떤 말도 칼빈을 설득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파렐이 하나님의 절대 주권에 의지해 “크게 어려울 때(at a time of such great need) 내가 도움을 망설인다면(hold back) 하나님께서 나의 침묵(peace piːs)을 반드시 저주하실 것이다”(God would surely curse my peace if I held back from giving help at a time of such great need)라는 경고와 예언에 칼빈은 크게 떨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파렐의 말을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순종했습니다. 칼빈은 자신의 저서 『기독교강요』 제6장 2항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No man can have the least knowledge of true and sound doctrine without having been a disciple of the Scripture. Hence originates all true wisdom, when we embrace with reverence the testimony which God hath been pleased therein to deliver concerning himself. For obedience is the source, not only of an absolutely perfect and complete faith, but of all right knowledge of God(Inst. 1, 6, 2). 성서(scripture skrptr)의 제자(disciple disipl)가 되지 않고(without wiðut) 참되고 건전한(sound saund) 교리의 지식을 아주 조금이라도 가질 수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그분 자신에 관해 그 속에서(therein) 전달하기를 기뻐하시는 증거를 존경심(reverence rvrns)을 갖고 받아들일(embrace embris) 때 거기서부터(hence hens) 모든 참된 지혜(wisdom wzdm)가 생깁니다(originate rdnit). 순종(obedience oubːdins)이 절대적으로(absolutely æbslːtli) 완전하고(perfect pːrfikt) 철저한(complete kmplːt) 신앙의 원천(source sːrs)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올바른(right rait) 지식의 원천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칼빈이 설교한 스트라스부르그 교회 칼빈주의에 대해 『웹스터 영영사전』은 다음과 같이 정의했습니다. Calvinism: the theological system of Calvin and his followers marked by strong emphasis on the sovereignty of God, the depravity of humankind, and the doctrine of predestination 칼빈주의(Calvinism klvinizm)는 하나님의 주권(sovereignty svrinti), 인간의 부패(depravity diprvti), 예정(predestination pridstnin)의 교리(doctrine dktrin)에 대한 강한 강조(emphasis mfsis)로 특징짓는(mark mːrk) 칼빈의 신학적(theological θːldikl) 체계(system sstm)와 그의 추종자(follower flour)들. 여러분도 이제 절대적으로 완전하고 철저한 신앙의 원천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모든 올바른 지식의 원천 하나님 말씀 성서에 순종하는 칼빈(Calvin klvin)이 주장하고 가르치고 실천한 칼빈주의를 따르는 칼빈주의자(Calvinist klvvnist)가 되어 칼빈처럼 성서의 제자(a disciple of the Scripture)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2020-08-17
    • G.QT
    • 기독교강요 영어수업
    2020-08-17
  • 기독교강요 영어수업 - Lesson IV 게임의 규칙
    Lesson IV 게임의 규칙A rule of game 젊은 하나님의 사자(使者)는 천사(天使)가 어떻게 노래하는지 압니다. 그 미묘한 눈동자는 감미로운 눈망울 위로 태산의 무게를 이미 압니다. 숲의 부르짖는 반향(反響)이 어떻게 우리의 믿음 속에서 하루 동안 포근히 잠드는지 압니다. 그는 왕성한 원기 속에 하늘나라 새들의 강한 믿음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 믿음 속에서 이스라엘을 실어 나른 독수리들의 강력한 날개가 허공을 가릅니다. 따스한 물고기들의 등에 보이는 소리 없는 눈부신 영광(榮光)처럼. 우리 시절 신학생이나 전도사는 육십 촉 전구만한 노랑 병아리 같았습니다. 그가 강아지 집 같은 주일학교에 들어가면 어둑하던 강아지들이 환해지곤 했습니다. 아무 덧칠도 없이 믿음의 세계를 만나던 그 맑은 시절은 어디로 갔나. 사물의 색깔과 촉감이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던 날들. 너무 순정(純正)하여 세상에 다 들킨 채 살던 날들은 어디 갔나. 가릴 것 하나 없을 때 세계도 맨살로 내게 다가왔었지요. 그 투명한 만남은 얼마나 황홀했던가요. 조약돌처럼 깔깔거리며 함께 웃던 그 병아리들은 다 어디로 갔나요. 마음을 환하게 비추던 청년의 달빛은 지금 어디에 걸려 있나요. 영어로 인해 좌절하는 수많은 예비 목사들을 위한 해결의 문을 영어역본 『기독교강요』를 통해 조금이라도 열어보려 생각합니다. 하나님의 비전을 향해 더 힘차게 걸어갈 이 땅의 전도자들이 영어를 잘 하고 싶다면 행복하게 영어를 하고 싶다면 먼저 영어에 대한 생각부터 바꿔야 합니다. 아인슈타인은 이런 말을 했습니다. “먼저 게임의 규칙을 익혀라. 그리고 다른 누구보다 그 게임을 잘하라.” 돈에는 지배 법칙이 있습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돈은 그것을 소중하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로부터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로 이동하기 때문에 부(富)는 언제나 지배 법칙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로 이동할 것입니다.” 이 말을 이렇게 바꿀 수도 있습니다. “영어는 그것을 소중하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로부터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로 이동하기 때문에 영어는 언제나 지배 법칙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로 이동할 것입니다. 먼저 지배 법칙을 익혀라. 그리고 다른 누구보다 그 게임을 잘하라.” 그래서 이제 우리가 신학교에서 배우지 못한 영어에 대한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는 것만큼이나 낡은 습관을 버리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것을 위해 자신의 마음을 바꾸는 일은 할 수 있습니다. 타인의 마음을 바꾸는 일은 할 수 없습니다. 할 수 있는 일에 힘쓰는 사람은 지혜롭고 할 수 없는 일에 힘쓰는 사람은 어리석습니다. 영어를 잘 하려면 먼저 발음 규칙을 알아야 합니다. 영어는 단어마다 발음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른 언어 사전과 달리 영어 사전은 단어마다 발음기호를 병기하고 있습니다. 조선의 문화를 꽃피웠던 세종의 어전회의는 늘 두 가지 질문으로 시작됐다고 합니다. “경들은 어찌 생각하시오.” “왜 그리 생각하시오.” 세종의 어법은 ‘신하들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만들어 주고 스스로 답을 찾을 때까지 기다려 주는 훌륭한 리더의 조건’이었습니다고 말합니다. 나도 세종대왕을 본떠 말해 보겠습니다. “후배들께서는 영어 발음의 중요성을 어찌 생각하시오.” “왜 그리 생각하시오.” 나는 많은 것을 배웠습니다. 그러나 배운 대로 살지 못했습니다. 나는 믿음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구원은 얻었지만 믿음대로 살지 못했습니다. 늦어도 한참 늦지만 지내놓고 나서야 그것은 이랬어야 했음을 알았습니다. 각설하고 알파벳을 익힌 사람의 영어 첫걸음은 영어사전을 읽을 수 있는 발음기호를 익혀야 합니다. 영어의 발음 기호를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영어 사전을 볼 때 단어와 그 단어의 뜻만 보지는 않나요. 사전들이 단어를 발음하는 규칙에 대한 가이드를 제공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나요. 사전에 나와 있는 단어의 옆에는 조금 이상하게 생긴 기호들이 있습니다. 이 문자 같은 기호들이 바로 발음 가이드입니다. 예를 들어 여기 단어 dictionary가 발음되는 방법이 있습니다. dk nr i 사전의 발음기호를 사용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은 보이는 만큼 어렵지는 안습니다. 일단 규칙을 이해하고 나면, 단어의 뜻뿐만 아니라 바르게 읽는 방법도 알 수 있습니다. 왜 사전들은 이상한 기호들을 사용하나요. 단어들은 기호입니다. 이는 소리를 나타내는 작은 그림들이지요. 그렇다면 왜 같은 소리를 나타내는 완전히 다른 방법을 만든 거죠. 아래의 단어들을 소리 내보세요. pit(pit) pie(pai) 두 단어 모두 세 개의 문자로 이루어져 있고 두 번째 문자는 i입니다. 그렇지만 이 문자 i가 앞의 단어는 ‘i(이)’ 다음 단어는 ‘ai(아이)’ 다르게 발음된답니다. 문자 i는 단어마다 다른 소리를 만들거든요. 이제 이 두 단어를 발음해 보세요. garage(grː) vision(vn) 이 단어들에서 garage의 첫 번째 g는 ‘거(g)’두 번째 g는 ‘쥐()’ vision에서의 문자 s와 같은 ‘전(n)’ 소리를 만듭니다. 전혀 몰랐죠. 보신 바와 같이, 문자들은 다른 소리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단어나 문장의 어디에 있는지 또는 말하는 사람이 어느 나라 사람인가에 따라서도요. 어떤 단어들은 많은 소리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소리들은 문자를 가지지 않고 있기도 해요. 그러나 사전의 발음 가이드는 모든 사람이 사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에 여러분들도 배울 수가 있습니다. 기호가 간단하고 보이는 것보다 복잡하지 않아요. 어떤 기호가 어떤 소리를 나타내는지만 배우면 됩니다. 왜 발음 기호를 사용하는 법을 배워야 하나요. 좋은 질문입니다. 새로운 단어를 배울 때에는 단어의 의미와 단어가 문장에서 어떻게 쓰이는 지를 배웁니다. 단어의 다른 형태를 배울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말할 때나 책을 읽을 때 실제로 단어를 사용하고 이해하기 위해서는 단어를 발음하는 방법을 알아야 합니다. 단어의 바른 발음을 배우는 데에는 사전의 발음 가이드를 읽는 것은 영어를 배우는 학생들에게 정말 유용한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딱 보기만 해도, garage[grː]의 두 개의 g가 다른 소리 ‘g(거)’와 ‘(쥐)’를 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특별히 미국에서 주말이면 그 집안의 안 쓰는 물건을 차고(車庫)에 벌여놓고 헐값으로 처분하는 거라지 세일(garage sale)이 있습니다. ‘차고’라는 뜻의 garage(grː)라는 단어 발음기호 가운데 두 모음이 나옵니다. 그것은 ‘’와 ‘’입니다. 이 책의 발음기호에서 앞의 발음기호 ‘’는 약한 ‘어’로 발음하시고 뒤의 발음기호 ‘’는 위에 강세 부호도 있으니 강한 ‘아’로 발음하시면 되겠습니다. 나머지는 자주 발음하시다 보면 자연 익숙해지게 될 것입니다. 다시 한 번 연습 삼아 garage(grː)를 발음한다면 ‘라’에 힘을 주어 ‘거라쥐’하시면 될 것입니다. 발음 가이드를 이해하기 위한 시간을 조금만 할애하세요. 결국엔 많은 시간과 많은 수고를 더는 일이 될 겁니다. 이 책은 영어 초급자를 위한 영어를 스스로 익히기 위해 만든 『기독교강요 영어수업(修業)』이기 때문에 필요한 단어마다 발음기호를 병기할 것입니다. 좀 귀찮더라도 영어 지배 법칙을 익혀 영어를 돈처럼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발음기호대로 발음하는 습관을 성경 장절처럼 익히시기 바랍니다. 모든 영어 발음 기호를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줄 간단한 개요가 있습니다. 첫째 자음(consonant knsnnt)입니다. 자음은 모음이 아닌 모든 문자들로 발음할 때 혀·이·구강·입술 등의 발음 기관에 의해 호흡이 제한되어 나는 소리입니다. 성대의 진동이 일어나는 유성 자음과 그렇지 않은 무성 자음으로 구별합니다. 영어에는 21자의 자음이 있지만 자음 소리는 더 적습니다. C와 k, 그리고 c와 s 같은 문자들은 단어 안에서의 위치에 따라 같은 소리를 가질 수 있습니다. 다른 소리는 ch와 sh와 같은 자음의 조합입니다. 이것도 소리가 다르지요. 배워야 할 자음은 그리 많지 않고 배우기가 쉬우니 걱정하지 마세요. 둘째 모음(vowel vul)입니다. 성대의 진동을 받은 소리가 입술·코·목구멍의 장애에 의한 마찰을 받지 않고 나는 ‘ㅏ·ㅑ·ㅓ·ㅕ·ㅗ·ㅛ·ㅜ·ㅠ·ㅡ·ㅣ’ 따위의 우리말 소리입니다. 홀소리 영어의 모음은 a, e, i, o, u 그리고 가끔 y가 있습니다. 모음은 다른 문자들과 조합될 수 있고 함께 새로운 소리를 만들기도 합니다. 각 모음을 발음하는 데에는 몇 가지 방법이 있으며 그 발음들에 대한 기호도 있습니다. 셋째 이중모음입니다. 우리말의 모음 중에서 소리를 내는 동안 입술 모양이나 혀의 위치가 달라져 ‘ㅑ·ㅕ·ㅛ·ㅠ·ㅒ·ㅖ·ㅘ·ㅙ·ㅝ·ㅞ·ㅢ’ 따위의 첫소리와 끝소리가 다른 소리입니다. 영어의 이중모음은 두 개의 모음이 합쳐져 만들어진 소리입니다. 이는 bamboo(bæmbː)의 ‘oo’처럼 장음의 ‘우(uː)’처럼 발음하는 소리입니다. 다른 때에는 하나의 모음으로 시작해 다음으로 넘어가지요. soak(souk)의 oa(ou) ‘오우’ 같은 소리입니다. 넷째 음절(syllable slbl)입니다. 음절은 하나의 종합된 음의 느낌을 주는 단어의 구성 요소로서의 음의 단위입니다. 소리마디라고도 하고 영어로 실러블(syllable)입니다. 영영사전은 문자들을 위한 발음 기호와 함께 단어를 음절로 분리합니다. 예컨대 영영사전은 syllable을 si-l-bl로 표시합니다. 이 책에서 사용하는 사전은 영한사전이라 발음기호의 음절을 분리하지 않고 slbl로 표시합니다. 그러므로 이 책의 발음기호는 자음과 모음의 단위로 구분해 음절로 알고 읽으시기 바랍니다. 이는 하나의 단어를 말하기 쉬운 부분으로 나누기 때문에 문자를 하나하나 기억하고 단어를 말하는 것을 더욱 쉽게 만듭니다. 다섯 째 강세(accent ksent)입니다. 영어의 단어에서 강세 즉 악센트를 어디에 두는가 하는 것은 단어를 바르게 말하는 데 중요하고 단어의 뜻도 바뀔 수가 있습니다. 그 예가 present입니다. present[prznt] ‘프레전트’처럼 악센트가 앞의 음절에 올 경우 뜻이 ‘현재(現在)’입니다. 그러나 present[priznt] ‘프리젠트’처럼 악센트가 뒤의 음절에 올 경우 뜻이 ‘선물(膳物)’입니다. 그러므로 사전을 볼 때마다 악센트의 위치를 잘 파악해 그 음절에 힘을 주어 읽다보면 원어민 수준의 영어 발음을 체험하게 되고 뜻의 차이도 익히게 될 것입니다. 언어학자들은 모음을 혀나 이의 아무런 방해를 받지 않고 만들어지는 소리라고 정의합니다. 음절들 또한 모음을 중심으로 만들어집니다. 모음들 사이에 없이는 많은 유성 자음을 만들 수가 없거나 읽을 수가 없어요. 반면에 자음들은 말할 때에 부분적으로 숨을 막음으로써 만들어지는 소리입니다. p, b 그리고 g와 같은 소리들은 사실 여러분의 숨을 완전히 막음으로써 만들어진답니다. 그래서 이를 폐에서 나오는 공기를 일단 막았다가 그 막은 자리를 터뜨리면서 내는 소리(ㅂ·ㅃ·ㅍ·ㄷ·ㄸ·ㅌ·ㄱ·ㄲ·ㅋ 등의 소리)라는 뜻으로 파열음(破裂音)이라고 합니다. 왜 사전에서 발음기호를 봐야 하는지 그 실례를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xylophone은 어떻게 발음해야 할까요. 대개 실로폰으로 알고 있는 그 영어 단어를 영어사전에서 보면 그 발음기호가 이렇게 되어있습니다. zilfun 우리말로 음역하면 ‘자일러포운’인데 그 뜻은 ‘실로폰’입니다. 그것은 타악기의 하나인데 대(臺) 위에 나무토막을 배열해서 두 개의 채로 때리거나 비벼서 소리를 내는 악기인데 목금(木琴)이라고도 합니다. 실로폰 연주자는 xylophonist zilfunist ‘자일러포운이스트’가 되겠죠. 이제 발음기호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알게 되었습니다. 자신이 사용하는 영어사전의 첫 페이지에 소개되는 발음기호를 늘 보면서 단어를 읽다보면 사전의 발음기호를 익숙하게 읽을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사실 이것만 잘 해도 영어의 지배법칙을 다 알았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닙니다. 이제 그 습관만으로 영어의 주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 습관을 익히기 위해 이 책에서는 영어발음을 병기했으니 넘기지 마시고 꼭 발음해 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발음기호에서의 콜론이라고도 하는 ː 쌍점 표시는 장음을 나타내는 기호입니다. 『기독교강요』 제목에 강요(綱要)로 번역된 영어 ‘institute’(nsttjːt)는 라틴어 ‘institutio’에서 온 말입니다. 이 단어의 영어 발음기호 ‘nsttjːt’에서 ‘tj’ 발음은 ‘튜우’라고 길게 발음하면 됩니다. 단어 전체를 발언하면 ‘인스터튜우트’가 되겠죠. 이 단어는 훈련(training)이나 교육(instruction)으로 번역될 수도 있습니다. 이 제목은 많은 체계의 지식을 망라하는 여타 개론(槪論) 저술들과 마찬가지로 법률 저술들의 제목에서도 일반적으로 사용이 되고 있습니다. 칼빈에게도 익숙했을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의 1516년 판 『그리스도인 군주 강요』(Institutio principis Christiani)의 제목이 『그리스도인 군주의 교육』(The Education of a Christian Prince)으로 통상 번역되고 있습니다. 칼빈의 『기독교강요』1536년 초판의 간결한 제목의 형식도 『그리스도인 종교 교육』(Christianae religionis institutio)이었습니다. ‘경건의 전체 개요’(he Whole Sum of Piety)와 ‘구원의 교리에 관해 알아야 할 필요한 모든 것’(Whatever It is Necessary to Know in the Doctrine of Salvation)을 거의 망라하고 있는 『기독교강요』의 완전한 증보판도 『그리스도인 종교 교육』(The Institute of the Christian Religion)으로 번역될 수 있을 것입니다. 캐나다의 역사 신학자 맥닐(McNeill, John T.)의 『기독교강요』서문(‘Introduction’. In McNeill, John T.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1. Louisville, KY: Westminster John Knox. pp. xxixlxxi. 1960.)의 저술 배경은 이렇습니다. John Calvin was a student of law and then classics at the University of Paris. Around 1533 he became involved in religious controversies and converted to Protestantism, It was a new Christian reform movement which was persecuted by the Catholic Church in France, forcing him to go into hiding. 존 칼빈은 파리대학교에서 법학과 고전(classic klsik)을 공부했습니다. 1533년 경 그는 종교 논쟁(controversy kntrvːrsi)에 말려들게(involve invlv) 되었고 개신교(Protestantism prtstntizm)로 개종했습니다(convert knvːrt). 그를 피신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든(forcing him to go into hiding) 개신교는 프랑스에서 가톨릭교회의 박해(persecute pːrsikjːt)를 받는 새로운 그리스도인(Christian krstn) 개혁(reform rifːrm) 운동(movement mːvmnt)이었습니다. He moved to Basel, Switzerland, for safety in 1535, and around this time he must have begun writing a summary of theology which would become the Institutes. His Catholic opponents sought to tie him and his associates (known as Huguenots in France) to groups of radical Anabaptists, some of which had been put down by persecution. He decided to adapt the work he had been writing to the purpose of defending Protestants suffering from persecution from false accusations that they were espousing radical and heretical doctrines. 그는 1535년 안전(safety sifti)을 위해 스위스 바젤로 옮겼습니다. 그리고 이 시기 즈음에(around rund) 나중 『기독교강요』(Institute nsttjːt)가 될 신학(theology θiːldi)의 개요(summary smri)를 쓰기 시작했음이 분명합니다. 칼빈의 가톨릭 적대자(opponent punnt)들은 그와 프랑스에서 ‘위그노’(Huguenot hjːgnt)로 알려진 그의 동료(associate suiit)들을 박해(persecution pːrsikjːn)로 일부 진압된 급진적인(radical rdikl) 재세례파(Anabaptist nbptist) 무리(group gruːp)와 엮으려고(tie tai) 했습니다. 그는 그의 동료들이 과격하고 이단적인(heretical hrtikl) 교리들을 지지합니다(espouse ispuz)는 그릇된(false fːls) 비난(accusation ækjuzin)으로 말미암은 박해(persecution pːrsikjːn)로 고난을 당하는 신교도(Protestant prtstnt)들을 변호할(defend difnd) 목적(purpose pːrps)으로 쓰고 있던 작업을 수정하기로(adapt dpt) 결심했습니다(decide disid). The work, written in Latin, was published in Basel in March 1536 with a preface addressed to King Francis I of France, entreating him to give the Protestants a hearing rather than continue to persecute them. It is six chapters long, covering the basics of Christian creed using the familiar catechetical structure of the Ten Commandments, the Apostles' Creed, the Lord's Prayer, and the sacraments, as well as a chapter on Christian liberty and political theology. Soon after publishing it, Calvin began his ministry in Geneva, Switzerland. 라틴어(Latin ltin)로 쓴(written rtn, write rait의 과거분사) 그 저서는 1536년 3월(March mːrt) 바젤(Basel bːzl)에서 출판되었는데 개신교도들을 계속 박해하기 보다는 그들에게 청문회(hearing) 기회를 달라고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Francis frnsis)에게 탄원하는(entreat entrːt) 서문(preface prfis)이 있었습니다. 『기독교강요』는 6장(chapter tptr)으로 되어 있는데 그리스도인 자유(Christian liberty)와 정치 신학(political theology)에 대한 1장과 더불어 십계명(the Ten Commandments), 사도신경(the Apostles' Creed), 주기도문(the Lord's Prayer), 성례(sacrament skrmnt) 등의 익숙한(familiar fmljr) 교리문답(catechetical kætktikl)의 구조(structure strktr)를 이용해 기독교 신조(creed kriːd)의 기초 원리(basics bisiks)를 망라합니다(cover kvr). 이 저서를 출판한 뒤 얼마 안 있어 칼빈은 스위스(Switzerland swtsrlnd)의 제네바(Geneva dnːv)에서 그의 목사 직무(ministry mnistri)를 시작하게 됐습니다. 칼빈이 피신한 바젤 교회 2020-08-03
    • G.QT
    • 기독교강요 영어수업
    2020-08-03
비밀번호 :